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에 나타난 부활사상

제1장 이집트와 그리스에서의 내세와 부활

1. 이집트

이집트인들의 희망은 카(Ka)라고 하는 일종의 산 사람의 "영상"에 희망을 가지고 있다. 카가 미이라로 만들어진 몸 안으로 들어오기를 고대한 아크(akh) 즉 초월적 존재가 되길 고대한다. 이들은 육에 희망과 모든 관심을 가지고 있다. 육적인 기쁨, 쾌락을 최우선으로 하기 때문에 이 땅에서 살 수 있는 방법들을 연구한 결과가 바로 우리가 쉽게 알 수 있는 미이라의 모습일 것이다. 여기서 바로 기독교의 세계관과 너무나 큰차이가 있음을 볼 수 있다.

2. 그리스

그리스인들은 영혼의 불멸에 관하여 플라톤의 영향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은 불멸 교리의 네 단계는 로마의 시에서 말하는 "영혼"이며, 6세기의 오르페우스교 협회의 의식과 플라톤의 영혼의 삼분적 이해와 아리스토텔레스의 능동적 지성이다. 그리스의 영향이 기독교의 영혼 불멸이라는 말을 만들어 내는 역할을 하는데 큰 역할을 했으리라 생각 되어진다. 이유는 그리스도의 부활 이전의 사상들이 기독교의 적지 않은 공헌을 했다고 본다.

제2장 구약에서의 불멸과 부활

1. 죽음

창3:19의 말씀에서 흙으로 돌아가는 모습을 흔히 죽음이라고 말한다. 죽음은 예견된 사건임을 성경은 말한다. 성경의 많은 사람들이 죽음을 보지 않기를 소원했다. 죽음은 경험해서는 안되는 것 중의 하나임에는 틀림없는 것 같다. 예수님께서 죽은 자를 살려주신 이유도 죽음이 분명 당한 자에게는 고통과 슬픔을 동반하기에 그것을 더러주는 의미도 있었을 것이라 생각이든다. 하지만 죽음이 멸절을 가져 오는 것이 아니라 이 책에서는 sheol(음부)에 대해 많은 증명을 해주고 있다. 스올 즉 죽은 영혼의 지하 세계와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전통적인 견해이다.

2. 불멸

히브리 성경에는 불멸이라는 말에 대해 별개의 술어가 없다. 잠12:28에서 "사망이 없느니라"라는 조어적 표현이 있다. 이것은 하나님에 대하여 언급할 때만 "영구히"(forever)나타난다. 다니엘 12:2∼3에서는 부활과 불멸이 상호관계를 맺고 있다. 이것은 서로 좀 다르나 "영원한 생명"은 시체들이 소생함을 얻어 생명이 무한정 연장되는 것을 가리키고 있다.

3. 부활

부활의 두가지 관점 즉 죽은 자 가운데서 사람들이 부활하는 것 그리고 포로에서 돌아오는 것으로 인하여 실현되는 미래의 국가적, 영적회복의 묘사이다. 그러나 우리가 말하는 육체적인 부활은 미래에 일어날 희망이다. 그러나 이 희망은 믿을만한 가치가 있다. 그리고 부활할 때 의인이나 악인이나 모두 부활한다면 좀 안됐다. 악인은 그냥 놔 뒀으면 한다. 다시 살려서 고통 주느니 그냥 흙에 살게 했으면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이 심판이라는 피조물에 대한 판결을 포함하고 있다고 늘 생각하지만 지금은 말하는 자나 듣는자나 이해하기 힘들 것이라 생각된다.

제3장 신구약 중간시대 유대교에서의 불멸과 부활

1. 불멸

주전 200년∼주후 100기간 동안 불멸의 개념은 유대교의 본문들 안에 두드러진다. 오로지 불멸만을 강조하거나 불멸만을 가리키는 본문들, 부활과 불멸 두가지 사상을 조화시켜야 겠다는 필요성을 인식하거나 하지 않은 문서들이 있다. 부활 사상과 불멸 사상을 위식적으로 서로 연관시켜 놓은 분문은 팔레스타인, 디아스포라 유대교의 부활후의 의로운 자들의 상태를 죽지 아니하는 것 또는 부패하지 아니하는 것으로 묘사한다.

2. 부활

신구약 중간시대 문헌은 구약에 비하여 상당히 진전했음을 나타내며 구약과 신약의 다리 역할을 한다. 중간기의 부활의 역할을 불확실한 내세의 빛에 역할을 수행했다.

