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요한복음서와 요한 서신들의 神學

■요한의 역사적 위치

1. 공관서와의 관계

요한복음서의 역사적 자리를 규정하기 위해 공관복음서를 비교하는 것은 그 양식과 주제에 한정한다면 의미가 있다. 요한이 다른 공관서를 알고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확실치 않다. 그러나 그는 개작된 전통, 예수의 말이나 이적 사화들이나 수난사화가 개작된 전통을 알고 있었음은 분명하다. 요한에게는 긴 예수의 담론 또는 많은 대화가 등장하는데, 이 대화를 위해 이적 외에 이중의미적 진술들과 개념들이 촉진력을 제공한다. 이 때 등장하는 말들은 특정한 주제에 관한 관련성 있는 논술들이다. 예수상에서는 요한의 예수는 오직 신이 보낸 계시자로서 자신의 인물됨을 증거한다. 그는 자신의 옴과 감, 세상에 온 목적을 말한다. 그는 자신의 인물됨에 대한 불신앙과 싸운다. 수난사도 완전히 개작되었고 마지막 만찬도 유월절 만찬이 아니다. 요한복음서에 반영되고 있는 공동체의 모습은 완전히 회당과의 관계를 청산하고 있으며 유대인들은 예수에 대한 신앙을 거절하는 세상 전체의 대표자로서 보여졌다.

2. 바울과의 관계

요한의 바울에 대한 관계는 초대 교회 신학의 직선적인 발전 도식에 의해 이루어질 수 없다. 물론 이 둘사이에는 영지주의적 영향이라든지 용어에서의 유사점을 찾을 수는 있으나 그러나 유사점보다는 차이점이 더 강한 것이 사실이다. 특별히 요한에게는 바울의 구원은사의 표지로서의 신의 의 개념이 등장하지 않으며 구원사적 관점들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분명한 것은 요한이 바울 학파에 속하지 않고 바울의 영향을 받지도 않고 그는 독창적인 인물이며 신학적 사유상 다른 분위기에 서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독자성은 심오한 내용상의 유사성이 존속하는만큼 더욱 뚜렷하게 드러난다. 이 둘에서 종말론적 사건이 이미 현재에서 완수되는 것으로 이해된 점에서 유사하다. 또한 영지주의적 우주론적 이원론을 비신화화했다. 그리고 세계를 신의 창조로 이해하고 신 개념에는 심판과 은혜의 역설적 결합을 포함시켰다.

3. 요한의 특수성

요한복음서와 서신들의 필자나 기록시기에 대해서는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첫 세기중에 근동 그리스도교의 분위기를 포함하고 있음은 확실하다. 그가 사용한 계시의 담론들은 이원론적 기본 사상으로 표현되어 있어 헬레니즘계의 종교들과 영지주의적 영역들의 영향을 반영하고 있다. 그가 사용한 구원의 개념은 진리와 생명으로 표현되어 있고 이것은 신의 나라와 신의 의라는 개념 대신 등장하고 있다. 이 세계에서 예수는 계시자로 등장하고 그 종말론적 사건은 파견자로서 아버지의 위임으로 말하는 그이 말에서 현재화한다. 요한에게서는 수육한 로고스가 그의 영광을 그이 지상의 활동에서 나타낸다. 그러므로 그의 예수의 모습은 전적으로 영지주의의 구세주 신화가 제공한 양식들에 의해 우주론적인 주제가 결여된 채 그려졌다. 이때 그는 아버지와 굳게 맺어져 있으며 계속 그와 통일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그를 이해하는 자들은 그의 사람들 뿐이다. 그는 온대로 떠나지만 그의 떠남은 그의 구원의 일에 속한다. 이 특징은 예수의 말과 담론들을 분명하게 부각시킨다. 즉 담론과 말들에서 반영되는 이중성과 오해의 여지가 많은 표현은 계시자와 세계가 서로를 이해할 수 없다는 이원론적 기본 사상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A. 요한의 二元論

42) 세계와 인간

1. 세계의 본질

요한의 선포는 신이 세상을 사랑하므로 그의 독생자인 아들을 보내되 세상을 구원하기 위함이었다는 소식을 전하는데 있다. 세상은 신에 대한 철저한 대립으로 세상은 묵시문학적 종말론에서 생긴 용어 '이세상'으로 특징지어졌다. 이 경우에 중요하게 문제된 것은 본질의 대립이다. 세상의 본질은 어두음이며 거짓이다. 또한 그것은 노예성에 들어있는 존재이며 죽음이며 특히 생명에 대해 적대성을 가진 것이다. 그러나 세상은 오히려 그의 근원을 신의 창조에 두고 있다. 창조에서 신은 자신을 계시하였다.

2. 빛과 어두움등의 개념들

영지주의적 이원론에서 생긴 개념들 즉 빛과 어두움, 진리와 거짓, 자유와 노예됨,생명과 죽음등은 창조 사상에 의해 비로서 그 특정한 요한적 의미를 얻는다. 빛은 성결이며 세상의 빛은 현존의 밝아짐으로 인간의 자기이해의 조건이 된다. 그러므로 어두음은 인간의 가능성을 막아서 창조주의 영광을 가로채는 것으로 등장한다. 그러므로 세상은 어두움에 있으면서 동시에 신에게 반항하고 창조자에게서 독립한다. 이것은 분명한 속임이다. 즉 신과 진리에 대한 반항으로서의 자기 이해이다. 진리는 계시된 신 자신의 실재이며 생명은 신과 그를 분명하게 하는 자에 대해 열려짐을 뜻한다. 신에 대해 반항하면서도 세상은 여전히 신의 창조이다. 인간은 자신의 근원에 의해 규정되어 있어 신 또는 실재에서 실존할 수 없으면 세상과 비실재에서 살 수 밖에 없다. 그의 목표도 그의 군원에 의해 규정되었다. 빛과 진리, 생명, 자유라는 개념들은 서로를 설명한다. 그 반대도 같다. 그것들은 인간의 실존에 대한 물음에 의해 그 의미를 가지고 인간 실존의 이중 가능성을 표시한다. 인간은 예수에게서 나타난 신의 계시를 통해 이 결단 앞에 새로 세워진다. 영지주의의 우주 생성론적 이원론은 요한에게서 결단의 이원론이 된 것이다.

43) 요한의 결정론

1. 인류의 이분

이원론, 특히 인류의 이분은 영지주의적인 것으로 각기 고유한 성품에 의해 처음부터 본질과 운명적으로 규정되어 있는 것 같은 인상을 준다. 그러나 믿음의 예수 요구는 모든 사람을 향한 것이다. 예수의 말들은 초대이며 결단에의 초대인 것이다. 아버지가 이끄는 것은 신앙 결단 후에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결단 안에서 자신의 안전성과 자기 주장을 포기하는 일로서 수행된다. 바울에게서와 같이 믿는 자는 자신의 안전을 자기 안에 결코 두지 않고 언제나 신에게만 둔다.

2. 인간의 존재

모든 인간이 비실재에 의해 규정되어 있다는 죄의 일반성은 신비적 근거에 소급되지 않고 단순한 사실로서 증명된다. 세상에 빛이 옴으로 인간에게는 그의 어두움에서 탈출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린다. 인간은 신앙의 결단으로서 그의 출처를 분명히 드러내게 되는 것이다. 의를 행하고 형제를 사랑하는지의 여부가 신의 자녀와 악마의 자녀를 나눈다. 계시자에 대한 반항으로 세계는 결정적으로 악의 세상이 되었고 세상과 그 지배자는 심판을 받았다.

44) 창조의 전도: 세상

1. 진리의 개념

세계는 그들의 반항에서도 창조임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사실은 인간의 삶이 실재, 즉 생명에 대한 물음으로 일관되어 있다는 점에서 드러난다. 요한은 이것을 "참" 에 관해 말하는 귀절들로 표현한다. "나는...이다."는 "생명", "충족"(모든 욕구를 결정적으로 만족시켜 주는 충족)에 관한 인간의 물음에 대한 대답이다. 이것은 생명을 선사하는 자를 신뢰하고 있다는 공개된 또는 숨겨진 인간의 지식을 전제한다.

2. 역행하는 창조로서의 세상

독립하려는데서 자란 광신은 진리를 거짓으로, 창조를 "이 세상"으로 바꾸어 놓았다. 그들의 광신에서 사람들은 생명을 찾는 물음이 자기 자체를 찾는 물음으로 바뀌어 그들의 피조성을 유지하는 데 이르지 않고 오히려 스스로 대답하므로 그들의 안정성을 얻으려 했다. 그들은 그들의 종교로 안전함을 얻었다고 생각하면서 동시에 이 지식을 顚倒시킨다.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그를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자들이다. 그러므로 바른 신 예배는 종말적인 사건인데 이것은 그의 영 자신에 의해 작용되고 계시자의 옴으로 실현되는 것이다.

요한은 유대종교의 예를 들어 인간의 안전하려는 의지가 얼마나 신에 관한 지식을 왜곡시켰고 신의 요구와 언약을 어떻게 소유로 만들었으며 그렇게 하므로 신을 소외시켰는가를 분명하게 했다.

B. 세상의 심판

45) 아들의 보냄

1. 아들의 옴과 감

죽음의 이세상에 생명이 나타났다. 신의 아들이 세상에 옴으로써 그러했었다. 신화적 양식으로 예수가 선재적인 아들로서 인간이 되었다고 말하는 이런 진술들이 어느 정도 실제로 신화적인 의미에서 이해될 수 있는가? 분명한 것은 예수라는 인물에 의해 피안적인 신적인 실재가 지상세계의 영역에서 들을수 있고 볼 수 있으며 잡을 수 있게 되었다. 그의 출연은 보내진 존재, 온 존재로 파악되어야 한다. 그가 신의 실재의 계시로서 세상에 오는 일의 성격은 그의 옴에 그의 감이 연결됨으로 강조되었다. 그가 지상에 머무는 기간은 극히 짧다. 그가 하늘로부터 내려온 것같이 그는 이전에 있던 곳으로 다시 올라갈 것이다. 그의 옴과 감은 그가 계시자로서 활동하는데 통일적으로 속한다. 그것은 그의 옴과 감이 마찬가지로 심판으로 표시될 수 있다는 데서 나타나는 것과 같다.

