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사역이 세례요한의 사역
안에 머물러 있었을때.
Ethelbert Stauffer교수에 의하면, 예수께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을때
그의 연령이 33세였다(참조, Jesus and His Story,p.61). 당시, 팔레스틴
에 거주한 유대인의 생활환경으로 미루어 볼때 33세라고 하면 오늘 우리의
생활환경에서 보다는 더 나이 들어 원숙한 때에 해당이 된다. 예수가 처음
공생애에 등장 하였을시 그는 이미 약관이 아닌 성숙인이었고 완성이 된
인격자(a finished personality)였다.
신약 안에 출현하는 중요 인물들이 예수의 탄생시 있었던 경이로운 초자
연적 사건들에 관하여 잘 알고 있으며 그러므로 예수의 장래가 비범하리라
고 예상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눅. 2:41-51에 단 한번 나오는, 성전에 찾
아가 현자와 박사들과토론을 하여 그 자리에 참석한 사람들이 모두 그의
지혜에 놀랐다고 하는 기사 이외에는 그는 일상 평범하게 묻혀 살았다.
과거에 모세가 오랫동안 묻혀 양치기 생활을 한 것처럼(출.3:1,7:7) 예수
가 조용히 목수 생활을 이어 가는 동안 아무런 비범한 일도 일어나지 않았
다.
당시의 유대 묵시문학에 의하면 최후의 구주(the savior of theLast Day-
s)가 드디어 백성앞에 나타나기 전에는 오래 동안 먼 곳에(in a remote p-
lace) 그리고 자기 백성속에서 전여 눈치 챌수 없을 만큼 숨어 있어 천대
받으며 기다린다고 되어 있다. 어떤 의미에서, 예수는 이러한 묵시문학적
인 조건을 충족시켰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거의 30년간 예수는 나사
렛에서 조용히 노동자들과 섞여 노동을 하며 아무도 그를 비천한 사람이라
고 주목 받을 이유없이 기다리는 생활을 하였기 때문이다.
한때, 그의 탄생시에 있었던 천체의 이변이나 동방현자들의 예방이나 양
치기들의 찬양예배나 베들레헴 주변에 있었던 끔직한 영아 대학살사건이나
지금은 모두 과거의 잠자고 있어 잔인한 헤롯왕가나 교활한 로마의 집정관
이나 아무도 다시는 예수를 주목하지 않는 고요한 기다림이었다. 말하자면
인류와 온 창조가 장구한 시간과역사의 초점을 예수 개인에게 두고 조용히
숨쉬며 침묵으로 초조히 기다리는 그러한 세월이라고 말 할수 있다.
예수의 사역활동의 초기에는, 예수께서 세례요한의 선포행위와 메시지에
깊이 관여 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예수께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은 것이 28
년 2월이라고 추정이 되고, 그후 광야에 들어가 세례요한의 광야활동과 일
치하는 금식기도를 하신후 불과 수주후에 유월절을 지키기 위하여 예루살
렘으로 상경하였고 그후에 예수는 다시 세례요한의 주변으로 돌아온다. 이
때에 본래 세례요한의 제자였던 요한과 안드레는 세례요한이 예수께서 다
니심을 보고 "보라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이렇게 증언함을 듣고 예수에
게로 옮겨간다. 그후 거의 같은 때에, 안드레와 같은 벱세다 사람인 베드
로와 빌립 그리고 가나사람인 나다나엘이 예수께로 합류하여, 이 적은 모
임은 가나의 혼인집으로 함께 찾아간다.
말하자면 예수는 자신이 아직은 세례요한의 영향아래 머물러 있으면서 그
의 주변에는 이미 이와 같은 갈릴리 사람들의 몇명이 뭉쳐, 이것이 예수의
초기활동의 핵심이 되었다고 본다. 그러한 사실과 그러한 사정은 주로 요
한복음 1-2장 이하와 3:24에 나온다. 요한복음 3:24은 명확하게"요한이 아
직 옥에 갇히지 아니하였더라." 말하고 있다.
