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신학 제7강

어디까지 하였는가?

지난 시간에 그 사람의 아들에 대한 중요한 관찰까지 하였다. 그러면 복음서를 읽을 때 그 사람의 아들에 대해서 이러한 현상들이 일어는데 이런 현상들을 가지고 있는 그 사람의 아들에 대한 해석을 함에 있어서 우리가 무엇을 참조해야 할 것이냐? 지난 시간에 한 것은 그 사람의 아들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관찰을 하였다.

2. 다양한 해석들을 위한 요인들

왜 학자들의 해석이 다양한가? 하는 것에 대한 요인들, 다양한 해석들이 요인들에 대해서 오늘 자세히 논하기로 하자.

1)학자들의 전제

①이 학자들의 전제 중에서도 특별히 자유주의,비판주의 신학자들이 대개 가지고 있는 도그마가 하나 있는데 그게 뭐냐면 좀 지나친 학자들, 그 도그마가 뭐냐면 예수가 스스로 메시야라고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즉 non-messianic Jesus. 예수가 스스로를 메시야로 보지 않았다는 것이다 라는 도그마가 상당히 작용을 한다.

그래서 가령 예수가 그 사람의 아들이라는 말을 썼다면 이 도그마에 의해서 예수가 스스로르 메시야라고 부르지 않은 것이 분명하므로 그 사람이 아들이라는 것은 칭호는 메시야에게 칭호가 될 수가 없고 예수이 메시야적인 자기이해를 표현하는 수단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가 어떻게 메시야가 될 수 있을 것인가의 이런 논리가 전개되는 것이다.

만약에 '그 사람의 다들'이라는 칭호가 종교사적으로 메시야적인 칭호임에 틀림이 없다면 그러면 예수가 스스로 자기를 메시야라고 보지 않았으므로 그러므로 예수가 그런 메시야 칭호를 썼을리가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예수가 스스로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종말에 올 메시야를 지칭했거나 아니면 도대체 예수가 사용하지 않은 말을 교회가 지어내가지고 예수가 썼다고 교회가 예수의 입에 집어 넣은 것이다라고 이런식을 신학을 전개한다.

만일 예수가 메시야로서 오지 않았다면 그렇다면 이 학자들의 도그마가 '그 사람의 아들'을 해석함에 있어서 상당히 중요한 요인이 된다.

②그러면 현대 심리학에서는 심리적인 어려움, 가령 종교사적으로 볼 때에 '그 사람의 아들'이 만약에 초월적인 존재, 신적인 존재라고 규명이 된다면 어떻게 이 나사렛 예수가 이 땅위에서 이 시간 속에 사는 사람이 자기가 바로 그 초월적인 사람이라고 하였겠는가? 이 심리적으로 상당히 믿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심정의 어려움도 학자들의 전제들로서 이 '그 사람의 아들'을 해석함에 있어서 상당히 영향력을 행사한다.

그러니까 이런 논의를 좀 쉽게 한다면 학자들의 전제중 하나가 자유주의 학자들의 전제요 도그마요 심리적인 전제, 이러한 것을 볼 수 있다.

2)방법론의 문제

비판적인 방법론은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아들'을 다양하게 해석할 수 가 있다.

①자료비판(source-criticism)을 해보면 공관복음서의 자료비판에 가장 유력한 설이 그렇다고 완전히 만족스럽지도 않지만 많은 학자들이 즐겨 사용하는 가설이 무엇이냐하면 두 문서설이다.

두문서설이라고 하면 공관복음이 근본적으로 '막가복음'과 'Q'라는 두 문서로 구성이 되어 있다고 한다. 그래서 '마가'와 'Q'와 그리고 누가가...

마태는 '마가'와 'Q'가 합쳐서 되었고 즉 마태와 누가는 마가에 Q를 사용하고 즉 마가의 작품에다가 덧붙인 것이 많다는 것이다. 거기다가 Q라는 어록, 즉 예수님의 어록 ՋՏՃՉՁ 말씀들, Q는 예수님의 행적이나 역사적 이야기는 별로 없고 예수의 말씀들만 모아 놓은 것인데 간혹 이제 그 자료를 '마가'의 틀에 끼워 넣어서 만들었다는 것이다. '누가'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그래서 마태에는 자기의 특수자료가 들어 있고 누가에도 자기의 특수자료가 들어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가장 유력한 공관복음서 자료설에 의하면 이러한 내용으로 되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선 공관복음서에 있어서 자료비평에 보면 이 Q가 난해해도 그 사람의 아들이라는 칭호가 나오는 것이 사실인데 그 종류가 다르다.

이 Q에 있는 그 사람의 아들의 죽음의 해석,그 사람의 아들이 죽음에 대한 것만 나타난다. 이 의미에는 강조되는 것이 그 사람의아들의 죽음이다. 이것은 지난 시간에 이야기하였다. 그가 자신의 죽음을 이야기할 때에는 항상 '그 사람의 아들'로 시작한다 그런데 게 다 마가에서 온 자료이다. Q자료에는 하나도 없다.

그래서 우리가 자료설을 자료비판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그에 버금가는 Q가 더 원래의 많고 오래된 자료로서 '그 사람의 아들'이라는 예수의 가르침을 진정으로 유추하는데에 마가가 좀더 발전시켜서 예수의 죽음을 강조하게 되었다.

왜? 마가에 있어서는 바울과 마찬가지로 십자가의 사건이 그냥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런식으로 전개한다.

그래서 Q공동체에서는 십자가의 신학이 없이 예수의 죽음이 우리를 위한 대속의 죽음이 아니고 종말에 온 예수의 지혜 선생으로써 하나의 선지자로써 활동하고 그가 종말에 올 그 사람의 아들, 메시야를 예고했을 뿐이라고 이렇게 그들은 그 삶의 아들을 해석한다.

따라서 예수가 세례요한과 다를 것이 하나도 없다. 세례요한과 비슷하다.

②양식사 비판(form-criticism)에 의하여 학자들의 해석이 다양해질 수 있다.

