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신학 제8강

Ⅱ.종교사적 배경(Religion-historical Background)

지난번에 한 것은 서론이고 이제는 종교사적인 배경에 대해서 살펴본다.

이 헬라어로는 ՉՏՒ ՔՏՕ ՍՈՑՙՐՏՍ가 아주 불가능한 구문이다. 그래서 모든 학자들이 일치하는 것은 이것이 아람말 ࠀࠚࠂࠀ ࠘ࠁ의 문자적인 번역이라는데에 일치한다. 그러니까 이 표현의 종교사적인 배경을 찾기 위해서는 바로 이 아람말 표현의 종교사적인 배경을 찾아야 한다.

그러면 무엇이 아람말 '그 사람의 아들'이란 말의 배경일까?

우리 복음서에 '그 사람의 아들'이라는 말과 같이 나오는 구절의 많은 경우에 다니엘서 7장이 은유되어 있다. 그러니까 이것이 좋은 실마리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가 '그 사람의 아들'이라는 말씀 가운데 자기가 다니엘서 7:13-14절에 나오는 '사람의 아들과 같은 이'와 동일시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복음서에 나오는 '그 사람의 아들'의 배경을 일단 다니엘서 7장에서 찾아야 하는 것이다.

다니엘서 7장의 내용을 아는가? 다니엘서 7장에서 다니엘은 무엇을 보는가? 한 환상을 본다. 한 환상을 보는데 거기에 보면 아주 혹독하게 생긴 4짐승들이 차례로 일어나는 것을 본다. 그래가지고 이 4짐승들이 차례로 일어나면서 앞의 짐승들을 다 잡아 먹는다. 그 다음에 9-14절까지 무엇을 보는가?

그래서 4짐승들이 차례로 일어나는 것을 보고 그 다음에 내가 또 보니 뭐가 놓이고? 거기에 왕좌(보좌)들이 놓이고, 거기에 우리말 번역에 그냥 단수로 왕좌라고 하였는데 우리말에는 단수 복수 개념의 구분이 없어서 그래요. 그런데 원래 그게 복수이다. '왕좌들이 놓이고' 그 드암에 누가 나타나는가? 옛적부터 계신 이 곧 하나님이 백발이 성성한 노인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하나님이 옛적부터 계신이가 노인의 형상으로 나타난다. 옛적부터 계신이, 머리가 양털같이 희고...

그러니까 이 장면이 무슨 장면이냐 하면 하나님이 왕좌위에 등극하는 장면인 것이다. 등극하는 것을 환상으로 본 것이다. 그리고 뭐가 열립니까?

심판이 열리는 것이다. 책이 열리고...책이 열렸다는 것은 무슨 소리인가? 심판이 열렸다는 의미이다. 심판이 열리고 그 마지막 짐승이 그러니까 마지막 짐승이 심판을 받는다. 권세를 다 빼앗기고 심판을 받는다.

그 다음에 내가 또 보니 심판의 과정이 죽 설명이 되고... 또 내가 보니 누가 나타나는가? 또 한 존재가 나타난다. 한 존재가 나타나는데 즉 한 사람의 아들 같은이가, 거기에 아람어로 어떻게 되어 있는가? ࠀࠂࠀ ࠘ࠁࠊ 사람의 아들 같은 이가 나타났는데 무엇을 타고 나타났는가? 구름을 타고 나타났다.

14절에 그리고 그가 어디로 나타났는가? 옛적부터 계신 이에게 나타났다. 그래서 그에게 뭐가 주어졌는가? 권세가. 즉 왕적인 권세가 주어졌다. 그리고 나라가 주어졌다. 통치권이 주어진 것이다.

9절......하나님---옛적부터 계신 이

심판

13절...... 한 사람의 아들 같은 이가

(ࠀࠂࠀ ࠘ࠁࠊ)

구름을 타고

14절...... 권세(왕권)

그러니까 13,14절의 장면은 9절의 하나님이 보좌에 등극을 하고 또 하나의 존재가 하나님의 보좌 옆에 등극하는 장면이다.

그래서 하나님으로부터 대권을 받는 장면이다. 하나님 나라의 통치권 즉 대권을 받는 장면인 것이다.

그러니까 다니엘이 환상 가운데 본 것이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이 보좌에 등극하시고 찬하의 심판을 하시는데 그래서 마지막 짐승이 심판을 받고 또 하나의 존재가 하나님 우편에 높임을 받아서 등극을 해서 하나님으로 부터 왕권을 받는 나라를 받는 통치권을 받는 그 장면을 이 다니엘이 본 것이다.

그런데 그 한 사람 같은 이의 권세와 영광은 4짐승들이 왕권과는 달리 영원히 계속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한사람의 아들 같은 이가 구름을 타고 왔다는고 하는 데에서 우리는 무엇을 알 수 있느냐면 이것이 한 인간이 아니라 한 신적인 존재(theophany)임을 알 수 있다.

왜 그러느냐면 구약에서 이 구름은 하나님이 출현할때마다 항상 쓰이는 문구이다. 구름이라는 상징언어는 이 하나님의 출현, theophany 하나님의 출현에만 동반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른바 주의 종인 천사가 나타나도 구름을 타고 나타났다고 한다. 그런데 이 '한사람 같은이'가 구름을 타고 왔다고 하는데서 우리는 무엇을 알 수 있느냐면 이것이 사람이 아니라 한 신적인 존재라는 것이다.

여기서 벌써 하나님과 또 하나의 신적인 젼자가 하나님에게 다가와서 하나님으로부터 대권을 받는 장면인 것이다.

그러면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이 '사람의 아들'같은 이가 그가 ࠀࠚࠂࠀ ࠘ࠁ가 무슨 칭호가 아니다. 무슨 메시야적인 칭호가 아니다. 이것은 그냥 한 신적인 존재, 하나님과 또 하나의 제2의 신적인 존재가 환상 가운데 나타났는데 그의 모양이 사람같더라는 것이다. 사람같은 형상으로 나타났다는 그말이다. ࠀࠚࠂࠀ ࠘ࠁ는 그냥 '한 사람'이라는 하나의 숙어로써 한 사람과 같이 생긴 신적인 존재가 나타났다는 말이다.

그래서 ࠀࠚࠂࠀ ࠘ࠁ '사람이 아들'은여기서 무슨 메시야적인 칭호가 아니다. 한 신적인 존재가 사람같은 모양으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그러면 여기의 재미있는 것은 여기의 환상 중에 두개의 신적인 존재들이 상정되게 된다. 하나님과 또 하나의 사람의모습과도 같은 신적인 존재...

