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신학 제12강

예수의 '그 사람의 아들'이라는 자기 칭호까지 하였다. 그래서 오늘은 예수의 '그 사람의 아들'이라는 자기 칭호와 '하나님 나라 선포'와의 관계를 논하고 예수의 생애와 가르침을 결론짓겠다고 하였다. 좀 자세히 해야 하는데 시간이 없어서...

지금까지 우리가 해온 것을 여러분에게 상기시키면 신약신학의 과제를 어铽게 십자가에 못박힌 나사렛 예수를 태초부터 선재하신 신적인 하나님이 아들로 그리고 그리스도로, 주로 신앙고백하게 되었나? 이렇게 이 기독교 신앙이 발생하게 되었나 하는 것을 역사적으로 규명하는 것이 신약신학의 과제라고 하였다.

그것을 규명하기 위해서 우리가 앞에서 예수의 생애와 가르침을 살펴보았는데 그 중에서 주로 3가지를 살펴보았다.

첫째는 간접 기독론이라고 해서 예수가 당시의 기독론적인 칭호를 쓰지 않고 어떻게 간접적으로 은근히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의 계시자이며 하나님의 구원자이신가를 나타내었나? 이라는 것을 살펴보았고

그 다음 우리가 예수의 중심 메시지인 하나님 나라를 살펴보았다.

그 다음, 우리가 살펴본 것은 예수의 자기 칭호, '그 사람의 아들'이라는 예수의 자기 칭호까지 죽 살펴보았다.

그래서 우선 세 이 큰 주제의 결론만을 대시한번 우리가 살펴봄으로써 이 세가지가 어떻게 서로 맞아 들어가는가를 살펴보도록 하겠다.

예수가 하나님을 독특하게 ՁՂՂՁ라고 부르고 ՁՌՇՍ이라는 말을 독특하게 쓰다가 모세의 율법에 대한 태도, 죄사함의 권리를 주장한다든가 하는 이러한 것을 통해서 무엇을 나타내고자 한다고 하였는가? 그것은 그가 하나님의 독특한 아들로서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계시하고 ՁՌՇՍ, 율법보다 직접적으로 하나님을 계시하고 자기 추종자들을 하나님의 자려들 되게 하는 분이라는 자기 계시를 나타내셨다고 하였다. 이것이 간접기독론의 결론이었다.

그 다음에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에 있어서는 우리가 무슨 결론을 내었는가?

그것은 아주 다양한 내용알 가진 가르침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예수께서 자기를 통해서 하나님의 통치가 지금 이루어지는 것으로 그렇게 나타냈다고 하였다.

다양한 비유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를 여러양상들을 가르쳤는데 그 비유들 중에 가장 중요한 비유가 무엇이라고 하였는가? 아니 가장 중요한 비유라기보다 가장 흔히 나오는 비유가 '잔치'의 비유라고 하였다.

하나님 나라를 잔치로 비유한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과 그의 백성들의 fellowship의 회복으로 보았고 그것은 죄인들이 하나님과 화해되어서 하나님의 잔치에 참여하는 것, 즉 하나님이 잔치에 참여하여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즉, 무한한 하나님의 자원에 참여하여 살 수있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으로 계속해서 선포하였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의 궁극적인 의도는 어디에 있었다고 하였는가? 하나님의 백성을 창조하고 모으는데 있다고 하였다. 그것은 무슨 말이냐 하면 하나님의 자녀들을 창조하고 모은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백성들이 곧 하나님의 자녀들이니까..

그래서 직접 기독론에서 나오는 예수의 의도, 하나님을 계시하고 하나님의 죄를 용서하고 구원을 베푸는 것을 선포함으로 하나님이 자녀들을 모으려는 간접기독론에서 추출한 에수의 의도와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를 통해서 설펴본 예수의 의도와는 차이가 없고 똑같은 것이다.

곧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로써 하나님의 백성 곧 하나님의 자녀들을 창조하고 모으는데 본 의도가 있었다. 이 예수의 '하나님 나라'의 선포와 더불어 예수의 성전에 대한 독특한 태도도 우리가 조금 살펴보았지요? 기억나요? 예수께서 성전에서 아주 독특한 태도를 취했다는 것.

그런데 예수는 하나님 나라를 성전으로 본 것이다. 그런데 성전은 무엇을 하는 곳인가? 성전은 이스라엘 백성의 선택과 언약을 전제로 하는 것이 성전이다. 성전이 있는 이유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성전에서 자기의 백성으로 만들었고 그들과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고 너희는 내 백성'이라는 언약을 세웠기 때문에 성전이 있는 것이다.

즉 이것이 성전에서는 하나님과 그의 백성, 하나님의 백성이 fellouship을 하는 곳이다.

성전은 그래서 우주의 두 부분,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곳이다. 다시 말하면 땅에서 하늘로 들어가는 관문이다.

그래서 여기(성전)에 하나님이 임재하시고 여기에 백성이 나아가서 하나님과 교제를 하는 것이다. 그런데 교제가 자꾸 죄로 인하여 깨어지므로 자꾸 제사를 드려서 속죄의 제사를 드려서 죄를 깨끗이 하고 교제를 자꾸 회복함으로 하나님의 무한한 축복에 참여하는 것의 매타니즘이 바로 성전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성전에 들어가는 것이다. 성전에 들어간다. 그리고 성전에서 하나님이 무엇을 하는가? 잔치를 한다. 사람들과 더불어...

그래서 절기때마다 성전에서 제사를 드린 후에 성전에서 뭐가 베풀어졌는가? 커다란 잔치가 베풀어졌다. 그래서 잔치가 매우 중요한 것이다.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의 배경이 대개 성전을 염두에 두고 있다. 그래서 예수의 '하나님 나라'의 선포와 함께 가장 흔히 쓰이는 동사가 무엇이라고 하였는가? '들어간다'이다.

또 성전에 들어가서 무엇을 해요?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과 들어가서 잔치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는 한 마디로 뭐하는 곳인가?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과 더불어 잔치하는 곳이다. 그러면 성전에서 누구만이 들어갈 수있느냐? 시편의 여러 곳에 있는 바와 같이 행악자가 아니고 의를 도모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성전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래서 성전에 들어갈 수 있는 외적 기준이 구약의 법에 레위기에 다 있다.

마찬가지로 에수도 누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있는가? 어린이아와 같은 순전한 자, 깨끗한 자, 믿음을 가진자,악을 품지 않는 자 등 여러가지 것을 내세웠는데 이 때 이러한 형식은 성전에 들어갈 수 있는 조건과 맞아들어가는 것이다.

예수는 성전에 들어갈 수 있는 의식적인 조건들을 많이 도덕적인 조건들로 바꾸었다 뿐이지..성전에 들어갈 수있는 조건과 맞아가는 것이다.

이렇게 예수가 '하나님 나라'를 성전으로 많이 그림을 그린 것을 볼 수가 있다. 그런데 예수가 마가복음 11:27에서 33절을 보면 성전에서 예수가 소란을 피웠다. 상인들을 쫓아내고 소란을 피웠다.

그래서 그것이 마가복음 11:15-6절에 나온다. "왜 네가 그런 일을 하였느냐?"고 유대 관원들이 와서 신문하자 예수가 뭐라고 대답하였는가? 간접적으로 대답한다. 간접적으로...