2. 구원을 가져온 자로서의 아들

아들의 보냄은 신의 사랑의 행위이다.(요 3:16) 그러므로 예수를 신이보낸 아들로 믿는 자들에게서 이 보냄의 의미가 이루어진다. 즉 그들은 신의 사랑을 받는다. 신의 사랑이 아들을 보낸 근거라는 사실은 그가보내진 또는 온 목적을 제시하는 방식으로 표현되었다. 그는 오로지 "진리" 를 증거하기 위해 세상에 왔다. 신이 그를 준 것은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하려는 것이다(3:16). 그러므로 예수는 "세상의 구주"라고 칭할 수 있다. 그가 이로써 구원을 가져오는 자에 대한, 특별히 헬레니즘적 칭호를 얻었다면, 그의 보냄의 의미는 유대교 및 초대 그리스도교 전통에서 유래한 칭호에 의해 더 자주 표현되었다. 물론 "주"칭호는 거의 볼 수 없다. 예수는 메시아 즉 그리스도이다. 그가 그렇게 일컬어질 수 있는가는 여전히 유대인들 중에서 화제가 되었다. 반면 그것은 믿는 자들의 고백이다. 왕의 칭호로서의 메시야 칭호의 옛 의미는 그것과의 교체에서 "이스라엘의 왕"이 나타난 것으로 고수되었다. 그리고 이 칭호가 "신의 아들"에 의해 설명된 것은 이것도 우선은 옛 메시야의 의미를 가지고 있음이 분명하다. "人子"칭호는 유대교및 초대 그리스도교 전통에서 나온것이다. 즉 그는 예수가 세계 심판자라는 근거를 "人子"라는 데서 보았다.

3. 종말론적 사건으로서의 아들의 오고 감.

위의 모든 칭호에서 표현된 것은 예수가 종말론적 구원의 지참자이며 그의 옴이 종말론적 사건이라는 것이다. 그의 옴을 통해 모세와 예언자들의 예언이 이루어 졌다. 그의 오고 감이 사실 한 가지를 말하는바(참조. 위에 1) 종말론적 사건이라는 것은, 역시 무엇보다도 그의 옴 또는 그의 감이 세상의 심판으로 표시된 귀절에서 표현되었다. 이미 바울에 의해 시작된 종말론의 역사화가 요한에 의해 철저히 관철되었다. 그는 심판과 가려냄의 이중 의미로 이해했다. 예수와의 해후에서 신앙과 불신앙의 사이, 보는 자 와 보지 못하는 자 사이의 가려냄이 수행된다는 점에서 바로 심판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아버지는 그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면서 동시에 그는 죽은 자들을 일으켜 심판을 베풀 전권을 그에게 부여했다. 그러므로 심판은 극적인 우주적 사건이 아니라 그것은 오히려 사람들의 예수의 말에 대한 관계에서 일어난다. 그러므로 예수가 세상에 왔음을 뜻할 수 있는 것과 같이, 그것은 신이 그를 심판하러 보내지 않고 구원하기 위해 보냄을 뜻할 수도 있다. 사실 심판자는 그가 아니라 그가 하는 말이다. 그의 말에 의해 수행되는 "심판"이 6장 60-70절에 구체적인 장면으로 묘사되었다. 종말론의 역사화는 세상이 전혀 무엇이 일어났는지를 알지 못한다는 점에서도 표현되었다. 세상의 눈에는 오로지 방해 즉 당파들을 야기시키는 격동이 있을 뿐이다. 그것들에서 결단과 분리가 반영되고 있음을 세상은 알지 못한다. 이 점에서 무섭게도 드러나는 것은 세상이 심판을 받고 있다는 것이다. 수난의 시간이 세상을 위해 승리, 기쁨의 시간 이지만, 그러나 그것은 사실 세상의 심판이고 그 "지배자"에 대한 심판이다.

46).'말이 육신이 되었다' 는 거리낌

1. 인간으로서의 신의 아들

신의 아들이 세상에 오는일은 어떤 방식으로 일어나는가? 그는 인간으로 온다. 요한복음의 전체 주제는 "말이 육신이 되었다"(1:14)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육신으로 온것을 고백하지 않는 자, 예수를(즉 인간을 신의 아들로) 고백하지 않는 자는 모두 "신에게서" 나지 않았다. 요한이 예수의 모습과 활동의 상을 위해 영지주의적 구속자신화의 양식을 이용했기 때문에 바로 영지주의를 한정시키는 일은 그에게 긴급한 과제였다.

우선 분명한 것은 신의 아들의 인성이 그에게 있어서 영지주의에서처럼 우주적 현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현상은 종말론적 사건(구원 사건)을 자연과정으로 일으키고 이를 통해 그 본질상 대립적인 빛과 어두움의 결합이 풀린다는 것이다. 요한은 "자연" 에 대한 영지주의적 개념을 배제했다. 요한에게 있어서 신의 아들의 인성은, 우주 생성론적이고 인간학적인 교설의 형태로 사람들에게 "영지"를 전달하며 그들에게 신비스러운 들과 헌신례를 제공함으로, 그것들에 힘입어 그들의 자아가 안전하게 하 는 여행을 치를 수 있도록 해 주기 위해 창시된 기구도 아니다. 계시자는 인간자체, 특정한 한 역사적 인간 즉 나사렛 예수로서 나타났다. 그러므로 요한은 선재자가 세상에 들어오는 이적적 방식과 인간 예수와의 그의 결합 방법에 관한 이론을 모른다.

계시자는 교훈들과 헌신례들을 전하는 말의 전달자로도 나타나지 않는다. 그 인물은 단지 수단으로 이용될 수 없고, "영지"를 받은 자에게는 불필요한 자가 될 수 없다. 그가 전한 것은 마찬가지로 세계 성립과 영의 운명에 관한 가르침들도 아니다. 그는 어떤 무엇을 중개하지 않고 자신에게로 불렀다. 또는 그가 은사를 약속하면 그 은사는 그 자신이다. 인성된 신의 아들 예수는 참 인간이다. 사실 신적인 것은 오로지 올리운, 승화된 인간적인 것으로서만 생각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요한에 의하면 인간적인 것에 정면으로 반대되는 것이다. 말이 육신이 되었다는 것은 역시 충돌이다.

2. 신적 인간으로서의 예수

예수는 "신적인 사람"으로서 그를 만나는 자들의 내력을 안 자이다. 이 상들은 믿는 자사 신에게 자세히 알려져 있음을 안다는 것, 계시자와의 에서 그 자신의 실존이 노출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는 신의 계시에 직면하여 신에 대한 인간의 저항이 드러남을 안다. 예수의 全知는 제자들에 의해 그에게 확인되었다. 그 이유는 그가 그들에게 기적적인 지식으로 자신을 과신했기 때문이 아니라 지금 고별하면서 "솔직히" "수수께끼"없이 말했기 때문이다. 이전에 말한 것이 지금 새로운 빛에 비추어졌다. 그것은 예수의 고별에 직면하여 잠정적인 것으로 나타난바, 그것의 결정적 드러남, 즉 그것의 참 이해는 미래에 비로소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16:12-18, 특히 25-26절). 그를 계시자로 인식한 자는 한 가지를 알면서 모든것을 안다. 그리고 예수의 약속은 성취되었다. "그날에 너희가 내게 아무것도 묻지 않을 것이다. 예수의 異蹟的인 知識은 반성 없이 전통 계열에 따라 나사로의 史話에서 언급되었다. 신앙에는 보장이 없다. 그리고 공동체는, 그 한가운데서도 악마는 그의 일거리를 발견한다는 꺼리낌을 극복해야한다. 제자의 도피와 공동체의 박해에 관한 예언도 이에 일치시켜 해석될 수 있다. 즉 이 예언은 계시의 본질에 대한 통찰의 결과인 先行知이다.

3. 이적

예수는 이적 행하는 자로서 활동한다.그의 이적들은 "표적들"이다. 는 예수의 "영광"을 계시한다. 예수의 이적들은 "표적들"로서 이중적이다. 그것들은 예수의 말들과 같이 오해될 수 있다. 그것들은 계시가 세상적인 사건이 아니라 초세계적인 사건임을 지시한다. 그것들은 상들이고 상징들이다. 포도주 이적의 는 예수의 전 활동에서 수행되는 것의 상징이다. 이적적인 현상들로서의 "표적"이 예수에 관한 증명도 합법화도 아니라는 사실은 이미 6장 26,30절(참조. 위에)이 보여 주었다.그 全 서술은 오히려 이적들이 표지로서 이해되지 않으면 거리끼는 것임을 보여준다. 많은 사람들에게 이적들이 예수를 주목하는 신앙의 시작을 위한 첫 동기가 되었을지라도 백성의 지도자들, 세상의 대표자들에게 있어서는 그것들은 살해결의를 서둘게하는 촉진제였다(11:47; 비교.12:28 f.)

4. 오해

이적들이 이해시키는 표적들이기 때문에 바로 그것들은 오해의 가능성도 제공한다. 무리는 계시의 작용방법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은 계시가 세상의 입장을 위해서는 언제나 반드시 숨은 것임과 그럼에도 공공연하게 숨은 일상성에서 일어난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이 이해되지 않는 것은 예수의 행위전체에 해당한다. 예수의 행위들과 마찬가지로 그의 말들도 오해를 받았다. 세상의 사유의 범주들에 의존하는 한 바로 파악되지 않는다. 무리의 몰이해는 상징적으로 표현되었다. 이 모든 것에 "말이 육신이 되었다"의 거리낌이 부각되어 있다. 이 거리낌은 계시자가 신의 아들이라는 자신의 주장을 세상 앞에 증명하지 못하는, 아니 증명해서는 안되는 한 인간으로 나타나는 거리낌이다. 계시는 사실 세상에 대한 심판이기 때문이다. 그의 말을 삶들은 이해하지 못한다. 그가 순수한 인간이 아니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단순한 인간으로서 자신이 계시자라는 주장을 믿을 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말씀이 육신이 됨의 거리낌은 예수의 요구에 대한 직접적인 반항에서 가장 분명하게 나타난다. 그와 아버지가 일체라는 그의 주장은 청중을 광분시켜 그들이 다시 그를 돌로 치려고 하게 했다. 자신의 요구에 대한 그의 집요성은 그의 제자들도 소수의 사람을 제외하고 그에게서 떨어져 나가게 했다. 십자가의 표징에서 예수의 요구의 역설과 거리낌은 비길 데 없이 엄청난 상으로 서술되었다.