가령 L. Kasemaan 같은 사람은 Q에 나오는 그 사람의 아들에 대한 말씀은 원래 거룩한 법의 선언 형식으로 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이 사람에 의하면 가령 누가복음 12:8의 경우를 보면 이렇게 되어 있다. '누구든지 지금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고백하면 그 사람의 아들도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천사들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다 누구든지 지금 나를 부인하면 그도 부인될 것이다'하는 것이다.

이것이 형식상 양식사비판학에서 어떤 형식을 가지고 있느냐면 소위 Talio의 법칙을 적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고대의 법 형식에서 가장 근본되는 공식이 Talio의 공식이다.

그것이 무엇인가? 눈에는 눈, 이에는 이...

그래서 어떤 녀석이 자기 친구를 때려서 이를 부러뜨리면 그 벌로 그 녀석도 똑같이 이 하나를 부러뜨려 놓는 것이다. 이 친구가 눈을 빼면 가해자에 대한 벌로 똑같이 눈을 빼는 것이다.

이 동급의 복수의 원칙이다. 이 형식으로 눅12:8이 되어 있고 따르고 있다는 것이다. 누가 나를 지금 시인하면 고백하면 그 사람의 아들이 그를 고백할 것이요 지금 나를 부인하면 그 사람의 아들이 그 때 부인할 것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 양식사 비판에서 Kasemann이라는 사람은 원래 '그 사람의 아들'이 하나님의 법정에서 적용될 거룩한 법들이 모음 형식을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것은 천사들이나 선지자들이 초대교회의 제자들이 이렇게 해가지고 이것에 권위를 부여하기 위해서 '주께서 말씀하셨다'고 하나 뒤에 말씀하였는데 원래는 선지자가 성령의 감동으로 혹은 주의 영의 감동으로 받았다고 주장하였기 때문에 선지자가 한 말이지만 주의 말씀이라고 하여 가지고 그것을 나중에 점점 발전시켜 역사적인 예수가 한 것으로 만들었다고 주장한다.

③전승사 비판(Tradition-history)의 방법론에서는 가장 과격한 학자들이 내세우는 원칙이 무엇이냐하면 지난번에 설명을 하였는데 The principle of dissimilarity이다.

이것이 무엇이냐하면 가령 어떤 사상, '그 사람의 아들'에 대한 언어적인 구조나 '그 사람의아들'이라는 칭호를 통해서 표현된 신학사상이 어떻게 전승사적으로 발달하였는가? 하는 것을 본다.

그래서 구약→유대교→예수→원시 초대교회 그리고 원시 초대교회에서 유대초대교회, 아람어를 사용하면 팔레스탄인 초대교회, 헬라말을 사용하면 헬라초대교회 이런 식으로 어떤 가르침이 전승사적으로 발전했다고 단정하고 '그 사람의 아들'이라는 이 가르침은 어떻게 전승된 것으로 보아야 하느냐? 할 때에 이 문제에 있어서 아주 중차대한 문제가 무엇이냐하면 예수가 어떻게 가르쳤느냐? 하는 것이다.

예수가 '그 사람의 아들'이라는 칭호를 어떻게 사용하였느냐?

그러면 예수가 어떻게 가르쳤느냐를 알기 위해서는 어떤 전제가 필요하다고 보느냐면 이 dissimilarity의 원칙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이것에 대한 가르침이 만약에 유대교에도 있고 즉 예수가 복음서에서 가르쳤다고 하는 이것에 대한 가르침이 유대교에도 있고 초대교회에도 있으면 어떤 가능성을 상정할 수 있는가? 이것은 진짜 예수가 가르친 가르침이 아니고 유대교에서 전승된 것을 교회가 마치 예수가 가르친 것 같이 내세웠을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또 공관복음서에서 예수가 가르쳤다고 했는데 그런데 또 초대교회에서 만연된 사상인 것이다. 그렇다면 진짜 예수가 가르치지 않았는데 초대교회가 자기들의 사상을 적나라하게 그 사상에 권위를 부여하기 위해서 마치 예수가 한 것같이 예수의 입에다 넣었을 가능성이 있는가? 없는가? 있을 수 있는 것이다. 간혹 그렇기 때문에 과격한 학자들은 무어라고 이야기하느냐면 진짜 예수가 진짜로 역사적인 예수가 가르쳤다고 주장할려면 어떻게 되어야 하느냐면 그 가르침과 주장한 것이 유대교의 사상과도 다르고 초대교회의 사상과도 달라야 한다. 그런 것만 진짜 예수가 가르쳤다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The principle of dissimilarity인데 이것을 주종으로 사용하는 것이 전승사학파이다. 독일말로는 Unableitbarkeit라고 하는데 ableit 한다면 여기에서 유대교에서 '유도한다'는 말이다. '도출한다'는 말이다. Unableit이니까 유대교에서 도출되거나 줄 수 없는 것이라는 의미이다. 초대교회에서 Unableit한 것 즉 초대교회에서 줄 수 없는 것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이 아주 비현실적인 방법이라는데에 있다. 왜 그런가? 이것은역사적인 현실을 완전히 무시하기 때문에 그렇다. 왜그러냐? 예수가 유대인 출신으로서 유대교에서 자란 사람인데 유대교에서 배운 것이 하나도 없다는 말인가? 예수의 가르침은 유대교와 비슷한 것이 하나도 없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예수는 역사속에서 산 사람이 아니다. 갈4:4에 보면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셔서 여인에게 나게 하고 율법 아래에서 나게 하셨다'로 하였다. 그것은 유대인으로 율법의 통치 밑에 나게 하셨다는 의미이다. 예수가 유대인으로 나신 것이다. 그리고 율법을 지켜야 하는 율법의 통치밑에서 나셨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 방법론은 예수에게 무엇을 요구하는가? 예수는 유대교와 아무런 상관과 관련이 없다는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초대교회에서는 더 심각한다. 초대교회는 자기들을 무엇으로 보았는가? 예수의 제자로 자기 자신을 보았다. 그런데 예수에게 하다도 배운 것이 없겠는가? 예수에게 배운 것을 초대교회가 만약에 계속했다면 이 방법론에서 우리가 무엇으로 보아야 하는가? 초대교회에서 지어내어 가지고 예수의 입에 집어 넣은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런 엉터리 제자들이 어디에 있는가?