여기에서 하나님도 사람과 같이 나타난 것으로 그리고 있다. 그런데 이 두번째의 신적인 존재도 '한 사람의 아들' 같은 이라고 표현되고 있다. 이렇게 두개의 신적인 존재를 나타내고 있다.

그러면 사람들이 다니엘서 7장은 이러한데 그러면 다니엘서 7장의 배경은 어떻게 되겠나? 하는 것이다. 다니엘서 7장의 배경.

다니엘서 7장의 이런 환상이 그려지는 것에 대한 종교사적인 배경은 어떤 것일까? 고 많은 생각을 하였다.

1)그래서 옛 종교사학파에서는 다니엘서 7장이 이란에서부터 에집트까지의 중동의 널리 펄쳐지고 흩어졌다고보는 이 '태초의 인간'의 한 사상의 유대교판으로 볼려고 하였다. 종교사학파에서는 이란,바벨론니아,에집트,심지어는 인도,그리고 영지주의 먼서들에 널리 흩어진 '태초의 인간'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과 신화가 있었는데 그것의 유대교판이 두가지로 나타났다고 본다.

하나는 창세기의 아담 기사로 나타났고 또 다른 하나는 여기의 다니엘서 7장의 '사람의 아들'의 기사로 나타났다고 보았다. 그래서 이것이 나중에 Enoch의 비유 1En 37장에서 71장을 에녹의 비유라고 하는데 이 에녹의 비유와 네번째 에스라책에도 영향을 주었다고 본다.

엣종교사학파에서는 이렇게 고대 문명의 '태초의 인간'에 대한 관심이 매우 많았다. 그래서 오늘의 인간의 숙명,고난의 인간의 숙명을 설명하기 위해서 태초의 인간에 대한 태초의 인간이 무엇을 어떻게 하였기에 그 후손들이 이렇게 고난에 떨어졌나 하는 추측을 많이 하였는데 그것이 이제 태초의 인간의 빛의 존재로서 아주 찬란한 존재로서 악과 고난을 모르는 존재이었는데 어찌된 셈인지 악의 힘과 싸워서 져가지고 타락해가지고 그의 자손들이 다 악과 고난에 어두움의 구렁텅이에 빠지게 되었다.

그래서 이 '태초의 인간'의 자손들이 어떻게 구원받느냐? 이것이 다시 고대문명이 태초 인간에 대한 사상들의 관심이었다고 본다.

이것의 유대판이 이스라엘 판이 하나는 창세기의 아담 기사로 나타나고 그래서 유대판에 의하면 아담이 '태초인간'이었는데 아담이 낙원에서 아무 부족함이 없이 살았는데 그런데 죄와 악과 고난을 모르고 살았는데 타락을 해가지고 그의 자손이 다 악과 고난의 구렁텅이에 빠졌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악과 고난의 구렁텅이에 빠진 아담의 자손들을 구출할 구원자는 또 하나의 인간은 종말의 인간은 이 '태초의 인간'이 어찌된 셈인지 종말에 다시 와서 그의 자손들을 다 구출해간다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종말의 두번째 인간이 바로 다니엘서 7장에 나오는 '사람의 아들'이다는 것이다.

그래서 다니엘서 7장에 나오는 사람의 아들은 아담의 타락을 뒤바꿈을 해놓는 아담이 그의 후손들에게 가져온 숙명을 뒤바꿔놓는 그런 임무를 띠고서 나타난 것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옛 종교사학파들은 보았다.

특히 이것이 나중에 불투만 학파에 가서는 이것이 소위 영지주의의 구원자 신화로까지 발전을 해가지고 한동안 신학계에 굉장히 영향력을 끼치고 어지럽게 하였다. 지금도 케케묵은 책들을 보면 그렇게 쓰여이끨.

그런데 요새는 최근에 와서 불투만 학파 뿐만 아니라 오스카 쿨만의 '신약의 기독론'이 상당히 괜찮은 책인데 바로 이 학설을 받아들인 것이 큰 맹점이고 문제는 나이를 좀 먹어서 틀린 것이 많다.

또 미국 친구가 쓴 프레드릭 보쉬의 'the son of man--and history'라는 책도 바로 이러한 이론을 주장하고 있다. 바로 이런 옛종교사학파에 의하면 사람의 아들은 아담의 타락을 뒤집어 놓고 그래서 아담의 자손들을 구원할 메시야의 칭호로 그래서 이 사람의 아들은 하나의 메시야적인 칭호로 이해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때의 '사람의 아들'은 유대 전통적으로 메시야사상, 곧 다윗의 아들로써 다윗의 왕위를 회복하고 다윗의 왕조를 재건할 그런 정치적인 군사적인 영웅으로서의 메시야관에 반해서 구름을 타고 하늘에서 오는'초월적인 메시야'라해서 다윗적인 즉 세상적인 정치적인 메시야 사상과 경쟁하는 또 하나의 메시야 사상을 탄생시켰다고 사람들은 보아끨.

그래서 다니엘 7장에서의 사람의 아들은 다윗의 아들로서 메시야 사상에 반한 초월적인 메시야 사상을 가져왔다고 보았다.

그런데 최근에 와서 1960년대 이후는 이러한 사상을 갖는 사람이 거의 없다. 아까 이야기한대로 지금도 그렇게 케케묵은 책에는 더러 쓰여뮶지만 요새와서 이런 설을 주장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왜 그러느냐면 1960년대부터 사람들이 고대 문서에 대한 연구가 훨씬 더 활발해져서 옛날 불투만 이런 사람들은 고대 언어를 잘 몰랐다는 것이다. 그래서 엉터리 여기 저기서 한조각씩 붙여가지고 자기들이 '태초의 인간'에 대한 신화를 만들어 낸 것이다.

그래서 영지주의 구속자 신학이라는 것도 불투만의 '신약신학' 챌에 보면 거기에 '영지주의 주제들'이라는 항목이 있는데 거기에 보몬 자기가 영지주의의 '구원자 신화'라는 것을 재건한다. 그래가지고 우리 '신약기독론'이 어떻게 영지주의 구원자 신화를 예수에게 그냥 뒤집어 씌어서 '신약 기독론'이 발생하였는가를 설명한다.

그런데 그것이 지금에 와서 밝혀진바에 의하면 다 불투만이 혼자 대학 도서관에서 만들어낸 것이다. 진짜 문서에는 그런 것이 없다.

그래서 최근의 학자들, 특히 옛날 이란의 문서들을 읽을 정도로 고대언어를 하고 그 문서들을잘 살펴본 C.Colpe나 동독의 H.M.Schencke나 스코틀랜드의 R.McLeod등 이런 사람들이 고대문서를 조사해보니까 이런 것이 다 없다. 만들어 낸게...