5. 메시야의 비밀

우리는 요한이 사람이 된 신의 아들로서의 예수의 활동을 서술함으로 마가복음서의 메시야 비밀에 관한 그 이론을 특유한 방식으로 발전심화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는 세상을 위해 모든 솔직함에 숨어 있는 메시야이기 때문이다. 그가 무엇을 숨기거나 비밀을 명하기 때문이 아니라 세상은 보이는 눈으로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의 숨겨짐은 바로 그의 자기 계시의 결과이다. 바로 이것이 보는 자를 소경으로 만든다. 계시는 거리낌과 마찬가지로 그의 행동 전체이다. 이것은 그의 옴과 감에 의해 이루어진 통일성이다. 예수의 보냄의 의미는 수난에서 이루어졌다. 그리고 수난이 아버지에 의해 위임된 일의 성취로 파악되고 받아들여지면서 동시에 그것은 올리움과 영화롭게 되는 시간이 되었다. 이 완성으로 볼 때 인간 에수의 전 활동은 영과의 계시이며 예수의 메시야적 생애가 과정의 내적 내용상의 정당성이 분명하게 되었다. 신의 아들이 세상을 고별하는 시간인 지금과 어느정도 과거와 미래가 서로 결합되었다. 그리고 미래가 과거를 그것됨으로 즉 영광의 계시로 만들었기 때문에 제자들은 예수의 고별을 기뻐해야 한다. 예수의 지상 삶은 역사적 과거의 일부가 아니라 언제나 현재에 머문다. 예수의 역사적 모습, 그의 인간 역사에는 자신과 동시에 신의 영광이 곧 계시라는 의미가 들어있다. 그것은 종말론적 사건이다. 그러나 믿는 자들은 지금은 예수의 지상 생활을 회고하면서 말할 수 있다. "우리는 그의 영광을 보았다"(1:14).

47) 영광의 계시

1. 역설

인간 예수의 인물됨에서 만나는 자는 신 자신이다. 아들로서의 예수와 아버지로서의 신의 이 통일성은 계속 새로운 표현들로 강조되었다. 말의종교의 말투도 이 통일성을 묘사하는데 이바지 했다. 신과의 만남은 예수의 활동에 부鞹치고 그의 말을 들을 수 있는 사람의 개방성에 대해서만 만나진다. 그 말을 외면하는 자도 예수 안에서 심판으로 신을 만나게 된다. 이것은 계시사상의 역설이며 바울에게서 드러나는 예수의 인간적 모습과 그의 활동, 운명에서 일어나는 계시의 이해와는 다르다. 요한은 예수 안에서 신이 외견상 모순된 방식으로 만난다는 사실을 논술하였다. 또한 예수는 스스로를 자신의 권위가 아닌 아버지의 보냄을 받아 온 자로 묘사하고 있다. 이 소극적인 표현들은 예수의 겸손을 드러내기 보다는 그의 권위가 신의 말들을 말하는 한 인간의 역설적 권위에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즉 계시사상이 명백히 논술되도록 하려는 것이다.

2. 예수의 일들

예수가 아버지의 부탁을 받고 행한 그 일들이란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구원 사건이다. 바울에 의하면 그리스도의 人成도 구원 사건에 속하는데 이것이 요한에게는 결정적인 구원사건이고 죽음이 이 사건에 예속되었다. 그리고 인성은 신의 아들의 옴으로서 그의 감인 죽음과 통일성을 이룬다. 그의 죽음은 또한 한 편으로 순종의 완성이면서 다른한편에서 예수 그의 임무에서의 해방이다. 즉 요한이 말하는 십자가에 달림은 처음부터 올리움에 해당하는데 이것도 특유한 이중의미를 가지고 있다. 죽음 안에서 예수 자신이 계시자로서 행동한다. 그래서 요한은 죽음 이외의 고난을 말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요한의 수난설화는 예수를 행하는 자, 승리자로서 보여준다. 그러므로 예수의 죽음을 죄를 위한 속죄제물로 보는 그리스도교 공통의 해석은 요한의 견해에 일치하지 않는다. 요한의 특징적인 것은 요한이 주의 만찬, 속죄사상이 포함된 주의 만찬의 성립을 전하지 않는다는데 있다. 요한에게는 예수의 죽음이 그의 활동의 완성으로 이해되며 그 활동 전체가 제물이지 그의 죽음만이 그렇지는 않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의 죽음은 특별한 일이 아니라 예수의 전체 활동과 함께 그것의 완성으로 이해되었다.

3. 부활

예수의 부활은 십자가의 죽음이 이미 예수의 올리움과 영화롭게 됨이라면 특별한 의미의 사건일 수 없다. 예수는 사실 그의 살리는 힘을 부활에 의해 비로소 얻지 않고 아버지가 그에게 처음부터 준 것이다. 그러므로 요한의 경우에 예수의 말들에는 공관복음서에서와 마찬가지로 그가 부활한다 또는 일으켜진다 등에 관한 예언이 없다. 복음서 기자가 전통을 따르면서 부활사화를 전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며 문제는 그것들이 그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에 있다. 그것들이 현실적인 사건인 한 그것들은 결국 없어도 된다. 부활사건은 사람들의 약함을 위해 허락되었다는 점에서 다른 이적들과 동일하기 때문이다. 복음서 기자는 부활신앙의 표지들, 구상들, 고백들 이상으로 분명한 것을 요구하는데 경고와 함께 이 사건이 외적이 아닌 내적인 사건임을 기록하고 있다. 즉 그것은 인간에게서 거리낌이 극복되고 신앙이 드러나면서 동시에 예수가 얻는 승리인 것이다. 도래가 요한에게 있어서 임박한 극적인 우주적 사건이라는 것은 자명한 바, 그것은 이미 예수의 옴이 심판이 遁때문이다. 그러나 요한에게는 인자가 그의 아버지의 영광으로 하늘의 구름을 타고 온다는 등에 관한 도래 예언들은 없다.

4. 성례들

요한의 경우 구원사건들이 전통적인 의미에서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한다는 사실, 그리고 전 구원사건 즉 예수의 인성과 죽음, 부활, 성령강림, 도래등의 한 사건, 곧 신의 진리가 인간 예수의 지상 활동에서 계시되고 신앙에서 그 거리낌이 극복되는 한 사건에 종합되었다는 사실에 일치하면서 성례들도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한다. 물론 요한도 세례를 교회의 관습으로 전제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 예식 자체에 의미를 두지는 않았다. 주의 만찬에 대한 보도에서 요한은 주의 만찬의 창시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전하지 않고 그는 오히려 예수의 고별 기도로 그것을 대치했다. 그러므로 요한은 직접 성례들에 공격한 것은 아니나 비판적으로 아니면 적어도 삼가하면서 그것을 대했다.

48) 말로서의 계시

1. 일과 말

예수가 완성하고 그를 위해 증언하는 일들은 어떤 것인가? 그것은 일종의 말 "보이는 말"이다. 오로지 이렇게만 예수의 활동을 회고하면서, 이것들 전체가 표적들을 행함으로서 묘사될 수 있다. 실제로 에수의 일들은 그의 말들이다. 일과 말들의 동일성은 또 말의 작영에 관해 말하는 것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즉 그의 말은 생명을 제공한다. 그리고 그의 말이 진리를 인식하게 하고 동시에 자유에 인도한다는 것도 물론 다른 것을 의미할 수 없다. 그의 말은 깨끗하게 하고 거룩하게 한다. 이것으로써 말은 물론 동시에 불신앙에 대한 심판자이다.

2. 말들의 내용

예수의 말 또는 말들의 내용은 그가 아버지에게서 본 것 또는 들은 것을 말한다. 그리고 그 주제는 언제나 한 가지분이다. 즉 그것은 아버지가 그를 보냈다는 것, 그가 진리등의 증인으로서 왔다는 것, 그리고 사람들은 그를 믿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분명한 것은 신화적 진술들이 그것들의 신화적 의미를 상실했다는 것이다. 그의 말은 인간의 관찰과 사유의 영역에서 생기지 않고 피안에서 온 것이다. 그것은 모든 인간의 동기에서 벗어나서 결정된 말이다. 예수가 스스로는 아무것도 행하지도 말하지도 않는다는 저 확증들, 인간의 말들이면서 역시 인간의 말들이 아닌 예수와 그 말들의 권위도 날카롭게 하려는 귀절들도 같은 것을 말한다. 즉 예수의 말들은 그때마다 영감陘 않고 그는 항상 신과 하나가 되어 말하고 행위한다. 그의 인간됨과의 해후에 의해 인간은 그의 인간적 상황의 전반과 함께 결단 앞에 세워진다. 예수를 통해 신의 계시는 세상에 단번에 주어졌다. 그리고 그것들은 말들이며 동시에 일들이다. 예수의 행위는 담론이며 그의 담론은 행위이다. 그러므로 예수의 말들은 거의 모두가 자기 진술들이다. 그는 심판자이며 그의 말은 심판하는 말이다. 예수는 보충없이 절대적으로 "나는 ...이다"를 말할 수 있으며 이때의 나는 주어가 아닌 서술어로 쓰여 예수를 증언하고 있음이다.

