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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다음 세 이야기는 왜 아포프테그마로 불러야하는가? 그리고 그들간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막2:15-17 마 11:2-19, 막 10:13-16
아포프테그마: 삶의자리 + 예수의 말씀
@ 막2:15-17 : bultmann에 의하면 논쟁 및 사제 대화들에 해당.
삶의 자리 - 세리집의 만찬
예수의 말 - 17절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17절은 장면과 어색한 관계를 이루고 있다. 즉 17절의 말은 원래 독립되어있는 것임이 분명하고 15f절은 이말에 맞추어 만든 장면이다.
@ 마 11:2-19 : 논쟁및 사제의 대화부분.
삶의자리- 세례요한의 질문
예수의 말씀- q 에의해서 세례요한에 관한 말 즉 마11:7-11과 마11:16-19이 첨가되었다 . 그사이에 마태는 12절과13절에서 눅16:16에 수록된 말을 하나더 첨가하고 이 말을 14f절 -아마 마태 자신의 작문일 것이다-로 부연했다. 핵심은 5f절(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에 있으며 이 로기온은 원래는 독립된 것이었는데 교회에 의해 아포프테그마적 작문에 이용되었다. 길이가 비교적 긴것이 특징인데, 이것은 초기에는 짧았는데 후대에 갈수록 예수의 말씀이 첨가되었기 때문이다.
@ 막 10:13-16 : 전기적 아포프테그마
삶의 자리- 예수의 어린이 축복
예수의 말 - 13-16절의 장면은 15절 없이도 빈틈 없이 짜여진 아포프테그마로서 핵심은 14절에 있다. 원래의 부분인 13,14,16절은 유대적 축복관습에 그 근거를 가진, 엘리야와 게하시 사화(왕하4:27)에 본보기를 지닌, 그리고 랍비사화에서도 한 유사형을 볼 수 있는 이상적 장면이라면, 15절의 첨가에 의해 이 장면의 이상적 성격은 전적으로 분명해지고 잇다. 즉 15절의 진리가 이장면에세 상징적으로 묘사된 것이다.
2. 치유이적의 Internal Structure는 무엇인가? 막 1:29-31을 막 5: 1-20절과 비교 하라.
-- 이적기사의 역사,양식--
예수의 이적은 당시 주변세계에서 일어나는 이적들과의 비교에서 가능하다. 로마항제Vespasian이나 소아시아의 방랑 설교자 Apollonius 등은 예수당시에 살면서 이적으 鱁행했다고 하며 에피다우로스의 아스클레피오스 신전에서 발견된 비문에서 기적적인 치유사건이 기록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오눌날 까지 남아있는 70개가량의 석판 비문과 보존된 일련의 봉납물들을 보면 눈병, 중풍, 종양, 상해, 수태걱정 등의 갖가지 병과 고뇌에서 구제받기를 갈구하는 이야기와 그치료 이야기를 보여준다. 에피다우로스의 비문에 적힌 치유기적들은 당대그리스 치유이적 사화들의 그 서술 양식들을 볼 수 있다. 그리스인들은 이적을 이야기할 때 상황묘사, 기적적 치유, 치유의 실증, 목격자들의 반응순으로 엮었다.
Bultman은 그의 공관복음 전승사에서 이적 사화의 형식을 다음과같이 종합하여 보여준다.
1.병세묘사. -병의 기간 2.병의 처절한 혹은 위험한 성격 3.의사들의 헛 수고 4.구원자에대한 회의적조소와 진술 5.병고침의 어려움 6.이적 행위자가 병자 가까이 감 7.손을 대는 동작,일으키는 행위 8.아적을 일으키는 말 9.귀신이 위협받음 -꾸짖다. 명령하다는 말 사용 10.귀신축출, 병고침 11.귀신이 관대하기를 요청 12.귀신에게 잠잠하라 명령 13.병고침의 실증 14. 붸겨나는 귀신이 무엇인가 파괴 15.치료받은자 단순히 돌려보냄 16.현장에있는 무리가 받은 인상묘사
Dibelius는 이적이야기를 부분적으로는 범례(paradigma)로, 부분적으로는 단편소설(novelle) 로 분류하였다. 따라서 그의 분류에 따르면 1:29-31 본문은 paradigma로 본래는 떨어져서 전달된 담문으로 짧고 완결된이야기인데 역사적 가치가 인정된 것들이고, 5:1-20절은 novelle로서 완결된 단편이야기로 다른 신들에 대한 그리스도의 우월성을 드러내는 본문이다. 불트만의 분류로는 두본문이 치유이적에 속한다.
