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은 20장 30,31에서 저술의 목적을 밝히고 있다. 요한복음의 저술 목적이 예수가 그리스도 즉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알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그렇게 되어 있다. 그래서 요한 복음의 전체의 내용이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을 계시한 분이라는 것을 그래서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신 분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가 신약의 다른 어떤 책보다도 더 많이 나오는 책이 요한복음이다.
요한복음에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보냈다는 이 보냄의 형식이 나타난다. 요3:17/요1 4:9,10,14. 또 보냄의 형식에 근거한 하나님에 대한 지칭이 '나를 보내신 아버지'또는 '나를 보내신 이'로 요약된다. 하나님 이름이 요한복음에서는 나를 보내신 아버지,나를 보내신 이(Տ ՐՅՌՓՁՒ ՌՅ)가 요한복음에서 하나님에 대한 정의이다. 이것이 곧 보냄의 형식에 근거한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과 예수의 관계는 하나님은 예수 하나님의 아들을 보내신 아버지이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자이다.
그래서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으로부터 나왔다. 그런데 하나님으로부터 나옴을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음은 선지자들이다. 다른 하나님의 종들이 하나님으로부터의 보냄을 받음과 질적으로 다른 것이다. 그래서 선지자를 가령 세례요한이나 이런 존재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았다 할때는 ՁՐՏ, ՐՁՑՁ라는 전치사를 쓴다. ՐՁՑՁ ՐՁՔՑՏՍ ՁՐՏ ՔՏՕ ԨՅՏՕ 그러나 예수가 하나님 아들로서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았다 할때는 ՅՊ라는 전치사를 쓴다.
여러분들이 헬라어 기초에서 배웠겠지만 이 ՅՊ라는 말은 속에서 나온다는 말이다. ՁՐՏ, ՐՁՑՁ는 그냥 애매하게 하나님으로부터 이런 말이지만 ՅՊ라는 말은 그 속에서 나온다는 말이다. 영어로 하면 out of라는 말이고 ՁՐՏ, ՐՁՑՁ는 하나님 곁으로부터, 하나님으로부터 란 말이다.
예수와는 하나님 종들과 근본적으로 다름을 이 전치사로 벌써 나타낸다. 그래서 이 ՅՊ라는전치사를 쓰는데어 우리는 요한이 강조하고자 하는것은 옛가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하나님의 전권대사인데 하나님의 본질로부터 나오는 이다. 이러한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됐음은 곧 하나님의 본질로부터 보냄을 받는 하나님의 전권대사 라는 그러니까 예수는 하나님의 독특한 agent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요한은 여러가지 언어를 쓴다. 하나는 모노게네사(독특한 아들=독생자) 1:14,18. 아가케토스(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 3:16,18/요1 4:9 뿐만 아니라, 이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을 통해서 우리들이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는게 가령 요한복음 내용 전체가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을 통해서 우리들이 하나님의 자녀들이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요한복음을 요약하는 복음 서문 1:11-12에서 그렇게 말하고 있다. 누구든지 그 이름을 영접하는 자는 하나님의 아들 되는 일컫는 권세를 준다. 하나님의 자녀되는 권세를 준다.
1螡11,12의 요한복음의 요약이다. 11절을 요한복음의 첫책 ՋՏՃՏՒ가 그의 백성에게 왔으나 그의 백성이 그를 영접하지 않았다. 2-12장까지의 내용이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메시야로 자기 백성에게 왔다. 그래서 표적과 표적에 대한 설교를 통해서 이 하나님을 계시하고 하나님의 구원,영생을 베풀었다. 그런데 그를 영접하지 않았다. 또 12절은 수난과 영광의 책 13-20장까지의 요약이다. 그러나 거기에 소수(11명)가 예수를 영접했다. 그들에게 하나님의 백성됨 곧 하나님의 자녀들 되는 권세를 주었다. 두번째 책 수난과 영광의 책에서는 바로 11명에게 예수가 말하고 있는 걸로 되어 있다. 이렇게 되어 있는데 그러니까 여기서 예수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계시 활동을 통해서 예수를 믿는자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었다. 그런데 그때 쓰는 명사가 ՔՅՊՍՁ, ՔՅՊՍՏՃ이다. 그래서 예수에게는 ՕՉՏՒ라는 말을 쓰고 하나님의 아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에게는 ՔՅՊՍՏՃ또는 복수 ՔՅՊՍՁ라는 말을 쓴다. 이렇게 어휘를 달리한다. 그래서 예수가 사랑하는 아들 또는 독특한 아들로서 하나님의 본질로부터 나오는 아들이다. 또 이 독특한 사랑하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의 본질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강조하는 요1:18은 하나님의 품속에 있는 자다. 품속에 있는 아들 1:18에 아무도 하나님을 본 자가 없다. 그런데 하나님의 품속에 있는 독생자 하나님이 거기서 ԨՅՏՒ를 ՌՏՍՏՃՅՍՇՒ ԨՅՏՒ 아니면 ՌՏՍՏՃՅՍՇՒ ՕՉՏՒ로 읽어야 되느냐? 사본학적으로 아주 결정하기가 어렵다. 그런데 대개 편집자들은 ՌՏՍՏՃՅՍՇՒ ԨՅՏՒ로 읽는다. 그러니까 하나님 아버니의 품 속에 있는 모노게네스 데오스다. 독특한 아들 하나님이 하나님 아버지를 우리에게 나타냈다. 하나님의 품속에 있는 분이라는 말로 아버지의 본질로부터 나오고 아버지의 사랑의 관계에 있는 분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그러니까 지금까지 말한 것을 요약하건데 요한 복음에 의하면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인데 어떤 의미로 하나님의 아들이냐면 하나님의 본질로부터 나오는 하나님의 전권대사로서 '이 세상에 보냄을 받으니라'이 말이다. 전권대사로서 하나님의 아들이 하는 일이 무엇이냐 첫째로 하나님을 계시하는 일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으 鱁실행하는 실행자이다. 계시와 구원의 실행자이다. 어째서 그러면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을 계시하고 하나님의 구원의 행위를 실제로 담당할 수 있느냐 그것을 첫째로 예수 하나님의 아들이-하나님 아버지와 본질적으로 또는 존재론적으로 하나되기 때문에 그렇다. 아버지와 같기 때문에 그렇다. 그래서 가령 10:30에 '나와 아버지는 하나다'라고 예수께서 그런다. 또는 10:38 '아버지가 내 안에 거하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 상호연합, 상호 내재함.또는 유명한 ՅՃՙ ՅՉՌՉ(I am saying) 내가 ....이다. 이것이 요한복음에 7개가 나오는데 이것은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절대적 용법이 있다. 하나는 보어를 수반하는 용법이 있다. 절대 용법은너희들이 그 사람의 아들을 높이면(들리면) 내가 ՅՃՙ ՅՉՌՉ 인것을 너희들이 알것이다고 예수께서 그런다.
