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성서배경사
제 1장 서론
1.설명
이 책은 B.C.330년경과 A.D.135년 사이의 이스라엘 역사를 재구성하기 위해 시도되었다.이러 한기간을 선택한 것은 한편으로는 이 책이 B.C.330년경까지의 이스라엘 역사를 다루었던 이전의 책에 대한 하나의 연속 물로서 의도된 사실에 의해 결정되었다. 이스라엘 역사의 마지막으로서 A.D.135년은 이스라엘이 하나의 국가로서 존재하기를 끝마쳤기 때문에 그해를 선택하는것이 적절하다.
2.자료들
(1)구약 성경
구약 성경은 단지 몇 부분만이 여기서 기술하고 있는 이스라엘 역사의 기간과 관련되어 쓰여졌다.이들 중 가장 중요한 책은 의심할 것도 없이 다니엘서이다. 코헤렛은 그 당시의 사회적 및 경제적 상황에 관한 약간의 정보를 제공해 주는 것으로 생각된다.
(2)외경과 위경
당시의 종교적인 발전 및 상황을 볼 수 있는 약간의 통찰력을 주기도 한다.이러한 문헌들이 역사적 가치가 없다는 것에 대한 유일하면서도 현저한 예외는 마카비 1,2서이다.
(3)알렉산드리아의 필로
필로(B.C.20-A.D.50년경)는 알렉산드리아에 있는 유대 공동체의 한 일원이었다. 매우 폭넓고 훌 륭한 헬라 교육을 받았다는 것이 그의 여러 저작에서 나타남. 고전에 관한 가장 영향력 있는 유대 철학자로 간주되고 있다.
(4)플라비우스 요세푸스
요세푸스의 저작들은 우리가 B.C.330년과 A.D.135년 사이의 이스라엘 역사를 우리가 연구하는데 가장 중요한 자료이다.
(5)헬라 및 라틴저자들
폴리비우스(B.C.203-120년경)40권으로된 세계 역사를 기록. 로마의 세계 통치에 대한 불가피성을
확신 .
디오도루스 시쿨루스(B.C.1세기)는 역사 개관을 씀.
스트라보(B.C.64-A.D.21년경)의 저작들은 몇 부분은 잃어버렸지만,무엇보다 지도자들과 정치가들을 대상으로 쓰여진 것처럼 보임.
리비(B.C.59-A.D.17년경)는 특히 로마의 외교정책 및 발전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6)사해사본
1947년이래 수많은 사본들,단편들,파피루스등이 이들을 기록한 것을 담은 질그릇과 함께 사해 부근에서 발견되었는데 그 연대는 주후 시작전 마지막 세계에서 부터 A.D.135년까지이다.
(7)신약 성경
역사적인 문서로서 도움을 주기 위해 쓰여진 것이 아니라,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한 것이다.(참조 요20:30f)무엇보다 세공관복음서와 요한복음간에 존재하는 차이점들은 현저하다.
(8)랍비문헌:A.D.70년 이후에 나타났다.수세기에 걸쳐 지속된 과정을 거친후 현재적인 형태로 전 해진 광범위한 선집으로 이 용어는 미쉬나(Mishnah),로세프타(T) ,탈무드,미드라쉬, 그리고 타르굼등을 포함하는 말로 사용되고 있다.
(9)고고학의 증거 :외디에드.달리예 사마리아 파피루스들은 B.C.375년에서 335년경 사이에 나온것 들이다.제노파피루스는 1915년 이집트에 있는 퍄윰이라는 한 오아시스에서 발견되었다.알렉산더 얀네우스에 의해 건축되었다. 바르코호바의 편지들은 무라바이트 및 나할 헤버 즉 사해 지역에 있는 동굴들에서 발견되었다.
3.땅과 사람
(1)땅: 알렉산더 대제와 바르 코흐바 사이의 이스라엘역사에 대한 그 어떤 연구에서도, 대부분 츄대와 예르살렘을 강조하고 있다.
(2)사람:많은 유대인들이 또한 유대지역 밖에서 살고 있었다. 헬레니즘시대 및 로마시대에 있어서도 그 밖에 집단들이 이 땅에 정착하였다.
제 2 장 헬레니즘시대의 시작
1.헬레니즘
알렉산더대재(B.C.333-323)가 고대 근동지역을 정복한 것이 헬레니즘시대로 간주된다. 헬라어 및 헬라문화가 지배적이었다.
2.전반적인 정치 및 경제적 상황
(1)알렉산더 제국의 확장:B.C.333년 이수스 전투이후 그의 관심을 시리아와 팔레스틴(가나안)에 있는 해안도시들에게 향했다.두로를 제외하고 유대와 사마리아를 정복하였다.무역중심지인 가자( )를 B.C.332년에 그후 애굽을 정복했다. B.C.331년 알렉산드리아 건립.B.C.323년 바빌론에서 말라리아로 죽음을 맞이함
(2)알렉사더의 정치적인 통치: 마케도니아 사람들과 페르시아사람들을 하나의 왕국으로 연합,하나의 민족으로 만들려과 시도했으나 성공하지 못하였다.그가 팔레스탄에 도착함으로 일어난 지배세력의 변화는 예루살렘의 종교 공동체에 거의 어떤 변화도 가져오지 않았던 것이다.
(3)경제적인 상황:헬라 상인들이 B.C.7세기이래 팔레스탄에서 무역활동에 종사해왔기에 경제적인 여건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페르시아의 작전기지들에 있는 함대를 빼앗고 상인들에 대한 경쟁상대를 제거 시켰던 것이다.거래를 결재하는 수단으로 화폐를 사용하였다.
3. B.C.333-323의 팔레스틴
(1)유대 :요세푸스에 의하면 B.C.332년에 가자를 정복한 후에 알렉산더는 해안평지에 있는 캐팔사바( kefar saba,후에 antipatris로 바뀜)에서 만난 것을 언급하고 있다.
(2)사마리아:요세푸스는 그의 {유대고대사}에서 사마리아의 신발랏이라는 사람이 8.000명의 군사로 두로를 포위할때 알렉산더의 도움을 받았다고 기록하고,커티우스 루푸스( )
가 쓴 전기에 의하면 알렉산더가 이집트에 체류하는 동안 사마리아의 거주민들이 반역하여 코엘리-시리아의 마케도니아 사마리아 거민을 포로로 잡았으며 바로 그곳에다가 일단의 아케도니아인들을 정착시켰다.달리예에서 파피루스외에도, 약 300그의 유골들이 거기에서 발견되었다.
(3)사마리아 성전:B.C.330년경 또는 그 다음해에 세검의 재건과 같은 시기에 또는 세검의 재건과 연결되어 건축되었다는 것이 나은 추정이다.
제3장 계승자들의 시대 (B.C.323-301년경)
1.알렉산더 사후의 전반적인 상황
B.C 323년에 죽었을때 계승자가 없었다. 계승자들 서로간의 전쟁속에서 팔레스틴도 역시 길고 쓰라린 전쟁의 무대가 되었다.
2.팔레스틴을 차지하기 위한 투쟁
B.C. 323년 프톨레미는 이집트에 도착하였다. 시리아가 이집트를 공격하는 매우 훌륭한 작전 기지였다. B.C. 320년에 팔레스틴을 차지하였다. B.C. 3세기 전체를 통틀어 팔레스틴은 프롤레미 왕조와 셀루시드왕조 사이에 분쟁의 원인이 되었으며 문제들은 일시적으로 프톨레미에게 유리하게 되어 B.C. 201년에서 198년까지 그 땅에 대한 소유를 계속 유지할 수 있었다.
3.땅과 사람들에 대한 결과들
(1)B.C.323-311년까지 결과들 : 전투로 말미암아 지독하게 고통을 당했으며, 해안도시들과 특히 가자가 심한 고통을 받았음이 틀림없다.
(2)B.C.311 에서 301까지의 기간 :평화롭고 조용한 기간이었으며,안티고누스가 직위를 공고히 하였으며 코엘리-시리아에서 확고한 발판을 구축하였기 때문이었다.
4.행정적인 상황
(1)전반적인 구분:안티고누스 모노프탈무스는 후에 팔레스틴을 프톨레미 왕조에 의해 사용된 토파르키로 분할된 체제를 진척시켰다.토파르키는 가장 작은 행정단위이며 세금을 거두는권한이 위임되어 있는기관이기도 하며,다음으로 큰단위인 하아파르키를 형성하였으며,헬레니즘시대 에 있어서는 대체로 헬라사람들이 차지하였다.
(2)예루살렘과 유대에서의 행정:정부는 이나라 나머지 지역에서의 정부와는 다소 다른 구조를 가지고 있었으며, 예루살렘에 그중심지를 둔 의회에 의해서 지배를 받았음이 틀림없다.
(3)팔레스틴 나머지 지역에서의 행정:팔레스틴의 대부분 해안 도시들과 헬라 거주지들처럼,나중에 데가볼리와 같은 도시들도 독립적인 헬라 도시들로 간주되어야 한다. 이러한 도시들의거주민들이 그들 자신의 내부적인 문제들은 규제할수 있으나.군사적인 관점에서는 헬라정부에 완전히 의존하고 있어서 그들이 또한 세금을 내야할 의무가 있음을 의미한다.도시의 행정은 수백며으이 회원들로 구성되어 있는 의회의 관할하에 있다.
제4장 프톨레이통치의 처음 반세기(B.C.301-246)
1.프톨레미왕의 지위
이집트에서 바로들과 마찬가지로 강력한 중앙권력과 왕들은 공격할수 없는 그들의 지위를 유지할수 있었으며,모든 땅은 원착적으로 왕의 소유물로 상당한 땅이 궁중관리들의 엄격한 감독하에 소작논들에 의해 경작되었고,수입의 근원은 무역형태에서 왕실에서 독점 공급되었다.이모든것외에도 여러가지 세금 및 사용료징수를 관장하였다.대다수 비율의 인구와 특히 본토 이집트사람들이 심한 가난을 겪었다. 왕과 그의 가까운 측근만이 부를 어느 정도 획득하였다.