성서의 기적 이야기들은 다음과 같이 단순하게 도식화 할 수 있다.
1.곤경을 언급함 2.도움을 청함 3. 구조(말씀,몸짓) 4. 성공의 확인 5.시위 (실증)
귀신추방에는 확대된 도식이 따른다.
1.귀신추방자와 귀신과의 만남 2.귀신의 방어 3.귀신추방자의 위협 4.귀신추방자의 침묵명령 5.귀신에게 떠나라고 명령 6.귀신이 떠남 7.무리들이 놀람/찬양으로 끝남
* 막 1:29-31의 구조
이 본문은 복음서 전승에서 가장 짧은 기사이면서 양식상으로는 가장 명확한 기적사화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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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병고의 종류 - 열병으로 누워 있다. - 누워있다는 동사표현으로 병의 위독함을 묘사(B.1,2) 2.신통한 치료 - 예수가 다가가서 - 다가감,손을 잡아일으키는 손을 잡아 일으킴 행위는 전형적 치유 동작(B.6,7) 3.치유결과 확인 - 열이떨어지고, 부인 수종듬 (B.13) |
*막 5:1-20
이 사화의 본문은 체계적으로 정연하게 구성되어있으며, 고대 구마사화의 도식적 양식에 의거하여 엮어져 있다. 플라비우스 요세프스의 "유대사" , 로마황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궁정저술가 필로스트 라토스의 "티야나 아폴로니우스의 생애"등에는 여러 귀신추방 사건들을 저술하고 있는데 이들을 살펴보면 어떤 일정한 규칙들이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리스 사화 도식에 따라 5장1-20절을 구성해보면 다음과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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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상황 보고와 1-5절 무덤 귀신들린자 증상보고 2.구마자와 귀신의 만남 6절 예수를 보고 달려옴 (B.10) 3.귀신의 자기방어 7절 나를 괴롭게 마소서 (B.11) 4.구마자의 추방명령 8절 나오라함 (B.9) 5.귀신의 떠남과 실증 13절 돼지떼 (B.13) 6.목격자들의 반응 14-17. 20절 기이히 여김 (B.14) |
이 본문의 특이점은 장면들이 이중으로 묘사되고 있다는 점이다. 예수와 귀신들린 사람과의 만남(2.6절), 무덤에서의 기거(3.5절), 자기들을 가만 두어 달라는 귀신들의 간청(10.12절), 목격자들이 다른사람들에게 알리는 장면(14.16절) 이 이중묘사는 본문이 여러 전승과정과 편집과정을 거치면서 편집자가 여러차례 손질을 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으며, 마가는 예수의 신적 권능을 강조 하기위해 이본문을 저술했다고 볼 수 있다.
3. 다음 말씀들(sayings)의 형태를 결정하고 그 말씀들이 나오게 된 삶의 정황을 말해보라
눅6:20-21 ,눅 6:22-23 ,마7:6 ,막9:1
복음서의 단위 양식들을 불트만은 크게 3가지로 나누었는데,주의 말씀과 아포프테그마,설화자료로 나누었고 디벨리우스는 교훈적말씀과 설명적 전승(설화전승)으로 크게 2가지로 나누었다
1)눅6:20-21
"예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가라사대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것임이요 ,이제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요 이제 우는 자 는 복이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
말씀의 형태:
