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신학 Ⅱ 제 14강

초대교인들은 에수의 이와같은 사건을 통해서 예수의 십자가 사건을 체험하고 그가 메시야, 주,마지막 아담 등의 구약과 유대교가 제시하는 카테고리들을 예수거에게 붙여서 신앙고백을 하고 그를 선포할 때에 구체적으로 예수의 의미, 사건의 의미를 어떤 부분은 어떻게 설명하려고 하는가 그것을 살펴보고자 한다. 예수가 메시야, 그리스도라고 했을 때 예수이 어떤 점을 설명하려고 하는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을 때 메시야와 어떻게 다르며 구체적으로 예수의 어떤 성품, 신격, 기능의 어떤 부분을 설명하려고 하며 예수를 마지막 아담이라고 했을 때 예수를 어떤 그림으로 어떤 틀로 우리에게 설명하려고 하는가?

기독론적 칭호들이 혼동되어 사용되는 것이 아니고 뉘앙스가 조금 씩 다르다. 쓰임새가 다르다. 칭호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어떤 면을 찾을려고 하는가를 살펴볼 것임. 그래서 초대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한 신앙고백의 전체 의미를 파악할 수있으며 그의 시점을 복음으로 선포할 때의 전체___가 되는 의미를 헤아릴 수가 있다. 그래서 그것이 신약신학Ⅱ의 과제이다.

원시교회가 예수를 어떻게 선포했는가에 대한 예를 몇가지 들자.

바울 서신에 부분들이 케리그마가-다른 부분은 나오지만-인용하자.

바울이 자기보다 먼저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들에게 받은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고백과 케리그마의 전승을 여러번 인용했다. 최근 연구되는 부분이 바울의 신앙고백, 예배의식,찬송가등을 발굴해서 초대교회의 신앙발전 과정을 살피면서 동시에 바울이 먼저 사람들에게 이어받은 전승을 어떻게 사용,폐지하고 있는가를 살펴서 바울 신학의 특징을 살피고자 함.

(고전15:1-8)

1절:ՔՏ ՅՕՁՃՃՅՋՉՏՍ을 상기.ՐՁՑՁՋՁՌՂՁՍՅՉՍ(받았다) 그리고 그 안에 서 있고 구원을 받았다. 그리고 말씀을 내용과 함께 상기시키고자 함.

2절:먼저는 시간적인 먼저의 의미다. ՐՁՑՁՄՉՄՏՍՁՉ(넘겨주었다):ࠌࠁࠗ

중요도로의 먼저의 의미 ՐՁՑՁՋՁՌՂՁՍՅՉՍ(받았다) ࠘ࠈࠎ

이 두동사는 랍비들이 자기 제자들에게 가르침을 전수,전승 하는데 사용된 전문용어. 랍비들이 제자들을 가르치는게 가장 힘들여서 강조한 것이 일점 일획도 틀림없이 암송하여 그대로 전승. 바울이 지금 고린도 사람들에게 선포한 베드로의 증언에서 이런 전문용어를 쓰고 바울 스스로도 이 복음을 받았고 고린도 사람들에게 전함. 랍비들이 전승과정에 사용되는 전문용어를 쓰면서 바울이 선포했고 그때 선포한 복음들이 문자 그대로 어떤 말을 통해 강조하고 하는 것은 바울이 먼저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들로 부터 받은-소중한 것으로-그대로 교린도에 전함. 자기가 상기시키려고 하는 복음이 자기가 만든 것도 아니고 자기가 고친 것도 아니고 먼저 그리스도인 된 사람들에게 받은 것을 그대로 넘겨줌을 말함으로 복음의 신실성과 보편성을 강조하고자 함.

바울전의 초대교회 복음

3절:ՏՔՉ ՗ ՁՐՅՈՁՍՅՍ(죽고)

4절:ՏՔՉ ՅՔՁՖՇ(장사)

ՏՔՉ ՅՃՇՃՅՑՔՁՉ(부활)

5절:ՏՔՉ ՙՖՈՇ(보이시고-부활하여 나타남을 나타내는 전문용어),12제자

고린도 인들을 설득하며 바울이 증거를 덧붙인 것.

6절: 500

7절: 야고보,모든 사도

8절: 바울

3-5절: 복음이라는 것이 4개의 ՏՔՉ절로 구성되었다. 이것을 요약하면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인데 이것이 복음이다. 그런데 이것을 원시 초대교회가 이 주장을 시작함. 그때 쓰인 칭호가 그리스도이다. 도대체 그 당시는 메시야는_______에 있지 않는가? 어떻게 그리스도의 죽고 부활하며 이것이 복음이 되느냐 어떻게 이런 발전이 있느냐? 이때 죽음과 부활과 연결된 칭호가 그리스도라는 칭호다.

(롬1:1-5)

1절:하나님의 복음:하나님이 복음의 저자

2절:약속이(구원의 계획이) 성취:구원사적으로 성취,구원 계획이 성취

3절:하나님의 아들에 관한 것이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로 복음을 요약.이것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 (1:16) 복음을 다시 정의:구원의 능력:로마서 전체의 요약:바울은 즐겨 이 칭호를 사용한다.

3절:하나님의 아들에 관한 정의:육신으로는(인간성을 말하는 것이냐?) 다윗의 아들:나단의 예언이 숨어 있음:복음이 하나님의 아들로 정의되는데 이것이 아주 오래된 예언의 신앙을 인용. 이 용어는 이 방인에게 별 필요가 없으므로 바울 서신에는 잘 나타나지 않음.

4절:하나님이 아들에 관한 정의:성결의 영으로는(영적으로는 이냐?)

부활로 말미암아(원인) |

부활때부터(시간) |

바울은 보통 성령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셈족의 언어(아람어를 문자 그대로 번역한 것임.)

주권을 행사하는 주가 됨.

