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성서신학의 전제와 계기들

I. 예수의 선포

서언

1. 예수의 선포는 신약성서신학의 전제에 속하며 그 신학 자체의 일부분이 아니다. 왜냐하면 신약성서신학은 그리스도교 신앙이 그의 대상과 그의 근거, 그의 결과를 확인하는 사상들의 전개이기 때문이다.

2. 예수의 선포에 대한 사료들은 공관복음서들이다.

1) 종말론적 선포

1. 신국의 개념과 민족적 묵시문학적 미래상

예수의 선포에서 주도적인 개념은 신의 지배라는 개념이다. 이 나라의 시작을 그는 선포했으며 신의 지배는 종말론적인 개념을 가진다. 그러나 선포로서의 예수는 유대교의 종말 및 미래의 대망과 역사적으로 관련되어 있다. 이 희망의 전제는 비관론적 이원론이다. 이 세상의 때가 끝났다고 예수는 확신했다.

2. 신의 나라의 현재적 침입

예수는 묵시적 미래상을 받아들였으나 엄격히 제한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출현, 활동, 선포 속에 종말, 즉 시대의 징조가 있음을 확신했다. 그는 신의 나라가 이미 시작되고 있음을 보았고 여러종류의 질병들의 근원으로 본 악귀들을 축출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신의 나라가 이미 현재함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 나라가 시초에 있음을 말해준다.

3. 결단에의 호소

그러므로 지금은 결단의 때이며 예수의 부름은 결단에의 부름이다. 인물로서의 예수 자신은 때의 징조인 것이다. 그러므로 인물 자체가 결단의 요구를 뜻한다. 그러나 이 세상에 대한 거부, 탈세상화는 어떤 금욕적인 것이 아니라 신의 요구에 대한 소박한 준비이다.

2) 신의 요구에 대한 해석

1. 유대교의 율법성

신의 뜻으로서의 예수의 선포는 유대교의 율법성에 대한 항거이다. 유대교에서는 종교와 윤리가 요구하는 것은 율법에 의해 규정되었다. 그 결과 그것은 윤리적 행위의 동기를 부패케 하는 역할을 담당하게 했고 인간이 신과 선의 요구에 대해 행해야 하는 순종이 완전히 형식적으로 이해되었다. 유대교 율법성의 결함은 법적 율법이 윤리적 요구처럼 모든 개인의 생활을 포괄할 수 없다는다는데 있다. 결과적으로 유대교에서는 선행사상, 즉 요구된 율법 실천을 넘어서서 본래의 의미에서 공적을 뒷받침하므로서 율법의 위배된 것을 대속할 수 있는 선행에 대한 사상이 형성되었다.

2. 예수의 항의와 무조건적인 신의 요구

이 배경으로부터 신의 뜻에 대한 예수의 선포는 큰 항의로 부각된다. 예수의 선포에서 성서의 대 예언자들이 그들 시대의 제의적 신 예배에 대해 제기했던 항의가 달라진 상황하에서 새로와진 것이다. 예수는 제의적 규례들의 실천을 철저한주요 과제로 간주한 형식적 순종에 순수하고 철저한 순종을 대립시켰다. 산상수훈의 대구들은 법과 신의 뜻을 대립시키고 있다. 여기서 드러나는 신은 인간의 의지 전부를 요구하고 에누리는 전혀 없다. 인간은 신 앞에서 아무런 요청들도 제기해서는 안된다. 이 순종에서 인간은 역설적인 진리를 소유한다. 즉 자기를 찾기 위해 선의요구, 신의 요구에 자신을 내주어야 한다는 것이며 이에 자기 자신을 얻는다는 진리를 소유하게 된다.

3. 구약성서, 경건한 관습. 성전 예배등에 대한 예수의 태도

구약성서에 대해서는 예수는 그 권위를 인정하면서 구약성서의 요구들을 비판적으로 구분했다. 신의 뜻을 묻는 자에게 구약성서의 윤리적 요구들이 지시된다. 이러한 예수의 태도는 후기 공동체에도 전해져 분명한 말로 율법의 완성으로서의 예수를 증거하고 있다. 성전 제사에 대한 공격은 예수의 말 중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그는 율법적인 제례주의에 대해서는 공격을 하였따.

4. 사랑의 요구

예수는 신의 뜻의 적극적인 면은 사랑의 요구임을 말한다. 사랑의 요구는 모든 법의 요구를 능가한다. 그것은 한계도 제한도 없으며 적에게도 해당된다. 사랑의 계명의 너 자신과 같이라는 표현에는 사랑의 행위의 무제한성과 함께 방향도 제시되어 있다. 그러므로 이 사랑의 계명은 종말론적인 윤리이다. 예수의 선포는 인간의 공동체를 질서있게 하는 법의 요구를 능가하면서 개인에게 신 앞에 책임을 지도록 하는 윤리이다.

5. 종말론적 선포와 윤리적인 것의 통일성

그러므로 예수의 종말론적 선포와 윤리적 선포의 통일성은 이해가 된다. 이것은 신의 뜻을 지키는 일이 신의 나라의 구원에 참여하기 위한 조건으로 표시된다는 점에서도 드러난다. 여기서 신의 뜻을 지키는 것은 그것이 진지한 용의 즉 신의 나라를 위한 순수하고 진지한 의지일 뿐이라는 그 의미에서 신의 나라의 구원에 참여하는 조건이다. 지금 오고 있는 구원은 인간의 신을 위해 모둔 세상 인연들에 대항하여 결단할 것을 요구하는 신의 나라이다. 그러므로 이 나라에 들어가기 원하는 자는 사랑의 결단이 필요하다. 즉 종말론적 선포와 윤리적 요구, 이 둘은 인간에게 그가 신 앞에 세워져 있음과 신이 앞에 서 있음을 지시한다. 그것은 인간에게 그의 지금을 신을 위한 결단의 시간으로서 지시한다.

