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시간에 ՌՁՑՁՍՁՈՁ라는 기도를 중심으로 이것이 종말론적 기도-예수의 parousia를 비는 기도이면서 동시에 예배에의 parousia-예배에 오셔서 임재하시기를 비는 기도다.
그래서 예배라는 것은 종말의 성취라고 볼 수 있다. 예배는 종말에 parousia할 주의 parousia 미리 체험하는 것이고 종말에 있을 하늘 나라의 잔치를 미리 체험하는 것이다. 말씀과 성찬식이 예배의 중심이다. 그래서 예배에서 종말에 주 예수의 parousia와 더불어 있을 심판을 체험하고 또 죄의 용서와 구원을 미리 체험하는 것이 예배이다.
지금까지에서 무엇을 배울 수 있느냐?
주라는 칭호는 예수가 주라는 신앙고백과 주라는 칭호는 예수의 부활과 높임받음 그리고 종말에 올 심판자와 구원자로서의 예수 그리고 마지막으로 예배의 대상,기도의 대상이 되는 예수 이런 3가지 관계에서 쓰이는 칭호이다. 종말에 다시 올 종말론적인 사상을 표현할 때에 주라는 칭호가 쓰이고 그것의 현재적인 성취인 예배 때에 주라는 칭호가 쓰이고 종말론적인 사상과 예배는 무엇을 전제하느냐면 예수가 부활하심으로 하나님께 높임 받아서 지금 현재 주권자로 군림한다는 것을 전제한다. 그래서 주라는 칭호는 3가지의 context에서 주로 쓰이는 칭호다. (그리스도라는칭호는 그의 죽음과 부활이 우리를 위한 구원사건이다. 곧 그것이 그의 메시야적 과업이었다. 그것이 곧 그의 그리스도로서의 과업이었다. 우리를 위한 죽고 부활하심이 그의 과없이었다. 그리스도라는 칭호는 그이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과 관계해서 주로 쓰인다. 그것을 믿는 것이 객관적인 구원의 사건을 주관적인 구원의 사건으로 만든다. 그래서 믿음이라는 말과 같이 쓰인다. 그 객관적인 그리스도의 죽고 부활함에 우리가 믿음으로 연합하고 동참케 해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는 사상을 나타내기 위해 '그리스도와 함께''그리스도 안에'라는 맥락에서 사용된다.)
오늘은 시편 110편의 역할:예수가 주라는 고백에 있어서 시 110편의 중요성.
시110편은 신약에서 제일 많이 인용된 구약성경이다.(시110;1)
롬8:34/고전15:25/골3:1/엡1:20/히1:3/8:1/10:21/벧전3:21/행2:34-35/5:31/7:55/계3:21/마22:44/26:64/막12:36/14:61/눅20:42/22:69 등 이렇게 많이 시110:1이 인용되거나 은유 반영되어 있다. 그래서 이것에서 우리는 시편 110:1이 굉장히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지난 시간에 예수께서 민간 메시야 사상에 대한 비판을 하면서 시110:1을 인용하면서 비판하는 것을 보았다. 메시야가 다윗의 아들 정도로 다윗적인 메시야에 그칠 수 없다. 왜? 다윗이 여기서 메시야를 주라고 부르기 때문에.
