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신학 제6강

지난번에 어디까지 하였는가? 하나님 나라 다 하였는가? 죽음과 부활까지 하였다.

그래서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와 초대교회의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하나님의 구원의 사건으로 선포하게 된 것과의 상관관계를 하였을 것이다. 이제 마지막으로 하나님 나라의 주제에서의 마지막으로 예수께서 자기 제자들을 보냄을 공부하겠다.

9)예수께서 제자들을 보냄.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에 응하는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의 사람의 통치의 축복만을 받는 나라들이 아니라 동시에 예수에 의해서 하나님 나라에서의 여러 과제들을 성취하도록 위임을 받고 보냄을 받는다. 그러니까 예수의 하나님 나라의 선포에 응하는 사람들은 일방적으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통치의 축복만을 받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 나라에서 할 의무를 갖는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 의무가 세가지로 되어 있다.

하나는 이 하나님 나라가 빨리 완성이 되도록 기도하는 것이다. 그래서 주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도 그렇게 시작한다. 주의 나라가 임하소서. 이제 하나님 나라가 빨리 완성이 되도로 끼도하는 것이다.

둘째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고 귀신을 쫓아내고 병자를 고치는 것(막3:13.눅10:8ff) 등. 이 두번째에 있어서는 이 하나님의 백성이 예수의 사역을 계속한다고 볼 수있고 또는 예수의 사역에 참여한다고도 볼 수 있다. 예수께서 그의 제자들을 불러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고 귀신을 좇아내서 병자들을 고치도록 보냈다.

세째로, 하나님 나라의 백성다운, 하나님 나라의 백성의 의의를 나타내야 한다. 이세상에서 살지만 벌써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살아라. 이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의 의의는 무엇으로 나타나느냐면 섬김으로 나타난다. 겸손한 섬김으로..그러니까 자기를 내어주는 사랑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것이 막10:33-45절가지에 나오는 교훈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 곧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에 있어서의 그들에 있어서의 ethos는 이 세상의 도와는 달리, 세상의 도는 자기주장하는 것이다.

세상에는 자기 주장을 잘해야 국회의원도 되고 대통령도 되고 그런다. 자기 주장을 잘해야 남의 돈도 많이 뺏고 사람도 마구 죽이고 그래야 대통령도 되고 한다. 이렇게 이 세상은 전체가 고난이요 고통이다.

그러기에 그의 백성은 하나님 나라를 구해야 하고 하나님의 통치와 지배가 이루어지도록 구해야 하는 것이다. 즉 이세상의 지배자들은 자기 밑의 피지배자들을 깔고 뭉개는 것이 이 세상의 일이지만 예수께서 가르치시기를 너희들 가운데에서는 그게 아니라는 것이다.

너희들 가운데에서의 ethos, 도는 무엇이라고 하였는가? 섬김이라고 하였다. 그 섬김이 자기를 내어주는 섬김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 사람의 아들'이 온것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대속물로 주려 함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이것이 하나님 나라에서의 백성의 의무인 기도하는 것이라든가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는 것, 그 다음에 하나님 나라 백성의 의를 내어보이는 것이다.

바로 그 섬김으로... 겸손한 섬김으로 하나님 나라 백성의 의를 내어보이는 것이다.

이제 그것이 종합되어서 마 28:19절 이하의 우리가 잘 아는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고 너희들이 가르친 모든 것을 지키게 하라' 이렇게 부활하신 주께서 명령을 하셨다.

그런데도 이 명령이 주로 기도와 복음선포이며 하나님 나라의 백성의 의를 선포하는 것이다. 그런데 재미 있는 것은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에도 그랬지만 예수가 자기 제자들에게 명령하는데에 있어서도 제자들의 하나님 나라 백성의 과제라고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명령하는데에 있어서도 사회,정치,경제적인 program이 전혀 없다. 이것이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에 있어서 상당히 독특한 것이다.

우리가 지나번에 배경을 설명했듯이 유대의 여러신학적인 조류들, 여러 파당들의 하나님 나라 개념은 아주 물질주의적이고 이세상적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다 사회적인,정치적인 대안들을 다 가지고 있었는데 그 당시 하나님의 통치에 대해서 가장 열렬히 선포했던 열렬당원들이 하나님 나라의 개념을 무엇으로 보았다고 하였는가? 이 세상에서의 신정의 구현으로 보았다. 그런데 그 신정은 사회적인,경제적인,정치적인 현상으로 나타나는 것으로 보았다.

그래서 정치적으로는 이스라엘의 독립, 즉 우상숭배하는 로마사람들로부터 완전히 독립을 하여소 로마의 가이사가 아니라 하나님을 왕으로 섬기는 이스라엘 민족이 되어야 하고 다윗 왕조가 재건되어야 하고..

사회적으로는 무슨 하나님의 백성간의 주가 있고 종이 있어서는 안된다 해서 열혈당원들이 66-70년에 일으킨 유대전쟁때 예루살렘을 함락하였을 때 제일먼저 한 것이 무엇이라고 하였는가? 노비문서를 다 불태워버렸다고 했다.

또 이 경제적으로도 평등, 그래서 빚, 채무,채권관계 서류도 다 불태워 버렸다. 이렇게 그들의 하나님 나라 개념에는 아주 정치적이고 사회적이고 경제적인 program이 주류를 나타내었다.

그런데 그것과는 너무나 대조적으로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에는 사회 경제적인 또 정치적인 program이 하나도 없다. 이것이 이른바 해방신학하는 사람들, 예수를 이른바 해방운동의 효시로 삼으려고 하는 살마들에게는 상당히 큰 문제이다.

우리가 우리의 복음서에 나와 있는 예수의 하나님의 나라 선포에는 그런 사회적인,경제적인, 정치적인 program이 하나도 없다. 불행히도 도리어 반대현상이 많다. 그렇다고 해서 예수가 이러한 사회적인 현상을 지지한 것도 아니다. 의식적으로 예수가 분명히 현재 지금 이런 관계가 이런 사회적인,경제적인 관계가 좋다고 주장한 것도 아니다.

너무 이렇게 원칙적으로 이 세상에 있어서 ethos 통치자들은 어떻게 한다구요? 자기 아래 있는 사람들을 깔고 뭉갠다. 섬김이 없고 탈취하고 핍박한다. 자기 주장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에서 이 세대의 가치와 질서를 뒤집어 놓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혁명 program을 제기하나 구체적으로, 구체적인 것에 있어서의 사회적인 경제적인 program이 하나도 없다. 구체적인 면에 있어서는 도리어 좀 반대적인 요소가 좀 있다.

예수의 비유들 가운데 당시의 착취의 관계에를 많이 드는데 거기에 있어서의 착취의 관계를 비판하지 않는다.

