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과 요한의 신학
I. 바울의 신학
16) 바울의 역사적 위치
바울의 역사적 위치는 그가 헬레니즘계의 그리스도교 영역에 서 있으면서 헬레니즘계 공동체의 케리그마에 작용한 신학적 주제들을 신학적 사상으로 명백히 했다는 사실에 의해 특징지을 수 있고 그가 헬레니즘계의 케리그마에 숨겨진 문제들을 지각하고 그것들에 정의를 내렸으며 그렇게 함으로 그리스도교의 신학을 창조한 자가 되었다는 사실에 의해 특징지을 수 있다.
바울은 헬레니즘계의 유대교 출신이다. 그의 고향은 길리기아 다소였다. 그는 그의 고향에서 헬레니즘 문화에도 접했고 통속철학에도 정통했으며 종교적 혼합주의 현상에도 익숙해 있었을 것이다. 예수의 역사적 제자가 아니었던 그는 헬레니즘계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케리그마를 통해 그리스도교의 신앙을 얻었다. 이 케리그마에 의해 그에게 제기된 문제는 십자가에 죽은 나사렛 예수를 대망의 메시야로 볼 것인가였다. 그러나 그것은 법의일들을 실천함으로 의를 이루려는 유대교적 노력에 대한 심판을 승인하려는가를 뜻했다. 그는 처음에는 이물음에 격분하고 그것을 거절하였으며 그 공동체의 박해자로 나섰으나 결국 회심하고 신의 심판에 굴복했다.
그러므로 그의 회심의 의미는 바로 이것이다: 그의 지금까지의 자기이해의 포기, 즉 지금까지 그의 삶의 규범과 의미였던 것의 포기, 지금까지 그의 자랑이었던 것의 희생. 그러므로 그러므로 그의 회심에는 회개의 회심의 성격이 없다. 오히려 그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선포된, 모든 인간의 공적들과 영예에 대한 신의 심판에의 순종적인 굴복이었다. 그러므로 그의 신학에 재현된것은 바로 이 사실들이다. 이런 의미에서의 이 회심은 그를 헬레니즘계의 공동체에 인도했다.그는 선교자로서 헬레니즘 지역에서 활동했다. 그는 바나바와 함께 "사도회의" 에서 팔레스틴계 초대교회에 대해 헬레니즘계의 그리스도교를 대표했다. 그리고 그와 함께 제1차 전도여행을 계획했다.
그는 회심후에 예수의 제자들 및 예루살렘 초대교회와의 접촉을, 예수의 인물됨과 활동에 관해 배우려는 목적으로 시도하지 않았다. 그에게 중요한 예수의 역사는 오로지 다음 사실뿐이다. 즉 예수가 유대인으로 율법하에 나서 살았다는 것과 십자가에 처영되었다는 것뿐이다. 그가 그리스도를 모범인물로 지시할 때 생각한 예수는 역사적 예수가 아니라 先在者이다. 그의 본래의 구원론이 그의 신학적이고 인간학적인, 구속론적인 사상들과 함께 예수의 선포의 傳受도 展開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특별히 특징적인 것은 그가 율법에 관한 자신의 가르침을, 율법에 관한 예수의 말들중 어느 하나에도 관련시키지 않은 것이다. 바울의 신학은 예수의 설교에 비해 새로운 형성물이다. '예수와 바울' 은 결국 '예수와 헬레니즘계 그리스도교' 라는 문제이다.
A. 신앙의 계시 이전 인간
序言
1. 바울 신학의 사료로 사용될 수 있는 것은 단지 의심없이 순수한 바울 서신들 즉 로마서와 고린도 전후서, 갈라디아서, 빌립보서, 데살로니가 전후서,빌레몬서뿐이다.
2. 바울이 가령 그리스 철학자들 또는 현대 신학자들처럼 신과 그리스도, 세계와 인간에 관한 자신의 사상들을 이론적으로 종합하여 독자적 학문적인 글로 전개하지않고 그것들을- 로마서를 제외하면 - 오로지 단편적으로, 처지에따른 현실에 의거하여 편지로 엮었다는 사실과, 그것들을 연관성 있고 어느 정도 완결성 있게 확언한 로마서도 다름아닌 편지이고 구체적인 상화의 필요성에 의해 행해졌다는 사실 - 이 사실들에 의해 바울이 본래 신학자가 아니라는 판단을 내려서는 안된다. 그가 현실적 문제들을 근본적인 신학적 문제에 소급시킨 방법은, 그의 思惟와 談論이 그의 신학적 기본 입장에서 생겨났다는 것을 보여준다. 오히려 바울의 신학적 사유는 오로지 신앙 자체안에 포함되어 있는 인식을 意識적인 앎(知)으로 명백하게 할 뿐이다. 단지 감정, 단지 "경건" 만을 알 뿐, 동시에 신과 인간의 통일성에 관한 지가 아닌 신 관계는 바울 에게서 생각할 수 없다. 바울의 신학은 본질 자체를 다루지 않고 오로지 신이 인간과 그의 책임, 그의 구원을 위해 중요한 만큼 신을 다룬다. 그 신학은 항상 신과의 관련에서 세계와 인간을 본다. 신에 관한 명제는 모두 동시에 인간에 관한 것이고 인간에 관한 것은 모두 신에 관한 것이다. 그 까닭에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바울의 신학은 동시에 인간학이다. 바울의 그리스도론도 이 관점하에 놓여있다. 이 그리스도론은 그를 통해 신이 세계와 인간의 구원을 위해 일하는 그러한 자로서 그를 논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에 관한 명제도 모두 인간에 관한 명제이고 인간에 관한 것은 모두 인간에 관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바울의 그리스도론은 곧 救贖論이다.
1. 인간학적 개념들
序言
바울은 인간을 언제나 그의 신과의 관계에서 보았다. 특별히 인간적인 것, 신에대한 인간의 관계에 그 특유한 성격을 제공하는 것은 무엇인가? 바로 이것을 이해하려면 반드시 인간존재의 특수성 즉 이 존재의 형식적 구조들을 분명하게 해야한다.
17) 몸의 槪念
1. 육체와 인격으로서의 몸
바울에게서 인간의 존재를 특징짓는 가장 포괄적인 개념은 soma"몸" 개념이다. 가 構成的으로 인간의 존재에 속한다는 것은 바울이 완전히 죽은 후의 미래의 인간존재를 몸 없는 존재로 생각할 수 없었다는 사실에서 가장 분명하게 드러난다. 부활한 몸은 물론 이미 육체가 아니다. 그러므로 몸은 여러 다른 소재 - 육과 영 - 로 刻印될 수 있는 육체의 형태로 이해하는 것이 더 가깝게 보인다. 몸개념을 규정하려면 소박한 통속적 화법 즉 몸이 육체(Leib), 신체(Körper)를 뜻하고 역시 소박한 인간학적 도식에 따라 psuke "혼" 및 pneuma "영"에 대립시킬 수 있는 화법에서 출발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일련의 이 귀절들에서 분명한 것은 몸이 인간의 본래자아(가령 그의 영혼)에 외부적으로 결부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이 자아에 속해 있다는 것이다. 인간은 몸을 가지고 있지않고 몸이다.(고전13:3; 9:27; 7:4 <참조. 위에>).
