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시간에서는 예수의 주권의 투쟁에 관한 부분을 공부했다. 그래서 예수는 교회의 주일뿐 아니라 온 우주의 주이다. 그래서 예수의 주권이 나타나는 장이 교회의 직접적인 활동에서만이 아니고 우주 모든 영역에서 -모든 만물의 역사의 장에서 예수의 주권이 나타난다고 본다.
그러면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공동체 이외에 이른바 세상의 역사의 구체적 과정 속에서 어떻게 그리스도인들이 예수의 주권을 나태내야 하는 가를 인식하고 거기서 구체적인 역사적 과정에서 예수의 주권이 나타날 때 인식하고 그것을 고백할 수 있는가?
그것은 이 세상의 모든 악과 거짓,불의,추악함은 사단으로부터 유래한다고 보듯이 모든 참과 진리,사랑,의,아름다움,평화는 예수의 주권의 선물로 보아야 한다.
그래서 역사의 구체적인 장에서 거짓과 자기가 맞서 있을때-의와 불의,평화와 불의가 맞서 있을 때-이런 곳에서 예수의 주권과 사단의 주권의 투쟁이 벌어지고 있는 것을 인식하고 그 곳에서 예수가 주임을 선포하고 고백하고 예수의 주권에 순종해서 삶으로써 그 주권이 실현되도록- 구체적으로 일하면 진리가 승리하고 의가 펼쳐지고 사랑이 행해지고 아름다운 것이 추악함을 이기고 실현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이것이 이른바 요즘 확대된 선교의 개념이다. 전통적으로는 선교의 개념을 교회가 예수가 주라고 주로 영혼구원의 영역에만 선포한 것으로 해석했는데 하나님 나라의 예수의 주권에 대한 새로운 인식에서 선교의 개념에 대한 확대가 일어났다. 이것게 공헌한 선교 신학자는 Missio Dei에서 출발했지만 사실은 신약성경 신학에서는 예수의 주권에서부터 시작한다. 지금까지 이것에 대한 몰이해에서 지금까지 많은 보수 경건주의 전통에서는 이 선교를 너무 교회의 4 벽안에서만 행해지는 활동을 보았고 즉 예수의 주권을 교회의 4벽 안에 가두는 신학적인 오류를 많이 범했다. 현실적으로 독재하고 압제하는 독재자들에게 악용당하고 그들의 편을 들어서 사회의 정의를 실현하고 자유를 구현하고 인권을 구현하는 적극적인 그리스도인들의 가치를 천명하고 실현하는데 부족했다.
역사의 장이-세상에서 일어나는 사건들-구체적으로 예수의 주권과 사단의 주권에 각축장이라면 사단이 거짓-불의,증오,추착함 등 이런 것으로 우리를 통치하며 죽게하고 예수의 참,진리,정의,사랑,아름다움의 가치들을 실현시키는 예수의 구원이 구체적인 역사의 사건 속에서 그것에 반대하는 악과 맞서 있다.
이건 역사적인 장에서 -예수의 주권과 시단의 주권이 맞서 있는 장에서-예수를 주라고 고백하는 것은 참___의 편에서 투쟁하는 것을 포함한다.
그런데 더 나아가서 선교의 개념이 확대되는 것 까지는 옳은데 이렇게 확대되다보니 항상 그리스도인들은 이원론에 바지기 쉬워서 전에 영혼구원에만 심쓰던 사람들은 사회참여를 해서는 안된다는 식으로 영혼과 몸, 내세와 현세를 구분지어 기독교는 죄용서와 영혼구원만 감당하라는 잘못된 해석이 있었다. 그러나 거기에 대한 반작용으로 역사의 구체적인 장에거 예수가 주임을 고백해야 한다.
예수가 주라는 신앙고백은 당시 가이사거 주라는정치적인 가이사,가이사교에 대한 다분히 정치적인 도전이다. 정치적인 함축의미가 들어 있는 신앙고백이다. 그런 것을 강조하는 신학에서는-에큐메니칼-또 반면에 정치,경제적,투쟁만이 선교로 즉 초월의 평면,내세의 평면-종말론적인 평면은 다 잊어버리고 현재의 정치적 압제가 있는 곳에서 경제적 수탈이 있는 곳에서 투쟁을 함으로 자유,정의,자유를 확립하는 것만이 선교라는 식으로 주장이 진행된다. 이것은 옳지 않다.
예수의 주권은 우리의 실존 전체에 대한 주권이다. 영혼 만이 아니라 현재의 삶 만이 아니라 지금부터 영원까지 우리의 실존 전체에 대한 주이시다. 예수의 주권은 예수의 부활과 높임받음부터 재림까지이며 예수의 주권은 우리에게 무엇을 약속하느냐 하나님이 직접 통치하는 즉 (고전 16:24) 예수께서 모든 악의 세력을 꺾고 하나님께 그의 왕권을 돌려주는 그때까지 계속적으로 종말의 평면과 초월한 평면을 좇아야 한다.
또 하나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구체적으로 정치,경제의 상황 속에서 예수의 주권을 선포하고 예수의 주권을 선포한다는 말은 이 기간(현재의 하나님 나라의 기간)은 하나님 나라가 예수의 주권을 통해서 나타난다. 즉 하나님의 통치를 확립한다는 말인데 이것을 구체적으로 정치 경제 영역에서 확립하고자 하는 운동이 많이 있다.
교회로부터 시작되는 운동들이 많고 정식 교회 기구와 관계 없지만 그리스도인들이 연합체들이 그런 운동을 많이 한다. 도시 산업 선교,민중신학,해방신학운동..
또 교회가 시작하지 않았지만 압제자 파시즘에 대한 민족 해방 전선, 이런 곳에 그리스도인들이 많이 참여한다. 그때에 이런 선교 신학을 가진 사람들이 곧 잘 범하는 오류는 자기들의 운동이 1:1로 예수의 주권 또는 하나님의 주권과 동일시 하는 잘못을 많이 범한다. 즉 자기들의 자기들의 투쟁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를 확립하는 것으로 본다. 자기들의 거짓,불의 와 투쟁하는 것이 정치,경제 현장에서 투쟁하는 것이 하나님 나라를 확립하는 것으로 본다. 그러할 때 이 사람들은 벌써 예수의 당시의 열혈당의 논리에 빠지게 되었다.
그런데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에서 본 바와 같이 예수는 열혈당의 인간의 투쟁으로, 聖戰으로 하나님 나라를 이루다 곧 신정체제를 이룬다는 것에 대해 예수는 반대했다.
하나님 나라를 초월성과 은혜성, 하나님 나라를 우리에게 주시고 인간들은 수동적인 표현-하나님 나라에 들어감. 하나님 나라를 받는 예수는 열혈당의 성전을 통한 신정체제를 구축하고자 하는 그러한 하나님 나라의 개념에 반대하여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께서 확립하는 것이고 인간은 그것에 대한 순종으로 결실이 역사속에서 나타난다고 말한다.
그래서 이런 출발점이 옳은 확대된 선교의 개념을 가진 사람들이 잘못하면 도리어 자기들의 올바른 신앙의 동기에서 시작했지만 사단의 세력과 싸우면서 자기들의 활동이 예수의 주권을 확립하는 하나님 나라를 확립한다는 사상까지도 전개되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모든 구체적인 현장에서 인간의 모든 삶의 투쟁자체도 변증법적인 긴장을 해속할 수 없다. 다시 말하면 예수의 주권에 순종하고자 하는 의지와 사단의 주권에 사주를 받아서 자기 주장 하는 의지의 변증법적 성격을 다 띄고 있다. 그래서 역사의 과정이 이런 변증법적인 긴장을 다 가지고 있다. 예를 들면 불란서 혁명은 인류 해방 역사에서 크게 경축되었지만 이것은 참, 아름다움,정의가 아니었다. 그것은 엄청난 비극과 공포정치만 초래했고 나폴레온이 엄청난 군부독재체제를 낳았고 하나님의 주권을 잊어버린 인본주의적 자산으로 그래서 하나님의 주권을 무시하는 인본주의적 세속화 과정에 박차를 가하는 불란서 혁명이 당시 절대 군주의 불의,압제 하에서 해방시키는 그만큼 우리에게 정의,사랑을 가져온 만큼은 예수의 세상을 다스리는 주권에서 왔다고 보아야 한다. 모든 참은 하나님으로부터 왔다.
불란서 혁명이 가령 절대군주로부터 자유를 얻어냈다면 정의를 구현했다면 그것은 예수의 주권으로부터의 선물로 보아야 한다. 반면에 ___단체가 참,정의...가 아니고 그 자체가 이런 것으로 섞인 것이었다. 이와 같은 모든 인간이 enterpraise가 더 그렇다.