그런데 특히 C.Colpe는 케텔의 TDNT의 제 8권에 ՉՏՒ ՔՏՕ ՍՈՑՙՐՏՍ에 대해서 긴 논물을 썼는데 거기에서는 바로 이와같은 옛 종교사학파들이 주장하는 '태초의 인간'이론을 완전히 배격한다. 따라서 더 이상 들슩볼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러면 다니엘서 7장의 배경이 고대 중동에 널리 흩어졌다고 보았던 '태초의 인간'의 신화가 아니라면 그러면 무엇인가?

2)두번재로 대두되는 이론이 무엇이냐 하면 소위 가나안의 신화,가나안의 종교와 신화의 영향에 의해서 대니엘서 7장이 나왔다는 것이다.

이것은 케임브리지 구약학자 J.Emerton. 상당히 좋은 학자인데 이 사람이 먼저 발설을 하기 시작하였는데 그것을 Kittel의 TDNT에 C.Colpe가 그냥 수용해서 좀 더 발전을 시킨다.

그의 이론에 의하면 가나아의 정통적인 종교가 무슨 신을 섬기는가? El을 섬긴다. El은 이것이 父王이다. El의 아들은 누구냐하면 Baal이다. 그래서이 바알은 부왕의 子王이다. 그래서 이 바알은 항상 무엇을 하고 다니는가? 구름을 타고 다닌다. 왜? 바알이 구름과 비의 신이다. 구름과 비의 신으로서 자연을 비옥하게 하는 신인 것이다.

그래서 엘인 부왕으로부터 대권을 받아서 바알 자왕이 구름을 타고 다니면서 천지에 비를 내리고 천지를 비옥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관계에 있어서도 아들을 많이 낳게 한다. 그래서 가나안의 자식을 잡아 불로 태워죽이는 것이 성행하였다. 그리고 그것이 종교의식이었다.

바로 이 엘-바알 관계가 다니엘서 7장의 바로 그 옛적부터 계신이와 또 하나의 신적인 존재, 구름을 타고 오는 또 하나의 신적인 존재, 한 사람의 아들 같은 이로 약간 변형되어서 나타났다고 보는데 이러한 학설을 주장하는 이가 J.Emerton 과 C.Colpe이다.

얼듯 보기에는 이 이론이 상당히 그럴듯하다. 그런데 구체적으로 가나안의 신화와 다니엘서 7장을 비교해보면 자세한 점에 있어서 차이점들이 참으로 많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가나안의 신화들이 어떻게 다니엘서의 7장에 영향을 주었을가가 역사적으로 설명하기가 참으로 힘들다. 그래서 J.Emerton이나 C.Colpe와 같은이러한 사람들은 물론 다니엘서를 BC 167-168년 쯤에 쓰여진 것으로 본다.

전통적인 견해는 이것이 바벨론의 포로기간중에 쓰여진 것으로 보지만 대부분의 비판적인 학자들은 마카비 전쟁이 날 무렵 그러니까 셀루키드 왕조의 안토니쿠스 4세가 유대인들을 핍박하고 성전을 막 더럽히고 할 때를 배경을 삼는다. 그래서 BC 167,168년 이때를 배경으로 삼는다.

그렇다면 더 문제가 된다. 유대인들이 이스라엘인들이 가나안에 집입한 때가 언제인데 주전 11세기쯤 되는데 옛날에 의하면 13세기도 되고 어떤 사람은 17세기라고도 하는데 그런데 어떻게 수백년 동안 가나안의 신화가 잠잠하였다가 갑자기 다니엘서에 출현하느냐? 하는 것이다.

다니엘서가 주전 5세기의 것이라고 해도 마찬가지이다. 수백년동안 잡자다가 갑자기 출현하느냐 하는 것이다. 그래서 Emerton은 그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시편에 보면 농사절기에 따른 축제들이 많은데 그 축제들을 통해서 가나안 종교의 신화가 잠재해서 전승되다가 다니엘서에서 나온다는 이런식으로 설명한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그러나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다니엘서가 제일 이방우상정교와 많이 싸우는데 이와 같은 책이 어디에 있는가?

다니엘서가 무엇으로 시작하는가? 다니엘과 그의 두 친구들이 바벨로의 수도에 끌려가서 고사하고 별 대우를 다 받아도 그들의 우상숭배에 참여하지 않는다. 심지어 음식도 먹지 않았다. 이렇게 외국의 종교와 우상숭배와 전혀 타협하지 않는 다니엘에 갑자기 구약에서 철천지 원수로 보는 가나안의 신화가 그대로 모방되어 나타나겠는가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도 옳지가 않다.

그러면 다니엘서 7장의 배경은 무엇인가?

그래서 일단의 학자에 의해서 새로운 의식이 삭트는데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이 배경은 중동에 흩어져 있던 무슨 '태초의 인간' 이나 가나안 신화의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니고 전적으로 구약적인 배경이 있는 것이다.

그것이 무엇이냐하면 구약에서의 theophany 현상의, 하나님의 출현 현상의 배경을 두고 있는 것이다. 다나엘서 7장이 결국 무엇인가?

그것은 결국 theophany 현상인 것이다. 하나님의 출현현상이다. 구약에 하나님의 출현현상이 얼마나 많은가? theophany 전승이 얼마나 많은가?

그런데 다니엘서 7장을 문서적으로 비평을 해보면 다니엘서 7장과 아주 가까운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이 무엇이냐면 에스겔서 1장이다.

에스겔서 1장이 에스겔 선지자로 부름을 받을 때에 무엇을 보는가?

하나님이 출현을 환상가운데 본다. 하나님이 그런데 어떻게 해서 나타나는가? 어디에? 불이 훨훨 막 타오르는 전차위에 하나님의 보좌가 놓여 있다. 하나님의 보좌위에 하나님이 앉아계신 것이다. 하나님의 보좌가 불이 훨훨 타오르는 전차,요새말로 하면 탱크위에 보좌가 놓여 있고 하나님이 그위에 앉아 계시는 것이다.

이 전차를 히브리말로 무엇이라고 하느냐면 ࠄࠁࠊ࠘ࠎ라고 한다. 그래서 오늘날 이스라엘의 전차 이름이 ࠄࠁࠊ࠘ࠎ라고 한다. 그런데 에스셀이 자기의 환상 중에 나타난 하나님을 어떻게 그리고 있느냐? 에스겔서 1:26-28까지 누가 한번 읽어보라.

거기에 이렇게 되어 있다. 26절에 하나님이 어떻게 되었더라?

ࠎ࠘ࠀ ࠄࠀ࠘ࠎࠊ ࠛࠅࠎ࠘ 이렇데 되어 있다. 형상이라는 말은 무엇 무엇과 같은 likeness 여기의 '사람의 모양 같은'으로 되어 있다. 하나님이 어铽게 나타났어요? 사람의 모양으로... 사람의 형상으로 나타났다.

