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행본문
|
마11:25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11:26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11:27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11: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11:30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
누가복음 10:21 이때에 예수께서 성령으로 기뻐하사 가라사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10:22 내 아버지께서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이 누군지 아는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가 누군지 아는자가 없나이다 하시고
|
2. 전승비평의 세가지 방법
1. 두본문의 관계
평행하는 두 본문은 많은 첨가내지 삭됨으로 인해 다수의 편집 과정이 있었을 것으로 예측된다.
마11:25-27과 눅10:21-22절은 상당히 흡사하지만 그 이후 본문은 마태의 또다른 독자적 자료에 의해 생겨났을 것이다. 누가의 본문은 마태의 본문과 비교하여 누가 누구를 이용했다고 말할 수 없다. 우리는 누가의 본문을 긴 것을 단축한 것이라고 할 수 없고 또 보다 오래 된 견본이라고 할 수 없으며 두 본문은 서로 공동체 안에서 다르게 형성된 것이다. 이 구절의 출처가 예수님의 어록(Logia) 또는 공관목음서의 Q 자료임에도 불구하고, '아버지'(ԇ՜ ՐՁԵՇՑ ; 호 파테르)와 '아들 '(՜ ՕԿ՜Ւԍ호 휘오스 : 한글개역에는 '아이들' 로 되어 있음) 등의 말이 보여주는 것처럼 내용과 어휘면에서 명백히 요한적이라고 하는 사실 때문에 성서 비평가들은 크게 당황 하였다. 그 이유는 제 4복음서가 1세기말에야 비로소 기록되었으며 어록(Logia)은 공관복음서 이전의 자로이기 때문이다. 이에대해 만족할만한 유일한 설명은 요하복음에 수록된 이와같은 어투의 가르침이 예수님 자신의 직접적인 교훈이라고 하는 사실에 있다. 또 본절은 누가복음의 사상과 감정의 같은 뿌리를 가지고 있음을 입증한다. 마치 그것은 제4복음서에서 기어나와 제1복음서와 제3복음서 안으로 들어간 것처럼 보이며 다른 것 같다고 하더라도 동일한 기원을 가지고 있음을 증거해주는 참된 표적으로 보인다.
2. 어느 본문이 보다 원래적인가?
이 본문은 마태복음에서 중요한 전환점을 이루고 있다. 거짓 이스라엘에 대한 정죄가 끝나고 이제 예수는 아버지꼐서 자기를 '나타내 보이신', 그래서 아버지를 '아는' 자들에게는 돌아서고 있다. 여기서부터 예수는 참 이스라엘을 가르치며 그들을 강화시키는 일에 집중하고 있다. 마1:25-27은 눅10:21-22에 평행 본문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27절은 본래 25-26절과 처음부터 결합된 말씀은 아닌 것 같다. 왜냐하면 25-26절에서는 하나님을 가리켜 직접 '아버지여' 라고 부르고 있는데 27절에서는 3인칭으로 언급되고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아버지', '나타내다'(계시하다)라는 요어의 공통성 때문에 나중에 서로 연결되었을 것이다. 본문에는 주님의 관대한 초청이 그려져 있다. 마11:25절의 '그 때에'(ՔԼՔՅ , 토테)는 어느 분명한 시간을 지적해 주지 않고 대단히 개략적으로 사용되는 단어이다. 그러나 눅 10:21에 나타난 '이 때에' 라는 표현을 볼 때 본 구절의 '그때에'는 70인이 전도 여행에서 돌아왔을 때를 배경으로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는 여기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는 어느 한 질문에 대한 대답이라기보다 어느 상황에 대한 반응을 표현해 주는 말이다. 즉 마태는 예수께서 새로운 반응을 보이고 있다는 것을 자기의 방식으로 이 문구를 사용함으로써 독자들의 주의를 환기시켜주고 있는 것이다.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에서 특히 25-27절 사이에 다섯 번이나 나오는 '아버지'란 말속에는 예수 자신이 성부 하나님과 동등한 성자 하나님이라는 사상이 나타나고 있다. 이것은 아버지와 아들은 동등하다는 히브리인들의 사고 개념에서 그러하다.(막14:36 ; 눅10:21,22 ; 요 11:41).
이것으로 미루어 보아 마태는 누가보다 자신의 입장을 더 많이 첨가한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누가가 원래적 상황에 가까운 것임을 알 수 있다.
2)복음서의 일반적 경향과 일치한다.
이 본문에서 주님은 아버지와 거룩한 교제를 나누고 계시는데 이는 우리가 요한복음 14장부터 17장까지에서 고찰한 바 있는 바로 그것과 동일하다. 참으로 그것은 고귀한 친교의 시간이다. "온전히 안다."는 뜻의 에피기노스케이(ԽՐՉԵՉՍՙՓՋՅՉ)가 두 번 사용되고 있음을 특별히 유의해야 한다. 그리고 원한다, -하려고 한다를 의미하는 불레타이(ՂՏՕՋՇՔՁՉ)에 대해서도 유의해야 한다. '아들'은 '아버지를' 사람들에게 계시할 권능을 가지고 있으며 또한 그렇게 하기를 원한다.
마11:28-30절은 누가복음에는 없는 마태복음만의 특별한 보고에 속한 것이다. 마태는 이것을 헬라사상에 기반을 두고서 말한 것으로 보인다. 그 당시 헬라인들은 "신을 발견하는 것은 극히 힘든 일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을 본 자는 하나님을 보았다라고 말하면서 그 때 당시 사상의 흐름을 깨뜨린다.