거기서부터 시작해서 여기에 나오는 ՊՕՑՉՏՒ가 결정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예수의 부활을 체험한 그의 제자들은 그가 하나님의 대권을 받아서 절대적 권위를 행사한다는 그의 주장-간접 기독론에서 확인-이 옳다고 하나님께서 인정하신 것을 보았고 그래서 그러한 주장에 상응해서 예수를 ࠀࠃࠈ, ࠃࠈ라고 불렀는데 이 주가 하나님의 영광으로 높임받은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의 부활을 시편 110:1에 의거하여 하나님의 우편에 높임 받은것으로 해석하기 시작했다.-부활이 우편에 높임받음이다. 예수의 부활을 시편 110:1에 의거해서 하나님의 우편에 높임받은 것으로 해석하게 된데에는 예수 스스로가 시편 110:1을 자기에게 간접적으로 적용한 것이 중요한 발단이 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막12:35-37에 다윗의 아들에 메시야 사상에 대한 시비와 예수의 산헤드린 재판 때(막14:62)에 예수께서 대제사장과 그의 무리들에게 시편 110:1에 대한 사용이 부활을 체험한 예수의 제자들에게 상기되어서 예수의 부활이 하나님께서 그를 시110:1과 마찬가지로 그의 우편에 높이신 것이구나 깨닫게 된것. 그래서 주라는 칭호는이제 확실히 구약적인 근거를 갖게 되었다(시110:10. 이렇게 됨으로 점점 주라를 칭호는 구약적인 의미로 이해되었으며 예수가 주라는 신앙고백은 구약의 야웨에 대해 나오는 많은 본문들을 예수 그리스도에게 이전하게 되었다. 구약에서 ࠄࠅࠄࠉ를 ࠉࠏࠃࠀ라고 불렀는데 시 110:1의 주가 예수를 두고 말하는 것이 확실히 이해되자 점점 구약의 다른 곳에서 주라고 읽을 수 있는 야웨에 관한 본문들을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본분들로 이해하게 되었다. 이것이 어떻게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가 정확히 설정이 되었는가를 겔 2:9-11에 잘 그려져 있다. 여기 보면 하나님께서 예수에게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일므을 주었다. 모든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은 하나님의 이름 자체, ࠄࠅࠄࠉ, ࠉࠏࠃࠀ ՊՕՑՉՏՒ를 예수에게 주었다. 그래서 예수의 이름에 -하나님의 이름,ՊՕՑՉՏՒ-에 무릎을 꿇게 하고 천사들이나 땅에 있는 것(인간) 땅아래 있는 것(악령들)이 무릎을 꿇게 했다. 그리고 모든 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고백하게 했다. 여기서 무릎을 꿇는다. 혀로 고백한다는 것은 사 45:23에서 왔다. 이것은 야웨 이외에는 다른 어떤 신에 무릎을 꿇어서는 안된다. 무릎을 꿇는다는 것은 예배한다는 것이다. 야웨 외에 다른 어떤 것에 예배하고 그를 주로 불러서는 안된다. 바로 그 말을 예수에게 적용했다.
예수가 야웨 이름을 갖었으므로 하나님 스스로가 자기 이름 야웨 곧 아도나이,ՊՕՑՉՏՒ를 예수에게 주었으므로 사 45:23이 원래 의도했던 예외 규정이 아니고 예수 에게만 적용되는 규정이 된다.
그래서 온 우주가-하늘에 있는 것들이나, 땅위에 있는 인류나,땅아래 있는 악령들- 예수에게 무릎을 꿇고 그를 주라 고백하게 하였다. 왜? 그가 야웨 이름을 받았으므로.
그래서 그가 주로 고백되고 예배되게 되었다. 그런데 그것이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는것이다. 여기서 아버지라는 말이 나옴으로-이 주 예수- 하나님의 이름을 받은 주 예수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부자로 설정이 되었다. 그것의 함축 의미는 예수는 아들로서 아버지의 이름을 상속받았다.
그래서 아버지의 이름 주를 물려받게 되었다. 아버지 하나님에게만 해당되는 예배를 에수 그리스도가 받게 되었다. 이러헥 관계가 설정되었다. 물론주 이름과 더불어 하나님 아버지의 전권을 이양 받게 되어 예수가 만유의 하나님 아버지 대신에 그의 대권자로 군림하는 분이 되었다. 비슷하게 딤전 3:16도 이러한 사상을 가르쳐줌.
그래서 시 110이 야웨가 메시야인 내 주께 이르기를 내 오른 쪽에 앉으라... 고 말한 말히 예수의 부활과 더불어 성취된 것으로 보고 그렇게 함으로써 에수가 하나님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받고 하나님의 전권을 위임받아서 현재에 하나님 우편에 높임 받아서 하나님 대신에 군림하는 곧 하나님의 agent 노릇하는 하나님의 통치를 대신 통치하는 그런 주권자가 되었다.
