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신학 제19강

지난번에 우리가 본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직후에 바울 전의 초대 교회가 예수를 어떻게 하나님이 아들로 선호했는가 하는 것을 바울 서신에 나와있는 바울 전의 신앙고백을 분석함으로 살펴보았다.

이제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한 그래서 하나님 우편에 높임받은 예수를 하나님의 영광가운데 나타남을 보았다. 소위 그리스도의 나타남을 체험했다. 그런데 다메섹 도상에서 나타난 예수가 하나님의 영광 가운데 찬란한 빛 가운데에 아주 신적인 분으로 나타났기 때문에 바울은 그를 주ՊՕՑՉՅ라고 부를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우리 행9:5.22:8.26:15에 바울이 자기에게 나타난 예수에게 예수를 부르는 장면이 있는데 거기에 한결같이 주라고 부른다. 또 바울 서신 자체에서도 확인이 된다. 고전 9:1에 바울이 자기 사도직을 의심하는 고린도인들에게 '내가 주를 보지 않았느냐'고 말한다. 이렇게 해서 다메섹 도상에서 바울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의 빛으로 둘러싸여서 나타난 분이 신적인 분으로 인간의 자태보다는 훨씬 고양된 자태로 영광스러운 분으로 나타나셔서 바울이 주로 호칭하지 않으면 안되는 그런 분으로 나타났음을 알 수가 있다.

이런 경우 분명히 인간인데 신적인 영광가운데 나타난 존재를 묵시문학에서 '하나님의아들 같은 이'라고 부른다. 거꾸로 하나님이 나타났을 때-Theophany 때-는 하나님의 형상을 그릴 때 '한 사람의아들 같은 이'라고 한다(겔1/단7:13). 하나님이 나타날 때 하나님 같다하면 아무 수식이 안된다. 아무 그림이 안된다. 흙이 땅같다는 소리와 똑같다. 그런 것을 tautology라고 한다. 그래서 아무런 기술이 되지 못한다. 그런데 하나님이 어铽게 나타나겠느냐? 그 모양이 어떠하던가? '사람과 비슷하더라' 반면에 신적인 높임 받은 존재가 나타날 때, 분명이 인간이라고 예수라고 그런데 에수가 사람같이 나타났다고 하면 예수가 사람인데 사람 같이 나타났다고 하면 아무런 descreption이 되지 않는다. 이런 경우 묵시문학에 보면 아브라함이 '하나님 아들 같이' 나타났다는 묘사가 많다.

반면에 하나님이 나타날 때는 '사람의 아들 같이' 그래서 다니엘 7:13에는 '한 사람의 아들 같은 이'가 신적인 존재임을 우리가 알아야 한다. 그래서 이러한 묵시문학적인 표기방법에 따라 우리는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하나님의영광 가운데 나타나는 신적인 영광가운데 나타나는 예수,인간 자기가 지금 적대시하는 예수가 신적인 영광가운데 나타나서 자기가 주라고 부르짖을 정도의 분을 무어라고 그러겠는가? 어떤 형태로 나타났겠느냐? 분명히 '하나님의 아들 같은 이'로 그렸을 것이다.

'하나님 아들 같이 '나타났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바울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를 자기의 다메섹 도상에서의 christophany(예수의 체험-예수의 나타남)과 항상 직결해서 쓴다.

대표적인 경우로 갈1:16. 다메섹 도상에서 지금 핍박자로 교회의 핍박자로 행하는 바울 자신에게 하나님의 아들로 나타났다. 무엇하도록? 그의 아들을 이방인들에게 복음으로 선포하도록. 그에게 자기가 혈육과 상의하여 예루살렘에 가지 않고-인간들과 자기보다 먼저된 사도들과 상의하러 예루살렘에 가지 않고 아라비아로 갔다. 거기에 오해가 많다 아라비아로 바울이 묵상하러 갔다고 말하는데 묵상하러 가지 않고 선교사로 갔다. 바울이 사막에서 3년간 묵상한 것이 아니고 선교하러 갔다. 하나님께서 자기를 이방인에게 그의 아들을 복음으로 선포하기 위해서 핍박자로 행하는 바울 자신에게 그의 아들을 나타냈다.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나타내서 곧 내가 순종해서 예루살렘에 가서 시간 낭비할 시간이 없어서 아라비아로 선교사로 갔다. 여기에 오해가 두가지 있다.

첫째는 아라비아라 하면 오늘날의 사우디 아라비아로 생각하는데 당시 다메섹 도성 밖이 아라비아였다. 지금 바울이 다메섹 도성 앞에서 있을 당하였다.

다메섹 도성 밖은 Nabatea왕국이 있었다(고전12장)(행 )에서 바울이 다메섹에서 광주리를 타고 성에서 도망가는데 왜 도망갔는가?

Nabatea의 왕 아레타스가 바울을 잡으려고 성을 다 지키고 있었다. 바울이 아라비아에 가서 복음을 선포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시끄럽게 구니까 바울을 잡아 없앨려고 하니까 바울이 자기의 선교를 받은 형제들의 도움으로 광주리를 타고 도망을 갔다. 갈1:16의 문구가 '그의 아들을 이방인들 가운데 복음으로 선포하기 위해서 나에게 그의 아들을 계시하였다. 그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않고-혈육과 상의해서-곧장 아라비아로 직행했다'고 말함.

바울이 자기 다메섹에서의 체험을 한마디로 하나님의 아들의 계시라고 요약한다. 이것과 상응하는 것이 행전 9:20-사도행전 전체에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이 딱 한번 나오는데-바울이 다메섹에서 그리스도를 보고 곧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선포하였다고 다메섹 도상의 체험 직후 바울의 케리그마, 바울의 복음 선포를 한마디로 요약한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선포했다. 그래서 우리는 바울이 다메섹에서 부활하여 높임받은 예수의 하나님의 영광 가운데 나타남을 체험했는데 그때에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같은 이로 곧 하나님의 아들로 나타남을 보고 자기가 핍박하던 예수를 주라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그리스도라고 선포했던 것이 옳음을 확인받는다.

그래서 바울도 예수가 주 그리스도다. 하나님의 아들이다. 라고 선포했는데 다메섹 도상에서의 체험을 가장 정확히 반영한 칭호는 그몬든 것들중에서 하나님의 아들이다는 칭호였다. 그래서 갈1:16/행9:20에 자기의 다메섹 도상에서의 체험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초대교회의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신앙고백을 수용하게 되었다. 바로 초대교회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고 선포한 것을 자기가 체험했으므로 그것이 사실이다는 것을 느낌. 하나님이 그것을 자기에게 가르쳐주었다. 그래서 자기의 핍박자로서의 생애를 회개하고 하나님의 아들의 종으로 사도로 나서서 그 하나님을 복음으로 선포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롬 1:3,4을 다시보면

3절: ՐՅՑՉ ՔՏՕ ՕՉՏՕ ՁՍՔՏՕ

3'절: ՔՏՕ ՃՅՍՏՌՅՍՏՕ ՅՊ ՓՐՉՑՌՁՔՏՒ ԤՁՉՄ ՊՁՔՁ ՓՁՑՊՁ

4절: ՔՏՕ ՏՑՉՓՈՅՍՔՏՒ ՕՉՏՕ ՈՅՏՕ ՅՍ ՄՕՍՁՌՅՉ ՊՁՔՁ ՐՍՅՕՌՁ

3절:복음은 그의 아들에 관한 것이다. 이것은 바울의 서문이다. 그의 아들은 (여기서부터가 초대교회 신앙고백이다)

3'절:4절만 보면은-바울 전 교회의 신앙고백만 보면은

예수가 육신적으로 다윗의 씨로부터 낳았고 부활로 말미암아 권세를 행사하는 하나님의 아들로 등극했다. 이런 신앙고백이다. 이 신앙고백은 나단의 예언의 성취로 예수의 사건을 나단의 예언의 성취로 유대 메시야 사상의 뿌리인 나단의 예언의 성취로 선포한 것이다. 그러나 아직 이 신앙고백은 선재사상은 내포되어 있지 않다. 그런데 바울이 여기에서 서문을 달므로 복음은 그의 아들에 관한 것이다. 그의 아들은 다윗의 아들의 씨로 낳았다. 이렇게 말함으로서 바로 이와 같은 서문의 역할은 영원한 하나님의 아들이 다윗의 아들로 낳은 것으로그에게 선재사상과 성육신 사상이 비로소 나포되기 시작한다. 이것은 갈4:4과 비교해보면 잘 알 수 있다.

4절:때의 충만함이 왔을 때에 때가 차매,하나님께서 그이 아들을 보냈다.

ՅՎՁՐՅՓՔՅՉՋՅՍ Տ ՈՅՏՒ ՔՏՍ ՕՉՏՍ ՁՕՔՏՕ

ՃՅՍՏՌՅՍՏՍ ՅՊ ՃՕՍՁՉՊՏՒ

ՃՅՍՏՌՅՍՏՍ ՕՐՏ ՍՏՌՏՍ

이것을 한번 비교해 보자.

