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와 무화과나무의 저주

막 11:12-14, 20-25, 마 21:18-19

황 성 규 (한신대 교수/신약학)

1. 시작하는 말

예수가 비유로써 말씀하는 이유(목적)에 해당한 본문(막 4:10-12 병행)은 결코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특히 마가복음의 경우가 그렇다:"다른 사람에게는 모든 것을 비유로 말했다. 그것은 '그들이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고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여 돌이켜 죄사함을 받지 못하도록(사 6:9-10)'하려는 것이다"(4:12). 그런데 비유장으로 알려진 4장 33절:"예수께서 이와 같이 많은 비유로 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게 말씀을 전하셨습니다"라고 함으로써 위의 4장 12절과 상반된 견해가 나타난다. 따라서 4장 10-12절의 바른 해석을 위한 해석학적 노력이 필요했었다.

예수의 가르침 중에 방금 말한 내용처럼 매우 납득하기 어려운 말씀이 있듯이, 예수의 공생애 중 그의 행동이 납득하기 어렵다 못해 "왜 그렇게 행동하셨는가"고 회의를 갖게 하는 활동이 있다. 예컨대 헬라 사람 수로보니게 여인의 간청, 즉 더러운 귀신들린 딸에게서 귀신축출을 예수에게 간청했을 때 "자녀들의 떡을 집어 개에게 던져 주는 것이 옳지 않다"(막 7:24-30)고 반응하신 것과 거라사의 군대 귀신들린 자를 고치시는 과정에서 2천 마리의 돼지를 물 속에 빠지도록 해서 몰살시킴으로써 엄청난 경제적 손실을 입힌 행동(막 5:11-13) 등이 있다. 특별히 우리가 다루려는 예수의 행동 즉 열매맺지 못한 무화과나무의 저주 사건에서 그려진 예수상은 평소의 은혜와 자비, 그리고 사랑으로 점철된 그의 모습을 일시에 먹칠하는 듯한 인상을 강하게 심어 준다.

사실, 예수는 수세 후 시험을 받으셨는데 처음 시험은 '돌을 떡으로 만들라'는 것이었다. 40주야 굶주린 인간 예수를 일시에 무너뜨릴 만한 시험이었지만, 예수는 자신의 메시아적 권능을 오직 자신을 위해서 사용하는 것을 결연히 거부함으로써 시험을 이기셨다. 그의 공적 활동에서도 그의 적들로부터 빠져 나오기 위해서 기적을 일으킬 힘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런데 우리의 본문에서 예수는 어떤가? 멀리서 잎이 무성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열매를 기대했지만 그 기대가 어긋나자 그 나무를 저주했다. 그가 시장했을 때 그를 실망시킨 나무를 말라 버리게 하는데 그의 힘을 사용한 것이다. 더욱 이 본문을 이해하는데 걸림이 되는 것은 '때가 무화과 열매를 맺는 철이 아니다'(11:13)고 밝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본문이 쉽게 납득되지 않을 뿐더러 예수의 처신에 대해서 어떤 혐오스러움마저 갖게 하기 때문에 우리는 본문을 바로 이해하고 해석해서 성서 이해의 걸림돌을 제거하고 본문의 본래의 메세지를 찾아보려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우선 그 동안의 해석의 사례들 일부를 간략히 살펴보고 본문이 속한 전후문맥과 본문의 구조를 분석함으로써 본문의 의도를 밝혀 설교자의 설교 구성에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2. 여러 가지 시도들

1) 팔레스틴 지역에서 무화과나무와 포도나무는 잘 알려진 나무요 사랑 받는 것들이다. 무화과나무는 그 높이가 15-20피트까지 이르렀고 그 가지는 25-30피트 정도였으니 열매도 풍성했다. 우리가 본문을 이해하는데 "겨울철 무화과설"이 제시된다.