제4장 복음서(와 행전)에서의 "(죽은 자들을)살리심"

나인성 과부의 아들, 야이로의 딸, 나사로, 마27장의 성도들, 드르가 유드고, 이들을 일으키신 것을 우리가 목숨을 되찾게 함, 또는 소생케 함 또는 "살림"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다. 이유는 이들의 살림은 다시 죽음을 위한 것이다. 그러나 예수의 부활은 살림이 아니라 그보다 한 차원 높은 불멸의 의미를 포함하는 다시는 죽음을 경험할 수 없는 상태가 될것이다. 롬6:9절에서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한다고 한 것이 이를 증명한다. 예수의 죽음은 죄를 위한 단번의 죽음이나 우리의 죽음은 그렇지 못하다.

제5장 무덤에서의 부활:입증할 수 있는 역사

소생과 부활로서의 최초의 부활 사건이 역사가의 엄밀한 조사를 받게 되는 이유는 그것이 하나의 자연 현상이기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님이 분명하다. 예수의 높임(the Exaltation)에 대해서와 신자는 예수의 소생과 변화를 하나님이 하신 일로 보며 소생과 부활의 원인은 믿음의 분야에 들어간다. 부활은 역사 안에서 그리고 역사를 초월하여 일어난 사건으로 묘사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부활은 목격자들에 의해서 관찰되어진 사건이라는 의미에서 또는 더욱이 인간의 사건에 의해서 관찰 되어질 수 있었던 사건이라는 의미에서는 "역사적"인 것이 아니다. 예수의 부활 사건 자체에 대한 목격자들은 없으며 그의 부활된 상태에 있어서 예수는 정상적으로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하나님과 예수사이의 거래를 우리는 "초자연적"이라고 한다. 당연히 그러할 것이다. 신들끼리의 사건이 하나의 피조물 세계에서의 현상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상을 역사라는 전제가 있는 한 역사가 하나님과 아들 사이의 관계를 좌우하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역사라는 틀에서 우리를 사용하신 부활의 사건을 역사 속에 심어 주신 이유가 역사 밖에서 떠날 수 없는 인간 세계의 한계를 스스로 극복해 주신 이가 바로 부활하셨다는 것이다. 분명히 느낀 것은 역사적으로 증명할 수 없는 사건이지만 믿음이라는 사건으로 역사를 볼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빈 무덤을 통해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려 일으키심으로 유대인들이 예수를 배척한 일을 뒤집어 엎으신 것이었다고 기독교인들이 예루살렘에서 공공연히 주장했다. 만일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이 시체가 아직 무덤에 있다는 증거를 가지고 있거나 시체가 사라지고 없어진 것을 설명할 수 있는 증인들이 시체가 아직 무덤에 있다는 증거를 가지고 있거나 있기로 모의했다는 것은 새각할 수 없는 일이다. 후에 빈 무덤에 관한 설명에서 "기전설", 또는 "가사설"등은 18세기 독일의 합리주의와 최근에는 테레트에 의한 희랍어 아나스타시스는 신학적 의미에서 "부활"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소생"(revival)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뇌사를 임상사와 구별하면서 임상적 사망에서 소생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또 여자들의 무덤을 잘못 찾아 갔다거나 제자들의 음모로 부활을 묘사했다고 한다. 이러한 견해들은 다 역사적으로 증명하기 위한 노력의 결과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래서 믿음의 영역에서 이해해야 하는 부분이다. 아니 하나님의 방법일 수도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행위로 인하여 비어졌다. 이것은 하나님의 본질적인 문제이다. 이 문제는 제자들도 이해하지 못했다. 놀라움이나 근심함, 의심, 두려움 그리고 회의를 보였다. 예수가 다시 사셨다는 그들의 탄호성은 없었다. 이유는 믿음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보이심의 방법을 통해서 믿음의 결핍을 충족시키셨다. 죽음과 부활 사이에 행해졌다. 역사적 증명들과 고고학적 증거의 결과는 큰 관심의 대상이 될 수 없어야 한다. 이유는 그 증거들이 복음을 완성하거나 선교의 큰 전환점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안다. 그러한 증거들이 하나님의 사업에 절대적이라면 그것은 또하나의 우상이 될 것이다. 하나님의 방법은 분명 증거를 제시하기보다 증거를 원하실 것이다.

