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성서의 형성사
목차
서문 .…………………………… 3
1.신약성서의 기원 …………… 4
2.구전시대……………………… 4
3.문헌시대……………………… 5
4.이 시대에 기록된 문헌들 … 6
5.신약 정경의 성립 ………… 8
6.신약의 외전 …………………12
7.신약성서의 본문 ……………15
8.신약시대의 용지 ……………16
9.신약시대의 사본 ……………17
10.본문의 비판 …………………19
11.공관복음 ……………………19
12.제4복음 ………………………24
13.로마인서 ……………………26
14.고린도전서 …………………29
15.갈라디아서 …………………30
서 문
신약성서는 긴 역사의 과정을 통하여 여러 민족과 국가의 흥망 성쇄를 겪으면서 무수한 남녀 신도들에게 지대한 감화를 주어 왔을 뿐 아니라. 우리에게도 옛날과 마찬 가지로 생명을 주는 말씀으로 애독되고 있다.
신약성서에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그리스도의 복음과 사적 그리고 예수를 구주로 믿고 생활한 사람들의 기록을 볼 수 있다.
필자는 신약성서의 가치성 또는 그 가운데 기록되어 있는 말씀에 대하여 해석하거나 유대주의와 히브리 민족사 메시아사상 그리고 정치 사회 철학적 고찰이 아니라 다만 제목 그대로 신약성서의 완성과정과 시대적 배경과 특별히 문제되는 사실을 적어서 이 책을 읽는 모든이의 앞길에 주님의 은혜가 충만하기를 바라며 무딘 붓을 든다.
강원도 영월에서 육재흥
1996년 월 일
1. 신약성서의 기원
그리스도교는 문헌의 종교로 시작된 것이 아니라 영적 능력의 종교로 나타났다.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팔레스타인에서 전도하실 때 아무런 글을 남겨 놓지도 않았고, 제자들에게 글을 써서 보존하라고 지시한 바도 없었다.
예수 자신이 글을 쓰셨다는 기록도 땅에 두번 쓰셨다는 기록이 있을 뿐이다.
< 요 8 : 6-8> 예수께서 세상을 떠난 후에도 제자들과 사도들은 예수에 대한 이야기나 복음에 대하여 글로 남기려는 생각이 보이지 않은 것 같다.
그들은 초대 그리스도교를 선교하는데 설교내용도 원고가 아닌 구전적인 점으로 보아 그 당시는 문헌적인 야심은 엿 보이지 않았다.
그것은 무식해서 쓸 능력이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예수님과 제자들은 분명히 글을 읽고 쓸 수 있는 분들이다. < 요 7 : 15 - 행 4 : 13- >
2.구전시대
ㄱ.하나님의 말씀을 기록으로 남기지 않은 이유는?
ㄴ.그들에게는 익숙한 구약 성경이 있었다.
그래서 초대 교인들에게는 예수의 출현과 생애를 예언한 구약성경이 있었기 때문에 구약을 잘 연구하면 예수님에 대한 기사도 발견할 수 있으리라 믿었고 구약을 단순한 유대교의 성경으로만 생각지 않고 그리스도의 문헌으로 생각하여 별달리 그리스도적 문헌을 만들 필요를 느끼지 아니했다.
ㄷ. 문헌 보다 구전을 중시했다.
그 당시에는 문헌보다 구전을 중시여겨 예수님이 세상을 떠나신 후에도 예수와 친히 교제하며, 그의 가르침을 직접 받은 사람들이 많이 살아있을 뿐 만 아니라 예수님께 대한 기억이 새로웠기 때문에 서로 만나서 예수의 생애와 교훈을 생각하고 이야기 하는 것으로 큰 만족을 느꼈다. 요약하면 유대인들은 구전을 문헌보다 중히 여기는 습관이 있었다.
ㄹ. 종말사상으로 문헌의 불필요성
예수께서 곧 오시면 세상의 끝날이 올 것을 확신한 그들에게는 책을 쓸 생각도 문헌의 필요성도 느끼지 않았다. 그래서 초대 교회는 십여년 동안 아무런 글도 없이 예수의 사적과 교훈을 입으로 증거 하였고 따라서 마음속에 살아 계신 그리스도의 영적 지도만으로 만족해 했다.
3. 문헌시대
<로마의 박해로 인해 증인의 감소로 문헌의 필요성을 느낌>
세월의 흐름에 따라 교회안에서 일어나는 어려운 문제들을 단순한 구전 방법으론 쉽게 해결될 수 없게 되고 또한 복음이 널리 전파되므로 새로운 신자들이 날로 증가되어 많은 지도자가 요구되는 반면 제자들과 그 밖의 예수를 친히 뵙고 교훈을 받은 사람들은 로마의 박해로 널리 흩어지고 수효는 점차 감소됨에 예수의 교훈을 듣기가 어렵게 되자 교회 지도자들은 각지에 산재한 교회의 당면 문제를 해결하고 박해 중에 고통 받는 신도들을 격려하기 위하여 자연히 편지를 쓰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밖으로는 박해가 안으로는 이단 사상이 나타나 선량한 교인들을 위협과 미혹으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왜곡시켜 교회를 어지럽히는 무리가 나타나게 되어 이단 사상을 막기 위한 글을 써야할 필요성을 느껴 문헌 시대는 자연적으로 시작 되었다. 문헌 시대가 빨리 이루어지게 촉진 시킨 이유를 간략히 말하자면,
ㄱ. 이단 사상을 배격할 논문이 필요해서 써야했다.
ㄴ. 교인들의 신앙을 위해 썼다.
ㄷ. 젊은 전도자 훈련을 위하여 교재를 써야 했다.
이러한 조건들에 의해 구전 시대는 문헌 시대로 변천 하게 되었다.
4. 이 시대에 기록된 문헌들
= 이 시대에 어떤 문헌들이 기록 되었는지 살펴보자.
ㄱ. 바울 서신
여러 가지 이론이 있으나 신약 성서안에 있는 책들 가운데 바울 서신들이 먼저기록되었다고 볼 수 있다.
바울은 열렬한 사명감을 가지고 소아세아, 마케도니아, 희랍, 로마등 여러 지방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 각 지방에 교회를 설립하였으며, 할 수만 있으면 친히 방문하여 여러 신도들을 격려하고 싶었지만 형편이 여의치 못하게 될 때 편지로서 교회를 지도하게 되었다.
ㄴ. 순교문학 = < 박해를 참아라 >
그리스도교에 대한 박해는 처음부터 있었으나 베드로가 노년에 이르렀을 때 로마 제국은 가혹한 박해를 시작했다.
그래서 베드로는 로마제국의 여러 지방에 산재한 신도들에게 주를 바라보고 박해를 참으라는 희망의 글을 보낸 것이 베드로서 이다.
바울과 베드로가 순교한 후에는 로마제국의 박해는 그대로 계속되어 로마에 있는 신도들은 더욱 불안을 느낄 때 마가는 최초의 복음서를 기록하게 되었다.
