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신학 5강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의 의도가 무엇이라고 하였는가? 궁극적인 의도가 하나님의 백성을 창조하고 모으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것이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의 의도이었다.

그러면 예수의 이 하나님 나라 선포와 그의 죽음과 어떻게 관계가 되는가? 하는 것은 아주 신학적으로 중요하다. 그것이 신학적으로 아주 중요하다는 것을 우리가 금방 알 수 있는 것은 공관복음서에 보면 이 예수의 중심 메시지가 하나님 나라 인데 사도행전의 설교를 넘어서 서신으로 가면 벌서 사도행전에 나타나는 사도들이 설교의 요약부터가 하나님 나라는 거의 등장을 하지 않고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이 그 중심 메시지이다.

그래서 성경을 좀 자세히 읽는 사람에게는 그것이 벌서 평신도에게라도 그것이 문제가 된다. 예수는 하나님 나라를 선포했는데 어떻게 된 셈인지 그의 제자들과 그의 사도들이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은 예수의 가르침을 이어받지 않고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그 중심 메시지로 보았나? 하는 이것은 아주 단순한 질문인것 같지만 우리 신약신학의 근본문제가 그 속에 있다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어떻게 the preached, 하나님 나라의 선포자가 사도들에 의한 선포의 대상이 되었나? the preached, 예수가 누구인가? 예수가 하나님 나라를 선포한 분이었지? 하나님의 통치를 선포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 복음서를 넘어가면서 사도행전에 들어가면서부터 예수가 선포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하겠는가? 이것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소위 역사적인 예수, the Jesus of history, 이 역사적인 예수가 어떻게 이 신앙고백과 이 선포의 그리스도가 되는가? the Christ of faith and kerygma. 신앙의 대상이되고 선포의 대상이 되느냐?

예수는 하나님의 통치를 선포했는데 사도들은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고백하고 선포하였다는 것이다. 그리서 그 예수의 선포의 내용은 하나님 나라이었다. 어떻게 보면 하나님 나라 자체라고도 볼 수 있다. 하나님의 통치하심 그리고 하나님의 아버지되심. 그런데 사도들에 의해서는 하나님 나라가 거의 나오지 않는다. 무엇만 나오는가?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만이 나타난다.

Jesus:the preacher ----------- the preached

the Jesus of history ----------- the Christ of faith and Kerygma

하나님 나라 ----------- 십자가와 부활

특히 예수의 십자가에서의 죽음이 그들의 메시지의 중심이라고 할 수있다. 이것이 서로 어떻게 연관이 되었나? 를 논하는 것이 기독교 신학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이다. 기독교의 신앙이 어떻게 발생하였나 하는 것이다.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위의 그림에서 양쪽 간에 근본적인 단절로 보았다. 예수와 그의 교회, 그의 사도들간의 근본적인 단절로 보았다.

그래서 그 유명한 자유주의 신학을 총결산했다고 할 수있는 벨른 대학의 A. Von Harnack은 위의 관계를 한마디로 표현하기를 이렇게 말하였다. 예수의 복음에는 하나님만 속하지 그의 아들은 속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예수의 원래의 복음에는 하나님의 통치하심과 하나님의 자비로운 아버지되심만 그 내용이었는데 나중에 사도들이 와 가지고서 또는 나중에 교회가 예수를 그리스도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했다는 것이다. 이것을 원래의 복음에 덧붙였다는 것이다. 아니 이것으로 원래의 복음을 대치시켰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것을 어떻게 대치했느냐? 자유주의 신학자에 의하면 역사적인 예수와 관계없이 헬라의 종교사적인 영향을 받아가지고 헬라 기독교에서 이와 같이 전혀 새로운 기독교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진짜로 전혀 역사적인 예수와 관계없는 발달로서 이것은 합법적인 것이 못되는 것이다. 이렇게 보았다.

이러한 관찰방법은 자유주의 신학이나 또는 최근에 새로 부활되는 유대신학에서 계승되고 있다. 그래서 자유주의 신학이나 유대신학에서는 이 예수는 유대교의 카테고리에서 충분히 이해될 수있는 유대교에서 선지자나 랍비정도로 충분히 이해될 수 있는 역사적 인물이다. 선지자나 선생으로서 충분히 이해될 수 있는 분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초대교회가 예수에 대해서 신앙을 하고 그를 선포하고 하는 것은 전혀 다르다는 것이다.

이러한 프로테스탄트의 자유주의 신학을 받아들여가지고 자유주의 유대교 신학자들이 보수주의 유대교 신학자들은 예수에게 관심이 없고 무조건 옛날 식으로 정죄하는 태도만 취하는데 자유주의 유대교 사람들이 예수에 대해서 관심을 많이 보인다.

그들은 사실 예수가 유대교에 속한다고 본다. 그래서 요새 자유주의 유대교 사람가운데 이런 운동이 소위 독일말로 Heimholung Jesu라한다. 예수가 본래 유대교의 선지자이고 랍비이고 지도자인데 지난 2000년 동안 기독교에 납치되어가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예수를 다시 집으로 데리고 와야 된다고 한다. '고향으로 데리고 와야 한다' 그말이다. 그래서 이 Heimholung 란 말이 '집으로 다시 데리고 온다'는 의미이다. 지금까지 예수가 너무 오래 기독교에 납치되어가 있었다. 그래서 다시 집으로 데리고 와야 한다는 것이다. 영어로 굳이 번역한다면 bringing Jesus home 이러한 운동이 일어난다.

