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트만의 이원론적인 역사관에 대한 비판
서론
현대인의 마음은 모든 사태에 규정된 과정이 경험적으로 설명되어온 폐쇠된 세계에 맞추어 지도록 적응되어왔다. 모든 것들은 자연법에 의해 운행되는 세계 속에서 합리적 검증에 대상이 되어야 한다. 이 폐쇠된 체계는 신학이 의미있게 진술될 수 있는 어떤 여지도 남겨놓고 있지 않다.
이러한 위기상황에서 불트만은 현대인에게 타당성이 있고 의미있는 신학 언어, 즉 폐쇠된 세계 내에서 조차 의미를 가질 수 있는 언어를 찾으려고 한다.
위에서 진술한 것이 드러내는 불트만의 신학의 기본전제는 현대과학과 현대인에 대한 특별한 이해, 즉 신약시대와 현대 세계 사이의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근본적으로 해석학적 방법과 구조를 신학언어와 관련하여 주석하는 과제를 갖게되는데 어떻게 그가 해석학적 원리들을 하나님 말씀에 연관시키는지를 알아봄으로써 그의 역사관을 살펴보고 비판할 점들을 생각해 보고자 한다.
본론
불트만의 신약해석을 위한 기본 전제들
1. 역사적 방법이 성경해석에서 제거될 수 없다.
2. 하나님과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 행위(구속행위)를 전제한다.
** 불트만에 있어서 근본적인 것은 역사가 모종의 법의 원칙에 의해 규정되는 이성의 객관화인 반면에 종교는 객관화 하는 존재의 양태를 따르거나 법 규정의 원칙에 따르는 것으로 생각될 수 없기 때문에 역사적으로 해석될 수 없다.
기본전제들에 의해서 야기되는 문제들
1. 객관화와 법과 같은 신칸트 철학적인 범주들 밑에서 표현되는 것은 경험론적인 역사 개념이라기 보다는 합리주의적 또는 형이상학적인 역사개념이라는 사실이다.
2. 본질적으로 신칸트 철학에서 유래된, 근거 없는 이원론적 실재 이해(신칸트 철학자들은 이성이 법에 따라 대상을 객관화 시키는 기능을 가진 것으로 묘사하지만 그들은 개체를 이성의 객관화 시키는 기능과 관계가 없는 아주 다른 영역에 속한 것으로 생각한다)에 연관되어있다.
두 언어들
객관화 언어-지식을 전달하고 객관적인 어떤 것을 주장하는 목적을 지닌다. 세계와 역사 속에서 일어나는 사실들과 대상들 그리고 사건들을 직접적으로 지칭하는 언어이며, 사용되는 방식은 지식을 전달하고 대상을 지칭하고 어떤 것을 주장한다.
(신화적 언어는 객관화 경향들을 가지고 있고 이 객관하는 신화의 본질적인 구조에 결정적이다. 결국 신화의 언어는 객관화의 언어이다. 신화의 언어는 종교영역에서 잘못 발생하는데 이 언어는 하나님의 행위들을 세상의 사건들의 지평들에다 투영시킴으로서 그것들을 객관화 시킨다.)
실존적 언어-결단을 촉구하고 결단의 행위를 묘사하는 비객관화된 언어이다. 실존적 언어는 두 범주로 묘사된다. 즉 존재론적인 것과 존재적인 것, 또는 실존주의적인 것과 실존적인 것이다. 전자는 실재적인 결단의 순간들에 답변해 주지 않고 실존의 일반적인 진술들에 관심을 갖는다. 후자는 단지 존재에 참여함으로써 생겨지는 비주재적이고 비과학적인 종류의 존재이해를 묘사하는데 사용된다. 따라서 존재적 언어는 참된 자기이해가 오직 지금 여기서 나 자신의 실재적 가능성으로 실현되어지는 순간에 직면하여 구체적이고도 실체적인 현상들에 관심을 가진다.
존재언어와 관련된 두가지 종류의 신학적 언어-결단의 결정적 행위를 불러일으키고 표현하는 언어와 이 행위를 서술하는 분석적 언어.
신학과 케리그마의 구별-신학은 신앙 안에서의 실존을 개념적으로 해석하는 학문이고, 케리그마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심판 또는 은총을 대면하도록 만드는 직접적이며 개인적인 호소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불트만은 말한다.
**불트만의 목표는 객관화를 극복하는 것인데 신학이나 실존분석 자체에 의해서 성취되지 않고 오직 선포속에서 신앙의 실존적 결단을 통해서만 이루어진다.
불트만의 이원론적 언어관에 대한 비평
1. 실재에 대한 전형적인 독일적 이원론에 뿌리박고 있다.