불트만은 이 말씀의 양식을 예언적 말씀 또는 묵시적 말씀으로 보았고 디벨리우스는 예언적 말씀으로 보았다 또한 하인리히(Heinrici)를 따라서 클로스데어만(Klostermann)과 하우크(Hauck)역시 예언 부분으로 보았기에 본문의 형태는 '예언부분'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할 수가 있는데 그 이유는 마태복음5장의 산상수훈과 마찬가지로 본문의 평지설교는 현재에 있는 사람들과 그리고 앞으로 그렇게 살아갈 사람들을 대상으로 천국에 대한 축복을 말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말씀의 삶의 정황:
눅6:20-26절은 두 가지의 대조가 하나의 부분을 형성한다
이 부분에서는 두 종류의 사람들이 대조가 되는데 한편에는 하나님의 축복이 주어지고 다른 한편에는 그의 저주가 내려진다 즉 가난하고 억압당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축복이 선언되고 부요한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심판이 내려진다 따라서 이 부분은 사람들에게 어떤 식의 삶을 영위할 것인가에 대하여 도전한다 제자가 되라는 초청이며 동시에 제자가 이미 된 사람들을 위로한다
첫번째 그룹의 사람들은 외형적으로는 불쌍하게 보이나 예수의 눈에는 행복한 사람들로 여겨진다 두번째 그룹의 사람들은 물질적으로 부요함을 누리고 세상이 부러워하는 계층의 사람들이다 그런 상태에 대해서 예수가 슬프다고 한 것은 물질적 번영 그 자체에 대하여 말한 것이 아니고 그런 번영을 만끽하고 거기에만 만족하여 그 이상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한 것이다
듀퐁(Dupont)에 따르면 누가는 저주들과 다란 소소한 수정을 가함으로써 예수의 메시지가 사회적 관심을 가진 것으로 서술하였고 현재적 고통과 장래의 보상을 부각시켰다는 것이다 한편 마태는 더 많은 축복을 첨가 시키기 더 많은 수정작업을 가하여 축복의 말씀들을 그리스도교적으로 도식화하였다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은 문자 그대로 가난한 사람들이고 반면에 복음을 거부하는 많은사람들은 물질적 풍요를 즐겼다 그러므로 제자들은 세상의 수준에서 가난하다고 볼 수 있는 삶을 살아갈 각오를 해야 한다
2)눅6:22-23
"인자를 인하여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고 너희 이름을 악하다 하여 버 릴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도다.그 날에 기뻐하고 뛰놀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 저 희 조상들이 선지자들에게 이와같이 하였느니라"
이 말씀의 형태도 마찬가지로 '예언말씀'으로 볼 수가 있는데 이는 '그 날'이라는 미래적인 용어가 사용되었으며 또한 앞으로의 박해에 대한 축복의 상급을 천국이라는 단어로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삶의 정황
만약 처음 세 가지 축복들이 일반 사람들에게 제자직으로의 초청으로 주어진 것이라면 네 번째의 것은 그런 제자직이 당면할 운명과 세계 속에서 짊어지게 될 박해의 짐을 달게 짊어질 것을 권고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초대교회가 모순을 느끼지 않고서 그 두 사상을 함께 제시했다면 예수 역시 그랬을 것이라고 보는 일이 어렵지 않다 오히려 예수는 자신과 그의 제자들이 앞으로 당하게 될 박해를 예견하고 이 말을 했다고 보는 편이 타당하다 히긴스(Higgins)는 예수를 지상의 사람의 아들로 여기고 그에襂 충성할 때 야기되는 박해를 말한다고 주장한다 즉,인자인 예수 그리스도 자신으로 인해서 박해를 받는 것이 앞으로 교회가 박해 속에서 신앙의 대상으로 삼는 예수가 하늘에 있는 사람의 아들로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라 할 수있는 것이다
그런 박해 속에서 기뻐하라고 한 것은 하늘에서의 너희의 상이 크기 때문이라고 하면서 그 근거를 과거의 선지자의 이야기를 통해서 증거해주고 있다 즉,그들은 예언자가 그랬듯이 하늘의 보상을 확신할 수가 있는 것이다 앞으로 회당에서 인자인 예수의 이름으로 출교를 당하는 박해를 당하고 심지어 고문을 당하고 죽기까지 핍박을 받는다 하더라도 그들의 받을 복은 하늘에서의 상급으로 비교할 수 없는 축복을 얻는다는 것이다