무화과나무는 먹을 수 있게 익은 과일을 6월에 한 번, 가을에 한 번 해서 두 번 열매를 맺는다. 첫 열매는 옛 가지에서 겨울 동안 동면하다 4월이 되면 눈이 커지고 6월에 먹을 수 있게 된다. 예수가 잎이 무성한 무화과나무에서 열매를 기대한 때는 유월절, 즉 4월이었으므로 무화과 열매를 기대한 것은 시의 적절하지 못했다. 4월의 무화과의 그 작은 초록빛 눈은 먹을 수 없기 때문이다. 가을에 익는 무화과 열매는 새 가지에서 나는 것으로서, 겨울 동안 나무에 달려 있어서 이듬해 봄철에도 발견할 수 있으나 그 수가 적고 또 딱딱해져서 먹을 수 없다고 한다. 그렇다면 본문의 예수가 시장해서 먹으려고 한 열매는 사실상 먹을 수 없는 것이었으므로 "겨울철 무화과설" 등을 들어 본문을 설명하려는 것은 한계가 있다고 하겠다.

2) 본문과 무화과나무의 비유(눅 13:6-9)

'무화과나무의 저주'는 마가복음과 마태복음(21:18-19)에 있으나 누가복음에는 없다. 그 대신 무화과나무의 비유가 있다. 우리는 누가가 마가복음서를 기초 자료로 삼았다고 보기 때문에 누가복음에 우리의 본문이 없는 것은 누가가 임의로 생략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아니면 무화과나무의 비유와 무화과나무의 저주를 동일한 이야기의 파생으로 보고 전자를 기록했을지도 모른다. 만일에 누가가 마가 본문을 생략했다면, 예수의 행동(무화과나무 저주)을 납득하기 어려워서 이를 생략하고 무화과나무의 비유로 대신했을지도 모른다.

이런 이해와 달리 무화과나무의 저주 이야기의 역사성을 부인하는 학자들은 우리의 본문이 누가의 무화과나무의 비유, 즉 하나님이 그의 거룩한 뜻을 접으시고 다시 한번 회개할 기간을 연장한다는 비유를 근간으로 만들어진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무화과나무의 저주 이야기는 허구적이라고 간주하여 본문이 안고 있는 난해한 예수의 행동을 비껴 간다.

3) 무화과나무 저주 이야기가 구체적인 역사적 사건을 배경으로 한다는 주장이다. 이 주장에서는 복음서들이 예수의 사역의 연대와 사건을 비교적 정확하게 설명한다는 전제가 있다. 다시 말해서 복음서가 역사적 상황에 충실하며 많은 경우 복음서 기자들이나 처음 교회 공동체의 자의식보다는 예수의 자의식을 반영한다는 것이다.

역사적 사건으로서 이 이야기를 설명하면 이렇다. 잎이 무성한 나무는 당연히 열매를 맺고 있어야 했는데 그렇지 못한 것은 그 나무가 열매를 맺지 못할 만큼 병들었기 때문이다. 예수는 인간의 마음을 꿰뚫어 보시는 분으로서, '병든 나무가 곧 시들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으로 추측할 수 있지 않은가. 말하자면 예수는 나무에 대한 원예학적인 진단을 근거로 나무가 시들 것을 예견한 것으로 설명하는 경향도 없지 않다.

3. 본문의 문맥과 구조

우리의 본문이 속한 문맥을 11장 1절로부터 13장 37절까지로 볼 수 있는데 그 전체 문맥은 성전 주제를 중심으로 한다. 이 문맥은 예루살렘 입성과 성전정화 사건에 앞서 감람산 근처에서 시작한다(11:1). 그리고 다시 감람산에서 끝난다(13:3), 즉 예수가 성전을 떠나면서 그 성전의 파괴를 선언하고서 감람산에서 성전을 바라보신다.