이 마가복음은 신도들로 하여금 순교정신을 유지하도록 격려하기 위하여 세상죄를 지시고 십자가에 죽음을 당하신 대 순교자 예수그리스도를 묘사하였다.
마가복음이 나온지 약 15년 후에 도미시안 황제<81∼96>의 박해가 시작되매 성도들의 신앙이 또다시 흔들리기 시작하자 이러한 신앙 위기를 구하기 위하여 한 무명의 인사가 히브리서를 기록했다.
이 서신은 그리스도교의 최초의 변증문 이라고 불수 있다.
도미시안 황제의 박해는 말년에 더욱 심해졌는데 그것은 신도들이 황제에 대한 예배를 거절한 까닭으로 황제의 미움을 받게 되어서 였다.
전설에 의하면 이때 반모섬에서 귀양<유배> 중인 요한이 박해중에 있는 소아세아 여러 교회에 회람 편지를 보내어 예수그리스도와 사탄의 싸움 틈바구니에서 고난을 받아도 최후에는 그리스도가 승리하여 끝까지 충성한 신도들에게는 영광스러운 신천지가 전개 되리라는 것을 기록한 것이 요한 계시록 이다.
ㄷ. 역사문학
예수께서 세상을 떠나신지 반세기가 지나도록 체계 있는 예수의 전기가 없기 때문에 의사 누가는 지금까지 나타난 여러 자료를 수집하여 저술자 적인 태도를 가지고 이방인 들을 위하여 아름다운 예수전을 저술한 책이 누가복음이다.
누가는 로마제국의 박해가 계속됨으로 다시 붓을 들어 그리스도교가 발전한 역사를 기록하여 세계적인 종교임을 명백히 하고 그리스도교가 로마 정부와 대립되는 종교가 아니라는 사실과 로마정부의 관헌들이 그리스도교 운동의 지도자 바울을 매사에 보호해준 사실을 지적하여, 정부의 환심을 끌기 위하여 기록한 책이 사도 행전이다. 그래서 누가복음의 속편이라고 볼 수 있다.
ㄹ.요한 문학
초대 교회에는 외부의 박해로 인하여 고통을 받을 뿐 아니라 내부의 이단 사상으로 인하여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특히 노스틱 주의자들은 그리스도가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셨다는 것을 부인하고 환상으로 오셨다는 주장으로 그리스도 교회의 신앙을 왜곡시켰다. 이에 대비하여 희랍사상의 영향을 받은 요한은 영원하신 그리스도의 확신 즉 그리스도가 육신을 입고 오신 사실을 믿어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강조하는 글을 기록한 것이 요한 복음과 요한 서신들이다.
ꁁ.그 밖의 서신들
야고보는 신도들이 바울의 자유주의 혹은 신앙지상주의를 오해하여 행위를 경솔히 여기는 경향을 바로잡기 위해 종교생활의 윤리면을 강조하는 편지를 썼고 베드로와 유다는 이단자들의 불규칙하고 무질서한 생활로 교회를 어지럽게 하는 것을 경계하기 위하여 각각 쓴 편지가 주후 50-100년 동안에 기록된 책들인데, 이 책들을 다음에 언급한다.
지금의 신약에 수록되어 있는 책들은 많은 책 가운데서 선택된 일부의 책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면 많은 책 가운데 27권만 성경으로 삼은 이유는 무엇이며 또 어떠한 과정을 거쳐서 성경이 완성되었는지 살펴 보기로 하자.
5.신약정경의 성립
衁.정경의 의의
정경을 뜻하는 영어의 캐논이란 말은 희랍어의 카논이란 단어에서 온 말로 이 말의 뜻은 곧은 갈대 혹은 자 란 말로 정규란 뜻으로 사용되어 표준,규칙,법령 등의 의미로 사용되었으며 그리스도교 안에서 사용될 때에는 교회가 제정한 교리 혹은 정통 교부들의 글이라는 뜻으로 해석되어 여러 문헌 중에도 가장 귀중한 책으로 신앙을 위한 규범으로 생각했다.
遁. 정경의 편성사
그러면 이러한 정경은 어떠한 과정을 거쳐서 성립 되었는가.
그 역사를 살펴보면 대략 준비시대, 촉진시대, 완성시대로 구분할 수 있다.
鑁.제1기 준비시대<A.D50-140>
앞서 말한바와 같이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신약의 대부분이 이 기간에 기록 되었으나 즉시로 경전으로서 권위를 가지게 된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하면 전술한 바와 같이 구약 성경을 경전으로 생각하고 있었고 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서는 문서보다 구전을 더 중요시한 까닭에 신약서들을 경전으로 생각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차츰 예수의 교훈을 직접 받은 사람들이 세상을 떠나게 되자, 그들이 남겨 놓은 문헌에 대하여 존경을 표하게 되며 초대 교인들이 예배때에 이 신약서들을 낭독하고 그 다음에 바울로부터 받은 편지를 회중에게 낭독하여 듣게 하는 일이 안식일마다 반복됨에 회중들은 경험에 의해 공감되는 바울 서신을 공독 하는 것을 중요시했고 그 말씀을 듣는 신자들은 경건한 태도로 예수와 바울을 사모하여 그 교훈을 생각하게 된 것이 신약서들을 경전화 하는데 하나의 기초를 이루게 되었다.
鱁.제2기 촉진시대<A.D140-200>
제2세기에 이르러 나타난 이단사상인 노스틱주의 운동이 그리스도 교훈의 문헌을 전경으로 만들도록 촉진하는 하나의 자극제가 되었다.
노스틱주의는 당시 동서양의 모든 사상을 종합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그리스도교의 구원의 교리를 자기들의 사상과 조화시키려는 운동으로 그리스도교의 전통적 신앙에 대한 하나의 큰 위험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회는 이러한 이단사상을 배격하고 정통적 그리스도교의 신앙에 대한 토대가 될 문헌을 결정 지어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리스도교의 정경을 처음으로 제창한 사람은 노스틱파의 지도자인 말시온이다.<140-170> 말시온은 소 아세아 북부 본토 출신인 선주였는데 신학 연구에 투신하였고 140년경부터 로마에 이르러 당시 교회와 분리하여 독자적인 운동을 전개하여 삽시간에 로마 제국안에 이 운동이 퍼져갔다.
그 운동이 교회적인 세력으로 발전하여 백육칠십<160-170>년경 그가 죽은 후에도 세력을 유지했다. 그는 예수와 바울이 철저한 반 유대교주의자로서 구약의 하나님을 배격하였다고 보았고 그는 또 성경 가운데서 유대주의적인 요소를 완전히 제거하는 것이 자기의 사명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복음서 중에서 누가복음만을 선택하고 바울 서신 중에 열권의 책만 추려서 자기의 경전이라고 부르며 그 가운데에도 유대적인 요소라 생각되는 부분은 제거하려 했다. 말시온이 편찬한 성경의 순서를 보면 다음과 같다.