초대교회 신앙고백 자체는 아직 신앙고백이 내포되어 있지 않다. 그런데 바로 바울이 서문을 담으로 복음은 그의 아들에 관한 것이다. 그의 아들은 다윗의 씨로 낳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그의 아들을 보냈다. 보내서 여자의 몸으로 낳게 했다. 문장형식이 똑같다. 그의 아드이 ՃՅ ՍՏՌՅՍՏՍ 했다. 낳았다.-다윗의 씨로 낳았다. 여자의 몸에서 낳았다. 율법 아래서 낳았다- 문장형식이 똑같다. 그러니까 신앙고백 자체만 보면 선재사상이 없는데 바울이 서문을 담으로 말미암아-복음은 그의 아들에 관한 것이다. 그의 아들은 다윗의 씨로 낳았다-이 선재사상이 아직 없는 신앙고백의 의미를(갈4:4)에서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이른바 보냄의 형식과 같이 만든다. 여기서 제일 먼저 두드러지게 나타난 사상이 하나님의 아들이 선재한, 태초전에 인간 되기전에 하나님과 영원히 같이 한 존재했음을 나타낸다. 그래서 그의 여자의 몸에서 또는 다윗의 씨로 난것이 성육신이었음을 밝힌다.

그래서 보냄의 형식. 하나님+그의 아들+보냈다+목적:이런 형식을 보냄의 형식이라고 한다. 이런 문장 형식은 항상 쓰이는 기독론적인 칭호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칭호다(갈4:4/롬8:3/골1:13ff/요3:17/요1서 4:9,10,14 등).그래서 하나님께서 -갈4:4에서 보는 바와 같이-그의 아들을 보내서 여자의 몸에서 낳게 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아들이 여자의 몸에서 낳기 이전에 존재한 걸로 쓰여있다.

이런 것을 선재사상이라고 하는데 엄밀한 의미로 선재사상은 사람으로 세상과 역사 속에 들어오기 전에 이미 존재했다는 말이다. 사실은 그보다 조금 더 큰 의미를 가진다. 이 세상 창조전에 이미 존재했다. 영원히 존재하는 분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이 '보냄의 형식'이 우선 나타내는 것이 선재사상이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인간으로 낳기 전에 이미 하나님과 같이 존재한,영원히 존재한, 이미 세상의 창조전에 존재한 분이다. 그럼으로 그의 여자의 몸에서 혹은 다윗의 씨로 낳음은 성육신이었다는 것을 내포한다. 선재사상과 성육신의 의미를 내포한다. 이것이 sending-formula의 첫번째 두드러진 의미이다.

둘째로는 '보냈다'는 말의 배경.왜 보냄의 형식에 아들이라는 칭호가 쓰이느냐? 이것은 히브리어 뿐만 아니라 셈족의 공통된 사고에 보냄에 대한 Massanger,심부름꾼에 대한 이해에 비추어 이것을 이해할려 한다. 이 agent는 mishnah Berakoth 5:5에 보면 -미쉬나는 AD100년경에 유대랍비들이 지중해 연안 Jemnia(Yevneh) 라는 곳에서 이제 성전이 다 부숴져 버려서 성전에 제사를 중심으로 한 유대교가 더 이상 가능하지 않는 마당에 구약성경-Torah책의 해석의 전통들을 전부 참조하여 율법들을 제정한 것들의 미쉬나이다. 역대 랍비들이 구약성겨에 근거해서 가르침 하나님의 율법들을 제정한 것이 미쉬나다. 미쉬나의 주석이 Talmud이다.

예루살렘 탈무드-팔레트신 탈무드-있다. 미쉬나가 율법책의 근본이다.

미쉬나의 Berakoth 5:5에 보냄을 받은 자는 보낸 자와 같다고 법으로 정하고 있다. 이것은 agent는 보낸이의 전권대사이다. 그래서 보냄을 받은 심부름꾼 agent는 보낸이의 저권을 행사할 수있고 이 심부름군이 계약을 체결하면 그것은심부름을 보낸 주인에게 완전히..

성경의 예를 들면 아브라함이 이삭의 아내를 구하기 위해서 그의 종을 사라의 고향에 보낸다. 엘리에셀이 거기가서 리브가를 데리고 아브라함의 집에 올 경우 아브라함이 리브가를 박대할 수가 없다. 이삭이 박대할 수가 없다. 왜? 엘리에셀을 보낸 아브라함의 전권대사이기 때문이다. 엘리에셀이 택했으면 아바르함이 택한 것과 마찬가지이고 엘리에셀이 계약하면 아브라함이 게약한 것과 마찬가지이다. 법적으로 그렇다. 박대할 수가 없다. 계약을 파기할 수 없다. 이런 셈족의 전권대사의 이해.

그래서 ࠇࠌࠚ(보낸다)는 항상 보낸이의 대권을 행사하고 그래서 보냄을 받은 이가 결정하고 게약한 것은 보낸이에게 구속력이 있는 뜻이 항상 들어 있다. 여기서 발달하는 랍비들의 사상이 ࠇࠉࠌࠚ제도다. -보냄의 제도. 가령 랍비들이 공회에서 중요한 법을 결정하면 랍비 공둁회가 한 대표를 혹은 대표들을 여러 세계에 흩어져 있는 유대 회당들에게 파견을 한다. 이때에 파견 받은 랍비는 랍비들의 공회의 전권을 행걽나다. 그런 제도를 ࠇࠉࠌࠚ제도다. 예수의 사도들을 ՁՐՏՓՔՏՋՏՒ-보냄을 받은 이-라고 부르는 것은 아마 유대 랍비들의 ࠇࠉࠌࠚ 제도와 관계가 있을 것으로 본다. 원래 ՁՐՏՓՔՅՋՋՅՉՍ은 심부름꾼을 파견한다는 말도 되지만 광대를 파견한다는 뜻이었다. 원래 지금 신약성경에 나오는 사도라는 뜻, 또는 그렇게 보냄을 받은 자를 사도로 부른 칭호가 없었다. 심지어 유대교에도 이렇게 랍비들의 고薷회의 보냄을 받은자도 칭호가 없었다. 또 그렇게 보내는 제도를 ࠇࠉࠌࠚ라고 했지만 이 제도에 의해 보냄을 받은 자의 칭호도 없었지만 보냄을 받은 자가 평생동안 ࠇࠉࠌࠚ 직책을 갖는 것이 아니고 일회적이다. 임무를 마치면 1회로 끝이 난다.

그러나 예수에 의해사 사도로 임명을 받은 자는 신약성경에서 평생 사도가 된다. 그리고 그에게는 보낸다는 ՁՐՏՓՔՅՋՋՅՉՍ 동사는 ࠇࠌࠚ와 마찬가지다. 여기서 온 독특한 칭호가 있는 것 같다(?). 이런 점에서 신약성경의 사도라는 직책은 이런 ࠇࠌࠚ와 ࠇࠉࠌࠚ적인 전승사적인 배경을 가지고 있지만 전혀 새로운 제도이고 칭호다. 이 신약성경의 중요한 단어는 다 똑같다. 복음이라는 것도 마찬가지다. ՅՕՁՃՃՅՋՉՏՍ이라는 말도 히브리어 ࠄࠚࠁ 기쁜 소식을 선포한다는말과 연결되어 있으나 이것도 전혀 새로운 의미이다.

그리스도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와 구원을 체험하고 그리스도인들은 이 그리스도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와 구원을 표현함에 있어서 당시 언어들의 부족함을 느겼다. 그래서 이와 같은 새로운 언어들을 개발한다. ՁՃՁՐՇ도 그중 하나. ՁՃՁՐՇ는 원래부터 헬라어에 자기를 내어누는 사랑이라는 뜻이 아니엇다. ՁՃՁՐՇ는 자주 쓰이지 않는 무의미한 말이었다. 반면에 ՅՑՙՒ라는 말은 아주 뜻이 분명한 그리고 아주 중요한 헬라말이었다. 그게 이성적인 즐김,애력만에만 적용하는데 그것이 아니고 원래 가치의 끌림이라는 말이기 때문에 자신을 지식을 사랑한다든지 아름다움,권력을 사랑한다든지 하는 모든 말에 적용되는 말이다. 그래서 인간으로 하여금 인간되게 하는 것이 ՅՑՙՒ라고 보았다. 인간이 가치를 추구하는 활동 자체를 ՅՑՙՒ로 보았다.

그래서 인간이 가치에 끌림,가치에 매력됨이 ՅՑՙՒ이다. ՅՑՙՒ는 인간의 삶의 원동력으로 보아 셀라 철학에서는 아주 고양된 개념이었다. 그런데 그것은 주체가 가치를 가지고 있는 객체에 매력을 느낀다. 왜? 가치를 가지고 있는 정체를 자기 것으로 만들려는 욕구 때문이다. 가치를 소유하려고 하기 때문. ՅՑՙՒ를 다른말로 하면 자기 주장이다. 이것은 이기적인 자기 추구 활동이다. 이렇게 이것인 색깔이 분명한 언어였다. 헬라사상, 인본주의 사상을 가장 잘 나타내는 말이었다. 이 말로 어떻게 십자가에 그의 아들을 내어버린 하나님의 행위를 기술할 수 있겠느냐? 십자가 아래 그의 아들을 내어버린 하나님의 행위는 우리를 위해서 내어 버렸다. ՅՑՙՒ라는 말이 전혀 해당이 안됨. 왜? 그것은 하나님이 아무 가치도 없는 인간들에게 자기를 준 것이다.

이것은 ՅՑՙՒ라는 말을 쓸 수가 없다. 그래서 이런것-하나님이 아무 가치도 없는 인간들을 위해 자기를 내어줌-을 어떻게 표현하느냐? 표현할 말이 없다.

그래서 무미건조하고 색깔이 없는 ՁՃՁՐՇ라는 말을 선택해서 그 말에 그 내용을 채운 것이다. 그래서 ՁՃՁՐՇ가 자기를 내어주는 사랑이라는 의미를 갖게 된 것이다.