Bultmann도 예수는 세례요한과 똑같은 유대교에 속한다고 본다. 그래서 이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와 그의 죽음과의 관계, 나중에 그의 사도들이 그들의 중심 메시지로 삼는 그의 죽음과의 관계는 이 기독교 신앙의 근본문제이다. 그런데 지금까지 대부분의 학자들이 이와 같은 관찰이 법에 억눌려서 또 이와 같은 관찰을 해석할려는 자유주의 학자들에 경향에 억눌려서 이 관계는 별로 분명히 밝히지 못했다.

그래서 신약학자들 중에 온건하고 보수적인 학자들, 가령 스코틀랜드의 I.H.Marshall같은 사람들, 또 M. Hengel 같은 학자들이 기껏해서 이것에 대해서 변명을 하면 무슨 말투로 하느냐면 위의 예수의 하나님 나라선포와 사도들이 선포한 예수의 죽음과의 관계를 너무 완전히 다른 것으로 보아서는 안된다고 하는 그런 식의 문장 한두개를 쓰므로 어떻게 좀 이것의 어려움을 완화해볼려고 하는 것이다.

그러면 이것이 오늘 우리의 과제이다.

그러면 어떻게 연결되어 있나?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와 예수의 죽음과는 어떻게 관련이 되어 있나 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그것을 보기전에 먼저 우리가 복음서에서 하나 관찰할 것이 있다. 마가복음을 가령 보면 막8:27-31이 마가복음의 분수령이다. 여기가 뭐하는 곳인가? 베드로의 신앙고백, 베드로의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신앙고백이다. 마가복음 8:29에는 베드로의 신앙고백이 나오고 31절에는 뭐가나오는가? 예수가 자기의 죽음을 예고하고 있다. 거기가 첫 예고이다. 그 뒤부터는 자기의 죽음이 자꾸 예고된다. 9:9/9:12,31/10:33,45/14:17ff 등등 예수의 죽음이 자꾸 예고된다.

이전에는 예수의 메시지가 저부 하나님 나라이었다. 이전에는 예수가 주로 공중에서 설교를 함녀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한다. 그런데 마가복음 8:27-31의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분수령으로 해서 톤이 달라진다. 이제 예수의 설겨의 주제가 무엇이냐 하면 예수의 죽음에 관한 것이다.

그러니까 벌써 이 복음서와 사도행전이나 서신서간의 관게가 어떻게 되느냐를 물을 것이 아니라 벌써 복음서 내에서도 이것이 문제가 된다.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던 예수가 자기의 죽음을 예고하는데 그러면 자기가 지금까지 선포하던 하나님 나라와 다가올 자기의 죽음이 어떻게 연결이 되어 있느냐 하는 것이 문제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우리는 무엇을 염두에 두어야 하느냐면 예수의 지난 시간에 관찰해 본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에 있어서 긍극적인 의도, 그의도가 무엇이라고 하였는가? 하나님의 종말의 백성을 창조하고 모으는 것이 그의 의도라고 하였다. 하나님 나라 선포의 의도라고 하였다. 그것을 늘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러면 에수가 자기의 죽음을 무엇으로 보았느냐? 를 살펴봄으로써 그 의도와 어떻게 연결되었는가를 우리가 살펴보겠다.

자 가령 예수가 이제 막8:31.9:31.10:33 에 아주 대표적으로 예고한다. 많은 학자들은 이 막 8:31/9:31/10:33절을 한 예고로 본다. 9:31절이 가장 원어적으로 되어 있는 한 예고로 보고 8:31과 10:33절은 똑같은 판의 되풀이로 본다.

물론 과격파 자유주의자들은 예수가 자기의 죽음을 예고하였다는 것도 다 부인한다.

그러나 예수는 죽음을 여러번 예언하였다. 그런데 대부분 간접적으로 하였다. 그런에 이제 막8:31/9:31/10:33에 나오는 이 예고에서는 아주 직접적으로 하였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예수가 자기의 죽음을 예고할 때에는 항상 '인자'라고 하였다. '그 사람의 아들'이 죽는다고 하였다.

그래서 자기의 죽음을 항상 '그 사람의 아들'로서의 죽음이라고 가르쳤다.

그러면 예수가 자기 죽음의 뜻, 다가오는 자기의 죽음의 뜻을 가장 이제 잘 밝힌 것이 언제이냐 하면 최후의 만찬 때이다. 최후의 만찬은 이제 예수가 체포되어서 죽기 하루 전날 성전에서 이제 소란을 피워서 곧 체포되어서 죽기 하루전날 성전에서 이제 소란을 피워서 체포되기 하루 전날 그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한 것이다. 그래서 이 제자들과의 마지막 만찬은 예수의 특색중의 하나가 무엇이라고 하였는가? 회개한 세리와 창기들과 먹고 마시는 천국의 완성된 하나님 나라에서의 잔치의 지상에서의 실현으로 회개한 죄인들과 하나님 나라의 메시지를 받아들인 죄인들과 같이 먹고 마시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 일련의 지상에서의 만찬의 종결로써 그리고 완성된 하나님 나라에서의 잔치에대한 예고로써 최후의 만찬을 베풀었다. 거기서 예수는 자기의 내일 다가오는 임박한 죽음의 의미를 연극으로 표시하였다. 그리고 미리 drama를 해석을 한 것이다. 죽음의 의미를... 그래서 이 drama에는 두 가지 요소가 있다.

