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성서의 실존론적 해석 - 불트만

신약성서 메시지를 파악함에 있어서 불트만은 역사주의의 방법에 따라 과거에 일

어난 예수의 사건을 분석, 재구성하여 예수의 사건이 인간과 세계의 운명에 대하여

무엇을 말하는가 보다 오히려 인간의 실존이해에 있으며, 이것을 파악하는 것이 신

약성서 해석의 목적으로 보았다.(Glauben und Verstehen I , 159)

불트만에 의하면 신약성서는 인간의 두 가지 실존 방식을 알고 있다. 인간은

누구를 막론하고 미래를 지향하며 본래의 자기를 얻으려고 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

다. 그러나 그것을 어떻게 얻고자 하는가에 따라 두 가지 실존 방식이 나누어진

다.

1. 불신앙적이며 구원받지 못한 실존 : 하나님을 알지 못하며 구원받지 못한

인간은 눈에 보이는 것, 자기가 지배할 수 있는 것, 이 세상에 속한 것을 수단으로

살아간다. 그러나 인간은 이로써 자기의 삶과 생명에 대한 보장을 얻는 것이 아

니라 오히려 자기의 삶과 본래성을 상실한다. 불안과 절망이 강하면 강할수록

그는 더욱 더 자기 자신과 자기의 소유에 집착한다. 그는 자기의 본래성을 자기

의 힘으로 얻고자 하며 이로 인하여 참된 미래에 대하여 자기를 폐쇄시켜 버린다.

바로 이것을 가리켜 성서는 죄라고 말한다. 불트만에 의하면 죄란 자기의 미래와

본래성을 자신의 힘으로 얻고자 하는 인간의 "교만", 즉 자기를 하나님으로 만드는

것이 죄이다.

2. 하나님을 신앙하는 실존, 구원받은 실존 : 하나님을 믿는 사람, 구원받은

사람은 인간의 모든 자기 보장을 포기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것으로부터 살아 간

다. 하나님에게 자기를 철저히 맡기며 모든 것을 하나님이 주시기를 기다리는 이

헌신을 통하여 인간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자유롭게 된다. 이러한 자유로운 삶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 가능하다. 이 때 그의 참된 미래가 열

리며 인간은 자기의 본래성에 도달한다.

이렇게 실존하는 것을 가리켜 불트만은 "종말론적으로 실존하는 것"이라 말한다.

이 사람은 이 세계 안에 살지만 이 세계를 벗어난 사람(Entweltlichter)으로서 살

아간다. 불신앙의 실존에서 신앙의 실존으로 넘어갈 수 있는 길은 무엇인가?

신약성서에 의하면 이 길은 그리스도의 사건을 통하여 가능하다.

그리스도의 사건은 하나님의 은혜의 사건이다. 이 은혜를 받아들일 때 불신앙의

실존은 신앙의 실존으로 변화한다.

불트만에 의하면 철학과 신학은 이 문제와 관련하여 일치점을 가지는 동시에 구

분된다. 양자는 인간의 "참 본질" 곧 그의 본래성을 문제삼는 점에 있어서 일치

점을 가진다.

그럼 이 실존이 어떻게 실현될 수 있는가?

철학은 인간의 타락에 대하여, 인간은 참 자기를 잃어 버렸으며 참된 길을 잃어

버렸다. 그러나 철학은 인간의 비본래적 상황을 철저히 절망적인 것으로 보지 않

는다. 그러므로 자기의 자연적 본래성에 이르기 위하여 인간은 하나님의 계시를

필요로 하지 않으며 단지 인간적 사색과 결단을 필요로 할 뿐이라고 생각한다.

이에 반하여 신약성서에 의하면 비록 인간이 자기의 현재 상황과 본래성을 안다

할지라도 자신의 힘으로 이 본래성을 얻을 수 없다. 인간은 그 자신을 해방할

수 없다. 이 해방은 오직 밖으로부터 일어날 수 있다. 다시 말하여 하나님의

사랑만이 인간을 자기 자신으로부터 해방하여 믿음과 사랑안에 있는 새로운 삶으로

인도할 수 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구원의 사건이며, 바로 여기에 신약성서와

철학, 기독교 신앙과 "자연적" 존재이해의 차이가 있다.

불트만에 의하면 구원의 사건은 십자가와 부활의 사건을 말한다. 즉, 옛 세대

에 대하여 종지부를 찍고 새 세대를 시작케 하는 종말론적 사건인 십자가 사건은

과거의 역사적, 신화적 사건이 아니라 오늘 나에 대하여 현재적 사건이다. 십

자가를 믿는다함은 지난간 역사적 사건의 신화론적 표상을 믿는것이 아니라, 그리

스도의 십자가를 나의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불트만에 있어서 그리

스도의 부활은 십자가에 불가분리적으로 연결되며 부활은 "십자가의 의미의 표현"

(der Ausdruck der Bedeutsamkeit des Kreuzes)에 불과하다.

