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의 義사상

- 의인(義認)의 의미를 포함하여

과 목: 바울서신 교 수: 성 종 현

제출자:

학 번: 제출일: '97. 4. 8

Ⅰ. 序 : '의롭다 함'의 진술

바울에게 있어서는 그의 후계인 종교개혁자들과 마찬가지로 오직 신앙만에 의한 "의인(義認)혹은 칭의(稱義)"의 소식이 그의 신학과 사상에서 핵심적 주제라고 할 수 있다. 바울이 가르치는 것은 神은 의롭다는 일반적인 신학적 명제가 아니다. 그의 주제의 특수성은 믿는 자들에게 신의 의를 넘겨주는 것이다.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의 중심적 교리이기도 한 "의인"의 근본개념은 의로운 재판장이신 하나님이 비록 죄인이기는 하지만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을 의롭다고 선포하신다는 데 있다(롬 1:16-17). 의롭다고 보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바른 관계가 회복되었기 때문이다. 위의 편지에서 바울의 의인론(義認論)은 하나님의 종말적 구원행동에 관한 바울의 복음의 근본적이며 동시에 가장 개인적인 표현형태를 나타냈다는 사실을 쉽게 살펴 볼 수 있다.

물론 바울의 구원론은 유대전통의 구원론과의 대결상황 속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이 유대적 구원론은 바울이 이전에 바리새인으로서 자신 주장했었으며, 이제는 유대적이며 극단적인 유대 기독교적인 일부로부터 그리스도 안에서의 구원에 관한 바울의 선포에 대립되어 제기된 그 구원론이다. 그러므로 바울의 의인진술(義認陳述)의 논쟁적 성격은 분명하다.

이러한 투쟁적 맥락에서 근본적인 바울의 진술은 이러한 것이 된다: 하나님의 의가 드러났다. 혹은 명백해졌으며(롬 1:17; 3:21), 하나님은 그의 의를 나타내 보이셨고(롬 3:25-26), 그것도 현재에서 나타내셨다. 그러므로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의는 복음, 즉 복음의 선포를 통하여 드러난다고 말하며(롬 1:16-17), 다른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께서 그를 통하여 죄사함을 나타내 보이셨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으로 말미암아 믿는 자들에게 지금 알려졌다고 말하고 있다(롬3:21-25).

Ⅱ. 바울의 "義"개념

1. 바울이 사용한 용어로서 "義"

'의'라는 헬라어의 여성명사 '디카이오쉬네(ՄՉՊՁՉՏՓՕՍՇ)'는 형용사"ՄՉՊՁՉՏՒ" 와 함께 동사 "ՄՉՊՁՉՏՙ" 에서 파생된 것으로 신약성서에서 총 91회가 나타나며 주로 바울서신에서 나타난다(총 57회). 그 중에서도 신학적으로 가장 무게 있는 서신인 로마서에서만 총 33회가 집중적으로 등장하는 데 이것으로 보아서 바울이 중요하게 사용하는 신학적 중심주제와 관련 깊은 개념의 단어임을 알 수 있다. 이밖에도 이 명사는 마태복음(총 7회), 목회서신(총 5회), 히브리서(총 6회), 야고보서(총 3회), 요한 1서(총 3회) 등에서 발견된다.

이 여성명사는 신약성서에서 동사, 형용사, 부사(ՄՉՊՁՉՙՒ) 와 함께 바울 및 복음서 신학의 중요 개념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 용어의 본래적 헬라어 뜻은 "정의", "적법성", "공평성", "덕으로서의 의", "분배의 정의 및 심판자적 정의"를 의미한다.

바울은 자신의 서신들 속에서 이 헬라어를 다른 단어들과 연결시켜 사용하면서 독자적인 신학적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하고 비중 있는 결합어가 바로 "ՄՉՊՁՉՏՓՕՍՇ ՈՅՏՕ" ( 디카이오쉬네 데우 / 하나님의 의)이다(롬 1:17; 3:21 등). 그 밖에도 바울은 "믿음의 의"(롬 4:11,13), "믿음으로부터의" 내지 "믿음을 통한 의"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롬 9:30; 10:6). 또한 바울은 이 여성명사를 다른 명사와 병행시키거나 대립시켜서 그 의리를 간접적으로 시사하고자 했다. 이때 쓰인 병행어로는 주로 "평화","기쁨","성결","구속","지혜","진리","믿음","사랑","순종" 등이었으며, 반면 대립된 개념으로는 대개 "불의","죄","죽음","불법" 등이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2. 바울의 "의"의 역사적 배경과 의미

바울의 의는 행위에 따르는 보상으로 주어지는 분배의 정의 개념도 아니요, 덕으로서의 윤리적인 개념도 아니며, 심판자적인 정의 개념도 아니라는 것은 그의 용어사용 속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바울의 의는 헬라적인 전통에 그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이 아니라 구약적이고 유대적인 전통에 깊게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그는 이스라엘을 선택하시고 언약의 관계를 맺으며 그 안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과 선민인 이스라엘 백성 사이의 관계성 속에서 이 개념을 사용하고 있다. 그 배경에서 우리는 두 개의 커다란 구약 신학적 주제를 발견하게 된다.그 하나는 "언약(ࠛࠉঢࡪ)" 사상이요, 다른 하나는 세상의 심판자가 되신다는 "야웨 심판자 사상"이다. 인간은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파기하고 죄와 불순종의 길을 가지만 하나님은 끝까지 자신의 신실성을 지키시는 의로우신 하나님으로 증명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의는 첫째로 언약에 대한 하나님의 신실성으로서의 의(Bundestreue Gottes)이며, 둘째는 법정적(forensisch)인 성격으로서의 하나님의 의가 바로 그것이다. 창조주요 역사의 주관자로서 하나님은 세상을 심판하시고 그 중에서도 택한 백성인 이스라엘 민족에 대해서는 언약의 율법을 이행하도록 요구하시는 심판자이며 구원자이시다. 하나님과의 언약관계 안에 있는 모든 인간의 죄는 법정적인 성격을 띠게 되고, 하나님의 의(ࠄএঠঅ/ࠗতং)는 심판에 처한 죄인을 속죄함으로써 의롭다고 칭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의(Heilsgerechtigkeit)"로서 나타난다고 하였다(사 56:1). 여기에서 바울이 말한 '의'를 원어인 히브리어로 보면 이는 "차다크(ࠗࡽॾ)에서 온 말로서, 본래 그 의미는 "규범에 따른다"는 뜻이 있다. 이처럼 카톨릭 전통에 의하면 이 단어는 다분히 윤리적인 성격을 가진다고 이해할 수 있다. 물론 구약의 의의 개념이 이러한 윤리적인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주된 의미가 되지는 않는다. 최근 신학자들은 많은 경우에 의의 개념에서 윤리적인 면보다는 "관계"의 의미를 강조하고 있는데, 이는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구약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스나이드(N.Snaith)에 의하면 구약에 나타난 의의 개념은 "세상사에 있어서 사람이나 사물이 따라야 하고 다른 것을 평가하는 표준"이라고 하였다.

구약에 있어서도 의란 관계 개념으로 이해되고 있으나, 한편으로는 법정적 개념으로 흔히 사용되었다. 특히 그것이 동사로 사용될 때에 주로 법정적 의미가 나타난다. 그러므로 바울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경건치 않은 자들을 의롭다고 하셨다는 사실을 선포하였을 때 그것은 법정적 의미에서 한 말이며, 이 선포는 유대인들에게 커다란 충격을 안겨주었다. 특히 죄의 용서가 율법과는 관계없이, 오직 믿음으로(갈 2:16) 가능하다는 주장은 유대인의 개념으로는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Ⅲ. 하나님의 "義"

1. 하나님의 의란 무엇인가?

바울에게 있어서 '의'사상이란 구약적이고 유대적인 전통에 그 뿌리를 두고 있으며, 심판자이시며 동시에 구원자이신 하나님의 종말론적 구원의 의의 개념으로 등장한다.

바울은 "하나님의 의"라는 개념을 비교적 드물게(6회) 사용하고 있으나, 이 합성어는 묵시문학적인 유대교에서 그의 계약을 성실히 지키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표현하기 위해서 사용된다. 이는 하나님의 행동에 대한 진술이다. 그는 인간이 표상할 수 있는 것과는 전혀 다른 하나님의 행동에 대해 말하고 있다. 인간 특히 경건하다는 유대이등이 율법준수에 의해 자기 의를 세울 수 있다는 생각에 대해, 바울은 그리스도인이 된 이후에 그의 흠없는 율법의 의가 그에게는 "해로운 것"이었으며, 누구도 자신의 행위로는 의에 도달하지 못한다는 것을 주장하게 되었다. 하나님은 율법의 행위를 요구하시거나 참작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의 의는 현재에 나타나게 된 하나님의 행동으로 표현되며, 그러한 하나님의 행동은 '예수를 믿는 사람들까지 의롭다 하심'을 선포하고 있다. 이에 대해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행한 것이 없어도 사람을 의롭다 하시는 하나님을 믿으면 그 사람의 믿음이 그의 의로 인정된다(롬 3:26; 4:5 참조)는 것이다.

바울에게 있어서 의롭다고 선고하는 하나님의 행동은 불경건한 사람을 의로운 사람되게 하며, 죄인을 "새로운 피조물"로 만드시는 창조적인 행동이다(고후 5:17,21). 또한 바울은 로마서 5장 1절에서 믿음을 통하여 의롭다고 선고된 결과로서 "우리가 하나님과 화평하게 되었다"고 말한 바와 같이 그는 율법의 의로부터 전향한 자기 자신에 대하여 이렇게 말한다:"율법에 의한 나 자신의 의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한 의, 다시 말하면 믿음에 세워진 하나님으로부터의 의를 얻으려는 것입니다."(빌 3:9, 골 2:13-14 참조)

2.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의

바울의 "하나님 의"가 죄있는 인간을 현세적인 종말에서 의롭다고 선포하시며 그럼으로써 새롭게 창조하시는 하나님의 구원행동을 뜻한다면, 이러한 신의 행동이 예수 그리스도와 갖는 관계에 대해서도 살펴보아야 한다.

예수와 함께 다가오신 하나님은 예수의 선포 속에서 '하나님의 왕적 통치' 곧 "하나님의 의의 통치"를 드러내시며, 모든 인간적이고 세상적인 의를 물리치시고 자신의 종말론적 구원의 의를 지상에서 실현하시는 하나님으로 나타난다. 이 하나님의 의는 죄인들과의 만남 속에서 일차적으로 "용서의 의"로 나타난다. 죄인과 세리들에게 용서와 구원이 선포되고(막 2:5; 눅 7:48; 19:9), 수많은 병자들이 예수와의 만남을 통해서 치유(=용서)를 체험하게 되며, 가난한 자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된다(막 1:32-39; 마 5:3-12, 눅 6:20-23).

'인간의 의'와 다른 '하나님나라의 의'를 비유를 통해 전파하신 예수는(마 20:1-16), 세리와 죄인들과의 식탁공동체의 사귐으로 자신의 "메시야적 의의 행위"로서 그의 하나님 나라의 비유행위이며, 동시에 종말론적 메시야의 토라로 선포된 원수사랑 계명(마 5:44)에 대한 "메시야적 주석행위"를 보이셨다.

예수의 공생애를 통해 나타낸 하나님의 의는 율법 안에서 의인을 의롭다 칭하시는 "의인 칭의"로 나타나지 않고, 율법으로부터 멀리 떠나 있는, 그럼으로써 하나님의 긍휼만을 바라볼 수밖에 없는 죄인들을 의롭다 칭하시는 "죄인 칭의"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예수는 자신의 임박한 죽음을 하나님의 의에 순종하는 대리자적 속죄 죽음(Sühnetod)으로 해석함으로써 십자가사건을, 세사의 죄를 심판하고 죄인의 죄를 용서하는, 세상을 향한 종말론적 심판과 구원으로서의 하나님의 의의 완전한 계시사건으로 드러나게 한다. 복음의 사도로서 바울의 하나님의 의 사상은 이 예수의 십자가사건에 결정적 근거를 두고 있다. 바울은 하나님의 의롭다 인정하시는 행동을 그리스도의 죽음에서 일어난 사랑의 행동으로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로마서 5장 6절과 8-9절에서 우리는 먼저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사랑이 그리스도로 하여금 우리를 위하여 죽게 하였다는 것이며, 또한 이러한 죽음으로 인하여 이제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고 선포되었으며, 그래서 우리는 종말에 있을 하나님의 진노에서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또한 바울은 속죄로서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낸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이러한 대리적인 죽음으로써 하나님께서는 무엇을 목적하셨는지에 대해서 언급한다.(롬 3:25-26 참조) 즉,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의를 드러내시려 하셨으며, 자신이 의로우심을 보이시고 그리고 그를 믿는 사람들까지도 의롭다 함을 얻게 하시기 위한 것이었다. 예수의 죽음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죄인의 죄를 용서하셨으며 그럼으로써 불경건한 자를 의롭다 칭하셨다.(롬 4:5)

Ⅳ. 의롭다 함(義認)

1. 義認의 종말론적 의미

유대적 전통으로 볼 때 하나님은 의로운신 입법자요, 재판장이요, 마지막 심판 때에 각 사람의 의와 불의를 판단하신다. 이 때는 주로 법정적 의미에서 의의 개념이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종말론적 의미로 사용된 경우도 적지 않다.

로마서 8장 33-34절에서 바울은 마지막 심판 즉, 종말론적 의미로 말하고 있다. 하나님의 심판의 표준은 율법에 순종했느냐 아니면 불순종했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그런데 바울이 로마서 5장 9절에서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된 것 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고 할 때 그것은 미래에 있을 심판을 두고 한 말이다. 따라서 우리가 기다리는 의에 대한 소망은 의에 대한 법정적 선포, 다시 말하면 심판날에 주는 "석방"을 뜻한다.(갈 5:5) 한편 칭의에 대한 보다 분명한 종말론적 이해는 예수님의 말씀 속에서 더욱 잘 나타난다.(마 12: 36,37 참조)

바울이 의를 법정적 개념에서뿐만 아니라 종말론적 의미로 본다는 점에서는 유대적 전통사상과 일치를 보이지만, 바울의 개념은 실제로는 커다란 차이점이 있다. 그 가장 중요한 근본적 차이점은 바울에게 있어서는 미래의 종말론적 의인(義認)이 벌써 일어났다는 것이다(롬 5:9; 5:1; 고전 6:1). 이 구절들에서 바울의 사용한 동사는 모두 단순과거형(Aroist), 다시 말해 "이미 의로워졌다"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이처럼 바울의 종말론적 의미는 미래적 의미로 사용된 유대교와 종말론적이란 점에서는 같으나 그 내용은 전혀 다르다고 하겠다.