3-4절:

3:하나님의 아들에 관한 것: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신앙고백과 케리그마의 형식과 바울은 즐겨 하나님의 아들로 복음을 요약했다. 예를 들면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어서 이렇게 강조를 했느냐? 롬1장에서 중요한 문제로 등장하는 것은 바울이 16절에서 다시 한번 복음을 정의하는데 '모든 믿는 자들에게 구원의 능력'-구원론적 정의

16절은 '롬'전체의 요약이라고 볼 수 있다. (바울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단어를 통하여 한마디로 복음을 요약하는 곳을 여러군데서 볼 수 있다)

3:하나님의 아들에 관한 정의:육신으로는(ՊՁՔՁ ՓՁՑՊՁ) 다윗의 아들로

육신있는 예수의 인간성을 말하자면 다윗의 아들로 나타나고 4절의 신성으로는 하나님의 아들로 나타난다. 아니면 관점의 차이에서 육신으로 보면 영적인 관점으로 진짜로 예수를 영적으로 잘 이해하고 있으면 하는 말인데 복잡한 말이다. 아니면 이 세상에서(ՊՁՔՁ ՓՁՑՊՁ) 우리가 말하는 세상이 아니고 영원히 높임받은 그리스도,영원한 세상에 관심을 갖고 하는 말-번역이 어려운 말이다.

4:영적으로는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로 말미암아:원인으로 번역

+-부활한 때부터:시간으로 번역

성결의 영으로는 능력으로가 인정되었다는 동사에 붙는 부사구로 되었는데 (개역성경에는) 능력으로가 하나님이 아들에 붙는 형용사로, 능력을 주권적으로 행사하는 아들로 등극했다. 만유의 주가 되었다. 그래서 주 예수 그리스도라고 되어 있다.

여기에는 나단의 예언이 숨어 있다. 재미있는 것은 복음이 하나님의 아들로 정의되는데 이것이 아주 오래된 셈족 언어를 사용하는 바울전의 그리스도인들의 신앙고백을 만들었고 바울이 인용한다는 흔적이 많이 나타난다.

성결의 영:바울은 보통 성결의 영이라고 하지 않고 ՐՍՅՕՌՁ ՔՏ ՁՃՏՏՍ(성령)이라고 하는 용어를 사용하는데 여기서는 ՁՃՉՙՓՕՍՇՒ라는 셈족적인 언어형식으로 원래 아람어적인 신앙고백을 문자적으로 번역한 것이다.

또 다윗의 아들이라는 칭호가 이방인들에게 별 의미가 없으나 바울 서신에서는 잘 나타나지 않는데 여기서는 다윗의 아들이라고 말하는데 나단의 예언을 중시한 아주 원시 예루살렘 셈족 언어를 쓰는 이 사람들의 성서를 위주로(?) 그때 벌써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우리가 아는 복음이라는 것이 선포되었다. 여기서는 그리스도의 부활이 복음이라고 선포되었다.

(빌 2:6-11):그리스도에 대한 찬송시

대부분의 학자들은 찬송시가 바울전에 찬송시를 바울이 인용하고 있다고 본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 바울이 지었다고 본다. 그러나 대부분의 학자들의 견해를 따르면 찬송시의 11절을 보면

11: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며--

바울 전에 주라는 칭호가 그리스도에게 주어졌고 이것이 복음이 선포형식에 사용되었다. 그래서 십자가의 예수의 죽음과 부활 후에 이러한 칭호들이 주께 붙여져서 예수께 선언되었는데 이것을 살펴볼 것이다.

예수의 전 경력은 메시야적 사건이다. 구원의 사건이다. 종말의 사건이다. 예수의 삶과 죽음,가르침은 하나님의 종말의 구원사건으로 우리의 구원을 이루신 분이다. 우리를 위해 담당하신 분이라. 이런 인식들이 일어났다. 이 인실을 고백하고 선포하는 형식이 십자가=그리스도=하나님의아들=주=지혜=어린 양이라는 케리그마의 형식으로 표현. 이런 칭호들은 십자가가 하나님의 종말에 사건을 이루시는 분이라는 것을 다양하게 표현하고자 하는 수단들이다.

신약신학2에서는 대표적인 기독론적 칭호들을 살펴봄으로서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안에 예수를 통해 일어난 종말의 하나님의 구원의 사건을 어떻게 이해하고 선포했는가를 살펴보고자함.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우리의 신앙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갖게 되는데 왜냐하면 우리의 신앙은 신약성경에 담겨져 있는 초대교회의 신앙고백에 초대교회의 복음 선포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국 이러한 기독론적인 신앙고백은 궁극적으로 우리로 하여금 신학의 모든 다른영역 즉 신론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낳게 된다.

가령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를 통해서 보겠지만 예수를 통해서 하나님의 종말의 구원 계시가 발생했다는 인식을 예수를 통해서 스스로를 완전히 계시하시고 자기 종말의 구원을 이루신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냐? 그런 점에 대한 새로운 신인식을 가져왔던 것이다.

그래서 신약성경에서 자연스럽게 하나님을 인식하고 신앙고백하게 된 것이다. 이것은 구약성경과 비교해보면 다른 신인식인데 이것이 어떻게 가능하게 되었는가?

이런 것을 보게 되는게 신론뿐만 아니고 구원론,교회론,종말론 등의 큰 신학의 주제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종말에 구원과 계시를 이루신 분이라는 기독론적인 인식이 이런 모든 신학적인 주제에 있어서 새로운 인식과 새로운 신앙고백을 낳게 했다.

이런 칭호들을 통해서 예수 안에서 일어난 하나님의 종말의 계시와 구원의 사건들에 대한 초대 교회들의 이해를 살펴보면서 이러한 기독론적인 인식이 결국 신학의 큰 주제들에 어떠한 새로운 인식을 가져오게 되었는가를 알게 된다.

1. "예수=그리스도"라는 신앙고백

ԩՇՓՏՕՒ (ՅՓՔՉՍ) ՗ՑՉՓՔՏՒ

՗ՑՉՓՔՏՒ는 헬라어의 ՗ՑՉՙ라는 동사에서 부터 왔는데 '기름 부은다'는 뜻. 헬라어로는 아무 의미 없는 말이다.