3)마7:6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저희가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할까 염려하라"
본문은 산상수훈의 교훈적인 말씀중에 삽입된 말씀으로써 말씀의 형태는 교훈적인 예언의 말씀으로 볼 수가 있다
삶의 정황
15:26-27절에서 이방인들은 랍비문학에서처럼 개와 비교 되었고 또 돼지는 유다인들에게 있어서 이방인과의 교제에 가장 중대한 역기능을 하였던 정결치 못한 동물이요 이 밖에도 이방적인 로마에 관한 비유로 사용되었다
이 낱말은 아직도 엄격히 율법적으로 살아가는 유다 그리스도교에 깊은 인상을 주었으며 유다 그리스도교가 이 낱말을 사용하면서 이방선교와 맞서서 싸웠다는 사실을 입증해 주는 것이다
僞클레멘스의 인증 3장1절에서도 이 말은 엄격한 유다 그리스도교도들에 의해서 큰 교회의 교인들에 대항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그러므로 아마 마태는 간단히 조롱해서는 안되는 하나님의 말씀과 그의 계명의 거룩함을 더 강하게 강조하려고 한 것 같다 이것은 우선 세속적인 세상으로부터 그들의 '신성한 것'을 지켜려는 헬레니즘적 종교 제의의 사상과 일치를 하긴 하지만 어쨋든 예수의 사상과는 일치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예수의 강렬한 말씀은 또한 그의 공동체가 교회의 규율과 형제에 대한 권면과 더불어 복음서를 분명한 소리로 듣지 못하게 하는 것에서 막아야 했다
4)막9:1
"또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섰는 사람 중에 죽기전에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하시니라"
말씀의 형태는 미래적이고 종말적인 예언의 말씀이다
삶의 정황
평행구절로 마16:28과 눅9:27절 말씀들이 그리스도의 변모에 대한 저들의 기록을 잊어버려서는 안될 상황과 관계를 시키고 있다 즉,다음 막9:2-8절에 나오는 변화산에서의 변모에 대한 예언을 성취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변모가 그 말씀의 성취라 할지라도 철저한 성취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임박한 사건으로서 즉,유대인의 정치적 전복을 포함하는 예루살렘의 멸망이 있었는데 이 사건은 당시에 거기에 섰는사람 중에 어떤 사람들이 살아있는 동안에 일어나리라고 합리적으로 기대는 할 수있었다 그리고 이 대 재난은 우리 주님께서 세상 끝날에 있을 심판의 모형과 전조로 자주 언급하였다 그것은 확실히 미래에 있을 전조와 보증이었으며 특별히 저들의 주님의 고난을 목격한 사도들을 분발하게 하고 강하게 하며 또하 기독교인들의 생활의 수고와 시련을 저들로 하여금 참도록 고무하기 위하여 작정되었다 그러므로 변모는 말하자면 이 예언의 삽입적인 사건,즉 변모를 목격한 자들의 특별한 이익을 위한 예비적인 표명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세상의 끝이 온다는 경고'로 주신 것이다
박해하에서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주를 따르는 자에게 필요한 것은 박해 저편에 있는 하나님의 나라의 영광을 바라보는 것이고 그 예표로 여기 변모의 장면이 보여진 것이다
참고문헌:국제성서주석,Pulpic성서주석,주해신약(이상근)
4. 눅12:43-46, 마13:31-32, 막4:3-8, 막4:14-20, 눅18:9-14, 눅 16:19-31은 모두 "비 유들"로 구분할 수 있는 구절들이다.
1)이것들 중 어느 것이 "비유"의 form(양식)에 가장 가까운가?