가령 요8:28 "너희들이 인자를 들어 올릴때 내가 그인줄 알라" 우리 한국말 번역에 '그'라는 보어를 집어넣었는데 원래 헬라어는 그냥 ՔՏՔՅ ՃՍՙՓՅՓՈՅ ՏՔՉ ՅՃՙ ՅՉՌՉ 그들이 인자를 들어 올리면 ՅՃՙ ՅՉՌՉ인것을 안다. 절대용법이다. 보어가 없다. 그러나 보어를 동반하는 것이 많다.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내가 세상의 빛이다. 내가 포도나무다. 내가 선한 목자다. 내가 양무리의 문이다. 내가 생명이요 부활이요 내가 하늘로 부터 온 떡이다. 많다. 내가 ....이다가 7개 있다. 이 보어를 동반하는 ՅՃՙ ՅՉՌՉ말씀은 주제가 전부 생명과 관계가 있다. 예수가 생명을 주시는 분이다. 하나님을 함께 해서 생명을 주시는 분이다. 그래서 이 생명을 주시는 분이라는 생명을 누가 주느냐? 하나님이 준다. 그래서 보어를 동반하는 ՅՃՙ ՅՉՌՉ의 말씀은 절대용법 ՅՃՙ ՅՉՌՉ 말씀을 푼 것이다. 그것을 해석한 것이다. 그래서 이 ՅՃՙ ՅՉՌՉ말씀은 사실은 출 3:3이다.
이사야 서 후반부에 나오는 하나님의 이름이다 그래서 예수의 하나님됨 예수의 야웨됨을 나타내는 말씀이다.
자 그런데 우리가 8:28에
너희들이 들어 올릴때 내가 ՅՃՙ ՅՉՌՉ인 것을 안다. 풀어 말하면 내가 하나님 인것을 안다. 이것이 도대체 무슨 소리인가? 가령 10:30 나와 아버지는 하나라. 이렇게 말하는데 이것이 다 무슨 말들인가? 이 사람의 아들을 들어 올리면 너희들이 ՅՃՙ ՅՉՌՉ인 것을 안다. 들어올린다는 소리가 ՕՏՙ인데 요한복음에 있어서 들어 올린다는 동사가 이중 의미로 쓰인 것은 여러분들이 다 알것이다. 하나는 십자가에 못박혀서 자표에서 들어 올린다는 말이다. 십자가에 못박힌다는 것은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을 말한다. 그 사람의아들을 들어 올리라는 소리는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는다는 소리이다. 그러면 예수가 십자가에 목박혀서 지표에서 들어 올리면 그때에 ՅՃՙ ՅՉՌՉ인 것을 안다. 그때 예수가 하나님인 것을 안다. 그 말이다. 이것이 무슨 소리인가?
예수는 십자가에서 들어 올릴때 하나님의 사랑을 계시한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힌 순간에 하나님이 인류를 사랑하심을 나타낸다. 하나님의 사랑을 계시한다. 곧 하나님의 본질이 사랑임을 계시한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계시한다. 그런데 이 계시의 첫원칙이 하나님은 하나님만 계시할 수 있다. 그러니까 십자가에서 예수가 하나님의 본질을 계시한다는 것은 예수가 하나님과 본질이 같다는 것이다. 그러기때문에 예수가 하나님을 계시할 수 있다. 그러니까 십자가에 달리는 순간에 하나님의 본질이 드러나는데 그 본질을 드러내게 하는 예수가 하나님과 본질적으로 같은 하나님임을 나타낸다.
예수가 십자가에 들리는 순간에 하나님을 계시하짐나 그것은 동시에 예수를 계시하는 것이다. 예수는 하나님의 계시자이다. 하나님의 계시자는 하나님과 본질이 같아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을 계시할 수 있다. 여러분들 내가 누차 얘기했짐나 예수가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면 하나님을 계시할 수 없다. 사람보다 못한 원숭이가 사람을 보여 줄 수 없듯이 하나님보다 조금 못한 하나님의 아들 예수는 하나님을 보여줄 수 없다. 사람은 사람만 보여줄 수 있듯이 하나님은 하나님만 보여줄 수 있다. 하나님을 보아야 하나님이 어떻게 생긴줄 알지 그런데 십자가에서 예수가 하나님의 사랑을 계시하고 하나님의 본질이 사랑이다. 우리가 어铽게 아는가? 하나님이 사랑인 것을 십자가에서 예수가 하나님의 인류를 위한 구원의 사건을 나타냈다. 그래서 하나님은 본질이 사랑이다. 곧 하나님을 계시했다. 하나님을 계시하므로 예수는 스스로 하나님의 계시자임을 나타낸 것이다.
우리 기독교 신앙구조가 항상 이렇게 되어 있다. 예수가 하나님의 계시자이다. 하나님을 계시하므로서 스스로 하나님의 계시자임을 또 나타낸다. 그래서 이 십자가에서야 비로서 예수이 본질이 드러났다.
하나님의 계시자로 하나님의 아들도 하나님과 본질이 같은하나님으로 그것이 무엇인가? 옛의 영광받음, 예수의 높임 받음. 하나님으로 인정됨. 영광받음이란 본질이 드러나고 드러난 본질에 의해서 하나님이 하나님으로 인정됨 이것이 영광받음이다. 그래서 예수의 들림이 일단은 십자가에 못박혀 죽음이 이것이 수난이다. 그러나 이것이 동시에 예수의 본질을 드러나게 하는 예수가 하나님의 계시자로서 하나님의 본질에 참여하는 하나님과 본질적으로 같은 분임을 드러내는 행위다. 그러니까 예수가 본질적으로 존재론적으로 하나님과 하나됨이 굉장히 강조되었다. 그래서 예수가 하나님을 계시할 수 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이 예수의 영광 받음이다. 예수의 본질이 드러난 것이다. 그래서 높임받음 들림받음의 의미가 이중으로 쓰이고 있다. 이것이 십자가의 죽음 이것은 글자그대로 고난이다. 그러나 이것이 동시에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의 계시자됨. 그래서 하나님적인 본질을 드러내는 사건이다. 예수의 아들됨. 하나님 됨을 나타내는 사건이다. 그래서 이런 말이 있다. 너희들이 인자를 들어 올릴때 그때에 ՅՃՙ ՅՉՌՉ인것을 내가 하나님인 것을 너희들이 보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 하나님과 본질이 같다. 그래서 하나님과 하나됨을 고이장히 강조한다.
둘째로 이 의지의 하나됨(unity) 하나님 아들과 하나님 아버지와 의지가 똑같다. 이 의지의 일치는 아들의 아버지에 대한 절대순종으로 나타난다. 절대 복종으로 나타난다.
