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에 대하여
1. 다소의 바울
바울은 디아스포라들 속에 섞여 살고 있는, 한 엄격한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다소(Tarsus)는 길리기아라는 로마지방의 首都격이었다. 이 다소는 지중해 연안과 近接해 있고 소아시아에서 시리아로 가는 途上에 위치해 있다. 現代는 그렇지 못하지만 바울 당시에는 상업과 무역의 要衝地帶였으므로 자연적으로 헬라주의적 사상이 지배하게 되었다. 다소는 헬라 文化의 中心地로써 알려지게 되었다.
다소라는 이 城이 언제 세워졌는지 자세히 알길은 없다. 초기, 이 도시의 역사의 기록은 살만에셀의 요블렉 오벨리스크에서 발견된다. 그곳에 보면 살만에셀에 의하여 정복된 도시들 中에 이 도시가 포함되어 있다. 그러므로 B.C.850년 이전에 이 도시가 설립되어 있었다는 결론을 얻게 된다. 古代에는 헬라의 도시라기 보다는 東方의 도시로서 내려 온 것이다. 앗시르 왕국의 멸망후에 길리기아는 독립을 얻었다. 최소한 부분적으로 그랬다. 그러나 그후 페르샤 제국의 屬國이 되었고 總督 下에 있게 된 401년에 동생 싸이러스는 그의 형 아르타 크세르크세스를 대항하기 위하여 군대를 이끌고 이곳에 들어왔고 20일간 진주하였느며,협상후 그곳에서 후퇴하였다. BC 333년 알렉산더 대제는 이수쓰로 가는 길에 길리기아의 입구를 통과하여 갔다. 페르샤인들은 곧 다소에 불을 놓으려하였으나 곧 마게도니아人들이 들어왔으므로 그 城을 求할 수 있었다. 다소는 2년간 페르샤 影響 下에 있다가 이제는 헬라의 영향 下에 있게 되었다. 알렉산더가 페르샤軍을 무찌르고 나자 소아시아의 東南部 地方은 헬라 영향이 강력하게 되었다. BC 323년 알렉산더가 젊은 나이로 죽고 그의 넓은 帝國은 分割되고 길리기아는 결국 시리아의 셀루키드 王朝에 떨어지게 되었다. 셀루키드 王都는 안디옥이었다. 이 왕조도 헬라주의를 가진 왕조였다. 그간 별로 政治的 變動은 없었으나 主前 2세기傾에 변화가 찾아왔다. 안디오커스Ⅲ가 마그네시아 전쟁 (B.C. 190)에서 로마人들에게 패하고 소아시아의 소유들이 로마에 빼앗기게 되었다. 東길리기아는 아직도 셀루키드 왕조의 소유로 남아있었고 西길리기아는 로마로 넘어갔다. B.C. 2세기 중반에 셀루키드왕조의 멸망으로 강도들과 약탈자들이 들끓었고 밋쯔리데틱전쟁(Mithridatic War)以後 104년B.C.경에 로마의 지방이 되었으나 다소는 일시적으로 아르메니아의 티그라네스의 손에 들어갔고 폼페이가 이곳을 로마의 제국의 동방지구로 개편하였다(B.C.64-63). 그리고 BC 25년경 부터 다소를 포함한 東길리기아와 시리아는 한지방으로 한행정 구역이 되었고, 바울 당시에도 그랬다 (갈1:21 참고).
안토니우스의 덕분에 이 도시는 獨立되고 자유로운 도시로 되었고 가끔 안토니우스의 거주지가 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특권의 상태는 아우구스투스가 악티움 전쟁에서 이긴 후 홀로 로마제국의 통치자가 되었을때 확고하게 되었고, 다소인들에게 한결같이 로마의 시민권이 주어진 것은 아니었다. 自由民으로 허락받는 것은 황제의 特別 配慮로 되어지는 것이었다. 즉 한사람 한 사람이 허락을 받아야 한다. 여러가지 사건으로 인하여 다른 황제들이 권좌에 올랐고, 그 황제들은(폼페이,시저,안토니우스,아우구스투스 등) 각기 자기들의 마음에 든 사람들에게 로마 市民權을 수여해 주곤 하였고 그렇게 하여 後孫들은 계속 시민권을 소유하게 되었다. 그러나 바울의 부친이 이 특권을 받았는지, 또는 조부가 받았는지, 또한 어느 황제에게서 받았는지 알 길이 없다. 다만 행22:26-28정도 밖에 알수가 없다.
스트라보(Strabo)라는 지리학자는 말하기를 다소가 아덴과 알렉산드리아 혹은 다른 대학의 도시들 보다 더 나은 곳이라고 하였다. 흔히 사람들이 다소의 자기 고향에서 공부하고 그들의 연구를 완전히 마치기 위하여 타지방으로 가게 되는데 한번 고향을 떠난 학생들은 대부분 다시 돌아오지 아니한다. 알렉산드리아도 역시 그러하다. 그래서 로마에는 다소 사람들과 알렉산드리아人들이 많이 살고 있다. 이러한 도시는 學文으로서도 有名하지만 부요하였다. 이땅들은 平野가 많았고 매우 肥沃한 땅이었다. 게다가 商業이 특히 왕성하였다.
