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신학 제 15강

지난 시간에는 사도들이 예수를 그리스도라 하고 고백함에 있어서 Interpretio Christiana라는 것을 설명했다. 그래서 예수의 삶과 가르침과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예수가 메시야 그리스도 하나님의 종말의 구원을 이루신 분이다라는 것을 깨달은 초대교인들은 무조건 유대교의 다양하고 복잡한 그리고 황당무게하기까지한 메시야 사상을 무조건 예수에게 다 전가시킨 것이 아니라 오히여 예수가 메시야라 했을 때 예수의 메시야 됨이 예수의 삶과 가르침을 통해 나타난 예수의 자기 이해와 그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에 의해서 결정되게 되었다. 그러니까 예수가 그리스도라 했을 때 다시 되풀이 하는데 유대교의 메시야 사상을 무조건 예수에게 전가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가 어떤 분이고 무슨 일을 했는가가 그의 메시야 됨의 내용을 채우는 것이었다.

그래서 간단히 말하면 예수가 메시야라 할 때 예수가 하나님의 종말의 구원을 담당할 분인데 그 종말의 구원은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고 대속의 죽음과 새 언약 세운 죽음이어서 우리를 하나님께 화해시키고 우리를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자녀들로 만들어 준다. 그것이 예수의 메시야됨의 행위이고 예수가 메시야라 고백할 때 바로 예수가 그런 일을 하신 분이라. 그 말이다. 유대교이 황당무게한 메시야 사상을 예수에게 적용한 것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가 정치적인 메시야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들은 예수가 메시아라고 유대교의 정치적 메시야 사상에 대항해서 예수를 메시아라고 말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예수가 메시야라고 고백한 것은 예수가 어떤 분이었고 예수가 무슨 일을 했는가에 의해서 정의된 그 메시야를 선포한 그리스도인들이 메시야 사상을 자세히 살펴보면 도리어 예수가 메시야라는 선포가 구약성경의 메시야적인 예언들을 더 심오하게 더 정확히 성취한 것을 발견하게 된다. 이것은 그림으로 말하면 구약성경의 메시야적 예언에서 신약성경에 있어서 예수가 메시야와 그리스도라는 신앙고백이 나온다. 예수의 하신 일과 예수가 어떤 분이다라는데서 나오는데 여기서 자세히 살펴보면 구약성경의 메시야적 예언을 징정으로 성취한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런데 유대교는 같은 구약성경의 뿌리에서 예수와 신약성경의 사상과 달라서 갈라진다. 그래서 시기적으로 말하면 구약과 중간사시대의 유대교와 한동안 같은배경으로 자라서 이것이 주전/주후 를 나누는데 예수가 어떤 분이었고 무슨 일을 했는가에 의해 결정되는데 이것을 뒤돌아 볼 때는 이 신약성경에 예수가 메시야라는 사상이 구약성경의 예언을 진정으로 성취한 분이다.

유대교는 구약성경의 메시야적 예언을 문자적으로 성취되어질 것으로 보고 있으나 다윗 왕조가 재건될 것으로 보고 제 2의 출애굽이 문자적으로 이루어질 것으로 보고 열혈당들이 독립운동을 했으나 예수에 있어서 구약의 예언들이 영화되었다고 말할 수 있어서 예수가 말한 하나님 나라는 다윗왕조의 재건이 아니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새롭게 정립된 하나님의 백성을 창조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구약의 나단의 예언을 진짜성취해서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백성을 이루신 분이다 그러나 문자적으로 다윗 왕조를 재건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백성을 만든 것이며 또 신명기 18:15도 마찬가지다. 모세와 같은 선지자로서 제2의 출애굽을 한다고 하는데 유대교는 문자적으로 정치적 군사적 해방을 이룰 메시야를 기다리고 그러한 구원을 기다리는데 예수에게 있어서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제2의 출애굽이 일어났다. 신약성경에서 구약에 대한 모형에서 가장 흔한 모형이 출애굽 모형이다. 그래서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서 진정한 구속,해방이 일어났다. 구속이라는 말은 해방인데 로마제국, 애굽과 같은 정치,군사적 속박의 힘에서 벗어나는 구속이 아니고 인간을 속박하는 더욱 근본적인 죄와 세상, 죽음 즉 사단의 악과 고난으로부터의 해방을 예수의 십자가죽음과 부활이 이루었다. 그래서 이것을 제2의 출애굽이라 보고 있다. 신약성경에서 아주 흔한 모형이 예수를 통해 이룬 구원을 네2의 출애굽이다. 이 신 18;15이 예수를 통해서 진정 성취가 된 것이다.

유대인들은 문자 그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라니까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예수가 메시야, 그리스도 라는 신앙고백을 예수의 삶과 가르침,십자가의 죽음,부활을 통해서 얻은 그리스도인들은 예수가 어떤 분이었고 무슨 일을 했는가에 따라 그의 메시야됨을 정리하고 보니 구약성경의 메시야적 예언들을 진정으로 성취한 분이다.

사11장 시2:7 시111편 등도 다 마찬가지다. 그래서 사도들이 에수가 그리스도라고 선포하면서 구약성경의 메시야적인 예언들을 증거로 사용한 것이다. 유대인들과 논재에서 구약성경의 메시야적인 text 등을 예수가 메시야됨을 증거하는 에수가 구약성경의 메시야적 예언들을 성취하는 분으로 나타나서 그래서 testimonia라 해서 초대교회 등의 많은 학자들이 R.Hans C.H.Dodd 등은 최최의 신약 성경의 사도들이 예수가 그의 삶, 가르침과 십자가 죽음과 부활로 성취했다고 보는 구약성경의 메시야적 예언들을 전부 모아서 그것으로 유대인들과 논쟁을 벌였다. 그래서 예수가 메시야임을 증거하여 설득하게 되었다. 그렇게 모아진 구약성경의 메시야적 text를 Testimonia라고 한다. 그래거 신약성경에서 구약을 인용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그리스도인들이 예수가 성취했다고 하는 구약성경의 메시야적 해석이다. 이것을 Testiminia라고 한다.

이렇게 예수이 메시야됨과 구약성경이 이렇게 연결되었다. 그래서 그리스도라는 말은 종말에 구원을 이루신 이, 그래서 그리스도라는 칭호가 모든 그리스도론적 칭호중 가장 기본되는 칭호이다. 그리스도와 다른 칭호-주,주의종,하나님의 아들,하나님의 형상,선한 목자,세상의 빛,영생의 떡,마지막 아담,하나님의 지혜, 등-들과 어떻게 연관이 되었느냐 함녀 그리스도가 기본칭호이고 예수이 종말의 구원자 됨-하나님의 종으로서 우리의 구원을 담당하실이라는 기본적 칭호이고 다른 칭호들은 예수의 그리스도욈의 다양한 면들을 틀별히 부각시키는 칭호들이다. 그리스도가 기본 칭호인것은 구약성경의 예언을 담당하신 이라는 뜻으로 기본칭호이고 이 칭호가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의 하나님의 구원사적인 칭호로서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의 구원사적인 계속성을 잘 밝혀주는 칭호다. 곧 약속(구약성경)과 성취(신약성경)라는 관계르잘 나타내주는 칭호로서 구원사적 칭호이고 기본칭호이다.

다른 칭호들은 이 칭호의 다양한 의미들, 면들을 부각시키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 그러기 때문에 이 칭호들이 쓰임새가 조금씩 다른 것은 분명하다.

그리스도라는 칭호가 가장 흔히 쓰이는 context는 소의 믿음의 형식이라는 ՐՏՓՔՉՒ formula이다. 이것은 믿는다는 동사 +-ՐՏՓՔՅՕՅՉՍ-+ + ՏՔՉ ՗ ՁՐՅՈՁՍՅՍ ՕՐՅՑ ՇՌՏՍ

+-ՐՉՓՔՉՒ -+

고전15:3-5을 잘 생각해보면 잘 알 수 있다.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죽었다는 것을 믿는다. ՏՔՉ 절 이하가 복음이다.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서 죽고 부활했다. 이것이 우리를 위한 사건이다. 우리 죄문제를 해결한 사건이고 복음이다. 복음은 선포된다. 복음이 선포된다 와 그리스도라는 칭호가 많이 사용.