하나는 행위의 gestures가 있다. 이것은 무엇인가? 떡을 부수고 빨간 포도주를 붓는 gesture가 있다. 떡을 떼는 체스쳐와 포도주를 붓는 제스쳐가 있다.

또 하나는 거기에 무엇을 부착하였느냐면 설명의 말를 부착하였다. 그래서 떡을 떼는 제스쳐에 떡의 말씀, 그리고 잔을 붓는 제스쳐에 잔의 말씀의 소위 영어로는 bread saying 과 cup saying 이라고 한다. 잔의 말씀을 부착하였다. 떡을 떼면서 뭐라고 하였는가? '이게 부서지는 나의 몸이라' 잔을 부으면서 뭐라고 하였는가? 이것의 나의 피에 세우는 새언약이라.

그런데 여기에는 두개의 판이 있다. 최후의 만찬의 전승에는 4가지로 되어 있다고 하였다. 공관복음에서 3개가 나오고 고전 11장에 나온다. 그런데 이 4가지가 조금씩 차이가 있다. 그런데 크게 두가지로 구분할 수가 있다. 하나는 마태, 마가판이고 하나는 누가, 바울판이다.

마태,마가 | 누가,바울

이것이 많은 사람을 | 이것이 너희들을

...언약의 피라 | ..피로 세운 새언약이라

이 마태와 마가판은 아주 비슷하다. 그 다음에 누가와 바울판은 조금은 차이는 있지만 중요한 일에 있어는 크게 일치한다. 그래서 전승을 보통 2가지 종류로 분류한다. 이 잔의 말씀에 있어서 두가지의 전승에 있어서 차이가 난다.

마가판에 의하면 '이것이 많은 사람들을 위해서 흘리는 언약의 피라'이렇게 되어 있다. 누가,바울 판에 의하면 '이것이 너희들을 위하여'로 되어 있다. '많은 사람'이아니라 '너희들을 위해서 흘리는 피로 세운 새언약이라'그렇게 되어 있다. 하나는 이것이 '흘리는 언약의 피라' 고 되어 있고 하나는 '흘리는 피로 세우는 새언약이라'이렇게 되어 있다.

그래서 하나는 '많은 사람을' 말하고 하나는 '너희들을'을 말하고 있다. 그래서 이렇게 차이가 나는데 그래서 주님의 최후의 만찬의 전승이 두가지인데 마가 마태판이 더 오래된 것이냐? 즉 원형에 더 가까운 것이냐? 아니면 누가 바울판이 더 오래된 것으로써 예수의 원어에 더 가까운 것이냐의 논란은지금가지도 해결나지 않고 있다.

어떤 문서는 분명히 마태,마가판이 더 오래되고 어떤 문서를 보면 누가 바울판이 더 오래되고...그령 그러면 어떻게 결정하느냐? 이 마태, 마가판과 누가,바울판의 잔의 말씀에 있어서 두드러지게 다른 점이 두가지있다.

하나는 마태,마가판은 많은 사람들을 위해서라고 쓰여져 있다. ՕՐՅՑ ՐՏՋՋՙՍ 그런데 이 누가판에 의하면 '너희들을 위해서'라고 쓰여져 있다. ՔՏ ՕՐՅՑ ՕՌՙՍ이라고 되어 있다. 그러면 어느 것이 더 오래되었을까? 어떤 점이 더 원어에 가까울까? 할때 많은 학자들을 쉽게 그점에 있어서 마태,마가판이 더 오래되었다고 볼 수 있다. 여기의 '많은 사람들'이라는 것은 히브리어 숙어라고 볼 수있다.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라는 말이다. 히브리어에는 '모든'이란 말이 없으니까 '많은'이란 말을 '모든'이란 말로 대치해서 사용한다. 그래서 많은 이란 말은 곧 '모든 사람을 위해서'흘렸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여기의 '너희들을 위해서'는 어떻게 '많은 사람을 위해서'가 '너희들을 위해서'로 변했느냐? 하는것은 쉽게 설명할 수 있다. 그것은 예배용어에 있어서는 아주 용어가 personal해진다. 그래서 '우리들을 위해서''너희들을 위해서'이렇게 예배에 참여하는 사람들에게 직접적으로 나타내 강조하는 것이 예배용어이다.

그래서 벌써 최후의 만찬이 성만찬으로 예배의 의식에 많이 사용되는 것으로 벌써 나타낸다. 그래서 이런 점에서 마태,마가판이 더 오래되었을 것이다. 예수님의 원어에 더 가까운 것이고 '많은 사람을위해서'라고 하였지 '너희들을 위해서'라고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것은 금방 알 수가 있다. 그러면 또 다른 점이 하나 있다. 하나는 마태,마가판은 '나의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언약의 피라'고 하였고 누가,바울 판은 '너희들을 위하여 흘리는 나의 피로 인한 새언이라'이라고 하였다. 그러면 그 점에 있어서는 어느 판이 더 오래되었을까?

