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과 열심당
-예수님은 열심당이었나?-
서론
우리는 각박한 현실에 처해 있는 한반도에서 민주·민중·민족주의라는 이데올로기로 무장한 20세기의 열심당원들을 목격하고 있다. A.D 1세기의 열심당원들이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강한 열정과 적극적 행동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대망했다면, 20세기의 이들은 마르크시즘의 기초 위에서 유토피아를 향한 민족주의적 투쟁 속에서 그것의 도래를 대망한다고 하겠다. 이러한 혁명시대에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 우리는 이러한 큰 물음 아래서 예수님과 열심당의 관계를 살펴보고 예수님의 행동을 파악해 우리의 모델을 삼고자 한다.
본론
I.열심당에 대한 이해
1.열심당의 기원
열심당을 파당적(派黨的)인 성격으로 보는 최초의 문헌들은 그 파를 A.D 66년 9월 로마에 항거하는 반란군을 지휘하려고 했던 므나헴(Menahem)의 추종자들이나, A.D 66년과 67년 겨울에 있었던 폭도들 중의 극단론자들과 관련시키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요세푸스가 '강도들'(léstai)-이 용어는 '바라바'나 예수님과 나란히 십자가에 달린 두 강도들처럼, 평범한 강도들이 아닌 점령국에 대한 폭도들을 지칭한다-이라고 부르는 자들과 '열심당'을 서로 교환이 가능한 명칭들로 언급하고 있고 쿠마누스(Cumanus)총독 치하에서 일어난 폭동들의 주범인 강도들을 라틴어 시카리(Sicarii)의 헬라어 형태인 '시카리오이'(Sikarioi)-이 말은 '단검'(sica)으로 무장한 사람들이란 뜻으로서 테러주의의 주동자들을 지칭한다-라는 용어를 퀴리노 때에 반란을 일으켰던 사람들로부터 마사다(Masada)를 최후까지 사수한 사람들과,유대에서 싸우다가 A.D 70년 이후에 애굽으로 도피하여 거기에서 최후까지 버틴 생존자들까지를 포함하여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열심당의 기원을 요세푸스(Josephus)가 유대의 '제 4철학파'로 부른 A.D 6년의 반란으로 추정할 수 있을 것이다.
2. 열심당의 배경: 종교적·정치적 측면
A.D 6년의 반란은 유대인 통치자 아르켈라오가 해임되고 유대와 사마리아가 로마의 직접적인 위임통치 영역이 되어 시리아의 퀴리노(Cyrenius)가 제국의 국고에 상납되어야 할 공물의 양을 결정하기 위하여 그 땅에 인구 조사를 지시한 것에서 발단되는데,이러한 조치는 몇몇 유대인 집단을 격분시켰으며 그들로 하여금 저항운동을 하게 만들었다. 그들 중에는 특히 적극적인 행동으로 그들의 반감을 표시하기를 거부하는 바리새파 사회에서 떨어져 나온 집단이 속해 있었다. 그들은 율법에 대한 열정 때문에 로마인에게 복종하기를 거부하였는데 요세푸스는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가말라(Gamala)라고 하는 어느 성읍 출신의 골라니티스(Gaulanitis) 사람 유다(Judas)는 사둑(Sadduc)이라는 한 바리새인과 함께 유대인들로 반란을 일으키게 하는데 열심(zealous)이었다. 그 두 사람은 세금 징수가 노예제도의 도입과 다를 바가 없다고 말했으며 그 국가가 그들의 정치적 자유를 옹호해 줄 것을 촉구했다.…… 갈릴리 유다가 창시자인 유대 철학의 4번째 분파 소속원들은 다른 모든 면에서 바리새인들의 의향에 동의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정치적 자유에 지대한 애착을 보이며,하나님만이 그들의 유일한 통치자요 주(Lord)가 되신다고 고백한다. 또한 그들은 어떤 류의 죽음을 당하느냐에는 개의치 않으며 그들의 친척들이나 친구들의 죽음에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그리고 그러한 어떤 두려움도 그들로 하여금 어떤 사람을 주라고 부르게 할 수는 없다."