가령 거기의 포도원의 농부의 비유를 들어보자. 막12:1-12절까지 나오는 포도원의 농부의 비유를 들어보자.

이 비유에서 포도원은 분명히 이스라엘을 말한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 구약에서 보면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그리는 그림들 중의 하나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포도원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농부들은 이스라엘의 대표자들, 지도자들, 대제사장들, 이런 사람들을 말한다. 그래서 농부들이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이 이스라엘 백성을 진짜 하나님을 경외하고 순종하는 언약의 백성으로 잘 인도해야할 의무가 있는데 그 정반대로 이제 하나님의 종들을 선지자들을 다 잡아 죽이고 종국에는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까지도 잡아 죽이리라는 비유이다. 요점은 거기에 있다.

그런데 예수로 하여금 그렇게 생생한 비유를 아주 효과적으로 들수 있게 한 것은 당시의 갈릴리의 사회, 경제적인 현상이었다. 당시의 갈릴리의 많은 농토들이 부재지주의 소유이었다. 그래서 예루살렘이나 이런 도시에 사는 큰 부재지주가 갈릴리의 농민들의 땅을 다 뺏어가지고 조그만한 땅을 가지고 있는 농민에게 대여해주어 소작농,농노의 관계로 전락하였다.

즉 옛날의 땅 주인들이 부재지주에게 땅을 다 뺏기고 자기들이 가지고 있던 땅을 계속 경작하지만 이제 그것이 남의 땅이 되어서 농사를 지어 주인에게 소작료를 내어야만 했었다. 이렇게 당시의 갈릴리는 아주 소작농이 많았다.

그래서 이 막 12:1-12절까지의 비유를 예로 들면 당시의 갈릴리의 사회 경제적인 현상을 아주 잘반영하고 있다. 그런데 예수는 그 당시의 사회적인 현상에 대해서 그 비유에서 부정적인 말을 하지 않는다. 차라리 예수가 그 비유를 어떻게 사용하는가? 그 사회적인 현상을 가지고 차라리 하나님과 이스라엘과 이스라엘 백성과의 관계를 설명하고 있다.

무슨 말인지 알겠지요?

이렇게 차라리 세례요한의 메시지에서는 사회 경제적인 혁명적인 program이 많다. 그래서 세리들에게 착취하지 말라. 군인들에게 강포를 하지 말고 착취하지 말라 등의 program이 많다. 그러나 예수님에게는 그러한 가르침이 없다.

그래서 이제 이것을 곰곰히 생각하면 그 재물에 대한 태도를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왜 그렇게 예수께서는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시면서 그 당시의 열혈당원이나 유대인같이 사회 경제적인 정치적인 program을 제시하지 않았는가?

예수는 부, 부의 우상성에 대해서 실랄히 공격한다. 그들의 부에 대한 태도를 실랄히 공격하였다. 누구든지 부, 하나님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 하나님과 mamon을 동시에 사랑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부라는 것이 우상이 되어서 우리를 하나님으로부터 분리시키고 우리를 부의, 물질적인 것을 같이 섬길 수 없다는 것을 가르치신다. 부자에게 대해서도 그렇지만 가난한 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가난한 자, 부자는 자기의 부에 대해서 의종하고 부에서 자기의 security를 얻으려고 하고 하는 것을 보고 예수는 부가 그의 우상이라고 경고한다. 즉 부자는 부가 자기에게 안전을 주고 자기의 생명을 유지한다고 해서 그것을 경고한다.

그래서 이 부의 우상성과 그 어리석음을 예수는 지적하고 있다. 예수는 부자들에게 경고하는 것이다. 즉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에서도 부자들을 많이 경고한다.

그러나 예수는 동시에 부자들의 덕을 많이 본다. 그래서 부자들이 소개하면 가서 음식 많이 먹고 베다니의 말아, 마르다, 나사로가 돈이 꽤나 있었든것 같은데 그 가정을 본보기로 삼는다. 예수의 제자들도, 요즈음 해방신학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고난과 고통을 받는 것이 아니라 또 가난뱅이가 아니라 요즘 말로 다 중산층이다. 거기에 보면 베드로도 집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베드로의 집에서 예수가 대접받고 그런다. 그래서 소의 장모의 병도 고여주고...

소의 세배대의 아들들도 조그만한 중소기업을 가지고 있었다. 예수 자신도 빈민층이 아니다. 당시의 사회계층을 보면 부자는 농토를 가지고 있고 馽나 농토를 다 빼앗기고 농노로 전락한 하층민이 있는 반면에 또는 부재지주로써 로마 사람들과 결탁하고 아니면 제사장 가문과 연결되거나 공무원과 연결된 보다 나은 상류층이 있는가 하면 중산층이 있었는데 그 중산층이 무엇이냐면 이렇게 손재주를 가진 사람이 있었다. 그래서 개작하는 기술을 배운 사람들이 이게 중산층이다. 예수가 목수이었다 하는데 있어서 중산층인 것이다.

예수도 대개 자기의 제자들을 중산층에서 선택하였다. 그런데 그것은 자기가 의식해소 뽑은 것도 아니다. 왜? 거기에는 또 무엇이 있었는가?대개는 중산층이지만 세리도 있었다. 세리.. 이 세리들은 어떻게 세리가 되느냐면 로마의 치리자에게 뇌물을 잔뜩 주고 그 자리를 샀다. 돈으로 이 세리직을 산 것이다. 그래서 유대인에게 세를 책정할 권을 갖는 것이다.

그러면 로마 사람들은 유대인들에게 10쯤 세를 책정하라 하면 15쯤 책정해서 10은 갖다 주고 나머지 차액을 자기가 챙겼던 것이다. 뇌물을 잔뜩 주어가지고 세관을 샀으니까 본전을 빼야 될 것이 아니겠는가? 자기돈 하나도 안들고도 대통령 되어가지고 수천억을 먹었는데 자기의 돈이 들어갔는데 안그러겠어?

그래서 세금을 먹이는데 많이 먹여서 나머지는 착복하였다. 그러기 때문에 사회적으로는 정치 경제적으로는 막강한 권력이 있었지만 종교적으로는 죄인 취급을 받고 미움을 받고 고통을 당했다. 그런데 예수의 제자들까지 세리가 있었다. 그리고 예수의 친구들까지 세리가 많았다.