심지어 교회가 하는 활동도 그렇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이 현실정치,현실경제의 과정 중에서 사단의 주권과 맞서서 스스로의 주권을 확립하려면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적극적인 보다 확대된 선교가 있어야 되겠다. 그런데 주의할 점은 항상 비판적으로 해야 한다. 우리의 활동이 사단의 자기 주장할려는 의지에서 나오는 이런 것들에 오염되게 나타나지 않게 하며 항상 비판적이어야 하며 이런 비판적인 태도를 견제한다는 것은 기독교 복음이 ideology가 될 수 없다는 말이다. 마치 현실정치에서 자유,정의,인권을 확립할려고 하는 신학-민중,해방신학-이것이 곧 변증법적 관계 없이 일방적으로 하나님 나라 운동이다. 예수의 주권의 현재적 표현 양상일다라고 동일시 할 수 없다. -이런 변증법적 긴장이 있다.
또 이것이 예수의 주권의 2영역이며 이것이 어떤 관계가 있으며 세상에 예수의 주권이 어떻게 나타나며 그래서 어떻게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의 역사 속에서 예수가 주임을 증거하고 예수의 주권에 순종하는 삶을 사는 것이 어떻게 적극적인 현실 참여 형태로 나타나는가? 선교로 나타나는가를 지금까지 이야기했다.
그런에 이건 예수가 주다는 기독론적이 인식과 더불어 나타나느냐 또 하나의 근대신학사상이 소위 anonymous Christians(익명의 그리스도인),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지 않지만 이미 실제로 그리스도인이다. 이런 것은 로마 카톨릭의 Karl Hahner와 그의 제자들이 개발한 idea둁니데 O.Cullmann도 상당히 긍정하고 있다. 가령 예수가 세상의 주가. 교회는 예수가 주임을 알고 고백하는 사람들의 공동체라면 세상은 예수가 주임을 모르고 사단이 주임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다.
세상은 벌써 예수의 주권 아래 있다. 그래서 예수의 주권의 축복,구원 등 긍정적이인 가치들을 벌써 받고 있는 존재들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그들은 자기들도 모르게 궁극적으로 그들의 삶은 예수의 주권 영역에서의 삶이며 예수의 주권에 순종하는 거이다. 이런 dialectic이 일어나지만 예수가 사단을 이겼으므로 그들도 궁극적으로 사단보다 더 큰 예수의 주권아래 있는 자들이다. 그렇다면 예수의 구원의 축복이 그들에게도 미친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그들이 벌써 그리스도인이다. 다만 그들은 그리스도인인줄 스스로 모른다. 그래서 티벳,아프리카 정글에서 예수를 알지 못하는 사람이 선을 베풀고,참을 발견,사랑을 행하면 그것은 그가 예수의 주권에 순종하며 하는 행위라고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그가 이름없는 그리스도인이다. 이런 신학을 전개한다. 이것은 보편구원론(universalism)으로 연결된다.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므로 선교는 '네가 이미 예수의 주권아래 있는 그리스도인임을 깨우쳐 주는 것'에 불과하다. 그래서 이런 dialectic의 관계가 예수의 주권에 순종하는 쪽으로 좀더 기울도록 일깨우는 것에 불과하다.
이 신학이 종교간의 대화에 효과적으로 활용되었다. 그래서 로마 카톨릭의 Raymond Panikar(인도), Han Kung(한스 퀑) 이런 사람들이 Karl Rahner의 개념을 그런 쪽을 많이 활용하였다. -종교간의 대화-이것이 개신교에도 영향을 끼쳐서 1950년대 에큐메니칼 운동에서 선교를 대화로 규정했을 때 이 신학이 상당히 그 근저에 있었다. 이것은 말할 것도 없이 이들은 신약성경에 예수의 주권에 대한 논리의 연장이라고 주장하지만 우리 신약성경과는 관계없는 신학이다. 세상이 예수의 주권아래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예수를 의도적으로 주라고 고백하지 않는한 그는 사단의 주권아래 있다. 그를 베푼 선,행한 의,발견한 참 등은-그가 사단의 주권아래 있으므로 예수의 주권에 반항하는 것인데-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의 보다 큰 주권에 의해서 억지로 강요되어 이루어진다. 그래서 예수의 주권의 영역을 여기까지 확대하면 이것은 신약의 지지를 받을 수 없다. 로마카톨릭 학자들이 이러한 신학을 할 수 있는 이유는 로마카톨릭의 특징중의 하나가 그리스도의 이름 아래 모든 것을 넣을 수 있다면 그것으로 좋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런 신학이 Raymond Panniker, 인도의 개신교 지도자들에 의해서 어떻게 전개되느냐면 인도,힌두,불교 모두가 그리스도인들이다-자기들은 모르지만-
더우기 예수가 자기 주권을 그리고 거기에 딸린 구원의 은혜를 여기 여러 민족,문화에 그들의 종교를 통해서 베푼다고 확대한다. 그래서 인도 사람들은 그리스도가 힌두교를 통해서 구원하고 태국 사람들은 불교를 통해서 구원한다. 로마카톨릭 신학자들에 의하면 힌두교를 통해서 구원을 이루지만 구원을 주는 자는 그리스도이다. 그러니까 괜찮다. 그래서 로마카톨릭이 그리스도의 후례자로 본류이고 힌두,불교,이슬람교 등을 통해서 예수가 그 민족에게 예수의 주권을 나타낸다.
Anonymous Christians과 같이 가는 개념 하나가 cosmic christ(우주적 그리스도)다. 예수가 교회의 주만이 아니고 우주의 그리스도다. 우주의 주다. 그래서 온 우주에서 자기의 주권을 확립하는 분이다. 이러한 사상을 -예수가 우주적 주라는 사상을 갇조한 나머지 예수를 주로 고백하지 않는 세상의 사람도 이미 그리스도인이라는 신학은 지금 이 세상이 예수와 사단의 각축장이라는 현실을 부인하고 사단의 주권이 해소된 것으로 생각하고 그리스도-일원론으로 변증법적인 긴장을 불법적으로 해소시켜버리는 문제가 있다.
그런데 사단의 권세가 완전히 해소되는 것은 예수의 praousia때이다. 지금 현재는 예수우螁 주권과 사단의 주권이 팽팽히 맞서서 각축을 벌이지만 궁극은 예수가 승리할 것이다. 왜 D-day가 지났으므로 그런데 벌써 세상이 예수의 주권의 영향 아래만 있는 것같이 그래서 세상의 성원들이 예수의 주권에 순종할 수 있듯이 사단의 주권에 더 순종하고 있는 것인데 로마카톨릭 신학자들은 일방적으로 너무 빨리 해소시킨 것이다.
그리스도-일원론은 종말론적인 구도에서 본다면 그리스도의 재림때 이루어질 최후의 승리와 그때 있을 예수의 영광의 참여를 미리 너무 빨리 지금 현재 선포해 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이 신학을 영광의 신학-Theologia Gloriae이다. 사실은 지금 현재가 예수의 구원과 사단의 주권의 각축장이기 때문에 사단은 우리에게 고난을 예수는 우리에게 영광과 구원을 가져오기 때문에 그런데 우리는 세상을 부인하고 살아야 하기 때문에 그 삶은 사실 고난으로 나타난다. 자기 부인으로 나타난다. 그래서 예수의 주권을, 구원을 축복을 맛볼 수 있다. 그래서 현재는 Theologia Cross-십자가의 신학-에 의해서 얻어진다. 즉 현재는 예수의 재림때까지 이전에는 십자가의 신학과 영광의 신학이 교체한다.
그리스도의 주권의 영광에 참여하는 것은 십자가에 동참함-사단과 자신을 부인하고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삶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즉 영광의 신학은 십자가의 신학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그런데 십자가의 신학이 없이 종말에 있을 영광의 신학의 승리만을 너무 조급하게 경축하는 의미가 된다.
이것을 또 triumphalism-이미 예수가 사단을 완전히 다 이겨서 이 세상에서서는 마치 고난은 없고 승승장구하고 그리스도인의 삶이 승승장구하는 삶으로 표현한다. 또 enthusiasm 이라고도 한다-광란주의- 하늘의 축복이 이미 도달했다. 그래서 성령받고,구원받고,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어서 이 세상에서 실재하지 않는 삶을산다-고린도인이 가졌던 신앙이다. 그래서 바울이 자기의 고난을 예로 들면서 그리스도인의 실존은 십자가의 신학에 의한 실존이라고 해서 고난을 강조했다.
오늘날 은사주의 계통에서만 이 영광의 신학이 있는 것이 아니고...중산층 교회. 십자가 신학을 의연하고 영광의 신학에....심지어 에큐메니칼,해방신학 하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이들은 마치 역사속에서 투쟁을 낙원을 건설할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이런 것들이 다른 신학적인 배경을 갖고 있으면서도 똑같은 영광의 신학의 오류를 범하고 있다. 하여간 신약성경에서는 이 세상이 사단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의 각축장으로 보기 때문에 일관되게 사단의 주권의 영역에서 벗어나서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의 영역으로 들어오라고 부르고 있다. 이것이 교회의 선교로 나타난다.