이 열심당원들은 이방 통치자들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을 불법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신정(神政)의 원리를 실행했기에, 바리새파 사람들처럼 미래의 메시야적인 전환기를 참고 기다릴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그들은 오히려 적극적인 행동을 통해서 역사의 진행을 결정하려고 하였다. 즉 그들은 하나님의 통치를 촉진하기 위해 하나님과 협력해야 한다고 확신하였던 것이다. 이들이 열심당(the Zealots)이라고 불리우는 이유는 역사적 전례에 기초하는데, 즉 안티오쿠스 4세가 유대교를 탄압했을 때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열심을 나타냈던 마따디아와 그의 아들들과 추종자들, 광야에서 이스라엘인들이 배교했을 때 뛰어난 열심을 보였던 비느하스(민 25:10-13,시 106:30 -31)등이 이 전례에 해당한다. 이러한 열심당의 정신은 A.D 74년까지 지속되었다. 유다 가족들은 열심당의 지도자들이었는데, 그 두 아들 시몬과 야곱은 A.D 46년에 박해자 알렉산더에 의해 십자가 형에 처해졌고 세째 아들 므나헴은 A.D 66년 강력한 반로마 저항 운동을 지도하기 시작했다. 열심당은 A.D 66-73년의 전쟁 동안에 적극적이었다. 그러나 마지막 요새였던 마사다가 A.D 74년에 무너지면서 해체되었다. 이와 같은 열심당의 종교적·정치적 측면은 그 운동의 사회·경제적 측면과 연결지어져야 한다.
3. 열심당 운동의 사회·경제적 특성
A.D 6년의 반란은 원래 경제적 문제 때문에 일어났다. 즉 조세 부담에 대한 반대로써 조성되었던 것이다. 로마시대 농민들의 수입은 수확의 50%를 넘지 못했다. 이는 물론 과중한 세금부담 때문이었다. 유대인들의 경제적 상황은 철저하게 검소하였는데 예루살렘의 소수 상류층과 갈릴리의 대지주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밭농사와 수공업 그리고 소매업으로 그들의 생활비를 벌어야 하는 형편이었다. 그러한 경제적 위기에서 부자들의 착취가 가능했으리라는 추측을 할 수 있고 그로 인해 많은 사람들은 농토를 잃고 반농 혹은 소작농이라는 새로운 계층이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가난과 구걸은 널리 퍼져 있었으며 경제적인 비참함 때문에 고국을 등지는 사람이 많았다. 한편,농업생산의 어려움은 강도질을 유발시켰는데 그것은 부채를 지고 있는 농부들과 소작인들이 빈곤의 압박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은 산속의 저항 투사들에게 도망가는 방법 외에는 없었기 때문이다. 열심당은 소유관계를 하나님이 원하는 바대로 새롭게 조직하기 위하여 투쟁했는데 요세푸스는 그들의 행태에 대해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폭력적인 한 전쟁이 우리에게 닥쳤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고통을 덜어주던 친구들을 잃었다. 또한 엄청난 강도 행위와 주요 인사들에 대한 살인 행위가 있었다. 이것은 공공복리를 위한다는 구실 아래 행해졌지만 실제로는 그들 자신의 이익에 대한 소망 때문이었다."
이러한 현상은 A.D 66년 열심당이 예루살렘을 점령할 때 구체적인 행위로 표현되는데 요세푸스는 그 행태를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그들은 횃불을 공문서들이 보관되어 있는 그 곳(대제사장 아나니야의 집과 아그립바의 궁전)으로 가지고 가서 채권자와 맺은 채무문서를 불태웠다. 그것으로 인해 그들은 그들의 채무이행의 의무를 해소시켰다. 그들은 채무자인 많은 대중들을 그들에 동조케하기 위하여 이런 행위를 했고 그로 인해 그들은 가난한 부류들로 부유한 이들에 대항하는 그들의 폭동에 좀더 가담하도록 설득했다."
이처럼 요세푸스는 사회 혁명적 특성을 열심당의 고유한 동기로 파악하면서 국가적 독립에의 욕구는 단순히 '탐욕'의 이데올로기적 장식에 불과한 것이라고 평가절하한다. 열심당 운동은 상층 계급과 하층 계급 간의 사회·경제적 분배 투쟁으로서 궁핍한 시대의 첨예화된 현상으로 파악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열심당의 사회·경제적 특성이 너무 과장되어서는 안될 것이다(예,크라이시히). 왜냐하면 근동의 다른 지역들도 이스라엘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로마 정부에 의하여 심한 경제적 착취를 당하였지만 타지역에서는 이스라엘의 저항 운동에 필적하는 저항 운동이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II. 예수님을 열심당에 관련시키려는 시도들
1. '갈릴리'라는 공통적 배경
이러한 주장은 갈릴리가 열심당의 본거지일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고향이자 사역지라는 맥락에서 제기된다. 이러한 연결에 관심이 있는 학자들은 갈릴리를 사회·경제적 측면에서 분석하는데,그들에 의하면 갈릴리는 암하아레츠('땅의 사람'이라는 뜻)의 중심지이다.