또 이것을 생각해보고 비판해 보아야 하다. 그때는 이것에 대해 이렇게도 생각할 수 있고 저렇게도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내가 이것을 소개하는 것은 어떻게 신학자들이 사고하는가를 보여줄려고 그렇다.

어떤 학자들은 그 점에 있어서는 마태,마가판이 더 오래되었다고 한다.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해서 흘리는 나의 언약의 피라'

유대인들에 있어서 제일 무서운 것이 무엇이냐 하면 피를 마시는 것이다. 예수가 유대인들인 자기 제자들을 향하여 빨간 포도주를 부으면서 '이것이 피이니까 마셔라'고 이렇게는 하지 않했을 거라고 말한다. '이것은 너희들을 위해서 흘리는 피로 세운 새언약이라'에서 잔은 언약이라고 하였지 피라고 이렇게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 누가 판이 그것에 있어서 예수가 어떻게 차마 자기 제자들 앞에서 이러한 피를 마시라고 하였겠는가? 다들 유대인들인데....

그래서 누가,바울판이 더 오래되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정반대로 생각한다. 즉 예수나 되니까 이것이 피라고 하고 피를 마신다하고 가르쳤는데 나중에 유대제자들이 처음에 예수 제자들이 다 유대인들이 그것이 거리끼니까 그것을 살짝 돌려가지고 피로세운 새언약이라고 변경했을 가능성이 많다는 것이다. 즉 예수나 되니까 그렇게 도전적인 그리고 분명한 확실한 말을 먼저 했고 제자들은 그점에 있어서 조금 예수보다 못하니까 조금 바꾸었을 것이다.

그것은 조금 이렇게도 생각할 수 있고 저렇게도 생각할 수있다. 그런데 그거 가지고 그냥 싸운다구요.

그래서 이 누가의 전승이 어느 것이 더 오래되었느냐? 어느것이 예수의 원어에 더 가깝는가? 하는 것에 대해 책들도 많이 쓰이고 한다. 그런데 그런 것은 어떻게 보면 다 헛수고이다. 누가, 바울 판이나 마태,마가판이나 그 의미는 다 똑같다. 그 어순이 조금 바뀌었다고 해서 의미가 하나도 틀려지지 않는다. 의미는 똑같다.

그러면 여기의 잔의 말씀에서 우리는 예수가 최후의 만찬석상에서 자기의 다가오는 죽음의 진정한 의미를 미리 설명해주고 있다. 그런데 그것을 이렇게 drama로 극으로 표시해 설명한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이 드라마를 분석함으로써 에수가 자기 죽음을 어떻게 이해하였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마가복음 10:45절의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무로 주려 함이니라' 이말도 많은 학자들은 원래 이 말도 예수가 최후의 만찬 석상에서 한 것으로 본다. 이것의 일부 병행절, 전체가 아니라 일부 병행절은 눅22:27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는데 이것은 분명히 만찬석상에서 이야기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많은 삭자들은 그렇게 보지 않고 다른 상황에서 이야기한 것으로 본다.

그런데 나는 내 책에서 주장하기를 예수가 최후의 만찬석상에서 예수의 다가오는 죽음의 의미를 설명해주는데도 깨닫지 못한 제자들이 서로 누가 높냐고 주장하니까 이 최후의 만찬 석상에서 자기의 죽음의 의미를 설명하고 있다. 다시 한번 요약하는 것이다(막10:45)

그러니까 막10:45절이 예수가 만찬석상에서 자기의 최후의 만찬의 말씀들을 다시 한번 요약한 것으로 본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두잔의 말씀 막14:24절의 잔의 말씀과 막10:45의 말씀을 분석해보면 예수의 자기 죽음에 대한 의미를 금방 알 수가 있다. 그것을 명료하게 알 수가 있다. 그러면 14:24절에 있는 잔의 말씀을 한번 분석을 해보자.

우선 마가복음 판을 따로 따로 보자.

그래서 '많은 사람을 위해서 흘리는' 그 소리는 어디서 왔느냐면 그 소리는

①이사야서 53:10-12절에 왔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을 위해서 흘리는... 그러니까 에수가 자기의 죽음을 구약에서 이사야서에서 예언된 고난받는 주의 종의 역할을 성취하는 것으로 보았다. 이사야서 53장에 예언된 고난받는 주의 종은 죄인들을 위해서 대신 매맞음을 당하고 궁극적으로 많은 사람들을 위해서... 거기에서 '많은사람들'이란 가르침이 나온다. 거기에서부터 많은 사람들이란 말이 자꾸 나온다. 5번이나 나온다. 쏟아,흘려서,대속의 제사를 드리는 것이다. ࠈࠚࠀ 대속의 제사를 드림으로써 그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의롭게 되게 한다는 이야기이다. 주의 고난받는 종이 죄인들을 위해서 대신 매를 맞고 궁극적으로 자기의 목숨을 대속의 제사로 쏟아서 흘려서 많은 죄인들을 의롭게 한다는 내용이다. 바로 그 점을 이 잔의 말씀에서 예수가 인용한 것이다.