제6장 변화된 몸을 입은 부활:입증할 수 있는 역사

부활 설화들은 모든 출현이 제자들이 그의 사망 전에 있었던 나사렛 예수께서 몸소 가시적인 모양으로 나타나신 출현이었다는 것에 대하여 조금도 의심의 여지를 남겨놓지 않는다. 다시 사신 예수는 나사렛 예수와 정확하게 동일하신 분, 즉 기억과 성별과 태도와 말씨 그리고 습관 등과 같은 분야에서 동일한 개인적 특색을 지니신 분이었다. 천사는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히신 나사렛 예수를 찾는구나 그는 살아 나셨느니라"(막16:6)라고 선언했던 것이다. 예수의 부활의 몸은 하나님이 새로이 창조하신 것, 즉 "무에서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고 한다. 그럼 예수님의 잉태의 순간은 이러한 마술이 있는 지 궁금하다. 주님이 성령으로 잉태했다는 그 의미가 창조의 걸과는 분명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다. 예수님의 원래의 모습이 작은 생명으로 되어서 태에서 자라서 출산한 간난아이의 모습이 어른의 모습으로 되기까지의 모습, 변화의 모습이 창조의 모습이라고 말할 수 있는지 다시 말해서 만들어지는 모습이 예수님의 속성으로 가능하며 이해되어지는 신의 모습이라는 의문이다. 부활 후에 모든 백성에게 하신 것이 아니요 "미리 택하신 증인에게 하신 것이라" 부활 출현을 받은 단 두 사람의 불신자는 예수의 형제 야고보(막6:3, 요7:5)와 다소의 사울이었다. 이 두 사람은 만남을 통해서 신앙에 이르렀다. 사울의 예는 만남 그 이상이다. 외경 복음서 가운데만 불신자들이 정말 다시 사심 예수를 본 증인들이 된다. 그리고 그들은 여전히 불신자로 남아 있는다라고 전한다. 예수님은 보이심에 두가지의 모습이다. 하나는 믿는 자 믿지 않는 자들에게도 그러나 믿는 자들은 정해져 있다. 이것은 선택의 의미를 담고 있지는 안다고 생각된다. 하나님의 방법과 주님의 생애가 어느 때는 너무나 답답하기 짝이없다. 너무 느리고 행동보다 말만 많이 하신 것 같다. 많은 수가 듣고 회개했다고 하지만 그 순간에도 많은 수의 사람들이 죄를 구별할줄 모르고 있으니 피조물에게 한탄하시고 불쌍히 여기신다는 메시야의 속성은 창조된 피조물에게 너무나 소홀하고 있다는 것이다. 부활로 인해 소망이 있지만 너무 느리다. 사울에게 마저 나타나지 않으셨다면 지금쯤 청교도가 미국을 개척하고 있었을 것이다. 여기서 감사할 것을 찾아보자면 현재 나는 메시야를 알고 있다. 주님이 부활하셔서 제자들에게 출현하셨다. 이유는 부분적으로 인간의 믿음 없음에 대하여 적응하는 것이라고 해석한다. 대다수의 제자들은 보고서야 믿었다. 중요한 것은 부활에 대한 신앙은 말씀으로 예언하시고 구약에서부터 전승으로 내려오는 부활의 메시지가 모두 소용없다는 것이다. 작개는 제자들에게는 말이다. 직접 보고야 믿는 제자들이 대표적인 사람은 도마이다. 그러나 이렇게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이유 중에 하나가 예수님 자신이 실패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드러내 준다고 하겠다. 그 동안의 사역들과 기적들을 통해서도 제자들은 전하는 사명을 감당할 수 있어야 하겠다. 또한 주님의 가르침은 더한 것이 목표이셨다. 가르침 속에서는 죽음을 예언하셨고 자기가 팔릴 것이라는 것들도 가르치셨다. 그러나 죽고보니 제자들은 다 도망가고 주님의 가르침은 오고 간데 없었다. 주님이 부활하셔서 다시 나타나실 수 밖에 없는 이유도 바로 그것이다. 어떻게 보면 다시 나타난 그 자체가 살아있는 동안의 사역이 실패했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일 수도 있다. 다시 살아서 오셔야하느 이유, 목적 그것은 피조물들에 대한 또다른 도전이며 사랑이라고 해야겠다.

제7장 입증할 수 있는 역사로서의 부활에 대한 반론

역사적으로 회의론자가 될수 있느 문제와 절대적으로 입증할 수 있느 사건이 없다는 의미가 부활의 개연성을 통해 증명 되어질 수 있을 것이다. 고전 15:17에서 바울은 "그리스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다" 이 말씀은 신앙과 역사는 서로 관계가 있는 것으로 말한다. "기적적인 사건들은 영역적인 근거에서 불가능한 것이기에 예수의 부활은 일어날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잠깐 언급했듯이 이러한 문제는 신앙의 문제다. 영역적 근거에서 부활의 가능성을 배제해 버리는 것은 과학이 모든 자연법칙을 결정적으로 규정해 놓았다고 생각하는 독단적인 절차를 밟는 일이다. 부활은 일어날 수 없었던 일이라고 미리 결정하고 따라서 그리스도의 부활은 일어나지 않았다고 결론을 내리는 것은 부당한 것이다. 입수할 수 있는 역사적 증거를 조사한 다음 가능한 범위에서 조사한 뒤 과학적인 결정을 내려야 할 것이다.