누가복음 갈라디아서, 고린도 전후서, 로마서, 데살노니카 전후서, 나오디게아서<현 예배서>, 골로새서, 빌립보서, 빌례몬서의 순이었다. 그리고 목회서신과 히브리서, 로마서 16장은 빠져 있었다.
이러한 말시온의 경전에 대하여 당시 그리스도 교회는 불만을 느꼈으므로 도저히 그의 경전을 용납치 않았다.
초대 교인들은 그리스도교와 그의 복음은 구약의 예언을 성취한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구약을 제거할 수 없었고 또 그 당시의 교회는 말시온의 편협한 경전보다 더욱 포괄적인 경전을 요구 하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제2세기말에 그리스도 교회는 처음으로 정통적 신앙의 기반이 되는 정경을 발표하게 되었는데 그 당시 그리스도 교회 지도자 였던 이레니우스에 의해 쓰여진 정경은 다음과 같다.
경전을 복음서와 문헌으로 이분한 것이 특징이다.
복음서 = 마태, 마가, 누가, 요한,
사도적 문헌 = 바울서신 12통<빌레몬서 빠짐> 베드로 전서 요한 1.2서 요한계시록, 헬마스서, 솔로몬 지혜서들이다. 그러나 익나시어스의 정경에도 유다서. 야고보서, 베드로후서, 요한3서, 히브리서, 등은 전혀 인용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정격으로 취급 받지 못했다고 생각된다.
ㅁ. 그 밖에 정경의 내용
을 찾아볼 수 있는 귀중한 문헌은 무라토리의 단편인데 이 단편은 라틴어로 기록된 제2세기 말에 속한 단편으로 그 내용은 이레니우스와 큰 차이는 없으나 유다서와 베드로 묵시를 넣고 헬마스서와 베드로 전서를 빼 놓았다.
내용을 보면 2세기 말경에 신약성경의 내용이 정돈되어 가고 있었으나 불확실한 점은 지방과 교회에 따라 정경의 내용이 다소 차이가 있었다는 점이다.
ㅂ. 제3기 완성시대<200-400>
제2세기에 있어 신약 성서의 내용이 대략 결정되기는 했으나 아직도 의심되는 책들이 있어서 완전한 성경으로 합의 되지 못했다.
특히 동방교회에서는 묵시록을 요한의 글로 믿기 어렵다고 거부하는 반면 히브리서를 바울의 것이라고 하여 정경에 넣었고 서방교회에서는 그와 반대로 묵시록을 편입 시키고 히브리서를 제외 시켰다.
이시기에 <340년 전후>역사가 유세 비우스는 신약성서를 다음과 같이 세종류로 분류했다.
衁.확정된 것=4복음 사도행전 바울서신 요한1서 베드로전서 묵시록
遁.의심되는 것=야고보서 유다서 베드로 후서 요한 2,3서
鑁.거부된 것
=바울행적 헬마스서 베드로 묵시 바나바서 12사도 교훈서 요한 묵시 이렇게 점점 정돈 되었는데 제4세기 중엽에 만들어진 시내사본에 나타난 신약 성경의 목록은 4복음 바울서신 14권<히브리서 포함> 사도행전 일반서신 7통 요한 묵시 바나바서 헬마스서 였다.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신약 성서와 같은 내용의 책들을 정경으로 삼은 사람은 알렉산드리아의 감독 아타나 시우스 였다.
그는 376년 부활절 훈시 서신에 4복음 사도 행전 일반서신 7통 바울서신14통<히브리스 포함>요한 묵시록 등을 열거한 후에 이 문헌 들은 구원의 원천이니 목마른 자는 이산 말씀으로 갈함을 축일수 있다고 하였다.
이로서 동방교회에서는 아타나시우스가 요한 묵시를 인정하고 서방교회에서는 제롬과 어거스틴이 히브리서를 인정함으로 동서 교회는 같은 내용의 신약 성경을 가지게 되었고 393년 힘브회의와 397년 갈타고 회의에서 이상 27권의 책을 그리스도 교회의 정경으로 결정하게 된 것이다. 그후 근대에 이르기까지 몇권의 책이 의심 되었고 또 많은 학자들은 신약성서의 각책에 대하여 비판을 가하였으나 그것은 비교적 적은 일부분의 학자들의 의견에 불과하고 그리스도 교회 전체는 변함없이 27권의 신약성서를 하나님
의 말씀으로 애독하여 왔으며 앞으로도 그러하리라 믿는다.
6.신약의 외전
위에서 말한대로 초대교회에서 나타난 문헌들 가운데 특별히 27권만을 선택해서 그리스도교의 정경으로 결정하고 정경안에 들지 못한 책중에도 가치가 어느정도 있다고 생각되는 많은 책들은 외전으로서 존경을 받는다. 그러나 우리 나라에는 불행히도 우리말로 옮겨진 외전들이 없어서 참고는 못되나 대략 다음과 같은 외전들이 있다는 것만을 소개한다.
衁.한때 경전 가운데 들어서 교회 예배 때 사용된 것
클레멘트의 고린도 서신
클레멘트는 <91-100>로마의 감독으로서 바울과 베드로의 동료였으며 사도요한과도 아는 사이 였을 것이다. 그는 사도 요한이 반모섬으로 귀양가던 해에 이 편지를 기록한 것으로 믿어진다. 크레멘트도 마침내 광산으로 유배되었다가 트랴쟌 황제때 순교했다.
遁. 십이사도 교훈집
사도들의 작품이 아니고 어떤 무명의 저자가 사도들의 설교라고 생각한 교훈들을 수집한 것인데 야고보서와 비슷하다.
초대 교인들이 이 책을 경전에 넣지는 못했지만 높이 평가하는 책이다.
鑁.바나바서신
바울의 동역자였던 바나바의 편지라고 볼 수 있으며 특히 유대로 되돌아간 사람들을 상대하여 기록한 이 책은 시내 사본에서 나타났기 때문에 중요시 되고 있다.
鱁.헬마스서
이 책은 외전으로서는 가장 많이 읽혀진 책이며 시내 사본에는 경전으로 포함 되었고 초대 로마 교회의 신앙생활과 사상을 말하고 있는 일종의 천로역정과 같은 책이다.
내용을 구분해보면 이상편, 계율편, 비유편으로 저술 되어서 1부는 저자가본 5가지의 이상을 말했고 2부는 그 당시 그리스도교의 윤리사상을 논하였으며 3부는 낭만적인 전후 관계가 없는 여러 비유들을 나열해 놓았다.
본서는 대체로 묵시록의 형식을 따르고 있으나 실제로 하나의 목회 서신과 같은 책이다.
ꁁ.베드로 복음서
이복음서는 제2세기 말에 시리아 지방의 여러 교회에서 사용되었다. 이 책은 노스틱주의의 영향을 받았다고 공격을 받았으나 시리아 지방에서는 제5세기경까지 민간인들 간에 읽혀졌다.