6. 회개에의 호소

그런 면에서 예수의 선포는 저주와 회개에의 호소가 되었다. 심판은 죄인들위에 떨어질 것이다. 예수는 의인들이 아니라 죄인들을 위해 보내졌음을 인식하였다.

3) 예수의 신사상

1. 현재에 대한 예수의 오산

예수의 옛 세상의 임박한 종말은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볼 때 우리는 신사상의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그가 가졌던 신에 대한 인간의 자세가 그의 운명을 결정하고 그가 결정할 수 있는 시간은 한정되어 있다는 의식은 이 세상을 위해 제공된 그 결단의 시간이 지금이라는 의식에 싸여있다. 그러므로 그의 선포는 이 세상의 허무와 신 앞에서의 인간의 무상함과 신의 뜻을 앎으로 생긴 것이다. 종말론적 선포에 결정적인 것은 신사상과 그 중에 포함되어 있는 인간 실존의 이해이고 세계 종국의 시간적 박두에 대한 믿음이 아니다.

2. 신사상

예수에게는 신이 창조자로서 존재한다. 인간은 당연히 이 창조자의 뜻에 달려 있다. 이 점에서예수의 신사상은 구약성서 및 유대교의 것과 동일하다. 그러나 예수에게서 신은 가까이 있는 신이다. 그는 모든 사람을 포용하고 한정하며 요구하는 주로서 아버지로서 현재적인 힘이다. 또한 그는 요구하는 자로서 가까이 서 있다. 인간은 이웃과의 만남 속에서 직접 신이 무엇을 그에게 요구하는가를 듣게 되었다. 심판하고 요구하는 신은 또 용서의 신이다. 그에게로 돌어오는 자는 그의 용서하는 자비에 확신을 가질 수 있다. 신의 용서는 인간을 새롭게 만든다. 새로 되기를 원하는 자는 용서를 받을 것이다.

3. 비역사화

예수의 설교는 예언자들의 설교와는 달리 개개인을 향한다. 이 의미에서 예수의 신사상은 비역사화되었고 이 신사상하에서 관찰된 인간도 비역사화된 것이다. 즉 신과 인간의 관계가 세계 역사의 구속에서 벗어났다. 비역사화, 안전에서 벗어난 인간은 그가 참으로 역사화되는 이웃과의 구체적인 해후를 향해 세워진다.

4) 예수 자신의 메시야 자의식에 대한 문제

1. 과제 : 예수 생애의 비메시야적 성격

예수의 메시야성은 그의 제자들과 후의 공동체들이 고백하기는 했지만 그것은 신앙조건을 증명해 주는 것일 수는 없다는 것이 확실하다. 이 답변은 개인적 결단으로서의 신앙과 무관하다. 예수의 메시야됨에 대한 공동체의 신앙은 오로지 예수 스스로 자신을 메시야로 의식했고 그런자로서 자처했을 때에만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베드로의 메시야 고백 장면은 이에 대해 어떤 역사적 자료도 제시하지 못한다. 이것은 다른 자료들과 마찬가지로 전승이기 때문이다. 예수의 삶과 활동이 메시야적인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에 대해 공관복음서는 확실한 입장을 보인다. 예수는 단지 예언자와 랍비로 등장하였던 것이다.

2. 메시야 개념의 개조

예수는 그러하다면 전통적인 메시야 개념을 개조했을까? 그런 조짐은 어떤 전승이나 전통에서도 드러나지 않는다.

3. 미래의 메시야로서의 예수

구원의 시대의 왕으로서의 메시야 개념의 전용 및 정신화가 전혀 언급될 수 없으므로 예수는 자신을 미래의 메시야로서 임명된 자로서 인식했다고 볼 수 있다. 그의 메시야 사상은 미래적인 것이었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그의 도래의 예언과 죽음 및 부활의 예언들이 원래 상관이 없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즉 인자의 올을 말하는 말들이 인자가 인물로서 이미 여기에 있으나 후에 하늘로부터 다시 올 수 있기 위해 죽음으로 이곳을 떠나야 한다는 것을 생각했다고는 전혀 볼 수 없다. 유대교의 메시야 - 인자 - 개념은 수난 예언들 중에서 전용되었다.

4. 메시야의 비밀

그의 활동에 관한 복음서의 보도는 메시야 신앙이라는 조명을 받게 되었다. 이 이해와 전승자료 사이의 괴리는 마가복음서의 특수성인 메시야 비밀론으로 표현되었다. 메시야의 비밀을 복음서 기자의 이론으로서가 아니라 역사로서 이해하려는 시도는 메시야 비밀이 옛 전승에 자리한 것이 아니라 복음서 기자의 편집적 문장들에 자리잡은 것이라는 점에서 성립되지 못한다.

II. 초대교회의 케리그마

서언 : 초대교회의 사적 자료로 사용되는 것은 1. 사도행전 편집자에 의해 사용된 전승 / 2. 바울서신들에게서 보는 보도들 / 3. 공관복음서 전승이다.

5) 예수의 선포와 초대교회의 선포의 관계에 관한 문제

1. 올 인자로서의 예수

초대교회는 공관서 전승이 보여주는 바와 같이 예수의 선포를 받아들여서 게속 선포하였다. 동시에 예수 자신을 선포하였다. 선포자가 선포되는 자가 된 것이다. 이것은 예수를 메시야 및 인자로서 선포하는 그 자체가 종말론적 유대교의 대망 영역에 철저히 근거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 결과 확신의 도는 무한히 성장하게 된 것이다.

2. 교사및 예언자로서의 예수

예수는 철저한 신의 요구의 선포자였다. 그러므로 이 선포자가 공동체의 선포 속에 남았다는 사실은 그들이 가진 대망에 한계를 긋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선포, 즉 메시야됨의 근거는 율법주의에 극력 대항한 것이라는 점에 둘 수 있지만 그 내용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3. 인격자로서의 예수

또한 그의 인격도 그의 메시야성을 입증하는 증거는 아니다. 그가 가진 본성의 비밀도 공동체의 관심의 대상은 아니었다. 그 상을 재현시키려는 시도는 모두 주관적인 환상의 유희에 불가하다.