그런데 이 방법이 아주 기가막히게 쓸데가 있다. 지난번의 간접기독론이 바로 이 방법론을 사용한 것이다. 그러면 어떤 부분에 이것이 필요하느냐면 예수의 가르침 중에 가장 독특한 것으로써 누구든지 부인할 수없는 점이 있다. 누구든지 부인할 수 없는 예수의 가르침의 최소한을 확보하는데에 있어서 그렇다.

만약에 일반적으로는 이렇게 비현실적인 방법론이나 우리가 이렇게 비현실적인 방법론을 사용해서라도 진짜 유대교와도 다르고 초대교회와도 다른 예수의 독특한 것을 발견한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두가지 면에서 있어서 중요하다.

첫째로 예수에 있어서 독특한 점을 안다는 것이고 둘째로 그것이 예수에게 있어서 독특한 점이기 때문에 예수의 자기 이해를 표현하는 가장 좋은 수단일거라는 것이다.

그중의 하나가 무엇이라고 하였는가? 아멘이라고 하였다. 예수가 아멘을 어떻게 사용하였는가? 유대교와 전혀 다르게 사용한다. 유대교는 우리아 같이 기도의 끝에 사용하였다. 초대교회에도 다 그렇게 기도의 끝에 사용하였다. 그런데 예수는 어떻게 사용하였는가? 중요한 사람 앞에 사용하였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아멘 내가...' 예수의 아멘 용법은 중요한 것이다. 이것은 예수의 아주 독특한 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 아멘 용법에서 예수의 아주 중요한 자기이해를 도출할 수있다고 하였다.

그렇게 해놓고 보니까 이 The principle of dissimilarity가 우리에게 예수에 대해서 중요한 이해의 한 방법을 제공하다. 따라서 이 The principle of dissimilarity가 예수이해에 있어서 출중하게 쓰일때가 있다. 그러나 이 법칙이 일반적으로는 이러한 비현실적인 문제 때문에 문제가 많다.

그러면 여기서 우리가 이 방법론을 얼마만큼 사용하느냐? 할때에 있어서 '그 사람의 아들'에 있어서 나타났던 것을 가령 공관복음서에 나타나는 예수가 하였다는 '그 사람의 아들'이라는 말이 유대교에 있어서 가령 에녹서에 나오는 '그 사람의아들'이라는 말과 비슷하면 The principle of dissimilarity에서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가짜로 보아야 한다. 즉 유대교에서 전증받은 것을 마치 예수가 한 것처럼 만든것으로 보아야 한다. 전승사 비판에서는...

그렇게 하면 '그 사람의 아들'에 대한 해석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어떤 사람은 예수가 유대인이었으므로 묵시문학의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 따라서 묵시문학의 것과 비슷하다고 해서 예수가 말한 것이 가짜라고 할 수 있겠는가? 하며 도리어 진짜일 가능성이 많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The principle of dissimilarity를 이해할 수 있鑁. 이렇게 해서 '그 사람의 아들'에 대한 해석이 많이 차이가 난다.

지금 우리가 무엇을 하고 있는가? '그 사람의 아들'이라는 해석이 다양한 해석이 왜 일어나느냐? 하는 것이다. 이처럼 이러한 방법론을 배우면 신학의 내용도 배울수 있지만 신학하는 방법도 배울 수 있다. 그러므로 내용도 중요하지만 신학적으로 사고하는 훈련도 필요하다.

물론 여러분이 교회에 가서 설교하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그러나 여러분의 사고하는 훈련을 배우고 나면 여러분의 설교가 비상해진다. 이런 훈련을 하나도 하지 않으니까 성경해석을 하나도 할줄 모르니까 맨날 엉뚱한 이야기나 한다. 그러니까 교회가 오래 다닌 사람에게 당신 도대체 무엇을 믿습니까? 하고 물으면 '잘모르겠다'고 '그냥 믿으면 되는게 아니냐'고 대답한다.

여러분들 그런 사람이 되지 말로 여기 학교의 교훈에 신자가 되라. 학자가 되라. 를 아주 신기하게 보는데 개혁교회 장로교 전통에 신학이 '학'을 상당히 중요하게 여긴다.

영국에 가봐요. 장로교 종교개혁한 스코틀란드의 교육 수준은 지금도 잉글란드는 일반 대학이 서울에 2개밖에 없는데 스코틀랜드는 대학이 4개이다.

스코틀랜드는 잉글란드보다 가난하고 인구도 작고 그래도 대학이 4개이다.

그래서 장로교 신자들이 일반적으로 교육수준이 높고 목사들도 학식이 깊으며 백성들도 일반적으로 높다. 그래서 개혁주의는 학을 상당히 중요시한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별로 그런 것이 없다.

3)종교사적인 배경(The old religions, geschichfliche schule)

세째로 또 하나의 형태가 무엇이냐면 종교사적인 배경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그 사람이 아들'에 대한 해석에 큰 차이가 있다.

옛 종교사학파 소위 The old religions 독일말로 geschichfliche schule인데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20세기에 횡횡하였던 옛종교 사학파에서는 '그 사람의 아들'에 있어서 종교사적인 배경을 무엇으로 보았느냐 하면 고대 중동 문헌과 지중해 연안의 문명의 즉 인도에서부터 로마 이집트까지 아주 만연되었던 '태초인간' 소위 The primal man 태초의 인간에 대한 사상의 한 표현으로 보았다.

그래서 창세기에 나오는 아담,아담이 무슨 말인가? '사람'이다. 아담이라는 말이 히브리 말로 무슨 의미인가? 사람이다. 창세기에 나오는 아담 설화도 중동내에서 널리 퍼져있던 '태초인간'의 사상의 한 판 한 거주이라는 것이다. 즉 이것이 히브리판둁이 창세기에 나오는 '아담'이라는 것이다.