이것이 전부 신약성경의 기독교적 용법이다. 그래서 신약성경에 ՁՃՁՐՇ라는 말이 일관되게 쓰인다. 그런데 가금 이와 같은 사랑을 ՖՉՋՅՉՍ이라는 말로 표현하기도 한다. '요'에서는 ՁՃՁՐՇ가 주로 나오는데 가끔 문체의 변화를 위해서 ՖՉՋՅՉՍ이라는 동사를 동의어로 사용한다.

하여간 이렇게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위대한 계시와 구원을 체험하고 그리스도인들이 새로운 언어들을 개발하여야만 했다.

요21:15-17: ՁՃՁՐՇ와 ՖՉՋՅՉՍ의 교차적 표현은 문체적 변화를 위해 사용했다.

그래서 보냄의 형식에 두드러진 사상이 무엇이냐 하면 예수가 하나님의 전권대사다. 그런데 특이 아들이 agent로 보냄을 받았을 때에 이 사상이 더욱 확실하다.

막12:1-7은 포도원 농부의 비유다.

7절: 포도원 주인이 포도원 농부들에게 종들을 보내서 세를 받을려고 하니까 종들이 아마 선지자들이나 유대의 율법을 현명하게 가르친 의로운 선생들을 심히 때려 보내니까 포도원 주인이 몸시 화가 나서 마지막에는 자기 아들을 보낸다. 그런데 농부들이 이 아들은 상속자라..

아들에 있어서 제일 중요한 개념은 상속자이다. 바로 아들이 상속자이기 때문에 그가 agent로 보냄을 받았을 때 그 보내는 아버지의 전권을 위임받는다.-전권대사

그래서 아들을 죽이면 상속자가 없어지니까 그 주인의 땅이 우리 것이 된다고 하였다. 그래서 보냄의 형식에 항상 아들이라는 칭호가 쓰인다.

세째로, 보냄의 형식은 항상 목적이 있는데, 목적은 구원을 위한 것이다.

가령 갈4:4/롬8:3, 보냄의 형식은 구원이 목적이다.

그러니까 보냄의 형식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선재함을 나타내고 둘째로 하나님의 agent로 하나님의 전권대사, 하나님의 상속자로 활동하는 분임을 나타내고 세째로 하나님의 구원의 사업의 agent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구원하는데 누구를 일꾼으로 삼아서 구원을 하느냐? 자기 아들. 하나님의 구원의 사업에 예수가 그의 아들로 실행자 노릇을 한다.

네째로 보냄의 형식의 배경을 이루는 종교사적 전승은 지난번에 우리가 살펴본 유대교의 지혜사상이다. 유대 지혜 문서에 보면 지혜가 '하나님의 말'로서 태초부터 하나님과 같이 하고(선재) 하나님의 어좌에 하나님과 같이 앉아 있고, 지혜가 보냄을 받아-하나님의 agent노릇을 한다.-

무엇하러 보냄을 받느냐? 창조와 계시와 구원의 사건의 중보자 노릇을 하도록 보냄을 받는다. 그런 의미에서 지혜가 하나님의 창조,계시,구원의 사업의 agent로서 하나님의 전권 대사라 해서 하나님의 딸이라고 했다. 딸이라고 하는 이유는 지혜가 여성명사이기 때문이다.

바로 그래서 보냄공식은 지혜 신학의 예수에 대한 적용이라고 말할 수 있다. 뒤집어서 말하면 예수의 가르침과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체험한 초대교회가 예수가 바로 구약성경과 유대교에서 말했던 지혜였다고 깨달았다. 또는 예수의 인격과 사역이 구약성경과 유대교에서 지혜의 활동이라고 말했던 지혜의 인격과 활동이라고 기술되고 예언되었었구나 하는 것을 깨달았다는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고, 또는 예수가 성육신 하기전에 하나님의 창조와 구원 사이에서의 활동을 구약성경 그러니까 전의 계시에서는 지헤의 활동이라고 계시되고 깨달아 졌구나 하고 깨달은 것을 말할 수도 있고.

지난번에 내가 지혜 신학의 말달은 초월하신 하나님의 내재하심을 나타내는 것의 언어수단이다. 바로 구약성경 그러니까 점진적인 계시에서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의 지혜의 활동이라고 초월하신 하나님의 세상 속에서의 활동을 지혜라는 category를 통해서 그렸는데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보다 더 완성된 계시의 빛 아래에서 보았을 때 바로 예수의 활동이라고 본 하나님의 창조, 계시,구원의 활동을 예수가 하였구나. 예수가 어떤 분?

옛날 구약성경과 유대교에서 지혜의 활동이라고 한 그 하나님의 활동-창조,계시,구원의 활동을 하시는 분으로 깨달아서 그렇게 천명한 것이다. 그것이 sending formula이다.

그래서 보냄의 형식은 일단 겉으로 나타나는 것은 예수가 구원의 사업에 실행자,중보자인 것만을 나타내나 이 속에 같이 나포된 것은 바로 이 보냄의 형식이 구약성경과 유대교의 지헤신학에 근거하고 있으니까 예수가 동시에 창조,계시의 실행자인 것도 나타낸다.

그럴때 쓰이는 칭호가 하나님의 아들이다. 가령 골1:13-20:예수의 창조,계시,구원의 중보자 노릇함을 그리는 '골'의 시의 서문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되어 있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창조,계시,구원의 중보자이다.

나는 내책에서 이러한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로서 선재사상과 예수의 창조,계시,구원의 중보자 됨의 사상 곧 예수가 구약성경과 유대교에서 지혜사상을 성취한 분이라는 사상은 바울의 공험이라고 바울의 초대교회의 신학에 대한 공헌이라고 주장했다. 다시말하면 바울 전의 교회 신학에서는 롬1:3,4에서 보여준 바와 같이 아직 선재사상이라든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창조,계시,구원의 중보자라는 사상이 나타나지 않았다.

바우이 이러한 사상을 발달시키는데 바울이 어떻게 이 사상을 발달시키느냐면 예수가 바로 구약성경과 유대교에서 지혜사상을 성취한 분이라는 것을 깨달음으로 바울이 초대교회에 한 공헌이다라고 나는 주장을 했다.

지금까지 학자들은 바울의 공헌이라고 보지 않고 바울 전의 교회에서 이미 발생한 것으로 보았다.

왜냐하면 지금 이런 사상을 담고 있는 보냄의 형식이 바울 서신에만 나오는 것이 아니고 요한복음에도 나온다.요한의 교리에서도 보냄의 형식이 나타나고 요한복음에도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가 바울 신학에서와 똑같은 의미를 갖고 있다. 그래서 이것은 바울 만의 신학이 아니고 요한의 신학도 됨으로 교회 전체의 공통된 신학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러기 때문에 바울이 전에 그리스도인들로부터 이어받은 바울 전의 신학이라고 대개 주장을 한다.

나는 바울이 신학적인 통찰력을 개발해서 전체 교회의 유산이 되었다고 주장한다.

'히'가 대표되는 교리,요한 교리,-신약전체의 유산이 되었다고 나는 주장한다.

왜냐하면 첫째 이유가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영광된 그리스도를 본 것이 하나님의 아들로 보았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 칭호가 다메섹 도상하고 다메섹 체험하고 결부되었다. 극러며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하나님의 아들을 어떻게 체험하였는가?

a)하나는 묵시문학적 전통에서 아까 이야기한대로 '하나님의 아들 같은 이'로 나타난 것을 보았다. 그러니까 묵시문학적으로 신적으로 고양된 높임 받은 인간이 나타날때 그런 인간을 '하나님의 아들 같은 이'로 나타났다. 도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나타났다.

이때 쓰는 말이 ՅՉՊՙՍ이나 ՌՏՑՖՇ이다. 하나님의 형상,하나님의 이미지로 나타냈다.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영광된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형상으로,하나님의 형태로 보았음을 바울은 여러 곳에서 시사한다. 이 하나님의 형상이란 말은 신약성경에서 바울만 쓰는 말이다. 바울은 아주 자주 사용한다.

하나님의 형상이란 말은 고후 4:4/골1:15 등에 쓰고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형상인 하나님이 맏아들 예수의 형태로 닮아간다. 변화한다는 것을 나타낼때에 ՌՏՑՖՇ란 말을 쓴다(롬8:27/고후3:18/빌3:21 등).

그래서 바울의 기독론에 있어서 하나님이 형상-예수가 하나님의 형상이다.바울의 구원론에 있어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그의 형상으로 변화된다 또는 그의 형상과 같이 된다는 형상의 카테고리가 아주 중요하다. 그런데 신약성경에서 바울의 신학에서만 나타난다. 그런데 바울의 신학에서 아주 중요하게 나타난다. 그런데 이 형상이라는 말은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쓰인다. 대표적인 것은 롬 8:29이다.

롬8:29 ՔՇՒ ՅՉՊՍՏՒ ՔՏՕ ՕՉՏՕ ՁՌՔՏՍ ,ՅՉՊՏՍ 즉 image. 형상을 본받는다고 그랬는데 헬라어 동사는 ՓՕՌՌՏՑՖՏՕՒ (ՔՇՒ ՅՉՊՍՏՒ ՔՏՕ ՕՉՏՕ ՁՌՔՏՍ) ՓՕՌ은 같다는 말이고 ՌՏՑՖՇ는 form이다.