나도 질문이 하나 있는데 너희들이 그것에 대해 대답하면 나도 하겠다. 그게 뭐냐하면 '세례요한의 세례가 하늘로서냐 이땅에서 났느냐?' 다시 말하면 세례요한이 진짜 선지자냐? 하나님으로부터 위임을 받은 진짜 선지나냐? 아니면 땅에서 난자냐 곧 스스로 선지자라고 주장하는 거짓선지자냐?고 묻는다.

그러니 유대관원들이 '아 나 그것 답하기 어렵다'고 피해버린다. 그러니까 예수가 뭐라고 하는가? 그러면 나도 답안해준다. 고 그런다.

그래서 예수의 이 ࠌࠚࠁ 예수의 수수께끼같은 대화의 예수가 주로 이런 식으로 대화를 많이 하였다. 랍비들도 이런 식으로 대화를 많이 하고... 여기의 숨겨진 의미가 아주 재미있다.

성전에서 예수가 소란을 피웠다. 요새 정치신학자들은 무슨 억눌림받은 사람이 민중이 창취하는 성전의 제사장 계급에 대해서 폭력을 휘드르고 무슨 정치적 혁명을 한 것으로 보는데 그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성전의 뜰이 얼마나 크냐면 400m 300m이다. 한번 상상해보라.

큰 국민학교 운동장의 2배는 더 된다. 거기에서 장이 벌어졌다. 여기에서 상인들을 다 쫓아낼려면 예수가 적어도 1개 중대의 전경을 투입했을 것이다. 무장한 1개 중대....

그러니까 성전에서 성전 경찰들이 많았다. 레위인들이 주로 성전경찰이었다. 레위인들이 주요 직책은 성전경찰과 성가대노릇을 하였다. 그래서 경찰들이 유월절 같은 절기에는 로마의 군대가 증파된다. 그래서 높은 망대같은 데에서 늘 성전의 되어가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래서 무슨 사건이 터지면 즉각 체포하여 잡아오고 하였다. 여기의 뜰까지는 이방인도 들어갈 수 있는 곳이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이 이렇게 큰 뜰에서 장사하는 장사치들을 다 쫓아낸 것이 아니고 내짐작으로는 상 한두개 뒤집어 엎었고 그리고 한 모퉁이에서 상인 2-3명이 있는데 여기서 장사하면 되느냐고 소리하번 지른 것이다. 그러니 여기 성전 뜰의 수백명의 상인들을 한꺼번에 몰아놓고 혁명하고 하는 것은 전혀 아니다.

하여간 이러한 제스쳐가 symbolic 제스쳐이다. 하나의 symbol이다. 이 상징제스쳐는 구약의 선지자들로부터 죽 내려오는 전승이다.

선지자들이 자기들의 메시지를 아주 효과적으로 선포하기 위해서 아주 괴상한 sing, 이상한 상징을 내세우므로 사람들의 관심을 끌게 만드는 그러한 dramatic한 symbol을 이용하였다.

예수님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가령 이사야도 발가벗고 거리에 다녔다든가 세례요한이 무슨 옷만 입었다고? 약대옷입고 무엇만 먹었다고? 메뚜기와 석청만 먹었는데 그것은 그 사람의 금식주의만 나타낸 것이 아니고 거기에 symbolism이 있다. 그것을 독일말로 소위 Zeichemhanelung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유대 관원들이 그것을 간파하고 이 사람이 무슨 symbolic을 주장하는 구나 하고 문초를 한다. "네가 무슨 권리로 성전에서 소란을 피웠느냐?" " 또 누가 너에게 그러한 일을 하라고 하더냐?"하니까 예수가 세례요한에 대해서 물었다.

예수께 나아와서 "네가 무슨 권리로 소란을 피웠느냐?"고 물을 때 예수께서 세례요한에 대해서 묻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네가 무슨 권세로 성전에서 소란 피웠느냐? 누가 네게 권세를 주었느냐? 하니까 지금 예수에게 문제가 되는 것이 무엇인가? 자기의 권세의 즉 예수의 권세의 원천과 그권세가 어디에서 왔느냐? 누가 주었느냐?이다. 그 다음에 그것의 성격이다. 그 권세는 어떤 것이냐? 하는 것이 문제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예수가 세례요한이 베푸는 세례에 대해서 물었다는 것은이 예수의 권세와 점 더 정확히 말하면 예수의 권세의 원천과 그 권세의 성격과 세례요한의 세례와 논리적으로 관계가 있어야 그 질의 응답이 의미가 있는 것이다.

에수가 세례요한을 통해서 세례를 받을 때에 뭐라고 선포되었는가?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자요 기뻐하는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 마가복음 1:11-12절의 내용이다. 세례요한이 예수에게 요단강에서 세례를 줄 때 하늘에 열리고 구름 가운데 큰 소리가 울려 퍼졌는데 뭐라고 하였는가? "이는 나의 사랑하는 아들이라"

이 마가복음 1:11-12절은 이 예수에 대한 세례시의 하늘의 선포는 이것이 두 부분으로 되어 있다. 하나는 시2:7의 "너는 나의 아들이다. 오늘 너를 낳았도다"는 것이도 하나는 사42:1절의 이것은 주의 고난받는 종의 노래의 시작이다. 여기에는 "나의 사랑하는 종 이스라엘" 이렇게 시작한다. 그래서 이 세례시의 이 선포는 시2:7과 사42:1절의 혼합이다.

여기에서 시2:7절은 뭐냐면 나단의 예언 삼하 7:12-16절의 전승이다. 삼하 7:12-16절은 그 내용에 대해서 전에 소개하였는데 이게 무엇이라고? 선지자 나단의 예언 이라고 하였다. 나단이 성전을 세울려고 애쓰는 다윗에게 가서 선포한 하나님의 말씀인 것이다.

그 내용이 무엇인가?

다윗에게 말하기를 너희 수가 다하면 너의 씨, 다윗의 아들 나단의 예언이 어떻게 되어 있느하면 하나님이 다윗에게 말씀하시기를 "너의 수가 다하며 내가 너의 아들, 너의 씨, 너의 씨 하나를 택하샤 너의 왕위에 앉히겠고 그래서 너의 왕조, 왕가, 너의 지방을 내가 건설하고겠고 그를 나의 아들로 삼겠다. 그리고 그로 하여금 나를 위해서 집(성전)을 짓게 하겠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이것은 한 편은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아들 하나를 택해서 다윗왕가를 너의 집을 내가 이루도록 하겠다. 왕조를 이루겠다는 약속이고 또 하나는 그로하여금 하나님을 위해서 집을 짓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거기에 "집"이라는 말이 두개 나온다. 이러한 집을 성전을 짓도록 하겠다는 예언이다.

이 예언이 곧 무엇이냐 하면 다윗오아조를 세우는 예언이다. 다우시이 구데타로 사울을 문뜨리고 왕권을 잡았다. 그래서 이제는 왕조가 사울 선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고 다윗 선으로 이어진다. 그러한 것을 하나님이 만드신 것으로 하나님이 원하신 뜻을 합법화하는 것이 이 나단의 예언이다.

