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서 론
로마로부터 바벨론의 이르는 전 로마 제국을 통해 누구보다도 정체성이 뚜렷했던 집단이 바로 유대인이다. 그리스도교와 교회는 유대교의 역사를 성취했다. 실제로 그리스도와 교회는 유대교와 그리고 간접적으로는 헬레니즘과 로마제국과 다양한 관계를 맺었다. 더욱이 팔레스틴 중심의 유대는 아주 급속한 헬라화가 이루어졌고, 유대의 핵심종파들이 이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유대 공동체들이 민족과 하나님 나라를 위해 백성들 가운데서 어떻게 뿌리내렸으며, 사복음서를 통하여 예수의 가르침과 유대 공동체의 가르침이 어떤 곳에서 부딪히게 되는지 알아 보려고 한다.
유대 공동체에 대해서는 예수님 당시로부터 유대전쟁에 이후까지 많은 종파들이 생성되고 확장되었지만, 그중에서 사두개파와 바리새파, 그리고 엣세네파, 폭력적인 열심당 젤롯파까지만 언급하도록 한다.
Ⅱ. 유대종파의 기원
유대종파들의 대부분이 헬레니즘의 태동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은데서 나온 결과이다. 유대인들 중에는 그리이스의 문명과 히브리의 종교를 종합시키려고 시도했던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헬라 세계 도처에 있던 유대인들뿐만 아니라 팔레스타인에 있던 유대인들도 그리이스식 이름을 받아들이고 그리이스 철학에 동의를 하였으며 그리이스의 제도를 문화진보의 선구자로 간주하였다.
유대인들이 바벨론 포로에서 귀환하여 성전제사와 의식들을 존속시키는 것과 서기관의 새로운 관심사로 율법의 전수와 해석의 두가지 경향이 나타났다. 전자는 대제사장의 위치가 중요하게 부각되면서 마카비 반란 이후에 더욱 높아졌고, 후자는 처음에 전자와 같은 맥락에서 존속되었지만 후에 성전의 일과 율법의 일이 서로 분리되어 관여하게 되었다.
당시 유대주의 신학은 다른 이방종교와는 달리 유일신 사상 즉 하나님 한분만을 참신으로 섬기는 신론에, 역사적으로 수많은 침략과 억압 속에서 자신들을 구원해 줄 메시야의 도래를 기다리는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구약시대에는 민족전체에 대한 운명을 강조하는 반면에 중간사부터는 개인적인 운명이 차츰 강조되면서 개인적인 부활 교리도 강조되었다. 그렇다고 민족주의와 선민의식이 사라진 것은 결코 아니다.
앞으로 다루어질 4개 종파에 대한 간단한 설명은 주로 기독교문서선교회에서 김의권씨가 번역한 레이몬드 설버그(Raymond F. Surburg)의 저술 「신구약중간사」에 서술된 것으로 요약하며, 인용구는 페이지만 기록하고, 각주는 생략한다. 단 엣세네파에 대한 보충설명은 챨스 F. 파이퍼가 저술한 「신구약중간사」에서 인용하였다.
Ⅲ. 유대종파
1.바리새파
그리스도의 탄생 전후 세기들에 살았던 유대인들 가운데서 발견되는 모든 당파 사이에서 바리새파는 가장 커다랗고 가장 영향력이 있는 종파였다(77). 어떤 학자에 따르면 바리새(Pharisee)란 명칭은 '구별되다', 혹은 '∼로부터 분리되다'란 의미의 히브리어 페루쉬(perush)에서 유래하였다. 바리새란 명칭의 최초의 사용은 요한 힐카누스가 통치하였던, B.C.13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78)
바리새주의의 발전에 기여했던 요인중에 세가지가 있다. 하나는 율법주의이다. 이들은 토라(율법), 즉 모세오경을 위시로 회당에서 율법을 가르쳤다. 이들은 사두개파와는 달리 구전도 성경으로 인정하고 가르쳤으며, 생활에 많은 부분을 적용하였다. 두번째는 국가주의이다. 수많은 박해와 수난 속에서 특히 포로기 귀한 이후에 이들은 근동 아시아를 헬라화 시키려는 수리아군과 투쟁함에 있어서 자신들의 특별한 민족임을 일깨우는 것이 중요하게 되었다. 곧 선민사상이다. 세번째는 바리새파 중의 한 부류로서 하시딤의 발생이다. 이들은 헬라화로 인해 로마와 손잡고 타협하는 것을 거부하며, 전적으로 순수한 유대교로 남기를 원한 집단이다. 다시 말해서 이들은 바리새파의 최극의 경건파들이다.