그러나 공관복음에서도 비록 예수의 공생애가 일년의 시간구조안에 압축
이 된바 있으나 여기 저기에서, 예수의 여러 해의 사역의 흔적이 발견이
된다. Staauffer교수는 그러한 예로서, 마가복음14:3이하의 기사의 내용에
서 예수가 베다니 문둥이 집에 초대되어 식사 하신 일이나, 예수의 머리에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부은 한 여자의 귀한 행위가 전자에 예수께서 이미
이 지역에서 사역을 하신일이 있기 때문에 은혜받은 여인의 감사가 동기가
된 일이라고 지적을 한다. (어떤 사본에서는 눅.4:44의 본문이 "유다회당
에서 전도 하시더라"라고 나오며, 눅, 13:7이하에서 무화과 나무의 결실을
기다리며 "삼년"을 기다리는비유나, 사도행전 18:25에 보면, 아볼로가 예
수의 가르침과 예수에 전한 많은 것을 알고 있어 가르치나 요한의 세례만
을 알고 있었다고 하므로서 아볼로가 공관복음에 기록이 된 예수의 사역이
전의 사역을 알고 있음을 암시한다.)
비성서적인 자료로서, '아키바에서 톨레도트 예수까지' (from Akiba to
the Toledoth Jesus)의 유대인의 예수전승에 보면, 예수가 초기에 세례요
한의 추종자로서 사역한 상당히 긴 기간이 있었음을 말하고 있다. 심지어
는 만다고 전승(the Mandaen tradition)에도 이러한 초기의 예수의 활동에
관한 희미한 기억을 수록하고 있다.
예수는 그의 소수의 추종자와함께 많은 귀향하는 순례자의 무리속에 섞여
갈릴리의 고향 집으로 가는 도중, 가나에 잠간 들렀다가 모친과 형제와 함
께 가버나움으로 옮겨간다. 이즈음에 예수의 부친인요셉은 이미 세상을 떠
난후이고, 누이들은 나사렛에 그대로 거주 하였으며 이미 결혼을 하였다(
요한2:12). 그러나 예수는 가버나움에 오래 머물러 있지 않았고, 이 최초
의 제자들과 함께 요단강 하류로 다시 돌아가 잠정적이나마 세례요한의 세
례운동에 참여하는 것이다.
기원 29년의 유월절에, 예수는 다시 한번 예루살렘으로 상경을한다. 이번
유월절에 예수는 성전구역 이방인의 뜰에서 환전상과 장사치들을 추방한
성전의 혁신을 이르킨다. 이 첫번째의 성전혁신에 관하여 요한복음만이 2:
13이하에 언급하고 있어서, 신약학자중에는 공관복음에서 최후에 예루살렘
방문시에 있었던 예루살렘 입성과 연결이 된 성전혁신 사건(막.11:15-18,
마태. 21:12-13, 눅.19:45-48)과의시간차의 문제 때문에 이 난제를 해결하
는 방법으로서, 양자택일을 하므로서 어느 하나를 가지고 다른 하나를 수
정하는 입장을 취하거나 아니면 예수는 예루살렘에 올라가 유월절을 지킬
때마다 성전혁신의 사건이 으례히 있었으며 공관복음은 최후의 것을 요한
복음은 최초의 것을 선택했다고 하는 양극적 기사를 조화시키려는 입장을
취하기도 하나, 나의 생각으로는 복음서에 기록이 된 2회의 사건을 그대로
받아들임이 가장 무리가 없고 자연스럽고, 성서 저자의 의도와 일치한다고
생각을 한다.
요한복음은 예수께서 처음 성전을 청결하신 혁신행위에서 "너희가 이 성
전을 헐라 내가 사흘동안에일으키리라"이와 같이 대담한 도전을 하셨다고
하였고(참조, 2:13-)유대인들이 답변하여 "이 성전은 46년 동안에 계속 지
어 왔거늘..." 말한것으로 기록 하였다. 헤롯이 성전건축을 시작한 해가
로마건국 736년(ab urbe condita)의 봄이었다. 여기에 46년을가산하면 로
마 건국 782년에 해당하고 그 해는 기원 29년과 일치한다(Stauffer,p.65).
그러므로, 예수께서 공관복음에 기록이 된 단독사역을 하시기전 이미 요한
복음의 시간구조에 의하면 기원 29년에 있었던 성전의 혁신이라는 또 하나
의 구체적 사건이 요한복음에 전승으로 기록이 된 것이다.
기원 29년의 이 유월절이 지난후 예수는 교훈과 세례와 치유를 하시면서
여러 달 남쪽에 체류하였다(요한복음 2:23,3:2, 22이하, 4:45, 눅.4:44).
