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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의 사도직과 사도로서의 특권 포기 (고전 9:1-18을 중심으로) 김 학 철 (연세대학교 대학원 신학과/신약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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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성서학연구소에서는 95년과 96년에 이어 작년 97년에도 제3회 전국 신학생 성서학 논문공모를 주최하였습니다. 이번 논문공모의 주제는 "구/신약성서에 나타난 그리스도인의 지도자상"이었으며, 응모자 중에서 우수상 1명과 가작 2명을 뽑았습니다. 성서마당은 이 논문들을 요약하여 싣고자 합니다. 이번 호에는 그 세 번째 글로 가작으로 선정된 김학철의 글을 실었습니다. 지면관계상 자세한 본문풀이와 각주, 참고문헌 등을 생략하였습니다. |
'사도직'은 초대교회에서 일종의 '지도자직'이라고 할 수 있는데, 본 소론에서는 바울이 자신에게 위임되었다고 믿는 이 사도직을 어떻게 이해하였으며 사도로서 그가 마땅히 누릴 수 있는 '특권들'을 왜 포기하였는가가 집중적으로 논구(論究)될 것이다. 바울의 사도직과 사도로서 당연히 소유한 특권들을 어떤 이유에서 포기했는지를 주석적 방법으로 탐구함으로써 오늘의 지도자상의 단초를 그려보고자 한다.
II. 본문의 전후 문맥
많은 학자들은 본문(9:1-18)이 전후 문맥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해 왔다. 8장과 10장이 우상과 우상제물에 관한 주제를 다루고 있는 데에 반해 9장은, 특히 본문은 바울이 우상에 관련된 주제와는 벗어나 자신의 사도직에 관한 논증을 하고 있다는 것이 학자들로 하여금 8-10장 사이에 단절을 상정하게 한 이유이다.
이러한 전통적인 견해에 대해서 8-10장의 통일성을 강력하게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대표적으로 윌리스는 첫째, 9장이 8, 10장의 중요 단어들을 공유하고 있고, 둘째, 9장의 주제가 8,10장과 서로 배치되지 않을 뿐만이 아니라 오히려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말한다. 즉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서 발생한 우상 제물에 관한 논란을 해결하고자 하면서, 자신이 당연히 행사할 수 있는 사도로서의 특권을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여 제한하였듯이 고린도 교인들 중에 스스로를 강하다고 여기는 사람들도 우상 제물을 먹을 수 있는 자유와 권리를 '약한 자들'을 위해서 제한하라고 권고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위의 두 주장은 모두 바울의 의도 중 한 측면 밖에 간파하지 못한 것이다. 바울은 9장을 문맥적인 필요와 자신의 사도직을 변호하기 위한 두 가지 목적을 내, 외면적으로 가지고 기술한 것으로 보인다. 바울이 9장을 8, 10장과의 연결선상에서 좀 더 큰 문맥적인 목적, 즉 약한 자들을 위한 강한 자들의 자유 및 권리의 자발적인 제한이라는 목적을 가지고 작성하였다는 주장은 타당성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문맥적인 목적을 위해서 사용된 것이 바울 자신이 가장 민감해 하는 '사도직'이라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특히, 고린도 교회가 분열과 분쟁을 겪고 있는 정황을 고려할 때 바울이 고린도 교회의 설립자로서 자신의 권위와 복음을 지켜야 할 필요성에 직면해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주목해 보아야 한다. 또한 본문의 내적 증거는 9장이 단지 문맥상의 목적을 위해서 쓰여졌다기 보다는 오히려 바울이 자신의 사도권을 주장하기 위해서 문맥을 역이용했음을 암시한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글쓰기의 전략을 사용함으로써 바울은 문맥의 목적을 달성하면서 동시에 자신을 위한 변증을 시도하고 있다.
