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성서에 나타난 "쉼"

이 형 의 (서울장로회신학교 교수/신약학)

Ⅰ. 쉼의 문제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모범적인 그리스도인 사역자의 조건으로, 쉬지 않고 열심히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을 들 수 있다. 그 모델로 우리는 사도 바울을 생각케 되는데, 그는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다"고 확신하였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에서는 쉬지 않고 너무 무리한 나머지 자신에게 주어진 사역을 다 감당치 못하고 중단하는 목회자들의 안타까운 경우를 가끔 보게 된다. 그러므로 때로는 쉼이 절실하게 요구된다는 것을 인정치 않을 수 없다. 과연 신약성서에서 쉼(휴식)이란 정당한 덕목으로 나타나는지, 그리고 그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현대 사회가 산업화 사회에서 후기 산업화 사회로 들어서면서 대중 문화가 일의 문화에서 쉼 또는 놀이의 문화로 옮겨가는 것을 보게 된다. 따라서 현대인에게 가장 큰 관심의 대상은 무엇을 먹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노느냐로 바뀐 것이다. 얼마 전에 신문에서 젊은 직장인들이 더 많은 봉급을 받기보다는 더 많은 여가 시간을 원한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서구 선진 사회는 말할 것도 없고 이미 우리 나라에서도 여가 문화가 지배적인 현상으로 나타나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여기에서 쉼의 개념은 '휴식(Recreation)'에서 '여가(Leisure)'로 바뀌었고 모든 삶이 여가로 지향하고 있음을 본다. 이것은 근본적으로 쉼에 대한 잘못된 이해에서 기인한 것이며 그러한 잘못된 이해에서 현대사회의 수많은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

쉼은 일한 후에야 기대될 수 있는 것인데 수고는 없이 쉼만을 추구하는 데서 사회적 병폐가 생기는 것이다. 현대인의 고민은 여가는 보다 많이 누리는데 스트레스는 그보다 더 많이 쌓인다는 기현상 속에서 진정한 쉼을 소유하지 못하는 데 있다. 그것은 극한적인 경쟁사회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스트레스의 중압감을 벗어나고자 왜곡된 여가를 끝없이 추구하는가 하면 치열한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쉼을 무시하고 일에만 매달리는 양극화된 상태를 나타낸다.

신약성서의 메시지는 근본적으로 그러한 상황과는 다른 배경에서 쓰여졌다. 즉 그것은 산업화 이전의 농업노동을 기초로 한 고대 봉건적 사회를 배경으로 한 것이다. 그러나 진정한 쉼을 요구하는 현대인의 삶의 상황에 비추어 성서의 본문(Text)을 새롭게 음미하므로 거기에서 오늘을 위한 메시지를 찾아내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Ⅱ. 종말론적 쉼

앞에서 인용한 사도 바울의 말에서처럼 그가 지향한 것은 현세에서의 모든 싸움과 달려갈 길을 마친 후 그의 삶이 끝나는 날 주어진 쉼(안식)이었다. 그것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기대하는 궁극적 쉼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궁극적 쉼은 개인적인 삶의 끝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의 모든 현상이 종말을 고하는 현세의 마지막 때에 이루어질 영원한 안식에 근거하여 기대되는 휴식이다. 즉 종말적 안식 이전에 생을 마친 모든 신앙인의 영혼이 그때까지 휴식을 취한다는 의미에서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종말적 쉼을 지시하는 성경본문으로 계 14:13을 들을 수 있다.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가로되 기록하라. 자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가라사대 그러하다 저희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저희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리니."