아들이 만약에 아버지와 같은 의지를 갖고 있다면 요한복음 언어로 말하면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지 않으면 아들이 아무리 본질적으로 아버지와 같다고 해도 아들의 말에서 아버지의 말을 헤아릴 수 있겠어요? 없다 .아들이 하는 의지에서 아버지의 의지를 헤아릴 수 있어요? 없다. 아들이 하는 행위에서 아버지의 행위를 헤아릴 수 없다. 아들이 아버지의 뜻에 자기 뜻을 완전히 일치시켰을 때 아들의 가르침에서 아버지의 뜻을 아들의 행위에서 아버지의 행위를 헤아릴 수 있다.그래서 본질적으로만 unity가 아니고 의지의 unity를 가져야 하는데 의지의 untiy를 갖는다는 소리는 아들이 아버지에게 자기 뜻을 완전히 일치시킨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그것이 어떻게 나타나느냐면 아들이 아버지에 대한 절대 순종으로 나타난다. 그래서 예수가 이것을 굉장히 강조한다. 8장에서 내가 아무것도 내 스스로 할 수 없다 .아버지가 나에게 가르쳐준 대로 나는 말한다. 아버지를 기쁘게 하는 것만 나는 한다. 그러니까 자기 스스로 아들이 무엇을 하는 것이 아니고 아버지가 하는것을 보는데로 할 것이며 5장에 보면 또 자기 스스로 무엇을 하는 것이 아니고 아버지가 가르쳐 준대로 자기는 가르치며 자기 뜻을 자기는 받드는 것이 아니고 자기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한다.
이렇게 해서 아버지의 뜻에 자기가 완전히 순종함. 절대 복종함 이것을 말하다(8:28/7:16/7:14,10/5:19,55/4:34/5:30).
이런 의미에서 아버지가 아들보다 크다 말할 수 있다. 아버지가 아들보다 크다(14:28)
아들은 아버지에게서 나와서 아버지의 뜻을 완전히 순종하면서 성취하고 아버지에게로 돌아가는 아버지의 심부름꾼이다 .이런 의미에서 기능적인 subordiantion(기능적인 복종) 그러니까 본질적인(essential) 또는 존재론적인 하나됨과 의지의 일치(uinty of the will)는 곧 functional subordination을 의미한다. 기능적인 아버지에 대한 완전한 순종, 이런 후자의 의미로 아버직 아들보다 크다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고대교회에서 아리우스와 아다나시우스가 논쟁할 때 양파가 다 요한복음에 호소했다. 아리우스는 바로 요14:28 아버지가 아들보다 크다고 하지 않느냐 또 아들은 아버지의 뜻에 전적으로 순종하고 아버지 뜻을 순종하는 자기를 보내신 이의 뜻을 한다.
그러니까 아들이 하나라고 하지 않느냐 10:30 그리고 아버지가 내 안에 있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고 하지 않느냐 또 예수가 ՅՃՙ ՅՉՌՉ하지 않느냐 그런데 사실은 이 두가지가 계시의 요건들이다.
둘다 본질적인 존재론적인 unity 의지의 하나됨 functional subordination이 있을 때에만 예수가 하나님의 계시자가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아들이 하나님과 본질적으로 또는 존재론적으로 같고 또 그 하나님의 뜻에 전적으로 완전히 일치시킬 때 곧 순종할 때만 예수 그리스도 곧 하나님의 아들이 하나님이 계시자가 된다.
계시의 요건이다. 예수가 바로 이러한 하나님과 본질적으로 같고 그러면서 하나님의 뜻에 전적으로 순종하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우리에게 하나님을 계시했다 .요한복음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가 ՋՏՃՏՒ 이다.하나님의 게시자. 하나님의 말씀 자체가 계시 자체다. 하나님의 본지에서 나오는 하나님과 본질적으로 같은 분이니까 물론 선재하신 영원한 분이다. 하나님 말씀 자체 그런데 이 예수가 하나님이 주로 무엇임을 계시했는가? 생명을 주시는 분임을 계시했다. 하나님이 생명을 우리에게 주시는 이로 창조주로 또 우리를 죽음의 구렁텅이에서 살리시는이로 다시 생명을 주는 영생을 주시는 이로 우리에게 계시했다.
요한복음에서 누차 강조하는 것이 무엇인가? 가령 3:16,17에서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함이 아니다. 구원하려 함이다. 예수를 믿는 자들에게 생명둁르 주기 위해서 그러니까 하나님은 심판하는 분이 아니다. 심판하려고 자기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신 분이 아니고 이 세상을 구원하려고 또는 이 세상에게 생명을 주려고 보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사랑이시다. 하나님이 사랑이심을 계시한 것이다. 하나님이 사랑이셔서 이 세상에 생명을 주려하시는 분이다. 이것을 강조. 그러기 때문에 요한복음에 내어줌에 형식이 3:16에 나타나고 10:11.15:13/요일4:10 비슷하게 나타나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강조한 것이다.
창조주 하나님은 사랑이시기에 이 세상을 심판하시지 않고 구원하려고 이 세상에서 생명을 주려고 자기 아들을 보냈다. 우리는 너무나 많이 하나님을 심판자로 알고 있다. 무서운 저기 서초동에 앉아 있는 검사 할아비꽃으로 생각한다. 하나님을 그래서 무엇을 조금만 잘못하면 여지없이 저기 지옥의 유황불에 떨어뜨리는 분으로 하나님을 안다.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한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우리를 구원하시는 분이다. 우리를 요서하시는 분이다. 너무나 많이 경건주의자들의 신앙은 왜곡된 신관으로 되어서 그렇게 되면 신앙이 옳을 수가 없다. 그럼녀 그것이 율법주의 신앙이 되지 않을 수 없다. 벌벌벌 떠는 새벽기도 한번 안나가면 복받기는 틀렸고 그걸 어떻게 회복하려면 심방을 한 25번 더 해야 어떻게 겨우 회복해 가지고 지옥 꼭대기 층에서 천당 제일 밑바닥으로 올라가는 조그마한 그렇게 율법주의 신학이 될 수밖에 없고 공로로 구원받는 공로의 신학이 돌 수밖에 없다.