III. 본문의 배경
그의 서신을 통해 볼 때, 바울 사역 전반은 물론 고린도 교회에서도 바울의 '부양받을 특권'의 사용 여부는 논란거리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바울은 빌립보 교회의 지원을 받아들인 것을 제외하고는 그의 '특권'을 행사하지 않고, 또한 자신이 특권을 사용하지 않는 이유들을 일관성을 결여한 채 매우 다양하게 설명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바울의 글이 정황의 필요에 따른 '서신'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우리는 바울의 관행의 이유를 그의 언급들 배후에 있는 사회-문화적 정황의 재구성을 통하여 추론하려고 하는 일련의 시도들을 설득력 있는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바울과 바나바로 대표되는 비유대교 세계를 향한 선교는 그 달라진 사회-문화적 환경에 따라 선교 방식의 변화를 필요로 하였다. 이런 전략의 수정은 단지 바울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이방 선교에 나선 이들 즉 바나바, 디도 등도 이러한 '수정'에 동참하였다. 헬라 세계를 향한 선교에 있어서 바울은 견유학파처럼 생계를 구걸하던 당시 지중해 지방의 '순회교사'들과 구별하기를 원했다고 볼 수 있다. 즉, 바울은 사람들이 경제적인 목적을 가지고 가르치는 이들, 특히 '갈취하는 (지적) 귀족'인 소피스트들 뿐만이 아니라 이를 비판하여 그러한 탐욕에 대한 일종의 저항으로서 구걸을 하던 견유학파들과도 자신을 구분하고자 하였다. 어느 교회에서도 정기적 후원을 받지 않았던 바울은 정기적인 후원이 가져다 주는 '복음 전파의 장애물'을 의식한 것으로 보인다. 우리가 '순회교사,' '소피스트,' 그리고 '견유학파' 등이 활발하게 활동하는 헬라 세계라는 정황에서 추론할 수 있는 '복음 전파의 장애물'이란 정기적인 후원이 가져다 주는 관계, 다시 말하자면 바울 자신이 어떤 특정 교회에 '고용된,' 그래서 자신의 선교 사역과 선교 여행에 지장을 초래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헬라 세계를 위한 바울의 변형된 선교 관행이 문제가 된 것은 고린도 교회에 '다른 사도적 관행'이 소개되는 시점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즉, 고린도 교회에서 제기된 문제는 단순히 바울과 개인적인 대적자들 간의 문제라기 보다는 "두 다른 사도적 관행들"의 충돌이라고 할 수 있다. 바울의 관행을 비난한 이들은 바울이 '특권'이라고 표현한 것을 '의무'로, '주의 명령'으로 이해한 이들이다(마 10:2-15). 바울은 자신의 부양 받을 수 있는 사도로서의 특권을 포기함으로써 복음 전파에 걸림돌을 놓으려 하지 않는다고 주장하였지만, '팔레스틴의 카리스마적 방랑가'들은 바울이 자신의 생계를 모두 하나님께 맡기라는 믿음과 금욕에로의 예수의 명령을 어긴 것으로 간주했다. 그러므로 바울의 '특권' 거부는 그의 신실한 사도로서의 믿음을 의심케 하기에 충분했다. 더군다나 선교 초기에는 주의 명령에 따라 '의무'로 이해되던 선교사들의 부양받는 일이 기독교 조직의 확대와 더불어 바울의 재해석대로 '특권화' 되었다면 바울의 특권포기는 바울 자신이 사도가 아님으로 고린도 교인들에게 그런 특권들을 요구하지 못한 것이 아니냐는 의혹을 불러 일으킬 수 있다.
IV. 본문의 주석
서론: 바울이 자신의 사도직을 주장 (1-2절)
바울은 자신이 사도가 아니냐고 물은 후 그 첫 번째 근거로서 자신이 "우리 주 예수"를 보았다고 주장한다. 이 질문에 사용된 oujci는 앞의 두 질문의 oujk보다 강한 어조를 띠는 단어인데, 이 점으로 미루어 우리는 바울이 "우리 주 예수를 보았다"는 사실을 다른 부분보다 더 강도 높게 주장하고 있다고 판단할 수 있다. 바울이 이렇듯 부활한 예수의 목격을 강조하는 이유는 바로 부활한 예수의 목격이 사도됨의 가장 큰 요소이었기 때문이다.