바리새파의 생활과 형성사는 다음과 같다. 이들은 자신의 십일조를 철저하게 준수하였고, 다른 파에 속한 자들과의 접촉을 금하였으며, 이방인과의 통혼은 아주 철저하게 금지되어 있었으며, 복장으로 다른 파와 구분을 나누었다. 이런 바리새인들이 약 6000명이 있었다고 요세푸스는 설명하고 있다. 이들의 구성원은 고루 분포되어 있다. 높은 귀족이 있는가 하면 시민층에 종사하는 자도 있다. 경건한 바리새인 집단은 부자와 가난한 자 모두를 포함하고 있다.(80) 서기관들의 대다수가 바리새파에 속하였으며 이 종파가 민중과 산헤드린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던 것은 바로 서기관들을 통해서였다. 바리새인들은 예루살렘에만이 아니라 팔레스틴의 전역에 분포되어 있었다. 그들의 율법에 대한 헌신과 종교적 열심 때문에 그들은 하층 계급의 사랑을 받았으며, 그들이 지닌 민중에 대한 영향력 때문에 상류계급은 그들을 두려워하였다.
2.사두개파
이 사두개파는 바리새파와 같이 신약성서에 기록된 종파이며, 사실상 바리새파 다음으로 권력을 행사한 종파이다. 이들의 구성원은 주로 귀족들로 이루어졌으며 대제사장이 여기에 속한다. 이들의 본거지는 성전이였으며, 귀족들과 대제사장으로 이루어진 종파이어서 대중에게는 별로 호응을 얻지 못한 종파이다. 사두개파는 바리새파와 달라서 대부분의 교리가 반대였다. 사두개파는 오로지 기록된 율법만을 준수하고, 구전을 믿지 않았으며, 부활과 천사와 미래에 대한 심판 등을 인정하지 않았다. 로마 합병으로 유대 지도자로 대제사장이 공식적인 인물이었는데, 사두개파가 항상 지배계급에 머무를 수 있었다. A.D. 60-70 사이에 대제사장은 항상 사두개인이였다는 것은 공공의 문제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83).
3.엣세네파
엣세네파 또한 바리새파의 한 부류이다. 하지만 신약성서에는 기록되지 않았고, 이들은 주로 수도 생활을 한 것 같다. 어떤 이들은 쿰란종파와 엣세네파를 동일시하는 경향도 있으나 지금은 서로 다른 부류로 보고 있는 견해도 있다. 고대 저술가들은 엣세네파가 금욕주의를 실천하고 성격상 은둔적인 종교집단이었다고 전한다. 그리스도 당시에는 그들의 수효가 약 4천명에 달하였다. 그들은 예루살렘과 유대의 몇 마을, 사해의 서쪽 해안에 있는 엔게디(Engedi)에서 볼 수 있었다. 사해의 황야가 특별히 그들의 거처였다. 엣세네파는 세상과 분리되어 인간사회와 극히 제한된 교류가 있었다. 각 그룹은 자체의 회당과 식사와 회집을 위한 공동의 홀, 공중목욕탕을 보유하였다(레이몬드 p.85.).
바리새인들은 비정통인 사두개인들의 지위를 못마땅하게 생각하면서도 성전예배에 참여를 하였지만 엣세네인들은 자기들이 오로지 참되고 순수한 이스라엘이라고 여기고 예루살렘 성전의 부패한 종교 의식에 협력하기를 거부하였다. 엣세네인들의 입장에서 보면 엣세네파 중심지에서의 주의깊게 규제된 생활이 성전 대용물 역할을 했었던 같다(챨스 파이퍼, p.164.). 어떤 이는 예수가 엣세네파에 영향으로 가르침을 받았고, 그의 제자들과 초대교회도 엣세네파였다고 말하기도 한다. 이것은 신약성서에 엣세네파를 예수가 힐난한 것이 없기 때문이라고 본다. 하지만 엣세네파의 가르침과 예수님의 가르침은 확연히 달랐다. 그러므로 신약성서에 엣세네파에 대한 비난의 말이 없다고 예수님과 초대교회를 엣세네파로 주장하는 것은 무리이다(챨스 파이퍼, p.165 참조).