՗ՑՉՓՔՏՒ는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인데 헬라어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이것은 히브리어 ࠇࠉࠚࠈ의 직역이기 때문에 유대교의 메시야 사상에서 ՗ՑՉՓՔՏՒ의 의미를 찾아야 한다. 그러므로 이 시간에는 유대교의 메시야 사상을 살펴보고자 한다. 논지의 하나를 제출하면

신약성경 당시 유대교의 메시야 사상은 통일된 것이 아니고 다양하고 심지어 모순되기까지 한 상태에 있었다.(예,요1:19):예루살렘에서 파견된 사람들이 요한에게 질문

"네가 누구냐?"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엘리아냐? 그 선지자냐?

광야에서 부르짖는 소리이다. 이사야의 말씀을 인용해서 표현.

그 다음에 요한이 예수에 대해서 증거 하는 것이 나온다. '성령으로 세례를 줄 분''하나님의 아들'

그 다음날,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증거하고 요한의 제자가 예수에게 넘어오는데 안드레게 예수에 대해서 베드로에게 말하는데 메시야를 발견했다. 빌립이 나다나엘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예언한 분을 발견했다. 나다나엘이 고백. 하나님의 아들 이스라엘의 왕이라고 말함. 반면 예수는 자신을 '그 사람이 아들'이라고 함.

요1:19-51은 증언들의 3section이라 하는데 '요'본문에서 보여준 예수의 계시를 보고 믿게된 사람들이 신앙고백한 것을 미리 모아 놓은 서문적인 section이다.

그래서 '예수=그리스도'는 '요' 본문이 '요'서문에 나오는 제자들의 그리고 요한의 신앙고백을 통하여 독자들로 하여금 요한의 자기 계시를 보고서 예수에 대한 신앙고백을 하라고 주문하는 것이 서문의 기능이다.

여기서 관심을 갖는 것이 보는 바와 같이 다양한 칭호들이 종말의 구원자라는 다양 창호와 사상들로 표현되었다. 여기서 예수 당시 다양했던 유대교의 메시야 사상이 반영된 것을 볼 수 있다. 메시야를 유대인들은 종말에 엘리야가 다시 돌아로 것으로 보았다 엘리야가 돌아와서 무슨 일을 하느냐에 대한 의견이 분분. 엘리야가 메시야의 준비자로 오느냐 스스로 구원을 행하는 자로 오느냐 하여간 종말에 엘리야가 돌아오리라 믿는 사람들이 많았음.

공관복음에서는 예수가 이 사상을 받아 세례요한이 엘리야라고 한다. 그 선지자는 신18:15절에 근거해서 나왔을 것이다. -확실하지는 않다.

여기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모세와 같은 선지자를 약속. 이 약속에 근거해서 종말에 제2의 모세가-종말의 선지자가 나타나서 제2의 출애굽을 이룰 것이다. 온 이스라엘 백성을 이방인의 굴레에서 해방시키고 모세가 광야에서 기적을 베풀었던 모든 기적들을 다 베풀고 모세가 받았던 하나님의 율법에 상응하는 새로운 종말의 하나님의 계시를 보여줘서 이스라엘 사람들로 의롭게 할 것이다.

그래서 제2의 출애굽을 할 제2의 모세와 같은 선지자를 기다렸다. 그러면 그 선지자는 메시야와 무슨 관계가 있느냐? 그가 메시야냐 하는 것이 유대문서에 불분명하다. 하나님의 아들, 이스라에의 왕은 메시야의 칭호와 연결이 되는데 나단의예언 중에 나오는 메시야 사상이 복잡하고 다양하게 전개된 유대 메시야 사상 중에서 주류를 이룬다. 하나님의 어린양이 나오는 '요'은 어떤 배경을 가지느냐? 이사어 53장의 배경이 유력. 또는 '계'의 묵시문학적 배경을 갖고 있다.

akkdeak Issac이라고 아브라함이 모리아산에서 이삭을 묶은 것이 유대인들에게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데 랍비들은 모든 아브라함의 자손들을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선언하는데 왜냐하면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않고 하나님께 제물고로 바친 공로가 하도 커서 아브라함의 모든 후손들의 죄를 덮고도 남는다. 그래서 이삭을 Akedak Issac이라고 함.

유대학자는 '요'의 세상 죄를 지고가는 어린 양이라는 표현이 Akedak Issac의 사상을 이어받았다고 설명한다.

그런데 사 53장 배경이 가장 유력한데 또는 어떤 사람은 예수가 유월절 양으로 나타났다고 하는데 원래 유월절 양은 제사의 의미가 없다. 출애굽 시기 유월절 양은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름으로서 죽음의 사자가 이스라엘 족속의 집안은 통과하고 애굽 사람들의 집에 가서 장자를 죽이는 사건인데 유월절 양의 피는 이스라엘 죄를 속죄하는 제사의 의미가 없었다.

그런데 '요'에 있어서 예수가 유월절 양으로 나타난다. 예수가 가령 니산 14일 정오에 십자가에 못박혀 죽는다. 요한복음에 의하면. 여기서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힌 날짜가 공관복음과 요한복음이 다르다. 공관복음에는 닛산 15일 못박힘으로 나타남.

니산 14일은 유월절 양을 성전에서 잡는 날. 유월절 양이 희생되는 날에 예수가 못박히는데 예수가 유월절 양으로서 출애굽의 구원의 의미를 후형적으로 완성한 분이다. 출애굽의 구원사건의 전형으로 암시한 그 구원을 종말의 구원자로서 후형으로 완성한 것이다. 예수가 못박힌 사건이 기록된 공관복음도 요한복음과 뜻은 같다.

15일 날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히면 14일에서 15일로 넘어가는 밤이 해지면 새날인데 그 순간에 예수가 최후의 만찬을 했다. 그래서 공관복음의 날짜를 따지만 최후의 만찬이 유월절 만찬이다. 예수의 죽음이 공관복음의 연대로 따져도 유월절의 의미를 후형적으로 완성한 구원의 사건이다. 예수의 죽음이 요한복음의 연대로 따져도 유월적의 의미를 후형적으로 완성한 구원의 사건이다. 이런 의미를 가진다.

