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신학 제11강

예수의 자기 칭호 그 사람의 아들을 논함에 있어서 우리가 제일 먼저 자기 칭호와 더불어 관찰해야할 점들을 여러가지 하였다. 생각해보았고 그 다음에 여러 학파들의 경향을 소개를 하였다. 거기에 대한 여러 학파들의 학설이 어떻게 구구하게 하나? 그래서 아직 학자들의 결론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아직 없다. 그러한 상황에서 나는 그러면 어떻게 해석하느냐해서 이제 내 해석을 개진하고 주장하였는데

그 첫째번으로 고찰한 것이 이른바 조교사적인 자료이었다. 종교사적인 자료들은 전통적으로 다니엘서 7장과 제 1에녹서나 네번째 에스라서 등에서 사람들이 찾을려고 그랬는데 제1에녹서나 제 4에스라서가 아마 신약후에 쓰여진 문서일 가능성이 많으니까 그것은 그렇게 종교사적인 자료로 그렇게 합당한 것이 못된다 그래서 좀더 새로운 자료들을 사용해 보아야 한다고 해서 쿰란 옛터에서 찾은 조그마한 조각 하나 4Q ps Dan Aa이라는 이것을 좀 우리가 살펴보았고

그 다음에 다니엘 7장을 헬라어로 번역한 것이 있었다. 이른바 LXX로 번역함에 있어서 어떻게 다니엘 7장을 이해하였나? 하는 이러한 것을 주로 살펴 보았다. 그런 결과 다니엘서 7장에 나오는 하늘에서 구름을 타고 오는 한 사람과 같은이를 하나님의 아들로 이해하고 있는 것을 여기저기에 흔적을 남기고 있는 것을 우리가 보았다.

그 다음에 다니엘 7장이 이제 발달되는 마카비 전승에서 어떻게 쓰였는가를 보았을 대에 이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의 우편에 높임받는 그런 ࠄࠁࠊ࠘ࠎ (전차) 장면으로 이해되는 것을 많이 보았는데 그 전승이 나중에 유대의 영지주의 문서에까지 이어진다고 그렇게 말하였다.

이렇게 보았을 때에 다니엘서 7장이 하나님의 나타나는 현상으로서 소위 ࠄࠁࠊ࠘ࠎ vision전승의 초창기의 일부로서 거기의 한 사람과 같이 나타나는 이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종말에 하나님의 백성들 즉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성도들의 대표로 그렇게 이해될 수있다. 그렇게 대개 종교사적인 배경을 살펴 보았다.

그 다음에 우리가 살펴본 것은 언어적인 배경을 죽 살펴보았다.

그래서 첫째로 ՕՉՏՒ ՔՏՕ ՁՍՈՑՙՐՏՍ을 직역하면 아람말로 강조형,마지막 ࠀ가있는 것으로 번역을 해야 된다. ࠀࠚࠏࠀ ࠘ࠁ . 왜냐하면 우리가 '그 사람의 아들'을 논함에 있어서 제일 우선적을 관찰해야할 점이 무엇이었냐 하면 항상 이렇게 관사가 붙어 있다는 것이다. ՕՉՏՒ ՔՏՕ ՁՍՈՑՙՐՏՍ 그런데 우리의 공관복음 다른곳에서 ՕՉՏՒ ՔՏՕ ՁՍՈՑՙՐՏՍ 또는 ՕՉՏՒ ՁՍՈՑՙՐՏՍ 이렇게 관사없이 자주 나오는데 관사를 동반하는 경우는 유대문서에 복음서 전의 유대문서에는 없다. 그러기 때문에 이것이 상당히 관건인 것이다.

그래서 이것을 직역하면 이렇게 아람말로 ࠀࠚࠏࠀ ࠘ࠁ의 마지막 ࠀ를 들어가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래서 이것을 정확히 번역하면 '그 사람의 아들'이라고 해야 한다.

'그 사람의아들'이라고 하는 말은 다니엘서 7장에서 따온 말이다. 여기에 '그'라는 관사는 다니엘서 7장에 있는 '그 사람이 아들'이다. 하는 지칭의 기능을 한다고 하였다. 그런데 '그 사람의 아들'이라고 하는 말은 셈족언어의 숙어로서 그냥 '사람'이라는 소리이다. '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다니엘서 7장 13절의 하늘에서 거름을 트고 오는 이가 한 사람과 같은 형상으로 나타났다는 말이다. 사람과 같이 나타났다는 뜻이다. 그런데 예수가 사람과 같이 나타난 그 사람이라고 자기를 지칭했다는 말이다. 대개 아마 거기까지 지난 시간에 우리가 관찰하였을 것이다.

그러면 복음서 이정도로 종교사적인 배경과 언어학적인 설명을 하였으면 그 다음에는 공관복음서 4복음서 전체에 나타난 예수의 어록들, 자기를 '그 사람의 아들'이라고 지칭하는 말들을 하나하나 해석함으로써 분석함으로써 예수가 도대체 어떤 의도로 또는 어떤 의미로 '그 사람의 아들'이라는 칭호를 자기에게 썼는가를 밝혀내야 되지 않겠는가?

그래서 지난번에 첫 시간에 이야기한바와 같이 전통적으로 예수의 '그 사람의 아들'에 대한 말들을 세가지로 학자들은 분류하였다.

1)지상에서 겸손히 존재하고 일하는 '그 사람의 아들'. 그래서 가령 공중에 나는 새도 깃들곳이 있고 여두도 굴이 있으나 그 사람의 아들은 머리둘 곳이 없다고 하는 이런 말, 또는 요한은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으므로 귀신 들린 자라 했는데 그 사람의 아들은 먹고 마시니까 뭐라고 한다고? 술주정뱅이요 탐식가라고 한다고 한 이런 말을 첫 카테고리에 넣는다. 현재에 땅위에서 겸손히 존재하며 역사하는 사역하는 그 사람의 아들이다.

2)죽음, 그 사람의 아들의 죽음과 부활, 소위 공관복음에 마가자표에 집중해서 나타난다. 마가복음 8장 31절부터 시작하는데 9:31/10:33의 세가지에서 '그 사람의아들'이 장로들과 서기관들에 의해 넘기움을 받아서 죽임둁르 당하고 사흘만에 부활한다. 그런데 보통 이 세가지를 말하지만 그와 비슷한 말들이 수없이 많다. 막9:9/9:12/10:45/14:19-24 등등의 '그 사람의아들'이 죽임을 당한다는 말이 많다. 10:45절은 우리가 너무 잘아는 말도 거기에 뭐라고 쓰여져 있는가? '그 사람의 아들'이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고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사람들을 위한 대속물로 주기위해서 왔다고 한다. 그 사람의 아들이 자기 목숨이 많은 사람들 우리 해서 대속물로 주기위해서 왔다는 것이다. 그래서 두번째 카테고리로 사람들이 보통 간주한다.