2. 법정적 의미에서의 義認

종교개혁 이후 신학자들은 의롭다함의 법정적 의미를 강조해 왔다. 여기에서"법정적"이란 말의 뜻은 통치자요, 입법자요, 심판자이신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의롭다고 선포하는 것을 말한다. 어떤 이들은 이 용어 대신에 '새 신분', '새 관계'(D.E.H. Whiteley)라는 말을 쓰는 데, 그 의미는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볼 수 있겠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의란 개념 속에 '윤리적 개념'을 배제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ՄՉՊՁՉՏՙ" 속에 "의롭게 만든다"는 뜻은 없으며, 오히려 신분, 즉 의의 관계를 말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실제로 일부학자들은 의인(義認)의 법정적 의미에 대해 그것이 허구에서 시작되었다는 견해(Sanday, Headlam)나 실제적인 "전가된 의"(V. Taylor)로 보는 주장을 한다. 그러나 스나이드(N. Snaith)는 Taylor의 의의 개념을 비판하며, 윤리적 의란 그것이 실제적인 것이든 전가된 것이든 아니면 주입된 것이든 그것을 구원의 필요조건으로 보는 것은 바울의 교훈을 우스꽝스럽게 만드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의란 결코 하나님밖에 있는 어떤 필요가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의로 보아야한다. 의를 하나의 도구로 보는 것은 잘못이며, 법정적 의는 실제적 의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관계는 인간의 윤리적 조건과 마찬가지로 실제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하나님께 대한 관계는 결코 허구가 아니며, 하나님도 결코 죄인을 의인처럼 취급하시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법정적 의미의 의는 허구가 아닌 실제적 의이다.

3. 의인(義認)의 근거와 수단

의에 대한 종말론적, 법정적 개념에서 유대사상과 다소 유사해 보이는 점을 지닌 바울의 의사상은 그러나 근본적 차이점을 더욱 분명히 하고 있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롬 2:13) 라고 말함으로써 율법을 받아들이는 것과 의는 전혀 관계없음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로마서 3장 20절에서는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하심을 얻을 사람이 없다고 못박고 있으며, 율법으로는 다만 죄를 깨닫게 될 뿐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義認의 근거로 그가 주장한 것은 율법에 대한 순종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 위에서의 죽음인 것이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죄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의 지고지순한 표현이며 또한 義認의 근거가 되는 것이다.(롬 5:8)

십자가, 즉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義認의 근거가 된다는 것을 자세히 밝히고 있으나, 義認의 수단은 바로 개인의 신앙에 의존하는 것이다. 여기서 신앙이라 함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역사를 수용하고 그것에 절대적으로 의존하며 자신의 공로에 대한 의지나 그로 인한 칭의는 철저히 거절하는 것이다.

Ⅴ. 結 : 以信稱義(이신칭의)

예수의 십자가 처형을 예수의 패배로 인식하고 그를 떠났던 그의 제자들은 예수의 부활이후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 속에서 다시 한번 그들을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의-죄인 칭의를 경험하게 된다. 이들의 고백적 신앙전승은 이후에 나타나는 기독교 칭의 사상에 주요근거로서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게 된다. 바울 자신도 예루살렘 신앙공동체와 그 신앙전승에서 큰 영향을 받았다. 또한 그의 의사상은 역사적 예수에 대한 원시교회의 칭의적 신앙전승과 자신의 그리스도 체험 즉, 다메섹 사건을 바탕으로 형성되었으며, 유대교의 율법주의자와의 신학적 논쟁의 상황 속에서 구체화되었다. 다메섹에서 부활예수를 직접 체험한 그의 "죄인 칭의"개념은 하나님의 의는 율법의 의가 아닌 오직 믿음의 의라는 사상으로 발전되며 이는 그의 신학과 사상의 핵심이요 진수가 된다. 그리스도의 복음에서 계시된 하나님의 의는 이신칭의(以信稱義)의 새로운 역사로 칭의의 은총아래 있는 인간을 종말론적 의의 삶으로 인도한다. 또한 하나님의 의를 체험한 자들에게 이제 그들의 삶을 드려 하나님의 세상갱신의 역사에 능동적으로 참여토록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은 하나님의 의에 힘에 사로잡힌 복음의 사도로서 가장 기독교적이고 성서 신학적인 자신의 고유한 언어로써, 복음 속에 계시된 하나님의 의를 선포하고 있다.

바울의 의사상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는 로마서의 한 부분을 공동번역으로 살펴보면서 글을 맺는다 : 로마서 3장 21절 - 28절

"그러나 이제는 하느님께서 인간을 당신과 올바른 관계에 놓아주시는 길이 드러났습니다. 그것은 율법과는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율법서나 예언서가 바로 이 사실을 증명해 줍니다. 하느님께서는 믿는 사람이면 누구나 아무런 차별도 없이 당신과의 올바른 관계에 놓아주십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하느님이 주셨던 본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잃어 버렸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모든 사람을 죄에서 풀어 주시고 당신과 올바른 관계를 가질 수 있는 은총을 거저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에게는 죄를 용서해 주시려고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제물로 내어 주셔서 피를 흘리게 하셨습니다. 이리하여 하느님께서 당신의 정의를 나타내셨습니다. 과거에는 하느님께서 인간의 죄를 참고 눈감아 주심으로 당신의 정의를 나타내셨고 오늘날에 와서는 죄를 물으심으로써 당신의 정의를 나타내셨습니다. 이렇게 해서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올바르시다는 것과 예수를 믿는 사람이면 누구든지 당신과 올바른 관계에 놓아주신다는 것을 보여 주십니다.

그러니 우리가 내세울 만한 것이 무엇입니까? 아무 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해서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되찾게 되었습니까? 율법을 잘 지켜서 그렇게 된 것입니까? 아닙니다. 그것은 믿음을 통해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사람은 율법을 지키는 것과는 관계없이 믿음을 통해서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다고 우리는 확신합니다."

참 고 문 헌

* 성종현, 신약총론, 장신대 출판부, 1991.

* 성종현, 신약성경연구, 장신대 출판부, 1994.

* 귄터 보른캄/허혁 역, 바울 그의 생애와 사상, 이대 출판부, 1978.

* W.G.큄멜/박창건 역, 주요 증인들에 따른 신약성서신학, 성광문화사, 1991.

* 신성종, 신약신학, 기독교문서선교회, 1983.

* 그레샴 메첸/김남식 역, 성운출판사, 1979.

* N.Snaith, Distinctive Ideas of the O.T.,1944.

* D.E.H.Whiteley, The Theology of St. Paul.

* 한글 개역 성경

* 한글 공동번역 성경(카톨릭용)



"기독교 교육의 새 전망

(Letty M. Russell 著)"을 읽고-
















과 목 명 : 기독교 교육

교 수 님 : 고 용 수 님

제 출 자 : 조 계 영(9331112)

제 출 일 : 1997. 4. 23

들어가는 말

New York의 East Harlem 프로테스탄트 교구에서 14년간 목사와 교사로서 사역한 저자의 경 험과 W.C.C의 전도 연구위원회 연구원으로 일한 경력의 산물인 이 책은 기독교 교육에 대해 거의 문외한이었던 나에게 다소 낯설지만 신선한 충격이요 유익한 정보였다. 이에 본서의 내용을 정리하면서 그 내용에 대한 소감을 적어보도록 하겠다.

러셀은 자신의 경험의 신학적 반성으로 두 가지 시야를 얻었다. 그 하나는 하나님의 은총에 대해서 신앙자는 이 세상을 "장미빛 색안경"을 통해 '믿음의 눈'으로 세상을 본다는 것이다. 믿음의 눈이란 성서적 시각과 관점 내지 시야로서 이것으로 심판과 용서의 양쪽을 볼 수 있다. 즉, 구속사적 관점에서 세계를 조망하여 역사의 한복판에서 하나님의 활동과 세계사적 사건을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의 일부분으로 어떻게 사용하시는지를 보는 눈이다. 또 하나의 시야는 증인 공동체의 생활은 일치(unity)이라는 점이다. 교회안의 교육은 교회생활의 전체 속에 포함된 것으로 증인공동체 장에서 분리될 경우 그 의미를 상실하게 된다. 그러므로 증인공동체내의 일은 신앙적이든 불신앙적이든 모두 기독교 교육의 양육과정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전도에 대한 그녀의 경험은 선교적 차원에서 보는 기독교 교육이라는 새로운 측면을 제시한다. 교회회중의 구조라는 면에서 하나님의 선교로서의 사명 즉, 선교활동이란 곧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 세상을 자기와 화해시키려는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함이며, 여기서 기독교 교육은 이 참여의 초청을 감당하는 것이다. 두 번째로는 하나님의 선교의 영역인 역사적 세계는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어지고 있는 현실세계이며, 선교자로서 그리스도인은 세상사건에 대한 하나님의 행위를 증언하도록 요구받고 있다. 그리고 이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에 대한 이해와 사회구조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교회의 선교구조 역시 변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Ⅰ. 기독교 교육 : 하나님의 사랑과 선물

제 1부 에서 현재의 기독교 교육이 '자녀에게 빵대신 돌을 주고 있다'는 현실비판에서부터 출발한 저자는 기독교 교육은 하나님의 좋은 선물에 관한 것으로 하나님의 사랑의 선물에 사람들이 참여하게 되기 위한 길들 중의 하나라고 주장한다. 이에 대한 분석으로 기독교 교육의 몇 가지 오류를 지적한다. 먼저 기독교 교육이 교회의 사유물화 되었다는 것이다. 즉, 1780년 Robert Raikes의 주일학교 운동이 시작될 때부터 19세기 대각성 운동을 거쳐 최근의 주일학교를 비롯한 기독교 교육은 항상 교회의 관심사로서의 자리를 지켜오면서도 고작해야 시대의 문제나 교회발전을 위해 그리고 사회의 도덕적 상황에 대한 "작은 반창고"로서의 역할 밖에 감당치 못했다. 결국 번번이 하나님의 아들 딸들에게 주어진 것은 생명의 빵이 아니라 "돌"에 지나지 않았다 (마 7:9-11)고 한다.

기독교 교육에서 잘못된 두 번째 것은, 기독교 교육을 교회생활의 다른 부분으로부터 분리해서 결국 교회의 통일을 부정해버린 일이라 한다. 그 동안 교육적인 효과라는 이유로 혹은 관리상의 능률성이란 관점에서 구획을 그어왔으나, 교회는 결코 특수한 지적 훈련의 장으로 고립되어서는 안된다고 주장한다. 증인 공동체로서 교회는 여타의 상황과는 달리 어른, 아이, 남녀노소가 모두 참여하는 하나님의 선물로서 그 존재와 양상의 중요성이 강조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교회가 교육을 사유화하고 있는 한, 교회는 거침돌이 될 수밖에 없다며, 교육은 하나님의 사랑의 선물의 일부라는 것은 매우 중대한 개념이라는 것이다.

저자의 개념에서 기독교 교육은 교회에 예속하는 선물이 아니다. 그것은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사랑의 선물이기에 교회도 또한 이것에 동참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교사는 곧 그리스도 자신이며 그가 성령을 통하여 우리들을 하나님의 자녀로서 인간다운 인간으로 지어주신다. 또한 그리스도는 단지 교사일 뿐만 아니라 교육의 내용이기도 하다. 그리스도의 생애의 사건들은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을 분명히 하고, 또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아들과 딸로 받아들여 주시는 복음의 메시지를 형성하고 있다. 이 교육의 장에서 교회의 교육적 역할은 교사가 되는 일이 아니라, 교육을 받는 모든 자들의 파트너가 되어 함께 일하는 자로서 거기 참여하는 일이다. 만일 기독교 교육이 하나님의 사랑의 선물에 참여하는 일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교회생활의 다른 모든 영역과 관련 짓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다른 부분도 역시 그 사랑에의 참여이기 때문이다(눅 11:13). 기독교 교육은 다른 것으로부터 분리되어 구획화되자 마자 벌써 기독교 교육일 수 없게 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힘에 의해서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생활 안에 일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선물 전체에 관계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기독교 교육이란 것은 하나님과 이웃과의 화해를 통해서 참 인간성을 회복하시려는 하나님의 선교의 과업에 참여케 하도록 남녀노소를 묻지 않고 모든 사람에게 열려져 있는 그리스도의 초청에 우리 자신도 참여할 수 있기 위한 방법이다. 신약성서에서 복음의 선교는 즉시로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생활을 하라는 교육이며, 다시말해 선교 즉, 복음을 선전한다는 것은 그대로 복음이란 무엇을 뜻하는가를 교육하는 일이다. 그리스도적 관점에서 볼 때 교육이란 한 개의 독립한 범주는 아니다. 그것은 정녕 복음 그 자체의 일부이다.

변천하는 세계를 장(場)으로 하는 기독교 교육의 의미를 살펴보면서 저자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를 "과정과 변화의 세계"라고 본다. 세계를 둘러싼 가장 중요한 것은 역사이며, 그것은 세계가 바야흐로 위기와 변동의 한복판에 있기 때문이고, 세계는 사건이 인간생활을 형성하고 있는 곳이며 인간이나 국가나 하나님도 끊임없이 유동하고 있는 세계이다. 저자는 류웬(Leeuwen)이 그의 저서 "세계 역사 속의 그리스도교"에서 사용한 용어를 인용하여 테크노크라시(기술 지배)의 세계관와 로고스적인 그리이스 세계관 그리고 소위 과학적인 세계관을 소개하면서 오늘의 기술지배 현상은 운명적인 필연은 아니며 시간과 역사의 산물이라고 규정한다. 이 현실세계 속에서 그리스도인의 사명은 이 세계와 자유의 일부분으로서 인간을 참 인간되게 하고 진실하게 책임을 짊어지는 주체자가 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세계적인 목적에까지 시야를 넓게 보는 일, 그러면서 모든 인간에 의해 날조된 이데올로기들을 끊임없이 부정해 가는 일이라 한다.

기독교 교육과 이 세상의 일반적인 교육과 그 이념 간의 구획을 긋는 데는 상당한 어려움이 있다. 이는 첫째, 교회도 역시 이 세상의 일부로서 그 교육적인 생각은 모두 시대의 정치적, 사회적 제반 관계와의 다함없는 상호작용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이다. 둘째로, 교육이란 과정은 학교, 가정, 교회 그리고 그 어느 장소에 관계없이 어디서든지 일어날 수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또한, 교육의 분야에서 교회의 주요한 책임은 완벽한 교회 교육의 조직을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세속의 교육제도 속에서 이 세계를 위한 주님의 누룩으로 주께 봉사해 나가는 일이다. 그러므로 사람들로 하여금 참 인간성을 회복할 수 있도록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미션에 참여하도록 그리스도의 초청에 참여하는 일이 곧 기독교 교육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세속 학교 제도에 대한 깊은 관심과 유효적절한 행동을 수반하지 않는 기독교 교육은, 불가능하지는 않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무의미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다소 보수적인 장로교회가 세속교육에 대해 거의 무지하다는 것은 실로 안타까운 일이라 생각되며, 관련 세상분야에 대한 보다 전문적인 연구가 필요하다고 느꼈다.

