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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에서의 영성식별 유 해 룡(장로회 신학대학교 교수/영성신학 전공) |
영성적인 식별을 해야할 이유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전하시는 말씀이 매우 다양하고 모호하고 불확실하게 느끼기 때문이다. 이것은 하나님 말씀 자체에 모호성과 불확실성이 있다기 보다는 우리의 영혼이 완전하게 열려져 있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제한적으로 들을 수 있다는 의미이다. 그 한계성을 보완하고 보다 명확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응답하기 위해서 식별적인 작업이 필요하다. 신약성서에서 가장 탁월하게 식별적인 삶을 보여하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예수님은 식별의 과정을 통해서 당신 자신의 정체성과 사명을 인식해 갔다. 예수님의 식별은 오류가 없는 완전한 것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식별의 완전성이란 그의 존재의 완전성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생각한다면 그 식별에는 어떤 의미를 부여하기 어렵다. 즉 예수님은 마리아의 태에서 태어날 때부터 이미 완전한 존재였기 때문에 모호성과 불확실성을 감수하면서 식별을 할 수 없다고 한다면 예수님의 식별은 여기서 더 이상 논할 가치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완전성으로부터 모든 실체가 이미 자명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입장은 예수님의 인간적 경험을 전해 주고 있는 성서의 가르침과는 일치하지 않는다.
마 4:1-11 이나 눅 4:1-13에서 예수님은 공생애 초기부터 세 번의 시험을 묘사하고 있다히 4:14-16절서도 그 시험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여기서 예수님은 대제사장이시지만 시험을 받으셨고 계속해서 주님은 연약의 한계성을 경험하면서 살았기 때문에 무지하고 불확실한 미래를 사는 사람들과 공감할 수 있다(히 5:2)는 말이다. 히 5:8-9절은 왜 그가 시험을 받으셔야 했는가를 명확히 하고 있다. 즉 순종을 배우고 온전하게 되기 위해서라고 했다. 여기서 우리는 인간 예수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눅 2:52절에서 그는 "키가 자라고 지혜가 자라가면서 하나님과 사람에게 사랑스러워지더라"는 말씀이 있다. 어떻게 처음부터 완전한 자에게 '자라간다'라는 표현을 사용할 수 있겠는가? 마 26: 36-46절은 불확실성과 의혹에 시달리는 예수님의 겟세마네 동산의 경험을 묘사하고 있다. 요 12:27절에서는 요한이 신성이신 예수님을 말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가 자신의 정체성과 사명의 인식이 점점 자라가고 있다는 암시를 받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의 신성 자체가 점차로 자라났다라는 말은 아니다. 그것은 왕손(王孫)으로 태어난 아이가 처음부터 왕의 피를 타고났지만, 점차로 자라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분명하게 인식해 가는 것과 같은 의미로 설명할 수 있다. 성서는 분명히 말하기를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지만 동시에 마리아의 아들이다. 인간의 아들로서 그는 지혜와 은혜로 자라갔고, 고난을 통하여 순종을 배워갔다.
그의 신적인 의식에 있어서는 영원한 진리를 파악하고 있었지만, 인간의 의식에 있어서는 우리처럼 자라갈 수밖에 없었다. 예수님이 완전한 인성과 완전한 신성을 겸하고 있었다는 것에 대해서는 이해 불가능한 일이지만, 신성이 인성을 완전히 삼켜버렸다고 말할 수는 없다. 칼케돈회의에서 결정된 신조에 따르면 예수님은 '신성에 있어서 아버지와 동일본질이시고 인성에 있어서 우리와 동일본질이시나 죄를 제외하고 우리와 똑같다'라고 한다. 그러므로 그가 완전한 인간적인 측면에서 또 다른 위격인 신성을 자각하고 또한 메시아로서의 정체성을 확인하기까지 우리 모든 인간이 겪는 식별적인 과정을 거쳐야 했을 것이다. 예수님은 갖가지의 사건과 일들과 내면의 움직임 등을 식별하면서 정체성이나 사역의 모호함으로부터 점차적으로 완전한 확신에 도달하였다. 단지 그의 식별이 오류가 없는 완전한 것이었다고 하는 것은 신성의 덕분이 아니고, 그의 인간성이 하나님의 영에 의해서 완전한 인도를 받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이 기준으로 삼았던 하나님의 뜻에 대한 식별의 원칙은 무엇인가? 예수님의 식별의 보편적인 기준은 '수난과 죽음'이었다. 수난과 죽음을 거부하는 어떠한 것도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위협으로 생각했던 것같다. 그렇기에 그러한 이들이나 사건이나 행동은 거부하셨다. 예를 들면 베드로가 예수님의 죽음을 만류했을 때 그의 행동과 생각을 거부하는 표시로 그를 사단이라고 일컬었다(막 8: 31-35).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이 영광 중에 임할 때 자신의 형제들을 좌우편 자리에 앉게 해달라는 요청을 거부하실 때에도 예수님의 식별원칙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예수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신 후에 백성들이 예수님을 왕으로 삼으시고자 할 때에 예수님은 혼자 산으로 떠나가셨다고 기록하고 있는데(요 6: 15), 이 때에도 예수님은 식별과정이 필요했던 것이다. 세 번의 시험과정에서도 예수님의 식별원칙은 분명했다. 자아부정, 자기포기, 수난, 대속의 죽음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처음부터 이 원칙이 세워졌다고 할 수는 없다. 성부 하나님께 순종하려는 열망과 세심한 식별과정을 통하여 점차적으로 분명한 식별기준이 세워졌을 것이다.