3)그 다음에 세번째의 카테고리는 미래에 하나님의 영광으로 와서 그 사람의 아들이 하나님의 천사들과 와서 세상을 심판하리라는 미래의 파루시아의 관한 말들이 대개 '그 사람의 아들'과 연결이 되어 있다.

그래서 보통 학자들은 이렇게 예수의 말들이 우리의 공관복음서에 나타난 '그 사람의 아들'의 말들이 이렇게 세가지로 분류를 해가지고 논한다고 하였다. 어떤 살마들은 3)에 예수의 진짜 말이 몇개 있고 이 나머지들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후 교회가 예수가 바로 그 사람의 아들이라는 신앙고백을 하기 위해서 그래서 그냥 발달시킨 것이다. 특히 독일의 비판학자들이 그렇게 본단고 하였다. 독일의 대개의 비판학자들이 그렇게 볼때에 예수가 '그 사람의 아들'로서 하나님의 영광으로 천사들과 더불어 와서 심판한다고 할 때에 예수가 자기를 두고 '그 사람의아들'이라고 한 것이 아니라 자기 말고 종말이 올 심판자와 구원자를 '그 사람의 아들'로 불렀다는 것이다. 이것은 유대교 묵시문학에서 있어서 '그 사람의 아들'이 메시야적인 존재로 이미 묵시문학에 알려졌기 대문이다. 그렇게 한다고 하였다. 그런데 그것이 옳지 않다고 하였다.

옳지 않은 이유가 많은데 근본적으로 두가지 면에서 옳지 않다.

1)유대의 묵시문학에 '그 사람의아들'이라는 메시야적인 존재가 없다. 유대의 메시야 사상에 무슨'그 사람의 아들'이 메시야적인 칭호로 복음서에 전혀 알려진 것이 없다. 보수주의자나 복음주의자들 책에고 그렇게 많이 쓰였는데 그렇지가 않다. 그렇게 자꾸 저장하면 독일의 과격파의 주장에 사실은 말려드는 것이 된다. 그런데 조금 뒤떨어진 책들에는 그렇게 많이 쓰였다. 그렇지가 않다. 그 뿐만이 아니고 이 세째번 카테고리의 말들을 잘 분석하여 보면 예수가 어떤 또 하나의 존재를 기대한 것이 아니고 자기 자신을 두고 '그 사람의 아들'이라고 부른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2)번만 진짜로 예수가 한 말들이고 그 나머지는 나중에 교회가 나중에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얻은 신앙고백을 발전시켰다고 그렇게 말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것도 옳지 않다고 하였다.

도대체가 예수의 이 말들을 이렇게 세종류로 분류해놓고는 어느 한쪽이 1)과 2)만 진짜 말이고 나머지는 여기에서 발달시킨 신앙고백으로 초대교회가 만들어낸 것이라는 그 연구 방법그것을 제일 먼저 개발한 사람이 Bultmann인데 그런데 그 연구 방법이 틀렸다고 하였다. 도대체가 이렇게 분류하는 것 자체가 틀린 것이다. 왜 틀렸는가에 대해 그때 이야기를 하였는데 내가 기억을 다시 한번 새롭게 하면 이 분류방법이 무슨 기준으로 분류한 것인가? 언뜻보면 그럴듯하다. 그러나 사실 그렇지가 않다. 여기의 1)3)은 무슨 기준으로 분류한 것인가? 시간적으로 분류한 것이다. 1)은 현재 지상 위에서 겸손히 행하는 그 사람의 아들3)은미래에 영광중에 올 그 사람의 아들 그러면 가운데 2)은 무엇인가? 이것은 내용적으로 분류한 것이 아닌가? 그 사람의 아들의 죽음과 부활. 그래서 이것을 이렇게 분류할 때에는 기준이 어긋나는 것이다. 이것은 억지로 자기의 마음대로 분류한 것이다. 그런 식으로 분류를 시작하면 수없이 많은 분류를 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실제로 6-7가지로 분류하였다. 그래서 내책 끝부분에 보면 내용이라는 한가지 기준으로 6-7가지로 분류하고 있다. 그런데 어떤 학자들은 대개 2가지로 분류하기도 한다. 그것은 a)권위가 무시되고 핍박받는 '그 사람의 아들'. 그의 권위가 무시되고 핍박받는 그 사라의 아들 b)그 다음에 그의 권위가 확인되고 심판자로서, 구원자로서 나타나는 그사람의 아들. 이렇게 두가지로 분류한다. 따라서 그의 권위가 무시되었느냐? 아니며 확인되었느냐의 하나만으로 이렇게 분류한다.

그러나 이것을 보면 사실은 위의 것에 해당하는데 a)는 앞의 것의 2)에 해당되고 b)는 앞의 3)에 해당된다. 이렇게 분류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가령 캠브리지의 모나크 교수나 튀빙겐의 오토베쯔 같은 사람은 내용적으로 이렇게 분류를 하다. 그것도 일리가 있다. 그 사람의 아들이라는 말이 우리 복음서에 나올 때마다 예수의 권위주장이 은근히 풍긴다 그러기에 아주 엄숙한 선언이며 그 말들이 쓰인 곳은 예수의 권위 주장이 은근히 풍긴다. 담나 지금 이 땅위에서 권위가 무시되고 그래서 심지어 '그 사람이아들'이 머리둘 곳이 없는 그 사람의 아들이 심지어 술주정뱅이요 탐식가라고 놀림을 받는 그 사람의 아들이 섬겨야될 자기 백성들에 의해서 대신 죽어가야 하는 심지어 자기 목숨을 대신 죽기 위하여 장로들과 서기관들에 의해서 넘겨줌을 받아서 침 뱉음을 당하고 죽임을 당하는 이 모든 것이 그 사람의 아들의 권위가 무시되고 짓밟히는 이야기이다.

반면에 여기의 b) 즉 앞의 3)의 이야기는 그러나 '그 사람의 아들'이 종말에 심판자로, 구원자로 그의 천사들과 함께 나타난다는 이야기이다. 이렇게 두가지로 내용별로 나누었다. 그것은 자중에 좀 더 이야기할 수 있겠지만 이상의 두가지로 분류하는 기중이 내용상 이루어진 것이고 또 그렇게 할 수 있겠지만 그것이 미흡해서 나는 6-7가지로 분류하는데 일단 지금 말하고자 하는 것은 대부분의 학자들이 사용하는 위의 3가지 분류방법이 옳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옳지 않은 분류방법으로 시작하는 해석은 대개 옳지가 않다.