그러면 왜 날짜가 다르냐?

하나의 해결책은 당시 팔레스타인이 사용하는 달력이 상이할 가능성. 쿰란 문서에서 보면 당시 성전을 장악하고 있는 사두개파의 달력과 쿰란의 엣센파가 상이한 달력을 사용했으나 성전을 장악하고 있는 사두개의 달력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따랐다. 그래서 사두개파와 에센파가 절기 지키는 것이 조금 달랐다. 이것을 보았을 때 공관복음과 요한복음이 상이한 달력을 써서 유월절에 잔치를 지키는 것이 상이한 달력의 차이이다.

요한복음의 어린양은 사 53:7ff에서 있는데 그러나 동시에 이 양은 이사야의 고난받은 종이 양으로, 속죄의 제사의 양만이 아니고 유월절 양으로 나타났다. 유월절 양이 원래 제사의 의미가 없었는데 신약시대쯤 와서는 구약의 다양한 제사의 의미가 서로 중복되어 각 제사가 정확한 의미를 갖지 못했다. 그래서 유월절 양이 원래 제사의 의미가 없었는데 이때쯤에는 속죄의 의미를 가질 가능성이 있다. 심지어 유월절 양이 속죄양의 의미와 겹쳐질 가능성도 있다.

하여간 메시야 모세와 선지자가 예언한 분, 모세가 예언한 분은 신18:15에 모세와 같은 선지자를 선지자가 예언한 분은 주로 엘리야나 나단의 전승을 이어받은 그 메시야를 두고 말하는지도 모른다.

지금 내가 요1장 증언들이 section을 예를 들어 보여줄려고 하는 것은 유대교의 이와 같이 다양한 메시야 사상이 있었다. 이것을 정리해보면

1)신 18:15 같은데 뿌리를 둔 종말의 선지자-혹 엘리야와 동일시 될 지도 모른다. 다시 살앙온 엘리야를 기다림. 이 사상은 하나님의 선지자로 하나님의 뜻을 선포하고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을 예비.

2)나단의 예언 삼하7:12-16

선지자 나단이 다윗에게 하나님의 약속을 전달하는데 다윗의 씨라고 . 다윗의 씨 하나를 하나님께서 허락하여 다윗 왕위에 앉히고-(이스라엘의 왕)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이스라엘의 진정한 왕은 하나님이며 그런데 하나님 대신에 하나님 백성 위에서 왕 노릇하는 자의 의미로 그를 나의 아들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의 대권을 받아서 하나님을 대신하여 통치하는 왕이다. 다윗의 아들,하나님의 아들이 메시야 칭호들로 메시야 사상을 문서들에 일으킨다.

이 삼하 7:12-16은 다윗 왕조를 설립시키는 하나님의 언약으로서 이것에 근거해서 시2:7/89/139편 같은 등극시에서 다윗의 자손이 다윗의 왕위에 등극할 때에 하나님 백성 이스라엘에 대해 합법적으로 하나님 대신 통치하는 왕이라는 것을 하나님이 선언. 이 사상이 계속되다가 중요한 전기를 맞게 되는데 유대인들이 바벨론에서 팔레스타인으로 돌아와 유대 나라를 재건할 때 돌아온 유대인들이 지도자중 하나가 수룹바벨인데 다윗가의 왕자인 스룹바벨이다.

이가 성전을 짓는 일을 하는데 나단의 예언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다윗의 아들 하나를 택하여 그를 다윗 왕위에 앉히고 하나님 아들로서 선언하고 그로 하여금 성전을 짓게 하겠다고 한 나단의 예언이 역사속에서 실현되어 다윗 왕조가 재건될 줄 알았다.

수룹바벨을 중심으로 한 또 한번의 나단의 성취-다윗 왕조가 재건된 것-이 방인의 압제에서 벗어나서 번영하는 나라로 세울 것에 대한 열망이 대단했다. 그런데 스룹바벨도 희미하게 끝났고 그 당시 지었던 성전도 형편없을 뿐만 아니라 외세의 압제에서 벗어나기를 커녕 계속해서 페르시아의 통치를 받고 알렉산더의 침공으로 멸망하여 알렉산더의 후계자인 톨리미 왕조와 셀류키드에게 잔인한 통치를 받게 되었다. 여기서 다시 한번 더 실망한 유대인들은 나단의 예언을 종말에 하나님께서 성취할 것으로 재해석하기 시작했다.

그러한 근거는 벌써 바벨론의 압력을 받고 있던 때부터(렘21:5) 벌써 예레미야때부터 나단의 예언이 미래에 다시 한번 성취될 것으로 기대했고(슥6:12) 스룹바벨에 의해 성취도는 줄 알았고 구약 내에서 다윗 왕조가 멸망할 것을 뻔히 알고 있는 상황에서 일단 바벨론에서 유대가 멸망해서 패역한 유다에 대한 심판이 있은 후에 다지 하나님께서 다윗에 대한 자기 약속을 지켜서 다윗 왕조를 재건하고 새롭게 할 것이라는 사상이 쭉 있었다. 그래서 이(렘23:5)에 다윗의 씨라를 말이나오는데 이것은 '렘'보다 더 거슬러 올라가 암9장 미가 5:1에서도 벌서 다윗 왕조가 멸망 직전 위기속에서 다윗 왕조의 멸망을 미리본 선지자들은 바벨론에 의한 하나님의 심판 후 다윗 왕조를 재건할 것으로 보았다. 그래서 그때의 소망의 근거는 하나님의 다윗에 대한 약속을 이었다. 그것은 선지자들이 암,미,사2장11장 렘23장 등에서 심판후에 하나님께서 약속을 다시 실현시킬 것을 보았도 이 약속을 미래에 투사했다. 이것이 스룹바벨에서 진짜 일어날 것으로 보았으나 그렇지 않았으니 유대인들은 종말에 하나님께서 이루실 것으로 보았다. 여기서 나단의 예언에서 메시야 사상이 주종이 나오기 시작한다. 그것은 신약시대에서는 어디서 볼 수 있냐면 여러 묵시문학에서 볼 수 있다. 쿨란 문서에서도 메시야가 다윗 혹은 다윗의 아들로서 지칭되어 그들을 기다리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대표적으로 솔로몬의 시편이다. 주후 1세기 신약시대 쯤에 쓰여진 책인데 바리새인의 작춤인데 17,18장에 강력한 메시야 사상이 전개되는데 이 메시야 사상은 어떠하냐면 지금은 유대인들이 핍박을 받고 살지만 종말에 하나님께서 다윗의 아들을 보내서 이방민족을 멸망시키고 葨윗 왕조를 재건하고 이스라엘에게 영광과 번영을 가져다 줄 군사적 전쟁의 영웅 혹은 승이랒로서 정치적 왕으로서의 다윗의 아들을,메시야를 기술하고 있다.