4. 예수의 역사적 위치와 활동

초대교회가 인자로서 도래하여 모든 세계사에 종지부를 찍을 자의 역사적 위치와 활동의 유일성에 주목하지 않았음은 자명한 일이다. 즉 그의 등장은 이스라엘 역사를 위한 결정적 사건으로 이해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의 메시야적 활동의 의의는 인간이 미래를 위해 그에게 기대하는 것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기대가 종말의 마지막 사건으로 이루어질 것이라면 그것은 역사에 종지부를 찍는 신의 최후 행위가 될 것이다.

5. 종말론적 사건으로서의 예수의 역사

그러므로 바울에게나 요한에게서는 예수의 도래와 십자가, 부활 및 승천이 종말론적 사건을 의미함이 분명하다. 즉 초대교회는 자신들의 공동체를 종말론적인 공동체로 이해하였고 예수를 바울과 같이 종말론적인 사건으로 이해하였다.

6) 종말론적 공동체로서의 초대교회

1. 마태 16: 18 - 19 과 열 두 제자

초대교회가 마지막 시대의 공동체로서 자신을 이해했음은 바울과 공관서 전통이 증명한다. 이 공동체는 신이 그에게 지배권을 선사할 작은 무리이다. 그 대표권은 열 둘이며 이들은 신의 나라가 나타날 때 열 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을 다스릴 것이다. 그들은 사실 종말론적 관원들로서 열둘이기 때문이다.

2. 예루살렘과 그 공동체

종말론적 인식에 대한 증거는 예수의 제자단이 갈릴리에서 부활절을 체험한 후에 곧 올 신의 나라의 중심지인 예루살렘으로 갔다는 사실이다. 이곳에서 그 공동체는 약속의 성취를 기대했다. 초대교회는 자신들을 신의 공동체로서 표시함으로서 그 공동체안에서 묵시문학자들의 희망이 이루어졌음을 말한다.

3. 세례

세례의 의미는 예수와 그의 첫 제자들이 자진해서 받았던 요한의 세례와 동일하다. 즉 세례는 회개에 결부된 종말공동체에 입교하기 위한 예식인 것이다.

4. 공동식사

공동식사도 공동체의 종말론적 의식에 의해 성격지어진다. 이것은 종말론적인 기쁨의 분위기를 전하며 이때마다 세워지는 공동체의 특성을 묘사하고 있다. 이때 행해지는 기도는 종말의 완성을 위한 간구이다. 주여, 오소서, 이 세상은 사라지게 하소서!

5. 영

초대교회에서는 자신에게 유대교 전통에 따른 영, 마지막 때의 영의 은사가 제공된 것으로 알고 있었다.

6. 예언의 증명

초대교회가 구약성서의 예언 증명을 도입한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구약성서의 예언들은 마지막 때에 해당하므로 에언들이 실현된 그리고 지금 실현되는 성취에 대한 확신에도 공동체의 종말 의식이 전제되어 있다.

7. 선교

종말을 지향하는 교회는 선교도 지배하여 사도들은 방방곡곡으로 돌아다니며 이스라엘의 회개를 촉구하였다.

8. Q 자료

이런 신앙은 초대 교회에 소급되는 주의 어록 즉 Q자료에 의해 증명된다. 이 결문은 도래에 대한 말들로 되어 있다.

7) 초대교회의 신앙을 위한 예수의 의의

1. 부활절 신앙에 비추어 본 예수의 옴

초대교회는 유대교 내부의 종말론적 종파로 나타난다. 이들은 자신들을 이미 부름을 받은 종말론적 공동체로 인식하고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케리그마에 붙잡혀있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는 예수의 옴 자체가 결정적인 사건이었다.

2. 종말론적 사건으로서의 예수의 역사에 관한 함축적 인식

예수의 옴이 결정적 종말론적 사건이라는 이 인식이 초대 교회에서 얼마나 명료하게 되어 있었는가는 별도의 문제이다. 이 인식이 잠재적으로 주어졌다는 것은 결정적인 것이 예수 자신에게서와 마찬가지로 공동체에 있어서도 선포의 무엇이 아니었다는데서 밝혀진다. 공관복음서 전승에서는 결정적인 사건으로서의 예수의 활동이 일련의 주의 말들로 특별히 그의 옴과 보내짐에 관해 거론한 말들로 이해되었다.

3. 십자가에 대한 이해

예수의 철저한 결단으로서의 십자가의 죽음은 확실하게 제자들에게 결단의 문제를 다시 제기했다. 그 공동체는 십자가의 거리낌을 극복해야 했고 또한 부활절 신앙에서 극복했다. 부활절 신앙과 십자가에 대한 이해를 통해 유대교 판결에 따른 저주의 거리낌이 극복 또는 변화된 것이다.

4. 현재를 규정하는 힘으로서의 부활한자

예수에 대한 새로운 이해는 예수의 모습을 현재를 규정하는 힘으로 파악하게 하였다. 공동체는 예수의 율법해석을 듣고 예수가 메시야로서 말하는 것을 듣고 있다. 시간의 경과에 따라 필요하게 된 공동체의 질서를 위한 규율들이 그의 명령들에 적용되는 것은 쉽게 이해가 된다.

5. 예수의 칭호들

공동체가 예수에게 부과한 칭호는 유대교의 메시야 신앙의 전통에서 취한 것으로 여러가지 동기가 포함되어 있다. 모든 칭호는 그러나 종말론적 구세주를 말한다는 점에서 일치한다. 인자라는 명칭은 초대교회에서 지배적인 호칭이다. 다윗 자손이라는 칭호는 민족조의적인 전통에서 나왔고 신의 아들이라는 명칭도 많이 사용되었다. 이와 비슷한 신의 종이라는 호칭도 있다.