Herrshagts wechsel=Lodship Change 그래서 사단의 주권의 영역에서 회개함으로 벗어나서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의 영역으로 들어오는 주권의 변화를 이루라고 한다. 가령 골 1:13. 흑암의 권세, 곧 사단의 권세 영역에서의 그의 사랑하는 아들의 주권 영역으로 불러왔다. 롬1:5에서 바울은 스스로 모든 민족을 예수의 주권의 영역으로 불려와서 예수의주권에 순종하도록 하는 것이 자기의 사도직을 보았다. 이것은 포기할 수 없는 신약성경의 가르침이다. 이것은 사단의 주권을 배제하고 예수의 주권만을 강조하며 영광의 신학에 도달하며 이미 다 온 세상이 예수의 주권만 나타나는 것으로 하나님 나라의 일이 완성된 것으로 종말에 있을 현사이 이미 다 이루어진 것으로 예수를 주라고 고백하지 않는 사람도 그리스도인 이라고 선포해 버리고 이렇게 할 수없다. 익명의 그리스도인(anonymous christians)가 성립될 수 없다.
다른 것으로 넘어가서
①예수가 주라는 신앙고백은 그러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의 실존에 표징이다(롬10:9/빌2:9/고전12:3)
롬10:9 시인→고백.:ՏՌՏՋՏՃՅՉՍ(호모로게인)는 부르짖는다. 시인한다. 주이름을 부른다는 말.
그가 어떻게 주가 되었느냐? 마음속으로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높이신 것을 믿으면 그때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시키신 것을 믿으면 하나님께서 그를 만유의 주로 삼으셨다는 것을 고백하고 그의 이름을 부르면 구원을 받는다. 이것을 소위 세례 약식(Baptismal formula)초대 교회때, 세례 때 이 고백했던 신앙고백의 형태를 바울이 여기서 인용하고 있다고 학자들은 보고 있다 세례는-믿는 자가 되는 과정의 종결이다- 믿음의 극화, 사단이 주인줄 알고 살다가 예수가 주임을 고백하고 사단을 주인으로 섬겼던 사람이 죽음을 침례로 나타내고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새로운 사람으로 예수의 주권의 영역으로 새로 탄생되는 새로 창조되는 체험을 한다. 그렇게 함으로해서 세례가 그리스도의 교회의 입교 예식이다. 왜냐하면 교회는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사람들이 공동체이기 때문.
우리가 우리를 교회의 일원으로 만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으로서의 표징이다. 그래서 바울은 고전 12:3에서도 그렇게 말한다."누구든지 성령으로가 아니고는 예수를 주라고 고백할 수 없고 누구든지 성령으로는 예수가 저주 받았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우리가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것은 성령의 역사에 의해서 예수가 주라고 고백하는 것이다. 성령이 우리 안에서 역사하는 것을 증명한다.
성령받음의 표징은 예수를 주라고 고백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 신앙고백에 어떠한 핍박의 상황에서도 이 신앙고백을 신실히 견지해야할 것을 고전 12:3은 암시하고 있다. 대개 학자들이 고전 12:3의 이 댓구는 "누구도 성령으로가 아니면 예수를 주라고 고백할 수 없고 누구도 성령으로는 예수가 저주를 받았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은 핍박의 상황에서 나온 것으로 본다. 유대인들에 의한 혹은 로마 관원들에 의한 핍박인지는 논란이 있으나 핍박의 상황에서 나온것으로 본다. 핍박의 상황에서 그리스도인들이 믿음을 많이 부인했던 모양이다. 특히 유대인들은 바울도 다메섹 도상에서 그리스도인을 붙잡아서 신21:23을 들이대면서 나무에 달린 자는 자주를 받았다고 했는데 왜 예수를 주라고 고백하느냐. 만약에 그렇다면 하나님을 욕하는 것이니 너를 죽이겠다. 네가 신21:23에 의해서 예수를 저주받은 자라고 하면 너를 용서해 주겠다는 핍박의 상황에서 예수가 주라는 고백을 철회하고 예수가 저주받았다고 강요를 한 것 같다. 특히 유대학자들이..
이런 상황에서 많은 믿음이 약한 그리스도인들이 일단 더럽히고 나중에 그리스도인 공동체에 돌아와서 변명하기를 '아 그때 그 상황에서 성령이 나한테 그렇게 하라고 일러 주어서 그렇게 했다'고 변명한 상황이 벌어진 모양이다. 그래서 바울이 여기서 못을 박고 있다.
성려을 그런 영감을 안 준다고. 핍박의 상황에서도 그리스도인의 실존은 예수가 주라고 고백하고 그 주권에 순종하는 것이다. 이 신앙 고백으로 신자들은 지금 하나님 우편에 군림하는 예수께 충성을 서약하는 것이고 그의 주권에 순종을 서약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신앙고백은 주 예수 그리스도와 신앙고백을 하는 신자와의 사이에 법적인 관계를 성립시킨다.
이러한 관계가 새로워지고 실제로 체험되는 상황이 예배의 상황이다. 그래서 이 주라는 칭호를 예배에서 일어나는 여러 활동들과 관계있는 칭호이다. 예배때 우리는 예수를 주로 고백하고 부르짖고 그의 임재함을(마라나타) 기도하고 빌고 그 주에게 주권을 행사하도록 빌고 우리를 보호하도록 빌고 예배의 그 주로부터 신분이 _____의 심판을 빌고 그 주로부터 치유함을 받고 이렇게 예배의 여러 활동들과 관계해서 쓰이는 칭호가 주라는 칭호다 . 그거와
②주라는 칭호는 윤리적 상황에서 쓰이는 칭호다.
왜? 예수를 주라고 고백하는 사람들은 스스로를 종으로 인정하며 예수의 주권에 순종하기를 서약한다는 것이다. 순종이 구체적으로 나타나도록 하는, 다시 말하면 윤리의 상황에서 쓰이는 칭호다. 그래서 바울은 주라는 칭호를 윤리적인 가르침이나 또는 교회에 있어서 실제적인 문제와 그리스도인들이 실제적인 행동을 규제케하는 context에서 가장 흔히 사용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바울이 즐겨 쓰는 주안에서(ՅՍ ՊՕՑՉՏՒ)라는 말의 한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가령 빌 4:2 빌립보 교회가 아름다운 교회였는데 거기도 문제가 조금 있었다. 유오디아와 순두게가 열렬한 집사요 바울의 복음의 동역자들로 교회에 큰 공헌을 하는 바울 선교에 큰 공헌을 하는 사람들이었느네 둘이를 중심으로 다툼이 생겼나보다. 그래서 방루이 한 마음이 되도록 권면하고 있다. 구체적인 교회의 문제에서 윤리적인 가르침을 주고 있다. 한마음이 되라고. 주안에서 한 마음이 되라. 그런 context에서 주라는 칭호를 쓴다.
그런데 주 안에서 한 마음이 되라는 소리가 무슨 소리냐? 순두계와 유오디아에게 상기시키는 것으로 너희들이 두 사람 다 예수의 주권아래 있는 사람들이다. 주안에 있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그들이 예수를 주라고 고백한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추구하는 뜻은 주 예수의 뜻이다. 교회를 향한 주 예수의 뜻은 하나이다. 그래서 이 두 사람이 주 안에서 자신의 실존을 재점검하면 곧 자기들이 예수를 주로 고백하고 예수의 주권에 순종하는 종들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깨달으면 그들은 한마음이 된다. 예수의 교회를 위한 한 뜻을 발견하고 그 뜻에 순종하면 둘이 다 한몸이 된다. 그래서 주는 모든 상황에서 그리스도인의 모든 결단의 최종권위를 가지신 분으로 그리스도인들이 그에게 심판을 받을 것이므로 그의 주권자적 뜻에 일치하게 행동해야 한다. 자 이렇게 예배와 윤리와 여기 상황 속에서 주라는 칭호가 쓰인다. 지난번에는 예수의 부활하시고 높임받는 분으로 지칭할 때 주라는 칭호가 쓰인다고 하였다. 또 종말에 영광가운데 다시오실 종말에 심판과 구원을 이루실 분으로 재림과 관계하여 쓰인다. 재림의 성취도 예배롸 관계하여 쓰인다. -오늘 배운 예배의 상황과 연결해서 쓰인다.
③그리스도인들에게 확신과 위안을 주고자 할 때 쓰인다.