세상교육과 마찬가지로 변화를 겪고 있는 오늘의 기독교 교육은 그 이념의 변화에 주목하게 한다. 그 첫째 변화는 교육자들이 변화하는 세계를 위한 교육에 관하여 이야기할 수 있게 된 일이다. 즉, 사람들이 끊임없이 변화하는 "현대의 유동사회" 안에서 생존할 수 있을 교육이 행해져야만 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로는 교육자들이 지식의 구조를 규명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며, 또한 특정한 학습훈련이 주어지는 것은 미래의 학습에 도움을 주기 위해서라는 기본적인 태도를 학습자가 파악할 수 있는 방법이 탐구되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러한 구조학습은 브루너(J. S. Bruner)의 말대로 "먼저 기능이 아니라 한 일반적 관념을 학습하는 것으로, 그 일반적 관념은 그 후에 따르는 문제를 최초에 습득한 관념의 특수한 사례로 인식하기 위한 기초로서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 이런 브루너의 생각은 "낚시 잡는 법을 먼저 가르친다"는 유대인의 교육방법의 적절성을 떠올리게 했다. 세 번째 변화는 프로덕션 팀(Production Team, 생산성 집단:당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임기웅변(ad hoc)으로 형성된 집단)의 한 부분으로서의 교육활동의 강조이다. 러셀은 이런 집단은 교육의 영역에서 두 가지 중요한 기능을 갖는다고 적고있다. 곧, 전문성을 요구하는 새로운 교수법의 문제와 문제해결을 위한 기능집단에 참가함으로써 학습에 대한 새로운 흥미와 동기를 발견하게 되는 학습활동의 문제라는 것이다.

이와같이 변하는 세계 속에서 기독교 교육 역시 변화와 과정의 세계 속의 교육이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저자는 또한 교회의 전통적 체질인 구조주의적 근본주의를 극복해야 할 것으로 보고있다. 하지만 기독교 교육 그 자체는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하게끔 모든 사람들에게 그리스도가 제공해 주고 있는 하나님의 사랑의 선물 속에 계속 머물러 있어야 할 것이라는 주장에 대해서는 다분히 율법적인 구조에 젖어있는 한국의 많은 교회(우리 교회를 포함해서)의 현실에는 다소 과격하게 들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Ⅱ. 기독교 교육의 장(場) : 증인 공동체

신명기 6장의 "쉐마"의 말씀에서 출발한 제 2부에서는 오늘날 기독교 교육이 결국 증인 공동체(Witnessing Community) 즉, 하나님의 구속의 사건을 체험한 자들이 그 기쁨을 말과 행위로써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의 축가를 부를 수 있는 공동체 안에서 비로소 가능하다는 견해에서 시작하고 있다. 또한 이 구속의 이야기는 오직 생활 속에서 리얼하게 체험될 수밖에 없다. 그런 이유에서 증인 공동체 없이는 기독교 교육이란 없다고 단언하는 것이다. 저자는 세상 속의 교회를 기독교 교육의 장으로서 이해하고 있으며, 기독교 교육 행위가 "참여"라는 성격을 내포하는 이상 우리도 또한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자신의 행위 안에 내포된다고 한다. 실제로 그리스도의 초청이 주어져 그 의미가 해명될 수 있게 하는 장(場)은 그리스도와 세계 사이의 계속적인 대화라는 구조를 지닌 살아 있는 콘텍스트에 다름 없기 때문에 기독교 교육에 있어서 증인 공동체가 이루는 역할이 바로"장(場)"이다. 그러나 한국교회의 현실은 거의 동일 종교집단의 수준에 머무르고 있으며, 삶을 나누는 공동체로서의 역할을 감당하는 교회가 얼마나 될지 의구심이 생겼다.

증인 공동체는 반드시 어느 특정한 타입의 교회와 동일시되지 않는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인 사람들의 모임이다(마 18:20). 이것은 확실히 이스라엘 신앙공동체와 비슷한 면모를 지니고 있는데, 그것은 그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으 힘있는 구속의 역사를 그들의 자손에게 전해 주었으며, 그 증거를 매일 매일의 삶 속에서 새롭게 살아내도록 힘썼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후로 이 증언이 이방의 모든 국민들을 대상으로 해서 원심적으로 널리 퍼졌다는 점에서 그리스도인 공동체는 이스라엘과는 다르다(롬 1:5). 이 증인공동체는 이 세계 안에 자신을 드러낸다. 증인 공동체는 이 세계에 속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하기 위해 그리스도의 부름에 응할 장소는 바로 모든 인간이 서로 섬기는 필요에서 함께 사는 이 세계이다. 이런 공동체로서의 교회는 이 세계와 자신을 분리해서는 안 된다. 또한 기독교 교육의 질과 성패를 좌우하는 고정적인 콘텍스트가 바로 그리스도인의 공동체이다. 그러나 1965년에 린(Robert Lynn)이 지적한 대로 "교회가 전체가 걸어가야 할 방향을 상실하고 참 사명을 망각한 채로 무기력하게 되어 있다는 표상"이 바로 오늘의 프로테스탄트 교육의 위기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기독교 교육이 성립하는 장은 증인 내지는 파송자(missionary)의 공동체이다. 그리고 그 임무는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의 선교를 위해 신도들을 정비하고 격려하는 일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하도록 하나님에 의해 부름받고 이 세계에 파견되어 있기 때문에 분래적인 의미에서 미셔너리 즉, 파견자의 공동체이다. 흔히 사용하는 "전도(evangelism)"이란 용어는 그리스도에서 모든 사람이 복음의 사실의 현실화를 목표로 하여 교회가 그 생명을 걸고 문자 그대로 도를 전하는 것이다. 이런 생각에서 "증언", "파견", "전도"는 교회의 본질과 기능의 전체를 표현하는 점에서는 전적으로 일치하며, 이는 기독교 교육의 개념과도 근본적인 차이는 없다. 기독교 교육도 역시 하나님의 선교 사명에 참여할 것을 목표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기독교 교육과 선교의 구별은 다만 관점과 시각의 차에 있을 뿐이라는 것이 저자의 생각이 나에게는 미쳐 깨닫지 못한 새로운 지식이었다.

증인 공동체의 구체적인 구조나 조직 형태는 다양한 기능과 그 때 그 때 요청되는 임무에 응해서 다양해야 한다. 이것은 현대의 다원적인 복합 사회에서 사회적인 여러 관계가 이미 단일한 형태로 될 수 없기에 교회의 여러 구조도 다원화의 방향을 잡지 않을 수 없음을 의미한다. 고로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개개인의 흥미나 필요 혹은 사회 동향에 적응한 방법으로 증언에 임무를 감당하려고 지향하는 한 소위 주거지 형태의 교회(residential congregation)만을 유일한 규범으로 볼 수는 없다. 여기서 교회의 본질적인 기능에 맞추어 몇 가지 기본적인 형태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소위 가족으로서의 교회구조(family structure)이다. 이는 종래의 주거지 형의 교회성격을 띠고 상호 신뢰감과 연대감 아래 각자가 사회에 대한 봉사의 생활을 이루어 가는 것이 중요하다. 둘째는 대응적인 상설 봉사기관형의 교회구조(structure of permanent availability)로 이는 교회의 장기적인 봉사활동을 위한 형태이다. 제 3의 타입은 소위 "기동부대형의 교회구조(task force structure)"로 이는 그때 그때 특수한 요구, 기능, 목적에 따라 임기응변적으로 편성되는 것으로 일정한 임무가 성취되면 해산해도 무방하다고 본다. 그러나 다소 보수적인 생각일지도 모르겠으나 과연 제2, 제3의 형태가 진정한 교회의 모습일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물론 예수의 이름으로 모인 사람들의 단체이니 교회라고 주장한다면 할 말은 없지만, 과연 그 속에서의 예배의 의미는 어떤 것인지 모른겠다.

저자는 여기서 교회의 구조형태에 관한 유연한 이해를 위해 몇 가지의 지침을 제시하고 있다. 첫째, 증인 공동체의 멤버쉽은 근본적으로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봉사하기 위해서 저 쪽에서 부른 초대, 즉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하도록 부르시는 하나님 자신의 일하심에 기초를 둔다는 점을 상기시키고 있다. 둘째로 참가자 측의 개인과 전체의 문제로 항상 다른 사람들과의 연대를 실현하는 방향이 기본적으로 중요시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셋째는 참가자의 조직 형성은 그리스도와 그의 일하심에 응답하려고 뜻하는 자에 대해서는 그들의 궁극적인 헌신을 명료한 것으로 하고, 그렇지 않은 참가자에 대해서는 그리스도인과의 연대를 원하는 그들의 의지를 존중하는 길을 여는 일이 되는 것이다. 넷째, 이런 증인 공동체의 규율은 그 집단들의 개별과제를 실현하기 위한 가장 적절한 필요에서 육성된다. 또한 다양한 형태를 지닌 증인 공동체에 있어서 교육적인 과제 또한 다양화(a variety of shapes)를 동반하게 된다는 것은 분명하다는 것이다.

교회는 가족구조로 이해되고 불리워지고 있는데, 그것은 교회가 곧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모든 시대의 인종, 성별, 계급의 차이를 넘어서서 모든 남녀와 노유가 한 "하나님의 가족"으러 결합되는 근본적인 장소가 된다. 신약성서에서 "집(oikes)"은 특히 "하나님의 한 집안, 혹은 가족"으로 교회적인 공동체에 적용되고 있는데, 소위 "하나님의 백성의 종말적인 소집체로서의 가족"이라는 의미로 명확히 파악되어 있다. 이는 결코 특정한 가족 단위와 즉시 동일시되는 것은 아니다. 그 안에는 전혀 차별이 없기에 그 멤버가 되기 위한 특별한 패턴 같은 것은 없다. 따라서 "하나님의 가족"의 성격은 각 상황에 따라서 다양한 형태를 취할 수밖에 없다. 또한 여기에는 친족일가는 물론 일꾼이나 노예까지도 포함하는 이른바 대가족 제도를 가리킨다. 이처럼 하나님의 집안 내지 가족이란 단적으로 말해서 그리스도인이 형성하는 특이한 소집단이며, 여기서는 모든 것이 오지 그리스도의 사랑에 의해서 하나가 되어 있기에 계급이나 인종의 차별대우 등은 일절 있을 수 없었음이 확인된다(갈 3:27-28)는 것이다. 여기선 한국 교회 안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차별성과 계급구조가 떠올라서 기분이 상했다. 복음 안에서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도 차별이 없다는 사도 바울의 주장이 생각난 부분이었다.

저자에 의하면, 하나님의 가족으로서 현대에 있어서 가족적인 형태의 증인공동체는 구조상으로 신약성서의 오이코스와 유사하지만, 이것이 사회전체의 구조를 그대로 대표하는 것 같은 신약성서의 "하나님의 가족" 개념과 즉각 동일시 할 수는 없다. 오히려 다원적이고 복합적인 현대사회에 있어서 오이코스적인 구조를 가진 타입의 증인 공동체를 첨가해서 다시 몇 개의 보충적인 형태, 그것도 때에 따라서는 가족적 타입과 대립하는 구조를 갖는 새로운 공동체의 가능성에 대해서도 충분히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한다. 중세기에 있어서 교회는 서서히 개인을 기본적인 단위로 하는 집단의 성격을 띠게 되고, 가정 생활은 실질적으로 세속화되어 소위 그리스도교적인 제사의식도 차츰 쇠퇴해 갔다. 그런데 1500년경 까지는 사회가 안정하고 교육이 보급됨으로써 사회생활의 주요한 무대인 가정 생활의 회복이 이루어져서, 다시 가족이라는 이념 그 자체가 변용되기 시작하는 사태가 생겼다. 사실 루터는 참 그리스도인이 되며, "손과 입을 가지고 복음신앙을 고백하기 원하는" 자들에 대해서 우선 가정 교회를 형성해야 한다고 열심히 권고했다. 그 뒤 산업혁명의 시대를 거쳐 프로테스탄트 전체로서는 대개 중산계급의 가정 구조와의 사이에 자기 동일화를 시도했던 경향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현대의 소위 핵가족은 단지 두 개의 기본적인 기능, 즉 어린이들을 사회의 구성원으로 이끌어 올리기 위한 사회화의 기능과 성인들을 사회 대중 속에 정당하게 자리잡게 하는 안정화의 기능 주에 어느 한 쪽 또는 쌍방을 충분히 다하는 한에 있어서만 유효성을 지닐 수 있을 뿐이다. 현대사회의 다원화 현상에서 가족적인 타입의 구조를 갖는 증인 공동체라는 것은 일정한 거주지역에서 생활하는 남녀노소를 봉사의 일을 위해 소집함을 기본적인 목적으로 하는 교회적인 교제를 말한다.

그렇다면 이런 가족적 구조의 형태의 특질이란 무엇인가? 러셀은 먼저, 교회 그 자체가 한 가족으로 서서히 성장하고, 그 결과 서로의 사이에 공감과 신뢰가 오가며 거기에 희망이 생기는 일을 들고 있다. 그래서 모든 자가 아마도 그 생애에서 처음으로 가족의 일원이 되었다는 사실의 깊은 의미를 체험적으로 알 수 있도록 이끌어 가는 점에 있다고 본다. 중요한 특질은 그 자체가 바로 한 가족처럼 기능하며 항상 사랑과 신뢰로 충만해 있다는 점이다. 여기서는 서로 돕고 회목하고 함께 일하고 또 때로는 사랑에 의한 상호비판이 행해지는 것이다. 진실한 공감과 작은 모임의 역할은 그 안에서 행해지는 모든 일이 그 자체로 양육과 훈련의 과정의 의미라는 것이며, 생활을 통한 교육이라는 점에서는 성인교육도 교회학교 교육과 마찬가지로 준비되어야 한다. 교회의 생활이 곧 기독교 교육이라는 저자의 견해에 크게 공감하면서도 현실적인 어려움에 안타까웠다.

이런 교회의 성격상 지도자로서 목사는 특히 "어머니"의 역할이 요구된다는 점이 또하나 흥미롭다고 하겠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성(性)이 아니라, 당사자의 적성 유무, 또 가족으로서의 친됴의 심장부가 될 의지를 갖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그는 권위적인 태도가 아닌 기능적 의미에서 권위를 갖고 함께 수고하며 서로 사랑하는 가운데 상호비판을 이끌어 내는 역할을 충분히 감당해야 한다.모계구조 교회에서는 본질적으로 남녀노소 간에 차별이 없으므로, 교육의 과정은 각자가 각기 좋은 은사를 살려 타인을 위해 섬기도록 하는 "상호교육"의 책임이 존재하며, 이같은 공동학습의 접근이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나님의 "가족교회"는 다음의 몇 가지 그 구성요건이 적용된다. 첫째로, 그 지역이 사람들의 주거의 현장인 동시에 생활의 장인지를 살펴야 한다. 둘째로, 교회는 그 멤버가 서로 도와가며 건전한 상호비평을 할 수 있도록 가능한 한 규모를 작게 하고, 모두가 모였을 때, 낯선 사람이 하나도 없게끔 화친하는 관계가 실현되고 있는가의 여부도 음미해야 한다. 또한 교회는 스스로 포용적 성격을 유지하고 있는가에 대해 자기평가해야 한다. 끝으로, 가족 타입의 교회의 목사나 지도자는 성도들을 돌보기 위한 "어머니"의 역할을 진지한 심경에서 받을 각오가 있는가 없는가를 스스로 물을 필요가 있다. 이런 점에서 우리나라 교회의 목회자들의 자질을 새롭게 평가해야 할 필요성을 제기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나 자신도 목회자 후보생으로서 교회 내에서 어머니의 역할을 감당할 의지가 있는 지를 스스로에게 물어보는 계기가 되었다.