그래서 그가 이방민족을 다 복종시켜서 이스라엘로 하여금 세계를 정복하고 다스리는 민족으로 삼기 위해 다윗 왕조를 재건하는메시야 사상이 나타난다. 그래서 다윗의 아들, 다윗의 씨, 다윗의 가지 등이 주된 메시야적 칭호로서 나오는데 최근가지 나단의 예언에 근거해서 하나님이 아들로 유대문서에 혹 메시야적 칭호로 쓰인 흔적이 있었느냐? 없었느냐? 최근가지 종교사학파들은 하나님의 아들은 메시야적 칭호가 아니었다고 보았다. 왜냐하면 유대 묵시에 메시야를 하나님의 아들로 지칭한 곳이 없다고 봄. 그러나 최근에 2개의 쿰란 문서, 하나는 4Q flor라는 조그마한 문서 이것은 구약의 메시야 tent 즉 나단의 예언과 시 1,110편 등을 한꺼번에 모아 주석해 놓은 것인데 여기에 나단의 예언이 정확히 예언이 되었다 .다윗의 아들=하나님이 아들이라고.

메시야가 하나님이 아들로 불린 흔적이 나타났다.

좀거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는 것은 4Q ps Dan Aa 그 쿰란으로 되어 있는데 1/3이 떨어져 나간 조그만 문서이다. 이 문서는 다니엘 7장과 비슷한데 여기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가 나온다. 그가 즉위 높으신 이의 아달. 하나님의 아들로 불리움을 받을 것이다라는 말이 나옴. 메시야를 하나님의 아들로 불렀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를 종교사학파들은 특히 Bultmann은 헬라 그리스도인의 신앙 고백으로 본다. 왜냐하면 메시야를 하나님의 아들로 부르지 않았으므로 신과 인간의 근본적인 차이를 인정하는 유대교에서는 불가능하고 신과 인간의 근본적인 차이를 별로 인정하지 않고 신이 인간의 맏형정도로 인정하는 헬라 세계에서 가능했다고 본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신앙고백은 전부 헬라적인 것이며 후기에 발전한 것이라는 식으로 생각했는데 이런 유명한 증거들이 우리로 하여금 그것이 아니고 유대교에서 벌써 메시야를 하나님이 아들로 불리운 흔적인 있다.

예수 당시 아주 초대 교회에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신앙고백했다는 우리 신약성경이 그만큼 신빙성이 있는 것이다. 메시야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상은 나단의 예언에 근거를 두고 있다. 다윗의 아들이 하나님의 아들로 선언된다. 나단 예언의 전승인 시2편 89편 7편 사2장11장미5:1 암9장은 아주 유명한 전승이다. 나중에 이 전승이 랍비문서에 이어지는데 다윗왕조를 재건할 메시야를 찾는데 랍비문서에서는 메시야를 다윗 혹은 다윗의 아들이라고 하는데 다윗이 오면 그런식으로 말하는데 이때는 다윗이 메시야로 지칭된다.

가령 2세기 초 유명한 랍비 아키바는 '단' 주석에서 하나님의 보좌가 하나가 아니고 복수로 나오는가? 그것은 어좌 하나는 하나님의 보좌이고 또 하나는 다윗의 보좌이다. 곧 메시야의 의자다.

나단 예언의 전승이 강력하게 발달해서 유대교에서 주종을 이루는 메시야 사상을 유방시켰다. 그런데 단 7장 이래로 한 사람이 아들 같은 이, 하늘에서 오는 신적인 존재로서 소개된다.

이것이 1En37-71장. 사Esra 13장 중에서도 하늘에서 온 초월적인 존재로 세상의 심판과 이스라엘의 구원역할을 한다고 또 한 사람의 아들로서 지칭하지 않으며서 메시야가 태초부터 존재하는 분으로 하나님에게서 부터 오는 초월적인 분으로 내세우는 문서들도 있다.

그래서 19세기말 20세기 말 종교사학파들은 이것을 간단 명료하게 정리:그릇됨.

신약,중간사 시대에 메시야 사상이 두종류가 있었다.

1)나단의 예언에 근거한 다윗 왕조를 재건할 전사적,정치적 왕 메시야를 기대하는 세상적인 메시야 사상이 있고-랍비문서로 연결

2)다윗 왕조에 철저히 실망한 유대인들이 점차 묵시문학으로 종말에 하늘에서 오는 메시야를 기대하는 조류:초월적인 천상의 구원자(사람의 아들 같은 이)

이 두 사상은 서로 대비됨.

1)은 바리새인,랍비,열혈당의 메시야 사상

2)는 묵시문학적인 메시야 사상

그런데 예수가 이 정치적 메시야 사상을 배격하고 묵시문학적 초월적 메시야 사상에 연결해서 자기는 '그 사람의 아들'이라고 불렀다. 하나님 나라를 선포함.

그러나 이것은 단순한 도식화. Bousset, Mowinkel 등에 의해 주장.

벌써 메시야 사상에 대한 주류가 2가지 있지만 또 있다. 무엇이냐면 쿰란문서에도 잘 나타나지만 12족장의 유언이 있다. 그 중에는 메시야가 2이다.