여기서 부활은 십자가의 사건에 흡수되어 버리며 그 자신의 의미를 갖지 못하게

되는 문제점이 나타난다.

예수의 죽음을 한 인간의 죽음으로 인식하지 않고 구원의 사건으로 인식할 수 있

는 길은 무엇인가? 불트만의 답변 : "그리스도, 십자가에 달려 죽었고 부활하신

그 분은 선포의 말씀 속에서만 우리를 만난다. 말씀이 울려 퍼질때 십자가와 부

활은 현재가 된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나에게 지금 여기에서 선포

되는 말씀을 믿는다는것을 뜻한다.(Kerygma und Mythos I , 28 f.) 여기서 불트만

은 그리스도는 제자들의 믿음과 선포속으로 부활했다고 비판받을 수 있는 여지를

남겨 놓고 있다.

"Kerygma"는 "보냄받은 자의 부름", "메시지", "선포", "증언", "설교"를 뜻한

다.

신약성서에 있어서 그것은 나에 대한 하나님의 인격적 말씀(Anrede) 곧 불신앙의

실존이냐 아니면 신앙의 실존이냐를 지금 여기에서 결단케 하는 말씀을 뜻한다.

볼트만에 있어서 설교가 곧 구원의 사건이라고 말할 수 있다.

창조로부터 시작하여 이스라엘의 선택과 계약,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과 부활과

승천에 이르는 일련의 사건들이 볼트만에 있어서는 "지금"이라고 하는 한 점에, 다

시 말하여 말씀이 선포되는 이 "순간"(Augenblick)에 집중된다.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 계시의 사건이 현재화되는 설교 혹은 선포는 우리의 눈

을 열어서 새로운 "자기이해"(Selbstverstaendnis)를 부여한다. 선포는 우리에

게 과거의 일들에 대한 객관적 지식을 주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실존이해

내지 자기이해를 열어주며 이를 통하여 그의 타당성을 증명한다.

한 마디로 말하여 우리는 "하나님에 대하여"(ueber Gott), 내 자신의 실존과 관

계없는 하나의 객관적 대상인 것처럼 하나님에 대하여 말할 수 없다. 우리는 오

직 "하나님에 관하여"(von Gott), 내 자신의 실존과 관계된 분으로서의 하나님에

관하여 말할수 있을뿐이다. 신학은 오직 인간과 그의 실존에 관하여 말하므로써

만이 하나님과 그의 행위에 관하여 말할 수 있다.

여기서 불트만은 신학(theology)를 인간학(anthropology)로 폐기한다는 비판을

받지만, 인간의 자기이해, 인간의 실존과 관계없는 하나님은 아무 의미도 없다고

주장한다.

불트만에 의하면 신앙은 말씀의 선포 곧 케뤼그마에 의존한다. 선포되는 말씀

이 신앙의 유일한 근거이다. 케뤼그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우리를 만나며 새

로운 자기이해를 요구한다. 이 요구에 복종하지 않고 그것의 신빙성 내지 옳고

그름에 대한 질문을 제기하는 것은 불신앙의 행위이다.

그러므로 불트만은 역사의 예수 혹은 실사의 예수(historical Jesus)에 대한 질

문은 거부한다. 신앙은 실사의 예수와 관계하는 것이 아니라 케뤼그마와 관계하

며, 케뤼그마가 증명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믿는다는 바로 이 점에 있어

서 신앙은 참 신앙으로 증명된다.

복음서가 우리에게 제시하는 예수는 실사의 예수 혹은 역사의 예수가 아니라 초

대 공동체가 신앙하였고 선포한 "신앙의 그리스도"이다. 하나님이 원하는 것은

예수의 실사 혹은 역사에 대한 객관적 지식을 우리가 얻게 되는것이 아니라 복음서

가 선포하는 신앙의 그리스도에 대한 결단이다.

불트만 신학의 문제점

1. 불트만은 성서의 메시지를 인간의 실존, 인간의 자기이해로 위축시킨다. 하

이댁거의 실존철학으로 말미암아 불트만은 신약성서 메시지의 내용까지 인간 실존

의 문제에 제한시키는 오류를 범한다. 그러나 성서에 있어서 하나님의 계시는 하

나님의 창조로부터 시작하여 역사의 종말에 올 "새 하늘과 새 땅"을 포괄하는 세계

사의 지평 속에서 일어난 사건이다. 오늘의 신학에 의하면 하나님의 계시는 하나

님의 존재와 인간의 존재를 계시하는 동시에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의 공의와 자비

와 평화 속에서 함께 사는 "하나님 나라", 역사의 미래가 앞당겨 일어나는 사건이

다. 몰트만에 의하면 불트만은 세계의 "미래에 대한 보편사적 질문을 실존에

대한 질문으로 대치시키며 이리하여 의로운 세계에 대한 신정론의 문제

(Theodizeefrage)를 자기 자신과 일치하는 실존에 대한 동일성의 문제

(Identitaetsfrage)로 대치시킨다."