예수가 이미 사단의 세력을 꺾고 만유의 주로 군림하시면서 의,사랑,생명으로 통치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그리고 그리스도인들 혹은 교회는 그 주에 속한 자들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어느 상황에서나 겁낼 필요가 없고 도리어 확신을 가지고 기쁨을 가질 수 있다. 왜? 그들의 주가 이미 사단-그들에게 악과 고난을 끼칠려고 하는 -을 이기신 그래서 그들에게 의,사랑,생명으로 충복하고자 하는 분의 백성이기 때문에. 그러므로 그들은 사단이 악과 고난으로 위협하는 순간에도 인간적으로 두려움과 불안한 상황에 처한 순간에서도 주를 부르짖으며 확신과 위안과 기쁨을 갖을 수 있다.
그래서 주 예수는 순종만을 요구하는 분이 아니라 우리를 보호하시고 인도하시며 승리를 주는 그래서 우리가 위지하며 확신과 위안을 얻을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는 주이시다.
빌4:4 빌립보서에서는 '기뻐하라'는 말이 자주 나온다. '빌'에는 사실 기뻐할 일이 별로 없다. 객관적 상황은 바울은 사형선교가 내릴지 모르는 감옥에서 불안한 상황에서 '빌'교회蝥 그 자체대로 엄청난 핍박이 있고 내분이 있고 사실 기뻐할 것이 없는 상황속에서 바울은 기뻐하라는 말을 연거푸 하고 있는데 여기에 주의할 것은 '주안에서 기뻐하라' 여기서 '주안에서'는아까와는 다르다. '주 안에서'가 2가지 경우로 쓰이는 것을 볼 수 있다. 여기서 주는 악과 고난으로 다스리는 사단을 꺾고 이기셔서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는 승리를 주시는 축복을 주시는 만유를 통치하시는 인간의 모든 불안하고 불확실한 상황 속에서 그의 주권을 확립하시고 그의 구원을 이루어 가시는 분임을 싱기시킴. 우리가 그런 분에게 붙들려 있다. 그런 분 안에 있다. 그 분이 우리의 품이 되어서 우리를 품고 있다. 그러기 때문에 사단의 통치하에 있는 인간의 상황은 우리에게 불안,두려움을 일으키지만 그보다 더 큰 힘이 우리를 안고 있다.
누가? 주께서 그 사단의 세력을 꺽은 주가 그러므로 주안에 있음을 상기할 때 우리는 위안,기쁨,확신을 가질 수 있다. 그러므로 주안에서 기뻐하라.
이런때 주는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는 분으로 사단의 세력을 꺾고 승리한 분으로 구원의 주로서 위안과 확신을 주시는 분이다.
④'예수가 주다'는 신앙 고백은 예수의 신성을 깨닥게 하는 신앙고백이다.
지난번에 빌2:9-11에서 본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예수를 지극히 높이셔서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었다' 곧 자기 이름 야웨를 주었다(ࠄࠅࠄࠉ)
그래서 하늘에 있는 천사들이나 땅위에 있는 인간들이나 땅아래 있는 것들이나 온 우주가 그에게 무릎을 꿀고 예배하고 그를 ՊՕՑՉՏՒ라고 하였다.
그리고 예배의 대상이 되었다(이사야 45:23 인용). 야웨 외에는 누구에게도 무릎을 꿇어서는 안된다는 것인데 그 exclusive 조항. 야웨에게만 무릎을 꿇고 예배해야 한다는 조항을 예수에게 적용한다. 왜? 예수가 야웨라는 이름을 받았기 때문. 그래서 예수가 야웨라는 이름을 받아서 주이기 때문에 사45:23에 의해서 그 말이 온 우주 만물의 경배르 鱁받을 수 있다. 이 말은 우리에게 예수의 신성,예수의 하나님 됨. 예수가 하나님의 본질에 참여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가 주라는 신앙고백은 예수의 하나님의 본질에 참여함. 그래서 예수의 신성을 나타내는 말이다. 그러기 때문에 신약성경은 구약성경에서 야웨에 관한 말들을 거리낌 없이 예수에 관한 말로 적용하고 있다. 신약성경에서 구약성경을 인용할 때 구약성경의 맥락에서는 분명히 야웨에 관한 것인데 그것을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의 빛 아래서 보았을 때 그것이 주 예수에 대한 예언으로 이해를 하고 예수에게 적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중에서 대표적인 것이 히 1:10ff인데 여기서 시 102:25ff에 나오는 우주의 창조자로서 야웨에 관한 말씀이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말씀이라고 선언하고 있다. 곧 우주의 창조에까지 참여한 분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내세우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차이를 신약성경은 분명히 유지하고 있다(빌2:9-11). 예수가 주 이름을 받았는데 그가 하나님께서 예수에게 자기 이름, 주라는 야웨를 주었는데 그래서 온 우주가 예수를 주라고 고백하고 예배하게 하였는데 그것이 결국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을 위해서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에서 유래한 것이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인데 이 때에 하나님의 이름을 받은 예수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설정한다면 부자관계로 설정한다. 그래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호칭하고 있다. 예수가 하나님의 본질에 참여하나 하나님과 동시에 다름이 있는데 하나님은 아버지이고 예수님은 아들이다. 그래서 예수의 이름 야웨와 더불어 하나님의 모든 속성들 심지어 창조시의 속성까지고 예수에게 주가 되었으가 (히1:10ff) 단 한가지 칭호인 하나님께 유보되었다-아버지란 칭호. 이 한가지만 제외하고 하나님의 모든 칭호들과 속성들이 모두 예수에게 전가되었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란 신앙고백에 관한 참고도서
*M.Hengel The Son of God
H.Marshall The origines of N.T. christology
E.Schweizer et,al, TDNT Ⅲ pp334-397
O.Cullmann "신약 기독론"-하나님의 아들
김세윤 The orgin of Paul's Gospel 109-166/256-260/315-319
J.D.G Dunn NT christology in the making p12-64
Ⅰ.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신앙고백과 그 의미
1.헬라적 배경
20세기 초까지 종교사학파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가 유대의 메시야적 칭호로 쓰인 흔적이 없다는데서 헬라적 배경을 찾으려고 애를 썼다. 이들은 헬라 사상이 히브리 사상과는 달리 신과 인간의 차이를 강조한 것이 아니고 신을 인간보다 조금 큰 존재로 생각을 해서 현명한 철학자나 이적을 행하는 자들이나 막강한 정치적 영웅들을 신격화하는 일에 착안해서 예수가 이적을 행하고 또 현명한 그르침을 한 지혜로운 인간이었던 점을 헬라적으로 나태내기 위해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신격화해서 칭호하기 시작했다고 추측하며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신앙고백을 전적으로 헬라적 배경을 가진 헬라 교회의 산물이라고 보았다.
그런데 실제로 고대 헬라 문서들을 검토해보면 인간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상은 별로 많이 나타나지 않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 자체도 아주 드물게 나타난다. 또 이적을 행하고 지혜로운 가르침을 하고 막강한 정복행위를 한 알렉산더 등과 같은 군사적 정치적 영웅을 신적인간(ՈՅՉՏՒ ՁՍՇՑ)이라고 지칭한 예가 없다. 20세기 초 오스트리아 Bieler 이래로 ՈՅՉՏՒ ՁՍՇՑ라는 개념을 예수에게 적용해서 이적들을 행하고 현명한 가르침,막강한 정복행위를 한 군사적 정치적 영웅들-초인간적인 힘을 가졌다고 생각하는 자들을 인간인데 신적인 사람이라해서 신격화했다고 보고-Divine man-이러한 사상이 헬라 사상에 많았는데 이것을 예수에 적용해서 '막'기독론은 예수를 신적인 인간으로 나타내는 것이다.
'막'에서 예수가 이적을 열심히 행하는 분으로 나타난다. 막1:1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라'고 시작하고 15장에 있어서 백부장이 '이 사람이야말로 진정으로 하나님의 아들이다'는 것으로 inclusio된 현상을 보고 바로 '막'이 예수는 신적인 인간으로 나타낼려고 한다. 이적을 행해서 스스로를 신적 인간으로 보여줄려고 한다. 그러한 예수를 '막'에서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야 말로 헬라적인 ՈՅՉՏՒ ՁՍՇՑ에서 배경을 가지고 있는 칭호이고 신앙고백이라는 식으로 전개를 했는데 실제로 헬라문서를 살펴보면 E.Schweizer와같이 TDNT의 areicle을 쓴 실제로 W.Von. Martitz가 헬라 문서들을 실제로 survey해 보면 이런 말이 나온 것이 없다. 그 이후에도 헬라 문서를 실제로 survey해 보니까 인간이 하나님의 아들됨이 흔한 사상이 아니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 자체가 드물게 나올 뿐 아니라 어느 곳에서도 ՈՅՉՏՒ ՁՍՇՑ라는 말이 나온곳이 없다. 이것은 Beiler가 만들어낸 말이다.