8) 교회의 표현 양식들의 형성을 위한 출발점들

1. 유대교와의 관계에 관한 문제

종말론적 공동체는 물론 새로운 종교 단체임을 뜻하지 않으며 새로운 종교로서 유대교와 구별되지 않는다. 그 공동체는 성전과 제사를 고수했다. 그러나 참 이스라엘이 얼마나 종말론적인 것으로 이해되었을까?

2. 율법의 문제

이 문제는 율법의 유효성에 대한 문제로서 활기를 띤다. 구원의 길로서의 율법에 대한 문제가 다른 문제들과 결합되었다는 사실에 의해 불확실성과 불명료성은 증가되었다. 율법의 실천이 공동체의 참여에의 자격이라는 점을 초대교회공동체가 고수하였다는 점은 당연한 일이다. 그들은 선택된 민족의 특수성으로서 율법을 구수했고 그것을 대표한다고 자부했다. 이런 사실은 그들이 이방전도를 과제로 파악하지 않았었다는 사실에서 분명해진다. 이 점 때문에 예루살렘공동체 내부에서의 예수 직계의 옛 제자들과 헬레니즘계의 유대인 그리스도 신자들 사이에서, 그리고 초대교회와 바울사이에서 내분이 야기되었다. 이방 공동체는 율법의 수납, 특별히 할례의 수납을 공동체의 가입이나 메시야 구원의 참여를 위한 조건으로 여기지 않았기 때문에 더 심각한 문제를 야기시켰다. 이래서 사도회의가 열리고 사도회의 훈령이 작성되게 되었다.

3. 교회 개념의 형성

초대교회에서의 교회개념 형성은 유됴교 공동체와 연결됨으로서 독자적인 발전을 못한 것은 사실이다. 초대교회가 독자적으로 회당 예배를 주도했을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다. 자체의 제사형식들의 발전을 위한 시발점으로는 세례와 공동식사들이 있었다. 주의 만찬은 축제의 형식을 지녔으며 예배의 형식은 아니였다.

4.공동체의 지도, 전통과 계승

공동체의 지도권은 열 둘의 손에 있었다. 그러나 처음에 이들은 기구라기 보다는 대표였다. 그 지도적인 권위가 처음에는 베드로에게 있었으며 얼마안가 나란히 세베대의 아들 요한과 주의 형제 야고보가 지도적인 지위를 얻었다. 본래의 공동체 잭책자들은 장로들인데 이들은 유대교의 본을 따라 일찍 선출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종말론적 공동체의 지도를 위해서 세워진 적절한 기구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오로지 말 선포에 근거를 두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그들은 구약성서적 유대교 공동체 처럼 근거를 두는 역사가 포함되고 생생히 드러나 있는 전통을 필요로 했다. 그리고 이 전통은 계승을 요구하는바 제도가 아닌 영의 자유로운 관할에 위임되어 있었음을 볼 수 있다. 즉 안수에 의한 임명관계로 드러난다. 이 사상은 예루살렘 교회 공동체에만 국한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헬레니즘계의 사람들이 세운 안디옥의 공동체에도 채택되었던 것이다.

5. 공동체 안에서의 생활

공동체 내부의 생활은 회원이 증가함에 따라 어떤 규율들을 필요로 했다. 이에 대한 사료는 거의 남아있지는 않으나 죄사유에 관한 자체의 권한을 위임함으로 그 지도권이 넘어갔을 것이라는 추측은 가능하다. 종말론적 교회이기 때문에 경제적 공동생활에 대해서는 확실한 양식이 형성되지 않았다는 것은 자명하다.

III. 헬레니즘계 공동체의 케리그마

- 바울 이전과 바울 시대 -

서언 :

1. 바울의 신학에는 어느정도 발전된 초대 헬레니즘계 그리스도교가 전제되어 있다. 그러나 여기서 전제되는 바울 이전 헬레니즘계의 그리스도교는 처음부터 통일적 산물이 아니었다. 조건들과 가능성들의 전 영역, 독자적인 중요한 신학적 현상들이 고개를 들고 고대 교회의 신학과 교회의 형상들이 서서히 자란 전 영역을 뚜렷하게 만들어야 할 것이다.

2. 바울 이전과 동시대의 헬레니즘계 그리스도교 서술을 위한 직접적인 증언들은 거의 없다. 사용할 수 있는 자료는 a.사도행전의 소수의 보도 b. 바울 서신들로부터의 추론에의 의존 c. 다른 후기의 사료들에서 추론 등이다.

9) 신 및 그의 심판, 심판자 및 구원자인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설교와 신앙의 요구

1. 헬레니즘 - 유대교 선교의 유일신론적 설교

이방 세계에서의 그리스도교 설교는 유일신에 대한 선포로 시작되었다. 유대교 선교는 이미 이와같은 선교를 시작하였다. 구약 성서 - 유대교의 신 개념은 그리스 - 철학적 전통의 신사상들에 의해 다양하게 변조되고 은폐되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그리스도교 - 헬레니즘계의 선교 설교에 계승되었다.

2. 창조자, 유일한 신에 관한 그리스도교의 설교

개략적으로 헬레니즘계 그리스도교 선교 설교와 공동체 신앙에 그 표현을 제공한 언어는 다음과 같이 성격지어진다. 이방문화의 세계는 무지와 미혹에 빠져있다. 그 까닭에 그리스도교 신앙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신 또는 진리를 인식하는 것이다. 이런 유일신론의 바울의 설교는 헬레니즘계 유대교의 선교를 이어받았음이 화길하다. 바울과 동시대의 사람들도 마찬가지 였다. 신의 본질은 창조자이며 구약성서와 유대교적 표현들이 사용되었다. 이와 나란히 헬레니즘 말투들이 신의 창조와 세계 지배를 묘사하는데 사용되었다. 즉 스토아 철학파의 자연신학은 그의 신 증명과 함께 바울에 의해 전승되고 있다.