4.젤롯당(열심당)
그들의 명칭은 히브리어의 '열심(zeal)'과 '질투가 많은(jealous)'으로부터 비롯되었다. 그들은 자기들의 정부를 통제하는 이방 정부에 대해 너그럽지 못했다. 젤롯당원들은 그들의 하나님과 그들의 나라를 회복하기 위한 싸움에 자기들의 생명을 기꺼이 내놓았다. 이 종파는 예수님 당시의 두드러진 활동이 있었지만, 주후 74년 경에 마사다의 전투로 막을 내렸다. 하지만 이들의 정신만은 끊이지 않고 계속적으로 남아 있었다. 마카비혁명에 이 열심당은 종종 관여하였다. 그리고 바리새파의 영향도 받았지만 폭력적인 것에 바리새파는 거절하였으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하지만 정치, 종교적인 것에는 바리새파와 많은 유사점이 있었다. 이들 중에 메시야 운동이 저항운동으로 생각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다닌 제자도 있다(눅6:15, 행1:13).
Ⅳ. 유대 공동체의 신앙
유대의 각 종파가 주장하는 바가 조금씩 다르지만 이들에게는 몇가지 핵심적인 중심배경이 있다. 이것은 이들의 공통된 것이며, 또한 구약부터 변질없이 존속되어져 온 것이다.
1.유일신 신앙
유대인들에게는 자신들이 섬기는 하나님만이 참신이며, 오로지 하나님만 섬기고 경배해야 한다. 이들은 수많은 재난과 포로기 생활이 하나님의 심판으로 믿으므로 이들은 이방인들과 같은 죄악생활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하나님의 심판으로부터 적절한 태도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순결을 유지하는 일이었다. 이러한 확신이 배타주의 낳았다. 유대인들은 다른 모든 백성과 구별하는 것은 단순히 자신들이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이라는 그들의 믿음만은 아니다. 믿음과 행위, 그리고 예배는 모두 하나라는 확신을 그들이 갖게 된 이상 그들이 그 세가지 중 어느 하나라도 위협하는 생활 양식으로부터 자신들을 분리시키려 했던 것은 불가피한 일이었다. 유일신 신앙이 헬레니즘의 영향으로 다신론이 등세하고 이교와의 대립에서도 이들을 결속시키고 하나님의 선택된 민족으로 남게 하는 것이 되었고, 다른 무엇보다도 율법이 우선이 되었다.
2.토라와 회당
어떤 종파에 속해 있든 모든 유대인이 공유하고 있었으며, 또한 하나님의 계약 백성으로서의 그들의 정체의식에 핵심적이었던 한가지 요소는 성서였다. 토라를 엄밀히 따지면 하나님의 율법이 기록된 오경만을 가리킨다. 오경은 구체적인 규칙과 규정들 외에도 상당히 많은 양의 전설과 역사, 신화 등을 포함하고 있으며, 유대인에게 있어 토라라는 말은 하나님이 자기 자신에게 관해 계시한 것과 유대인의 역사, 그리고 유대인에게 요구되는 행위 등 모든 것을 지칭하는 매우 포괄적인 용어이다.
유대교 내에서 토라에 대한 지식을 전달하고 또 토라에 대한 깊은 경외심을 배양시키는 데 회당보다 더 중요한 기관은 없다. 성서를 듣기 위해 모이는 일은 유대인의 정체성에 있어 매우 중심요소였다. '회당'이란 말은 모임의 장소라기보다는 유대인이 어떤 장소에 모이는 일을 의미했다. '회당'은 성전을 가지지 못한 유대인들의 예배를 위한 모임이었다.
3.성전과 제사장
포로기에서 귀환한 유대인들에게는 성전건축이 가장 우선적인 것이었다. 또한 성전에서 행해지는 모든 의식과 제반엄무를 돌보는 제사장들은 유대인들에게 있어서는 심리적 종교적인 구심점을 가져왔다. 제사장의 선별기준은 토라를 토대로 아주 엄하게 선별되었으며, 제사자의 수위에 있는 대제사장은 당시 유대를 통치하는 여러 정부들과 협상도 하는 자로서 유대공동체 내에서 비상한 권위를 가졌다. 대제사장과 제사장은 주후 70년 성전파괴시까지 유대공동체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지만 이들의 가문이 귀족적이고 부유하였기 때문에 일반 백성에게는 점차적으로 호응을 잃어 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전이 서 있는 한 성전은 유대인의 결속력을 제공하는 중요한 제도였다. 팔레스틴에 있건, 또는 디아스포라로 존재하건 유대인은 성전을 하나님의 백성에 속한 한 사람으로서의 자신의 신분을 나타내는 상징으로 간주했다.