이제 제자들의 식별과정을 살펴보자. 예수님의 식별에는 실패와 오류가 없었다. 그러나 성서는 제자들의 실패한 식별의 예를 거듭 보여주고 있다. 이미 위에서 보여준 예인 야고보와 요한이 자기의 마음에서 꿈틀거리는 욕망과 생각들을 제대로 식별하지 못하고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려 할 때 문제를 야기시켰다(막 10:35-40). 한 부자 청년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수용하는데 실패한 것도 역시 영성식별의 문제였다(마 19:16-22). 한 여종에 의해서 베드로가 예수님의 가장 측근이라는 사실이 공개되었을 때 그것을 처리하는 방식에서도 식별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러나 베드로는 자신의 안정과 생명의 두려움으로 인해서 진실이 가려져 결국 올바른 식별을 할 수 없게 되었다. 갖가지의 장애물 즉 욕망, 재물에 대한 관심, 생명의 안전에 대한 집착등이 제자들로 하여금 예수님의 인격과 사역의 진실한 면모에 대한 식별을 어둡게 하고 혼란케 했다. 이것은 우리의 식별작업이 언제나 자연스럽지 않다는 것을 들어준 예들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식별이 언제나 무류(無謬)일 수 밖에 없었던 것은 그는 본성상 죄가 없었기에 부적합한 애착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으며 완전한 성령의 인도를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제자들은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었으나 하나님만을 사랑하는 일에 실패했다. 마 16: 13-23 에서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향하여 교회의 반석이라고 칭찬하시면서 동시에 순간 사단이라고 불렀던 것은 인간의 자의적인 식별은 언제가 오류가 있을 밖에 없음을 상기시키는 사건이다.
복음서에서 가르치고 있는 식별의 기준은 그의 가르침이나 사역 그 자체 뿐만 아니라 더 근본적인 것은 예수님 자신과 그의 인격적 임재를 통해서 얻어진진다. 예를 들자면 예수님의 가르침인 팔복(beatitude)은 단순히 어떤 사람은 부하기 때문에 저주를 받은 자이고, 또 어떤 사람은 가난하기 때문에 복을 받을 사람이라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인격과 그의 사역에 참여함으로서 진정한 가난이 무엇인가를 경험하게 된다. 이것은 예수님이 가르친 윤리적인 차원을 뛰어넘는 인격적인 만남의 차원이다. 즉 예수님의 가르침은 개념의 문제가 아니고 예수님을 경험함으로서 얻어지는 경험적 지식이다. 예수님을 만나는 그 지점에서 진정한 식별의 기준이 세워진다는 의미이다. 베드로의 영성식별의 과정 중에서 요 6:68-69를 예로 들 수 있다. 생명의 빵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이 받아들이기가 어렵기에 대부분의 제자들은 예수님을 떠나갔다. 그 때 예수님은 열두 제자들을 향하여 너희도 떠나가겠느냐고 물으신다. 제자중 베드로는 "주여 당신이 영생의 말씀을 가지고 있는데,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겠나이까? 우리는 당신이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인줄 알았나이다"라고 말한다. 사실 베드로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선택한 것이라기 보다는 예수님 자신을 선택한 것이다. 반면에 요 6장에서는 백성들이 예수님을 좇기는 했으나 그 식별에는 실패한 예를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예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 보다는 사역에서 나타나는 그 결과에 집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그 실패의 사실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요 6:26). 여기서 백성들이 식별할 대상은 빵의 문제가 아니라 표적이었다. 그 표적은 사역이 아니라 예수님 그 자신이며, 그것은 곧 인격적인 만남의 문제였다. 사도행전의 오순절의 성령체험이 바로 원숙한 식별의 근본을 제공하고 있는데, 그것은 나타난 능력이 아니라 인격체이신 성령을 만남이요 동시에 그리스도 자신을 만나는 체험적 지식의 획득이다.