2. 히브리人으로써의 바울
로마서를 硏究하면서, 특히 바울을 연구하면서, 사도행전과 다른 바울서신을 자세히 비추어보면서 배워 나가야 할 것이다. 바울이 다소 출신 이요, 로마의 시민권의 소유자라는 사실보다 더 중대한 사실은 그가 유대인이었다는 사실이다. 빌립보서 3:5,6을 살펴보자 "내가 8일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族屬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의 義로는 흠이없는 자로다." 여기서 볼 때 그는 날 때부터 유대人이었음을 알 수 있는데 특히 다음세가지 사실을 알수 있다.
첫째로, 그는 베냐민 支派에 속해있었다는 점이다(롬11:1). 베냐민지파는 사해바다의 북서쪽에 있으며 유다지파와 근접해 있다. 예루살렘은 유다와 베냐민, 두지방에 할당된 땅이었다. 솔로몬 왕이 죽자 르호보암이 왕위에 올랐을 때 10지파는 르호보암을 배반하고 여로보암이라는 반란 대장을 따라 북쪽에 괴뢰 정권을 수립하였는데 이것이 북쪽 이스라엘 왕국이요, 르호보암 왕자를 따르는 지파는 겨우 2개 지파로써 정통파정권, 즉 왕통을 잇는 지파들이었다. 全이스라엘 백성들의 제1대 왕인 사울이 베냐민 출신이었고, 제 2대왕인 다윗은 유대지파였으며 그후 王位는 솔로몬, 르호보암으로 연결(세습)되었다. 이와같이 하나님의 백성들인 이스라엘이 둘로 갈라진 이유는 간접적으로는 솔로몬의 이방여인들과의 통혼, 우상숭배, 사치, 과중한 세금부담과 과중한 노무 사역 때문이었다. 그러나 직접적으로는 그의 아들 르호보암의 교만한 마음과 성급한 젊은이 氣質 때문이었다. 하여간 유대지파와 베냐민 지파는 히브리 12지파중 正統지파였다. 나중에 이 베냐민지파는 支派意識을 잃어버렸으나 어떤 사람들은 굳게 뭉치기도 하였다. 捕虜에서 돌아온 후 베냐민 지파의 後孫들은 다시 유대지방에 定着하였다(느헤미야 11:7-9,31-36).
바울의 부모가 그의 이름을 '사울'이라고 지어준 이유는 아마도 베냐민지파 中에서 히브리역사상 가장 뛰어난 인물이 사울 왕이었으므로 '사울'이라 하였을 것이다. 구약 가운데, 바울 사도가 悔心하기 以前의 狀況을 豫言한 구절이 있었겠는가 ? 창세기 49:27 에 '베냐민은 물어 뜯는 이리'라는 말이 바울을 두고 한 말이라는 해석은 배제되어야 한다.
둘째로 바울은 히브리인 중에 히브리인 이었다. '히브리인'이라는 말은 '이스라엘 백성'이나 혹은 '유대인'이란 말보다도 더 特殊化된 言語다. 바울은 고린도 敎會를 방문하여 바울의 地位를 떨어뜨리려는 자들에 대하여 말하기를 "저희가 히브리인 이냐? 나도 그러하며 "라고 했는 데(고린도후서 11:22), 이것은 '이스라엘 百姓'이나 아브라함의 後孫들보다는 더 엄격한 意味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사도행전 6:1에서 히브리파 유대인들은 같은 유대인이지만 헬라파 유대인들과는 對照的인 人物들이다. 이들 히브리파 사람들은 이곳 저곳에 흩어져 있었으나, 그들은 자기들의 居住地의 言語(헬라어)를 사용하지 아니하고 히브리 方言이었던 아람語를 사용하였다(행 26:14). 뿐만 아니라 이들은 로마나 고린도에 헬라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히브리어를(아람어) 말하는 會堂을 따로 가지고 있기도 하였다. 바로 이 아람어가 바울의 母語(mother tongue)였다(행 21:40,22:2).
행 22:3에 의하면 憎惡에 차 있는 유대人들에게 자신을 소개하기를 ①길리기아 다소에 출생 ② 이 도시(예루살렘)에서 자라났음. ③가말리엘 門下에서 우리 조상들의 律法의 嚴한 敎訓을 받았고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있는 者라고 함.
세째로 바울은 "律法에 대하여는 바리새인"이었다, 그는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교육을 받았는데 가말리엘은 그 當時 바리새人의 指導者였다(행 26:5, 23:6참고 할것). 그는 산헤드린의 公會員이기도 하였다. 그의 謙讓과 德은 행5:38-에서 볼 수 있다. 그렇다고 하여 가말리엘의 계열과 바울의 계열이 같은 것은 아니였다. 예를 들면 復活 所望이나 聖經解釋上의 기술적인 차이였다.