그의 아들의 형상에 일치하도록 본받는다는 뜻이 아니고 일치하도록, 우리 형상이 그의 아들의 ՅՉՊՙՍ에 일치하도록 하나님께서 우리를 예정대로 미리 정했다. 이 구원론이 -예수가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기독론-그리고 우리가 그의 형상에 일치되어가고 변화되어 가고 예를 들면 고후 3:18은 ՓՕՌՌՏՑՖՏՕՒ 대신에 ՌՅՔՁՌՏՑՖՕՒ라고 했다. 변한다고 그의 형태로 변한다고. 빌3:21의 ՌՅՔՁՓՅ՗ՇՌՁՔՉՓՅՉ 변화되어 간다는 말이다.

이런 것이 바울에게 있어서 아주 중요한데 이것은 다음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다'는 신앙고백 다음에 살펴볼려고 하는 것은 '예수가 하나님의 형상이다'는 신앙고백이다. 거기에서 아담 기독론이 나온다. 예수가 마지막 아담이다. 왜?

누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았느냐? 아담이. 그런데 아담이 어쨌냐? 아담이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렸다. 누가 이제 하나님이 형상이냐?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 것이다.

우리 옛 아담적인,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린 우리들이 어떠헥 되는 것이냐? 하나님의 형상을 되찾는 것이다. 그것이 구원이다. 이런 신학이 ՅՉՊՙՍ. 형상이 기독론. 아담 기독론 이것이 다 연결되어 있는데 아담 기독론은 형상 기독론의 일부이다. 이전까지는 거꾸로 볼려고 했다. 형상 기독론이 아담 기독론에서 나온 것으로 볼려고 했다. 그것이 아니고 아담 기독론이 형상 기독론에서 나온다. 이것이 아주 중요하다고. 그런데 그것이 신약성경에서 바울의 서신에 나오되 아주 중요하게 나온다. 그러므로 이곳이 아주 바울적인 신학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런데 솔로몬의 지헤 7:27에 보면 지혜가 하나님의 형상이다. 이것이 무슨 말이냐면 지헤가 하나님의 계시의 중보자라는 말이다. 지혜가 하나님의 형상이니까 지헤를 보면 어떻게 하나님의 형상을 보면 무엇을 알아요? 하나님을 알지. 지혜가 하나님의 계시자라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 솔로몬의 지혜라는 책 7:27에 보면 지혜를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한다.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 같은이'로 보았고 '하나님이 형상'으로 보았다. 그러면 이와 같은 구약성경과 유대교 신학을 전수받은 바울은 이 예수를 어떻게 해석하겠느냐? 지혜의 카테고리로 해석하겠지. 왜? 거기에 알려진 신학에 의하면 지혜가 하나님의 형상이기 때문에 그러니까 예수를 지혜의 카테고리로 해석했을 것이다. 또 자기에게 알려진 하나님의 형상은 누구? 아담이 그러니까 예수를 아담의 카테고리로 해석하기 시작했다.

b) 또 하나는 지난번에 지혜신학을 말할 대 Issuo ben Sirak 24장에 지혜가 모세의 율법,토라에 담겨 있다. 왜? 모세 율법에 하나님의 뜻이 계시되었다. 지혜는 하나님의 뜻을 계시하는 계시자니까 그런데 모세 율법이 하나님의 뜻을 계시하는 것이니까 토라와 지혜가 같은것으로 정확히 말하면 토라가 지혜를 담고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것도 지혜전승의 일부이다.

그런데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왜 교회의 핍박자로 활동했느냐? 십자가에 달린 에수가 바로 율법을 거스린 거짓 메시야로 율법의 의해 저주를 받은(신21:23)자인데 -랍비 신학 교육을 받은 바울에게는 분명한 사실인데 못된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를 주 메시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며 율법이 옳으냐 그리스도인들이 주장하는 예수의 메시야 사상이 옳으냐 이것이 바울에게 alternative이다.

바울은 유대 신학자로서 율법이 옳다고 믿었다. 그래서 율법의 이름으로 예수를 저주하고 예수를 주로 고백한 자들을 핍박한 것이다. 그런 과정중에 다메섹 도성 앞에 다다랐다. 거기서 십자가에 죽은 율법이 저주한 예수가 하나님이 아들로 나타났다. 거기서 무엇을 깨달았느냐? 하나님의 진정한 뜻이-예수가 옳다고 인정하고 하나님의 우편에 높이셨으니 하나님이 진정한 뜻을 계시하는 지헤가 모세 율법에 담겨진 것이 아니라 예수 안에 담겨져 있다. 예수가 하나님이 진정한 뜻의 계시자다. 토라가 하나님의 뜻의 계시자이지만 그것은 아직 완벽되지 않은 부분적인 계시에 불과하다.

예수가 진정으로 하나님의 뜻의 완성된 계시자였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의 계시자인 지혜가 토라에 담겨 있다기 보다는 예수에게 담겨 있다. 이렇게 해서 또 이러한 이유로 다메섹 도상에서 바울은 예수와 토라와 연결짓게 된다. 그래서 바울은 예수를 하나님이 지혜라고 부른다(고전1:30). 예수가 하나님의 지혜라고 부르고 예수가 하나님의 지혜이기 때문에 지혜를 보내어 지혜로 하역므 창조,계시,구원의 agent로 된다는 사상을 예수가에게 적용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이와같은 sending formula를 개발한 것이다.

그런데 바울이 그리스도인이 된 것은 주후 32-34년 쯤이다. 예수가 십자가에 죽고 부활한 것은 30년쯤으로 본다면 바울이 이와같은 다메섹 도상에서 엄청난 계시의 체험을 한 것은 불과 2-3년 사이이다. 그런데 우리가 본 바와 같이 예수를 지혜로 이해하고 지혜라는 카테고리로 해석한 것은 다메섹 도상에서의 체험과 연관된 것을 보니까 뭐라고 결론을 내릴 수 있겠어요? 부활한 예수 그리스도를 지혜로 해석은 것은 다메섹 도상의 체험과 관계가 있으니까 아주 예수의 부활 직후였다-시간적으로-

그래서 우리가 지나번에 본 롬1:3,4 같은 신앙고백은 약 30년 바로 그때 발생한 것이라면 그 신앙고백의 깊이를 더하는 바로 하나님이 아들 다윗의 자손으로 나단의 예언을 성취한 하나님이 아들,메시야,주만이 아니고 선재한 하나님의 창조,계시,구원의 중보자라는 사상은 곧 바로 이어진다. 그래서 내 주장은 바울에 의해서 이어진 것이다.

*요한복음은 바울에 의해서 이루어진 sending-formula와 sending-formula가나타내는 사상. 예수가 곧 선재하는 하나님의 창조,계시,구속의 중보자라는 사상이 교회전체의 신학이 되었다. 그것을 요한이 발달시켰다고 보아야 한다.

그런데 예수를 지혜의 카테고리로 해석하는 것은 예수 자신에게서 역사적인 예수 자신에게서 시작된다. 양식사가들은 공관복음에서 다음과 같은 5가지 Q의 말씀,Q의 자료들을 예수의 지혜의 말씀들이라고 분류한다. ㉠마11:16-19=눅7:31-35㉡마11:25-27=눅10:21-22㉢마11:28-30㉣마23:34-36=눅11:49-51㉤마23:37-39=눅13:34ff) 이것이 소위 예수의 지혜의 말씀이다.

지혜의 말씀들 속에서 예수는 자신을 지혜의 대표로, 지혜의 사자,지혜의 체현으로 나타낸다. 이것이 '마''눅'의 공동자료에 나타난다. 다시말하면 Q자료에 나타난다.

그래서 Q자료를 모든 공동체의 기독론 중의 중요한 기독론이 지혜기독론이다. 예수를 지혜의 선생을 나타낸 것이다. 예수는 구약성경과 유대신학에 있어서 지혜 자체로 나타난 것이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예수를 지혜와 연결시켜서 보려는 운동은 바울과도 관계없이 이미 예수의 가르침 자체로부터 시작되고 예수의 가르침을 바울은 Q공동체-- '마'의 신학이 아주 중요하다. 뿐만 아니라 '요'신학에도 중요해서 심지어 '계'에도 중요하다. '약'에도 중요하다. 지혜 신학디라는 것은 신약성경 자에세 있어 퍼져 있다고 보아야 한다. 그런데 정확히 예수를 지혜의 체현으로 보고 지혜를 나타내는 정도가 아니고. 이렇게 보냄의 형식을 그의 아들이라는 칭호와 더불어 계발해서 그의 에수의 선재사상과 예수의 창조,게시,구원의 중보자임,실행자됨을 누가 가장 먼저 나타냈느냐? 나는 바울이 제일 먼저 나타냈다고 주장하는데 바울의 그런 신학적인 공헌에 직접적인 근거는 다메섹 체험이었고 다메섹 체험후 예수의 가르침의 전통을 보았을 때 바울이 확인 받은 것이었다. 예수의 가르침에 예수 자신이 지혜의 대표로 나타났다. 그러니까 다메섹 도상에서 얻은 신학적인 통찰력, 에수가 바로 지혜이시라는 통찰력이 다메섹 도상 체험 바울이 누구와 사귀었는가? 그리스도인들과 사귀었지, 특히 베드로와 예루살렘에 가서 베드로와 2주일 같이 지냈다지(갈2:21). 2주일동안 무엇을 했겠느냐? 예수의 가르침을 전수 받았다. 그건 다메섹 도상 체험후 그리스도인들과의 교류를 통해서 예수의 가르침을 전수 받았다 . 거기서 바울은 자기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를 지혜로 본 그 통찰력을 확인받은 것이다. 왜? 에수 자신이 지혜로 가르쳤으니까. 그래서 지혜신학이 아주 중요한 주제인데 것의 발전단계에 있어서 바울이 중요한 공헌을 했다고 나는 주장한다.