한편, 다원화된 사회구조에 대응하기 위해서도 증인 공동체의 모양도 다양해진다. 이렇게 다양해진 증인 공동체에서의 교육은 그 형태에 관계없이 그것이 그리스도에 의해 소집되고 인간의 참 휴머니티를 회복하는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하기 위해 정비되고 훈련됨을 목적으로 하는 "증인 공동체"라는 점 이외에는 전혀 자유로우며 유동적이고 가변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다. 교회의 대응적 구조중에서 상설 기관으로서 교회는 요구되는 조건이 있다. 먼저 일정한 "장소"가 필요하다. 즉 사람들이 언제나 수시로 이용할 수 있을 유효한 대응 기관이 상설되어야 한다. 또한 그 성격상 봉사의 제공을 위해서 유능한 "인재"가 필요함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더구나 그 구성은 많은 경우 복수일 것이 바람직하다. 봉사자의 팀으로서 교회는 결코, 봉사 대상자를 자기 집단으로 끌어 모아들이는 일을 꾀하지 않고 오히려 무조건적으로 봉사를 제공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기동적인 구조형태는 반드시 일정한 "장소"를 점유하지 않으며, 관심의 중심은 오히려 직면하는 문제 그 자체에 향해져 있어서 구성원들은 전체 에너지를 그것을 위해 투입한다고 한다. 기동적 구조를 가진 집단은 항상 복수멤버로 구성되지만, 그들의 목적의 실현을 위해 소수의 숙련된 전문가의 지도를 필요로 한다.

이러한 교회의 기동적 그룹은 항시 사회의 누룩으로 작용하여 모든 불의와 인간소외의 문제를 근절하기 위해 방향을 찾아 새로운 길을 개척하는 사명에 살아가야 한다. 그래서 일단 사회 스스로가 그 기능을 자기 힘으로 담당할 수 있게 되면 교회 그룹은 해산하거나 적어도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나가, 그후에는 주의 깊은 파수꾼이 되어 대힌 일을 맡은 정부나 다른 사회 기관들이 완전히 그 임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간접적으로 조력함이 바람직하다고 한다. 나는 이것을 사회구원의 입장에서 보는 것으로 이해했으며, 진정한 교회의 사명은 무엇이고 사회구원에 대한 기독교 교육의 입장을 정리함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러셀은 증인 공동체로서의 교회의 여러 구조는 그 자체가 매우 유동적이며 가변적이라는 사실을 다시한번 상기시키고, 교육의 장으로서의 여러 교회의 구조들을 설명하고 있다. 먼저 교육과정의 구조는 월등히 대화적 성격을 나타낸다고 한다. 교육의 방법은 참여라는 형태를 취하게 되며,교육의 목적은 성서가 말하는 의미의 자유의 축하잔치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교육의 장소는 증인공동체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그녀는 프랑스의 떼제(Taize)공동체 등 미국과 유럽의 몇몇 공동체와 기관들의 예를들고 있으나, 한국적 현실에서 적용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기독교 교육을 교회 내의 교육으로만 한정짓고 싶어하는 우리의 시각과 많은 차이가 있다고 느꼈다.

Ⅲ. 기독교 교육의 구조 : 대화

누가복음 24장의 엠마오 도상에서 부활 예수와 제자들의 만남에서 그 실마리를 찾은 러셀은 이런 대화야말로 기독교 교육의 구조 혹은 형태라고 주장한다. 즉 열려진 "믿음의 눈"을 가지고 우리들은 지금도 일하시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사랑의 복된 소식을 위해 기쁨으로 증거하는 일의 양방을 모두 이해하게 된다는 것이다.

사람들을 참 인간으로 변혁하려는 하나님의 선교에 우리가 참가하려는 데 있어서, 어디서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기독교 교육적인 이해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가능한 것인지를, 러셀은 밝히고 있다. 이런 이해는 기독교 교육이라는 대화에 참여할 때 성령에 의해서 주어진다는 것이다. 이 대화는 하나님과 세계와의 대화러서 그것은 이 세상에 있어서 하나님의 미션으로 부르는 그리스도의 초청으로서, 증인 공동체가 귀를 기울여야 할 부분이라고 주장한다.

그리스도가 어떻게 사람들을 결단과 헌신으로 이끌어 주시는가를 보여주는 비유로 저자는 누가복음 24장을 들고 나온다. 여기서 분명한 것은 첫째, 이 대화가 엠마오의 도상에서 (on the road)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그것은 이 세계의 한복판에서라야 참 대화가 일어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둘째로 이 대화는 "이야기하며, 의논하고 있는" 공동체의 산물이다. 또한 셋째로 대화라는 것이 자기계시의 사건에서 절정에 도달한다는 것으로 제자들은 이때에야 믿음의 눈을 뜨게 된다. 끝으로 이 대화가 결국 증언의 행위로 다른 사람의 믿음의 눈도 뜨게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기독교 교육의 구조로서 대화는 이중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그 하나는 하나님과 이 세계와의 대화이며 다른 하나는 하나님이 이 세계를 향하여 어떻게 말씀하시는가 하는 의미를 가지고 교사와 학생들 양측이 한 회화 속으로 이끌려 들어감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모든 교육에 있어서 참 인간관계는 대화를 통해서 가능하다는 주장과 함께 기독교 교육의 대화적 성격을 강조하고 있다. 여기서 나는 기독교 교육의 구조를 이해함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출발하여 이와같은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저자는 성서는 하나님의 역사에 대한 이해의 기초이며 나아가서 하나님의 활동에 참가할 수 있도록 우리를 장비하는 일이 곧 성서연구라고 말하고 있다. 또한 성서를 연구하는 구조 역시 대화적인 구조여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한번 누가복음을 인용하면서 러셀은, 성서학습의 대화적 구조를 설명한다. 즉, 한길 위에서의 대화여야 하며, 공동으로 즉 그룹연구로, 그리고 신앙의 사건을 볼 수 있는 진지함으로 임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녀는 또한 이러한 성서연구의 대화적 구조가 하나님 이해에 의한 사람이해가 가능해진다고 본다.

대화의 장으로서의 자연적 사회집단은 생산성 집단과 동료 집단이 있으며, 러셀은 이들이 교육적 대화에 있어서 적극적 요소와 부정적 요소가 있다고 분석한다. 특히 어린이와 청소년의 동료 집단은 그들의 생활의 중심점으로서 그들의 생활에 중대한 영향을 미친다고 보고 있는데 주일학교와 중고등부 교사로 수년간 일해온 나에게는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이었다.

Ⅳ. 기독교 교육의 방법 : 참여

기독교 교육은 모든 인간들이 하나님의 선교에 참가하도록 부르시는 그리스도의 초청에 교회가 참여할 수 있기 위한 수단이라고 정의하는 저자는, "참여"에서 인간의 평등, 횡적인 관계 속에서의 학습 경험 중시, 인간 지성의 창조적 사고로의 해방 등을 강조하고 있으며, 칼빈의 교회는 교육을 그리스도의 학교에서의 끊임없는 참여의 과정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현실의 교회 생활에서는 참여라는 것이 그다지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그 이유로는 오늘의 교회가 크건 작건 계층적인 직제조직으로 굳어져 버렸다고 한다.

이미 앞에서 언급한 대로, 기독교 교육의 교사는 참여하는 교사이다. 이는 그리스도가 참 교사이며, 기독교 교육의 교사는 이 그리스도의 활동에 참여하는 자에 지나지 않는다. 또한 증인 공동체가 기독교 교육이 이루어지는 장이라고 한다면, 이 공동체가 곧 그 자체로 가르치는 팀이 된다고 볼 수 있다는 것이 러셀의 주장이다. 이런 관점에서 그녀는 가장 자연스런운 교육 형태로 팀티칭(Team teaching)을 들고 있다. 어떠한 교육 구조의 형태를 취하더라도 하나님의 선교의 봉사를 위해 성도들을 준비시키는 그리스도의 활동에 참여하는 증인 공동체 전체의 기능을 나타내는 것이 된다는 것으로, 이는 최근 한국의 몇몇 교회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가족적인 분위기의 공동체교회의 한 모습이라고 생각된다. 주일학교라는 구조적인 틀에 메이지 않고 부모님과 자녀들이 함께 예배하고 성경연구와 봉사활동에도 같이 하는 교회는 목사로부터 유아에 이르기까지 공동으로 서로 서로에게 교사가 되는 것이라 볼 수 있겠다.

상호교육의 방법으로서 팀티칭은 특히 동료 그룹 교육의 주요한 부분이며, 미숙한 교사나 어린이들이 자기 나름의 지식이나 경험을 매우 자연스럽게 오늘의 어린이에게 연결시켜 응용할 수 있게 된다고 한다. 모든 팀티칭에 있어서 결정적 요소는 봉사실천을 통한 훈련에 있으며, 여기서는 교사도 배우는 것이다. 또한 팀티칭은 그룹의 계획수립(group planning)을 의미한다고 한다. 팀에 의한 계획수립은 거기 참여하는 각자가 자기에게 적합한 책임을 자진해서 맡는 태도를 촉진시키데 그 의의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것은 나의 경험으로도 공감이 가는 부분이다. 학생들과 함께 한 가지 목표를 정하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필요한 항목들을 나열한 뒤에 현재 우리가 갖고 있고 할 수 있는 모든 자원(RESOURCES)들을 점검하여 구체적인 실천계획의 단계들을 설정하는 과정을 통해 학생들은 물론 교사인 나에게도 많은 것을 얻는 기회였음을 회고할 수 있었다.

러셀은 참여의 카테키즘이란 용어를 설명하면서, 이는 하나님과 이 세계 사이에 오가는 대화에 참여하는 증언과 봉사의 공동체가, 이 대화를 통한 사색에 참여함으로써 각자가 생각하는 법을 배울 수 있도록 이 공동체의 생활 전체와의 관련에서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를 둘러싸고 물음을 일으켜 가는 것이라고 한다. 다소 생소하고 난해한 이 부분은 공동체, 놀이, 성서라는 세 학습분야를 통해 구체적인 예를 보고서야 조금씩 이해할 수 있었다. 먼저 공동체는 학생들이 매일 살아가고 있는 세계로서의 공동체이며, 그것은 그의 일상생활을 형성하는 동료집단 및 생산성 집단으로서의 공동체이다. 또한 그것은 그가 이 세계와 사회적인 계층에 그와 함께 참여하는 증인 공동체이다. 여기서 봉사와 연대성 그리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이해된다는 것이다. 두 번째로, 놀이는 복음의 기능이 자유와 해방을 주는 것(갈 5:1)으로 볼 때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쁨"에 참여토록 초청하는 것이 된다. 셋째는 성서로서, 참여의 카테키즘이 학생들로 하여금 마치 자기 자신이 성서 이야기의 한 부분이 된 것처럼 느껴지게 한다는 것이다. 내가 볼 때에도 이런 경험은 이 세계 속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사역에 대한 "믿음의 눈"을 소유하게 한다고 생각된다. 다만 저자가 자신의 경험에서 말하고 있는 축제와 그후의 연계된 구체적인 "운동(MOVEMENT)"에 대해서는, 우리의 현실에서는 요원한 이야기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에 회의적이기 되고 말았다.

그리스도가 참여라는 방법을 통해서 우리의 생활을 형성하신다고 전제한 저자 러셀은, 삶의 스타일을 통한 참여를 이야기한다. 그녀는 우리가 그리스도를 향하여 성장해 감으로써 그리스도는 우리의 일상적인 행동이나 관습을 어떤 한 스타일 즉 삶의 모습으로 형성해 간다고 한다. 나는 특히 이 부분에서 많은 공감과 함께 나 자신을 반성하게 되었다. 저자에 의하면, 그리스도와의 관계 속에 살면서 이 세계 한복판에서 기능적으로 일하기에 적합한 크리스천의 삶의 모습을 이루도록 추구해 나갈 때, 우리는 두 가지 위험 앞에 직면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 하나는 이런 크리스천의 삶의 모습이 그가 살아가고 있는 개개의 상황에 따라서 끊임없이 변한다는 것을 망각해 버리는 위험이다. 이 경우, 단지 관습에 불과한 것이 어떤 종류의 율법이 되며, 크리스천의 삶의 모습이 근본적으로 종의 모습임이 망각되어 그것이 일종의 우월감을 동반하는 특권의식으로 대치된다는 것이다. 또하나 다른 위험은, 그리스도에게 대한 복종의 형태가 이렇게 세상의 상황에 따라서 계속 변화해 가더라도 복종 그 자체는 결코 변해서 안 된다는 사실을 망각하기 쉽다는 점에 있다고 한다.그리스도에 대한 복종이라는 견고한 관계에서만 주님을 따르는 생활 형성이 가능하게 된다고 볼 때 이점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하겠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상을 나타나고 있는 사도행전 2:42-47의 말씀을 통하여 러셀은 크리스천의 삶의 모습이 잘못 이해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 오해의 하나는 크리스천의 삶의 모습이 고정적인 것으로 이해된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고정된 어떤 하나의 패턴이 있다는 이해라고 한다. 그러나 누가는 주님을 증거하면서 "활동하고 있는 교회"라는 포괄적인 주제 밑에 움직이고 있는 교회를 묘사하고 있다는 것이 러셀의 이해이다. 이러한 삶의 스타일이 목표하는 것은 선교 곧 하나님의 미션이 되며, 또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항상 기능적이고 행동을 동반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러셀은 사도행전 2:42-47의 이해를 바탕으로 누가의 의도를 설명하고자 한다. 초대교회의 삶의 스타일은 곧 선교활동의 스타일이며, 증인 공동체는 하나님께 향하여 열려진 생활 형태와 이 세상을 향해 열려진 생활형태를 모두 소유함으로써 이 선교적인 스타일에 참여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활동의 형태야말로 크리스천의 삶의 스타일의 원형이라는 이해를 가짐으로써 이 두 초점은 우리들의 생활 안에서 계속 대화적인 관계를 갖게 한다. 증인 공동체는 자기들이 하나님을 알게 된 것은, 하나님 자신이 -성서와 성례전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될 것을 굳이 선택하셨기에 가능했음을 인식한다. 이 때 성서는 우리 가까이에 계시며 일하고 계신 그리스도의 화해의 활동을 분별해 내고 우리 생활 어느 부분에서 그리스도를 따를 것인가를 아는 데, 즉 신앙의 눈을 얻는 데 도움이 된다고 보는 것이다. 진지한 성서연구나 묵상과 토론 등으로 우리가 귀를 기울여 들으려는 자세를 취할 때, 하나님의 말씀하심은 여러 방법, 특히 우리가 전혀 예기치 못한 방법으로 우리에게 말씀하시여 우리의 행동을 이끌어 믿음의 눈을 뜨게 한다는 것이다. 나는 지난 2개월에 거쳐 개역과 공동번역으로 구약성경을 통독하면서 러셀의 견해가 사실임을 체득했다고 말 할 수 있다.