2. B.C.301-246년경의 정치적 발전들
(1)프톨레미 1세 소테르의 시대:'구원파','해방자'의 뜻인 소테르라는 별명을 가진 프톨레미 1세는 B.C.30년까지 존재한 이집트의 헬라 국가의 건설자로서 간주되었으며 ,실제로 B.C.323년부터 이미왕국의 더 큰 부분에 대한 통치권을 가지고 있었음에도,B.C.305년에 프톨레미는 스스로 왕관을 취하였다.수도는알렉산더대제에 의해 세워진 알렉산드리아시였다.
시리아롸 페니키아지역을 B.C.286년에 프톨레미왕조가 차지하고 있었다.군사적,경제적 기반으로서 의 그의 위치를 강화하였으며,통치말엽 그러한 목표를 성취했다고 말할수 있다.
(2)프톨레미2세필라델푸그의 시대(B.C.283-246):권력의 절정이었으며,제1차(B.C.274-271)및 제2차시리아 전쟁(260-253) 에서 셀루시드왕조의 요구에 반해'시리아와 페니카아'에서 그의 위치를 방어하는데 성공하였다.여러도시들을 건축(또는재건)하였고 요새화하였다.정치적이고 군사적인 관점에서 일어난 일이 별로 없다.두차례에 시리아전쟁은 팔레스틴의 대부분 지역에 해를 입지 않은 채 남아있던것 같다.가장 큰 변화는 사회적 및 경제적인 영역에서 일어났다.
3.팔레스틴에서의 사회적 및 정치적 결과들
(1)사회적 결과들:팔레스틴은 주로 유다에 있는 유대사람과 사마리아와 갈릴리에 있는 옛 이스라엘의 후손글로 구성되어 있었다.알렉산더 대제하에 마케도니아인들과 헬라인들의 막대한 집단이 해안 지대를 따라 있는 도시들과 트랜스 요르단에 정착했다. 이들은 군사및 경제적인 중요한 무역로 및 대상로가 이곳을 통과하기 때문에 그들의 가족및 부하들과 함께 온군인들과 상인들이었다.
(2)경제적 결롸들:프톨레미 왕조의 기간 도안의 국가가 경제적인 영역에 있어서 매우 강했다. 알렉산드리아의 당국자들은 그들 자신의 이익을 위해 넓게 모든 땅을 이용하였으며,국가임대에 대한 헬라체제를 도입했다. 프톨레미왕조가 많은 수입을 얻기위하여 높은 세금을 징수하였으므로 지위를 차지할수 있었다. '징수 청부인들'은 징세 및 기타 세금을 징수하는 임무를 맡았다.
프졸레미 2세 필리펠푸스가 '시리아와 페니카아'에서 노예무역이 억제되지않고 행해지는 것에 대한 조치를 취하였다. 제노는 팔레스틴에서도 효과적인 정치지배력과 경제 지배력을 전하기 위해 여행을 했다.
4.코헬렛(전고서)
B.C.3세기에 쓰여졌다는 것이 거의 보편적으로 여겨지고 있다. 기원한 장소는 예루살렘으로 간주되고 있다.유대사회에서 중요한 관리였음을 암시하며 '지혜자'고 불리워지고 있다.
제5장 프톨레미의 두번째 반세기(B.C.246-198)
1.제3차 시리아 전쟁(B.C.246-241)
(1)전쟁의 경과 :프톨레미3세 유어게테스의 즉위로 발발하여 B.B.245년에 알렉산드리아로 가시 돌라가는 듯 하였다.이집트에서 일어난 반란이 프톨레미러 하여금 나타나게 만들었으며 마케론의 왕 안트고느스가 바다에서 프톨래미의 왕조에 해르르 가하여 패배시키고 이러한 이유로 세루크스는 나중 단게에 가서 더 강해졌다.아버지늬 왕국 영토를 다시 획득하였다.프톨레미는 B.C.241년에 유리한 평화조약을 체결하는데 성공하였다.
(2)제3차시리아전쟁중 예루살렘 상황:전쟁이 끝나는 무렵에 당시의 대제사장 오니아스 2세는 프톨레미왕조에게 공물을 바치는 일을 거부하였다.
2.오니아드와 토지아드
배후에는 특별한 가문이 있으며 오니아드와 토비아드로 지칭된다.오니아스1세 B.C.323년에서 300년경까지 예루살렘에서 대제사장으로서의 지위를 가지고 있었다. 토비야드는 헬레니즘에 호의적인 집단이다. 파피루스에 추론에 의하면 토비야드가 트랜스요르단에 있는 땅과 거주지(요새)를 가지고 있었으며 중요한 지위를 가지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3.토비아드 요셉의 발흥
역사상 처음으로 예루살렘 엿시 중요한 국제도시가 되었으며 요셉의 발흥은 경제적인 호항의 전조가 되었다.예루살렘은 점차 재정적,경제적인 중심지가 되었다.
4. 제4차 시리아 전쟁(B.C.221-217)
(1)서고 :내부적으로 많은 투재을 겪은후안티오쿠스 3세는 그의 나이 20세 B.C.223년에 셀로시드 제국을 다스리는 왕이 되었다.프톨레미 2세 츄어게레스가 이집트에서 죽었으며 ,아들 프톨레미4세 필로파트르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그는 예술과 종교문제에 몰두해 문제들을 소시비우스에게 맡길려고 하는 것처럼 보인다.
(2)전쟁의 결과:승리는 안티오쿠스 3세였다. 제3차 시리아 전쟁후에도 안디옥의 항구는 프톨레미 3세의 소유였다.
(3)제4차 시리아 전재둁후 그 후의 팔레스틴 :상당한 고통을 당하였다.
5. 팔레스틴에서의 프톨레미 축출
(1)제 4차 시리아 전쟁후의 정치적인 상황:프톨레미왕조가 제4차 시리아 전쟁에서 승리했지만 팔레스틴을 통치하는 시기는 얼마남지 않았다.
(2)제5차 시리아 전쟁(B.C.202-198):B.C.201년 안티오쿠스3세는 매우 짧은 시간에 전영토를 점령하는 데 성공하였다.가자는 이집트와 무역하는 아랍의 종착점이어서 경제적으로 중요한곳이었으며 군사적인 면에 있어서도 가장 강한 곳이었다.B.C.201 봄에 팔레스틴을 손에 넣었다. B.C.201-200년 겨울에 프톨레미의 장군 스코파스는 잃어버렸던 영토를 다시 정복하는제 성공했드나 B.C.200년 안티오쿠스에게 요단의 근원지인 파니움에서 패배하였으며 2년후'시리아와 페니카아'는 이집트와 면 국결까지 셀루시드 통치하에 들어갔다.
(3)제5차 시리아 전쟁 당시의 팔레스틴:B.C.201-200년 겨울에 전쟁으로 고통당했음.요세푸스는 사마리아,아빌라,가다라 ,유대와 예루살렘을 많이 언급되고 있다.성전이 심한 손상르 입었다.앗수르 이후에 바빌로니아 ,페르시아와 프톨레미가 그리고 이제는 팔레스린에 대해 통치권을 안디옥에 셀라시드이다.이전의 통치자들과 마찬가지고 예루살렘의 대제사장의 영적인 권위를 무시했다.그것은 그들 자신의 이익을 어떻게 극대화 시키는지 너무나 신속하게 드러내었던 것이다.
제6장 셀루시드통치의 시작(B.C.198175)
1.전반적인 정치적 상황
(1)안티오쿠스3세의 시대(B.C.222-187):프톨레미에 대해 승리를 거두고 '시리아와 페鎺키아'를 정복한 것으로도 정치적 야마이 그치지 않았다.B.C.188년에 아파메이에서 평화조약을 맺은 것은 그에게 큰 손해를 주었다. 고대에 있어서 성전들은 성소일뿐아니라,화폐를 발행한 이후부터는 은행으로서의 역할도 하였다. 벨성전에서 그를 도와 돈을 훔친 사람들이 죽임을 당하고,B.C.187년에 야망있는 통치를 유감스럽게도 魻내도록 만들었다.(단11:19참조)
(2)셀루크스4세의 시기 (B.C.187-175):그가 통치하는 중에 아파메아의 평화조약에서 로마에 의해 부과된 연간공물이 어떻게 바쳐져야 하는지 물어봄으로써 지배를 받았다.예루살렘성전을 강타하려다가 실패로 돌아간 사전의 배경이기도 하다. B.C.175년에 그의 장관인 헬리오도루스에 의해 살해되어 그의 통치는 끝났다.
2.유대에 대해 안치오쿠스 3세가 취한 조치들
(1)안티오쿠스3세가 프톨레미 통치자에게 보내는 편지:이 편지에서 안티오쿠스는 우선 프톨레미와 의 전쟁에서 자기를 도와준 유대인들에게 감사의 뜻을 전하고 있다. 아울러 왕은 예루살렘과 성전의 재선 작업 및 예루살렘 사람들을 격려하는데 목적을 두는 명령을 시달 했으며,장로회의 회원들(게루시아),제사장들과 나머지 성전직원들은 세금납부에서 면젤르 받았으며 아울러 유대통치가 조사의 율법에 일치되도록 하는 것을 계약조항으로서 명기하였다.
(2)성전의 의식적 정결에 관한 정도 :예루살렘에 부정한 동물을 들어오게 하거나 거기에서 사육하는것을 무역에 도움이 되어서가 아니라 예루살렘의 엄격한 종교 집단에게 환영받는 것이었으며 ,유대인들과 이방인들 사이에 벌어지는 무역둁르 통해 일어나는 접촉들을 싫어하였다.
(3)헵시비 비문 :B.C.201-195년에 갈릴리의 스키토폴리스 (고대의 벧-산)서쪽 헵시바지역에서 발견되었는데,이비문은 '시리아와 페니키아'와 관련된 안티쿠스3세와 셀루크스4세의 많은 포고문을 포함하고 있다.
3.대제사장 시몬 2세
유대가 셀루시드의 통치하에 들어갔을 당시 ,시몬2세는 예루살렘의 B.C.220-190년경까지 대제사장직을 유지하였다.능숙한 정치적 및 종교적 높은 칭송둁르 받았다.
4.토비아드가문 내의 충돌
시몬2세가 생존해 있는 중에도 일어났으며,원인은 요셉 토비아드의 여덟째 아들인 히르카누스와 그의 나머지 아들들 사이에서의 적대감이다. 히루카누스의 아버지와 동일한 권력을 차지하려는 것과 이를 추방하려는 형제와 충돌이었다.
