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신학 제9강

다니엘서 7장을 유대교에서 어떻게 하석하였는가를 하였다. 그리고 1En 37장-71장의 내용과 4에스라13장의 내용까지 하였다.

그러면 이어서 이렇게 1에녹서와 4에스라서에서 확실히 다니엘서 7장을 메시야적으로 해석할 뿐 아니라 다니엘서 7장에 나오는 '한 사람의 아들 같은 이'가 거의 메시야적인 칭호가 되다시피 한다. 완전히 칭호가 되지는 않지만 거의 메시야적인 칭호가 되다시피 한다.

그래서 옛날에는 사람들이 바로 이 두 문서에 근거해서 예수님 당시의 '사람의 아들'이 유대의 묵시문학에서 기대했던 메시야였다. 또는 메시야적인 칭호이었다. 이렇게 보았던 것이다. 그래서 예수가 이 복음서에서 자기를 그 사람의 아들이라고 부른 것은 바로 이와같이 다윗적인 메시야라기보다는 묵시문학에서 고대하는 하늘로부터 오는 초월적인 메시야라는 것을 스스로 밝히는 것이다라고 이렇게들 보았다.

그런데 최근에 와서는 이런 견해가 문제가 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이유는 1에녹서와 4에스다라서 책이 예수님 이후의 책이라는 것이 많은 학자들에 의해서 천명되고 있다. 4에스라서책은 주후 90년대의 책이라는데 거의 異論이 없다. 1에녹서는 지난번에도 이야讽나바와 같이 여러책의 합본인데 그 중에 37장-71장까지가 '에녹서의 비유'라고 해서 한 책을 이루는데 이 책은 요사이 많은 학자들이 주후 2세기에 완성된 책으로 본다.

지금도 대부분의 독일학자들은 이 책이 주전에 쓰여진 것으로 보는데 대부분의 영국학자들과 많은 미국학자들은 이책 또한 주후 2세기에 쓰여진 책으로 본다.

그 이유는 1에녹서 37-71장까지 나오는 거기에 나오는 의문이 되는 정치사가 주후 2세기에 일어나는 사건과 잘들어맞을 뿐 아니라 그것은 이제 내적인 증거이고 또 외적인 증거로서는 쿰란 문서중에 제1에녹서의 긴책의 모든 부분의 파편들이 다 나온다. 그런데 바로 에녹서의 37장에서 71장까지의 이 부분만은 나오지 않는다.쿰란에서 에녹서가 아주 중요한 책이었는데 그래서 쿰란 사람들에게 이 에녹의 비유 즉 1에녹서 37장-71장가지가 이미 알려졌드라면 이들이 분명히 이 책을 가지고 있었을텐데 그러한 흔적이 없다.

에녹서의 다른 부분이 모든 부분이 쿰란 문서에서 발굴이 되는데 이 부분만 안 나오는 것이다.

그것은 무엇을 말하느냐? 아마 이 부분이 주후 2세기 쯤에 쓰여져 가지고 쿰란 사람들에게 미쳐 알려지지 않았었던 것이 아니냐? 이렇게 되기 때문에 이것을 주후의 것으로 보는 것이다. 그렇다면 에수님 당시의 '사람의 아들'이 메시야적인 칭호로 쓰였다는 증거가 하나도 없다. 그것이 하나 중요한 것이고

또 하나는 오슬로의 학자 Leivestad가 아주 강력히 주장했듯이 만약에 '사람의 아들'이 널리 알려진 유대교에서 메시야적인 칭호였다면 예수가 그 칭호를 사용하는 것이 예수위 일반적인 경향과 어긋나는 것이다. 예수의 일반적인 경향은 한마디로 메시야적인 비밀이라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가 당시에 유행하던 메시야적인 칭호들을 다 피하였다. 그리고 자기 자신을 되도록이면 간접적으로 나타내었다.

그때 만약에 '사람의 아들'이라는 칭호가 널리 알려진 메시야적 칭호라면 에수가 그것을 자기 칭호로 사용하였다며 그러면 '내가 바로 그런 메시야다'라는 것밖에 더 되겠는가? 그렇게 하는 것은 우리가 복음서에서 볼 수 있는 예수의 일반적인 경향과 완전히 위배되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사람의 아들'이 메시야적인 칭호로 널리 인식되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여기서 한가지 잠정적인 결론을 한가지 내릴 수가 있는데 그것은 예수님 당시에 '그 사람의 아들'이 아직 메시야적인 칭호로 확립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러한 잠정적인 결론을 하나 내릴 수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피할 수 없는 사실은 설령 우리가 에녹서 37장에서 71장까지를 주후 2세기의 문서로 규정하고 4에스라 13의 문서를 주후 90년 대의 문서로 규정해도 적어도 주후 90년대에는 또 적어도 주후 2세기에는 다니엘서 7장이 메시야적으로 해석이 되고 사람의 아들이 거의 메시야적으로 쓰였다는 것을 부인할 수가 없다.

왜? 에녹서나 에스라서가 그것을 증거하니까...

그러니까 에녹서가 에스라서는 예수님 당시에 '그 사람의 아들'이 메시야적으로 쓰였다는 것은 증명하지 못하지만 예수님 이후에는 메시야적으로 쓰였다는 것을 증명해준다.

그러면 언제쯤 다니엘서 7장이 메시야적으로 이해가 디고 그래서 거기에 나오는 '그 사람의 아들'이 거의 메시야 칭호화 했느냐? 하는 것이 상당히 중요하다.