이 본문의 전후 문맥을 검토할 때 단순히 성도의 죽음에 관하여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종말에 일어날 영적 전쟁의 상황을 염두에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죽음 그 자체가 세상의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편으로 인식될 수 있는데, 진정으로 복 있는 자들은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이라고 한다. 그 이유는 저의 수고를 그치고 쉬게 되기 때문이다.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순교자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되며 "저희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ՍՁՐՁԾՓՏՍՔՁՉ ִՊ Ք،Ս Ձ״Ք،Ս)"라는 말씀 가운데 수고를 나타내는 희랍어 코포스(Պ՜ՐՏՒ)는 고통이 동반하는 힘든 일을 의미하며 여기서는 그리스도인이 당하는 수난과 박해를 가리킨다고 하겠다. 즉 종말의 박해기에 주를 인하여 매맞고 고문당하고 죽임까지 당하게 될 성도들이 온갖 고통에서 마침내 벗어나게 될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 구절에서 쉰다는 동사로 ֢ՍՁՐՁ՝ՙ가 쓰여졌는데 거기에서 파생된 ֢ՍԼՐՁՕՓՉՒ(쉼)이라는 명사가 계 14:11에도 나타난다. 그 본문에서는 이 단어를 사용하여 불신앙인들이 종말 때 안식에서 제외될 것을 말하고 있다.

본래 희랍어 ֢ՍԼՐՁՕՓՉՒ는 일시적인 휴식(refreshment)이나 여가의 휴식(recreation)을 뜻하는 것이었으나 신약성서에서는 일반적으로 보다 영속적인 쉼을 의미하는 안식의 뜻으로 사용되고 있음을 보게 된다. 그러나 구약의 안식일(Sabbath)과 관련하여 안식 혹은 쉼을 나타낼 때는 ՊՁՔՁՐՁ՝ՙ라는 동사와 ՊՁՔՁՐՁՕՓԿՒ라는 명사를 쓴다. 그 예는 히 4:9, 10의 "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의 자기 일을 쉬심과 같이 자기 일을 쉬느니라"는 말씀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이 본문에서는 종말에 주어질 성도의 쉼을 구약에 나타나는 안식의 개념으로 표현하지만 거기에 담긴 근본적 의미는 계 14:13의 의미와 일맥상통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이러한 사상은 임박한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살았던 초기 그리스도인들과 한편으로는 극심한 시련과 박해 아래서 현실적인 삶의 고통을 견뎌 내야 했던 박해기의 신앙인들에게서 찾아 볼 수 있는 특징이라 하겠다. 그런데 이 사상의 배후에는 육체의 죽음을 통하여 이 세상의 고난으로부터 벗어나 진정한 영혼의 자유를 누릴 수 있다는 희랍 철학적 해방관이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으나, 그보다는 구약에 나타나는 안식의 개념이 초기 그리스도인의 종말론적 신앙에 적용되어진 것으로 봄이 더 타당할 것이다. 그러한 사실을 뒷받침해 주는 것으로 계 14:11 마지막 부분의 "이는 저희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는 말씀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종말에 순교한 성도가 쉼을 얻게 되는 것은 그들의 행한 일이 그들을 증거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들이 행한 일,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를 위해 수고하고 고난받음이 없이는 진정한 쉼을 누릴 수 없다고 해석된다. 이는 6일 동안 창조의 역사를 마치신 하나님께서 7일째 되는 날 쉬셨음 같이 모든 사람은 열심히 수고하고 일한 후에 온전한 휴식을 누릴 수 있다는 구약의 안식관과 일치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종말에 누리게 될 안식은 수고한 성도에게 주어지는 소망인 것이다.

Ⅲ. 쉼에 대한 잘못된 이해

사람들은 쉼에 대한 강한 욕구를 가지며, 때로는 모든 삶을 휴식의 연장된 상태로 유지하려고 한다. 일과 휴식이 조화를 이룰 때 바람직한 삶이 이루어진다고 여기면서도 점점 더 일보다는 휴식을 추구하고 있음이 오늘의 현상인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가치 있는 쉼을 올바로 추구하느냐 하는데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진정한 쉼을 얻는데는 물질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며 부가 휴식을 위하여 가장 중요한 조건이라고 여긴다. 그러나 물질의 풍부와 재화가 반드시 참된 쉼을 가져다주지 못함을 많은 경우에서 보게 된다.