4.메시아
유대교에서는 오랜 역사를 통하여 어떤 확실한 메시야관이 정립되지 못한 채 자주 변화를 겪어왔다. 실제로 유대인들의 장구한 역사가 흐르는 동안 메시야의 의미는 여러 차례 변화되었다. 맨 처음에 유대인들은 자신들을 압제자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해, 그리고 자신들에게 평화와 자유를 보장해 주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특별한 사자를 보내시리라고 믿고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 유대인들 중에는 메시야가 인격적인 존재이리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들은 정의가 실현될 초월적인 메시야의 통치 시대가 도래하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Ⅴ. 유대와 예수
예수의 가르침은 모든 신약성서에 기록되어 있지만, 직접 제자들을 통해서 가르침은 사복음서에 주로 기록되어 있다. 사복음서를 통하여 예수의 가르침이 유대 공동체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알아보자.
1.예수 가르침의 내용에 대한 개관
예수는 윤리적 단일신론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예수는 자신에 대해 메시야라는 칭호를 사용하지도 않았고, 그러한 칭호 듣기를 좋아하시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는 인자(人子)라고 불리는 것을 좋아하셨다. 또한 예수는 자신의 제자들에게 하나님을 '아바(abba)'로 부르라고 가르치셨으며,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라는 최대의 윤리적인 강령을 내리셨다. 예수의 가르침의 모든 바탕은 하나님의 나라의 시대가 도래했다는 것을 선포하는 것이다. 특히 하나님의 나라(천국)에 대한 가르침은 비유를 통하여 많이 설교하셨다.
2.유대 지도자들과 예수
사복음서를 통해서 보면 예수와 유대 공동체(주로 바리새파와 사두개파)와 적지 않게 충돌이 일어났다. 예수의 행함과 가르침이 유대 공동체의 형식적 권위와는 달리 예수는 율법의 근본적인 목적과 그 정신을 강조하였다. 예를 들면 예수가 안식일날 병자를 고치거나, 제자들이 곡식 밭을 지나가는 길에 이삭을 따는 일(막2:23이하)로 인해 계속적인 충돌을 일으켰던 것이다. 더구나 예수의 미쉬나에 대한 비판은 바리새인들과의 충돌을 가중시켰다.
유대 지도자들은 당시에 상당한 부분에 있어서 로마 헬라문화에 영향을 받았고, 또한 로마와 결탁하여 자신의 지위와 재산을 유지하였다. 하지만 이들에게는 진정한 평화와 자유를 가져다 줄 메시야를 간절히 소망하며, 율법을 준수하는데 전념을 다하였다. 이들 자신뿐만 아니라 모든 유대인들이 율법을 어기지 않고 순결한 하나님의 민족으로서 그 의무를 다할 때 하나님께서 비로소 메시야를 보내어 자신들을 구원해 줄 것으로 굳게 믿고 있었다. 그런데 나사렛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예수라는 자가 일어나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를 받으며 유대인들에게 설교를 하였다. 예수는 유대인들이 목숨과 같이 지키는 안식일을 범하고 다니는 것이었다. 이것이 이들에게는 아주 큰 불신이었다. 그리고 예수를 따르는 12제자들도 당시 유대인들이 철저하게 지키는 율법을 제대로 준수하지 않았다. 식사 전에 손을 씻지 않았거나, 다른 이들은 금식을 하는데 예수의 제자들은 금식을 하지 않았거나, 예수와 같이 안식일에 일을 하였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는 이방인들과의 접촉은 철저하게 배제되어야 하는데 예수와 그의 제자들은 이방인과 죄인들의 집에서 대접을 받고, 그들에게 죄사함의 권세를 행함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부여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모든 것이 유대 공동체에서는 있어서는 안될 일들이었다. 유대 공동체 모두가 율법을 온전히 지키므로 메시야를 바라볼 수 있는데 예수라는 무리들 때문에 메시야의 도래가 늦어지고 있다고 그들은 판단한 것이다. 그리고 유대 지도자들에게는 예수가 많은 대중들에게 지지도가 높자 자신의 가르침과 지위가 난처한 위치에 처하게 되었다. 즉 유대 지도자로서 자신들의 권력행사를 제대로 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로마의 지지도가 유대 지도자들에게 크나큰 타격을 가져오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유대 지도자들에게 예수는 있어서는 안될 존재로 부각된 것이다.
3.대중들과 예수
로마의 통치하에 많은 수난을 겪고 있는 이스라엘인에게는 예수야말로 메시야였다. 병든 자를 고치고, 귀신을 내어 쫓고, 그들에게 생수와도 같은 설교로 심령에 감화를 주는 등 유대의 지도자들의 가르침보다 예수의 가르침이 이들에게는 꿀송이와도 같았다. 그렇지 않아도 대중과는 거리가 먼 생활을 누리고 있던 유대 지도자들의 가르침에 예수의 강론은 이들을 반박함으로 더욱더 대중을 이끌 수 있었다. 예수의 많은 기적으로 그를 그들이 소망한 전통적인 메시야(권력의 힘과 통치의 능력을 지닌 자)로 생각하고 믿어 왔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혀 죽기 직전까지도 그들은 예수를 메시야로 기대하고 있었다.