그러면 이런 에녹서 37-71장과 4에스라서 13장 이외에도 또 다니엘서 7장을 메시야적으로 해석하고 거기에 나오는 사람의 아들같은 이를 메시야임을 인정하는 유대문서가 있느냐? 하는 것을 찾아볼 필요가 있다. 있으면 그것이 언제쯤 쓰여졌느냐? 를 정확히 연대를 규명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그런 것을 해보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자료들을 발견할 수가 있다. 자료들이 조금 있는데 그것이 그토록 중요하지 않고 제일 중요한 자료만 몇가지만 설명하도록 하겠다. 그중하나가 무엇이냐 하면 4Q ps Dan Aa라는 긴 기호를 가진 문서가 하나 있다. 조그만한 조각이酈 이것을 어떻게 읽을줄 알지요? 이게 무슨 뜻이지?여기에서 Q자는 Qimram문서라는 것이다. 4자는 Qumram의 4번째 동굴에서 나왔다는 소리이다. 그리고 그 다음이 문서의 성격을 규정하는 것이다. pa Dan는 다니엘서와 유사한 문서라는 것이다. ps는 pesudo의 약자이다. '유사 아니엘서 문서'라는 것이다. 이것을 간단히 쓰면 '4Q 243'이라고 쓰기도 하는데 이 문서는 그림처럼 두줄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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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둘째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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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칼럼

그래서 여기의 처음의 3분의 1이 떨어져 나가 버렸다. 그래서 우리가 이것을 정확히 복원하기가 어렵다. 이 문서가 내책 20페이지에 이 문서의 내용을 영어로 적어놓았는데 사실 Joseph Fitzmyer가 이 문서를 발간하였는데 자세히 볼려면 내 책 20페이지를 보도록 하고 하여간 첫째칼럼 여기에는 뭐라고 쓰여져 있느냐면 한신하가 왕좌에 앉아 있는 왕에게 부복하여 아뢰는 장면이다.

왕에게 신하가 하는 소리가 뭐라고 하느냐면 '당신의 아들이 이 땅위에서 위대해질 것입니다. 왕이시여 모든 사람들이 그 때에 평화를 이룰 것이고 모든 사람들이 그를 섬길 것입니다. 그는 그러니까 당신의 아들은 위대한 왕의 아들이라고 불리울 것이며 위대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릴 것이며 그 이름은 그러니까 하나님의 이름으로 불리울 것입니다' 즈 衁하나님의 이름을 가진 자가 될 것이라는 것이다.

두번째 칼럼에는 또 뭐라고 쓰여져 있느냐면 그는 그러니까 '왕인 당신의 아들은 하나님의 아들로 불리울 것이며 모든 사람이 그를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고 부를 것이며' 여기에서 '지극히 높으신 이'의 이말은 우리의 귀에 익은 말이다. 이것은 다니엘서 7장에 나온다. 그리고 하늘의 별이 반짝거리고 우리의 눈 앞에 빨리 나타나듯이 그들의 왕국은 빨리 사라질 것입니다.

조금 있다가 그들이 누구인지를 생각해볼 것이다. '몇년 동안 그들은 이 땅 위에서 통치할 것이고 사람들을 짓밟을 것이며 도시들을 짓밟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이 일어나고 그리하여 모든 사람들이 이 칼로부터 이 전쟁의 칼로부터 쉼을 얻을 때까지만 입니다.' 이렇게 되어 있다.

이 문서가 아직도 완전히 발간이 되지 않았다. 이 문서를 가지고 있는 자가 쿰란 문서를 발굴하고 발간하고 번역하는데 지대한 영향을 끼친 J.Milik이라고 프랑스의 카톨릭 신학자가 가지고 있는데 이 친구가 술을 많이 마셔가지고 주정뱅이가 되었다. 그래서 폐인이 되어 버렸다. 그런데 이 문서를 안 내놓고 있다. 지가 가만히 가지고...

그래가지고 이 문서가 완전히 아직도 발간이 안된 상태이다.

그런 상태속에서 이 Joseph Fitzmyer가 일부를 가장 중요한 대목을 이렇게 대충 발간을 했는데 왜 이 문서를 다니엘서와 유사한 문서라고 이름을 붙였느냐면 다니엘서 7장과 아주 유사하다. 아까 내가 두번째 칼럼에서 뭐라고 하였는가?

그들의 왕국은 마치 이 세상이 조금 반짝하다가 사라져버릴 것이다. 당분간 사람들을 짓밟고 도시들을 짓밟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이 끝내 일어나서 평안을 받고 쉼을 얻으리라는 말이 있는데 여기에서 '그들의 왕국'이란 이 문맥에서 누구를 말하느냐면 '에집트와 앗수르 바벨로니아'와 같은 이런 나라들을 말하고 있다.

그러니까 여기에서 그들의 왕국은 다니에서 7장에 나오는 네 짐승들로 표시되는 네 왕조, 그 네 왕조들과 대치되는 것이다.

다니엘서 7장의 vision의 내용이 무엇인가? 네 이방 왕조들리 차례로 일어나서 심판을 받고 차례로 망하고 결국에 누가 나타나는가? '한 사람의 아들' 같은 이가 나타나서 뭐 한다고 하였는가? 하나님의 나라를 받는다고 하였다. 그것이 무엇을 상징한다고 하였는가?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성도들 곧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 나랄鱁 받는 것으로 다니엘서 7장이 해석되었다.

이 4Q ps Dan Aa에서는 이와 똑같은 형식을 취하고 있다. 그들의 왕국 그러니까 이집트나 앗수르나 그들이 왕국이 일어나서 백성들을 못살게 군다. 그러나 결국 누가 일어나는가? 당신의 아들, 왕의 아들이 일어난다. 그런데 이 왕의 아들이 뭐라고 불리울 것이라고 하였는가?

다니엘서 7장에 누가 나타나는가? 여기에...'한 사람의 아들 같은 이'가 나타나는 것이다. 이 쿨란 문서에는 누가 나타나는가? 왕의 아들, 그런데 이 왕의 아들이 뭐라고 불림을 받을 것이라고 하였는가? 위대하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 하나님의 아들,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고 불리움을 받을 것이라고 하였다. 다니엘서 7장과 비교하면 그렇다는 것이다.

다니엘서 7장에서 '한 사람의 아들'같은 이가 나타나서 하나님 나라를 받는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나님의 종말의 백성이 하나님의 나라를 받아서 구원에 이름을 의미하는 것이다.

여기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누가 여기에서 일어나서 하나님의 나라를 받고 평화를 받고 쉼을 얻어요? 하나님의 백성이.. 이와 같이 4Q ps Dan Aa은 다니엘서 7장과 모든 요점에 있어서 일치하고 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모든 것이 일치하다 이말이다. 여기에서 우리가 무엇을 배울 수 있느냐면

첫째로 만약에 4Q ps Dan Aa이 다니엘서 7장을 재해석한 것이라면 바로 이와가은 유사함 점을 볼 수 있느데 그렇다면 무엇을 알 수 있느냐면 다니엘서 7장에 나오는 '한 사람의 아들 같은 이'를 '하나님의 아들'로 해석하고 있다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 이것이 첫째 요저이다. 다니엘서 7장에 나오는 '한 사람의 아들 같은 이'를 하나님의 아들로 해석하고 있다는 것은 아주 중요한 요점이다.