비유의 양식이라는 것은 불트만이 양식분류에 속한 것미며, 나-말<I-Saying>과는 구분되는 것으로서, 이것은 그가 모든 공관복음 자료를 일반적으로 구분하는-즉, 아포크테마와 주의 말로 구분하는- 것과 따로 취급된다. 그에 따르면, 비유란 그 구체적인 언어, 그 방언과 독백의 사용 및 그 반복에 있어서 대중적인 설화와 아주 유사한 간결하고 단순한 설화이다. 그것은 청중 측의 판단을 요청하기 위하여 이야기되는 설화이다. 하나의 판단이 매일의 인간사와 인간관계의 이야기와 관련하여 형성되고, 이 판단은 영적 생활의 영역에서 적용된다. 그가 사용하는 비유적 형식들은 단순한 비교와 은유에서부터 비유(Gleichnis), 파라벨(Parabel), 예화(Beispielerzählung)이다. 이것들의 차이는 언제나 쉽게 관찰될 수는 없다. 모든 페라벨이 공통으로 비교의 요소를 지니고 있다. 불트만은 순수한 비유를 발견할 수 있는 하나의 법칙을 제시하는데, 그것은 "한편으로는 유대적 도덕 및 경건 사이의 대립과 예수의 선포를 특징짓는 특수한 종말론적 분위기가 표현되어 있고, 다른 한편 기독교 특유의 성격이 발견되지 않는 곳에서 예수의 순수한 비유를 소유할 수 있다고"는 것이다. 이러한 법칙과 비교와 은유가 많이 나타나는 것을 위의 질문에 답을 결정하는 기준이 된다고 여겨진다. 먼저 각 구절들을 비유가 가지는 요소를 가지는 가를 살펴보고, 그 다음 이 법칙에 근거하여 가장 비유의 양식에 가장 가까운 가를 살펴본다. 눅12:43-46절은 판단컨대, I-Saying에 해당한다고 본다. 이것은 44절에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라는 구절에 근거한다. 불트만은 예수가 자기 자신에 관하여 일인칭으로 말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것을 입증할 수 없음을 인정한다. 이 말들은 전체로서 교회의 회고적 관점을 표현하는 것으로서, <나-말>은 주로 헬레니즘적 교회들의 산물이라고 한다. 마13:31-32은 겨자씨 비유로서, 이 구절들은 위의 비유의 정의에서 사용하는 구체적인 언어를 사용하고 있으며, 대중적인 설화와 유사한 간결하고 단순한 설화의 형식이다. 그리고 기독교 특유의 표현인 천국은 ..같으니라는 표현이 있다. 막4:3-8은 하나님 나라의 비유중에 씨뿌리는 자의 비유로서, 형식면에서 구체적인 언어들이 위에 것보다 많이 나오며, 또한 반복이 위에 것보다 강하게 나타난다(예를 들면, 뿌리다, 더러는, 그리고 댓구가 되는 단어들의 나열). 또한 이 내용이 일상생활에서 경험하는 평이한 소재이다. 또한 기독교 특유의 표현이 나타나지 않고 있다. 막4:14-20은 이것은 앞의 바로 이것은 '말씀을 들을 때,라는 구절로 볼 때, 기독교 특유의 성격이 발견되어지며, 따라서 이것은 앞의 씨뿌리는 비유에 대한 교회의 해석으로 볼 수 있다. 특히, 17절이 풍기는 표현을 볼 때, 기독교가 박해당하던 시기인 헬라시대에, 교회가 비유를 해석하여 선포하고 있음을 추측할 수 있다. 이것은 너무도 명시적이며, 설교체의 형식으로서 비유라기 보다는 어떤 의도를 가지고서 하는 비유에 대한 해석이요 선포라 할 수 있다. 눅18:9-14는 유대적 도덕 및 경건과의 대립을 보여주고 있으나 기독교의 특유의 성격이 발견되어 진다. 이것은 하나의 예화(Beispielerzählung)라는 비유적 형식에 속한다. 그리고 비교는 나타나지만 은유적인 성격은 약하다. 눅 16:19-31은 이것은 기독교적인 색채가 많이 나타나며, 예수의 선포를 특징짓는 특수한 종말론적 분위기가 표현되어 있다. 이 구절은 역시 비교는 나타나 있지만, 은유적인 면모라기 보다는 알레고리칼한 면모가 짙다. 그래서 어떤 대상에다 빗대어 풍자하는 Parady의 성격도 가진다. 또한 이 내용은 대중적이기 보다는 기독교 신앙에 속한 이들안에서 이해 될 수 있는 것이며, 문체가 간결하거나 단순하지 않으므로 비유의 성격과는 거리가 멀며, 오히려 비유로부터 알레고리로 전환되는 현상을 가진 구절들이다. 결론적으로 볼 때, 막4:3-8은 씨뿌리는 자의 비유로서, 형식면에서 구체적인 언어들이 위에 것보다 많이 나오며, 또한 반복이 위에 것보다 강하게 나타나며(예를 들면, 뿌리다, 더러는, 그리고 댓구가 되는 단어들의 나열), 간결하고 은유적인 표현이 많이 나타나며, 또한 이 내용이 일상생활에서 경험하는 평이한 소재이며, 또한 기독교 특유의 표현이 나타나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순수한 비유라고 할 수 있는 점에 근거해서 가장 비유의 양식이 가지는 기준에 적합하므로 이 구절들이 가장 비유에 가까운 것이라고 할 수 있다.