한편, 러셀은 성례전이 우리들에게 대한 하나님의 사랑의 고지(告知)와 하나님이 우리를 자기의 백성이 되게 하시는 일을 나타내기 위해 그리스도에게서 받은 표징이라고 한다. 하나님은 물세례로써 우리를 죄의 지배적인 힘으로부터 해방하고, 떡을 뗌으로써 그리스도가 다시 오실 날에 우리의 새로운 삶이 완전히 성취될 때까지 우리를 계속 용서하시며 갱신하신다. 이 두 개의 성례전은 증인 공동체의 예배와 행동의 중심을 형성한다. 그것이 과거와 현재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행동과 현재와 미래에 있어서의 우리의 응답의 행위를 하나로 묶어주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하나님의 구속의 활동은 용서, 자유, 희망 등의 선물을 우리들에게 주어 우리가 그것을 이 세상으로 가지고 나가도록 해주는 것이다. 세례의 기원이나 성례전의 오용 등에 대한 수많은 논란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증인 공동체 생활의 중요한 부분임에는 틀림없다고 하며, 성례전 없는 기독교 교육은 핵심이 빠진 것이 되어 버린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성례전이야말로 하나님의 미션에 참여하도록 부르시는 그리스도의 초청에 대한 응답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세례와 성찬의 의미 속에서 기독교 교육의 핵심을 발견해내는 러셀의 설명에서 예전에는 단순하게 생각하고 참여했던 성례전에 대한 반성과 함께 예수 그리스도의 모든 삶의 구체적인 행동이 결국엔 나를 비롯한 모든 따르는 자들에게 교육의 실마리를 제공하고 있다는 생각에 감사하는 마음과 경외하는 마음이 생겼다.

구체적으로 러셀은 유아세례와 성찬을 설명한다. 유아세례는 하나님의 은총으로 모든 사람들이 아무런 조건없이 받아들여 진다는 사실을 들어내며, 어린이는 그 안에서 교제하며 자라가면서 한 사람의 회원으로 인정되고 양육되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성찬의 의미에 대해서는 그것이 가능한 한에서 모든 증인 공동체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우리들은 자기를 음미하면서 왜 내가 이 식탁에 참여하도록 허락되어 있는가를 생각할 뿐이라는 사도 바울의 말을 통해서 볼 때, 이 식탁에 참여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충분히 가치 있는 존재여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것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여기서 하나님의 은총이 다시한번 강하게 드러나고 있다.

증인 공동체는 하나님을 향하여 열려진 생활 스타일에 참여함과 동시에 이 세상을 향해 열린 생활 스타일에 참여하는 존재이다. 이 증인 공동체는 하나님과 세상과의 대화적인 관계에 참여하는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세계가 항상 변화를 추구하는 성향이 있으므로 이 세계를 향해 열려진 생활을 하는 우리의 삶의 스타일은 이 세상의 변화에 호응하여 변화하는 것일 수밖에 없다고 하겠다. 이런 세상에서 우리들이 감당해야 할 가장 중요한 삶의 모습이 봉사라고 저자는 주장하는 바, 형제들에게 대한 우리들의 봉사 활동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대한 사랑과 긍휼의 자발적인 발로일 뿐 아니라, 비뚤어진 사회 안에도 하나님의 고침의 힘이 확실히 일하고 계시다는 사실의 표상이 된다고 한다. 크리스천에게 있어서 봉사의 활동은 봉사적인 재능의 강매가 아니라, 만인의 종이 되기 위해 오신 주님께 대한 복종과 이 세상을 위한 주님의 봉사 사업에의 참여에서 생기는 것이다(빌 2:6-8).

봉사하는 삶의 방식은 타자와 함께 봉사의 공동체에 참여함으로써 배워야한다고 하는데, 이는 나의 대학시절 기독학생연합회에서의 봉사와 교제의 경험에 비추어 볼 때 전적으로 동의하는 바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도움과 자극과 본이 되어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겸손과 희생에 대한 몸으로 직접 느낄 수 있다는 것은 증인 공동체의 커다란 유익 중의 하나일 것이다. 우리들 스스로가 이 세상을 향하여 열려진 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또 하나의 삶의 방법, 탐구하는 삶이다. 탐구하는 일이야말로 자유롭고 기쁨에 넘친 크리스천의 삶의 특질이라는 것이 러셀의 주장인데, 탐구하는 삶이란 신앙의 눈을 가지고 이 세계를 주의 깊게 들여다보며 하나님의 행하신 일들을 통해 하나님과 함께 산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믿음의 눈을 가지고 이 표상들을 탐구하고 현대의 큰 사회적, 정치적 분열, 그들 간에 존재하는 갭, 사람과 사람 사이의 갭, 평화와 화해를 가져올 길을 발견하도록 힘쓰는 것이다. 이런 탐구 가운데 비로소 우리의 기도가 참되고 우리의 삶 속에서 저 엠마오 도상의 제자들에게 일어났던 일들을 기대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삶의 특질로, 러셀은 먼저 연대성(連帶性)을 말한다. 이 연대성은 자기를 다른 사람과의 상호의존의 관계에 있는 자로서 받아들임으로써 또한 그 상호의존성을 증인 공동체 안에서 실제로 경험함으로써 양성되는 것이다. 예수는 모든 사람과 연대하시는 분으로, 연대성이라는 특성있는 삶의 방식은 자기 생명을 타자를 위해 바친 이 분에게 복종함으로써 성장된다고 한다. 공동체 안에서는 무거운 짐을 서로 나누어 지고 서로 간의 벽을 무너짐을 경험하게 되는 데, 이것이 곧 연대성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또 하나, 다소 공감이 안되지만, 러셀이 주장하는 크리스천의 삶의 방식은 세속성(secularity)이라는 것이다. 그녀에 의하면, 그것은 크리스천의 생활이 인위적으로 짜여지는 종교적 관습의 포로가 되는 것을 방지하며, 그런 종교적 행위를 가지고 하나님의 호의를 획득하기 위한 교묘한 수단으로 변질시키는 일을 막으며, 단순한 습관이나 미신의 노예가 되는 일을 방지하며, 우리들이 진정 그리스도의 사랑의 선물에 의해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자유를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힘에 의해서 역사의 움직임이나 운명을 두려워하면서 살아갈 필요를 느끼지 않는 세속화된 인간,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한다. 저자에 의하면, 우리는 현대인이 크리스천이 되기 위해서 어떤 특정한 틀에 박힌 종교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세계관을 받아들이 필요는 없다고 주장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녀는 계속해서, 성숙한 세계에 있어서는 증인 공동체의 양상도 성인된 스타일 즉 세속화라는 모습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스도인은 스스로 자기가 살고 있는 세계에 참여하는 모든 자유를 향유하는 존재라는 것이며,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가 그리스도로부터 명령 받은 임무와 이웃을 향해 항상 생각이 깊어야 한다는 것이다(고전 10:23-24).

샬롬(Shalom) 또한 그리스도인의 삶의 요소 중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인데, 그것은 요컨대 이 세계가 희구하고 있는 상태를 나타냄과 동시에 하나님께서 새롭게 개조될 세계에 관해서 의도하고 있는 상태를 지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샬롬은 하나님이 그 백성에게 주시는 평화, 전체성, 중요성, 그리고 번영의 선물을 나타낼 때 쓰인다는 것이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힘에 의하여 모든 인간의 삶의 스타일이 이루어져야 할 모습, 또한 그에 의하여 실현할 수 있는 모습을 지시한다고 본다. 저자 러셀은, 샬롬이 우리들과 하나님, 또 이세상과의 화해 관계를 의마하는 것이기에 그것은 크리스천 생활의 모든 특질을 총괄하고 있는 것으로, 모든 형태의 크리스천 삶의 스타일의 근거라 해도 좋을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와같이 크리스천 삶의 모습을 향해서 성장하기 위해서는 복종이라는 구체적인 우리의 의지와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며, 이렇게 형성된 삶의 모습을 구성하는 개개의 크리스천들의 행위는 결국 그 사람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이다. 또한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습은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마 16:24)"는 예수님의 말씀을 실현시키는 것이므로, 그것이 선물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모순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저자는 우리의 삶의 모습은 이 세상의 고난과 불안, 이웃과의 연대 관계, 봉사라는 방향으로 우리를 횡적인 방향으로 밀어 넓히며, 동시에 우리의 생활과 그 성장의 근원인 하나님과의 "위와 아래"의 관계 즉 종적인 방향으로 우리의 생활을 밀어 넓힘으로써 형성되는 십자가의 길이라는 설명을 하고 있다. 삶의 구체적인 모습을 통해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짊어진다는 설명은 복음적이란 느낌이 들었고, 기독교가 결코 세상을 외면한 개인의 안일함만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Ⅴ. 기독교 교육의 목적 : 축하의 잔치

마태복음 25장의 양과 염소의 비유로 시작하는 제 5부에서 저자는 이 비유가 전체적으로 지향하는 것이 이른 바 "자유로운 봉사자"가 되지 않으려는 제자들에 대한 철저한 비판이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주님 되시는 분의 이름을 몰라도 순수한 마음으로 이웃에 봉사하는 자에 대해서는 기쁜 위로를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이 비유의 중심 사상은 "자유"이며, 그리스도인은 여기서 섬기기 위한 자유를 획득한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저자 러셀은 기독교 교육의 궁극적 목적을 유출해내고 있다. 즉, 기독교 교육의 궁극의 목적도 한번 그리스도와 만난 자들이 이 같은 자유의 축하연에 함께 참여하여 그 끝 없는 사랑에 충일되어,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 자신이 펴고 계신 화해의 사명을 함께 가지고 새롭게 살아감으로써 자기 자신으로부터 전혀 해방되어 타자를 위한 존재로 변혁해 가는 일을 빼놓고는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이다. 환언하면, 기독교 교육은 하나님이 그 백성을 구원하여 그들에게 자유를 얻게 하기 위해 힘있게 일해 오시는 일체의 활동을 기뻐하고 축하하는 일이라고 정의될 수 있다. 여기서 하나님의 선교의 사명의 내용은 인간이 자기와 타인에 대한 화해를 얻음으로써 참 인간다움을 회복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기독교 교육의 실천은 이미 한 번 하나님에 의해 성취된 일, 지금 여기서 일어나고 있는 현실을 모든 사람들이 기뻐하고 축하하면서 새롭게 사는 것을 목표로 한다고 러셀은 말하는 바, 나는 여기서 선교와 기독교 교육의 연계성에 대한 설명이면서 동시에 교회의 교육의 전체성 내지 연계성이란 측면에서 교회의 본질적 사명에 대하여도 탁월한 이해가 이루어지고 있다고 본다.

축하잔치의 구조에 대해서 저자는 교육의 과정과 마찬가지로 대화적 구조를 언급하고 있다. 그것은 하나님과 세계사이의 산 대화로서 구원의 활동과 약속이 역사의 각 사건들을 통해서 실현되는 전 과정을 통해 성립된다고 하며, 그 구체적인 삶의 모습으로 두 가지를 말한다. 우선 예배의 생활 속에서 하나님과 세계 사이의 대화에 참여하여야 한다고 한다. 왜냐하면 교회 공동체는 예배를 통해서 구원의 사건을 축하하며, 거기에서만 집중적으로 하나님의 이름이 숭상되고 그리스도의 이름이 칭송되기 때문이다. 둘째로는 봉사의 생활을 들고 있는데, 여기서도 같은 축하의 사건이 타자를 섬기는 일상생활의 한 복판에서 새롭게 시작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계속해서 저자는 증인 공동체의 예배 생활은 그것을 통해 하나님에게 대한 자유를 표현하는 것이라 한다. 하나님은 공동체의 생명과 구원의 원천이며 우리들을 모든 공포, 욕망, 제약, 과오로부터 해방하여 참 자유를 얻게 하는 힘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은 이미 과거에 알려지고 현재 경험하려는 하나님의 구원의 일을 축하하기 위해 기뻐하며 모여드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크리스천의 공동예배는 거룩한 교제의 잔치이며, 문화의 향연이며, 신앙고백의 축하잔치라고 할 수 있다. 성찬의 축하잔치로서의 예배는 세상과 자신을 화해시키시기 위해서 아들을 세상에 파견하셨다는 사실만을 기뻐하며 축하할 뿐이다. 여기서 성찬의 의미는 이미 우리를 한몸으로 부르시고, 차별이나 편견이 없이 서로나누는 사랑의 교제에 대한 환희의 상징이 된다고 한다. 성찬식 뿐만 아니라 실은 교회의 모든 예배 전체가 마치 가정에서의 식사 모임과 같이 형식에만 치우치지 않은, 서로 화친감(和親感)에 넘친 자연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내도록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볼 수 있다.

러셀은 그 충실화의 방법으로 "교회의 관심사"와 "친교의 악수"를 예시하고 있다. 러셀에 의하면, 예배에다 성스러운 교제의 축하 잔치로서의 의미를 붙이는 가장 중요한 길은 현실적으로 성찬을 지키는 일이며, 교회는 스스로 고유한 사명을 기뻐하고 축하하기 위해서 가능한 한 예배에서 성찬의 성례전을 중요시해야만 한다. 이와같은 주장은 예배의식과 현실적인 번거로움의 이유로 성찬을 하나의 행사로 전락시켜 버린 오늘의 한국교회가 재고해야 할 내용이며, 예배의 갱신을 위한 구체적인 대안이 제시되는 장면이라고 하겠다. 크리스천 공동체의 예배는 문화의 축하 잔치이기도 하며, 이는 성육신의 교리가 지닌 의미를 잘 드러내고 있다고 하겠다. 문화의 축하 잔치로서 예배는 공동체의 삶이 문화생활과 유리되어 이루어질수 없다는 점과 문화형태가 곧 예배의 매개체가 된다는 점을 감안할 때 놓쳐서 안 될 것이다. 이 때 또한 고려되어야 할 것은 구체적 타당성을 갖기 위해서 대상에 대한 배려가 심사숙고되어야 한다는 것과 사명을 수행한다는 것의 의미가 차별이나 형식, 의식행위가 배제된 평등하고 균질화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즉, 중요한 것은 교회의 예배 전체가 우리들에게 지금 알려져 있는 문화의 풍요함과 깊음을 기뻐하며 축하하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일치와 함께 자유도 함께 구가함으로써 그것 자체가 이 세계에 대한 유효하고도 적절한 증거가 된다는 사실이다.

증인 공동체의 예배가 신앙 고백의 축하잔치라는 것은, 예배가 사람들이 모여서 거기서 죄의 참회를 하고 신앙의 고백을 공공연히 하는 갱신의 기회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예배를 통해 자신의 자격없음을 통감하고 계속적인 용서와 은총에 대해 거의 완전한 환희를 맛보게 되며, 하나님의깊은 자비와 도움을 얼마나 필요로 하는가를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증인 공동체가 하나님과 세계 사이의 축하 잔치인 대화에 참여하는 일은 예배 외에 특히 봉사의 생활을 통해서 표현된다. 여기서 저자는 이 봉사의 생활이 말씀에 의한 증언과 함께 기독교 교육의 목적으로 재설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세상을 위한 자유의 축하 잔치에 참여한다는 것은 우리들이 우선 자기 자신으로부터 해방되는 자유를 얻음으로써 타인에게 봉사하는 참 기쁨을 체득하지 않는 한, 그 실현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자기로부터 탈출해서 밖을 향해 몸을 던져 타자를 위해 섬기는 일이란 극히 어려운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크리스천의 성장이란 결국 자기로부터의 자유가 타자를 위한 자유로 비약해서 이상스러운 방법으로 전환되는 과정을 뜻하며, 우리는 모두 간단 없이 반복하여 새로운 출발점에 서지 않으면 안 된다. 이렇게 자유의 봉사를 사는 크리스천을 육성하는 것은 기독교 공동체의 대목표이며, 교회는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하기 위한 그리스도의 초청을 넓혀, 부르심이 사람들에게 정확하고 바르게 들려지며 또한 기쁨을 가지고 받아들여지는 일을 위해 소명받았다고 말할 수 있다.