Ⅵ. 유대 공동체를 통한 복음서
예수의 대한 행적은 주로 사복음서에 기록이 되어 있다. 그리고 사복음서에서 예수의 행적으로 통하여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메시야임을 확고히 명시하고 있다. 이러한 사상은 예수가 직접 자신의 입으로 표명한 것이 아니라 제자들과 예수를 만난 사람들에 의해서 불려지며, 인정받았다. 예수는 이러한 현상에서 유대 지도자들과 민중에게 두가지 양면으로 나타나게 된 것이다. 전자에는 부정적인 면이 부각된 것이고, 후자는 긍정적인 면이 부각된 것이다. 그러나 십자가 처형이 있으면서 둘다 예수에 대한 적대심과 실망에 사로잡힌다.
예수는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이제 그다지 기대의 대상이 아니였다. 즉 메시야의 이미지를 벗어 버렸다. 하지만 제자들은 예수가 그리스도시이고 메시야임을 분명히 알고 있었고, 사복음서에서도 기록하고 있다. 유태 자료에서 나온 증거로는 바빌로니안 탈무드는 예수가 '마술'을 부려 사람들을 현혹시켰기 때문에 처형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성서에서도 보면 유대인들은 예수가 마귀인 '바알세블'의 힘을 빌어 역사한다고 믿었다. 이러한 유대교의 계속적인 가르침에 신약성서의 저자(특히 사복음서)들은 예수가 메시야이고, 그를 하나님의 독생자로 믿어야만 된다는 것을 유대인들에게 인지 시켜야만 했다. 특별히 마태복음은 유대인들에게 예수가 메시야임을 알리려는 목적에서 쓰여졌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예수가 당시의 유대 율법을 망치려고 온 것이 아니라 메시야를 향한 모든 구약의 말씀들(율법과 구전)을 마무리짓기 위해서 (성서의 말로는 완성시키기 위해서) 오셨다는 것을 유대 공동체에 깨달음 주어야 할 것임을 알았다.
우리가 복음서라고 부르는 책들은 저술 당시 비교적 새로운 종류의 문학에 속했다. 전형적인 전기 문학과는 달리, 복음서에는 당시의 역사적 배경이라든가, 인물의 성격과 특징에 대한 분석, 그리고 그 주인공의 내면적인 사상에 대한 정밀 묘사 등이 경려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고대의 기적을 행하던 사람들의 실제 혹은 가정된 행동들을 칭송하는 헬라의 기적 설화들하고도 또 다르다.
Ⅶ. 나오는 말
예수시대의 유대 공동체 모두가 고전적인 율법에 얽매여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은 현세계에 대한 집착으로 인해 예수를 올바르게 바라보지 못하고, 도리어 외도하였다. 확고한 선민사상과 정치적인 권력의 메시야 사상과 지나친 배타주의 등이 가져온 결과가 예수의 가르침이 자신의 가르침에 역행하는 것으로 판단하여 그리스도의 예수, 메시야적 예수를 인정하지 않고 도리어 적으로 몰아내 버린다. 유대 지도자들의 가르침에 물들여진 유대인들도 한때 예수의 기적과 말씀에 전적으로 지지하며 따랐지만 심판대에 오른 예수의 모습에 유대인들은 자신의 옛 지도자들의 품안에 다시금 쓸려 들어간다.
로마 헬라 문화로 인한 이방의 죄악으로부터 하나님에 대한 자신들의 순결성을 보호하기 위하여 많은 율법(규율)과 금욕생활을 한 종파들은 세상과 너무 동떨어진 생활로 인하여 하나님의 구원의 사역을 한계점을 가져왔다고 볼 수 있다. 예로 예수의 가르침에 견주어 판단한다면 '세상 끝까지 증인이 되라'는 말씀과는 거리가 먼 생활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수도생활을 한 공동체일 수록 배타주의는 심하였다. 이들에게도 예수는 자신들과 동일한 사상을 가진 자라고 인정할 수 없었을 것이다.
완성되지 못한 율법에 자신들의 규율을 가중시켜 거기에만 전념하며, 메시야를 기다리고 하나님을 섬긴 유대의 공동체가 결국에는 예수를 정죄하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까지 하였다. 이들의 꺾이지 않은 자존심으로 하나님의 역사적인 구원사적 사역은 이루어지고 이것이 신약성서가 기록되는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참 고 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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