(다니엘 7장) (4Q ps Dan Aa)

네 짐승들 ----------------------- 그들의 왕국들

한 사람의 아들 같은 이 ---------- 왕의 아들(다윗의 아들,다윗의 자손)

=하나님의 아들(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

왕국,하나님의 백성 -------------- 하나님의 백성

둘째로 우리가 상당히 염두에 두어야할 것은, 하나님의 아들 또는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로 해석된 '한 사람의 아들 같은 이'를 동시에 무엇으로 보느냐 하면 '왕의 아들'로 보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왕조의 맥락에서는 이 '왕의 아들'이라는 소리는 무슨 소리인가? 다윗왕의 아들이라는 소리이다. 다윗왕조를 이을 수 있는 다윗자손이 왕위에 오른다는 의미이다. 다윗자손이 지금 왕 위에 앉아 있는데 그 아들이라는 것이다. 이제 궁극적으로 다윗의 아들이라는 소리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무슨 힌트를 얻을 수있느냐면 4Q ps Dan Aa의 사실은 다니엘서 7장을 나단의 예언의 전승들, 삼하 7:12-16절 까지의 나단의 예언의 전승으로 해석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니엘 7장 + 삼하 7:12-16

나단의 예언이 무엇이라고 하였는가? 하나님께서 선지자 나단을 통해서 다윗에게 약속한 것이라고 하였다. 그게 무엇이라고 하였는가? 다윗의 수가 다차면 하나님께서 다윗의 씨 하나를 택해서 그냥 다윗의 아들 하나를 택해서 다윗의 왕위에 앉히고 다윗의 왕조를 이어가는 합법적인 통치자로 내세우고 그가 하나님의 원하는 백성을 그가 하나님을 대신해서 합법적으로 통치한다는 것을 선언하기 위해서 그를 자기 아들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언하겠다. 다윗의 아들을 하나님의 아들로 선언하겠다. 그리고 그로 하여금 성전을 짓게 하겠다는 그것이 나단의 예언의 전승이다.

이 나단의 예언의 전승이 가령 시편 2편 시편 110편 이런데에 나오고 있다 그래서 시2편 같은 것은 다윗의 자손이 다윗 왕조에 왕위에 오를 때마다 하는 등극시이다. 그래서 다윗의 자손이 다윗의 왕좌에 오를 때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는 시이다. 그래서 시편 2편이 신약기독론에 있어서 아주 중요하다.

거기에 뭐라고 되어 있는가? '너는 나의 사랑하는 아들이다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다' 라고 되어 있다. 하나님이 다윗의 자손이 다윗왕을 위해서 이스라엘 왕이 된 것을 정식으로 선언하는 것이다. 합법적인 통치자로 선언하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이므로 이스라엘의 진정한 왕은 누구인가? 하나님인 것이다.

하나님 대신에 다윗의 아들을 통치자로 세우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을 나타내기 위해서 다윗의 아들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 나단이 전승이 이렇게 시편에서 다윗왕조를 잇는 등극시로만 쓰인 것만 아니고 선지자들에 의해서 계속 재해석되고 심지어는 메시야적으로 재해석되어서 이것이 구약과 유대교의 가장 중요한 메시야 사상의 커다란 흐름이 되고 있다.

그래서 이 메시야 칭호들, 가령 다윗의 아들, 다윗의 씨, 다윗의 가지, 하나님의 아들 이런 말들이 전부 어디에서 나왔느냐 하면 전부 이 나단의 전승에서 나왔다. 그러니까 나단의 전승이 요점이 무엇이냐 하면 다윗의 아들이 무엇이 되는가? 다윗의 왕위를 이어받아서 뭐가 된다고? 하나님의 아들로 선언된다는 것이다.

이 쿨란 문서에서도 이 부복하고 있는 신하가 지금 누구에게 말하고 있는가? 왕에게... 그러면 이스라엘의 content에서 왕은 항상 누구를 말한다고? 다윗을 말한다. 다윗의 아들로서 왕위를 점하고 있는 현재의 왕에게 신하가 무어라고 말하느냐면 '당신의 아들'이라고 하나. 그러면 그게 누구인가? 다윗의 아들이다. 그런데 그 아들이 나중에 뭐라고 불리울 것이라고 하는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리울 것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이것은 무엇을 반영하고 있는가? 나단의 전승을 반영하고 있다. 그러니까 4Q ps Dan Aa는 다니엘서 7장과 나단의 전승이 집합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좀더 정확히 말하면 다니엘서 7장을 나단의 예언으로 해석한 것이라고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나단의 예언이 이스라엘의 메시야 예언의 뿌리라고 하였다. 그래서 메시야의 칭호들이 전부 다윗의 씨, 다윗의 아들, 다윗의 가지, 하나님의 아들 이렇게 된다고 하였다.

그런데 여기의 다니엘서 7장에서는 '한 사람의 아들 같은 이'가 바로 이렇게 다윗의 아들, 하나님의 아들로 불리운다는 것이다. 그러면 분명히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다니엘서 7장이 메시야적으로 해석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또 다니엘서 7장에 나오는 한 사람의 아들같은 이가 메시야로, 다윗적인 메시야로 해석이 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런데 거기에서 강조된 칭호가 두번이나 강조되고 있다. '하나님의 아들'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 이라는 것이다.

이 문서를 쿰란에서 나왔으므로 이것이야말로 에수님 전의 문서이다. 쿰란 공동체가 유대전쟁 때 없어졌다. 주후 66년에서 70년 그때 유대전쟁 때에 없어지고 말았다.

그러니까 쿰란 공동체가 주전 150년에서 주후 70년까지 존재한 것이다. 그 공동체에서 이 문서가 나왔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느냐면 예수님 당시나 아니면 예수님 전에 이러한 사상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이 문서가 우리에게 무엇을 보여주는가? 예수님 당시 아니면 예수님 조금 직전에 쿰란 같은데서 다니엘서 7장이 메시야적으로 해석되기 시작하였다는 것, 그리고 '한 사람의아들 같은 이'가 메시야적으로 이해되기 시작하였다는 것이다. 아주 널리 펼쳐진 흔적이 없어야 함에도 왜? 유대문서 중에 많이 반영되어 있지 않으므로, 따라서 이러한 사실이 쿰란 문서 같은 데에 나온다는 것은 바로 다니엘서 7장의 메시야적인 해석이 이제 점차 시작되고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는 것이다.