5.오니아스 3세와 성전창고 책임자 시몬과의 투쟁
마카비2서3:4에 의하면 예루살렘의 시장을 감독하는 것에 대한 의견차이로 시몬이 어떤 규제사항들을 제지하기를 원하였고 오니아스는 이를 거부했다는것은 가능한데 왜냐하면 시장관리에 대한 것이 시장의 의식상의 정결을 위험하게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6.나머지 팔레스틴에서의 상황
셀루시드 통치의 시초부터'시리아와 페니키아'의 행정구역이었으며,남부지역을 포함하고 이었다.유대라는 성전국가로 사마리아도 확실히 독립된 행정단위로 보인것이 틀림없다.
7.예수시락(Jejud Sirach)의 저작과 위치
(1)저자:시락서 50:27에의하면 이책의 저자'예수 시락의 지혜'는 예루살렘 출신이다.
지혜교사로 간주되었으며,코헤렛과 마찬가지로 중요한 인물이었다.
(2)시락의 위치:시락은 예루살렘의 정치적 탄체중에서 특별한 위치였음을 암시하고,시락은 헬레니즘에 대해 우대의 공개적인 반대를 하는 하나의 선구자로 볼수있다.
제7장 반란의 서곡
1.안티오쿠스 4세 에피파네스(B.C.175-164)
아파메이에서 평화조약이후 불모로 잡혀 로마에 갔다.B.C.177년에 셀루크스 4세의 아들인 데메트리우스와 교환되어 아테네에서 정착후 셀루크스는 헬리오도루스에 의해 즉임을 당하였다.안티오쿠스4세는 정치무대에서 헬리오도루스를 제지하는데 성공하여 권력을 잡았다.안티쿠오스4蕁는 셀루크스4세의 하법적인 계승자가 아니었다.셀루크스의 아들이 그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2.대제사장이라는 인물에 대한 분쟁
(1)야손의 등장:오니아스3세가 안디옥으로 간후, 그의 형제인 야손(Jason)은 오니아스 3세의 대리자인 것처럼 허세를 부리며 등장하였다.왕으로부터 대제사장이라는 영구적인 지위를 부여받았다.
(2)대제사장으로서의 메넬리우스:B.C.172년부터 163년까지 대제사장직을 보유하였다.
(3)야손의 반란:마카비 2서5:5ff는 야손이 반란을 일으켜 대제사장을 다시 차지할려고한 시도를 기술하고있다.야손은 약 천명의 사람과 함께 예루살렘에서 끔찍한 대학살을 하고,메네라우슨느 피난하였다.이러한 투쟁으로 야손은 죽는다.
3.예루살렘 성전에 대한 아티쿠오스 4세의 행동들
(1)성전의 강탈
안티쿠오스4세의 명령에 의해성전이 강탈되는것에 대한 세개의 기록이 있다.마카비서의 기록,요세푸스의 기록, 다메섹의 니콜라우스의 자료
(2)예루살렘에 대한 안티오쿠스4세의 조치들
예루살렘의 성벽을 허물었으며막강한 요새 아크라가 시온산을 등지고 세워졌다.
(아크라는 수지대일 뿐만아니라 제도를 가진 일종의 헬라도시)이러한 조치는B.C.168년로마가 이집트에서 철수하고 유대가 국경지대가 되면서 더욱더 중요하게 되었다.
4.종교적 상황
(1)종교에대한 포고령
안티쿠오스4세는' 그의 왕국을 하나의 민족'으로 만들어 '각 민족이 각자의 관습을 포기해야함둁르'요구는 공포를 한 포고령을 내렸다.
(2)사마리아 인들의 요구
요세푸스에 의하면 '사마리아인들'이 안티오쿠스4세에게 편지를 보내어 그에게 자기들을 비유대인으로 간주할것과 세금납부를 면제해달라고 요구하였다.게다가 그리심산에 있는 그들의 성전 제우스 헬레니오스(똔느 제우스 크세니오스)라는 이름을 가질수 있도록 요청하였고,안티오쿠스 3세에 의해 받아들여졌다.
(3)종교적 박해의 배경과 성격
안티오쿠스 4세가 유대교의 믿음을 없에버리고 헬라관습을 도입하려고 했다
또한 박해가 단지 한정된 지역에서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된다.
5.묵시문학
묵시라는 말은 '(비밀을)밝히다'를 의미하는 헤라어와 관계있다.신학에 있어서 이것은 B.C.300년경에서 A.D.100년경사이에 수많은 유대저작에서 나타난 사고형태 및 표상을 가리키는데 사용된다.
묵시문학의 전성긴느 B.C.165년경부터 계속되는 기간에 해당된다. 묵시문학의 전작이 이시기에 나왔다. 다니엘서,에녹1서,희년서,제4에스라서,12족장들의 유언 및 요한 계시록(신약성경에서)이다.
묵시문학의 목적은 ,모든 권세들 ,심지어 강대한 세상제국들이라 해도 영원히 지속되지 않으며 결국에는 하나님의 나라,즉 구원의 때가 나타날 것임둁르 강조함으로써 격려하기 위함이었다.
6.이시기에 나온 문헌
(1)다니엘서
B.C.167-164년중에 쓰여졌다.문학적인 관점에서 보면 이책은 강화부분(16장)과 가장중요한 묵시저작들중 하나인 묵시부분(7-12장)으로 되어있다.
(2)이시기에 나온 나머지 문헌들
중요한 문헌들은 수많은 외경과 위경이다.위경중에서 중요한 것은 에녹1서(에티오파아에녹)이며,묵시책중 蓥급해야할것은 에스라3서와 유딧서이다.
제8장 미카비 투쟁
1.다양한 집단들의 배경
(1)예루살렘에서 헬레니즘의 지지자들
이 집단은 우선 예루살렘주민들과 그 다음에는 세겜을 포함하여 유대의 나머지 지역들도 헬레니즘문화를 받아들이게 하려고 했다. 그들의 목적은 유대교의 특별한 지위를 없애는 것이었다.
(2)마카비
반란에서 너무나도 큰역활을 했던 집단의 회원을 마카비로 알려져있다.
이 이름은 제사장 마타디아스의 아들 유다에게 주어진 '마카비(아마 망치라는 뜻)'라는 별명에서 나왔는데 ,이 유다는 급속하게 반란의 지도자가 디었고 후에 그들의 조상 하스몬에서 유레한 '하스모니아인들'로 알려지게 되었다. 또한 마카비반란은 농민전쟁으로 보아야함은 명백하다.
(3)하시디안
하시디안(헬라어)또는 하시딤(경건하다는 의미가 있는 히브리어)은 반란기간 중에서와 그 이후에도 명백하게 중요한 역할을 했던 집단이다.그들은 '율법을 위하여 기꺼이 자신들을 바치는'사람들의 집단으로 더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2.반란의 시작
(1)마타디아스의 등장
마타디아스가 왕의 명령에 따라 희생제사를 드리도록 제의 하는 안티오쿠스4세으 명령을 거스려 모데인에서 반역을 일으켰다.이일 후에 그는 자기의 다섯아들,즉 요한 ,시몬 ,엘레아잘,유다그리고 요나단과 함께 도피자들과 더불어 산악지대로 도주하였다.이것이 반란의 시작이다.
(2)유다의 첫번째 성공
마타디아스가 죽은 후에 그의 아들 유다가 반란군의 지도자가 되었다.. 유다는 그의 군대를소집하고 ,조직하여 일종의 게릴라전을 수행하였다.곧 그 전투는 매우 성공적임을 나타났다.
(3)성전의 정화와 재봉헌
성전의 정화와 재봉헌은 B.C.164년 기슬레월 25일(12월 15일경)에 일어났다.
(4)유다의 새로운성공들B.C.163년에 유다는 예루살렘에 있는 아크라를 포위하였다.그러나 포위는 성공하지 못했고,유다가 오히려 뤼시아스의 군대에 의해 포위당했다.이상황느 안티쿠오스 4세의 유언에 따른 내분으로 극복할 수 있었다. B.C.162년쯤 종교적인 자유가 회복되고 합법적인 제사장이 임명되어 하시디안들을 포함한 많은 사람들에게 그들이 투쟁한 목표가 이루어졌다.
3. B.C.162년 이후의 상황
钢간의 전쟁으로 하시디안들이 마카비형제들에게서 분리되었으며 유다는 새 대제사장 알카무스 와의 분쟁에서 죽고,아키스는 그의 직위를 회복하였다.
4.마카비의 지도자로서이 요나단( B.C.161-142)
(1)전반적인 정치적 상황
로마는 '분리하여 통치한다.'는 원책에 호소함으로써 그들의 힘과 영향력을 향상시킬수 있었다. 마카비를 다루는 것도 이러한 정치적인 정책에 들어맞는 것이었다.
(2)유다의 죽음이후 팔레스틴의 정치적 상황
유다의 죽음후에 셀루시드 왕가와 헬레니스트 일파가 유다의 죽음후에 또 가시 유대와 예루살렘에 대해 매우 확고히 지배했음이 분명하다.
(3)유다가 죽은후 사회적 및 경제적 상황
B.C.156년경에 대제사장 알키무스가 죽었다. 경제적 상황에 관하여 팔레스틴에 심한 기근이 있었다는 것이다.사두개파, 바리새파蝡에세네파와 쿰란공동체가 이제 나타난다.
(4)요나단의 외교적 및 정치적 성공들
B.C.153년경부터,요나단은 알렉산더 발라스와 데메트라우스 1세를 차례로 지원함으로써 셀루시드제국 내의 여러 어려움들을 이용할수 있었다.이사건은 개인적인 성공을 주었지문 내부적인 상황은더 악화되었다. 그 다음에 요나단은 정치적인 영역에 있어서 적당한 시기에 다양한 변화들을 순응시킬 수 있게 됨으로써 그의권력을 상당히 확장시키는데 성공하였다.
(5)요나단의 정책의 결과
우리는 요나단이 셀루시드의 왕위를 차지하고자 하는 여러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난 권력을 위한 계속되는 투쟁을 매우 잘 이용할 수 있었음을 알았다.보수를 지급하고 군사들을 제공함으로꺼 그는 점점 더 많은 특권들을 차지하는위치에 있었다.그결과 요나단은 개인 적인 권력거葡 영향력이 증대했을 뿐만아니라 유대의 영토가 상당히 확장되었다.