에스겔서 1:26-28은 우리로 하여금 무엇을 연상케 하느냐면 창세기 1:26절을 연상케 한다. 창세기 1:26은 여기와 거꾸로 되어 있다. 하나님이 인간을 무엇으로 창조하였는가? 하나님이 자기의 형상으로, 하나님의 형상으로,거기에 똑같은 말이 나온다. ࠎ࠘ࠀ ࠄࠀ࠘ࠎࠊ ࠛࠅࠎ࠘ 하나님의 형상과 하나님의 비슷한 것들로 이것은 likeness 라는 말이고 이것은 image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창세기 1:26절의 위대한 창조, 하나님이 인간을 자기 형상으로 만들었다. 이것이 신학적으로 얼마나 중요한 천명인가? 그래서 사람들이 이 신학적인 천명의 배경을 살필려고 하였고 이 천명이 신학적으로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나 해가지고 신학적으로 무진장 토론을 많이 하였다.

이것이 기독교 신학자들만 토론을 많이 한 것이 아니라 영지주의자들도 이것이 그렇게 중요하였다. 또한 영지주의자들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랍비들도 이점을 굉장히 토론을 많이 하였다.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하는데 인간의 무엇을 가지고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하느냐? 이러한 토론이 굉장히 많았다. 이와같은 구약의 학자들, Ladd나 등의 의견이 맞다.

이와같은 창세기 1:26절의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다는 것은 그와같은 신학적인 천명뒤에는 어떠한 계시체험이 있느냐면 하나님이 나타날 때에 인간의 형상으로 나타난다. 인간같이 나타난다. 그러니까 그와 같은 하나님의 출현, 하나님의 게시의 체험에서 하나님이 형상이 없는 존재인데 하나님이 스스로 인간에게 계시해서 형상을 입을 때에는 인간과 비슷한 형상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의 모양과 하나님의 모양에는 유사함이 있다는 말이다.

이러한 계시의 체험에서 거기에 대한 신학적인 천명이 나온다 그말이다. 지금까지는 너무나 많이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바 되었다는 것을 추상화해가지고 어떤 신학자는 말하기를 인간이 이성적인 존재라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 말한다고 한다. 이성을 가리켜서 주로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한다. 또는 인간의 말하는 존재라는 것을 의미하기 위해서... 또는 인간의 하나님과 관계를 가질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뜻하기 위해서...

이런 식으로 하나님의 형상에 대해서 생각하였는데 어떤 것을 두고 그것이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한다고 그렇게 추상화해서 말하는 견해가 수없이 많다.

여러분이 그 견해를 알려면, 그 견해가 도대체 몇십자기나 되는지 알고 싶으면 C.Westermann의 창세기 주석에서 거의 창1:26절을 펴보면 지금까지 대두되었던 의견이 다 망라되어 있다.

하여간 그렇게 수없이 많았는데 그것들에 다 일리가 있다.

그러나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천명한 사실 뒤에는 에스겔서 1:26절과 같은 체험이 있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스스로 자신을 나타낼 때는 사람과 같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구약에 하나님의 출현을 묘사할 때 대개 인간형상의 언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에스겔서 1:26의 하나님의 출현이 인간의 형상으로 나타났다. 28절에 보면 26절에서 사람의 형상대로 나타났다고 하는 존재를 그것을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에스겔서를 죽 읽다보면 이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말이 하나님의 나타남, 원래 영광이라는 말이 하나님의 나타남이라는 말인데 영어로는 God in his revelation 이라고 하는데 하나님의 나타난 상태가 영광인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하는 말은 스스로를 나타낸 하나님을 우리가 인정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뜻이다. 영광을 돌린다의 가장 간단한 정의는 하나님으로 인정한다는 것이다. 이 영광을 올린다는 말이 애매하게 무슨 말이 아니고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래서 영광을 돌린다는 소리는 God in his revelation이다. 그런데 보통 빛이 그 상징어로 나타난다.

그런데 에스겔서를 죽 읽다보면 이 하나님의 영광,ࠄࠅࠄࠉ ࠃࠅࠇࠊ란 개념이 하나님과 전적으로 동위를 이룬다. 그래가지고 하나님의 실현자, 하나님의 심부름꾼 노릇을 하는 것이다. 제2의 신적인 존재로 나타난다.

소위 binitatianism 이란 말은 요새 학자들이 니어낸 삼위일체론을 무엇이라 하는가? Trinity에 대항되는 말이다. binitatian하면 하나님을 그위 일체로 보는 것이다. 그래서 2위일체로 인식한遁 것을 binitatianism이라고 한다.

그런데 에스겔서에 이 binitatianism이 점차 발달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있고 하나님의영광이 따로 있는 것 같이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이 하나님의 사자노릇을 한다. 하나님의 심부름꾼 노릇을 하는 것이다.

이것이 나중에 유대신학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신학과 특히 지혜의 신학으로 발달한다. 그래서 유대의 지혜문서에 의하면 지혜가 하나님의 딸로서 하나님의 보좌에 하나님과 같이 앉아 있다가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아서 하나님의 일을 실제로 담당하는 하나님의 사자, 하나님의 중보자, 하나님의 심부름꾼 노릇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지혜가 무슨 노릇을 하는가? 하나님의 창조와 하나님의 계시와 하나님의 구원의 중보자 노릇을 한다. 하나님의 따로서... 이러한 binitatianism이 발달하는 것이다. 이것은 신학적으로 우리에게 우수꽝스럽게 들릴지는 모르지만 여기는 아주 중요한 신학적인 진리를 표현하고자 하는 언어적인 시도가 있는 것이다.

그것은 무엇이냐 하면 초월적인 하나님이 어떻게 동시에 이 세상과 역사에 내재하여서 활동하느냐? 하는 것을 해결하고자 하는 수단이 바로 이것이다.

말을 뒤집어서 다시 하자면 하나님이 초월하시면서 동시에 역사와 세상에 내재하셔서그렇게 스스로를 계시하시고 우리에게 구원자로 활동하신다는 것을 표현하고자 하는 신학적인 언어 수단이 binitatnanism이다.

하여간 하나님이 창조하셨고 하나님이 스스로 계시하시고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셨는데 그런데 그 초월하신 하나님이 어떻게 하셨느냐? 이 세상 밖에 계신 하나님이....