또 우리가 이제 관심있게 보아야 할 것은 LXX에서 다니엘서 7장을 어떻게 번역하였는가? 하는 것이다. 이것이 왜 중요하느냐 하면 이것들의 번역을 보면 번역에는 항상 해석이 첨가된다. 반영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헬라어로 구약성경을 번역할 때 당시의 사람들이 어떻게 번역하였는지를 살펴봄으로써 이 사람들이 다니엘서 7장을 어떻게 해석했는지를 알 수가 있다.

그런데 이 LXX의 여러 사본들이 있는데 그중에 origen이라고 하는 위대한 초대교회의 성경학자가 모아논 사본 소위 codex 88과 같은 syro-Hexapla가 있는데 이것은 origen이 이제 성경을 6가지 말로 해놓았다. 히브리어,시리아어,헬라어,라틴어.. 이러 식으로 6가지 말로 편집을 하였다.

그중에 나오는 하나의 사본이 syro-Herapla 그것이 실제적으로 dodex88과 같은 것이다. 이것 하나 하고 또 하나 LXX사본의 파피루스에 적힌 사본 p967이 있다. 이 p967은 독일의 웉른에 보관되어 있다고 해서 이렇게 쓰는데 p967(웉른) 이판을 보면 이렇게 되어 있다. 다니엘서 7:13-14을 어떻게 번역되어 있느냐 하면 이렇게 되어 있다.

그것도 내책 22-23page에 취급해 놓았는데 두개가 약간의 차이가 있짐나 내용에 있어서는 똑같다. 그래서 하나만 보도록 하겠다.

"내가 밤에 환상 가운데에서 보았다. 보라 하늘이 구름 위에 '한 사람의 아들' 같으며 또 옛적부터 계신 이 같은 이가 와서 당도했다 .그래서 거기에 정렬해 있던 자들이 천사들이 그에게 다가갔다" 이렇게 되어 있다.

14절에 "또 그에게 왕적인 권세가 주어지고 이 땅이 모든 민족들이 각 족속마다 영광마다 그에게 예배했다" 이렇게 되어 있다.

여기에서 13절에 중요하다. 다니엘서 7장의 원래의 아라어판에는 뭐라고 되어 있느냐면 9절에 옛적부터 계신이가 나타나고 그 다음 13절에 또 하나이 신적인 존재가 구름을 타고 나타나는데 그가 '한 사람의 아들 같은 이'라고 되어 있다.

그런에 이 LXX 사본들에는 뭐라고 되어 있느냐면 13절에 한 사람의 아들 같으며 또 옛적부터 계신 이와도 같은 이라고 되어 있다.

그러니까 이 두번째 나타나는 신적인 존재가 사람같은 것만이 아니라 그 앞에 나오는 하나님 같기도 했다. 하는 것을 강조한다.

그리고 그에게 왕권이 주어졌다는 것이다. 다니엘서 7장에 나오는 아람말 ࠈࠌࠚ 이것을 우리말로 권세라고 하는데 이 말은 벌써 왕권이라는 말이 벌서 내포된 말이다. 그런데 이 헬라어 구문에서는 그것을 매우 강조해서 '왕으로서의 권세'가 주어졌다고 기록한다.

그러니까 첫째로 '한 사람의 아들 같은 이'가 '사람 같았다'는 것 뿐 아니라 '하나님 같았다'고 하는 것을 굉장히 강조하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님의 권세'를 가졌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 70인 역의 번역자들이 다니엘서 7장 13절을 이렇게 번역하였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다니엘서 7:13절에 나오는 '한 사람의 아들 같은 이'를 되도록 이면 하나님과 가까이 볼려고 하였다는 그 말이다.

그러면 하나님과 이 두번째 신적인 존재의 관계를 우리가 이스라엘 유대 신학이 제공하는 언어적인 가능성을 총동원하여 정의하면 어떻게 할 수 있느냐?

그것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아들'의 관계라고 밖에 정의할 수없다. 유대신학이 제공하는 언어수단은 이 두번째 인간간치 나타나지만 동시에 하나님과 같은 존재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밖에 정의할 수박에 없다.

그래서 4Q ps Dan Aa과 비슷한 해석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이 헬라어 번역판이 그러면 나이를 얼마나 먹었느냐?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사본의 연대측정을 하는 방법이 여러가지가 있는데 그중 하나가 글씨체를 가지고 추정하는 방법이 있다. 왜냐하면 세대마다 유행하는 글씨체가 다르다. 그래서 이것을 글씨체 방법이라고 하는데 이 글씨체에 의해서 보통 주후 2세기 초로 본다. 그사본 자체를...

그래서 이것을 쿰란 문서와 같이 예수님 전에까지는 소급해 올라갈 수는 없지만 하여간 상당히 일찍 다니엘서 7장에 나오는 '한 사람의 아들 같은 이'를 '하나님의 아들'로 인식하는 것이 헬라번역판에도 나온다고 우리가 볼 수 있다.

후기 랍비 문서에서는 다닝레 7:13절에 나오는 신적인 존재의 이름을 무어라고 붙였느냐면 '구름타고 오는 이'또는 '구름의 아들' 이라고 붙였다. 왜 '구름의 아들'이라고 하였느냐면 그가 구름트고 오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의 아들이라고 호칭하는 것이 아니고 구름의 아들이라고 호칭하였다. 그래서 '구름타고 오는 이'로... 그래가지고 그것을 메시야적으로 해석하였다. 그래서 가령 주후 2세기 초에 막강한 영향력을 가졌던 당새의 최고의 랍비 R. Akiba는 여기에서 사람 이름 앞에 R을 쓰면 랍비라는 의미이다.

R.Akiba는 다니엘서 7:9절을 해석함에 있어서 이렇게 해석하였다. 왜 여기의 왕좌들이 복수로 되어 있느냐? 내가 거기에 복수로 되어 있다고 하였다. 왜 여기의 하늘이 왕좌들이 복수로 되어 있느냐에 대해 R.Akiba가 답하기를 하나는 하나님을 위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다윗을 위한 것이라고 하였다.