2. 서신서 안에서의 영성식별의 원칙
서신서에서의 식별의 가장 중심된 주제는 예수님의 가르침이나 그 윤리적인 평가라기 보다는 예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에 있다. 예를 들어 마하트마 간디는 인류역사상 가장 고상한 윤리적 가르침을 복음서 안에서 발견했다라고 했다. 그러나 그것은 믿음 안에서의 인격적인 만남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 간디의 이상과 방법은 인간의 합리적인 차원이다. 베드로처럼 믿음 안에서 생명의 주로 고백하는 차원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 사도들이 보여준 식별의 기준을 이런 차원에서 생각해야 한다. 사도들에게 있어서 자신의 정체성이나 사역의 진정성을 가리는 식별 기준은 바로 예수님 자신이었다. 요일 1: 1절에서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고 성육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내적인 체험을 의미한다. 여기서 감각의 눈은 인간 예수를 본 것이요, 사랑으로 가득찬 내적인 눈으로는 빛되신 하나님을 본 것이다. 그에게는 전혀 어두움이라고는 없었다. 예수님을 육안으로 경험하지 못한 사람일지라도 영에 대한 내적 체험이 가능한데 그것이 곧 진정한 제자의 표징이다(요일 3:24). 그 내적인 경험은 인간의 성향이나 상식이나 그 요소와는 별개로 독립적인 확실성과 빛을 전해 준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처한 '영의 식별'적인 상황을 제시하고 있다. 그것은 외부세계에 의해서 도전받고 있는 비도덕적이거나 비진리적인 요소와의 대결국면이 아니고 내적으로 일어나는 성령의 은사에 대한 바른 식별 문제였다. 이미 바울 시대의 초기 교회는 은사라는 내적인 질서가 그 형평성을 잃고 교회 안에서 혼란을 야기시키고 있었다. 특별히 방언이나 예언의 문제들이 식별의 대상이 되었다. 바울은 그것이 위험하다는 이유로 금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예언이나 방언하기를 금하지 말고 오히려 사모하며 질서를 따라 하라고 권한다(고전 14: 39-40). 반면에 예언할 때 듣는 자는 분별을 하라고 한다(고전 14: 29). 바울은 곳곳에서 고린도 교회의 상황이 매우 식별을 요하는 상황임을 밝히고 있다. 거짓 복음 증거자인가 혹은 참 복음 증거자인가라는 혼란도 교회 안에 있었다. 그 식별기준으로는 그 곳에 희생적인 '사랑이 있느냐'라는 열매적인 측면을 제시했다. 사단도 '광명의 천사'로 가장할 수 있을 만큼 대단히 미묘하지만 그 행위를 자세히 살펴보면 그 열매로서 그의 진실을 알아볼 수 있다는 의미이다(고후 11: 1-15). 성서는 이렇게 곳곳에서 영의 식별의 필요성이나 대략의 원칙을 언급하고는 있지만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수 있는 명백한 규범이나 공식같은 것을 일목요연하게 제시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성서로부터 받은 어떤 원칙과 더불어 성령으로부터 오는 지혜와 그 은사를 통해서 식별의 통찰력을 얻어야 한다.
3. 신약성서에서의 식별의 대원칙
신약성서가 제시하는 첫번째의 식별의 대원칙은 지혜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이들이 받는 하나님의 은혜중의 탁월한 것이 지혜이다. 이 지혜는 곧 성령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며, 이것은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할 수 있다(고전 2: 6-9). 이것은 이미 복음서에서 제자들이 식별의 기준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한 이해보다는 그 분에 대한 인격적인 체험을 식별기준으로 삼았던 것과 같은 맥락을 이룬다. 성령의 체험이 복음서에서 말하는 그리스도의 임재와 동일한 경험이라고 할 때 복음서의 식별 원칙과 서신서의 식별 원칙을 동일한 것으로 간주해야 한다. 영적인 사람만이 하나님의 지혜를 부여받고,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모든 것을 식별할 수 있다.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기 위해서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엡 5: 17)고 하며, 이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는 지혜가 우리에게 임한다(골 1: 9; 엡 1:9). 이 지혜에 속하고 있다는 가장 기본적인 특징은 하나님만이 줄 수 있는 평화를 맛보는 것이다. 이 평화는 곧 하나님의 나라를 마음과 뜻과 정성으로 받아들이는 경험이며(롬 14: 17-19), 우리가 하나님에게로 나아가고 있다는 확신이며, 성령에 의해서 인도를 받고 있으며, 그 영혼(마음과 생각)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지고 있다는 증거이다.
신약성서가 제시하는 두번째의 식별 원칙은 그 열매를 보고 그 나무의 근본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마 7: 15-20). 좋은 뿌리는 좋은 열매를, 좋지 못한 뿌리는 좋지 못한 열매를 맺게 된다는 원칙이다. 그 구체적인 열매가 무엇인가? 갈 5: 16-26에서 언급하고 있다. 성령의 소욕과 육체의 소욕은 서로 대적관계이므로 어떤 하나를 식별하여도 다른 하나는 곧 식별가능하다. 성령의 행함 중에서 바울서신이나 요한의 문서에서 공통적으로 보여주는 두드러진 기준은 예수님과 관련된 형제애(兄弟愛)이다(갈 5: 13-14; 요일 4:20, 2:9, 3:10). 이 사랑의 구체적이고도 심리적인 속성을 바울은 고전 13장에서 밝히고 있다. 이 말씀에 의하면 영에 의한 내적인 움직임이 두 가지가 있을 수 있는데 성령에 의한 움직임은 사랑이요, 악령에 의한 책동은 이기주의와 증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