4)마태의 신학적 작업을 엿 볼 수 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계시 방법, 즉 모든 것을 절대 주권으로 계획하신 하나님의 뜻을 찬양하시면서 이에 대해 '옳소이다. 라고 저극 인정하셨다. 참고적으로 원문을 보면 '옳소이다' 가 '옳소이다. 아버지여'(ՍՁՉ ՜ ՐՁՔԾՑ. 나이 호 파테르)로 되어 있다. 여기서 '파테르' 는 형태상 주격이나 호격으로 사용됨으로 그 의미가 강화되었다. 또 강조적 성격을 띄고 있음을 보여주는 곳은 '내가' 라는 단어가 강조 되어있다. 왜냐하면 '내가'(ՊՁԵՙ , 카고)는 접속사 '카이(ՊՁԿ)와 1인칭 대명사 '에고'(ԽԵՙ)가 합성된 단어인데 여기서 '에고'가 사용됨으로 '쉬게 하리라'는 동사의 주체가 더욱 강조되었기 때문이다. 마태는 이러한 강조구문을 사용했을 뿐만 아니라 인용구도 사용하고 있는데
그리고 마11:28-30은 마태의 독특한 자료인 것처럼 보이지만 외경 집회서의 51:23 이하와 비슷하다. 사상적으로는 집회서 24:18 이하와도 유사하다. 여기서나 집회서에서나 지혜의 멍에가 쉼(안식)에 대한 약속과 연결되어 있다.
집회서 51:23, '너희 배우지 못한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참조. 마 11:28, 너희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집회서 5:26, '네목에 지혜의 멍에를 메워라'
(참조. 마11:29,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집회서 51:27, '내가 작은 노력을 해서 얼마나 많은 쉼을 얻었는지 네 눈으로 보라'
(참조. 마11:29,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라.')
여기에서 보다시피 집회서와 마11:28-30절이 유사한 점으로 미루어보아 마태의 인용구 사용이 주목된다.
4) 삶의 정황
마 11:25-30이 원래부터 하나의 문학적 단위로 존재했다는 견해의 대표자는 노든이다. 노든은 마11:25-30이 원래부터 하나의 문학적 단위였으며,, 자기권고(Self -recommendation) 형식에 근거한 3연으로 된 찬가라고 보았다. 즉 (1) 계시를 받은 것에 대해 아버지께 감사함 (2) 계시의 내용과 전달 (3) 초청과 호소 세가지 내용으로 되어 있다. 노든은 이러한 형식이 집회서 24,51장;솔로몬의 송가 33장, poimandres, 롬 11;25f에서 발견할 수 있으며,(가장 유사한 병행은 집회서 51장이다.) 당시 헬라세계에서 널리 유행했던 선교 선전문(missionary proganda)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25-30을 문학적 한 단위로 보는데에는 다음과 같은 몇가지 문제가 있다.
첫째, 28-30절이 누가 병행구절(10:21-22)에는 없으며, 23-24절이 Q의 콘텍스트에 아주 잘 부합된다. 둘째, 불트만의 견해대로 11:27이 계시를 약속하고 있는 반면에 28-30절이 예수의 명령에 순종하는데에 대한 보상을 약속하고 있다는 점에서 다르다. 셋째, 도마복음서에는 마11:25-27을 제외한 28-30만이 등장하고 있는 것은 25-27절과 28-30절이 원래부터 하나의 문학적 단위가 아니었음을 증명한다. 넷째,25-30절이 하나의 문학 단위라고 하는 결정적 증거로서 집회서 51장이 제시되었다. 그러나 쿰란문서 11QPsa의 발견으로 이들의 주장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그 외에도 불트만에 따르면 11:27이 계시를 약속하고 있는 반면에 28-30절이 예수의 명령에 순종하는데에 대한 보상을 약속하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다르다고 본다. 불트만은 28-30절이 마28:18의 서두와 비슷하다는 점에서 원래 부활한 자의 말로 전해졌다고 추측하며, 또 마치 예수로 말하게 한 유대 지혜 문헌에 의한 인용인 것으로 본다.
결론
Q의 본문에서 Q의 지혜 기독론의 표준적 전거( locus classics)는 마 11:25-27/ 눅 10:21f였다. 여기에는 계시의 은폐성과 획득 가능성이 나타나 있는데, 이는 구약과 유대교 문학의 지혜의 은폐성과 획득 가능성에 전승사적으로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또 계시를 받는 대상인 어린아이는 구약과 유대교 문화, 그리고 쿰란 공동체에서 말하는 계시 혹은 지혜를 받는 "선택된 자"에 대한 이름이며, 어린아이로 표현한 것은 지혜에 있어서 겸손을 이상화하는 전승을 이어받는 것이다. 이들 어린아이들은 하나님 나라를 기대하고 지상의 예수를 종말의 선지자요, 하나님의 아들로 받아들인 자들로서 그들은 가난한 자들, 세리들, 죄인들이었다. 또 이 본문에 따르면 예수는 아버지와의 독점적 인식, 또 계시의 유일한 중계자로 직접 등장함으로써 예수는 더 이상 단순한 지혜가 보낸 사자들 혹은 지혜전승속에 나오는 지혜자가 아니라, 지혜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