선포된 복음-그리스도가 우리 죄를 위해 죽고 부활했다는 것인데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이다. 그래서 이 전체를 ՐՉՓՔՉՒ formula라 한다. 이것의 약자가 ՐՏՓՔՅՕՅՉՍԌՅՉՓ ՗ՑՉՓՔՏՍ (to believe in Christ)

원래 헬라어의 ՐՉՓՔՅՕՅՉՍ은 타동시켜서 전치사가 필요없고 목적어를 동반하는데 신약성경에서는 전치사가 들어 있어서 영어로 그대로 번역하여 to believe in Christ로 번역함.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한동안 이것을 특별히 신약의 헬라어인가 생각을 해보고 이상히 생각했는데 요사이는 believe in Christ 라는 말이 ՏՔՉ절에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죽고 부활했다는 말의 약자로 대개 생각한다. 그리스도를 믿는다하면 그리스도를 우리를 위해 죽고 부활했다는 것을 믿는다는 말이다. 본바와 같이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죽고 부활했다는 것이 객관적인 구원의 사건이다. 이것을 믿으면 주관적 구원의 사건이 되어서-우리의 구원이 발생하게 되어서-효력을 발생하게 한다. 이것이 믿음이 하는 일이다.

이 선포된 말씀, 복음을 믿으면 이 객관적인 구원의 사건이 우리에게 개인적으로 효력을 발생하게 되어 우리의 구원의 사건이 되고 우리가 구원을 얻게 된다.

믿음이 선포된 메세지를 받아들이는 것인데 왜 믿음이라는 것이 객관적인 구원 사건을 주관적인 구원-왜 오늘 나에게 효력을 발생하게 하느냐? '그 사람의아들'인자,pp 297-311.

믿음의 근본의미가 선포된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인데 왜 믿음이 2000년전의 사건과 2000후의 오늘 나와의 연결이 되어 오늘 나에게 효력을 발생하느냐를 이해하려면 ՕՐՅՑ(for)는 "대신,대표,위한"의 여러가지 의미가 있다. '대신'이라는 이미와 '대표'라는 의미와 그래서 우리에게 믿음을 가져오는 우리를 '위한'사건이다. 이것을 받아들이는 것을 두 개념을 합치면 내포적 대신(Inclusive Substitution) 우리를 내포하면서 대신했다. 그가 우리를 가의 몸속에 내포하면서 대신했다. 여기서 우리가 이해해야할 사건이 구약성경의 corporate personality(=stammvater) 개념인데 Stammvater(약어로 S.V)라 하는데 한 민족의 조상은 그의 자손들을-마치 줄기가 가지들을 내포하고 대표하듯이-내포하고 대표한다고 본다. 그래서 이 조상이 개인이면서 동시에 집단적인 인격체로 이해된다. 그래서 영어로 corporate personality.

가령 구약성경에서 가장 두드러진 야곱에서 이스라엘 이란 칭호를 주는데 야곱이란 한 개인이 이스라엘 민족 전체를 대표. 유다도 한 개인이면서도 민족을 내포적 대표로서 그의 후손들을 그에게 내포한 것으로 본다. 야곱 이스라엘의 하나님에 대한 관계가 그의 후손들 이스라엘 전체의 운명을 좌우하기 때문에 야곱 이스라엘 유다가 한 개인으로만 인식되는 것이 아니고 그 후손들 전체은의 운명을 좌우하는 존재로서 그 민존 전체가 그 안에 내포되었다는 으미에서 야곱이스라엘, 유다 등이 Stammvater가 된다.

이런 이간론을 이해해야 한다. 현대인들의 인간론은 극단적인 개인주의로 각 개인의 실존을 한 존재의 단위로 보는데 고대 사상은 그렇지 않다. 구약만 그런 것이 아니고 어디나 집단이 그리고 한 민족이 존재의 단위였다.

Substitution 이란 말은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죄를 위해 죽을 수 있느냐? 그러나 인간의 모든 관계가 복잡한 substitution으로 되어 있다. -한 사람이 잘 하면 민존 전체가 잘 살게 되어 있다.

야곱 이스라엘, 그 조상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올바른 관계 언약의 관계로 있다면 그의 백성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고 야곱 이스라일이 범죄하면 반대의 현상이 일어난다.

이런 의미에서 조상이 한 개인이지만 한 개인으로서 그 민족의 운명이 전부 결정된다는 의미에서 그 민족이 조상 속에 내포된다고 본다. 그래서 그 조상의 하나님과의 관계가 그 민족 전체의 하나님 과의 관계가 되는 것이다. 이것을 이해해야 한다. 곧 예수가 우리를 위해 죽고 부활했다는 것을 믿는 것은 그가 우리 대신 대표라는 것은 그가 우리의 S.V라고 믿는 것이다.

이 인정과 더불어 무슨 일이 일어나느냐하면 우리의 '내포적 대신'이므로 우리가 그의 속에 내포된다. 이것을 성경에서 '연합'이라고 말함.

그러나 S.V의 개념이 야곱 이스라엘 , 족 조상 안에 그의 후손이 내포되는 것을 보아 그의 하나님과의 관계가 그의 후소 전체의 운명을 좌우한다. 그러면 우리가 믿음으로 그리스도 안에 내포된다는 것은 그를 우리의 S.V로 인정하는 것인데 곧 그와 연합한 것이다. 그러면 예수의 하나님과의 관계가 우리의 하나님과의 관계가 되고 그가 한 일이 우리가 한 일이 되고 그의 하나님 에 대한 철저한 의지와 순종이 우리의 것이 되고 그의 하나님과의 의로운 관계가 우리의 하나님과의 의로운 관계가 되고 그의 조로 인해 벌받음이 우리의 벌받음이 되고 그의 죄를 위해 죽음이 우리의 죽음이 되고 그이 새로운 생명으로의 부활이 우리의 부활이 된다.

그래서 믿음을 내포적 대신인 도 우리의 S.V인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시켜서 그의 됨됨이(what he was:그가 어떤 분인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순종하는 하나님이 아들)가 우리의 됨됨이 되고 그의 하신 일이 우리가 한 일이 된다. 그래서 믿음은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 내포시키고 그리스도와 연합시켜서 그와 함께 죽고 부활하는 사건을 일으킨다. 고후 5:14-17에서 14절에 예수가 모든 사람을 대표해서 죽었으므로 우리가 그의 안에 내포되어 우리가 죽은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죄에 대해서 죽고 의에 대해서 의로운 사람으로 새로 부활한 사람 즉 새로운 피조물이다. 이 새로운 피조물은 그리스도와 연합해서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다. 이 관계를 바울이 나타내기 위해서 아주 많이 사용되는 것이 ՓՕՍ ՗ՑՉՓՔՙ ,ՅՍ ՗ՑՉՓՔՙ이다.

이 말은 그리스도가 우리 죄를 위해 죽고 부활했다는 것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즉 가가 우리의 내포적 대신이라는 것을 받아들임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그 안에 내포되어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게 된다. 곧 그리스도와 연합되고 있다. 그래서 두 구절은 항상 함께 다닌다.

바울 신학에 있어서 가장 많이 토론되는 단어가 '그리스도 안에서'이다.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말이 무슨 의미를 갖느냐? 많은 사람들이 헬라 신비주의에서 나온 공식이 아니냐고 추측했지만 요사이는 많이 밝혀져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말은 그리스도가 우리의 죄를 위해 죽고 부활했다는 내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의 S.V가 되고 우리가 그 안에 내포된 생태로 그와 연합한 상태에서 그의 하신 일이 우리의 한 일이 되고 그분의 됨됨이가 우리의 됨됨이가 되는 것을 나태나는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이다.