그래서 우리가 대부분의 학자들이 이렇게 세가지로 분류해놓고 그 중에 어느 하나만 예수의 진짜 말이라고 시작해서 거기에서부터 해석을 해나가서 예수가 자기를 '그 사람의 아들'이라고 부렀다면 설명 불렀다고 하더라도 무슨 의미로 불렀겠느냐 하는 것이다. 그러면 많은 '그 사람의 아들'의 말중에 어느 것에서부터 시작해서 우리가 해야하는가 하는 이것이 상당히 중요하다.

그러니 이것을 연구하는 받둁법이 여러가지가 있을 수있다. 지금 복음서에 나타난 '그 사람의 아들'의 말들을 가령 마가복음은 마가복음, 마태복음은 마태복음, 누가복음은 누가복음에 나타나는 순서대로 정확히 해석을 해서 이 문제를 접근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것은 비경제적이고 상당히 혼란스러운 방법이다. 그래서 나는 어떤 방식을 취하느냐면 우리 보기에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 예수가 자기 계시,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 예수가 자기계시를 하는 순간에 쓰이는 '그 사람의 아들'이라는 말이 상당히 예수의 자기 의도 또는 자기 이해를 제시해주지 않겠는가? 는 가정을 설립해 볼 수 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예수가 자기의 십자가의 못박히기 전날밤에 주의 만찬이라고 부르는 만찬석상에서 자기의 다가오는 죽음을 자기의 제자들에게 연극으로 설명해주고 있다. drama로 설명해 주고 있다. 자기의 다가오는 죽음을 내일 다가오는 자기의 죽음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drama로 예수가 제자들에게 설명해주고 있다.

그래서 떡을 떼는 제스쳐를 하고 그 제스쳐가 무엇을 의미하는가? 내일 자기 몸의 부서짐을 의미한다. 또 빨간 포도주를 붓는 그 제스쳐를 하면서 그것은 내일 자기이 피흘림을 의미한다는 것을 연극으로 내일 다가오는 자기의 죽음을 설명한다. 그런데 그것을 신학적으로 설명한다.

자기의 자기 몸의 부서짐이 너희들을 위한 것이다. 또는 많은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또 피흘림이 많은 사람들을 위한 피흘림으로서 새언약을 세우는 피흘림이다라고 이렇게 설명을 한다.

그러니까 최후의 만찬석상에서 다가오는 자기의 숙명적인 죽음, 십자가의 죽음의 의미를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그 순간에 예수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자기의 사명둁르 가장 절실하게 가장 분명하게 확실하게 표현한다고 그렇게 볼 수 있다. 그러니까 가자 둁결정적으로 그 순간에 자기의 자기 이해 또는 자기의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사명에 대한 이해를 가장 분명하게 가장 확실하게 표현한다고 그렇게 볼 수있다.

그런데 마침 회후의 만찬의 말슴에 예수가 '그 사람의 아들'로서 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 사람의 아들'로서 말을 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니까 결정적인 순간이 예수의 자기이해를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사명을 분명하고 가장 확실하게 설명하는 바로 그 순간에 그가 '자기가 그 사람의 아들'로서 하는 것이다고 하였다면 이 최후의 만찬의 말씀이 역으로 '그 사람의 아들'이라는 의미를 '그 사람의 아들'이라는 말을 예수가 어떤 의미로 썼는가를 해석하는 열쇠를 우리에게 제공할 수 있지 않는가? 그렇게 가설을 세워고 이제 접근을 해보는 것이다.

그러면 마가복음 14장 최후의 만찬의 말씀을 보자. 이것이 최후의 만찬의 말씀이다. 최후의 만찬의 말씀은 우리에게 4가지로 전승이 되어 있다. 공관복음에서 3가지이고 그 다음에 고너 11장이다. 요한복음에서는 최후의 만찬의 장면은 나와 있으나 최후의 만찬이 말씀은 전승되지 않고 있다. 좌우간 요한복음을 자세히 보면 이 최후의 만찬의 말씀이 약간 변형되어서 나타나는 것은 사실이다. 우리가 그것은 다음 시간에 살펴보기로 하겠다.

그러나 일단 공관복음에 3가지 고전 11장에 바울의 것이 전승이 되는데 이것의 4가지를 자세히 분석해보면 두가지로 구분이 된다. 하나는 마태,마가판이고 하나는 누가, 바울판이다. 이 마태 마가판은 거의 비슷하다. 누가,바울판도 거의 비슷하나 약간의 차이가 있는데 신학적으로는 같다.

마태/마가 누가/바울

많은 사람들을 위해서... 너희들을 위해서....

...이것은 언약의 피라 나의 피로 세언 새언약의 피라

↓

언약에 참여

그래서 학자들 사이에서는 어느것이더 예수의 원래의 말에 더 가깝느냐? 를 가지고 굉장한 논란이 벌어졌다. 많은 학자들은 마가복음판이 더 오래되었다고 하고 또 다른 학자들은 누가복음판이 또한 오래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논쟁이 많이 벌어졌고 지금도 해결되었다고 볼 수 없으니 지금은 다수의 학자들이 어떻게 생각하느냐면 둘다다 오래된 요소들도 유지하고 좀 교회에서 최후의 만찬의 말씀이 우리가 성례전에서 교회에서 낭독한다. 그렇게 교회의 예배에 쓰임에 있어서 조금씩 변형되었다. 그런데 그것이 누가, 바울 판에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마가 마태판에도 일부 있다고 이렇게 본다.

그래서 어느 것이 더 오래되었느냐고 단정적으로 말 할 수 없고 어느것은 마가복음의 것이 더 오래되었다고 하고 어느 것은 누가복음의 것이 더 오래되었다고 이렇게 혼합적으로 생각을 하기도 한다.

여기서 우리가 이제 주목해야 할 것은 마가복음 14:24절에는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포도주를 붓고 말씀하시기를 이것은 많은 사람들을 위해서 흘리는 언약의 피이다. 이 말을 잔의 말씀이라고 한다. 잔의 말씀, 소위 cup-saying이라고 한다. 앞의 떡의 말씀, 이것은 너희를 위해서 부서지는 나의 몸이다. 떡의 말씀이 있는데 우리는 잔의 말씀이 신학적으로더 정확히 해석한 말씀이기 대문에 잔의 말씀 여기에 우선 집중하겠는데 이 잔의 말씀의 두판이 확연히 다르다.

누가 바울판에는 어떻게 되었느냐면 이것은 '이 잔은 너희를 위해서' 우선 그것이 마태 마가판과 다르다. 마가, 마태판은 '많은 사람을 위해서'라고 되어 있다. 누가바울판은 '너희들을 위해서'라고 되어 있지만..'너희들을 위해서 흘리는 나의 피로 세운 새언약이라' 이 잔은... 새언약이라 라고 문법구조가 되어 있다. 마가,마태판은 어떻게 되었느냐면 '이것은 ...언약의 피라'라고 되어 있다.