보냄의 공식에 아들이라는 칭호가 쓰인다. 이 보냄의 공식의 아들이라는 칭호를 볼때에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뜻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할때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냐?

예수가 선재하신 영원한 신적인 존재로서 다윗의 아들로 이 세상에 성육신하신 메시야 되었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계시,구원의 중보자다. 전권대사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이 무슨 뜻? 선재하신 영원한 신적인 존재로서 우리에게 창조,계시,구원의 중보자 되신 분,하나님의 전권대사로서 하나님의 창조,계시,구원을 대행하신 분,실행하신 분이다. 그것이 우리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할 때에 제일 먼저 나오는 의미이다.

내어줌의 형식(giving-up formula)

아들이라는 칭호와 더불어 쓰이는 문장형식이 지난번에 이야기한 sending-formual가 있고 또 내어줌의 형식(giving-up formula)가 있다. 이것은 하나님+아들+(내어)주셨다+목적(구원). 우리에게 가장 잘 알려진 것은 요3:1:'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그의 아들을 내어 주셨다' 바울 서신에 있어서 롬8:22/갈2:20/롬5:10/요1서4:10.

내어줌의 형식은 이 형식이 나올 때마다 주체가 하나님의 사랑이다. 하나님의 사라을 이야기할 때에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우리를 위해 내어주셨다고 되어 있다. 그래서 요3:16에도 '..사랑..그의 아들을 내어 주었다' '믿는다마다 멸망치 않고 다 구원에 들어감' 롬8:32도 마찬가지다.

거기서 바울이 하나님이 사랑으로 고난받는 그리스도인들을 이제 확신시키기 위해서 '자기 아들을 아끼시지 않고 내어주신 이가 그와 함께 모든 좋은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않겠느냐' 갈3:20은 약간 변형된 형태로 바울이 '자기가 이제 사는 것은 스스로를 우리를 위해 내어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산다'고 한다.

내어줌의 형식이 하나님의 아들로 내어준다고 하는데 갈2:20은 하나님의 아들이 스스로를 위리를 위해 내어준 것으로 약간 변형된 형태로 나타나는데 내용을 다 똑같다.

그래서 그때마다 쓰이는 칭호가 하나님의 아들이다. 지난번에 sending-formula에 쓰인 칭호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듯이 롬8:32을 보면 '그의 아들을 아끼시지 않고 내어주신 이가'그 말은 창22:16을 상기시킨다. 거기에 아브라함이 모리아 산에서 하나님께 그의 독생자 이삭을 아끼지 않고 내어줬다. 그래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사랑을 확인하고 다른 대속물을-양을- 준비한 것을 말한다. 거기서 '창'의 주제를 보통 Akeadh Issac이라고 한다. 문자 가대로는 이삭을 묶음이다. 아브라함이 그의 아들을 하나님께 제사로 바치려고 묶었다는 소리이다. 이거이 유대 신학에서는 아주 중요한 주제다. 가령 아브라함의 후손들은 전부 구원받는다는 랍비들의 교리가 있는데 왜냐하면 바로 Akeadh Issac 때문에 그렇다. 아브라함이 그의 아들을 아끼지 않고 바친 것이 이 Akeadh Issac이 아브라함의 후손들의 모든 죄를 덮고도 남는다. 아브라함이 아들을 바친 공로가 후손들의 모든 죄를 덮도고 남는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모든 이스라엘은 구원받는다는 교리가 여기서 나온다. 이것이 유대의 구원론에 아주 중요한 주제인데 우리 신약성경에 예수의 십자가에서의 바쳐짐을 이렇게 Akeadh Issac의 후형적으로 설명할려고 보는 학자들이 있다고 한다. 그것이 바로 롬 8:32에 나타나는 내어줌의 형식에도 나타났다고 하고 가령 G.Vermes-유대인-학자는 요1장에 세례요한이 예수를 보고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한데도 반영되어 있다고 하고 또 1-2곳도 반영되었다고 함. 하여금 아브라함이 이삭을 하나님께 바친 것에 비유했든지 아니했든지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을 하나님이 그의 아들을 우리를 위해 내어주신 것으로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을 표현하기 위해서 내어줌의 형식을 쓴다.

하나님의 사랑의 직접적인 주체가 아닐 때는 내어줌의 형식이 다른 칭호들과도 쓰인다. 가령 롬 4:25/엡5:2 등.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이 주제일 때는 항상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가 쓰인다. 이것이 무슨 말이냐? 하나님의 아들이 하나님의 사랑의 체현(enbodiment)이다. 하나님의 사랑의 계시다. 인류를 위한 하나님의 사랑이 몸으로 나타난 것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지난번에 보냄의 공식에서 우리는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신앙고백을 하나님의 본성에 참여하는 이로서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며 하나님의 전권대사로서 창조,계시,구원의 실행자 노릇을 하는 분이다는 것은 지난번에 이야기 했다.

그런데 이제 '내어줌의 형식'에서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뜻이 '하나님의 사랑의 체현이다'는 뜻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지난번에 내가 롬1:3,4을 갈4:4과 비교하면서 어쩌면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선재하신 태초부터 존재하신 하나님의 창조,계시, 구원의 대행자로서 전권대사로서 인식된 것은 바울에 의해서 시작된 다시 말하면 바울이 초대교회의 신학발전에 한 공헌일 것이라고 지난 시간에 이야기 했는데 왜 내가 그렇게 주장했느냐? 다시 한번 상기하면

우선 그것은 지혜 신학에 의해서 내어줌의 형식이 만들어 졌다고 했다. 곧 예수를 지혜로 예수의 가르침과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체험하고 보니 바로 이 분이 구약성경과 유대교에서 지혜로 불리웠던 분이구나. 지혜로 활동했던 분이다는 깨달음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구약성경과 유대교에서는 조직신학적 카테고리로 말하면 점진적인 계시로,성서신학적 카테고리로 말하면 전승사적 발달에서는 지혜의 활동이라고 하나님께서 지혜를 보내서 지혜를 통해서 세상을 지으시고 가지를 계시하시고 자기 백성을 구원하신다고 했는데 그것이 예수의 자기 계시들, 예수를 통한 더 발달된, 더 많은 더 확실한 계시를 체험하고 나니 바로 그것이 선재하신 예수의 활동이었구나 선재하신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신 활동이었구나 한 것을 깨닫게 되어서 그것을 표현하기 위해서 보냄의 공식 같은 것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 sending formula는 지혜신학의 발달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지난번에 이야기한대로 지혜 기독론은 예수를 지혜로 보는 기독론은 바울 서신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요'에도 중요하고 가령 ՋՏՃՏՒ. 그 찬송시가 전부 지혜 신학이다. 또 공관복음도 중요하고 그래서 Q자료에 나오는 5개의 지혜의 말씀들 특히 '마'에 중요하고 '히1장''약''계'에도 나타나고 신약에 전체에 걸쳐 나타난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초대 교회의 공통된 신학이다.- 예수를 지혜로 보는 것.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개 왜 시점을 바울이 예수를 지혜로 보고 sending formula를 개발해서 이것이 초대교회에 바울이 한 공로로서 이것이 초대교회의 나중에 공통적인 신학적인 유산이 되었다고 주장을 하느냐면 첫째로 바울이 예수를 지혜로 체험한 것이 그의 다메섹 도상에서의 그리스도의 체험과 직결되기 때문에 그렇다. 다메섹 도상에서의 지혜의 체험과 직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다메섹 도상의 사건은 주후 32-35년에 발생한 아주 초대교회의 초기 사건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이 30년에 일어났다면 바로 직후에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그리스도를 체험하는 사건이 일어났는데 지난번에 이야기한대로 바울은 갈 1:16/행9:20에서보는 바와 같이 이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체험한 것을 그의 다메섹 도상에서의 그리스도의 체험의 본질로 나타내고 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 다메섹 도상에서 체험한 그리스도에 대한 칭호이다.

둘째로 바울은 이 에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한다. 그런데 신약성경에서 바울만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한다. 고후 4:4/골1:15/롬8:29 등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한다. 예수를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하는 신학을 바울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기독론적인 주제이다.

ՅՉՊՙՍ(image) 이라는 말과 같이 같는 말이 ՌՏՑՖՇ인데 보통 form으로 번역한다. 가령 빌2:6 같은데. 그런데 ՅՉՊՙՍ 나 ՌՏՑՖՇ는 거의 동의어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형상(image,form)로 보는 기독론과 그의 형상에 ՓՕՌՌՏՑՖՏՕՓՈՁ 한다. 또는 그의 형상으로 우리가 변형된다는 구원론이 바울에게 있어서 중요하다. 예수가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기독론과 우리가 그 형상으로 바뀌어져 간다. 그래서 롬 8:29에 보면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ՅՉՊՙՍ 나-에 같은 형상이 되게 했다'. 또 고후 3:18에 보면 '우리가 수건을 벗은 얼굴로 주의 형상을 보며 그의 형상으로 변형되어 간다(ՓՕՌՌՏՑՖՏՕՓՈՁ ).'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형상인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형되어간다.

또는 같은 형상으로 되어간다는 기독론과 구원론은 바울 신학에 있어서 아주 주요하다. 그래서 물론 아담 기독론과 같은 것이다. 그래서 아담이 상실한 하나님의 혀앙을 마지막 아담 그리스도가 회복해서 그에게 연합된 그리스도인들이 그 마지막 아담 그리스도의 형상에 같은형상이 되어가고 그 형상에 변화되어 간다는 기독론과 구원론이 바울 신학에 있어서 아주 중요하다. 사실은 바울의 구원론은 전부 아담 기독론의 틀을 가지고 있다. 바울에 있어서 이것이 아주 중요하다.