나중에 보겠지만 '주안'이란 말은 '그리스도 안'과는 전혀 다르다.

그래서 믿음이 2000년전에 일어난 사건이 오늘 나를 그리스도 안에 내포시켜서 그리스도의 됨됨과 그의 하신 일이 나의 것이 되게 한다. 십자가에서 죄값을 받고 새로운 삶으로 부활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객관적 구원의 사건이 나에게 구원을 준다. 믿음이 우리를 예수 안에 내포시킨다.

이 믿음을 극으로 표시한 것이 '세례'다. 그래서 초대교회에서 침례하는 것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장사됨을 극화한 것이다. 세례때 이 믿음을 고백하고 고백된 믿음을 극으로 표현한 것이 세례이다. 그래서 침례가 그리스도와 함께 연합해서 죽고 장사되었음을 상징화했고 물로 깨끗이 씻긴 몸으로 나온 상태를 그리스도 안에서 내포되어 그리스도와 함게 새로운 생으로 즉 하나님과의 의로운 관계를 갖는 생으로 부활했음을 극으로 표시한 것이다. 롬 6장에 잘 나타남.

이 극적인 효과를 느끼면서 그리고 초대교인들의 예를 따라 침례하는 것이 상당히 의미가 있다. 세례라는 자체가 물이 마술적인 힘이 있어 거듭나게 하는 것이 아니고 세례 자체에 의미가 있는 것도 아니고 믿음에 의미가 있다. 이 믿음을 극으로 표현한 것이 세례다. 그림으로 '세례'는 '믿는자가 되어가는 과정의 종결'이라 말한다. 세례를 받음으로 밀마암아 입으로 고백한 신앙이 문서적으로 인제 내가 믿는 자가 되었다는 증거이다.-믿음의 객관화:믿음을 객관적인 사건화 한 것이다.

질문:세례에 있어서 씻음에 강조점을 두어 약식 세례를 주는데...

답:씻음에 의미가 있다. 그것은 너무 소극적이다. 씻어나오는 것이 아니고 새로운 생명으로 부활인데 죄인이 죽었다는 것이 훨신 더 적극적인 의미이다.

질문:신약에 있어서는 죽음의 이미가 장조되었다고 보아야 하는가?

답:다 있다. 씻음의 의미도, 죽음의 의미도 있는데 죽음의 의미가 더 강하다. 더 적극적인 의미로 롬6장에 언급. 씻는다는 것은 소극적인 개념이다. 완전히 주고 새피조물로 되었다는 것이 적극적인 개념이다.

질문:구약적인 연결에 있어서는..

답:씻는다는 개념도 있다. 바울도 씻으라고 말함. 그리사도 안에서 씻긴 문제다. 그러니까 죄가 씻겼다는 것을 말함. 그러니까 이런 것들이 다 그림언어이다. 어느 하나만 맞는 것이 아니고 죄가 씻겼다고 볼 수 있고 죄인이 죽고 의인으로 거듭났다고도 할 수있고 위로부터 났다-요한복음적인 그림인데 이것도 상당히 소극적인 그림이다. 완전히 새로 창조되었다는 것이 비유적인 그임이지 이것이 훨씬 적극적인 그림이지 -다 똑같은 Royality를 알리고자 하는게 옛사람이 죽고 완전히 새로운 피조물로 부활했다. 이것이 가장 적극적인 그림이 새로 창조되었다는 것이다.

질문:세례가 구약과 어떻게 연결되는가?

답:홍해를 지나는 것은 세례라 할 것이 아니고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의 사건에서 되돌아 보았을 때 구약의 백성들이 홍해를 지난 것을 모세로 세례 받았다고 한다(고전11장)

질문:할례와 세례의 관계는?

답:할례와 관계 있는 것은 언약의 백성의 표시인데 세례 자체가 원래 할례와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고 세례가 그리스도 안에 우리를 내포된 자로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부활한 자로서 새로운 사람들이 된, 의로운 사람들이 된,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과 새언약을 세우는 죽음을 덕보는 사람들이 된다. 이것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세례가 하나님이 백성의 공동체로 편입되게 함. 이런 의미에서 할례와 의미가 상관됨. 세례라는 것이 중간사 시애에 발달했는데 이것이 신약적인 세례의 이미가 아니고 몸을 씻는 것을 의미. 한번 씻는 것이 아니고 날마다 씻는 것을 의미. 쿰란 공동체에서는 날마다 씻었다.

요한의 세례는 회개를 위한 세례다. 목용함으로서 죄와는 관계 없고 의인으로 살겠다는 결단을 나타내는 회개의 세례다. 그런 의미에서 조금씩 다 있다. 회개, 죄씻음. 그러나 신약의 세례는 중간사 시대의 유대인들의 세례와는 질적으로 다른 일부 연속성이 있으나 훨씬 더 깊은 의미를 갖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부활하는 것을 나타내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공동체로 들어가는 하나님의 백성을 다른 말로 예수의 몸이라 하는데 몸이 지체들로 내포적 대표들로 내포되어 한 몸을 이룬다. 이것으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진입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세례가 할례,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의 공동체의 일원이었던 할례와 의미가 비슷하나 조인이 죽고 새로운 의로운 자로 부활한다. 죄문제가 청산된다는 의미에서 죄를 씻다고 회개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일부 중간사 시대의 목욕과 전승사적인 의미가 있기는 하나 그것을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이 아니고 소극적인 의미이며 배경에 불과하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타난 실제는 그의 배경들이 상상할 수 없었던 훨씬 근본이 되는 것이고 큰 것이다.

질문)중간사 시대의 세례운동에 설명해 주십시요.

답:중간사 시대에는 부흥운동이 많이 일어났다-Hasidim에서

Hasidim이 나중에 여러파로 갈림. 바리새파,엣센페(혹은 사두개패), 이들이 자기들의 부흥운동에 일부로 목욕하는-옛적인 죄를 씻어버리고 하나님의 언약에 충실해서 하나님의 율법을 준수하여 살겠다는 결단에서 나타내는 목욕운동이 일어났다. 목욕운동은 종교사적으로 보면 꼭 유대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고 중동에 널리 퍼진것이 목욕운동이다. 이 목욕운동이 중요한 것은 쿰란의 엣센파에서이다. 이것은 쿰란 공동체가 자신들을 제사장 공동체로 보았다. 왜냐하면 쿰란 공동체를 세운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전이 타락한 것을 보고 그것에 반발해서 떨어져 나간 예루살렘 제사장들이 세운 공동체 이기 때문이다. 쿰란 공동체 자신들이 꼭 예루살렘 성전의 제사장들의 조식같이 꼭 조직하고 자기들의 공동체를 성전이라 보고 성전을 나무와 돌로 만든 집이 아니고 하나님의 백성들이 공동체를 성전으로 보는 이른바 성전개념의 영화 또는 모형론이 쿰란에서 발생한다. 그래서 이른바 쿰란 공동체를 예루살렘 성전 공동체의 조직으로 만들어 놓고 예루살렘 성전 제사장들이 제사들릴 때마다 아침 저녁으로 하는 목욕을 그대로 행했다. 주의할 것은 기독교에서와 같이 목욕을 한 번 하는 것이 아니고 매일 하는 것이다. 매일 같이 죄를 씻고 의로운 사람으로 하나님께 나타내는 그런 운동을 했는데 이것이 세례이다.

논란이 되는 것은 사도들이 행한 세례가 예수의 세례와 연결이 되고 예수의 세례는 또한 요한의 세례와 연결이 되고 요한의 세례는 쿰란의 세례와 연결이 되었는가에 의문이 많다. 인반적으로 요한의 가르침과 쿰란의 가르침이 비슷한 것이 많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요한이 쿰란의 한 일원이었다고 보는 사람도 있다. 요한이 세례를 준 사막지역이 쿰란과 아주 가까운 곳이다. 직선거리로 약 12Km.