하나님이 지혜를 통해서 이루셨다. 그러면 지혜는 무엇이냐? 하나님의 소성이면서 그러니까 하나님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으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심부른꾼 노릇을 하면서 하나님의 딸로서이다. 그러니까 초우러하신 하나님의 내재성을 동시에 천명하고자 하는 것이다. 초월과 내재를 동시에 천명하고자 하는 언어적인 수단이 이것이고 그리고 지혜신학이며 중보자 신학이며 이것이 유대교에서 점차 발달을 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binitatiasm이 점차 발달하는 상황이 어떠한 상황이냐 하면 하나님이 점차 초월하신 하나님으로 인식이 될 때에 그러하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일로서 우리 삼위일체를 논의의 근거가 바로 여기에 있다. 하나님은 초월하셔야 우리를 구원할 수가 있다. 하나님이 우주보다더 커야지 그래서 우리가 병났을 때 우주가 고장났을 때 우주를 고칠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니 우주를 고칠 수 있는 하나님은 우주보다 더 커야 한다. 초월하신 하나님만이 우주를 고칠 수가 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초월성을 강조한다는 것은 무엇이냐? 하나님의 전능함, 하나님이 우주를 지배하고 우주를 고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초월만 하고 이 세상을 내팽개쳐 버리면 그러면 구원이 일어날 수 있겠는가?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은 동시에 내재하셔야 구원과 계시가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내재성을 강조한다는 것은 무슨 소리이냐 하면 하나님이 구원하고자 하는 그 의지, 사랑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초월하셔서 우주를 구원할 수 있어야 되고 동시에 내재하여서 실제로 구원하게 하는 의지가 나타나야 구원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구원이 일어나지 않는다.

도대체 하나님의 계시와 구원이 일어난다는 것이 무슨 소리이냐?

초월하신 하나님이 동시에 내재한다는 그 소리이다. 그런데 어떻게 초월하신 하나님이 동시에 내재하신다고 할 수 있느냐? 그 conceptuality과 언어의 수단을 총동원하여 어떻게 하였느냐면 유대인들은 초월하시고 내재하신 하나님의 진리를 깨달은 후에 그것을 표현하고자 하는 수단이 바로 이런 식의 신학으로 나타났다.

그런데 이게 벌써 에스겔서에 나타나기 시작한다. 그래서 하나님과 하나님의 영광의 불가불의 관계에 있짐나 점차 하나님의 영광이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어서 하나님의 사역으로 독립되는 장면을 에스겔서는 그리고 있다.

이것이 나중에 유대 묵시문학과 랍비 문학 중에서 소위 신비주의 랍비문서가 있는데 데클로트라는 랍비신비주의 문서가 있는데 이것이 무엇이냐 하면 하늘에 하나님이 나타나는 것을 보고 하늘의 정경, 하늘의 사람이 하늘에 올라가는 것이다. 가령 고전 12장에 바울이 무엇이라고 하는가? 자기가 어디에 갔다고? 바로 그런 체험을 그려놓은 아주 굉장히 많은 문서들이다.

그러한 것들이 다 어디에 근거하고 있느냐면 묵시문학과 신비문서에서 하늘을 보고 하늘에 앉아계신 보좌의 하나님을 보고 하는 것이 다 궁극적으로 어디에 정승사적으로 근거하고 있느냐면 에스겔 1장에 근거하고 있다.

그래서 에스겔 1장에 나오는 묵시문학과 신비주의의 전승을 마타비 vision, 마카비 환상 전승이라고 한다. 왜? 에스겔서에서 에스겔이 무엇을 보는가? 하나님의 ࠄࠁࠊ࠘ࠎ를 본다. 하나님이 어디에 앉아 계시는가?ࠄࠁࠊ࠘ࠎ에 앉아 계신다. 그래서 그것이 전문언어이다.

유대묵시문학과 신비문학에 나타나는 하나님을 보좌를 보고 그 위에 등극하신 하나님을 보는 그것을 그린 모든 문서들 전체를 뭐라고 하느냐 '마카비 환상 전승'이라고 한다. 이게 다 에스겔서 1장에서 나온 것이다.

다니엘서 7장이 바로 에스겔서 1장의 '마카비 환상 전승'의 약속에 있는 것이다. 벌써 에스겔서 1장의 하나님과 하나님이 무엇과 같이 나타나는가? 사람의 형상으로 나타난다. 다니엘서 7장에도 하나님이 무엇으로 나타나는가? 사람의 형상으로 나타난다. 또 하나의 신적인 존재도 무엇으로 나타나는가? 사람의 형상으로....

이처럼 에스겔서 1장에서 하나님과 하나님의 형상이 분리되어서 binitatianism으로 시작하는데 다니엘서 7장에서도 이렇게 옛적부터 계신이와 함사람의 아들 같은 이=이위일체론적인, 그래서 하나님의 대권을 받아서 하나님 나라를 받아서 하나님 대신 통치한다는 것이다.

이것에 대해서 자세히 알려면 내 책 16-18page를 읽어보기 바란다.

Ⅲ.다니엘 7장이 유대교에서 어떻게 해석이 되었느냐?

예수님 전에 그리고 예수님 당시까지 다니엘 7장이 어떻게 해석되었느냐 하는 것을 살펴보겠다.

1)다니엘서 7장 자체내에서는 어떻게 해석되었느냐? 하는 것이다.

15절 이하를 읽어 보라.

그 해석이 무엇이냐 하면 네 짐승들은 무엇을 나타낸다고? 네 이방 왕조들의 왕들을 나타낸다고 하였다. 네 이방 왕조들이 차례로 일어나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못살게 굴고 끝내 마지막 짐승이 상징하는 마지막 왕조의 왕이 아주 못살게 군다 이말이다.

그런데 언제까지 그런다구? 하나님의 지극히 높으신 성도들 곧 하나님의 종말의 백성이 하나님 나라를 받을 때까지 그런다 그말이다. 이 환상에서는 4번째 짐승이 언제 망하는가? 하나님의 심판자로 나타나고 한 사람의 아들 같은 이가 하나님의 나라를 받을때까지 그렇게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믿음과 이 믿음의 해석과 다응을 해보라. 그러면 한 사람의 아들 같은 이가 무엇을 상징하는 것인가? 이 해석에 의하면...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성도들. 이 환상에서는 누가 하나님 나라를 받는가? 한 사람의 아들 같은 이가. 그러면 이 해석에서는 누가 하나님 나라를 받아요?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성도들이..

그러니까 우리가 여기서 벌써 무엇을 알 수있느냐면 이 환상 가운데 한 사람의 아들 같은 이로 나타나는 존재는 종말의 하나님의 백성의 상징이요 네 짐승들이 네 왕조들의 상징이듯이 상징이요 그 대표이다. 그 대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종말의 하나님 백성의 상징이며 그 대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21-22절도 읽어보라.

여기도 마찬가지로 되풀이되는 해석이다. 뭐냐하면 마지막 짐승이 이 하나님의 백성을 못살게 구는데 드디어 옛적부터 계신이가 개입해서 와서 그를 없애버리고 그의 성도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주었다고 하는 것이다.