그런데 또 하나 유의할 것은 바울에게만 이렇게 나온다. 바울에게만-신약성경에서-이렇게 나온다.

그런데 바로 솔로몬의 지혜 7:27이나 필로의 여러 책들에서 지혜가 하나님의 ՅՉՊՙՍ이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ՅՉՊՙՍ 이라 할때는 지혜 신학을 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바울은 예수가 어떻게 해서 하나님의 ՅՉՊՙՍ이라는 중요한 기독론적인 통찰력을 얻게 되었느냐? 다메섹 도상에서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보았다. 그래서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본 바울이 그 체험을 곧 자기에게 알려진 신학적인 카테고리 곧 구약성경과 유대교에서 누가 하나님의 형상이냐? 지혜가,아담이. 그래서 다메섹 도상에서의 예수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본 바울이 즉각 예수 그리도를 지혜로,마지막 아담으로 해석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아담 기독론과 지혜 기독론이 바울에게 발달하는데 이 ՅՉՊՙՍ 기독론과 그 ՅՉՊՙՍ에 우리가 같은 형상이 되어간다. 또는 그 ՅՉՊՙՍ으로 변형되어 간다에는 지혜 기독론과 아담 기독론이 같이 작용한다.

그래서 이것도 우리는 바울이 자기의 다메섹 도상에서의 체험과 그리스도를 지혜로 보는 것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한다.

세번째로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또 무슨 체험을 했느냐면 그리스도가 율법의 종결인 것을 체험했다.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 왜 갔느냐?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러 갔다. 왜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할 필요가 있었느냐? 율법에 충성하기 위해서. 갈1:13-15에서 본바와 같이 율법에 대한 열심으로 다메섹에 까지 가서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자들을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는 자들을 붙잡으러 간 것이다. 왜? 갈3:13에 말한 바와 같이 율법은 예수가 십자가에 곧 나무에 달려 죽었으므로 예수에게 저주를 내렸다고 신21:23이 선언한 바와 같이. 이렇게 율법, 토라가 하나님의 저주를 선언한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고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그리스도인들을 율법을 거스리는 자가 분명하다고 확신. 그래서 율법의 이름하에 율법의 열심으로 율법의 진리를 내세우기 위해서 바울은 율법이 저주를 선언한 예수를 그리스도로 주로 하나님이 아들로 고백하는 그리스도인들 핍박하러 다메섹으로 갔다. 그런데 다메섹 도상에서 바울이 무엇을 체험하였는가? 하나님이 예수를 높이신 것을 체험했다. 하나님이 예수를 옳다고 선언했음을 체험했다. 자 그렇다면 율법이 무엇이냐?

율법은 예수에게 저주를 선언했다. 그런데 하나님은 예수가 옳다고 인정하시고 그를 높이셨다. 다메섹 도상에서 바울이 그것을 체험했다. 그러면 바울에게 무슨 깨달음이 왔겠느냐? 예수가 율법의 종결이다(롬10:4). 예수가 율법의 종결이다. 거기서 예수가 율법의 ՔՅՋՏՒ 종결이라는 말이 어떤 의미를 갖느냐? 아주 논란이 많다. 아주 중요한 신학적 논란이다.

율법이 목적이라는 말이냐? 에수가 율법의 목적을 완성했다는 말이냐? 아니면 예수가 율법을 끝장내었다는 말이냐? 주로 이 2가지로 율법이 예수를 통해서 성취되어...예수가 율법의 성취라는 말이냐? 아니면 예수가 율법을 끝장냈다는 말이냐? 2가지 가지고 지금까지 논란이 계속된다. 이 논란은간단한 신학적 논란이 아니고 이 논란에 따라 기독교 신앙을 어떻게 이해하느냐가 결정되는 아주 중요한 논란이다. 나 보기에는 두가지 전부다. 예수가 율법을 성취해서 끝장내는. 그래서 이제 더 이상 모세의 율법으로서 효력을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완성된 그리스도의 법으로 그래서 바울은 ՍՏՌՏՒ ՗ՑՉՓՔՏՕ-그리스도의 법-이라는 말을 쓴다. 고전 8장에서. 하여간 둘다 의미가 있다.

예수 그리스도가 율법을 성취했다. 율법이 하나님의 구원사에 대한 예언으로서 또는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약속의 의미를 갖는 한 율법을 성취한 것이다. 성취해서 더 이상 율법이 독립적인 의미를 갖지 않는다. 그러나 또 율법은 변증법적인 문제가 있다. 바울이 '롬'에서 설명한대로 이것이 생명을 위해서 주어진 것이나 이것이 인간의 육신을 자극해서 인간이 자기 주장할려는 의지를 자극해서 도리어 하나님께 대항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변증법이 인간의 육신을 자극해서 하나님께 대항하게 하는 사단의 도구로 쓰이는 이런 율법은 예수가 종결시킨 것이다. 그래서 성취와 종경의 2가지 의미가 다 있는데 그렇다면 이것이 무슨 뜻이냐? 가령 시락 24장에 유대교에서 지헤가 율법에 담겨 있다고 보았다. 왜? 지헤가 계시의 수단인데 율법이 게시의 수단이므로. 그래서 지혜가 율법 속에서 ,율법으로 체현되었다고 보앴다. 그런데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체험한 것이 무엇이냐? 율법이 완벽한 하나님의 계시가 아니고 율법이 불완전한 하나님의 계시이다. 예비계시에 불과해. 예수 그리스도가 완전한 계시로서 율법을 성취하고 완성시키고 그리하여 종결시키는 예수가 진정으로 하나님의 계시이다. 왜? 율법의 성취,완성,종결이다.

그렇다면 구약신학에서 계시의 수단이라고 보아야 하는 지혜가 과거에 율법을 통해서 부준적으로 불완전하게 체현되었다면 예수 안에서 완전히 나타났다고 보아야 하다. 그래서 아담 같은 율법과의 체험도 우리로 하여금 바울의 다메섹 도상의 체험과 지혜 신학의 연결을 보게한다.

그래서 나는 주장하기를 예수를 지혜의 카테고리로 해석하기를 시작한 것은 바울의 다메섹 도상의 직후이다. 왜? 다메섹 도상에서 체험한 바울의 체험의 내용이 구약성경의 지혜 신학과 이런 식으로 직결되어 있다. 그렇다면 이것은 초대교회역사에서 아주 초기에 신약성경 저자들 중에 우리가 아는 한 유일한 정식신학교육을 받은 신학자 바울이 이 지혜 신학을 발달시켰을 것임이 거의 확실하다.

물론 '마'저자도 랍비 훈련을 상당히 받은 것 같다. 그러나 우리에게 알려지기는 바울이 신학자로 훈련받은 신학자이다. 그래서 나는 바울이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지혜로 identification 하고 지혜의 카테고리로 해석해서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로서 선재하심과 그의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하나님의 창조,계시,구원의 중보자되심의 사상을 발달시켰다. 그것이 초대 교회에 들어가서 초대교회의 공동유산이 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의 체험을 통해서 지혜신학을 발전시켰지만 나중에 바울이 그리스도인이 된 뒤에 가령 베드로 같은 예수님의 제자들을 통하여 얻은 예수의 지혜 말씀들이 지난 시간에 내가 말한 Q자료들, 바울의 지혜 신학 전개에 역사적인 근거로 작용했을 가능성이 많다. 그 Q자료에 나오는 지혜의 말씀들을 다 보면 예수가 지혜로 완전히 identify되지는 않고 있다. 그 말씀들에는 예수가 지혜의 선생으로 또는 지혜의 대표로 나타난다. 곧 예수가 지혜를 나타낸 분으로, 예수가 incorproation으로 나타난다. 이제 예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보았을 때 바울에게는 어떻게 예수가 지혜의 선생을 지혜를 나타내는 분으로 역사적인 예수가 작용할 수 있었느냐? 바로 그분이 지혜자체이기 때문에 지혜를 가르치는 지혜를 표현하는 분이었다. 이렇게 바울은 자기의 다메섹 도상에서의 체험에 근거해서 예수가 지혜임을 깨닫고 그것에 근거해서 역사적인 에수의 지헤의 말씀들을 이해했을 것이고 역사적인 예수의 지혜의 말씀들이 바울에게 지혜 기독론을 펼치는데 있어서 역사적인 근거로 작용했을 것이라고 나는 주장한다.

자 여기서 우리는 또 다음 문제로 넘어가야 한다.

아까 롬 10:4의 유명한 말씀을 근거로 예수가 율법의 ՔՅՋՏՒ이다. 그래서 율법을 성취,마침(종결)이다. 그래서 예수가 지혜의 enbodiment다. 여기서 우리는 왜 바울이 자기의 복음을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로 즐겨 요약을 하는가를 우리가 이해할 수가 있다. 이 예수가 율법의 성취,종결로서 지혜다. 그런데 구약성경과 유대교에서는 지혜가 하나님의 딸이라고 한다. 예수가 지혜로서 지혜는 하나님의 딸이라고한 이유는 여성명사이므로 예수는 남성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한다. 그래서 예수의 지혜 기독론을 표현하는 좋은 칭호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이다.