그래서 그가 예배나 기도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니까 주라는 칭호는 예수의 부활과 높임을 받음과 예수가 부활하여 높임 받으신 분이라고 할 때에 예수를 주라고 한다.
그래서 예배와 기도의 대상이 되신 분이라고 할 때에 예수를 주라고 하고 현재 군림하는 분이라고 할때에 주라는 칭호를 사용하고 종말에 심판과 구원의 완성을 위해서 오시는 분이라고 할 때는 주라는 칭호가 쓰인다. 예수가 주라고 고백될 때 지금 이야기한 모든 것을 의미한다.
예수의 주권은 시간적으로 제한된 것이다(고전15:24). 부활의 순서를 이야기한다. 이제 각각 자기 순서와 계급대로 이루어질텐데 제일 먼저 그리스도,다음에 그리스도에 속한 자들이 그의 재림 때에 부활한다. 그리고 종말이 오는데 그때에 예수께서 현재 군림하는 주가 모든 원수들과 모든공중의 권세 잡은 악령들과 권위자들-모든 악의 세력들-을 무찌른 뒤에 (무찌른 다는 말은 실업자로 만든다는 뜻. 악령들이 인간들을 괴롭히는 일을 못하게 한다. 그들을 무력하게 한다.)
그때에 하나님 아버지께 그의 왕권을 넘겨 준다. 이것의 의미는 예수의 부활과 하나님 우편에 높임-그의 agent가 되었다-받았다. 그래서 예수의 왕권이 주권이 예수의 부활과 높임받음으로 하나님의 주라는 이름과 그의 모든 권능을 위임받아서 예수의 왕권이 시작이 된다. 그런데 언제 예수께서 이것을 하나님께 돌겨주는가? 예수의 재림때 모든 사단을 정복하고 실업자로 만든 뒤에-온 세상을 평정한 후에-아들도 그의 왕권을 하나님께 돌려준다.
그렇다면 예수의 왕권은 한계적이다-하나님의 구원사역에서-예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로부터 그의 재림때까지-모든 악의 세력에 대한 심판과 정복과 온 우주의 평정. 이것은 무엇을 말하느냐하면 온 우주가 사단의 세력 아래서 하나님께 반란을 일으켰다. 인간들은 반란의 와중속에서 하나님께 적대하는데 예수가 군림하여 주권을 행사하는 것은 사단의 세력과 계속 싸워가는 것이라고 볼 수있다. 현재 예수가 주로서 정통성이 없고 스스로 주라고 내세우고 우리들을 자기의 주권아래 넣을려고 하는 사단과 진정한 주 예수님 사이에 격전이 벌어지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예수의 재림과 더불어 결정적인 전투가 벌어져서 악령들을 쳐부수고 반란 상태에 있는 온 우주를 평정해서 그때의 주 예수-하나님의 agent-의 임무가 끝난다. 그 때에 주 예수가 주권을 하나님께 돌려드림으로 온 우주가 하나님과 화목의 상태에 들어간다. 그래서 그 상태는 고전 15:25-28. 아들의 사단과의 투쟁을 통해서 사단의 세력들이 완전히 꺽이고 온 우주가 평정된 상태를 28절에 그리고 있다. 하나님이 그가 지은 만유 안에 있고 만유 안에서 모든 것으로 하나님 만이 절대 주권을 행사하고 자기가 지은 온 우주에 절대 주로 군림하게 도는 그런 상태이다. 그래서 예수의 주권의 기간은 부활과 높임받음, 시110;1이 성취되는 부활과 높임받음부터 그의 parousia와 더불어 사단의 세력들을 꺽은 기간이다.