또 이 다니엘서 7장에 나오는 '한 사람의 아들'도 '태초의 인간'으로서 어떻게 된 셈인지 악의 힘에 패배해가지고 모든 자손들이 악과 고난에 종속되었는데 종말에 이 '태초의 인간'이 다시 회복을 해가지고 자기 자신의 자손을 다 회복한다는 그런 사상이 중동에 많이 있었는데 이 창세기 1장이나 다니엘서 7장이나 다 중동에 널리 퍼졌던 '태초인간'에 대한 히브리판인 것이라는 것이다.

여기의 바벨로니아판은 조금 차이점이 있으나 그것도 마찬가지이다. 이런 식으로 종교사학파들이 생각하였다.

그래서 이러한 종교사적인 배경에 의해서 복음서에 나오는 '그 사람의 아들'이라는 것을 설명하려고 하낟.

오늘알 이것을 믿는 사람은 그리 많지가 않다.

아마 지금도 조금 뒤떨어진 곳에서는 그러한 것을 하고 있겠지만 그러나 이러한 것을 아직도 주장하는 사람들은 뒤떨어진 사람들이다.

또 어떤 사람들은 '그 사람의 아들'이라는 칭호가 묵시문학적인 배경을 가지고 있어서 '그 사람의 아들'이 묵시문학에서 메시야, 하늘에서 오는 초월적인 메시야, 특히 다윗왕조를 재건하는 다윗의 자손 메시야, 정치적인 메시야와 대립될 수 있는 대조될 수 있는 초월적인 묵시문학상의 메시야 칭호이었는데 예수가 '그 사람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은 그런 묵시문학상의 배경에서 이었다고 한다. 이런 것이 상당히 많이 퍼져 있었다.

특히 보수한다고 하는 사람들이 이것을 많이 주장하였는데 나중에 고찰해보니까 그렇지가 않다.

그것도 이제 튀빙겐의 구약학 교수인 H.Gsee(게세) 같은 사람은 '그 사람의 아들'이라는 것이 '다윗의 아들'이라는 메시야와 대조되는 또 하나의 초월적인 메시야 사상이다.

이처럼 구약의 메시야 사상이 여러가지로 표현이 되는데 내용이 다 똑같은데 다만 표현 방법만 다르다는 이말이다. 그래서 메시야 geschichfliche '그 사람의 아들' 등 이와같은 것을 서로 연결되는 전승사적으로 보려는 것이 서로 연결되는 것으로 보려는 것이 종교사적인 학파의 접근방법이다.

그래서 '그 사람의 아들'이라는 것은 옛날 종교사학파들이 말했듯이 옛날 중동의 '태초인간'에서 온것도 아니고 무슨 다윗의 아들과 대립되는 천상의 초월적인 묵시문학상의 메시야 사상도 아니고 구약과 유대교의 내적인 발전의 결과로써 구약과 유대교의 표현의 메시야사상의 또 하나의 메시야의 표현으로 볼 수 있다는 이런 식으로 게세가 주장을 한다.

이렇게 우리가 '그 사람의 아들'에 대한 종교사적인 배경을 어떻게 설정하느냐가 '그 사람의 아들'을 해석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요인이 되는 것이다.

4)언어학적인 측면

우리 복음서에서는 한결같이 헬라어로 ՉՏՒ ՔՏՕ ՍՈՑՙՐՏՕ로 되어 있다. 한결같이 이렇게 되어 있다는 것 조차가 상당히 신기한 것이다.

그런데 헬라어로는 '그 사람의 아들'의 표현은 아주 어색하다. 우리말로도 아주 이상하지만..

헬라어 문장으로는 그러한 말이 나온 예가 없다. 그런데 왜 어색한 표현을 이렇게 한결같이 하는가?

이것을 어학적으로 왜 이런 표현이 나오느냐를 규명해야 한다. 그런데 대부분의 학자들의 의견이 이점에 있어서는 대부분이 일치한다.

이것은 아람어의 ࠀࠚࠏࠀ ࠘ࠁ의 문자적인 헤랄어 번역으로 보는 것이다. 그러면 ࠀࠚࠏࠀ ࠘ࠁ가 예수님 당시에 어떻게 쓰였느냐? 예수가 가령 ࠀࠚࠏࠀ ࠘ࠁ 했으면 듣는 사람이 이 말을 어떻게 이해했을까? 그것을 하나의 칭호로 쓸수가 있었느냐? 아니면 그것이 하나의 숙어적인 용법으로 '한 사람'의 뜻으로 이었느냐?

'한사람'의 뜻이었으면 소위 한 사람의 말에 말하는 자기를 포함시키는 것이냐? 그럴 경우에는'나같은 한 사람' 이란 뜻일 것이다. 아니면 자기만을 지칭해서 말할 수 있는 것이냐 등의 언어학적인 면에 있어서는 그 당시에 이 말이 어떤 의미로 쓰였을 것이냐? 이것 또한 '그 사람의 아들'을 설명하는데 있어서 다양하게 설명하는 하나의 pattern이다.

이상의 4가지가 '그 사람의 아들'의 해석에 있어서 여러가지로 의견이 분분하게 만드는 것들이다.

3. 다양한 해석들

'그 사람의 아들'에 대한 해석은 굉장히 많다. 그리고 자신이 학자라고 행세하는 사람들은 여기에 대해 한가지의 주장은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 주장이 각기 다르다. 또 어떤 학자들은 아주 설득력있는 결론을 도출할 수 없으므로 나는 이것에 대해서 의견을 유보한다고 하는 학자들도 있다. 그러나 어떤 이는 이렇게 중요한 문제에 대해서 의견을 가지지 않을 수 없으니까 하면서 여기에 대해 다 한마디씩 한다. 그래서 그것을 다 설명할 수는 없고 대가 중뙽나 것만 7개를 준비하였는데 설명하기로 하겠다.