한동안은 영지주의의 구원자 신학에도 호소를 하고 신비종교에도 호소를 해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신앙고백과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가 그런데서 다 나왔다고 하는데 요새 헬라적 배경이 그렇게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를 나타내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것과 더불어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실제로 신약성경에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가 어떤 문서들에 자주 나오느냐 하는 것을 생각해보면 재미 있다.
바울 서신들로 말하면 '롬''갈'에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가 가장 많이나오고 공관복음에서는 '눅'보다는'마'에 하나님이 아들이라는 칭호가 더 흔히 나타난다.
만약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가 헬라적 종교사적 배경을 가지고 있으면 바울 서신에서 헬라 종교와 헬라 문화와 가장 절실히 씨름하는 편지들에서 이 칭호가 가장 많이 나와야 할 것이다. 바울 서신 중에서 헬라적 종교사,문화사적 배경과 많이 씨름하는 고전후서에-헬라적 종교현상과 가장 많이 싸우는 곳.헬라적 지혜의 이해,헬라적 우상숭배,헬라적 이원론,영과 육에 근거한 이원론,여러가지 윤리적 문제,결혼의 문제,헬라적 이원론에 근거한 육신의 부활의 부인,헬라적인 종교 현상에 의한 열광주의라고 하는 성령과 성령의 은사의 오해로 인한 문제등을 다루는 곳이 고,전후서다.-그렇다면 만약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가 헬라적 배경을 가지고 있다면 헬라적 종교현산을 다루는 고전후서에서 가장 많이 이 칭호가 쓰여야 할 텐데 그러기보다는 유대교의 율법과 율법의 행위와 씨름하는 '롬,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가 가장 많이 쓰인다는 것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는가? 또 이방적인 orientation을 가지고 있는 '눅'보다는 철두철미하게 유대적인 orientation을 가지고 있는 '마'에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가 더 많이 쓰이고 있다는 사실은 무엇을 말하느냐? 이것은 유대에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가 헬라적 배겨을 가진 것이라기보다는 유대교적 배경을 가지고 있으며 유대인들에게 또는 유대교를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에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신앙고백하는 것이 더 의미 있었던 것같다는 것을 시사한다. 그래서 우리들은 헬라적 배경을 작별하고 구약성경과 유대적인 배경을 한 번 찾아보자.
2.구약적인 배경
구약성경에서는 다음과 같은 3가지 존재들에게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를 붙였다.
1)천사들에게 인데 이 때 천사는 하나님의 하늘의 궁정의 시종들로 궁정에서 살며 시종을 드는 존재들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지칭된다.
2)하나님의 언약 백성인 이스라엘을 단수로, 집합명사로 하나님의 아들 또는 개별적으로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 지칭한다. 이것의 고전적인 text는 출 4:22f인데 이것을 언약에 의한 선택의 특별관계에 있음을 나타내고자 함. 그래서 '내가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희가 나의백성이다'는 언약에 의해서 하나님의 이스라엘의 아버지가 되고 아버지로서 이스라엘을 보호,구원하시며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아들로 하나님께 의존하고 순종하는 그래서 하나님의 부요함을 상속받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사는 관계에 있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 부자관계로 나타난다. 이때 이스라엘의 백성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한다.
3)이스라엘의 왕에게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가 부여되는데 이 때 왕은 하나님의 대신으로 하나님의 백성인 하나님의 아들들인 이스라엘을 통치하는 자라는 합법적으로 하나님 대신에 통치하는 자라는 의미로 하나님의 아들이고 이스라엘의 왕을 하나님이지. 하나님 대신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합법적으로 다스린다는 의미에서 하나님의 아들이고 또 하나님의 아들인 이스라엘 백성의 대표자라는 의미로 하나님의 아들이다. 이때 왕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상은 고대세계에서 왕권에 합법성을 주기 위한 형식으로 온 세계의 보펴적인 현상이다.-에집트의 왕인 파라오가 태양신의 아들이라고 보았고 메소포타미아의 바벨론에서도 마찬가지. 중국에서도 황제를 천자라고. 일본의 천황도 태양신의 아들, 한국의 단군 신화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고대세계에 일발적인 현상으로 왕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함.
이것은 왕권의 합법성 정통성을 표시하는 말이다. 그런데 이것이 이스라엘에서는 언약 신학의 틀에서 나타난다. 이때에 왕이 신에 의해서 낳음을 받는 것인데 구약성경에서는 왕을 시2:7 "너는 내 아들이고 오늘 내가 너를 낳았다'인데 낳앗다는 말이 에집트적으로 육신적으로 낳앗다는 문자적으로 이해된 것이냐? 왕이 하나님의 선택과 은혜로 하나님 대신 통치한다는,낳는다는 말은 metaphor로 사용된 바벨론식으로 이해된 것이냐에 대해 토론이 있을 수 있는데 이런 것은 더 이상 재론의 여지 없이 구약성경에 있어서 왕이 하나님으로부터 낳음을 받았다. 낳음을 받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할때 바벨론 식으로 metaphor로 사용되었음을 거의 다 동의한다.
여기서 이 전통에 속하는 것이 나단의 예언이다. 삼하 7:12-16에 나오는 나단의 예언에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다윗의 씨=다윗의 아들'을 택해서 다윗의 왕위에 앉히고 그래서 너의 집을 세우겠다. 즉 다윗 가문을 세우겠다. 그래서 너희 왕위에 앉히고 그를 나의 아들로,하나님의 아들로 삼겠다. 그래서 내가 그의 아비가 되고 그가 나의 아들이 된다.
그리고 그로 하여금 나를 위해서 성전을 짓게 하겠다는 예언이다.
그래서 이제 다윗 왕조를 성립시키는 하나님의 신학이다. 다윗아들이 다윗의 왕위에 오르고 그가 합법적인 하나님 대신에 하나님 백성위에 군림할 수있는 왕이라는 것으로 내세우기 위해서 하나님의아들로 선언하는 것이다. 그래서 여기서 나온 것이 등극시이다. 가령 시편 2:7, 다윗의 아들이 다윗의 왕위를 계승할때, 그가 왕위에 등극할 때 너는 나의 아들이라는 선언이 울려 퍼진다. 그래서 네가 하나님 대신 합법적으로 하나님 백성 위에 군림할 수 있다고 선언이 된 것이다.
그래서 시89:4ff/27ff/대상17:13/22:20/28:6/사9:5,11 등에서 제2나단의 심판이 재해석되면서 역대 이스라엘 왕에게 적용될 뿐만 아니라 미래에 올 다윗왕에게 적용된다. 그러나 솔로몬을 정점으로 해서 퇴락하기 시작하는 다윗 왕조의 실망을 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나단의 신탁을 자꾸 미래의 진짜 왕다운 왕을 기대하는 것으로 미래에 다윗과 같은 성군을 기다리는 소망의 근거로 삼기 시작하는데 그것이 바벨론의 침공으로 완전히 망해서 다윗 왕조가 끊어졌다. 그 뒤에 페르시아의 고레스 왕의 칙령으로 바벨론으로 포로갔던 유대인들이 돌아올 때에 그들을 이끌고 돌아온 사람이 스룹바벨인데 그는 다윗 가문의 왕자다. 그래서 스룹바벨이 성전을 짓는 그일을 두고 나단의 신탁이 성취되어서 다시 한번 다윗 왕조가 재건될 것으로 보고 곧 스룹바벨이 다윗의 왕위에 등극할 것으로 보고 다시 말하면 유대가 페르시아의 식민 통치에 독립하고 해방이 되어서 솔로몬의 태평성대가 새로 이루어질 것으로 보고 스룹바벨과 그의 성전 건축을 중심으로 메시야 사상이 굉장히 일어났다(슥4:6-10/6:12-13)
그런데 스룹바벨도 유명무실하게 끝나고 그가 지은 성전도 솔로몬의 성전보다 훨씬 못하고 유다는 독립은 커녕 계속해서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고 알렉산더에 의해서 멸망하고 알렉산더 후계자들인 톨레미 왕조와 셀류키드 왕조의 통치를 계속 받으므로 유대 사람들은 나단의 예언이 점점 더 종말론적인 미래로 투사하기 시작해서 종말에 올 다윗의 씨, 다윗의 아들,다윗의 가지를 기다리게 된다. 이것이 유대 메시야 사상의 근거를 이루게 된 이유다.
그래서 다윗의 씨, 아들,가지 등이 메시야의 칭호를 이었고 다윗의 씨,아들,가지가 와서 나다의 신탁을 다시 한번 성취해서 다윗의 왕위를 복원하고 그가 이스라엘 백성위에 군림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곧 이방민족들로부터 유대가 독립하는 것을 의미할 뿐 아니라 다윗이 이방민족을 정복했듯이 다 정복해서 이스라엘 백성의 높임을 의미하기도 한 것으로 보아끨.