3. 敎會의 迫害者였던 바울
初代敎會 기독교인들과 바울의 처음 관계는 박해자로서의 관계였다(고전15:9, 갈1:13). 그가 가말리엘 문하에서 자랐으나 가말리엘은 중도적이요, 온화한 태도를 가졌다. 이러한 태도는 스데반이 使徒들보다 더 급하고 날카로운 태도를 가진 것과 비슷하다. 스테반이 사도들보다 더 훨씬 論理性을 가졌던 반면, 바울(사울)은 가말리엘보다 훨씬 더 논리적이었다. 스데반과 바울, 이 양자의 눈에는 새 秩序와 舊秩序가 서로 和合할 수 없는 것이었다. 만약 스데반이 "새로운 것이왔다. 그러므로 옛것은 버려야 한다"고 말했다면, 바울은 '옛 것은 머물러야 한다. 그러므로 새 것은 버려야 한다'고 한 것과 같은 것이다, 그래서 결국 바울은 스데반을 죽이는데 가담하는 中心人物이 된 것이다.
바울의 생각에는 律法이 變한다는 것은 받아들일 만한 見解였다. 유대인들은 세계역사를 세 時代로 나눈다. 이들은 각기 2000년씩으로 되어 있으며 ①혼돈의 시대 ② 율법의 시대 (시내산에서 모세에게 啓示하신 때부터) ③ 메시야의 시대로 나눈다. 이러한 세 시대 이후에는 永遠한 安息이 온다. 그러므로 이것을 믿는 그들은 율법이 固定된 것이 아니요 臨時的인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바울이 使徒들이 주장한 것처럼 '예수가 메시야이다'는 사실을 생각해 볼 때 그것은 얼토당토 하지 않은 것이었다. 바울의 메시야觀과 사도들의 메시야觀이 서로 같지 않았다. 그러나 이것이 바울로 하여금 예수의 메시야性을 否認하게 하는 결정적인 原因이 된 것은 아니었다. 그 결정적인 원인은 간단한 것이었다. 예수는 십자가에 못박혔다. '십자가에 못박힌 메시야'란 言語的으로 矛盾이 된다. 십자가에 죽였다는 것이 재판의 잘못으로 되었던 안되었던 그것은 문제 밖이었다. 문제는 그가 십자가에 달렸다는 데 있는 것이다.
신명기 21:23에서는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예수는 메시야가 될 수 없었다. 적어도 메시야는 이사야 11:2과 같이 "주의 신이 그 위에 강림하실"분이었다, 그 반면에 나무에 달린자 위에는 저주가 임하는 것이다(롬1:18참고). 십자가에 달린 메시야란 가장 矛盾된 論理인 것이다. 그래서 그는 믿지 않고 오히려 異端으로 생각하게 되었고 박멸코자 했던 것이다. 자신의 옛날의 형편을 想起하면서 그는 고린도전서 1:23에서 십자가의 導가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라고 하였던 것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이러한 論理의 결과, 바울은 종교적인 열심에서 기독교인들(예수 믿는자들)을 핍박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大祭祀長들과 유대人 몇몇 사람들은 政治的인 動機에서 기독교인들을 핍박한 것이다. 그리하여 결국은 다메섹까지 돌진해 간 것이다. 無知에서 기독교 핍박, 정치적인 세력면에서 자기들을 위해서 기독교 핍박, 이 두가지는 모두 나쁜 것이나 후자가 더 나쁘다.
하나의 문제가 제기된다. 바울은 기독교에로의 改宗을 하려고 했으며 그래서 양심의 찌름으로 인해서 더 기독교를 핍박한 것인가 ? 어떤 사람들은 그렇게 주장하면서 행26:14구절을 해석하기를 가시채란 양심의 소리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해석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핍박한 것을 비유로 한 말로써 예수그리스도로 해석하여야 할 것이다.
또 하나 갈1:12의 구절을 가지고 바울의 복음이 全的으로 새로운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주장하기를 바울은 예수님을 再解釋한 人物이요, 그러므로 기독교의 第2創設者라고 한다. 그러나 갈1:12에서 밝히고 있는 것은 바울의 복음의 獨立性이요 使徒性의 獨立性이다. 위에서 살펴 보았듯이 기독교에 대해서 알았으나 배타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었고, 그래서 기독교를 박해 하던 中 하나님의 啓示로 인해서 變化된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悔心 前에 基督敎를 전혀 몰랐었다고 말할 수 없다. 그는 매우 어렸을 때(젊었을 때)부터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으면서 공부를 하였던 것이다. 초대교회가 무엇을 믿고 있는지 알고 있었을 것인데, 왜냐하면 使徒들의 메세지는 처음부터 십자가에 죽었다가 다시 사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내용을 中心으로 하고 있었다. 바로 이 점이 유대인들의 憎惡를 일으키지 않았던가 ? (행4:10,17, 5:28-31, 40, 42, 7:1-6,57). 더구나 바울은 스데반의 설교를 들었었고 거기에 반박하였던 사람이었고 그를 죽이는데 증인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만약 우리가 '바울이 회심전에 예수에 대하여 전혀 모르고 있었다'고 하는 주장을 인정한다면, 우리는 심각한 문제에 부딪친다. 그것은 [역사적 예수 ---X---바울의 그리스도] 의 상태가 되며, 자유주의자들의 주장을 받아들이는 결과가 되는 것이다.