그런데 거기에 그 아들로 하여금 성전을 짓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예언이 솔로몬에 의해서 성취가 되었지만 계속 이 예언이 솔로몬을 정점으로 계속 다윗왕조가 내리막길으 鱁가자 이스라엘의 역사속에서는 이 예언이 계속 재해석되어서 가령 솔로몬의 성전이 완전히 부서진 뒤에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 갔다가 다시 고레스의 칙령에 의해서 본국에 돌아가서 자기들이 성전을 다시 짓도록 하였을 때에 이 때 다윗왕의 자손인 스룹바벨이 다윗의 아들, 다윗의 왕자 스룹바발이 성전을 짓는 것으로 인해서 마치 이 나단의 예언이 다시 한번 성취될 줄을 알고 그래서 다윗 왕조가 새롭게 건설될 줄 알고 따라서 스룹바벨을 중심으로 메시야 사상이 일어났던 것이다. 그러한 것이 슥3장 4자 6장 그런데 보면 잘 나타난다.

그런데 그것도 별로 꿈이 이루어지지 않고 그러니까 이 나단의 예언이 중간사 시대를 통해서 신약시대에 까지 메시야 사상의 가장 중요한 뿌리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다윗의 아들을, 하나님의 아들,다윗의 가지, 다윗의 씨 등의 메시야적인 칭호들을 부르는 이유가 이 나단의 칭호에서 나온다고 하였다.

그래서 다윗의 아들이 다시한번 다윗의 왕위에 앉고 다윗의 왕국을 재건하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는 것이 유대의 다양한 메시야 사상중의 가장 중심된 사상이다.

그런데 이 시2:7의 내용이 무엇이냐 하면 바로 이 나단의 예언에 근거해서 다윗의 자손이 다윗의 왕위에 오를 때마다 소위 대관식의 시이다. 그래서 다윗의 아들이 손자가 증손자가 즉 다윗의 자손이 다윗의 왕위에 오를 때에 원래의 이 하나님의 나단을 통해서 선포된 약속에 따라 선포하는 것이다. 다윗의 왕위에 오른 이스라엘의 왕을 자기의 아들로 선포한 것이다. 그래서 합법적인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에을 하나님을 대신하여 군림하고 통치할 수있는 합법적인 왕이라는 것을 선언하는 것이다.

"너는 나의 아들이다. 오늘 내가 너를 낳았다" 다윗 왕위에 오르는 이스라엘 왕을 하나님이 자기의 아들로서 자기를 대신하여 군림하고 통치할 수있는 합법적인 왕이라는 것을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너는 나의 아들이다 오늘 내가 너를 낳았다" 다윗 왕위에 오르는 왕을 하나님이 자기의 아들로 삼는 것이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합법적 통치자로 세우는 것이다. 그러니까 시2:7은 이 '나단이 예언'의 전스으로서 왕위 취임식때마다 불렀던 시의 일부이다. 그 시의 내용이 이 예수의 세례 때에 예수를 향해서 선포된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가 무엇인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가 다윗의 왕위를 회복해서 다윗과 왕이 되는 그런 하나님의 아들이냐? 는 것이고 또 두번째 그럼 그가 어떤 성격의 하나님의 아들이냐를 설명해 준다.

어떤 성경이냐? 주의 고난받는 종의 역할을 감당하는 그것이 고난받는 종의 노래의 첫 절이다. 이사야서 42:6 "나의 사랑하는 종 이스라엘" 이렇게 시작하는 주의 고난받는 종의 노래의 첫절이다.

그러니까 예수가 나단의 전승을 이은 하나님의 아들인데 그러니까 메시야인데 메시야 사상의 근원인 나단의 예언을 성취할 메시야인데 그러나 나단의 예언이 표면적으로 생각했던 바와 같이 다윗의 왕위를 재건하고 거기에 정치적인 왕으로 군림하는 그런 왕이 아니라 주의 고난받는 종의 역할을 감당하는 종으로서의 하나님의 아들이다.

여기의 주의 고난받는 종의 역할들이 무엇인가?

지난시간에 이야기하였지? 주의 고난받는 종이 무엇을 한다고?

이스라엘, 하나님의 백성을 모으고 이스라엘의 대표자로서 하나님의 백성의 대표자로서 그들을 모으고 그들에게 하나님을 계시하고 이방인에게도 하나님을 계시하여 따라서 이상인의 빛이라.

그리고 언약을 세우고(사42:6.49:8) 그리고 끝내는 대속의 죽음을 하는 (사53장) 이러한 일들을 하는 분이 주의 고난받은 종인 것이다.

그래서 예수의 여러가지 가르침에 스스로를 주의 고난받는 종으로서의 자기에 대한 계시가 잘 나타난다고 하였다.

그러니까 주의 백성들,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해서 스스로를 대속의 제물로 바쳐서 그들이 죄를속하고 그들을 위해서 언약을 세워서 다시 한번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도록 여기의 언약을 세운다는 말은 하나님이 백성을 모으고 창조한다는 말이니까 다시 한번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는 것이 주의 고난받는 종의 역할이다. 그 하나님의 백성이 대표자가 누구이냐? 하면 하나님의 아들이다. 하나님의 백성은 뭐라고? 항상 하나님의 자녀들이다(출4:22).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의 대표자로서의 예수가 스스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인데 어떤 성격의 하나님의 아들인가? 하나님의 백성들을 대신해서 스스로를 속죄의 제물로 바침으로 그들의 죄를 용서하고 하나님과 화합시켜서 하나님과 언약의 관계를 회복하는 그래서 언약을 세우는 그래서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요 너희는 나의 백성이라'는 이 관계가 회복되도록 하고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을 창조하는 그래서 이 창조와 모으는 일을 하는 하나님의 백성의 대표자로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마가복음 11:27-33의 유대관헌들이 와서 "왜 네가 그렇게 성전에서 소란을 피웠느냐?" 할 때에 예수의 답변이 무엇인가? "세례요한의 세례가 무엇이냐?"고 하였다. "너희들이 진정으로 세례요한을 하나님으로부터 임명받은 선지자로 인정한다면 나도 대답하도록 하겠다. 그러나 너희들이 세례요한을 거짓 선진자로 인정한다면 나는 할말이 없다" 는 것이다.

왜 그런가? 에수님이 세례요한을 통해서 이러한 하나님의 선포를 들은 것이다. 그래서 뒤의 예수의 권세,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권세는 세례요한을 통해서 증거되었다고 볼 수있다.

그래서 적어도 사람들의 눈에는 세례요한이 진짜로 이런 하나님의 큰 일을 중개할 수있는 하나님으로부터 임명받은 하나님의 종, 하나님의 선지자인가? 아니면 거짓 선지자인가? 하는 이것이 상당히 중요하다.

여기에서 세례요한이 거짓 선지자이면 세례요한이 세례 때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었다 하면 예수는 거짓 선지자 세례요한과 더불어 거짓 선지자로 정죄받을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만약에 세례요한이 진짜 하나님의 선지자이었다면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을 계시할 수있는 그런 사람이었다면 그의 세례 때에 하늘로부터 이런 엄청난 계시가 있었다 그런데 그게 뭐냐면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다'는 것이다라고 할 수 있다. 위 대화에서의 내용이 이러한 내용이다.