빨간 포도주가 무엇인가? 피라는 것이다. 그래서 거기에 앉은 사람들이 무엇을 마시는가? 피를 마시는 것이다. 문법구조로 보면 그런 것이다. 그런데 거기에 '새'자는 없고 그냥 언약의 피라고 되어 있다. 후의 사본에는 마태마가에만 '새'자를 집어 넣는다.

반면에 이 누가바울판에는 많은 사람들을 위해서라기보다는 '너희들을 위해서'라고 다르게 되어 있고 또 하나의 다른 점은 '이것은'이 무엇을 말하는가? '피'가 아니고 '새언약'을 말한다. 그러면 '피'는 어떻게 나오는가? '너희들을 위해서 흘리는 나의 피로 세운 새언약이라'고 나온다. 그래서 우리가 누가바울판을 사용하면 거기의 최후의 만찬석상에 앉았던 사람들이예수의 피를 마시는 것이 아니고 새언약에 참여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예수의 피를 마신다는 것은 없어진다. 마가마태판에는 그 피를 마시는 것으로 나타나지만...

이렇게 확인히 다르게 나타난다.

그래서 여기에서 어느 것이 더 먼저이고 어느 것이 더 예수의 원래의 말에 가까운가?를 학자들간에 논란이 매우 많으데 대개 논란이 어떻게 전개되느냐면 이렇게 전개된다.

여기의 많은 사람들을 위해서는 분명히 셈족언어의 숙어이다. 셈족언어에는 추상명사가 없다. 그래서 가령 '우주'라는 말이 없다. 우주를 말할 때에는 양극을 말한다. '하늘과 땅' 그리고 태초에 하나님께서 어쨌다? cosmos 우주를 창조했다고 말할 때에 말하고 싶을 때에 뭐라고 말하는가? 하늘과 땅을 지으셨다고 말한다.

마찬가지로 이 숫자도 전체적인 개념인 '전체'라는 개념이 없다. 그래서 전체,모든 사람들, 영어의 all, 헬라어의 ՐՁՍՔՁ, ՐՁՒ에 해당하는 히브리말이 없다. 이럴때는 무슨 말로 대치하느냐면 ࠎࠉࠁ࠘, '많은 사람들'이라는 말로 대치한다. 영어로 many이다.

그래서 이것은 많은 사람들을 위해서 흘리는 피라는 것은아주 셈족언어적인 숙어적인 표현이다. 그것은 무슨 말이냐하면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흘리는 피'이다. 라는 말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을 위해서'라는 말은 셈족언어적인 냄새가 많이 난다.

반면에 '너희들을 위해서 흘리는 피라'는 것은 벌써 이 최후의 만찬의 말씀이 성만찬에 개개의 의식으로 많이 쓰여서 지금 예배에 참석하는 사람들에게 직접 적용된다고 하는 것을 다주 강조하는 문구이다. 그래서 '너희들을 위해서'라는 말은 최후의 만찬의 말씀이 성만찬에 예배의식의 말씀으로 많이 쓰였던 그래서 예배용어가 되었던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이다.

그래서 그점에 있어서는 마가복음판이 더 원어에 가깝다. 예수의 원래의 언어를 간직하고 있을 것이라는 것으로 이렇게 대개 보는 것이다. 그러면 그 다음에 중요한 차이점은 어디에 나타나느냐면 그것은 마가마태판에 의하면 '많은 사람들을 위해서 흘리는 언약의 피라'고 되어 있鑁. 이것은 빨간 포도주의 잔은 많은 사람들을 위해서 흘리는 언약의 피라고 되어 있다. 거기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 무엇을 마시는가? 싱징적으로 예수의 피를 마신다.

이 말이 유대인들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졌겠는가? 유대인들이 피를 마시는가? 유대인의 법에 의하면 피를 마시면 되는가? 안되는가? 절대 안되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예수도 유대인이었고 거기에 앉아있는 사람도 다 유대인이었는데 감히 피를 마신다는 말을 하였겠는가? 그러니까 피 마신다는 말이 피해진 누가바울판이 더 원어에 가까울 것이라고 주장한다. 누가바울판은 무엇이라고 되어 있는가? '너희들을 위해서 흘리는 피로 세운 내 언약이라' 그러니까 그것이 원어에 더 가까울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이렇게 말을 하고 여기의 피를 마신다는 것은 나중에 헬라의 무슨 신비종교의 영향으로 예수의 죽음에 그 신의 죽음에 직접적으로 동참하는 것을 의미하기 위해서 그것이 변형된 것이다고 이렇게 논리를 전개하는 학자들이 있다.

그러나 많은 학자들은 그것을 정반대로 생각한다. 어떻게 하느냐? 에수나 되니까 '이것이 나의 피다'라고 말할 수있지 어떻게 초대교회가 감히 예수의 말을 변형해서 초대교회가 대부분 누구인가? 유대인이다. 우리가 늘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그것이다. 종교사학파들 특히 Bultmann학파들이 신약의 기독교를 순 헬라적인 종교사적인 해석을 할려고 한다고 그랬다. 그런데 그것이 근본적으로 틀린것이 그 이유가 무엇이냐하면 신약시대 2세기동안은 신학적인 leadership이 누구에게 있었느냐면 전부 유대인들 손에 있었다.

그래서 우리신약성겨의 저자들이 전부 유대인이다. 누가만 빼고..

어떤 많은 사람들은 누가는 유대개종자로서 그리스도인이 되었던 사람일 것이다고 많은 사람들은 보는데 제 친구 올 엘리스 같은 사람은 누가도 유대인으로 본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의 의견들은 누가가 유대개종자로서 나중에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이라고 한다면 그 사람만 우리 신약성경의 저자중 유일한 이방인이다. 그 외에는 전부 유대인이다.

따라서 그것만 봐도 1세기 말이라는 것은 교회사에 있어서 아주 재미있는 시간대인데 그 때의 신학적인 지도력이 유대인에게서 헬라인에게로 넘어간다. 1세기 말에 활약한 교회지도자들인 안디옥의 이그나티우스나 폴리캅이나 로마의 클레멘트나 이런 교회지도자들은 전부 이방인이다. 1세기 말부터 그 사람들이 교회의 지도자로, 신학적인 지도자로 등장한다.