3. 계시자

결국 에수는 신의 계시자로서 그 자신이 계시자라는 것 외에 아무것도 계시하지 않았다. 요한의 표현수단들인 영지주의 신화와 그 언어는 결국 계시자가 왔다가 갔다는 것 이외의 어떤 다른 것에도 존속하지 않는다는 것을 표현하는데 만족했다. 요한은 신비주의자가 아니므로 영의 훈명과 영의 체험에 대한 어떤 관심도 없었다. 단지 그는 계시를 모든 인간의 자기 주장과 모든 인간의 척도들, 가치 평가들을 흔들어 놓고 부정하는 것으로 명시되고 있다. 바로 이런 부정에서 생명과 참 실재에 대한 인간의 동경의 긍정과 성취가 이루어진다. 오직 신앙만이 이것이야말로 계시임을 알 수 있다. 신의 뜻은 오직 신앙만을 요구한다. 그러므로 계시자는 특정한 역사적 인가, 나사렛 예수일 뿐이다. 구체적인 모습으로서의 예수를 만날 수 밖에 없다. 게시가 계시로서 신앙에서 계시되기 때문에 계시의 의미는 어느 움직임이 신앙에서 수행되는가를 다룸으로 더 분명하여질 수 있다.

C. 信仰

49) 말을 들음으로서의 신앙

1. 들음과 봄으로서의 신앙

요한복음서와 요한 1서를 일관하고 있는 것은 믿으라는 요구와 믿는 자를 위한 약속이다. 구상적인 화법들도 같은 것을 말한다. 그와 그의 말이 동일하기 때문에 그의 말들도 싱앙의 대상으로 일컬어질 수 있다. 그리고 말들과 도일한 "일들"도 마찬가지이다. 선포자와 선포된자의 통일성은 이 언어 용법에서 분명해졌다. 그에 대한 신앙이 들음에서 온다는 거스 아니 그것이 들음 자체라는 것은 말과 그 인물이동일한 데 일치 한다. 그것이 순수한 들음 즉 단순한 청취가 아니라 ,"들음 과 배움"또는 "들음과 행함" 인 한 그렇다. 신앙과 들음,봄의 병행성 및 동일성은 이미 그 봄이 가령 신비적 관조가 아님을 보여준다.그것은 역사적 인물 예수에게서 "진리"와 "생명"을 알아 보는 신앙의 지각이고 이 진리와 생명은 오로지 그를 통해서만 중개되고 그러므로 직접적인 관조에서 지각되는 것이 아니다. 이" 우리가 본다"는 역사적 추궁의 의미에서의 "목격"을 표시하지 않는다. "보다"의 주어는 믿는 동시대인 뿐 아니라 영원히 그런자로 남는 다. 또 계시는 어떤 사상 내용에 존속되는 것이 아니다. 그 까닭에 믿는 동시대인의 역할은 그들이 목격한 것으로 계속되는 세대들의 신앙에 안전성의 보장을 제공하는 데 있지않고 그들에게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거리낌을 전달하는데 있다.

2. 인식

그봄은 신앙에 고유한 인식이다. 그러므로 "보다"와 "알다"는 서로 결합될 수도 교체될 수도 있다. 신앙은 인식하는 신앙일 때에만 참 신앙이다. 참 신앙은 외견상의 신앙과 혼돈되어서는 안된다.분명한 것은 신앙과 인식이 그 대상에 관계된 한 구별될 수 없다는 것이다.예수가 아버지에게서 왔다는 것이 믿어지는 것은 ,그의 가르침이 아버지에게서 났다는 것이 인식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완전한 의미에서의 신앙과 인식이 두 다른 행위 또는 단계들이 아니라는 것은 그 서열이 도치될 수도 있다는데서 드러난다. 신앙은 어떤 교리의 수용이 아니다. 이 수용에 이어 밀의의 인식들이 따르게 하는 신앙이 아니며 오히려 전쳬로서의 신앙이다.

50) 종말론적 실재로서의 신앙

1. 비세계화로서의 신앙

신앙의 유일성은 요한에게는 자명하다. 요한은 구원자체에 대한 문제를 토론한다. 그는 생명에 대한 인간의 욕구를 문제삼고 생명에 대한 잘못된 이해에 도전한다. 세상은 생명을 요구하고 그것을 안다고도, 그것을 발견하거나 가지고 있다고까지 주장한다. 그러므로 신앙의 요구는 세상 자체의 척도들과 판단들, 지금까지의 자기이해를 포기하라는 요구이다. 또한 거리낌의 극복이다. 신앙은 인간이 자신의 안전에 흔들리고 세상에서 방황하다가 세상에서 돌아서서 사변적인 사유 또는 경건한 침묵으로 피안의 세계에 올라가려는데서 생긴다. 그러나 신앙은 세계 도피와 금욕이 아니라 인간의 모든 척도들과 평가들의 파괴로서의 비세계화이다. 그러므로 신앙은 세상에 반대하고 신을 위해 결단하는 것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2. 신앙의 안정성

신앙의 결단은 신에 의해 작용되었다. 그러나 신의 작용은 이 결단 이전에 또는 이 후에 수행되는 방식으로 수행되지 않고 바로 이 결단 안에서 수행된다. 목자에 관한 담론에는 계시자와 신자들이 서로 안다는 상으로 신앙의 안전성이 서술되었다. 신앙의 안전성은 동시에 주관적이고 객관적인 것이다. 이 안전성은 신앙에 들어있는 속성이다. 그것은 단순한 들음과 순종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앙은 자체의 안정성을 그가 믿는 대상 안에 두고 있다. 이것은 객관적인 안정성을 표시하며 이 때문에 모든 피안전성과 엄격히 구별되어야 한다. 신앙의 안전성은 오로지 들음이고 내세계적 경험이 될 수 없으며 바로 그 때문에 요지부동한 것이다.

3. 종말론적 실존

거리낌의 극복이고 세상에 대립하는 결단으로서 신앙은 비세계화이며 종말론적 실존으로 넘어가는 일이다. 믿는자들의 것이 된 영광은 그들의 신앙에 선사된 인식중에 있다. 통일적인 인식은 신앙에 약속된 진리의 인식 즉 신을 유일한 실재로 파악하고 세상의 실재를 가상으로 통찰하는 인식과 동일하다. 이 인식에 자유가 약속되었다. 이 자유는 곧 세상, 가상적 실재, 이것의 유혹과 공적인 적대성에서의 자유이다. 즉 세상에서의 자유는 죄에서의 자유이다. 이 자유는 신앙이 갖추어 가진 것이고 신앙은 사실 합리적 이유들에 의해 얻어진 항사 새로이 수행되어야 할 세상의 극복이다. 요한에게는 종말론적 관점들이 역할을 하지 못하고 종말론적 사건의 철저한 현재화에 역점을 두었다. 특유한 변증법을 보고 있다. 생명나무에 관한 담론은 직설법과 명령법의 변증법적 관계를 보여 준다.

4. 사랑의 계명

계명을 지킴은 소극적으로는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는 의미를 가진다. 즉 욕심에서 벗어나는 의미이다. 적극적으로는 신의 마음에 드는 일을 행하라는 의미를 가진다. 이 내용으로 직설법과 명령법의 내적 통일성이 분명해진다. 사랑을 받을 때 사랑의 의무가 생겨난다. 신앙과 사랑의 통일성은 요한일서의 주제이기도 하다. 신앙에서는 사랑의 행위로서의 모든 행위가 이미 앞서서 결정된 것이다. 바로 이 때문에 신앙은 사랑에서 세상에서의 그 자체의 자유를 보존한다. 그러므로 사랑의 계명은 종말론적 실존에서 실현된다는 의미에서 새계명이다.

5. 평화와 기쁨

종말론적 실존은 평화와 기쁨에 의해 표시되는데 이것은 전통적으로 종말론적인 구원을 의미한다. 세상에서 신자들이 당하는 것은 곤경뿐인데 오로지 신앙에서만이 그들은 평안을 가진다. 기쁨은 그의 사람들에게 그의 기쁨으로 선사된 것이다. 그리고 이것으로써 이것은 모든 세상의 기쁨과 구별된다. 종말론적 기쁨은 세상의 시련에 대항하여 얻어져야 하는 것이고 또 그 때문에 흔들리지 않는다. 가시적인 무엇에 대한 기쁨이 아닌 만큼 실존적인 의미를 가진다.

6. 계시자에 대한 관계

종말론적 실존은 믿는 자들의 존재가 계시자 안에 있는 존재로서 또는 그들의 상호 관계의 존재로서도 묘사되면서 서술되었다. 이것은 권고와 약속에서 나타난다. 예수와 그의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앎으로 표현하고 묵시문학적 언어로 재림과 재회를 약속한 것은 그들 사이의 신화적 관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탈취된 믿는 자들의 종말론적 실존이다. 이 실존은 오로지 신앙에서만 실현되고 예수 또는 신에 대한 직접적인 관계에서 실현되지 않는다. 계시자에 의해 신에 대한 관계가 믿는 자에게 중개된다면 그 관계는 기도의 관계가 된다. 이 기도는 종말론적 실존의 표현이다. 기도를 하는 것은 담대한 것이다. 이 담대함은 심판의 그 날에 신앙이 가질 신앙의 성분이기도 하다.

7. 영

종말론적 실존의 척도는 영의 소유이다. 이 영은 고별사에서 위로자로 불리워졌고 예수가 그의 사람들에게 약속한 것이다. 요한에게 있어 영은 이적 행위들과 기이하게 보이는 물리적 현상들을 일으키는 세력도 바울에게서와 같이 그리스도교적 삶의 힘도 규범도 아니고 공동체 안에서 일어나는 인식과 말 선포의 능력이다. 영의 작용은 모든 것을 가르치고 온전한 진리에 인도하는데 있다. 영은 오로지 예수가 말한 것을 회상할 뿐이며 예수를 증거한다. 영은 예수의 떠남과 함께 오는 예수를 대신하는 자이나 사실은 예수 그 자체이다. 그러므로 선포에서 계속 수행되어야 하는 것은 예수의 옴과 감에서 완수되는 종말론적 사건이며 선포에서의 영의 작용은 이 종말론적 사건이다.

