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자의 문제
(The Son of Man debate)
예수의 칭호중에 인자의 대칭이 근원적으로 예수가 자기에 대하여 사용한 일이 있는가. 초대교회가 예수에게 이 칭호를 사용한 일이 있는가. 이 칭호가 예수를 가리킨 언어인가. 아니면, 예수이외의 다른 사람을 가리켜 사용한 일이 있는가. 이 인자논쟁(the "Son of Man" debate)은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한다.
1. 根據資料(Source).
엄격히 말하여 人子칭호는 네 복음서 안에만 나온다. 사도행전에는 단 한번 스데반이 순교하는 장에서 그가 숨을 거두려고 하는 순간에 하늘이 열리고 그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행.7:56)하였다. 이 칭호가 히브리서 2:6에 인용이 된 시.8:4의 언어 말고는 어떤 서신에도 인자칭호의 사용이 나오지 않는다. 요한계시록에 다니엘 7:9,13의 인증으로 두번나오면,첫번째는 밧모섬에서 본 사도요한의 환상중 "촛대사이에 인자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 띠를 띠고"(1:13과 단.7:9)라고 언급이 되었고 두번째는, 14:14에 나오는 "또 내가 보니 흰 구름이 있고 구름위에 사람의 아들과 같은 이가 앉았는데 그 머리에는 금면류관이 있고 그 손에는 이한 낫을 가졌더라"하였다.
본문에 근거한 예수를 지칭한 인자의 칭호는 네 복음서에 있다. 엄격히 말하면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그리고 요한복음에 기록이 된 예수의 말씀의 맥락에 나온다. 공관복음에 69회 나오고, 요한복음에 13회 나온다. 동일 맥락이나 문절에 반복이 된 것을 피하면 공관복음의 총계69회가 39회가 된다.여기에 요한복음의 것을 추가하면 , 예수는 자기를 가리켜 59회나 인자라고 하였다(Jerenias, New Testament Theology, New York:Charles Scribner's Son, 1971;pp 259f.).
본래 이 언어는 희랍어가 아니라 아람어에서 처음 왔다. 그러한 어원학적 이유로 인자라 사람이라고 하는 명사와 동등한 보편개념이라고 생각하는 학자도 있으나 그러나 복음서의 맥락에서 이 인자가 사람과 같은 명사가 아니라 한정적으로 사용이 된 칭호였다는 점을 주목하여야 한다. 마태복음 26:24에 나오는 문절 "인자는 자기에 대하여 기록 된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면 제게 좋을뻔 하였느니라"에 보면, 인자와 사람이 함께 나오며 혼돈이 없고 어느것도 보편인을 가리킨 말이 아니다. 정확하게 말하여 아람어의 인자는 보편인의 의미가 아니라 話者가 완곡하게 자기를 지칭한 대명사와 같은 용법이였다. 가령 마태복음 16:13에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하였고 같은 맥락이 막.8:27과 눅.9:18에서는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되어 있어서 보편인 사람이 아닌 話者인 "나"에 걸리는 한정적인 용어이다.
2. 狀況的 設定(Setting)
인자라고 하는 용어가 복음서에만 나오며 서간문에는 나오지 않는다고 하는 성격이 매우 의미가 깊다. 그리고 나아가 이 언어가 엄격하게 예수가 자기를 지칭한 언어라고 하는 점이다. 요한복음 12:34의 백성들이 되 물은 말 "너는 어찌하여 인자가 들려야 하리라 하느냐 이 인자가 누구냐"는 선행한 예수의 언명의 인용으로 나온 인자이다.
그리고 중요한 사실은 이 언어의 상황적 설정이 팔레스틴의 맥락이라고 하는 점이다. 바울이 이 인자의 언어개념을 잘 알고 있었을터이나 그러나 그는 후에 서간문에서 이 언어를 예수의 칭호로 사용하지 않았다. 사도행전에서 스데반의 순교적 기도중에 나오지만 그러나 차라리 이 언어의 팔레스틴적인 근원을 더 강조하여 준다. 그러므로 분명한 사실은 이 인자의 언어사유가 바울이전의 사상(pre-pauline)이고 그리고 셈족언어문화가 헬라어문화(a Greek-speaking milieu)로 전환할때 사용이 정지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한 이유로, 희랍인 신자들사이에서 그 언어가 보편화 될때에 본래의 언어사유가 저질화 할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예수가 자기를 지칭하여 인자를 사용한 경우가 세가지 경우라고 학자들은 구분을 한다. 하나는, 예수의 사역과의 관련이 된 일련의 말씀에서 (죄를 사할 권세가 있음을 선언 하신 경우인 막.2:10과 안식일의 주라고 선언이 나온 막.2:28). 다른 하나는, 인자의 고난과 죽음과 부활과 관련이 된 일련의 말씀에서 (인자가 많은 일로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배척당하시고 죽임을 당하시는 일을 언급한 막.8:31의 경우). 끝으로, 미래에 도래할 인자의 영광스러운 강림과 관련이 있는 일련의 말씀에서("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데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 하리라"한 막.8:38의 경우)등이다.
