장경철목사 (서울여대 기독교학과)
일반 신앙인들은 신학에 대하여, 특별히 조직신학에 대하여 어떠한 생각을 가지고 있을까? 다음의 가상적 이야기를 들어보자.
로마 교황청에서 카톨릭의 교리를 확정하기 위하여 신부들의 모임을 소집하였다. 그 모임에 초대받은 사람 가운데는 칼 라너라는 신학자도 포함되어 있었다. (교회지도자들은 신학자들을 별로 좋아하지는 않았으나 한 사람 정도는 괜찮다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모임을 가지던 중간에 서로의 의견이 통일되지 않는 어려운 문제가 생겼다. 그러자 회의를 주재하던 사회자는 잠시 회의를 중단하고, 함께 회의에 참석하던 신부들에게 각자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과 뜻을 구한 뒤에 다시 모여서 회의를 계속하자고 제안하였다. 그리하여 거기에 참석한 모든 신부들은 각자 자신의 기도처소로 들어갔다. 사람마다 약간의 차이는 있었으나 대부분의 신부들은 20분 정도 기도한 후에 뛰쳐나오며 "하나님의 말씀이 너무 어려워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오직 신학자 라너만은 아직도 그의 기도실에서 나오지 않고 있었다. 사람들은 '아마도 우리의 박식한 신학자 라너가 무엇인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나올 것이다.'라고 기대하였다. 시간이 한 30분 쯤 더 경과한 뒤에 라너의 기도실에서 누군가가 뛰쳐나왔는데, 뛰쳐나온 분은 라너가 아니라 하나님이었다. 하나님께서는 머리를 흔들면서 말씀하시길, "라너의 말이 너무 어려워서 도대체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어떤 신앙인들에게는 신학이란 이와 같이 전적으로 문제투성이인 것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이것은 이해될 만한 일이다. 신학의 사변성에 좌절을 느낀 사람들은 말한다: "신학의 쓸모없는 논쟁을 다 던져버리라.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더 많은 신학이 아니라 단순한 신앙이다." 필자 자신도 신학을 처음 공부하기 시작했을 때에 겪었던 좌절들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신앙의 단순함과는 반대로 신학은 왜 그리 복잡하고 난해하며, 추상적이고 사변적인가의 물음이 나를 괴롭혔다. 특별히 조직신학이라 불리는 신학의 한 분과는 추상적이고 사변적인 학문의 표지처럼 여겨지기도 하였다. 오늘날 누가 이러한 문제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있겠는가? 단순하게 믿음을 가지면 되는 것이지, 우리는 신학을 필요로 하는가? 특별히 학생들을 잘 가르치는 데에 있어서 신학이 필요한 것인가?
신학이 반드시 필요한 것인가를 논하는 데에 있어서 먼저 우리 신앙인들은 모두가 (넓은 의미에서의) 신학자임을 인식하는 것이 좋겠다. 만일 신학이 이해를 추구하여 자신이 신앙하는 것을 더 깊이 알기를 원하는 것이라면, 모든 신앙인은 이미 신학자이다. 자신이 그것을 알건 모르건 간에, 신앙인은 이미 하나님에 대하여, 인간에 대하여, 이 세계에 대하여 자신의 이해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가 전수받은 신앙과 하나님 이해는 이미 어느 특정한 신학의 영향 아래 형성된 것임을 알 필요가 있다. 신학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했던 위의 질문들도 실상은 어떤 특정한 신학적 입장으로부터 나온 질문임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위의 질문들은 신앙을 연구하는 신학에 대한 자기 자신의 '신학적' 입장[이 경우에는 신앙주의(fideism)라고 하는]을 전제하는 가운데 던져진 질문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있어서 중요한 과제가 있다면 그것은 '신학을 해야 할 것인가, 하지 말아야 할 것인가' 또는 '신학자가 되어야 할 것인가, 되지 말아야 할 것인가'가 아니다. 참된 과제는 '어떠한 신학자가 될 것인가'이다. 우리는 우리가 원하건 원치 않건 간에 모두가 신학자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과제는 '좋은 신학자'가 되는 것이다.
우리는 어떻게 좋은 신학자가 될 수 있을까? 무엇이 신학인가를 보다 분명하게 살펴보는 것으로부터 우리의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이 좋겠다. 안셀름(Anselm)의 고전적 정의에 따르면, 신학이란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fides quaerens intellectum)이다. 신학이란 일차적으로 전통적인 교리를 앵무새처럼 되풀이하거나 전통적인 신학의 주장들을 그저 무비판적으로 반복하는 것이 아니다. 신학의 과정은 하나님을 향한 신앙 속에서 우리에게 알려진 충만한 진리를 질문하는 가운데 계속적으로 탐구해가는 과정이다. 우리는 이 문장을 보다 상세히 고찰함으로써 신학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보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도록 하자.
첫째, 신학은 "하나님을 향한 신앙 속에서" 시작한다. 신학은 아무런 전제 없이 시작하는 학문이 아니다. 신학에는 분명한 출발점이 있다. 이 출발점은 인간의 사고나 경험이 아니라 오늘도 우리에게 찾아오시는 하나님의 현실(Reality)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현실에 대하여 우리는 신앙으로 응답하는 가운데 신학의 순례를 시작한다. 그러므로 신학은 언제나 신앙의 학문임을 우리는 분명히 인지하면서 그것을 고백해야 한다. 신학의 출발점은 곧 살아계신 하나님이며, 이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자신을 우리에게 알려주셨기 때문에 신학이 가능해진다. 만약에 이 계시의 현실(Reality)이 없거나 부정된다면, 신학은 하나님을 연구하는 학문이 아니라 오직 인간 자신의 종교적 소원을 기술하는 학문이 될 수 밖에 없다.
둘째, 우리 안에서 신앙적 사고, 곧 신학을 불러 일으킨 진리는 "충만한 진리"이다. 우리가 신학하는 가운데 대면하는 진리는 한정된 진리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충만한 진리임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이것은 결코 우리가 통제하고 조작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진리이기에 우리 인간의 지적인 소유물로 갇힐 수 없는 진리임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신학은 언제나 자신의 출발점을 기억함으로써만 참으로 신학이 될 수 있다. 하나님과 그분의 현실로부터 출발할 때, 신학은 인간학에 머물지 아니하고 참으로 하나님에 대하여 말할 수 있다.
셋째, 신학은 무엇보다도 신앙의 "질문을 제기"하는 것이며, 비록 잠정적일지라도 그 질문에 대하여 답변을 진지하게 추구하는 것이다. 신학은 삶의 진지한 질문들에 대해 미리 만들어진 답들을 다 포장하여 선사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기독교 신앙과 신학은 언제나 새로운 질문을 불러일으킨다. 하나님 없이 사는 인간과 자신의 세계가 스스로에게 결코 던지지 못했을 질문들을 기독교 신앙과 신학은 던져준다. [성경은 무엇보다도 질문의 책이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창 3:9); "가인아, 네 동생 아벨이 어디있느냐?"(창 4:9);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막 8:29)] 그러므로 신학은 사물을 그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자 하는 유혹과 싸우며, 하나님과 우리 자신과 이 세계에 대하여 검증되지 않은 주장들에 대하여 계속적으로 의문을 제기한다. 결과적으로 신학은 진리 탐구를 두려워하는 소심한 자세나 진리를 완전히 소유한 듯이 말하는 교만한 주장과도 거리가 멀다. 그러므로 참된 기독교 신앙과 신학은 신앙주의(fideism)와는 다른 것이다. 신앙주의는 우리가 우리의 질문과 사고를 멈추고 그저 믿기만 해야 함을 강조하는 반면에, 참된 신앙과 신학은 계속적으로 질문을 던지며 탐구하는 가운데 진리를 향하여 나아간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계속적으로" 라는 표현을 강조해야 한다. 신학은 단 한번의 시도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그렇기에 신학하는 사람은 어제의 결론을 무비판적으로 수호하는 것을 자신의 과제로 삼을 수는 없다. 이것은 신학하는 것이 늘 새로운 이야기만을 다루어야 함을 뜻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어제의 결론을 무비판적으로 반복하는 것이 지양되어야 한다면, 오늘의 새로운 이야기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것도 역시 거절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신앙인은 자신의 상황에서 자신의 신앙의 질문들을 계속적으로 제기하는 가운데 신학하기를 배워야 한다. 우리는 신학을 함에 있어서 언제나 '성급한 종말론'을 경계해야 한다. 우리는 이 세상의 종말에 이르러서 하나님의 충만한 진리를 보다 분명히 깨닫게 될 것이다.(고전 13:12) 하지만 아직 종말이 임하지 않았음으로 우리는 진리의 부분들만을 경험할 뿐이다. 비록 우리의 구원에는 충분한 진리이지만, 우리가 탐구하고 소유한 진리가 진리의 전부인 것처럼 착각하는 가운데 독선적인 자세를 가져서는 안된다.