저자가 본서에서 반복해서 주장하는 것을 정리하면, 기독교 교육이란 사람들을 참 인간성으로 되돌려 세우시려는 하나님의 선교 사명에 참가하도록 모든 사람들에게 대하여 제공되고 있는 그리스도의 초청에 참여하는 일이며, 그것이 성립하는 자리는 특히 증인 공동체라고 불린다. 이 증인 공동체의 구조는 하나님과 이 세계 사이의 대화의 관계로 특색 지어지며, 거기서 실천되는 교육의 과정은 세상에 있는 교회의 본질적 사명에 참여하는 것으로 비로소 완성된다. 그 목적은 한 마디로 "축하의 잔치"이며, 이는 하나님이 이미 행하신 일, 현재 이 세사의 한가운데에서 하려 하시는 일을 말에 의한 증언과 사랑에 의한 봉사의 활동을 통해 기뻐하고 축하하는 일이다. 이렇듯 기독교 교육은 곧 축하 잔치의 교육이다. 따라서, 기독교 교육의 내용을 축하잔치 이외의 무엇으로든지 변화시키려는 것은 저 바리새인들과 같이 하나님이 자기 자녀들에게 좋은 선물을 주시려는 기쁜 일을 근본적으로 부정하고 그리스도의 승리의 축하 잔치에서 이미 나누어 주어진 생명의 빵 대신 돌을 주는 행위일 것이다. 나 자신의 신앙이나 우리 교회의 교육이 이와같이 빵을 즐기지 못하고 돌을 들고 괴로워 하는 모습인 아니었는가 하는 반성으로 이 책을 덮었다.

『신앙교육의 터전』을 읽고 나서-

과 목 명 : 기독교 교육 개론

담당교수 : 고 용 수 님

제 출 자 : 신대원 1학년 9331112 조 계 영

제 출 일 : 1997년 6월 12일



- 들어가면서 -

저자인 엘리스 넬슨은, 기독교인들은 종교의 전달을 교리의 설명이나 전달의 기관들(예를 들면, 주일학교와 청소년 모임), 또는 전달의 수단(예를 들어, 설교나 가르침)의 관점으로 보는 오해가 있다는 전제에서부터 출발한다. 그는 이 책에서 모든 전달의 요소들을 간접적으로 다루고 있으나, 그의 주된 논지는 종교란 가장 깊은 차원에 있어서는 인간의 감성(setiments)에 자리잡고 있으며, 어릴 적에 자신을 돌보아 주는 어른들에 의해 사회화되는 방식의 결과라는 것이다. 그가 주장하는 핵심적인 문제란, "어떻게 성경에서 우리에게 계시된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계발하느냐? 그리고 신앙이란 삶에서 무엇을 의미하느냐?"이다.

이러한 질문은 우리로 하여금 교리나 기관이나 전달의 수단으로부터 몇 가지 질문을 하게 한다. 즉, 왜 신앙이 있느냐? 어떻게 신앙이 전달되느냐? 어떻게 신앙이 전달될 수 있는 의미로 계발되느냐? 그러한 의미는 수정될 수 있느냐? 만약 있다면 어떤 조건하에서 가능한가? 이러한 질문들과 이와 유사한 질문들은 종교적 관점의 기초가 되는 가정들을 다루고 있다.

계속해서 저자는, 종교적 삶이 갖는 비논리적 기초를 탐구할 때에 도달하는 분명하지 않은 경계에 대해서 말한다. 우리의 도덕적 삶의 뿌리는 종교적 신앙을 생산하는 토양 안에 함께 섞어져 있다는 것이다. 그의 주장은 신앙이란 성도의 공동체 의하여 전달되며, 신앙의 의미는 그들의 역사와 상호간의 관계를 통하여, 그리고 삶에서 일어나는 사건들과의 관계에서 계발된다는 것이다.

저자가 자신의 방법을 기술하면서, 그는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를 묻기 전에 성경이 무엇이냐(what it is)를 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다음에 우리는 성경이 말하는 바(what it says)를 분석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는 것이다. 즉 그는 여기서 권위의 근거로서의 성경의 의미를 다루고 있는 바, 성경은 신앙을 통해서 하나님의 메시지를 분별하고 그분의 뜻을 자신의 삶에 실천했던 사람들의 공동체를 기술한 책으로 보고 있다. 성경은 역사적 설화나 시, 전쟁의 노래, 드라마, 신조, 복음, 지혜문학, 비유, 예언의 집합으로 구성되어 있다. 또한 그는, 우리가 다루어야 하는 실체는 성경을 생산했던 공동체들이란 주장을 하며, 신앙의 형성과 전달에 있어서 신앙 공동체의 역할과 의미를 살피고자 한다.

사회학과 문화인류학의 연구결과들을 참조하면서 저자는, 시회과학의 과정으로 기술하고 있는 것이 바로 신앙공동체가 신앙과 그 의미를 전달했던 과정을 기술하고 있다는 것을 파악하고 있다. 엘리스 넬슨의 생각은, 신앙교육이란 신앙공동체의 사회화 과정이라고 보자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리하여 그는 인간의 공동체를 연구하는 사회과학자들의 분석적 방법들을 사용함으로써 우리는 어떻게 이 과정이 작용했는지를 알 수 있으며, 이를 이용해서 기독교 신앙의 전달을 이해하고 개선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기독교 신앙이란 문화 밖으로부터의 원천을 주장하기 때문에, 기독교 신앙전달을 위해 사용하는 방법의 어려움을 말한다. 이는 기독교인은 자신을 문화의 산물이며, 문화 안에서 살지만 그러나 문화와는 다소 다른 삶의 방식을 개발하기 위해서 애쓴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한다. 나는 이 부분에서 문화 밖의 원천 즉, 초월적 하나님의 존재와 의미가 강조되는 느낌을 갖게 되었다. 문화란 종교적 전통과도 같이 역사적이다. 성경은 전통의 일련의 기록된 의미의 해석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분석은 다분히 현재와 미래를 그 관심의 영역이 된다. 왜냐하면 만일 과거를 잘못 해석하면, 오늘에 대한 안내를 잃게 되고 하나님을 '살아 있는 하나님'으로서 알지 못하게 되는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Ⅰ. 전달의 개념과 내용

"신앙은 전달될 수 있다"는 명제로 시작하여 저자는, 이 명제의 사실성과는 별개로 그러나 어떻게 전달될 수 있는지를 묻는다. 그는 인간현상의 관찰자로서 사회과학자들의 방법을 빌어오고자 한다. 사회과학은 인간행동에 대한 서술, 설명, 예측하는 데 그 기능의 목적을 두고 있다고 한다면, 저자의 방법은 긍정적일 수 있다는 생각으로 이해했다. 사회과학자들은 문화의 일부로서의 종교적 신앙의 중요성을 평가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신앙을 측정하거나 한 개인으로부터 다른 개인 또는 한 그룹으로부터 다른 그룹으로의 경로는 추적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경험적 자료에 의존하는 사회과학자들은 그들이 자유로이 사용하는 방법으로서는 종교적 신앙을 규정할 수 없다는 그의 주장도 수긍할 수 있다.

엘리스 넬슨은 우리가 왜 이 질문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의문시하면서, 신앙의 전달이란 너무나도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신비적 경험에 깊이 관련되어 있고 또 너무나 개인적이기 때문에 그 과정에 대한 어떠한 체계적인 연구나 그 과정을 조장하려는 노력은 또다시 에덴동산의 유혹이라고 말하는 몇몇 교회지도자들의 견해를 들고 있다. 그러나 그의 따르면, 비록 우리는 하나님이 신앙의 원천이라는 사실을 알지만 하나님은 신앙을 전달하기 위하여 인간에 의존한다는 것이다. 이 사실에 의해서 우리는 어떻게 신앙이 전달되고 있는가하는 질문에 대답하도록 한다는 것이다. 이 질문에 대한 우리의 신앙 아래 깔려 있는 동기는 바로 진리에 대한 소망이라는 것이다. 또한 우리는 우리의 사역에 목적을 제시하고 우리의 효율성을 판단하기 위해서 우리는 전달의 개념을 필요로 한다. 이것은 우리가 나아가는 데 대한 방향을 정해야 하고 우리의 여정에서 만나는 실질적인 문제들에 대해 결정할 수 있는 관점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전달의 개념이 필요한 또다른 이유는 각각의 전달형태를 이해하고 다른 형태와의 관계를 이해하기 위해서이다. 역사적으로 설교와 가르침은 표면적인 신앙 전달방법이었고, 예배와 치유와 사회활동은 이면적인 방법이었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어떻게 전달할 것인가에 대한 대답으로서, 저자는 모델형태의 정신적 구조를 말하고 있다. 모델이란 의식적이고 무의식적인 요소들에 의해서 마음에 형성된다. 의식적으로 우리는 우리의 마음의 모델을 볼 수 있으며, 모델과 우리의 하는 일에 대한 거의 자동적이고 반사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다. 무의식적인 요소들은 개인적인 경험들, 특히 어릴 적의 경험들로부터 생겨난다. 이러한 요소들은 의식적인 모델들 아래 기초하고 있는 감정적 힘을 제공한다. 전달의 모델의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는 실재의 개념으로서 이는 정신적 이미지를 형성하고, 전달의 통로를 정의하고, 메시지의 실체와 본질을 받아들이는 기관을 형성하도록 돕는다.

여기서 저자는 전달의 방법으로서 4가지의 범주를 들고 있다. 먼저, 정신을 통한 전달을 말한다. 어떤 전달의 모델들은 실재란 개념들 안에 있고, 신앙의 의미를 받아들이고 전달하는 기관은 정신(mind)이라는 가정 위에 기초하고 있다. 이성을 중시하는 것으로 보이는 이 범주에서는, 종교적 지식이나 교리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설교와 가르침은 교리의 설명이다. 표면적이든, 이면적이든 요구되는 것은 신앙이란 어떤 것이든 간에, 하나님에 대한 신앙의 표현으로서 주장되어야만 하며, 사람의 정신이 전달의 주된 통로라는 전제이다. 그러나 저자는 이 범주의 방법들은, 신앙을 지식이나 '올바른 교리'와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하면서, 하나님은 신조나 개념이나 교리가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정신의 세계는 통제와 질서는 가능하지만, 많은 종류의 의존성이 작용을 하는 인간적 사건들의 세계로 오지 못하기 때문에 정신으로 시작하고 이에 의존하는 전달의 모델로서의 유용성이 제한된다.

둘째로, 경험을 통한 전달의 범주를 들고 있다. 이 범주의 모델들은 경험을 중심 실재로 생각하며 개인이나 그룹이 갖는 오늘의 경험을 전달의 주된 기관으로 생각한다. 여기서는 오늘의 사회적 경험을 하나님께서 역사 하시는 장소로서 강조한다. 신앙적인 관점에서 볼 때, 이 범주에 속한 모델들은 많은 장점들을 가지고 있다. 신앙은 경험적이며, 그래서 인간 상황에 있어서의 경험에 대한 강조는 정신의 세계보다 더욱 광범위하다. 그러나, 다른 모델과의 균형을 고려해 볼 때, 경험이 절대화되면 현재를 과거보다 더욱 중요시하게 되며, 우리 자신을 그렇게는 이해할 수 없다. 개인의 종교적 경험에 대한 집착은 비록 중요하기는 하지만, '개인적 필요'를 향한 종교를 생산하기 쉽다고 넬슨은 주장한다. 이는 인간이 이웃의 필요를 섬김으로써 하나님을 섬긴다는 성경적 요구를 범하는 것이 될 것이다.

세 번째로, 자아를 통한 전달의 범주에서는 심리학적 접근을 보이고 있다. 욕구와 가능성을 가진 인격은 전달이론의 계발을 시작하기 위해서는 실질적이고도 의미 있는 장소이다. 자아의 범주에 속한 몇몇 모델들은 하나님을 인격과 같은 실체를 가진 존재로 보며 하나님과 인간의 전달은 한 자아가 다른 자아에게 하는 것으로 본다. 전달을 위한 중심적 실재로서의 자아는 자연적 호소력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저자는, 자아실현이 비록 바람직한 목적일지라도, 신앙의 관점에서 이러한 목적의 적합성에 대해 질문해야 한다. 성경에는 인간의 존재가 심리적으로 온전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다는 증거가 없다는 점을 상기시키고 있다. 오히려 성경 이야기의 영웅은 하나님의 뜻을 감당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네 번째로, 교회를 통한 전달을 말한다. 이는 조직과 기관의 의미로서의 교회라는 다소 부정적인 인상을 받게 했다. 그리스도의 부활의 결과로 형성된 교회는 기독교 신앙의 형성과 조장을 위한 기관으로서 다양한 조직적 모습으로서 견디어 왔고, 확장되어 왔고, 그리고 계속적으로 존재해 왔다. 사회조직으로서의 교회는 다른 기관과 구별되는 특수성을 가지고 있으므로, 교회에 근거한 전달의 모델들은 매력적이라고 볼 수 있다. 신약성경의 자료로부터 이상적인 교회를 기술하고 그러한 교회를 생산하려는 전달의 모델을 개발하려고 유혹 받지만, 신약의 교회는 이상적인 교회가 아니며, 교회의 역사는 하나님의 은총과 인도만이 아니라 인간의 죄도 보여 주고 있다는 것을 상기해야 하다는 것이 넬슨의 주장이다. 기관으로서의 교회를 전달과정의 목적으로 삼는 경향이 있지만, 교육은 기관에 대한 충성을 창조하는 과정이 되는 경향이 있으며, 목회자의 지속적 사역을 요구하는 잠재적 체계를 암시하거나, 또는 평신도를 교회인(a churchman)으로 만드는 경향이 있는 지적이 제기된다. 교회가 진리의 기구적인 표현으로 간주될 때, 교회의 지도자들에게 지나치게 의존할 가능성이 있으며, 또한 교회에서 하는 일은 무엇이든 옳다고 간주할 경향이 있다. 성경의 증언은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나 교회에 의해 구속받지 않으시며, 진리는 다른 원천으로부터도 올 수 있다고 말한다.

이 부분에서, 중고등부를 담당하는 교사로서 나는 주로 경험을 통한 전달 방법과 교회에 대한 성실을 강조하는 측면에서 학생들을 가르쳐 왔다는 생각을 해 보았다. 물론 다른 범주에 대하여서도 수용적일 수밖에 없으나, 다소 그러한 경향이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는 말이다. 자신의 다른 견해로서 넬슨은 내적으로나 외적으로 어떤 한 모델을 사용한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다른 모델의 방법으로 신앙을 전달할 수 있는 것 또한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이제 저자는 전달의 범주로서의 신앙을 말한다. 우리가 연구에서 탐구하려는 대답은 성경에서 기술된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야말로 우리의 모델을 계획해야 하는 실재이며, 그리고 자연적인 전달의 기관은 성도의 공동체라는 것이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신 악에서는 교회는 신앙을 전달하는 공동체적 일체(the corporate unity)라는 것이다. 그러나 신앙은 고넬료의 이야기에서 보듯이 교회에 한정되지 않으며, 또한 아나니아나 삽비라의 이야기가 지적하듯이 교회의 모든 사람이 신앙의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상기시키고 있다. 기관으로서의 교회를 비판하면서 저자는, 진정한 의미의 성도의 공동체가 일반적인 생각의 교회와는 다르다는 점을 놓치지 않았다.