이럴즘에, 세례요한은 요단강 중간지역에서 사역을 계속하고 있었다. 그러
므로 세례요한의 활동이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까지 파급이 되었을 것이다.
상황적인 이해는 지극히 타당성이 있는 견해이다. 이 때에 요단강 하류에
서 행한 예수의 사역은 세례요한의 사역과 흡사한 세례가 있는 사역이었으
나(요한복음.3:22,26,4:1이하) 그러나 이 세례는 초대교회가 예수의 이름
으로 집행한(마태.28:19이하, 행.2:38) 세례집전과는 구분이 되며 동일하
지 않다. 짐작컨데 예수의 초기에 있었던, 세례요한과일치하는 세례사역은
회개의 설교를 들으면서 무리들은 각자가 물속에 들어가 각자가 씻는 행위
이며 주의 이름과 아버지 하나님과 성령의 이름으로 집전하는 형식이 아니
었다. 또한 성서 신학적으로 말한다면 성령강림이전, 성령의 은사가 이해
되기전의 세례사역(Baptismal ministry)이었다고 생각하여야 한다.
주의 활동이 세례요한의세례운동과 밀착이 되었을 시의 이 초기횔동이 베
드로와 마가의 안목으로는 순수한 예수의 독자적 사역으로 구분이 되지 않
았으므로 베드로의 형식(the Petrine formulae)인 마가복음의 구조로 본
예수의 생애에 관한 지식안에는 그러한 부분이 생략되었으며보존 된바 없
는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에 관한 제 4복음의 관점은 공관복음과 상당히 격차가
있다. 신약학자의 견해중에 상당한 비중이 있는, 요한복음의 집필 장소에
관한 정설인 에베소에서 요한이 집필하였기 때문에 그 지역사정에 따라 그
곳에서는 아직 세례요한의 제자들과 예수의 공동체와 사이에 긴장 관계가
수그러지지 않은 형편이기에 이러한 긴장상태에서 요한이 예수와 세례요한
의 사역이 서로 어떤 성격의 것인지를 비교하여 천명하였다고 하는 해석이
주목이 된다(참조, 행. 18:25이하, 19:3이하). 특히 사도행전 18:24이하에
보면, 알렉산드리아 출신이며 학문이 많고 성경에능한 아볼로가 에베소에
방문하여 열심히 예수에 관한 것을 자세히 말하며 가르쳤으나 요한의 세례
만을 알 따름이라고 기록한 저자 누가는 아볼로의 예수지식과 예수의 사역
이 세례요한의 세례로 집약이 된 그러한 지식이었음을 암시한다.
물론 기원 29년, 예수께서 성전을 청결하신 그 무렵에도 이미 가나의 혼
인집에서 값진 포도주의 이적을 최초로 나타내 주시므로 금욕과 금식이 특
징인 세례요한과 상당히 거리감이 있는 독자성을 보이긴 하였으나 그러나
요한복음 2:23이하가 의미심장하게 집약하고 있는 그대로, 예수의 교훈을
듣고 이적을 보고 믿는 사람이 상당수 있었으나 아직 예수는그러한 인간의
공감이나 동조를 믿지 않았으며 계속 세례요한의 사역의 그늘에 머물러있
기를 선택하였다. 우리 한역에 "예수는 그 몸을 저희에게 의탁하지 아니
하셨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 한 문절은 RSV 영역에 있는
표현처럼 ("but Jesus did not trust himself to them")예수의 초기의 사
역에 관한 민심의 반응과 예수의 용의주도한 자세를 표현한 상황판단과 관
계있는 것으로 해석하여야 살아있는 의미가 감지된다. 세례요한의 사역의
그늘에 머물러 계신 하나님의 아들(filius dei incognitus)인 예수는 거듭
거듭 당신의 메시아 비밀이 노출되지 않도록 용의주도하게 사람들 사이에
생활 하였다.