제9장 몇몇 중요한 집단들의 기원과 발전
1. 사두개파
(1)자료들
사두개파에 대해 기록한 문서는 요세푸스 , 신양성경과 그리고 랍비문헌등을 의미한다.그중세서 탈무드가 사두개파 가운데서 나타났던 이단들에 대한 개요를 제공한다.
(2)명칭
다윗과 솔로몬 당시 예루살렘에서 제사직위를 가졌던 사독(Zadok)의 이름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사두개파는 또한 보에투시안 으로 언급되기도 한다.이 이름은 알렉산드리아출신의 보에투스 라는 대제사장 가문에서 유래되었다.
(3)기원과 역사
요세푸스에 의하면 ,바리새파및 에세네파와 마찬가지로 사두개파도 요나단 마카비시대에 하나의 구별괸 집단으로 이미 존재 하였다.에론스트 밤멜의 견해는 사뭇 다르다.그가 믿기로는 A.D.1세기에서야 사두개파를 말할수있다는 것이다.즉 사두개파는 바리새파와 갈등르 겪은 결과로 생겨났다.
(4)특징들
사두개파는 분명히 특수한 계층이었으며 실제로 그 당시 사회의 부유한 사람들 중에서도 상류계층이었다. 그들은 고위성직자 및 귀족계층의 집단이었다.또한 그들은 죽은자의 부활 및 천사와 영의 존재에 대한 (바리새적)교리를 거절하였다.
2.바리새파
(1)자료들
바리새파에 대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자료들도 사두개파에 관한 자료들과 같은데 ,즉 요세푸스, 신약성경 그리고 랍비문헌이다.
(2)명칭
바리새파라는 이름은 히브리어와 아람어에서 '분리된'이라는 뜻을 가진 단어에서 유래하였다.
유대교문헌에서 바리새파에 대해 좀더 선호하는 묘사는 '지혜로운 사람들'혹은 좀더 흔히'이 시대의 지혜로운 사람들'이다.
(3)기원과 역사
바리새파는 요나단 당시 사두개파와 에세네파와 마찬가지로 다소 독립적인 집단으로서 처음으로 역사적인 무대에 등장하였다. 생가컨데 주후 초엽부터 바리새파는 여러 공동체에서 모였다. 예를 들면 이들은 하위계급의 제사장들,숙련공,소규모의 농살르 짓는 농부들과 상인들로 구성되었다.
(4)특징들
그들은 부활과 천사와 영의 존재를 믿는데 있어서 사두개파와 달랐다.(행 23:8을 참조)
또한 바리새파는 신적인 전遁둁성과 섭리 및 인간의 자유와 책임을 둘다 강조하였다.
3.에세네파
(1)자료들
유대인 저자들인 요세푸스와 필로를 에세네파에 대한 가장 최초의 중요한 자료로 간주한다.에세네파는 랍비문헌이나 혹은 우리에게 전해지는 신약성경의 어떤 저작 중에서도 이름으로는 결코 언급되지 않고 있다.
(2)명칭
에세네는 종종 경건하다는 의미 있는 아람어와 관련되기도 하고 ,'치유자들'이라는 의미가 있는 말과 관련되기도 한다.
(3)기원과 력사
헬리적 유대 저자와 그밖의 다른 고대의 저자들은 그들에 대한 이전역사에 관하여 상에하게 설명하지 않고 그저 존재하고 있는 하나의 집단으로 기록하고 있다.
에세네파는 확실히 A.D.70년으 제2성전이 종말에 이르기까지 유대공동체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
(4)특징
에세네파는 노예를 몰랐으며 또한 맹세하는 것을 피하였다.그들은 평소에 흰옷을 입었으며 정결의식에 대해 신중한 주의를 기울였다.그들은 성전에 기증품을 가져오는 한편,그들은 동물희생을 거절하였다. 안식일을 매우 엄격하게 준수하였으며 모든 소유는 공동으로 소유하고 사치품을 거절하였다.
4. 쿰란공동체
(1)정체성
여러구성설은 쿰란공동체의 정체성을 밝히는 문제는 켤코 쉬운 문제가 아니다.
이 집단이 대체로 제사장적 가문(아마도 하층계급)으로 구성되어있는 것으로 보는것이 가장 좋을 듯하며 아울러 여러가지 점에서 에세네파와 많은 유사성을 보여준다.
(2)기원과 역사
고고학적인 증거로부터 입증된것은 사해지역에 있는 이공동체 거주지의 중심적인 건물들은 키르벧 툼란에 있었다.(엔게디 북방 약 20마일지점) 쿰란 공동체가 B.C.150/140년경에서A.D.68년까지 거기에 살았던것으로 추정할수 있다.
(3)도서관
1947년 이후 많은 수의 히브리어 ,아람어 및 헬라어 사본들 또는 사본의 단편들이 키르벧 쿰란 주변에서 발견되었다.이모든 것이 쿰란 도서관을 형성한다.발견된 사본들 가운데는 성경사본,외경,위경,페사림(성경주석),타르굼,및 명령규율서등이 있다.
(4)특징
매우 엄격한 규칙들이 공동체내에서 준수되어졌다. 또한 정결 및 의식상의 씻음에 대해서 강조를 많이 하였다.
제10장 제사장-통치자들인 하스모니아 왕조시대
1. 시몬(B.C.143/42-135/34)
(1)국제적인 정세
셀루시드제국이 모든면에서 붕괴되어가고 있음을 볼수 있다. 마침내 셀루시드 왕조는 파로티아와 유대 및 더 넓은 주변지역의 영토에 대한 모든 지배권을 상실하였다.
(2)조세로부터의 해방
트리포에 의해 요나단이 사로잡힌 후, 마카비반란군의 지휘권은 다섯형제중 마지막 생존자인 시몬의 손에 들어가게 되었다. 데메트리우스2세와 트리포가 다투고 있을 때에,시몬은 곧 데메트리우스2세의 편을 들었다. 그조건으로 조세의 면제를 받았다. 이것은 시몬이 획득하였던 독립을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것이었다.
(3)대제사장,사령관 그리고 지도자로 임명된 시몬
마카비1서14:28에서 제사장,백성들의 지도자,그리고 그따의 장로들로 구성된 소위대공회가 소집된 것을 말하고 있다.이모임은 시몬과 그의 형제들이 이루어 놓고 해결해놓은 그모든 것에 대해 그들을 크게 찬양하고,아울러 시몬은 대제사장,지도자 및 사령관이라는 세습적인 칭호를 소유하였다.그러나 시몬을 세습적인 대세사장으로 임명한 것은 기존의 종교적인 전통과는 단절이 둁끁었다.
(4)시몬과 외국통치자들과의 관계
요나단이 죽은지 얼마되지 않아 ,시몬은 로마와 접촉할려고 하였다.그의 목표느 그의 지위를 공고히 하는 것이었고 로마와의 우호적인 관계는 매우중요했다.그결과 주변나라 왕들에게 로마가 유대의 독립을 보장하였다는 서한을 보냈다.
(5)시몬의 최후
시몬의 사위 이두매출신이 프톨레미는 여리고의 사령관이었는데 시몬과 그의 아들들인 마타디아스와 유다를 초대하여 그들을 처형하였다.그러나 요한에 의해 프톨레미의 쿠테타는 실패한다.
마카비 1서는 시몬의 죽음에 대한 기사로 끝맺고 있다.
2.요한 히르카누스 1세(B.C.135/34-104)
(1)그의 통치의 시작
'대공회'에 의해 수여된 명예로운 칭호에 근거하여 ,시몬의 셋째 아들이며 마지막으로 살아남은 요나단은 그의 헬라이름인 요한보다 더욱 알려져 있는데 합법적인 계승자로서 요한 히르카누스라는 칭호를 얻었다.
(2)요한 히르키누스 1세의 정복
그의 통치는 유대 주변지역에 대한 일련의 정복들로 특징지워진다.첫째로 히르카누스느 트랜스 요르단을 침략하였으며,그곳에서 6개월동안 포위한 후 비아 레기스,즉 왕의 도로에 있는 메데바라는 중요한 도시를 점령하였다.
(3)외국과의 관계
그의 전임자들과 마찬가지로 ,그는 로마와 우호적인 관계를 갖는데 관심을 가졌다.또한 그는 로마뿐만 아니라 이집트에 있는 프톨레미 왕실과도 좋은 관계를 가지기를 원했다.무었보다도 로마와 이집트와의 관계 및 아울러 셀루시드왕조의 허약한 정세에 힘입어,요한 히르카누스 강시에 유대는 셀루시드제국으로부터 완전히 독립하였다.
(4)요한 히르카누스의 국내정책
그는 대부분 그의 외국용병군대에 신세를 지고 있었으며,한때 다윗과 솔로몬처럼 요한도 정치적 및 군사적인 영역에서 막강한 지위를 누렸으나 이러한 것이 국내의 막대한 문제들을 대처하는데 도움을 주지 못하였다.
3. B.C.150-100년경에 나온 몇몇 중요한 문헌
위경적인 희년서를 언급할 필요가 있는데 ,초대교회에서 이책에 대해 사용된 또 하나의 이름은 '소 창세기'였다.이 시기에 나온 또 하나의 중요한 작품은 아리스테아스의 편지이다.모세오경의 헬라어 번역본의 기원에 대해 설명하는 것이다.
제 11 장 제사장-왕들인 하스모니아왕조의 통치
1. 아리스토불루스 1세 (B.C.104-103)
요한 히르카누스 1세가 주고,아리스토불루스가 요한의 유언을 거스려 그의 가족을 감금하고 자시이 권력을 차지했다.요세푸스에 의하면 아리스토불루스는 왕이라는 칭호를 가진 하스모니아왕조 중에서 첫번째 왕이었다.B.C.103년 갑자기 죽었다.
2.알렉산더 얀네우스 (B.C.103-76)
(1)그의 통치의 시작 아리스토1세가 죽은후 ,알레산드 얀네우스가 권력을 잡았다.그는 오직 군사적인 정복과 자신의 권력을 확장시키는데만 관심을 가졌다.
(2)전반적인 정치적 및 사회적 상황
알렉산더는 통치 내내 로마는 국내의 분쟁과 미트리다테스와의 전쟁으로 늘 분주하였다.