그러니까 여기에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예수가 성전에서 소동을 피운 것이 무슨 권세가 있다고? 하나님의 아들의 권세가 있다는 말이다. 세례요한이 세례 때에 자기에게 중개된 '하나님의 아들'의 권세로 이 일을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성전에서 소란 피운것이 하나님의 아들과 무슨 관계가 있는가? 바로 이 나단의 예언이 그 관계의 배경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뭐하는 사람인가? 성전을 새로 짓는 사람이다. 나단의 예언을 살펴보면 ....지금 이 서 있는 성전, 헤롯이 지은 이 성전은 부패할때로 부패하였다. 그 부패의 상징이 무엇인가? 이 성전 뜰에 장터가 되어버린 것이다. 이것을 이제 싹쓸이를 해버려야 하는 것이다. 좋은 의미로...그래서 성전을 지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가 서 있는 예루살렘 성전에 대해서 뭐라고 예언하였는가? 이 부패한 성전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서 돌 위에 돌 하나도 남기지 아니하고 다 무너진다고 하였다(막13:2)

갈릴리의 시골사람들이 시골 사람들이 아니라도 성전을 보면 입을 딱 벌렸다. 로마의 책에도 헤롯이 세운 예루살렘 성전의 아름다움과 웅장함에 대해서 노래하고 있다.

유대의 책 Mishina에 보면 이러한 이야기가 있다.

"헤롯의 성전의 건물을 보지 않은 사람은 아직 그 일생에 좋은 건물을 보았다고 말할 수 없다" 그렇게 엄청나게 지어놨다.

헤롯이 그렇게 엄청난 성전을 지은 이유가 있다. 그것은 헤롯이 그이 아버지는 에돔의 사람이다. 그리고 자기 어머니는 유대인이다. 따라서 경건한 유대인들은 헤롯을 이방인으로 취급하였고 유대왕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래서 다윗 왕조를 재건할 사람으로 보지 않았다.

바로 나단의 예언을 통해서 메시야 사상이 전개되므로 헤롯 성전을 엄청나게 지어가지고 유대인들로 하여금 '나단의 예언'이 자기를 통하여 성취된 것으로 생각케 할려고 의도 하였다. 그러니까 다른 왕, 다윗의 자손으로서의 왕을 기대하지 말고 메시야적인 왕을 기대하지 말고 지금 여기서 태평성대를 누리고 이루어진 천국으로 생각하라는 것이었다.

왜? 좀더 나은 미래를 생각하면 현재의 하는 짓에 대해서 비판하며 욕할 것이 아니겠어. 다 그러는데 헤롯이 이와 같았다.

그런데 예수가 이제 뭐라고 하시는가? "돌위에 돌 하나도 남김없이 다 무너지리라"고 이야기하신다. 그리고 자기가 성전을 3일만에 다시 세운다고 하였다. 그래서 예수가 무엇으로 재판을 받았는가? 예수의 죄목이 바로 그것이 아닌가? 이 성전을 위협했다.이 성전을 때려 부수고 손으로 지은 성전을 때려부수고 예수가 대제사장 앞에서 재판 받을 때 바로 그것이 죄목이다.

손으로 지은 성전을 때려부수고 손을 짓지 않는 성전을 사흘만에 일으킨다는 것이 예수의 죄목이다.

그 죄목에 대해서 대제사장이 예수에게 물었다. 정말로 네가 그렇게 말했느냐? 그러니까 예수가 묵비권을 행사했다. 그러니까 대제사장이 그러면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 라고 물었다.

성전을 때려 부순다는 것과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과 무슨 상관이 있어요? 바로 나단이 예언을 살펴본 그러한 관계가 있는 것이다.

예수가 성전을 때려부수고 새로 짓겠다고 했다는 것은 자신이 나단의 예언을 성취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왜? 성전은 누가 짓는가? 하나님의 아들이 짓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가 그렇다고 그러니까 유죄판결을해서 빌라도에게 넘겨주는 것이다.

자 여기서 보면 예수가 나단의 예언을 염두에 두고 현재의 성전을 하나님의 심판으로 완전히 때려부수어질 것이고 자신이 3일만에 사람의 손으로 짓지아니한 성전을 지을 것을 의식한 것이다.

그러면 사흘만에 일으키는 손으로 짓지 아니한 성전은 무엇인가? 여기서 '사흘'만이라는 말은 호세아 6:2에서 온 말이다. 호세아 6:2절은 무엇을 이야기하느냐 하면 하나님의 징법로 신판으로 완전히 녹아 떨어진 하나님의 백성을 하나님의 그의 백성으로 다시 회복하는 것을 말한다. 사흘만에 다시 회복하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 '사흘'이라는 소리는 짧은 기간이라는 의미이다.

그래서 이 호세아 6:2절을 염두에 두고 예수께서 이 손으로 짓지 아니한 성전 여기에서 손으로 짓지 아니한 것이 무엇인가? 돌과 나무로 짓는 성전이 아니고 건물이 아니라는 것이다.

벌써 쿰란 공동체에서 엣센 공동체에서 성전을 영화해서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를 성전으로 보았다. 특히 쿰란의 엣센파의 사람들은 예루살렘과 유대의 썩어빠진 자들은 다 범법자들오서 더 이상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고 자기들의 공동체에서 율법을 연구하고 자기들이 몸을 깨끗이 하고 율법을 철두철미하게 지키는 쿰란 공동체, 엣센파 자기들만 하나님의 백성들로서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자기들이 드리는 기도가 곧 성전에서 드리는 제사로 보았고 자기들이 하는 성경공부가 곧 성전의 제사로 보았다. 이것은 선지자들의 전통을 이어받은 것이다.

그래서 벌써 성전의 spiritualisation, 성전을 건물만을 성전이라고 하지 않고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를 하나님의 성전으로 보는 전통이 선지자들의 가르침이 발전되어 가지고 중간사 시대에 발전한 것을 알 수가 있다.

그래서 예수가 가령 막14:58에서 손을 짓지 아니하는 성전을 짓는다고 할때 예수는 무엇을 염두에 두었는가 하면 이 건물을 말하지 아니하고 예수를 재판한 사람은 건물을 두고 말하지만 그래서 그가 마치 기적적으로 하나님 앞에 이 엄청난 건물을 지을 것같이... 그래서 요한복음에서는 그렇게 되어있다. "아 46년 동안이나 계속해서 짓고 있는 중인 이 성전을 네가 때려부수고 사흘만에 지어? 그건 말도 안되는 소리이다"

이것이 예수의 insunderstanding technique이라. 즉 이것은 건물을 두고 말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를 염두에 두고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을 두고 말하는 것이다. 이것이 손으로 짓지 아니하는 성전이다.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이다.

이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를 예수가 성전으로 바꾸고 이것을 자기가 사흘 만에 자기가 다시 일으키리라고 말한 것이다. 호세아서 6:2절의 말대로 하나님의 백성을 죄로부터 회복하는 것이다.

어떻게 예수께서 회복하는가? 주의 고난받는 종으로서 '대속과 새언약을 세우는 제사'를 통해서 이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 곧 새로운 성전을 다시 세운다고 한 것이다.

그런에 이 대속과 새언약의 제사는 무엇인가? 바로 그것이 성전의 기능이 아닌가? 성전이 무엇하기 위해서 있는가? 거기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려서 하나님의 백성과 하나님의 교제를 회복하는 것이 하나님의 성전의 기능이다.