요한복음 2:3이하의 맥락으로 판단하면 이러한 초기의 예수의 활동과 사
역에 관한 비밀을 모친만이 홀로 숙지 한바이고 제자들의 지식은 거저 그
들의 안목에 비친 예수의 행위가 세례 요한과는 쉽게 구별이 되는 독자적
이고도 새로운 특징으로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왜냐하면, 세례요한은 광야
의 예언자이며 금욕적이고 그의 설교는 심판과 회개의 불같은 외침이었으
나 예수의 사역이 점차로 독자성의 것으로그 특징이 집약된 바에 의하면,
그는 광야보다는 도시의 설교자였으며, 번잡한 로변과 항구와, 선창가와
호반과 포도원과, 들꽃이 있는 길과, 밀밭사이와, 동네 어귀와 회당안에서
그리고 성전의 구내에서 드러내 놓고 교훈과 비유의 설교를 행하였다. 예
수는 구태어 금욕주의적 생활을 최선이라고 말씀하지 않았고 서민이나 불
법자들과도 쉽게식탁을 함께 하였으며 포도주를 물리치지 않았다(눅7:34).
"인자는와서 먹고 마시매 너희 말이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라"
의 요약은 예수를 비판하는 원수들이 지어 낸말이면서 또한 세례요한의 제
자였다가 예수에게로 옮겨 온 안드레, 빌립, 베드로, 그리고 나다나엘등이
또한 같은 모습을 보았을 것으로 생각이 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에게
서 거룩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보았다는 사실적근거가 중요하다(요1:14
). 제자들은 비로소, 풍요와 아름다움과 넉넉한 마음씨와 그리고 사람들의
웃음속에 함께 웃음이 있는 그러한 구약의 하나님의 형상을 예수 그리스도
에게서 발견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드디어 제자들의 안목에 확연한 변화가 목격 되었다. 위대한 광야의 설교
자 세례요한의 이미지가 빛을 잃어가며 그와 함께 새로운 삶의 길을 약속
하는 새로운 시대가 열려가고 있었다(요1:16이하,3:29이하,막2:9,눅4:19).
특히 마가복음 2:10에 나오는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며 지붕에서 구멍을 뚫고 내려온
중풍환자를 치유한 예수의 사역에 관한 기록에서 지극히 초기부터 명백한
사실, 다시 말하여 세례요한과의 대비적 차이가 요한이 회개의 설교자였는
데 반하여 예수는 이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를 보이신 인자였다고 하는
놀라운 사실이였다.
이러한 초기활동에서 예수는 많은 호감을 불러 일으켰으나 또한 심각한
적대감정도 일으켰다(호감을 보인 반응은 요.2:23,3:26,4:1,41. 그리고 적
대적 비판은 요.1:11,46,4:44.마태.8:10,눅.13:7,34). 이럴즈음의 예수의
교훈은 아직 토라(Torah) 즉 모세의 오경과 정면 충돌하는 인상이 아니었
다. 또한 아직은 안식일을 지키는 일에 관해서도 온건하게 순응하는 인상
이었다. 그렇게 일관성있는 해석에서 보면 예수께서 초기에 행한 성전혁신
의 사건은 아직 세례요한의 과격한 심판행위나 그의 비판적인 활동과 같은
맥락에 연관이 있어 보인다고 Stauffer교수가 유추한 견해는 일리가 있다
고 생각이 된다.
Stauffer교수의 견해를 따라가면, 이 초기에 감행한 예수의 성전 청결의
과격행위의 배후에는 세례요한이라는 거목이 서있는 것으로 예루살렘 당국
이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당시의 상황에서 짐작하여, 모사꾼들인 교활한
안나스의 사람들이 성전의 살림을 맡은 관리자들이였으며 저희들은 팔레스
틴에서 많은 사람들이 두려워 하는 세도가들이였고 또한 심한 증오의 대상
이였다. 원래, 예루살렘의 성전 가까운 시온산근처에 성전 희생들을 손쉽
게 구입할 수 있는 시장이 오래전 과거부터 있어왔다.그런데, 안나스가 재
산을 치부하기 위한 수단으로 표면으로는 순례자들의 편의를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그러한 같은 기능의 시장을 성전구내 이방인의 뜰안으로 끌어 들
였다. 일반여론은 이 교활한 변칙을 심히 증오하여 비평적이었다.
이러한 민심의 반목은 또 하나의 해석을 추가하면서 더욱 격한 감정이 되
고 있었다. 그러한 감정은 경외전 마카비후서 3장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내용과 관계가 있다.