3. 심판의 설교

유대교의 파악에 따르면 이방신의 다신론과 우상 숭배, 그리고 이방 세계가 죄와 악덕들 중에 빠져 있다는 것들 사이에는 인과적 연관성이 있다. 바울은 이 사상을 받아들였다. 그러므로 유일한 참 신을 믿으라는 호소는 곧 회개하라는 호소이다. 회개는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허입의 관문인 것이다. 그러나 회개의 호소는 신이 창조자이며 동시에 심판자라는데 근거를 두고 있다. 그 까닭에 참 신에 관한 그리스도교의 설교는 동시에 종말론적인 설교, 임박한 세계 심판에 관한 설교이다. 임박한 심판의 선포는 신약성서를 하나로 묶는 일관된 주제이다. 죽은 자들의 부활에 대한 설교는 신의 심판에 관한 설교에서 분리될 수 없다. 즉은 자들도 그들의 옛 행실에 대해 책임을 져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부활은 심판의 구체적인 증거이며 이 점에서 그리스도교의 신앙 핵심인 것이다.

4. 그리스도론적 케리그마

세계의 심판자는 세계의 창조자인 신이다. 이 명제에 그리스도론적 주제는 예수그리스도가 신과 함께 혹은 신 대신 세계 심판자로 나타난다는 사상을 더하고 있다. 그리고 이 예수 그리스도는 종말론적 공동체에 속한 자들을 위한 구원자이기도 하다. 이 모습은 유대교 묵시문학과 초대교회의 증언에서 드러나는 인자 칭호에서도 등장한다. 그러나 종말론적 심판자와 구세주인 예수 그리스도는 헬레니즘계 공동체에 속한 증언의 성격을 지닌다. 부활한 자를 선포한 설교가 어떤 방식으로든지 지상 시대의 예수와 그의 죽음에 관해서도 말해야 했다는 것은 자명하다. 에수의 죽음을 범죄들을 위한 대속제물로 해석한 것은 초대교회에도 있으리라고 추측되는데 헬레니즘계 그리스도교 선교에서도 거론되었음이 분명하다. 이때의 해석은 그의 죽음을 공동체, 신의 백성들을 위한 것으로 보았고 개인을 위한 것으로는 보지 않았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이것은 구약성서 - 유대교 전통의 특수성이다.

5. 복음과 신앙의 개념들

복음은 선포가 예수에 대한 증언의 성격을 가졌을 때만 전문어이다. 신앙과 믿는다는 말은 그 소식을 받아들이는 것을 말한다. 그리스도교에서 신앙 개념이 처음으로 인간의 신에 대한 관계를 표시하는 주도적 표지로 되고 신앙은 삶을 철저히 지배하는 경건한 자의 태도로서 이해된 것이다. 또 구약성서 - 유대교 전통에서 생생한 신 관계의 이해가 신앙으로 특징지어진 그리스도교의 신 관계, 신뢰 및 희망, 성실및 순종의 관계로서 성격지어진 신 관계에 영항을 미쳤음이 분명하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물에 대한 인격적인 관계에서의 신앙이라는 사상이 처음에는 초대 그리스도교의 선포에 생소했지만 시간이 지나자 새로운 이해가 등장하게 된 것이다.

10) 교회 의식과 세계에 대한 그 관계

1. 교회개념의 문제

그리스도교의 종말론적 선포와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한 케리그마는 이방인들에게는 생소한 것이었다. 이들에게 임박한 종말론적 사건이 구원사의 최종적인 행위라는 것을 정거하기 위해서 교회개념에 대해 명백하게 해야 할 문제가 발생했다. 초대 기독교의 선포가 개인 예속해 있는 신의 백성의 공동체의 구원을 지향하는 바 교회의 조직의 우위에 공동체의 선결속 의식을 말해야 했다. 이것을 대표하는 징표가 언어의 용법이다. 개체 교회가 개체 공동체를 앞선다는 생각은 이방인 그리스도교 공동체들의 연합체를 예루살렘과 연합하여 확고히 하려는 바울 자신의 노력 배후에도 들어있다.

2. 구원사와의 연대성의 의식

이런 노력들은 바울에게서만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방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일부 헬레니즘계의 회당 공동체에서 성장했다는데도 그 원인이 있고 구약성서가 공동체에 성서로 전수되었다는 점에서도 더욱 그렇다. 구약성서는 그리스도교 공동체에서 이스라엘과 그의 역사와의 연대의식을 고취하는 방향에서 함께 작용하였다. 물론 이 둘의 관계는 변증법적이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종말론적인 사건으로 이스라엘과 현재 공동체의 역사는 단절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종말론적인 사건에 관한 표상의 방향이 신의 백성으로서의 공동체에서 성립되었음을 증명하는 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창건의 제물로 삼는 새로운 언약의 이념은 성서기자들에게는 중요한 것이었다.

3. 이방신 제사들에 대한 배타성

이 교회의 의식은 배타성 및 세계와의 단절에 관한 의식이 포함되어 있다. 이 의식은 종말론적 공동체의 칭호를 헬레니즘계의 그리스도교에 의해서도 받아들여졌다는데서 증명된다. 이 배타성은 어떤 비그리스도교적 제사들에 대한 배타성이다.

4. 세계에서의 탈출

교회의 배타상은 윤리적 불결과 죄의 영역으로서의 세계와의 단절을 뜻한다. 공동체는 모든 세속적이고 죄된 것과 분리된 신의 성스러운 전이다. 이것은 교회의 종말론적 자기이해에 근거하고 있다. 금욕에 대한 권고들은 이 세계의 임박한 종말에 대한 지시에 의해 강화되었다. 그리스도교 설교에는 또 다른 두개의 전형이 생겨났는데 여기서는 세속적인 과거에 반대되는 그리스도교 존재의 새로움이 이전 - 지금이라는 도식으로 묘사되었다.

5. 종말론적 이원론

교회 인식과 세계와의 종말론적 단절에 대한 인식은 이원론 사상으로 표시될 수 있다. 이것은 유대교 전통의 종말론적 이원론이며 동시에 스토아 학파의 영향을 감지할 수 있다. 즉 세계와의 단절에 대한 의식을 포함하는 교회의식과 영지주의자들의 의식, 즉 세계에 대해 생소하며 신비롭게 결합되어 통일성을 이룬 공동체를 묘사하려는 저 의식 사이에는 어떤 유사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교회 의식의 특수성은 영지주의에 있는 것이 아니다. 또한 회당 공동체와 유사한 점이 있으나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헬레니즘 세계에서 철두철미하게 새로은 것이고 독자적인 것이다.