1)옛 종교사학파

여기는 W.Bousset 나 G.Mowinkel 이나 O.Cullmann, F.Borsch 등이 여기에 속한다. 이 옛 종교사학파는 W.Bousset에 의해서 완전히 성립이 되었고 Cullmann이나 Borsch에 의해서도 전개가 되는데 이들에 의하면 '그 사람의아들'은 아까 이야기한 대로 동양과 헬라세계에 널리 퍼져 있던 '태초의 인간'에 대한 사상의 일부로써 유대 묵시문학에서 받아들여져 가지고 메시야적인 칭호로 쓰였었는데 복음서에 묵시적인 메시야적인 칭호로 '그 사람의 아들'이라는 말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 O.Cullmann은 뭐라고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느냐면 구약성경의 이 '태초의 인간'에 대한 추측이 두가지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하나는 창세기의 아담이다. 그런데 이 아담은 태초체 죄를 범해서 자기 자손인 모든 인류를 전부 죄와 고난의 통치를 받게 하였다. 그러나 어찌된 셈인지 그 태초의 인간이 다시 종말의 인간으로 나타나서 대니엘서에서 종말의 인간으로 나타나서 악과 고난을 극복하고 아담의 죄를 속하므로 아담의 죄를 극복하고 그의 후손들에게 그에 의해 대표되는 그의 후손들에게 구원을 가져다 주었다.

그러면 어떻게 이 종말의 인간, 이 '그 사람의 아들'이 태초의 인간 아담의 죄를 극복하느냐? 속하느냐? 의 여기에 Cullmann은 이사야서의 후반에 나타나는 주의 종의 노래와 함쳐졌다는 것이다.

예수에 의해서 주의 종의 노래,주의종, 이사야서 49-53장까지 나오는 주의 종의 사상과 종말의 인간이 합쳐져가지고 종말의 인간 '그 사람의 아들'이 주의 종으로써 자신이 ꁁ나유를 위한 제물로 속죄의 제물로 드려져서 아담의 죄를 속하고 자기의 백성을 의롭게 한다고 전개한다. 이것이 Cullmann이 옛종교사학파의 전제를 계승한 '그 사람의 아들'에 대한 해석이다.

2)옛 영국학파(The old English school)

이것은 우리들끼리만 쓰는 용어인데 이 The old English school은 옛날이 아니라 1960년대 까지만 활약한 중요한 영국의 대부분의 학자들은 대개 지금 내가 소개할려는 해석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T.W. Manson이나 V.Taylor 과 C.H.Dodd나 M.Black이나 캠브리지의 C.F.Moule 등 FF Bruce도 마찬가지로 이러한 해석을 하고 있다. 그게 무엇이냐 하면 무슨 해석이냐하면 '그 사람의 아들'은 묵시문학에서의 메시야의 칭호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옛영국학파의 해석은 이 '그 사람의 아들'이라는 칭호가 종말의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symbol이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바로 예수가 이런 의미로 종말의 하나님의 진정한 백성으로써 자기를 보았고 이사야서 53장에 나오는 주의 종은 이와 같은 해석을 해서 자기가 패역한 이스라엘 대신에 주의 종으로써 속죄의 죽음을 함으로써 종말에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을 창조한다고 가르쳤다고 하는 것이다.

이것이 Manson이나 Tylor이나 Black 같은 사람이 가르친 입장이다. 그런데 Manson은 거기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서 예수가 말할 때의 '그 사람의 아들'은 에수 자기 개인자격이지만 자기와 연합하는 운명을 같이 하는 자기의 하나님의 나라의 선포를 듣고 하나님의 종말의 백성이 되겠다고 하는 자기 제자들과 연합해서 종말의 하나님의 백성을 구성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The old English school에서도 Moule이나 Hooker나 Barrett는 조금 방향이 다른데 이들은 이사야서 53장의 주의 종의 노래가 '그 사람의 아들'의 말씀에 전혀 관계치 않는다고 본다. 아까 이야기한 Manson이나 Taylor나 이런 사람들은 다니엘서 7장이나 이사야서 53장이 연합되었다고 보는데 지금 Moule 이나 Hooker나 Barrett는 이사야서 53장은 연결이 아니고 다니엘서 7장 자체에서만 그 사람의 아들이 종말의 하나님의 백성의 symbol로써 상징으로써 이방인들로부터 고난을 받고 종국에 하나님으로부터 높임을 받는다는 사상이 다니엘서 7장에서만 나왔다고 주장한다.

하여간 그러한 차이점은 있짐나 이 사람들이 모두 다 주장하는 것은 무엇이냐면 '그 사람의 아들'이 메시야적인 칭호라기 보다는 종말에 하나님의 백성을 대표하고 상징하는 의미로 다니엘서 7장에서의 해석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3)독일학파,비판학파

여기에 속하는 학자들로는 R.Bultmann 이나 W.보른캄,그의 제자인 H.E.Toat 또 하나의 다른 제자인 F.Hahn이나 K.코르테 이런 사람들 그리고 H.E.Toat의 영향을 받은 R.H.Fuller 영국 사람으로서 A.J.D. Higgings 등 이런 사람들을 대표하는 비판적인 학자인데 Bultmann이 이런 식으로 원래 해석을 창시하였고 그것을 그의 제자 보른캄이 발전시켰는데 그것을 보른캄이나 Hahn 등이고 그래서 Toat가 대표적인 학자이다.

이들은 어떻게 해석을 하느냐면 공관복음서에 나오는 '그 사람의 아들'에 대한 형태를 3가지로 분류를 한다.

①미래에 올 '그 사람의 아들'에 대한 말씀. 즉 당시가 아니라 미래에 올 '그 사람의 아들'에 대한 말씀. 아까 이야기한대로 만일 너희가 사람들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그 사람의 아들이 천사들과 함께 영광중에 올 때에 부인할 것이고.. 등의 이런 말들이 꽤나 많다.

②죽고 부활할 '그 사람의 아들'. 마가복음 10:45절에 보면 내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섬기려 하고 나의 몸을 대속물로 주려함이니라 그리고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고 3일만에 부활한다. 이런 말들은 여기에 해당한다.

③현재 이땅에서 겸손하고 가난하게 사는 그 사람의 아들. 대표적인 것이 새도 깃들 둥지가 있고 여우도 굴이 있건만 '그 사람의 아들'은 머리둘 곳이 없다.