대제사장 오니아스(Onias)가 성전을 집전하고 있을때, 성전시장의 이권에
불만을 품은 경비대장 시몬이 다소의 총독 아폴로니우스(Appolonius) 에게
도주하여 성전의 내부에 희생제사와 상관없는 다량의 금은 보화가 숨겨져
있다고 거짓 고발을 하였다. 총독은 분봉왕에게 그 부정축재를 압수하라고
요구하였고 분봉왕은그 집행을 헤리오도로스(Heliodorus)에게 명 하였다.
헤리오도로스는 그러한 사실을 성전의 당국에게 통고한 후에 정한 날에 감
사행을 하기 위하여 성전에 접근하였다. 그런데 대제사장과 제사장들의 금
식기도와 예루살렘의 모든 경건한 유대인의 간구를 들으신 여호와가 성전
을 지켜, 군마를 탄 여호와의 사자가 성전안에서 달려나와 그 기사가 탄
말의 앞발이 기고만장한 헬리오도르스의 머리를 쳐 쓰러뜨렸다. 그리하여
하나님이 친히 그들을 물리쳐 주셨다는 그러한 내용이다. 유대인들은 이
마카비 후서의 기사를 잘 알고 있다. 그리하여 부패한 안나스의 성전은 하
나님이 버리셨기 때문에 빌라도가 성전재정에 손을 대어 감히 사용하여도
하나님이 그 이방인을 그대로 살려 두신다고 하는 해석을 하였다. 그러한
견해가 민심으로 돌고 있을때였기 때문에 예수께서 초기에 성전을 진노의
채찍으로 혁신할때 주변의 호응이 긍정적이었다고 하는 상황설명도있었다.
(Stauffer,p.67).
예수의 이러한 초기의 성전혁신의 사건에 대한 주변에있었던 긍정적인 호
응은 상당히 광범하여 바리새인들과 또한 예루살렘의 산헤드린(the Great
Sanhedrin)의 회원중에도 호응자가 있었다(요.3:2,7:50,19:39). 왜냐하면
예수께서 예루살렘 성전을 성결하게 일치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예수의 열심있는 혁신행위를 보고 제사장들은 못마땅하게 생각을
하였다(요.2:18). 그러나 예수의 행위는 세례요한의 많은 동조자의 호응이
함께 하였으며 제사장들이 예수의 당돌한 행동에 맞서서 재제를 가하다가
섣불리 일이 확대되면 저희들 성전 기득권 마저 위태롭게 할 수도 있다고
판단이 되었기에(막. 11:32) 어찌 할 도리가 없었을 것이다. 저희들의 깊
은 원한과 사려깊은 모의는 공개적으로 예수의 행위에 대하여 재제를 가하
므로 백성들의 호응을 더 불러 일으키게 만드는 일을 피하여, 대신에 왜곡
과 중상으로 예수의 행위와 민심을 단절시키므로 예수를 고립시킨 후에 결
정적인 시기에 체포하여 제거하는 술책을 세운다(막11:18-,눅19:47이하).
이럴즈음 예수와 제자에게 더 긍정적인 교훈이 있음을 발견하고 좋게 생
각하는 무리들이 그 주변에 모이기 시작을 하더니, 점차로 그 추종자들의
수가 세례요한의 추종자보다 더욱 커지면서 양편의 추종자들 사이에 원치
않은 긴장관계가 생기게 되었다. 그러한 불행한 긴장관계가 계속하면서,
그러한 사태진전에 대하여 예루살렘에 본거지를 두고 있는 바리세인들이
집요하게편승하려고 하는 모종의 새로운 사태가 발전하는 기미가 보이자
예수는 일행과 함께 남쪽 유대지역을 떠나 북쪽으로 물러서야 할 신호로
해석을 하였다(요.4:1). 어찌하여세례요한과 예수의 제자간에 있었던 시샘
과 긴장(요.3:25-30)이 있었음을 바리세인들이 들었을때에 예수의 일행은
남쪽을 떠나야 할때라고 판단을 하였을까. 요한복음 3:25에 많은 사정을
함축한 문절이 나온다. 예수와 세례요한과의 불안한 관계는 세례에 관한
한 유대인과의 변론이 시발점이라고 하였다. 결례에 관한 논쟁은 바리세인
의 전담분야이다. 짐작컨데 바리세인이 세례요한을 끊어버리고 예수와 밀
착하려고 하는 인상을예수는 민감하게 감지하였을 것이다(Stauffer,p.6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