하나는 왕-메시야이고 다윗의 아들로서 다윗 왕국을 재건할 왕-메시야이고 다른 하나는 대제사장 메시야이다. 두 메시야를 기다림. 제사장 메시야가 왕-메시야보다 높다.

이것만 봐도 종말에 선지를 대제상도 기다렸고 왕도 기다렸다. 구약에는 이 3사람을 대상으로 기름부음을 함. 이것은 하나님이 자신의 일꿈으로 내세우는 것이다. 자기의 권위를 부여하고 하나님의 임무를 수행하도록 내세우는것. 그런데 구약에서의 하나님의 구원사역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돌고 기름 부음을 받은 대상이 왕,선지자,제사장 등이다.

그런데 그것과 상응하는 지는 몰라도 신약시대에 유대교에 있어서 메시야 사상은 왕-메시야를 제사장-메시야 종말에 선지자도 기다리고 이런 것들이 상호 어떤 관계로 서로 어떤 관계로 천상의 메시야를 기다리는 등 복잡하게 전개가 되었다.

그러나 주종을 이루는 것이 나단의 예언이 나오는 다윗의 왕국을 재건할 다윗의 아들로서 왕-메시야인데 이것을 어떤 사람들은 민간 메시야 사상이라고 하는데 신학적인 깊은 사고에 의해서 도출되지 않고 일반 신앙으로 널리 퍼졌던 메시야 사상. 이방인 정복하고 이스라엘을 높이고 평화와 번영을 가져다 줄 왕을 기다림.

이런 것을이 '예수=메시야'라는 신앙고백의 배경을 이룬다.

그러면 예수의 추종자들이 그의 그리스도 사건-삶과 가르침, 십자가 죽음, 부활을 체험하고 그가 종말에 하나님의 구원을 완성한 분이라는 인식을 갖게 된다. 그렇다면 유대교의 범주에서 이 분을 무엇이라고 고백해야 하는가? 그가 메시야라 해야 한다. 에수가 메시야라는 신앙고백이 발생. 그렇다면 지금 첫 신앙고백을 한 유대인들이 유대교에서 가졌던 메시야 사상의 일체를 예수에게 적용해야 할 것인가?그러면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로 하나님께서 예수를 옳다고 인정함으로서 자기가 독특한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을 계시하고 하나님의 대권을 행사하며 하나님의 백성 곧 하나님 자녀들을 창조 모으는 분이다. 이것을 위해 자기가 대속과 새언약을 세우는 죽음을 함으로 진정한 새언약의 백성 곧 하나님이 자녀되게 한다고 주장했다. 그것을 하나님이 옳다고 인정하고 예수를 부활시킴으로서 인정하였으므로 예수가 메시야라고 한 그 고백을 한 유댕니들이 자기들이 지금까지 기다렸던 메시야로 인식하여서 자기들의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인식을 모두 예수에게 씌워서 바로 예수가 그런 메시야라고 고백했는가? 이것이 중요한 issue이다.

그렇게 하지 않고

Interpretio Christiana

기독교적인 새로운 메시야 사상을 내포한게 예수가 메시야라고 했을 때 그가 종말에 구원자라는 의미로 메시야라 한다.

메시야라는 범주와 그리스도라는 범주 자체, 용어 자체는 유대교에서 빌려왔으나 그 내용은-예수가 무슨 일을 했고 에수의 메시야적인 과업이 무엇이었으며 그가 무슨 일을 했기에 메시야냐 하는 것은 유대교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예수의 메시야성은 유대교의 메시야에 대한 기대가 정의하는 것이 아니고 그 내용을 채우는 것이 아니고 예수가 어떤 분이었으며 예수가 무엇을 했는가에 의해서 그 내용이 채워졌다.

예수가 종말에 구원한다는 의미에서 메시야인데 그러면 예수가 종말에 구원하는 내용은 유대교의 소망에 의해서 채워진 것이 아니라 예수가 어떤 분이고 무슨 일을 했는가에 의해서 채워졌다.

이것을 두고 Interpretio Christiana라고 한다.

그래서 신약성경에 복음서들에 기록된 행적과 가르침 그리고 행전과 서신들에 요약된 초대교회의 예수에 대한 예수의 메시야성에 대한 선포가 지금 요약한 다양한 구약과 유대교의 메시야 사상과 다르다. 바로 이 유대교의 메시야 사상과 신약에 그려진 예수의 모습과 다름에 착안한 종교사학파-W.Wrede는 예수가 메시야가 아니다 왜냐하면 신약성경에 표현된 예수의 모습은 유대교에서 기다렸던 메시야와는 너무 다르므로 가령 예수가 다윗 왕국 재건했는가? 이방인들 정복했는가? 다윗왕이 되어서 군사적, 정치적 왕이 되었는가? 또 유대 묵시문학이 천상에서 오는 메시야가 온 세상을 새롭게 만들어 인간들을 찬란한 존재로 탄바꿈하고 이세상에.... 아니다.

유대교의 메시야 사상과 신약성경의 예수의 상과는 너무나 다름.

Wrede:그래서 종교사학파들은 예수가 메시야가 아니라고 주장.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예수가 메시야라고 고백하기 시작했다. 모순이 발생. 이 모순은 처음으로 해결하려고 시도한 것이 마가다. 마가는 '복음'이라는 새로운 문체를 개발함으로써 이 역사상의 실제 곧 예수가 유대인이 기다리는 메시야가 아니었다고 주장. 그러나 교회는 예수를 메시야라고 고백했다. 역사적 예수의 실제와 초대교회의 신앙과의 괴리를 극복할려고 마가가 처음으로 '복음'이라는 문체를 개발했는데 마가는 어떤 방법을 사용하여 이 괴리를 해결하려고 했나? '메시야적 비밀' 이라는 방법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함. 마가의 의하면 예수가 실제는 메시야 였다. 그런데 왜 예수의 메시야됨이 알려지지 않았는가? 예수 자신의 메시야됨을 인간보다 더 큰 통찰력을 가진 초월적 존재로서 성령,메시야적 구원의 체험한 사람들 예수의 제자들은 예수의 메시야됨을 알았는데 예수가 비밀을 지키라고 해서 널리 퍼지지 않았다.