(3)알렉산더 얀네우스의 첫번째 정복
클레오 파트라는 알렉산드와 조약을 맺었으며,그리하여 다시금 마음대로 할수 있었다.
이때부터 (B.C.95년경)알렉산더 얀네우스는 아스글론을 제외하고 해안 평원 전체를 그의 지배아래 두었다.그 이후 그는 그의 모든 관심을 국내문제로 돌려야만 했다.
(4)국내적인 분쟁들
이때 유대에서는 하스모니아왕조 뿐만 아니라 또한 사두개파도 포함된다고 할 수 있는 보수적인 옛 제사장적 엘리트집단이 있었으며, 이시기에 대중적인 바리새파는 확실히 진보적인 것으로 간주되었다.그후 곧 데메트리우스 3세(B.C.95-87)가 군대를 이끌고서 영토를 침략했다.그 싸움에서 민족적인 유대감으로 승리한 후 그는 많은 대적자들을 추방했다.그는 그의 나라안에서는 평화를 누렸지만,바깥에서는 그렇지 못했다.
(5)나바태 왕국과의 투쟁
나바테왕국의 왕인 아레타스 3세가 유대를 공격하였다.무척어려운 상황에서 알렉산더는 아체타스 3세와 조약을 맺는데 성공하고 그들은 철수하였다.
(6)알렉산더 얀네우스의 최후
알렉산더 얀네우스 죽기 직전에 그는 다시 싸우기위해 트랜스요르단에 갔다.B.C.76년에 그는 라가바요새을 포위하는중에 죽었다.
3.알렉산더 얀네우스 통치의 정치적 및 경제적인 결과들
그는 전생에를 많은 전쟁에 바쳤다. 그 결과 그의 영토가 확장되는 결과를 얻었다.또한 전쟁은 많은 문화적인 중심지를 파멸에 이르도록 하였다.경제적인면에서 해안 도시들을 점령하며서 무역에 유리한 위치인 바다와 관련된 것을 지배하는 것을 의미하며, 또한 이는농업발전에도 도움 되었다.
4.메시아주의
다가오는 이스라엘 역사의 시대에서 ,구약성경에 그배경을 가지고 있는 메시아시대 및 메시아를 기대하는 것은 점차 두드러진 위치를 차지하였다.메시아적인 기대들은 하나님께서 그의 최종적인 목적을 사람들과 세상에서 성취하시며 또한 기름부음 받은 자 또느 메시아와 같으 遁특별한 인물들을 사용하신다는 구원의시대로 향하고 있다.또한 메시아적인 기대는 위축된 시골주민들의 인간실존에 대한 유일한 희망이었다.
제 12장 하스모니아왕조의 몰락
1.국제적인 정세
이 시기에 국제정치는 점차 로마에 의해 지배되고 있었다.특히 B.C.74년에 스페인과 이태리에서 노예반란이 일어났으며, 또한 본도의 왕 미트리차테스와 대결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로마는 수년내에 질서를 유지하고 심지어는 아시아에서 그들의 지위를 상당히 강화하는데 성공하였다.로마는 동방에서 그렇게 강력한 지위를 결코 차지하지 못하였다.로마제국은 유프라테스까지 확장되었다.하스모니아 왕조의 아리스트불루스와 히르카누스 사이의 짖誙은 형제간의 싸움이 로마가 유대 내정에 간섭하는 좋은 구실이 되었다.
2.살로메 알렉산드라(B.C.76-67)
알렉산더 얀네우스의 소원에 따라, 그의 미망인 살로메 알렉산드라가 얀네우스의 사후에 유대의 통치권을 이양받았다. 물론 그녀는 대제사장이 될 수는 없었다. 그리하여 그녀는 자기의 맏아들을 이 자리에 임명하였는데, 전승에 의하면 그는 나약한 사라으로 묘사하고 있다.
대체적으로 살로메 알렉산드라의 통치는 상당히 평화스러운 시기였다.
3.아리스토불루스 2세 (B.C.67-63)
죽은 여왕 살로메 알렉산드라의 합법적인 승계자는 이미 대제사장으로서의 직위를 보유하고 있었던 히르카누스 2세였다.그러나 아리스토불루스 또한 막강한 권력을 가졌었다. 따라서 바리새파에 의해 지지를 받고 있는 히르카누스 2세와 사두개파에 의해 지지를 받고 있는 아리스토불루스 2세 사이의 투쟁은 당연한 것이었다.그때 헤롯대제의 아버지 인터파터가 등장한다. 그는 히루타누스를 지지하는 사람들과 더불어, 아레타스를 끌어들여 아레스토불로스를 패배시킬수 있었다.그후 아리스토는 그의 군대와 함께 도망하였고,이런 상황에서 히르카누스와 아리스조불루스 둘 다 로마에 도움을 청하였다.
4.로마의 개입
로마는 아리스토불루스를 선택하였다.아마 로마가 그렇게 한것은 히르카누스가 아레타스3세와 동맹을 맺고 있었으며 ,아울러 로마는 유대에서 많은 영향력을 얻기위해 어떠 이유에서든 나바태아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아리스토는 로마가 다시 나바태아를 물리치고 나약한 히르카누스를 선택할것을 알고 ,요새를 지었다 이러한 행동은 폼페이의 진노를 유발했고,유대를 침공했다.폼페이는 승리했으며,수많은 포로를 끌고 왔다.
5.유대국가의 재편성
유대는 알렉산더 얀네우스가 얻은 영토 전부와 시몬과 요나단이 정복한 상당한 영토를 잃었다.그리고 오랜기간동안의 로마의 지배가 시작되었다.
6.히르카누스 2세(B.C.630-40)
(1)히르카누스의 위치
히르카누스 2세가 로마에 의해 대제사장으로 재임명된 것은 유대나라에 여전히 외형상의 독립을 제공하였다.히르카누스 자신은 유대에서의 사건진행에 거의 어떤 영향력도 미치지못했다.
(2)안티파터의 역할
안티파티는 일찍이 알렉사더 얀네우스에 의해 이두매의 통치자로 임명받았다. 이제 그 역할은 완전히 뒤바뀌게 되었다.그는 그의 아들 파사엘과 헤롯(후에 헤롯대제)에게 과업을 부여했다.인터파티의 정책의 주춧돌은 로마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자기자신을 지키며 그의 아들이 대중들에게 주목을 받는것이었다.무엇보다도 그의 아들 헤롯이 사람들의 주목을 받은것이다.그후 그는 살해되었다.
(3)정치적 및 경제적인 발전
포메이가 예루살렘을 정복한 후 첫 일년은 비교적 평화 스러운듯이 보였다.그후 상황은 상당히 악화되었다.이는 특히 안티파터가 죽은 후 몇년동안의 상황이기도 하였다. 로마의 삼두정치 결과 동부지역은 안토니가 통치하게 되었고,그龁 허세부리는 삶에 의해 팔레스타인에게 있어서는 않좋은 시기였다. B.C.40년에 파르티아는 옛 근동지역에 대규모 침략을 감행하였고,이때 사로잡혔던 아리스토불루스2세의 아들인 안티고누스는 그를 유대의 왕으로 앉도록 도움을 구하는 것 대신 그들에게 편의를 제공하였다. 침략은 성공하였고 히루카누스2세는 포로로죽고 헤롯은 도망쳤다.
7.안티고누스(B.C.40-37)
안티고누스는 단지 파르티아의 봉신왕에 지나지 않았으며 또한 사실상 파르티아에 완전히 예속되어 있었다.이러한 상황은 오래 지속될수 없었는데 로마가 곧 질서를 잡았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 안티고누스의 가장중요한 대적자는 헤롯이었다.헤롯과의 싸움에서 패한 그는 헤롯과 안토니의 명령으로 참수당했다.
8.열심당
(1)열심당이 출현
요세푸스에 의하면, A.D.6년에 제4철학파가 사두개파 ,바리새파 및 에세네파와 나란히 생겼고 '갈릴리사람'이라는 별명을 가진 유다가 바리새인 사독과 함께 이 집단의 창시자로 불리워진다.
이 운동은 시간이 경과하면서 좀더 강해졌으며 그리하여 제1차 유대전쟁 후에는 마침내 무대에서 사라졌다.
(2)술어
'열심당'이라는 말은 '하나님으 명예와 영광을 위한 열심'을 가진 어떤 사람을 나타낸다.많은 열심당원들이 마음과 영혼으로 그들 하나님의 대의명분을 위해 싸웠다.그들은 그들의 주로써 오직 그분만을 인정하기를 원했다.
(3)목표들
열심당원으 가장중요한 목표는 이스라엘의 해방이다.
제 13 장 헤롯대왕의 통치 (B.C.37-4)
1. B.C.37-4년경의 로마제국의 상황
(1)안티니와 옥타비안 사이의 대립
안티니는 제국 동부에서 점점 더 헬라의 왕자처럼 행동하기 시작하였다.
안토니가 클레오파트라와 결혼했는데 그것은 동시에 옥타비안의 여동생인 안애를 버리는 것이었다.두경쟁자들 사이의 갈등은 B.C.31년의 악티움전투에서해결되었다.옥타비안의 승리는 그의 입지를 상당히 강화시켰다.
(2)유일한 통치자로서의 옥타비안
안토니가 죽은 후,옥타비안은 모든 권력을 손에 넣고 로마의 원로원은 그에게 고귀한 자의 뜻을 가진 아우구스투스라는 칭호를 부여하였다. 헤롯은 그의 충성스러운 신하였다.
2.헤롯의 지위
(1)특징
정치가로서 헤롯은 무자비한 사람이었다.그러나 유대교에 대한 그의 태도는 관대한 것으로 묘사된다. 헤롯의 외교정책은 그의 국내정책과는 전혀 달랐다. 외교정책은 로마와의 우호를 유지하는 정책을 전적으로 기초하고 있다.
(2)로마와의 관계
전쟁이 일어났을 때 헤롯의 의무는 군대로 로마를 돕는 것이었다.
3.건축업자들
(1)예루살렘에서
헤롯의 가장 중요한 계획사업들 중의 하나는 예루살렘성전의 재건 및 확장이었다.A.D.64년 아그립바의 시대에 가서야 그 성전의 건축이 완전히 마무리 되었다.