그것은 무슨 이야기냐 하면 '다윗을 위한 것이다'라는 것은 다윗의 자손으로서 다윗의 왕위에 오르는 자를 다윗의 아들이라고 하였지만 그냥 다윗이라고도 하였다. 메시야라고도 했다. 그래서 메시야의 이름이 그냥 다윗이다. 그래서 메시야의 이름이 다윗의 가지, 다윗의 씨, 다윗의 아들, 다윗 이렇게 여러가지이다.

그래서 랍비 Akiba가 7:9절을 왕좌 하나는 하나님을 위한 것이고 또 하나는 다윗을 위한 것이라고 했다는 소리는 무슨 소리냐 하면 다니엘서 7장을 메시야적으로 해석했다는 소리이다. 그런데 재미 있는 것은 Akiba도 13절에 나오는 '그 사람이 아들'은 메시야 칭호를 쓰고 있지 않다.

또 내가 아까 이야기한대로 다른 랍비 문서에서 13절에 나오는 '그름을 타고 오는 이'를 사람의 아들로 보지 않고 구름의 아들이라고 지칭했다는 것은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 주느냐면 메시야적으로 해석하면서도 사람의 아들은 메시야 칭호를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해준다.

또 Akiba와 동시새의 사람으로서 Akiba와 더불어 당대의 세명의 위대한 랍비들이 있었다.

그중의 하나는 누구이냐 하면 R.Elisha ben abuya이다. 랍비문서에 아주 중요하게 전승되는 이야기에 의하면 Akiba와 그의 친구 R.Elisha ben abuya하고 또 하나의 유명한 랍비 3사람이 하늘에 갔다고 한다. 갔더니 세 천사가 이 세 랍비들의 하늘의 궁전 여기 저기를 보여주었다. 그래서 하나님의 왕조 앞에 나아가서 R.Elisha ben abuya가 무엇이라고 소리질렀느냐면 '하늘에 두 전능하신 이가 계시다'라고 소리를 질렀다.

그래서 그가 이단자로 몰렸다. 왜? 유대의 정통신앙은 무엇인가? 유일신론이 아닌가? 그런데 R.Elisha ben abuya가 '하늘에 두 전능하신 이가 존재하다'고 주장하니 어찌되겠는가? 그래서 R.Elisha ben abuya가 이단으로 몰렸다는 이야기가 나와있다.

그러데 이렇게 하늘에 두 전능한 이가 존재한다는 사상은 아주 발전된 당대의 사상을 보여준다. 그런데 에스겔서 1장에 보면 무슨 형상으로 나타나는가? merkabah가 나타난다. 히브리어로 ࠄࠁࠊ࠘ࠎ인데 이것은 전차이다. 전차를 merkabah라고 한다.

왜 전차를 ࠄࠁࠊ࠘ࠎ라고 하느냐면 하나님이 나타날 때에 전차 위에 그 위에 왕좌가 놓이고 그 위에 하나님이 나타나신다. 그것이 에스겔서 1장에 나타난다.

그래서 이 에스겔서 1장부터 유대묵시문학과 랍비신비주의의 면면히 흐르는 전승이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의 출현을 보는 것 또는 환상가운데에서 하늘에서 그 보좌 위에 높이 앉아계시는 하나님을 보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초월하신 분으로 그러니까 우리가 구약의 이름을 사용하면 거룩하신 분으로, 여기서 거룩하다는 말이 무슨 의미인가? 초월하여 계신다는 뜻이다. 거룩하신 이로써 보이지 않는 분이시다.

그럼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그것은 하나님의 형상을 중계해주는 중보자를 사실은 보는 것이다. 그런데 그 형상을 중계해주는 중보자가 누구인가? 에스겔서 1장에 있는 하나님이 영광이 그렇게 나타난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이 원래는 하나님의 영광이 무엇이냐하면 나타난 하나님이시다. 계시된 하나님이시다. 그런데 그 영광이 하나님의 본질로부터 점점 분리되어 가지고 독립된 개체로서 인식이 되어진다. 에스겔서에서... 그래가지고 하나님을 계시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런 사상이 한편으로는 지혜의 신학으로 발달하는 것이다. 그래서 지혜가 하나님의 한 속성이다. 그런데 그 지혜가 점찬 hypostatized를 실체화한다. 즉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시간과 공간을 차지하는 물체를 가진 존재로 인식이 되는 것이다. 이처럼 실체화하고 인격화 personified 된다.

그래서 가령 잠언 8장을 보면 벌써 그것이 나타난다. 지혜가 하나님의 딸로서 하나님의 왕좌에 하나님과 같이 앉아 있는 그래가지고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아가지고 하나님의 실행자agent 노릇을 한다. 하나님의 agent, 하나님의 심부름꾼 노릇을 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모든 일, 크게 창조와 계시와 구원의 사역에 agent로서 지혜가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러한 지혜를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한다. solomon의 지혜 7:25절에 보면 이하에 보면 이와같은 지혜를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지혜가 하나님을 보여주므로 그러하다.

이 사상이 philo에 의해서는 더 발달해가지고 가령 필로가 창28장에서 하나님이 벧엘에 야곱에게 나타난 현상을 어떻게 해석을 하느냐면 하나님 자신이 직접 나타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ՋՏՃՏՒ 가 나타났다고 한다. 이 로고스가 하나님의 형상이기 때문에 로고스를 보면 하나님을 보는 것이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분이시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 머리로 하나님을 인식하지 못하는 야곱과 같은 바보천치들에게는 스스로를 보여주시는 것이다. 잡혀주시는 것이다. 잡혀주시는데 어떻게 잡혀주시는가? 자기의 로고스를 통해서 잡혀 주시는 것이다.

말씀의 신학이나 지혜의 신학이나 똑같은 것이다.

로고스가 직접 하나님을 보여줄 수 있는 이유는 로고스가 하나님께 함께 하나님의 왕좌에 앉아계시므고 그 왕좌로부터 보냄을 받기 때문에 그러하다.