바울은 자신의 사도됨을 위한 두 번째 근거로서 고린도 교인들 자체를 들고 있다. 고린도 교회는 '주 안에서' 바울이 이루어 놓은 일이다. 고린도 교회의 존재 자체는 바울의 사역에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반증이다(4:5-9). 논리적으로 고린도 교인들이 아버지 같은 자신의 사도권을 부정하는 것은 고린도 교인 자신들의 뿌리를 없애는 일과 같다(4:15). 왜냐하면 고린도 교인들이 바울의 사도직을 부정한다면, 고린도 '교회'가 과거에 올바른 복음 위에서 '교회'로 세움을 받지 못했고, 지금까지 '교회'이지 못했다고 스스로 자신들을 부정하는 결과를 낳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은 아닐지 몰라도 '주 안에서' 고린도 교회는 바울의 사도됨의 '증인'(證印, sfragiv")이다.
본론: 1. 바울이 사도로서 소유한 특권들 (3-6절)
4-6절에서는 긍정적인 답변이 기대되는 이중 부정의 형식(mhV, oujk)으로 바울은 자신이 마땅히 가지고 있는 특권들을 나열한다. 즉,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비용으로) 먹고 마시는, 선교 시에 동반한 아내까지 부양받는, 일하지 않고도 생계를 보장받을 수 있는 사도로서의 특권들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이다.
6절은 4-5절과는 달리 바울이 자신이 확고히 사용할 수 있는 특권을 자의에 의해서 포기했음을 유추할 수 있게 해 준다. 즉, 그는 부양 받는 특권을 포기하고 남들이 미천하게 보는 천막제조업을 하였다. 그것은 "오직 나, 그리고 바나바"가 특권이 없어서 그러는 것이 아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복음에 장애물을 놓기 싫어서이다.
본론: 2. 바울 자신이 소유한 특권들의 당위성 논증과 특권 포기 (7-15절)
7-15절에서 그의 예증은 크게 두 단락을 이루어서 전개되는데 첫 번째 것은 7-12절, 두 번째 것은 13-15b절이다. 이 각 단락은 일반 생활 그리고 일반 종교 관습으로부터의 논증으로 시작해서 모세의 율법과 주의 명령으로부터의 논증으로 특수화되어 강화된다. 그러나 이 강화된 논증이 절정을 맞는 순간 예증으로 말미암아 확인된 바울의 특권들에 대하여 바울은 급작스럽게 포기를 선언한다.
완전한 문장이 아닌 15b절의 비교를 나타내는 h[ 다음에 올 내용이 무엇인가 대해서는 몇 가지 의견이 제안되었다. 그러나 h[ 이후의 문장을 12절 전체, 'ajpoqanei'n'과 짝을 이루는 14절의 'zh'n'과 16절의 '화'(oujaiv)와의 관련성 속에서 "특권들을 사용하여 복음에 장애가 되느니"가 h[ 다음에 올 내용이라고 추론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15절의 해석에 있어서 또 다른 논란은 바울의 '자랑'에 있다. 16절에서 분명 바울은 자신이 복음을 전하는 것은 자신의 자랑거리가 못된다고 천명한다. 또한 바울의 특권 포기가 그의 자랑의 내용이라는 주장도 받아들일 수 없다. 왜냐하면 바울은 자신이 이룬 일이나 업적에 대해서 자랑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고린도 후서에서 확실하게 드러난다. 그는 자신들이 이룬 업적을 자랑하는 대적자들을 향하여 자신도 자랑하겠다면서 유명한 소위 '고난목록'을 제시한다. 그러나 바울이 밝힌대로 이는 어리석은 자를 따라하는 자랑이요 '정신 없는 말'일 뿐이다(고후 11:16-17). 오직 바울이 '지나치게' 할 수 있는 자랑은 주 안에서 "너희를 세우는 권세" 즉 사도직 뿐이다(고후 10:8). 그것은 마치 그리스도가 약함으로 십자가에 못 박혔으나 하나님의 능력이 머물러서 다시 살게 되고, 또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된 것처럼, 바울은 자신의 약함을 통해서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능력이 머물고 드러나게 되며, 그래서 자신이 사도로서 확증된 것을 자랑할 수 있을 뿐이다(고후 13:4). 위의 논지를 근거로 하여 우리는 15절에서의 바울의 자랑의 내용을 하나님이 세우신 바울의 사도됨과 그가 사도로서 "세우는 권리"로(고후 11:8) 설립한 고린도 교회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바울의 자랑의 내용은 당연히 누릴 특권을 보류한 채 값없이 복음을 전한 바울의 "업적"과는 거리가 먼 것이다. 그의 특권 포기는 그가 사도로서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파하기 위해서 고안된 것이지, 바울이 그의 자랑의 품목 혹은 자신의 상을 위해서 설정한 것은 아니다.