그런데 갈릴리 자체는 비옥한 지역인데 왜 그곳에 암하아레츠가 그렇게 모이는가? 그것은 유대 지방보다 이곳이 교리(종교)상 자유롭고, 사회 계층상으로도 자유롭기 때문일 것이다. 갈릴리는 농업이 생업의 중심이 되는데, 농사는 대부분 암하아레츠에 의해 경작되었다. 그럼에도 이곳에는 절대 빈곤의 소농과 땅 없는 소작인이 압도적이었다. 갈릴리의 소작인들이 부재지주에 의해 착취당했기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사회·경제적 상황 속에서 열심당 운동은 발생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갈릴리인은 곧 열심당원으로 간주되었던 것이다.(마 26:69,막14:70 참고) 예수는 바로 이러한 삶의 현장 속에서 자라나셨고 자연스럽게 열심당의 혁명운동을 목격하였을 것이다. 브랜든은 예수가 열심당의 영웅적 투쟁을 보고 비록 그들의 과격한 행동에 대해서는 회의를 가졌다고 하더라도 그들의 숭고한 이념과 강렬한 의지에 대해서는 거리낌 없는 찬사를 보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안병무는 복음서에서 예수가 갈릴리 지역으로 간 사실을 눌린자,포로된 자인 암하아레츠와 연결시켜 하나님 나라를 위한 투쟁이 민중 봉기와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주장한다. "예수는 눌린자, 포로된 자들에게로 갔다. 바로 이 민중들을 해방하기 위해서이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예수는 젤롯당과 서로 통한다고 결론을 내릴 수가 있다."
2. 예수님의 제자들
예수님의 제자들 중 몇몇이 열심당원임을 주장한다.
1)시몬:가나안인(Cananaean:히브리어 qanna<zealous>에서 연유한 말로서 열심당을 의미함) 또는 열심당으로 묘사된다. 이것은 예수와 열심당의 밀접한 관계를 설명해 준다.
2)가룟유다: 유다를 열심당원으로 보려는 자들은 '가룟'(Iscariot)이라는 명칭이 암살자라는 의미의 sikarios와 연결된 말이라고 주장한다. (라틴어 sica와 희랍어 sicarion 곧 '단도'라는 단어에서 온 말이다.) 요세푸스는 시카리오이(sicarioi)를 지언(指言)한다. 고로, 유다는 유대인 열심당원으로서 예수와 그의 추종자들에게 가담하면서 그들의 운동이 민족해방 운동이라고 믿었으며 그가 마침내 예수를 배반한 것은 정치적인 망상 때문이 아니면 예수로 하여금 일어나 싸우지 않을 수 없게 만들기 위함이라고 생각된다.
3)베드로: '바요나'(Bar-Jona)라는 부칭(父稱)은 율법학자의 문헌에서 반역자의 계급을 칭하는 데 사용된 용어(biryonim)와 아주 비슷하다. 이것은 베드로의 열심당적 성격을 드러내 준다.
4)요한: '보아너게'(ㄐㄎㄈㄒㄅs)라는 명칭은 열심당과의 밀접한 연결성을 입증해 주는데 눅9:54의 내용과 막10:38의 '그들의 순교에의 각오'등이 그러하다.
3. 성전 청결 사건
-막11:15-19,마21:12-17,눅19:45-46
이 사건은 열심당이 성전을 점거함으로서 하나님 나라를 이루려 했던 점과 비교해서 강조되는데 즉 예수께서 무장한 일단의 사람들과 함께 성전을 점유하려 했던 시도로 해석된다. 당시 성전 청결 사건은 부조리한 사제 귀족의 권위에 대한 정면 도전이었는데 이는 로마의 식민주의자들뿐만 아니라 이들과 타협한 사제 귀족들에게도 증오의 화살을 돌렸던 열심당의 뜻과 상통한다.