그런데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나단의 예언을 성취하는 분으로 이 성전의 기능을 완성해서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를, 성전의 기능을 완성해서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를, 성전의 기능을 완성해 버렸으니까 다시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는 그런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를 완성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백성 자체가 성전이라고 볼 수 있다 .왜? 이곳의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가 대속과 새언약의 제사를 통해서 하나님과 완전히 교제가 회복이 되어가지고 하나님이 그들 안에 거한다는 것이다.

그들안에 거하는 것이다. 성전은 어떤 곳?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이다.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는 곳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 자체에 하나님이 거하시고 그들이 하나님과 더불어 먹고 마시는 잔체를 베풀게 되므로 그것이 바로 성전인 것이다. 이것이 곧 하나님 나라이다.

아까 우리가 지난 시간에 한 것을 상기할 때 뭐라고 하였는가? 에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의 궁극적인 의도가 무엇이라고?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를 구성하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백성을 창조하고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를 모아서 이룩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예수의 간접기독론이나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나 예수의 성전에 대한 태도나 다 일치한다.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을 창조하고 모으는 일이다.

그런데 그 일을 누가 하느냐?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한다 이말이다.

즉 그 일을 다른 말로 말하면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의 아들들 곧 하나님의 백성을 창조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을....

이 하나님의 아들들 곧 하나님이 자녀들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그림언어이다. 그래서 그것이 유명한 출24장에서부터 나온다.

그러면 여기에 예수의 '그 사람의 아들'로서의 자기이해가 있는 것이다. 지난 시간에 분석해 본바에 의하면 지난 시간에 우리가 두 가지의 결정적인 '그 사람의 아들'의 말씀을 통해서 분석하였다.

하나는 최후의 만찬 때의 말씀 마가복음 14:17-24절까지 나오는 최후의 만찬의 말씀을 분석함으로 예수가 스스로 그 사람의 아들이라고 할 때에 무슨 의미를 갖고 무슨 의미를 갖었냐는 것을 해보았다. 또 그와 똑같은 말이나 약간 변형되어서 나오는 마가복음 14:45절을 분석함으로 지난번에 이야기하였다.

자 마가복음 10:45절이나 마가복음 14:17-24절까지 나오는 '그 사람의 아들'에서 거기서 우리가 무엇을 알아냈었는가?

가령 마가복음 14:24절의 잔의 말씀에 반영된 구약의 구절들이 무엇무엇이라고 하였는가? 이사야서 42:10-14의 대속, 사42:6절의 언약 또 사49:8/출19장 24장 34장 등이 반영되어 있다고 하였다.

그런데 이 말씀이 '그 사람의 아들'로써 하신 말씀이다. 그런데 예수가 '그 사람의 아들'로서 자기가 주의 고난받는 종의 역할을 감당하는 곧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대속의 죽음을 하므로 타락한 하나님의 백성이 다시한번 회복되도록 하여 그들을 다시한번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는 언약을 세우는 제사로 보았다 이말이다.

이렇게 해서 창조된 것이 무엇이라고 하였는가?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이제까지 예수의 간접기독론이나 예수이 하나님 나라 선포로 보나 예수의 율법에 대한 독특한 태도를 보나 예수의 그 사람이 아들이라는 자기 칭호로 보나 모든 것이 어디에 집중이 되고 있는가? 어디에 다 통일이 되고 있는가? 예수가 하나님이 아들로서 하나님의 아들들 즉 하나님의 백성들, 그것을 새로운 성전이라고도 할 수 있고 백성이라고도 할 수 있다.

우리가 '그 사람의 아들'이라는 자기 칭호를 연구할 때에 몇가지 독특한 사실들을 관찰함으로 시작하였다.

첫째는 예수가 다른 모든 메시야적인 칭호들을 거부하면서 독특하게 자기를 '그 사람의 아들'로 불렀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 나라와 '그 사람의 아들'이라는 두 말은 같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마태복음의 한 두어 곳의 예외를 제외하고는 이 두개념을 같이 나오지 않는다.

마태복음의 두어곳 중에서 같이 나오는 것은 전에 고찰한 바와 같이 마태의 편집사적인 교정이라고 하였다.

왜 자기 중심 메세지인 '하나님 나라'와 유일한 자기 칭호인 '그 사람의 아들' 이라는 말이 같이 나오지 않는가? 같이 연결되어 있지 않는가 예수님의 가르침에....

그것을 가지고 독일의 과격파 학자인 Vielhaver 나 Kasemann(케제만)같은 사람은 뭐라고 한다고 하였는가?

그 둘다 예수가 말했을 수는 없다. 둘다 말했으면 에수가 섞어 쓸 것이 아니겠느냐? 즉 자기가 바로 그 사람의 아들로서 하나님 나라를 들여온다고 하거나 둘을 유치해서 쓸 것이 니겠는가?

이 개념이 이렇게 분리되어서 우리 복음서 전승에 나온다는 것은 한 사람이 두가지를다 말했을 수는 없다. 그러니까 하나만 예수가 말하고 다른 하나는 초대교회가 지어내어 가지고 예수의 입에 넣어가지고 마치 예수가 한 것같이 했다고 보아야 된다.

그래서 이 Vielhauer는 말하기를 예수는 하나님 나라를 선포했는데 초대교회가 예수가 종말에 오는 '그 사람의 아들'이라고 신앙고백하고 '그 사람의 아들'은 이제 묵시문학에서 흔했더 종말론적인 구원자,메시야적인 존재이었다. 라고 전제하고 부활후 초대교회가 예수에 대해서 신앙고백하고 그 고백을 예수의 입속에 넣어서 예수가 마치 스스로 '그 사람의 아들'이라고 주장했던 것같이 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이 두가지 면에서 틀렸다고 했다.

첫째로 '그 사람의 아들'이 그 묵시문학에서 메시야적인 칭호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Vielhauer의 전제가 무너지는 것이다. 더 중요한 것은 만약에 Vielhauer의 논리를 180도 뒤집는 것인데 Vielhauer가 어떻게 주장했느냐하면 한 사람이 '하나님 나라'와 '그 사람의 아들'이라는 말을 다 썼으면 이것이 섞여서 나왔을 것이다.따라서 예수는 하나님 나라만 선포했고 '그 사람의 아들'이라는 말은 초대교회가 자기들의 신앙고백을 뒷받침하기 위해서 지어가지고 예수의 입속에 넣었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하나의 근거없는 이야기이다.

초대교회가 예수가 '그 사람의 아들'이다는 신앙고백을 하고 바로 '그 사람의아들'의 지위와 권세를 가지고 '하나님 나라'를 선포한 사람이라는 이해가 있었으면 초대교회가 '그 사람이 아들'이라는 말을 지어낼 때에 예수가 '그 사람의 아들'로서 바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고 하나님 나라를 실재가 되게 한 분이라고 말을 지었을 것이 아니겠는가?

초대교회가 예수가 '그 사람의 아들' 이라고 하는 말을 지어냈다면 뭐하기 위해서 지어냈겠는가?

하나님 나나를 선포하고 하나님 나라를 실재라 되게 한 예수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초대교회가 '그 사람의 아들'인 예수가 바로 하나님 나라를 가져오는 분이라고 이렇게 '하나님 나라'와 '그 사람의 아들'을 초대교회가 이렇게 연결시켰을 것이다.