8. 공동체

요한에게는 어떤 특수한 교회론적 관심, 제의나 기구에 관한 어떤 관심도 없다. 그러나 공동체에 대해서는 매우 생동적인 관심을 가진다. 요한에게서의 공동체는 불가시적인 교회로 생각되었다. 이 불가시적인 공동체는 서서히 가시적인 공동체로 제자들의 공동체에서 실현된다. 이 공동체는 이미 세상에서 벗어난 소극적인 존재로 표시되었다. 그것은 종말론적으로 존재하는 자들의 공동체이며 그들의 세상과 죄에서의 자유는 계시자로서의 예수에 대한 그들의 관계에 근거를 두고 있으며 이들은 신앙의 통일성을 가진다. 이 공동체는 말의 공동체이고 이것은 이 말로 살며 동시에 세상에 대한 임무를 지니고 있다. 이 공동체의 삶은 인식과 말 선포의 힘으로서의 영에 의해 움직인다.

제 3 부

古代 敎會를 向한 發展

I.교회 秩序의 성립과 첫 발전 단계

51) 종말론적 공동체와 교회의 질서

1. 솜과 하르낙의 토론

인간의 공동사회가 공동사회생활의 질서들이 없이 유지된 일은 역사에 없다. 그러므로 초대교회 공동체에서 서서히 질서들이 형성되었다는 것은 자명하다. 솜에 의하면 교회의 법은 교회의 본질에 상충된다. 이 법은 카리스마적인 인물들의 권위가 직책의 권위로서 이해됨과 함께 교회에 침투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교회의 타락이다. 하르낙은 이에 대해 초대 그리스도교에 처음부터 법의 성격을 지니고 필연적으로 법 질서들로 발전될 질서들이 있었다는 것과 그러한 질서들이 교회의 본질에 결코 상충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했다.

2. 공동체의 자명성

서로 상충되는 두 견해의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기 위해 역사적 현상으로서의 교회와 영의 지배에 의해 이끌어지는 종말론적 공동체로서의 교회 사이의 차이를 분명하게 만들어야 할 것이다. 하르낙은 교회를 역사적 현상으로 파악하고 솜은 그것을 그 자체의 자기이해에서 출발한다. 교회의 자기 이해가 실제상 결정적으로 중요한 동인이 된 것은 사실이다. 이 사실은 그리스도교를 헬레니즘 밀의종교 공동체들로부터 구별하는 공교회와의 개체 공동체들에 대한 관계가 그 본래의 근거를 경험적 소유성들 및 교류와 상호 부조들 또는 권력 주장등의 필연성들 중에 두지 않고 에클레시아의 자기이해, 즉 이에 따라 공교회가 개체 공동체에 우선한다는 자기이해에 두고 있다는데서 가장 분명하게 인식될 수 있다. 그러나 개체 공동체들의 질서성립도 종말론적인 영으로 치리되는 공동성으로서의 공동체의 자기 이해에 의해 규정되었다. 첫째로 이 자기이해에서 그리스도교 공동체들의 배타성이 결과로 따르는데 이것은 밀의 종교들과 다른 특별한 성격을 그리스도교 공동체들에게 제공한다는 것이고 둘째는 이 배타성이 세상에서의 탈피성을 뜻하는데도 그 삶의 훈련의 근원은 이 세상에 두고 결국 참회율의 완성을 보게 한다는 점이다. 제일 권위가 있는 인물은 카리스마를 받은 자이다. 이들은 말을 선포하는 자들이었다.

3. 영과 법

이 의미에서 법이 아니라 영의 지배로 구성되는 공동사회로서의 교회에 관한 솜의 파악은 타당하다. 법이 규제하는 것에서 구성하는 것으로 변하는 경우, 법질서가 그 공동체의 본질에 대립된다는 점에서도 솜은 옳다. 그러나 그는 규제하는 법질서가 영에 대립될 수 없고 영으로 만들어질 수도 없다는 사실을 잘못알고 있다. 영은 말의 선포 뿐 아니라 공동체들 안에서도 역사한다. 영은 교회 공동체 - 민주체제를 세운다. 그러므로 질서및 직책의 성립과 완성이 영에 대립되는 것으로 보는 것은 정당치 못하다. 교회법 자체의 성립은 다음 문제들에 의해 지배되었다. 1. 질서들의 유지가 언제부터 어떻게 형벌 규정들에 의해 보존되었는가? 2. 그 질서들을 세우고 그것들의 준수를 감시하는 법원들은 어떤 것이었는가? 그것은 공동체들이었는가? 또는 공동체의 위임에 의해서든지, 그의 권위에 근거를 주는 다른 권위에 의해서든지 그것은 개인이었는가? 질서들의 권위가 개인들에 의해 대표된다면 교회의 직책은 그렇게 성립된다.

52) 교회의 직책들

1. 장로들과 감독

팔레스틴 초대교회에서도 헬레니즘계의 초대 기독교에서도 처음에는 교회의 질서들과 직책들의 제한에 관한 반성이 없었다. 이것은 교회들의 종말론적인 의식에 근거한다. 그러나 두 공동체에 어떤 질서와 지도력이 필요했을 때 이것들은 아직 직책의 성격을 지니지 않은 권위적인 인물들에 의해 제공되었었다. 팔레스틴계의 공동체에는 베드로와 요한 주의 형제 야고보가 있었고 헬레니즘계의 공동체에는 물론 공동체들의 설립자들인 사도들이 있었다. 그러나 장로의 직책이 얼마안가서 팔레스틴 겨회에 나타났다. 또한 발전된 헬레니즘 세계의 그리스도교 공동체들에도 장로들이 공동체를 이끌었다는 사료들이 등장한다. 직책이 등장했다는 사실보다는 성립되는 직책의 성격을 분명히하는 것이 논할 가치가 있다.

2. 공동체의 직책자들과 카리스마를 받은 자들

공동체의 직책자들과 카리스마를 받은 인물들 사이의 차이는 무엇인가? 우선 카리스마를 받은 이들은 말의 선포자는 아니었다. 실제로 교회를 구성하는 말 선포의 활동이 처음에는 직책에 결부되어 있지 않았다는 점에서 교회가 처음에는 교회를 구성하는 직책과 법을 알지 못했다는 사실이 분명하다. 즉 장로들과 감독들, 공동체 직책들의 기구는 교회를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 생활의 실천을 규제하는 것이다.

3. 사도직에서 교회의 직책으로

발전이 개속되어 카리스마를 받은 자들이 말의 선포자인 한 에서 점점 직책자들로 반면 말의 선포는 직채 또는 직책 의무로서 공동체 직책자들에게 위임되는데 이르렀다. 사도들은 부활한 주를 선포한다. 아니 그에게서 주 자신이 해후된다. 그러므로 부활한 주에 의해 파견된 선포자로서의 사도라는 개념은 권한 부여라는 사상에 의해 규정되었다. 이와함께 서서히 전통 사상이 우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원래 모든 선교자들에게 적용되던 사도라는 칭호가 12인에게 한정된 것은 사도들이 교회전통의 보증인들에 해당했다는데 대한 분명한 표지이다. 그리고 사도직은 전체 교회 조직의 관점에서 보여지고 한 직책으로서 파악되었다. 어쨋든 직책 - 카리스마는 무엇보다도 가르치는 일에서 역사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4. 사제직과 신의 법

공동체 직제의 완성에 작용한 것은 감독들이 예배의 집행자가 된 것이다. 이것은 말과 나란히 또는 말 대신에 성례가 교회를 구성하는것에 해당할 수록 더 중요했다. 종말론적 의식이 성례주의에 의해 빛을 잃었고 예배를 주도하고 성례를 관장하는 감독은 사제가 되었는데 그의 직책의 성격은 그에게 평민 단체로서의 일반적인 공동체에서 그를 분리시키는 자격을 제공하였다. 이것은 교회의 질서들이 전적으로 신의 법의 질서들이 되게 하고 교회는 구원의 기구가 되게 하는데까지 이끌어 갔다. 교회는 전체성을 주장하고 세속 법적 요구에 지배될 수 있는 세속적 생활 영역은 있을 수 없다. 몇 가지 더 숙고할 문제는 1. 법질서에 의한 생활의 규제가 형법들의 제정을 필요하게 했다는 점, 2. 강제성을 요구하는 법 질서의 성격상 교회는 국가와의 경쟁에 휩싸이고 교회의 강제권의 집행을 위해 국가를 대표로 파견한다는 이론이 발전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53) 교회의 자기 이해의 변천

1. 미래와의 관련성과 성례전주의

이 발전은 결국 교회의 자기이해의 변천이다. 기대된 도래의 인기 때문에 교회의 초월적 성격은 차츰 미래에 대한 교회의 연결에서보다 피안의 능력들을 이미 지금 중개하는 기구들에서 교회의 현재적 소유를 꾀하게 되었다. 물론 미래에 대한 관련성이 상실된 것은 아니나 그것도 특유하게 변형되었다. 우주적 종말극에 관한 전통적인 상은 계속 전승되었으나 그것은 개인의 미래의 생명에의 관심으로 전환陗갔다. 이에 일치하여 성례들의 의미는 그것들이 개인에게 미래의 삶을 위한 힘들을 중개한다는 점에서 보여졌다. 영은 이미 믿는 자들의 카리스마에서, 말과 행위에서, 행실과 수시로 사건을 일으키는 능력이 아니라, 제도중에, 특별히 제의 중에 입주해 있는 힘이다. 영은 직책을 받은 자들이 가지는 장비이며 평신도들은 그들의 중개에 의해서만 간접적으로 작용을 받게 되었다.

2. 종말론적 긴장의 연기

종말론적인 긴장이 중단되는 다른방식으로도 미래에 대한 관련성은 변형되었다. 그것은 종말론적 완성의 대망이 철저히 포기되지는 않았지만 그 희망의 실현을 무한정 멀리있는 시대로 미루어 놓은 것이다.