ꑁ.베드로 묵시
이 책은 베드로 복음서와 함께 애급에서 발견된 것으로 무라토리 사본에는 경전 가운데 포함된 이 묵시록은 요한 계시록과는 달리 사람이 죽은 후에 되어질 상태 즉 성도들이 가는 낙원과 악인들이 가는 지옥에 대한 상태를 잘 묘사하고 있어 그리스도 문학과 특히 중세기의 신학 사상에 큰 영향을 주어 단테의 신곡이 나오게 되었다.
걁.어떤 지방에서만 경전으로 사용된 것.
히브리인의 복음서, 애급인의 복음서, 에비오 나미트 복음서,
둁.출처가 확실치 않은 것.
로마복음 1;-9; 예수탄생 이전 10;-20; 예수탄생 시기 21;-24; 사가라의 이야기 이 책은 예수님이 어렸을 때 행한 여러 가지 이적들을 기록했다.
예. 어린예수는 야고보가 독사에게 물린 것을 고쳐주었고 아버지 요셉이 나무가 짧아서 애쓰는 것을 보고 나무를 길게 늘려준일 예수가 시냇가에서 놀다가 흙으로 새를 만들어 훅하고 불어 날렸다는데 그날이 안식일 이었다.
롁.예수와 아부라루스의 왕복서신
역사가 유세비우스는 에뎃사에서 두통의 편지를 발견 하였는데 하나는 왕이 중병에 걸려 고생하는 중 팔레스타인에서 예수라는 사람이 많은 이적을 행하고 병을 고친다는 소문을 듣고 에뎃사에 와서 병을 고쳐달라는 내용을 예수에게 전한 편지와 이에 대한 예수의 답장, 아부라루스여 나를 보지 않고 믿는 너에게 복이 있을 지어다. 그리고 예수는 유대국을 위하여 오셨기 때문에 그 곳에 갈 수 없으니 제자중 한사람을 보내기로 했다는데 물론 위조된 편지다.
쁁.그밖에 사도행전 유에 속한 것들
바울 행전 베드로 행전 로마행전 안드레 행전 요한 행전 등이다.
7.신약 성서의 본문
衁.신약시대의 언어
팔레스타인은 열강들 틈에 끼어서 상호교섭의 연락지대를 이루고 있었기 때문에 자연히 여러 민족들이 모여들었고 언어도 다양한 형태를 이루게 되었다. 예수님의 십자가 위의 명패가 세가지 말로 쓰여졌던 점이 그때의 사정을 잘 설명 해주고 있다.
遁.히브리어
구약성경은 히브리 말로 기록되었고 예수의 십자가 위에 기록된 히브리 말은 구약성경에 사용된 고전 히브리 말이었다. 예수당시의 유대인들이 사용하던 말은 기원전 5세기경 팔레스타인 토착민들에게서 배운 아랍어 였다.
신약 성경에서는 이 말을 모두 히브리어라고 불렀는데 그것은 이 두 언어가 같은 계통의 말임으로 그랬는지 혹은 유대인들의 자존심에서 나온 일인지 구별하기 어렵다.
구약 성경에 기록된 히브리 말은 신약 시대에는 벌써 죽은 말이 되어 율법학자나 교양 있는 사람들만이 읽을 수 있었고 일반 사람들은 알지도 못하는 글이 되었다.
鑁.라틴어
십자가 상에 씌어진 둘째 라틴어이다. 이것은 정복자의 공용어로서 기원전 63년 품베이어스가 예루살렘에 입성한 이래 팔레스타인에서 사용하게 된 말이다. 비록 이 당시에 헬라어의 세력이 압도적이었으나 신흥세력의 언어로서 라틴어가 등장하였고 황제는 중요한 일에는 언제나 헬라어와 라틴어, 두 말로서 써 주었다.
그러므로 라틴어는 그 당시 정치적 용어라고 할 수 있다.
鱁.헬라어
셋째 말은 헬라어 인데 이 말은 주로 학문과 문화의 언어로서 이미 수세기 동안 동방지역을 지배하고 있었다. 팔레스타인에서도 신약시대는 시장에서 무난히 헬라어가 통용되고 유대교의 지도계급중의 사두개 당파는 철저히 헬라화한 사람들이었다.
8.신약시대의 용지
衁.파피루스
이 시대에는 지금과 같은 훌륭한 용지가 없었으므로 강변에 무성한 파피루스<갈대의 일종>의 껍질을 벗겨 그것을 될 수 있는 대로 엷게 찢어 가로 세로로 펼쳐가며 풀을 발라 무거운 것을 눌러 말린후 조개껍질로 문질러 매끄럽게 만들어서 갈대로 만든 붓으로 먹을 찍어 그 위에 글을 썼다.
遁.양피지
파피루스 용지는 상하기 쉽고 오래 보존할 수 없음으로 제3세기말부터는 튼튼한 가죽으로 만든 용지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 양피지는 그 전부터 있었으나 초대교인들은 빈곤해서 양피지를 사용하지 못하고 파피루스 용지를 사용한 것 같다.
그러나 3세기 말부터는 그 당시에 완성된 신약성경을 영구보존을 위하여 값이 비싼 양피지를 사용하게 되었고 파피루스는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9.신약성서의 사본
위에서도 말한바와 같이 신약성서 저자들은 대체로 빈곤하여 좋은 양피지를 사용하지 못하였고 값싼 파피루스 용지를 사용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하였기 때문에 원본들은 오래 가지 못하고 곧 파손되어 더 읽을 수 없게 될 뿐더러 한 책만 가지고는 여러 교회 신도들이 얻어보기에 많은 불편을 느껴, 자연히 귀중한 말씀을 오래 보존할 수 있고 여러 사람들이 읽기에 편하도록 하나의 원본을 몇 사람이 필기하게 되었고 또 필기한 사본을 다시 필기하는 일이 생기게 되었다.
그러므로 지금까지 남아있는 것은 사도들이 손수 기록한 원본들이 아니라 몇차례 걸쳐 필기된 사본들이다.
지금까지 발견된 무수한 사본들은 여러 가지 형태를 가지고 있다.
그것을 크게 나누면 용지의 성질에 따라 파피루스 사본과 양피지 사본으로 구분하기도 한다. 이러한 사본들의 수는 무려 수천에 달하고 있으나 중요한 사본 몇개만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衁.시내사본 부호 S 또는
이 사본은 독일의 티센돌푸 박사가 1859년에 시내산에서 발견한 것이다.
이 박사는 그보다 15년전인 1844년에 시내산에 와서 어떤 수도원에 머물러 있는 동안 우연히 쓰레기 통에 가득한 양피지를 발견한 것인데, 그것은 불 쏘시개로 쓰려고 모아놓은 것이 였다. 박사는 그것이 상당히 오래된 구약 성경의 사본으로 알고 연구한 결과 제4세기 사본의 단편들 임을 판명하게 되었다.
1853년에 박사는 고대사본의 나머지를 찾으려고 재차 그 수도원을 방문 했으나 찾지 못하고 1859년대 제3차로 방문하여 시내사본을 발견하게 되었다.