3. 解釋(Interpretation)
예수의 지상사역과 관련이 있는 일련의 말씀을 어떻게 해석하여야 하는가. 儀式批評學的입장으로 성급하게 보는 학자들은 "인자"칭호가 후에 초대교회 공동체가 창작한 표현이라고 간단히 생각을 한다
(R.Bultman, The istory of the Synoptic Tradotion. New York:Harper & Row, 1963. M. dibelius, Form Tradition to Gospel. London:Nicholoson & Warren 1963. H. Conzelmann, An Outline of the Theology of the New Testament. Lo- ndon:SCM,1969. G. Bornkaamm, Jesus of Nazareth. H. E. Todt, The Son of Man in the Synoptic Tradition. Philadelphia:Westminster, 1965).
다시 말하여 예수의 하신 말씀이 아니라 초대교회가 경건신학으로 예수의 하신 말씀으로 그렇게 창작을 했다고 한다.
예꺃에서 인자가 이 땅에서 죄를 사할 권세가 있다고 선언 한 본문(막.2:10)과 인자가 안식일의 주라고 언급한 본문(막.2:薁28)과 인자가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라고 말씀한 본문(마태.11:29)과 인자가 머리 둘곳이 없다고 언급한 본문(마태.8:20)들을 정밀분석을 하여야 한다. 양식비평학파는 마가복음 2:10이 확실하게 초대교회의 창작이라고 생각하며 그 이유로서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라"(막.2:10f)에 있는 흐름의 단절이 그 증거라고 하였다. 여기에 있는 생각의 흐름에 끊어진 까닭으로 원래의 본문에 초대교회가 인자문절을 추가시켰다고 단언한다.
그러나 Morna D Hooker 교수는 "이 문절에서 일부나 전체나 초대교회의 추가적 부분이라고 하는 해석은 인자문절의 다른 모든 경우를 경시하였거나 아니면 다른모든 경우를 외면한 편견이다. 다른 모든 인자문절을 제외 하면 그 모든 맥락이 어떻게 되겠는가. 같은 이유에서 막.2장의 경우도 그러한 인자의 추가설은 성립하지 않는다." 명석하게 반문하였다(The Son of Man in Mark. London:S.P.C.K., 1967;p.83). 만일에 여기에 있는 의식의 흐름이 이유가 되어 인자문절이 추가문이라고 하면, 같은 병행문절인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있는 흐름의 단절과 인자문절들은 어떻게 설명하여야 하는가(마태.9:6,눅.5:24). 세 복음서가 다 같이 인자문절과 같은 구문으로 되어 있으면 이 말씀이 친히 예수의 입에서 나온 말씀으로 보아야 한다.
더우기 초대교회가 예수의 말씀에 있는 언어들을 변경시켜야 할 이유가 없다. 복음서의 맥락에서 예수는 항상 죄인들과 세리들과 같이 있었다. 그러니 "인자는와서 먹고 마시매 말하기를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미태.11:19)라고 예수의 언급이 자연스러운 것이고 여기에 나온 인자의 문절이 초대교회의 작품이라고 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
공관복음의 인자 말씀을 심층적으로 분석한 I.Howard Marchall은 마태.11:19(병행절,눅.7:34)의 구문을 주목하여 "사실이 그렇기 않을때 초대교회가 예수와 세례요한을 비교하는 심히도 복잡한 내용의 글인 누가복음 7:33f.의 문절을 창작할 수 있겠는가. 이 말씀은 전적으로 예수의 친히 주신 말씀이라고 수용하야야 한다."("The Synoptic Son of Man Sayings in Recent Discussion." New Testament Studies 12[4,1966],pp.339f.)라고 정당한 견해를 제시하였다.
예수의 인자문절중에서 심히 중요한 인자의 고난과 죽음과 부활의 언급이 있다. 마가복음에 의하면 8:31,9:31, 그리고 10:33이하에 나온다. 그 중에서 대표적인 문절은 8:31의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림바 되어 죽음을 사흘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저희에게 가르치시되"이다. 다시 編輯史批評學派에서는 이 본문이 예수의 순수한 말씀이 아니라고 부인한다. 저희들의 편견은 예수의 수난기사는 전체가 復活神學以後의 回想的인 문장이라고 한다. 그리하여 여기 이 본문은 사실적으로 이미 발생한 과거를 마치 앞으로 일어날 일처럼 예언형식으로 담았다고 생각을 한다. Bultmann은 이 본문의 信憑성을 전적으로 부인하여, 에수의 예언이 아니라 초대교회가 예수이 고난과 죽음을 예언형식으로 기록한 것이라고 해석을 한다(Theology of the New Testament, Vol. I. New York: Scribner's 1952;pp.29ff.) 같은 입장에서 약간 온건하게 Gunther Bornkamm은 말하여"예수가 자기에게 닥쳐 올 고난고 죽음을 알고 있었다고 하는 것은 의심할 바 없으나 그러나 이러한 상세한 지식은 예수의 말씀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상세한 지식을 사건이 발생한 후의 지식이어야한다." 라고 하였다(Jesus of Nazareth,p.229). 그러나 이들 본문이 1세기 팔레스틴의 초대교회 공동체의 설교라고 하여야 하는가.