우리가 신학에 대한 개략적 소개를 통하여 배워야 할 것은 이전에 전개되었던 '신학들'(Theologie)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신학하기'(theologieren)를 배워야 한다. 우리 자신이 스스로 보다 나은 신학을 하기를 배움으로써 우리는 우리의 부분적이고 파편적인 하나님 이해를 넘어서서 보다 전체적인 이해로 나아가기 때문이다. 우리가 신앙의 질문들을 계속적으로 제기하는 가운데 신학하기를 배워야 할 필요성은 다음의 두 가지 이유로 인하여 더욱 분명해진다.
신학의 질문을 계속적으로 제기하는 가운데 탐구해야 할 첫번째 필요성은 기독교 신앙이 언제나 새로운 상황(situation) 가운데 자신을 드러내야 하기 때문이다. 신앙인들은 진공 상태 안에서 살지 않는다.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신앙인들은 자신의 문제들과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특정한 역사적, 사회적 상황 안에서 산다. 우리가 신앙하는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지만(히 13:8),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는 언제나 변화하는 가운데 있으며 모호한 상황 가운데 있다. 우리는 이러한 세계와 상황 가운데 우리의 신앙을 살아내야만 하기에, 어제의 신학적 작업들이 언제나 삶의 적합성(relevance)을 지니는 것은 아니다. 변화된 이 세계는 기독교 신앙에 대하여 언제나 새로운 질문을 제기하는데, 그것은 어제의 답변들이 오늘에는 그 설득력을 잃어버리기도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신앙 가운데 살아가는 이 세계는 우리에게 외면할 수 없는 도전들을 던져주기에 기독교 신앙과 신학은 오늘도 새로운 질문을 계속적으로 제기하며 이해를 추구한다.
그러나 신학이 계속적으로 새로운 질문을 제기하면서 탐구하는 것은 그저 외적인 상황적 이유 때문만은 아니다. 오히려 그 일차적 이유는 내적인 것으로부터 찾아져야 한다. 즉 기독교 신앙이 고백하는 하나님 자신의 독특한 성격에서 그 이유가 찾아져야 한다. 신학은 자신의 대상(object)으로서 다른 대상들과는 다른 고유한 대상을 가진다. 우리가 앞서 살펴본대로, 신학에는 분명한 출발점이 있다. 그 출발점으로 인하여 신학적 탐구는 그 대상을 가지게 되는데, 그 대상은 죽은 대상이 아니라 살아있는 분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신학적 노력을 통하여 더 알기를 원하는 대상은 살아있어서 움직이는 하나님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과거의 신학적 표현들이 살아있는 하나님의 실재를 그 속에 모두 다 담아두고 있는 듯이 말할 수 없다. 우리가 신앙하는 하나님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이해보다 언제나 크기에 기독교 신앙과 신학은 오늘도 새로운 질문을 계속적으로 제기하며 보다 충만한 이해를 추구한다.
이렇듯이 신앙과 신학의 순례에 접어드는 것은 새로운 질문들을 던지는 가운데, 때로는 우리의 옛 질문들을 변형시켜서 보다 중요한 질문을 던지게 하는 것이다. 신학은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던지는 가운데 하나님께 더욱 가까이 나아가기를 소원한다.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새로운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시는가?
하나님은 성령의 능력 가운데 오늘의 세계 안에 어떻게 현존해 계시며, 또 역사하고 계시는가?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하신 주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리는 지금까지 신학을 구분하지 않고 뭉뚱그려서 말해왔다. 그러나 신학에는 여러 분과가 있으며, 조직신학은 그러한 분과들 가운데 하나이다. 신학 안에는 조직신학 이외에도 성서신학, 역사신학, 철학적 신학, 윤리학, 실천신학 등이 있어서 상호 연관된 가운데 서로 도움을 주고받고 있다. 우리가 위에서 기술한 내용들은 원칙적으로 그 어느 신학적 분과에도 다 적용되는 말들이나, 특별히 조직신학에 보다 직접적으로 적용된다고 볼 수 있다. 조직신학(Systematic Theology)은 다른 신학적 분과들과 도움을 주고받는 가운데, 기독교 신앙이 믿고 소망하며 예배하는 하나님과 그분의 세계를 기술하는 것을 그 과제로 삼는다. 조직신학은 때로는 교의학(Dogmatics)으로 불리기도 하는데, 그것은 조직신학이 하나님과 그분의 역사하심이라는 빛 가운데에서 교회의 교리와 실천을 계속적으로 해석하고 재해석하는 과제를 가지기 때문이다.
이제 마지막으로 조직신학이 기독교 신앙과 신학 일반을 위하여 어떤 도움을 줄 수 있는가를 살펴보도록 하자. 우리가 조직신학을 접할 때 우리는 어떤 기대를 가질 수 있는가? 또는 어떤 것을 기대하지 말아야 하는가? 앞서 살펴본 대로, 우리의 문제는 신학자가 될 것이냐, 안될 것이냐의 문제이기보다는 어떻게 좋은 신학자가 될 것인가의 문제이다. 어떻게 조직신학은 우리로 하여금 좋은 신학자가 되도록 돕는가?
조직신학은 무엇보다도 우리로 하여금 보다 체계적이고 보다 온전한 하나님 이해를 가지도록 돕는다. 우리는 조직신학의 이러한 기능을 약도에 비유해 볼 수 있다. 조직신학은 기독교 신앙이 누리고 약속 받은 충만한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약도를 제시한다. 우리는 조직신학이 그려주는 약도를 통하여 우리 자신이 가진 신앙적 체험과 신학적 견해가 어디쯤에 위치하는가를 보다 분명히 파악할 수 있다. 또한 이 약도를 통하여 우리가 가지고 있는 하나님 이해를 절대화하려는 위험으로부터 조금은 더 자유로울 수도 있다. 그리고 우리와는 다른 신앙적 견해를 가진 사람들이 그러한 견해를 가진 것의 이유 또는 의미도 더 잘 파악할 수 있다. 우리는 누구나 자신의 경험으로부터 하나님에 대한 이해를 가지는데, 우리는 신뢰할 만한 약도를 통하여 우리 자신의 경험을 넘어서서 하나님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반면에 조직신학은 학문하는 것이기에 때로는 신앙의 활력을 다 담아내지 못하는 나름대로의 한계를 가지고 있다. 한 건물의 약도가 실제로 응접실의 안락함을 그대로 재현하지 못하는 것처럼 신학하는 것 자체가 신앙의 생명성을 언제나 활력있게 드러내지는 못한다. 약도가 약도로서 자신의 제한된 기능을 하듯이, 신학도 신학으로서 자기의 기능을 충실히 수행해야 한다. 신학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하겠고, 할 수 없는 일을 할 수 있는 것처럼 스스로를 너무 높여서는 곤란할 것이다. 따라서 신학과 신학하는 사람들에 대한 지나친 기대와 지나친 경멸은 모두가 바람직한 자세는 아니다. 이 두 가지 자세는 모두 신학에서 얻을 수 없는 것들을 얻으려는 비현실적인 기대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약도가 그 자신을 위하여 존재하지 않듯이, 조직신학도 역시 자신을 위하여 존재하지 않음을 우리는 강조해야 하겠다. 조직신학은 신학을 가능하도록 만들었고, 지금도 신학을 향하여 손짓하는 그분과 그분의 새로운 세계로 우리를 인도하는 것을 자신의 사명으로 가져야 한다. 그러므로 좋은 "조직"신학자는 자기 사고의 틀이나 "조직"(System) 안에 갇혀 살기보다는 그곳을 거쳐서 하나님("神")의 새로운 신비의 세계로 언제나 자신을 열어놓기("學")를 게을리 하지 않는다. 이러한 의미에서, 신학하는 것은 자유로운 인간을 필요로 한다. 여러 가지 신학들을 배운 뒤에, 계속해서 하나님의 신비를 더 배우기 위해 자유로이 남아 있을 수 있음이 신학하는 기본적인 자세 가운데 하나이다. 이러한 점에서 신학하는 것은 참으로 자유케 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좋은 신학자는 최선의 노력을 다하여 신학하기를 배우면서, 동시에 미련없이 신학을 넘어설 수 있는 사람이다.