②그 다음에 '언약의 피라'는 어디에서 왔느냐? 언약의 피라고 하는 이 소리는 성경에서 여러 배경을 가지고 있다. ⓐ출24장 출19장 34장이 언약에 관계된 장인데 출애굽기 24장을 보면 시내광야에서 모세가 하나님과 이스라엘 간의 언약을 맺는제사를 드리고 그 제물의 피를 이스라엘 회중에 뿌리면서 뭐라고 외치는가? '언약의 피라'

그러니까 예수가 자기의 내일 다가오는 죽음, 곧 피흘림을 시내에서 세운 모세에 의한 그 옛언약에 대한 후형으로서 그 언약의 후형으로써 새언약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래서 이 마태,마가 복음 판에 '새'자가 안들어가지만 어떤 사본에는 '새'자가 들어가는데 그것은 별로 신빙성이 없고 그것은 후에 쓰여진 사본이다.

'많은 사람을 위한 언약의 피라' 이렇게만 되어 있다. 그리고 바울,누가판에는 '새언약'이라해서 '새'자가 분명히 들어가고 그러나 근본적인 차이가 없는 것이다.

예수가 다가오는 자기 죽음을 모세가 시내산에서 드린 언약의 제사와 비교해서 보았을 때는 그 후형으로써 분명히 '새언약'이라는 소리가 분명히 들어간 것이다. '새언약'이란 그 의미가..그래서 그'새'자가 들어가고 안들어가고가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다. 안들어가도 그것이 새언약이다.

언약이 하나 있는데 또 세우면 그게 새언약이지 그게 헌언약이겠느냐고? 아주 멍텅구리같은 놈이다. 그런 소리하지. 가끔 그런 엉터리 학자들도 있어요. 하여간 학자라고 잘난체하는 친구들 중에 반멍텅구리가 상당히 많아요.

ⓑ또 이 새언약의 예언은 우리가 잘 아는 렘31:33ff 거기에 예레미야가 뭐라고 예언해요? 이스라엘 민족이 이 시내산에서 세운 언약을 파기하므로 그래서 하나님께 의존하고 순종하지 아니하므로 이 하나님께서 이 이스라엘 민족을 어떻게 한다고? 싹쓸이를 해버린다고. 싹쓸이를... 그래서 누구를 통해서 싹쓸이를 해요? 바벨론에 의해 싹쓸이를 해요. 그리고 싹쓸이 하는 표로 이 성전까지 싹쓸이 한다.

그렇게 싹쓸이를 해버리고 하나님이 구원작업을 새롭게 시작하는데 어떻게 새롭게 시작한다고 하였는가? 남은 자들과 새언약을 세운다고 하였다. 그래서 이 새언약은 옛언약과는 다르다. 옛언약은 그 옛언약의 표현하고 율법은 어디에다 썼는가? 돌판에 새겼는데 새언약의 율법은 어디에다가 새긴다구요? 인간의 심장에다....

그래서 마음속에서 울어나서 하나님께 의존하고 순종하게 해서 하나님을 아는 자식이 가득차고 의가 이루어지게 하겠다는 것이 새언약의 내용이다. 그것을 예수가 지금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도 그 정신을 이어받아서 고후에서 자기를 무엇이라고 하는가? 새언약의 사역자이라고 한다.

새언약의 사역자, 새언약을 섬기는 종이라고 한다.

ⓒ또 여기에 어떤 배경이 있냐면 이것은내가 주장하는 소리인데 이사야서 42:6/49:8이 반영되어 있다. 이게 다 주의 고난받는 종의 노래들이다. 사42:6에는 '나 여호와가 의로 너를 불렀은 즉 내가 네 손을 잡고 너를 보호하며 너를 세워 백성의 언약과 이방의 빛이 되게 하리니'

이사야 49:8에는 '여호와께서 또 가라사대 은혜의 때에 내가 네게 응답하였고 구원의 날에 내가 너를 도왔다. 내가 장차 너를 보호하여 너로 백성의 언약을 삼으며 나라를 일으켜 그들로 그 황무하였던 땅을 기업으로 상속케 하리라'

주의 종의 노래에 대해서 Duhn이라는 독일의 학자가, 구약학자가 금세기 초에 이사야서 42장에서 53장까지의 이른바 세개의 주의 종의 노래를 분류하였다. 42장46장49장과 53장의 세개의 주의 고난받는 종의 노래를 분류하였다.

그래서 이 42장과 49장을 보면 주의 종이 백성에게 언약으로 주어진다는 말이 있다. '주의 종이 백성에게 언약'으로 주어진다. 바꾸어 말하면 주의 종이 백성을 위한 새로운 언약의 중보자가 된다는 그말이다. 언약의 중보자로...

그런데 우리는 성만찬 할때마다 이것이 나의 피로 세운 새언약이라. 이것은 많은 사람을위해서 흘리는 언약의 피라고 아무 정신 없이 낭송을 하지만 도대체가 사람이 언약둁르 세우는 제물로 바쳐진다는 것은 구약에는 없는 것이다. 예수의 이 자기 죽음에 대한 해석이..자기의 죽음이 곧 새언약을 세우는 제물이라는 것이..