11) 유대교에 대한 관계와 구약성서의 문제

1. 문제

유대교에 대한 관계는 유대인 그리스도교 형태에 대한 관계를 말한다.왜냐하면 처음의 공동체는 유대교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공동체에 가입을 원하는 자는 유대인이 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유대교 자체에 대한 논쟁은 그의 본질과 그의 기초에 대한 그리스도교 신앙의 자각의 필연적 결과이다.

2. 해결책의 유형들에 관한 개관

갈등을 야기하는 문제 해결의 가능성은 처음부터 역사적 상황에서 제공되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것이 바울에 와서 분명하게 인식되고 평가된 것이다.

a. 영지주의 : 영지주의는 이방근동에서 침투된 이원론적 구속 신앙에 그 뿌리를 두고 있고 전체적으로 보아서 그리스도교 종교의 병행 현상 또는 경쟁현상이다. 구약성서와 함께 그것이 제시하는 율법의 완전 배격은 방종적인 윤리를 초래하거나 완전히 금욕적인 윤리가 가능성으로 제기되었다.

b. 바나바 서신 : 이 서신은 유대인들이 구약성서를 완전히 오해했다고 말한다. 그는 구약성서를 완전히 알레고리적으로 해석하여 윤리적 지시로, 그리스도교의 구원에 대한 예언들로 읽었다. 그러므로 당연히 구원의 길로서의 율법에 대한 본래의 문제, 구원에 참여하는 조건으로서의 선한 일에 대한 문제를 파악치 못했다.

c. 히브리 서신 : 구약성서가 그리스도와 그의 일에 대한 예언으로 풀이되고 있다. 그리고 주된 관심은 구약성서의 제사를 알레고리적으로 해석하는데 있다. 그는 구약성서의 윤리적인 계명들에 관하여 언급하지 않았다.

d. 클레멘스 서신 : 이 서신은 아주 소박하게 구약성서를 그리스도의 책으로 삼았다. 구약성서서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윤리적인 모범서이다.

e. 톨레미 서신 : 그는 율법을 세 부분으로 나눈다 - 신의 율법 제정, 모세의 율법제정, 장로들의 첨가물. 이것을 예수와의 관계에서 규명한 것으로 영지주의에서 특유하게 내용비판과 역사비판이 결합되어 나타난다. 그러나 구원의 길및 율법주의에 대한 문제는 제기되지 않았다.

f. 유스틴 서신 : 그는 율법을 내용상 3부분으로 나누었다 - 영원한 윤리법, 율법중에 포함되어 있는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 이스라엘 및 유대인들에게도 타당한 원리의 의미에서의 제사 및 의전율이다. 유스틴도 율법성의 문제에는 개입하지 않았다. 이것은 구약성서 - 유대교의 생각을 뛰어넘지 못한 주석이다.

3. 종합 파악

a. 제사 - 제의적 율법제정의 종결 : 구약성서의 율법은 그것에 제사 - 의전적 요구들이 포함되어 있는 그러한 한도 내에서 폐기된 것에 해당한다. 신의 은혜가 인간의 드리는 예물에 의해 얻을 수 있다는 생각을 포기한 것, 그리고 공동체가 자체와 신 사이의 중개를 위해 특별한 자격을 구비한 인물들, 즉 사제들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b. 예언서로서의 구약성서 : 구약성서는 대체적으로 일부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성취되고 일부는 그 성취가 진행되는 예언들의 책에 해당한다. 그 해석 방법은 알레고리적이다. 자신을 유대교의 종파로 이해할 위험은 이방 그리스도교에서는 크지 않았다. 구약성서에 의해 신은 역사의 과정에서 계시되는 존재로 학습하게 되었다. 예언서로 구약성서를 이해함으로 공동체는 역사 안에서 부름을 받고 역사를 초월하는 종말론적 공동체라는 의식을 보존하게 되었고 또한 교회안에서 처음으로 이성과 계시라는 신학의 문제가 함께 제공되게 되었다.

c. 구약성서의 윤리적 계명들 : 구약성서에 윤리적 계명들이 포함되어 있는 범위에서 그의 권위는 흔들림이 없다. 그러나 규정적으로 작용한 것은 선이란 곧 신의 요구이고 인간의 신 앞에서 책임적이며 신의 심판 앞에서 자신의 행위를 변명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때 제기되는 신의 은혜는 무엇인가? 신의 은혜는 바로 구약성서에 반영되어 있는 그런 성격을 지닌다. 이 문제는 그러므로 신의 호의를 차지하려는 인간의 행위와 신의 은혜를 파악하는 그의 신앙 사이의 관계 문제로서 표현될 수 있다.

12) 큐리오스와 신의 아들

1. 그리스도교의 제사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모임과 의식들은 분명히 제물도, 사제도 없었고 거룩한 장소와 시기에 결부되지 않았었기 때문에 원래의 제사적인 것으로 표시될 수 없다. 이 공동체에서는 말이 지배적이었을 것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구약성서와 함께 사도들의 글과 복음서들, 그리스도교적으로 개작된 묵시서들이 등장하였고 이 글들이 읽혀졌다. 예배에서 제사행위는 현저히 축소되었지만 예배하는 공동체에 신이 현재하도록 하는 목적은 실현되었다. 즉 그리스도교적 신은 낭독된 말, 성서의 말 중에서 현존한다.

2. 큐리오스로서의 그리스도

예배에 현존하는 신은 참신이며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그리스도를 통한 찬양을 드렸음을 볼 수 있다. 즉 예수 그리스도는 헬레니즘 계의 그리스도교의 종말론적 공동체의 특수성 속에서 종말적 구세주라는 모습뿐 아니라 제의로 숭배되는 주의 모습도 얻었다. 바울은 이미 헬레니즘 교회가 사용하고 있었던 용어를 사용하여 에수를 주로 불렀다.