3. 종교로서의 그리스도교

그러므로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한 새로운 종교로 이해된 것은 당연하다. 누가복음서와 사도행전 필자의 서술은 그리스도교를 세계사적 산물로 파악하는데 성공했다. 그가 사도행전을 그의 복음서에 뒤따르게 한 것도 물론 그가 예수 전승에 대한 원래의 케리그마적 의미를 포기하고 그것을 역사화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종말론적 신앙의 경우 바울에게서도 세계의 역사는 끝에 도달했었다면 지금 사도행전의 파악에 따르면 구원사는 계속 진행된다. 그리스도는 우주적 사유에 의해 역사의 중심점과 전환점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II.가르침의 發展

54) 전승과 역사적 전통

1. 종교들 내부에서의 전통의 의미

그리스도교 교회는 말에 의해 부름을 받고 언제나 새롭게 구성되는 교회로서의 전통을 필요로 한다. 모든 종교가 전승을 필요로 한다면 전승은 역시 그리스도교에서도 특수한 역할을 할 뿐아니라 그것으로 특유한 성격도 얻었다. 이스라엘 유대 종교도 제의적 의식행위들과 예전의 전승과 생활을 규제하는 법조문들의 전승을 필요로 하였다. 이들에게 신은 역사의 신이고 그의 계시는 그 백성의 역사에서 완수되기 때문이다.

2. 그리스도교 전승의 특수성

헬레니즘계의 그리스도교에 제사 격식 언어들의 전승이 있었다는 것은 주의 만찬에 대한 기사가 보여준다. 그 전승은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 구원사건, 그의 죽음과 부활이 짧은 문장으로 종합된 것이다. 그리스도교의 격식문이 말하는 구원사건은 특유하게도 세계사적 사건들과 결합되어 있다. 역사적 전승은 지금은 이미 구약성서와 유대교에서 가졌던 의미를 가질 수 없게 되었다. 예수의 사건은 새로운 것이었고 종말적인 것이다. 그리스도는 사실 역사의 마지막이고 그가 이와 함께 구원사의 성취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구약성서는 그의 역사 보도와 함게 그리스도교 공동체에 의해 받아들여졌다. 그때 예수의 역사와 종말론적 공동체의 부름은 예언들의 성취로 나타났다.

3. 전승과 역사의 결합

역사적 사실들을 지칭하지 않고도 전승의 문장을 만드는 것은 가능했었다. 그러나 성서의 기록들은 그럼에도불구하고 한 역사적 인물 예수에 대해 말하는 것만이 의미가 있다고 증언하고 있다. 바울은 예수의 선재자로서의 자기비하와 희생의 면에서 그랬다면, 마태는 역사속에서 세계사를 마감한 신적인 임물로, 마가는 인간에게는 숨겨진 신의 아들로 그러나 부활을 통해 신의 아들로 현현된다는 신앙의 인식으로서 역사적 예수를 증언하고 있다.

4. 결합의 문제성

이러한 결합에는 문제성이 있다. 즉 종말론적 공동체로 자처하는 그리스도교 공동체이나 피안에서 오는 계시에 의하지 않고 예수의 역사적 모습에 의해 부름을 받았다는 데에서 문제성이 있는 것이다. 전승은 종말론적 사건과 역사적 사건을 동시에 말한다는 특별한 성격을 지니게 되었다. 누가문서는 이 역설을 오로지 세계사로서만 진행되는 구원사를 아는 역사신학으로 해소되었다면 다른데서는 케리그마로 인해 역사적 사건에 대한 관련이 포기됨으로서 해서되었다. 그리스도교적 영지주의는 구원자의 역사적 실재성을 포기하되 신의 아들과 역사적 예수와의 동일시를 거부함으로써 예수의 역사성과 신성을 결합하는 것을 포기했다. 그러나 요한은 이 역설의 의미를 종말론적 사건의 역사화에 대해 신앙에 대한 정당한 관심으로 표현함으로 명쾌한 결합을 시도, 성공하였다. 그러므로 전통은 역사적 사건의 연속성에 근거를 제공하는 역사적 전승이 아니라 예수가 영으로 현재하는 공동체의 설교이다.

55) 바른 가르침과 신약성서 정경의 성립에 관한 문제

1. 신앙과 인식

그리스도교의 선포는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나는 신의 행위에 관해 보도하면서 동시에 듣는 자에게 그 자신에 관한 새로은 인식을 제공한다. 이때의 인식은 신앙 안에 포함된 인식의 구조적 계기를 부각시켜준다. 믿는 자는 신과 그리스도에 관해 선포되는 것이 무엇이며 그것으로 자신의 상황이 어떻게 규정되는가를 이해해야 하며 신앙은 믿는 자가 그때마다 자신에게 요구된 것에 관한 바른 판단을 얻는다는 점에서 산 신앙으로 보존되어야 한다.

2. 그리스도교의 신학

케리그마적 격식문들에 기록된 구원사건인 하나의 지식과 지혜가 구별된다. 전승의 격식 언어들은 해석을 필요로 한다. 그 개념들과 문장들은 신학적이고 그리스도론적이고, 우주론적이며 인간학적인 어떤 결과들이 필요하며 어떠한 것들이 정당하냐는 질문을 유발한다. 그리스도교 신학의 근원은 여기에 있다. 이때 쓰이는 지혜는 그 근원을 신앙 안에 두고 있다. 이것은 카리스마이고 받은 자는 다른 자들과 나눠야 하는 것이다. 신학발전을 위한 결정적 문제는 신학이 신앙에 포함된 인식의 전개임을 어느정도 고수하느냐에 달려있다. 그것은 어느정도 케리그마와 그것으로 규정된 그리스도교적 실존의 설명인가를 뜻한다.

3. 인식의 문제

이 지식은 올바른 가르침의 문제를 유발시켰다. 영지주의화한 기독교가 등장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거짓교사들의 영지를 소유하라는 가르침을 거부하지 않았을 때 위험이 야기될 수 있었다. 많은 성서 기자들은 이러한 영지주의와의 싸움을 반영하였으며 나름대로의 해결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4. 바른 신앙성과 거짓 가르침

신학적인 관심들과 사상들의 차이는 크다. 초기에는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의 것과 구별하는 신앙의 개념이었고 상관개념인 거짓 가르침이라는 개념과 함께 그리스도교 공동체들 내부에서 형성된 각양성에서 비로서 생긴 바른 신앙성의 개념이 아니었다. 거짓 가르침 즉 이단의 표시로는 처음에는 다른것을 가르치다, 다른 것을 나타내다, 다른 교훈등이 제시되었다. 처음에는 학파를 표시하던 말이 다음에는 당파를 표시하게 되었다. 새로운 방향 설정의 모든 시도들은 이단들에 근원을 두었다.

5. 정경의 성립

바른 가르침에 근거를 제공하는 권위는 어디에 있는가? 이 상황에서 권위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주의 말들 뿐이었고 그것들의 신뢰성은 전승의 담당자들에게 있었다. 즉 사도들에게 있었던 것이다. 이들이 죽자 사도들의 말은 구전전승을 근거로 삼았으며 후에는 문서적 전승으로도 계속 전해지게 되었다. 그러나 문서가 증가하자 사도적인 것에 해당될 수 있는 문헌들을 가려내는 일이 중요하게 되었고 결국 이 일의 역사적 과정이 새로운 정경을 형성하게 했는 데 이 정경은 구약성서의 문헌들의 정경과 병립되었다. 중요한 것은 무엇이 교회의 권위적이며 사도적인 전승에 해당해야 하는가를 확정할 때 감독직책과 문서전통의 무게가 함께 작용했다는 것이다. 그 최종적인 결정은 직책의 권위였다(405. 인노센츠 1세 법황의 인준). 가르침의 통일성은 정경에 의해 확정된거은 아니다. 이것은 정경의 통일성이 하나의 상대적인 것임을 드러내는 것이다. 즉 신약성서 정경 자체가 교회의 통일성에 근거를 주는 것은 아니다. 이에 반해 그것 자체 즉 역사가에게 파악되는 피상성에서의 그것은 교단들의 다수성에 근거를 제공한다.

56) 동기들과 유형들

1. 바울의 전통 : 바울의 편지들이 특별한 영향력을 제공하였다. 많은 문서들이 그의 서신을 모방하여 기록되었다.

2. 유대교의 전통 : 바울 자신에게도 영향을 미친 헬레니즘계의 회당 전통은 목회서신들에게 더 심한 영향을 주었다. 특히 많은 영향을 미친것은 유대교의 묵시문헌이다. 이 영향은 신약성서의 전반에서 볼 수 있다.

3. 통속 철학 : 헬레니즘계의 통속철학, 특히 토론법은 바울과 목회서신들에 영향을 미쳤다.

4. 영지주의 : 바울과 요한은 영지주의 신화와 그 개념상의 전통을 계속 드러내고 있다. 이 영향이 제거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렸다.

57) 신학과 우주론

서언 :

신학적 사유가 사도 후기에도 교의학적 체계를 위한 노력으로 유도되지 않고 구체적인 동기들에 의해 규정되었다는 것은 특징적이다. 그러나 모든 사상들 배후에는 신 사상이 들어 있기 때문에 좁은 의미에서의 신학의 논술을 앞세우는 것은 타당하다.

1. 신과 천사, 악마

신에 대한 말에서 주도적인 것은 구약성서와 유대교의 전통, 즉 신은 세계의 창조자이고 주라는 것이다. 신과 세계를 일반적으로 관련시키는데 대한 이론적 관심은 아직 없었다. 이것은 이른바 구약성서 - 유대교 전통에 의하면 신의 국가를 이루는 천사들에게도 해당한다. 이와 함께 영지주의적인 우주론적 천사형태의 천사를 말하는 경우도 있다. 이 모든 표상은 신과 세계의 관계에 대한 구원사적 이해에 이용되었다.