2. 자기 자신에 대한 자신의 관계로서의 인간 존재의 표현
인간이 몸으로 지칭될 때 인간을 보는 특별한 방법은 어떤 것인가? 인간이 몸이라고 불리워질 때는 그가 자기 자신을 자신의 행위의 대상으로 만들 수 있거나 한 사건, 한 일의 주체로 자기 자신을 경험 할 때이다. 즉 어떤 방식으로든지 자기 자신으로부터 거리를 가질 수 있을 때이다. 이런 "자기 자신에 대해 가지는 어떤 관계"가 인간의 존재에 속한다면 그 곳에는 이중적인 것이 들어있다. 이것은 자기 자신과 통일을 이루거나 또는 자기 자신에게 생소해져서 자기 자신과 분리될 수 있는 가능성이다. 이때 외부 세력은 적대적인 것으로, 인간을 자신에게서 생소하게 하는 것으로 경험하거나 반대로 자기 자신에게서 멀어진 인간을 다시 자기 자신에게 돌아오게 하는 구원의 힘으로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몸으로서의 인간의 특징에는 인간이 자기 자신에 대해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는 존재라는 것, 이 관계가 바로 된 것일 수도, 잘못된 것일 수도 있다는 것, 인간은 자기 자신과 하나가 될 수도, 자기 자신과 분열을 일으킬 수도 있다는 것, 자신을 소유할 수도, 상실할 수도 있다는 것, 아니면 이 세력이 인간을 그 자신에게 돌려줌으로 그에게 생명을 제공한다는 것이 포함되어 있다. 오로지 그가 몸이라는 이유에서만 선할 수도 악할 수도 신과의 관계를 가질 수도 있는 가능성이 그에게 있다. 즉 몸 개념이 인간 존재의 특징으로 가지고 있는 근본 의미에서 이것은 이해되어야 한다. 그 의도는 몸의 존재로서 특수하게 인간적인 존재가 저 근본적인 의미에서 죽음을 넘어선다고 주장하려는 것이다. 그런데 부활의 삶에서 인간이 자기 자신에게 생소해지고 자기 자신과 균열을 일으키며 그에게 적인 세력 즉 그의 손에서 그 자신을 탈취하여 파멸시키는 세력에 포박될 수 있는 가능성이 제기된다는 반론도 가능하게 보인다. 이것은 인간 존재의 존재론적 구조가 제거되었다는 것이 아니다. 이 개념은 '나'와 '나' 사이의 인간균열을 화해시키는 것으로 자기 자신에 대한 인간의 관계를 전제한다.
3. 이원론적 자기 이해의 문제
인간이 몸이고 자기 자신에 대해 관계를 가지는 한 그는 자신에게서 거리를 가질 수 있으며 이 거리를 분리로 만들고 자기 자신에 대한 관계를 자신과 근본적으로 생소한 존재, 즉 非我에 대한 관계로서 오해하게 하는 유혹이 생긴다. 이 때 몸은 곧 육신이라는 소박한 원래의 의미가 다시 침투되어 '나'가 결부된 "이중 인격"을 물질적인 육신으로 생각하게 한다. 이것은 다름 아닌 이원론의 자기이해이다. 그 결과 인간의 "나"는 자신에게 이질적인 감옥으로서의 육신에 결박되고 이 육신에서의 해방을 동경하게 된다. 이 이원론의 실천적 생활 태도는 밀의와 금욕인데 그것들은 자기 자신에 대한 관계로서의 인간존재의 긴장에서 도피하는 일로 이해되었다. 바울의 자기 이해가 이 이원론에 의해 각인되지 않았다는 것은 그가 몸의 삶으로서 부활의 삶을 파악했다는 사실에서 드러난다. 그러나 반면 그는 인간의 균열, '나'와 '나' 사이의 긴장을 아주 심각하게 보고 인간의 처지를 받아들였는데 이 인간이 자기 자신을 잃고 외부 세력들에 넘겨졌다는 것은 그가 영지주의적 이원론에 접근할 수 있을 정도로 그에게 분명했다. 이 사실은 "몸"이 sarks "肉"과 동의어로 사용된 데서 나타난다. 몸은 원하는 것과 불가분의 관계로서 결합된 '나'로 남아있다. 그리고 몸과 육의 근본적인 차이는 계속 존속한다. 육은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죽었고 제거되었다. 육은 "신의 왕국"에 참여하지 못한다. 반면 몸은 부활된 생명을 지닌 자이다. 몸은 곧 인간 자신인데 비해 육은 인간에게 요구하고 인간을 규정하는 세력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인간의 '나(靈)'를 이원론적으로 인간과 동질적이 아닌 外皮 즉 감옥으로서의 육체적인 몸에서 구별하지 않았다. 그의 희망은 몸의 부활 및 육에 빠져 있는 "몸"이 영적인 것 즉 영의 지배를 받는 것으로 변화하는 것을 지향했다. 바울이 고린도후서 5장 1 절 이하와 12장 2 - 4절에서 헬레니즘 - 이원론적 몸의 평가절하로 즉 그것을 육신으로 보는 영향을 받은 것으로 나타나는 바 이 영향은 혼인 문제를 다루는 고린도전서 7장 1 - 7절에서 한층 더 심하다. 만일 이 귀절들에서 출발하여 바울에게 특유藅 그의 결정적 논술들을 규정하는 몸 개념을 해석하려고 한다면 그것도 역시 방법상으로 잘못일 것이다. 유선 육신을 지시하는 이 개념이 그 때에는 인간의 인격을 표시하는 데 쓰일 것이다. 즉 몸은 인간이 그의 행동의 대상으로 자기 자신의 상대가 되는 한 자기 자신에게서 떠나서 외부 세력들의 지배에 빠질 수 있는 한에서 인간이 되기 때문이다.
18) 魂과 靈, 生命
1. 속 사람
몸으로서의 자기 자신에게 거리를 둘 수 있는 본래의 나일 때 그런 인간을 바울은 "속 사람"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는데 이것은 헬레니즘 이원론의 인간학에서 생긴 표현으로 보인다. 이 사람은 죄의 세력에 빠진 나, 죽음의 몸 및 죄의 몸과 반대로 인간의 본래적 나이다. 고린도후서 4:16에서 "속사람"은 본래의 나이기도 하나 육신에 반대된 의미에서 그렇다. 로마서 7장 22절에서는 율법하에서 벗어나지 못한 인간을 말한다. 고린도 후서 4:16은 신의 능력이 작용하고 영이 거주하는 그리스도인을 말한다. 그러므로 주체인 '나'의 형식적 표지로서의 "속사람" 개념은 자기 자신에 대한 관계로서의 인간 존재에 관한 바울 사상의 파악을 확인해 준다.
2. 혼
다른데서 온전한 존재로서의 인간의 표지를 위해 몸과 결합되어 있는 개념 "혼"은 바울에게서 비교적 드물게 보인다. 또한 영지주의 화법의 영향도 받아 혼을 격하된 의미에서 사용하기도 한다. 그러나 영과의 대립이 없는 곳에서는 바울이 혼을 철저히 구약성서 - 유대교적 전통의 의미에서, 말하자면 인간의 생명과 살아있는 인간의 표지로 사용했다. 그러므로 바울의 혼을 단지 "동물적 생의 기본"으로만 이해하면 옳지 않다. 오히려 혼은 특수하게 인간의 생동성인데 이것은 노력하고 원하며 무엇을 향한 그의 "나"에 속한 것이다. 그리고 혼이 영과 반대로 격하된 곳에서도 그것은 단순히 동물적인 생명을 뜻하지 않고 전 인간의 삶, 물론 초자연적인 것과 반대되는 지상적 인간의 자연적 생을 뜻한다. 혼적인 사람은 단지 생의 욕구들만을 가진 인간이 아니라 지상적인 것에 한정된 생을 지향하는 인간이다.