2. 그의 케리그마적, 실조적 언어에 대한 집착은 성경에서 발견되는, 정보를 제공해 주는 지시적 언어에 무관심한 것은 아닐지라도 소홀히 하도록 만들었고 따라서 그의 해석학을 비신화화라는 방향으로 극단화 시키도록 만들었다.
신학 언어와 실존
불트만의 언어관-불트만은 성경의 언어가 내면적으로 신화적이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그는 비신화화 원리(객관적 언어를 실존적 언어로 바꾸는 것)를 그 실존적 내용을 해석하는 방법으로 사용한다. 신화적 언어가 실존적 언어로 바뀔 수 있다는 것은 그것이 그의 자기 이해를 감추었다는 것이다.
그는 성경 신화의 실존론적 해석은 케리그마 자체가 요청하는 어떤 것이라고 확신하였다. 왜냐하면 중요한 것은 실존적 언어이다.
불트만은 그 언어관을 성경신화의 모호하고 우주적이며 다차원적인 언어와 성경말씀의 본래적인 참된 표현 내용 사이의 거리를 극복하기 위하여 성경언어에 새로운 접근방식이 요청된다는 그의 기본적인 통찰로 부터 정초한다. 그래서 그는 신화의 낯설고 거짓된 표현은 인간 실존에 관한 진술들로 번역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번역 과정은 믿음 자체가 요청하는 어떤 것이다. 만일 성경의 신화가 현대인에게 용납될 수 있고 이에 가능한 새로운 표현 양식이 주어지짖 않으면 신약 케리그마는 법에 의해 규정된 페쇠된 세계관을 가지고 있는 현대인의 눈에 전혀 무의미하게 된다는 의미에서 위기에 봉착하게 된다. 그는 실존철학의 낡은 세계상에 의해 모호해진 신약 케리그마에 대해 적절한 표현양식을 제공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신의 행위를 말하는데 내재하는 한가지 중요한 문제가 불트만의 언어관에 걸려있다. 그것은 과연 그가 하나님과 그의 행위를 말할 때, 한편에서는 그렇게 말하는 것이 실재적이고 객관적인 의미를 지니면서도 그가 정의한 신화개념에 다시 돌아가지 않을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이다. 이 질문은 불트만의 이원론적인 실재관에 기인하여 재기되는 전형적인 약점을 보여준다. 그에게 있어서 근본문제는 신들을 인간생활에서 나온 술어로 묘사하는 것으로 신화를 정의하면서도 하나님과 그의 행위를 인간 생활에 유추하여 말하는 것이 가능한가 하는 것이다. 그가 주장하는 유추의 언어는 신의 행위들을 세계와 역사의 지평 위에서 객관화 시키는 옛 신화의 오류에 빠짐이 없이 그것들을 실재적이고 객관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적절한 표현 양식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비록 유추의 언어가 신의 행위들을 객관화 시키는 경향은 있지만 그것은 관찰 가능하고 객관적인 사실들을 묘사하는 것과 근본적으로 다른 실존적 언어 범주들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유추의 언어는 실존적 전망에서 완전히 접근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그러나 불트만의 실존언어는 하나님과 그의 행위들에 관한 언어가 "그가 나를 위한다는 사실"에 대한 실존적인 표현들로 환언되어질 수 있는 한에서 근본적으로 개인주의적이다. 그의 이러한 배타적으로 개인주의적이고 실존론적 언어관은 그의 근거없는 존재론적 이원론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에 그의 실존언어는 사도적 복음을 이해하는데 적절한 표현 양식을 제공하기에는 너무 제한되어 있고 편향적인 것이 분명하다.
신학적 언어와 역사
불트만은 역사를 두개의 범주로 구분한다. 즉 역사와 초역사로 구분한다. 역사란 역사과학의 주제가 되는 객관적인 역사를 지칭하는 말이다. 역사과학은 원인과 결과의 연속에 의해 연결되어 있는 역사적 사건들에 관심을 갖는다. 그것은 역사적인 사건들을 역사속에 내재하여 있는 요인들을 가지고 설명하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신약이 말하는 모든 구속사적 사건들은 역사탐구에 종속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역사과학은 역사적인 과정을 객관화 하는 방식으로 바라보고 따라서 그것을 폐쇠된 결과들의 통일체로 이해한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가는 역사비평적 접근방식을 피할 수 없다. 이러한 역사적 접근의 틀속에는 초자연적이고 초월적인 세력들이 간섭할 여지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불트만은 역사란 우리에게 역사적 상대성 박에는 줄 수가 없으며, 따라서 케리그마적인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할 수 없다고 결론짓는다.