결론 : 바울의 사도직과 상 (16-18절)
바울에게 있어서 그가 복음을 전하는 것은 자랑할 사항이 못된다. 그러므로 그것이 상을 받을 이유는 될 수 없다. 왜냐하면 바울에게 있어서는 위임된 직분의 수행일 뿐이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바울에게 있어서 하나님께서 자신을 사도로 부르시는 것, 즉 자신의 사도됨 자체가 그리스도인 됨으로 부르심, 곧 그를 구원으로 인도하시는 이미 하나님의 은혜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사도의 직분 이외에는 어떠한 직임이나 임무에도 '은혜'(cariv")란 용어를 사용하지 않는 바울은 다른 경우에는 이 '은혜'란 용어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에만 연관시켜 사용한다(롬 3:24; 5:2; 6:14). 이것을 통하여 볼 때, 바울에게 있어서 믿음으로의 부르심과 사도직으로의 부르심은 동시적 사건이며 근본적 의미에서 동일하다고 결론 내릴 수 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인 사도로의 부르심은 바울에게 '숙명'(ajnavgkh)으로 다가왔다. 이러한 숙명을 거역하면 그에게 '화'(oujaiv)가 있다. 이러한 바울의 숙명과 화에 관한 담화는 바울 자신의 사도성에 관한 일체의 의심에 대해서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은 자신의 사도권을 방어하기 위한 역할 역시 담당한다. 즉, 그 누구도 하나님의 뜻에 따라 된 자신의 사도됨을 취소할 수 없는 것이다.
V. 맺음말
바울이 이해하고 지키고자 했던 지도자직, 즉 사도직은 특권을 얻어내고자 하는 도구가 아니라 자신에게 맡겨진 사명을 충분히 수행하기 위한 것으로 인식된다. 바울에게서는 사도직으로부터 오는 특권이 사명을 효과적으로 달성하기 위해서 포기될 망정, 특권 자체가 직책 획득과 고수의 목표가 되지 않는다. 심지어 그 특권을 행사하는 것이 당연할 뿐만 아니라 그 권리를 포기할 때 바울 자신이 육체적 고생과 사회적 수치를 감수해야만 할 때에도 바울은 임무의 수행을 위해서 주어진 특권들을 서슴없이 포기한다.
그런데 최소한의 당연한 권리까지도 포기해 가면서 달성할 직분의 임무란 "너희를 세우는 일"이다. 즉 바울이 이해한 지도자직, 즉 사도직 직분의 임무는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을 섬기는 종이 되는 것"이다. 이런 직분과 직분의 임무에 대한 바울의 인식은 자신을 섬기러 왔다고 표현한 예수의 직분 이해와도 맞닿는다(막 10:45).