26-27절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이 역사에 개입하셔서 그 마지막 짐스으로 상징되는 마지막 왕조를 심판하고 하나니이 그의 지극히 높으신 성도들 곧 종말의 하나님이 백성에게 그 나라와 권세를 줄 때에 그 나라와 권세가 영원하리라 하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세번이나 자꾸 읽으라고 한 것이 무엇인가?

이것은 다니엘이 본 황상의 해석이라고 하였다. 그러면 환상에서는 누가 하나님의 나라를 받는가? 한 사람의 아들 같은 이가. 그것의 해석이 무엇인가? 지극히 높으신 성도들이 나라를 받는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를 받는 것이다.

그러면 환상에서 '한 사람의 아들 같은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성도들의 상징이요 그 대표라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보면 4짐승들도 '왕조'라는 집단적인 개념을 나타내기도 하고 '왕'이라는 개인적인 개념을 나태내기도 한다.

마찬가지로 '한 사람의 아들' 같은 이도 한편으로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성도들, 종말의 하나님이 백성들 전체를 상징하는 collective 그러니까 집단적인 개념이기도 하고 4짐승이 왕이라는 개인을 나타내는 개념이기도 하듯이 또 하나님의 백성의 한 대표로서 개인적인 해석도 가능하고 또 집단적인 해석으로써 종말의 하나님의 백성 전체를 상징하는 집단적인 해석과 종말의 하나님의 백성의 전체의 대표라를 개인적인 해석 사이의 양쪽의 중복이 있다. 그러한 조금 애매한 점이 있다.

그러면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성도들은 구약에서는 성도들 ࠍࠉ࠘ࠗ 성도들이 두가지 의미로 사용된다. 하나는 천사들을 지칭할 때 이 말을 많이 사용하고 그러나 또 하나는 하나님의 백성을 지칭할 때 많이 쓰인다.

그러나 이 다니엘서의 문맥에서는 분명히 하나님의 백성을 두고 말하는 것이다. 종말의 하나님의 백성을 두고 말하는 것이다.

자 그러면 우리가 다니엘서 7장 9절-14절의 환상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그러면 그 환상이 무엇인가? 다니엘서 7:9절에 뭐가 놓이고? 왕좌(보좌)들이 놓이고 하나님이 등극하고 또 하나의 신적인 존재, 한 사람의 아들 같은 이가 하나님의 우편에 놓인 그 왕좌에 등극하는 환상이다. 그래서 하나님으로부터 대권을 위임받는 나라를 받는, 통치권을 받는, 권세를 받는 심판의 권세를 받는 광경인 것이다.

그런데 그 한사람의 아들 같은 이가 누구라고요? 종말의 하나님의 백성의 대표요 상징이라고 하였다.

그러면 이 다니엘서의 환상의 내용이 무엇인가? 한 마디로 말하면 종말의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우편에 등극한다는것이다. 종말의 하나님의 백성, 그러니까 진정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보좌의 우편에 등극하여서 하나님의 통치권, 하나님의 대권을 받는다는 것이다. 지금은 이 하나님의 백성이 이방왕조에 의해 짓밟히고 고난을 받고 그래서 허덕이고 있다. 대부분의 이스라엘은 언약을 포기하고 패역한 자들로 굴러 떨어졌다. 그러나 끝까지 언약에 충실하는 진정한 이스라엘,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성도들, 그들이 종말에 어떻게 된다고? 하나님의 최후 심판때에 어쩌리라? 하나님이 보좌 우편에 높임받는다는 말인 것이다. 그것이 다니엘이 본 환상이다. 그런데 어铽게 높임을 받아요? 하나의 신적인 존재로 높임받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스콜틀랜드의 중요한 신학자인 H.Black같은 사람은 무어라고 말하느냐면 다니엘서의 진정한 의도는 무엇이냐면 Apotheosis of Isfael이라고 한다. Apotheosis란 말은 무엇인가?그것은 피조물이 하나님과 같이 됨 그것을 말한다. 인간이 하나님과 같이 됨. 인간이 신격화됨. 그러니까 H.Black은 다니엘서 7장의 진정한 의도를 한마디로 무어라고 말하느냐면 종말의 진정한 이스라엘의 하나님과 같이 됨이라고 한다.

이것은 구약의 언약 신학의 논리적인 발달이다. 구약의 언약 신학은 이스라엘을 무엇으로 보는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본다. 구약의 언약의 형식은 무엇인가? 내가 너희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라 이다. 하나님이 이 미천한 이스라엘 백성을 택해서 그들이 하나님이 되어 주기로 약속을 하고 그러니까 그들을 축복하고 보호하고 그들의 하나님이 되어주겠다고 약속을 하고 그들을 자기 백성으로 삼은 것이다. 이것을 선포한 것이 언약이다.

그런데 이 패역한 이스라엘이 대부분이 이 언약을 포讽나다. 그러면 하나님께 의존하고 순종해야 되는데 언약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의존하고 순종해야 되는데 이렇게 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대부분이 언약을 포기한다. 그래서 점차 구약의 전승이 진행됨에 따라 선지자들로부터 이스라엘 민족을 가르기 시작한다.

진정한 이스라엘, 진정으로 언약의 관게를 유지하는 이스라엘, 그들을 '남은 자들' 이라고 한다. 이들은 끝까지 하나님께 의존하고 충성을 해서 언약의 관계를 유지하고 귿르이야말로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인 것이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에 그들이야말로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인 것이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에 그들이 하나님과 특후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고 하기 위해서 구약에서는 이스라엘을 뭐하고 하는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한다.

이 사상이 여러곳에 나타나지만 가장 도전적인 곳이 어디냐 하면 출4:22-23이다. '이스라엘은 나의 맏아들이라'라고 한다. 왜? 언약의 백성으로 내가 택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개념은 언약의 백성이라는 소리이다.

그런에 아까 이야기한대로 이스라엘 백성이 점차 패역하고 우상숭배하는 이방민족의 암력하에 점차 패역해감에 따라 이스라엘 민족 내에서 진짜 언약에 충실한 사람드로가 그렇지 못한 다수를 가르기 시작한다. 그를때에 이 하나님의 아들됨이 누구에게만 적용되기 시작하느냐면 언약에 충실한 자들에게만 적용된다. '남은자들'에게만 적용되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것이 선지적인 문서들, 특히 지헤의 문서에 아주 똑똑히 나타난다.