초역사란 현재 계속해서 결정적인 역활을 지니는 그런 의미를 지닌 역사적 사건들을 지칭한다. 이것은 실존주의자들이 역사를 접근하는 방식으로, 역사를 초월한 무시간적인 영역이 아니라 과거의 역사적 사건이 나에게 의미를 지닐 수 있는 실존적 가능성이고 인간론적으로 기초된 개념이다.
그래서 역사는 원인과 결과 같은 범주를 가지고 이해될 것이 아니라 실존 범주들을 가지고 이해되어야 한다.
**불트만의 이원론적인 역사학 방법은 신칸트 철학 특별히 비헬름헤르만의 신칸트주의적 루터신학의 배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불트만은 전승으로서의 성경언어가 역사탐구의 대상이 될 때, 역사적 상대성밖에는 주지 못하고 따라서 우리의 존재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초역사의 의의를 지닐 수 없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세계와 실존을 구분하는 그의 이원론 사상에서 파생되어 나오는 것이다. 그리고 불트만은 역사와 케리그마 사이의 연계점을 무너뜨렸다는 잘못된 견해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것들 사이의 연속성들을 유지하는데 관심을 두었다.
불트만에 따르면 하나님의 말씀은 역사의 예수와 신앙의 그리스도 사이에 연결을 형성할 수 있다. 예수의 역사적인 사건, 십자가는 말씀(실존화 된 언어) 속에서 종말론적인 사건이 된다.
그러나 과연 불트만이 신약 메시지의 영단번적인 성격을 실재로 공평하게 다루고 있는지 결코 분명치 않다.
신학 언어와 믿음
불트만은 믿음을 일차적으로 말씀 선포속에서 우리와 대면하는 은총에 직면하여, 결단을 내리는 것으로 정의한다. 여기서 불트만은 믿음을 결단과 밀접하게 연관된 것으로 이해하려는 경향이 있다. 불트만에게 있어서 인간이 참된 실존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은 자신의 힘이나 재원을 통해서 실현되어지지 않고 전적으로 하나님에게서 나오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총 행위에 의해 그에게 제시되는 것이다. 결단 자체가 불트만에게 하나님의 은총의 선물로 이해된다. 따라서 믿음은 자기자신을 마음대로 처리 가능한 여러 가능한 존재 방식들 가운데 하나를 택하는 해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의 반응이고, 본질적으로 하나님 말씀에 대한 믿음의 반응이고, 그 안에서 사람은 참된 존재의 가능성을 향해 결단하도록 부름받는 것이다.
그렇다면 신앙은 이해의 문제와 관련이 되어있다.
따라서 믿음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일반적인 신뢰나 경건이 아니라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불트만은 이해를 그가 하나님의 행위 또는 그리스도의 사건 또는 케리그마로 부르는 대상에 대해 내리는 결단의 행위로 이야기 한다.
불트만에게 있어서 진정한 신앙은 어떤 역사적인 증거도 거절하고 모든 인간이 만든 안전책을 포기함으로써 어두운 가운데로 뛰어드는 것으로 본다. 신앙을 객관적 안전책 속에서 합법화 시키려는 모든 시도는 따라서 존재에 대한 거짓된 이해에 뿌리를 내리는 것이다. 신앙은 어떤 객관적인 증거도 요구할 수 없고 신앙의 사람은 공중에 걸려있기 때문에, 불트만은 신앙을 모험으로 묘사하기를 좋아한다.
불트만의 해석학에 있어서 믿음과 관련된 두 가지 종류의 언어-역사비평의 대상이고 신앙 없이 접근될 수 있는 객관화 언어와 역사비평을 초월하며 오직 믿음 안에서만 이해될 수 있는 믿음의 언어. 믿음의 언어는 모든 진실된 기독교의 선포속에서 구원 사건으로 나타나는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만 만나질 수 있다.(신앙과 관련없는 역사 비평을 채용하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신앙 위에 기초시킨다.)
이 이원론적 언어관은 신약 자체에서 나온 것이라기 보다는 세계와 실존을 구분짓는 그의 근거 없는 존재론적 이원론 철학에서 나왔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불트만의 해석의 원리들과 하나님 말씀
객관적 실재의 수준에 적용되는 역사비평, 인간 실존의 수준에 적용되는 실존해석, 이들 두 실재의 사이에서 연루된 혼란들을 치료하고 분명히 해주는 신화적 세계상에 대한 비판으로서 중간에 놓인 역할을 담당하는 비신화화가 주된 해석의 원리이다.