그러나 위와 같은 바울의 사도직 이해는 윤리적인 차원을 넘어선 곳에서 성립된 것이다. 그 '넘어선 차원'을 우리는 바울이 자신의 사도직을 '숙명'(ajnavgkh, 9:16)으로 여겼다는 사실에서 가장 극명하게 발견할 수 있다. 바울에게 있어서 직분은 필연성이요 숙명이다. 그것은 감당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직분을 필연성과 숙명"이라고 인식하는 것은 그 직분을 회피한 결과가 하나님의 '화'(oujaiv)라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고 또 이 직분 위임이 숙명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자신에게 이 직분 위임이 자신이 갖추고 있는 어떤 자격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라고 고백하는 것이다. 또한 이 직분 위임은 자의로 된 것도 아니어서 그 직분의 일을 수행한다 하더라도 상을 기대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위의 견지에서 본다면, 지도자직은 훌륭하고 자질 있는 한 개인이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는 자리가 아니다. 심지어 그가 자신의 이상과 공동체의 선을 위해서 희생적이고 모범적인 삶을 산다고 해도 지도자직은 그에게 마련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지도자는 하나님에게 혹은 역사에게 '떠밀려' 거역할 수 없는 소명에 굴복한 사람이다. 그러므로 그는 그 직책이 불성실하게 수행되었을 때 하나님의 화에 가깝다는 것과 그 직책이 자의로 얻어진 것이 아니므로 임무를 잘해낸다 하더라고 '상'이 없음을 알고 있다. 그에게 남아있는 유일한 길은 자신을 역사로 내몬 하나님의 계획을 긍정하고 동의하여 '자신'을 기꺼이 희생시킬 수 있는데 까지 나아가는 것이다. 동시에 이런 "강요받은 비범한" 지도자직을 자신과 역사와 하나님의 계획을 달성하기 위한 하나님의 '은혜'로 고백하면서 그 은혜에 헛되지 않게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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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소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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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와 같은 그 분이 있기에』 류호준 저. 크리스챤 다이제스트사, 1998년 2월 발행. 신국판 380쪽, 가격 10,000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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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히브리서에 대한 성서신학적 강해 주석서이다. 저자 류호준은 화란 자유 대학교에서 구약학으로 신학박사를 받았으며, 현재 서울 방배동에 소재한 기독신학대학원 교수이다. 구약학자인 저자가 신약의 히브리서 주석서를 쓰게 된 이유에 대해, 저자는 "나는 구약학자이기 이전에 성경을 연구하는 성경학자이며, 그리고 성경학자이기 이전에 성경을 믿고 성경을 사랑하는 신자"라고 말한다. 또 류호준 교수는 히브리서 주석을 쓰게 된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감동적으로 밝히고 있다 : "내가 히브리서 주석을 쓰게 된 것은 히브리서가 신약의 레위기에 해당하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내가 히브리서를 사랑하게 된 것은 히브리서가 보여주고 있는 '생생하고도 눈물겨운 믿음'에 관한 묘사 때문입니다. 특별히 히브리서 저자가 보여주려고 힘쓰는 믿음은 결코 신적이지 않다는 점이 나에게는 매우 인상적입니다. 예를 들어 신앙의 모습을 다각도에서 그려주고 있는 11장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은 매우 인간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흔히 우리가 말하는 대로 고고하게 믿음 안에서 살다가 떠난 분들이 아니라, 삶의 깊은 수렁과 시련의 높은 파도 속에서 처절하게 고난받으면서도 끝까지 하나님을 향한 충절을 잃지 않고 고군분투하며 그들의 길고도 험한 순례의 길을 걸어갔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그들은 매우 인간적인 신앙인들이었으며 이런 점이 나에게는 커다란 위안이 되었습니다."
또한 저자는 서문에서 자신의 기도이자 히브리서 저자의 믿음에 대한 정의를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 "비록 양손에는 가진 것이 없어도, 등에 짊어진 천막 하나로 인생을 살 수 있는 용기있는 신앙인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이 땅 위에서는 외국이요, 나그네요, 일시 체류자처럼 살면서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받고 순례자처럼 천성을 향해 길고도 머나먼 여정을 떠나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이와 같은 인간적인 감동을 지닌 믿음에 관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책은 본래 평신도를 대상으로 강의한 것을 책으로 엮은 것이기에 어렵게 느껴지는 히브리서를 알기 쉽게 풀이해 주고 있다. 그러나 그 내용은 깊이가 있으며, 상세한 각주는 이 책이 학문적 연구서임을 입증하고 있다. 먼저 그는 17쪽에 걸쳐, 일종의 히브리서 서론(introduction)격에 해당하는 <히브리서에 관한 성서신학적 강론>을 제시한다. 그리고나서 히브리서 전체 13장을 24개의 강론으로 나누어 주석하고 있다.
그 동안 국내 성서학자에 의해 집필된 단권 히브리서 주석서로서 장신대 박수암 교수의 『히브리서』(대한기독교서회, 1993)와 총신대 권성수 교수의 『히브리서』(총신대 출판부, 1997) 뿐이었는데, 류호준 교수의 이 책이 더해짐으로써 한국 성서학자에 의한 히브리서 연구가 보다 진척되었다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