이 성만찬의 말씀이 전승되어 복음서에 기록될 때까지는 신학적인 지도력이 전부 유대인에게 있었는데 어떻게 감히 유대인들이 예수의 피를 마신다는 생각을 할 수가 있겠는가? 그렇다면 예수나 되니까 그렇게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왜냐하면 여기에서 분명한 것은 무엇인가? 예수가 유대의 관습을 많이 무시를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의 피마신다는 것이 도리어 마가마태판이 더 오래되었다는 것을 더 예수의 원어에 가깝다는 것을 우리에게 말해준다고 이렇게 논리를 전개하는 사람들이 많다. 나도 그것이 옳은것 같다.

그래서 나는 이 마가복음판이 대체적으로 전부는 아니지만 누가바울판보다 나이를 더 먹은 것으로 본다. 예수가 말한 원어에 더 가까운 것으로 본다. '많은 사람들을 위해서'라는 그 말 뿐만 아니라 '언약의 피라'는 그 말이...

또 이 '새'자가 없는 것도 예수의 원어에 더 가깝다고 말한다. 그 이유는 곧 이제 설명을 하겠다. 그래서 우리가 마가복음판에 집중을 해야 하겠다.

마가복음 14:24절. 그런데 왜 그렇게 그것이 중요한가? 방금 마가복음 14:17-25절을 읽었는데 21절을 한번 다시 읽어보기 바란다. 여기의 21절에 보면 ''그 사람의 아들'은자기의 기록된 바대로 가거니와' 여기의 '간다'는 말은 예수가 자기의 죽음을 두고 하는 소위 Eupuenmism이다. 자기의 내일 다가오는 죽음을 듣기 좋은 말로 표현한 것이다. 자기의 기록된 대로 간다. 그런데 그 사람을 파는 그 사람은 그 사람의 아들을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을 것이다.

여기에 소위 word-play가 있다 .이것을 아람말로 다시 번역해보면

ࠀࠚࠏࠀ ࠘ࠁ 그 사람의 아들을 파는 그 사람은 그리고

ࠀࠚࠏࠀ ࠘ࠁ 그 사람에게는

또 ࠀࠚࠏࠀ ࠘ࠁ이다. 즉 ࠀࠚࠏࠀ ࠘ࠁ를 파는 ࠀࠚࠏࠀ ࠘ࠁ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을 것이다. 여기에 소위 언어유희가 있다.

예수의 말씀들 중에 특징이 여러가지가 있다. 그것에 대해서 여러분들이 잘 공부해볼려면 J.Jeremias의 신약신학을 한번 읽어보라. 그러면 제일 첫장에 예수의 말씨의 특징이 여러가지로 나와 있다.

그 중의 하나가 무엇이냐 하면 word-play이다. 또 예수가 알쏭달쏭하게 말하는 것이다. 수수께끼 식으로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들을 귀 있는 자만 듣도록 하는 것이다. 믿음이 없고 미련한 자는 못듣게 하는 것이다. 그것을 ࠌࠚࠎ라고 하는데 그 ࠌࠚࠎ의 일부가 비유이다. 그러기에 예수의 가르침의 말씀이 특징들이 거기에 잘 고찰되어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무엇이냐 하면 word-play이다. 말로 하는 장난이다.

우리말에도 말놀음이 많다. '그 사람의아들;은 자기의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그러니까 성경에 예언된 대로 하나님이 뜻대로 그러니까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이 뜻대로 죽는다. ՕՐՁՃՅՉ 죽는다는 이말이다. 그런데 '그 사람의 아들'을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을 것이다. 그 사람의 아들의 성경에 기록된 대로의 죽음의 의미를 22절부터 drama로 해석하는 것이다.

그 사람의아들이 성경에 기록된 대로 간다. 하나님의 뜻대로 간다. 그런데 '그사람의 아들'이 성경의 기록된대로 가는 진정한 의미는 무엇인가? 그것이 떡의 말씀과 잔의 말슴으로 그리고 말씀을 동반한 제스쳐, drama로 나타냈다. 그러니까 마가복음에 나타난 최후의 만찬의 말슴을 보면 마가복음 14:21절이 가장 중요한 천명이다. statement둁다. 그 사람의 아들이 곧 죽는다는 것, 그 사람의 아들이 이제 곧 죽는다는 것 그런데 그것이 성경에 계시된 대로 하나님의 뜻대로 죽는다는 것 이것이 statement이다.

그 statement의 해석이 22-24절까지의 drama로 나타나는 것이다. statement에 대한 해석이 그러니까 떡을 떼고 잔을 나누는 것이 무엇을 나타내는가? 사람의 아들이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뜻대로 죽는 것의 진정한 의미를 나타내는 것이다. 그러니까 최후의 만찬의 말씀을 그 사람의 아들로서 하신 것이며 내일 다가오는 그 자기의 죽음이 '그 사람의 아들'로서의 죽음이라는 것을 분명히 나타내고 있다.

그래서 공관복음에 보면 예수의 자기의 죽음을 예고할 때는 항상 그 사람의 아들로서 예고한다. 항상....아까 이야기한대로 막8:31/9:9,12,31/10:33/10:45.14:20-25절까지 등이 다 그러하다. 이렇게 항상 예수가 자기의 죽음을 예고할 때에는 '그 사람의 아들'로서 죽음을 말한다.

그래서 주어가 '그 사람의 아들'이다. 예수가 다가오는 자기의 죽음이 어떤 신분으로서 죽는가? '그 사람이 아들'로서 죽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사람의 아들'로서 죽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가? 그것이 잔을 붓고 떡을 떼는 drama로 지금 최후의 만찬이 설명이 되고 있는것이다.

그러니까 이 최후의 만찬의 말을 번석을 해보면 예수가 무슨 의미로 자기를 '그 사람의아들'이라고 하였는가를 해석할 수 있는 열쇠를 갖게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이 결정적인 자기 계시이니까 그러하다. 십자가의 죽음 직전에 하신 결정적인 자기계시이니까 그러하다. 그래서 여기에서부터 우리가 출발을 하는 것이다.

그러면 24절의 잔의 말씀이 모든 것을 내포하므로 잔의 말씀에 집중해보도록 하겠다. 우선 마가마태판이 예수의 원래의 말에 가까운 제일 오래된 전승이라고 보고 24절을 한번 생각해보도록 하자.

'이것은' 이것이 무엇인가? 포도주가 잠긴 이 잔은 그러니까 그 잔이 아니면 그속에 들어 있는 포도주는 '많은 사라들을 위해서 흘리는 언약의 피라' 이것을 해석할려면 어떻게 해석하는 것이 좋은가?

이말도 분명히 풍부한 구약적인 배경을 가지고 있는 것이 확실하다. 그것이 어디에서 암시되었느냐면 21절에 암시되어 있다. 21절에 보면 '그 사람의 아들은 자기에 대해서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그러니까 성경에 계시된 대로 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 잔의 말씀 뒤에도 성경, 당시의 성경은 구약이니까 풍부한 구약의 배경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고 우리가 생각할 수가 있다. 그래서 그 구약의 배경을 찾으면 쉽게 찾을 수가 있다.