그 한 예를 신약성서 가운데서 발견케 되는데 바로 눅 12:16-21에 나오는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이다.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여 그것을 쌓아 둘 곳이 부족하므로 곡간을 더 짓고 거기에 가득 채운 후에 그 자신에게 말하기를 "내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쌓아 두었으니 편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였다는 것이다.

일생 동안 재산 축적에 전력을 기울이며 조금도 쉼이 없는 삶을 사는 사람만큼 어리석은 사람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 부자는 다행히도 자신에게 쉼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꼈다. 문제는 그가 잘못된 안식을 구하였다는데 있다. 그의 재산축적을 그의 수고와 노력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다른 사람들의 노동력을 착취함으로 얻은 것이었다. 1세기 팔레스틴에서는 소수의 사람만이 부유층에 속하고 대부분의 주민은 종이나 소작농 혹은 수공업에 종사하는 빈한한 계층이었다. 이 당시 부유층은 다음과 같은 부류들이었는데, 대제사장과 그의 가족들이거나 헤롯 가문에 속한 자들과 그들에게 충성하는 일파가 있었으며, 한편으로는 기존의 유대귀족의 후손들이 여전히 부를 누렸다. 그리고 또 하나의 부류로는 상업과 무역업을 통해 부를 모은 상인들이 있었다. 상인들을 제외한 이들의 부의 기초는 토지에 있었으며, 그들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땅을 넓혀 광대한 농토를 통해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또한 그들은 소작농과 노예 혹은 날품팔이 노동자들의 노동력을 싼값에 이용하므로 쉽게 부를 늘려 나갈 수 있었다.

본문의 비유에 나오는 부자 역시 이러한 부류에 속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는 아마도 많은 재물을 쌓아 두고 불안함으로 때로는 지나친 권태로움으로 잠 못 이루는 밤을 지내기도 했던 것 같다. 그에게는 식구들의 생계를 위하여 노동판에서 하루종일 수고하고 돌아와 깊은 잠에 빠져 휴식을 취하는 가난한 노동자의 행복이란 없었다. 다행이라고 할는지, 큰 풍년이 들므로 그의 창고에 쌓아 놓을 수 없을 만큼 많은 소출을 거두었다. 그는 그 물질의 풍부함에 만족을 느끼며 그것을 통하여 그 동안 진정으로 쉼을 얻지 못했던 자신의 영혼에 안식을 제공하고자 했다. 그러나 그는 잘못된 방법을 택하였던 것이다. 이 부자는 풍요로움 가운데 가난한 이웃과 은사를 베푸신 하나님에 대한 관심은 제쳐 두고 자신의 부를 오로지 이기적으로 만끽하려는 데서 진정한 안식을 누릴 수 없었다. 그가 아무리 스스로를 즐기며 평안을 누리려 해도 그의 양심은 이웃에 대한 윤리적 불안과 종말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인간의 실존은 미래에 대한 불안에 떨 수밖에 없으며, 그것을 떨쳐 버리기 위해 술을 마시며 마약을 하고 환각상태에 빠져 보아도 소용이 없다. 그 영혼 깊숙이 도사리고 있는 종말에 대한 두려움으로부터 어떤 재물이나 인간적 방법도 해방시켜 주지 못한다.