우리는 지난 호에서 신학의 필요성, 신학한다는 것의 의미, 그리고 신학이 줄 수 있는 도움 등에 관하여 살펴보았다. 이번 호에서는 보다 구체적으로 신학의 내용에 대하여 고찰해 보도록 하자. 이번에 우리가 주로 다룰 내용은 계시, 성경,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것들인데,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염두에 두면서 이러한 주제들에 대하여 생각해 보고자 한다.
계시란 무엇인가? 계시의 독특성은 어디에 있는가?
성경은 무엇을 말하는가?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
우리는 하나님이 삼위일체임을 어떠한 경로를 통하여 알 수 있는가?
기독교 신앙과 신학은 하나님의 계시의 현실로부터 출발한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드러내 알려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에 대하여 말할 수 있고, 하나님에 대하여 신뢰할 만한 지식을 가질 수 있다. 19세기에 포이에르바하(Feuerbach)나 마르크스(Marx)와 같은 사람들은 종교적 진술들이 인간의 자기 경험을 거꾸로 투사한 것에 불과하다고 주장하였다. 기독교 신학은 이러한 사람들의 주장에 대하여 진지하게 생각한다. 사실 우리가 가진 종교적 생각들 가운데는 우리 인간의 소원을 하나님 관념으로 투사한 것들이 적지 않다. 그러므로 기독교 신학이 가지는 중요한 과제 가운데 하나는 하나님의 참된 계시에 기초하여 우리가 가진 온갖 종류의 잘못되고 왜곡된 관념들(종교적 관념들을 포함하여)을 비판하여 바르게 정립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계시란 무엇인가? 성경에 따르면 계시(revelation)란 숨겨져 있던 것이 드러나는 것을 의미한다. 기독교 신학에서 계시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드러낸 것을 지칭하는데, 하나님께서는 창조된 세계를 통하여, 인간의 역사 가운데서, 그리고 무엇보다도 성서에 기록된 예수의 삶과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자신을 드러내시며, 그 가운데서 자신의 의도와 행위를 보여주신다. 우리가 계시의 사건 가운데 만나는 분은 하나님 자신이며, 그저 몇 가지 새로운 사실이나 교리들이 아니다. 여기서 우리는 계시가 어떤 사실들이나 교리들의 계시가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의 계시임을 다시 한번 강조할 필요성이 있다.
우리가 계시 가운데 하나님을 대면하고 하나님을 알게 된다면, 이 계시의 만남과 앎은 일상적인 만남이나 앎과는 사뭇 다른 성격을 가진다. 하나님은 계시의 사건 가운데 인간에게 자신을 알려주시는데, 이러한 앎은 생명이 있는 앎이며, 또한 생명을 창조해내는 앎이다. 다시 말하자면, 계시는 그것을 경험하는 인간을 하나님 앞에 서게 하면서 동시에 그를 구원하는 사건이다. 곧, 계시의 사건은 언제나 구원의 사건과 동행한다. 하나님이 알려지는 곳에는 생명의 구원과 세계의 변혁이 동시에 일어난다.
계시로 비롯되는 하나님에 대한 참된 지식은 언제나 실천적인 지식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계시의 사건에 직면함으로써 새로운 사고방식, 새로운 결단을 하게 된다. 그것은 계시가 우리의 삶과 아무 관계없는 정보의 전달이 아니라, 인간에게 구체적인 결단을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자기 결단으로부터 비롯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계시는 인간에게 구체적인 믿음과 순종을 요구하는 가운데 말을 걸어오시는 하나님의 결단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자기 계시는 인간이 이전에 하나님을 이해했던 방식을 새롭게 변혁시킨다는 의미에서 놀랍고 충격적인 내용을 담고 있기도 하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과 부활 가운데 나타난 하나님은 당대의 종교적 지도자들이 가진 하나님 이해에 대하여 참으로 충격적인 내용이었다.
하나님의 계시는 어떤 것을 그 내용으로 가지고 있는가? 우리는 다음의 세 가지를 살펴봄으로 하나님의 계시의 내용에 대하여 고찰해 볼 수 있다.
첫째, 계시는 참 하나님의 모습을 우리에게 드러내 준다. 우리는 계시의 사건을 통하여 인간 앞에 서 계신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 참으로 자유로운 가운데 인간과 그의 세계를 포기하지 아니하시고 인간을 위해 다가오신 하나님의 모습이 계시의 사건들 가운데 드러난다.
둘째, 계시는 인간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계시의 사건을 통하여 우리는 두 가지 인간의 모습을 보게 된다: 먼저,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죄인된 인간의 모습을 계시의 사건을 통하여 깨닫게 된다. 다음,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의 행위로 인하여 가능해진 인간의 참된 모습을 계시의 사건을 통하여 만나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된 하나님은 우리에게 죄인된 인간의 모습을 보게 하는 동시에, 참 인간의 모습에 대하여 알려준다.
셋째, 계시는 약속으로 주어지는 하나님의 새로운 세계를 우리에게 드러내준다. 우리는 계시의 사건을 통하여 인간이 결코 꿈꾸지 못했던 새로운 세계를 대면하게 되며, 동시에 그 세계 속으로 초대받는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기 계시의 특수성에 대하여 한 가지를 더 짚고 넘어가는 것이 좋겠다. 하나님께서는 여러 가지 사건들을 통하여 자신을 계시하시고 이 계시의 사건을 통하여 자신에 대한 참된 지식을 주시지만, 하나님은 이러한 계시의 사건 가운데 주인(주관자)이기를 멈추지 않는 분임을 우리는 강조해야 한다. 하나님은 자신을 계시하는 바로 그 순간에도 인간의 지성 안에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내어주는 분이 아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인색하기 때문이 아니라, 인간 지성의 한계와 하나님 자신의 무한한 신비로 인하여 비롯되는 것이다. 자신을 계시하는 하나님은 결코 인간이 통제할 수 있는 대상이나 물체로 축소되지 않는다.
비록 하나님의 계시는 여러 가지 형태를 통하여 우리에게 주어질 수 있으나, 가장 분명한 형태는 성경을 통한 하나님의 계시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자기 계시의 사건들에 대한 참된 증언으로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참된 모습과 인간의 참된 모습,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는 새로운 세계의 모습을 그려주고 있다. 성경은 우리 가운데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에 대한 근본적인 증언이다. 참된 증거자로서 성경은 주의를 인간의 생각이나 자기 자신에게 돌리지 아니하고 그 촛점을 하나님께로 돌린다. 종교개혁자들이 주장하였듯이, 성경이 그 권위를 가지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기 때문이며, 성령의 조명과 능력 가운데 하나님과의 뜻을 드러내는 가운데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를 창조하기 때문이다.
성경은 증언은 단조로운 방식으로 그 목적을 성취하기보다는 다양한 방식으로 자신의 목적을 성취한다. 성경의 증언은 대단히 풍성하며 다양하다. 하지만 성서적 증언은 이렇게 다양한 가운데 서로 간의 연결성도 분명히 가지고 있는데, 우리는 성경의 증언의 다양성과 연결성을 모두 존중하는 가운데 성경을 해석해야 한다.
성경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이 세계를 변혁하시는 행위를 증거한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시작된 다가오는 하나님의 나라는 개인적인 변화와 사회적, 우주적 변혁을 동시에 포함한다. 한 사람, 한 사람을 죄와 죽음에 얽매인 사슬로부터 해방하는 하나님의 구원의 사건을 다룰 뿐 아니라, 이 세계를 변화시켜서 하나님의 나라로 변혁시키는 하나님의 구원의 사건을 또한 다룬다. 여기서 우리는 성경 안의 새로운 세계가 삶의 개인적이며 사적인 영역에 국한되지 않으며, 모든 나라와 모든 피조물에게까지 이르는 것임을 강조해야 한다.