4. 예수의 십자가 처형
예수는 선동적인 정치 지도자로서 정치적인 처형 즉 십자가 형을 당하였다. 십자가에 쓰여진 명패, 바나바(로마에 항거한 폭도로서 열심당원)와 그의 관련성, 종교 당국에 의해 제기된 실제적인 고소, 그리고 십자가 좌우편의 강도(lestai) 사이에서 처형된 점 등은 바로 예수가 정치범으로 처형되었음을 입증해 준다. 즉 예수는 열심당으로 정죄받은 것이다.
5. '모든 것을 버리고…','십자가를 지고…따르다'
소위 타이센에 의해 사회적 무근성(無根性)이라고 불리워지는 특성은 예수 운동과 열심당 사이의 공통점이다. 그들은 모두 '부와 가족의 포기'를 요구한다. 한편 젤롯당은 죽음을 각오하고 해방 운동에 나선 몸이라고 해서 '십자가를 진다'라는 구호를 사용했는데 이것은 예수 운동에서도 동일한 급진적 태도를 의미하는 것으로 사용된다.
6. '천국이 침노를 당하며 침노하는 자가 그것을 빼앗을 것이다'
이 말은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가 투쟁으로 가능하다는 것으로 해석되어, 열심당의 주장과 긴밀히 연결된다.
III. 예수님은 과연 열심당인가?
앞에서 언급된 긍정적 시도 즉 예수님이 열심당과 관련이 있다는 시도는 과연 타당한 것일까? 물론, 그 형태적 유사성은 부인할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현상 속에 숨게진 본질은 엄청난 차이가 있음을 우리는 확인하게 될 것이다. A.D 66년 유대 전쟁이 발발하자 열심당이 주도권을 쥐고 있던 예루살렘에 그리스도인들이 없었다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해 주는가?
그리스도인들은 열심당의 선동적 행위와는 도저히 병립할 수 없는 그 무엇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 무엇, 바로 그것이 예수님과 열심당의 근본적 차이를 구분지어 주는 것이다. 이제 막12:17을 중심으로 그 무엇의 한 내용을 살펴보기로 하겠다.
1.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막12:17)
세금 문제는 그 당시의 논쟁점이었는데, 본문 막 12:13에 보면 서로 견해가 다른 바리새인과 헤롯당이 등장한다. 헤롯당 사람들은 당시의 정치 체제를 인정하고 통치자를 지지하여 그들로부터 상당한 특권을 얻어 누리던 사람들이었던 반면에 바리새인들은 율법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을 철저히 지켜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서 이상을 실현하고자 했으며 로마의 식민통치를 대단히 증오했다. 이렇게 상반되는 정치적 이데올로기를 표방했던 두 부류가 지금 연합하여 예수에게 올가미를 씌우려고 한다. 몇가지 중요점만을 살펴보자.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가하니이까 불가하니이까? : 이것은 딜레마적 질문으로써 '바치라'고 대답하면 하나님의 백성인 유대인들 위에 로마 황제가 합법적으로 군림하는 왕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행위가 되며, '바치지 말라'고 대답하면 로마 당국에 저항하라는 뜻이 된다. 전자는 바리새인에게 흠잡히게 되며, 후자는 헤롯 당원들에게 헛점을 드러내게 된다.
예수님의 대답에 있어서 그 구조와 강조점: 지금까지의 대부분 주석들은 '가이사'와 '하나님'사이의 접속사 ㄋㄊ를 그리고(and)로 해석해 왔다. 이러한 해석은 전자에 강조점을 둠으로써 자주 현실 유지에 봉사하도록 이해시켰다. 심지어 이것은 불의를 자행하고 폭력으로 억압하는 정권의 체제 유지를 위한 합리화의 도구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예수님의 답변은 후자에 강조점이 두어지고 있다. 따라서 ㄋㄊ는 그러나(but) 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로 번역되어야 한다. 이는 다음의 사실 속에서 입증된다.