그것에 대한 가장 가까운 구약적인 배경이 이 이사야서에 나오는 주의 종의 노래이다. 주의 종이 언약의 백성에게 언약으로 주어진다. 주의종이.... 그래서 아까 '많은 사람을 위해서 흘리는' 이것이 어디에서 왔다고 하였는가? 소위 4번째의 주의 종의 노래에서 왔다고 하였다. 그런데 그 앞의 '언약의 피'라 하는 그 소리도 다른 주의 종의 노래를 반영하고 있다.

아까 이야기한 막10:45절 이것도 예수가 처음에 만찬석상에서 한 만찬의 말씀을 또 다른 말로 요약한 것이라고 보는데 이에 대해 내책에서 자세히 썼다. 이것도 분석하면 이와 비슷한 구약적인 배경을 발견할 수가 있다.

여기에서도 많은 사람들을 위해서 자기 목숨을 무엇으로 준다고요?

대속물로 주려 한다는 것이다.

여기의 그 사람의 아들은 다니엘서 7장에서 분명히 왔다. 그 다음에 섬긴다고 하는 소리는 주의 종의 노래, 주의 종이 무엇하는 자인가? 섬기는 자이다. 섬김. ࠃࠁࠒ이것은 무슨 소리인가? 섬긴다는 소리이다.

그 다음에 '많은 사람들을 위하여'는 이사야서 53:10-12절에서 왔다. 많은 사람들을 위해서..

그다음에 ՋՕՔՑՏՍ 대속물 그소리는 어디에서 왔느냐면 그곳에서 왔다. 하나는 이사야서 43:3-5절까지에서 왔다. 이사야서 43:3-5까지 버면 하나님이 자기 백성 이스라엘을 사랑하기에 그들의 죄값으로 이집트와 에돔을 대속물로 준다는 말이 있다. 이스라엘의 죄를 위해서 그들을 멸망에 이르는 심판을 받아야 하는데 그 대신에 하나님께서 이집트와 에돔을 때리겠다는 그말이다. 이집트와 에돔이 무엇이냐?࠘ࠛࠊ ՋՕՔՑՏՍ이다.

그 다음에 또 어디가 배경이 되느냐 하면 이사야서 53장이다. 거기에 보면 많은사람들을 위해서 누가 대속물을 바쳐요? 대속의 제사로 바쳐지는가? 주의 종이다.

그래서 막 10:45절에 나오는 이 대속물 예수님께서 자기 목숨을 대속물로 주기 위해서 왔다는 이 말은 이사야서 43장과 53장의 결합이다. 자 이렇게 볼때 예수가 자기의 죽음을 무엇으로 보았는가? 이사야서에 있는 주의종의 노래에 근거해서 보았다는 말이다. 그것은 무슨 말이냐? 자기의 죽음을 대속의 죽음으로 보았다는 말이다. 대속의 제사로 봤다는 말이다.

그래서

1.자기의 죽음을 대속의 제사(ࠎࠚࠀ ࠘ࠛࠊ)

여기의 중요한 개념이 하나는 ࠎࠚࠀ이고 하나는 ࠘ࠛࠊ인데 이둘은 비슷하면서도 조금 다르다. 영어로는 guilt offering이다. 댓가를 치르는 것이다. 이 사람이 죄르 鱁지어서 죽어야 되는데 다른 사람이 대신 죽어주는 것이 ࠘ࠛࠊ이다.

그래서 예수가 자기의 죽음을 대속의 제사로 보았다는 것이다.

2.새언약의 제사

둘째로 예수가 자기의 죽음을 새언약을 세우는 제사로 보았다는 것이다. 즉 언약을 세우는제사로 보았다. 자 그러면 예수가 자기 죽음의 결과를 무엇으로 보았는가? 자기의 죽음이 대속의 죽음이고 새언약을 세우는 제사이면 즉 대속을 하고 새언약을 맺으면 그 결과가 무엇인가? 무엇이 나타나는가? 하나님의 의로운 백성이 창조되는 것이다.

언약을 세운다는 소리는 항상 하나님의 백성을 창조하는 것이다. '내가 너희의 하나님이되고 너희가 나의 백성이라' 이것이 언약의 형식이다.

언약을 세운다는 이 소리는 하나님이 제일 못한 이것들을 이스라엘을 자기의 백성으로 삼는다는 것이다. 선택한다는 것이다. 내가 너희의 하나님이다 그리고 너희가 나의 백성이라.이렇게 법적으로 하나님과 이들과의 관계를 맺는 것이 언약이다.

어떻게 관계를 맺는가? '내가 너희의 못난 너희의 하나님 노릇해줄께! 너는 내 백성이라' 이렇다. 그러므로 언약을 세운다고 하는 것은 늘 백성이 창조된다는 소리이다. 선택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일단의 자기의 백성들을 선택하는 것이다. 그리고 자기가 그들의 하나님으로 축복하고 보호하겠다고 약속하는 것이다.

그러면 언약의 백성은 무엇을 짊어지는가? 하나님께 순종하고 순종하는 그런 관계를 맺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들을 보호하겠다고 약속하는 것이고 백성들은 그 하나님의 보호에 의존하고 그 뜻에 순종하겠다는 의무감을 지니는 것이다. 그것이 언약이다. 그래서 언약을 세운다는 그 소리는 하나님의 백성을 창조한다는 그 소리이다.