제8장 하나님의 오른쪽에 있는 영광으로의 부화:신아의 조목

우리의 관심의 초점이 "무덤은 비어 있었는가?"에서 "누가 무덤을 비웠느가?"하는 것으로 "예수께서 죽은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나셔서 어떤 개인들에게 보이셨는가?"에서 "최초의 부활사건이 무엇을 의미했는가?"하는 것으로 바뀌어야 한다. 여기서 율법에 비추인 예수의 십자가를 생각해 봐야한다. 달린자(the hanged one)라고 칭했다는 것은 특이할만하다. 이 평결이 파기시키려 한다면 파기하는 일의 주도권은 저주를 선언하신 분 곧 하나님 자신에게 나와야 한다. 그러므로 최초의 부활은 하나님의 원판결을 크게 파기하신 것이다. 신명기의 나무에 달린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는 선언하신 분이 나무에 달린 꼴이다. 그래서 필연적으로 그 고난 두의 부활은 쉽게 설명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유는 메시야는 죽음과 상관없는 분이란걸 알고있기 때문이다. 물론 믿음이 선행되어야 하겠지만, 어떻게 보면 믿음이 생기게 하는 사건이다.이 책에서 말하는 승천의 의의를 알 필요가 있다. 먼저 지상 부활 출현이 끝났음을 나타내고 교회시대의 시작을 표했으며 그의 부활의 자연스럽고 필연적인 결과라는 것이다. 또한 성령(the spirit)의 오심을 위한 선행조건이 되며 humanture의 구속되어져야할 것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부활은 곧 사건이나 승천은 그러한 사건의 결과라고 할수 있으며 신자들의 희망이라할 수 있을 것이다.

제9장 신자들의 부활

데살로니가전서 4:15∼16의 최후의 심판날의 부활이 일어나다고 전한다. 여기서 바울의 견해를 들어 신자들의 부활의 관심을 정리하고자 한다. 바울에게 있어서 신자들의 부활은 그 단계 사건(a two-stage event)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는 것 그리고 그리스도와 같이 되려고 부활하느 것 부활을 과거에 일어난 일로 보기도 하고 장차 일어날 사건으로 보기도 함으로서 생기는 긴장은 종말에 관한 신약성경의 가르침 전부를 특징짓는 "이미-아직 아니다"(already-not yet)의 긴장에 해당한다. 바울이 두 부활 사이에서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을 점점 더 깊이 알며 영적 관점에서 부활 상태에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기독교인의 부활을 이원적 사건이라고 말할 뿐 아니라 새로운 기원을 이루는 것 그리고 상태라고 말하고 있다. 그런 상태라는 의미는 아직 완성되지 않은 상태의 부활이지만 되어지는 과정이라면 우리의 삶이 부활의 시작이며 완성이라고 해도 그리 틀리지는 않을 것이다.

제10장 신자들의 부활(2)

그리스도의 부활과 신자들의 영적 부활 간의 친밀한 관계는 "그리스도와 함께"(골3:1) 또는 "그와 함께"(엡2:6, 골2:12) 살리심을 받았다고 하는 단순한 사실에 근거하였고 이장에서 특별히 다룬 성령의 역할을 정리해 보려한다. 성령은 미래의 부활 변화에대한 보증이다. 성령은 시나들에게 arrhabon이라고 이것은 실제의 지불과는 종류가 다르다. 실제의 지불이 의무적인 것이 되게끔 만드는 서약 또는 보증을 표시했다. 성령은 하나님이 미래의 부활 변화를 가져 오려고 살용하시게 될 수단으로서의 역할이다. 엡1:19∼20에서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으로 돌릴 때와같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죽은자들 가운데서 예수를 다시 살리셨다는 것에 대한 강한 암시들이 있다. 또 성령은 부활 생명을 유지하신다는 역할이다. 마지막으로 신자의 부활 이전 상태와 이후 상태 사이를 연결하는 분으로의 역할이다. 이러한 역할들이 신자들만이 있는 주님이 없는 세상의 부활을 위한 준비의 역할이며 결과를 보증하는 오심의 역할을 알 수 있다.