박사는 애급 카이로에 있는 신도들의 원조를 얻어 이것을 사서 러시아 황제에게 기증하였다.
그래서 이 사본이 레닌 그라드 박물관에 보관 되었으나 그 후 노동당 정부는 많은 돈을 받고, 영국에 팔았기 때문에 지금은 영국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이 사본에는 구약의 대부분과 신약성서 전부와 신약외 전인 바나바서와 헬마스서가 나타나 있다.
遁.바티간 사본=부호B
이 사본은 제4세기경에 속한 사본으로 현존한 사본중에 가장 유명하고 권위가 있다.
이 사본은 바티칸 도서관 창설 당시<약15세기 중엽>부터 이 도서관에 보관되어 오다 나폴레옹이 이태리 원정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파리로 가져 갔는데 그 가치를 알게 된 후에 바티칸 도서관으로 다시 보내져 현재까지 보관되어 있다.
이 사본에는 목회서신 히브리서 9:14- 빌례몬서 묵시록 등이 없으나 그 밖의 책들은 전반적으로 선명하다.
鑁.알렉 산드리아 사본=부호A
이 사본은 알렉 산드리아에 있었던 것인데 1616년 희랍 정교의 루키로대 사교가 아로스산에서 발견한 것으로 1621년 콘스타틴이 논문을 썼던 것으로 약품으로 원문을 회복시킨 결과 골로새서 디모데후서 디도서 요한2서 이외의 신약성서 전부가 포함되어 있다.
이 사본은 현재 파리 국립 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다.
10.본문의 비판
신약 성경의 원문은 소실되고 초기의 사본들도 파손되어 없어지고 말았다.
이러한 사실은 초대 그리스도인들이 그 내용에 대하여 무관심하거나 흥미를 갖지 못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사용한 파피루스가 본래 파손되기 쉬고 습기와 태양열에 잘 견디지 못해 여러 개의 사본을 만드는 동안 인간의 실수로 많은 착오가 생기게 되었는데 필기중 나타나는 착오를 두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 무의식적인 것으로 잘못쓰거나 빠뜨리거나 중복되거나 난 외에 있는 것을 본문에 삽입하는 일 등이 인쇄기가 없던 천 수백년을 경과하는 동안 여러개의 본문을 가지게 되었다.
둘째 고의로 된 것인데 원문을 쉽게 풀이해서 쓴다든가 필기자가 자기의 말투에 맞는 말로 고치거나 신학적인 설명을 가하기 때문이다.
하여간 성경 본문 가운데는 이러한 일로 많은 착오가 생겼다. 신학 학자들은 원본을 회복하려고 될 수 있는데로 여러 사본을 비교 연구하여 공통되는 본문을 찾으려고 노력하였는데 이것을 가르켜 본문비판이라고 한다.
11.공관 복음서
ㄱ. 공관복음의 문제
신약성서의 처음에 복음서인 마태,마가,누가복음을 일반적으로 "공관복음"이라고 부른다.
이 세권의 복음서는 대체로 보아 동일한 관점에서 예수의 사적을 전하고 있는데 서로 공통되는 점이 많이 있기 때문이다. 몇가지 예를 들면, 예수의 역사를 취급할 때 거의 같은 경로와 순서를 밟고 있다.
세례 요한의 활동, 예수자신의 세례와 광야의 시험, 하늘나라의 복음전파 제자의 선택과 그 교육 및 공동생활, 병치료 교사로서의 활동적 출현과 논쟁 그리고 예수의 수난과 죽음, 부활등 예수의 역사를 취급한 순서뿐만 아니라 그 중에는 사건의 저술 그리고 내용과 서술방법, 문체와 어휘에 이르기까지 같은 점이 많다.
세례 요한의 기사 예수의 세례 광야의 시험 막1:1-15 마3:1-4:17 눅3:1-4:17 베드로의 고백 막8:27-9:13 마16:13-17:13 눅9:18-35 중풍병자에 대한 사죄 선언 막2:1 마9:6 눅5:24 그러면 세복음서의 일치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것은 결코 우연한 일치가 아니다. 만일 복음서 기자들이 각각 독립적으로 제작했다면 세 복음서 사이에 그 같은 일치점은 있을 수 없으며 더구나 예수님께서는 아랍어를 사용하셨는데 복음서는 희랍어로 기록된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공관 복음서 사이에는 일치점이 있는 반면 차이점도 있다.
그 예로 예수의 외적 생활을 마가는 세례요한의 활동부터 기록했고 마태는 예수의 탄생부터 누가는 세례요한의 출생부터 저술했다. 마가복음 중에는 예수의 말씀과 그 비유가 별로 없으나 마태와 누가는 예수의 말씀과 비유가 많이 들어 있다.
마태5:-7:-에 이르는 산상수훈의 기사는 마가는 전혀 없고 누가는 단편적으로 분산되어 6:11:12:13:14:16: 여러 군대 나타난다.
유명한 탕자의 비유와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는 누가복음만 기록되어 있다. 세 복음은 긴밀한 공통점과 차이점을 볼 수 있는데 이같은 일치점과 차이점의 원인 어떤 이유인가?
이 복잡한 문제를 설명해주고 예수님의 역사적인 모습과 그 복음의 참뜻을 파악해 보려고 하는데 세복음에 관한 문제가 있다.
ㄴ. 문제 해결의 역사
이 문제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가지고 학문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한 것은 제18세기부터 시작되었다고 본다.
종래에는 네복음서가 마태,마가,누가,요한 순으로 제작되었고 각 복음서 기자들은 자기의 주장보다는 먼저 제작된 복음서를 참고 하였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세 복음서의 조화에 대하여 말하기를 세 복음서 중에 마태복음이 제일 먼저 기록되었고 마가복음은 마태복음을 간추린 것이며 누가복음은 마가복음을 수식한 것이라고 말하였다.
제17세기에 이르러서 성서 영감설을 주장한 사람들은 세 복음서의 일치점은 복음서 기자들이 같은 성령을 받았기 때문에 나타난 것이라고 하고 차이점에 대하여는 가급적 언급을 피하려 했다. 혹자는 세 복음서 기자들은 다같은 사실을 목격 하였기에 공통점을 이루게 되었고 차이점에 대하여는 저자가 달랐기 때문이라고 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설명으론 세 복음서 사이에 있는 문장과 문체용어까지 일치된점 또는 어느 복음에는 기록되어 있고 다른 복음서에는 빠져 있는 기사에 대한 충분한 설명이 될 수 없다.
그래서 제18세기 이후부터 복음서 연구에 대한 새로운 방법을 사용하게 되었는데 그것이 곧 역사적 비판이다.
이 방법이 나타나자 지금까지 주장되던 모든 가설은 여지없이 무너지게 되었으나 그것을 대신할 새로운 학설은 오랜 세월이 걸려 새로운 가설이 나오게 되었다.