그래서 시내산에서 모세의 언약을 통해서 모세가 동물을 제사로 바쳐서 모세가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였다. 그런데 그것의 옛언약에 대응해서 새로운 언약을 세우는데 예수가 자기의 죽음을 통해서 새로운 언약을 세우는 것이다. 그래서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이 창조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들을 위해서 속죄의 제사가 드려졌다. 속죄의 제사를..그래서 그것이 의로운 것이다. 의롭고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이 창조되는 것이다.

이것이 예수가 자기 제자들에게 설명해준 자기 죽음, 임박한 자기 죽음의 진정한 의미인 것이다. 다시말하면 하나님이 하나님의 종말의 새로운 백성을 창조하고 모으는 것이다라는 것이다. 그려면 다음 주제를 보도록 하겠다.

그러나 우선 예수가 자기의 죽음을 무엇으로 보았는가? 자기의 다가오는 죽음이 대속의 제사요 새언약의 제사로써 보았다. 그러면 그 결과가 어떠하냐? 그러면 예수의 죽음을 통해서 벌어지는 것이 무엇이냐? 결과되어지는 것이 무엇이냐? 하나님의 새로운 의로운 백성의 창조이다.

그렇다면 이것이 도대체 무엇인가?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와 어떤 관계가 있는가? 예수의 하나님 나라의 선포가 무엇이라고 하였는가? 그 의도가 하나님의 종말의 백성들, 또는 새로운 백성을 옛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이었는데 이들 말고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을 창조하고 모으는 것이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의 의도라고 하였다. 따라서 똑같은 것이다.

좀더 자세히 그리고 정확히 말하면 예수의 죽음은 예수의 하나님 나라의 선포의 성취라고 볼 수 있다.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은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의 의도를 성취한 것이다라고 볼 수 있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면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는 약속이요 너희들을 하나님의 백성을 내가 만들어 주겠다. 그래서 하나님의 보호와 축복을 받는 하나님의 부요함에 참여할 수 있는 하나님의 자져들로 만들어 줄테니까 악과 고난으로 다스리는 새탄의영역에서 벗어나서 하나님을 주로 고백하는 하나님의 주권의 영역으로 오라는 약속이요 초대장이다. 하나님의 부요함에 참여하도록 그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내가 주겠다. 그러므로 사탄의 주권에서 하나님의 주권 밑으로 넘어오라는 초대장이자 청첩장이다.

하여간 예수가 이렇게 초대장을 발부한다. 예수의 하나님 나라의 선포는 약속이다. 초대장이다. 그 초대장을 받고 오는 자들, 그 약속을 받고 그 초대장에 응해서 초대장을 들고 오는 자들을 예수가 뭐라고 했는가? 잔치를 베풀었다. 먹고 마시는.. 하도 많이 먹고 마셔서 예수가 무슨 병명이 있었다고 하였는가? 탐식가요 술주정뱅이라고 하였다고 하였다.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는 우리를 하나님의 백성이 종말의 하나님의 백성이 도게 하겟다는 약속이요 하나님의 백성이 되라는초대장이다. 예수의 그 십자가에서의 그 죽음을 그 약속의 성취이다. 자기 목숨을 대속의 죽음으로 새 언약을 세우는 일에 바침으로써 자기의 하나님 나라 선포에 응한 초대장을 들고 오는 사람들에게 법적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도록 하는 일이다.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의 죽음은 무엇이라고? 그의 하나님 나라의 선포의 성취라고 하였다. 그러니까 이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와 예수의 죽음과 얼핏보면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 같지만 그렇지가 않다. 왜? 무엇으로 연결이 되어 있는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연결되어 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를 선포한 예수가 그의 대속의 새언약을 세우는 죽음을 통해서 그 약속을 성취했어야 했다. 예수가 자기 대속의 제사의 죽음을 통해서 그 초대장을 효력을 발생하게 하였다. 바람 맞히지 않고...

그래서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은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 나라의 완성이다. 성취이다. 이렇게 볼 수 있다. 정확히 말하면 예수가 하나님 나라를 선포해서..

이렇게 정확히 말할 수 있다.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는 우리를 종말의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해서 하나님의 구원에 이르게 하겠다는 약속이요, 그의 대속의 그리고 새얀약을 세어는 제사로서의 죽음은 그 약속을 법적으로 성취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곧 하나님의 자녀들로 새롭게 법적으로 만들어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법적으로 성립시켜서 너희는 내 백성이요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라는 이 언약의 관계가 맺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을 우리의 하나님이라 하고 우리의 아버지로 부를 수있고 그의 부요함에 참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의 십자가에서의 죽음은 그가 하나님 나라의 선포를 통해서 한 약속의 성취라고 이렇게 볼 수 있다.

자 그래서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다. 그런데 부활이 일어났다. 이 부활을 체험한 제자들은 우선 무엇을 깨달았겠는가? 하나님이 예수를 높였다. 이말이다. 하나님이 예수를 높였다. 그 소리는 누구소리인가? 무슨 소리인가? 하나님이 예수를 옳다고 인정했다. 옳다고 선언했다는 말이다. 하나님이 예수를 vindicate했다. 옳다고 선언했다는 것이다.