이렇게 에스겔서 1장에 나오는 ࠄࠁࠊ࠘ࠎ를 전부, 하나님의 왕좌에 하나님이 앉아계심을 본 체험을 기술하는 문시문학이나 신비문학의 모든 것을 다 한마디로 뭐라고 하느냐면 ࠄࠁࠊ࠘ࠎ신비주의라고 한다. 그 신비주의 전승이 한편으로는 지혜의 신학, 말씀의 신학으로 발전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어떻게 발전하느냐면 다니엘서 7장과 같이 발전하는 것이다.

다니엘서 7장에 하나님의 왕좌들이 놓이고 하나님이 거기에 정좌하시고 그 밑에 또 하나의 신적인 존재가 등극하는 것이다. 다니엘서 7장에서 누가 그런가? 한 사람의 아들 같은 이가 등극하는 것이다.

그래서 R.Elsha b.Abuya의 선언, 하늘에 하나님 한분만 혼자 계시는 것이 아니라 또 한분의 신비적인 존재가 있다는 선언은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가 되는 것이다. 나중에 이 전승이 소위 제 3 에녹서에 가면 제 3 에녹서는 히브리어 에녹이라고도 한다. 왜냐하면 히브리말로 쓰여져 있으니까..

제 3 에녹서은 주로 merkabah 신비주의를 담고 있는 것인데 그래서 신비문서인데 거기에는 이 사상이 더 발달해서 하늘의 하나님의 왕좌에 하나님 혼자서 앉아계시는 것이 아니라 또 하나의 신적인 존재가 앉악시는데 그 이름이 무엇이냐 하면 metatron이다.

그런데 이 metatron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도 하고 작은 야웨(little Yahweh)라고도 한다. 그것은 하나님과 하나님이 왕좌를 공유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아가지고 심부름군 노릇을 하는 실행자(agent)인 것이다. 그런데 그 이름이 metatron이다.

그런데 이 metatron의 어원이 어떻게 되느냐에 대해서 어떤 사람들은 문자 그대로 meat tronos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왕좌 뒤에 앉는자'라는 의미이다. 하나님의 왕좌를 공유한 자라는 말이다. 이자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도 하고 작은 야웨라고도 한다고 하였다. 이런 전승사에 있어서 다니엘서 7장이 좀 초기의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다니엘서 7장이 문자적으로 에스겔서 1장과 아주 가깝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느냐?

첫째로 이스라엘의 유일신론이 절대유일신론이 2위일체론적으로 발전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소위 이것을 영어로 Bitarianism이라고 한다. 지혜신학이든 아니면 나중에 metatron으로 발전하는 묵시문학이든 이스라엘의 절대유일신론이 Bitarianism으로 2위일체론적으로 발전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스라엘의 신의식이 절대적 유일신론에서 2위일체론으로 발전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제까지 내가 대충 든 예를 살펴보면 우스꽝스럽죠? 우리로서는좀 이해가 안되는 이상한 것 같다. 그러나 우리가 이런 고대문서를 대할 때에 늘 염두에 두어야할 것이 이 사람들이 이런 언어를 통해서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무엇인가를 늘 생각해보아야 한다.

이것은 무엇이냐 하면 신의식에 있어서 하나님 의식에 있어서의 발전의 과정을 나타내주고 있다.

바로 이 2위일체론적인 신의식이 발전이 무엇과 시간적으로 병행이 되느냐면 하나님의 초월이 강조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거룩함이 강조됨과 시간적으로 일치하고 있다. 하나님은 거룩하시다. 하나님은 곧 초월자다라는 것과 병행되어 발전하는 것이다. 하늘과 땅을 지으신 이로써 하늘과 땅과 동일시 될 수있는 분이 아니고 하늘과 땅의 저편에 계시는 초월해 계시는 '초월자'라는 것이다.

그러면 하늘과 땅 저편에 계시는 초월해 계시는 초월자가 어떻게 동시에 역사속에 개입하셔서 아니면 이 세상에 개입하셔서 우리에게 스스로를 계시하시고 구원하시느냐? 혹은 내가 그가 어떻게 동시에 내재하시느냐?는 사상을 나타내는언어적인 수단이 바로 이러한 지혜 신학이요 이런 묵시문학에서 발달되는 metatron이다.

초월하시는 하나님 동시에 이 역사와 세상에 내재하셔서 우리에게 계시와 구원의 활동을 하시는 분이시다 라는 이 진리를 신학적으로 표현하는 수단이 지혜 신학의 발달과 metatron의 발달이다.

구원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계시가 일어나기 위해서는 위의 둘다 다 필요하다. 하나님은 초월하셔야 우리를 구원할 수가 있다. 하나님은 이 우주보다 커야 이 우주의 고장을 고칠수가 있다. 하나님이 겨우 우주만큼 하다고 가정해 보자. 범신론과 같이... 그러면 이 우주의 병을 고칠 수 있는가? 하나님은 우주를 초월하여서 이 우주의 고장을, 병을 고칠 수가 있다. 초월하여 계셔야 구원할 수가 있다.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이 이 우주를 초월하셔서 저 위 꼭대기에 앉아계시면 또한 우주를 고칠 수가 없다. 이슬람교의 신관같이 '알라'가 저기 너무 거룩해가지고 하늘 꼭대기에 자기 혼자 앉아있으면 이 세상은 나몰라라하고 앉아 있으면 구원이 안일어 나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이 동시에 이 세상에 들어오셔서 이 역사안에 들어오셔서 스스로 계시하고 우리에게 구원을 베풀어야 하는 것이다. 내적이어야 내재해야 구원이 발생하는 것이다.

그러면 초월하시는 분이 어떻게 내재하시느냐? 어떻게 내재하시는가? 자기의 실행자, agent를 통해서 하시는 것이다. 자기의 지혜를 통해서 그 일을 하신다. 또는이 metatron을 통해서 하신다.

하나님이 어떻게 자기의 왕권을 행사하는가? 자기의 아들을 통해서 자기의 딸인 지혜를 통해서 하나님이 왕권을 행사하시는 것이다. 그러면 그 아들과 딸은 하나님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과 똑같으므로 하나님을 보여줄 수가 있고 하나님과 똑같으니까 하나님의 뜻을 100% 이행할 수가 있는 것이다. 또 하나님과 똑같으니까 하나님의 권능을 완전히 행사할 수가 있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2위일체론적인 신의식이 발전하는 것이다. 이것의 완전한 발전형태가 삼위일체론이다. 삼위일체론의 논리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이러한 신의식의 발달 전 과정중에 다니엘서 7장이 나타난다. 이것을 전통적인 계시의 신학에서 이른바 점전적인 계시라는 카테고리로도 이해할 수도 있다.