이 기간을 종말론적으로 말하면 이미,벌써(already)와 아직도(not yet)의 긴장이 있는 기간이다. 이미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부활함으로 사단을 결정적으로 무찌르고 군림하는 기간이다. 의와 사랑과 생명으로 벌써 군림하기 시작했다. 사단이 결정적인 패배를 벌서 당했다. 벌써 예수께서 의,사랑,생명의 통치를 하신다. 그래서 그만큼 그의 의,사랑,생명이 체험되는 시간(벌써) 그만큼 종말의 구원의 실제가 실현된 것이다.(realised eschatology).
그러나 아직도 약간 세상이 계속된다. 사단의 세게가 계속된다.(아직도)
결정적인 패배는 당했지만 완전히 실업자가 되지 않았다. 언데 완전히 실업자가 되는가? 완전히 패배할 때. 그림으로 말하면 주 예수께서 악령들을 발등상으로 만드신 때이다.
고대 근동에 왕이 앉을 때에 발을 괘는 상이 있었는데 상에는 용의 그림이 조각되어 있다. 카오스,암흑,악의 세력을 완전히 정복하고 왕으로 군림한다는 것을 상기하기 위해서 예수가 재림해서 악의 세력들을 자기 발등상으로 만들 때에 악과 고난이 없어지고 의와 평화가 생며이 완성될 것이다. 그것은 예수의 parousia때 온다. 그의 주권이 완전히 성림되어서 세상을 평정해서 그때는 자기 주권을 하나님께 되돌겨 준다. 종말론적인 간장 관계를 보통 D-day V-day라고 말한다.
D-day:전쟁이 결정된 날. 1943년 연합군이 노르망디에 상륙해서 독일군을 결정적으로 무찌른 때. 그러나 그 때는 전쟁이 결판이 났지만 끝난 것은 아니다.
V-day:1945.5.8일 베를린의 함락, 히틀러의 자살, 되네트 제독이 항복.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로 에수가 사단을 결정적으로 무찔렀다. 그러나 아직도 사단의 세력이 예수에게 항거하며 오늘날도 우리가 지금 벌써 군림하는 예수의 의,사랑,생명의 축복을 우리가 누리지만 동시에 악의 지배를 뼈저리게 느낀다. 고난을. 그런데 예수가 재림함으로서 사단을 완전히 쳐 없앨 때 우리의 구원이 완성된다. 다른 그림으로 말하면 사단의 들뼈을 분질렀다. 그런데 이작도 사단이 사지에 힘이 남아 우리를 못살게 굴고 괴롭힌다. 이때에 예수께서 다시 오알때 사단의 사지에 힘까지 다 빼서 실업자로 만든다. 그때 우리의 구원이 완성이 된다.
성경적인 그림은 지금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과 높임 받음으로 지금 현재 예수의 의,사랑,생명으로 살 수 있는 축복을 첫열매라고 말한다.(ՁՐՁՑՇ :고전 15:23)
우리가 구원의 첫열매를 받았다. 이것을 첫맛(foretaste) 이라고 한다.
첫 열매인 우리의 구원의 완성을 전체적인 수확이라고 한다. 첫열매는 얼마 있지 않으면 모든 것을 수확할 수 있다는 것을 보장한다. 그래서 첫열매는 보증금 노릇을 한다.
그래서 벌써 군림하는 주로부터 우리가 첫 열매를 받았는데 첫열매는 종말에 있을 완성된 구원-전체 수확에 있을 보증이다. 그런데 구원의 첫 열매와 종말에 완성될 구원의 보증금 노릇하는 것이 대표적으로 성경이 그러하다. 그래서 바울이 성령을 구원의 첫 열매라고 하고(롬8:23) 또 종말에 있을 구원의 보증이라고 한다(고후1:23/5:5/엡1:14). 그런데 예수의 주권의 기간은 종말론적 긴장 벌써와 아직의 긴간이 나타나는 기간이면서 동시에 교회의 성교의 기간이다. 교회의 선교의 본질을 여기에서 알 수 있다.