그러나 십자가와 부활후 이 비밀의 비밀이 벗겨져서 교회가 이제 예수가 메시야였다고 고백할 수있었다. --이러한 소설을 썼다고 주장. 이것이 마가의 소설이다. 왜냐하면 소설을 쓴 이유는 역사적 예수의 실제와 초대교회의 신앙과의 괴리르 극복하려고 쓴 소설. 소설의 핵심은 '메시야 비밀'

이런 식으로 신학을 전개했는데 이것이 Bultmann에게 완전히 받아들여지고 강조되어서 역사적 예수를 부인하는 그런 신학을 전개한다.

W.Wrede가 터득하지 못한 진리는 신약의 케리그마에 있어서 예수를 메시야라고 고백할 때 예수가 메시야이므로 예수의 메시야됨이 내용을 유대교에서의 메시야 사상을 다 이룬 분이라고 유대교의 메시야 사상을 예수에게 전가해서 예수의 메세야 됨을 유대교의 메시야 사상으로 정의 한 것이 아니고 예수가 어떤 분이었고 예수가 무슨 일을 했는가에 따라서 예수의 메시야 됨이 정의되는 Interpreito Christiana의 논리를 터득하지 못한 것이 문제.

신약신학 1에서 열심히 가르침을 살펴 볼 것은 예수의 자기 주장과 자기 계시를 통해서 예수가 자기 이해를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을 계시하고 하나님의 주권을 행사하여서 죄를 용서하고 하나님 나라를 선포해서 하나님 백성을 창조하고 모으는 일 그것의 완성으로서 대속과 새언약을 세우는 죽음을 통해서 새로운 하나님의 자녀를 창조하고 모으는 독특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자기 이해가 있었다. 이것이 예수의 자기 이해이다. 예수는 어떤 분이었는가? 그러면 그가 한 일은 무엇인가? 그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구원의 효력을 보였고 죄인들을 용서해서 하나님의 자녀되었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서 그들과 먹고 마시고 그들로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르게 하고 그들을 위해서 궁극적으로 대속의 새언약을 세우는 죽음을 했다.

그래서 예수가 어떤 분이며 어떠한 일을 했는가에 따라서 대속과 새언약을 세우는 제사를 통해서 죄가 용서되고 하나님과 화해되고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으로 탄생되었다. 이것이 예수가 한 일이다.

자기가 그것을 하는 분이라고 주장했고 십자가에서 죽음으로 그것을 했다고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를 부활시킴으로 이 예수의 자기 이해와 자기의 과업이 옳따고 하나님이 선언하신 것. 하나님이 부활시키신 것. 그렇다면 예수의 메시야 됨이 무엇으로 결정되는가?

그가 어떤 분이며 그가 무엇을 했는가에 의해 결정되지 유대교의 다양하고 복잡한 사상에 의해 예수가 메시야 됨이 결정되는 것이 아님. 예수의 모습이 유대교의 메시야 모습과 다르지만 이런 이유 때문에 예수를 메시야가 아니라고 말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를 메시야라고 고백할 때 예수의 메시야됨의 내용이 무엇이었느냐? 그것은 유대교의 메시야 사상과 다르고 그것보다 더 풍부하다.

유대교의 생각보다 훨씬 더 높은 것이다.

그러므로 유대교의 메시야 사상과 예수의 메시야 사상의 내용은 유대교의 소망에 의해 채워질 것이 아니라 초대교인은 유대교의 메시야 사상을 예수에게 직접 관련시키지 않았고 단지 메시야라를 용어를 차용하여 메시야가 대속과 새언약의 죽음을 통해서 우리를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고 자녀가 되게 해서 하나님의 부요함에 참여케할 독특한 하나님의 아들이다는 것으로 예수의 메시야됨을 정의하였다.

이와 같은 Interpretio Christiana. 예수의 메시야됨의 내용-예수의 삶과 가르침, 십자가,부활의 의해서 예수가 어떤 분이고 어떤 일을 했는가에 결정이 되지 유대교에서 메시야를 어떤 분이라고 해서 결정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예수의 삶과 죽음 부활에 의해서 그가 어떤 분이고 무슨 일을 했는가에 의해 판명이 났고 예수의 메시야성이 정의된 상황에서 그리스도인들이 구약성경을 되돌아 보았을 때 예수의 삶과 가르침, 십자가, 부활 곧 예수가 어떤 분이고 어떤 일을 했는가가 구약성경의 메시야적 예언을 놀랍게 성취한 것이다.

그렇다면 유대교의 메시야적 사상들은 구약의 메시야적 예언들을 왜곡한 것들이다.

그래서 정확히 말하면 예수가 메시야라는 신약성경의 신앙고백은 구약성경의 메시야적 예언 성취다. 그러나 유대교는 구약에서 나왔지만 신약의 예수는 메시야라는 신앙고백과 일부 연속성이 있지만 그러나 불연속성이 있다. 이 불연속성은 유대교가 구약의 예언을 잘못 이해한데서 왜곡한데서 왔다고 보아야 한다. 그래서 예수가 메시야 사상을 진저으로 성취한 분이다. 유대교의 왜곡을 넘어서 유대주의의 제한된 민족주의의 왜곡을 넘어서 구약성경의 진정한 정신을 선취한다.

유대인들의 종말에 구원자에 대한 기대는 분명 구약성경에서 나옴.

예수가 바로 그 소망을 성취한 분이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황당하게 전사적,정치적 메시야로 와서 이방민족들을 다 전멸하고 유대인들이 온 세상을 지배하는 왕국을 건설하려고 함. 도리어 예수가 건설한 하나님 나라는 모든이방인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왕으로 인정하고 예수의 주권에 믿음의 순종을 하게 한 메시야 그대로 였다. 유대인들은 문자 그대로 구약성경에 있는 이른바 이바인들의 시온에 대한 순례사상-하나님의 영광이 시온에 나타나면 메시야가 온통 이방민족들을 정복하고 하나님의 영광이 온 세상에 퍼져서 온 세상의 이방인들이 자기 신들을 버리고 보화를 가지고 시온에 와서 순례를 하고 여호와를 섬긴다. 이것이 유명한 이방인들의 시온에의 종말론적인 순례라는 사상이다. 아주 민족주의적이고 선교가 없다. 이방인들이 종말에 보화를 가지고 이스라엘에 와서 하나님을 섬기고 자기들을 섬김.