2. 우주적 세력들과 그리스도의 승리

우주적 천사들 중에는 타락한 자로 등장하는 자들이 있다. 그리스도의 구원사업은 이들, 즉 우주적 세력들에 대한 승리는 개념으로 바울에게 나타나기도 한다. 골로새서에 등장하는 거짓 교사들은 천사의 세력을 존경함으로서 모든 의례적이고 금욕적인 요구를 의무적인 것으로 받아들일 것을 요구한다. 즉 그들은 우주적 세력들을 숭배하는 자이다.

58) 그리스도론과 구속론

1. 구원을 가져온 자로서의 그리스도(칭호, 인물됨, 구원의 일)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공동체들에서 구원을 가져온 자로 숭배되었다. 그에게 붙여진 이름은 다양하여 주, 궤주, 심판자, 신의 아들등이 그것이다. 그리스도의 인물됨에 대한 것은 신에 대한 그의 관계의 반성들이다. 선재자가 사람이 되었다는 것과 부활한 자로서 다시 영광중에 승천하여 신의 우편에 않아 있다는 것을 믿음으로 만족했다.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은 수난과 죽음으로 묘사되었다. 그의 죽음으로 얻어진 믿는 자의 구원은 철저히 죄의 용서, 해방, 의인, 성화, 정화로서 표시된다.

2. 구원의 개념

구원의 개념은 오로지 생명과 죽음에서의 구출을 의미한다는 점에서만 일의적이다. 그러나 그 표상들과 견해들은 다르게 나타난다. 많은 진술들은 구원을 미래의 것으로 생각한다. 생명도 마찬가지이다. 반면 반대로 현재의 것으로 생각하는 경우도 많이 존재한다.

3. 구원의 현재성과 미래

이러한 구원의 현재성과 미래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일반적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은 교회의 부름에 의해 세례로 중개된 현재의 죄사유를 통해 미래의 구원의 가능성이 주어졌다는 것이다. 또 현재는 명령하에 있고 그 실천이 미래의 구원을 얻는 주건이라는 것이다.

a. 헤르마스 서 : 구원한 세례는 미래의 구원도 준비할 것이라는 견해를 밝히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깨끗한 생활영위라는 조건에 결부되었다. 이때는 수세후의 죄가 문제가 된다. 헤르마스에게 있어 신앙은 다른 덕목중의 한 덕목, 아니 주된 덕목이라는 것도 특징이다. 그러나 이 신앙은 유일신에 대한 신앙일 뿐이다.

b. 야고보서 : 그리스도인의 율법에 따른 생활과 미래의 보복과 심판에 대한 지시를 바탕에 두고 있다. 회당전통의 도덕주의가 당당히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 유대교 문헌을 받아들여 쉽게 편수했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감지하게 한다.

c. 디다헤서 : 이 글도 유대교의 도덕전통을 반영하고 있다.

d. 바나바서 : 이 글도 유대교의 교리문답서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의 그리스도적 실존에 대한 이해는 제 2바울서신의 이해에 육박한다. 그는 신앙과 지식의 연관성을 강조한다. 이것이 뜻하는 것은 구약성서에 의해 선사된 과거의 것과 현재의 것, 미래의 것에 관한 인식으로 법조문들에 관한 인식도 제공한다. 여하간 이 서신의 그리스도교 신앙이해는 율법적이 아니다.

e. 히브리서 : 히브리서는 바나바서와 유사하다. 그리스도인은 책임을 의식하면서 하늘의 심판자 앞에서 산다. 이때 주어진 역설은 옛 죄들에서 해방된 후에 새로운 행실로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가능성이 현재성의 새로운 것을 보았기 때문에 문제가 되지 않는다. 율법성의 문제가 필요를 움직이지 못하는 것도 득특한 것으로 그의 관심을 끈 것은 오로지 그가 알레고리적으로 해석한 제사법 뿐이다.

f. 베드로후서 : 베드로후서에서는 회당 전통의 영향도 거의 감지되지 않는다. 또한 그가 기대하는 구원은 미래에 가 있다. 이 기록의 목적은 그리스도의 도래에 대한 회의를 물리치고 임박한 심판의 진지성, 깨끗한 생활 영위에 대한 책임을 날카롭게 하는데 있다.

g. 클레멘스 제 2서 : 이 문서는 도래와 미래의 심판, 갸蕷건한 자들에게 약속된 구원을 지시하는바, 권구및 회개의 설교이다. 이 심판은 업적들에 의해 베풍러진다. 그러나 그리스도교 실존의 중간은 여기서는 내용상의 규정이 아니라 연대기적 규정에 불가하다. 이 서신은 율법성이 회당전통에 의해 더 적게 표현되고 세계도피와 금욕의 어떤 헬레니즘적 경향을 더 강하게 받았다고 말할 수 있다.

h. 폴리갑의 서신 : 윤리적 권유들을 싣고있는 이 서신은 미래에 대한 희망으로 규정된 그리스도교의 증서이다. 그에게 그리스도인의 삶은 게명들의 실천으로, 세상에서 멀리하는 행실로 미래의 구원을 위해 준비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여기에는 자유의 개념이 전혀 없다.

i. 요한게시록 : 6 - 18장에서 선포하는 위협적인 심판은 반신적인 세계에 대한 심판이다. 이는 공동체들을 위협하므로 깨어있어 신앙에 충성할 것을 호소한다. 그럼에도 공동체들이 가지는 희망의 확실성은 그리스도의 죽음에 근거를 둔다. 계시록의 그리스도교는 그리스도교화된 유대교로 표시되어야 한다. 그리스도교적 존재의 특유한 중간 성격은 파악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현재는 잠정적인 기다림의 시대와는 다르다.

j. 골로새서와 에베소서 : 바울의 전통이 드러나는 서신으로 중간 - 상황의 내용적 의미가 파악되고 있다. 이들의 특징은 현재가 우주적인 세력들이 거세되었다는 점에서 신의 행위에 의해 그리스도 안에서 실현된 구원의 시대로서 이해되었다는 점이다. 그리스도교적 존재를 특징짓는 것이 바로 인식이라는 것과 그 때문에 항상 자랄 수 밖에 없다는 사상은 이 서신의 특징이라 할 것이다. 구원에 관한 이해에 있어서 어느 정도의 교리주의와 도덕화를 골로새서와 에베소서에서 부인할 수 없다. 그 결과 믿음도 철저하게 이해되지 못하였고 언어도 계속 관례적이다. 그러나 바울 신학의 본질적 주제들은 남아있다.

k. 베드로 전서 : 골로새서와 에베소서와 유사하다. 그러나 여기에 미래에 대한 연관성은 더 강하게 각인된다. 그리고 구원의 현재성은 그들이 바라고 있는 자라는 점에서 표시되었다. 그리스도와 함께 당하는 고난과 죽음에 대한 바울의 사상이 특유하게 개편되었다. 또한 종말론적 의식과 세상에 대한 거리가 강조되었다. 그 결과 참으라는 권고가 서신 전반을 관통하고 있다.

l. 목회서신들 : 이 서신들은 미래의 대망이 그 긴장을 더 많이 상실하고 있다. 그리고 그리스도교 신앙은 세상과 거리를 두되 시민생활의 영역에서 자리를 차지하는 경건으로 화했다. 그리스도교적 자세의 특징적 표시는 경건, 신 - 호의적인 행동, 경외심이다. 새로운 존재가 낡은 세대중에 있다는 의미에서의 그리스도교적 존재의 역설과 함께 중간시의 내용상의 의미를 파악할 수 있다. 목회서신의 그리스도교는 다소 퇴색된 바울사상이다.

m. 클레멘스 제 1서 : 이 서신은 목회서신에 가깝다. 종말론적 긴장은 사라졌고 바울 사상의 전통보다는 헬레니즘적 회당 전통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구원은 현재적인 방식으로 이해된다. 그리스도로 인해 얻은 구원은 신과 그리스도인의 관계를 형성하였다. 율법성의 문제는 필자에게는 없다. 결국 그리스도를 통해 얻은 것은 공동체의 자기 의식의 강화 및 확인에 불가하고 그가 보호자, 우리의 약함의조력자로 표시된 것은 그에게 있어서는 적합한 것이었다.

n. 이그나티우스서 : 그는 바울신학의 영향을 받은 마지막 성격적 유형에 속한다. 그도 요한과 같이 구원을 생명, 진리라고 표한하는 것은 특이하다. 그러나 초대 그리스도교 종말론의 상은 완전히 사라졌다. 종말론적 사건은 성만찬에서 현재화 된다. 경건의 개인주의화는 교회의 경건성에 결합되었다. 즉 구원은 교회 안에서 개인을 위해 제공되었다는 주장으로 이그나티우스의 교회의 통일성과 개체 공동체의 통일성에의 관심을 읽을 수 있다. 그는 그리스도인의 새로운 존재방식을 영 개념에 의해 표시하였다. 육이 죽음의 영역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에 의해 가능케 된 육과 영의 통일은 죽음과 생명의 통이로도 이해될 수 있다. 이그나타우스가 그리스도와의 죽음 및 삶의 공동성이 성례들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것을 생각하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것은 실제적인 고난과 죽음의 각오에서 그리스도를 본받음으로 실현된다. 믿음과 사랑은 언제나 그리스도교의 특수성들로 지칭되었다. 이 결합은 바른 가르침의 받아들임 또는 고수를 의미한다. 그에게 있어 바른 신앙은 교리적인 명제들에 대한 찬성이 아니라 실존적 태도이다. 이그나티우스는 그리스도교의 신앙을 실제로 실존적인 태도로서 이해하는 것을 바울에게서 배웠다. 그는 이미 아니다와 아직 아니다 사이의 한 존재로서 그리스도교적 존재의 역설적 성격을 파악한다. 그에게 율법성이 문제되지 않는 것은 자신의 공로로 구원을 얻는다는 태도가 그에게 전혀 없기 때문이다. 그에게 그리스도교적 상황의 새로운 것은 존재의 변화에 있다. 이것은 그가 그리스도를 종말적인 사건으로 이해했음을 지시하는 것이다.