역사비평-불트만의 역사비평학의 개념은 포괄적인 것으로 성경의 본문 비평, 자료 비평, 양식 비평, 종교사 비평을 포함한다. 역사 비평은 성경 본문들을 역사 탐구의 대상으로 조사하는 학문적인 방법이다. 그것은 모든 가능한 역사 자료를 수집하고 그것들을 서로 논리적이고 시종일관하게 연결시키며 증거로 부터 끄집어 낸다. 이 비평 방법의 본질적인 특징은 비평, 유추, 상관성의 원리를 통해 어느점에도 고립되거나 절대적이지 않고 도처에 연결되어 있으며 마찬가지로 가능한 모든 것을 포함하는 전체의 맥락에서만 이해될 수 있는 상호 의존되어있는 현상들의 그물 구조를 확립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역사 비평은 폐쇠된 통일체로서 역사개념을 전제하게 되어 모든 역사적 사건들이 역사에 내제하여 있는 요인들과 관련하여서만 해석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불트만 사상에 있어서 출발점은 본질적으로 합리적인 원칙, 즉 역사적으로 주어지고 논증 가능하고, 발견 가능한 것, 우연적이고 관계적이고 상관적인 것등의 표준들을 적용한 것이다. 따라서 역사란 상대적인 것들의 세계와 동일하다.
불트만이 어떤 초자연적인 설명 방식도 거절하면서 반면에 궁극적인 계시의 가능에 관한 그 회의론에 대해서는 비평적인 입장을 취한다는 점이 주목할만하다. 이것은 불트만이 역사비평의 효율성을 인정하면서도, 그가 역사비평의 원리들을 시종일관 내내 따르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역사비평은 객관적인 역사탐구에 적용되고, 객관화 언어는 편파적이지 않고 중립적인 확실성을 얻기 위하여 객관적인 사실들과 역사를 설명하는데 적절하다.
불트만은 신화와 전승으로서의 성경 언어들을 객관화 언어들로 보기 때문에, 역사비평 방법을 통해 연구되어야 한다고 본다.
불트만은 철저한 역사비평을 케리그마 신학에 통합시킴으로서 바르트의 변증법 신학에 합류한다.
역사비평은 신앙을 말씀 속에서 하나님의 현재 행위 위에의 다른 대상에 묶어두지 못하도록 방지해두는 한에서 실재로 신학적 해석과 일치한다고 말한다. 이 점에서 불트만은 역사적인 방법론을 신학적 성찰의 도구로 생각하는데 그 이유는 비평적인 접근 방식을 통해서 모든 것을 의심스럽게 만듦으로서 역사비평은 오직 하나님 말씀에만 의존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불트만의 변증법적 해석학에는 몇가지 약점들이 있다. 케리그마의 자율성은 역사비평을 통해 내버려졌던 객관적 사실들을 희생하고서야만 확보된다는 인상을 피할 수 없다. 역사비평방법은 오늘날 의문스럽게 되었다는 평을 듣게 된다.(역사실증주의자들의 시도를 부당한 것으로 간주한다) 오늘날의 역사비평방법은 그 시대의 가치판단에 크게 영향을 받는다.
역사문제들에 대한 변증법적 접근은 필연적으로 역사적 방법과 케리그마의 신학적 해석 사이의 존재론적 균열을 가져다 준다.
비신화화는 신화적이고 역사적인 진술들의 실존적 내용을 끄집어 냄으로서 언어의 의미를 밝혀주는 해석방법으로 신화의 객관화 언어를 비객관화하는 실존적 언어의 표현으로 재진술하려고 시도하는 한에서 그 이원론적 언어관의 배경하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따라서 그것은 세계와 실재라는 두 실재들 사이에서 연루된 혼란들을 분명히 해주는 신화적 세계상에 대한 비평으로서 중간 역할을 담당하다.
불트만의 비신화화 요구는 그 기보적인 출발점으로서 현대과학과 현대인에 대한 특별한 이해를 전재한다:현대과학적인 자연 이해에서 볼때 그는 주장하기를 성경의 메시지는 현대인이 타당성이 없고 무의미한 것으로 이해하는 낡은 세계상에 의해 모호해지고 불분명해 졌다는 것이다. 그는 세계에 대한 현대적 개념들과 고대적 개념들 사이에 엄청난 거리가 존재한다고 믿기때문이다
불트만에 있어서 현대성의 개념은 아주 철저한 것처럼 보이는데 그 이유는 그것이 시학 케리그마의 타당성을 결정하는 표준으로 가정되기 때문이다.