그래서 어쩌면 요한이 쿰란 공동체의 세례의식을 발전시켜서 세례운동을 했을 것으로 본다. 그러나 요한의 세례 운동은 쿰란의 세례운동과 다르다. 요한의 세례 운동은 매일 반복하는 것이 아니고 회개를 위해 오직 한번. 이런것이 전승사적으로 사도들에게 거슬러 올라갔느냐? 여기에 대해서 논란이 많다.

그러나 오늘 알아야 할 것은 세례가 이와같은 배경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배경들이 말할려고 하는 것보다 훨씬 더 근본적이고 큰 의미를 가진 것이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을 통해서 탈바꿈한 것이다. 이것도 메시야 사상과 마찬가지고 Interpretio Christiana가 일어난 사건이다. 유대의 배경을 보고 무조건 신약의 세례에 무슨 세례 신학이 있었다고 전제하는 것은 아니다. 그 뒤 교회사에서 세례에 대하 많은 묵상이 되어 의미가 덧붙여져 복잡하게 발전한 것이다.

질문:바리새인들이 요한에게 무슨 권세로 세례를 주느냐고 말할 때 그리스도의 권세와 세례를 연관시켜 말하는데....

답:요 1장을 자세히 읽어보면 요한이 부흥운동을 하는데 세간에 요한이 그리스도나 엘리야, 그 선지자 종말의 사자라고 주장하는 것 같다. 그래서 대표단을 파견하여 요한의 성격을 자세히 알려고 함. 요한이 자신 스스로를 무엇이라고 보고 지금 이 부흥운동을 하고 있느냐? 요한에게 특징 있는 운동이 세례라. 그래서 그의 이름이 세례요한이다. 요한이 부흥운동의 핵심이 세례운동이었다. 그러니까 세례운동을 통하여 요한이 무엇인가 하나님으로부터 위임받은 운동을 한다고 주장하는 것 같은데 정확히 무엇이라고 하는가를 묻는 것이다. 네가 그리스도냐? 엘이야,그 선지나냐? 아니다. 그러면 지금 하고 있는 이 세례운동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 하나님으로 위임받은 권세 사명이 무엇이이냐? 그런 말이다. 지금 네가 하고 있는 일을 네 스스로 무엇이라고 보고 하나님께 무슨 권세를 위임받은 것이냐고 질문 그래서 요한에게 있어서 세례가 가장 핵심적인 의미를 가지고 예수가 요한의 제자들 중의 하나에서 예수그 그의 운동을 요한의 운동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은의심할 수 없는 사건이다.

그래서 요한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의 선포 뿐만 아니라 종말론, 심판 에서도 요한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을 텐데 우리가 예수의 종말, 하나님 나라에 대한 선포,심판에 대한 선포 등에서 보는 바와 같이 요한과는 많이 달랐다.그래서 나중에 예수가 요한과 분리해서 독자적인 운동을 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마찬가지로 요한과 달라지기 시작했지만 그 관계를 규명하는 것은 어렵다.

기타:쿰란 공동체에서는 자기 스스로 몸을 씻은 것이고 요한에 오서 타인에게 베품.

여기에 관계된 책:G.Beasly Murray "신약에 있어서의 세례'

O.Cullman

J.Jerenias-K.Aland:유아세례의 정당성에 관해 논쟁. 유아 세례가 신약시대부터 시작되었으냐 아니면 교리사 나중에 발달한 것이냐 혹은 유아세례가 꼭 시행된 것이냐 아니면 세례가 시행되기도 하고 되지 않기도 했느냐에 대해 논쟁.

질문:유월절 양에서는 원래 제사의 의미가 없었는데 요한복음에 제사적 의미로 쓰였다고..

답:'요'에서는 제사의 의미로 쓰인 것이 아니고 점차 제사의 의미를 띠게 되었다. 유대교에서 신약시대에. 왜냐하면 제사는 여러가지인데 원래는 삶의 정황과 뉘앙스가 달랐는데 섞이는 경향이 있었다. 유월절 양은 원래 제사의 의미가 없는데 신약시대에 와서 구약의 다양한 제사들이 섞이는 바람에 유월절 양도 제사의 의미를 갖었을 가능성이 많다. 그래서 그것을 '요'이 반영하고 있다. 왜 '요'에서는 세상 죄를 지고가는 지고간다는 말은 지어서 없애버린다는 말인데 어린 양이라는 말에 제사의 의미가 강하다.

질문:어떻게 해서 유월절 양이 제사의 의미를 갖게 되었느냐?

답:원래 구약에는 많은 제사가 있었는데 그것이 섞였다. 유월절 양은피를 문설주에 바르면 죽음의 사자가 애굽 사람의 장자만 죽이는 의미. 그래서 유월절 양의 피가 히브리 사람들이 집을 나타내는 그래서 죽음의 사자가 pass over 지나가는 의미가 있다. 이것이 죄값을 치루거나 하나님이 진노를 푸는 제사의 의미는 하나도 없다. 그것을 성전에서 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 집에서 행해지고 자기 집의 문설주에 바르는 것이 유월절 양이었다. '요'에서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이다. 그 말은 유월절의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니고 사53:7-12에서 주의 고난 받은 종이 하나님의 양으로 많은 사람들의 죄를,대속의 죽음을 한다. 또 유월절 양의 의미가 있고 또 계시록의 양이 승승장구하는 정복하는 메시야에 대한 표시라고 말함.

C.H.Dodd 같은 사람은 요1장에서의 세상 죄를 지고가는 어린양의 의미 보다는게의 의미에서의 양의 의미로 주장한다. 또는 아람말로 양이 '탈리야'였는데 주의 종 혹은 양이라고 번역되었다.

그러나 유월절 양이라는 말을 부인할 수 없는게 요 1장에서 예수가 십자가에 목박히는 순간을 유월절 양이 잡히는 순간으로 잡고 있다. 그것만 보아도 그리고 유월절에 예수가 예루살렘에 여러번 가는 것도 있고 유월절 신학이 '요'에 상당히 중요큨. 그래서 유월절 양이란 의미를 부인할 수 없다. 다만 이것이 의심을 받는 이유는 유월절 양이 원래 제사의 의미가 없는데 '요'에서는 세상 죄를 지고가는 제사의 의미가 있는, 죄문제를 해결하는 그것으로 나타났느냐? 그것은 신학적으로 섞여서 그렇다. 이와 같은 신학이 나올 수 있는 것은 전승사적으로 중간사 후에 제사들의 의미가 섞어서 심지어 유월절 양도 제사의 의미를 띠게 되었을 것이다.

질문:출34:25에 유월절의 희생 양이라고 했는데 유월절 양이 희생제물의 성격이 강했다고 말할 수 없겠느냐?

답:나는 모르겠다. 유월절 양이 무슨 희생제사의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다. 성전에사 제사한 것도 아니고 제사라는 것은제사장이 한 것이다. 그런데 각자가... 예수 시대에도 유월절 전야에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이 자기들의 양을 잡기는 성전뜰에서 잡았다. 그래서 자기 집에서 잘 구원 먹었다. 그래서 유월절 만찬을 한 것이다. 제사라는 것은제사장이 한 것이다. 유월절 양은 예수 시대에도 각자가 잡은 것이다. 물론 잡는 의식에 있어서 제사장이 축복하고 하는 의식이 있었지... 여러분들 각자 좀 더 연구해 보라 .나는 그 이상은 몰라.

Ⅰ.예수가 ՊՕՑՉՏՒ라는 발생과 의미

1.배경

1)헬라적 배경에 있어서 주라는 칭호의 3가지 사용법에 있어서

①일상 생활에서 지체높은 사람이거나 큰 재산이나 노에들을 소유하는 사람들에게 존경하는 의미로 부를 때 사용하는 칭호로 영어의 Sir,Master

②종교적 용법으로는 에집트나 시리아 소아시아에서 serapis,osiris,isis등의 신들을 섬기는 신비종교들에서 신들을 ՊՕՑՉՏՒ 여신들을 ՊՕՑՉՁ라고 부르고 이 신들을 섬기는 사람들은 스스로를 ՄՏՕՋՏՉ라고 불렀다.