이거야말로 하나님에 대한 대칭이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에 의해서 구원을 받는 것이지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 범을 좀 잘 지켜서 하나님 앞에 공로를 세워 하나님이 차마 나를 괄시 못하게 하려고 내가 이렇게 열심히 헌신했는데 하나님이 차마 나를 괄시못하겠지 이거야말로 인간이 하나님에 대한 도전이다. 하나님이 누군가. 하나님에 대해서 내가 공로를 이렇게 쌓았으니 하나님 당신 꼼짝 못하고 나 축복해야지. 내가 공로를 이렇게나 많이 쌓았는데 당신 나 복안주고 베겨.이런 신관이다. 그러니까 루터가 큰 깨달음 하기 전의 심관이 대부분의 한국의 그리스도인의 신관이다. 이것이 성경이 계시하는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하는 하나님이 아니다. 하나님은 무엇하러 요3:16,17 요한복음 전체가 보여주듯이 무엇이라고 하나님은 사랑이다. 이 세상을 구원하려고 자기 아들을 보냈다. 그런데 심판이 불가피하게 이루어진다. 그것은 하나님이 심판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사랑의 계시, 하나님의 생명의 계시를 받은 우리 인간들이 그것을 안받겠다고 그것을 부인할 때 우리가 스스로 암흑의 자식임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래서 항상 이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가 이루어질 때 요새말로 하면 복음선포가 이루어질 때 인간들의 반응이 갈라진다. 소수의 인간들은 그 계시의 빛을 이해하고 예수를 영접하고 그래서 이 계시가 주고자 하는 생명을 받고 구원을 받고 다수이 인간들은 이 계시의 빛을 거부한다. 그러므로 이렇게 항상분리가 일어난다. 이 분리가 심판이다. 그래서 이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거부한 사람들은 이 세상의 죽음 이 세상의 암흑 가운데 남겠다고 하는 사람이다. 하나님의 구원에 이르지 못한다. 그런데 이 세상의 암흑과 이 세상의 죽음의 상태가 얼마나 지독한 것인가를 그림으로 그린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으하면 이를 갈고 슬피 운다. 좀더 묵시문학적인 만화로 그린다면 유황불에도 떨어지고 그런 것이다. 여러분들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유황불에 떨어뜨리겠어요? 그런 하나님이 하나님이겠어요? 이것을 만화다. 그림이다. 묵시문학의 상징이다. 그림어이다. 무엇을 상징하는가? 하나님의 구원의 이르지 못한 상태가 얼마나 지독한가? 얼마나 비참한 것인가? 얼마나 우리가 도저 원하지 않을 것인가를 그리는 그림이다. 그 죽음의 상태이다. 얼마나 우리로서는 그걸 진짜 알면 원하지 않을 것인가를 아주 생생하게 보여줄려고 하는 그림이다. 그걸 그ꂥ 문제적으로 해석을 해서 진짜 하나님께서 유황불로 떨어뜨리는 것으로 이해한다. 인간도 자기를 반대하는 적수를 막 유황불에 떨어뜨리면 우리는 그 사람을 존경할 수 없다. 사랑을 고사하고 인간성이 없는 사람으로 본다 .그런데 본질이 사랑이신 하나님이 자기를 안믿었다고 막 유황불에 집어 넣으면 그런 하나님을 믿겠습니까? 여러분들 이것은 그림이다. 상징어 묵시문학의 상징어, 요새로 요한계시록을 도대체 이해하지도 못한 사람들이 요한계시록을 깨달았다고 교계 신문만 보면 요한계시록 부흥회 한다고 난리를 피우는데 그런 사람들에게 절대고 가지 마세요.
그런 사람 요한계시록을 모르는 사람이다. 엊그제 누구한테 들었더니 무슨 EC가 92년에 통합되는게 그것이 전천년설하고 어떻게 연결된다고 난리를 피운다고 그래요. 왜 그것이 한국에서 대단하다고 그래요. 요한 복음에서 예수께서 지옥에 대해서 한 것도 다 비유이다. 문자 그대로 해석해서는 안된다.
내가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여러분들이 하나님이 사랑임을 선포해요. 자꾸 하나님을 despot독재하는 서초동 공안검사 할아비같이 만들지 말고 그러면 신앙이 다 뒤틀린다. 이런 사람이 믿지 않고 등지면 그것은 인간의 지금 암흑의 썩어질 상태 바울도 마찬가지다. 로마서 1장에서 무엇이라고 하는가? 인간들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있으면서도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고 그래서 하나님을 자기들의 욕심에 내버려 둔다. 그것이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그러니까 심판은 누가 하는가? 인간 스스로 한다. 하나님의 사랑을 거부하는 행위가 스스로 자기는 하나님의 사랑에 참여할 수 없는 하나님의 구원에 참여하지 않는 그러니까 이 세상의 썩어짐과 암흑에 죽음에 머무르겠다고 스스로 선택하는 것이다. 그 사태가 얼마나 비참하고 desirable하지 않는가. 그것이 얼마나 참담한 현실인가? 그것을 많은 사람들이 모르고 산다. 그것을 상기 시키기 위해서 아주 엄청난 만화를 그린 것이다.
묵시문학이 만화다. 만화로 그 진리를 아주 효과적으로 표현할려고 한 것이다. 여러분들 저기 소련을 그릴 때 무슨 만화로 그리는가? 곰을 그린다. 곰을 그리므로 소련의성격을 효과적으로 communication 할려고 하는 것이다. 그런 것이다. 소련의 만화를 곰으로 그려놓고 소련 사람을 문자 그대로 곰이다 생각하면 돼요?
종말 이후의 지옥의 상황은 어떤가?모른다. 그것이 무지무지하게 지독한 상황일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때 이루어질 하나님으로부터 영원한 분리의 상황 그것이 지옥에 간다는 것이다. 그게 무지무지하게 지독한 상황일 것이다. 정말 desirable하지 않는 상황일 것이다. 그걸 나타내기 위해서 묵시문학에서 그림으로 유황불로 난리가 나게 그릴 수 있다 .그런데 문자 그대로 유황불에 끓고 그러느냐? 나는 그렇지 않다고 본다. 그럴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것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고 이 종말의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때 구원에 이르지 못하면 하나님의 생명에 이르지 못하면 죽음이 confirm 확인이 되는데 그 확인의 상태가 지옥이 얼마나 지독한 것이냐 그것을 비유로 말한 것이다. 그것이 도저히 인간이 그 실체를 안다면 바라지 않을 그런 상황일 것은 분명하다. 지옥이라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분리가 확인되는 종말에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것이 확인되는 그 상황인 것을 알게 하기 위해서 비유로 말해야지 우리 중벌상 제일 나쁜 것이 유황불에 떨어지는 것일 것이다.
상상하건데 그보다 더 나쁠 것이다. 지옥은 있지. 그런 의미로. 그런데 그 지옥이 얼마나 지독하냐 그러니까 여러분들 좀 더 훌륭한 신학자가 되기 위해서 유황불에 떨어지는 것보다 더 지독하다고 그러세요. 그게 옳다 .그러니까 인간의 체험상 유황불에 떨어지는 것이 지독하다면 적어도 그 정도는 지독하라는 것이다. 알겠어요? 또 괜히 쓸데없이 녹음해가지고 가서 김세윤이 지옥 안믿는다고.... 지옥이 있지. 그런데 유황불에 떨어지는 것보다 더 지독하다고 인간의 언어로서는 그렇게 밖에 표현 못해. 그러나 사실은 그 보다 더 지독하다. 인간의 극한 상황을 표현하는 그림이 그런 것이다.