따라서 이렇게 공관복음의 전승에서 이 두개념이 이렇게 떨어져 있다는 것을 도리어 Vielhauer가 말한대로 '하나님 나라'만 예수가 말하고 '그 사람의아들'은 초대교회가 지어냈다는 것은 얼마나 잘못된 것인가를 정반대로 증명하는 것이다.

만일 초대교회가 하나님 나라를 선포한 예수의 의의 와 지위와 중요성을 선포하기 위해서 '그 사람의 아들'이라는 말을 지어냈다면 초대교회가 '그 사람의 아들'과 '하나님 나라'를 뒤섞었을 것이다. 예수가 바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였는데 그가 섞어서 쓰는 것은 그가 바로 '그 사람의 아들'이었기 때문이다는 이런 식으로 하였을 것이다.

여러분들이 비판적이고 자유주의 학자들의 논의를 쓱 보면 상당히 그럴듯한 데가 있다. 그런데 그것이 우리 정통신앙과 위배가 되면 여러분들이 가만히 생각해보라. 그라개지고 비판적인 학자들보다 한 250배 정도 더 비판적이 되면 그 사람들보더 더 훌륭한 진리를 찾아낼 수가 있다.

보수주의 신학자들의 큰 결함이 어디에 있느냐면 이 비판주의 신학자들처럼 비판적으로 생각하면 안된다는 것이다. 무비판적으로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옛날 우리 선조들이 전달해준 것은 무조건 믿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이 보수주의자들의 가장 약점이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학증을 갖는 신학을 전개할 수가 없다. 사실 진정한 보수주의자라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면 이른바 비판주의 학자라고 주장하는 학자들보다 250배 정도 더 비판적이어야 한다. 그래서 그들을 이겨 먹어야 진리가 보수되는 거이지 그냥 모래 속에 머리만 그냥 박고 있으면 세상이 잘 되어 가는가? 그렇게 생각하니까 안되는 것이다.

여러분들이 진짜 보수적으로 신앙을 유지하고 교회를 지키려면 비판적인 학자들보다 한 250배 더 비판적이 되어야 한다. 그렇게 되면 여러분들의 길이 쫙 보이는 것이다. 그러면 그들이 피상적인 것과 약점이 다 보이는 것이다.

그런데 가끔씩 신학에 衁자도 모르는 사람들이 비판적인 학자들보다 한 250배 더 비판적이기 위해서 책을 읽고 그 사람들과 씨름을 하고 논쟁을 하면 그 사람들에게 지는 것이고 오로지 루이스벌코프 책만 읽어가지고 일년내내 그것만 가지고 설교만 하고 하면 좋고 하는 것을 나는 원치 않는다.

그럴러면 뭘라고 신학교 댕겨? 차라리 1주일간 합숙해가지고 그책달달 외면 될것이 아닌가? 하여간 그건 잔소리고....

그래서 지난번에 우리가 '그 사람의 아들'에 대해서 연구할 때에 이러한 독특한 현상들을 관찰함으로 시작하였다. 예수가 자신을 '그 사람의 아들'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예수의 중심 메시지인 '하나님 나라'와 '그 사람의 아들'은 따로 분리되어 있다.

또 하나 우리가 관찰한 것이 무엇인가? 예수가 자기의 죽음을 예고할 때 항상 무엇으로 예고하였는가? '그 사람의 아들'로 예고하였다. '그 사람의 아들'로 자기의 죽음을 예고하였다. 이러한 것들이 바로 무슨 관계가 있느냐?

여기의 '그 사람의 아들'이라는 자기 칭호와 '그 사람의 아들'선포가 우리 복음서 전승에 연결되지 않았다고 하였다. 그래서 Vielhauer는 '하나님 나라'만 예수가 선포한 것이고 '그 사람의 아들'은 나중에 교회가 지어 내어서 예수의 입에 넣었다고 하는 주장과는 정반대인 것이다.

즉 예수가 이 말을 하였기 때문에 초대교회가 이것을 감히 건드리지 않았기 때문에 분리되어 있는 것이지 만약에 초대교회가 여기에 개입했다면 예수가 '그 사람의 아들'로서 '하나님 나라'를 가져온 분이라고 섞어서 썼을 것이다라고 하는 것이 나의 결론이다.

그렇다면 Vielhauer의 주장은이제 무시가 되었지만 그러면 왜 분리되어 있느냐? 하는 것은 설명이 안되어 있다. 이것을 설명해야 한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의 상황을 자세히 살펴보고 예수의 '그 사람의 아들'의 칭호를 사용하는 상황을 자세히 살펴보자. 그러면 우리는 거시서 놀라운 사실 하나를 발견하게 된다.

두세곳의 예외를 제외하고는 가령 마가복음 2:10 같은 두세곳을 제외하고는 '그 사람의 아들'이라는 칭호는 어디에만 나오느냐면 에수가 자기 제자들과 대화할 때만 나온다. 자기의 가까운 제자들과 대화할 때만...

반면에 예수의 '하나님 나라'선포는 큰 청중들에게 선포할 때에 등장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의 하나님 나라는 에수의 공개적 가르침이라고 한다. 공개적으로 모든 청중들에게 베푸는 가르침인 것이다.

여기에 반해서 예수의 '그 사람의 아들'이라는 가르침은 어디에서만 나오느냐면 그의 제자들과 내밀하게 비밀적으로 하는 가르침이라고 한다.

그래서 J.Jermeias가 관찰한 바와 같이 예수의 '하나님 나라'의 가르침은 에수의 공개적 가르침이고 '그 사람의 아들'이라는 가르침은 제자들에게만 하는 내면적인 심지어 비밀 가르침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기 때문에 이렇게 분리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의 ՋՏՃՉՁ, 예수의 말씀 전승에서 이것이 분류되어 나타나는 것이다.

이것을 좀 더 자세히 말하면 무슨 말이 되느냐 하면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는 내가 지난번에 무엇이라고 하였는가? 이것은 하나의 초대장이다. 사탄의 권세를 부인하고 하나님의 권세를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통치영역으로 들어오라는 청첩장이라고 하였다. 곧 하나님의 백성이 되라는 call이라고 하였다.

사탄에게서 벗어나서 하나님의 선한 통치, 악과 고난으로 다스리는 사단의 통치에서 벗어나서 의와 사랑으로 다스리는 하나님의 통치 밑으로 들어오라는 초대장이라고 하였다.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믿음으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오라"는 말이다.

그래서 예수는 일반 대중에게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백성이 되도록 회개하고 믿음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도록 하는 초대장인 것이다.

이 부름에 응한 자들, 이 부름에 응한 자들이 누구인가? 예수의 제자들이 아닌가? 이 하나님 나라를 선포해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라는 부름, 예수의 초대장에 응한 자들이 누구인가? 회개하고 하나님의 부름에 응한 자들이 누구인가? 그들이 바로 예수의 제자들이다.

그의 제자들에게 그러면 자기가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들것인가? '하나님 나라'를 선포해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도록 초청을 했는데 여기에 응한 사람들에게 그러면 어떻게 자기가 그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들것인가? 하나님 나라의 시민들로,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로 만들 것인가? 를 설명할 때에 '그 사람의 아들'이라는 칭호를 사용하였다.

어떻게 만드는가? 그의 대속의, 궁극적으로는 그의 대속의 그리고 새언약을 세우는 자기 제사행위로 그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든다는 것이다 . 이것이 이사야서의 주의 고난받는 종의 예언이 바로 그것이다.