3. 신의 아들로서의 그리스도

주 라는 명칭은 신의 아들과 유사하다. 주라는 칭호가 헬레니즘계의 공동체에서 처음으로 그리스도를 수반하게 되었다면 헬레니즘계의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의 선교는 신의 아들 칭호를 이미 전부터 수반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 칭호는 그리스도를 유일한 참 신으로부터 구별하여 상하관계를 표현하는데 이바지하면서 그의 신성을 표시한다. 신의 아들의 모습은 헬레니즘적 사고에는 익숙한 것이다. 이 표상은 신적 권위를 계시하는 자로, 인간이 된 선재적 신의 아들로서, 구속론적이고 우주론적인 영지주의의 아들의 신성으로서의 예수를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13) 성례전

1. 세례

개인은 세례를 통해 공동체에 들어오고 동시에 주와 관계를 가진다. 즉 세례는 공동체에의 가입과 구원의 참여를 위해 피할 수 없는 조건이었다. 그러므로 세례는 자연적인 수단을 통해 초자연적인 힘들로 작용하게 하는 의식행위, 즉 성례전에 해당한다. 세례의 작용은 죄를 깨끗하게 하는 것이다. 정결한 의식으로 신을 부를 수 있는 가능성을 마련하는 것이다. 이 세례욕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일과 결합되어 있다. 이것은 수세자들을 미래에도 주의 수호아래 두고 그를 귀신들의 작용에서 안전케 하는 적극적인 작용이다. 여기에 영의 수여가 결합된다. 이것은 특별한 의전적 안수의식에 연결되어 있다는 점에서도 특수성을 보여준다.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참여케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표상은 세례의 밀의 종교적 해석에 상응한다. 이것으로 세례를 구원사건의 실제적인 현재화로서 이해할 수 있는 가능성도 제공되었다.

2. 주의 만찬

주의 만찬은 공동체 안에서 지속적으로 반복되었다. 주의 만찬의 의전문에는 세 주제가 포함되어 있다 - 의식의 본래의 성례적인 해석, 예수의 죽음을 새 언약으로 이해, 예수의 죽음을 속죄제물로 이해 . 이 의식행위는 예수의 몸과 피와 합일됨을 추구한다면 이것은 주와 가지는 교제에 대한 사상을 지향한다. 바로 죽은 제사신의 육체가 동시에 능력으로 찬 작용력 있는 육체라는 사상이다. 그러므로 헬레니즘계의 그리스도교에서 주의 만찬은 밀의 종교적인 의미에서 성례로 이해되었다. 성례의 만찬은 본래 실제적인 식사를 의미했는데 후에는 의미가 변질되었음을 고전 11장에서는 증언하고 있다. 주의 만찬을 누가 제정했는지에 대해서는 알수 없다. 다만 지속적으로 행해졌다는 것을 말할 수 있을 뿐이다.

14) 영

1. 프뉴마 개념

세례에서 그리스도인에게는 모두 영이 선사되었다. 공동체의 예배에서도 영의 임재를 말하고 있으나 그 표상들 사이에는 전혀 통일성이 없다. 프뉴마의 의미는 모든 인간적인 것에 단적으로 대립되는 놀라운 신의 능력이다. 프뉴마의 개념 성분은 그러므로 그것은 인간의 생, 행위 또는 관계에서 일어나는 한 놀라운 것이다. 영을 받는다는 것은 종말론적인 은사이며 영이 작용하는 것은 공동체에서 종말론적 사건이라는 점에서도 일치된 것을 볼 수 있다. 영은 그때마다 특별한 상황과 순간에 인간을 포착하거나 그에게 제공되는 힘으로 또는 계속 인간의 것이 되어 있는 , 그 안에 이른바 고여있는 힘, 그의 본질에 초자연적 성품을 제공하는 힘으로 생각될 수 있다.

2. 영 표상들의 모순들과 부조화

영에 대한 지배적인 신념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세례에서 영을 받고 그로 인해 새로운 존재로 변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영의 소유가 신의 생명력으로 죽음의 극복의 안정성을, 부활과 영원한 생명에 대한 확실성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즉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영을 받았다는 의미이다. 그런데도 다른 것에서는 누구나 영의 소유자라는 사실이 무시되고 있다. 즉 특별한 방식으로 영을 가진 자들의 언급을 통해서 이 생각들이 드러난다. 그러나 모든 그리스도인이 영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은 영을 정도와 힘에 따라 각이하게 소유할 수 있다는 표상과 조화된다. 또한 이것은 영의 상이한 은사들의 표상에서 드러난다. 또 영이 모든 특별한 그리스도교의 현상들의 근원이라는 일반적인 파악과 나란히 인간의 노력 또는 합당한 행동이 영의 은사 및 특수한 영의 은사를 처음으로 얻게한다.

3. 실상과 문제점

영의 표상은 그러나, 영이 공동체에 주어졌고 개인들은 세례를 통하여 그 공동체에 받아들여진다는 데서 출발한다. 그 까닭에 공동체에 제공된 영 및 그 안에서 작용하는 은사들이 자주 언급된다. 영의 작용이 신 예배 즉 종말론적 공동체를 현존하는 것으로 나타내는 신 예배에서 경험된다는 것은 명백하다. 영은 현상들의 범위를 뛰어넘어 활동한다. 영은 선교를 명령하며 예언과 교훈을 선포하게 하며 치유와 봉사를 가능케 한다. 또한 윤리적인 행실을 하게 한다. 영의 종말론적 신적 능력에 근거를 두고 지탱되는 실존의 이해가 어떻게 형성되었는가는 세상에서의 단절과 종말론적 이원론에 관한 문제이다. 영이 수반하는 황홀경 자체는 결코 명백한 의리를 지닌 현상이 아니다.