요한 복음이 강조하는 것이 무엇이냐? 요3:17 심판하려고가 아니고 생명을 주러 보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심판이 이루어진다. 3장 5장 9장 10장에도 그렇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사랑해서 그 아들을 보내서 십자가에 달리게 하므로 우리를 구원하신 것이다. 자 그러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디에서 나타나는가? 십자가에서 나타난다.(giving form) 그의 아들을 십자가에서 내어주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그의 아들을 내어주었다. 그래서 그를 믿는 자마다 심판과 멸망에 이르지 않고 구원하려 함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목적이다. 그래서 이런 의미에서 예수가 세상의 빛이다. 이 예수가 하나님의 빛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계시라는 말이다. 하나님이 사랑임을 계시했다. 빛을 보고 계시를 보고 우리가 하나님을 알게 된다. 그래서 요한복음에서 하나님을 믿는다는 말과 안다는 말이 동의어로서 같이 쓰인다. 아주 중요한 말이다.
예수가 하나님의 세상의 빛이다. 곧 하나님을 계시하는 계시자이다.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사랑임을 계시했다.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사랑임을 그래서 그 계시를 우리가 받아드리면 하나님을 안다. 안다는 말이 무슨 말이냐면 헬라 사람들은 안다는 것이 현상들을 관찰해서 그 현상들 뒤에 숨었다고 보는 원칙을 추상하는 것을 안다고 그런다. 이 현상들 뒤에 있는 그 원칙들을 추상화해서 이론을 만드는 것을 지식이라고 한다. 객관적인 지식이가. 그런데 성경에서는 안다는 말은 그런 말이 아니고 관계를 갖는다는 말이다. 그래서 하나님을 안다는 말은 하나님과 관계를 이룬다는 말이다. 그래서 아는 것의 가장 밀도 깊은 앎이 남녀의 성관계 그래서 가령 성관계를 말할 때 안다고 그런다. 예를 들어 이 아담이 이브를 알았다. 성관계를 했다는 말이다. 마리아가 아직 남자를 알지 못했다는 것은 성관계가 없었다는 그런 말이다. 이 관계 부부간의 성관계와 같은 밀접한 관계 하나됨의 관계 이것이 앎의 극치이다. 예수가 하나님을 계시해서 우리로 하나님을 알게 하는데 이 앎의 극치가 하나님과 관계 하나님과 하나됨 마치 부부가 한 몸을 이루듯이 하나님과 union한다 그말이다.
그러면 우리 피조물들이 하나님과 하나되면 우리 제한성 속에서 죽어간 피조물들이 무한한 창조주 생명주와 접합됨녀 우리가 하나님의 그 삶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 결과가 영생이다. 신적인 삶이다. 그래서 예수의 하나님에 대한 계시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 union하게 해서 생명을 주는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가 빛과 생명을 가져오는 분이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신앙고백을 하면서 늘 염두해 두어야 할 것은 이 하나님의 아들을 통해서 스스로 계시하신 분이 어떤 분이냐 우리를 사랑하는 분이다.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우리의 구원자 하나님이시라는 말이다. 늘 그 공안검사 할아비꽃으로 생각하지 않도록 하나님의 사랑을 강조해서 설교를 하세요.
아까 이야기한 하나님의 아들과 하나님의 하나됨이 아까 내가 제시요건이다 해서 두개를 썼지요. 하나는 존재론적인 unity요 기능적인 unity 이것이 삼위일체론적인 실존의 논리의 시발이다. 하나님 아버지를 아들이 계시했다. 그래서 아들이 계시하기 위해서는 아버지와 아들이 같아야만 한다. 존재론적으로도 같고 의지에 있어서도 하나되고 그래서 아버지와 같은 본질에 있어서도 같고 의지에 있어서도 같은 아들이 아버지로부터 나와서 ՅՊ 아버니의 품으로부터 나와서 아버지로부터 보냄을 받아서 우리에게 아버지를 보여주신 것이다. 계시란 것이다. 이 계시가 객관적 모든 역사적 계시이다.
팔레스타인에서 거의 2000년전에 우리의 참여 없이 역사적으로 일어났다. 과거이다. 과거시제 이 계시를 오늘 우리에게 하나님의 계시로 계시되게 하는 분이 성령이다. 그래서 요한복음에서 그것을 분명히 밝혔다. 성경이 또 하나의 ՐՁՑՊՋՇՔՏՒ(보혜사)로 아들이 아버지로부터 보낸다. 또는 아들이 아버지 이름으로 보낸다.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나온다 .소위 고대 교호에서 삼위일체 교리에서 아주 중요한데 서방교회에서는 성령이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나온다고 하고 동방교회에서는 아버지로부터만 나온다고 하고 그래서 동방교회와 서방교회가 갈라지는 가장 중요한 이유이다. 하여간 요한복음에는 아버지가 아들의 이름으로 보낸다. 아들이 아버지로부터 성령을 보낸다고 그래요.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나온다고 그런다. 그래가지고 요한 복음에 의하면 성령이 하는 일이 무엇인가? 자기 뜻대로 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의 것을 가르치고 아들의 것을 가르치고 아들의 가르침을 기억나게 하고 깨닫게 한다. 아들은 자기 뜻대로 자기 멋대로 하는 것이 아니고 아버지가 가르쳐 준 것을 가르치고 아버지의 뜻을 했했다. 성령은 아들의 가르침을 가르치고 아들이 가르침을 기억나게 하고 아들의 한 것을 깨닫게 한다. 그러니까 성령이 아들을 나타낼려면 어때야 하는가?
똑같은 논리를 아들과 똑같아야 한다. 아버지와 똑같아야 한다. 그러니까 하나님 아버지를 아들이 역사적으로 우리에게 계시했다. 그 계시를 성령이 우리에게 계시되게 한다. 우리가 그것을 진짜 하나님의 계시로 하나님을 깨닫게 한다. 그렇기 때문에 계시의 본질상 하나님은하나님만 보여줄 수 있으니까 아들 안에서 아들을 통해서 계시된 하나님을 계시할 수 있는 성령을 아버지와 아들과 같아야 한다. 이것은 초월하시는 하나님의 내재하심을 동시에 천명하는 것이다. 아무도 하나님을 볼 자가 없다(요1:18).