3.영
구약성서에서 NPS 와 LOH 가 어디서나 같은 뜻으로 사용된 바와 같이 바울도 영과 혼을 비슷한 의미로 사용하였다. 몸과 혼과 같이 영도 이 의미에서 인격을 뜻하고 인칭 대명사를 대신할 수 있다.. 그러므로 바울이 인간의 영을 말할 때 그것으로 그가 생각한 것은 어떤 더 높은 원리 또는 특별히 정신적인, 종교적인 기능이 아니라 단순히 나였다. 그리고 우리가 되물어야 할 것은 오로지 이 나가 영으로 호칭될 때 그것은 특별한 관심으로 보여졌는가일 뿐이다. 분명한 것은 나가 혼으로 불리워졌을 때 이것은 생동하는 '나'를 뜻할 때와 같다. 그러나 영은 혼과 달리 의식된 또는 아는 나로서의 나도 표시하는 것 같다. 고린도전서 2장 11절이 인간의 영은 그의 속을 안다고 한다면 영은 현대적 개념인 자기의식과 비슷하다. 즉 영의 의미가 혼의 의미에서 멀어지고 이성의 그것과 가까와짐은 분명하다. 원하고 아는 인간인 '나'가 신적 작용의 놀라운 힘과 동일한 말로, 즉 영으로 지칭될 수 있다면 영의 형식적 의미는 이 이중적인 가능성을 제공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신의 영은 바울에 의해 특정한 경향, 원하는 것에 의해 수반되는 것으로 소개된다. 그 까닭에 특정한 의지의 방향에서 "신의 영에 의해 인도된다"라고 말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바울은 萬有 정신론적 용어, 그때마다 행동을 규정하는 특수한 영에 관한 몇몇 귀절들로 이해될 수 있다. 이 귀절들에서 영이 특수화로서, 이른바 신의 영의 조각으로 생각되었는지, 또는 우리의 말 " ... 마음으로 "에 인접한 전혀 퇴색된 화법이 여기에 들어 있는 지는 확실히 말할 수 없지만 여기에서 영이 특정한 의지의 방향을 뜻하는 것은 분명하다.
4. 생명
인간 즉 '나'를 보는 어려가지 가능성들이 인간학적 용어들 몸과 영과 혼에서 드러난다. 인간은 산 통일체 즉 자기 스스로 대상이 될 수 있는 '나'이고 자기 자신에 대해 관계를 가지며 그것은 그의 의도성에서, 밖의 것을 향해 있음에서, 원하는 것과 앎에서 생동한다. 어떤 것을 향해 있음과 의도함, 원함, 앎에서의 생동성이 본질적으로 인간에 속하고 그 구조는 목표선택 즉 선이냐, 악이냐, 신을 위해서냐, 반대해서냐의 결단의 선택 가능성을 제공한다. 이 실정은 인간학적 개념으로 이용된 "생명" 개념에서도, 혼과 함께 본질적으로 인간에게 속한 이 생명 개념에서도 증명된다. 이것은 몸 개념에 해당하는 것과 동일한 것에 해당한다. "살아있다"의 용법에서 분명해지는 것은 생명이 인간존재의 의향성으로 이해되었다는 것이다. 인간의 것으로서의 생명의 개념은 생명이 생동성, 인간의 주체성, 그의 생동적인 자신을 원한다는 점에서 역설적이다. 이것은 그가 단적으로 단지 "살아있기"만 하지 않고 언제나 특정한 방법과 양식으로 그의 생을 "영위한다"는데서 표현된다. 인간은 이로서 언제나 마찬가지로 "...을 위해서 산다". 그리고 이 진술들은 생명이 희생 혹은 자기 단념에서, 자기 자신의 고수의 포기에서가 아니라 "스스로" 살 수 있다는 환상에서 어떻게 상실될 수 있는가를 보여준다. 그러나 특별히 그리스도교적 삶을 묘사하는 이 귀절들에서 우리의 문맥을 위해 관찰 대상이 되는 것은 다지 그것들 중에 전제되어 있는 "생명"의 형식적 의미 뿐이다.
19) 思惟, 良心
1. 사유
인간됨이 그때마다의 나임을, 그의 원하는 것과 행하는 것의 주체 임을 뜻한다는 것은 "이성"이라는 용어에서 가장 분명하게 잘 표현된다. 이것은 어던 것둁[ 대한 지식과 인간 자신에게 속해 있으면서 그의 태도를 규정하는 이해와 판단이다. 신의 평화는 모든 이성으로 고양되었는데 그것은 인간의 이성이 이해하는 모든 것을 뜻한다. 신의 불가시적인 본성은 세계의 창조 이래 이성의 눈으로 이해하는 사유로 인지되는 것이다. 이 귀절들에서 이성의 구조에 포함되어 있는 이론적인 것의 게기가 드러나 있다면 그것은 자세, 의도된 또는 의도적이 아닌 원하는 것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그것은 이해있는 노력이고 계획이다. 바울에게 있어서 앎과 이해는 철두철미하게 무엇을 계획하고 행위를 향한 방향을 포함하는 그런 것이다. 이성의 개념은 "속 사람"의 개념을 받아들였다. 그러므로 이성은 자신의 대상이 된 나로서의 몸과 다른 인간의 본래의 나이다. 이 나는 율법에서 서리치는 신의 뜻을 듣고 그것에 동의하며 그것을 자기의 것으로 만드는 이해하는 "나"이다. 신의 요청을 수긍하는 이성에는 그 본래적인 傾向上의 선을 향하나 실제로는 "순수하지 못한 이성"으로서 악을 향할 수 있는 인간의 이성이 들어있다. 이 이성은 그런 것으로서 신의 요청을 듣거나 또는 거부할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바울은 신의 본질을 이해하는 파악에 신의 요청에 대한 지식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자명하게 표현했으며 이방인들에게 이 능력이 있음을 기록하였다. 신의 의식은 그것이 신에 대한 승인이 아닐 때 부인된다. 그러므로 분명한 것은 이성이 그런것으로서 이중 가능서, 즉 자신을 이해하면서 원하는 것으로서 신을 위해 또는 신을 반대하여 결단을 내릴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인간이 원한다는 것은 이해하면서 원하는 것인데 그것은 항상 "평가하면서"원한다는 일이고 그러므로 반드시 선과 악 사이를 결단하면서 순환하는 움직임이다. 그러므로 이성은 인간됨 자체에 속하고 그와 함께 인간됨의 모든 가능성들 중에 서 있다.
2. 생각과 그 유비형
어간 no - 로 된 다른 표현들도 같은 것을 가르친다. 동사 noein , 명사 noema등은 많이 사용된다. 그러나 dianoia 이해력, dianoeisthai 숙고하다는 바울에게 없다. "회개하다"는 고후 12 : 21에 있다. 참회 회개는 그것이 의지의 행위임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3."분별하다", "판단하다", "여기다"
로마서 12:2에 따르면 이성의 내용은 "검토하다","판단하다"이다. 판단이 가치 판단인 한 그것은 "가치있게" 도는 "품위있게 간주한다"를 뜻한다. 이성에 선의 요구를 인식할 수 있는 가능성이 들어 있다면 "검토하다"에는 "무엇이 중요한지"를 인식하는 기능이 들어있다. 이때 분명해지는 것은 이성이 자기 자신을 자신의 판단의 대상으로 만드는 '나'라는 것이다. 또 한가지는 "판단하다"이다. 이것은 경우에 따라서 "검토하다"라는 뜻을 가진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에 대해 심판하는 비난하는 판단을 뜻한다. 자기 검토의 결과인 자기 판단도 여기에 속한다. 그러므로 이것은 거의 "결심"의 의미를 얻었다. 이와 아주 유사한 것은 "여기다"이다. 이것도 어떤 실정에 관한 판단을 표시할 수 있다.