ㄷ. 원 복음 가설
이 학설은 1794년에 아이히홀른씨가 주장한 것으로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복음서가 기록되기 이전에 하나의 원시 복음서가 있어서 세 복음서 기자들은 각각 이 원시 복음서를 근거하여 현재의 복음서를 기록하였기 때문에 상호간에 일치점이 있게 되고 차이 점은 각자에게는 구전 자료가 있어 그것을 활용 한데서 이루어 졌다.
ㄹ. 구전설
이 주장은 유명한 교회 역사가였던 기슬러씨가 1818년에 처음으로 발표한 것인데 세복음서 기자들이 공동으로 사용한 자료는 문서가 아니라, 다시 말하면 초대 교회 내에 구전으로 내려오는 예수의 사적과 교훈을 마태마가 누가가 기억할 수 있는 대로 기록한 것이 공관 복음이라고 하나 이 학설은 초대 교회 안에 예수의 사적과 교훈이 구전되어온 것은 사실이나 공관 복음서 안에 똑같은 구절 들이 있는 것과 문체까지 같은 것들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공관 복음이 구전만으로 기록 됐다고 할 수는 없다.
ㅁ. 단편설
이 학설은 유명한 신학자 슈라이엘 마헬씨가 1817년에 그의 저서 누가전에서 발표된 원시 복음서 설 주장과 달리 슈라이엘 마헬씨는 공관 복음서 이전에 몇개의 단편들이 있었는데 그 단편들을 다소 확대 편찬한 것이 공관 복음서란 주장이다.
ㅂ. 마가 복음 우선설
1835년에 이르러 라하만은 공관 복음서 중에서 마가복음이 제일 먼저 기록 되었을 뿐만 아니라 마가복음은 마태와 누가의 기본자료중 하나였다는 학설을 주장하여 신약 학계의 찬의를 얻게 되었다. 그래서 마가복음을 기본 복음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둘째 마태 누가복음 속에는 마가복음 이전의 전부가 포함되어 있다는 점. 셋째 마태 누가복음은 마가복음의 문체보다 세련되어 있다는 것들이다.
ㅅ. 두자료 설
대다수 학자들은 마가복음이 마태 누가복음보다 먼저 기록되어 두복음의 기초가 되었다는 것을 인정은 하나 마태 누가복음서에서 마가복음의 자료를 제하고도 약200절 가량의 자료를 찾아볼수 있다. 다시 말하면 마가복음에 없는 같은 기사가 마태의 ⅓과 누가의 ¼을 찾아볼수 있는데 이 부분은 다른 자료를 마태 누가가 사용한 것이라 볼 수밖에 없다. 그래서 학자들은 제2자료 혹은 Q 라고 부른다. 이 자료에는 예수의 사적보다 교훈이 많이 포함되어 있어 이것을 예수어록 이라고도 하나 Q 라고 간단히 부르기도 한다.
ㅇ. 마태독자의 자료 M
위에서 말한 두자료를 가지고 세복음을 형성 했다고 보는 것이 제2문서설의 골자이다. 그러나 마태와 누가가 각각 단독으로 사용한 자료가 있으리라는 것은 일반적으로 인정된 사실이다. 맥나일 박사는 마태복음의 기록된 예수의 교훈에서 세가지 형태를 찾아볼수 있는데 첫째 누가복음에 기록된 것과 비슷하기 때문에 Q로부터 왔다고 보는 것과 둘째 전혀 독자적인 것들이다. 그러므로 셋째의 것은 마태의 독자적인 자료 M이고 둘째 것은 M과 Q를 뒤섞은 것으로 볼 수 있다. 예로는 M자료에 숨겨진 보화 진주일만 달란트 빗진 자 포도원의 싹군 산양과 면양을 갈라 놓은 비유 등이다. 그리고 M과 L이 혼합된 것은 잃은 양 혼인잔치의 비유이며 Q로부터 온 것은 씨뿌리는 악한 농부 계자씨 비유 등이다.
ㅈ. 누가복음 독자의 자료L
누가는 마태와 같이 여러 자료를 혼합한 일이 적고 오히려 이것을 서로 연결하는 방법을 사용했기 때문에 그의 독자적인 자료를 식별하기가 마태복음 보다 용이하다. 실 예로 누가복음에 나타난 예수의 어린시절 이야기<1:-2:>는 누가의 독특한 것이며 마태복음의 것과는 다른 점이 많다. 그리고 3:13-이하에 기록되어 있는 예수의 족보도 마태복음에 나타난 것과는 많이 다르다.
지금까지 설명한 것을 그림으로 그려보면 다음과 같다.
12. 제 4 복음
ㄱ. 공관 복음서와의 관계
공관 복음서의 목적은 예수의 행적과 보훈을 그 순서대로 서술하여 역사적 예수전을 만드는데 있었고 요한 복음의 저자는 역사적인 예수전을 목적으로 하지않고 예수를 고정된 영원하신 신격으로 추앙하고 그를 대하는 인간의 태도를 서술하므로 공관 복음과의 현저한 차이를 가지게 된다. 그러면 공관 복음과 요한복음의 차이점을 보기로 하자.
요한복음에는 서론에 로고스 론이 나와 있어 그리스도의 선재가 강조되고 이어서 가나안 혼인 잔치 니고 데모와의 대화 나면서 부터 소경된 사람 선한 목자등이 요한 복음에만 있는 기사이다.
예수께서 활동하신 시기와 장소도 요한복음은 공관복음과 다르다 공관 복음에 의하면 예수의 활동 무대가 주로 갈리였고 예루살렘에는 한번밖에 올라가지 안했으나 요한복음에는 네 차례나 올라가신 것으로 되어있을뿐 아니라 예루살렘이 활동 중심지로 되어 있다.<요2:13-5:1-7:10-12:12>.-
ㄴ. 공관 복음에 보면
예수의 공적 활동이 1년에 불과했다고 보이는데 요한복음에는 적어도 2-3년간의 활동한 것으로 되었으며 공관복음서에서는 활동하신 때와 처소를 분명하게 전하지 못하고 예수의 고난의 날을 요한은 나선월<1월 14일>이라고 말하였으나 공관복음에는 15일이라고 만 하였고 마리아가 값비싼 기름을 예수의 발에 부은 것도 요한에 의하면 유월절 6일 전이었으나 마가에는 이일전 이었다.
그리고 예수님이 십자기에 못박힌 시각도 마가는 제3시로 기록되었다. 요한은 제6시로 기록하였다. 요한 복음에는 공관복음에서 볼수 없는 사람의 이름이 나타나 있고 요18:10-에는 베드로가 칼로 말고의 귀를 베었다고 했고 마가의 14:47-에는 말고의 이름이 없는 것이 다르다.
이같은 차이는 요한복음의 저자가 목격자 였기 때문에 자신의 목격한바를 더 정확하게 기록했을 것이다. 그리고 요한은 공관복음서의 기자들과는 달리 색다른 각도에서 예수의 초상을 묘사하였고 역사적인 사실에 대한 해설을 하고는 있으나 역사이상의 진리를 밝히는데 더 힘을 기울렸다.