예수가 가난한 자들을 미워하기도 하고 또 사랑한다; 그러나 가난한 자들에게 얼마나 사랑하였느냐면 특별한 사랑을 베풀었다. 그들이 금전적으로 없어서 없이 여기고 그런 자들 뿐만 아니라 어떠한 형태들로든 억눌림을 당한 자들을 사랑하였다. 세리들도 사랑하고 심지어 창녀들도 다 사랑하였다. 그러데 억눌림을 받고 배척을 받는 다수가 자연히 경제적으로 가난한 자들이었다. 그래서 가난한 자가 예수의 사랑의 대상이 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예수가 가난한 자들을 위해서 사회개혁을 어떻게 해야 하고 경제 개혁을 어떻게 해야 하고 하는 그러한 program을 제시해야 하느냐 하면 그런 것은제시하지 않는다.

우리가 아까 말하는 착취와 착취당하는현 경제체제를 하나도 바꾸지 않고 그것을 하나님 나라의 진리에 대한 예화로 들고 있다. 그 유명한 달란트 비유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니 민족주의 신학자들은 큰일이 났다. 공산주의자들도.. 이 달란트 비유는 자본주의 중의 자본주의 비유이다. 달란트 받아가지고 뭐하라고? 장사해서 이득을 남기라고!! 이익을 안남기면 어떻게 한다고? 이놈!! 한다고..

이렇게 당시의 사회 경제제도도 즉 착취와 착취당하는 관계에 대해 구체적인 어떤 program을 제시하지는 않지만 그런 것을 이용해서 하나님 나라의 진리를 설명하고 있다.

왜 그렇느냐? 왜 이와같이 하는가?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의 선포의 사회적인 경제적인 정치적인 코멘트가 하나도 없느냐? 이것은 여러가지로 생가해볼 수 있다. 하나는 이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 나라의 초월성 때문에 그렇다. 초월성, 지난 번에 예수의 하나님 나라의 선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동사가 무엇이라고 하였는가? 하나님 나라가 '온다'라는 것이었다. 온다 거기에 바대해서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가 '온다'라는 것이었다.

그러데 우리는'하나님 나라를 받는다'는것이다. 거기에서 벌서 하나님 나라가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으로부터 우리에게 온다는 말이다. 우리는 받아요!

우리가 어떻게 무슨 경제적인 사회적인 정치적인 혁명을 통하고 무슨 개혁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를 우리가 이루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가 우리에게 임해서 우리에게 주어져서 우리가 그것을 받아서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 그것이 제일 첫째 이유이다.

이 유대의 하나님 나라 개념을 다 synegism이라고 하여싸. 인간이 하나님과 협동해서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열형다원들은 자기들이 하나님 나라를 정치적인 사회적인 투쟁으로 하나님 나라를 이룬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예수는 정반대로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은혜로 전적으로 우리에게 온다고 하였다. 이것이 가장 근본적인 이유이다. 예수의 하나님 나라의 선포의 하나의 사회 경제적인 정치적인 이유가 없느냐에 대해서..

두번째로 이 하나님 나라의 초월성과 결부해서 말할 수있는 것은 사회 정치적인 경제적인 program이라는 것이 전부 역사적인 시간적인 한계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다 이세상적이다. 물질주의적이라는 것은 다 이세상적이다.

예수는 이 세상의 지금 현 질서를 조금 어떻게 개혁해서 조금 더 공정하게 만들고 하는 그것이 참 목적이 아니었다. 초월자 하나님의 전혀 새로운 질서 새로운 세계가 그의 궁극적인 목적이지 이 세대의 무엇을 조금 고쳐놓고 하는 것이 그의 목적이 아니다.

이것과 연관되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잘 생각해 보자.

부에 대한 경고, 부가 무엇이 될 수 있다고? 우상이 될 수 있다는 것에 대한 경고, 부자에 대한 실랄한 비판, 가난한 자에 대한 위로와 사랑, 그러나 가난한 자들을 위해 무슨 program을 제시하지는 않았다.

이러한 것들을 곰곰히 생각해보면 예수의 부에 대한 태도를 알 수 있다.

세째로 예수는 '부'라는 것을 절대화하기를 거부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수는 '부'를 절대화 하기를 거부하였다. 이 세상을 전부로 알고 사는 사람들은 부자나 가난한 자나 할 것 없이 '부'를 mamon을 절대화 하였다.

부자는 왜 남을 윽박지르며 죽이면서까지 '부'를 만들려고 하는가? 얻을려고 하는가? 그것은 '부'를 절대화한 것이다. '부'가 자기에게 안전을 주고 쾌락을 준다고 생각한 것이다. 가난한 사람들은 왜 더 '부'를 외쳐 내가 부자가 되어야 한다고 아우성치고 난리인가? 마찬가지로 똑같은 생각이니까 그렇다. 이 사람들도 부를 절대화한 것이다. '부'라는 것이 나에게 안전을 주고 쾌락을 주고 안정을 제공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모든 삶의 풍요로움을 제공한다고 생각한다.

부를 절대화하는 것은 부자나 가난한 자나 같다. 부자에 있어서는 '부'를 절대화하고 가葥한 자에 대해 나타나는 현상은 교만이요 사랑없음이요 윽박지름이요 착취요 짓밟음이요.. 이러한 것이지만 가난한 자의 부자에 대한 태도는 사랑없음이요 질시요 미워함이요... 이렇게 똑같다.

그래서 예수는 무슨 부자와 가난한 자의 자리바꿈하는 것을 문제해결로 보지 않았다. 또 '부'를 공산주의식으로 빼앗아서 똑같이 나누는 것도 그 해결책으로 보지 않았다. 도대체 '부'라난 것을 상대화하는 것이다. 부자에게도 '부'라는 것이 우상이기도 하지만 가난한 자의 우상이기도 하다. 부자가 '부'를 우상화하지 못하도록 실랄하게 비판하고 경고하였지만 마찬가지로 가난한 자들이 '부'를 우상화함으로 절대화하도록 위로하지도 않았다.

무엇가지고 위로하였나?

하나님 나라의 보상을 가지고 위로하였다. 물질적인 보상이 아니다. '부'라는 것을 가볍게 상대화하였다. 그러기 때문에 '부'에 대한 자유함,부를 섬김의 수단으로서 해야지 부로부터 나의 안정, security를 얻고 삶의 힘을 얻으려고 하면 안된다는 것이다.

부를 섬김의 수단으로 사용하라는 것이다. 부를 섬김의 수단으로 사용할 때에 '부'를 즐겨도 괜찮다. 그러므로 예수에게 있어서 금욕주의가 없다. 예수가 부를 비판하였으니까 어떤 사람들은 그러면 '금욕주의'로 가야할 것이 아니겠는가? 고 말한다. 그러나 먹고 마시고 즐기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고 말한다.

예수는 스스로 소유한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개서 공중의 나는 새로 깃들 곳이 있고 들의 여우도 잘들 굴이 있으나 '그 사람의 아들'은 머리둘 곳이 없다고 하였다. 예수 스스로 소유한 것이 없었다.