4. 양심
인식하다, 알다를 뜻하는 다른 개념들에는 특별히 인간학적인 의미가 없다. 근본적으로 인간학적인 개념에 속하는 것은 단지 양심뿐이다. 원래 이것은 다른 사람들과 의 공동지를 의미한다. 이 개념도 역시 자기 자신에 대한 인간의 관계를 그 자신의 행동에 관한 인간의 지로 표시한다. 그러므로 양심은 선과 악 그리고 이에 일치하는 하나된 행동에 대한 지식이다. 바울은 로마서 2장 15절에 보여주는 바와 같이 양심을 일반적인 인간적 현상으로 간조했는데 이것은 지금까지 전개된 인간 존재 파악에 아주 잘 일치하는 것이다. 바울은 이방인들에게 양심이 있다는 사실을 자명한 것으로 전제했다. 그들은 양심에 힘입어 율법의 요구를 알 것이다. 양심의 지가 인간에게 해당하는 요구에 소급되는 한 결정적인 것은 양심 일반이 그러한 양심 즉 양심의, 사실을 안다는 그것이다. 이때 드러나는 나는 바로 초월적 능력에 직면한 양심으로 그때마다의 나를 구성한다. 양심의 판단은 그것에서 초월적인 능력에 대한 순종으로 수행된다는 점에서 절대적으로 타당하다. 그리고 그 까닭에 인간은 바로 양심에서 그의 자유를 가진다.
20) 마음
1. 마음
바울은 마음을 널리 이성과 같은 의미에서 즉 원하고 계획하고 노력하는 나로서의 '나'표지로 사용했다. 이성처럼 마음은 인간의 나이다. 마음은 바라는 것과 욕심내는 것, 원하는 것의 주체이며 결심의 주체이며, 비애, 고통과 사랑 같은 것의 주체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마음은 의심 또는 신앙의 주체일 수 있다. 이성과 마음의 차이는 이성에 포함되어 있고 나타날 수 있는 지의 계기가 마음에서 강조되지 않고 감정에 의해 움직여지는 것 같은 노력과 원함의 계기가 주도적이라는 점에 있다. 마음은 외부적인 것의 반대로서 니적인 것이고 인간의 외모와 달리 본래의 나이다. 이 상이한 외적인 것과 내적인 것도 인간 전부를 표시하기 위한 것으로 종합될 수 있다.
2. 원하다와 노력하다와 감정의 움직임에 관한 표상들
마음의 의도들은 의도된 "원함"에서 실현될 수 있다. 이 원함을 표시하는데 무엇보다도 thelein과 thelema가 사용되었다. 특별히 중요한 것은 인간의 '원함'이 악 또는 도치된 것을 향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선을 향할 수 있다는 것이지만 그것이 의식의 영역에 침투될 필요는 전혀 없고 나의 숨은 지향성을 표시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마음이 감정들과 기분의 자극들로 격동되는 '나'라는 점에서 그의 생동성은 '기뻐하다' 또는 '슬퍼하다', '불평하다'로 나타난다. 이 모든 동사들은 인간의 행위 자체를 묘사한다.
2. 肉과 罪, 世界
21) 창조와 인간
1. 죄의 일반성
바울에 의하면 인간은 자기 자신에 대해 관계를 가지며 자신에게 위임된 자신의 존재에 책임을 지는 존재이다. 그의 이 존재는 결코 현재에서 채워진 것으로 존재하지 않고 그것은 언제나 자신을 향해 있는바 언제나 나와서 향해 있는 존재이고 자신을 발견할 수도 놓일 수도 얻을 수도 잃을 수도 있는 존재이다. 이로서 제기된 것은 인간이 선할 수도 악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인간은 언제나 이미 그의 본래의 존재를 상실했고 그의 노력은 처음부터 도치된 것, 악한 것이라고 주장한 점에서 바울의 특색이 부각된다. 사실 이것은 그의 구원론을 위한 주초적인 견해로, 그는 이것을 롬 1: 18 - 3:20에서 분명하게 발전시켰는데, 인간은 모두 죄인이라는 것이다. 이 견해의 이해를 위해 필요한 것은 바울에 의한 악의 의미가 무엇인가에 대한 설명이다. 그리고 그의 사상 줄거리들에서 자명한 것으로서 악이 여하간 죄, 즉 신에 대한 항거, 범죄가 전제되었기 때문에 제일 먼저 신 사상이 검토되어야 할 것이다.
2. 창조자로서의 신
바울은 신 앞에 언제나 세워진 자로 인간을 보았다. 신은 바울에게 있어서 존재론적 사상을 위한 신환적 포지가 아니라 인간의 창조자이고 인간에게 순종을 요구하는 인격적인 신이다. 선할 수도 악할 수도 있는 존재론적 가능성은 존재적으로 창조자를 승인하고 그에게 순종하느냐 아니면 순종을 거부하느냐의 선택 가능성이다. 인간에 대한 선의 요구는 신의 요구인데 이 요구는 그대로 "생명을 위한 계명"이다. 그리고 불신앙은 그 까닭에 죄이다. 신이 창조자라는 것은 바울에게 있어서 인간의 실존에 적중하는 명제이다. 무엇보다도 창조자로서의 신에 관한 인식에는 인간에 관한 즉 그의 피조성과 신에 대한 그의 요청됨에서의 인간에 관한 인식이 들어있다. 그의 존재는 인간에게 의미있는 존재로서 이해되었을 때에만 옳게 이해된 것이다. 다시말하면 인간의 존재가 동시에 신에게 근원을 둔 그리고 그것으로써 그를 향한 존재로 함께 이해되지 않고는 바른 것이 되지 못한다.
3. 창조
세계는 창조된, 그리고 그의 현존과 연존으로 물존하는 세계로서 창조자에 대한 피조물이다. 세계가 이렇게 파악되면 인간은 설사 썩을 인간으로 존재한다해도 이 피조물에서 제외되었다. 피조물은 피조성을 지닌다. 무상하에 노예가 된, 그리고 해방을 사모하는 피조물은 분명 땅 및 인간에게 예속된 피조물을 생각한 것이고 그러므로 창조는 특유한 이중성을 지닌다. 그것은 신이 인간에게 향유하도록 제공한 당이고 반면 악한 마귀의 세력들의 활동무대이다. 바울이 영지주의의 우주론적 신화를 이용한 이유는 인간이 신 대신 그것을 택할 때 무상한 피조물이 적대적인, 파괴적인 세력으로 변한다는데 있다. 즉 피조물은 신에 대한 그 독립성을 인간에게서 얻는다.
4. 인간
인간은 대개의 귀절에서 그의 피조물적인 인간성을 지적한다. 즉 신과의 관계에서의 인간을 말했다. 인간은 피조물이다. 모든 인간적 차별들은 신 앞에서 무산된다. 인간의 위대함과 고귀함들은 신 앞에서 헛된 것이다. 신에 의해 그리스도의 종으로 부름을 받은 자가 인간의 고귀함들에 따라 인간의 종이 된다면 그것은 미친 짓일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에게 인간 안에는 신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다.
22) 肉의 槪念
1. 악과 죄
악이란 선 곧 인간의 본래의 존재인 생명을 상실한 노력이며, 그 선이 동시에 요구된 것인 까닭에 그것은 악한 노력이다. 생명을 창조자의 선물로 받지 않고 스스로의 힘으로 그것을 만들어 내고 신에 의하지 않고 스스로 살려는 광은 본래의 죄로서 계시된다.