회심 전에 바울이 역사적 예수를 알았다는 사실은 복음의 傳統性을 말해주기도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啓示가 오기 前까지, 바울은 예수를 알았으나 그 진리에 반항하고 공격하고 믿지 않고 거부하였다(고전2:을 읽어 보라).
4. 바울의 悔心과 그 後 活動
바울의 다메섹 途上에서 그리스도 예수를 만난것은 실로 하나의 대 전환점이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라는 말씀은 의미심장한 말씀이다. 사울(바울)은 분명히 그리스도의 추종자들을 핍박하고 있었다. 그리스도인 이라고 하는 그들은 예수님의 몸이었다. 聖徒들의 아픔은 그리스도의 것이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바울을 죽이기는 커녕 사랑의 음성으로 부르셨던 것이다. 바울은 찔림을 받았다. 모든 것은 明白해졌다. 사도들의 증거는 옳았으며 대제사장들, 사두개인들, 바리새인들은 잘못되어 있었다. 아나니아라는 사람을 통하여 두번째 음성을 들었다. 그는 異邦의 使徒로 부르심을 받은 것이다(행9장).
사도행전에 바울의 회심에 관하여 세번 記錄되어 있다. 행9:1-, 22:1-, 26:12-에 기록되어 있으나 약간씩 차이가 있다. 이제 主의 啓示를 받은 바울의 마음 속에는 율법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거하시게 되었다. 그의 마음 속의 문제는 解決되어 갈라디아 3;10-14 과 로마서 10:4의 결론이 나오게 되었다. 이제 무엇을 하여야 할 것인지 명백해졌다( 행22:10참조). 과거 律法 안에서는 아무리 善行을 하였어도 불만이었다. 그래서 바울은 즉시로 예수를 메시야라고 證據하였다. 그는 그후 아라비아로 갔다(갈1:17). 그는 아라비아에서 무엇을 하였겠는가? 다른 것보다 우선적으로 그는 복음 증거를 하였다. 뿐만아니라 혼자 묵상하기 위해서도 아라비아로 갈 필요가 있었다. 아라비아에서 전도를 하였다는 근거가 어디에 있는가? 갈라디아1:17에 보면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메섹으로 돌아갔다고 하였다. 그런데 고린도후서 1:32,33에 보면 그가 다메섹에 있을 때 아레다 왕의 방백이 바울을 잡으려고 하였다고 했는데 이 사실을 볼 때 바울이 아라비아에서 복음 전도를 하였다는 사실을 알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여기서 잠시 아데다왕에 얽힌 사실을 살피도록 하자. 헤롯 안디바는 주전4년 헤롯 대왕의 후계자로 갈릴리 지방을 다스리게 되었다. 그는 헤로디아와 不倫의 관계를 맺기前에 나비티안 왕국의 공주, 즉 아레타스 4세(AretasⅣ. B.C. 9-A.D.40)의 딸과 결혼했었다. 헤롯 안디바가 헤로디아와 결혼하기 위해 나바티안 공주와 이혼하게 되자 아레다왕은 대단히 노했다. 그리하여 그때부터 아레다왕은 안디바에게 보복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主後 36년 나바티안 왕 아레다는 기회를 포착하여 베뢰아까지 침공해 들어갔으며 안디바는 여기서 쓰디 쓴 패배의 잔을 마셔야 했다. 로마 皇帝 디베료는 이곳을 도우라 명하고 군대를 보냈다. 비텔리우스라고 하는 원정군 대장은 평상시 안디바와 감정이 있었으나 황제의 명이므로 어쩔수 없이 안디바를 도우러 갔으나 그가 예루살렘에 도착하였을때에 로마에서는 황제가 37년 3월 16일에 사망했다는 전갈이 왔다. 그는 곧 안디바를 돕는 것을 거절하고 황제의 사망의 핑계로 本國 로마로 돌아가고 말았다. 결국 아라비아를 중심으로 한 나바티안왕국은 그 세력을 다메섹까지 확장하게 되었다. 아마도 바울이 아라비아에 있을때 나바티안은 다메섹을 장악하고 있었으리라 생각된다. 이것이 확실한 그 증거는 다메섹에서 사용되는 화폐 동전에 주후34-62년 사이에 로마 황제의 형상있는 것이 없는 것을 보아서 알수 있다. 바울은 나바티안 왕국인 아라비아지방에서 복음을 증거하였다. 이로 인하여 나바티안, 아레다왕의 노여움을 사게 되었고 아레다왕은 바울을 체포하려고 했던것이며 바울이 다메섹에 이르렀을 때 왕의 신하들이 그를 잡으려고 성을 지키고 있게 된 것이다. 그래서 광주리를 타고 성벽을 통해 밖으로 도망하여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다. 그것은 회심후 3년만이었다. 상황은 완전히 달랐다. 바울의 옛 동료들은 이제 원수가 되어 있었고 기독교인들은 그의 편이되어 있었다. 갈라디아 1:18에서 바울은 게바를 심방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갔다고 하였다. 바울의 제1차 예루살렘 방문에 대해서는 행9:26-30, 갈1:18-19에 기록되어 있다.