(2)예루살렘밖의 건축물들
예루살렘과 유대밖에서는 헤롯은 비유대인처럼 행동하였다.그리하여 그는 여러 비유대적인 도시들에 로마황제를 기념하는 성전들을 건추하였다.또 하나의 중요한 사업은 수많은 요새를 건축하거나 ,확장하는것이었다.
4.사회적 및 경제적인 상황
(1)조세
헤롯 치하에서 조세부담은 막대하였다. 그는 방대한 양의 돈을 필요로 하였다. 헤롯 당시 무수한 거축사업들과 그가 진척시킨 상황들이 매우 큰 금액의 돈을 탕진하였음에 틀림없다.
(2)가난과 부
애비개드는 헤롯당시 예구살렘에 큰 부자가 있었다는 것을 고고학적인 조사에 근거하여 입증하였다.하지만 이부자들은 특별한 소수집단이었고, 아울러 심히 가난한 사람들도 있었다.
5,헤롯의 종교정책
헤롯은 유대교와 유대관습에 대해 매우 조심스러웠으며 또한 그 스스로는 유대인들에게 유대인으로 나타냈다.하지만 후대의 전승은 사람들이 종교적인 문제에 있어서 헤롯을 매우 대단히 존경하지 않았음을 암시하고 있다. 헤롯은 또한 자기 마음대로 제사장들을 임명하거나 면직시켰다.
6.헤롯의 가족에 대한 그의 행동
헤롯은 하스모니아 왕조가 그의 왕위를 끊임없이 위협하는 것으로 간주하였다. 그것은 그의 통치기간중에 하스모니아가문사람들 모두를 처형한 것을 보고 알수있다.
동정심이 부족한 것이 헤롯의 전생애의 특징이었다. 분명히 그는 가족들과 백성들에 대해 가혹하고 잔인한 행동으로써 그 권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
7.헤롯의 최후
헤롯은 B.C.4년에 중병으로 죽었다.
이 장례식의 지휘는 그의 아들 아르켈라우스의 손에 있었으며,또한 헤롯이 죽기 직전에 헤롯이 자기의 후계자로 지명하였다.
8.헤롯당
신약성경에서 한번의 언급이 있을 뿐이다.헤롯당은 헤롯왕조의 지지자들로 또한 로마에 우호적인 사람들로 간주된다.
9. B.C.1세기에 나온 문헌
B.C.100년경에 나온 희년서 ,에녹서 몇부분도 이시기에 나온 중요한 작품이다.이러한 위경적인 작품들 외에 외경인 바룩1서 , 여러 단편으로 된 다메섹문서가 있다.
제14장 헤롯대왕의 죽음부터 아그립바 1세까지의 기간 (B.C.4년경-A.D.41)
1.헤롯 사후에 일어난 사건들
(1)반란들
헤롯이 죽은지 얼마 안되어 한 반란이 일어났다.이 반란은 헤롯이 죽기전에 유다와 마티아스를 처형한 결과였다. 헤롯의 군사들조차 참가한 반란도 있었으나 다 진압되었다.
(2)헤롯의 유언
헤롯의 유언에 따라 아르켈라우스는 왕위계승자가 되었다. 그러나 서로간의 사이가 나빠졌고, 아우구스투스 헤롯의 유언장을 재가해서 아르켈라우스는 유대,사마리아 및 이두매를 차지하였고,헤롯 아티파스는 갈릴리와 베레아를 ,빌립은 이두래아를 차지하였다.
그들중 어는 누구도 스스로 왕이라 부르는것이 금지되었다.아르켈루스는 분분와이 두사람은 사분분왕이 되었다.
2헤롯 사후의 팔레스틴통치
(1)유대와 사마리아
아르켈라우스의 통치는 단지 B.C.4년에서 A.D.6년까지만 지속되었다.
(2)빌립의 영토(B.C.4-A.D.33/34)
아우구스에 의해 빌립에게 할당된 지역은 팔레스틴의 북쪽과 동쪽에 있으며,아울러 거의 대개가 비유대인들이 거주하였다.
(3)헤롯 안티파스의 영토(B.C.4-A.D.39)
그는 빌립보다 더 중요한 지역을 물려받았다.그의 분봉왕직도 중요한데 그가 다스리는곳이 주로 예수님과 세례요한이 활동한 지역이기 때문이다.
3.사회적 및 경제적인 상황
(1)조세
조세는 두범주로 나누어진다.즉 직접세와 사용세이다.산헤드린은 로마총독의 감독하에 직접세를 징수할 책임이 있었다. 이 세금들은 땅의 소산물에 대한 세금과 사용세를 포함하고 있다.토지세는 로마에 납부하였고, 가장 반감을 일으킨 인두세는 A.D.6년에 합병한 후에야 납부하였다.
(2)토지소유와 임차인
미쉬나와 고고학적인 증거에 근거하여 ,애플바움은 토지 소유가 A.D.1세기에 현저하게 증가했다고 주장한다.이렇게 된것은 높은 세금과 병으로 그들이 토지를 팔수밖에 없었으며 그들의 자녀는 일용노동자가 되었다.또한 이 시기에 다양한 임차인들도 있었는데 그들은 수확한 부븐을 소유주에게 바쳐야 했다.
(3)가난한 자들의 위치
이러한 범주에서 머저 어급해야 할 것이 일용노동자들이고 이들은 정해진 시간동안 주인을 위해 일했다. 그들의 위치는 매우 형편없었다.(눅 16:20)
(4)경쟁과 무역
유대가 문헌에 있는 내용에 의하면 이시기에 40개 이상의 다양한 직업집단들이 있었다.그들중 많은 사람들이 농업과 관련되어 있었다. 또한 서서히 유대인들과 갈릴리 및 사마리아의 주민들이 점점 더 무역에 종사하게 되었다.
4.종교적인 상황
(1)성전
이 당시 종교 생활의 중심은 여전히 예루살렘의 성전 예배였다. 수만명의 사람들이 유대 ,갈릴리 그리고 디아스포라에서 세 큰절기에 참석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모여들었다.
(2)회당
팔레스티에서 회당이라는 기관은 단지 A.D.70년 성전파괴 이후에야 완전히 발전하였다.
(3)산헤드린
산헤드린은 어떤 의미에서는 대공회 및 게루시아의 연장으로 간주할수 있다.이 명칭은 B.C.63년경부터 사용되기 시작하였다.주요한 직무중 하나는 전통적인 율법을 해설하고 적용하며 ,또한 세속적인 또는 종교적인 소송사건들을 선고하는 일이다.
(4)영적인 지도자
대제사장은 제사장들의 우두머리였다.또한 산헤드린의 의장이었다.
(5)종교적인 생활
평민들은 성전예배에 단지 수동적으로만 관련되어있었다. 모든 희생제의행위들은 제사장들에 의해 수행되었고 평민들은 성전일과에 참여하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5.예수님의 사역
(1)연대기
대충말해 예수님은 로마의 황제 아우구스투그(B.C.27-A.D.14)티베리우스 (A.D.14-37)가 통치하는 기간 중에 태어나서 사셨다.
(2)예수님과 그 시대의 다양한 경향들
신약성경의 증건는 예수님이 자주 바리새인들과 논쟁에 관여하셨으며 또한 사두개파와의 논쟁에서 생각을 달리하셨음을 보여준다.
(3)예수님의 재판
모든것은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의 재판레서 매우 적극적인 역활을 하지않았으며 또한 종종 생각하고 있는 것보다 예수님께 좀더 동정적이었다는 인상을 주고 있다. 예수님이 결국 빌라도에 의해 사형이 선고된다.
(4)예수님의 설교
예수님의 활동과 복음서의 기록 사이에 그에 관한 전승들을 나타내고 있는 공동체의 설교가 있다. 설교의 주요 특징은,예수님이 어떤 체계적인 교훈을 전개하지 않았다는 것이다.그의 선포는 우선 구원의 메시지로 이해 되어져야한다. 마지막으로 코스터는 예수님의 윤리가 무엇보다도 종말론적이지 중간윤리가 아니라는 것을 강조한다.
제 15 장
아그립바 1세로부터 제 1차 유대전쟁까지의 기간
(A.D. 41-66)
1.전반적인 정치적 상황
아우구스투스가 죽은 후, 이 장에서 기술되고 있는 기간 중에 로마제국은 티베리우스(A.D.37-41),글라디우스(A.D.41-54) 그리고 네로 (A.D.54-68)와 같은 황제들에 의해 다스려졌다.이 사람들 중 그 어느 누구도 아우구스투스의 외교력과 지배권을 가지지 못하였다. 이 기간중 특히 네로는 잔인한 것으로 유명하였다. 그가 통치하는 동안 로마에 유명한 화재가 있었다.(A.D.64년).네로가 그 화재에 책임이 있는 것으로 의심받았다.그러한 의심을 전가하기 위해 그는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을 고발하였다.이일이 로마에서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첫번째의 박해가 되었다.
2.아그립바 1세이 통치
(1)아그립바와 로마와의 관계
헤롯대왕과 미리암네의 손자였던 아그립바(행 12:1-23에서 헤롯이라 불리워진다.)는 칼라쿨라와의 친분을 이용 안티파스가 추방되었을때 , 그 영토를 취하였다. 바로 그 시기에 하나의 신으로 경배받기를 원하였던 칼라쿨라는 예루살렘성전에다가 그 자신의 동상을 세우도록 명령하였다. 이것은 실행되지 않았고, 칼라쿨라는 41년에 살해당한다. 이 사건들 이후 아그립바는 클라우디우스가 즉위하자 로마에서 다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러한 은혜에 대한 보답으로 클라우디우스는 아그립바를 이전 그의 할아버지 헤롯대왕이 다스렸건 전지역을 다스리는 왕으로 임명되었다.
(2)전체 팔레스틴의 왕으로서 아그립바 1세
이러한 클라우디우스의 경정은 유대와 사마리아을 로마지방 시리아에서부터 다시 분리되어, 더 이상 로마의 직접통치 하에 있지 않게 되었다. 신약성경에서 아그립바는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박해 자로 기술되고 있다. 행 12:1-19에 의하면 세베데의 아들중 하나인 야고보가 그의 명령으로 죽임을 당하였으며 베드로도 거의 비슷한 운명에 처할 뻔하였다.
그의 통치는 단지 짧은 기간동안만 지속되었다. 그는 44년에 가이사랴에서 죽었다.