2. 인간성과 지상적 - 자연적인 것의 영역으로서의 육
육은 먼저 인간의 물질적인 육체라는 의미에서 육을 뜻한다. 이것은 인간의 생기있는 육신의 감성적 현상들로 나타나는 생동성이고 감성적인 인지로 파악되는 것이다. 이 육체성은 그의 특수한 인간성 즉 그의 약함과 무상함, 그리고 동시에 신과 그의 영에 대한 대립으로서의 지상 - 인간 존재를 뜻한다. 가시적인 것, 외적인 현상 중에 그 본질을 가진 것은 모두 육의 영역에 속한다. 이 의미에서 육의 개념은 세계가 창조된 것의 세계로, 자연 생활을 위한 공간과 생활 조건으로 인간의 지배하에 들어 있으면서 그에게 간으성을 제공하고 그로 살 수 있게 하는 세계로 표시되는 한 세계의 개념과 동일하다. 그러므로 이것은 "인간으로 그의 삶을 영위한다"는 것 외에 다른 뜻이 아니다. 이 삶에는 어떤 윤리적 또는 신학적 판단도 포함되어 있지 않고 단순히 한 사실은 확인한다. 육 안에 에 의해 제시되는 것은 규범이 아니라 공간, 영역이다. 그러므로 육이 먼저 지상 - 자연적인 것과 나약한 것, 무상한 것의 영역을 가리킨다면 육 안에라는 말투를 사용한 것은 "육에서의 삶"이 비본래적인 삶임을 보여준다. "육에 있는 자는 신을 기쁘게 할 수 없다"는 귀절은 육의 영역이 범죄의 영역으로도 간조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3. 육 안에 있는 죄의 근원
육에 의해의 어형은 이중적 의미로 사용된다. 그것은 한 인간 또는 인간의 관계를 자연 생활 내부에서 발견될 수 있는, 누구에게나에 의해서 확증될 수 있는 실정과 관련시켜 성격짓는다. 이것은 "자연적인 것" 즉 지상적인 주어진 것, 물적인 것의 영역이외의 것을 지시하지 않음은 분명하다. 이 말은 동사를 규정할 때에는 존재 또는 행동을 자연적인 인간의 것으로 성격짓지 않고 범죄적인 것으로 성품화한다. 무엇보다 결정적인 것은 이 말이 인간적이고 자연적인 것과 무상하고 약한 것의 영역을 표시하는 경우들에서보다 다른 의미를 가지지 않다는 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다. 육은 여기서 감성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육을 향한, 육에 의해 규제된 행동이 죄된 것인 한 육에는 죄된 것의 근원이 들어 있다.
23) 육과 죄
1. 악덕과 열심으로서의 죄
인간은 육 안에서 그의 자연적인 삶을 산다. 그것은 창조자에게서 돌아서 피조물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하며 자기신뢰를 드러내는 것으로 신에 대한 적대 행위라 할 것이다. 그러나 특별히 육에 따른 행동에 속하는 것은 율법의 정열적인 실천이다. 이스라엘의 율법과 특권들, 존칭들은 모두 가시적 - 물존적인 것, 역사적 - 확인 가능한 것의 영역으로서의 육의 개념에 속한다. 그러나 이것은 육에서 방향을 잡고 육에서 사는 행동이 자신의 힘과 이용될 수 있는 것을 신뢰하는 인간의 아집적인 행동이라는 것을 말한다. 이 태도를 포기하는 것은 자기 의의 포기를 의미한다.
2. 욕심내다, 염려하다, 자랑하다, 신뢰하다의 죄
육과 죄에 대한 이 평가는 바울이 특별히 인간적인 행동을 묘사하는 동사들의 용법에서도 그의 성격적인 표현을 보여준다. 우선 욕심내다가 성격화된 의미에서 이를 위해 사용되었다. 바울은 육을 바로 이것의 주체를 만들었다. 인간의 자주적인 태도는 마찬가지로 그의 "염려하다"에도 들어 있다. 그러나 인간의 죄된 자주적 태도는 인간의 자랑하다에서 가장 잘 표현된다. 여기서 드러나는 인간의 처지를 잘못 보는 것이고 다음 사실의 망각이다. 타당한 자랑이 있다면 그것은 오로지 주안에서 하는 것이다. 그 까닭에 그리스도인도 다른 사람들을 오만하게 내려다 볼 때 경고를 받아야 한다. 이와 닮은 것은 "육을 신뢰하는 것"이다.
3. 세력으로서의 육과 죄
"육에 대해 자랑하고 신뢰하는 일"의 측면에는 자기를 위해 스스로 염려하는 인간의 불안이 있다. 이 불안은 율법의 일들과 지혜를 위해 열심있는 자를 낳는다. 두려움이 세속 인간에게 가득하다는 것은 신앙인들에 의해 노예됨의 시대였다는 회고적 지시가 나타나는 것으로 보여진다. 누구나 인간적 가치 평가의 척도들로 그 생을 이루어 나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자는 다음 경고를 받아야 한다 ; 너희는 값으로 산 것이니 사람들의 노예가 되지 말라(고전 7: 23). 육과 죄가 세력을 써서 인간을 노예로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은 바울이 이들에 관해 마치 인격적 존재, 이른바 악마적 지배자처럼 말할 수 있었다는 데서 특별히 분명하게 표현된다. 이 세력들의 인격화에서 타당성을 가지게 된 것은 인간이 이 세력들에서 그의 주체됨을 상실했다는 사실이다. 즉 자아를 위해 부름을 받은 인간은 스스로 존재하려고 하므로 그 자아, 그의 생명을 상실하고 죽음을 향해 달음질친다. 죄의 지배력은 바로 인간의 모든 행위가 그의 본래의 의도에 역행하게 하는 힘이다.
24) 죄와 죽음
1. 벌로서의 죽음
인간의 노력이 비록 그때마다 구체적인 개별적인 것에 관련될지라도 결국 삶을 목표로 하기 때문에 잘못된, 미로의 노력은 죽음을 향한 길이 된다는 결론이 나온다. 죄가 죽음 을 초래한다는 것은 구약성서 - 유대교적 전통으로서 바울에게 자명한 것이다. 이때 죽음은 자연사의 죽음, 그리고 파멸 선고에 의해 확인되고 확정되었다는 것이다.
2. 벌의 필연적 결과로서의 죽음
그러나 육과 죄에 관한 바울의 사상들은 죽음을 형벌로 파악한 이 전통적 법적 파악을 넘어선다. 죄가 인간의 잘못된 노력이라면, 그리고 이 노력이 "육에 따른"삶의 영위에서 피조물과 지상 - 자연적인 것, 무상한 것에 속한 삶에서 일어난다면 죄는 내적 필연성으로 죽음에 이른다. 무상성에서 삶의 근원을 찾는 자는 무상한 것 자체의 파멸과 함께 반드시 망한다. 죽음은 이렇게 육적인 삶에서 자란다. 계명은 실제상 죽음에 인도하되 인간에게서 욕심을 일깨움으로 그렇게 한다. 결국 죽음은 이미 현재에 있다. 죄 아래 "팔리운" 인간은 상실된 인간이고, 이미 자신 안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3. 모순된 표상들
축음을 죄에 대한 형벌로 파악한 법적 표상과 죽음을 죄가 유기적으로 자라나는 열매로 파악한 표상은 사실 서로 균형을 잃고 있다. 이 불합리성을 바울은 다른 용어를 선택함으로 은폐하고 있다.
25) 죄의 일반성
1. 문제
죄의 세력은 그것에 빠진 인간을 완전히 지배하나는 점에서뿐만 아니라 예외없이 모든 인간을 노예화한다는 점에서 작용한다. 율법은 항상 계명으로 인간을 대한 다. 계명의 의도는 인간을 자주적인 노력, 자기 자신에 대한 지배욕에서 그를 탈취하려는 것이다. 그런데 이를 통해 바로 죄가 일깨워진다고 했다면 이것은 인간 안에 가능성으로 들어온 죄가 활기를 찾는 것, 즉 율법이 제공하는 생명을 인간이 독자적으로 스스로 만들려는 망상에 빠짐으로 실현되는 것을 뜻한다.
2. 죄의 실제적 일반성
죄의 범죄성격이 부정될 수 없을진대 그것은 오로지 경험에서 생겼다고 할 것이다. 그가 롬 1 :18 - 3: 20에서 죄의 보편성에 관한 논증을 공로없이 신앙에 의한 의에 관한 명제에 앞세웠을 때 그는 인간의 실제적 범죄 배후에 있는 원인을 돌아가 묻지 않고 모든 인간이 실제적으로 죄인이라는 사실만을 서술했다.