2)어느 것에서 비유로부터 알레고리로 전환된 현상을 볼 수 있는가? 초대 교회가 많은 비유를 그들의 상황, 특히 재림의 지연과 선교가 그 특징인, 교회의 상황에 관련시켜 해석에이용한 방법중의 하나가 알레고리적인 해석이었다. 눅 16:19-31은 이것은 초대교회의 기독교적인 색채가 많이 나타나며, 예수의 선포를 특징짓는 특수한 종말론적 분위기가 표현되어 있다. 이 구절은 역시 비교는 나타나 있지만, 은유적인 면모라기 보다는 비유를 그 시대의 상황에 맞게 알레고리칼하게 해석하는 면모가 짙다. 또한 이 내용은 대중적이기 보다는 기독교 신앙에 속한 이들안에서 이해 될 수 있는 것이며, 문체가 간결하거나 단순하지 않고 은유적인 것이 약하므로 비유의 성격과는 거리가 멀며, 오히려 비유로부터 알레고리로 전환되는 현상을 보여주는 구절들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씨 뿌리는 자의 비유의 해석은 초대 교회의 산물이라는 것이라고 결론을 내릴 수 있는데, 초대교회는 이 비유에서 알레고리를 보고 이에 일치시켜 그 비유를 곧 알레고리적으로 해석했다. 우선 씨는 말씀으로, 다음에 일람표식으로 된 네가지 밭은 네 종류의 인간으로 해석되는데, 이것은 원래 전혀 다른 제 4에스라서(에스라9:31)에서도 볼 수 있는 두 사상, 즉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씨와 비교한 것, 또 하나는 인간을 하나님의 재배와 비교한 것이 밑받침이 되어 있다. 이 해석은 마가 이전의 것으로, 어휘와 문헌 비판적인 분석이 증거하는 바에 의하면, 마가가 만든 것이 아니다. 전체적으로도 마가에 있어서 비유 자료의 범위가 비교적 적은 것을 감안하면 알레고리적인 해석이 그에게서 이미 큰 폭을 차지하고 있다. 이 해석은 이미 마가 전 전승에 속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따라서 이 절은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개종자의 자기반성에 대한 권고로 개작하기 위하여 알레고리적 해석을 사용했다. 예수의 비유들의 현재의 전승 형태에 많이 들어 있는 알레고리적인 해석들은 대부분 원래의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차적인 해석들과 표현들을 도외시 할 때, 비로소 예수의 비유의 원래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는 문이 다시 열릴 수 있다.
3)어느 것이 story에 가까운가? 왜? 불트만은 공관복음서의 설화 자료를 두 개의주요 그룹으로 나눈다. 즉 기적설화와 역사설화 및 전설로 나눈다. 우리가 설화 혹은 서사이야기(story or narative)라 할 때, 이것은 독자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문학작품으로 정의할 수 있다. 서사 이야기는 이야기(story)와 담론으로 두 가지 측면을 갖고 있다. 이야기는 서사이야기의 내용, 즉 서사 이야기가 말하려고 하는 것을 가리킨다. 하나의 이야기는 사건(events), 등장인물(characters), 배경(setting)이라는 요소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 세 요소의 상호작용을 플랏(Plot)이라고 한다. 이러한 서사이야기의 기법을 살펴보면, 데이비드 바우어(서사비평이란 부엇인가? 마크 알렌 포엘저, 이종록 역)는 성경 서사이야기에서 발견되어지는 15개의 구성관계의 범주를 설정한다. 즉 반복, 대조, 비교, 인과 관계와 실증, 절정, 전환, 구체화와 일반화, 목적의 진술, 복선, 요약, 질문, 표괄, 교차, 교차대조, 삽입이 그것이다. 이러한 이야기의 구조틀에 잘 맞는 것이 바로눅 16:19-31이다. 즉 사건의 전개와 등장인물 그리고 배경, 그리고 이야기 기법에 적절하다양식 비평