바울이 베드로와 야고보를 만나기 전에는 舊約 豫言의 知識을 基礎로 다메섹에서의 계시에 비추어 해석하여 傳했을 것이다. 그러나 베드로와 야고보를 만난 後에야 그는 자신이 받았던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傳達해 주면서 보다 상세하게 복음을 전할 수 있었다.
갈라디아서 1:18-에 보면 회심한지 3년만에 게바(반석-베드로)를 만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15일을 遊했는데 그곳에서 그는 베드로와 야고보만을 만났다. 그런데 고린도전서 15:5,7에 보면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12제자에게와" 라고 했으며 또 "그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라는 말씀이 나오는데 이것은 갈1:18,19과 우연히 일치된다.
15일동안 예루살렘에 머무는 동안 바울은 베드로와 야고보를 만났었다. 만약 베드로가 바울에게 주께서 자기에게와 12제자들에게와 500여 형제들에게 나타났다고 했다면 야고보는 아마도 어떻게 주님이 자기에게 나타났으며 또 모든 사도들에게 나타났는가를 바울에게 가르쳐 주었을 것이다.
야고보에게 예수님이 나타났다고 하는 사실에 대하여 제롬의 히브리인들의 복음이란 곳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주께서 자기의 겉옷을 제사장의 종에게 주고 나자 야고보에게 가셔서 나타나셨다. 야고보는 주의 성만찬 잔을 받아 마실 때부터 주께서 부활하신 몸으로 나타 나실때까지 금식을 하고 있었다. 주께서는 '식탁과 빵을 가져오라'하시고 빵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나의 형제여 너의 빵을 먹으라 이는 인자가 잠자는 자들중에서 살아났음이니라'고 하셨다"
하여간 베드로와 야고보는 예루살렘에 있는 초대교회의 두개의 공동체의 指導者들로 각각 부각되었다. 마가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안에서 모이는 베드로가 이끄는 그룹은 베드로가 헤롯아그팁바 1세로부터 도망하여 그 집으로 가서 떠나면서 인사말을 하면서 "야고보와 형제들에게 이말을 전하라"하고(행12:17) 떠난 그때 이후부터는 야고보와 더 가까와 진것 같다. 갈라디아에서 풍기는 인상은 바울이 야고보를 使徒로 認定한것 같이 생각된다. 원래 사도란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 그의 委任을 받은 사람을 가리키지 않는가? 그래서 초대교회는 야고보를 높이고 그래서 그의 地位는 점점 더 올라가게 된 것이다. 게다가 야고보는 기도를 많이 하는 경건한 사람이었다.
5. 안디옥과 敎會
안디옥은 입수스 전쟁의 바로 直後인 301년에 셀루키드 니카노르가 설립한 도시이다. 안디옥이란 이름은 그의 부친인 안티오커스의 이름을 따라서 붙였다. 그후 셀루키드 王朝의 王들, 특히 셀루커스 칼린니쿠스(246-226 B.C.)와 안티오커스 에피파네스(175-164 B.C.)에 의하여 확장되었다. B.C. 83년에 셀루키드 왕조의 멸망으로 안디옥은 아르메니아의 티그란네스의 손으로 떨어졌다. 그는 시리아를 통치하고 있었는 데 14년 후에 로마에게 멸망당했다. B.C.64년에 이 지방은 폼페이에 의해 로마로 倂合되었고 폼페이는 안디옥에 특권을 부여하였다. 그리하여 안디옥은 시리아 지방의 수도가 되었다. 이것은 당연하였는데 왜냐하면 이 안디옥은 陸路와 海路의 교통 중심지였으므로 商業上 要路였기 때문이었다. 이 도시는 로마 알렉산드리아 다음으로 로마 세계 안에서 세번째의 도시가 되었다. 그 도시로부터 5마일쯤 떨어져서 아폴로와 아데미의 전각의 지점인 다프네 근교가 있었다. 숲과 호수로 아름답게 꾸며진 이 近郊는 셀루키드와 로마인들에 의하여 다듬어진 것이다. 이것으로 인하여 안디옥이 國際的인 都市가 된 것이다. 셀루키드 니카도르는 이곳에 유대인들이 많이 거주하게 하였고 헬라인들에게도 똑같은 권리를 부여 하였다. 시리아人들, 헬라人들 또 그 후에는 로마人들 까지도 들어와 이 성의 主 住民을 이루었다. 이 주민들은 격정적이고, 거칠고, 성급한 人種들이었고 떠들석한 사람들이었다. 文學 藝術도 無視되지 않았다. 초대교회에서 안디옥은 重要하고 獨特한 位置를 차지한다. 