현재에의 일이다. 요한은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고 않으니까 귀신들렸다고 하였는데 '그 사람의 아들'은 와서 먹고 마시니까 탐식자요 술주정뱅이라고 한다. 미래나 과거가 아닌 현재에 놀림받고 고난받고 겸손히 가난하게 사신 것이다.

이렇게 '그 사람의 아들'의 해석에 있어서 3분한다. 3가지 종류로 분류를 한다. 그러면 이 속에 들어있는 3가지 종류의 말들 즉 3가지의 '그 사람의 아들'의 의미가 각각 다르다고 주장한다. 그러기 때문에 한 사람이 위의 3가지의 이유를 다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이 사람들은 뭐라고 주장하느냐 하면 위의 ①번 것만 예수의 진짜 말이라고 한다. 또한 첫번째 것도 다 예수의 진짜 말이 아니라 첫번째 말 중에서 한 2-3개가 예수님의 진짜 말이라고 한다.

그것은 어떤 말이냐면 예수가 자기를 '그 사람의 아들'이라고 내세우지 않고 미래에 올 그 사람의 아들, 자기 아닌 다른 사람, 다른존재를 미리 소개하는 것 같은 문장 형식을 가진 말로 된 것만 진짜라고 한다. 그러니까 그것은 3개밖에 없다.

아까 이야기한 눅12:8 그것은 마가같은 것을 Q말이라 하는데 그런데 그것은 막8:38/막14:62

산헤드린 재판 때 대제사장이 이제 유죄판결을 내림으로 예수가 여기에 대해서 뭐라고 하는가? 너희들이 이제 '그 사람의 아들'이 높임을 받아 하나님의 우편에서 심판을 하는 것을 보리라 고 말한다.

이런 문장형식에 있어서는 예수가 자기를 '그 사람의 아들'이라고 하든지 아니면 자기와 다른 제3자를 '그 사람의 아들'이라고 소개하는 것이 평범치 않다. 그냥 형식말을 보면...

그런에 이 학자들은 불트만,보른캄,퇴트 등 독일의 영향을 받은 학자들은 여기서 뭐라고 주장을 하느냐 하면 예수가 여기서 자기 아닌 다른 종말의 메시야적인 존재, 종말의 심판자요 구원자인 '그 사람의 아들'을 미리 예고한다는 것이다. 이것만 진짜라고 한다. 그러나 여기에 해당되는 것은 2-3가지 뿐이다.

그렇게 설정을 해 놓으면 여기를 어떻게 논리를 전개하느냐면 그러면 어떻게 해서 다른 미래에 속한 말들 중에서도 예수가 종말에서의 '그 사람의 아들'이라고 내세우는 말이 있다면 그 아들의 어떻게 이 진짜 말에서 누락이 되었겠는가? 또 둘째말은 어떻게 해서 누락이 되었겠는가? 그리고 세번째 말도 어떻게 해서 누락이 되었겠는가? 를 초대교회의 삶의 장 초대교회의 sitz im Leben을 재구성해 가면서 전승사적으로 해석을 하려는것이 비판적인 학자들의 방법이다.

오늘날 '그 사람의 아들'에 대한 여러 해석들 중에 아마 이 독일학파의 비판적인 학파의 의견이 자유주의 비판적인 학자들 중에 제일 많이 제일 흔히 수용되는 견해이다. 오늘날의 다수 의견이라고 볼 수있다. 최근에 와서 이 다수가 많이 무너졌지만 그래도 자유주의 비판적인 학자들 중에서는 이 의견이 제일 많이 수용이 된다고 볼 수 있다.

4)E.Schweizer

이것은 일반적인 학자들의 견해인데 쮜리히 대학에서 교수로 일하다가 은퇴한 E.Schweizer가 노르웨이의 오슬로 대학에서 L.Leivestad 같은 학자들에 의해서 대표되는 인물인데 이 사람도 '그 사람의 아들'의 위의 분류를 하기는 그대로 한다. 그러나 이 분은 독일학파들과는 정반대로 ③의 말씀이 진짜 말이고 이 ③의 현재 말씀이 진짜 말씀으로서 Schweizer의 같은 경우에는 ②의 말씀도 몇 마디는 진짜 말씀이라고 한다. 그러나 거기는 원래 '그 사람의 아들'이라는 칭호는 안붙었고 그냥 예수가 자기의 죽음을 예고하였고 지금까지 오해받고 핍박받으며 사는 것의 연장으로 자기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예고를 했는데 거기에다가 '그 사람의 아들'이라는 말은 거기다가 붙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③번의 말씀이 진짜 말이고 ②번의 몇개가 어느 면에 있어서는 진짜 말이고 ①의 경우에는 초대교회가 예수의 부활 후 곧 재림할 줄 알았는데 그 재림이 곧 이루어지지 않자 점차 초대교회가 유대묵시문학적 종말론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믿기는초대교회가 원래 유대 묵시문학적인 미래지향적인 종말론에서 점차 완성된 종말론으로 정반대적으로 변한 것이다.

C.H.Dodd도 마찬가지이다. 원래 예수의 가르침에 있어서는 완성된 종말론, 예수에 의해서 이미 하나님 나라가 온다는 종말론적 구조가 탄생되어지는데 이것이 현실적으로 예수의 재림의 형식으로 하나님 나라가 완성이 되지 않으니까 차차 유대묵시문학적인 경향으로 되돌아 갔고 유대묵시문학적으로 규명할려고 하였다.

그래서 가령 요한계시록 같은 문체가 나올 수 있었다고 한다. 요한복음이나 요한 계시록이나 모두 요한문서임에는 틀림이 없는데 요한 학파에서 나왔다해서 요한문서임에 틀림이 없는데 요한복음에 보면 ...

요한계시록에 보면 미래지향적이다. 미래지향적인 종말론이 강하다.

어느것이 문제인가? C.H.Dodd는 요한복음적인 것이 문제이다. 마찬가지로 '그 사람이 아들'에 있어서도 교회가 미래 지향적인 종말론으로 변화하면서 만들어낸 말이라고 한다.