성서를 통하여 증언되는 기독교 신앙의 하나님은 삼위일체되신 하나님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 세 분인 동시에 한 분인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삼위일체에 관하여 말하기 시작하면 우리는 곧 다음과 같은 질문에 직면하게 된다:
"하나님이 삼위일체라는 것이 성경에 어디 있는가?"
"삼위일체 하나님이라는 수수께끼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먼저, 기독교 신앙이 하나님을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고백하는 그 근거가 무엇인지에 대하여 생각해 보도록 하자. 하나님에 대하여 논의하기 시작할 때, 우리에게는 두 가지 길이 있다. 첫 번째 길은 하나님에 대하여 추상적이고 일반적으로 고찰한 뒤에 이것을 기독교적인 하나님 이해와 연결시키는 방법이다.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어렴풋이 나마 하나님에 대한 막연한 표상이 자리잡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표상들에 근거하여, 철학이나 신학의 논리의 도움을 빌어서 하나님에 대하여 보다 정교하게 말할 수 있게 된다. 두 번째 길은 하나님에 대하여 추상적으로 생각한 뒤에 그 결론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자기 계시를 믿는 가운데 계시의 현실로부터 출발하여 귀납적으로 그 현실에 기초한 하나님 이해를 전개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삼위일체라고 고백하는 것은 하나님을 아는 데에 있어서 두 번째 길을 따름으로써 얻어진 결론이다. 다시 말하면,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고백은 인간의 경험이나 사변에서 비롯된 주장이 아니라 초기 기독교 공동체가 경험한 계시의 현실(the reality of revelation)에서부터 비롯된다. 초기 기독교 공동체는 자신들이 경험하였고 증거하였던 새로운 역사 창조 운동의 일부분이 되었던 가운데 몇 가지 중요한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졌다:
"우리와 함께 하였고 우리가 따랐던 예수 그리스도는 과연 누구였는가? 예수 그리스도가 아버지라고 불렀으며 예수를 이 땅에 보내었던 분은 또한 누구인가? 지금도 교회와 이 세계 속에서 인간과 역사를 새롭게 하시는 그 영은 과연 누구인가?"
기독교 공동체는 이러한 질문들을 숙고하는 가운데, 계시의 원천(성부)과 계시의 내용(성자), 계시의 능력(성령)이 모두 하나님 자신의 사건임을 고백하게 되었다. 곧,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분과 예수 그리스도 자신, 그들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이며 구원자로 증거하는 분, 이 세 분이 모두 하나님이며 서로 다른 하나님이 아님을 고백하게 된 것이다.
기독교 신앙과 신학에서 우리가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하여 말하는 것은 신학자들이 '하나님의 일기장'을 훔쳐본 결과로 하나님의 비밀스러운 면을 완전히 파악했기 때문에 삼위일체라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위에서 살펴본 바대로, 단지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을 중심으로 전개된 구속의 사건 가운데 자신을 계시하신 하나님에 대하여 보다 충실히 말하고자 애쓴 노력의 결과인 것이다.
우리는 삼위일체론 자체가 계시된 교리라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다만 삼위일체론이 하나님의 계시의 현실에 대한 가장 충실한 해석임을 지적하고자 하는 것이다. 기독교 신학이 하나님을 삼위일체라고 주장할 때, 이것은 하나님이 삼위일체라는 관념임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하면, 삼위일체라는 표현 자체가 하나님으로 승격되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삼위일체를 통하여 표현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 세계 속에 찾아오신 세분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이며, 이 하나님의 하나되심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사건을 통하여 우리는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께서 함께 구원의 사역을 이루어 가심을 고백하였고, 그에 따라 하나님을 삼위일체로 고백하였다. 신학에서는 구원의 사역 가운데 계시된 하나님의 이해를 흔히 경륜적 삼위일체(the economic Trinity)라고 부른다. 구원의 경륜 가운데 함께 사역하시는 삼위일체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경륜적 삼위일체를 받아들이면, 여기에 중요한 질문이 제기된다. 만약에 하나님이 역사 가운데 홀로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가는 고독한 유일자가 아니라면, 이것은 하나님이 창세 이전부터 이렇듯이 삼위일체로 존재하신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언뜻 보기에 이 질문은 사변적인 질문으로 들린다. (창세 이전의 하나님의 모습에 대하여 누가 알겠는가?) 비록 사변적이기는 하지만, 이 질문은 대단히 소중한 면을 밝혀내고자 한다.
여기서 쟁점이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역사 가운데 활동하실 때 "자신의 본래의 모습에 상응하게 활동하시는 분인가" 하는 점이다. 만일 하나님이 자신의 본래의 모습에 일치하게 활동하시는 분이라면, 우리는 하나님의 역사적 활동 모습 뿐 아니라 본래의 모습도 역시 삼위일체임을 고백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추론에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을 창세 이전부터 삼위일체로 존재하시는 하나님으로 고백하는데, 신학자들은 이것을 내재적 삼위일체(the immanent Trinity)라고 부른다.
여기에서 하나님을 삼위일체로 고백하는 것은 하나님의 본성이 홀로 단독자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공동체 가운데 존재하시는 분임을 지적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하여 말하는 것은 인간의 선입견이 만들어낸 온갖 종류의 하나님 이해에 대하여 거부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저 하늘 위에 계셔서 그저 자족하는 가운데 인간과 그의 세계에 무슨 일이 일어나건 간에 아무 상관하지 않는 절대자 하나님이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하시므로 십자가 위에서 자신을 내어주기까지 인간과 그의 세계를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에 관하여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이 그저 무자비하고 폭군적인 힘이 아니라, 전능하심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자유를 존중하는 가운데 자신을 희생하시면서 까지 인간을 구원하시는 힘임을 말하는 것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에 관하여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참된 영광이 피조물을 지배하고 피조물 위에 군림하는 가운데 홀로 착취하는 독재자의 영광이 아니라, 피조물과 자신의 삶을 나누는 가운데 인간과 그의 세계가 가지는 아픔을 자신 안에 끌어안으시는 참 사랑의 영광임을 증언하는 것이다. 이상과 같은 의미에서 삼위일체론은 기독교 신앙을 다른 신앙으로부터 구분해내는 중요한 하나님 이해이다.
어느덧 우리의 신학 이야기는 세 번째 단원으로 접어들었다. 우리는 제일 처음에 신학의 방법론에 관계된 내용을 살펴보았고, 지난 호에서는 신학의 진술들을 가능하게 만드는 그 근거들에 대하여 살펴보았는데, 그것은 곧 계시와 성서, 삼위일체론에 관한 내용들이었다. 지난번의 논의에 따르면, 우리가 신학을 통하여 하나님에 관하여 말할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종교적 또는 세속적 경험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기 계시로부터 비롯되었다는 것, 이러한 하나님의 계시는 성경 속에 가장 분명히 나타나 있다는 것, 삼위일체론은 하나님의 계시의 현실에 대한 가장 충실한 해석으로서 기능한다는 것 등에 대하여 우리는 함께 생각해 보았다.
이번 호에서는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창조와 구원의 사역 가운데 인간과 관계를 맺으시는 내용을 고찰해 보기로 하자. 하나님께서는 사랑 안에서 이 세계를 창조하심으로 자신 이외의 다른 존재에게 생명을 허락하신다. 하나님은 자신의 피조물이 죄 가운데 빠진 것을 버려두지 않으시고, 스스로 인간이 되셔서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 가신다.
먼저 우리는 창조론의 몇 가지 의미에 대하여 살펴보자.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창 1:1) 기독교 신앙은 그 첫출발부터 하나님의 창조주되심을 고백한다. 하지만 이 처음은 시간의 첫 출발일 뿐이지 모든 것의 처음은 아니다. 모든 것의 처음은 요한복음 1:1에 잘 기술되어 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모든 것의 처음에 하나님께서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계신다. 서로를 향한 완전한 사랑 가운데 하나님은 이 세계를 창조하신다. 창조론과 관계되어 중요한 쟁점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완전하신 하나님이 왜 이 세계를 창조하셨는가의 문제이다. 하나님은 이 세계로부터 아무런 도움을 받지 않아도 스스로 완전하신 분이라면 왜 천지를 창조하셨는가? 그것은 어딘가 하나님의 존재가 아직 불완전함을 뜻하는 것은 아닌가?
