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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와 심판
박 경 미 (이화여자대학교 기독교학과 교수/신약학) |
그런가 하면 위기 앞에서 나약해지거나 포기하기 쉬운 사람들의 마음을 달래고 의욕을 북돋기 위해 이른바 위기담론들도 많이 나왔다. 6.25 이후 최대 위기라는 오늘의 위기에 이르게 만든 책임자를 추궁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드높은가 하면, 고난 속에서도 오똑이처럼 일어나는 우리 민족의 저력에 대한 이야기는 다시 한 번 움츠러든 몸을 추스리게 하며, 이 어려움이 지나간 뒤를 꿈결처럼 그려보게 만든다. 또 "위기는 기회"라는 말도 들린다. 위기(危機)라는 말의 한자어 자체가 "위험한 기회"라는 뜻이니 그럴 법도 하다. 영어에서도 위기를 뜻하는 crisis는 본래 전환점이라는 말이니 위기가 파국으로 치달을 수도 있겠지만 때로는 행운의 반전을 가져다주는 기회가 될 수도 있겠다.
그러나 하나같이 이 말들은 어떻게 하면 우리가 이 위기에서 벗어나서 다시 한 번 경제 기적을 이룰 수 있는가에 모아지고 있다. 다같이 힘을 모아 다시 한 번 경제대국으로 재기하고 경제위기를 경제회생의 기회로 돌려놓자는 것이다. 앉은 자리에서 일인당 국민소득 10,000달러가 5,000달러로 줄어들었으니 멀겋게 눈뜨고 앉아서 소득의 반을 도둑맞은 이 치욕에서 벗어나고자 열망하는 것은 당연하고 또한 지당하다. 그러나 급할수록 둘러가라는 옛 속담처럼 상황이 다급할수록 문제를 근본에서부터 따져볼 필요가 있다.
성서는 예수 생애의 마지막 무렵에 일어난 한 일화를 전하고 있다 : "예수께서 성전을 떠나가실 때에, 제자들 가운데서 한 사람이 예수께 말하였다. '선생님, 보십시오. 얼마나 굉장한 돌입니까! 얼마나 굉장한 건물들입니까!'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이 큰 건물들을 보고 있느냐? 여기에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질 것이다'"(마가 13,1-2). 이 예언의 말씀이 40년 후에 실제로 일어나게 될 예루살렘의 파멸에 대한 예언자적인 선포인지, 아니면 후대의 사람들이 예수의 입에 올린 사후 예언인지는 관심사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에 의해 해석된 역사의 맥락에서 보면 웅장한 예루살렘 성전이 결코 축복의 표징일 수 없다는 사실이다. 개인의 삶에서 질병이 형벌일 수 없고 유복함이 상급일 수 없듯이, 한 시대의 번영과 영광이 실제로는 재난일 수 있고 불행이 하나님이 개입하는 표징일 수 있다. 너나없이 감탄하는 웅장하고 화려한 예루살렘 성전이 예수에게는 폐허로 보였다. 예수는 화려하게 치장한 예루살렘의 벌거벗은 알몸뚱이를 보았고 두려움 없이 본대로 말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차분한 마음으로 물어야 한다. 지난 30년 동안 우리가 이룩한 고속 경제성장의 기적은 하나님의 축복이었는가? 국민소득 10,000 달러 시대에 우리는 정말 행복했는가? 그리고 가난은 두렵기만 한 것인가?
지금까지 우리의 삶을 지배해온 것은 고속 경제성장의 신화였다. 정권은 경제성장의 신화를 전파하고 국민들은 선진국 대열에 서게 되리라는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그리고 이것은 생활 수준의 향상에 대한 저마다의 장미빛 꿈으로 구체화되었다. 이런 신화와 기대 속에서 사람들은 숨가쁘게 앞만 보고 달려왔다. 그리고 숨가쁘게 돌아가는 세상 속에서 자신도 숨가쁘게 돌아가지 않으면 시대의 수레바퀴에서 밀려나고 말 것이라는 두려움이 사람들의 마음을 지배했다. 해마다 휴가철이면 고속도로가 북새통을 이루고 해외여행이 줄을 이었지만 사람들의 마음은 마치 이솝 우화의 서울쥐처럼 두려움과 불안이 지배했다. 언제 경쟁에서 밀려날지 모르고, 언제 우리 경제의 거품이 빠질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사람들의 마음 한자락에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
고속 경제성장의 신화는 경쟁력확보라는 시대적 좌우명을 담보로 한다. 무한경제전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국가경쟁력, 기업경쟁력, 인간경쟁력을 높이는 것이 개인과 집단의 목표이자 과제이다. 이러한 사회에서는 전문화를 통해 경쟁력을 기르고 능력주의 사회의 정상에 올라 물질적인 풍요를 누리는 것이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삶이다. 능력본위의 경쟁사회는 상품화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사람들을 환영하는 반면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끊임없이 주변으로 몰아낸다. 약육강식이니 적자생존이니 하는 무시무시한 말들이 전혀 낯설지 않은 사회에서 사람들은 서로 자신이 희생자가 되지 않기 위해 상대방을 희생자로 만든다.