ㄷ. 요한복음의 통일성
요한복음을 읽어 나갈때 문장의 연결이 잘되지 않는 것을 느낀다. 그래서 학자들 간에는 요한복음 저작 당시의 모습 그대로가 아니라 많은 변경이 생겼을 것이라고 하며 요한복음은 처음부터 단일한 저작이 아니라 여러가지 저작을 규합 시킨 것이라는 이론도 있다. 그래서 요한 복음의 통일성에 문제가 나타나는데 그 연유를 살펴보면 요7:53-8:11-에 나오는 간음한 여인의 기시는 전후 관계가 자연스럽지 못하며 내용과 문체 그리고 사상적 경향이 비요한 적이며 믿음성 있는 몇사본에는 그 부분이 들어 있지 않다. 학자들은 요21:-전체는 원저자의 저작이 아니다라고 확신하고 있다. 요한복음은 원래 20:30-에서 끝났을 것이다. 왜냐하면 요한 복음은 20:31-에서 이 복음서를 기록한 목적을 말하고 글을 맺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그리고 21:24-을 보면 20:까지의 저자를 제삼자의 입장에서 말하고 있다.
아마도 요한이 늙은 뒤에 복음서를 저작했거나 생존시에 펴내지 못했다가 요한이 죽은 후에 제자들이 그 기사를 첨부하여 펴낸 것이 아닌가 한다. 이것이 오늘날 많은 학자들의 주장이며 여기에서 가필설이 나오게 되었다. 그래서 요한 복음에 가필설과 전치설 문제가 되고 잇다.<가필설 전치설>(加筆說 轉置說). 다시 말하면 요한복음의 본문은 저작당시의 원상태로 보존되지 못하고 그 전후가 바뀌었다는 말이다. 요한 복음기사가 군데군데 단절되어 있는 사실을 볼 수 있다.14:31-과 18:1-을 연결시키고 5:과 6:은 그 순서를 바뀌게 된 것을 본문의 페이지가 우연히 바뀌거나 후세에 편집인의 오해에서 이루어 진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러한 가필과 전치가 있었을 지라도 요한복음은 하나의 통일성과 통일된 정신이 흐르고 있는 아름다운 예술품이라고 볼 수 있다.
13. 로마인서
1.로마에 교회가 언제 누구에 의해 설립되었는지 확실치 않다.
바울은 설립자가 아니며 베드로도 않인것 갔다. 그 이유로는 로마에서 베드로의 기사가 한마디도 없는 점이다. 만약 베드로가 그곳에서 전도 했다면 본서와 같은 편지는 필요치 안했을 것이고 그리고 바울이 처음에 로마 전 도시에도 베드로에 대한 언급이 없었다. 그러나 어떤 학설에 의하면 베드로가 로마에 교회를 설립하고 25년 동안 감독으로 있다가 바울과 함께 순교했다는 학설이 있으나 확실한 증거가 없다. 그러면 로마 교회는 누구에 의해 세워 졌을까 본서에서 보면 로마에는 상당히 일찍부터 많은 유대인들이 살고 있었고 그 사람들이 로마로 부터 온 유대인들이 오순절 날에 은혜를 받고<행2:10->다시 로마로 돌아가 그리스도교를 전했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스데반의 순교로 인해 많은 교인들은 동서방으로 흐트러졌는데 이때에 어떤 사도들이 로마에 갔는지도 모른다. 그 당시 로마예배소, 고림도, 안의옥, 예루살렘 사이에는 교통이 번화했다. 그래서 예수의 십자가에 대한 소식도 즉시로 로마에 알려 졌을 것이다. 그렇다면 로마 교회 설립은 바울이나 베드로가 아니라 무명의 평신도들의 설립으로 볼 수 있다. 초기 로마 교회의 발전과정 또한 알수 있는 근거도 없다. 지리적 관계를 보아 급속한 발전을 예측할 수 있다. 그것은 로마 교회에 보내진 서신의 내용을 볼 때 로마교회 수준이 상당히 높은 것을 알 수 있다.
2.로마서를 쓰게된 동기
바울이 로마서를 기록하게된 동기에 대하여는 학자들간에 의견의 차이가 있다. 어떤 학자는 주장하기를 바울이 제3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돌아가려 할 때 바울의 심중에 하나의 불길한 예감이 들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이 이번에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원수들의 음모와 투옥을 당하거나 살해될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 때문에 바울은 죽기전에 자기가 전파한 복음의 핵심을 유언과도 같이 남겨둘 생각으로 본서를 쓰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바울은 본서의 보관 장소를 천하의 중심 도시인 로마 교회가 적지로 생각했는데 그 이유는 그 교회가 우세하여 지는대로 편지의 가치도 중요시 될 뿐만 아니라 자연히 널리 보급되고 오래 보관 될 것을 믿었고 또 로마교회가 바울 문제에 관하여 아무 편에도 가담하지 않았으므로 공정한 입장에서 자기의 유서로 취급하리라고 믿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나 이 주장에 반대하는 사람의 말에 의하면 본서에는 바울이 전파한 복음의 일부분만을 논하고 그 밖의 많은 중요한 사실이 언급 되지 않았다. 그리고 역사적으로도 바울이 고린도에서 본서를 쓸 때 몇달동안 자유로운 생활을 한 것은 사실이나 앞으로 올 운명에 대한 불길한 예감 때문에 유서 형식으로 본서를 썼다기 보다는 오히려 바울의 선교적 대업은 아직도 미래에 속한 줄 믿고 그가 계획한 서방 전도의 서막으로 로마 교인들에게 자기 소개를 위해 기록했다고 본다. 롬 16:은 로마서의 다른 부분과 비교해 볼 때 상이한 점이 발견된다. 그래서 학자들은 그 부분은 로마서에 속한 것이 아니다. 바울은 아직 로마에 한번도 방문한 적이 없는데 16:에 보면 바울은 개개인의 이름을 들어가며 친절하게 많은 사람들에게 안부를 전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으나 15:까지 에는 16:에 나오는 사람들의 이름이 한번도 나타나지 않는 점이다.
16:17-20을 보면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교훈을 거스려 분쟁을 일으키고 거치게 하는 자들을 살피고 저희에게서 떠나라... 일종의 이단 사상을 배격하는 경고가 있으나 본서 내용 중에 이단 사상을 배격하는 말은 딴 곳에서는 한번도 나오지 않는 점이다. 1:-15:에 걸쳐 바울은 로마교회에 대하여 온화한 표현을 썼는데 이곳에서만 <16:17-20>돌연히 준엄한 배격문을 쓴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15:32-33> 끝절에 보면 나로 하나님의 뜻을 쫓아 너희와 쉬게하라 평강의 하나님 그래서 16:은 로마서에 속한 부분이 아니라 그 부분은 예배소서에 속한 것이라 보는 학자들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바울은 전도 여행중 예배서 교회에서 가장 오래 머물러 있었기 때문에 그곳에서 많은 신앙의 동지들을 가졌으리라 추측됨으로 이 부분을 예배소에 속한 부분으로 본다고 한다. 16:3-4로 부리스가와 아굴라에 대한 문안이 있는데 그들은 바울이 제2차 전도 여행때 고린도로 부터 예배소로 이주하였고<행18:>그후 제3차 전도 여행때 바울이 예배소에 와서 3년 동안이나 머물러 있을 때도 그들은 함께 있었을 뿐 아니라 자신의 집까지도 예배 장소로 빌려준 일이 있다. 고전 16:19-에 바울이 로마서를 쓰게 된 것은 그후 불과 1년 후였다.