그러나 부에 대한 아주 자유로운 태도, 부라는 것이 무엇이냐? 섬김의 수단이다. 그것에서 security를 얻는 그것에서 삶의 원동력을 얻는 그것에서 무슨 삶의 도피처 처럼 생각하는 그것이 부자나 가난한 자들이 그것이 안된다는 것이다.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가 그것을 자 보여준다.

그러면 어떻게 부를 상대화할 수있느냐? 이 세상에서는 이 세대에 사는 사람들은 그래서 자기 주장을 하는 의지, 이 세대에 사는 사람들을 부를 상해화 할 수 없다. 부를 상대화할 수 있다는 것은 오로지 초월적인 가치의 빛 아래서 보았을 때에만 이 세상적인 것이 없어져 버리는 것, 시간에 제한되어 있는 그것이 상대화되는 것이다. 그때만 진정으로 부를 상대화하고 부로부터 자유함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설령 우리가 부를 가지고 있든, 가지고 있지 않든지 간에 부라는 것은 우상화하며 절대화 해서 거기에 매이는 것이다.

해방신학자들이 민중신학자들이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가? 어떻게 가난한 자들이 이 착취하고 짓밟는 부자들의 돈을 빼앗아 가지고 그들이 가난한 자들이 부자가되느냐 하는 것이 그들이 관심이다. 아주 유치하게 표현을 하자면...그렇죠?

그렇게 하면 무슨 문제가 해결이 되겠는가? 자리바꿈만 되지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옛날에 블란서 혁명 때 혁명 시민들이 거리에서 빵을 달라고 데모하니까 마리앙토와네트 여왕이 시녀에게 물었다. 혁명이라는 것이 무엇이냐? 그러니까 시녀가 대답하기를 '혁명이라는 것은 내가 여왕이 되고 당신이 내 시녀가 되는 거요' 이 대답에는 상당한 진리가 있다. 혁명이란 무엇이가? 자리바꿈이다. 가난한 자가 한번 부자가 되고 부자가 한번 가난한 자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자리 바꿈을 했짐나 착취자와 착취당하는 그 관계에는 변함이 없다.

옛날 브레즈네프가 소련을 통치하고 있을 때 그 사람에 대한 농담 참 많았었다. 이런 것이 하나 있다. 브레즈네프가 외국에 다니면서 선물 받기를 좋아하였다. 그 선물 중에 좋은 차(car)를 좋아하였는데 그런데 한번은 자기의 별장에 자기의 어머니를 초대해서 저녁을 근가하게 대접을 하고는 자기의 어머니에게 선물들을 꺼냈다. 그리고 자기가 받은 선물들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말하기를 '엄마, 당신 아들 꽤 성공했지?' 그런데 그 엄니가 갑자기 슬픈 기색으로 말하기를 '얘 그런데 지금 걱정이 하나 있다.' 무슨 걱정이냐고 물으니 공산당이 만약에 정권을 잡으면 이거 다 어떻게 되니?

그런데 브레즈네프가 공산당 서기장이 아닌가? 공산당 서기장이 호사스런 선물들을 갖추어 놓고 자기 어머니에게 자랑을 하였다. 자기이 어너미가 걱정이 생겼다. 공산당이 집권하면 이게 다 뭐가 되니?

공산당 무산 계급이 혁명을 하였다. 모든 것을 똑같이 받고 형제애로 산다고 하는데 브레즈네프는 그렇게 잘 살게 되고 일반 국민들은 가난과 고통 가운데....

내가 지난 주에 아파가지고 솔제니친의 소설 하나를 읽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시작하던 때의 1914년 8월을 배경으로 해서 이것은 공산주의 소설은 아니지만 공산주의 혁명이 일어나지 않으면 안되는 재정 러시아의 부패한 무능상을 묘사하고 있는데 재정 러시아의 하급 생활자들은 엄청난 고생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혁명하기를 잘 했는데 혁명이라는 것이 문제해결을 하지 못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예수는 사회적인,경제적인,정치적인 program을 제시하지 않는다. 무엇을 제시하는가? 근본적인 해결책을 제시한다. ethos가 바뀌어야 된다. 세상의 도는 무엇인가? 자기 주장이다. 누구든지 클려고 하는 큰자가 되고자 하는 누구든지 서로 첫째가 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가 제시하는 하나님 나라에서의 도는 자기를 내어주는 섬김의 도라는 것이다. 자기 주장이 아니다. 자기를 내어줌인 것이다. 그러니까 ethos가 180도 전환인 것이다. 사실 이것만이 문제해결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는 사회적인,경제적인,정치적인 program을 하나도 가지고 있지 않다. 왜 그러느냐?

사회적인, 경제적인 정치적인 program이 이 세상적인 것이고 내재적인 것이기에 그것은 근본적인 문제 해결이 못된다. 그러기에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에는 이 세상적인 사회,정치 경제적인 program을 안가지고 있어도 진정한 의미의 혁명적인 program을 진정한 의미의 ethos를 자세하는 것이다.

이른바 해방신학자들이 이정도 과격해가지고는 진짜 과격할려면 예수 정도 과격해야 하는데 지짜 예수 만큼 과격한 사람이 요새 어디 있느냐?

그런데 해방신학이라는 것이 내재주의, 내재성 속에서의 문제해결을 할려고 그러고 그 안에서 과격할려고 하니까 잘 안맞아 들어간다. 잘 안맞아 들어갈 뿐 아니라 예수의 메시지와 맞지 않다. 그러니까 이 사람들은 억지를 자주 부려야 한다.

그러니까 성경을 억지로 해석을 하고 그렇게 해도 안되면 예수가 진짜는 어铽게 어떻게 했는데 복음서 기자들이 다 그것을 왜곡해놓았다고 ...그리고 지도자들이 이데올로기를 위해서 다 왜곡해 놓았다고 한다. 그렇게 꾸며댄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예수님의 부자에 대한 실랄한 비판, 통치자에 대한 실랄한 비판, 그러므로 헤롯을 뭐라고 하였는가? '여우 같은 놈'이라고 하였다. 우리는 한동안 전두환 못불렀다. 박정희 이름도 못불렀다고.. 이름 불렀다가는 무슨 죄목으로 잡혀갔지? 원수 모독죄로...

지금도 그 죄가 있는가? 있시요. 있으면 노태우 이름 함부로 못부르겠네. 그래도 전도환은 국가 원수 아니니까 불러도 되겠지? 전두환, 그 여우같은 놈이라고...(하하하..) 에수가 그랬다 그말이여.

그리고 가난한 자들을 사랑하였다. 이렇게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에 있어서의 그 사회경제적인 정치적인 program이 없느냐를 토론하면 신학적으로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보수 경향을 띤 사람을은 뭐라고 하느냐면 저 해방신학자들을 못된 놈들 진짜 틀렸구나! 그래가지고 굉장히 위안을 받는다. 그래서 더 반동적으로 그러는것이다.