실습문제4. 눅12:43-46, 마13:31-32, 막4:3-8, 막4:14-20, 눅18:9-14, 눅 16:19-31은 모두 "비유들"로 구분할 수 있는 구절들이다. 1)이것들 중 어느 것이 "비유"의 form(양식)에 가장 가까운가? 비유의 양식이라는 것은 불트만이 양식분류에 속한 것미며, 나-말<I-Saying>과는 구분되는 것으로서, 이것은 그가 모든 공관복음 자료를 일반적으로 구분하는-즉, 아포크테마와 주의 말로 구분하는- 것과 따로 취급된다. 그에 따르면, 비유란 그 구체적인 언어, 그 방언과 독백의 사용 및 그 반복에 있어서 대중적인 설화와 아주 유사한 간결하고 단순한 설화이다. 그것은 청중 측의 판단을 요청하기 위하여 이야기되는 설화이다. 하나의 판단이 매일의 인간사와 인간관계의 이야기와 관련하여 형성되고, 이 판단은 영적 생활의 영역에서 적용된다. 그가 사용하는 비유적 형식들은 단순한 비교와 은유에서부터 비유(Gleichnis), 파라벨(Parabel), 예화(Beispielerzählung)이다. 이것들의 차이는 언제나 쉽게 관찰될 수는 없다. 모든 페라벨이 공통으로 비교의 요소를 지니고 있다. 불트만은 순수한 비유를 발견할 수 있는 하나의 법칙을 제시하는데, 그것은 "한편으로는 유대적 도덕 및 경건 사이의 대립과 예수의 선포를 특징짓는 특수한 종말론적 분위기가 표현되어 있고, 다른 한편 기독교 특유의 성격이 발견되지 않는 곳에서 예수의 순수한 비유를 소유할 수 있다고"는 것이다. 이러한 법칙과 비교와 은유가 많이 나타나는 것을 위의 질문에 답을 결정하는 기준이 된다고 여겨진다. 먼저 각 구절들을 비유가 가지는 요소를 가지는 가를 살펴보고, 그 다음 이 법칙에 근거하여 가장 비유의 양식에 가장 가까운 가를 살펴본다. 눅12:43-46절은 판단컨대, I-Saying에 해당한다고 본다. 이것은 44절에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라는 구절에 근거한다. 불트만은 예수가 자기 자신에 관하여 일인칭으로 말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것을 입증할 수 없음을 인정한다. 이 말들은 전체로서 교회의 회고적 관점을 표현하는 것으로서, <나-말>은 주로 헬레니즘적 교회들의 산물이라고 한다. 마13:31-32은 겨자씨 비유로서, 이 구절들은 위의 비유의 정의에서 사용하는 구체적인 언어를 사용하고 있으며, 대중적인 설화와 유사한 간결하고 단순한 설화의 형식이다. 그리고 기독교 특유의 표현인 천국은 ..같으니라는 표현이 있다. 막4:3-8은 하나님 나라의 비유중에 씨뿌리는 자의 비유로서, 형식면에서 구체적인 언어들이 위에 것보다 많이 나오며, 또한 반복이 위에 것보다 강하게 나타난다(예를 들면, 뿌리다, 더러는, 그리고 댓구가 되는 단어들의 나열). 또한 이 내용이 일상생활에서 경험하는 평이한 소재이다. 또한 기독교 특유의 표현이 나타나지 않고 있다. 막4:14-20은 이것은 앞의 바로 이것은 '말씀을 들을 때,라는 구절로 볼 때, 기독교 특유의 성격이 발견되어지며, 따라서 이것은 앞의 씨뿌리는 비유에 대한 교회의 해석으로 볼 수 있다. 특히, 17절이 풍기는 표현을 볼 때, 기독교가 박해당하던 시기인 헬라시대에, 교회가 비유를 해석하여 선포하고 있음을 추측할 수 있다. 이것은 너무도 명시적이며, 설교체의 형식으로서 비유라기 보다는 어떤 의도를 가지고서 하는 비유에 대한 해석이요 선포라 할 수 있다. 눅18:9-14는 유대적 도덕 및 경건과의 대립을 보여주고 있으나 기독교의 특유의 성격이 발견되어 진다. 이것은 하나의 예화(Beispielerzählung)라는 비유적 형식에 속한다. 그리고 비교는 나타나지만 은유적인 성격은 약하다. 눅 16:19-31은 이것은 기독교적인 색채가 많이 나타나며, 예수의 선포를 특징짓는 특수한 종말론적 분위기가 표현되어 있다. 이 구절은 역시 비교는 나타나 있지만, 은유적인 면모라기 보다는 알레고리칼한 면모가 짙다. 그래서 어떤 대상에다 빗대어 풍자하는 Parady의 성격도 가진다. 또한 이 내용은 대중적이기 보다는 기독교 신앙에 속한 이들안에서 이해 될 수 있는 것이며, 문체가 간결하거나 단순하지 않으므로 비유의 성격과는 거리가 멀며, 오히려 비유로부터 알레고리로 전환되는 현상을 가진 구절들이다. 결론적으로 볼 때, 막4:3-8은 씨뿌리는 자의 비유로서, 형식면에서 구체적인 언어들이 위에 것보다 많이 나오며, 또한 반복이 위에 것보다 강하게 나타나며(예를 들면, 뿌리다, 더러는, 그리고 댓구가 되는 단어들의 나열), 간결하고 은유적인 표현이 많이 나타나며, 또한 이 내용이 일상생활에서 경험하는 평이한 소재이며, 또한 기독교 특유의 표현이 나타나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순수한 비유라고 할 수 있는 점에 근거해서 가장 비유의 양식이 가지는 기준에 적합하므로 이 구절들이 가장 비유에 가까운 것이라고 할 수 있다.