한편 저자는 "우리가 믿음이 있다면" 우리가 무엇을 하느냐는 큰 차이가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비판하고 있다. 즉, 실질적으로 이 말은 하나님께서 주신 우리의 이성의 능력을 부인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신앙의 미명하에 행해지는 모든 것에 정당성을 부여하려는 의도는 성경적이지 못할 것이다.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라는 사도 바울의 권고는 신앙의 차원을 논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그 본질에 대한 신중함을 강조한다고 보고 싶다. 우리는 무엇보다 교회는 성도의 공동체라고 말하고 싶은 충동을 받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은 기관으로서의 교회에 제한되지 않으시며, 또한 공식적인 교회 지도력에도 의존하지 않으신다. 성도의 공동체가 반드시 가져야 하는 것은 성경의 하나님에 대한 공통의 헌신 아래 그룹으로서의 충분한 기간 동안 함께 예배하고 일하며 공부하는 얼굴과 얼굴을 대면하는 인격적 관계이며, 하나님에 대한 해석은 사람에 따라서 달라도 무관하겠다. 그들이 공통으로 소유하는 것은 신앙이며, 이는 헌신과 서로에 대한 관심, 그리고 자신이 거주하는 공동체에 대한 책임을 의미한다.

Ⅱ. 종교적 전통과 그 역동성

실재(reality)는 우리가 직면하는 것이며, 우리가 반응해야 하는 것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우리는 사람과 환경을 연합하는 의미의 단일체로서의 사건 안에서 실재를 경험한다는 것이다. 배움은 개인이 사건에 참여함에 따라서 일어나며, 개인의 특징과 능력, 그리고 문화에 의해 내재된 인식체계에 의해 실재 일어나는 일에 대한 개인의 인식에 제한된다. 계시는 인간의 사건을 통해서 나타난다. 하나님은 명상적인 이성에서가 아니라 일어나는 일들 안에서 알려진다. 그리고 성경의 기록은 사건과 성도의 공동체를 위한 이러한 사건의 의미의 기록이다. 오늘날 신앙전달의 기관들 즉, 부모, 성인, 교회의 소그룹은 전통과 경험이 사건 안에 묶여 있다는 것을 보아야 한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신앙체계가 실제로 일어나는 것과의 관계에서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보이기 위하여 사건을 이용하며, 세상에서의 하나님의 역사를 선명히 이해하기 위해서 사건에 민감해야 한다. 전통의 보전과 창조적 적용은 이를 전달하는 역동적 과정에 달려있다. 따라서 우리는 신앙전달의 열쇠로서 일어나고 있는 사건을 사용하는 방법에 대해서 더욱 분명해야 한다는 것이다.

신앙과 자아정체를 논하며 저자는, 공동체적 실재로서 교회를 다음가 같이 규정한다. 교회는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 안에서 그의 백성을 찾아오시고 구원하심을 믿는 사람들의 교제라는 것이다. 그러나 교회는 그 자체로서 목적이 아니다. 모인 기독교인들의 공동체로서 예수 그리스도에 근거한 회중은 신앙을 배태하고 양육하기에 그 본질이 강조되고 있는 것이다. 의식하지 못하더라도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는 사람들의 모임이라면 교회로서의 구성요건이 충족된다고 본다면, 다음과 같은 넬슨의 주장은 비판받을 수 있다: 성도들이 그리스도에 대한 공통의 충성을 갖고서 의식적이고도 자발적인 교제 가운데서 모여질 때까지는 아직 그들은 교회가 아니라는 것이다.

저자는 교회의 공동체적 실체에 공헌하는 교회의 기능들을 4가지로 나누어 살피고 있다. 첫째로, 예배는 신앙을 잉태한다는 것이다. 예배가 우리 삶의 여러 요소들을 연합한다는 사실은 예배가 가진 전달의 힘을 말하는 것으로 그는 이해하고 있다. 예배의 경험은 하나님과의 경험이라는 측면에서 존중되어야 한다고 하지만, 개인경험의 신비주의화에 대한 경계로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한 관계를 말하고 있다. 두 번째로 성도의 교제는 신앙으로 하여금 작동하게 한다는 것이다. 신앙공동체는 자체의 삶을 통해서, 그리고 간접적으로는 부모를 통해서 교회의 아이들에게 지속적으로 믿음, 소망, 사랑과 같은 어휘들을 가르친다. 이는 반드시 상황적으로 보여져야 하며, 개인으로서 어린이의 경험의 일부가 되어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그의 주장에 공감을 표하는 바이다. 경험은 신앙의 확언과 연결되어야 한다. 사랑이 하나님이라고 말하는 것은 인간의 경험을 신성시하는 것이다. 반면에, 하나님은 사랑이시면, 이 사랑은 특별한 종류의 희생적 사랑으로서 다른 사람의 거만한 오용에도 불구하고 관계를 시작하고 유지한다고 말할 수 있다. 기독교인에게 있어서 믿음, 소망, 사랑이라는 말들은 준거점(reference)이 있는데, 바로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또한 신앙과 고백은 균형은 이루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신앙고백이 추상적이 될 때 - 경험의 정의라기보다는 마음의 상징이 될 때 - 신앙의 진술은 균형을 잃을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회중은 신자들 개개인의 집합이 아니라 이는 과거로부터 전해 온 일반적인 신앙의 전제들을 적용하고 수정하며 예외를 가져야 하는 역동적이고 살아있는 실체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회중은 지역적인 조건에 필요한 해석들을 시도하면서, 인간의 조건들을 신앙고백과 연결하는 전달의 방법이다. 세 번째로, 신자의 공동체는 성경의 탐구를 통해서 신앙을 의미있게 한다는 것이다. 신앙을 기술하고 전달하는 노력은 성경을 산출한 목적이었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그는 논쟁과 토의의 과정을 강조하며, 초대교회 당시의 회당은 공식예배의 장소라기보다는 토론장(forum)이었다는 것을 지적한다. 신자의 그룹이 여러 가지 윤리의 문제들을 매일의 삶에서 직면해야 했을 때에, 이들은 자신의 욕구에 적합한 자료들을 계발해야만 했다고 가정할 수 있다. 초대 교회의 성도들은 핵심적인 계수의 어록들, 비유들, 그리고 예수께서 해석하셨던 성경의 부분들을 모았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공통의 충성에 종속된 정직한 논쟁을 통해서만이 우리는 의미있는 신앙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과정을 위해서는 함께 예배하며, 사랑의 끈과 공통의 경험을 가지며, 얼굴과 얼굴을 맞대는 성도들 이외의 다른 대안이 없다는 것이다. 네 번째로, 회중은 관심사들을 다룸으로써 신앙을 윤리적으로 생명력 있게 한다고 본다. 개인적 갈등을 판단하는 데 있어서나 도덕적 기준을 설정하는 데 있어서의 교회의 역할은 구체적 상황에 대한 의무였다고 보는 것이다. 저자는 교회가 신약의 회중의 역할을 회복하고, 그에 따라서 우리가 고백하는 복음과 사건의 사실들을 관점에 따라서 도덕이 토의되고, 구체적인 사안들이 결정되는 장소가 되지 못한다면 개인의 도덕에 있어서 점진적으로 무능해질 것이라는 주장을 한다.

Ⅲ. 신앙과 가치인식

신자의 공동체는 함께 예배하고 살아가는 방식에 의하여 신앙에 의미를 조장하고 부여하는 그룹이다. 개인은 회중의 삶에 참여함으로써 기독교인으로서의 자신의 정체를 개발한다. 자기정체의 과정은 전 삶을 통해서 계속된다. "공동체적 실재"로서 신자의 그룹은 전달과정의 중심으로서, 신앙의 질을 끊임없이 점검해야 한다는 말이다.

비록 우리의 신앙이 하나님 안에 있지만, 과거에 신앙이 의미했던 바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책 안에 있다. 책으로서의 성경은 그 자체의 구성에서 근본적으로 우리가 기대하는 기독교 신앙의 조직적 기록을 위한 신학적 책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오히려 성경은 하나님을 믿었던 백성들의 관점에서 이들의 시대에 신앙이 이들에게 의미했던 바를 기록한 역사책이다. 성경은 산 공동체에게 자체의 역사를 해석할 책임을 맡긴다. 날짜의 기록은 사건이 일어났던 것을 강조하기 위함이었지, 사건들의 진리가 날짜의 정확성에 달려 있음은 아니다. 우리의 문제는 성경적 기록의 사실적 본질이 아니라, 성경 기자들이 자신들에 의하여 말한 이야기에 공급한 의미에 있다. 성경에 대한 해석의 문제에서, 주로 세 가지 전제들이 설정된다. 즉, 교리의 영역과 사회적인 영역 그리고 개인적 영역이 바로 그것이다.

성경의 기록을 포함해서 과거의 지식을 과거를 공부하기 위해 우리가 가지는 전제들에 의존한다. 과거를 해석하기 위한 전제로서의 믿음의 특징들은 다음의 3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 신앙은 기대를 창조한다는 것이다. 전제로서의 신앙은 하나님께서 인간 사건 안의 힘이요, 또는 통치자이시며, 관찰할 수 있는 삶의 사건들은 하나님께서 역사 하시는 매체라고 가정한다. 신앙의 증언은 하나님께서 "세상의 지혜를 어리석게 하셨다."고 말하며, 만일 예수를 구세주로 영접하면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를 알 것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은 또한 개인이 자신의 삶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에 대한 응답의 방식이다. 신자는 자기에게 일어나는 사건들 가운데서 어떤 형태로든 하나님의 임재를 기대한다. 신앙의 사람에게는 하나님은 정신적 개념이 아니다. 그는 어떤 방식으로든 지나가는 사건들을 조명하는 산 실재이며, 자신의 뜻을 이 사건들을 통해서 나타내신다는 것이다. 신앙의 사람은 어떤 목적을 달성하려고 하기보다, 하나님의 과정의 일부가 되려고 힘쓴다. 그는 어떻게 자신이 하나님의 뜻에 잘 사용되었는가에 따라서 성공을 계산할 것이다. 신앙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위한 운명을 가지고 계신다는 기대를 창조한다.

교회의 실질적 사역에 대한 원칙적 기능 가운데 하나는 하나님께서 지금 가까이 하신다는 기대를 창조하고 유지하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 점에서 많은 우리의 교육적 노력이 실패한다는 것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기대의 창조는 우리가 성경의 이야기를 들려주거나 혹은 역사적 기록들을 연결시키는 방식에서, 또한 우리가 이야기를 끝내는 방식으로도 달성될 수 있다.

둘째, 신앙은 의미를 제공한다. 신앙은 과거가 해석되는 의미의 틀과 과거의 진술을 위하여 사실과 사건들이 선택되어진 기준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가진 과거에 대한 지식은 과거에 살았던 사람들이 당시에 일어났던 수많은 사건들 가운데서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것에 의존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그 당시의 사고형태로 담겨져 있는 지식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기억된 예수의 삶 가운데에는 어떤 사건들은 다른 사건들보다 더 잘 알려지고 더 신뢰를 받는다. 그러나 그 선택과 사용에 있어서 어떤 불규칙이 있다고 해서 신앙이 어려움을 당하지는 않는다. 오늘날 우리는 예수께서 말씀하시고 행하신 것을 더욱 많이 알기를 원하지만 우리는 단지 예수시대의 신앙의 사람들이 신앙에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것만 가지고 있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가 어떤 다른 흥미를 가지고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 히브리서 11장은, 신앙은 과거에 대한 의미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가장 훌륭한 요약이 될 수 있다고 본다.

셋째, 신앙은 사건에 의미를 연결한다. 신앙은 현재에서 경험되고 표현된다. 바울에게는 신앙은 추상적인 것이 아니었다. 그의 신앙은 오히려 현재와 긴밀하고도 완전하게 연결되어 있는 삶의 방식이었다. 교육은 복음전도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는 점을 상기한다면, 우리는 신앙을 현재와 연결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 수 있다. 신앙은 현재에서 활동한다는 이 개념을 달리 탐구할 수 있는 방법은 기독교인의 삶에 있어서의 기도의 역할을 고려하는 것이다. 기도는 행동하는 신앙이다. 신앙은 과거를 해석하는 요인이다. 그러나 과거는 현재에서 경험되기 때문에 신앙은 항상 상황적이다. 즉, 신앙은 현재에 대하여 고민하고 기도하는 것과 긴밀히 관계되어 있는 한에서만 중요하다. 현재의 특징은 우리가 효과적으로 통제할 수 없는 행동의 범위들을 날카롭게 의식한다. 이는 현재가 항상 어느 정도의 근심으로 특징 지워지는 이유이다. 현재의 사건들에 대한 통제가 한계가 있음을 지적함으로써, 우리는 또한 사건들을 이성적인 패턴으로 맞출 수 없음을 지적한다.

그러나 상황은 미래로 인도한다. 사건의 상황적 측면은 상황이 우리의 행동이나 윤리적 판단을 통제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기독교인들을 위해 제안된 상황윤리(situation ethic)는 모든 상황의 윤리적 문제들을 "이 상황에서 사랑의 요구가 무엇이냐?"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하는 것으로 축소한다. 미래에 대한 이러한 개방성은 하나님께서는 항상 그의 백성을 미래로 인도하시며, 우리는 현재 상황에 대한 우리의 결정을 미래로 투사해야 함을 말하는 중요한 방식이다. 신자의 공동체는 역사의 흐름에 있어서 끊임없이 그룹으로서의 자신의 삶과 그리고 세상과의 관계에 대한 결정을 직면한다. 이러한 신앙적 관점의 고전적 진술은 가말리엘에게서 유해한다. "이 사상과 이 소행이 사람에게서 났으면 무너질 것이요, 만일 하나님께로서 났으면 너희가 저희를 무너뜨릴 수 없겠고, 도리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까 하노라"(행 5:39).

이와같은 신앙적 관점이 오늘날 회중이 공동체에서 사건들을 직면할 때 사용되어야 한다. 구성원들은 신앙의 관점에서 행동의 과정을 계획해야 한다. 그러나 그들은 사건이 판명되는 방식에 대해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개방해야 한다. 참된 회중의 배움은 신앙이 현재적 사건에 의미를 연결하고, 그리고 나서 이해의 점검으로서 결과를 숙고할 때만이 다가온다. 또 한편으로는, 기독교인들이 자신들의 개인적 삶의 사건들을 바라보도록 훈련하는 방식이다. 신앙은 우리가 새로운 경험들을 겪을 때에 우리를 인도하시고 주장하시며 유지하시는 하나님과의 관계의 기술(description)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우리 자신을 위해서나 타인을 위해서 우리의 경험을 이용하실 지를 모르기 때문에 결과에 대해서 자신 할 수 없다. 우리는 아브람의 분위기를 경험해야 하며, 우리가 어다로 갈지 정확히 알지 못한 채 나아가야 한다. 이것이 신앙의 바른 의미를 추구하는 자세일 것이다.