3)유대교
구약내에서 그렇다면 우리는 이미 유대교 속으로 들어갔는데 유대교에서는 구약성경에서와 마찬가지로 3존재들에게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를 쓰는 전통이 계속된다. 다만 천사들에게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를 부여하는 경향이 약화된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3존재들에게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를 부여하는 전통이 계속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유대교에서 다음과 같은 2가지 아주 중요한 전승사적 발전이 이루어지는데 그 하나는 하나님과 인간들 사이의 중보자적 개념이 발달하고 그리고 binitarianism(二位一체) 이라고 해서 절대적 유신론(absolute monotheism) 가령 신6:4에 쉐마 같은 데 보면 절대적 유일신론인데 여기서 하나님이 이위일체론적인 신론이 발달되고 이스라엘 백성의 신격화의 사상들이 발달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게 어떻게 이루어지느냐? 지혜 신학과 묵시문학에서 발달하는데 가각 지혜 신학에서 하나님의 지혜가 원래는 하나님의 한 속성으로 간주되었으나 점차 독립적인 개체로, 존재로,인식이 되고 인격화 되어서 세상의 창조전에 창조된 선재하는 하나님의 말로 인식이 되고 하나님의 창조와 계시와 구원의 실행자로 인식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보좌 위에 하나님과 같이 앉아 있는 존재로 가령 (솔로몬의 지혜 9:4-10) 그래서 하나님의 어좌에서 하나님에 의해 보냄을 받는 하나님의 실행자,일꾼으로,시온에 내려와서 하나님의 뜻을 계시하고 뜻에 따라 사는 사람들을 지혜롭게 하여 구원에 이르게 하는 존재다.
그래서 알렉산드리아 철학자 philo는 여러 책에서 지혜를 하나님의 딸이라고 부른다. 이것은 구약에서 유대교로 넘어오면서 점점 하나님의 초월성이 강조되었다. -하나님의 거룩성.
그러나 동시에 구약적인 신관은 초월한 하나님의 내재하심-세상에 간섭하시고 역사에 간섭하시고 자기 백성 이스라엘에게 자기를 계시하시고 그들을 인도하며 구원하시는 분-
그러면 초월하신 하나님이 이 세상에 어떻게 오셔서 자기 백성 이스라엘을 보호하시고 구원하시느냐? 내재하시느냐? 이 문제를 해결하기위해서 발달되는 신학 사상이 지혜신학이다. 곧 초월하신 하나님이 자기 지혜를 내려 보내서 자기를 계시하게 하고 자기의 구원 사업을 담당하게 한다. 지혜가 하나님을 계시하고 하나님의 구원을 행할 수 있는 이유는 지혜가 하나님의 한 부분으로 -하나님의 지혜다-그래서 선재하는 것이다. 하나님적이고 하나님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서 동시에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는 실행자로서 세상에 하나님을 계시하고 하나님의 구원을 실행하는 분이다. 그런 의미에서 지혜를 하나님과 구분해서 하나님의 딸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제 딸이라는 의미는 지혜가 히브리어로 ࠄࠈࠗࠛ고,헬라어로 sophia인데 둘다 여성명사이므로 하나님의 딸이라고 한다. 하나님과 분리할 수 없는,하나님의 전권을 가진, 아들,딸의 가장 기본적인 개념은 상속의 개념인데 하나님의 모든 부요함, 곧 신성,하나님의 모든 속성과 권능을 상속받는 존재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모든 신성을 가진 존재라는 의미로 하나님의 딸이다. 하나님의 모든 속성을 가진 자로서 하나님의 모든 뜻을 실행하는 자다. 그래서 하나님의 딸이라고 부른다. 그래서 지혜문서를 보면 지혜와 하나님을 분리할 수 없는 고나계를 강조하는 문구들이다.
그래서 지혜가 보통 하나님의 어좌에 하나님과 같이 앉아있다. 그곳으로부터 보냄을 받아서 세상에 오시는데 시온을 택해서 그곳에 내려와서 거기다 천막을 치고 이스라엘 백성과 같이 어했다. 하나님을 계시하고 하나님의 구원의 뜻을 행했다. 그러면 시온에 하강한 하나님의 지혜가 어떻게 나타났느냐? Sirach24장에 의하면 모세 율법에 스스로를 나타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지혜가 모세 율법(Torah)에 담겨 있다. 그래서 하나님의 지혜와 모세 율법인 Torah와 identify해서 사람들이 어디서 하나님의 지혜를 찾을 수 있느냐? Torah에서.
사람들이 어铽게 해서 지혜가 주시고자하는 구원을 얻을 수 있느냐? 토라를 연구하고 토라를 준행함으로서 그래서 율법을 연구하고 지킴으로서 이렇게 신학이 발전했다. 그러니까 지혜신학의 발전은 근본적으로 초월하신 하나님의 내재성을 청명하기 위해서 발전한 신학이다. 신이 절대적으로 초월만 하면 구원이 일어날 수가 없다. 계시 역사,초월한 신은 동시에 이 세상에 내려와서 자기를 이 세상에 계시하고 또 자기 구원의 뜻을 베풀어야 인간들에게 구원이 일어난다. 이러한 하나님의 초월성과 내재성을 동시에 천명하기 위해서 이것이 동시에 천명되지 않으면 안되는 이유도 그렇지 않으면 계시도 있을 수 없고 구원도 있을 수 없다. 나중에 보겠지만 이것이 삼위일체론적 신론의 가장 근본되는 논거의 시작이다.
지혜 신학이 얼핏듣기에 옛날 사람들의 신화적 이야기 같은데 이것 아주 고도의 신학 용어이다. 하나님의 초월성과 내재성을 동시에 천명하는 언어적 수단이다.
지혜와 같은 것으로 또는 지혜를 담고 있는 율법신학으로 이렇게 하나님과 인간들 사이에 중보의 개념으로 발달하는데 이 중보자,지혜가 이위일체론적 신론을 이미 암시하고 있다. 그런데 이 이위일체론적 신론은 또 묵시문학에서도 발전한다.
∙묵시문학
그것은 가령 겔1:26-28:거기에 보면 에스겔이 하나님의 신현(theophany)을 본다. 전차 위에 하나님의 어좌가 높여 있고 그 어좌 위에 하나님이 사람의 형상으로 나타나있다.
ࠎࠃࠀ ࠄࠀ࠘ࠈࠊ ࠛࠅࠈࠃ:사람의 모습과 같은 형상으로 나타난다.
겔 1:26은 창 1:26을 뒤집어 놓은 말이다.(자기 형상과 자기와 비슷하다는 말이다. ࠎࠌࠕ) 그래서 가령 Von Rad, J.Baur 같은 구약학자는 '창'의 위대한 천명-하나님이 인간을 자기 형상대로 만들었다-은 '겔'에 나오는 것같은 하나님을 인간의 형상으로 체험한 소위 제사장적 전승에 근거를 하고 있다고 한다. 문서설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이것을(?) 제사장 문서라고 한다. 그래서 Theophany는 특히 성전에서 나타나는데 성전이 하나님의 거처이다.-하나님은 보통 하늘에 거처하시는데 지상에 오시면 성전에 거처한다-그래서 성전에서 하나님이 나타난다(사6장). 그래서 성전에서 하나님의 신현을 체험하는 제사장적 체험에서-하나님이 인간의 형상을 가지고 나타남.-
인간이 하나님과 형상에 있어서 비슷함이 있다는 착안에서 이 위대한 천명.하나님이 인간을 자기형상으로 지었다는 천명이 나왔다고 구약학자들은 말한다.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말이 신학적인 토론에서 수없이 여러갈래로 해석되었다 .그런데 이거은 기독교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고 이미 유대 신학에서도 그했다. 랍비 신학과 영지주의 신학도 인간이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의 형상이냐? 인간의 무엇을 두고 하는 소리냐? 에 대한 토론은이미 랍비 신학에서 수없이 여러갈래로 해석되었다. 대표적인 해석은 C.Westermann의 창세기 주석에 나와있다. 인간의 하나님의 형상됨을 하나님은 인식하시고 언어를 사용하므로 relational concept로 보아지고(?) 하나님과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존재로, 인간이 다른 짐승과 달리 하나님과 관계를 맺을 수있는 Quality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본다는 식으로 자꾸 추상화해서 하나님의 형상을 생각하는데 이런 구약학자들의 말이 맞다면 아까 그런 것도 다 포함하겠지만 하나님은 안보이시는 분이지만 보이시기로 한다면 인간의 형상 비슷하게 보이신다. 그래서 외형적인 면에서의 비슷함을 배제할 수 없다.
너무 추상화해서 하나님의 형상을 생각해서는 안된다. 이런 경고를 하고 있다.