15) 영지주의적 계기들

서언 : 헬레니즘계의 그리스도교는 그것이 주 - 제사의 완성을 통해 혼합주의적 과정에 도입되었던 것과 같이 구속론의 완성을 통해 처음으로 영지주의의 영항하에 선다. 헬레니즘계의 그리스도교는 세부적인 면에서만 극히 혼합주의적인 주제가 포함되어 있으므로 그 전체를 혼합주의적 산물로 보는 것은 공정치 못하다.

1. 영지주의 운동

영지주의 운동은 그리스도교 선교에 있어서 가장 진지하고 가장 위험스런 경쟁자를 뜻했다. 둘이 유사했기 때문이다. 둘은 모두 인간 존재가 모든 세계성을 지닌 존재와 근본적으로 구별된다는 것을 인식하여 인간과 세계를 다르게 인식하였다. 영지주의의 구원이해는 자기 자아와 자기의 하늘 고행, 그곳에 이르는 길을 제시하는 인식한 영지자에게 선사되며 죽음에서 자아가 몸과 혼으로 갈라져서 해방되고 하늘의 빛의 세계에 올라갈 때 구원이 제공된다. 이 지식은 영지자에게 그의 세상의 우월성에 대한 의식을 주었다. 그리고 개인의 자아의 역사는 전 우주의 역사 중에서 어느 위치를 차지한다. 이 방식의 운동은 그리스도교 공동체 안에도 침투해 들어왔다. 그리고 기독교적 표상도 그들의 운동에 영향을 미쳤다.

2. 대립들과의 싸움

그리스도교의 선포가 구약성서 - 유대교 전통에 충실했던 한 영지주의에 대한 결정적 대립은 분명한 것이다. 이 선포는 세계가 유일한 참 신의 창조이고 신은 창조와 속죄의 신으로 유일하다는 것을 고수했다. 이런 이해는 바로 인간학에의 대립을 초래하였다. 또한 결정적으로 기독론에 대한 첨예한 입장차이를 보인다.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종말론과 그리스도론에서의 대립을 분명히 감지하였다. 후세의 이단 논쟁자들에게 중요한 점이었던 신론과 창조론은 처음에는 문제되지 않은 것 같다.

3. 내 그리스도교적 표상으로서의 영지주의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영지주의자들은 선교대상으로 여기지 않았다. 그들은 오히려 그리스도인을 자처하고 그리스도교의 지혜를 가르친다고 주장했으며 그리스도교 공동체도 그렇게 생각하였다.

4. 그리스도교 사유에서의 영지주의적 동기들

영지주의적 사유와 그 신화, 개념이 어떤 방식으로 그리스도교의 사유에 영향을 주었으며 신학용어 전개에 도움을 주었을까?

a. 이원론 : 종말론적 이원론의 개념적 발전에 도움을 주었다. 즉 우주론적 사유를 좀도 철저하게 발전시틴 것이다.

b. 피조물과 인간의 상황의 타락 : 피조물의 타락에 대하여 영지주의적 신화의 형태가 롬 8:20이하에 기록되어 있다. 영지주의적 신화는 세계에서의 인간의 상황을 , 그의 유래에 의해 썩을 것으로 규정된 삶으로 특징짓는데 이용되었다. 이에 상응되는 영지주의적인 것은 또 생활률의 전용어이다. 이 용어는 사람들에게 깨어 정신을 차릴 것을 말한다.

c. 구원사건 : 무엇보다도 영지주의적 개념은 구원사건을 분명히 하는데 이용되었다. 속죄자는 그 결과 우주적 인물로, 선재적 신적 존재로, 아버지의 아들로 하늘에서 내려와 인간의 모습을 취하고 지상의 일들을 끌어낸 후 하늘의 영광에 올리워져서 영의 세력들에 대한 지배권을 장악했다. 즉 속죄자의 내려옴과 올라감에 대한 표상을 제시하였다.

d. 구원 : 신자들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의 우주적인 승리는 악마적인 세계 지배자들과 죄, 특별히 죽음에서의 해방을 뜻하고 그러므로 부활은 이미 일어났다는 명제가 이해된다.

e. 교회개념 : 모든 영의 사람들이 서로 연합되었다는 영지주의의 통일에 관한 사상을 신의 백성에 대한 구약성서 - 유대교 전통의 주제와 결합했다. 그리고 이것으로 공동체 안의 내적 통일성을 분명히 했고 더불어 교회개념 형성을 아주 본질적으로 규정하였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며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인 것이다.그것은 곧 그리스도와의 하나됨을 의미한다.

f. 그리스도교의 존재이해 : 그리스도인들이 영을 소유한 자라는 의식은 자유와 권위에 대한 순수한 영지주의적 주장에 의해서도 유포되었다. 영의 사람들은 이것에 힘입어 교회의 공동성에 의한 속박을 멸시하고 도덕적인 구속들도 도외시하였다. 이러한 오만함은 사도 위에 군림하려는 자랑으로까지 발달하기도 했지만 그가 자신을 지탱하는 신의 지혜의 비밀과 신의 깊이를 통찰하는 지혜를 구사한다고 생각하는 한에서 바울은 그리스도교의 존재의미가 적절한 표현이라고 생각하였다.

g. 실존의 역사성에 대한 문제 : 영지주의의 신화와 개념성에는 교회와 개인을 파멸과 구원 사건의 큰 연관성 중에 세워진 자로서 파악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영지주의는 자아이해를 지향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자유와 권위로서 나타난다. 영지주의에서의 문제는 이 자유의 역설적 성격을 파악하고 있는가에 있다. 인간 실존의 역사성을 바로 이해하지 못하면 영의 소유와 자유에 대한 변증법적 이해와 함께 창조사상의 포기를 면하지 못한다. 역사성의 오해는 혈통사상에 대한 비역사적 해석, 교회적 공동성에 대한 잘못된 해석에 돌아갈 것이다. 영지가 사랑에서 그의 완성된 실현을 이루는 대신 그것은 탈역사적인 황홀경에서 그 절정을 찾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