첫째, '많은 사람들을 위하여 흘리는' 그 말은 분명히어디에서 왔느냐하면 이사야서 53장 10-12절까지에서 왔다. 여기에 보면 하나님께서 주의 종 ࠄࠅࠄࠉ ࠃࠁࠒ 주의 종을 무엇으로 바치게 한다고 하는가? 우리말로 해서 속건제물로 바치게 한다는 것이다. 히브리말로 ࠈࠚࠀ 이다. ࠈࠚࠀ로 바치게 해서 결과가 어떠한가?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의롭게 한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 ࠈࠉࠁ࠘ 24절 많은 사람들이 의롭게 되게 한다는 것이다. 대속의 속건제물로 주의 고난받는 종이 드려제기 된다.

이것이 주의 고난받는 종의 네번째 노래이다. 여기의 주의 고난받는 종이 스스로를 대속의 제물로 드려서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의 죄가 용서받아서 그들이 의곱게 되게 한다.

그래서 잔의 말씀의 '많은 사람들을 위해서 흘리는' 그 말은이사야서 53:10-12에서 왔다. '흘린다'는 말도 거기에서 왔다. 주의 고난 받는 종이 자기의 영혼을 '쏟는다'는 말이 그 말이 '흘린다'는 말과 동일하다. 히브리말과 헬라말이 대칭하는 말이다. 그래서 그것은 거기에서 왔다.

그 다음에 '언약의 피'라는 말은 어디에서 왔을까? 언약의 피라는 것은 아주 풍부한 구약적 배경을 가지고 있다. 제일 첫째로 출19장 24장 34장을 통해 배경을 가지고 있다. 거기에 보면 그래서 유대전승이 아주 중요한데 시내산에서 이스라엘 회주을 모아놓고 모세가 하나님과 언약을 세운다.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 그래서 여기의 제물을, 제사하면서 제물의 피를 모여있는 이스라엘 회중에 뿌리면서 뭐라고 부르짖는가? '언약의 피라' 고 한다. 언약의 피라.

유대신학에 의하면 바로 이 언약의 피가 대속의 효과를 갖는다고 보았다. 그래서 모세가 광야에서 언약을 세우고 이스라엘 백성 위에 뿌린 피가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속죄해서 그들로 하여금 의로운 하나님이 백성이 되게 하였는데 그 언약의 피가 어떻게 해서 항상 언약의 피를 뿌린 것이 재생되느냐면 할례를 통해서 재생된다고 보았다.

할례가 무엇인가? 언약의 백성의 표징이다. 이 할례때에 그 피가 언약의 피다와 연결되고 그것의 재생으로 보았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이 계속 모세가 세웠던 이 언약의 피에 할례를 통해서 참여해서 의로운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으로 이렇게 유대신학에서 신학을 전개하였다. 그래서 언약의 피라는 말은 항상 모세가 광야에서 세운 언약을 되돌아보는 표현이다. 그것이 유대신학에서는 할례를 통해서 그러나 예수가 여기에서 내일 자기에게 다가오는 죽음이 그와 같은 의미를 갖는다고 그와 같이 표현한 것이다.

내일 자기의 피흘림이 모세가 세운 모세가 광야에서 세운 언약과 대응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가 주의해야할 것은 이미모세가 광야에서 천 몇백년전에 피를 뿌리고 언약을 세웠다. 그런데 예수가 내일 자기의 피흘림을 또 언약의 피라고 하였다는 말은 무슨 말인가?

두가지를 생각해야 한다. 첫째는 그것이 모세가 세운 그 언약과 대응하는 것이다. 소위 Typology 이다. 모세가 세운 그 언약에 상응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적어도 그 만큼이 효과를 갖는다는 것이라는 의미이다. 모세가 언약을 세움으로 무슨 효과가 나타났는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이다. 언약을 세운다는 말은 항상 하나님의 백성을 창조한다는 말이다.

언약의 형식이 무엇인가?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라' 이것이 언약이다. 그래서 여호와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고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이 이스라엘과 하나님 사이에 맺는 언약의 내용이다. 그래서 여호와는 이스라엘을 자기의 백성을 인도하고 보호할 책임을 스스로 맡는다. 그들을 사랑하고 인도하고 보호할 구원할 책임을 스스로 맡는다.

그러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여호와께 전적으로 의존하고 순종해야할 또 의무를 지는 것이다. 이것이 언약이다. 그래서 모세가 언약을 세움으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보호아래 들어가고 하나님의 구원을 약속받고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에게만 의존해야 하는 그런 관계에 들어간 것이다. 그것이 소위 의로운 관계이다.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이다.

그것은 예수가 내일 다가온 자기의 피흘림을 적어도 그 만큼의 효과를 갖는 적어도 거기에 상응하는 것이라고 암시하고 있다. 그것이 무슨 소리이냐? 새로운 백성을 창조하는 사건이라는 것이다. 내일 다가온 자기의 죽음이.... 그것이 첫번재 생각이고 두번째 생각해야 될 것은 이미 모세를 통해서 언약의 피가 뿌려지므로 언약이 세워졌는데 이미 모세를 통해서 언약의 피를 뿌려서 언약의 백성을 또 만드는가?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모세가 세운 옛 언약의 피 또는 언약을 부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에의해서 일어난 효과 즉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의 백성됨을 일단 부정하는 것이다. 앞에서는 긍정적으로 서로 상응하는 것이라면 두번재의 이야기는 앞의 옛언약이 효과가 없으니까 또 언약을 세우는 것이다. 따라서 이것이야말로 새언약이다. 그러니까 누가바울판에는 그것을 더 분명하게 나타내기 위해서 '새'자를 넣은 것이다. 그러나 그 의미는 똑같다. 마가마태판에도 새 언약이다. 왜냐하면 옛언약이 있는데 또 언약을 세우니까 새언약이다. 다만 누가바울판은 그것을 분명히 하였을 뿐이다. 더 의미가 확연하게 드러나게 하기 위해서 '새'자를 넣은 것이다.

그러니까 원래 모세가 출 24장에서 세우는 그 언약과 무슨 관계이냐 하면 antithetical typology 즉 반대적으로 상응하는 사건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보는 바와 같이 언약의 피라는 말 속에는 출19장 24장 34장 중에서 주로 24장이 반영되어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학자들은 여기까지만 이야기하는데 나는 몇개가 더 반영이 되어 있다고 본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이사야서 42:6절, 49:89절인데 한번 읽어보기 바란다.