그러면 하나님은 어떻게 우리에게 나타낼 수 있느냐? 하나님을 하나님만 보여줄 수 있다. 그 하나님인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에게 초월한 하나님을 보여주셨다. 이 하나님 아들을 보여주었는데 우리는 그것을 깨닫지 못한다. 누가 우리에게 예수를 통해서 주어진 가齹미과 그 행적 십자가에서 죽음으로 절정에 이르는 그 예수의 행적이 바로 하나님의 모습 자체라. 하나님의 본질이다.
하나님은 사랑이다는것을 누가 깨닫게 하는가?우리 인간의 지혜로는 깨달을 수 없다. 십자가의 못박힌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하나님으로 그래서 하나님의 본질이 사랑인 것을 누가 깨닫게 하는가? 하나님인 성령이 우리에게 깨닫게 해준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게 한다. 그래서 하나님과 하나가 되어서 무한한 하나님의 생명에 참여하게 한다.
이것이 삼위일체론적인 신관의 논리의 시발점이다. 이 삼위일체론적 신관을 이야기할 때 우리는 무엇을 항상 염두해 두냐면 첫째로 지금 하나님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는 사람들이 누군가? 요한이다. 바울이다. 마태다 이들이 다 누구인가? 유태인들이다. 이 유태인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나면서부터 신명기 6:4의 쉐마 유대인의 근본 신앙고백. 들으라 이스라엘 여호와는 유일한 주시라. 절대 유일신학을 하루에도 몇번씩 낭독하는 사람들이다.
아돌프 하르낙을 위시한 19세기말-20세기 초의 자유주의 신창자들이 생각했던대로 무슨 이런 삼위일체론적인 신관은 헬라의 존재론의 영향을 받은 헬라 그리스도인들이 만들어낸 것이 아니다. 유대인들이 만들어낸 것이다. 절대유일신론의 신앙고백속에서 낳고 자란 요한이 바울이 마태가 깨달은 하나님이시다. 그것을 우리가 늘 염두에 두어야 한다 .벌서 이것이 헬라 철학적인 존재론적인 speculation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면 두번째로 알 수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계시를 체험한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계시된 하나님 또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스스로를 계시한 하나님을 또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을 서술 할 때 또는 개념화할 때 아주 spontaneous 하게 아주 자연적으로 삼위일체론적으로 말할 수밖에 없었다. 이 삼위일체로 신관은 어디서 나온것이예요?
초대교회의 절대유일신론의 신앙고백에서 낳고 자란 유대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의 엄청난 체험을 한 뒤에 그러한 예수 그리스도 사건을 통해서 스스로 나타난 하나님을 그릴 때 그 하나님을 conceptualive할 때 이 사람들이 무슨 존재론적인 철할을 배워서가 아니고 특별한 하늘의 수학을 배워서가 아니고 그러한 하나님을 기술할 때 자연히 삼위일체론적으로 밖에 기술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것을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 에수 그리스도에 의한 엄청난 계시와 구원을 체험한 이 유대인들이 이 사건을 통해서 구원자로 스스로를 들어내신 하나님을 개념화할 때 서설할 때 자연히 삼위일체론적으로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삼위일체론적인 언어는 그리스도의 계시를 체험한 사람들의 아주 spontaneous한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고 새로운 신앙고백이다. 그러면 하나님을 이렇게 삼위일체론적으로 말할 때에 궁극적으로 무엇을 천명하느냐? 하나님이 초월하신 하나님으로서 영원한 창조주 하나님으로서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분이다.
자 하나님이 초월하지 않으면 이 우주보다 크지 않으면 고장난 우주를 고칠 수 있어요? 없어요? 고칠 수 없다. 그래서 삼위일체 신론의 그 오묘함, 그 중요함을 알려면 우리가 다른 신관들과 좀 대조를 해보아야 한다. 어떤 신관들이 있는가? 범신론이 있다.
인도 종교들이 다 pantheism 이나 힌두교나 개척 힌두교라 할 수 있는 불교가 범신론이다. 범신론은 초월을 부인한다. 신이 우주와 coextensive인 우주전체가 신이다. 그러기 때문에 이런 신관을 가지고 있는 종교에서는 우주의 고장난 또는 인가의 고뇌를 어떻게 설명할 수 밖에 없느냐면 고뇌가 실제로 있는 것이 아니고 이것은 환상에 불과하다. 우주전체가 신이라면 선과 악이 무슨 구별이 있는 것이 아니다. 선과악을 구분하는 것을 순전히 현상에 세계에 대한 우리의 환상에 불과한 것이다. 그래서 이 선과 악의 reality을 부인하거나 아니면 이러한 선과 악을 체험하는 현상의 세계에서 선과 악이 없는 변화가 없는 본질의 세계로 뛰어 들어가야 한다는 그런 구원론을 제시한다. 그것을 보통 힌두교에서나 불교에서는 수레바퀴로 설명한다. 이본질을 기하학적으로 기하학적인 축과 같다. 이 수레바퀴의 기하학적인 축은 도는가? 안돈다. 그것은 변화가 없는 세계다. 그러나 수레바퀴의 겉은 어떠한가? 돈다. 변화의 세게이다. 우리의 실존은 본질에서 소외된 그래서 현상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윤회의 법칙이 노예가 된다. 돌고 돌음 낳고 늙고 병들고 죽는다. 또 낳고 늙고 병들고 죽는다. 이 고뇌가 언제 얼마나 계속되는가? 영원히 계속된다. 인생관이 이렇게 설정된다. 그렇다면 세계관 인생관 이런 신관에서는 구원이 무엇이겠는가? 현상의 세계에서 과감히 본질의 세계로 뛰어드는 것이다. 어떻게 본질의 세계에 들어가느냐? 자아를 없앰으로서 시론한다는 것이 본질로부터 소외된 것이니까 본질의 세계에 함몰되는 것이다.
본질의 세계에 무아 몰아적멸 자기를 없애버린다는 것이다. 그것을 그림으로 말하면 태평양의 한 물방울 같이 떨어져버린다는 것이다. 그것이 열반이다. 열반이 무아의 경지다. 몰아적멸, 없어져 버린 것이다. 태평양의 물한방울 같이 본질에 흡수되어 버리는 것이다. 구원론이 이렇게 설정된다.