지혜 기독론을 표현하는 제일 좋은 칭호가 하나님의 아들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는 예수가 구약성경과 유대교에 그러니까 점진적인 계시의 전단계에서지혜로 활동하신 분이다. 또는 지혜의 활동이라고 하는 활동들을 하신 분이라는 말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이다. 지헤가 주로 무슨 일을 했다고? 창조,계시,구원의 중보자 역할을 했다. 구약성경과 유대교에서 지혜가 그런 활동을 했다고 그러는데 사실은 그것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활동이었다. 성육신한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활동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이 지혜신학을 표현하는 칭호로서 어떤 의미를 갖느냐면 율법을 성취하고 종결하셔서 신자들을 죄와 율법으로부터 구속하신 분이다. 하나님의 구속의 사랑을 계시하셔서 인류를 구원하신 분이다. 이렇게 하여 계시와 구원의 중보자라고 생각했던 지혜의 역할을 감당하신 분이라는 뜻을 갖는다.

우리가 여기서 sending formula를 생각해 보자. 갈4:4/롬8:3,4 이 두곳에서 sending formula에서 보는 바와 같이 하나님의 아들이 율법이 하지 못하는 일,율법이 지혜의 enbodiment라 생각했지만 완전한 계시와 구원의 수단이 되지 못해서 도리어 인간을 속박하는 사단과 육신의 수단으로 전락한 상태에서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보내서 그의 몸에서 저를 정죄하고 율법의 정당한 요구가 완성되게 하고 우리를 율법으로부터 구원했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지혜 신학으로 말하면 율법은 지혜의 완전한 체현이 못된다. 율법은 하나님이 계시와 구원의 완전한 수단이 되지 못한다. 그런데 지혜의 완전한 체현을 누가 했는가? 하나님의 아들이.

이런데 하나님의 아들은 무슨 뜻을 가지고 있는가? 율법을 능가하는 하나님의 계시와 구원으 수단, 하나님의 율법을 능가하는 하나님의 완전한 계시와 완전한 구원의 수단이다. 그랫 구약신학에서는 율법의 지혜를 곧 하나님의 계시요 구원자인 율법을 나타낸다고 했는데 그것이 아니고 그것은 불완전한 것이고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가 완전히 나타나게 되었다. 구약성경과 유대교에서는 무엇이 구원의 수단인가? 율법이.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보고 나서 누가 구원의 수단인가?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바울은 자기 복음을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로 정의,요약한다.

갈1:16/고후1:18ff/롬1:2-4,9/살전1:10/행9:20/고후2:18ff 등.

바울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아들은 무슨 뜻? 복음의 정의와 요약을 사용되었을 때 하나님의 아들은 무슨 뜻인가? 율법을 능가한 하나님의 게시와 구원의 수단이다. 곧 구약성경과 유대교에서 말하는 지헤의 체현으로서 율법은 그 지혜를 불완전하게 나타내었는데 지혜가 하나님의 계시와 구원의 중보자이다. 그런데 다메섹 도상에서의 체험에서 예수가 율법의 성취,종결인 것을 깨달은 바울은 하나님의 계시와 구원의 수단을 불완전하게 나타내었던 율법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종결되었으므로 그러므로 하나님의 계시와 구원의 수단인 지혜가 예수 안에서 나타난다. 그때의 예수를 바울은 무엇이라고 지칭한다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지칭한다.

그래서 복음의 요약이나 정의로,바울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를 놀랍게도 복음의 정의와 요약으로 사용하는데 그때에 하나님의 아들은 무슨 뜻이냐면 율법을 능가하는 하나님의 게시와 구원의 중보자-지혜를 체현하는 분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우리의 구원의 수단이 되는 분, 우리에게 하나님을 계시해주고 하나님의 구원을 중보해주는 이라는 뜻이다.

그것은 다른 말로 하면 율법을 지켜서 가능하지도 않는 구원을 얻을려고 노력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내시고 하나님이 내어주신 이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의 구원의 수단이므로 우리는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 또 믿음으로 값없이 받는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아들이 많은 곳에서 복음의 정의와 요약으로 쓰인다.

바울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는 드물게 나오는 칭호다. 그리스도, 주라는 칭호에 비하면 드물게,몇번 안나오는 칭호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가 나오는 곳은 항상 신학적인 논리 전개의 climax에 나온다.

이것이 무슨 말이냐면 바울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를 아주 아껴썼다. 아주 중요한 신학적인 단계에 도달했을 때에 아껴쓴 것이다. 주로 복음의 정의를 위해서 썼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바울이 자기가 다메섹 도상에서 자기가 계시 받은 복음의 내용을 한마디로 하나님의아들이라고 한 것을 이해할 수 있다(갈1:15,6/행9:20).

다메섹 도상에서 바울이 율법의 행위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아들로 구원받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의 딸이라고 생각했던 지혜의 역할을 완전히 성취하신 분이다. 율법이 불완전하게 나타내었던 지혜를 예수 그리스도가 완전히 체현한 분이다. 그러므로 그를 통해서 우리가 구원을 받는다. 이것이 바울의 복음이다. 다메섹 도상에서 깨달은 복음이다. 그래서 갈1:16/행9:20에 바울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느 칭호로 그때 그가 받은 복음을 요약한다. 이러기 때문에 우리는 롬1장에 예수에 대한 유명한 정의가 같은 의미를 가진다.

복음이 무엇에 관한 것인가? 그의 아들에 관한 것이다. 복음을 무엇으로 정의했나? 하나님의 아들로-기독론적인-

롬1:16f에는 구원적으로 정의했다. '복음이 모든 믿는자에게 구원을 주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그래서 지금까지 학자들이 복음의 그 정의가 어떻게 상호 연관되었느냐에 대해서 토론을 했다. 롬 1:16f의 구원론적인 정의는 '롬'전체에 대한 테마이다. 그래서 다음에 나오는 '롬' 전체이 내용을 테마를 펼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기 때문에 대부분의 학자들은 바로 롬 1:16f이 바울의 특별한 복음의 정의라고 롬 1:2-4절까지는 바울 이전의 교회의 복음에 대한 정의인데-그래서 바울의 것이 이건데-그러면 왜 '롬' 첫마디에 자기가 하지 않은 복음의 정의를 하나님의 아들로 하고 있느냐?

자기를 모르는 어저면 자기에 대해 일방적으로 나쁜 소문을 들은 '롬' 교회에 바울이 자기를 소개하면서 자기 복음을자기 사도직을 소개하면서 자기가 초대교회의 교회 공동체 전체의 전승에 확고히 선 사람이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 그래서 '롬' 교인들로 하여금 바울에 대한 의구심을 제거하기 위해서 초대교회의 공통된 복음에 대한 정의를 먼저 인용했다고 대개 주장한다.

그런데 이것이 도무지 옳지 않다. 우리가 무엇을 발견했느냐? 바울이 인용하는 롬 1:3,4만 초대교회의 신앙고백이고 그것의 서문인 2b '복음은 그의 아들에 관한 것이다'는 것은 바울의 말이다. 뿐만 아니라 갈1:16f/고후1:18ff/살전1:10/행9:20에서도 바울은 항상 하나님의 아들로 복음을 정의하고 있다. 그러기 때문에 지금 내가 설명한 대부분이 학자들의 견을 옳지 않다. 바울 스스로 즐겨 복음을 하나님의 아들로 정의하고 있다.

그러니까 롬 1:2-4까지 나오는 복음의 정의와 롬1:16f에 나오는 복음의 정의의 관계는 지금 내가 방금 요약한 그런 식으로 설명해서는 안된다. 이것만 바울의 것이고 이것은 초대교회의 공통된 것인데 바울이 이것을 먼저 인용한 이유는 자기가 초대교회의 공통된 신앙고백위에 초대교회의 공통적인 복음위에 서 있다는 것을 보여주어서 '롬'교회로 하여금 자기에 대한 의구심을 갖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사용된 것이 아니라 사실은 다 똑같은 것이다. 하나는 기독론적으로 정의되고 다른 하나는 구원론적으로 정의되었다.

왜? 하나님의 아들이 무슨 뜻? 율법을 능가한 하나님의 계시와 구원의 수단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이 아들이 율법을 부분적으로 불완전하게 체현한 지혜, 곧 하나님의 계시와 구원의 수단을 완전히 체현하는 분이라는 뜻이 있다고 했다. 하나님의 아들의 뜻이 무슨 뜻? 율법을 능가하고 율법을 대치한 하나님의 계시와 구원의 수단이다. 복음이 무엇이냐?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는 능력이다. 구원의 수단이다. 의미가 둘 다 똑같다. 하나는 기독론적으로 정의되고 있고 하나는 구원론적으로 정의되어 있지만 바울에 있어서 의미가 똑같다.

그런 것이지 전략상 인용하는 것이 아니다.

그 다음에 살펴볼 것은 하나님의 아들은 또 무슨 의미를 갖고 있느냐면 우리를 하나님의 아들을 만드는 분이라는 뜻이다.

갈4:1-7/롬8:1-23에 자세히 쓰여있다.

우리를 율법으로부터 속량하여서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이 사상은 상당히 복잡하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구약성겨에서는 하나님의 아들을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했다.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다. 또 이스라엘의 대표인 왕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다. 또 천사들도.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아들이다.

예수가 아브라함의 자손으로서 하나님의 숙명을 대표적으로 대신적으로 성취한 하나님의 아들이다. 그래서 우리가 믿음으로 하나님의 아들,하나님의 백성의 대표인 하나님의 아들과 연합하면 그의 대표적인, 대신적인 하나님에 대한 하나님의 숙명 성취에 참여하게 된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안에 내포된다. 그래서 예수가 하나님의 백성의 조상이 된다. 우리는 그 가지가 된다-그 안에 내포되어서.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들 곧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 이것을 어떻게 울가 체험하느냐?