그 시작과 끝(11:1과 13:3) 사이의 자료들은 예수가 성전에서 활동하고 가르친 일, 그리고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과 원로들(11:27-12:12)과 또 바리새파 사람과 헤롯 당원(12:13-17), 사두개파 사람(12:18-27) 및 율법학자들(12:28-40) 즉 유대 민족의 지도자들과의 논쟁과 대결을 내용으로 삼고 있다. 위의 내용을 간추리면 무화과나무 저주 이야기의 전체 문맥은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을 역사적인 경우로서 나타내며 그가 성전 제의를 비판하는 등의 활동을 함으로써 유대 당국자들과 대결하고 마침내 성전 파괴를 선언하는 자료들로 차 있다. 14장 1절은 전혀 다른 시작이다.

우리의 본문(무화과나무의 저주)은 바로 이같은 문맥 속에 있다는 것을 유의하는 것이 좋다. 다시 본문의 직접적인 문맥이 되는 11장에서 갖는 구조를 보면 3일간의 구조다. 첫날은 예수가 개선하듯 예루살렘 입성과 관련된 일과 예수가 성전으로 들어가서 둘러보시고 12제자와 베다니로 귀환한다. 그 이튿날 즉, 제2일에 예수와 일행이 베다니에서 나가다가 잎이 무성한 무화과나무를 보고 열매를 기대했다가 실망하자 그 나무가 시들 것을 말한다. 제자들이 그의 말을 들을 수 있었다. 이 저주 사건 후 예수는 성전을 숙청한다(11:15-19). 제3일에는 저주 한대로 말라 버린 무화과나무에서 얻는 교훈과 예수의 권위에 대한 질문 등이 성전에서 이루어진다. 이같은 3일 구조가 마가 이전의 전승에 기인한 것인지 마가 기자의 편집의 결과인지는 간단히 말할 수는 없다.

여기서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마태복음의 병행(21:18- 19)은 마가의 3일 구조를 의도적으로 2일 구조로 재배치한 일이다. 마가복음에서는 예수의 무화과 저주와 그 결과 사이에 성전 숙청이 있는데 반해서 마태는 저주와 그 결과를 바로 연결하고 있으며, 성전 숙청(21:12-17)은 무화과나무 저주 사건 앞에 있다. 또한 "때는 무화과 철이 아니기 때문이다"라는 난해한 구절(막 11:13)을 생략한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마태복음 기자의 의도를 살필 경우가 아니므로 다시 마가의 본문을 보려고 한다.

이상에서 우리는 본문의 3일 구조가 마가 이전의 전승에서인지 마가 자신의 구성인지를 간단히 언급할 수 없다고 했는바, 비록 마가 이전 전승일지라도 마가가 일단 수용한 것은 분명하므로 많은 논의는 생략하고 마가의 편집적인 의도에서 본문을 이해했으면 한다.

4. 마가의 편집 의도

서두에서 말했듯이 본문이 난해한데 이를 더 가중시키는 구절이 11장 13절 즉, "때는 무화과 철이 아니기 때문이다"이다. 마태가 이 구절을 생략한 것은 바로 그 난해함 때문이리라! 이러한 난해함은 마가의 편집 작업에서 풀어 볼 수 있을 것이다.

마가는 이미 밝힌 대로 3일 구조를 갖는데 무화과나무 저주를, 저주 행위와 그 결과 두 부분으로 나누고 그 사이에 저 유명한 성전 숙청 사건을 놓는다. 마가의 편집 성향의 하나가 동일한 사건 사이에다 시간적인 간격을 메꾸기 위해서 다른 사건을 삽입하는 경향이다. 예컨대 야이로의 딸의 소생 기적은 5:21-24과 35-36인데 그 사이에 예수의 옷을 만져 혈루증을 고친 여인 이야기가 놓여 있다(참고. 막 3:19-21, [22-30], 31-35). 이런 편집 경향이 우리의 본문에도 있다고 하면 필시 저자의 의도가 있었을 것이다.