예루살렘에서 迫害를 當한 사람들은 베니게와 구브로(베니스와 싸이프러스)와 안디옥까지 박해를 피하여 오게 되었다(행11:19-26). 사도행전 11:20에 보면 헬라人에게도 福音을 傳하게 되는데 이들은 유대係 헬라人이 아니고 순수한 헬라인 이었다. 敎會 內에 問題가 차츰 일어나게 되었다. 사도행전 10장에 보면 베드로가 고벨료(로마인-異邦人) 가정에 초빙을 받아 가게되었고, 베드로는 그곳에서 모든 고넬료 가정에 세례를 베풀어 基督敎人이 되게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할례를 받지 않았고 그대로 기독교인으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던 것이다. 당시 여러 민족들을 모두 합하여 50萬이나 살고 있는 이곳에 핍박으로 인하여 신자들이 오자, 유대인들은 유대인들에게만 복음을 전하였다. 그러나 구브로와 구레네인 몇 사람은 순수한 헬라인들에게도 복음을 전하였다. 이들은 이미 고넬료 사건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곧 예루살렘에 傳하여 지게 되었고 예루살렘敎會는 바나바를 안디옥敎會로 파송하였다.
바나바는 '위로의 아들' 혹은 '느보의 아들'이란 뜻이다. 사도행전 4:36에 보면 요셉이 그의 本名임을 알수 있다, 그는 구브로 섬에서 태어난 레위 족속의 사람이었으며 마가의 사촌이었다. 즉 아버지의 형제의 아들이었다. 그는 부유한 사람인 것 같은 데 일찌기 밭을 팔아 使徒들에게 가난한 자를 도우라고 獻金한 것을 알 수 있다(행4:37). 사도행전에 보면(11:24) 그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라"고 하였고, 그의 권면의 말씀에 의하여 교회가 크게 부흥하였다. 그가 훌륭하다는 점은 귀한 종을 알아보았고 마음을 열고 그를 끌어들여 함께 事役하였던 점이다(행 11:25,26). 바울과 바나바의 가르침으로 인하여 '그리스도인'이란 별명이 붙을 만큼 큰 역사가 일어났다. 이들의 힘으로 안디옥교회는 3년만에 세계적인 교회로 승격하였고 이젠 오히려 예루살렘 교회가 흉년으로 고생하게 되자 부조를 보낼만큼 큰 일을 하게 되었고 宣敎 사역 또한 遂行하게 되었다(행13:1-).
수리아 안디옥의 교회는 예루살렘 교회와 비교되는 國際的인 敎會로 급속도로 성장해 나아갔다. 만약 예루살렘의 교회가 일반적인 意味에서 기독교인들의 모교회(mother church)였다면 안디옥의 교회는 특수한 의미에서 이방 기독교인들의 모교회였다. 사도행전 제13:1에 보면 이 안디옥 교회의 지도자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기록되어 있다. 이들은 '선지자들과 교사들'이었으며, 그 이름들은 ① 바나바, ② 니게르라하는 시므온, ③ 구레네 사람 루기오, ④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 ⑤ 사울(바울), 이상 다섯名이었다. 바나바와 사울(바울)에 관하여는 이미 살펴보았고, 또 앞으로 살펴 볼 기회가 있겠으나, 그외 시므온, 루기오, 마나엔 이 세사람에 대해서는 별로 아는 바가 적으므로 여기서 살펴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라틴어 별명 '니게르'(Niger=black) 라는 시므온은 그의 동료 루기오와 같이 아프리카 出身임을 암시해 준다. 그런데 시몬이란 신약 성경 가운데 기록된 다른 人物이 나오는 데 그는 바로 골고다 까지 예수님 대신 십자가를 지고 올라갔던 구레네 사람 시몬이다. 전도자 마가는 자기가 쓴 복음서 15:21에서 이 시몬을 로마서에 있는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비'라고 後代의 독자들을 위해서 기록해 주고 있다. 바울은 A.D. 57년경 로마의 기독교인 공동체의 일원으로 있는 루포에게 특별한 문안을 하고 있다. "주안에서 택하심을 입은 루포와 그 어머니에게 문안하라 그 어머니는 곧 내어머니니라"(롬16:13). 로마에 살고 있는 바울의 친구인 루포가 바로 마가복음 15:21의 시몬의 아들 루포라는 상상은 단순한 하나의 상상이 아니라 거의 확실하다. 아마도 바울이 안디옥 구레네 시몬 즉 니게르라하는 시므온의 가정에 머물렀으며, 그 때에 바울은 그 집주인의 아내(루포의 어머니)에게 어머니처럼 돌봄을 받았을 것이다. 