그러면 언약에 충실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남은 자들의 숙명이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의 아들의 숙명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은 뭐하냐 이다. 하나님의 부요함을 상속받을 자들인 것이다. 하나님의 부요함에 참여할 수 있는 자들이다. 이것이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선택으로 하나님의 언약으로 받은 축복이다. 그런데 그 축복은 현재는 법적으로만 있는 것이다. 또는 in posse 가능성으로만 있다. de hure

다니엘서 7장은 이러한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의 부요함에 참여하도록 약속을 받은 이스라엘이 현재는 이방민족에게 짓밟히고 있지만 언젠가는 실재적으로도 in esse de facto 실재적으로도 그 축복을 받는다는 종말론적인 소망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숙명이 무어라구요? 하나님의 언약 백성 곧 하나님이 아들로서 그의 아버지 즉 하나님의 부요함에 참여하는 것이 언약의 백성인 이스라엘의 숙명인 것이다. 그런데 지금으 역사속에서 이방민족에게 짓밟히고 있지만 그래서 많은 이스라엘 민족이 견디지 못해서 다 언약의 관계를 포기하고 떨어져 나갔지만 끝까지 언약에 매달리는 충실한 자들에게는 그 아들로서의 축복이, 하나님의 부요함에 참여하는 축복이 종말에는 realtity로 나타난다는것이다. 하나님의 우편에 높임을 받아서 이 세상의 모든 악한 자들은 죄의 심판을 받고 그들은 하나님의 우편에 높임을 받아서 하나님으로부터 무엇을 받는가? 하나님의 권세라,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영광을, 하나님의 부요함에 참여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무엇과 같이 되는가? 하나님과 같이 되는 것이다. 진짜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다. 그 한 종말론적인 소망을 나타내는 것이 다니엘서 7장의 내용인 것이다.

다른 말로 말하면 다니엘서 7장은 하나의 어전회의인 것이다. 이것을 독일말론 Thronratversammling이라고 한다. 영어로서 Heavenly assembly 히브리어로는 ࠃࠅࠑ 우리가 이것을 이해하려면 시편에도 많이 반영되어 있고 선지서에도 많이 반영되어 있지만 가장 쉽게 이해할려면 이사야서 6장을 상상하면 된다.

이사야서 6장에서 이사야가 성전에서 무엇을 보는가? 하나님이 성전의 보좌 우편에 높이 앉아계신 것을 본다. 그 하나님 앞에 누가 앉아 있어요? 천사들이 부복하고 있다. 그들이 하나님께 거룩 거룩 거룩 찬양하면서 부복하고 있다. 거기에서 하나님이 자기이 천사 종들과 무엇을 상의하는가? 구원의 계획을 상의하고 계신다. 앞으로의 이스라엘을 구원할 계획을 상의한다.

그런데 이사야에서는 그 구원의 계획이 거꾸로 일단 나타난다. 어떻게? 이 말 안듣든 놈들, 둁너약을 파기하고 말을 듣지 않는 놈들은 싹쓸이를 하겠다고 하신다. 그래가지고 다 타고 남은 둥지에서 나는 새싹으로 시작하겠다는 것이다. 새로 구원의 역사를 시작하겠다는 것이다. 그것을 토론하고 상의하는 것이다. 그러한 하나님의 어전회의인 것이다.

그것을 그렇게 하기로 하나님의 계획을 가결하였는데 우선 이들을 심판으로 싹쓸이를 하고 다 털어버리고 그 둥지에서 새싹으로 새롭게 시작한다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이다. 심판과 구원의 계획이다.

그래놓고는 하나님이 물어요. 그러면 우리를 위해서 이말을 선포하도록 누구를 보낼꼬? 그러니까 이사야가 환상 중에 하나님의 보좌 주위에 부복하고 있는 천사들의 대열에 하나님의 신하들의 대열에 지금 업저버로 참석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환상 중에 그러한 어전회의를다 보는 것이다.

어전회의르 보고 듣고.. 다른 천사들은 아무 말도 않고 가만히 있는데 그런데 자기가 한 발자국 앞에 나가서 '내가 여기 있습니다. 나를 보내소서'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옳지 너 됐다'그러니까 이사야가 내가 입술이 부정하다고 하니 그러니까 제단에서 레14:16에 따라서 그자리에서 숯불로 부정한 입술을 지져서 깨끗이 해가지고 그를 선지자로 내세운다. 그러면 이사야가 선지자로서 선포하는 메시지가 무엇인가?

어전회의에서 가결된 하나님의 계획이다. 그 계획이 무엇인가? 하나님이 심판으로 싹쓸이 하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남은자들로 새롭게 하는 역사를 시작하겠다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어전회의이다.

이 선지들이 부름을 받을 때에 대개 이와같은 계시의 체험을 하고 그 메시지를 선포한다. 그러니까 그 계시가 무엇이냐 하면 이 어전회의 즉 ࠃࠅࠑ가 헬라어로 번역되기는 ՌՕՓՔՇՅՉՏՍ이다. 영어로는 mystry 우리말로는 신비 또는 비밀.

바울이 로마서 11:25절에서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너희들에게 바밀 하나를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않는다'고 엄숙히 선언하고 있다. 여기의 비밀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다 들어올 때까지 이스라엘의 심장을 완악하게 하였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종말에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이게 다 무엇인가?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바울이 무어라고 부르는가? 비밀이라고 부르고 있다. ࠃࠅࠑ인 것이다.

그래서 이런 하나님의 어전회의도 ࠃࠅࠑ라고 하고 그 어전 회의에서 가결되어서 선지자에게 계시된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도 ࠃࠅࠑ라고 한다.

그러므로 진정한 선지자는 가령 예메미야는 우리에게 자기가 받은 ࠃࠅࠑ에 대해서 , 하나님의 어전회의의 계시에 대해서 설명하지 않는다. 그러나 예레미야가 누구하고 싸웠는가? 거짓선지자들과 싸웠다. 예레미야는 무엇을 선포하였는가? 패역한 이스라엘을 하나님이 싹쓸이 한다는 것을 선포하였다. 그래서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간다는 것을, 그래서 이 성전도 다 때려 부순다는 것이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나님의 심판을 예레미야는 선포하였다.

그런데 패역한 왕에 붙은 간신들 거짓선지자들은 무엇을 선포하였는가? 하나냐 이런 자들은 무엇을 선포하였는가? 예레미야가 전쟁을 선포하고 심판을 선포하면 하나냐는 평화, 평화 그러고 다녔다.

그러니까 거짓 선지자들은 예레미야를 진흙구덩이에 뭉고 그랬다. 그러니까 예레미야가 그들에게 도전하기를 뭐라고 하였는가? '너희들이 하나님의 ࠃࠅࠑ에 서봤느냐?' '너들이 하나님의 ࠃࠅࠑ를 들었느냐?' 진정한 선지자는 누구인가? 하나님의 어전회의에 참여해서 거기서 계시를 받은 자가 진정한 선지자이다.