L.Lerversad는 독일의 아주 비판적인 학자들에 대항해 가지고 '그 사람의 아들'이란 칭호가 메시야적인 칭호이었으면 전승사적으로 그 흔적이 어디에 있느냐고 한다. 에녹서나 4에스라서에 부분적으로 있다고 하는데 그런 책이 다 무슨 책인가? 외경이다.

그러니 예수님 당시에 '그 사람의 아들'이 메시야적인 칭호로 쓰였다는 흔적이 하나도 없는 것이다. 또 설령 '그 사람의 아들'이 메시야적인 칭호로 쓰였다 하더라도 예수가 어찌 그 말을 사용할 수 있겠는가? 왜? 에수에 대해서 우리가 확실히 알아볼 수 있는 경향이 무엇이냐 하면 당시 유대교에서 유행하던 메시야적인 칭호들은 무엇이 문제인가?

다윗의 아들이니,다윗의 가지니 하는 이런 메시야적인 칭호들이 거의가 어떻게 해서 이 메시야적인 칭호를 썼느냐 하는 것이다.

그래서 L.Leivestad는 '그 사람의 아들'이 메시야적인 칭호가 아니고 약한 인간이라. 약한 사람이라는 뜻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가 자기의 보통 사람들과 똑같은 죄와 악과 고난 밑에서 허덕이는 인간으로서 자신을 나타내기 위해서 이것을 사용하였다고 한다.

그러므로 그렇게 보면 ③의 말만이 제일 가깝게 쓰인 것이다. 그러기에 ③의 말만 진짜라고 한다.

자 여기서 지금 3)의 해석자들과 4)의 해석자들의 차이점은 같은 방법론을 사용하나 3)은 세가지로 분류에서 어느 한 것을 진짜의 말이라고 해가지고 진짜 말에서 정리가 되어서 다른 말로 발전해 가는 방법론을 사용한 것이다.

그런데 결론은 결과적으로 첫번째의 것이다. 4)의 경우에는 ③이 옳고 ①②가 잘못된 것이라는 것이다. 둘중의 하나가 잘못되었던지 둘다 모두 잘못된 것이라는 것이다.

똑같은 전제를 가지고 똑같은 방법론을 사용하는데 어떻게 이렇게 180도 다른 결론이 나타날 수있는가? 그러므로 위의 방법론 3)4)는 둘중에 하나가 옳든지 둘다 그르든지 둘중의 하나이다.

5)독일의 과격파학파

이 독일의 과격파 학파는 옛날의 본 대학에서 가르쳤던 P.Vielhauer와 E.Kasemann 그리고 이들이 영향을 받은 영국의 N.Perrin인데 N.Perrin은 나중에 시카고 대학에서 가르쳐서 미국의 과격한 영향을 가진 많은 학자들을 배출하였다. 이들에 의하면 S.Kasemann의 스승인 불투만 그리고 친구인 보른캄인데 이들이 아까 주장한 위의 3가지 중에서 어느 하나를 주장하고 이론을 폈는데 비하여 이친구들은 어느것 하나도 해당되지 않는다. 예수가 도대체 '그 사람의 아들'이라는 말을 입에 담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니까 그 사람의 아들이라는 말은 모두다 교회가 지어내가지고 예수의 입에 집어 넣은 것이다. 왜 그렇게 생각하느냐? 우리가 주로 지난 번에 관찰한 대로 우리가 복음서에 보면 '그 사람의 아들'이라고 하는 말씀이 한두절이 예외를 제외하고는 다 하나님 나라의 선포와 분리되어 있다. 마태복음에서 한두절 예외가 나오는데 그것은 대개의 학자들이 마태의 편집사적인 접합으로 보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런 예를 떠나서 '그 사람의 아들'이라는 말씀이 하나님 나라와 전부 분리되어 있다. 그래서 예수가 한사람이 하나님 나라로 나아올 때에 예수가 만일 '그 사람의 아들'로 지칭하였다면 미래에 오는 어떤 메시야적인 지칭을 하였다면 자기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하나님 나라, 그 구원의 개념인 하나님 나라와 연결을 시켰을 것이 아니겠는가?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떻게 분리가 되느냐? 그러니까 둘중에 하나는 예수가 한 것이고 하나는 예수가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의 주제에서 하나님 나라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고 수없이 이야기하지만 '그 사람의 아들'이라는 말씀이 가짜라고 성립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argument를 전개한다.

그러나 이것을 잘 생각해보면 앞 뒤가 맞지 않고 똑똑한 것이 아니다. 왜 말도 돼지 않는 소리이냐? 우리가 지난번에 이야기한대로 지난번의 기본적인 관찰에서 하나님 나라와 '그 사람이 아들'이 분리되었다는 것을 관찰하였다. 분리되었다는 것에 대해서 이 사람들은 그러한 결론을 도출해 내었다. 그러면 그게 말이 돼요?

결론은 무엇이냐면 예수가 이것으로 말했는데 교회가 '그 사람의 아들'이라고 지목해가지고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는 예수가 그 사람의 아들이라고 자기들의 신앙고백의 일부로 그런 말들을 지어냈다는 것이다.

이 사람들의 논리가 성립 될려면 교회가 어떻게 되었겠는가? 그 사람의 아들을 하나님 나라의 선포와 섞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사람들에 의하면 '그 사람의 아들' 이라는 말은 왜 지어냈는가?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고 하나님 나라를 이 역사속에 가져올 예수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서 '그 사람의 아들'이라는 말을 만들어 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교회가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는 예수가 '그 사람의 아들'이다. 이런 식으로 하였을 것이 아니겠는가?

이 사람들에 의하면 교회가 왜 '그 사람의 아들'이라는 말을 만들어 내었는가? Kasemann이나 Perrin에 의하면?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는 예수의 중요성을 부각시키기 위해서 '그 사람의 아들'이라는 말을 지어냈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위리의 반격은 교회가 만일 지어냈다면 하나님 나라라는 말과 '그 사람의 아들'을 접합시켰을 것이 아니겠는가?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잘생각해보라.