우리에게 지금 관심있는 것이 무엇이냐? 다니엘서 7장의 지금 이와같은 점차의 발달들은 bitarianism 전승의 초기단게에 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느냐면 지금 우리에게 있어서의 관심은 다니엘서 7장에서 '한사람의 아들 같은 이'가 구름을 타고 왔다는 것에 대해서 지난번에 뭐라고 하였는가? 신적인 존재라고 하였다. 그가 하나님과 하나님의 왕좌를 공유하는 자이다.

그러니까 그가 무엇으로 이해되어야 하는가? '하나님의 아들'로 밖에 이해도리 수밖에 없다. 그러니까 쿰란 문서의 해석이 전적으로 그 전승의 의도에 합당한 것이다. 그리고 LXX의 번역자들이 전적으로 그 전승의 의도에 합당하게 번역하였다는 것이다. 즉 '한 사람의 아들' 같은 이가 무엇이라? 하나님의 아들이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지금까지 몇가지 문서들을 살펴보았다. 이제 마지막으로 이제 두어 문서만 살펴보면

'요셉의 기도'라는 문서가 하나 있다. 그것은 독립된 문서로 있는 것이 아니고 위대한 성경학자 origen의 요한복음 주석책에 인용이 되어 있는 유대인들의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들을 origen이 무엇이라고 칭호를 주었느냐면 '요셉의 기도'라고 칭호를 주었다. 그래서 보통 요셉의 기도라고 알려져 있다.

그 문서를 보면 이런 이야기가 있다. 그것도 내책에 다 밝혀 놓았는데 내책 27page에 인용해 놓았는데 그 이스라엘의 조상 야곱이 하나님으로부터 무슨 이름을 받았는가? Isfael이라는이름을 받는다. 그래서 이 야곱이 이스라엘이 개인이면서 동시에 집합명사이다. 이스라엘 민족 전체가 이스라엘의 씨이다. 야곱의 씨이다.

야곱 이스라엘의 씨이다. 그래서 야곱이 이스라엘 후손 전체가 야곱에게 이스라엘의 몸에 내포되었다고 본 것이다. 그래서 야곱 이스라엘의 운명이 곧 그 후손들 곧 이스라엘 민족의 운명인 것이다.

지금 극단적으로 개인저의적으로 생각하는 현대인들에게는 좀 이것이 어려운 이야기이다. 인간 실존의 연결성을 잘 나타내는 개념이다.

그런데 그 '요셉의 기도'라는 문서에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야곱 이스라엘이 원래 하늘의 궁전의 천사들 중에 제일 대장이었다. 천사들 중에 제일 으뜸가는 천사이었다. 곧 하나님의 아들이다. 하나님의 아들로 천사들 중에 제일 대강가는 천사이었다 .그런데 그가 땅위의 야곱에 의해서 incarnation된 것이다. 성육신 된것이다. 그래가지고 그가 다시 하늘로 올라가는데 자기의 본향, 본래의 위치로 올라가는데 다른 천사들..미가엘 이런 천사들이 방해하고 싸우고 시기해가지고 그가 하늘에 올라가서 하나님의 보좌 제일 가까운 곳에 앉는 것을 방해한다. 그런데 결국 야곱 이스라엘이 그러한 것을 다 물리치고 하늘에 올라가서 하나님의 가장 가까운 곳에 앉는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 이야기가 아주 우스꽝스러운 이야기 같다. 사실은 여기에 약간 영지주의적인 영햐이 뒤섞인 이야기이다. 그런에 이 이야기가 나타내고자 하는 메시지가 무엇이냐하면 이스라엘 민족의 숙명론이다.

이스라엘 민족은 언약이 백성이므로 무엇인가? 하나님의 아들이다. 하나님의 백성이요 하나님의 아들이다. 출애굽기 4:22절 이하부터 이스라엘을 뭐라고 부르는가? 하나님의 맏아들이라고 부른다. 왜? 이스라엘이 언약의 백성이므로 그렇다.

그래서 하나님의 맏아들로서 이스라엘의 숙명은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과 뗄래야 뗄수 없는 교제의 상태에 들어가는 것이다.

fellowship에 들어가서 하나님의 무한한 자원을, 유산을, 부요함을 상속받는 관계에 들어가는 것이 이스라엘 민족의 숙명이다.

그런데 지금 현재는 이스라엘이 무엇을 하고 있는가? 이 땅 위에서 자기의 형에게 쫓겨서 방황하는 자기 조상의 야곱과 같은 것이다. 그래서 이 땅 위에서 에돔 사람들에게 고생하고 앗수르 사람들에게 고생하고 애굽 사람들에게 고생하고 바벨론 사람들에게 고생한다. 이렇게 맨날 쫓기고 고생만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진정한 숙명은 무엇인가? 종말에 어떻게 되는가? 하나님의 우편에 높임을 받아서 하나님의 아들로 확인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부요함을 상속받는 그것이 이스라엘 민족의 진정한 숙명인 것이다.

그러한 이해를 나타내는 것이 '야곱의 기도'인 것이다. 이스라엘이 원래 무엇이라고? 하나님과 제일 가까운 ,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있는 모든 천스들의 대장이다. 하나님의아들로서..그런데 그가 이 지상에 형에게 쫓겨서 유리 방황하는 야곱으로 성육신 되었으나 그가 다시 하늘로 올라가서 자기의 원래의 자리, 하나님의 맏으들로서의 원래의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그의 숙명인 것이다.

그런데 지금 반대 세력이 많다. 그런 이야기이다. 우기아 여기에서 자세히 논할 수는 없지만 이 이야기가 어떠한 유대신학의 전승에서 나오느냐 하면 바로 다니엘서 7장의 전승에서 나오는 것이다.

왜? 다니엘서 7장의 내용이 무엇인가? '한 사람의 아들' 같은 이가 구름을 타고 와서 무엇을 하는 장면인가?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는 장면이다. 그 장면을 뭐라고 해석하였는가? 종말의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우편에 등극하는 것이라고 해석하였다. 진정한 이스라엘 진정한 언약의 백성이 종말에 어떻게 된다고 하였는가? 하나님의 우편에 높임을 받는다고 하였다.