이 문제에 대하여 우리는 두 가지를 강조한다. 첫째, 세계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자유와 은혜에 의하여 창조되었다. 하나님은 자신 안에 부족함이 있기에 그것을 채우기 위하여 이 세계를 창조한 것이 아니다. 둘째, 하지만 하나님의 창조는 어떤 제한적인 의미에서 필연적이라고까지 말할 수도 있다. 이것은 일종의 '사랑의 필연'이다. 곧, 삼위일체 하나님 자신이 사랑의 존재임으로 이 세계를 창조하여 다른 존재에 생명을 허락하는 것은 하나님 자신의 사랑의 본성에 일치하는 행위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세계를 창조하지 않는 것, 하나님이 이 세계를 구원하지 않고 놓아두는 것 등은 하나님의 사랑의 본성에 어긋난다는 의미에서 사랑의 필연이다.
하나님의 창조주되심을 고백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하여, 그리고 피조물에 대하여 중요한 사실을 밝혀주는 것이다. 먼저, 창조론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고백한다. 즉, 창조주 하나님은 피조물과 본질적으로 구분되는 분이다. 하나님은 창조주로서 피조물인 이 세계와는 구분되는 분이기에, 하나님의 초월성을 제한하는 하나님을 이 세계의 내재적인 과정으로 환원시키는 모든 시도는 거부된다.
우리는 창조 이해를 삼위일체론적 시각에서 이해해야 한다. 창조 신앙 가운데 나타나는 하나님은 삼위일체의 교제 가운데 스스로 자족하는 하나님이 아니라 자신 이외의 다른 존재에게 존재의 공간을 허락하시는 교제의 하나님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창조의 사건은 하나님의 능력의 표현이기도 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이기도 하다. 하나님의 세계 창조는 자신 외에 다른 존재에게 그 자리를 허락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이며, 공동체 가운데 거하기를 원하셔서 사랑의 대상을 창조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표현이다. 하나님은 창조하심 가운데 자신을 피조물과 교제하는 대상으로 허락하신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통하여 그 절정에 달한 하나님의 자기 희생과 자기 낮추심은 이미 하나님의 세계 창조 속에서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음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창조론은 피조물로서의 세계에 대하여서도 중요한 점을 지적하는데, 곧 모든 피조물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에 의하여 비롯된 것임을 강조한다. 이 세계의 모든 피조물은 존재하지 않았을 때가 있었다. 반면에 하나님은 영원에서 영원에 이르기까지 참으로 존재하는 분이며, 오직 하나님만이 이 세상의 만물을 있게 하시는 분이다. 하나님의 이러한 창조주되심은 그저 과거의 사건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지금도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보존되며 지탱되고 있음을 창조론은 말한다.
기독교 신학은 전통적으로 '무로부터의 창조'(creatio ex nihilo)를 주장하는데, 여기서 세계가 '무로부터' 창조되었다는 것은 세계가 하나님의 존재로부터 유출되거나 진화한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자유로운 은혜에 의하여 창조되었음을 말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창조론은 이 세계가 신적인 존재가 아님을 지적한다. 이 세계는 결코 하나님으로 신격화 될 수 없다. 창조신앙은 하나님의 세계화를 거부하며, 동시에 세계의 하나님화를 거부한다. 기독교 신앙은 생태학적 관심에 대하여 깊은 공감대를 가지는 반면에, 세계와 자연을 하나님의 지위에까지 높이는 모든 시도에 대하여 분명한 반대를 표명한다.
기독교 신학은 창조의 선함을 주장한다. 하나님으로부터 지어진 이 피조물은 비록 신적인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 보시기에 선한 피조물이라는 것이다. 기독교 신앙의 창조론은 피조물의 일부를 악한 것으로 규정하는 온갖 종류의 이원론을 거부한다. 정신은 선하나 물질은 악하다고 주장하거나 영혼은 선하나 육체는 악하다고 주장하는 이원론은 창조론의 근거 위에서 거부된다. 기독교 신앙에서 가장 기본적인 구분은 피조물 사이의 구분이 아니라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의 구분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선한 창조에 대하여 말하는 것은 세계의 악의 존재나 죄의 실체에 대하여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세계에는 악이 분명히 존재한다. 그러나 악의 존재는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니라 인간의 죄와 타락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하나님으로부터 선하게 창조된 인간과 세계는 인간의 죄와 타락으로 인하여 악의 세력 가운데 빠져들었다. 하나님께서는 악의 유혹에 빠짐으로써 죄의 세계에 떨어진 인간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구원해 주시는데, 성서의 중심적 주제는 죄에 빠진 인간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이다.
예수 그리스도, 곧 성자 하나님은 인간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심으로써 죄악에 빠진 인간과 그의 세계를 구원하신다. 성자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세계에 찾아오신 사건, 곧 성육신의 사건은 하나님이 이 세계를 포기하지 아니하시고 끝까지 사랑하심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기독교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가 참 하나님이며 참 사람임을 고백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참 사람으로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사람이 해야하는' 속죄의 사역을 대신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참 하나님으로서 '하나님만이 할 수 있는' 그 사역을 완성한다. 모든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 속죄의 사역을 믿음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죄와 악의 세계로부터의 구원을 받는다.
인간과 세계의 구원은 죄로부터의 건짐과 하나님의 새 생명의 참여라는 두 가지로 이해되는데, 죄와 악의 세력 가운데 빠져 있던 인간의 생명은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으로 인하여 죄로부터 벗어나고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된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을 피안적이며 추상적인 실체로 이해하기보다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역 가운데 이해해야 한다. 구원 가운데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영원한 생명은 인간이 하나님의 내적인 삶 가운데 참여하는 것이다.
구원은 그리스도의 생명 가운데 하나됨으로써 하나님의 내적인 공동체 안에 들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는 그 은혜 가운데 그리스도 안에 있는 참 인간의 삶에 인간의 삶을 연합시킴으로써,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의 사랑의 삶 안에 거하도록 인도하신다. 이러한 의미에서 구원이란 단순히 도덕적으로 새 삶을 사는 것을 넘어서서, 하나님 안에서 우리의 전 존재가 변화되는 존재론적인 사건이다.
구원은 타락 이전의 상태의 회복을 넘어서는 것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그리스도와 연합하며, 그리스도의 참 인간성을 통하여 하나님의 생명 안에 참여하기에 타락 이전보다 밀접하게 하나님과의 교제 안으로 들어간다. 이러한 의미에서 하나님의 구원의 실재(the reality of salvation)는 타락 이전의 상태를 넘어서는 것이다.
우리는 구원을 개인적 차원과 사회, 우주적 차원에서 동시에 살펴야 한다. 개인적 차원에서, 구원은 우리의 생명이 거듭나는 사건이다. 그리스도의 은혜 가운데서 한 사람 한 사람의 생명이 구체적으로 거듭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하나님의 구원하심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것이며, 인간은 믿음을 통하여 하나님의 거저주시는 은혜의 선물을 받는다. 우리는 '오직 믿음으로',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지는 구원을 말함으로써 모든 공로주의를 배격한다.
우리는 한 가지 가능한 오해를 지적해야 한다.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말하는 것은 우리의 믿음이 구원을 만들어 내는 하나의 공로가 됨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그것은 최악의 공로주의이며, 대단히 게으른 공로주의이다. 믿음을 통하여 구원을 얻으나 믿음이 구원을 가져오는 원인이 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다른 모든 율법적 행위가 우리의 구원을 보장하지 못하듯이, 우리의 믿음이라는 행위 역시 우리의 구원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구원은 인간의 행위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만 근거하기 때문이다. 다만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는 우리의 믿음을 통하여 우리에게 전해지는 것이기에 우리는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갈 뿐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는 구원의 참 원인은 하나님의 은혜이며(by the grace of God), 우리 구원의 참 통로는 믿음이라고(through faith)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의 구원은 인간의 영혼의 거듭남이라는 개인적 차원에 국한되지 않는다. 구원이란 단순히 개개인의 영혼이 건짐을 받는 것을 넘어서서 사회의 변혁 및 전 우주의 새롭게 됨을 포함한다. 하나님의 구원의 대상은 개개인의 영혼 뿐 아니라 하나님의 피조물인 모든 만물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구원 사역의 최종적 목표는 새 하늘과 새 땅으로 표상되는 하나님의 나라이기에 하나님은 인간의 세계와 역사도 역시 구원의 대상으로 삼으신다. 하나님의 역사 속에서 펼쳐지는 구속의 사건은 분명히 인간의 영혼 구원을 포함하지만, 인간의 영혼 구원이 하나님의 구속의 사건을 모두가 포괄하지는 못한다는 것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된다.