③정치적 용법에 있어서는 지배자,통치자를 지체높은 사람들을 ՊՕՑՉՏՒ라고 부르기도 했는데 특별히 로마 황제를 ՊՕՑՉՏՒ라고 불러 황제를 신격화하여 황제숭배주의가 발생하고 거기에 따라 ՊՕՑՉՏՒ는 신성을 지닌 자가지 의미하게 되었다.

2)유대교적 배경을 살펴보면

Hebrew Text에서 ࠄࠅࠄࠉ 4자음이 나왔을 때는 유대인들은 이것을 발음하기를 꺼리고 ࠉࠏࠄࠀ(아도나이) 라고 불렀다(나의 주). 그래서 이 관습이 LXX역까지 그대로 이전되어서 M.T에 ࠄࠅࠄࠉ라고 쓰여 있으면 LXX에서는 ՊՕՑՉՏՒ라고 번역하였다. 이것이 신약성경에도 반영이 되어서 구약성경의 ࠄࠅࠄࠉ가나오는 문구를 인용함에 있어서 항상 ՊՕՑՉՏՒ로 대치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은 신약시대에 diaspora 유대인들 간에는-헬라말을 쓰는 유대인 간에는-하나님을 ՊՕՑՉՏՒ로 지칭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3)아람말의 ࠀࠃࠈ(주)라는 말이 있었는데 이것이 존경하는 의미로 지체높은 사람에데고 쓰이고 또는 하나님에게도 적용되었다. 특히 호격으로 ࠉࠃࠈ(나의 주) 사용. 그런데 ࠃࠈ 혹은 ࠀࠃࠈ의 절대용법이-인칭접미사 없이 주라는 절대 용법이 하나님에 대하여 쓰였느냐에 논란이 많았는데 최근에 발견된 ⅡQzqJob 24:5-7에서 절대 용법이 하나님에 대한 칭호로 사용된 것을 발견.

그래서 헬라세계에서와 마찬가지로 유대인들 가운데도 ࠐࠅࠃࠀ과 ࠀࠃࠈ가 일반적으로 높은 사람에게 쓰이는 존경의 의미를 띠는 호칭에서 시작해서 하나님께로 쓰이는 절대적 칭호로 발달했다.

2.예수와 주라를 칭호

예수께서 생전에 자기 제자들에게 스스로 주라고 주장했을까? 제자들이 예수를 주라고 고백했을까? 아니면 예수가 주라는 신앙고백은 십자가와 부활후 발생한 것인가? 등을 알기 위해서 예수가 주라는 칭호를 따지는데 첫째로 이것을 따지는데 우리가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간접기독론에서 살펴본 예수의 절대적 권위 주장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혹은 하나님의 대권자로서 하나님의 권세를 주장하고 절대적인 순종을 요구했던 분. 그런 권위의 주장을 한 예수에게 그의 제자들이 어떻게 반응을 했을 것인가? 그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이 관계에서 3가지 중요한 말들이 있는데

1)막11:3에 예루살렘에 입성하기 위해서 타고갈 나귀를 불러오라고 할 때에 제자들이 이르기를 "주께서 쓰시겠다 하라" 여기서 주라는 말이 이것은 지체높은 분, 특히 랍비(선생)에게도 ࠉࠃࠈ(나의 주)라고 불렀다. 그정도의 의미에서 생각해서 상황을 생각하건대 우리의 ࠉࠃࠈ가 쓸거니까 나귀를 무조건 풀어 주는 것을 보면 거기에서 ࠉࠃࠈ는 보통 선생보다는 무게있는 의미가 지워져 있지 않겠는가? 생각해 볼 수 있다.

보통 이런 경우를 예수와 나귀주인과 미리 약속이 되어 있는 상태로 본다. (예수의 지지자들이 많았다. 그래서 예수가 자기 제자들을 내어 보내면서 전대도 지지말고 그냥 가라고 한 것은 많은사람들이 생각한대로 하나님 믿고 하나님이 다 주실 것이니까 걱정말고 가라는 뜻이 아니고 사실은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그런 사람들이 다 지원할테니까 곧 하나님의 백성들이 다 지원할테니까 걱정말고 가라는 말이다. 궁극적으로 하나님 믿고 가라는 말과 비슷한데)

예수의 최후 만찬도 약속이 되었다. 그 당시 예수를 공개적으로 지지할 경우 상당히 많은 피해를 볼 경우가 많으므로 숨어서 예수의 운동을 지원하는 부자들이 꽤 있었다. 그래서 예수의 제자들이 오면 음식을 제공하고 몇일 씩 재워주기도 했다.

나귀 주인과 제자들이 같이 예수를 주로 보았다. 그런데 이럴때는 나귀를 필요로 한 것은 슥 9장의 메시야가 예루살렘 입성할 때에 '나귀'를 타고 입성한다는 예언을 성취하기 위함이니 나귀 주인도 예수의 그 의도를 알고 순종해서 나귀를 바쳤다. 그럴때 나귀의 주인은 예수를 무엇으로 보았겠는가? 슥 9장의 예언을 성취하는 메시야로 보았다. 그래서 이때의 주는 보통 선생이라는 의미의 주라기보다 훨씬 더 내용이 채워진 의미일 것이다.

2)막12:35-37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예수가 당시 신학적인 전승 사상에 도전한 것이다. folk dessianism이 당시 주종을 이루는 메시야 사상인데 나단의 예언에서 전승된 메시야가 다윗의 아들이다.(삼하 7:12ff) 예수가 여기서 그것을 시비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어째서 너희들의 신학자들이 메시야가 다윗의 아들이라고 하느냐? 그 시비의 근거는 시편 110:1인데 여기서 다윗이 "주께서(하나님) 내 주에게(메시야) 이르시되 ...내 우편에 앉으라" 하나님께서 메시야를 하나님 우편에 높이셔서 심지어 다윗이 그를 주라고 부르는데 어떻게 메이야가 다윗의 아들이겠느냐? 이런 문장형식이 됨.

시110:1은 신약성경에서 가장 많이 인용된 구약의 말씀이다. 이것은 예수의 부활과 높임 받음의 proof text로-증거 예언으로-아주 중요한 예언이다. 그래서 논란이 시편 110:1이 초대교회의 예수의 부활과 더불어 그의 제자들에 의해 도입이 되었느냐 곧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을 체험하고 그의 제자들이 그가 메시야인 것을 곧 구약의 예언된 구원자인것을 확인하고는 구약으로 되돌아가서 그 메시야에 대한 예언을 전부 모아서 그것을 testionia라고 하는데-초대교인들이 예수의 삶과 십자가,부활의 빛 아래서 구약성경에 메시야인 에수에 대해서 증거하고 있다고 혹은 예언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전부 모은 것을 testionia라고 한다. 이런 것들은 시2:7/89편/134편/이사야2장,11장,미5장 슥6장 9장 등. 메시야인 예수에 대한 예언들을 모아 놓았다. 그 과정중에 시편 110:1이 초대교회의 신앙고백과 성경해석에 도움이 된 것이냐 아니면 예수가 시편 110:1을 자기에게 적용했느냐 하는 것이 중요.

가령 예수의 산헤드린 재판(막14:62)에서도 예수가 대제사장의 질문에 그가 메시야임을 수긍하고는 곧 단7장과 시110:1이 탄생된 말을 한다.

시110:1을 예수께서 직접 자기에게 적용한 것 같다. 물론 비판적 학자들은 시편 110:1이 예수의 부활을 체험한 교회가 시110:1이 예수의 부활과 높임을 받음을 예언하고 있구나 하고 후에 깨달은 것으로 말하는데 바로 이 막12:35-37이 우리로 하여금 예수가 미리 시110;1을 자기에게 적용했을 것을 상당히 강력히 시사한 것이다.