설사 경쟁 자체를 어쩔 수 없이 인정한다 해도 우리 현대사에서는 공정한 게임의 법칙이 지켜지지 않았다. 중소기업에서는 단돈 몇 천만원도 대출받기 어려운 상황에서 한보나 기아는 취약한 재무구조에도 불구하고 국가경제를 망가뜨릴 정도의 막대한 자금을 대출받았다. 정권과 금융계, 재벌의 결탁이 없이는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일련의 개탄스러운 경제파탄 현상들을 목도하면서 우리 사회에서 도대체 선과 진실에 대한 신뢰를 가질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이 든다. 열심히 노력하면 거기에 합당한 보상이 주어지고, 선의가 제대로 받아들여지는 사회에서 사람들은 불안과 냉소주의에 빠지지 않고 자기 처지에 만족하며 살아갈 수 있다.
지나간 우리 현대사를 돌이켜보면 자본과 자원, 기술이 없는 상황에서 값싸고 질좋은 노동력을 제공한 국민, 노동자들이 경제성장의 실질적 주역이었다. 그러나 정권과 은행, 재벌의 부정한 결탁으로 경제가 왜곡되었고, 드디어는 파탄이 났다. 일만 죽도록 했던 노동자들은 이제 일터에서 쫓겨나 생계를 위협받게 되었다. 작금에 벌어지고 있는 상황도 결국은 노동자들의 일차적인 희생을 강요하고 있다. 지금같은 고금리 시대에 사실상 금융실명제까지 폐지된 마당에 돈있는 사람은 재산증식을 위한 절호의 기회를 맞은 반면 일터에서 쫓겨난 노동자들은 갈 데 없이 길거리를 헤맨다. 방금 이루어졌다는 노사정 합의를 바라보면서도 경제위기의 일차적 책임이 정부와 기업에 있는데 노동자들이 먼저 고통을 짊어졌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국난이 있을 때마다 부패하고 무능한 정권과 지배계급이 저질러놓은 일들을 민초들이 주워담아 온 것은 이조시대 이후 지금까지 우리 역사에서 되풀이되어온 관행이었다. 지금도 노동자들이 먼저 고통을 짊어지기로 나서는 것을 보면 눈물겹기까지 하다. 이들의 희생이 정말로 재벌, 금융, 정부 모두의 희생을 이끌어내는 도화선이 될지 두 눈 부릅뜨고 지켜볼 일이다. 지금의 위기는 정권과 금융, 재벌이 구조적으로 결탁하여 국민들의 희생을 강요해온 이 굽은 역사, 굽은 사회에 대한 심판의 의미를 지닌다. 그러므로 그 굽은 것을 바로 펴지 않고는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기대할 수 없다.
국민에게도 잘못은 있다. 우리는 성장경제의 신화를 믿었다. 기독교인들에게도 물질적 안락과 생활수준 향상에 대한 신화가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했다. 다른 사람의 등 뒤에서 하나님을 보기 보다 끊임없이 다른 사람들을 도구화하고 이용하라고 부추키는 사회에서 결국 남는 것은 무엇인가? 남는 것은 진실한 삶에 대한 냉소주의일 뿐이다. 경제성장의 신화를 믿은 결과 우리는 삶의 진실과 정의, 사랑에 대한 믿음을 잃었다. 생활수준의 향상에 대한 신화는 무엇인가? 인류가 하루에 쓰는 에너지 자원의 양은 지구가 1만일에 걸쳐 만들어내는 에너지 양에 맞먹는다고 한다. 이렇게 가다간 전(全)지구적 종말에 이르리라는 전망이 우리나라가 경제속국이 되리라는 전망보다 더 확실하다. 우리가 누리고자 하는 삶의 안락함이 자연생태계에 대한 약탈과 살육에 근거했을진대 그것은 범죄적 행위에 다름 아니다. 어떻게 다른 인간과 자연의 형제 자매들을 짓밟고 이룩한 경제적 성공이 진정한 성공일 수 있는가? 그들을 버리고, 그렇게 짓밟고 가다간 십리도 못 가서 발병 나며, 기어이 발병이 나고야 말았다. 웅장한 예루살렘 성전이 예수의 눈에는 폐허로 보였다면, 지난 몇 년간 진실과 정의를 댓가로 지불하고 우리가 걸쳤던 성장경제의 번쩍이는 옷은 실은 남루한 누더기에 불과했다. 이제는 피차의 남루한 모습을 바라보면서 껍데기를 벗은 삶 자체를 소중히 여기고 두려움 없이 가난을 실천할 때다. 이것이 지금 이 시점에서 우리가 하는 회개가 되고, 하나님의 정의를 실천하는 길이 될 것이다.