그래서 기독교 실업인회들인가 나발인가 하는 사람들은 이런 메시지를 듣기를 아주 좋아한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진짜 바로들이다. 예수가 누구를 경고하였다고? 부를 경고하고 부자들을 규탄하였다. 누구를 진정으로 사랑하였어요? 가난한 자들을..

이 부자들이라는 것들은 기독교 실업인들인가 나발인가 하는 것들을 나와가지고 최일류 호텔에서 최일류 밥을 먹으면서 기도회 한다고 앉아가지고 성경본다고 앉아가지고 찬송한답시고 앉아가지고 거기서 배울 것은 하나도 없다.

몇년 전에 손봉호 박사한테서 들었는데 자기가 기독교 실업인회 성경공부를 매주 인도하는데 그 모임에 개근하는 사람이 몇명 있대요. 그 중의 하나가 대한민국의 유수기업주 중에서 종업원들 월급을 제일 적게 주는 사람으로 신문에 났데요. 그 사람이 하는 짓이 무엇인줄 알아요? 그 사람이 회사에 가서 자기 회사 직공들을 데리고 성경공부한다고 하고 기도한다고 하고 찬송한다고 하고..그래서 잠못자게 만들고(하하하..)

우리 기독교 정신으로 한다고 하면서... 기독교 정신으로 자기가 착싢하였지!

나는 기독교 실업인 협회라는 것이 뭐하는 것인지 모르겠어. 자기들끼지 만나가지고 성경공부한다고 위로받고 시편에 '나는 가난한 자요 곤고한 자라'하는 말을 자기가 읽으면서 지가 어떻게 가난한 자요 곤고한 자여? 지가 읽으면서 그것으로 위로를 받고 즈그들끼리 기도하고 서로 위로하고...꼴물견이여.

나는 그런데 안가지만 신학 나부랭이나 좀 공부했다고 하는 사람 데려다가 이런 강의한번 들으면 그러면 그렇지 민중신학자들 다 못된 놈들이지. 해방신학자들, 다 빨갱이들이지. 그렇게 소리나 하고 앉아 있다. 그러면서 예수의 진정한 가르침은 안중에도 없다.

예수의 진정한 가르침이 무엇인가?

섬김의 도이다. 섬김의 도는 하지 않고, 아 섬김의 도 그런 것은 다 밑의 것들이나 하는 짓이지 나는 사장이니까 당연히 이런 호텔에서 기도한답시고 이렇게 앉아 있으면 되는 것이고 저 밑의 것들, 열심히 섬기는 것이 이게 아니겠느냐고 생각한다. 열심히 섬겨야 한다.

그러니까 하루 12시간씩 일을 하다. 거기다가 기도한답시고 하니까 기도하고 예배해야지, 찬송해야지.. 아주 못된 악랄한 친구들이 많다.

어디 기독실업인회 멤버 손좀 들어보세요?

내말이 틀렸어요 안틀렸어요? 정말 정직하게 하는 분들도 게중에는 있겠죠. 그러나 내가 말한 것처럼 극단적으로 비판을 받아야할 사람들이 수두룩하다.

아 이동네에서인가 옆동네에서인가 국회의원 된 사람 이태섭인가 하는 사람도 기독교 장로라고 하며 교회마다 돌아다니면서 까불가불하고 다녔지만 그 사람이 돈 제일 많이 쓰지 않았어요? 엊그제 강남 반포로 처음으로 이사하였을 때 누가 담요하나 갖다 줘요. 그래서 이게 뭐냐고 했더니 수해받아서 이것을 가져왔다고.. 그래서 아 나 수해받은 일 없노라고..금방 이번에 이사왔다고, 나 수해 안받았다고 그래도 세번이나 왔다고 통장이.. 받아야지 않받으면 큰일난다고.. 그래도 나는 안된다고..나만 도장이 안찍혔어요. 나는 안받는다고..저기 명동성당의 철거민들이나 갖다 주라고..했더니 나중에 알고보니 그것도 국회의원 선거용이래. 그러면서 기독교인이라고 까불고 있어.

부산에서 낙동강 오리알 떨어지듯이 '장성만'이 떨어졌다. 기독교인이라는 것을 어디에다 팔아 먹는가? 남을 윽박지르고 착취하는데 팔아먹고 있다. 예수만 앞세워 가지고...

기독교 실업인 대표, 아이고! 그런 것들이 기독교실업인이라고 하니 우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뭐가돼? 그런 쓰레기들 보기 싫어서 예수 안믿는 사람 많아요. 그게 기독교라면 누가 예수 Ꞩ을 필요가 있냐?

예수가 하나님 나라의 선포의 사회적인 경제적인 정치적인 program을 제시안한 것은 그 가난한 자에 대한 무관심 때문에 의한 것도 아니고 부자들의 착취에 대한 원통함이 없어서 그런 것도 아니고 그런 문제들의 근본적인 해결이 무슨 해방신학자들, 무슨 공산당이 제시하는 그런 해결이 아니라 초월적인 해결인 것이다.

바로 그것이 이 ethos이다.

그러기 때문에 이 간본 해결책을 제시한 것이지 예수님은 이 세상적인 해결책을 제시하지 않았다. 부를 절대화하고 우상화하는 것은 그것은 부자하든, 가난한 자가 하든 똑같이 나쁜 것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부자가 부를 우상화해서 더 많이 해야 하는 것도 경고를 해야 하는데 경고도 못하고 그렇게 되어간다.

그러니 수백억짜리 집지어가지고 교회 중에서 제일 똑똑하다고 그런다. 십일조 하라고 하고, 반지, 목걸이 팔아서 하라고 해서 쥐어짜 가지고 집 팔으라고 쥐어짜가지고 교회당을 지어가지고 그냥 그게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나라의 가르침과 같은 것인가?

그러기 때문에 자기 직권으로 착취하고 착취한 사람들이 그렇게 건축을 하면 크게 한번 씩 하지. 그러면 그런 사람은 당장에 장로가 된다. 꼼짝 못하고 누가 얼마 몇 천만원 헌금해서 했다고 하고..,

그래서 교회가 아주 못된 착취와 착취관계를 이용하고 있다. 이게 너무 많다.

그래서 그 반동으로 교회가 가난한 자들과 함께 해야 한다고 한다. 당연히 함께 해야 한다. 그것이 예수의 정신이다. 그런데 그렇게 극단적으로 반대로 나간 사람은 정반대로 나가지만 똑같은 우를 범한다. 왜? 가난한 자의 부를 절대화하고 우상화하는데에 나꾸 놔준다. 그래서 그들로 하여금 부를 우상화하고 절대화해서 부를 얻기 위해서 지금 있는 자들을 향해서 증오하고 질시하고 한을 가지라고 자꾸 가르친다.