왜냐하면 막13:35-37까지는 초대교회가 니야내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초대교회의 신앙고백에서는 예수가 다윗의 아들이다. 그런데 여기서는 피상적으로 볼 때 예수가 메시야가 다윗의 아들이라는 사실에 시비를 거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면 초대 교회가 예수가 메시야로서 다윗의 아들이라고 고백하는 사람들이 이런 말을 지어내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이 말은 분명히 예수의 진짜 말씀이다.

예수가 무엇을 할려고 그러느냐? 예수가 메시야가 다윗의 아들임을 부인하는 것이냐? 그렇다면 나단의 전승 일체를 완전히 부인하는 것이냐? 그렇다면 구약의 메시야 사상의 뿌리인 나단의 예언의 전승을 완전히 부인하는 것이냐 아니면 메시야가 다윗의 아들이라는 것은 조금 부족한 것다 그정도 인식은 정말 부족한 것이다. 그래서 겨우 다윗 왕조나 재건할 그런 존재로 인식한 것 은부족한 것이다. 메시야는 그 뿐 아니라 하나님 우편에 높임 받는 만유의 주로이해되어야 한다고 일부 수정한 것이냐? 민간 메시야 사상-정치적,군사적,메시야 사상을 부족한 것으로-완전히 틀린 것은 아닌데-고 일부 수정한 것이냐?

메시야를 겨우 그 정도로 보아서는 안된다. 만유의 주로 높임받을 자로 보아야 한다고 예수가 또 하나의 성경적 근거를 제시한 것이냐? 그러다면 예수는 스스로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느냐? 이런 걸로 해서 이 구절이 알송달송 중요하다. 예수가 보통 알송달송하게 가르치는 것 이것이 예수의 가르침의 특징이고 이것이 잘 들어 맞음.

이것에 대한 확고한 해석이 아직도 부족한데 동독의 F.Nergebauer는 막12:35-37에서 예수가 시편 110;1을 인용해서 메시야의 다윗의 아들됨에 대한 시비를 걸때에 단 7:13에 나오는 '한 사람의 아들 같은 이' 하나님의 보좌에 앉는 초월적인 존재로 염두에 두고 이야기했다고 주장한다. 하여간 여기서 중요한 것은 메시야가 다윗의 주라고 할 때에 은근히 자기가 바로 그러한 사람이라는 것인데 다윗의 주라는 소리는 이제는 선생님 정도는 아니고 의미가 엄청나게 부과됨. 메시야적 칭호인데 다윗의 왕국을 재건할 왕저도가 아니고 하나님 우편에 높임받을 존재로 주라는 의미가 담겨 있음.

3)눅 6:46 "주라고 부르면서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은 행하지 않느냐"

이 말로 예수는 제자들의 절대적 순종을 요구하고 있다. 보통 랍비 정도가 아니라 제자들의 절대적인 순종을 요구할 수 있는 주라는 것이다. 예수는 은근히 여기서 보통 선생님 정도의 sir,master 정도가 아니고 제자들 전체의 절대적인 주권을 행사할 수있고 절대적인 순종을 요구할 수있는 주임을 나타내고 있다. 그래서 이와 같은 예들을 보았을 때 무엇을 생각할 수 있느냐면 예수의 제자들이 예수를 스승(랍비)로 처음에는 그런 의미로 ࠉࠃࠈ로 시작했지만(지체높은 사람) 그러나 자기들이 ࠉࠃࠈ 라고 부르는 이 선생이-간접 기독론에서 본 바와 같이 하나님의 대권을 행사하고 모세보다 더 높은 권위를 주장하고 심지어는 제자들의 절대적인 순종에로 요구하는 이런 주로 예수가 스스로 계시함에 따라 그의 제자들이 예수를 ࠉࠃࠈ라고 불렀으며 그 주라는 소리에는 더 높은 무게 있는 의미가 들어갔을 것이다. 보통 선생님 정도가 아니라 예수의 권위 주장에 다가 그것에 상응하는 제자들의 예수에 대한 칭호는 점점 더 무게가 실렸을 것이다.

3.예수가 주라는 신앙고백의 발생.

W.Bousset의 이론으로 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다. W.S는 1세기를 지배한 책 "ՊՕՑՉՏՒ ՗ՑՉՓՔՏՒ"라는 책을 저술. Bultmann은 고백하기를 이 책이 자기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이 책에서 W.S은 주장하기를 예수가 높임을 받아서 현재 군림하는 주라는 신앙은 헬라세계의 신비 종교에서와 비슷한 예배의 체험에서 발달한 것으로서 최초로 안디옥에서 발생하였다. 팔레스틴의 교회는 예수를 체험할 그 사람의 아들로 기다리는 것이 그들이 신앙의 중심이었다. 그런데 헬라의 신비종교들에서 신들을 예배하는 관습에 젖어 있던 사람들이 예수를 바로 그 신비종교들이 신으로 예배하기 시작함으로서 신비종교에서 예배의 대상이 되는 신의 칭호가 ՊՕՑՉՏՒ였으므로 이 예수를 ՊՕՑՉՏՒ라고 하였다. 예수의 제자들이 예수를 생전에 ࠀࠃࠈ 또는 ࠉࠃࠈ라고 하고 불렀던 것과 예수가 ՊՕՑՉՏՒ라는 신앙고백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주장을 했다. 즉 W.S에 의하면 원래 팔리스탄인에 있는 교회는-아람말을 쓰는 유대인들 중의 예수의 추종자들은-그들의 신앙의 중심이 종말에 재림할 예수 곧 그 사람의 아들로서 종말에 재림해서 하나님 나라를 이루고 세상을 심판하여 그의 백성을 부러 모아 구원할 그 시鱫의 아들을 기대리는 것이 그들의 신앙 내용이었다. 그런데 안디옥에서 헬라 이방인들이 자기들의 종교들이 전통인 serapis,osiris,isis 등의 신들을 섬기는 신비종교였다. 신비종교 중 serapis 들은 자연종교로 오대지방에서 자연의 cycle에 대한 인식에서부터 시작하여 인간도 자연의 cycle에 지배를 받는다고 보았다. 그런데 자연의 주기를 운행하는 존재가 신이라고 보았는데 신이 쓰로 쇠퇴하고 죽고 싹이 나고 생명이 무성하고 되는 주기를 지배한다고 보았다. 그래서 신 스스로가 죽고 부활하는데 우리 인간들이 신과 연합하면 죽어도 다시 생명이 여름이 무성하게 다시 나오듯이 새로운 생명으로 부활한다고 보았다. 그래서 신들과 연합상태를 지탱하는 것이 신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심-종교를 추종하는 사람들까지 신과 더불어 먹고 마심 또는 신의 몸체를 먹고 마신다고도 할 수 있고-이런 의식을 통해서 신과의 연합을 지탱한다고 보았고 설령 죽우도 생명으로 부활한다고 보았다.

이러한 종교적 전통에서 자란 헬라 이방인들이 십자가에 죽고 부활한 예수의 이름을 접하게 되자 serapis,osiris 대신에 예수를 중심으로 하는 신비종교를 이루어가지고 자기들이 옛날 serapis나 osiris를 섬기듯이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 예수와 연합하고 예수의 살과 피를 먹는 성찬식을 함으로 예수와 연합을 지탱한다고 보았고 예수를 예배하게 되었다. 그래서 예수가 이런 신비종교들의 신을 대체하게 된 것이다. 이 신비종교에서 신들이 ՊՕՑՉՏՒ이다. 그래서 예수가 ՊՕՑՉՏՒ라는 신앙고백이 이렇게 신비종교의 배경을 가졌던 헬라 이방 기독교에서 처음으로 발생한 것이다. 그래서 이 사람들에 의하면 W.S는 팔레스타인 교회와 헬라 이방인간의 교리는 전혀 별개의 종교였다. 이 헬라 이방인들의 교회의 가장 발달된 상태가 우리가 바울과 요한에서 보는 신학들이다. 그러면 우리 교회는 지금 바울과 요한의 서신에 근거를 하고 있다.