하나님의 아들인 '한 사람의 아들'같은 이에게 내포되어가지고 그 하나님 보좌의 우편에 높임바든다는 이야기가 다니엘서 7장의 이야기이다. 여기서 이 '요셉의 기도'라고 하는 문서에서 우리가 무엇을 알 수있느냐면 다니엘서 7장의 이 전승이 에스겔서 1장에 나오는 묵시문학의 소위 ࠄࠁࠊ࠘ࠎ전승이 한편으로는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있는 하나님의 분신이라고 할 수 있는 제2의 신적인 존재에 대한 하나님의 그 내재의 수단으로서의 제2의 신적인 존재에 대한 신학사상과 신학언어를 창출하였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야곱이 이스라엘의대표로서 하나님의 아들이고 하나님의 아들인 이스라엘의 대표로서 하나님의 아들이므로 그에 내포되어서 이스라엘 하나님의 아들이 종말에 하나님에 의해 높임받는다는 사상이 크게 발달되었다.

그것이 좀 더 발달된 것이 우리가 좀 더 살펴볼 수 있는 이른바 Nag Hammadi에서 발달된 CodexⅡ이다. Nag Hammadi는 이집트의 Nag Hammadi라는 나일강의 유역의 모래 밭에서 발견된 영지주의 문서를 Nag Hammadi문서라고 한다.

이 문서의 153에 보면 무슨 이야기가 나오느냐면 ࠄࠁࠊ࠘ࠎ 보좌에 보좌르 둘러싸고 있는 천사들이 있다. 그리고 하나님의 merkabah보좌를 받침으로 하고 있는 천사들이 있는데 그중 하나가 누구이냐 하면 교회이다.

그런데 이 교회가 하나님의 맏으들로 불리우고 이스라엘이라고 불리우고 그렇게 불리움을 받는다. 이것도 똑같은 전승의 발전과정이다. 하나님의 보좌 곁에 누가 있는가? 교회가 있는데 교회가 하나의 천사로서 존재한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의 왕좌 곁에 있는 것이다. 이것도 똑같은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과 뗄래야 뗄수 없는 밀접한 fellowshil상태에 들어가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부요함에 참여하는 것이다. 지금은 우리 교회가 이 지상에서 짓눌림을 받고 고생하지만 교회가 하나님의 자녀들로서 교회의 숙명이 무엇이냐? 하나님의 보좌에 높임받아서 하나님의 부요함에 참여하는 것이다. 이런 전승이 발달하는 것이다.

이런 것이 다 직관적으로 다니엘서 7장과 관계되어 있는 것이다. 다니에럿 7장이 무엇인가? 지극히 높으신 성도들이 무엇을 하는가?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높임 받아서 그의 부요함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러한 그 구원의 기대 이것이 점차 이렇게 발달하는 것을 볼 수가 있다.

그러면 지금까지 우리가 살펴본 문서들에 근거해서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릴 수가 있다.

첫째로, 다니엘서 7장이 유대교전승에서 활발하게 메시야적으로 해석되고 거기에 나오는 '한 사람의 아들 같은 이'가 메시야로 인식되는 것이 주후의 문서들에서는 상당히 광범한 증거가 된다. 그러나 주전의 문서에서는 쿰란문서에서만 유일하게 증거가 된다. 그래서 그것은 무엇을 말하느냐하면 다니엘서 7장의 메시야적 해석과 한 사람고 같은 이라의 메새야적인 해석이 예수님 당시에 유대교 일부에서 이제 막 시작하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아직 널리 퍼지고 일반화된 사상이 아니라 이제 막 시작되고 있었다 하는 것을 우리에게 암시재 주는 것이다.

둘째로 유대의 전승 가운데서 다니엘서 7:13절의 한 사람의 아들같은 이는 하나님의 아들로 인식되어서 한편은 하나님의 대권자로, 하나님의 전권대사, 하나님의 실행자로 아들로 인식이 되기도 하고 다른 한편은 하나님의 종말의 백성의 대표로 하나님의 아들인 하나님의 백성의 종말의 대표로 인식이 되어서 그가 종말의 하나님의 백성의 하나님의 보좌에 높임바 되는 것을 상징화 되는 것으로 인식이 된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지난번에 대니엘서 7장이 무엇이라고 하였는가?ࠃࠅࠑ에 대해서 설명을 하였다. 하나님의 궁중 어전회의에 선지자가 참여하는 장면이라고 하였다. 지금 이와 같은 결론하에서 그러면 예수님의 다니엘 7장을 어떻게 해석하였을까? 그것이 이제부터의 과업이다.

예수가 자기를 그 사람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다니엘서 7:13절에 나오는 그 존재와 자기를 일치하는 것이다. 이 다니엘서 7장을 하나의 ࠃࠅࠑ로 보고 곧 하나님께서 자기 구원의 계획을 선지자가에 미리 계시하는 것으로 보고 그래서 선지자에게 계시된 이 구원계획이 지상에서 이제 펼쳐져야 할 것으로 보고 자기가 바로 그 구원계획을 펼치는 수행을 담당하는 자라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 예수의 자기칭호를 '그 사람의아들'로 나타내는 것으로 드러난다.

따라서 이러한 사상은 겨우 쿰란과 같은 묵시문학의 써클에서 이제 막 시작하는 것이기 때문에 예수가 아주 이 칭호를 사용하기에 합당하였다는 것이다. 즉 이것을 자기의 칭호를 만들기에 아주 합당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이 진정한 관심은 종말의 하나님의 백성,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성도들을 창조하고 모아서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 우편에 높임받게 하고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 우편에 높임받게 하고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어서 하나님의 부요함에 참여하도록 하는 것이었다는 것이다.

지난번에 내가 다니엘서 7장의 진정한 관심이 이스라엘의 하나님과 같이 됨이라고 하였다. 바로 예수께서 종말의 하나님의 백성을 모아서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자녀들로 하나님의 우편에 높임받았음으로 하나님의 부요함에 참여해서 하나님과 같이 되게 하기 위한 자라는 것이다.

바로 그러한 다니엘서 7장에 계시된 하나님의 구원계획 ࠃࠅࠑ 비밀을 성취하는 자라는 의미로 자기를 '그 사람의 아들'이라고 불렀다고 이렇게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