2. 불트만에 있어서 "역사"는 현재의 "순간"속으로 폐기된다. 인간이 믿음 속

에서 자기의 생명을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로 받는 이 "순간"속에 역사의 의미와 목

적이 있다. 바로 이 순간이 "역사의 종말"이다.

이로써 종말론이 가진 세계사적 지평은 개인의 실존이해로 위축되어버린다.

개인의 신앙적 실존이해의 결단을 내리는 사건 곧 완전히 개인적인 일로 되어 버린

다(Privatisierung): 피조물의 세계 전체를 포괄하는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의 역사

는 "실존주의적 방구석 장난(Kammerspiel)"이 되어버린다.(R. Bohren, Ev. Theol.

1962, 83).

3. 불트만에게 있어서 인간의 실존은 모든 사회적, 세계적 관계로부터 추상된 내

적 자아를 말한다. 하나님의 창조한 세계, 인간이 그 속에서 살 수 밖에 없는 현

실의 물질적 세계에 대하여 볼트만의 신학은 아무 것도 말하지 않는다.

이에 대하여 몰트만 : "세계에 대한, 역사에 대한, 사회에 대한 관계를 통하여

결정되어 있지 않는 인간의 자기이해란 것이 도대체 생각될 수 있는가? (Th. der

Hoffnung, 57).

하나님은 인간의 자아에 대하여 말씀할뿐 아니라 세계를 위하여, 세계에 대하여

행동하며, 세계 속에는 인간 실존뿐 아니라 사회와 국가들과 자연의 세계가 존재하

지만, 이 모든 것이 불트만의 신학에 있어서는 기독교 신앙에 대하여 아무 의미도

없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에 대하여 Carl Friedrich von Weizsaecker:불트만의

신학에 있어서

인간의 실존과 자연이 괴리되어 있다. 인간 실존을 신앙의 영역으로, 자연의 세

계를 자연과학의 영역으로 나누는 것은 두 분야에 대하여 너무도 좁은 영역을 할애

하는 것이다.(Zum Weltbild der Physik, 1963, 263) 따라서 불트만이 말하는 신

약성서 신화의 실존론적 해석도 개인의 사적(private) 실존과만 관계되어 있으며

현실의 세계와 그의 미래에 대하여 아무 것도 말하지 않는다.

4. 역사의 예수에 관한 문제:불트만에 의하면 예수에 관한 신약성서의 자료들 혹

은 전승들은 초대 공동체의 신앙과 삶과 선포에 의하여 형성되어 있다. 그것은

실사적 자료가 아니라 신앙의 증언들이다. 그러므로 기독교 신앙은 실사의 예수

를 그의 근거로 삼을 수 없다. 그것은 단지 예수가 이 세상에 오셨다는 사실성

(Dass)과 초대 교회의 선포 곧 말씀을 그의 근거로 가질 뿐이다.

따라서 "실사의 예수"(historical Jesus)와 "케뤼그마의 그리스도"(kerygatic

Christ)의 관련성이 불트만에게서는 부인되고 후자는 실사적 근거를 상실한 비역사

적 관념(idea), 무역사적 진리가 될 수 있다. 케뤼그마의 그리스도는 그의 실사

적 정체성(identity)을 상실한, 인간의 주관적 환상(phantasy)이 될 수 있다. 이

를 가리켜 바르트는 "가현설의 무서운 냄새"라고 말한다. 이를 가리켜 "케뤼그마

의 탈역사화"(Enthistorisierung des Kerygmas), "가현설의 무서운 냄새":(바르트)

라고 말할 수 있다.

"역사의 예수"와 "케뤼그마의 그리스도"의 분리는 불트만의 신학이 "방법론적

이원론"으로서 한 편으로 그리스도의 사건을 역사적-비판적으로 연구하여 예수의

오심과 그 존재의 사실성(Faktiitaet)외에는 아무것도 남겨 두지 않는다. 다른

한 편 선포되는 그리스도의 사건을 철저히 종말론적 사건으로, 즉 하나님이 인간의

구원을 일으키는 종말론적 사건으로 파악한다.

하나님이 예수 안에서 활동하였다는 것은 오직 신앙 가운데에서만 인정할 수 있

는 "파라독스"이다. 그러나 불트만에 있어서 하나님의 이 활동은 아무 것도 알

수 없기 때문에 이 파라독스는 "내용이 없는, 공허한 파라독스"이다. 이 공허한

파라독스가 어떻게 신앙의 근거가 될 수 있는가?

신약성서가 말하는 신앙의 개념을 설명할때 불트만은 철저히 결단과 복종의 면을

강조한다. 그러나 불트만에 있어서 이 결단과 복종을 요구하는 것은 역사의 예수

의 부르심이 아니라 인간의 본래성을 말하는 하이댁거 철학의 부르심으로 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