3. 아담의 죄
그러나 롬 5장 12 - 19에서는 모든 인간의 죄가 아담의 죄에 소급된다. 즉 여 기서는 상속죄가 명시된다. 물론 그는 영지주의 사상에 빠져들어가는 것을 피하고 있다. 그는 아담의 죄 자체를 그 죄 배후에 있는 어떤 것으로 원인을 삼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사상에 남아 있는 것은 죄가 범죄에 의해 세상에 들어왔다는 것이다. 반면 거부되어야 할 것은 롬 5:12이하에서 아담에 따른 인류의 죄가 아담의 죄에 소급된 것이다. 물론 주목해야 할 것은 이 주제가 죄의 근원이 아니라 죽음의 근원이라는 것이다. 즉 죽음의 근원도 단지 생명의 근원이라는 적극적인 주제의 소극적 측면으로서만 그럴 뿐이다. 그 외의 인간의 죄에 대해 언급하는 것은 불필요했다. 바울은 죽음을 죄의 형벌 또는 결과로 간주하기 때문에 아담에 의해 초래된 상속사를 말하는데 한정할 수 없었고 상속죄에 관한 명제로 압축되었다는 것으로 족할 것이다. 그리스도에 의해 예비된 것은 생명의 가능성 이상의 것이 아니다. 이 가능성은 물론 믿는 자들에게서 확실한 현실로 나타난다. 바울은 아담 후예인 인간이 모두 실제적으로 죄와 죽음에서 떨어져 있다는 것을 말한다. 상속죄의 사상에는 인간이 모두 이미 언제나 잘못된 노력에 의해 오도되는 인류로 태어난다는 것과 누구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는 없다는 경험이 그 근저에 들어있다. 인간의 생활이 상호간의 생활이므로 단 한 번의 속음수에 의해 상호간의 신뢰가 파괴되고 불신이 세워진다. 선이 항상 희생을 요구한다는 사실이 인간이 처음부터 죄된 자기이해에서 살고 있음을 입증해 준다.
26) '世界' 槪念
1. 창조와 인간세계로서의 세계
하늘과 땅, 산들및 인간들이 그 외의 모든 존재들과 함께 포함되어 있다는 이 우주라는 표상은 구약성서에는 생소하다. 하늘과 땅이라는 말이 우주라는 말보다는 자주 사용되었다. 여기에서 특유한 것은 신 자신이 여기에 포함되어 있지 않고 창조자로서 대립해 있다는 것이다. 바울도 이 개념을 같은 의미로 이용했다. 우주에 관한 진술들이 대개 인간에 관한 것이기에 우주가 때때로 세상을 가리키는 것은 자명한다. 이 경우 세계는 인간의 생활이 연출되는 공간 땅이다. 그러나 적지 않은 경우 오히려 지상 생활의 조건들과 가능성들의 총체적인 개념으로 상용된다. 이것은 양극적인 쌍개념들 사이에 포괄된 사건들과 운명들의 모든 존재 양식을 포함한다. 그러므로 인간의 삶은 세계와의 관계에서 모든 행위와 변화에서 기쁨과 슬픔에서 셰상을 이용한다. 사람들이 전체로 일컬어 질 때 세상으로 표시되었다.
2. 종말론적 개념으로서의 세계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이 개념이 특정한 신학적 평가가 담겨있다는 것이다. 즉 적지 않은 곳에서 우주가 명시적으로 혹은 암시적으로 신 또는 주의 영역의 대립으로 쓰여진 것이다. 특히 이 세상이라고 사용될 때 그러하다. 이것은 시간개념을 말하고 있다. 즉 종말론적인 개념인 것이다. 이 개념은 인간세계와 인간활동의 영역을 말하되 한편 잠정적인 , 마지막을 향해 달려가는 세계로 개인이 감금되어 있는 반신적인 세력의 영역으로 특징지었다. 세상, 인간 세계는 개인들이 염려하고 행하는 것을 통해 구성되지만 자기 편에서 개인들에 대한 지배자가 된다. 세상은 독자적인 주체로서 모든 개인적인 주체들 위에 군림한다. 이 의미는 그리스도인의 역설적인 위치 묘사에서도 분명히 드러난다. 세계는 모든 자신의 위태로운, 유혹적인 가능성들과 함께 동시에 그리스도인들 아래 예속되어 있다.
3. 신화적 진술들
세력들 하에서 노예된 인간의 상황은 이 세력에 대한 신화론적 진술들의 해석에서 드러날 것이다. 신의 창조물인 세계는 악마의 세력들의 지배 영역이다. 이 반신적 세력들의 우두머리는 사탄이고 이 세대의 신이다. 바울은 이원론적으로 영지주의적 의미에서의 악마의 세계를 알지 못했다. 또 그 세력들의 존재가 우리에게 있는 것으로 여기는 자에게만 중요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스도인의 존재가 마술적으로 변한 것은 아니다. 그 존재는 계속 역사적인 것이다. 그리고 그가 아직 세력들의 적대성 하에서 고난을 당해야 할지라도 그런 진술들로 표현되는 것은 바로 이존재가 계속 위협을 받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영의 세력들과 사탄에 관한 신화적 표상들은 우주론적 사변의 관심으로 설명하므로 인간을 책임과 범죄에서 모면시키려는 욕구에 이용된 것이 아니다. 바울이 죽음이 세상에 들어온 사건을 말할 때는 아담의 죄에 소급시켰다. 그러므로 이 신화적 표상은 인간이 자신의 삶의 주인이 될 수 없다는 것과 인생의 주인을 선택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이미 진정한 주이신 하나님을 벗어나 악한 세상이 주인으로 군림하고 있음을 드러낸 것이다.
27) 율법
1. 율법의 요구
인간의 참 뜻은 그가 이해하는 한 그에게 선한 것으로서의 생명을 향하고 있다. 신의 요구는 구체적으로 구약성서의 율법에서 인간을 맞는데 그것의 의미는 인간을 생명으로 인도한다는데 있다. 구약의 율법은 합리적인 윤리법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주어진 율법의 전체를 말하며 인간에게 요구된 것은 구체적인 경우의 적기적인 순종이다. 바울은 예언자들과 예수처럼 신의 요구에 대한 순종의 본질을 분명하게 하지도, 윤리적 요구를 비판하지도 않는다. 그는 제사 의전의 요구들과 윤리적인 것들이 모두 같은 의미에서 신앙 이전의 인간에게만 해당한다는 것과 무반성하게 작용하는 윈리가 신앙에서 비판을 받았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2. 율법의 구원사적 의미
율법은 실천되도록 신에 의해 주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에 신의 구속력 있는 요구가 포함되어 있지 않다는 결론을 내려서는 안된다. 의에 이르게 하는 것은 공적이 아니라 오로지 신앙 뿐이라는 명제의 이해를 위해 선행되어야 하는 것은 선한 일을 인간에게 요구하는 심판자가 곧 신임을 율법의 요구가 주장하는 바 이것을 승인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에게 계시된 신의 뜻은 율법의 요구와 동일하다. 그러므로 율법하의 인간의 상황을 절망적으로 만드는 것은 신앙 이전에 실제적인 율법의 성취가 없다는 단순한 사실이다. 그리고 이것은 인간이 율법의 일들로 구원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해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그 이유는 율법을 실천함으로 구원을 얻으려는 인간의 노력이 인간을 단지 죄어 끌어들이기 때문에 결국은 그 노력 자체가 이미 죄이기 때문이다. 그 대문에 율법의 일들로 의롭게 되어서는 안된다. 그는 창조자에 대한 자신의 예속성을 이해할 때에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 그렇다면 이때에 가지는 율법의 의미는 무엇인가? 그것은 인간이 율법을 통해 죄가 무엇인가에 대한 인식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범죄하도록 인도된다는 것을 말하려 한다. 즉 실천적인 인식, 범죄를 향한 자기 이해이다. 그러므로 율법은 인간이 죄인임을 밝혀준다. 율법의 의미가 그리스도를 향한 구육자라는 것이라면 그것은 현대적인 윤리적 교육자로 이해할 수 없다. 율법은 인간을 객관적으로 절망된 상황에 끌여들여 인간이 이 상황을 이해하게 한다. 그러나 주관적인 절망에의 가능성을 부인하지도 않는다. 그 방향의 잘못됨을 의미할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을 죄에 끌어들이되 그의 욕심을 자극함으로 범죄케 하는 것만이 율법의 구원사적 의미가 아니다. 그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계명에 대한 자신의 저항을 역행시켜 오히려 율법을 실천함으로 자신의 의를 얻으려고 노력하는 최대의 가능성을 제공한다는 점에서도 구원사의 의미를 가진다. 그러나 이때의 율법은 결국 인간을 죽음에 인도하고 신을 신으로 나타나게 하는데 있다. 그래서 인간은 이 신에게서 생명을 받을 수 있다.