3.로마의 직접통치 하의 팔레스틴전역
(1)41-66년까지의 로마총독들
아그립바1세가 죽은 후, 글라우디우스는 팔레스틴 전체를 로마의 지방으로 만들었다. 이러한 조치는 아그립바가 로마당국자들에 대해 완전한 신뢰를 하고있지 않음을 암시하고 있는데, 아마도 그가 좀더 독립적인 정책을 수행하려고 한 그의 시도의 결과일 것이다. 총독들은 쿠스피우스 파두스(44-46)였다. 그기간중 갈릴리 유다의 아들들인 야고보와 시몬이 십자가처형을 당하였다. 벤티디우스 쿠마누스(48-52) , 안토니우스 펠릭스(52-60) 펠릭스는 신약성경에서 언급되고 있는 총독이며, 가이사랴에서 바울을 그의 개인적인 죄수로 감금하였던 사람이다. 포르시우스 베스도
(60-62) , 알비누스(62-62)와 게시우스 플로루스(64-66).
제 1차 유대전쟁은 플로루스가 통치하던 A.D..66년에 일어났다.
(2)아그립바 2세 (49년경-92년)
아그립바 2세는 그의 아버지인 아그립바 1세가 44년에 죽었을 때 불과 17살이었다. 헤롯가족의 거의 모든 구성원들과 마찬가지로, 아그립바도 역시 로마에서 자라났다. 49년에 아그립바 2세는 레바논의 작은 왕국인 칼키스의 왕으로 임명되었다.53년경에 아그립바의 영토는 이전 분봉 왕인 빌립의 지경까지 확장되었으며, 그는 유대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며 로마에 충성했다.
아그립바 2세는 66년 로마와의 제 1차 유대전재의 돌발을 막으려고 가능한 모든 일을 다 해보았다. 그러나 일단 전쟁이 시작되자 그는 철저하게 로마편에 섰다. 그후에 그는 한층 더 많은 영토를 획득한 것같다.
4. A.D. 41-66년 사이의 사회적 및 경제적 상황
41년 이후에 경제적인 상황은 점차로 악화되어져 갔다. 이것도 또한 대체로 그 정권이 탐욕과 타락에 기초하였던 대부분 총독들의 악한 통치에 기인한다. 필요한 것 이상으로 훨씬 더 많은 세금이 거두어졌다. 이것은 반로마감정을 품도록 하였으며, 특히 이미 로마황제에 대해 세금 내는 것을 맹렬하게 반대하였던 집단들 가운데서 그렇게 점차로 늘어가는 것을 보았다. 갈릴리는 제1차 유대전쟁 이전 마지막 몇십년동안에는 여전히 비교적 번창한 곳으로 생각된다. 예수님은 많은 시간을 이곳에서 보내셨으며 아울러 이곳은 반로마운동의 요람이기도 하다.
5. 최초의 그리스도교회
(1)예루살렘에서의 공동체
사도행전(2:41)은 예루살렘의 최초 그리스도교회의 기원을 묘사하고 있다. 요한, 야고보, 그리고 베드로가 이러한 공동체에서 중요한 인물이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 공동체의 결속은 또한 잠시동안 물건들의 공동소유로 표현되었다고 한다. 우리는 최초의 시기에 '열두제자들'이 예루살렘공동체의 핵심을 형성하였다는 것을 추정할 수 있다. 그로부터 스스로 부활하신 주님 안에서 믿음으로 연합되어 있음을 느끼는 어느 곳에서든지 사람들의 집단이 생겨났던 것이다.
(2)예루살렘공동체에서 헬라어를 쓰는 사람들
우리가 이전의 장들에서 이미 종종 주목했던 것은 시간이 경과하면서 예루살렘이 중요한 도시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로 인한 결과들 중의 하나는 헬라어를 쓰는 사람들이 이 도시에 또한 정착하였으며, 한편 헬라어의 사용도 약간의 유대교 집단에서 유행하기 시작하였다.
(3)야고보의 죽음
오랫동안 최초 공동체의 지도권은 사도들중 한사람인 베드로와 예수님의 형제인 야고보의 수중에 있었다. 야고보가 마침내 가장 두드러진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62년에 베스도가 떠나간 후 총독이 없는 짧은 기간이 있었을 때, 이 중요한 예루살렘공동체의 지도자가 죽임을 당하였다.
(4)펠라로 도망?
유세비우스는 그의 교회사에서 예루살렘의 그리스도인들이 로마가 이 도시를 포위하기 직전인 A.D.66년에 트랜스요르단에 있는 펠라로 어떻게 도망하였는가가 요즘에 논란이 되고 있다.
제 16 장
제1차 유대전쟁(A.D. 66-74)
1.투쟁의 시작
(1)원인
여러 로마총독들의 부패하고 나쁜 통치와 로마점령군에 대한 많은 유대인들의 증오가 싸움이 돌발하는 직접적인 원인들중 하나였음은 명백하다. 뿐만 아니라 사회적, 경제적, 민족적 및 종교적인 동기들도 한 부분을 담당하였다. 여러 사건들의 결합이 전쟁의 불을 당겼으며, 가이사랴에서 시작되었다.
(2)평화의 첫걸음
모든 사람이 이러한 사건의 진행에 만족하지는 않았다. 이때 알렉산드리아에 머물고 있었던 아그립바 2세가 중재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급히 돌아갔다. 그의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는데, 그 이유는 무엇보다도 플로루스로부터 매우 적은 도움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대제사장과 사두개인들은 바리새인들과 함께 예배드리는데 그 어떤 방해물이 없음을 만족해하였으며, 또한 헤롯왕조의 지지자들도 평화를 회복하기 위한 가능한 모든 일을 하였다. 그러는 동안 열심당은 마사다를 포함한 여러 요새들을 이미 정복하였으며, 대제사장의 아들인 엘레아잘의 지휘하에 그들은 성전을 점령하여 황제에게 매일 희생제사를 드리는 것을 중지시켰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 싸움을 중재할려고 했던 집단들이 아그립바2세의 도움을 요청하였다. 그는 열심당과 그들에게 동조하는 사람들을 제거하기 위해 3,000명의 군대를 파견하였다. 이 공격은 완전히 실패하였으며 그리하여 로마와의 전쟁은 피할 수 없는 것이 되었다.
(3)첫번볁 성공
오랫동안 준비한 끝에 로마의 시리아총독 세스티우스 갈루스가 66년 가을에 팔레스틴 원정을 감행하였다. 그는 예루살렘까지 진격하였으나, 얼마후 다시 퇴각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퇴각하는 도중에 그의 군대 대부분이 벧호른 부근에 있는 한 협로에서 전멸하였다. 이 승리의 주요결과는 많은 사람들이 이제 반로마그룹에 참여하였다는 것이다.
2.갈릴리에서의 전투
(
1)준비
갈루스가 패배한 후, 로마에 의한 새로운 전쟁에 저항하기 위해 급히 조치를 취한다. 한편, 예루살렘의 유력한 제사장들은 만일 그들이 로마를 반대하지 않는다면 그들의 중요한 지위를 잃어버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산헤드린이 이제 행정적인 권력을 위임받았으며, 민회가 이제는 최고의 관
청으로 재구성되었다. 이 민회는 갈릴리군대의 사령관인 플라비우스 요세푸스가 맡고 있었는데, 나중에 그는 역사가가 되었다. 요세푸스의 첫번째 임무들 중 하나는 갈릴리의 도시들을 강화하는 일이었다. 그 자신의 기록에 의하면, 요세푸스는 10만 명을 동원하여 그들에게 전투훈련을 시
킬 수 있었다. 열심당과 그리고 특히 그들의 지도자인 기살라의 요한은 아마도 요세푸스가 결정적인 전투를 준비하기 보다는 로마와 협상을 시작하려고 한다는 의심을 하고 요세푸스에 대한 무장항쟁을 초래한다.
이 모든 요인들은 다가오는 로마와의 전쟁을 준비하는데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 준비가 매우 좋았을 리가 없음을 암시하고 있다.
(2)로마의 갈릴리진격
네로는 팔레스틴의 질서를 회복하도록 그의 장군 베스파시안을 보냈다. 67년이 끝나갈 즈음에 로마는 갈릴리 전역을 다시금 그들의 지배하에 두었다.
3.68-69년의 전쟁의 경과
(1)예루살렘의 상황
갈릴리에서 베스파시안의 빠른 진격이후 예루살렘에서 유혈충돌이 있었다.열심당은 갈릴리를 잃어버린 패배를 구지도자들에게 뒤집어 씌웠다. 또한 이들이 로마와 곧바로 협상을 시작했다는 것에도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예루살렘의 지휘권은 이제 열심당의 수중으로 들어갔다.예루살렘은 열심당의 세파 즉, 시몬 바르기오라,제사장 엘리아잘 벤 시므온, 그리고 기살라의 요한의 열심당은 강한 다툼을 벌였다.로마군대가 접근 했을 때, 그들은 세군데의 요새를 각각 맡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베스파디안의 아들인 디도는 예루살렘을 에워 살 준비를 하였다.
(2)68-69년에 베스파시안이 한층 더 진격함
67년에 로마에 대항하는 전투를 시작했던 사마리안들이 패배하였다.아울러 여리고도 함락되었다.그 즈음 로마는 그 나라 대부분을 정복하였다.
4.요하난 벤 자카이의 도피
요하난 벤 자카이가 예루살렘에서 도피한 것이 이시기에 일어났음이 틀림없다. 요하난 벤 자카이의 도주는 제1차 유대전쟁의 가장 중요한 사건들 중에 하나로 볼수 있다. 우리가 다음장에서 살펴보겠지만,이 단순한 사건은 후기유대교 발전을 위해 중대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5.예루살렘의 포위와 함락
70년 초에 디도는 예루살렘을 포위하기 시작했다. 디도는 예루살렘을 포위하기 위해 네개의 군단과 원군 모두를 투입하였다. 이시기에 기살라 요한은 엘리아젤을 정복하고 그후 두집단만 남는다. 5개월 동안의 포위 후에 로마는 다시 예루살렘을 완전히 손에 넣었다.