제11장 일반 부활

부활은 생명책에 기록될 것이나 기록되어 있지 않은 사람이든 '다시 살아나는 것'을 의미하는 중립적인 부활일 것이다. 요5:28-29의 "무덤속에 있는 자가 다"임자의 음성에 반응하게 되고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나오리라고 아주 명확하게 선언한다. 한 가지 알아야 할 것은 최후의 심판을 기다리는 악인은 이미 음부의 경감되지 않은 영적 고뇌와 고통의 상태에 있다. (눅 16:23-25, 28; 벧후 2:9). 쉬운 예로 부자와 나사로의 예는 영원의 심판과 정죄에 대한 사후적인 배경이며 특징이다. 궁금한 것은 성경은 말을 해 주지만 영정인 고통이 어떠한 것인지 궁금하며 부자와 나사로의 경우 부자의 고통은 육에서 느끼는 고통의 호소라는 것이다. 이 부분에서 영이 느끼는 고통이 세상에서 느꼈던 육의 고통속에서의 것과 동등한 것인지 아니면 성서속에서 그 의미의 상징적인지 구분이 모호함을 느꼈다.

제12장 부활과 피조물

결론에서 피조물이 그 원래의 본 모습을 되찾으려는 갈망은 허무한 데와 좌절케 하는 데 굴복하는 대신에 그리스도께 굴복할 때 성취될 것이다. 종말론은 이 마지막 문제에 초점을 맞춘다. 바로 이 육신의 몸에서 해방되는 순간 하나님의 자녀로 누릴 수 있는 자유이다.

제13장 살아있는 자의 변화

이 주제에 바울의 답변에 초점을 맞추면 "산자의 변화는 죽은자의 부활 변화와 비슷할 것이다."라는 것이다. 고전 15:42-43말씀은 비록 땅에 속한 생명과 형체(embodiment)는 썩을 것과 상대적인 불명예와 악함으로 특징지을 수 있다. 하늘에 속한 생명과 형체는 썩지 않을 것과 영광과 강함으로 특징짓게 될 것이라는 보증을 바울은 한다.

제14장 부활, 불멸 그리고 영원한 생명

부활과 불멸 이것은 부활변화(a resurrection transtormation)에 관하여 말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 개념은 기독교인에게만 해당되는 것인데, 단지 부활 전에 죽음을 경험할 기독교인 뿐만 아니라 죽지 아니하고 변화받을 기독교인들도 포함하는 범주이다. 이 개념은 연속적인 개념이 있기도하다. 최종적인 변화의 순간이 또한 죽은 것이 영원한 생명에게 삼킨 바 되는 것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불멸과 부활, 부활과 불멸은 서로 한쪽에 치우칠 수 있고 항상 공존하는 문제이다. 그러나 불멸하지 않는데 부활한다는 것은 더 연구해볼 문제이다. 불멸하지 않는다는 자체는 부활이 있기 때문이라는 성서에서의 주장은 공존이다.

제15장 신조와 서경의 정형적 문구들

니케아 신조에서 기독교인들은 한 주 예수그리스도께서 "성경대로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나셨구나"는 것을 인정하나 "우리는 죽은 자의 부활과 장차 올 세대의 생명을 기다린다."는 신앙고백을 끝낸다. 굴스탄 티오플 신조는 451년 "죽은 자"라는 표현은 모든 죽은 사람 곧 의인과 악인을 똑같이 가리키는 것이며, 따라서 "일반부활"을 넌지시 암시한다.

제16장 기독교적 부활관의 독특한 점

이집트의 사상이나 그리스의 사상등에서도 인간이 다시 살수 있는 방법을 찾아 무한히 노력했다. 유대인들은 집단의 부활에 관해서만 말한다. 그러나 기독교는 예수 메시야가 무덤에서 다시 살아 나셨고 죽지 아니하셨다고 하는 유일한 하나의 진리로 사상의 독특함을 말할 수 있다.(행 13:34, 롬6:9, 계1:18) 그리스도에게 속한자를 위해 예비된 불멸과 부활이다.

제17장 결론

불멸의 하나님 부활의 주 영원히 살아계신 예수님이다. 예수님은 그는 지금 무엇을 하고 계신가? 그는 하나님의 면전에서 비할 바 없는 영예와 능력의 자리를 차지하고 계시어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의 지도자가 되시며 죄로부터 구원을 받기 위해서 그를 앙망하는 자의 구주가 되신다. 지금 우린 그를 볼수 없다. 그는 우리에게 아쉬움을 남겼으나 그것도 이유있는 것임을 알수 있다. "너는 나를 본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요20: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