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시대의 聖殿, 律法, 祭司長

사방에 나누어져 살던 유대인들의 초점은 바로 성전과 율법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성전과 율법 제사를 주제하는 것이 바로 제사장 계급이었음을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는 율법과 성전에 대하여 조사해 보고 마지막으로 이러한 유대인의 관습을 주관하던 제사장에 대하여 살펴 보겠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성전에 대한 자료로 N.Perrin의 신약성서 개론에 나와있는 성전 모형도를 제시한다.

1) 율법

전통적으로 유대인들을 "전통파적 관행" 보다는 "참된 관습"에 대한 문제에 대하여 관심이있었다. 율법학자들이 인용한 의인 시므온의 말은 "세상은 세가지-율법과 예배와 그리고 자비로운 행실-의 것들로 유지된다." 그들의 사상은 잘 알수 있게 한다. 따라서 유대인들은 전통적으로 신조들 보다는 윤리적 원리들을 강조하였고 유대 백성에 속한 사실을 인친할례, 안식일에 쉬는것, 종교적 절기의 준수로 식별하였으며 하나님에 대한 믿음, 이스라엘의 특별히 선택된 자위, 그리고 토라를 인정하였다. 유대인들은 BC 586년의 국가적 비극을 모세 율법을 준수하지 못한 탓으로 이해 하였다. 율법은 지혜와 동일시 되었으며, 세상을 창조하는 구실을 하였다. 따라서 율법은 영원한 효력과 글자 하나하나에 중요성을 지닌것이었다.

여기에 보는것을 강조하는 헬라식과 듣는 것을 강조하는 히브리식 대조는 유대인들이 토라를 강조하는 것은 당연하였다. 토라는 처음에는 모세오경을 의미하였으나 확대되어 구전율법을 포함하게 되었다. 그리고 토라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주신 가장 큰 선물이었으며, 이것은 짐이 아니라 즐거운 의무였으며 삶의 기본이었다. 따라서 바리새인들은 율법이 삼鱁의 모든 문제를 다스려야 한다고 확신하였다. 그리고 이들 사이에서는 -잡비풍의 유대교-는 성문법과 구전율법이 존재하였으며, 구전 율법은 성문법을 해석하는 울타리로 생각하였으며 거의 대부분의 문제는 구전 율법을 통하여 해석하였다.

이러한 유대주의의 성서해석-율법의 해석-은 성문율인 유대교 경전을 받아들인 초기 기독교에도 영향을 주어, 성경의 해석 방법까지도 물려 받았다.

①직역주의-평범하고 직설적인 의미 신약에서의 직역주의적 방식의 예는 갈라디아서 3:16의 '자손'에대한 논쟁에 드러난다.

②풍유적-역사적인 배경과는 절연한 연원한 영적인 의미 - 필로에 의해 사용된 보통 우주적이거나 윤리적인 의미의 해석으로 히브리서7:1-3에 나타난다.

③페셔(pesher)-그 성취로 인해 밝혀진 숨겨진 비밀. 마태복음이 그렇듯이 쿰란 공동체의 주석을이 이 방법을 사용하였음.

④미드라쉬적-성서들을 혼합해서 개인의 경험이나 또는 다른 사건들의 새로운 상황들애 대해 적용과 함께 새로운 해석을 주는 방식-랍비문헌에 많이 발견됨

2) 성전

현재 예루살렘에 이는 바위의 돔이라고 알려져 있는 곳 근처에 위치했던 성전은 산헤드린의 소재지이며, 희생제를 지내는 모든 유대인의 촛점이었다. BC20-19년 헤롯대왕은 성전재건에 착수했으며, 예수님 당시까지도 재건은 진행중이었다. 그리고 AD63년 예루살렘 폭동까지 완공되지는 못하였다.

성전은 대략 남북방향으로 1,590피트 정도였고, 동서로는 1,030피트 정도의 성채와 시가지 사이의 북서코너에 있었으며, 그 전체를 성전경내라고 불렀다. 그리고 이방인들은 경내로 들어갈 수 없었음을 말하는 글들이 새겨진 돌들이 있었다. 하지만 성전 남쪽의 신성한 벽의 개방된 부분은 '이방인들을 위한뜰'이라고 이방인들에게도 개방되었다. 이외에 이스라엘 사람들 중에서도 여인은 '여인의 뜰'이라 명명된 곳까지 남자들은 '니카노의 문'들을 통하여 이스라엘의 뜰까지 들어갈 수 있었다.

다른 근동지방의 성전들처럼 예루살렘 성전은 귀중품들을 보관하는 역활을 하였으며, 따라서 성전을 깨끗케 하려는 예수의 행위는 당시 경제 체제에 대한 모욕이었으며 성전 관리 당국에 대한 도전이었다.

3) 제사장 계급

①대사제

예수시대의 이스라엘은 순수한 신정 왕국이었다. 그러므로 사제급은 첫번째 꼽히는 귀족이었으며, 왕이 없는 시대 현직 대사제는 백성들 가운데 가장 지위가 높았다. 대사제가 지도자적 위치를 차지한 이유는 그의 제의적 성격 즉 "영원한 거룩함"때문이었다. 특별히 대제사장 계급은 일년에 단하루 죽음을 면치 못하는 피조물로 유일하게 지성소에 들어 갈 수있다는 것과 사제들에게 분배되는 '성전의 성물'들의 우선 선택권이 있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제사장들은 24반차로 나뉘어 한번에 한 주간씩 일년에 두번의 성전의 의식을 거행하는 책임이 있었다. 대제사장 임명은 구약성서에 따라 계승되었지만 헤롯시대, 로마 시대에는 대제사장의 옷을 입혀 줌으로 임명되었으며, 이에따라 정치적 집권자는 자신의 정치적 선호나 뇌물에 따라 제사장들을 임명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②고위 사제들과 고위 레위인 사제귀족

사제계급에는 대제사직 이외에 성전 경비대장, 통솔자, 성전감독 창고책임자의 고위직이 있었다. 그리고 이들은 특별한 집단을 형성하여 사제귀족을 형성하였으며, 이들은 일반적인 사제들과 상당한 적대관계를 형성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예수 전후 시대에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던 역사관에 따르면 사독 대사제 가문 아론이후 계속해서 이스라엘의 대사제 직을 세습하였다. 하지만 안티오쿠스 4세는 대사제 임명에 관여하고 종교적 박해를 가함으로 사독가문의 대사제들은 종말을 고하였다. 그후 사제 귀족들중 특별히 대사제를 차지하는 가문이 없는 대사제 공위시대를 격은후 하스몬 가문이 대사제를 배출하는 시기를 가지게 되었다.

그후 헤롯 로마 통치 기간중 정치적 이유로 '평범한 사제 가문'에서 대사제를 임명하여 전통적 사제가문들은 쇠퇴하였다.

③ 일반사제들

주전 445년 율법에 엄숙하게 서명하였던 사제혈통은 21개 였으나 페르시아 시대 말기 BC 4C 에는 22가문으로 예수시대에는 24개의 사제혈통으로 구분되었으며, 이들은 각조로 1주일씩 당직을 서며 제사의식을 드렸다.

일반 사제들은 지방의 재판관으로도 일하였으나, 그들의 경제적 정치적 상황은 좋지 못하였다. 이는 모든 당시의 경제구조 예루살렘 성전에 근거한 까닳이었다. 따라서 AD66년 로마 봉기 때에도 많은 일반 사제들은 고위사제들과는 적대적 관계를 맺으며 민중의 편에 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