우리는 구원을 개인적 거듭남의 사건이나 또는 사회적 변혁의 사건 가운데 어느 하나로만 이해하려는 시도를 거부한다. 우리는 기독교 신학의 다양한 주제들을 다룸에 있어서 거짓된 양자택일을 거부해야 한다. 두 가지 중의 한 가지만을 배타적으로 선택함으로써 기독교 신앙의 풍성함을 놓치게 되고, 신앙의 보화들을 빈곤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우리는 구원을 하나님께서 만물을 새롭게 창조하시는 사건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인간 자신의 죄로 인하여 타락한 인간과 그 세계를 하나님은 포기하거나 외면하지 아니하시고 찾아오셔서 죄에서 건져주시며, 그 가운데 새롭게 창조해 가신다.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는 인간의 구원에서 중요한 분깃점에 달하지만, 하나님의 구원의 사역은 인간의 구원에 국한되지 않는다.
구원의 사역은 우주적인 지평을 가지고 있는데, 하나님은 인간의 구원을 통하여 만물을 새 창조하시는 사건을 완성해 가신다. 하나님의 이러한 새 창조의 사건에 참여함으로써 인간은 이 세계를 변혁하시는 하나님 자신의 역사와 운동 안에 참여하게 된다. 여기서 우리는 구원의 실재가 어떤 무시간적이며 몰역사적인 그 무엇이 아니라, 역사 속에서 계시되었고 역사를 통하여 성취되며, 이 세계 속에서 구체적으로 그 모습을 드러내는 것임을 지적해야 한다.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구원이란 이 세계로부터의 도피가 아니라 이 세계 가운데서 이 세계를 변혁하시는 하나님의 변혁의 사역 가운데 참여하는 것을 뜻한다.
우리는 지금까지 삼위일체 하나님의 창조의 사역과 구원의 사역에 대하여 살펴보았는데, 이러한 기본적 틀 안에서 참된 인간 이해와 죄 이해를 전개할 수 있다. 우리는 인간과 죄의 문제를 삼위일체론적인 관점에서 고찰해야 하는데, 그것은 인간의 문제와 죄의 문제는 인간 스스로의 판단과 상상에 의하여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지으시고 구원하시고 완성하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포괄적인 역사 속에서 분명히 나타나기 때문이다.
창조주 하나님의 빛에 비추어진 참 인간의 모습은 하나님 앞에서 피조물됨을 인정하는 가운데 생명의 근원되신 하나님과의 밀접한 교제를 맺어가는 인간이다. 구원자 하나님의 빛에 비추어진 참 인간의 모습은 자신의 죄인됨을 고백하는 가운데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지는 구원의 실재를 받아들이고 그것에 참여하는 인간이다.
죄의 모습도 역시 삼위일체론적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와 사역이 참 인간의 모습을 보여준다면, 죄의 모습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역 속에서 드러난 참 인간의 모습의 왜곡과 거부로서 나타난다. 죄 가운데 빠진 인간은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밀접한 관계 속에서 자신의 삶을 이해하기를 거부하고, 모든 관계를 단절하는 가운데 스스로의 동굴 속에 자신을 가두고 있다. 이러한 인간에게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찾아와서 구원의 선물을 허락하신다.
우리는 죄의 실체를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나타난 참 인간의 모습에서 살펴질 때, 죄는 크게 교만과 태만으로 규정될 수 있다. 첫째, 죄는 피조물된 인간이 스스로를 창조주 하나님의 위치에까지 높이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은 스스로 인간이 되셔서 우리 가운데 섬기는 자로 오셨는데, 인간은 교만으로 인하여 스스로 하나님이 되려고 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은 가장 크신 분이 가장 작은 자로 오셔서 섬김의 삶을 사셨는데, 인간은 자신을 높임으로써 거인의 역사를 이룰 수 있다고 가장한다.
둘째,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살펴질 때 죄는 교만의 적극적 모습을 가질 뿐 아니라 태만이라는 소극적 모습을 띠기도 한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구원의 사역을 통하여 인간을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참 사람의 모습으로 변화시키기를 원하시는데, 인간은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에 대하여 불신하거나 거절함으로써 자신의 단절된 삶에 머무른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해주셔서 "택하신 족속"이며 "왕같은 제사장"(벧전 2:9)으로서의 참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셨는데, 인간은 아직도 자신의 노예적 삶의 모습에 안주한다. 인간의 죄성은 하나님에 의하여 시작된 새로운 삶의 모습을 거절하고 옛 삶의 방식을 고집하는 태만 속에 드러난다.
하나님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시는 가운데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해 가며, 인간과 세계를 구원하시는 가운데 인간의 죄성을 극복하시며, 자연 및 모든 세계를 새롭게 빚어 가신다. 인간과 그의 세계는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통하여 자신의 죄악된 세계를 벗어나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랑의 공동체 안으로 들어간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완성이라는 전체적인 지평 아래서 구체적인 신학의 주제들을 이해해야 한다. 기독교 신앙과 신학은 그저 몇몇 개인들의 영혼 구원이나 죄론과 같은 작은 주제들로만 환원되거나 축소될 수 없다. 기독교 신학의 작고 소중한 주제들은 분명히 강조되어야 한다. 하지만 이러한 주제들은 하나님의 나라의 완성을 통한 하나님의 영광받으심이라는 장엄하고 전체적인 지평 가운데 이해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인간론, 죄론, 구원론 등은 그 자체로서 중요성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받으심이라는 보다 포괄적인 지평에 봉사하기에 그 중요성을 가지는 것이다.
우리의 조직신학 이야기는 이제 마지막 단원에 접어들었다. 지금까지 논의된 내용들을 간략하게 정리함으로써 우리의 마지막 이야기를 시작하도록 하자. 우리는 첫 단원에서 "신학은 왜 필요한가? 신학을 한다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조직신학은 우리에게 어떤 도움을 주는가?"와 같은 질문을 염두에 두고 신학의 방법론에 대하여 생각해 보았다. 둘째 단원에서는 신학의 진술들을 가능하게 만드는 근거들에 대하여 살펴보았는데, 그것은 곧 계시와 성서, 삼위일체론에 관한 내용들이었다. 지난 호에서는 삼위일체 하나님이 펼쳐가시는 창조와 구원의 사역에 대하여 살펴보았고, 이러한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역에 근거한 인간이해와 죄 이해에 대하여 간략히 살펴보았다.
우리는 조직신학의 각 주제들에 대하여 살펴볼 때에 삼위일체 하나님의 틀 안에서 이해하는 것의 중요성을 여러번 강조하였다. 우리는 마지막 주제들을 논의함에 있어서도 신학의 중심적 대상이 하나님이라는 이 사실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자 한다. 신학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그 대상으로 함으로써, 사이비 역사학이나 사이비 정치학이 되려는 유혹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수 있다. 여기서 신학의 신학됨을 주장하는 것은 인간의 역사, 사회, 문화, 정치 등과 같은 주제가 신학의 논의 대상 가운데 포함되지 않음을 말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우리가 기술하는 하나님은 인간과 세계를 버리지 아니하시고 찾아오셔서 구원해주시는 하나님이기에, 인간과 세계는 신학의 영역 안에 들어오며, 우리는 인간과 세계에 대하여 말하게 된다. 신학의 중심 대상이 삼위일체 하나님이라는 말하는 것은 인간의 관심을 축소시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인간과 세계를 삼위일체 하나님의 포괄적인 지평 아래서 온전하게 이해하고자 하는 시도이다.