사실상 이렇게 된다면 예수와 예수의 원래 추종자들과는 관계없는 우리의 기독교이고 관계없는 종교가 되어버리고 만다. 이런 이론을 제시했는데 이 이론이 Bultmann에 의해 수용되었고 오늘날까지도 S.Schulz, W.Kramer, F.Hahn 등에 약간의 수정을 거친 상태로 계속 지탱되고 있다. 여기서 하나 우리가 인정할 것은 헬라세계에서 예배의 대상이 되었던 신을 ՊՕՑՉՏՒ로 불렀던 그 전통이 예수가 ՊՕՑՉՏՒ라는 신앙고백의 생성과 발달에 큰 영향을 끼친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헬라 기독교로 들어갈 수록 ՊՕՑՉՏՒ라는 칭호가 더 자주 사용된다.

그러나 예수가 주라는 신앙고백은 안디옥에서 헬라 이방인들에 의해서 발생한 것이 아니라 이미 팔레스틴에서 발생했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몇가지 이유로 논증할 수 있다.

1)W.B.이론에 의하면 안디옥 교회는 헬라 이방인 중심의 교회라고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다. 안디옥 교회는 유대인들과 헬라 이방인 그리스도인 간에 섞인 교회다. 그래서 그들 유대 그리스도인들과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섞여 먹고 마시는 문제가 발생했다. 바울이 갈2장에서 말한 바와 같이 그 문제로 베드로와 충돌하였다. 그래서 안디옥 교회는 헬라 이방인 교회가 아니고 유대인과 이방인 그리스도인이 섞인 교회였다 .그래서 그 곳에서 신학적인 leadership은 유대 그리스도인에게 있었다. 바라바,바울,베드로-이 사람드이 우리가 아는 안디옥 교회의 목사들이고 신학자들이다. 사실은 안디옥 교회 뿐만 아니라 어디에서나 1세기 동안 신학적 지도력이 유대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었다. 우리 신약성경이 그것을 잘 반영하고 있다. 1세기 말부터 신학적 지도력이 헬라 이방인 그리스도인에게 넘어갔다. 그래서 신약성경은 어쩌면 누가 한 사람만 빼고 모두 유대인들에 의해 쓰여졌다. 그러나 여러분들이 아는 안디옥이 이그나티우스부터 시작해서 1세기 말 2세기 초에 활약한 점점 신학적 지도력이 이방인 그리스도인에게로 넘어갔다. 그것은 1세기가 분수령이었다.

그런데 W.B.가 설정하는 1세기 중반의 안디옥은 우리가 아는 신학적 지도자들은 바울,바라바,아볼로 등 모두 유대인들이었다. 구성은 섞인 교회였는데 신학적 지도력은 유대인들이었다. 차라리 유대교적 색체가 강하게 나타난 곳이 안디옥이었다.

2)W.B.가 전제했던 serapis,osiris,isis 등의 신비종교는 주후 1세기에는 그렇게 발달하지 않았고 주후 2세기 말부터 발달하기 시작. 기껏해야 2세기 말에 발달한 신비종교를 W.B.는 신약의 주라는 칭호를 통해서 전개된 기독론을 설명하는데 원용하는 것은 시간적으로 뒤바뀌었다.

3)W.B.이론에 의하면 예수에 대한 헬라 이방인들-곧 신비종교에서 신을 예배하던-에서 처음으로 시작하였다고 하는데 그것이 아니고 팔레스틴에서 부터 시작했다. 이것은 O.Cullman이 상당히 강조하고 있다. 왜 예배가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하는 것이 중요하냐고 하면 예배가 시작된 곳에서 예수를 현재의 주로 인삭하고 고백하는 것이다. 그래서 안디옥의 헬라 이방인에게서 부터 시작했다면 물론 주라는 칭호는 거기서 발달했을 것이다. 그러나 팔레스틴에서부터 예수에 대한 예배가 시작되었다면 팔레스틴에서부터 지금 현재 군림하는 주로 예수를 인식했을 것이다. 그래서 O.Cullman이 이것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이 예수이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후 처음 모여서 최후의 만찬을 되풀이 한 것이 떡을 떼었다(행2:42). 이 떡을 뗌으로서 생전에 예수와 더불어 먹고 마시던 체험을 갱신하고 예수와 더불어 교제를 새롭게 했다. 그래서 요 21장, 눅의 엠마오 제자들과 같이 우리는 부활한 예수를 그리스도인들이 체험하고 알아보는 것이 부활한 예수가 베푸는 식탁에서 같이 떡을 뗌으로 이루어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것을 Appearance meals라고 한다. 부활한 예수가 나타나서 식사를 같이 한 일련의 체험들을 통해서 팔레스틴의 원래의 예수의 처종자들은 십자가에 죽기 전에 자기들과 먹고 마시는 ࠉࠃࠈ가 지금 생생하게 살아 계셔서 자기들에게 마찬가지로 식탁을 배설하는 분으로 체험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제 그 분은 생전에도 절대 주권을 주장하는 엄청난 주였는데 이제는 부활로 하나님에 의해 높임받은 주로 체험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체험에서부터 시작해서 예수에 대한 예배가 시작되었다. 그 예배의 중심은부활한 높임받은 예수의 경우는 식사를 같이하는 걸로 곧 우리 말로 하면 성찬식이 예배의 중심이 되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안식일날 회당에 나가서 하나님을 예배하고 그 다음날(안식일 다음날) 모여서 떡을 떼고 부활한 예수와 더불어 교제를 나누고 그 예수를 예배하게 되어 그날을 주의 날이라고 하였고 그날 자기들이 되풀이한 예수의 떡뗌을 주의 만찬(ՊՕՑՉՁՊՏՍ ՄՅՉՐՍՏՍ)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예수의 최후만찬이 주의 만찬 성만차으로 새로운 의미가 부여되어서 시작된 것이다. 그래서 토요일이 아닌 일요일이 그리스도인의 예배의 날이 된 것이다. 그 일요일은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날인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예수에 대한 예바가 부활을 체험한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서 금방 발생한 것이지 헬라 이방인들에 의해서 처음 시작한 것은 아니다. O.Cullman책을 읽어 보세요.

4)W.B의 이론에 Archilleo heel로 작용하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고전 16:22에 있는 "ՌՁՑՁՍՁՈՁ"원래 헬라어로 쓰여진 고전에는 바울은 아람어 '마라나타'를 그대로 두고 있다. 한국말에도 그 정신을 살려서 그대로 두어야 하는데 번역하였는데 그 번역이 잘못되었다.

이것이 아람말이라는 것이 중요하다. 초대교회에서 신앙고백은 번역되는데 그것은 그 뜻이 정확히 전달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도 용어등 예배용어는 의식 소의 liturgical language는 원어가 지탱이 되는 경향이 있다.(ࠐࠈࠀ ࠀࠁࠀ ՌՁՑՁՍՁՈՁ).이런 말들은 예배에서 사용되는 기도용어이다. ՌՁՑՁՍՁՈՁ는 예수에 대한 예배가 팔레스틴에서 시작되었음과 에수를 주로 고백하고 주로 부르는 것이 팔레스틴에서 시작되었음을 증거하는 아주 중요한 자료이다.

그래서 영국은 Rowlinson은 Cullman은 이것을 ՌՁՑՁՍՁՈՁ가 비밀이우리에게 간직시켜준 W.B.의 Archilleo heel이다.

ࠀࠛࠀࠏࠃࠈ는 두 마디로 되어 있다. 옛날 언어는 띄어 쓰기가 없었다. 그러므로 적당히 띄어야 한다. -ࠀࠛ ࠀ ࠏࠃࠈ

이것은 두가지로 가능한데 ࠏࠃࠈ ࠀࠛࠀ(①) 와 ࠀࠏࠃࠈ ࠀࠛ(②)이다. 어떻게 떼느냐에 따라 의미가 조금씩 달라진다.

①은 주께서 임하셨다. 또는 주께서 임하신다. 가 되어서 신앙고백이 된다. 그래서 이미 오셨다. 또는 곧 오신다는 신앙고백이 된다. :우리말 번역이다.