4. 현재에 관한 이해

중간기의 연대적 의미가 부각되거나 또는 유일한 것이 되면 구원의 현재성은 과거의 죄들이 세례에 의해 소유된 구원의 일에서만 보여졌다. 율법성의 변형이 초래되었고 이로서 구약성서의 경건한 자들과 그리스도인들 사이의 다른 점이 완전히 사라졌다.

5. 그리스도론을 위한 결과

제사에서 현재하는 주로서 예배된 그리스도는 현재가 그를 통해 새롭게 된것으로 이해될 때만 현재의 주로 이해된다. 그리스도의 현재는 특별한 성례, 세례와 성만찬을 받는데서 경험된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근거를 두고 있기 때문에 어던 방식으로든지 그리스도의 구원사건을 현재화시킨다. 그리스도교적 신앙이 율법성으로 퇴색할 수록 그만틈 그리스도의 의미가 교회의 성례들 중에서 작용하는 것으로 소급된다. 그리스도론은 그리스도의 성례적 의미에 근거를 제공하는 데서 그 과제를 발견해야 할 것이다.

III. 그리스도교적 생활실천의 문제

59) 명령에 관한 이해

1. 명령과 서술

그리스도교적 생활실천의 문제는 역설적인 입장에 있는 공동체에 처음부터 그리스도교적 자기 이해의 문제로서 주어졌다. 구원론과 윤리의 주제는 그리스도교적 구원 이해의 특수성으로 인해 분리될 수 없고, 구원의 현재와 구원의 미래의 관계에 대한 물음이 서술과 명령의 관계에 대한 물음과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다. 전어 지은 죄책에서 벗어난 인간은 이제 새로운 시작의 기회를 얻었으나 자신의 순종으로 미래의 구원을 얻으려면 지금 인간은 스스로 힘써야 되게 되었다. 은혜 또는 신의 사랑의 선사가 인간을 철저히 갱생시켰다는 인식은 사라진 것이다.

2. 죄에 대한 이해

죽음에서의 구원은 죄들의 용서에서 일어나는데 이 용서는 그리스도의 죽음에 의해 준비되고 세례에 의해 소유된 것이다. 그러나 이 때의 돌아옴은 결코 옛 인간의 철저한 변화로서 이해되지는 않았다. 서술과 명령에 대한 바울의 이해의 의미에서 인간의 갱생을 파악하 사상 과정은 극히 희소하다. 바울과 요한이 죄라고 부른 것을 위한 의미들은 도덕적 - 율법적 사유에서 사라졌다. 이는 회당 전통의 영향에 의한 것이다. 육에 대해서도 바울의 의미는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 그래서 육 - 영의 대립도 오로지 지상의 것과 신적인 것을 표시할 뿐이다. 지금의 세대와 오는 세대의 대립 명제도 몇 문헌들 중에서 계속된다. 이것과 관련된 것은 옛 죄의 용서에 한정되어 있다. 죄의 세력에서 벗어난 자유와 영의 능력에 의한 지탱됨에 대한 인식은 상실되었다. 죄에서의 자유는 도덕적 의미에서 무죄성으로 이해되었다. 그리고 이 과제가 실천 불가능한 것으로 또는 실천되지 않은 것으로 증명될 때, 사람들은 회개와 신의 용서에서 도피처를 찾았다.

3. 은혜에 관한 이해

죄의 진지성이 철저히 파악되지 않았다는 것은 신의 은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임을 보여준다. 일과 은혜의 대립 명제가 사라지면서 선한 일들의 요구가 가세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마찬가지로 의의 개념도 상실되었다. 이 용어에서 제시되는 것은 종말론적인 인식과 카리스마주의 대신 도덕적인 경건의 이상이 등장하기 시작하고 계속 등장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신에 대한 두려움과 신을 두려워함의 용법은 특별하다. 이와 함께 신및 그리스도의 종들로서 경건한 자들에 대한 표지는 점점 더 자주 사용된다.

4. 작용한 기능들과 발전

바울과 요한의 신학을 축소시킨 영향력은 회당의 것과 예수의 선포 전통이다. 도덕주의에 대한 현실적인 제동력은 오직 큐리오스 - 예배와 성례전 주의 뿐이다. 이것은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표지이다. 이 공동체는 신의 은혜에 의해 부름을 받고 영이 그에게 주어져 있다는 의식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런 진술은 구원의 획득을 자신의 노력에 에속시키는 명령들과 통일되는데 이르지 못했을지라도 그 진술들은 피지탱성의 의식을 확인시킨다. 은헤와 영의 작용이 개인에게 선사된 기능에서 공동체를 위해 활동하면서 증명된다는 지식도 상실되지 않았다. 영의 능력으로 채워진 공동사회에 속한다는 의식은 이 능력이 교회의 기구에 의해 관장될 때에도 계속 살아있다. 이 두 계기의 유기적 통일성은 회개의 성례가 완성됨과 함께 비로서 도달될 것이다.

60) 여러 다른 생활 영역에 대한 요구의 내용과 위치

1. 생활률의 양식들

교회에 속하고 그것의 본질상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는 의식, 배타성과 세상에 대한 제한성 의식은 대체로 생생하게 남아있었다. 이것에는 소극적인 윤리적 요구의 기본성격이 일치한다. 각 윤리적 덕목들은 교리문답식으로 열거되어 나타난다. 즉 상론된 생활률이 목록 또는 교리문답식으로 제시된 생활률이 되었다.

2. 성화와 사랑의 계명

모든 개체 게명들은 성화라는 한 요구로 종합된다. 이것은 세상과 옛 생활태도, 육체적인 욕심들에 대한 거부를 뜻한다. 성화의 요구에는 공동사회를 지향하고 그 안에서 무사무욕적으로 착한 일을 하게 하는 요구로서의 적극적인 의미와 개인적인 성결만을 이상으로 하는 요구로서의 소극적인 의미의 두 경향이 함께 존재하며 서로 경쟁적이었다. 이 두 경향은 나름대로 발전해 왔으나 그 경계가 확연하게 그어지지 않았다.

3. 성과 완전주의

인간의 인격의 이상상에 대한 표상은 완전주의와 개인의 인품으로서의 성의 이상이다. 사랑의 계명으로 요구된 자깊포기는 이미 이웃과 공동사회에 대한 관심에 의해 규정되지 않고 자신의 구원에 대한 관심에 의해 규정된다. 완전주의와 성에 대한 노력은 한편 금욕주의의 요구가 유혹적으로 되는데까지 인도한다. 금욕의 요구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타당한 것으로는 관철되지 않았으나 그것은 개체적인 일을 부과하는 게명으로서 거부되지 않았다. 이와 같은 방향에는 완성으로서의 완전주의도 함께 하고 있다.

4. 시민적 도덕

그리스도의 생활실천이 특별한 도덕적 요구들과 그것들에 근거를 둔 완전 또는 성의 이념으로 그리스도교적 특성을 성취하지 못하고 누구에게나 알려진 단순한 윤리적 요구들을 추종함으로 이룰 수 있다는 이해가 나타났다. 즉 그리스도교의 생활률을 통속 철학적 윤리와 시민적 도덕의 개념 재료로 부터 거리낌없이 그 도식과 개념들을 받아들인다.

5. 각이한 생활영역

그러나 이 범위는 아직 상당히 한정되어 있다. 그러나 결혼을 평가하고 결혼생활을 다스림에 있어서 그약성서 - 유대교적 전통및 헬레니즘계의 회당의 영향이 작용한 것은 의심이 없다. 좀더 광범위한 공동사회에서의 공동생활도 비슷한 가부장적인 성격을 지닌다. 소유문제에 관한 견해로는 초대 공동체의 사랑의 공산주의에 대한 상이 전통에서 고립되어 있고 그것은 사랑의 모범상인 한에서만 대표적이다. 즉 이 사랑은 균등에 관한 것이다. 국가에 대해서는 그리스도인은 주어진 질서로서의 국가에 굴복해야 한다. 이 질서는 신에 의해 세워진 것이기 때문이다.

61) 계율

1. 공동체의 순수성을 위한 책임

공동체의 순수성을 위한 염려는 각 개인의 구원에 대한 관심에 그 근거를 두지 않고 공동체 전체의 관심사이다. 이 염려는 전체로서 성도들의 공동체이어야 하고 또 그것을 원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공동체 순수성을 위한 책임은 우선적으로 모든 공동체 구성원들에게 있다. 그러나 가르치고 권면하는 특별한 과제는 책임적인 인물들, 특히 공동체의 지도자들에게 부과된 것으로 그들의 의무는 권유하는 것인데 이것은 목회서신들에서 점점 더 예리하게 드러난다.

2. 죄인들의 배제와 재허입

특별히 악한 경우에는 죄인이 공동체에서 출교당해야 했다. 잠정적으로 배제된 공동체 성원의 재허입을 위해서도 특정한 규율들은 제정되어야 했다. 처음에는 이것을 공동체가 결정했을 수 있다. 재허입이 의심없이 허락에 의해 공동체 예배와 주의 만찬에 참여시키는 것을 의미했기에 이때에 회개의 고백이 행해졌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확실한 자료는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다.

3. 경한 죄들과 중한 죄들의 구분

죄들 사이의 구분은 죽음에 이르는 죄와 죽음에 이르지 않는 죄라는 표현을 통해 엿볼 수 있다. 경한 죄와 중한 죄의 구별은 처음부터 예수와 바울 요한에 의해 파악된 것과 같은 죄에 대한 철저한 이해를 어렵게 했다. 특히 어려운 것은 공적인 교회적 회개가 요구되었을 때이다. 그리고 율법성의 침투와 함께 은혜에 대한 순수한 이해가 상실되었기 때문에 교회의 공동사회에서 제거된 죄인은 이미 죄를 용서하는 신의 은혜 아래 서 있지 않는 그런자에 해당해야 했다. 그러나 죄인이 회개를 통해 공동체에 다시 받아들여졌다면 세례가 성례이기 때문에 회개라는 교회의 기구도 반드시 성례가 될 수 밖에 없다. 이것으로서 구원 기구로서의 교회의 성격은 빈틈없는 것이 될 수 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