신학의 중심적 내용은 하나님 자신이라는 이 단순한 주장의 중요성은 신학의 각 내용을 다룰 때에도 드러난다. 우리가 창조, 구원, 종말 등과 같은 여러 주제들을 다룰 때에 우리는 서로 다른 주제들을 개별적으로 살펴보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주제들은 동일한 하나님이 하시는 구체적 사역 가운데 이해되어야 하기에, 결국은 한분 하나님의 사역을 여러 측면에서 살피는 것이다.
모든 것을 있게 만드시는 하나님이 피조물과 맺으시는 관계가 시작의 측면에서 살펴질 때 그것은 창조에 대한 논의가 된다. 피조물이 죄와 사망의 사슬 가운데 빠진 것은 외면하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도우심의 관계가 피조물의 변화의 측면에서 살펴질 때 그것은 구원론이 된다. 역사 속에서 선한 일을 시작하셨을 뿐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날에 완성하실 하나님이 피조물과 역사의 끝에 맺으실 관계를 마지막의 시각에서 다시 살필 때 그것은 종말론이 된다.
우리는 두 가지를 강조하는데, 그것은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풍성한 관계는 각각의 주제를 통하여 우리에게 보다 분명히 드러난다는 것과 이러한 다양한 주제들은 서로 다른 내용들이 아니라 한 분 하나님의 창조, 구원, 완성의 사역이라는 것이다.
이상과 같은 내용을 염두에 두고,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구원의 사역에 의하여 새롭게 창조된 공동체인 교회의 모습과, 하나님께서 이루어 가시는 구원의 사역들의 방편들에 대하여 살펴보면서, 마지막으로 새 하늘과 새 땅을 지향하는 하나님 나라의 모습에 대하여 살펴보도록 하자.
신약성경에서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 하나님의 백성 또는 하나님의 성전으로 묘사되고 있다. 이것은 교회 공동체의 뿌리가 사람들의 자발적인 모임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도적인 부르심과 모으심에 있음을 보여준다. 신약원어로 교회를 뜻하는 에클레시아(ecclesia)도 역시 어원적으로 '보냄을 받은 무리들'을 뜻한다. 여기서 우리는 교회 공동체의 근거가 하나님 자신의 공동체 안에 있음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삼위일체론이 보여주는 바와 같이 하나님은 창세 이전부터 이미 공동체 안에서 존재하는 분이다. 하나님이 공동체로서 존재하는 분이기에, 교회 공동체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공동체에 그 뿌리를 두고 있을 수밖에 없다. 교회란 삼위일체 하나님의 공동체에 뿌리를 두는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 부활을 통하여 성령의 능력 안에서 창조된 새로운 공동체를 의미한다.
우리는 교회를 하나님의 삼위일체적 공동체에서 비롯된 것으로 이해함으로써 개인주의적 교회 이해를 거부한다. 교회는 구원받은 개인들이 모여서 '만든' 집단이나 단체가 아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 의하여 창조된 그리스도의 몸이며, 신자들의 어머니(칼빈)로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는 개개인의 신자들의 존재보다 우선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시간적인 차이가 아니라 존재론적 우선순위를 말한다. 우리는 교회를 개개인의 신자들에 의하여 만들어지는 것으로 간주하는 개인주의적 교회 이해를 거부한다.
우리는 교회를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된 운동(movement)과 사건(encounter)으로 이해한다. 교회가 제도적인 특성을 가지는 것도 사실이나, 교회는 무엇보다도 성령 하나님께서 세계를 향하여 펼쳐가시는 구원의 운동으로서 존재한다. 물론 교회는 세계 속에서 여러가지 가시적이며 제도적인 특성을 가진다. 하지만 그 특성들은 삼위일체 하나님이 펼쳐가시는 구원의 사건 가운데 이해되어야 한다.
교회를 올바로 이해하는 데에 가장 방해가 되는 것은 역사적으로 특정한 형태의 교회 이해를 절대시하여 인간의 제도를 하나님의 구원의 사건보다 우위에 두는 것이다. 교회의 뿌리가 삼위일체 하나님의 운동 속에 있듯이, 교회의 미래도 하나님의 나라로 표상되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운동 속에 있다. 그러므로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를 지향하는 가운데 자신의 사명을 다한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징조로서 하나님 나라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으나 스스로가 하나님 나라는 아니다. 교회가 자신의 시선을 하나님의 나라에 집중시키지 않고 자신에 그 시선을 집중시킬 때, 교회는 그 본성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게 된다.
교회의 참된 정체성은 자신 안에 있는 것이 아니다. 교회의 정체성은 그 근원에 있어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구원의 사역에 의존하고 있으며, 그 미래에 있어서는 종말에 완성될 하나님의 나라에 의존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교회의 영광은 햇빛을 반사하는 달의 영광과 같다.
오늘날 교회의 위기는 교회가 너무나 전통적이거나 너무나 세속화되었다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자신의 뿌리와 자신의 미래를 잊어버리는 곳에 자리잡고 있다. 오직 자신의 근원과 미래를 기억할 때에만 교회는 자신의 참된 모습을 회복할 수 있다. 교회는 자신의 존재를 하나님의 공동체에 의존하고 있기에, 교회공동체는 하나님의 삼위일체적 공동체를 반영할 수밖에 없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공동체가 사랑 가운데 서로를 존중하는 공동체이듯이, 교회 공동체도 역시 모든 종류의 차별을 넘어서서 하나가 되는 공동체이다. (갈 3:28)
이 세계 속에서 구원을 이루어가시는 하나님은 새로운 공동체로서 교회를 세우셨을 뿐 아니라, 교회와 세계 속에서 여러 가지 은총의 수단을 통하여 구원의 사역을 완성해 가신다. 하나님께서 은총의 수단으로 허락하신 것들 가운데 전통적으로 말씀과 성례전이 교회의 사역 가운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종교개혁자 칼빈도 역시 교회를 규정하는 데에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이 올바로 선포되고 성례전이 올바로 집행되는 것을 주요한 표지로 간주하였다.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는 성령 하나님께서 교회를 통하여 하시는 사역 가운데 중심적 위치를 차지한다. 하나님께서는 연약한 인간의 입술을 통하여 자신을 증거하기를 기뻐하셨기에, 오늘도 인간의 선포를 통하여 자신의 사역을 전개해 가신다. 비록 우리는 연약한 인간이며 죄인된 인간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로 선포할 수 없는 존재이지만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우리는 하나님을 증언하며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선포한다. 바르트는 말씀 증거자가 처한 위치를 다음과 같이 극적으로 묘사한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하여 선포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인간이기에 하나님에 대하여 말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해야 함과 우리의 할 수 없음 사이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
성례전은 말씀 선포와 함께 교회의 중요한 표지이다. 전통적으로 성례전은 은총의 외적인 매개체로서 이해된다. 성찬과 세례 자체가 구원의 현실을 가져오는 것은 아니나 그것들이 하나님의 은혜의 빛 아래서 구원의 현실을 매개해 주는 통로로 쓰임받기 때문이다. 어거스틴은 성례전을 "보이지 않는 은혜에 대한 보이는 징표"라고 간결하게 정의하였다. 종교개혁 이후로 개신교는 중세 가톨릭 교회의 7성례를 거부하고, 오직 두 가지 성례전만을 시행한다. 세례와 성찬은 모두 예수께서 시행하신 모범과 명령에 근거한다.
우리는 성례전을 이해함에 있어서 하나님의 은혜의 객관적 현실과 신앙인의 주관적 응답을 모두 강조해야 한다. 성례전 가운데 드러나는 하나님의 은혜는 받아들이는 사람의 신앙에 따라 생기기도 하고 없어지기도 하는 것이 아니다. 그 은혜는 신앙인의 상상이 만들어내는 주관적인 공상도 아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은 신앙인의 응답이 있기 이전에 이미 거기에 있는 것이다. 신앙인의 응답이 은혜의 현실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의 현실이 신앙인의 응답을 이끌어내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의 현실을 강조하면서 우리는 신앙인의 응답의 중요성을 또한 강조해야 한다. 은혜의 현실에 대한 강조는 성례전 가운데 드러난 하나님의 은혜가 기계적이거나 마술적으로 역사함을 뜻하지 않는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인격적인 하나님이기에, 하나님의 은혜는 인격적으로 역사하는 가운데 신앙인의 응답을 통하여 그 효력을 발휘한다.