그게 뭐라는 것인가? 그것이 의식화 교육이라는 것이다. 교회가 그래서도 안된다. 지금 현재 부자들과 같이 손잡는 것이다. 그것들이 거기에서 생명을 얻으려고 위로를 얻으려고 security를 얻으려고 자꾸 붙들려는 것이다.

조용기는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에서 물질적인 부를 누리지 않으면 진짜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 가르친다던데 그래요?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에 대해서는 낫놓고 衁 자도 모르는 녀석이다. 아와는 또 반대로 그렇다고 교회가 가난한 자들에게 부자들을 향해서 증오하고 질시하고 때려 죽일려고 하고 또 이에 대해 한을 가져야 한다고 의식화하고 그것이 옳은가? 그게 그것이다.

그들로 하여금 부를 우상화하고 절대화하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도 안된다는 것이다. 보다 근본적인 해결을 강구해야 한다. 보다 근본적인 해결책은 그리스도인의 삶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섬김의 도를 가져야 한다.

그래서 섬김의 도를 배우면 그러면 인간은 하도 죄악이 많은 사람들이라 또 빠져나갈 구멍을 간구한다. '아 그러면 내가 섬김의 도를 잘 배웠다고 하면 되는 것이고 내 주위에서 조금 하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요새 사회학자들이 말하는 individualization, 도덕을 완전히 개인화 하고 사회적인 구조를 못보고 말면 되겠는가?

복음이라는 것을 이렇게 개인의 영혼 문제와 국한시켜 가지고 개인이 거듭나고 새로워지고 그러면 되는 것이지 교회가 복음이 무슨 사회적인 방면의 분야까지 언급할 기초가 뭐 있느냐?고 한다. 그것은 옳지 않다.

진정으로 우리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백서응로 하나님 나라의 ethos 즉 섬김의 도를 실천하며 사는 개개인들이 된다면 사회구조가 변할 것이다. 국회의원이라고 주장하는 것들이 그리스도인 국회의원이라 하여 모여서 무슨 기도회하는 것들이 진짜 그리스도인 답게 살아봐요. 이 나라의 정치가 지금까지 이렇게 되었을까? 기독교 실업인회도 마찬가지요.

기독교 실업인회와 사회가 무슨 상관이여? 자기들에게 주어진 부를 청지기 정신으로 잘 관리해서 백성을 섬기겠다는 그런 정신으로 날마다 모여서 섬김의 도를 배우고 실천하자고 다짐하고 실천해서 나가봐요? 그러면 한국에 10만원 봉급받는 사람이 있겠어?없겠어? 자기들은 저녁 한끼에 100만원 짜리 먹으면서... 그러면 노사 분쟁도 없어질 것이요.

그런데 이제 이렇게 하나님 나라를 선포해서 하나님 백성 중에서 자기주장을 하는것이 아니라 섬기는 도를 내세우도로 가르쳐야 하는데 그 가르침을 받지 않고 계속해서 남을 윽박지르고 죄악을 저지르고 그렇게 힘 가진자들, 정부나 부자들이 그렇게 하면 그러면 교회가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항의를 해야 하는데 그것은 폭력을 쓰지 말고 주로 말씀선포, 하나님 나라의 선포가 주 무기이며 거룩하고 의로운 삶의 모범이 무기이다. 그래서 정부를 뒤집어 엎고 부자집에 가서 탈취하는 것이 아닌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고 의롭게 사는 모범으로 가르치고 깨우치고 하나님을 알도록 해도 이 세대에서는 근본적인 해결이 있을 수가 없다. 근본적인 해결은 오직 하나님 나라가 완성될 때에만 가능하다. 그러기에 우리의 기도의 첫 편도 하나님 나라가 임하소서이다.

이 역사 안에서의 진정한 하나님 나라가 완전히 임했을 때에만 가능하다. 그때까지는 하나님 나라가 완전히 임할 때까지는 하나님 나라의 도, service, humble service, 겸손한 섬김의 도를 실천하는 사람들이 살면 고난이 동반되는 삶인 것이다.

그래서 예수가 제자들의 삶을 제자도를 고난으로 생각한 것이다. '너희들이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이것이 예수의 제자도이다. 제 1조가 무엇인가? 자기부인! 이 세상의 도의 제 1조는 무엇인가? 자기 주장! 따라서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자기를 따르라고 하였다. 고난의 삶인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삶이 승리의 삶이기 전에 고난의 삶인 것이다. 자 하나님 나라의 선포는 거기까지 하고...

2. 다음에 예수의 자기칭호 '그 사람의 아들'에 대해서 하겠다.

예수의 자기 칭호인 '그 사람의 아들;은 아주 중요한 부분이다. 그리고 복잡할 뿐만 아니라 어려운 부분이다.

Ⅰ.서론-근본적인 관찰과 문제점들

서론적으로 다음과 같은 근본적인 관찰과 거기에서 나오는 문제점들을 공관복음서들에서 보면

1)예수는 당시에 유행하던 메시뒸거인 칭호들을 피하였다. 간접적으로 자기의 메시야됨을 주장하고 이것은 우리가 소위간접 기독론에서 보았다. 간접적으로는 자기의 메시야됨을 주장하고 남들이 자기에게 당시에 유행하던 메시야적인 칭호를 사용하면서 신앙고백을 할 때에는 그 신앙고백을 받아들이고 가령 베드로가 예수를 메시야라고 고백하였지요? 마태복음 16장에서. 그것을 예수께서 받아들였다. 이처럼 받아들여서 스스로를 간접적으로 자신이 메시야됨을 주장하고 남들이 자기에게 당시적인 메시야적인 칭호를 사용하면서 신앙고백을 하면 그것은 받으들이나 스스로는 당시적인 메시야적인 칭호들을 피했다.

2)그러나 예수는 자기 자신을 부를 때는 항상 '그 사람의 아들'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이 그 '사람의 아들'이 우리 복음서에는 항상 균일하게 ԑ ՉՏՒ ՔՏՕ ՁՍՈՑՙՐՏՕ로 쓰여져 있다.

이것이 우리 4복음서에서 82번 나온다. 공관복음서에는 62번 나오고 요한복음서에 13번 나온다. 그런데 공관복음서에 나오는 병행절을제거한다면 공관복음서에 38개의 상이한 '그 사람의 아들'이라는 말이 나오고 요한복음서 13개가 나온다. 그런데 우리가 공관복음서를 이른바 4자료설에 의해 분류해보면 그 모든 자료에 다 나왔다.