3. 은혜로서의 율법
이때 드러나는 것은 율법으로 구체화된 신의 요구가 은혜하는 것이다. 인간존재의 통일성도 율법하의 상황에서 은혜하의 상황으로 넘어가는 도중에서 분명하다. 여기에는 단절이 없다. 옛 존재에서 새것으로 넘어가는 것이 죄어세 신앙에 이르는 정신적 발전으로 수행되지 않으며 신앙은 오히려 선포된 말에서 일어나는 은혜에 대한 결단이다. 구원사에 관한 바울의 견해는 개인이 아니라 인류에 관련되어 있다. 죽음에서의 인간 구원은 생명, 자아를 향한 , 죄아래서 무기력해진 인간에 대한 목표와 본래의 의도의 성취를 의미한다.
B.信仰下의 人間
1.神의 義
28) 의의 개념
1. 구원 선물로서의 의
신앙 하의 인간은 생명을 얻은 인간이다. 이 생명은 자기 자신을 신에게 맡기고 자기를 얻는데서 자라날 것이다. 의인됨은 이러한 생명을 받는데 전제가 된다. 의는 구원즉 생명을 받는데 필요한 조건이다. 그러나 구원과 의 의 연관성으로 의 자체는 이미 구원 선물의 성격을 지닌다. 복음의 내용이 되는 것은 신의 의로서의 의의 가능성이다. 구원뿐 아니라 이미 그 조건이 신 자신에 의해 선사되기 때문에 그렇다.
2. 법적 - 종말론적 개념으로서의 의
구원조건 ,내용의 표지인 의는 법적 개념이다. 그것이 뜻하는 것은 관계이다. 즉 개인의 의는 그것을 선언하는 다른 사람의 판결에서, 그가 책임을 지는 심판대 앞에서 가지는 의이다. 즉 다른 사람 앞에서 가지는 유효성이며 자신의 권리로 노력해 얻은 권리이다. 그리고 이것은 종말론적인 심판의 기대 속에서 종말론적으로 되어 갔다. 법정적 - 종말론적 개념인 의에 대하여 그것의 형식상의 의미는 완전히 일치한다.
29) 의의 현재화
1. 의의 현재
바울과 유대교의 차이는 바울이 의를 이미 현재에 인간에게 선언했다는 데 있다. 롬 1;17은 설교에 의해 의가 설교의 청중들에게 가능성이 있는 것을 지시하고 있다.
2. 현재적 의의 법정 화법적 의미
바울은 의의 현재성에 관한 그의 주제로 법정적 - 종말론적 의미를 이 의에서 제거하지 않았다. 그는 역설적으로 신이 이미 그의 종말적인 심판을 이미 현재에 선포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이 인간에게 선포한 의는 신이 인간의 죄를 간주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의 죄없음이다.
3. 현재적 의의 종말론적 의미
의의 현재성은 그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작용하는 구원사에 의해 계시되었다는데 그 근거를 두고 있다. 이 구원사건은 종말론적 사건이므로 신는 이를 통해 옛 세계 진행을 마치고 새로운 세대를 시작했다.
4. 현재와 미래의 문제
유대교에 대한 바울의 대립은 유대교의 희망의 대상이 바울에게는 이미 현재적이며 동시적이라는데 있다.
30) 신의 의로서의 의
1. 율법없이 신앙으로
유대교에 대한 바울의 대립은 자유를 명하는 신의 선고에 결부된 조건에 관련된 주제에서 강하게 나타난다. 이것이 유대인에게는 율법의 실천이요, 여기에 대해 바울은 부정적이다. 대신에 바울은 복음을 믿는 것을 제시한다.
2. 신의 은혜로
유대교의 견해에 대한 이 반정립은 신앙이 자랑에 대한 철저한 대립이라는 것이다. 의는 인간의 노력으로, 공로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순수한 선물이다. 그래서 의인의 근거로 신의 은혜가 지칭된다. 그래서 믿음과 같이 은혜도 율법의 일들에 대한 명시적 댓귀로 사용될 수 있다. 은혜의 역설적 성격은 이것이 범법자, 죄인에게 해당한다는데 있다. 즉 경건치 못한 자를 의롭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적 존재의 성격도 단순히 은혜에 의해 성격지어질 수 있다. 의는 그 근원을 신의 은혜 안에, 그리스도 안에서 작용하는 그의 은혜로운 행위에 두고 있다. 신의 은혜는 인간의 오만과 자기 환상이 있는 한 그의 노력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것은 인간에게 자신의 신 앞에 죄인으로 이해하려는가라는 물음으로 그를 만난다.
3. 신의 의
의는 오로지 신의 은혜에만 그 근거를 두고 있기에 신의 의는 선사한 약속한 의이다.
31)화해
화해하다의 개념도 신 자신이 인간에게 열어준 새로운 상황의 표지로 사용될 수 있다. 이 말에는 신과 인간의 관계가 완전히 전도되었다는 것을 내포하고 있다. 화해는 인간의 모든 노력과 지식까지도 선행한다. 그리고 인간은 인간은 이것을 단지 받을 뿐이다. 이 말에서 바울은 인간으로 철두철미하게 신의 은혜에 예속되게 하려는 자신의 의도를 분명하게 표현하였다.
2. 恩惠
32) 사건으로서의 은혜
1. 신의 진노
신은 항상 심판자이다. 그리고 그리스도교의 신의 은혜에 대한 신앙에는 신의 진노가 없다. 바울에 의해 표현되고 있는 신의 진노는 신의 심판을 가리킨다. 유죄판결로서의 진노는 영원한 생명이나 구원의 선물이 상응한다. 그러므로 신의 은혜는 지금 명시되고 있는 것이며 바로 심판자의 은혜의 행위이다. 즉 지금도 신의 진노는 작용하고 있으며 마지막, 즉 진노의 날에 결정적으로 작용할 것이다. 신의 은혜는 범법자를 의롭다고 하는 재판장의 은혜이다.
2. 신의 행위 및 사건으로서의 은혜
신의 은혜는 한 번 행한 행위이고 그것을 그대로 인식하고 승인하는 모든 사람에게 작용하는 행위이다. 이것이 곧 신의 종말론적 행위이다. 은혜는 그리스도의 순종의 사건에서 볼 수 있는 바 이 사건은 아담의 불순종에 대치되었다. 아담의 타락이 온 인류의 죽음을 초래한 바 그리스도의 순종은 생명을 가져왔으며 이것은 바로 은혜로 존속한다. 은혜의 신적 행위는 그대로 은혜의 선물이다. 이 사건이 결정적인 종말론적 사건이고 이 행위와 함께 은혜받을 만한 때, 구원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은혜의 의미는 영의 의미에 접근한다. 그 까닭에 영을 받은 자들이 옮겨진 새로운 상태는 은혜요 신의 행위의 관할 영역으로 표시될 수 있다.