다니엘서 7장에 나오는 예언이 다니엘서 7장의 예언이 무엇인가?

한 사람의 아들 같은 이가 종말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성도들 곧 하나님의 창조하고모은다. '그 사람의 아들 같은 이'가 뭐하는 분인가?종말에 하나님의 백성을 창조하시고 모으는 이가 다니엘서 7장에 나오는 '그 사람의 아들'이다.

그런데 그가 어떻게 하는가? 이사야서 42장-53장까지 예언된 고난받는 종의 역할을 감당하는 것을 통해서... 곧 스스로를 대속의 그리고 새언약을 세우는 제물로 바침을 통해서 그것을 이루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의 죄가 용서되고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 "내가 너희의 하나님이고 너희는 내 백성이라"는 법적인 관계가 성립이 되고 보장이 되는 것이다. 계약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예수의 대속의 그리고 새언약을 세우는 제사를 통해서 그래서 뭐가 이루어지는가? 하나님의 백성이 만들어지고 탄생되는 것이다.

그것이 무엇인가?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의 성취인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와 '그 사람의 아들'이라는 자기 칭호와는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공개적으로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선포해서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되도록 초대장을 발부하였다. 그래서 그 초대장에 응한 자기의 제자들에게 자기가 어떠게 자기의 백성으로 삼아주겠다는 그 약속을 어떻게 성취하느냐 하면 그것은 '그 사람의 아들'로서 대속의 새언약을 세우는 제물로서 자기를 바친 것이다. 그것이 무엇의 성취인가? 다니엘서 7장의 성취인 것이다.

이래서 우리의 복음서에 '하나님 나라'와 '그 사람의 아들'이 많이 분리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하나이다. 무엇이 하나인가? 하나님의 새로운 백성을 창조하는 것에 있어서 그러하다.

그러니까 이 하나님의 백성, 곧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가 곧 성전인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손으로 짓지 아니한 성전인 것이다. 그 안에 이 성전에 누가 거하는가? 하나님이 거하신다. 하나님의 백성가운데 하나님이 거하신다. 이러한 자기 이해를 예수는 성전에서 소란을 피움으로 표시를 했고 바로 그것에 의해서 붙잡힌 바되어서 십자가에 처형이 되었는데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그리고 이 모든 것에 유대의 관헌들과 로마의 병정들은 이것을 거부하면서 스스로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거부하면서 하나님에 의해서 이용당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도구로 쓰임을 받은 것이다.

그래서 예수가 진짜 '그 사람의 아들'로서 대속의 새언약의 제물로서 스스로를 십자가에서 바친 것이다. 그래서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었다. 그때의 죄목은 무엇인가? "성전을 때려부수고 새로 짓는다고 했다. 그러므로 그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했다.

왜 이것은 어디에서 근거하였는가? 나단의 예언에서 근거한 것이다. 유대의 메시야 사상의 가장 중요한 뿌리인 나단의 예언에서 근거한 것이다.

이것은 곧 무엇을 의미하는가? 당시 유대인들의 메시야 사상과 로마 사람들의 이해에 의하면 이것은 곧 유대인들의 왕이라는 소리이다. 왜냐하면 다윗의 왕조를 재건한다는 소리이니까. 다윗의 아들로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니까. '유대인의 왕'이라는 소리이다. 그래서 로마 사람들에게 무엇으로 낙인이 찍히는가? 반란자로 인식된다. 로마 가이사의 식민종주국에 반란을 일으킨 반란자로 여긴다. 그래서 그를 십자가에 못박는 것이다.

그래서 십자가의 죄목을 뭐라고 써붙였는가? 유대인의 왕 예수라.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 그의 죄목이다. 이렇게 연결되는 것이다. 성전을 때로부수고 새로 짓겠다고 하는 것이 예수님의 죄목이다.

이것이 산헤드린에서 결정한 죄목이다. 그것은 무슨 죄목으로 연결이 되어 있는가? 스스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죄목으로 연결짓는다.

왜? 이러한 전승(나단의 예언) 때문에 그렇다. 성전을 다시 짓는다는 것은 다윗의 아들로서 스스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했다는 것과 연결된다. 그것은 당시의 이스라엘 사람들의 메시야 사상과 로마 사람들의 이해와 같은 것이다. 유대의 왕인 것이다.

다윗의 왕조를 다시 재건해서 로마의 종주국으로붙 탈피하여 유대의 독립을 선언하는 그리하여 독립왕국을 건설하여 자기가 왕이 되겠다는 소리이다.

그러니까 소위 정치적으로 본 것이다. 그래서 해방신학자들은 말하기를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혔다는 사실 자체가 예수가 열형당원들처럼 해방운동가였다는 사실을 말한다고 한다. 이러한 주장은 신학적으로 유치한 사람들이 하는 짓거리이다.

그러나 이것은 신학적으로 일관성있는 해석이다. 그러니까 이 때이 산헤드린의; 대제사장이나 서기관들이 신학적으로 멍텅구리들이 아니다. 신학자들이다. 신학적으로 아주 일관된 견해이다. 그러나 여기에 숨어 있는 자기들의 讻은 이해관계가 있는 것이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신21:23에 기초되어 있다. 신21:23이 당시에 어떻게 이해가 되었냐면 십자가에 매달려 죽은자는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이라는 것이다. 신21장의 본문에 의하면 죄인을 십자가에 처형하면 그 사람을 나무에 달아놓되 해질 때까지만 해가 떠 있을 때까지만 하고 해가 지면 그 시체를 내려 놓아라고 되어 있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께 욕되게 한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처형당한 시체를 해질때까지만 두고 그 후에 처리해버리라는 거은 그가 하나님께 욕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 해석이 꽤나 애매하다.

하여간 쿰란 문서들이나 신약의 문서들을 보면 신21:23이 어떻게 당시에 이해가 되었느냐면 나무에 달려서 처형을 받는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아서 하나님께 가증스러운 것이다. 라는 것이다.

그래수 예수가 성전에서 소란을 피우고 성전을 때려부수고 새로 성전을 짓는다고 하는 죄목을 들었을 때 곧장 이렇게 일관된 신학적인 해석을 해서 예수를 정치범으로 몰아서 로마에 넘겨 주면 그때의 로마의 처형방밥은 신민국가에서 노예들이나 반란자들에게는 반드시 십자가 처형을 하였다. 그래서 나무에 달려 죽게 되는데 그렇다면 유대인들의 신학적인 눈에 의하면 신21:23이 예수에게 적용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가 하나님의 저주를 받고 죽은 것으로 유대인의 눈에는 판명이 되는 것이다. 그러면 이것이야말로 예수 운동을 가장 효과적으로 종결시키는 방법인 것이다.

구약 후기 중간사시대를 거쳐서 연연히 흐르는 전승 하나가 무엇이냐 하면 진정한 선지자는 당세대에 의해서 버림을 받아서 고난을 받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선지자의 고난받음의 전승이 있었다.