선교의 본질을 세상에서 아직도 사단을 주로 섬기는 인류에게 사단이 주가 아니고 예수가 주다고 선포하는 것이 교회이다. 사단이 주가 아니고 예수가 주라는 것을 선포해서 세상,사단의 주권에 있는 사람들-악과 고난으로 다스리는 사단의 주권에 있는 사람들-을 의,사랑,생명을 다스리는 예수의 구원의 영역으로 불러오는 것이 선교이다.
그리스도인은 사단의 주권을 부인하고 예수가 주라고 고백함으로 예수의 주권의 영역으로 들어오는 사람이다. 그래서 골 1:13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흑암의 권세-사단의 암흑과 악의 권세의 영역에서 건짐을 받아서 하나님의 아들-의,사랑,생명으로 다스리는 예수의 주권으로 들어오는 사람들이다.
이것이 예수가 주라는 선포를 통해서 이루어지는데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진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단의 영역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영역으로 옮긴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래서 초대교회에서 세례때 신앙을 고백할 때 가령 롬 10:8 네가 네 입술로 주라 고백하면 부르짖으면 -우리말의 신인한다는 말이 조금 약하다-네 심장으로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시킨 것을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
그래서 세례때 중심되는 신앙고백이 예수가 주다인데 이것은 사단의 주권을 부인하는 것을 전제했다. 그래서 초대교회에서 세례 때 에수가 주라는 고백을 하기 전에 '네가 사단의 주권을 부인하느냐?'는 물음을 먼저한다. 그래서 '예'하면 '네가 예수를 주로고백하느냐'하는 형식을 갖는다. 사단의 주권을 부인한다. 지금까지는 사단을 섬기고 사단의 주권아래 자기를 주장해서 죄를 짓는 노릇을 했다. 사단의 주권 영역에 있었으나 사단을 부인함으로 예수가 주라는 고백을 한다. 이것이 회개이다.
사단에게 바쳤던 삶을 청산하고 예수를 주로 고백함으로 주권의 변동이 일어났다. 소위 권의 변동이 일어났다. E.Kasemann은 이것을 중요시함. E.kasemann이 이것을 중요시한 것은 전통적으로 개혁신학에서 구원을 의인됨으로만 설명하면 너무 인간 중심이 된다. 의인됨(justification) 자체가 사단의 주권의 영역으로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영역으로 들어가서 예수의-하나님의 대권자 노릇하는 예수- 뜻에 순종함으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원래 하나님이 의도했던 하나님과 인간의 올바른 관계에 들어갔다는 것이 의인됨인데 예수의 주권은 생각지 않고-주권의 비중은 생각하지 않고-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았다 하면 항상 그 사고가 인간중심이 된다.
그래서 의인됨이라는 선물만 강조하지 그 선물을 주신 이 하나님에 대해서는 망각하기 쉽다. 그러나 우리가 사단의 영역에서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예수의 영역에 들어가서 비로서 창조주 하나님과 그 하나님께 순종하는 올바른 관계에 들어가서 의롭다함을 받는다. 그래서 주권의 변동의 개념을 강조함으로 우리 사고에 있어서 원래의 올바른 우선순위가 된다.
먼저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될 것은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는 giver 하나님,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그가 우리에게 선물을 주신 분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신학사에서 Bultmann 신학이 너무 인간중심의 신학인 것에 반발하여 그의 제자인 E.Kasemann이 주권의 변동 개념을 강조함으로써 하나님 중심,그리스도 중심의 사고방식을 일깨울려고 했다.
그래서 구원이라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함을 받는다. 그래서 의인이 된다로도 설명할 수 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우리가 주권의 변동을 이루는 것이다.
이 사단의 주권 밑에서 해방이 되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의 영역으로 들어 갔다. 이것은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의지하고,순종하는 올바른 관계에 들어가는 것이 우리에게는 의롭다함을 받는 선물이다.