2)어느 것에서 비유로부터 알레고리로 전환된 현상을 볼 수 있는가? 초대 교회가 많은 비유를 그들의 상황, 특히 재림의 지연과 선교가 그 특징인, 교회의 상황에 관련시켜 해석에이용한 방법중의 하나가 알레고리적인 해석이었다. 눅 16:19-31은 이것은 초대교회의 기독교적인 색채가 많이 나타나며, 예수의 선포를 특징짓는 특수한 종말론적 분위기가 표현되어 있다. 이 구절은 역시 비교는 나타나 있지만, 은유적인 면모라기 보다는 비유를 그 시대의 상황에 맞게 알레고리칼하게 해석하는 면모가 짙다. 또한 이 내용은 대중적이기 보다는 기독교 신앙에 속한 이들안에서 이해 될 수 있는 것이며, 문체가 간결하거나 단순하지 않고 은유적인 것이 약하므로 비유의 성격과는 거리가 멀며, 오히려 비유로부터 알레고리로 전환되는 현상을 보여주는 구절들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씨 뿌리는 자의 비유의 해석은 초대 교회의 산물이라는 것이라고 결론을 내릴 수 있는데, 초대교회는 이 비유에서 알레고리를 보고 이에 일치시켜 그 비유를 곧 알레고리적으로 해석했다. 우선 씨는 말씀으로, 다음에 일람표식으로 된 네가지 밭은 네 종류의 인간으로 해석되는데, 이것은 원래 전혀 다른 제 4에스라서(에스라9:31)에서도 볼 수 있는 두 사상, 즉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씨와 비교한 것, 또 하나는 인간을 하나님의 재배와 비교한 것이 밑받침이 되어 있다. 이 해석은 마가 이전의 것으로, 어휘와 문헌 비판적인 분석이 증거하는 바에 의하면, 마가가 만든 것이 아니다. 전체적으로도 마가에 있어서 비유 자료의 범위가 비교적 적은 것을 감안하면 알레고리적인 해석이 그에게서 이미 큰 폭을 차지하고 있다. 이 해석은 이미 마가 전 전승에 속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따라서 이 절은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개종자의 자기반성에 대한 권고로 개작하기 위하여 알레고리적 해석을 사용했다. 예수의 비유들의 현재의 전승 형태에 많이 들어 있는 알레고리적인 해석들은 대부분 원래의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차적인 해석들과 표현들을 도외시 할 때, 비로소 예수의 비유의 원래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는 문이 다시 열릴 수 있다.
<근거를 더세워라.> 3)어느 것이 story에 가까운가? 왜? 불트만은 공관복음서의 설화 자료를 두 개의주요 그룹으로 나눈다. 즉 기적설화와 역사설화 및 전설로 나눈다. 우리가 설화 혹은 서사이야기(story or narative)라 할 때, 이것은 독자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문학작품으로 정의할 수 있다. 서사 이야기는 이야기(story)와 담론으로 두 가지 측면을 갖고 있다. 이야기는 서사이야기의 내용, 즉 서사 이야기가 말하려고 하는 것을 가리킨다. 하나의 이야기는 사건(events), 등장인물(characters), 배경(setting)이라는 요소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 세 요소의 상호작용을 플랏(Plot)이라고 한다. 이러한 서사이야기의 기법을 살펴보면, 데이비드 바우어(서사비평이란 부엇인가? 마크 알렌 포엘저, 이종록 역)는 성경 서사이야기에서 발견되어지는 15개의 구성관계의 범주를 설정한다. 즉 반복, 대조, 비교, 인과 관계와 실증, 절정, 전환, 구체화와 일반화, 목적의 진술, 복선, 요약, 질문, 표괄, 교차, 교차대조, 삽입이 그것이다. 이러한 이야기의 구조틀에 잘 맞는 것이 바로눅 16:19-31이다. 즉 사건의 전개와 등장인물 그리고 배경, 그리고 이야기 기법에 적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