그래서 예수가 신7장 13장 17장 18장이 제시하는 거짓 선지자의 처형방법인 돌려쳐죽임의 그 방법으로 예수가 거짓 선지자로 유대인들에 의해서 예수가 돌로 쳐죽임을 당하면 에수의 추종자들에 의해서는 그것이 예수가 더욱 선지자임이 더욱 드러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당시에 면면히 흐르는 전승은 진정한 선지자는 당세대에 훼방세력에 의해서 고난을 받는다는 그 신앙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빌라도가 여러번 책임을 회피할려고 하고 너희의 법대로 처리하라고 할 때에 이들이 빌라도의 요구를 듣지 않고 빌라도에게 끝까지 정치적으로 처리하도록 빌라도에게 압력을 가한 것이다.

"네가 스스로 왕이라고 처리한 예수를 처형하지 않고 놓아주면 너는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다" 네가 바로 가이사의 역적이 된다는 것이다. 가이사에게 역적 행위를 한 예수를 네가 놓아주면 네가 역적이 되어서 네가 십자가에 처형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얼마나 큰 공갈이냐?

네가 예수를 놓아주면 네가 역적자로 십자가에 처형을 받는다고 하니까 빌라도가 화가 나가지고 잔뜩 때리고 나와서 뭐라고 놀린다. "너희들의 왕 예수를 보라"고 외친다.

그러니까 유대인들이 뭐라고 하는가? "처형하라 우리에게는 가이사 외에는 왕이 없다." 예수가 그들이 왕이 아니다라는 말을 위해서 뭐라고 하는가? 가이사 외에는 왕이 없다고 외친다. 이게 얼마나 숙명적인 말인가?

유대인의 왕은 누구인가? 하나님이다. 언약에 의해서 하나님이 유대인의 왕이고 이스라엘은 그의 백성이 아닌가. 그런데 여기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 대신인 예수 그리스도의 왕권을 부인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자기들이 왕됨을 부인하고 누가 자기들이 왕이라고? 지금까지 누가 자기들이 왕이라고? 가이사가 자기들이 왕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것은 무슨 소리인가? 자기들은 이제 더 이상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는 소리이다. 자기 부인이다. 자기들이 더 이상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 하나님의 아들 곧 하나님 대신인 예수가 진정으로 이스라엘의 왕이다. 사무엘하 7:12-16절의 나단의 예언을 성취하는 왕인 것이다.

이 왕을 부인하는 그 자리에서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위치가 종결되는 것이다. 어떻게? 자기부인을 통해서 종결되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가이사 외에는 왕이 없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고 누구의 백성? 가이사의 백성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십계명의 제 1조를 위반하는 것이다. 나 외에는 무엇을 두지 말라? 다른 신을 두지 말라. 이 언약의 제 1조, 이것은 언약이 파기된 것이다. 그래서 구약이 파기된 것이다. 언약이 파기된 것이다. 언약이 예수의 십자가전에서 파기되는 것이다.

어떻게 그러게 말할 수 있는가? 그것은 유대인들의 일방적인 파기이다. 더이상 나는 너희들의 하나님이요 나는 너희의 백성이라고 할 수 없다. 왜? 유대인들이 하나님이 우리 왕이 아니요 가이사가 자기들의 왕이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가 십자가에서 못박힌 것이다.

바로 이러한 신학적인 이유 때문에 이렇게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이유 때문에 예수의 제자들이 예수를 버려두고 다 도망가는 것이다.

왜? 신명기 21:23에 의해서 예수가 의로운 선지자로서 당세대에 버림을 받고 패역한 이스라에의 지도자의 대적과 핍박으로 억울하게 처형당한 것이 아니라 정말로 예수가 거짓 선지자이었나 보다. 거짓 메시야였다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법, 하나님의 말씀 자체가 선언한대로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것이다. 혹 예수가 메이야인가 선지자인가 하고 따라다니면서 예수의 제자들이 환멸과 공포속에서 도망가 버린 것이다.

그런데 사흘만에 예수가 다시 부활하였다. 그래서 그의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다. 그래서 이 부활은 곧 하나님께서 예수가 옳다고 선언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예수를 Vindication한 것이다. 예수가 옳다고 선언한 것이다. 하나님이 진짜 예수를 십자가에 처형하셨으면 죽은 예수를 하나님이 부활시키겠는가 그래서 옳다고 선언한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의 부활을 체험한 제자들에게는 예수가 옳은 것이다. 하나님이 예수를 옳다고 한 것이다. 예수가 의롭다고 한 것이다. 뭐가 의롭다고 한 것이냐? 예수의 모든 주장과 행동이 옳다는 것이다. 예수의 모든 주장이...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한 주장이 옳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자기의 아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 세상에 도입하고 그가 자기의 아들을 통해서 자신의 백성을 창조하고 모으는 자라는 사실이 옳다는 것이다. 심지어 그가 '그 사람의 아들'로서의 자기의 죽음이 대속의 그리고 새언약을 세우는 제사라고 주장하였는데 그것이 옳다는 것이다.

그런 의로운 예수가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저주를 받고 참혹한 죽음을 당하는 이것이야말로 예수가 평소에 주장하던, 전날밤에 떡을 떼고 잔을 붓는 그 drama로 우리에게 설명해 준대로 대속과 새언약을 세우는 죽음이라. 그것을 하나님이 확인한 것이다. 그것이 그렇다고...

그런데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르로 우리에게는 가이사외에는 왕이 없다고 선언하므로 구약의 역사는 끝나고 유대인들의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역사는 끝나고 무엇에 의해서 대치되는가? 새언약에 의해서 대치되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들, 부활을 체험한 예수의 제자들이 대속의 효과를 받고 새언약에 의한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라는 자기 이해가 생기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예수가 사흘만에 손으로 짓지 아니한 성전을 세운다고 한 것이구나 하는 것을 깨달음이 있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자기들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성전이다.

그래서 초대교회에 교회, 즉 하나님에 의해 세워진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를 성전으로 본 것이다. 이 성전에는 이미 대속의 새언약의 제사가 종말론적으로 한번 영원히 바쳐진 것이다. 그래서 더 이상 이제는 제사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제자들이 뭐라고 자기이해를 갖게 되었는가?

자기들이 새 이스라엘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자기 이해를 가지게 되고 벧전 2:9절에서 본 바와 같이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모든 귀중한 칭호들, 출19:5절에 나오는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칭호들을 옛 이스라엘, 육신적인 이스라엘에게서 뺏어가지고 누가 누구에게 적용하는가? 자기들에게 적용한다.

너희는 뭐라? 너희는 왕같은 제사장이며 거룩한 족속이며....

그것이 출19:5의 이스라엘, 하나님의 백성에 적용되는 칭호이다. 그런데 그것을 그들에게 뺏어가지고 누가 갖게 되는가? 새이스라엘이다.

그러니 예수가 진짜 하나님의 아들이다. 예수가 진짜 메시야 사상의 뿌리인 삼하 7:12-16의 나단의 예언을 성취한 진짜 메시야이다. 예수가 진짜 주이다. 예수가 정말로 우리 죄를 위해서 대속의 죽음을 하였다. 예수가 정말로 새언약을 세우는 죽음을 하였다는 선포가 울려퍼지기 시작한 것이다. 이것이 이른바 복음이다. 케리그마이다. 사도들의 복음이 이렇게 해서 발생한 것이다.

예수가 메시야이다. 예수가 우리 죄를 위해서 죽고 부활하였다는 복음의 요약인 케리그마가 이렇게 예수의 가르침과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발생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