바울이 로마서를 기록할 당시에는 시몬은 아마 죽은 듯하다. 그리고 루포의 가족은 로마로 이사를 간 것 같다. 루포와 그 어머니는 안디옥에서도 주를 위해 많은 봉사를 하였겠으나 로마에서도 뛰어나게 봉사를 잘하여 로마 교회에서도 믿음이 널리 알려진 것 같다. 잔(Zahn)이라는 주석가가 마가의 루포를 로마서의 루포와 같지 않았다고 하였는데, 이것을 사람들은 "정신병자의 의심"이라고 하였다. 구레네 사람 시몬의 억지로 지우게 된 십자가는 그 자신과 가족에게 큰 축복을 가져다 준 계기가 된 것이다. 다음으로 구레네 사람 루기오는 아마도 사도행전 11:19-21에 나오는 안디옥에서 이방인 복음 전도를 한 구브로와 구레네 사람들중의 한 사람이었을 것이다.바울은 로마서 16:21에서 루기오에게 문안을 하고 있는데 그가 바로 이 사람일 것이다. 그러나 이 루기오(Lucius)를 누가(사도행전의 저자)와 同一 人物이라고는 할 수 없다. 그는 바울의 친척이었다. 이와같이 처음 안디옥에서 활동하던 사람들이(바울이 익히 알던 사람들) 나중에 로마로 많이 移住해 가서 살면서 교회의 충실한 일꾼으로 섬긴 것을 알수 있다.
그 다음 인물 마나엔은 B.C. 4년경부터 A.D. 39년까지 갈릴리, 베뢰아 지방을 통치했던 헤롯 안디바의 젖 동생 이었다. 그는 귀족임에 틀림없다.' 절친한 친구'였던 그는 헤롯과 친분이 두터운 가족의 한 사람으로써 왕자와 함께 궁전에 지내며 같이 놀고 같이 공부하며 매도 대신 맞아주는 whipping boy였을 것이다. 마나엔은 히브리어 이름 므나헴(Menahem)의 헬라어 이름이다(=Manaen).
바나바는 당시 안디옥 교회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하고 있었으므로 명단에 첫번째로 나온다. 그러나 사울은 회심하고 나서 안디옥교회에 온지 얼마 안되었으므로 또 젊은 나이였으므로 명단의 맨 나중에 나온다. 이 '선지자와 교사'들은 身分이 다르고 고향이 달랐으면서도 복음(그리스도)안에서 하나된 것을 알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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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 교회와 안디옥 교회 사이에는 서로 異質感이 점점 뚜렷하게 되어지기 시작하였다. 예루살렘 교회는 안디옥 교회에 대표단을 보냈는데, 그들중에 아가보라 하는 사람이 (예언의 영이 있는 者)있었다. 그는 글라우디오 황제때 흉년이 있으리라고 하는 예언을 하였고, 그 예언대로 글라우디오 때에 (행11:28) 그 사건이 일어났다. 수토니우스는 글라우디오의 통치기간(A.D. 41-54)에 흉작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흉년은 유대지방이 특별히 더 극심하였는데 이것으로 인하여 王家에서 유대교를 믿는 사람들에 의하여 애굽이나 구브로로부터 곡식을 사서 유대로 가져오는 일이 있었다. 이 때에 안디옥 교회도 아가보의 예언을 듣고 모아두었던 헌금을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들에게 보냈던 것이다. 이 돈을 책임을 지고 가져간 사람들이 바나바와 바울이었다. 이와같이 헌금을 예루살렘으로 보낸 것은 "저희가 기뻐서 하였거니와 또한 저희는 그들에게 빚진자니 만일 이방인들이 그들의 신령한 것을 나눠가졌으면 육신의 것으로 그들을 섬기는 것을 마땅하니라"(롬15:27)라는 의도가 들어있었다. 여기서 우리는 성경적인 헌금論을 알수 있는 것이다. 헌금의 목적은 ① 복음의 전도를 위하여, ② 그리스도인의 사랑의 표현(구제)이다.
6. 바울과 로마교회와의 관계
로마서는 바울의 로마 방문을 준비하게 하며, 그의 방문 목적을 설명하는 편지이다. 그가 그런 것을 쓰면서 동시에 그가 이해하고 선포한 복음의 진수를 포괄적으로 제시하는 것이 현명하다고 표현한 것이다.
바울과 로마교회와의 관계는 로마서 1:8 -15에 잘 나타나 있다.
바울은 주후 47년에서 57년까지 10년간 에게해(Aegean Sea)연안 복음화에 전력을 투구하였다. 주후 56-57년 겨울을 고린도의 가이오의 집에서 보내면서 가까운 장래에 예루살렘 방문을 앞두고 생각중에 있었다(롬15:25, 이방인에게서 거두어들인 헌금을 예루살렘 교회에 전달하려고).