엘리스 넬슨의 주장은, 전통의 전승에 있어서 이 후의 자연적 과정은 내면화된 보상과 벌에 의하여 개인의 양심에 가치의 체계를 형성하는 것이다. 우리 앞에 놓여진 과제는 가치체계를 개발하는 과제에 대하여, 신앙공동체가 따라야 할 방식에 대하여, 더 구체적으로는, 어떻게 공동체가 기독교 양심에 내용을 결정하는가를 토의하는 것이다. 전통이란 아우틀러(Outler)가 말했듯이 전승의 '행위'와 연결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전통이 의미있게 되고 전하는 자나 받는 자에게 생명을 갖게 되는 것은 수많은 작은 사건들 안에서이다. 가치는 변화하는 사회적 조건들과 관련되어 있고, 그룹 상호 작용으로부터 발생되며, 인간 행동에 바람직한 것을 표현하기 때문에, 기독교 신앙을 전달하기를 원하는 우리로서는 우리의 가치를 평가하는 데 있어서 신중해야 한다.

해석의 문제에 있어서 어떻게 교회의 실질적인 일에서 성경을 해석할 것인가? 성경 해석은 우리의 전 존재를 집중하게 한다. 이는 우리의 모든 배움을 우리의 바람과 희망으로 연합시키는 과정이다. 최종적으로 분석해 볼 때 한 사람의 감성은 해석에 있어서 대개 이성을 통제한다. 감성은 감정(emotion)만이 아니다. 이는 또한 우리의 이성을 강력하게 조정한다. 문화는 상징을 통해서 아이에게 해석되며 언어는 상징의 주된 도구이다. 언어 자체는 문화의 표현이며, 문화의 몇 가지 주된 특징들을 반영한다. 비록 언어는 그 자체로 상징적 과정이지만, 동시에 상징을 전달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우리의 종교적 전통의 많은 부분은 상징적으로 표현된다. 상징을 설명하는 것은 과거를 현재와 연결하지만, 이는 인간의 경험을 의미의 구조 안에 둠으로써 설명을 듣는 개인은 하나님과 인간에 대한 특별한 관점을 수용한다. 상징은 인간의 상황을 동시에 정의하고 설명하며, 그리고 이로 인해 상징은 전통의 가치체계, 기능과 관련된다. 상징은 가치 중립적이지 않다. 이는 인간의 상황에 대해서 분명한 어떤 것을 말하며, 이로써 사람들이 집착하게 된다.

우리가 상징에 관심을 갖는 것은 상징이 가진 전달능력 때문이다. 상징은 볼 수 없는 것을 나타내는 대상이거나 정신적 이미지이다. 상징은 인간의 경험은 이해하게 하고 전달하게 하며, 그리고 이 둘을 동시에 감당한다. 문화는, 삶을 정의하고 설명하는 상징을 계발하며 그 상징은 문화를 다음 세대로 전달하는 수단이다. 상징은 특별히 종교의 언어임을 주시하는 것은 중요하다. 왜냐하면 상징은 쉽게 이해될 수 있는 정신적 이미지로써 매일의 경험이나 대상을 전통이 이해하는 실재와 연결한다. 성경적 상징은 계시가 일어난 인간 상황에 그 기원을 둔다. 십계명은 도덕의 상징이지만, 출애굽은 하나님의 은총과 인도의 상징이었다. 이 둘은 함께 가야만 했다. 그래야만 십계명은 짐이 되지 않는다. 공통의 경험들도 지속적으로 영적인 진리를 상징하는 것으로 사용되었으며, 이것들은 기독교회가 물려받은 상징이 되었으며, 오늘날도 널리 사용된다.

신자의 공동체가 이미 전달하고 있는 것보다 더욱 기독교적인 신앙을 전달하기 위해서는 성경을 역사적으로 해석하는 것을 배워야 하며, 자신들을 하나님의 영의 인도하심에 개방해야 한다. 성경적 고백이 오늘의 상황에 적용될 수 있을지, 아니면 새로운 가치를 계발해야 할지를 판단하기 위해서 성경의 비슷한 상황과의 관계에서 자신들이 직면한 인간적 상황을 분석해야 한다. 종교적 신앙은 가치의 기능을 갖기 때문에, 우리는 끊임없이 우리의 신앙을 진술하고, 점검하며, 재형성해야 한다. 우리 앞에 놓여진 유일한 문제는 그 과정 가운데서 우리의 역할을 더욱 의식하며 "그리스도의 마음"(빌 2:1-11)을 찾기 위해 더욱 염려하느냐 하는 것이다.

저자는 이 책의 전반에 걸쳐서, 기독교 신앙의 공동체적 본질을 강조하면서, "신자의 공동체"라는 어휘를 사용함으로써 제도화된 교회와 쉽게 동일시하는 것을 피했다. 하나님의 영은 많은 경우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고 새로운 방식의 예배와 봉사를 형성하기 위하여 기성의 제도화된 구조를 파괴했으며, 이는 오늘날도 일어나고 있음을 가정해야 한다.

회중의 중심성을 논하며 저자는, 기독교 신앙의 전달은 가르치는 기관이나 방법에 직접적으로 의존되어 있다는 개념을 우리의 생각으로부터 제거하는 것이며, 그리고 신앙은 신자의 공동체, 대개는 회중에 의하여 조장된다는 개념을 마음에 고정시키는 것이다. 저자의 이러한 주장은 신앙교육의 공동체적 중요성을 강조한 것으로, 가르침은 회중의 삶과 연결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출발은 회중이 기독교인들의 원천사회(the primary society)라는 사실이요, 그리고 삶을 함께함(life together)이 전달되는 내용의 방법과 질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과정의 진술이며, 이 과정을 우리가 생각하는 전달되는 내용과 분리하는 것은 중요하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진지하게 찾고 또한 자신들의 지역사회에서 그리스도를 위한 사역을 실천할 수 있도록 서로서로 돌보아 가는 개인들로 구성된 회중은 기독교에 대한 해석뿐 아니라 자신들의 바람 또한 전달한다. 여기서 우리가 출발해야 할 장소는 인간공동체이며, 인쇄된 교재는 보조할 수는 있으나 거의 변화를 창조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할 것이다.

우리가 힘써야 할 단위가 신자의 그룹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면, 말하거나 행하는 것은, 또는 말하지 않거나 행하지 않는 것은 무엇이든 가르침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문제에 대한 해결을 연기하는 것 같은 것은 없다. 즉, 연기하려고 결정하는 것이 곧 결정이라는 말이다. 사람들은 사건들이 다루어지는 방식을 통해서 배운다. 중립이라는 것은 없다. 만일 회중이 중립적이 되려고 한다면, 이는 현안들에 대해서 결정할 수 없다는 것을 가르치거나, 결정의 결과를 두려워한다거나, 또는 어떻게 진행할 지에 대해 혼돈한다는 것을 가르친다. 그룹으로서 회중이 지역사회에서 말하고 행하는 것은 자신들의 신앙의 의미이다.

우리가 다루어야 할 실체는 신자의 공동체라는 사실은 저자가 여러 번 강조한 바이다. 우리 자신에 대한 관점을 갖기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께서 교회를 통해 일하시며 인간 사건의 세계를 통해서 일하시는지를 알기 위해서 끊임없이 다른 세대들이 가졌던 하나님과의 경험으로 되돌아가야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우리는 비교하지 않고서는 관점을 가질 수 없으며, 다른 세대들이 응답한 모습을 모르고서는 하나님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전통에 묶이지 않으면서 전통을 존경할 수 있는가? 우리는 체계적인 연구와 적절한 변화를 가져야 한다. 예배의 모든 차원은 탐구의 주제이다. 일 년, 또는 이 년 후에 새로운 형태의 예배가 개발될 수 있을 것이며, 새로운 형태의 회중적 참여가 강구될 수 있다. 회중은 계속적으로 예배와 성찬에 대해 자라나는 사람에게 일평생을 통해 해석할 필요가 있다. 그럼으로써 그는 그 의미를 깊고 풍성하게 이해함으로써 성찬의 상징이 가져다주는 이해의 깊이에 더욱 응답할 수 있게 된다.

다양한 수준에서 교인들에게 예배를 계속적으로 해석해 줄 필요와 함께 회중은 교인들에게 특별히 새신자들에게 교회의 본질과 사명을 해석해 줄 필요가 있다. 기독교 신앙의 의미는 새로운 참여로 명백해져야 한다. 교회에 참여하게 될 때만큼 교육이 효과적인 때는 없을 것이다. 저자는 컬트 러윈(Kurt Lewin)의 "배움은 새로운 소속이다(Learning is first a new belonging.)"라는 말을 다시금 인용한다. 바울이 말한 것처럼 사람들은 다양한 은사를 가지고 있으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기 위해서 인간관계에 있어서 더욱 좋은 길을 찾고 실천하면서, 아울러 자신들의 은사를 사용할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구성원들의 사고방식의 형성을 위한 기독교공동체의 의식적인 노력으로 저자는, 설교와 가르침을 강조한다. 설교는 기독교 메시지를 해석하는 데 있어서 다른 어떤 노력보다 더욱 성인들에게 영향을 끼치는 것으로 본다. 그는, 설교가 예배의 특징이라거나 아니면 설교가의 주된 활동이라고 간주하기보다는, 회중의 지속적인 삶의 일부라고 간주된다면 기독교인의 사고방식을 형성하는 데 더울 유용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계속해서 그는, 설교단의 자유를 주장하며 이것이 그 오용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결국에는 예언적 음성이 들려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 주목하고자 한다. 준비하는 데 있어서나, 훈련을 받는 데 있어서 어떤 약점을 갖고 있든, 목사는 자신이 말하는 바에 대하여 하나님께 책임을 진다. 이러한 이유로 해서 저자는, 설교가 전달된 이후에 토의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믿고 있다.

기독교적 사고방식 형성의 일부분은 비평적 지성의 계발이라고 생각하는 저자는, 회중의 모습을 결정짓는 성인들이 책임과 역할을 강조한다. 이러한 그의 생각 - 회중이 원천사회요,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목적인 - 은 성인성도들이 모든 관계에 있어서 전달의 기관이 되어야 함을 요구하며, 삶의 인식과 질은 성인들의 영적인 분별력을 넘어설 수 없다는 것을 가정하는 것이다. 그 목적은 성인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상황에 적합하도록 기독교 전통을 생활하고 점검하고 수정하도록 돕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주일학교의 전략과 자유, 종교, 교육운동의 전략을 뒤바꾸고 어린이가 아닌 성인에 초점을 두기만 한다면 우리는 자동적으로 신앙을 전달하는 데 있어서 문제를 해결할 것이라는 생각을 버리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회중이 다른 곳에서 시행했던 것에 기초해서 성인교육을 시도한다는 것은 잘못이다. 자신들의 상황을 간과한다면, 병은 모른 채 처방을 사용하는 격이 된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사도 바울은, 사랑이 고상한 감정이어서가 아니라 당시에 고린도교회의 문제를 해결하는 유일한 방안이었기에 고린도전서 13장에 사랑을 기록했다는 것이다. 이 부분에서 든 많은 예들은, 앞서 읽은 레티 러셀(Letty Russell)이 자신의 책("기독교 교육의 새 전망")에서 사용한 것과 유사한 부분이 많다. 그 때에도 그랬지만, 역시 아직은 한국 교회에 적용하기엔 다소 거리가 있는 내용이라는 생각에 아쉬움을 남겼다.

회중에서의 신앙전달을 위한 지도력을 언급하면서, 저자는 지식, 기술, 그리고 신앙적 자질의 3가지를 강조한다. 세 가지 지도자의 자질을 합리적으로 조화시키고 이를 교회사명과 적절한 관계에서 유지하는 최상의 가능성은 지도력 개발을 회중적 삶의 부산물로, 특히 성인교육 프로그램을 통해서 보는 길이다. 지도자는 더욱 성장하고, 자신의 종교적 문제를 탐구할 기회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자신이 배우는 자인 동시에 신자로서 교회의 신앙을 가르칠 수 없다는 사실은 중요하다. 신앙의 전달의 중요한 과제로 생각하는 교회는 어린이와 청소년을 위해서 영원히 교사와 지도자를 구하는 문제로 씨름해야 한다. 그 동기는 방어적이다. 즉, 우리는 자녀들에게 기독교를 가르침으로 기독교의 생명을 유지해야 한다. 이러한 태도는 회중을 전통적으로 만드는 것이다. 기관으로서의 교회를 지역사회의 세속적인 일과 분리하는 것은 회중으로 하여금 지역사회의 모든 사람에 대한 책임보다는 오히려 자기 구성원들에 대한 교육적이고 사회적인 봉사에 더욱 관심을 갖도록 했다. 미래의 주된 과제는 이러한 태도를 바꾸는 데 있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 맺으면서 -

개신교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 교회들의 문제는 전통을 전달하고 있는 과정이 너무 잘되고 있다는 것이며, 그 문제는 자라나는 세대에게 성인들이 실제로 믿고 있는 것을 생산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신자의 공동체가 아니라 배타적으로 개개인을 목적으로 개신교회를 개혁하려는 모든 시도는 어린이나 청소년을 자연적 사회화의 주체 자들(성인들)로부터 분리시키려는 시도나 또는 공동체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피하려는 노력은 실패하거나 적은 성공밖에 거두지 못할 것이다.

교회는 항상 회중 이상이었다. 신약은 지역 회중의 절대적 권위를 억제한다. 지역회중은 자체의 교제 내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다루어야 하며, 이를 일반적인 기독교 진리에 기초해서 행해야 한다. 그러나 동시에 회중은 신앙의 전달을 위한 더 나은 교재를 제공하기 위하여 다른 교회들과 함께 참여할 수 있다. 신앙의 전달이란 회중의 전체 삶과 필연적인 관련없이도 효과적이라고 가정한다. 중요한 것은 교육이 사람 중심이냐 아니냐가 아니라 모든 교육은 사람 중심이라는 것이다. 문제는 교회교육이 어린이의 제한된 세계를 중심으로 하느냐, 아니면 어린이가 자기 발달단계에서 공동체의 책임있는 성인 기독교인이 되는 것이 무엇인가를 배우는 성인들의 실제세계를 중심으로 하느냐이다.

종교교육에 있어서의 가정의 역할은 지난 세기 동안 여러 번 재평가되어 왔다. 호레스 부쉬넬 이후 종교교육가들은 대개 어린이 형성에 있어서의 가정을 존중하였으나 지난 25년여 동안 수정되어야 할 두 가지 경향이 있다. 하나는 인격의 형성에 있어서의 가정의 엄청난 능력으로 인해 가정을 이상화하고, 교회는 가정이 집안에서 가르칠 수 있는 것에 기초해서 교육적 전략을 수립하는 것이다. 또 하나의 경향은 가정을 무시하는 것이다. East Harlem Protestant Parish의 목회자인 레티 러셀(Letty Russell)은 종교교육의 기관으로서 가정을 제외했다. 그 지역의 상황하에서는 그녀가 종교교육을 위해서 다른 방법과 기관을 찾는 것이 옳을 것이다. 우리는 가정의 강력한 양육의 과정을 이상화하거나 무시해서는 안 될 것이다. 우리는 성인들이 가정에서 신앙적 부모로서 기능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