②주여, 오소서라는 명령어법의 기도가 된다.

그럼 어느것이 더 옳은 독법인가? 이것을 가리기 위해서 기도나 예배의 언야가 원어로 남는 경향이 있다. 신앙고백은 번역되는 경향이 있다. 그렇다면 그것이 우리에게 얼른 무슨시사를 하냐면 이것이 기도일 가능성이 더 많다는 시사를 준다. 그래서 ࠀࠏࠃࠈ ࠀࠛ로 읽어야 한다.

그러데 다행히도 우리를 그정도 애매한 짐작으로 하지 않게 하는 것은 Didache 10:6-1세기 말 12사도들의 가르침이라는 책-에 성찬식을 중심한 예배때에 드리는 기도에 ՌՁՑՁՍՁՈՁ가나온다.-기도로-

계22:20에 "주여 오소서"가 기도로 번역되어 끝난다. 이런 것을 볼 때에 ՌՁՑՁՍՁՈՁ가 초대교회때 기도로 쓰인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아람말로 되어있음으로 분명이 팔레스틴에서 예수를 주로 아람말로 고백했고 그가 다시 오기를 기도했으니 예수가 기도의 대상이 되었으니 곧 에수가 예배의 대상이 된 것이다. 파레스틴에서 벌써 예수가 예배되었고 주로 고백되었고 한것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이로서 W.B.의 이론이 ՌՁՑՁՍՁՈՁ한마디로 완전히 무너졌다.

초대교인들이 자기들과 같이 식사를 나누었던 예수, 십자가에 죽고 부활함으로 자기를 떠나갔던 그 예수를 다시 오시도록 기도할 때는 무엇을 전제하느냐면 그 예수가 지금은 주로 존재한다는 것을 전제한다. 곧 하나님 우편에 높임 받았음을 전제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를 주로 고백하고 그의 다시 오심을 기대했다.

그주에 대한 그들이 태도는 절대적인 순종이었다. 여기서 우리는 초대교인들이 입장에 서보자. 예수의 생전에 예수의 제자들이 에수를 무엇으로 불렀다고 랍미. ࠉࠃࠈ라고 불렀다. 예수의 자기 계시가 점점 진전되면서 ࠉࠃࠈ라는 말이 점점 무게를 갖게 되었다. 왜? 예수의 자기 계시가 진전되면서 더 절대적인 권위를 주장하고 그의 제자들을 절대적인 순종에로 요구했으니까. 선생 정도가 아니고 메시야보다 더한 이로서의 권위를 갖게 되었다 .그런데 그 에수가 십자가에 죽고 하나님에 의해서 부활되어서 높임받았다는 것을 체험하고 그 예수가 다시 나타나며 생전에의 식사의 교제를 새롭게 했을 때 그런 일련의 사건을 체험한 초대교인들이 계속해서 똑같은 말로 예수님을 ࠉࠃࠈ라고 고백하게 되었는데 -ՌՁՑՁՍՁՈՁ라 이것을 증명- 이제는 이 주라는 말이 선생, 다윗의 아들 ,메시야 정도가 아니라 신적인 존재로(기도의 대상, 예배의 대상이 되었으므로)-신적인 존재란 의미를 띠게 되었다. 이것을 헬라 그리스도인鑁르이 이어 받아서 아주 정당하게 ࠉࠃࠈ을 ՊՕՑՉՏՒ로 번역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교의 새로운 것은 팔레스틴 유대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시작되었고 헬라 이방인들이 이것을 이어받았을 따름이지 W.B. 나 Bultmann이 말한대로 여기서는 예수를 재림하는 분으로만 기다리는게 여기서는 전혀 새로운 -예수를 예배하고-종교가 발생했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

ՌՁՑՁՍՁՈՁ가 기도다(주여 오소서) 이 기도는 2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다.

①종말에 재림하신 주에 대한 기도. 오셔서 빨리 악과 고난의 세상을 종결 지으시고 당신의 나라를 완성하셔서 우리를 구원하시옵소서 하는 기도다 .그래서 종말론적인 기도다.

②동시에 이 기도는 '예배의 부름'이다.

우리가 여기 당신의 이름으로 식탁을 두고 둘어 앉아 모였으니 주여 여기에 여기에 임재하시고 생전에 베풀던 식탁을 베풀어 주시옵소서 하는 예배의 부름이다. 그래서 Lore's Supper이 이루어지도록 하소서. 마18:20 나의 이름으로 2,3사람이 함게 모이면 내가 너희와 함께 하겠다. 계3:20 (초대교회에서는 예배의 시작과 끝에 ՌՁՑՁՍՁՈՁ를 고백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성만찬 때에 고백한 didache에서 볼 수 있다)

그래서 예수의 생전의 교제를 새롭게 하고 부활 직후에 나타나셔서 식탁을 배설하셨던 주를 새롭게 체험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예배와 종말의 관계를 예배의 진정한 의미를 알게 된다. 주는 종말에 재림하신다. 그 종말에 재림할 주께서 예배가운데 지금 오셔서 우리로 하여금 종말에 오실 주를 체험하게 한다. 지금 현재 그래서 예배는 하나님 나라에서의 종말론적인 잔치의 현재적인 성취다. 종말에 하나님 나라에서 맛볼 그 잔치-예수께서 하나님 나라를 잔치로 비유하셨다. 늘 현재에서 미리 맛봄이다.

성만찬은 주의 오심의 현재적인 실현이고 하나님 나라에서 잔치의 현재적 실현이다. 예배 가운데서 우리는 종말을 미리 체험한다. 예배 가운데 주와의 만남이 이루어지고 예배 가운데 그 주로부터 우리의 죄악성에 대한 심판을 체험하고 예배가운데 그 주로부터 치유와 구원을 체험한다. 예배가운데 우리는 완성될 하나님 나라에서 잔치와 교제를 체험한다. 그러니까 예배가 종말의 성취다. 반면에 예배에서 체험하신 주의 오심과 그 주의 구원은 종말에 주께서 강림하실 것에 대한 증거요 뒷받침이다.

우리의 예배가 종말의 성취로서 이런 의미를 가지고 있다.

실제 우리의 예배에서 이런 것들이 체험되게 해야 한다. 예배가 말씀 선포와 성만찬이 같이 이루어져야 한다. 프로테스탄트 교회에서는 역사적 필요성 때문에 성만찬을 자주 안하는 걸로 되어 있는데 원래는 주일날마다 해야 한다. -신약성경에 따라서- 말씀 선포와 성만찬이 같이 간다. 로마 카톨릭에서 말씀 선포가 약해지고 성만찬이 마력을 발휘한는 magical하게 발달하는 것에 대한 반발로 종교 개혁자들이 성만찬을 조금 소홀히 했다고 할까. 그러나 칼빈 스스로도 성만찬을 매주 하기를 원했다. 주는 말씀으로 뿐만 아니라 성만찬으로 임재하신다. 그러므로 같이 행해져야 한다. 예배와 종말은 밀접한 관계가 있다. '계'이 종말론적인 책이고 예배의 책이다. 요한이 어느날 환상을 봅니까?주의 날에-예배 시간에- 하늘에서 예배의 상황을 본다. 주일날 하늘에서 벌어진 천사들이 예배드리는 상황을 보는 것이다. 그것이 땅에서의 예배로 상응되어야 한다. 하늘에서의 예배가 땅에서 신현이 될 것이다. 그것이 종말론적 드라마로 펼쳐질 것이다. 그래서 계시록은 종말론적인 드라마를 그린 책이지만 사실은 예배의 책이다.

ՌՁՑՁՍՁՈՁ 기도는 우리에게 주라는 칭호가 부활하고 높임받은 그리스도에 대한 칭호라는 것을 가르쳐주고 "주"라는 칭호가 주로 쓰이는 context는 예배와 종말론적인 소망을 표현하는데 사용한다.

주라는 칭호가 주로 쓰이는 context는 예배와 종말론적인 소망을 표현하는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