이것이 끝나면 새로운 일터인 스페인(성경에 서바나)으로 가기를 결심하였다. 스페인은 로마제국의 서단일뿐 아니라 그 지역에 있어서 로마 문명의 중심지였다. 스페인으로 가는 길에 로마를 보고자하는 대망이 있었다. 로마는 이미 바울 이전에 복음이 들어간 도시였기 때문에 바울은 로마에 정착할 생각은 없었다.
로마교회는 언제 세워졌는가? 사도행전 2:10에 의하면 주후30년 오순절날 예루살렘에 모인 이들 가운데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이들 중에는 "로마로부터 온 나그네 곧 유대인과 유대교에들어온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이 로마로 돌아간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로마에는 주전 2세기에 이미 유대인 거주지역이 있었다. 폼페이가 주전 63년에 유대를 정복함으로써 유대교포들이 더 많아졌다.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는 바울을 만나기전부터 신자들이었다. 그들은 아마 본래 로마에 거주하던 신자들 중에 속했을 것이다. 본래 로마에 있던 신자들은 모두 유대인 신자들이었는데 클라디우스의 추방령을 받고 흩어졌다. 추방령의 여파는 잠시 뿐이었고 로마에 유대인 거주지가 다시 번성하였고 그 때문에 신자들도 많아졌다. 클라우디우스가 죽고(A.D 54년) 3년 이내에 바울이 로마교인들에게 편지를 쓰면서 그들의 신앙이 온 세상에 알려졌다고 했다(8절). 그리고 로마서를 쓰던 당시 이미 로마의 상류 사회에까지 기독교가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주후 57년에 로마에는 유대인 신자들 뿐만 아니라, 이방 신자들이 있었다. 따라서 그들에게는 유대인 기독교인들과 이방인 기도교인들 사이에 미묘한 암투가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이방인과 유대인을 함께 대상으로 하여 글을 쓰는 것이다.
바울이 로마 교회를 가기 원한 것은 그들을 세우기 위한 것이었다(1:11). 즉 내적으로 그들을 강건케 하기 위해서였다. 또한 외적인 세움(증가)을 위해서도 가기를 원했다.
또한 바울은 그들에게 열매가 맺히도록 하기 위해 방문하고자 한것이다(롬1:13). 빚진 자로서의 채무의식을 늘상 가지고 있었던 바울은(14절) 로마교인들에게도 역시 채무 의식을 가지고 있었따. 그는 할수 있는 한 그들에게도 복음을 증거하기를 원했던 것이다.
로마서를 쓰고 7년 지난 후에 로마에 대화재가 발생했다. 바울이 로마서를 쓰고 3년 후에 드디어 로마 방문의 꿈이 실현되었다. 그것이 실현되는 방법은 그가 예상하지 못했던 방법이었다. 로마서 15:31에서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어떻게 될 것인가 하고 우려했던것은 근거없는 우려가 아니었다. 그가 예루살렘에 도착하고 며칠 후에 유대에 있는 로마 관리들 앞에 피고로 서게 되었기 때문이다. 죄목은 성전의 성결성을 범했다는 것이다. 재판이 오래 걸려서 마침내 바울이 로마시민으로서의 권리를 행사하게 되었다. 그는 로마 황제에게 상소한 것이다. 그래서 로마로 이송하게 되었는데, 파선을 당하고 말타섬에서 겨울을 보낸 뒤 드디어 주후 60년 초에 로마에 도착하였다.
바울이 죄수의 몸으로 아피아토(Via Appia)를 따라 북쪽으로 호송되고 있을때 로마에 있는 신자들은 그의 소식을 듣고 로마시 남방 30-40마일 지점까지 마중 나왔다. 거기서부터 로마까지 그들은 마치 승리의 부대 처럼 바울을 에스코트하여 주었다. 바울은 그들의 모습을 보고 큰 용기를 얻었다. 그로부터 8년간 그는 로마에서 셋집에 갇혀서 감시를 받으면서 간수의 허락을 받아 방문객들 맞아서 복음을 전파하였다. 그는 대제국의 심장부에서 복음을 전파하게 된 것이다. 스페인에가서 복음을 전했을 가능성은 없고 몇년 뒤 로마에서 기독교 지도자로 사형선고를 받고 성밖으로 끌려가 오스티아(Ostia) 항구로 가는 길목에서 처형되었다.
이상과 같은 동기에서 주후 57년 초 그의 친구 더디오에게 대서하게 하여 로마서를 썼다. 더디오는 바울이 고린도에서 머물던 집주인 가이오가 바울을 돕도록 붙여준 가이오의 비서였을 것이다.
이상을 요약하면 바울 로마서 기록 목적은 1)로마의 교회를 서방 전도의 전초기지로 삼기 위해서 2)로마 교회 내에 있는 유대인 기독교인들과 이방인 기독교인들 사이에 일체감을 갖게 하려고 3)로마 교회의 존속과 발전을 위해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