불트만에 의하면 신약 케리그마의 참된 의더는 그것이 내포하고 있는 세계상에 의존해있지 않고 결단의 대상이 되는 존재이해를 전해주는 것이다. 그래서 불트만은 신화적인 세계상을 없애버림으로서가 안라 그것들을 인간 실존에 관한 진술들로 번역함으로써 성경의 신화들을 재해석하고자 재안한다.
여기서 그는 한스 요나스 영지주의 신화의 속에 영향을 받았습을 강조한다.
비신화화 원리는 이해를 위해 두가지 측면을 지닌다. 하나는 성경신화가 하나님의 행둁위들을 자연과 역사의 지평위에 가시화 시킴으로서 그것들에 관해 객관적인 것을 주장한다는 점에서 그것의 객관적이고 역사적인 측면과 관련이 있고 다른 하나는 성경신화가 인간 실존 이해를 지니고 있는한 그것을 실존적 측면과 연관되어있다.
불트만의 비신화화 목적은 단지 "전통적인 성경 본문들을 잘 가꾸어서 종교를 현대인에게 좀 도 용납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라기보다는 현대인에게 기독교 신앙이 무엇인지 보다 분명하게 만드는 것이다". 비신화화 원리가 현대과학에 의해 형성된 세계상에 근거해서 거짓된 거침돌을 제거하고 그것을 현대인에게 보다 이해가능한 언어로 번역하려고 고안된 것은 사실이다. 또한 인간이 만든 모든 안전책에 안주하려는 현대인에게 거침돌을 현실적인 것이 되도록 부각시키고, 그에게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라는 진정한 거침돌을 가지고 도전하는 것이다.
비신화화의 과제는 복음의 거리낌을 없애기 보다는 낡은 세상이라는 거짓된 거리낌을 제거함으로서 진정한 거리낌이 그 효력을 발휘하도록 하는 것인데 이 진정한 거리낌은 하나님께서 신앙 안에서 만나질 수 있다고 선포하는 것이다.
불트만의 해석학에서 나타나는 내면적인 문제점들-1. 우리는 불트만이 일세기 반 전에나 유행했던 페쇠된 우주라는 잘못된 과학관에 여전히 붙잡혀 있다고 지적해야 할 것이다. 2. 불트만이 기독교복음을 현대 개념에 적응시키려고 하였을 때 한편 신화들을 비신화화 하려고 하고, 다른 한 편에서는 케리그마 속에서 행위하시는 하나님의 현재적인 행위를 강조하려는 데에서 논리적 모순이 발생하게 된다. 왜냐하면 현대 개념은 원칙상 하나님의 해위와 같은 어떤 것도 배재하기 때문이다. 3.객관적인 세계에 대한 불트만의 회의적인 태도는 아마도 여러가지 사상적 배경에서 기원되어쓸 것이다. 먼저 객관적 실재와 종교적 경험 또는 사실과 가치 사이를 근본적으로 구분하는 신칸트철학. 둘째는 믿음을 모든 인간적인 안전책과 객관적인 확실성들과 분리시키는 루터신학, 세째는 인간 이성의 안내를 받지 않는 전제위에 세워진 과학 이전의 세계상으로 이해되는 계몽주의 식의 신화 정의. 네번째 신화를 정신사에 있어서 그 본래 의도와 시기에 낯선 객관화 표현형식으로 간주한 관련론적인 실존주의가 그것이다.(R.A.Johnson)
실존주의 해석
실존주의 해석은 인간 실존을 해명하는데 적용되고 실존언어는 인간존재의 이해 그리고 또한 인간 자신의 자기 이해를 표현하는 신약 케리그마 이해에 적절하다. 실존주의 해석의 직접적인 과제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존재적 논의에 적절한 개념적 틀을 제공하는것이다.
전체적 비판
불트만이 철학의 직접적인 과제를 인간을 참된 존재가 되도록 부르는 것이라기 보다는 그러한 존재가 무엇을 뜻하는지 존재론적으로 분석하여 밝히는 데다 국한시키고 있다.
존재론적인 것과 존재적인 것을 근본적을 구분함에 있어서 과연 옳은가?
불트만이 하나님의 말씀을 어던 비의적인 종류의 언어로 간주하려는 경향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