그러면 누가 구원을 하는가? 자기가 자력 구원이다. 자기가 도를 닦아서 하든지 지식을 얻어서 하든지 사랑의 행위를 베풀어서 하든지 반면에 고등종교에서 또 하나의 신관이 무엇인가? 이슬람식 신관이다(Deism). 이것은 하나님의 초월을 너무 강조한다. 하나님의 내재를 부인한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고는 이 세상이 타락해 이 더러운 타락한 세상에 개입을 하지 않고 하늘 꼭대기에 혼자 고고하게 앉아 있다. 그러니까 이 세상을 고장난 우주를 고칠 수 있는 신이 있기는 있다. 고칠 수 있다. 할 수 있다. 그런데 그가 이 세상에 오지를 않는다. 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실제로 이 세상 역사속에 와서 하나님의 신이 우주를 끌어내야 한다. 우리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밀어야 우리가 구원을 받는데 혼자 하늘 꼭대기에 있다. 이 이슬람의 신관은 부재주의 신관이라 한다. 실제로 역사속에 세상 속에서 구원의 손실을 내밀지 않는다. 내재가 없으니까 이런 데는 인생관이 어떻게 되느냐면 완전히 숙명주의자들이다. 그러나 완전한 숙명주의는 우리 인간을 한시도 존재하지 못하게 한다. 숨막히는 것이다. 그러니까 거기로 구원이 논의되는데 어떻게 되겠는가? 구원할 수 있는 신은 있는데 그가 구원하러 내려오지 않으므로 여기서도 자력구원이다. 신이 게명에 완전히 순종을 해서 또는메카네 순례를 해서 또는 라바라덴에서 금식을 하고 하루 네번씩 기도를 해서 자력구원이다. 자력구원일 수밖에 없다. 신이 내려와서 구원하지 않으니까.
그러니까 이런 신관이 고등종교에서 제기된 신관이다. 범신론이든지 아니면 초월신론이든지 둘다 결국 구원론이 자력구원론이다. 그래서 모든 종교들이 전부 자력구원론이다. 그러니까 이런 신관을 궁극적으로 신의 존재를 완전히 부인하는 무신론적인 인본주의와 완전히 다를 바가 없다. 그것은 결국 인생관이 어떻게 설정이 되느냐면 인간은 결국 자기 손에 달려 있다. 인간은 자기가 자기 운명을 개척해야 하고 자기가 자기 스스로 구원을 하든지 말던지 해야 한다. 인간이 자기 손에 달려 있다. 이 인간이 자기 손에 달려 있음. 이것은 얼마나 처절한 위로 없는 말입니까? 곰곰히 생각해보세요. 우리의 운명이 우리의 손에 달려 있다면 그것같이 불안한 것이 없다. 인간같이 불안정하고 잔인하고 이 세상이 이 역사가 인간 손에 달려 있다고 생각해보세요.
지금 미국과 소련이 적재해 놓은 핵무기가 지구를 몇번 파괴할 수 있는 양인가? 이 인류가 운명이 인간의 손에 달려 있다면 인간들은 이 지구를 여섯번 파괴하고 말았을 것이다.
인간은 ꞻ보다 암흑을 더 사랑해서 이 세상을 완전히 카오스로 전락시켰다. 잉遁간이 이 세상을 완전히 카오스로 전락할려는 끝없는 동작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에 이만큼이라도 질서가 있는 것 같고 정의가 있는 것은 전부 창조주 하나님이 이 세상을 붙들고 게시기 때문에 그렇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붙들고 계시는 분이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하나님이 초월하신 분으로 이 세상보다 커야 이 세상을 붙들고 있지 이 세상을 붙들고 있다는 것은 무슨 소리인가? 이 세상에 내재하시고 이 세상에 간섭하시는 이 세상에 들어와서 인간들이 자구 카오스를 떨어뜨리는 이 세상은 그래서 코스모스의 흔적이라고 계속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자기를 드러내셨다. 그런 초월하시는 내재하시는 하나님이 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을 체험한 유대인들 그리스도 사건을 통해서 자기들에게 계시된 하나님을 삼위일체론적으로 밖에 개념화하고 서술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초월과 내재를 동시에 천명하는 것으로서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는 분이 우리를 구원하러 오셨음. 그래서 우리에게 구원이 발생함. 그래서 이 삼위일체론적인 신관과 대조되는 신관과 또는 그 신을 완전히 부인하는 무신론적 인본주의이다. 그러니까 우리에게 주어진 신관 세계관 인생관은 크게 두 종류이다. 하나는 삼위일체론적인 신관에 근거한 것이거나 아니면 이런 범신론, 자력신론 신관이나 무신론적인 인본주의에 근거한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삼위일체론적인 신관을 전제할 때 우리는 계시라는 말로 쓸 수있고 사랑이라는 말로 쓸 수 있고 은혜라는 말도 쓸 수 있고 구원이라는 말도 쓸 수있다. 인간이 하는 행위가 구원일 수가 있겠는가? 인간 스스로가 제한성에 갇혀 있는 존재인데 인간 스스로가 어떻게 그 제한성을 극복하는 것이 구원인데 어떻게 극복하겠어요? 인간이 하는 어떤 행위가 구원이 될 수가 없다. 구원은 하나님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초월하는 하나님만 할 수 있는 것이다. 그 초월한 하나님이 예수 그리드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내재하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초대교인들이 나사렛 에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 엄청난 하나님을 체험하고 그의 사랑을 체험하고 그의 구원을 체험했다. 다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렇게 자기를 드러내고 계시하고 자기 사랑을 나타내고 자기 구원을 베푸신 하나님을 개념화하고 서술할 때 어떻게 해요? 이것이 성경이 가르치는 삼위일체론적인 신관이다. 그러나 보통 오늘날 일반적으로 삼위일체론 신론을 말할 때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3위가 한분이냐는 숫자놀음으로 전락시킨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삼위일체론 신관하면 그 문제가 본질이 성경이 가르치는 삼위일체론적인 신론이 말하려고 하는 것은 이런 것인데 이런 것을 하나도 모르고 어떻게 3분이 하나가 되느냐? 물론 여기까지 성경이 가르쳐 주는데 성경이 여기까지 밖에 안가르쳐 준다. 여기까지밖게 안가르쳐주는데 인가의 호기심은 더 알고 싶어 한다. 그러면 어떻게 이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어떻게 다르면서(diverse) 동시에 하나(uinty). diversity 와 unity가 되는 mechanism을 어떻게 더 설명할 수가 없을까? 이렇게 인간은 그것을 더 알고 싶어 한다. 그래서 신학자들은 그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여러가지 개념들을 개발시킨다. 그래서 한 본질에 세 persona 그것을 설명할려고 애쓴다. 개념을 자꾸 만들어 가지고 본질(ՏՕՓՉՁ) substance persona 그러면 persona가 무엇이냐? 도대체가 이래가지고 개념 말장난을 많이 했다. 그것으로 안되니가 그림 비유들을 많이 만들어 냈다. 그래서 아마 많이 아려진 비유 어거스틴이 했다고 비유 어떻게 셋이 하나가 되느냐? 쇠더이를 하나 게속 달구어 버린다. 쇳덩어리가 열이 나고 빛이 난다. 열,빛,쇠덩이 삼위일체가 아니냐? 그래서 셋이 하나가 되는 법도 있다. 이런 식으로 비유들을 많이 개발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에 의하면 삼위일체론 특히 조직신학만 열심히 공부한 사람들은(요새 공부한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데) 구식 조직신학 열심히 한 사람들은 삼위일체론하면 삼위일체론 신관이 어떻게 인식되고 고백되고 무엇을 말하는가? 다 잊어버리고 모르고 완전히 셋이 하나가 된다는 추상화한 abstract formula해서 무슨 고등숫자 놀음으로 수학으로 본다. 지상수학은 그렇지 않은데 하늘에서 수학은 그렇데 된다. 1+1+1은지상에서는 셋인데 하늘에서는 하나다. 그래서 숫자놀음 해가지고 기껏해야 한다는 것이 아까 든 비유같은 것이다. 그런 비유가 우리에게 지금 내가 말하는 우리를 구원할 수있고 구원하신 분으로 실제로 그래서 우리에게 하나님을 알게 하고 구원이 발생하게 하는 그런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고 신앙고백이라고 하는 것과는 전혀 다르고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이런 신관이나 인본주의를 택할 수 밖에 없는데 이렇다면 세계관, 인생관이 이렇게 되고 우리에게 구원의 가능성이 없음. 이런 것을 깨닫게 해요. 삼위일체론을 계속 숫자놀음으로만 생각하면 아무것도 모른다. 진정으로 성경이 가르쳐 주는 성경이 어디까지 가르쳐 주는가? 이것을 깨달았을 때의 삼위일체론의 신관의 오묘하고 중요한 것이다. 어떻게 하나님이 diverse하면서 unity로 존재하느냐 이것에 대해서 궁극적으로 답할 수 없다.