믿음을 고백할때, 믿음의 공식적인 고백의 순간이 언제? 세례 때. 우리가 믿음을 고백해서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와 연합함으로 그때에 우리에게 성령이 주어진다. 이 성려이 하나님의 아들의 영이다. 이 하나님의 아들의 영이 우리 가운데서 하나님을 향하여 아빠라고 부르짖느다. 그렇게 하여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을 확인한다.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게 된다.

우리가 믿음을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 하나님의 아들인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 가운데-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거하고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거하게 되는데,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어떻게 거하느냐? 그의 영으로 거한다. 그래서 우리 가운데 거하는 그의 영 곧 아들의 영이 예수의 하나님에 대한 독특한 기도가 뭐라고 했지? 아빠라고 부르게 된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됨을 확인한다. 이것이 이렇게 체험상 나타난다. 믿음을 고백할 때,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름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과 연합했음을 알게 된다.

곧 하나님이 아들이 우리 속에 거함을 곧 하나님의 아들의 영이 우리 속에 거함을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 안에 있게 됨을-연합했음으로. 그래서 그의 아들됨에 참여해서 그의 하나님에 대한 독특한 관계 아빠라는 기도의 부름으로 표현되는 독특한 관계에 참여하게 된다는 것이다. (세례는 공식화 믿음은 그 전에 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르는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됨에 참여한다. 그것은 예수와 더불어 하나님의 상속자가 된다. 예수와 함께 하나님의 상속자가 된다 .상속자가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부요함에 참여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무한한 자원에 참여하게 되어서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같이 된다. 이것이 인간의 피조물성,제한성을 극복하는 길이다. 곧 이것이 구원이다.

질문:로마카톨릭과의 구원관의 차이는?

초대교회의 구원관에 Apotheosis(하나님과 같이 됨) category가 있었다. 이것이 아주 성경적인 가르침이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이 바로 그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오해를 많이 안을 수 있는 가르침이다. 로마의 이교도식으로 특히 신비종교 식으로 오해될 수 있는 소지를 가질 수 있는 것인데 성경적으로 옳게 이해하면 아주 옳바른 가르침이다.

인간의 제한성이 인간에게 근본문제이다. 제한성을 극복하는 것이 구원이다. 구원은 어떤 의미로든지 하나님의 신성에 참여할 때 일어나는 것이다. 하나님의 무한한 신성에 참여할 때, 하나님의 신성에 참여하는 상태가 하나님 같이 됨이다. 문제는 2가지가 있다.

첫째는 어떻게 하나님의 신성에 참여하느냐? 인간에게는 항상 2개의 길이 열려져 있는 것 같다. 인간 스스로 자기 주장하며 스스로 하나님이 되고자 한다. 아담 같이.

그러나 그 길은 역설적으로 인간을 하나님 같이 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이하로 인간을 타락과 고난속으로 전락시킨다. 반면에 이 길은 하나님이 제시하시고 하나님이 보내시고 하나님이 내어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와 연합하는 이 길, 그래서 하나님께 의존하고 순종하는 길. 하나님께 자기 주장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를, 하나님의 은혜의 재현인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받아들이고 하나님께 의종하고 순종하는 이길은 인간의 자율성을 약화시키고 -인간의 자율성이 인간의 가장 중요한 것이지만-인간을 노예화시키는 것같지만 니이체식으로 말하면 인간을 노예화시키는 것 같지만 역설적으로 그것이 인간을 하나님의 무한함에 참여하게 하고 인간의 제한성을 극복하게 해서 하나님 같이 되게 한다. 그러니까 역석이 일어난다. 인간의 자기 주장하는 것은 인간을 인간이하로 떨어뜨리고 하나님께 완전히 스스로을 내어 맡기는 그래서 하나님께 의지하고 순종하는 그 길은 그래서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의 길을 받아들이는 것은 인간의 자율성과 인간의 자기의 힘을 포기하는 것 같지만 그래서 인간을 인간성 이하로 떨어뜨리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것이 인간을 하나님됨에 참여하게 한다. 하나님되게 한다.

그러니까 인간의 하나님되게 하는 방법은인간이 하나님 될 수 있는 길은 인간의 자기 주장에서 스스로 하나님 같이 되고자 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 완전히 의지하고 순종해서 그것이 첫째 중요한 것이고

둘째로 중요한 것은 그것이 연속선 상에서 인간이 하나님과 같이 됨. 구원의 상태가 인간의 하나님 같이 됨인데 그 상태에서 하나님과 동등해질 수 있고 맞먹을 수 있느냐? 절대 그럴 수 없다.

인간은 어떻게 해서 하나님같이 됨. 인간이 하나님께 완전히 의지하고 순종하므로서 하나님과 절대로 좁힐 수 없는 간격을 유지하고 하나님께 완전히 순종함으로서만 인간이 하나님의 무한성에 참여할 수 있다.

그러기 때문에 헬라의 신비종교들과 같이 인간이 어느 정도 입신의 단계에 도달하여 하나님과 같이 되면 이제 자기 마음대로 행세한다 그런 것이 아니다.

인간의 하나님같이 됨은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창조주와 피조물의 올바른 관계를 갖는 상태. 그 상태가 계속되는 한 인간이 하나님과 같다. 그 상태가 무엇이냐? 인간은 하나님께 완전히 의지하고 순종하는 그 상태. 그래서 신약성경에 있어서 그리스도인의 구원의 상태 곧 하나님의 자녀됨의 상태 곧 하나님같이 됨의 상태는 하나님에 대항해서 스스로 무슨 자유를 주장하고 자기 주장하는 상태는 상상할 수가 없다.

그것이 인간이 하나님같이 된다고 하면 우리는 곧장 헬라 신비종교식으로 그렇게 이해하기 쉬운데 그것은 역설적으로 인간을 하나님과 같이 고양시키지 않고 인간이하로 떨어뜨린다. 이런 오해를 배제하고 정확이 히해하면 인간의 하나님같이 됨이 궁극적인 구원이다.

우리 인간의 피조물성,결핍성을 극복하는 것이 곧 구원이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 되어서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의 상속자가 되는데 그 상태에서도 하나님과 인간이 구분이 있듯이 그리스도와 우리의 구분이 있다. 그 구분을 롬 8:29은 어떻게 나타내느냐면 그리스도를 맏아들, 그리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의 동생들로서 그의 형사에 같은 형상이 되어가도록 또는 그의 형상으로 변화되도록 예정받은 자들이다. 다시 말하면 예수는 하나님의 독생자다. 독특한 아들, 독생자란 말은 독특한 하나뿐인 아들이라는 뜻이다.

우리는 그를 통해서 아들됨을 파생받는 우리의 하나님의 아들됨은 독생자를 통해서 중계된 아들들이다. 그래서 구분이 항상 강조되어 있다 .이것을 나타내기 위해서 '요'은 어휘를 달리 한다. '요'에서는 ՌՏՍՏՃՅՍՇՒ ՕՉՏՒ ՔՏՕ ԨՅՏՕ

예수가 독생자다. 유일한 독특한 아들이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를 통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우리들은 '요'에서

ՔՅՊՍՁ(아이들)둁라고 한다. 그래서 ՕՉՏՒ 와 ՔՅՊՍՁ를 구분한다.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됨과 우리의 하나님의 아들됨을 구분한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다. 그의 아들됨에 참여해서 우리가 입양된다. 그래서 우리의 하나님의 아들됨은 예수, 하나님의 독생자를 통해서 중계된 아들들이다.-이런 구분을 분명히 해야 한다.

하나님이 아들됨을 받는다=양자된다=ՕՉՏ ԨՉՓՉՁ=인양된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됨을 중계받는다는 것을 그림으로 말할 때 입양한다고 한다.

질문: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됨으로 하나님의 부요함에 참여하게 되는데 그로 인해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얻을 수 있는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은 무엇인가?

답: 하나님이 모든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들이니까 하나님의 모든 것을 상속받는다. 하나님의 신성에 참여한다. 그런데 이것이 종말론적인 구조를 가지고 잇다. 벌써 혹은 아직의 종말론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다. 우리가 언제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의 신성에 완전히 참여하는가? 완전한 상속자가 되는가? 종말에. 롬 8장이 그것을 말하고 있다.

지금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들 되었짐나 종말에 우리의 하나님의 아들들로서 하나님의 모든 것을 상속받아서 그의 신성에 참여해서 구원이 완성될 때까지는 이 세상에서 게속 고난을 받는다.

이것이 종말론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다. 그러면 지금 현재, 종말에 완성되기 전에,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의 권능과 축복을 상속받는 자로서 아무런 득도 없느냐?

많이 있다. 우리가 벌써 하나님의 아들로서 그러니까 성취된 종말이지. 하나님의 능력,축복을 상속받을 수 있다.

완전히는 아니지만 부분적으로라도. 받는 수단이 기도이다.

여러분들 기도 무엇이라고 시작해요? 아빠로 기도를 시작한다. 그 다음에 아빠로 불러놓고 ..을 달라고 기도함. 우리가 하나님께 달라고 할 수 있는 자격이 어디서 생기느냐? 아빠라고 하나님을 부르니까.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까 달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의 아들됨. 하나님의 상속자됨. 모든 구원은 벌써 그러나 아직의 종말론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다. 종말에 우리가 완전한 상속자가 되어서 하나님같이 됨에 이른다. 지금 그러나 벌써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종말에 실현되는 부분적으로라도 이 하나님의 아들됨의 축복을 체험할 수 있다. 그 체험의 수단이 지금 현재는 기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