약속,초대 |--------------→성취 |부활

하나님 나라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개념으로 연결 |vindicate

의도-하나님의 새로운 |하나님의 의로운 백성이 창조 |

백성 창조 |1.대속의 제사 |

|(ࠎࠚࠀ ࠘ࠛࠊ) |

|2.새언약의 제사 |

그래서 부활을 체험한 예수의 제자들은 이 유대인들은 예수를 거짓 메시야라고 백성을 오도한다고 해서 사형에 처했지만, 하나님의 저주를 선언한 가운데에 사형에 처했지만 하나님은 그를 다시 죽음에서 일으킴으로 그가 옳다고 선언하였다. 그리고 그를 높였다.

그를 옳다고 선언하다니 무슨 소리인고? 예수의 모든 주장이 옳다고 선언한 것이라 이말이다. 그가 진정으로 하나님 나라를 선포했고 하나님 나라가 실재가 되게 한 분이라는 것을 그가 진정으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해서 우리를 하나님의 종말의 백성이 되도록 하는 것이지 그의 죽음이 자기 죄를 위한 것, 즉 자기가 거짓 메시야라고 주장해서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그런 죽음이 아니라 우리를 위한 대속의 죽음인 것이다.

그러한 새 언약을 세우는 죽음이라. 이러한 예수님의 모든 주장이 옳다고 하나님이 선언했다. 부활이라는 것이 바로 그러한 의미인 것이다.

그랬을 때에 부활을 체험한 제자들의 입장에서 이제 예수의 모든 행적과 가르침, 그의 하葡님 나라 선포에서부터 십자가의 죽음까지를 되돌아 보았을 때에 이 부활을 체험한 제자들에게 무엇이 정확히 말하면 구원의 사건이었겠는가? 십자가의 죽음이 그렇다. 왜? 이것이(죽음) 이것의(약속,초대) 성취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 전체, 즉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행적과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의 전체가 구원의 사건임에 틀립이 없다. 그래서 그것을 그리스도 사건이라고 그냥 그런다. 짧은 말로 Christ-event. 또한 이것을 Salvation-occurents. 구원의 사건이라 한다. 독일말로 Heilsgeschehen 구원의 사건이라 그렇게 말한다.

그런데 예수의 전체 행적 중에, 아까 내가 뭐라고 말했는가?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와 그의 죽음과는 어떤 관계가 있다고? 약속과 성취 관계가 있다고 하였다.

그러니까 조금더 정확히 말하면 이 Heilsgeschehen. 구원의 사건이 무엇인가? 내가 너희들에게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해주겠다 하는 그것이 약속인가? 그것이 구원의 사건인가? 좀더 정확히 말하면..그것은 그 약속의 성취이다. 진짜. 대속의 새얀약을 세우는 죽음을 통해서 우리를 법적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한 그 사건이 그것이 구원의 사건인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부활을 체험한 제자들의 선포에는 더 이상 하나님 나라가 나오지 않고 가끔 나오나 그것이 중심이 되지 않는다. 왜? 그것은 약속의 성격을 가지기 때문이다. 약속이기 때문이다. 무엇이 중심이 되는가?

우리를 위해서 대속의 제사를 통해서 새언약을 세우는 제사로 자기를 버려서 우리를 하나님의 백성이 실제로 되게한 그 사건, 곧 그의 죽음, 그의 죽음 그것이 그들의 메시지의 중심이 되는 것이다. 그것이 구원의 사건으로써 그것이 구원의 사건이 되는것이다.

그래서 이 사도들의 선포에 그리스도의 죽음이 중심 메시지가 되는것이다. 더이상 하나님 나라의 선포가 더 이상 중심이 되지 않고 예수의 죽음이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를 통한, 통해서 한 구원의 약속을 성취하는 것으로써 사도들의 메시지의 중심이 되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누가 구원의 사건을 일으켰는가? 누가 대속의 제사로 새언약의 제사로 자기를 버려서 우리를 하나님의 종말의 백성으로 만들어서 의롭다 하는 구원이 일어났는가? 누가 그랬는가? 예수가....

그러니 자연히 사도들의 선포의 대상이 누구여? 예수와 그의 십자가! 그래서 아까 뭐라고 그랬다구요? 아까 뭐가 문제라고? 예수는 하나님과 그의 나라를 선포했는데 사도들은 무엇을 선포한다고 하였는가? 예수와 그의 죽음을 선포하였다. 그러면 사도들이 예수의 가르침을 깡그리 무시하고 무슨 헬라 종교에 의해서 무슨 새로운 종교를 만들었는가? 그게 아니고 바로 이러한 논리적인 이유 때문에 그렇다.

이렇게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와 예수의 죽음이 연결된다.

다시 표현하면 하나님 나라를 통해서 우리에게 한 구원의 약속, 곧 우리를 종말의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겠다는 그 구원의 약속은 그의 십자가에서의 죽음을 통해서 성취가 되었다.

그것을 뒤집어서 말하면 그의 죽음을 통해서 우리를 위해서 이룬 구원은 그가 하나님 나라를 선호함으로써 우리에게 한 약속의 구원, 바로 그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