이것이 다 이사야서 53장과 같이 주의 고난받는 종의 노래들이다. 이것 즉 이사야 42:6절이 첫 노래이고 49:8은 세번째 노래이고 사53:10-12절은 네번째 노래이다. 거기에 주의 종을 하나님께서 무엇으로 세운다고 하였는가? 백성을 위한 언약으로 내어준다고 하였다. 주의 종이 언약으로 내어준다. 이사야 49:8도 마찬가지이다. 한번 읽어보라.

거기에도 똑같이 내가 너를 뭐라고 하였는가? 주의 종을 백성의 언약으로 삼겠다. 그랫 蓡자기의 다가오는 죽음을 '언약의 피'라 할때에 출애굽기 24장 뿐만 아니고 이사야서에 나오는 주의 고난받는 종의 노래가 계속 반영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예수가 내일 다가오는 자기의 죽음을 무엇으로 보았는가 하면 주의 고난받는 종의 역할을 감당하는 것으로 보았다.

여기에 보면 주의 고난받는 종의 노래들이다. 이사야서 40장에서 53장 어떤 사람은 61장까지도 말하는데 하여간 이사야 61:1-3절까지를 제 5 주의 고난받는 종의 노래라고도 한다. 하여간 이사야서 42장에서 53장 또는 42장에서 61장까지에서 나오는 주의 고난받는 종의 역할을 감당하는 것으로 내일 다가오는 자기의 죽음을 해석하고 있다.

그러면 주의 고난받는 종의 역할이 무엇이냐? 이사야에 기록된 내용이 무엇이냐?

늘 기억할 것은 마가복음 14:21절에 무어라고 하였는가? 자기의 죽음이 무엇이라고 하였는가? 성경에 기록된대로 성경에 예언된 대로 성경에 이미 하나님이 뜻으로 계시된 대로라는 것이다. 그러면 좀 더 좁혀서 말하면 이사야서에 기록된 대로 라고 좁혀서 말할 수 있다. 또는 출애굽기에 계시된 대로라고 이렇게도 좁혀서 말할 수도 있다.

여기의 이사야서에 보면 주의 고난받는 종이 무슨 일을 하는가? 그가 자기의 목숨을 대속의 속건제물로 드려서 많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다시 의롭게 한다는 것이다. 또 백성의 언약으로 바쳐져서 그들로 하여금 다시 한번 하나님의 백서이 되게 한다는 말이다. 또 그렇게 해서이방인들에게도 하나님의 계시의 빛을 선포하고 구원을 선포하게 하는 자가 된다는 말이다. 그것이 이사야서 42장에서 53장에 나타나는 고난받는 종의 역할들이다.

여기에는 잘 나타나있지 않지만 이사야서 42장에서 53장에 있는 주의 고난받는 종의 노래들을 읽어보면 무슨 사상이 강력히 나타나는가?

'내가 너를 세워서 이방의 빛으로, 이방의 구원으로 내세운다'는 것이 강력하게 나타난다. 그것과 더불어 강력히 나타나는 것이 내가 너를 세워서 무엇을 하겠다는 것인가? 하나님의 백성을 다시 모으는, 하나님의 백성을 다시 창조하고 모으는 어떻게 창조하고 모으는가?

그들을 위해서 대속의 제물로 또는 언약의 제물로 스스로를 바침으로 그의 백성들을 창조하고 모은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주로 두가지만 생각해보자.

첫번째로 주의 고난받는 종의 역할이 무엇이가? 대속의 제물로 스스로를 바쳐서 거기에 따른결과가 무엇인가? 많은 사람들, 이 언약을 지키지못해서 패역한 패역해서 더 이상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할 수 없는 많은사람들을 의롭게 한다는 것이다. 그들의 죄가 대신 속해지게 해서...똑같은 말이지만 주의 고난받는 종의 또다른 역할은 무엇인가?

둘째로 언약의 제물이다. 따라서 그결과가 무엇인가? 하나님의 백성을 다시 창조하고 모으는 일이다. 이것은 다 같은 말이다.

언약을 지키지 못해서 그러니까 의롭지 못해서 하나님의 백성의 특권에서 밀려난 자들, 언약을 지키지 않으니까 그들이 무슨 하나님의 백성이겠는가? 따라서 그런 자들이 다시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의로운 자들이다. 하나님과 다시금 관계가 회복된 자들이다.

이것이 고난받는 종의 역할인데 바로 이 최후의 만찬에서의 잔의 말슴이 그러한 것을 반영하는 것이다. 자기가 바로 이사야서에서 예언된 고난받는 종의 역할을 감당함으로써 내일 다가오는 자기의 죽음이 무엇이라고? 주의 고난받는 종으로서의 죽음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이 대속의 죽음이고 대속의 제사이고 언약의 피흘림이다. 그래서 그것이 무엇이라는 것인가? 출24장에서 맺은 모세를 통해서 맺은 이 옛언약을 대치하는 새 언약을 세우는 사건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옛언약에 의해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 그런데 그것에 상응하는 새언약의 제사를 통해서 무슨 일이 벌어질 것인가?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이 창조되고 탄생되는 것이다.

그들은 죄가 대속되었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을 것이며 그들은 예수의 피로 세운 새 언약에 의해서 하나님의 백성이라, 하나님의 새로운 백성이라 함을 받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잔의 말씀이다. 그것이 내일 다가오는 자기 죽음의 의미이다는 것이다. 그런데 내일 다가오는 자기의 죽음을 무엇으로 안다고 하였는가? 예수가 무슨 자격으로 하는가? 예수가 '그 사람의 아들'로서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분명히 어디에서 왔는가? 다니엘서 7장에서 왔다. 지난번에 우리가 누차에 강조한 바와 같이 다니엘서 7장의 '한 사람의 아들 같은 이'가 어떤 존재인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종말에 하나님의 백성의 대표라고 하였다. 종말에 하나님의 백성을 창조하고 모으는 자라는 말이다. 그러니까 여기의 내용과 완전히 일치하는 것이다.

예수가 '그 사람의아들'로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는다. 마14:21절에서 쓰인대로 성경에 기록된 대로 죽는다. 그것은 무엇이냐? 다니엘서 7장이 예언을 자기가 이제 내일 서취한다는 말이다. 내일 십자가에서의 죽음이....

다니엘서 7장의 예언이 무엇인가? 그 사람의 아들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종말에 하나님의 백성들 곧 하나님의 아들들을 창조하고 모으는 일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내일 다가오는 자기의 죽음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종말의 하나님의 아들들을 창조하고 모으는 사건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다니엘서 7장의 '그 사람의 아들'은 예수의 사명이 무엇인가를 말해준다. 무엇인가를 말해준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종말에 하나님의 백성 곧 하나님의 자녀들, 하나님의 아들들을 창조하고 모으는 것을 말한다.