마가복음 8:31의 맥락은 이 말씀이 복음서의 본질적인 실체임을 일러준다. 그리고 광범한 맥락은 이 택스트의 요소가 정당함을 지지한다. 예를 들어 "버림바 되어"는 시편 118:22의 "건축자의 버린돌이 집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의 것으로서 예수와 회중에게 조금도 생소한 개념이 아니다. 이러한 문장의 맥락으로 보아 이 부분의 인자문절이 후에 삽입한 것이라고 반대하는 주장의 설득력이 없다.
끝으로 인자가 구름타고 영광중 오신다고 하는 문절과 관련이 있는 인자이다. 마가복음 8:38,13:36,14:62과 마태복음 24:27,37,39,44에 나온다. 이러한 문절들은 예수가 직접 말씀한 본문들이고 양식비평이나 편집사학파가 제거 할 수 있는 문절이 아니다. 그중 막.8:38의,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 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 하리라." 말씀한 본문에서 우선 양식비평에서는 이 인자가 누구인가. 나사렛 예수는 아니다라고 구분을 한다. 여기에서 "인자"와 "나"가 둘로 구분이 되고 있지 않는가 주장한다(참조,R.Bultmann,The History of The Synoptic Tradition,pp.122f.). 그러나 예수가 여기에 자기외의 다른 인격자를 언급하고 있는가. 아니면 한 인격의 두가지 상황을 말하고 있는가. 맥락에의 정당한 이해만이 그 문제를 푼다. 여기에서 한 인격의 두가지 상황이란, 현재의 겸허한 범상한 예수와 미래의 영광중에 오실 인자인 자기를 가르킨 말씀이다(I. H. Marshall, "Synoptic Sonof Man Sayings,"p.345).
4. 神學的 意味(Meaning)
예수가 이 "인자"를 사용하실때 그는 다니엘 7:13,14이 제시한 성서의 전통에 서 있었다. 다시 말하여,"인자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자에게 나아와 그 앞에 인도되매 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고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각 방언 하는 자들로 그를 섬기게 하셨으니 그 권세는 영원한 권세라 옮기지 아니할 것이요 그 나라는 폐하지 아니할 것이니라."의 본문이다. 예수는 구약의 약속을 성위하시기 위하여 오셨다. 그 중에 하나가 다니엘 7:13이하이다.
예수의 이 인자는 하나님의 나라의 중심이다. 그리고 중요한 사실은 이 하나님의 나라의 경이는 이미 현재에 일어나고 있다. 그러므로 예수는 세례요한에게로 돌아가는 그의 제자들에게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자가 살아나며 가난한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마태.11:3-4) 일러주셨다. 예수는 군중속에 "인자"로 서 계셨다. 그러나 예수는 인자이신 자기가 지상사역과 하늘의 영광으로 나타나실 동일 인물이시며, 두 차원의 일치를 수용하여야 한다. 이러한 두 차원의 일치는 특히 요한복음의 맥락에서 더욱 확실하다. 요한복음에서는 하늘과 땅의 두 차원이 공존하며 인자사상도 두 차원에서의 예수 자신이다. 왜냐하면 요한복음에서는 예수가 인자이시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요한복음 14:9의 "나를 본자는 아버지를 보았다."하신 예수의 답변은 요한복음이 제시하는 인자와 하나님의 아들의 일치문제의 요약결론이 된다.
예수는 인자이시므로 땅과 하늘의 일치만이 아니라 창조의 시초와 완전회복인 미래와도 일치가 되신다(참조,고후.4:4이하). Ethelbert Stauffer는 언급하여 예수는 인자이시므로 신 인류의 시작으로 우리속에 회손이 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신다라고 갈파하였다(참조,E.Stauffer,New Testament Theology.London:SVM, 1963;p.111). 결론으로, Joachim Jeremias의 견해를 귀담아 들어야 한다. 그는 말하여, "처음부터 이 칭호는 예수의 말씀전승에 존재한다. 그러므로 결과적으로 아무도 그 원초성을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하여 이 인자칭호가 묵시문학적인 인자맥락이라고 하면 본질적으로 예수 자신에게로 소급하여야 한다."(New Theology Theology,pp.266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