"위기"라는 뜻의 crisis는 그리스어에서 "나누다, 선을 긋다"라는 의미를 지닌 krivnw라는 동사에서 왔다. 이 동사는 고대 그리스 문헌에서 "결정하다, 판결하다"라는 의미의 법정적 언어로 사용되었다. 70인역에서도 역시 이 말은 히브리어 ࠈࠓࠚ와 관련하여 일차적으로는 법적 용어로서 "판결하다"라는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신약성서에서 krivnw와 그 파생어인 krivsi"는 때로는 "결정하다, 해결하다"라는 의미를 지니기도 하지만, 독특하게 하나님의 심판을 뜻하게 되었다. 따라서 어원과 관련해서 볼 때 영어의 "위기"라는 말은 뚜렷한 획을 긋는 전환점, 그 선의 앞뒤가 결정적으로 달라지는 분기점이 되는 지점을 가리키지만, 성서적으로는 참과 거짓이 나뉘어지고 구원과 저주가 판가름나는 심판을 가리킨다. 성서는 "나누다, 판단하다"라는 이 말의 한 측면을 하나님과 관련시켜 심판이라는 의미로 발전시킨 것이다.
결국 성서적 의미에서 위기는 심판이다. 이것은 오늘의 경제위기가 과거 왜곡된 우리 역사에 대한 심판이라는 인식을 재차 확인해준다. 마태복음은 종말론적 심판에 관한 의미심장한 한 비유를 전하고 있다 :
"인자가 모든 천사와 더불어 영광에 둘러싸여서 올 때에, 그는 …모든 민족을 자기 앞으로 불러모아 목자가 양과 염소를 가르듯이 그들을 갈라서, 양은 그의 오른쪽에, 염소는 그의 왼쪽에 세울 것이다. 그 때에 임금은 자기 오른쪽에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내 아버지께 복을 받은 사람들아, 와서 창세 때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한 이 나라를 차지하여라. 너희는 내가 주렸을 때에 내게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고, 감옥에 갇혔을 때에 찾아 주었다' 할 것이다. 그 때에 의인들은 그에게 대답하여 말하기를 '주님, 우리가 언제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잡수실 것을 드리고,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실 것을 드리고,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고, 헐벗으신 것을 보고 입을 것을 드리고, 언제 병드시거나 감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찾았습니까?' 할 것이다. 그 때에 임금이 그들에게 말할 것이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여기 내 형제자매 가운데,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기 이 사람들 가운데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하지 않은 것이 곧 내게 하지 않은 것이다.…그리하여 그들은 영원한 형벌로 들어가고, 의인들은 영원한 삶으로 들어갈 것이다'"(마태 25, 31-46).
어떤 척도에 따라 심판이 이루어지는가?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이 그 척도이다. 그리스도는 그 자신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요한 14,6). 그는 "희망 찬 사람으로서 그 자신이 희망이 되었고, 길찾는 사람으로서 그 자신이 새길이 되었다. 참 좋은 사람으로서 그 자신이 이미 좋은 세상이 되었다"(박노해 시집 [사람만이 희망이다] 中 "다시", 34쪽). 그리고 일상의 남루함 속에서 우리와 마주하는 사람들, 예수는 그들 뒤에 내가 있다고 말한다. 모든 인간 뒤에 그리스도가 계시다.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이 인간의 일을 자신의 일로 삼으셨다. 그러므로 보잘 것 없는 한 인간에게 베풀어진 선한 일은 그리스도에게 베풀어진 것이며, 이 점에서 그 일은 영원에 맞닿아 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은 이웃사랑으로 이어지며, 이 사랑이 심판의 척도이다. 겨울 한파가 아무리 매섭다 해도 실직한 가장의 가슴에서 부는 바람만큼 황량하지는 않으리라. 우리 사회에서 가장 안정된 직장이라고 하는 대학에 몸담고 있는 필자가 몇 마디 섣부른 말로 그 바람을 잠재울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지 않는다. 다만 우리 모두가 사그러들어가고 있는 이 사랑의 불씨를 다시 피워 두려움을 내쫓고 따뜻한 온기가 이 사회에 퍼져나가기를 바랄 뿐이다.
이솝 우화의 시골쥐에게는 돌아갈 시골이 있었다. 이야기는 홀로 남은 서울쥐의 후일담을 전하지 않는다. 서울쥐인 우리에게 돌아갈 시골이 있는가? 우리나라의 식량 자급율이 25%를 밑돈다는 소식에는 가슴 한구석에 남은 탑이 무너지는 소리가 들린다. 아무래도 우리가 다시 일으켜 세워야 할 일은 농촌에 있는 것 같다. 그래도 거기에 희망이 있지 않겠는가? 옛 현자의 말을 이렇게 받아들이는 것도 그리 틀리지는 않을 것이다.
"때를 만나지 못하여 세상에서 뜻을 펴기가 매우 어려워
질 때는
근본의 자리로 내려가 뿌리를 깊숙이 내리고
어려움을 잘 견디어 몸을 보존하는 것이 참의 길이다."
(壯子 繕性篇)
상황이 어려울수록 믿음의 자리에 서서 몸과 마음을 지키고 소박한 삶을 사는 것이 이 시대를 견디어나가는 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