여기의 이사야서는 무엇을 말하는가?

이사야서와 출애굽기의 배경은 어떻게 이다. 예수가 그러면 어떻게 다니엘서 7장의 예언을 성취하느냐이다. 어떻게 성취하는가? 주의 고난받는 종의 역할을 감당하므로 감당하는 것이다. 따라서 다니엘서 7장은 what이고 이사야, 출애굽기는 how인 것이다.

그러니까 마가복음 14:21절의 statement, '그 사람의아들'은 성경에 기록된대로 간다. 즉 죽는다는 곧 무엇을 말하는가? 그 사람의 아들이 내일의 죽음을 통해서 다니엘서 7장의 예언 '그 사람의 아들'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종말에 하나님의 아들들을 창조하고 모은다는 것이다.

22절에서 24절까지는 그러면 이 일을 어떻게 할 것인가의 문제이다. 그것은 주의 고난받는 종의 역할을 감당하므로서이다. 그것도다 성경에 예언된 대로 주의 고난받는 종의 역할을 감당하므로, 곧 대속의 언약의 제물으로 자기를 바치므로 새로운 언약이 세워져서 새로운 언약에 의한 하나님의 종말의 새백성,의로운 하나님의 새백성을 창조한다는 것이다.

의로운 하나님의 새백성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아들들,자녀들이라는 이말이다. 그러니까 예수가 무엇인가? '그 사람의아들'로서 이러한 일들을 하였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러니까 하나님의 종말의 새로 창조된 아들들의 대표이다. 그들을 창조하고 모으는 대표라는 것이다. 이렇게 결정적인 순간의 예수의 자기 계시를 분석해본 결과 예수가 자기를 '그 사람의 아들'이라고 부른것은 곧 다니엘 7장의 예언을 이사야서에서 예언된 주의 고난받는 종의 역할을 감당함으로써 성취하는 분이라는 의미로 자기를 '그 사람의아들'이라고 불렀다는 사실로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이것을 좀 더 부연하면 예수가 자기를 '그 사람의 아들'이라고 부른 이유가 무엇이냐? 예수가 자기를 '그 사람의아들'이라고 부르면서 스스로 계시하고자 했던 거시 무엇이냐?

그것은 자기가 다니엘서 7장의 예언을 성취하는 자라는 것을 은근히 나타냈다. 그것은 뭐냐하면 종말에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들을 창조하고 모으는 하나님이 아들이라는 자기이해를 나타낸 것이다. 그러면 이 다니엘서 7장의 예언을 어떻게 성취하느냐? 하면 이사야서에 나타난 주의 고난받는 종들의 역할을 감당하는 곧 스스로를 대속의 새언약을 세우는 제물로 바침으로 새로우 하나님의 백성, 곧 하나님이 자녀들을 창조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나타낸 것이다.

그래서 최후의 만찬의 말에서 우리를 예수가 자기를 '그 사람의 아들'로 부름으로서 나타내고자 했던 예수의 자기 계시를 이렇게 해석하였다. 그러면 이것이 옳은지 안그런지를 테스트 해보아야 한다. 테스트하려면 어铽게 해야 하는가?

다른 '그 사람의 아들'의 말들에 주의 만찬석상에서 도출한 '그 사람의 아들'의 의미를 적용해보아서 잘들어 맞으면 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 최후의 만찬석상에서의 '그 사람의 아들'에 대한 예수의 자기계시는 이러한 의미를 도출해내었는데 그럼 이 의미가 예수의 다양한 '그 사람의아들'의 말씀들에 의해서는 잘 통하는지 알아보아야 한다. 이것이 맞는지 아닌지를 테스트 해보는 것이다. 소위 Verfication해보는 것이다.

지난번에 이야기한 여러 '그 사람의 아들'에 대한 말을 세가지로 분류해서 해석할려고 했던 것들이 옳지 않다고 했는데 왜 그런가? verfication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들이 어느 한 가령 세번째 미래의 하나님의 영광주에 오는 '그 사람의아들'의 말에서 시작해서 예수의 '그 사람의 아들'로서의 자기 칭호를 해석하렬고 하는 것이 옳지 않고 억지이며 무리라는 것이 어디에서 발각이 되는가? 그것은 다른 '그 사람의아들'의 말씀들을 잘 해석할 수가 없다. 그러니까 우리가 그런 것을 틀렸다고 생각해서 우리가 예수의 결정적인 순간의 예수의 자기 계시 곧 자기의 죽음을 앞두고 최후의 만찬을 통하여 연극으로 drama로 스스로를 계시한 그 최후의 만찬의 석상에서 그 사람의 말을 통해서 '그 사람의 아들'에 대한 자기이해를 우리가 도출하였다면 똑같은 원칙대로 우리가 예수의 다른 '그 사람의 아들'의 말에도 적용해 보아서 그것이 잘 들어가면 이 해석이 옳은 것으로 판정되는 것이다.

우리가 다음 시간에 그것을 하겠는데 그것을 어디에서부터 시작하느냐면 우리가 지난번에 하다만 마가복음 10:45절부터 하겠다. 마가복음 10:45절은 최후의 만찬석상에서 예수가 최후의 만찬의 말들을 다시 한번 요약한 말들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지난번에 마가복음 10:45절이 최후의 만찬의 말씀들과 어떻게 연결되는가를 여러가지 이유로 설명하였다. 거기의 '그 사람의아들'은 섬김을 받으려가 아니라 섬기려 하고 많은 사람들을 위한 대속물로 주기 위해서 왔다고 하였다. '많은사람들을 위한'이란 말은 분명히 이사야서 53:10-12절에서 왔는데 뿐만 아니라 이사야서 43:3-5절서도 왔다.

그래서 마가복음 10:45절의 '많은 사람들을 위한 대속물'은 이사야서 43:3-5/53:10-12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래서 그것을 분석해 보면 최후의 만찬의 말과 똑같다.

그 다음에 시작할 것이 내가 내용상으로 분류한 6가지로 '그 사람의아들'의 말을 분류하였는데 거기에 여기서 도출된 의미를 다 적용해 볼 것이다;.

그 다음에 해야되는 것은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와 예수의 '그 사람의 아들'로서의 자기이해가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보아야 하다. 그러면 예수의 자기이해와 예수의 자기 사명에 대한 이해가 확연히 드러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와 예수의 '그 사람의 아들'로서의 자기 이해를 이제 서로 연결시킴으로 예수 즉 신약신학의 제1부를 마치는 것이다. 그러면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곧 설명할 수가 있다. 이렇게 제1부를 마치고 제2부는 사도들의 선포로 들어가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