예수의 주권은 두 영역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①예수는 세상의 주,만유의 주와 빌2:9-11에서 하늘에 있는 것들이나 땅위에 있는 것들이나 땅아래 있는 것들이나 온 우주가 그의 주권의 영역이다. 옛날 우주관은 3층 우주관이다.-하늘,땅,지하-
②예수는 그의 교회의 주이다. 그래서 온 우주와 교회 두가지가 주의 2개의 주권의 영역이라고 볼 수 있다. 2주권의 영역들은 2개의 동심원으로 나타낼 수 있다. 겉은세상, 안은 교회. 세상과 교회의 다른 점은? 세상의 예수의 주인줄을 모르고 사단을 주로 섬기며 예수의 주권에 순종하지 않고 도리어 예수의 주권을 거부하는 것. 교회는 세상에서 예수가 주임을 알고 고백한 사람들의 공동체가 교회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예수의 주권을 고백한 사람들의 공동체이므로 예수의 주권에 대한 순종이 더 많이 일어나는 그러므로 예수의 주권이 더 집중적으로 나타나는 영역이다.
그러나 세상이나 교회에서는 다 변증법적 관계가 일어난다. 세상은 예수가 주인줄 모르고 거기에 대해서 항거하는데 예수가 사단을 이긴 주이기 때문에 세상의 불순종을 이용해서까지라도 자기의 뜻을 관철하고 만다. 세상 역사를 다스리는 분이다. 그런데 세상은항상 주의 주권에 불순종한다. 그러나 예수는 이미 사단을 이긴 주로서 세상의 불순종을 이용해서까지라도 자기의 뜻을 관철시킨다.
반면에 교회는 에수가 주라고 고백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예수의 주권에 완전히 순종하지 못한다. 가래서 교회가 죄가 많고 혼잡하다. 그래서 세상에서나 교회에서나 dialectical relationshil 예수의 주권을 거부하지만 예수가 그의 불순종을 이용해서까지라도 그의 주권을 나타낸다.
반면에 교회는 예수를 주로 고백하면서 주의 뜻을 불순종하고 거역할 때가 있다. 그러니까 긍정과 부정,부정과 긍정이 나타내는 것이 세상이나 교회나 원칙적으로 마찬가지이다. 다만 세상과 교회에서 주의 주권에 대한 순종이 어떻게 다르냐?
①교회는 예수의 주권을 알고 순종하고 알면서 불순종하다가 주 예수의 심판과 통치로 할 수 없이-주 예수께서 그의 뜻을 성취하고 만다 왜? 그가 주권자이므로-그래서 성취되는 것이 교회라면
②세상은 주의 주권에 무지하거나 의도적으로 반역해서 예수의 주권의 힘으로 다스림을 받아서 세상을 통해서 예수의 주권이 성취된다. 이것이 차이점이다.
농도-예수의 뜻이 관철되는 농도에 있어서 주권이 나타나는 농도는 어쩜 교회가 더 진하다. 그런 것이 차이다.
이런 관계에서 최근에 유행된 여러 선교 사상이 나오는데 하나는 nissio Dei(하나님의 선교)라는 개념. 하나님이 이 세상에 그의 아들을 통하여 오신다. 그리고 자기의 뜻을 관철한다. 세상을 이원론적으로 생각해서는 안된다. 교회아 이 세상이 완전히 다른것으로 생각해서는 안된다. 교회도 세상도 예수의 주권아래 있고 하나님의 선교의 대상이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세상 역사가 구원활동의 장이라 또는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이 행사되고 관철되는 장이다. 꼭 교회만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이 행사되는 영역이 아니고 교회 역사만 예수의 주권이 행사되고 펼쳐지는 장이 아니고 이 세상 역사 전체가 하나님의 구원의 대상이고 선교의 대상이다. 교회에서 일어나는 사건에만 예수의 주권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삶 전체에 주의 주권이 나타난다. 