성례전 가운데 먼저 세례에 대하여 살펴보자. 세례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다시 사는 것으로 묘사된다. 물 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그리스도의 죽음에 우리 자신을 동일시하는 것을 의미한다. 세례는 또한 죄에 물든 삶으로부터 씻겨짐으로 묘사된다. 물이 모든 더러움을 씻어내듯이, 하나님의 용서도 참으로 회개하는 사람들의 죄를 씻어낸다. 세례는 성령의 능력 가운데 다시 태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세례를 통하여 우리는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며,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창세 이전부터 이루어 가시는 그 공동체 안으로 들어간다. 세례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공동체 안으로 들어감으로써, 우리는 더 이상 고독한 개인으로 남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루어 가시는 새로운 공동체의 일원이 된다.
성찬은 그리스도께서 하신 모범과 명령에 따라 떡과 포도주를 나누는 가운데 주님을 기억하는 것이다. (고전 11:23-25) 세례가 하나님의 구원의 사역 가운데 그리스도인의 삶에 기초가 되는 성례전이라면, 성찬은 신앙인의 삶이 그리스도와의 연합 가운데 계속 유지되고 그 관계가 더욱 깊어지는 성례전이다. 성찬을 통하여 우리는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상징되는 그리스도의 임재 속으로 들어가며, 그리스도와 연합되는 가운데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동시에 하나님 나라의 잔치를 앞당겨서 맛보게 된다.
성찬식 가운데 경험되는 그리스도의 임재의 양식(mode)에 대하여 여러 가지 신학 이론들이 있어왔고, 때로는 교회의 분열을 가져온 논쟁점이 되기도 하였다. 로마 가톨릭 교회는 전통적으로 화체설을 주장하며, 루터교회는 공재설을, 개혁교회는 칼빈을 따라서 영적 임재설을, 또 쯔빙글리를 따르는 교회는 기념설을 주장해 왔다.
우리가 성찬을 이해함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께서 성찬의 나누어짐 가운데 현존하신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하면, 주의 성찬은 하나님의 삶이 인간의 삶에 나눠짐을 뜻하는 성례전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창세 이전부터 자신의 삶을 나누는 가운데 존재하시는 하나님이기에, 삼위일체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의 사랑의 삶을 인간에게 나누어주신다. 신앙인은 성찬식에 참여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세우신 새로운 교제의 삶 가운데 참여한다.
우리는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의 시각에서 세례와 성찬의 종말론적인 측면을 강조해야 한다. 세례를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 볼 때, 세례는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의 징표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세례를 통하여 다가올 하나님 나라의 첫 열매로서 하나님의 나라를 희망하는 가운데 이 세계의 구원의 완성을 고대하며 신음하는 모든 피조물과 연대를 이룬다. 성찬도 역시 그리스도의 사역에 참여하는 것으로서,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날을 희망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나라를 지시한다. 우리는 성찬에 참여함으로써 이 세계 속에서 계속 진행되고 있는 하나님 나라의 사역 가운데 참여한다.
세계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그리스도의 사역이 인간 삶의 모든 영역에 걸친 것이기에, 신앙인은 성만찬에서 떡과 포도주를 나누는 가운데 이 세계의 굶주리는 사람들(영적으로, 또한 육신적으로)에 대한 자신의 책임을 자각한다. 성찬의 떡과 포도주가 자연의 곡물과 열매로부터 나온다는 점에서 성찬은 인간과 자연 사이의 공동의 운명을 상징적으로 지시한다. 인간 뿐 아니라 자연도 역시 그리스도의 현존 가운데 하나님 나라를 향한 사역 가운데 봉사한다. 밀리오리 교수의 표현에 따르면, "주의 성찬은 개인적 구원, 공동체의 구원, 그리고 우주적 구원이 서로 연관되어 있고 서로 의존하고 있음을 아름답게 묘사해준다."
마지막으로 종말론적 주제에 대하여 살펴보도록 하자. 종말론의 주제들은 비록 조직신학의 마지막 부분에 위치하고 있으나, 종말론의 시각은 모든 기독교 진술의 한 가운데 자리잡고 있다. 그것은 하나님 나라의 최종적 완성을 떠나서는 모든 기독교 교리가 왜곡되기 때문이다. 만약에 우리가 교회를 하나님 나라의 빛에서 이해하지 않고 마치 교회가 하나님 나라의 완성인 듯이 간주한다면, 우리의 교회이해와 성만찬 이해는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의 최종적 완성에 대해 무감각하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 이해와 성례전 이해를 전개함에 있어서 하나님 나라와의 연관성을 강조하는 가운데 그 내용들을 살펴보았다.
기독교 신앙은 세계의 종말에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될 것을 희망한다. 하나님의 나라가 최종적으로 완성될 때, 죄와 악과 죽음의 세계는 모두 정복될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의 사역이 피조물의 세계의 모든 차원을 포괄하듯이, 하나님의 나라도 역시 개인적, 사회적, 우주적 차원의 완성을 모두 포괄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개인의 삶이 완성되며 영화롭게 됨을 뜻하지만, 하나님 나라의 모습은 개인적인 완성에 국한되지 않는다. 하나님 나라의 완성은 개인적 차원을 넘어서서 공동체의 차원에도 적용된다. 하나님의 나라는 개인적, 사회적 차원을 넘어서 우주적 차원을 향한다. 즉 인간과 세계 뿐 아니라 자연 및 모든 우주가 영생으로 표상되는 하나님 나라의 완성에 참여한다.
영생이란 하나님의 충만한 삶에 참여하는 것을 뜻한다. 영생이 하나님의 충만한 삶에 참여하는 것이기에 천국에서의 삶은 어떤 사람들이 오해하듯이 지루한 삶의 연장을 뜻하지 않는다. 조나단 에드워즈의 말을 빌리면, 우리는 천국에서 실업자가 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더욱 활동적으로 일하게 것이다. 물론 이 땅에서 맛보는 것과 같은 무익하고 지루한 일은 사라질 것이나 우리의 삶의 가치를 실현하는 일들은 계속될 것이다.
영원한 생명이란 우리가 고독한 영혼으로서 지루하게 무한정 오래 사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공동체의 삶에 참여함으로써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온갖 종류의 축복을 맛보게 된다. 우리가 종말에 맛보게 되는 영원한 생명은 영혼의 영역에 국한되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새 하늘' 뿐 아니라 '새 땅'에 대해서도 말하는데, 이것은 영원한 생명이 인간의 영혼들만의 교제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땅 위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종류의 삶과 교제도 포함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종말에 최종적으로 완성될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주도적인 다스리심에 의하여 성취되는 하나님의 선물로 이해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의 노력만으로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노력과 업적을 (하나님의 선물로서 주어지는) 하나님의 나라와 동일시 할 수 없다.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로서 이해하는 것은 세계 속에서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그저 세계로부터 도피함을 뜻하지 않는다. 기도하기 위하여 골방에 들어가는 것이 세계로부터 도피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참으로 변화시키는 방법이듯이 하나님 나라의 미래를 희망하는 것은 현재의 과제를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계 속에서 하나님 나라의 삶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하여 중요한 과제가 자신들에게 부과되어 있음을 인식하고 있다. 인간만의 힘과 능력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룩할 수는 없으나, 우리는 복음을 선포하는 가운데 하나님 나라를 앞당겨 맛보게 하는 작은 희망들의 실현을 위해 애써야 하며, 하나님 나라를 향한 희망 가운데 이 땅위에 새로운 세계를 건설하도록 힘써야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종말론은 오늘의 세계를 향한 윤리적 도전을 우리에게 던져주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Gabe)로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나라는 동시에 과제(Aufgabe)로서 우리에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기독교 신앙이 펼쳐가는 종말론적 희망은 인간의 실천적 행동을 마비시키는 도피적이며 피안적인 공상이 아니라 인간의 실천에 불을 붙이는 참여적이며 구체적인 비젼을 우리에게 던져준다.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노릇 하시리로다" (계 11:15)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계 22: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