롬 16:5- 아시아에서 그리스도께 처음 익은 열매라고 예배네도에게 문안 한 것을 보면 예배서에 보내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롬 16:17-에 이단자란 공격을 예배서 교회에 대한 경고의 말이다. 이런점 등으로 보아 로마서 16:은 에베소 교회에 보내진 서신의 한 토막이라고 본다.
14.고린도전서
ㄱ.고린도서와 고린도교회
고린도는 상업 또는 교통상의 요지로서 유명할 뿐 아니라 문화적으로도 손색이 없는 도시로서 많은 철학자와 수학자들이 빈번하게 출입하였고 각종 운동 경기가 성행하였으며, 여러 종교들이 각지로부터 들어와 이도시안에는 유명한 쎄라피스 신전 이시스 선전 앞으로 디테신전 들이 설립되어 거의 만명의 창녀들이 이 신전들을 봉사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고린도시는 향락과 음란의 도시로 유명 했다.
바울은 이같은 도시를 방문하여 교회를 세우고 복음의 씨를 뿌렸는데 고린도 교회 신도들의 대부분이 이방인들이며 일부부유층과 지식층의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대개가 서민층이었다. 그리고 고린도 교회의 특징은 희랍 문화의 영향을 받아 현실적으로 윤리적 생활을 등한이 하여 희랍인들과 같이 개인주의적이고 분열과 분파적인 경향이 많았다.
ㄴ.고린도 전서를 쓰게 된 동기
고린도에서 일년 반을 지낸 바울은 그곳을 떠나면서 해로로 수리아 안디옥 갈라디아 부르기아를 거처 다시금 예배소에 도착하여 거기서 3년을 <AD52-55>머무르면서, 복음 전선에 종사하게 되었다. 행<19:1-41> 예배서 전도는 매우 분주한 시기였다. 바울은 잊지 않고 고린도 교회를 염려하며 그곳과 연락하며 교회안에 부도덕한 사람이 있어 교인들에게 나쁜 영향을 받을까 염려하는 마음에서 한장의 편지로 교인들에게 권면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지금까지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이 편지가 실제로 보냈다는 사실이 고전 5:9-에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이 음행하는 자들을 사귀지 말라 하였거니와.... 라고 기록된 사실에서 분명히 명시되었다. 그 후에 바울은 다시금 고린도로부터 온 글로에집 사름을 통하여 고린도 교회에 슬픈 일이 있다는 사실을 듣게 되었는데 또 고린도 교회안에 분쟁이 있다는 것과 <고전 1:11->음행의 페풍<5:1->과 신도간에 소송사건 들이다. <6:1->그래서 바울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디모데를 고린도에 파견하게 되었다. <4:17> 그러나 디모데는 에라스토스와 함께 마케도니아에서도 할 일이 있었기 때문에 <행19:22-> 디모데가 고린도에 도착하는 것이 좀 늦어지리라 예상하고<고전16:10->불안을 느끼게된 바울은 우선 고전도 교회에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바울은 이전에 보낸 편지에 대한 오해를 풀어 주는 동시에 당파싸움 음행 사건소송 사건 등을 경고하는 편지를 쓰기 시작 한 것이다.
바울이 미쳐 편지를 마치기도 전에 또다시 고린도 교회로부터 스테바나 보드나도 아가이고 이 세 사람이 예배소에 도착되어 바울에게<고전16:17-> 전달된 내용은 주로 교회의 여러 문제에 대한 바울의 해답을 요구하는 것이다.
고전 7:1-7:25-8:1-12:1-16:1-16:12-등의 구절에서 추적할 수 있다. 바울은 그밖에도 그들로부터 직접 더많은 것들을 듣게 되었는데 그 내용은 고전 16:17- 11:2-16 11:18-이하에 나타나 있다. 바울은 다시 붓을 들어 질문에 대답하고 그들을 바르게 훈계하려고 고린도 전서를 쓰게 되었다. 그래서 1:6:까지는 처음 글로에집 사람과 다른 사람으로부터 들은 고린도 교회의 문제에 대하여 경고로 쓰고 7:-16까지는 고린도 교회로부터의 질문서에 대한 해답과 교훈으로 이루어졌다.
15. 갈라디아서
ㄱ. 갈라디아서를 기록하게 된 동기
바울이 갈라디아에 전도하게 된 것은 병 때문에 <갈4:13-> 건강을 위하여 휴양차 갔다가 우연히 되어진 전도였다. 그러나 이때 여러 신도들은 바울에 대하여 매우 존대하고 환영의 태도를 취했다<갈4:13-15>그래서 그는 그 후 에도 또다시 그곳을 방문하여 여러 교회에게 문안하였다. 그런 사실로 보아서 바울과 갈라디아 교인들과의 관계는 매우 친밀한 관계임을 알 수 있는데 왜 이같은 우호적인 교회에게 본서와 같은 논쟁적이고 분노에 가득찬 투쟁문서를 썼을까? 바울은 이 편지를 쓰기 위하여 필사적인 노력과 각오 그리고 대단한 열정이 필요했을 것이다. 이 편지의 지필 동기는 위기에 처한 복음의 자유를 수호하고 나아가서는 자신의 사도직에 대한 변명의 필요를 절실하게 느낀 때문이다 바울이 갈라디아를 떠나 수리야 안디옥에 돌아오자 유대로부터 온 사람들이 형제들에게 할례를 받아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하고 또 바울의 사도직을 비방하는 등 역 선전을 한 것이다. 이들은 예루살렘 교회를 중심으로한 지도자들이며, 바울에게 대하여 좋지 않게 생각하고 있었던 사람들이였다. 이들의 선전 선동은 대단한 효과를 얻자 갈라디아 교인 가운데 지금까지 존경했던 바울의 사도직과 그가 전하는 복음에 대하여 유혹을 품고 등지는 사람들이 나타나게 된 것이다. 이처럼 급속히 변화되는 사태는 뜻밖의 일이 였으므로 바울은 크게 격분하게 되었다. 이런 선동은 갈라디아 교회의 위기 일뿐 아니라 복음과 그리스도 교에 대한 도전으로 보고 바울은 즉시로 붓을 들어 율법주의 운동을 막기 위하여 본서를 기록하게 되었다.
참고서적
전경련,지동식,김용옥,김철손 공저.신약성서 개론.대한기독교서회.1960.서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