마가 | Q

↓ ↓

마태 | 누가

↑ | ↑

M | L

마가복음에는 14번 나오고 Q에는 10번. Q가 무엇인가? 이럴 때는 Q가 무엇을 상징하는가?그것은 마태와 누가가 공유하는 자료로써 마가에 서 오지 않은 자료들을 Q라고 한다. 보통 공관복음에서도 그러지만 왜 누가복음에 서로 비슷하면서 서로 다르냐에 대해서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 세복음서가 상호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는가를 논하는것이 공관복음의 문제라는 것이다. 그것에 대한 여러가지 해결책들 즉 가설들이 있느데 가장 유력한 가설이 무엇이냐 하면 소위 두번서설이라고도 하는데 네 자료설이라고도 한다.

이것을 보면 그렇게 되어 있다. 원래 공관복음을 근간으로 해서 주는 자료로 두문서라는 것이다. 마가와 Q 그리고 마태와 마가의 틀에 Q를 더하여 번역되어 있고 그러면 마태와 마가가 조금 다르게 된다.

또 마태는 마가와 Q에서 오지 않은 또 다른 자료가 있다. 그것이 M이라고 하는 것이다. 누가도 마찬가지이다. 누가복음에서도 마가복음과 Q에서 온 자료를 빼버리면 또 누가만 가지는 독특한 자료가 있다. 그것을 L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M은 마태만의 독특한 자료이고 L은 누가의 독특한 자료이다. 그러면 Q는 무엇인가? 마태와 누가가 공유하는 자료중 마가에서 오지 않은 자료이다. 이렇게 알고 있어야지!

그래서 이런 이론들을 일단 받아들여 가지고 우리가 공관복음의 자료를 분류해보고 '그 사람의 아들'이란 칭호가 마가에서는 어떻게 나타나고 Q문서에서는 어떻게 나오고 M과 L문서에서는 어떻게 기록되어 있는가? 이게 무슨 소리인가? 우리가 공관복음의 근본을 이루는 자료를 어铽게 분류하던 그 모든 자료에 다 나온다는 것이다. '그 사람의 아들'이라는 말이..

3) 이 사실이 무엇이냐 하면 예수가 당시 유행하는 메시야적인 칭호들을 피했다는 것, 그러나 한결같이 자기를 '그 사람의 아들'이라고 불렀다는 것의 이 사실은 '그 사람의 아들'이라는 칭호가 우리로 하여금 예수의 자기이해를 해석하는데 있어서 가장 좋은 열쇠를 쥐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것을 시사해준다.

무슨 말이냐하면 예수가 당시에 주장하는 모든메시야적인 칭호들을 피하였다. 그런데 한결같이 자신을 뭐라고 하였는가? ' 그 사람의 아들'이라고 하였다. 그것은 무슨 뜻이냐? 예수가 자기 이해를 표현한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문구를 잘 이해하면 예수가 자기에 대해 어떻게 이해하였는지를 알 수 있는 것이다.

2.'그 사람의 아들'이란 문구는 우리 신약성경에 예수만 쓰는 문구이다. 두번째로 우리가 관찰해야 할 것은 초대교회에서 이 문구가 신앙고백이나 케리그마에 쓰였다는 증거가 하나도 없다. 그리스도, 주, 하나님의 아들, 등을 신앙고백에 그리고 케리그마에 아주 흔히 쓰이는 기독론적인 칭호들이었다. 그런데 초대교회의 신앙고백이나 케리그마에 예수가 '그 사람의 아들'이라는 말이 절대로 나오지 않는다. '그 사람의아들'이라는 말이 3인칭으로 되어 있다. 즉 '그 사람의 아들'이란 말이 보어로 나오지 않는다. 항상 '그 사람의 아들'이라는 말이 주어로 나온다. 남이-베드로나 안드레가 예수에 대해서 말할 때에도 '그 사람의 아들'이다. 이런식으로 말하지 않는다. 이말은 예수만 사용하는 말이다. 단 한번의 예외가 없다.

사도행전 7:57에 스데반이 순교하기 직전에 하늘이 열리고 '그 사람의아들'이 서 있는 것을 본다고 하였다. 그것이 단 한번의 예외이다. 그 외에는 막 14:62에 나오는 예수의 산헤드린에서의 심판 때의 약속관 관련이 되어 있다. 또 예외인 것 같으나 진짜 예외가 아닌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이 요 12:34절이다.

여기에서 예수가 쓰로 '그 사람이 아들'을 자기라 부르니까 사람들이 말하기를 '그 사람의 아들이 누구냐'고 의아해 하는 질문이 하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예수가 '그 사람의 아들'이라는 신앙고백도 아니고 케리그마도 아니고 예수의 말을 되받아서 질문한 것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그것은 진짜 예외가 될 수없다.

또 계 1:13/14:14에 단 7:13이 인용되어 있다. 그래서 '한 사람의 아들'같은 이라는 말이 나온다. 그러나 복음서와 같이 이렇게 관사를 동방하는 ՉՏՒ ՔՏՕ ՁՍՈՑՙՐՏՕ라고 나오지 않고 계시록도 하나의 예가 되지 못한다.

마찬가지로 히2:6절에도 시8:6절이 인용되어서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그 사람의 아들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 저를 잠깐 동안 천사보다 못하게 하시며 영광과 존귀로 관씌우시며 만물을 그 발아래 복종케 하셨느니라고 하여 창세기의 창조기사를 시로 읊은 시 8:6의 시가 인용되어 있다. 거기에 '그 사람의 아들'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거기도 관사가 있지 않은 '그 사람이 아들'이라는 공관복음의 관사가 있는 것과 다른 것이 나온다.

복음서에 나오는 '그 사람의 아들' 이라는 모든 칭호는 관사를 동반하는데 다만 요5:26에 관사가 나오지 않은 예외가 있다. 그렇지 않고는 전부 복음서에는 관사가 있는 '그 사람의 아들'이 나온다.

여기에서 문제가 하나 발생한다. 질문하나가 발생한다.

'그 사람이 아들'이라는 칭호는 오직 예수의 입술에서만 나온 칭호이고 초대교회가 이 문구를 신앙고백이나 케리그마로 쓴 흔적이 전혀 없다면 이 '그 사람의 아들' 이라는표현이 전적으로 역사적인 예수가 쓴 표현인가? 아니면 교회가 예수의 됨됨과 예수의 의미를 선포하기 위해서 신앙고백과 케리그마적 목적을 위해서 만들어 내 가지고 예수의 입술에 넣은 것인가? 전자의 가능성이 훨씬 크다. 왜냐하면 후자의 중에는 스스로도 그네들의 신앙고백과 케리그마의 형식에 '그 사람의 아들'이라고 사용했을 것이 아닌가?