가이사의 화상이 새겨진 은전을 소유하는 것이 주는 의미: 예수님이 데나리온 하나를 가져와 보이라고 하자 어떤 사람이 가져왔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의식이 강했던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제체두고 가이사를 왕으로 인정하는 것을 우상 숭배로 여겼기 때문에 그의 화상이 새겨진 로마 은전을 꺼려했다. 그런데 이런 형상 금지령에도 불구하고 예수께 질문한 자들의 일부가 로마 은전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은 무엇을 말하는가? 그것은 가이사를 그들의 왕으로, 스스로를 그의 시민들로 인정한다는 뜻이다. 가이사가 막강한 로마의 군사력과 행정 체제로 이룩해 놓은 '로마의 평화'(pax Romana)의 덕을 보고 있는 그들에게 예수는 말씀하신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그러나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이 말은 '너희들이 가이사를 왕으로 인정하고 그의 통치권 내에서 안전을 누리겠다는 결정이 너희 마음 속에 이미 이루어졌다면 너희들은 마땅히 가이사가 요구하는 그것들에 대한 대가,곧 세금을 바쳐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예수에게는 가이사에게 세금 바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절대적 요구가 있다. 곧 하나님께 속한 것을 하나님께 바치라는 것이다. 사실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문제는 예수님에게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하나님께 속한 것들' 즉 그의 나라의 이익들이 으뜸으로 중요하였다. 예수님은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칠 것이냐 하는 문제를 질문자들의 결단에 맡기고 있다. 헤롯 당원들은 기꺼이 바칠 것이고 열심당원과 바리새인들은-좀 덜하겠지만- 세금 바치기를 거부할 것이다. 그러나 헤롯 당원들이나 바리새인들이나 열심당원들이나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자들이든 아니든 모두 혼신을 다해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 이것이 예수님의 답변의 진의인 것이다.
위에서 처럼, 예수님은 '황제(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은가'라는 질문에 대해, 즉 재해석하여 '하나님의 왕국에 대한 그의 가르침이 열심당의 이상에 일치하는지 아닌지'의 질문에 대해 열심당원의 의미에서 대답하지 않고 계신다. 예수는 그의 대답 속에서 기종의 권력 체계가 신적 존엄에서부터 기인되는 것이라고 주장하지도 않으며 폭력을 사용하여 정세를 변화시키고 하나님 나라를 강제로 끌어오려고 했던 혁명가들의 견해에도 동의하지 않고 계신다. 예수는 열심당인가? 우리는 '아니오(No)'라고 응답하게 된다. 그런데 왜 예수님은 모호한 태도를 취했을까? 여기에는 예수님의 심오한 가르침과 일관된 태도가 있다.
2. 산상수훈: 예수님의 정치 강령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에만 집중하였다. 그는 하나님이 왕으로서 다스리는 그 나라를 선포함으로써 로마 제국이나 헤롯의 통치는 물론 그 어떤 통치에도 비판적인 태도를 견지하셨다. 예수님은 세상의 '나라'나 '정치'를 통하여 구원이 이루어질 수 없다고 보았다. 그는 인간의 정치에 사탄적 요소가 들어있다고 여겼다. 베드로에게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마 16:23)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이러한 사실을 잘 드러내 준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유대교 전통적인 정치적,군사적 메시야 상(像)을 단호히 부정하신다. 인간들의 노력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역사 속에서 이룬다는 생각은 바로 인간의 자기를 주장하려는 의지(self-assertive Will, 사탄이 인간을 포섭하기 위한 진입로용 무기)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무엇을 견지하셨는가?
예수님은 인간의 구원이 하나님과 동료 인간들로부터 소외를 초래하여 인간을 파멸로 이끄는 자기 주장하려는 의지를 청산하고 하나님과 화해하여 그의 부요함에 참여할 때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인간이 이렇게 될 때 자기 주장하려는 의지를 충동하여 그들을 지배하는 사탄의 통치에서 해방되어 하난님의 통치 아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산상수훈은 바로 이런 삶을 제시해 주고 있다. 부요하시며 사랑이신 하나님을 온전히 믿고 의지함으로써 자기 주장과 스스로의 힘으로 안전을 도모하려는 모든 의지를 대치하라는 가르침인 것이다. 즉 자기를 주장하는 대신에 자기를 희생하여 남을 섬기라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산상수훈은 하나님 나라의 정치 강령이다. 예수는 열심당인가? 이 질문은 예수님의 산상수훈의 모델 속에서 구체적으로 거부된다.
결론
지금까지의 고찰에서 우리는 예수님과 열심당 사이의 간격을 잇고자 하는 시도가 실패작으로 그침을 보았다. 예수님은 혁명이라는 자기 주장의 의지가 아닌 자기를 내어주는 사랑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의 현실을 보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대조는 십자가형-열심당에게는 경배해야 할 하나님의 섭리, 예수님에게는 하나님의 위임 명령의 성취-에 처해진 예수와 두 강도들 속에서 나타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