이 전승이 에스겔서 1장에 나타나고 이 전승이 바로 다니엘서 7장인 것이다. 다니엘서 7장이 무엇인가? 다니엘서 7장에서 다니엘이 본 그 환상이 무엇을 나타내는가? 무엇을 말하는가?

우선은 4왕조들이 일어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못살게 굴고 핍박하고 잔해하지만 종말에 하나님이직접 개입해서 심판으로 그들을 물리치고 그의 백성,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성도들, 종말의 백성들, 또는 마지막까지 언약에 충실한 그들에게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숙명을 달성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우편에 높여서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통치에 참여하도록 한다는 거이다.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아들로서 언약의 백성으로서의 숙명을 달성하겠다는 하나님의 구원의 게획의 계시이다. 이것이 ࠃࠅࠑ이다.

그러니까 양식사적으로 볼 때 이사야서 6장과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다니엘서 7장이... 자 여기서 볼때 한 사람과 같은 이는 거기서 '사람의 아들'이라는 말은 메시야적인 칭호가 아니라 사람 같은 이라는 것이다.

종말의 하나님의 백성의 상징이요 대표이다. 그것 뿐이지 사람의 아들이 문구 자체가 무슨 메시야적인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이 다니엘서 7장의 살람 같은 이가 점차 메시야적으로 해석이 된다. 유대의 전승에서.. 두개의 문서에 분명히 메시야적으로 해석이 된 문서가 있다.

그 하나가 제1에녹서 37장-71장(1En 37장-71장) 에녹서는 여러가지가 있는데 제1 에녹서,제2에녹서,제3에녹서가 있다. 제1에녹은 에디오피아 말로 우리에게 전승되어서 에데오피아 에녹이라고도 한다. 제 1에녹은 긴 책이다. 여러 부분으로 된 복합된 책이다. 37장-71장이 한 부분을 이루는데 이 부분을 에녹의 비유라고 한다. 영어로 Similitudes of Enoch 라 한다. 여기에 '한 사람의아들' 같은 이가 분명히 메시야적인 존재로 나타난다. 태초부터 계신 이로써 메시야적으로 활약을 할 존재로 나타난다. 특히 심판할 존재로 나타난다. 다니엘서 7장의 한 사람의 아들 같은 이가 메시야적으로 해석되는 분명한 또 하나의 문서가 4번째 에스라 13장에도 다니엘서 7장의 한 사람의 아들 같은 이가 메시야적으로 해석이 되고 다윗의 아들 메시야와 동일시 되며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얼마전 까지만 해도 제1에녹서와 4에스라서에 근거해서 많은 사람들이 '사람의 아들'이 예수님 전에 또는 예수님 당시에 메이야 칭호였다고 그렇게 보았다. 특히 유대 묵시문학에서 '사람의 아들'은 메시야적인 칭호로서 종말에 올 심판자요 구원자를 가르치는 것이었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면 예수가 스스로를 사람의 아들이라고 부른 것은 곧 바로 묵시문학에서 기다렸던 종말의 초월적인 심판자요 구원자 메시야가 자기임을 나타내고자 했다. 그렇게 많이 해석을 하였다.지금도 보수적인 학자들의 책에는 많이 그렇게 쓰여지고 있다.

그런데 그것이 문제가 많다. 우선 무슨 문제가 있느냐면 요새와서 분명히 밝혀진 바에 의하면 이 책들이 다 예수님 이후에 책들이다.

연대적으로.. 첫째로 연대적으로 문제가 있다. 이것은 거의 모든 학자가 인정한 바와 같이 AD 약 90년경에 쓰여진 것이다. 이책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다.

대부분이 독일 학자들은 지금도 이 책은 BC 1세기 쯤에 쓰여진 책으로 보낟. 그러나 많은 영국 학자들은 이 책도 AD 2세기의 책으로 본다. 그런데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다.

최근에 나타난 쿰란 문서에 보면 쿰란 공동체에서 에녹서가 아주 중요하였다. 쿰란 사람들이 에녹서를 아주 좋아하였다. 그래서 쿨란 사본들 가운데 에녹서의 조각들이 다 나온다. 에녹의 긴 책의 모든 부분의 조각들이 다 나오는데 37장-71장의 부분은 한 조각도 나오지 아니한다. 그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쿰란 문서가 쓰일 당시에는 이 책(에녹37장-71장)가 없었다는 것을 말한다.

뿐만 아니라 최근에 와서 이 책의 내용을 분석해볼때 2세기 중반에 일어난 정치적인 사건에 대한 은유가 나타난 것을 볼 수 있다.

그래서 대부분의 영국 학자들은 이 책을 AD 2세기 중반의 책으로 본다.

그렇다면 이게 무슨 소리이냐? AD 1세기 말, AD2세기에 유대 묵시문학에서 독자적으로 다니엘서 7장 중에서 특히 13절의 '한 사람의 아들 같은 이'를 메시야적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발달하나 이것이 예수님 당시에는 그렇게 했다는 증거는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예수님 당시에는 '사람의 아들'이라는 것이 벌써 메시야 칭호로 유대교와 묵시문학에서 확증되었다는 증거가 되지 못한다는 말이다.

또 더 어려운 것은 예수의 모위 메시야 비밀이 문제이다. 예수께서 우리 다 아는바와 같이 공관복음서에 보면 당시 유행하는 메시야적인 칭호들을 전부 피하였다. 그런데 그런 경향이 분명한데 만약에 사람의 아들이라는 것이 유대 묵시문학의 칭호로 이미 확립이 된 것이었다면 어떻게 예수가 이 칭호를 자기에게 적용할 수 있었겠느냐?

이점을 특별히 강조하는데 노르위에 오슬로의 신학자 E.Leivestad이다. 유대교에서 이미 사람의 아들이라는 것이 묵시 문학에서 메시야적인 칭호로 확립이 되었다는 것은 자료로서는 증거할 수 없짐나 유일한 증거를 댈 수 있는 이것들이 다 지금은 대개 생각하는 바와 같이 주후 문서들이니까 자료로서는 증거할 수 없지만 그것이 예수의 메시야적인 비밀과 상충된다는 것이다.

만약에 사람의 아들이라는 것이 유대 묵시문학의 메시야적인 비밀로 이미 확립이 되었다면 예수가 스스로를 계속 그렇게 사람의 아들이라고 부를 때 그러면 '내가 메시야다' 그소리 밖에 안되는데 제자들이 예수가 누군가 하고 그렇게 방황하고 어쩔줄 모르고 그럴리가 있겠는가?

이런 저런 이유로 예수의 당시에 '사람의 아들'이 메시야적인 칭호로 확립이 되지 못했을 가능성이 많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