Ⅳ. 참된 쉼으로의 초대

우리는 신앙인의 궁극적 쉼이 종말에 이루어질 안식에 근거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이 세상의 고달픈 삶의 현장에서 연약한 육체와 정신을 지닌 인간은 때때로 쉼을 절실히 요구한다. 이것은 누구나 당면하게 되는 문제이며, 그에 대한 적절한 신앙적 지침을 얻기 위해 예수님이 쉼에 대하여 어떻게 가르치셨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복음서 가운데 예수께서 쉼에 대하여 언급하신 것은 그렇게 많지 않다. 간혹 쉼에 대해 말씀하시는데 그것은 대체로 지치고 낙심한 제자들을 향하여 쉴 것을 권유하는 말씀들이다.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음식 먹을 겨를도 없이 사람들에게 시달리는 제자들에게 따로 한적한 곳에 와서 잠깐 쉬라고 하시며(막 6:31), 죽음을 앞에 두고 감람산에서 기도하시는 예수님을 따라 슬픔과 두려움으로 밤을 지새우는 제자들에게 결정적인 시간이 다가왔을 때 이제는 자고 쉬라고 말씀하신다(마 26:45). 예수님은 제자들의 연약함을 너무나 잘 아셨으므로 그들에게 휴식을 권하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일시적인 휴식을 의미하는 반면에 다른 곳에서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참된 쉼으로 초대하시는 말씀을 하신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마 11:28-30)

여기에서 초대를 받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은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한 것이나, 일차적으로는 예수 당시의 팔레스틴 주민들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들은 육체적, 정신적, 영적인 삼중의 고통에 시달리고 있었다. 복음서에 언급되고 있는 바와 같이 대다수의 사람들은 생계를 위하여 포도원이나 노동판에서 힘써 일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러면서도 날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염려해야 하는 삶의 무거운 짐을 벗어버릴 수 없었다. 한편 그들은 민족적, 사회적으로 극심한 정신적 고통을 겪었는데, 로마제국의 지배 아래 속국의 백성으로 자유를 상실했을 뿐 아니라, 대부분 빈한한 하층민인 그들은 상류 지배계층에 의하여 멸시와 억압을 당하는 상태에 있었다. 게다가 위의 본문에서 지시하는 바와 같이 그들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강요하는 엄격한 율법의 규율들을 수행하지 못하므로 자괴심과 더불어 구원에서 배제 당한다는 두려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으며, 그로 인하여 그들의 영혼은 심히 곤궁한 상태에 처하였다. 이 삼중의 고통을 당하는 무리들을 예수님은 참된 쉼으로 초대하셨으니 그 쉼은 육체의 휴식 뿐 아니라 정신과 영혼까지 쉼을 얻게 하는 통전적인 쉼인 것이다.

예수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에게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하신다. 멍에는 수고를 요구하는 것이지만 그것을 멤으로 쉼을 얻는다는 역설이 담겨진 말씀이다. 때로는 일을 하지 않는 것이 쉬는 것이 아니라 일하는 것이 쉬는 것이 되는 경우가 있는데 본문의 의미가 이와 통한다 하겠다. 예수님의 멍에는 예수께서 주시는 교훈이요 그의 멍에를 메는 것은 그분과 함께 하는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진정한 쉼은 예수님과 함께 하며 그 분에게 배우고 그것을 행하는 데서 얻게 된다. 그것은 바리새파의 서기관들이 강요한 규율을 억지로 행하는 것과는 다르다.

예수님의 멍에는 쉽고 그 짐은 가볍다. 그러기에 그것은 쉼을 준다고 한다. 누구든지 예수님과의 인격적 사귐을 가지고 그 분에게서 사랑과 지혜를 배울 때 자신이 진정한 평안 속에 있음을 경험하므로 이 말씀의 뜻을 깨닫게 된다. 이것이 바로 예수께서 주시는 참 쉼인 것이다. 주님이 주시는 쉼은 우리의 삶 가운데서 누리는 쉼이다. 그것은 현세의 삶 속에서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영원한 안식을 경험케 해준다. 그러므로 신앙인은 육체가 피곤하여 휴식을 취할 때나, 주어진 일을 완수하기 위하여 힘써 일할 때나, 어떠한 곤경에 처할 때에라도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쉼으로서의 평안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얻게 되는 쉼의 개념을 종말론적 안식과 현재적 삶 가운데의 쉼과의 관계에서 이해해 볼 수 있다. 그것은 하나의 실현된 종말론적 관점에서 생각할 수 있는데 곧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쉼을 누리는 것은 우리 가운데 이미 이루어지고 있는 하나님 나라에 참여하는 삶을 살고 있음이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