그런데 겔 1:26이 하나님이 인가의 형상으로 나타났다고 했는데 겔 1:28은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ࠄࠅࠄࠉ ࠃࠅࠁࠊ)의 나타난 모습이었다 .주의 영광이란 개념, 영광은 하나님의 본질의 표현인데 그런데 하나님이 나타날때 하나님이 엄청난 구름을 동반하고 나타나는데 구름이 하나님의 운반체다.
그때 광채가 빛나는데 이 광채가 영광의 외형적인 표시이다. 영광 자체는 하나님이 본질이 드러나는 상태가 영광이다.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났다는 말은 하나님이 나타났다는 말이다. 하나님의 본질이 드러났다. 그런데 '겔'에서 하나님의 영광이란 말이 하나님과 독립되는 경향이 있다. 점점.
하나님 자신과 독립되어서 하나님을 보여주는 하나님을 계시하는 독립적 개체로 이해가 된다. -'겔'전반에서- 아까의 지헤와 비슷하게 영광이 독립된 개체로 ,추상황된 개념이 아니고,시공을 차지하는 물체와 같이 인식이 되고(hypostatized) 인격화되고 (personfied) 이러한 전승이 좀 더 발달한 것이 단7:13이다. 단 7:9에 하늘에 하나님의 어좌들이 놓이고 하葡님이 거기에 등극하시고-백발이 서성한 옛적부터 게신 노인의 형상으로 나타나시고-내가 또 보니 '한 사람의 아들 같은 이'가 -사람의 아들 같은이는 사람이란 말의 숙어이다- 사람 같은 형상을 가진 하나님이 나타났는데(단7:13) 이가 하나님의 어좌 옆에 앉는다. 그래가지고 이 존재가 하나님으로부터 나라를 받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이것의 해석은 단 7:18ff에 되어 있는데 종말에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나라를 받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
그래서 '한 사람의아들 같은'존재가 종말에 하나님의 백성의 대표로서 해석되었다. 그래서 '한 사람의 아들 같은 이'가 하나님의 어좌 우편에 등극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이 종말에 하나님의 어좌 우편에 등극을 한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래서 여기서 2가지가 나타나는데
첫째는 '한 사람이 아들 같은 이'가 '겔'의 ࠄࠅࠄࠉ ࠃࠅࠁࠊ의 좀더 굳어진 상태, 좀더 독립된,좀더 발전된 상태라고 대개 본다. 그렇다면 '겔'에서 하나님과 하나님의 영광이 하나인데 동시에 2개체로 인식된다.
이 '단'에서도 '옛적부터 게신이가 한 사람의 아들 같다'는 분이 하나인데 동시에 2존재로 인식된다. 그래서 이위일체론적 개념의 발달이 하나 일어났고
둘째는 '한 사람이 아들 같은 이'가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성도들 곧 하나님의 백성의 대표로서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 어좌에 높임받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이것은 apotheosis of Israel-하나님 백성으로서 이스라엘에 하나님 같이 됨.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함. 그래서 하나님 같이 됨의 그 사상을 여기서 나타내고 있다 여기 binitarianism적인 발달은 이제 '겔''단'에 theophany vision-하나님의 출현을 이어 받은 하나님의 출현을 보는 전통을 ࠄࠏࠊ࠘ࠈ-mysticism이라고 한다.
ࠄࠏࠊ࠘ࠈ-신비주의라 하는데 ࠄࠏࠊ࠘ࠈ는 '겔' 1장에서 하나님의 어좌가 놓였던 전차이다. 전차위에 하나님의 어좌가 놓이는 vision을 보는 전통을 ࠄࠏࠊ࠘ࠈ-mysticism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 ࠄࠏࠊ࠘ࠈ-mysticism이 주후 2세기초에(주후 110-135년에 활약한 당대의 가장 유명한 3랍비들이 하늘에 올라갔는데-환상 가운데-그중에 R.Elisha ben Aubjah라는 랍비가 하늘의 궁정에서 하나님을 보고는 '하늘에 두 힘이 있구나'하고 외쳤다.
하늘에는 하나님 한 힘만 있어야 하는데-'힘'이라는 말은 하나님에 대한 별칭이다-두 힘이 있구나.
하나님의 어좌위에 하나님 혼자 앉아 계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그의 또 하나의 신적인 존재-그의 또 하나의 존재를 ࠄࠏࠊ࠘ࠈ-mysticism에서는 metatron이라고 한다.
metatron에 대해서는 어원이 무엇이며 무엇을 의미하느냐에 많은 해석이 있는데 하나님 어좌 뒤에 앉는 존재라해서 metatron이라고 했을 것이다.
R.Elisha ben Aubjah가 하나님과 metatron이 하나님 어좌 위에 같이 있는 것을 보고 지금까지 자기들은 하나님이 한 분이신줄 알았는데 하나님이 2분이시구나. 하늘에 2힘이 있구나 하고 소리를 질렀다 그래서 이것이 유대의 유일신론을 거스린 이단이라고 해서 유대교에서 추출당했다. 그러나 그것과 관계없이 계속해서 하나님의 어좌 가운데 하나님과 metatron이 앉아 있다(Elisha ben Aubjah의 이야기는 바벨로니아 탈무드 15장 A-h.hagiga 15a-에 나온다)
그 다음 우리가 눈여겨 보아야 할 것은-에녹서는 3권이 있는데 1에녹서는 에집트 언어로 보관되어 있어서 예디어피아 에녹,제2에녹은 슬라브 언어로 보관되어 슬라브 에녹,제3에녹은 히브리말로 보관되어 있어서 헤브라이 에녹이라고 함.-
제 3에녹은 AD 4세기 문서이나 그 안에 담긴 전승은 오래 된 것이지만 쓰여지기는 주후 4세기경 쓰여진 책이다. 거기서 metatron을 소야웨라고 부른다.
이런 R.Elisha ben Aubjah 이야기나 제 3에녹의 metatron 전승이나 '겔''단'을 거치는 binitarinism적인 사상의 발달이라고 볼 수 있다.
또 재미있는 문서가 '요셉의 기도'이다. 거기에 이스라엘의 조상 야곱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아들들인 천사들중의 대장이다. 하나님의 아들들인 천사들중의 대장으로서 천사작으로서 원래 하나님의 어좌 위에 앉아 있는 존재인데 야곱 이스라엘 속에 인간으로 나타났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의 조상이 되었다는 사상이 나타난다.
이것과 연결된 사상이 창 28:12의 야곱의 벧엘에 있어서의 꿈이야기에 대한 유대인들의 전설이다. 이 전성은 Targumin-구약성경의 아람어 번역인데 해석을 첨부한 번역이다-에 전부 나온다.
또 랍비들의 창세기 주석 62장에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데 이야기 내용은 -이 이야기 내용은 여러 곳에 많이 나와서 중요한 것을 알 수 있는데-야곱이 에서에 쫓겨서 아버지 집을 떠나 그 어머니 집으로 가는 중에 벧엘에서 피곤해서 잠이 들었다. 그래서 하늘이 열리고 야곱위에 사다리가 놓이고 천사들이 오르락 내리락 했다는 이야기인데 이 이야기는 Tardun과 랍비들의 주석에서 무엇이라고 과장해서 말하느냐면 야곱 이스라엘이 그 아비 집을 떠날 때 천사들이 동행하고 야곱을 호위했다. 그래서 야곱이 벧엘에서 피곤해서 잠이들자 천사들이 야곱의 얼굴을 처음으로 쳐다보고 사다리를 내리고 빨리 하늘로 올라가서 하늘에 있는 다른 천사들에게 야! 너희를 야곱 얼굴 볼 수 있는 절호의 챤스다.하나님 어좌 위에 야곱이 앉아 있는데 또는 야곱의 형상이 하나님 어좌에 새겨져 있다고도 하는데 그런데 하나님 어좌에 앉아 있는 야곱의 형상이 너무 거룩해서 천사들이 쳐다볼 수 없다. 천사들이 늘 야곱의 상이 어떤 것이냐 호기심이 가득했지만 너무 거룩해서 쳐다보지 못하고 얼굴을 가리우고 있었는데 이 야곱의 형상에 똑같은 형상이 지금 벧엘에서 잠자고 있으니 너희들이 빨리 내려와서 구경을 하면 어좌에 앉아 있는 야곱의 진상을 알 수 있다고 하여 천사들이 오르락 내리락 저녁내내 했다.
이런 이야기들이 단 7장과 사상이 똑같은 이야기인데-'한 사람의 아들 같은 이'가 하나님 보좌 우편에 높임 받는 존재인데 종말에 하나님의 백성의 대표인데 그 사상은 무엇을 나타내느냐면 종말에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 어좌 위에 높임을 받음. 그래서 하나님 같이 됨.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함을 나타냄.이같이 다 똑같은 사상을 나타내는 이야기이다. 다 궁극적으로는 언약신학의 표현이다.