즉 이 세상의역사 가운데에서도 예수의 의,진리,사랑으로 다스리는 주권이 악,고난,거짓으로 다스리는 사단의 주권과 더불어 각축을 벌이는 것으로 본다. 그래서 의의 세력이 악의 세력이 싸울 때에 의이蝡 세력은 설령 그리스도인이 아니고 교회에서 일어나지 않고 예수를 전혀 모르는 사람에 의해서 한 것도 주의 주권의 사주를 받아서-예수가 동원해서 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래서 세상의 어떤 삶의 과정에서도 진리,의,사랑,평화가 승리하면 바로 그곳에 주께서 주권자로 진리,의의 세력을 동원해서 악의 세력과 싸워서 자기 주권을 성취한 것으로 보아야 하다. 그렇다면 교회는 삶의 장에서 의,진리,평화의 세력과 연대하고 그 곳에서 바로 예수가 주다. 여러분들이 에수의 뜻을 관철하는 예수의 군대라고 증언하도록 부름을 받았다. 그것이 교회의 선교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가 주라고 선포해서 영혼 구원만 하는 것이 아니고 삶의 모든 영역에서 진리,의,평화,사랑의 편에 서서 악의 세력은 사단의 세력으로 의를 위해 싸우는 세력을 에수 그리스도의 세력을 증언하고 투쟁에 동참해야 한다. 이렇게 해서 나온 것이 선교에 대한 새로운 이해이다. -이런 신학적 근거로 해서 참여의 신학-도시 산업 선교 등-예수의 주권을 세우기 위한 싸움으로 나타날 수 있다. 지금까지 설명한 것은 다 옳다!! 그런데 이것이 2가지 문제점을 안을 수 있다.
①교회와 세상의 영역을 완전히 없애버리는 것이다.
교회가 특별한 의미에서 예수의 주권이라는 개념이 약화되어 세상에 흡수되어 버린다. 이런 신학을 너무 강조하면 그래서 이런 신학과 선교가 이해가 옳게 지탱되느냐면 교회의 특성:세상에서 불림 받은 자라는 교회의 특성, 세상과 다른 점을 상당히 강력히 유지해야 한다.
②역사속에서 교회의 주의 편에서의 악의 세력과 싸움을 통해서 구원이 완성디薩 것으로 생각하는 것-다시 말하면 종말론이 약화되는,역사 속에서 종말을 희구하는-
역사속에서 교회가 증거하는예수의 주권과 악의 세력이 계속 싸우가지 역사 내에서 가령 이 세상에 예수의 주권이 완성이 된다. 교회가 예수의 주권에 대해서 증거하고 그의 진리,의의,평화,사랑과 평화 편에 싸워서 이 세상에 완전한 의의 왕국,진리,평화의 왕국을 이룰 수 없다. 그런데 해방신학은 그것을 상당히 이룰 수 있는 것으로 나타내는데 역사안에서 종말론을 펼치는데 문제가 있다. 고전 15장에서 본 바와 같이 예수의 재림으로 더불어 사단의 세력이 완전히 꺾어진다. 그래서 종말론이 역사내에서 우리들의 투쟁으로 이루어 질 것으로 보는데에 큰 문제가 있다.
③이와 같이 되면은 에수의 주권을 빙자하지만 교회가 의,진리의 세력으로 거짓 세력과 싸우는 인간이 스스로 투쟁해서 종말을 실현하는 의,평화,자유의 세계를 실현하는 열혈당적 신학이 된다. 인간의 투쟁으로 하나님 나라를 이루고자 했던. 초월적인 예수의 주권자적인 간섭이라기 보다는 인간들이 모든 진리와 거짓,선과 악의 싸움에서 진리와 선의 편은 예수의 주권이 나타나는 것이므로 우리가 덤벼들어 싸움으로서 진리,선을 세운다. 그러므로 예수의 주권을 세운다는 식의 신학이 되면 열혈당 신학이 된다.
인간의 투쟁,노력으로 구원을 이루면 더 이상 구원이 은혜로 이루어지는 초월의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로 선물로 주는 것이 안된다. 이 논리는 보수 경건주의에서는 교정을 가져와야할 성경의 진리이다. 투쟁방법은 말씀과 시위(안식일 병고침,죄인들과 식사 등)로 해야 한다. 비폭력적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