6.마지막 요새들에 대한 전투 (70-74)
디도가 로마에서 승리의 행진을 할 때, 거기에는 수많은 죄수들뿐 아니라 성전에서 가져온 일곱가지 모양의 황금촛대와 진설병상도 포함되어 있었으며, 헤로디움, 마사다 및 마케루스둥지의 요새는 아직까지 함락되지 않았다. 그러나 마사다에서의 죽음의 항쟁을 끝으로 제 1차 유대전쟁은 막을 내린다.
7.결과들
로마에 패배한 것이 엄청난 황폐함과 무수한 인간의 생명을 앗아간 것은 제쳐놓고서라도,그것은 또한 종교,정치,그리고 사회적 및 경제적인 영역에 있어서도 주요한 결과를 낳았다. 성전이 파괴된것은 종교적,민족적인 중심지가 사라졌음을 의미하였다. 성전을 잃어버린 것에 대한 또 하나의 결과는 희생제사가 더 이상 드려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유대는 이제 독립적인 로마의 속주가 되었다.이 새로운 지위는 이 나라에 군대가 고정적으로 주둔하였음을 의미하였다. 예루살렘을 포함한 여러 도시들이 거의 완전하게 파괴되었으며, 수많은 지역들도 완전히 인구가 격감하였다.
제 17 장
로마와의 두번 전쟁 사이의 기간 (74-132년)
1.로마의 정치적인 발전들
69년에 베스파시안이 팔레스틴에서 전투를 치르고 있는 동안 그는 로마의 황제가 되었다.그는 10년간 (69-79) 통치하였다. 베스파시안이 통치를 시작하였을 때 , 로마제국의 재정적인 상태는 매우 형편없었다. 이러한 상황은 무었보다고 네로가 돈을 마구 써버린 지출 때문에 일어났다. 그의 아들 디도는 짧은 시기동안만 다스렸으며(79-81) 그 뒤를 그의 형제인 도미티안 (81-96)이 계승하였다.플라비안가문의 마지막 황제인 도미티안은 폭군의 기질이 있지만,그의 후계자인 네르바의 통치는 매우 달랐다. 네르바 후에 하드리안(117-138)이 계승하였는데, 바르 코흐바 반란 또는 제 2 차 유대전쟁이 그의 통치기간 중에 일어났다.
2.팔레스틴의 사회적 및 경제적 상황
앞의 사회적,경제적 상황이 70년 이후 오랫동안 영향을 미쳤다. 그리하여 성전의 파괴는 미래를 위한 중요한 사회적 및 경제적 중심지를 잃어버렸음을 의미하였다. 전쟁결과 광범위한 황폐함과 엄청난 가난에도 불구하고, 전쟁이 끝난 다음에도 여전히 막대한 재산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유대에 있었다. 수년 후에 유대와 갈릴리에서 경제적 성장이 회복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3.랍비들과 종교적 발전들
(1)랍비들
로마와의 전쟁이 끝난후 유대의 다양한 종교적 집단들 중에서 남아있는 것은 바리새파였다. '바리새파'라는 이름은 70년 후에는 점차 사라졌다. 유대교가 더 한층 발전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하기 시작한 집단의 일원들은 랍비들로 알려져 있다. 팔레스틴에서 흔히 사용된 랍비라는 칭호는 '나의 선생'을 뜻한다. 70년 이후 랍비들은 성경을 연구하고 또한 매일의 전체 삶에 성경을 적용하는 것을 강조하였다.
(2)야브네(얌니아)
요하난 벤 자카이가 예루살렘에서 도피한 후, 그는 야파남쪽에 있는 야브네에서 토라를 연구할 학교를 시작하는 것을 베스파시안으로부터 허락받았다. 그 다음 시대에서 이 곳은 랍비유대교의 중요한 중심지가 되엇으며 또한 135년까지 그렇게 남아있었다.
(3)회당의 새로운 위치
70년에 성전이 파괴된 후에야 비로소 회당이 팔레스틴에서 점차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팔레스틴에서 최초의 회당들은 A.D.1세기에 그 기원을 가진다. 이 회당들은 대개 영적인 삶의 중심지였다.
4.소위 퀴에투스 전쟁(115-117년)
115년-117년에 우리는 키레네에서 시작하여 거기서 키프러스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까지 번져간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의 반란에 대한 소식을 접한다.이러한 반란들은 트라얀이 파르티아와의 전쟁에 몰두하고 있는 동안에 일어났다. 반란은 로마의 장군 루시우스 퀴에투스에 의해 진압되었으며, 수천명의 유대인들을 죽였다. 그 반란이 진압되었을때,퀴에투스는 유대지방의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5.주후1년경에서 135년사이 팔레스틴에서 나온 가장 중요한 문헌
랍비들과 그들의 문하생들은 (기록된)토라와 구전을 연구하고 해석한 연구물들을 집성한 것이 미쉬나(가르침)이다. ,신약성경에 있어서는 단지 야고보서와 유다서만이 팔레스틴에서 기록되었을 어느 정도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추정될 수 있다. 위경으로는 모세의 승천서 , 아담과 이브의 생애 , 에스라 4서 ,예레미야의 예언서가 있다.
제 18 장
바르 코흐바의 반란 (132-135년)
1.원인
(1)정치적인 배경
하드리안 (117-138)은 로마제국의 국경을 공고히 하고 또한 그 영토를 더이상 확장시키지 않으려는 목적을 둔 황제로 알려져 있다. 팔레스틴에서 큰 문제들 중의 하나는 유대 주민과 헬라 주민들 사이의 관계였다. 130년경 하드리안은 팔레스틴에 헬레리즘 건축물들을 건립하였다. 상당히 많은 유대인들이 이러한 발전으로 불행하였으며, 또한 예루살렘과 종교적 문제들이 뒤얽혔을 때 훨씬 더 불행하였음이 명백하다.
(2)경제적인 상황
시골에서의 경제적인 상황이 하드리안이 통치하는 동안 또 다시 악화되었다는 암시들이 있다. 특히 임차인들의 지위는 점차로, 더 비참해져 가는 것 같았다.
(3) 직접적인 원인들
하드리안 할례금지와 예루살렘 재건을 약속을 어겼는데 또한 헬레니즘적인 건축물을 세우는것이 반란의 한 원인이 될 수 있었다.많은 학자들은 할례의 금지와 예루살렘 재건계획이 그 반란의 원인들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결과로 보인다고 생각하는데, 다른 말로 하자면 이것들은 반란 후에 취해진 조치들이라는 것이다. 복잡한 요인들이 그 반란에 영향을 미쳤는데, 그 중에서도 경제적인 요인을 빠뜨리면 안된다는 인상을 분명히 받는다.
2.바르 코흐바 라는 인물
(1)인물과 태생
그는 스스로를 시므온 벤 코시바로 불렀지만, 기독교전승에서 , 그는 '별의 아들'을 의미하는 바르 코흐바로 불리워지고 있다.
(2)칭호
수많은 화폐에서 바르 코흐바는 '이스라엘의 왕자'로 지칭되고 있으며, 문서들과 한 편지에서도 마찬가지로 지칭되고 있다.
메시아적인 기대들이 바르 코흐바라는 인물과 그리고 반란 그 자체 모두에 관련되어 있음이 분명하다.
(3)지도자로서의 바르 코흐바
바르 코흐바는 군사적인 영역에서 뿐만 아니라 사회적,경제적 및 종교적인 문제에 있어서도 그의 권위를 나타내었다.분명히 그의 지도력은 사람들의 삶의 모든 측면에까지 확대되었다.
3.랍비 아키바와 그밖의 랍비들의 역할
유명한 랍비 아키바는 바르 코흐바를 민 24:17에 근거하여 기대되고 있는 '다윗의 별'로 생각하였다. 아키바가 바르 코흐바와 관계 있다는 긍정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는 것은 그들 대다수 랍비들의 자세와는 반대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 밖의 랍비들은 그 반란에 열정적이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4.반란의 경과
(1)투쟁의 무대
유대가 그 반란의 주요 무대였으나, 그것이 132-135년 팔레스틴 나머지 지역에서 로마와 어떤 소요나 작은 충돌이 없었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로마군대의 주둔으로 갈릴리는 좀 소홀했는데 그렇다고 바르 코흐바편에 서서 싸우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2)반란의 시작
우리는 그 반란이 132년 초에 시작 되었다고 추정해야 한다. 반란기간은 아마도 3년경의 것으로 말할 수 있다. 반란군들은 곧 많은 요새들과(해로디움을 포함하여), 성채 및 동굴들을 점령하였음에 틀림없으며, 이런 곳들은 일종의 은신처로 사용되었다.
(3)더욱 더 발전된 투쟁
반란의 후기 단계에 가서 하드리안은 그의 가정 유명한 장군들중 한사람인 줄리우스 세베루스에게 그 반란을 진압하라고 명령하였다. 이 전투의 마지막 단계는 벧알 요새를 점령하고 약탈할 것을 포함하고 있다. 이 도시가 결국 로마에 의해 사로잡혔을때, 비록 후대의 기술이 아마도 다소 과장되었다 해도 다소 유혈상황이 일어났음에 틀림없다. 이 죽은 사람들 가운데 바르 코흐바와 랍비 아키바가 있었을 것이다.
벧알의 함락이 반란의 최종 목표가 아니었다. 로마군이 유대광야의 도굴에 있는 저항의 증심지들을 없애는데 더 많은 시간을 들었다는 암시들이 있다.
5. 반란의 결과
유대는 반란으로 실제로 중요한 지방이 로마에 빼앗겨 매우 큰 고통을 겪었다. 훨씬 더 심각한 일은 유대인들에게 나타난 결과였다. 그들 중 무수한 사람들이 노예로 팔렸다. 예루살렘은 이제 아엘리아 카피톨리나 라는 이름 하에 완전히 이방도시가 되었다. 죽음을 당한다는 형별로서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 들어가는 것이 금지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반란이후 팔레스틴에 종교적인 박해가 있었음을 나타내고 있다. 할례, 안식일 준수 및 토라를 가르치는 것이 금지되었다.
이 반란이후 심히 힘들고 어려운 시대가 유대인들에게 시작되었다. 유대인들은 그들의 정치 적인 조국을 ꣁ앗겼기 飁문에, 토라가 이들 백성을 결합시키는 유일한 끈이었다. 역시 바야흐로 이러한 끈이 시간이 경과하면서 얼마나 강해져 왔는가 보여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