언약신학에 의해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곧 하나님의 자녀들로서 하나님과 가장 밀접한 교제를 나누고 하나님의 모든 부요함을 상속받고-하나님의 자녀가 되니까-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는 숙명을 받은 그것이 이스라엘의 숙명이다.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는 것. 하나님의 부요함에 참여하는 것. 그래서 하나님과 가장 밀접한 교제를 나누는 것. 이것이 이스라엘의 숙명이고 그것을 그림으로 나타내면 하나님의 어좌위에 높임받는것 그것이 언약신학이다. 그런데 실제는 갖기는 에서한데 쫓겨 갈바를 알지 못하는 존재다. 다시 말하면 이 사상을 발달시킨 당시 이스라엘은 바벨론,페르시아,헬라,로마에 지배당하고 나라가 완전히 망하는 성전이 부숴진 현실,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하는데 실제는 쫓기고 짓밟히는 존재들이다.
그러나 종말에는 그들의 숙명이 성취될텐데 곧 하나님의 언약이 성취되어서 그 언약에 의한 숙명이 성취될텐데 그 숙명은 하나님의 어좌에 높임받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이스라엘의 숙명이다. 이러한 종말론적 소망,언약신학이 허락하는 종말론적 소망을 이스라엘백성-하나님의 자녀들을 위한 종말론적 소망을 표현하기 위해서 이런 이야기들을 하는 것이다. 옛날 고대 이야기들을 읽으면 다 우수꽝스러운 신화같은 이야기지만 그것이 무엇을 표현하려고 했느냐? 지금 이야기하는 진리를 표현하고자 하는 자기들의 언약신학과 언약 신학에 근거한 소망을 표현하고자 하는 언어 수단이다.
그래서 여기서 우리는 무엇을 발견하느냐면 한편은 지혜 문학을 통해서 한편은 묵시문학을 통해서 유대교에서 새로운 전승사적 발전 이것은 언약신학의 펼침이다. 그리고 유대 신관의 펼침이다. 하나님은 절대적 유일하신 분이나 거룩 초월하신 분이나 동시에 내재하신 분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초월하신 분이 내재하신다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서 이위일체론적인 신개념이 발달하고 이로 인해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중보자 노릇하는 '지혜''한 사람의 아들 같은이''metatron' 같은 존재가 설정된다. 이런 '지혜''한 사람의 아들 같은 이''metatron'은 하나님의 신성에 동참하는 자로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고 하나님의 어좌에 앉아 있는 자로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아서 하나님의 일을 실행하는 실행자 노릇을 한다. 초월적인 하나님의 내재의 수단으로 이용되는 존재이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보자로 설정이 되고 다른 한편으로 언약신학의 표현으로 하나님의 백성, 곧 하나님의 자녀들이 이 세상에서는 쫓기고 짓밟히지만 종말에는 언약대로 하나님의 우편에 높임받아서 하나님의 부요함을 상속받고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한다. 그 사상을 한마디로 말하면 하나님 같이 됨(Apotheosis). 이스라엘이 하나님 같이 됨의 사상을 발달시키는 것. 이것이 유대에서의 하나의 새로운 발전이라면 발전의 씨는 다 구약성경에 있다. (잠8장)
binitarianism의 발전도 '겔''단' 에 그 씨가 다 있는데 그것이 유대교에서 더 펼쳐진 것이다.
두번째는 이스라엘을 전체를 하나님의 아들로 보는 것이 아니고 언약에 충실한 남은자들과 믿음 없는 유대인들을 분리해서 언약에 충실한 남은 자들에게만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를 부여하려는 경향이 점점 발달한다.
야곱의 자손이라고 해서 다 언약의 백성이 아니고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 실제로 언약을 지키는 자들만 언약의 백성이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상이 발달한다. 그래서 지혜문서에 보면 지혜를 받아서 언약에 충성함으로 이들은 지혜를 받아서 야웨를 경외,순종하는 자. 어약을 지키는 자들, 이들만 지헤로운 자이고 의로운 자들로 이들만 하나님의 아들이다(시락4:10/솔로몬의 지혜2:18/5:5/2:13).
이들이 주의 종들이며 이들은 이 세상에서 언약의 충실하지 않은 패역한 자들에 의해서 무시,고난받지만 이들이야말로 하나님의 자녀들로서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의 대상이 된다.
이 사상은 단7:18ff에도 벌써 비춘다. 모든 야곱의 자손들이 모든 이스라엘이 다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성도들만, 종말에 끝가지 언약에 충실한 남은 자들만 구원받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들만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며 구원을 받는 것으로 되어 있다.
A.Philo의 책에 "Confusione linguarorum)의 146장을 보면
"아직까지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칭호를 받기에 합당하지 않은 사람이 있다면 그는 빨리 하나님의 첫아들인 ՋՏՃՏՒ에게로 들어가도록 하자. 이 ՋՏՃՏՒ는 하나니므이 천사들 중에 제일의 장로이며 천사장이다. 그의 이름이 여러가지 인데 '시작''하나님의 이름''하나님의 말씀''하나님의형상으로 지음받은인간''하나님을 보는 존재 곧 이스라엘'등이다." 그러므로 ՋՏՃՏՒ가 하나님의 첫 아들로서 천사장이고 그의 이름이 여러가지인데 그중의 하나가 이스라엘이다. 이스라엘은 야곱의 이름이다. 야곱의 진정한 아들들만 하나님의 아들인데 야곱의 육신적인 아들 중에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림받기에 합당하지 못한 자들이 있다. 이런 잗르은 야곱의날개-이스라엘의 날개, ՋՏՃՏՒ의 날개-속으로 들어가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를 받을 수 있도록 하자. 그럼으로 여기에 육신적인 이스라엘과 진짜 이스라엘,언약의 백성 이스라엘을 분간한다. 이들에게만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가 주어진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 진짜 이스라엘,하나님의 후손이 될 수 있는가? 그이 날개 밑에 들어가는 것. ՋՏՃՏՒ밑에 들어가는 것. ՋՏՃՏՒ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곧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계시에 순종하라는 자가 되라는 것이다. 이런 자들만 하나님의 아들이다.
그래서 이와 같은 현상이 나타나는데 또 한가지 우리가 중요한 2가지 발달이기에 유대교에 있어서 하나님의 아들이 적용되는 상황을 보면
세째 하나님의 영의 힘을 얻어서 이적을 행하는 사람들,또는 신비적인 체험을 통해서 하나님을 본 사람들, 이런 사람들에게도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가 붙었다.
그 다음에 우리가 눈여져 보아야 할 것은
쿰란 문서를 보면 나단의 예언 전승이 멧야적으로 해석이 되어서 다윗의 아들,다윗의 씨,다윗의 가지만 메시야 칭호인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아들도 메시야 칭호로 쓰인 것을 볼 수 있다. 아까 말한 것처럼 최근까지 종교사학파들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는 유대교에서 메시야의 칭호로 쓰인 일이 없다는 단정하에 헬라적 배경을 찾을려고 노력하였다.
그런데 이제 쿰란 문서가 발견됨으로서 4Q Flor 1:1-11 이곳에 나단의 예언이 메시야적으로 해석이 되었는데 다윗의 아들이 하나님의 아들로 곧 메시야가 하나님의 아들로 지칭된 것이 나타난다. 또 1Qs 28a 2:1ff에도 마찬가지다. 4Qps Dan Aa에도 나단의 예언이 메시야적으로 재해석 되었는데 그 곳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이 메시야적 칭호로 쓰인 것을 볼 수 있다(참고:김세윤 The Son of Man as the son of God pp20-22). 그래서 쿰란 문서들이 우리에게 신약성경 전의 유대교에서 나단의 예언의 메시야적 해석 과정에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가 메시야에게 적용되었던 메시야적 칭호임을 증거해 주고 있다.
그러기 때문에 막14:61 같은 곳에 '네가 메시야냐 하나님의 아들이냐'고 대제사장이 에수에게 물음.
지금까지는 이것을 가짜로 보았다. 왜? 메시야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쓰인 일이 없는데 유대교에서 대제사장이 예수에게 '네가 메시야 곧 하나님이 아들이냐'고 묻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래서 다 가짜다.
그런데 나중에 헬라적 배경에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를 예수에게 발달시켜 놓고는 이렇게 예수 당시로 거스러 올라가서 심지어 대제사장 입에 이 말을 넣었다고 했는데 그렇지 않다.
쿰란 문서가 우리에게 무엇을 보여주느냐면 신약성경 전에 유대문서에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가 메시야의 칭호로 쓰인 적이 있다. 그래서 구약성경과 유대교에 아주 풍부한 하나님의 아들 사상을 반영하고 있는데 여기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상적 배경을 찾야어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