그러기 때문에 일단 나중에 보겠지만 자유주의 학자들은 복음서의 저자들이 '그 사람의 아들'이라는 칭호를 통해서 자기들의 기독론을 전개할려고 했다고 주장하는데 그것은 가당치 않다. 만일 복음서의 제자들이 '그 사람의 아들' 칭호로 자기들의 기독론을 전개하였다면 그러면 '그 사람의 아들'이라는 칭호가 이 신앙고백과 케리그마에 쓰인 흔적이 나와야 할것이 아니겠는가? 예수가 바로 '그 사람의 아들이다. 그러므로 그가 우리의 구원자다.' 이런 흔적이 하나도 없다.

3.예수의 가르침에 보면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와 예수의 '그 사람이 아들;과는 자기 칭호를 써서 하는 가르침과 분리되어 있다.

쉽게 말하면 '그 사람의 아들'이라는 말과 '하나님 나라'라는 말은 같이 나오지 않는다. 어떤 곳에서는 이 두개념이 지리적으로 아주 가깝게 나오나 내용적으로는 전혀 연관이 되어 있지 않다. 가령 막8:38,9:1,눅17:21과 22 /21:27과 31 /마10:7과 23 /13:37과43/ 25:31절과 34/ 등에서 아주 가깝게 두 개념이 나오나 내용적으로는 분류되어 있다.

예외적으로 마 13:37 이하와 16:28에는 이 두 개념이 연결되어 있으나 대부분의 학자들이 이 부분에 있어서 이 마태의 편집적인 노력에 의해서 연결되었다고 말한다.

자 그러면 문제가 또 하나 발생한다. 왜 이렇게 두 개가 분리되느냐? 이 둘다 예수의 가르침임에 틀림이 없으면 이 둘을 통해서 예수가 자기의 메시야적인 됨됨과 자기의 메시야적인 사역을 표현하려고 하였으면 이 둘이 같이 나와야 했을 것이 아니겠는가? 이것이 이렇게 두 개념이 분리되어 있는데 어떻게 이 두 개념이 서로 연관이 되는가? 이런 문제가 발생한다.

4.예수는 가지의 죽음에 대해 이야기할 때 항상 '그 사람의 아들'로 시작을 한다. 공관복음에서 볼 수 있는 이 관찰에서는 다음과 같은 문제들을 유추할 수 있다.

첫째로 아주 근본적인 문제이다. 나는 자유주의 학자들이 다 부인하니까 하는 소리인데 예수가 자기의 죽음을 이야기하였느냐? 아니면 자유주의자들이 이야기한대로 엉겁결에 죽었느냐?

둘째로 예수의 자기 죽음에 대한 견해가 무엇인가?

세째로 이것이 지금 본문에서 가장 중요한 것인데 '그 사람이 아들'에 무슨 의미가 있기에 예수가 자기 죽음과 이 칭호를 연결시키는가?

네째로 예수는 '그 사람의 아들'의 재림, '그 사람의 아들'의 미래의 옴을 이야기하고 자기의 높임받음, 자기를 하나님이 옳다고 높인 승천을 이야기하는데 여기서 무슨 문제가 발생하느냐면 예수가 미래를 무엇으로 보았느냐? 특히 자기의 미래를 어떻게 보았느냐? 이상 5가지를 관찰하였다.

이상의 것이 복음서에서 볼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관찰이다. 우리가 공관복음서를 눈을 크게 뜨고 보면 아주 이런 이상한 현상들이 나타난다. 이 5가지 사실들에서 유추되는 문제들이 예수 '그 사람의 아들'이라는 이 주제가 신약신학의 아니 모든 기독교 신학의 결정적으로 중요하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준다.

왜? 예수의 자기 이해와 직결되어 있기 때무에 '그 사람의 아들'이라는 주제는 신약신학에도 물론 가장 결정적인 중요성을 가지고 있지만 모든 기독교 신학의 가장 결정적인 핵심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지난 100여년 그 전에는 그러니까 이 모든 역사적인 비평적인 방법으로 보기 전에는 사람들이 '그 사람의 아들'은 예수의 인성을 나타내는 칭호이고 하나님이 아들은 하나님의 신성을 나타내는 칭호로서 하나님의 아들과 사람의 아들은 예수의 양성을 나타내는 칭호들이라고 이렇게 생각해왔다.

더구나 120년전부터 사람의 아들이라는 말이 아무관계가 없는 칼세돈에서의 기독론적인 formula하고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을 밝혀 내었다. 이것은 역사적인 종교사적인 언어학적인 고찰이 발전하면서 고찰이 되어야 한다고 하고 그 뒤부터 지난 예수 그 사람의 아들이라는 칭호가 신약신학의 결정적인 중요성을 제공하게 되었다. 그것은 쉽게 말해서 지난 100여년 동안 이 주제에 대해서 신약신학의 학자들이 가장 많이 note한 것이다. 이 주제 연구에 대해서.. 그러니 이 주제에 대한 연구가 제일 많다. 또 그러기 때문에 이 주제에 대한 이론들의 가설들이 제일 많고 제일 복잡하다. 그러나 지금까지도 합의점이 없다.

그래서 쮜리히 대학의 E.Schweizer라는 조금 훌륭한 학자는 1960년대에 이 주제에 대해서 moratorium(토론중지)을 선언하자고 주장하였다. 이게 무엇인가? 이것이 경제적 용어(은행에서의 지불중지)이다. 이 단어가 이제는 일반화되어서 쓰인다. 그래서 무엇무엇에 대한 토론을 잠깐 중지하자는 것이다. 그러니 그 토론에 대해서도 토론중지를 선언하자고 한다. E.Schweizerrk가 이 문제에 대해서 하도 연구도 많고 의견도 분분하니까 더 혼돈만 되고 더 복잡해지니까 뭐라고 했느냐면 한 10년동안 아무도 연구도 하지 말고 가만히 있자고 하였다. 이것에 대해서 no-touch 그리고 예수의 다른 면, 성경에서의 다른 면을 자꾸 연구하다 보면 새로운 각도와 새로운 시각이 발달하고 새로운 빛이 발견되면 이 문제가 자연히 해결될지도 모른다. 그러니 이 문제에 대해서 그냥 복잡해지니까 뭐라고 하였느냐면 토론중지하자고까지 나오게 된 것이다.

그런데 E.Schweizer 지가 뭔데 토론중지를 선언해? 이렇게 중요한 문제를...

그래서 학자라고 생긴 것들은 이 문제를 한번쯤은 해결해 보려고 한다. 대개 미련하고 우직한 학자들이 이것에 대해서 한번쯤 손을 대볼려고 한다. 그중에 하나인 나도 거기에 대해서 연구해서 책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