예수가 이 유대인들의 기대를 성취하지 않았음.-문자 그대로 성취하지 않음.

그러나 진정한 의미로 바로 선지자들의 예언을 성취했음. 어떻게? 예수의 메시야적인 행위로(대속의 죽음과 새언약을 세우는 하나님 나라의 선포와 그의 대속의 죽음과 새언약을 세우는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예수가 주로 하나님 우편에 높임받아서 예수가 주라는 복음이 온 세계에 퍼져서-온세계가 자기들의 보화를 가지고와 이스라엘을 섬기는 문자적 성취는 아니지만 그러나 온 세상 만민들이 하나님을 여호와를 하나님으로 예수를 주로 고백한다. 그에게 무릎을 꿇는 일이 벌어졌다.

진정한 의미로 구약의 예언이 성취되었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해석했던 그런 의미는 아니다. 이런 예는 엄청나게 들 수 있다. 에수가 다윗의 아들로서 하나님의 아들이고 나단의 예언이 그대로 성취되고 그가 메시야가 主고 하나님이 아들로 고백이 되고 나단의 예언한 것을 그대로 성취.

그러나 유대인들이 해석했던 것과는 다르다. 이들은 정치적, 군사적 왕이 되어서 유대인들의 번영과 군림을 가져다주는 다윗왕국의 건설을 기대했는데 예수는 그것을 넘어서는 진짜로 예언을 성취함. 다윗의 아들로서 하나님의 왕되심을 선언하고 하나님 대신에 하나님의 아들로서 온 세상을 의와 사랑으로 통치하여 온 세상에 평화를 가져오는 대속의 제사로 하나님과 인간을 화해시키고 인간들을 화해시키는 샬롬을 이루는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분으로 나단의 예언을 진정으로 성취함. 그러나 주의할 것은 유대인들이 유대교에서 기다하였던 것은 성취하지 않았다. 그래서 예수가 메시야라는 고백은 진정하며 더 기쁘며 구약의 예언들을 성취하였으나 유대교가 해석한대로 성취하지 않았다. 쉽게 말하면 예수에 의해 완전히 새롭게 해석된 구약의 예언이 이루어짐.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이 구약을 보는 것이 유대인들과 완전히 달라짐.

전승적으로 말하면 구약과 중간사 시대에 구약의 유대교가 구약에 뿌리를 둔 AD 1세기 경에 문제점으로 커져 유대교와 기독교의 구약의 해석방법이 다르고 시간이 갈수록 그 차가 커져서 완전히 다른 종교가 되어버림. 이 근본이 예수 그리스도이다.

예수의 자기 이해와 자기 주장은 구약에서 나왔지만 그 구약의 해석은 당시 유대교와 다름. 그러므로 예수의 자기 이해가 당시 유대교의 메시야 사상에 비추어 예수가 메시야 모습과 달랐으므로 예수가 메시야가 아니었다는 주장은 피상적인 결론을 내리는데 이것은 Interpretio Christiana의 논리를 이해하지 못한데서 나오다.

'성탄절날 설교에서' 예수가 유대인들이 바라던 종말의 모든 기대를 완성해 주신 메시야로 오셨다. 그러나 다 완성하지는 못했다고 설교할 경우 역사적 사실에도 대치되지만 예수를 상당히 끌어내리는 행위이다. 유대교의 수준으로 예수를 내려버림. 예수의 메시야됨은 유대교의 메시야 사상과 다르고 유대교보다 훨씬 높은메시야사상이다. 예수가 구약의 진정한 예언을 진정으로 성취한 메시야로서 유개됴가 구약을 왜곡시켜 발달시킨 메시야 사상보다는 훨씬 높다.

Interpretio Christiana의 성경적 근거

고후 5:16

바울이 지금까지 그리스도를 육적으로 알았다. ՊՁՔՁ ՓՁՑՊՁ(Bultmann은 이 문장을 자기 신학의 대원칙으로 삼음. 육시적인 그리스도를 수식하는 형용사구로 해석하여 육신적인 그리스도가 역사적 예수로 보고 바울이 역사적 예수를 거부하지 않으냐고 주장. 영적 그리스도, 믿음 그리스도, 케리그마의 그리스도가 중요하지 역사적 그리스도는 더 이상 알필요가 없다고 말함. 그러나 사실은 ՊՁՔՁ ՓՁՑՊՁ는 안다는 말을 수식하는 부사구다.)

그래서 지금까지 우리가 그리스도를 육신적으로 알았다.

육적인 가치판단으로 그리스도를 알았다. 그러나 이제는 그렇지 않다.

그리스도를 육신으로 안다는 말은 무엇인가? 이것은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그리스도인이 되는 사건을 말함. 이제는 그때까지는 바울이 자기의 메시야에 대한 사상을 육신적인 것으로 말한다. 다시 말하면 다메섹도상 사건 이전까지 가지고 있었던 유대교적인 메시야 사상을 육신적인 메시야 사상이라고 한다. 곧 자기가 그런 메시야 사사을 가지고 있으면서 예수에게 비추어 보았을 때 예수가 메시야가 될 수 없었다. 그래서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한 것이다. 그리고 예수를 신 21:23에 근거하여 하나님께 저주받은 자라고 생각했고 예수가 저주를 받았다고 믿었다. 그러나 다메섹 사건을 통하여 그는 자신의 그릇된 메시야 사상을 깨닫고 새롭게 정리할 필요를 느꼈다. 예수를 통해서 안 메시야 사상을 통해서 예수를 그려야 하고 유대인의 메시야 사상은 잘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