왜 무화과나무 저주 사건을 둘로 나누고 그 사이에 성전 숙청 사건을 배치했는가? 저주 사건을 '성전 숙청 사건'과 연결시키려는 것으로 보인다. 마가는 예수의 성전 숙청을 심판의 행위로 이해했다면 무화과나무 저주 사건과 맥을 같이 한다. 예수가 무화과나무를 저주(심판)한 것은 열매 없는 것에 대한 실망과 분노에 기인한 것이 아니라 상징적인 행위다. 예루살렘의 성전 체제는 정치와 종교를 망라한 최고 체제로서 하나님의 의와 사랑은 제쳐놓고 억압과 착취와 위선으로 치장하였기에 예수는 성전 숙청을 단행한 것이다. 단순히 '만민이 기도하는 집'으로서 구실을 못하는 성전만이 아니라 백성의 원성의 대상이 되었기에 거룩한 분노를 내고 예언자적 상징 행동을 한 것이다. 성전 숙청 사건 앞에 무화과나무의 저주 사건을 배치함으로써 성전 숙청의 참 뜻을 제자들이 깨닫도록 하신 것으로 보도한 것이다.

이렇게 보면 제철이 아닌데도 열매 없음은 당연하므로, 예수가 무화과나무를 저주한 것은 열매를 맺지 않는데 그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유, 곧 성전 숙청을 위한 행위적 비유에 있다고 할 것이다. 결국 열매 없는 무화과 저주는 실망과 분노의 소산이 아니라 다가올 심판을 예고하는 행동으로 해석할 수 있다.

5. 본문과 현실

우리는 본문이 누가의 무화과나무의 비유에서 나온 허구적인 것으로 보지 않으며, 그렇다고 무화과나무의 열매가 1년에 두 차례 익는데, 유월절(4월)에 덜 익었거나 말라 딱딱해진 무화과를 얻을 수 있다는 전제하에 본문을 문자적으로 이해하는데도 문제가 있다고 보았다. 우리는 논의를 거쳐 예수의 저주가 열매 없음에 대한 실망과 분노에 기인한 것이 아니라 성전 체제에 대한 심판의 상징적 행위로서 이해하려고 했다.

이런 이해를 토대로 해서 우리가 얻는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성전이 숙청되고 무화과나무가 저주받은 것은 그 본래의 역할을 못한 때문이다. 무화과나무는 열매를, 그것도 풍성한 열매를 맺어야 하고, 성전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으로서, 종교적인 역할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강같이 흐르게 하고 그의 사랑을 만민에게 베풀어야 할 역할을 감당하지 못했기에 예수의 심판(저주)이 내려진 것이다. 예수 당시의 성전 체제를 종교, 정치, 경제적 측면에서 검토하면, 성전은 민중들의 원성이 쏠리는 곳이었다. 오늘의 한국 교회의 성장에도 불구하고, 세계 선교사(宣敎史) 상 유례없는 교회 발전에도 불구하고 세상을 섬기는 교회로서 사명을 다하지 못하면 언제 심판에 직면할지 모를 일이다.

둘째로 값싼 은총의 신앙 지양이다. 무화과나무의 저주는 그 풍성한 잎과 달리 열매 없음에서였다. 제자직은 엄청난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서 수행할 수 없다(막 8:34, 눅 14:25-27). 화려한 신앙고백 자체로는 무의미하다. 실천적 신앙이 언제나 문제였고 또 중요한 것이다. 어느 목회자는 교회 간판을 이 사회가 내어 걸어 달라고 하기 전까지는 걸 수 없다고 했는데 그것은 교회 이름에 걸맞은 삶이 교회 안에서 실천되어야 함을 말한 것이다. 실천적 신앙이 중요하고 결정적인 것은 지극히 작은 소자에게 행하고 행하지 않은 것이 심판주와 직결되기 때문이다(마 7:21-21, 25:31-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