거기에서 질문을 그렇게 한다면 삼위일체론의 신론은 궁극적으로 신비다. 그렇게 할 수는 있다. 질문을 그렇게 한다면 그러나 성경을 질문을 그렇게 하지 않는다. 계시와 구원을 체험부터 시작해서 이러한 계시와 구원을 하신 하나님이 어떤 분이냐? 삼위일체론적인 하나님이시다. 이런 하나님이 삼위일체론 하나님 인식 체험 그것의 개념화 여기에 중요성이 있는 것이지 그 다음에 우리 지적인 호기심이 일으키는 그것은 이차적인 것일 수 밖에 없다. 그것은 답을 모른다. 신념이다.
그것은 우리에게 그럴듯하게 만들려고 한 신학자들의 그많은 노력이었다. 그많은 노력들은 나름대로 값이 없는 것이다.
우리가 어떤 unity 와 diverse 가 있기에 그분이 초월하실 수 있는 분이고 내재할 수 있는가를 우리 지성이 만족할 수 있을 정도로 성명한다고 하면 값진 것이지 그러나 궁극적으로 만족할 수 없다.
그럴듯하게만 만족한다. 그런데 까닥 잘못해서 거기에 집중을 하다가는 그것이 삼위일체론의 신관인줄 안다. 삼위일체론적인 신관이 제기하는 주요점이 그것인줄 안다. 하나님을 삼위일체론적으로 고백할 때 우리는 무엇으로 고백하는가? 우주를 고칠 수 있고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는 초월하신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오셔서 우리를 구원했다 이말이다. 스스로 계시하시고 우리 가운데 내재하시고 우리를 구원했다. 그런 하나님이다. 그러기 때문에 인간은 인간 손에 달려 있지 않는다.
인간은 이 세상의 역사는 인간 손에 달려 있지 않고 창조주 하나님께 달려 있다. 무한하신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 그분이 이 세상을 게속 붙들고 우리를 붙들고 계신다. 무엇으로 사랑으로. 이런 신론관을 어떻게 체험했는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누가 처음에 유대인들이 이 절대 유일신론의 신앙고백속에서 낳고 자란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체험하므로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가진 것이다. 그것을 구태어 말한다면 점진적인 계시로서 절대 유일신론에서 전에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다는 신앙고백의 유대적배경할 때 이위일체론적인 개념을 받아들인다고 했지요.
예수 그리스도에게 와서 삼위일체론적 계시가 완성이 된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신앙고백이 그러니까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그 신앙고백을 하나님을 계시한 사건인데 예수가 하나님의 계시자라는 소리인데 어떤 하나님의 계시자인가? 삼위일체론적인 하나님의 계시자이다. 이 삼위일체론적으로 하나님이 계시되었다는 것은 우리의 실존에서는 무슨 의미인가?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는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셨다. 이말이다. 그러니까 우리의 운명과 인류으 운명과 세상과 역사의 운명은 우리 손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고 살아계신 하나님의손에 달려 있다. 여기에서 진정한 기독교적인 역사와 세상에 대한 우리 운명에 대한 낙관론, 다른 말로 하면 소망이 있을 수 있는 것이다. 만약에 불교신관,이슬람신관에서는절대 소망이 있을 수 없다.
예수가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줘요? 삼위일체론적인 하나님을 가르쳐 준다. 곧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이 사랑으로 우리 가운데 거하셔서 하나님에게 배반하고 하나님께 반발하면서 자꾸 이 하나님의 cosmos를 chaos로 떨어 뜨리려고 하는 우리 인간들을 붙들고 계신다. 그래서 이 세상에 요만큼의 cosmos가 있고 질서가 있고 요만큼만한 정의가 있다. 그러나 언젠가는 우리를 전부 구원하신다. 우리 인간의 손에 달려 있으면 우리는 이른바 한시도 지탱 못할 것이다. 창조하시고 창조하신 하나님이 사랑으로 우리를 붙들고 계시는데 그분이 우리를 구원하신다.
사랑이 하나님이 전능한 사랑의 하나님에게 우리의 구원이 달렸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신앙고백은 어떤가?근본적으로 우리에게 삼위일체론적인 하나님을 가르쳐 주어서 우리에게 새로운 인생관, 세계관 역사관을 갖게 하고 궁극적으로 우리에게 소망을 갖게 한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사는 의미를 갖게 한다 그러니까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이 복음입니까? 아닙니까? 복음이다.
저기 케케묵은 식으로 신학하면 안된다. 그러면 맨날 에수가 인성이 어쩌고 신성이 어쩌고 삼위일체론 신관이 어쩌고 셋이 하나되고 숫자놀음으로 안다. 이 예정론도 완전히 거꾸로 가르친다. 이 예정론을 우리에게 위안과 확신을 주는 교리인데 거꾸로 우리를 불안하게 하는 교리로 만들어 버린다. 성경이 가르쳐준 것을 정반대로 한다. 그래서 여러분이 앞으로 신학을 하면 이 성경의 고귀함을 강조한 보수 신학도 있고 성경신학도 많이 하고 그 위에 조식신학을 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