이렇게 형식적으로 하나님 나라와 '그 사람의 아들'이 분리되었다는 것이 도리어 둘다다 예수가 한 말이라는 가능성을 더 높이는 것이다. 만약에 하나는 예수가 한 말이고 다른 하나는 교회가 지어낸 것이고 '그 사람의 아들'은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는 예수의 중요성을 부각시키기 위해서 교회가 지어냈다면 교회가 얼시구나 하고 여기다 붙였을 것이 아닌가?

예수가 가령 제자들을 가르치면서 내가 하나님의 영으로 내가 하나님의 손가락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병자를 고치면 너희들 가운데 벌써 하나님 나라가 임했다는 이 말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중요한 말이다. 그 말을 교회가 전승하면서 지어 내야할 것이 아니겠는가? 따라서 내가 '그 사람의 아들'로서 지금 병자들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면 하나님 나라가 너희 가운데 임하였다고 할 것이 아니겠는가?

이와같이 이 사람들의 결론은 도리어 정반대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다. 왜 그렇게 이 두개가 분리되어 있느냐에 대해서는 지난번에 이야기하였는지 모르지만 하나님 나라는 에수의 무엇인가? 예수의 공적인 선포인것이다.

모든 사람들에게 공적인 선포인 것이다.

'그 사람의 아들' 이라는 말은 예수가 누구에게 한 말인가? 자기의 제자들에게 내적인 가르침인 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공적인 가르침이고 '그 사람의 아들'은 내적인 가르침이다.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분리된 것이다. 왜 그러느냐는 조금 있다고 말을 더 자세히 하도록 하겠다.

6)새로운 영국학파(The New English School)

이것은 옥스포드에서 가르치는 G.Vermes에서 시작해가지고 M.Casey, B.Lindars 이런 친구들이 중심이 되는 학파인데 지금 이들이 상당히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이들은 언어학적인 고찰로부터 시작을 한다. 이들의 주장은 복음서의 ՉՏՒ ՔՏՕ ՍՈՑՙՐՏՕ '그 사람의 아들' 이라는 헬라어 말투에는 이런 아람어가 있다는 것이다. 이런 아람말이 하나는 ࠀࠚࠏࠀ ࠘ࠁ 로 나타나고 그냥 ࠚࠏ ࠘ࠁ로 나타나기도 한다. 어느시대의 아람어냐 어느 지방의 아람어이냐에 따라 이런 여러 종류들로 나타나는데 이들의 주장에 의하면 이 말은 두 세가지의 의미를 갖는 숙어이었다는 것이다. ①a man(일반적인 한 사람) 또는 the man 이러한 것을 일반적 사람이라고 한다. 한 사람이니까 말하는 자도 포함되는 것이다. ②the man as I(나같은 사람) 이것도 일반적인 용법이나 더 적용범위가 좁아지는 것이다. ③그 말이 I(나)에 대한 대칭어라는 것이다. 나에게 나를 두고 말할 때 나에 대해서 대칭해서 사용하는 말인 것이다. as ࠚࠏ ࠘ࠁ는 예수가 주로 이용법으로 많이 사용하였다.

그러니까 그 사람의 아들은 아무런 의미가 없고 단지 '나'라는 말과 대치한 것 밖에 없다는 것이다. M.Casey는 사람이 이것도 예수가 주권적임을 주장한다는 것이다. B.Lindars의 해석에 의해서도 '그 사람의 아들'이라는 말이 특별히 예수에 의해서가 아니라 ②의 '에수 같은 자'라는 것이다. 예수와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

그러나 우리가 복음서에 나타나는 '그 사람의 아들'이라는 말이 여기가 이런 용법으로 해석되지 못한다는 말을 많이 있다고 그런 말을 많이 한다. 그러면 그 사람들은 뭐라고 하느냐면 그런 것은 다 가짜라는 것이다.

예수가 원래 이런 의미로 '그 사람의 아들'이라는 말을 썼다. Lindars에 의하면...

그런데 교회가 나중에 '그 사람이 아들'이라는 그 표현을 아람말에서 헬라어로 번역하는 과정에 다니엘 7장의 영향을 받아가지고 예수에게만 적용되는 칭호로 탈바꿈시켜가지고 예수에게만 적용되는 말들을 지어내서 예수의 입속에 넣어가지고 마치 예수가 한 것같이 했다는 거이다.

또 이학파에 의하면 '그 사람의 아들'이라는 말씀과 다른 숫자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원래 예수의 입의 말에 있어서 나중에 교회가 예수의 말을 오해해가지고 예수는 이렇게 일반의미로 썼는데 예수에게만 적용되는 메시야적인 칭호로 탈바꿈해가지고 다니엘서 7장에서 자꾸 떨어지기 시작한 것이지 원래 실제 예수는 다니엘 7장과는 관계없다고 한다. 이것이 새로운 공식이고 자꾸 이들이 주장한다. 예수 당시에 이말이 그렇게 쓰였느냐?

7)H.Gese와 튀빙겐 학파

옛날 튀빙겐 학파가 아니고 지금의 튀빙겐인데 아까 이야기한대로 다니엘서 7장에 나오는 '한 사람과 같은이'는 구약에 다양하게 나타나는 메시야적 전승의 한 종류로서 구약에 나타나는 다른 메시야적 표현 즉 다윗의 아들, 주의 종, 지혜 등과 전승사적으로 결부시켜서 해석해야 된다고 한다.

내가 지금 분류를 7가지 하였다. 이외에도 대단히 많다. 그 중에서 중요한 것은 지금까지 내가 분류한 것이 특히 이전에 많은 영향력을 끼치고 많은 여러 사람들이 그럴듯하게 받아들이는 그런 학설들이다. 이중에 3)번것과 6)번 것이 오늘날 비판적인 학자들 중에 가장 영향력이 있는 설들이다.

다음은 두 학파의 요점을 간단히 더 고찰해보고 이 친구들이 왜 틀렸는가를 설명하고 내가 발견한 진리를 여러분들에게 가르쳐 주도록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