3. 신의 사랑
바울은 은혜와 같은 의미에서 사랑을 말할 수 있었다. 사랑은 은혜보다 더 강한 사랑의 지각을 강조하고 있으나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성령을 통한 신의 사랑의 행위가 우리에게 확실하고 역사한다는 것이다. 사랑은 은혜와 마찬가지로 능력이다.
33) 구원 사건으로서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1. 구원사건으로서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및 受肉
신의 은혜 행위는 신이 그리스도를 죽음에 내주어 십자가에 죽게 했다는데 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의 죽음과 함께 구원 사건을 이룬다. 바울은 이것을 전승으로 받았다. 그러나 수육에는 독자적인 의미가 부가되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죽음과 함께 그리스도의 행위의 통일성을 이룬다.이 죽음에서 증명된 된것은 그의 순종이다. 바울에게는 예수가 교사도 예언자도 아니다. 인간적인 규범에 의해 예수를 평가하는 것은 육에 따라 그를 평가하는 것이다.
2. 문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구원 사건이 선행된 신의 은혜의 행위라는 것과 인간의 상황을 근본적으로 개조하는 그것의 능력을 표현하려고 하는 것은 명백하다. 이것은 순수히 신에 의해 제기된 사건이다. 문제는 이 사건이 어떻게 은혜의 행위로서 인간에게 경험될 수 있는가이다.
3. 개념성들
a) 속죄제물 : 이 개념은 유대교적 제사 사상과 법언어적 사유의 개념성을 사용하여 표현한 것이다.
b) 대속 제물 : 속죄제물과 유사한 것으로 제사 - 법정 용어 사유의 영역에서 생긴 것이다.
c) 속량 : 율법의 저주에서 죄에 대한 벌에서 속량하는 수단으로서의 그리스도의 죽음을 말한다. 속량에 의해 얻어진 자유는 율법 자체에 대한 자유이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죄책 즉 범죄함으로 정해진 형벌을 도말하는 제물이며 율법과 죄, 죽음에서 자유하게 하는 수단이기도 하다.
d) 밀의 종교적인 죽음 : 예수의 죽음으로 야기되는 그 작용에 대한 대답을 제공하려는 의도에서 묘사된 것이다. 이것은 세례와 주의 만찬을 통한 신성에의 합일로 나타나 있다.
e) 영지주의적 신화 : 이 사상에서 본질적인 것은 사람들이 실제적으로 구세주와의 통일 즉 한 몸을 이룬다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참여한 신자들은 반신적 세력에서의 해방을 경험한다. 이 사상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우주적인 사건으로 묘사한다.
4. 두 신앙 개념
바울이 예수의 죽음의 의미를 유대교적 제사 및 법 사유의 범주들로 논술하는데 한정시키지 않고 밀의종교적인 그리고 영지주의적인 신화의 규범을 따라 기술하였다면 그것은 구원사건이 실제로 인간에서 수행되는 사건으로 해석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신앙의 행위와 동시에 신앙 개념을 둘로 구분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선재적인 신의 아들을 통한 신의 은혜에 대한 증거를 받아들이고, 신의 은혜에 대한 신뢰로 지금까지의 인간의 자랑을 철저히 포기하는 신앙을 말한다.
5. 그리스도 승인과 새로운 자기 이해에서의 신앙의 통일성
어쨋든 바울은 신을 사랑하고 그를 위해 자신을 내어준 신의 아들로서의 그리스도에 대해 그 자신의 의를 포기하고 그의 자아를 죽음에 던지자로서만 말할 수 있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또한 구원 사건이 어디서도 선포하고 말을 걸고 요구하고 약속하는 말에서 현재한다는 것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님도 확실하다. 즉 구원 사건은 말로서 수행되고 항상 현실에서 수행뙤므로 종말론적인 사건이다. 이는 믿는자들이 그리스도와 한 몸으로 결합된 것이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선포의 말에서 결단을 내려아 할 실존의 가능성으로 되고 신앙이 그것들을 이해하고 믿는 자의 실존을 규정하는 세력들로서 그것들을 자신의 것으로 만든다는 점에 근거를 두고 있다.
6. 그리스도의 십자가, 先在 및 受肉, 復活
a) 구원 사건으로서의 십자가 :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구원사건으로 인식되는 것은 십자가의 말이 듣는 자 앞에 세우는 결단의 물음에서 유래한다. 이 사건은 언제나 현재에서, 선포되는 말에서, 성례전에서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된 자들 속에서 수행된다.
b) 선재와 수육 : 그리스도의 선재와 수육은 그것이 신의 종말론적 행위라는 사실을 표현하는데 사용되었다. 그리스도의 수육은 그 자신의 순종과 사랑의 행위로 앞서오는 신의 은혜와 사랑에 관한 신의 인정을 받은 선포가 있다는 사실이 그리스도의 선제에 관한 말에서 신화적 표현을 가지게 된 것이다. 선재성이 믿어지면서 동시에 듣는 자에게 적중되는 신의 말의 있음이 수긍된다. 선재자를 창조의 중개자로서 말할 때 신앙은 창조와 구속이 하나를 이룬다는 것, 케리그마의 말에서 만나는 신의 사랑이 그 근원을 영원 전에 두고 있다는 것을 명백하게 말한다.
c) 부활 : 이는 객관적으로 증명, 설명할 수 없으므로 부활한 자를 주로 승인하는 신앙 이전에 통찰될 수 없다. 예수의 부활은 그가 아버지에게 반환할 때 까지 소유하는 왕좌에 그가 올라간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사도들에게서 그리스도는 부활한 자로 현재한다. 그리스도는 사도들을 통해 자신을 보인다.
34) 말, 교회, 성례
1. 말에 현재하는 구원사건
구원은 옛 세계를 마감하는 종말론적인 사건이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보냄과 함께 시작하였다. 이미 구원과 함께 심판도 시작되었다. 이때 선포된 말은 각 개인에게 해당하고 그의 자기 이해에서 그를 문제삼으며 그의 결단을 촉구한다. 그러므로 선포자 사도도 종말론적 사건에 속한다.
2. 교회에서의 현재
설교의 말은 거룩한 자들의 공동체, 교회를 만든다. 그것은 종말론적 공동체이며 사건이다. 이 사건은 특유한 이중적인 성격을 반영한다. 교회는 가시적이면서 물가시적이며, 신앙의 눈에는 미래 세계에 속하는 것으로서 동시에 가시적이기 때문이다. 공동체는 세계에서 나뉘어진 것으로 그곳에선 세상의 차별이 그 의미를 상실한다. 이 공동체에는 상호간의 책임과 봉사가 있다. 바울은 이것을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표현한다. 그러므로 그 몸은 지체들에 의해서 이루어지나 그리스도에 의해 구성된다.
3. 성례에서의 현재
개인은 세례 성례에 의해 그리스도의 몸에 받아들여진다. 그리스도교 공동체에 속한다함은 그리스도 안에 있음을 뜻한다. 세례에 의해 조직된 공동체가 종말론적 공동체이기 때문에 그 말투는 교회론적이며 동시에 종말론적인 의미를 가진다. 또 밀의 종교들의 성례의 의미에서 세례를 받아들이고 정화의 성례로서 그것을 해석, 새로운 윤리적 삶의 기초를 보는 방식으로 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결코 마법적 작용력을 귀속시키지는 않았다. 바울은 주의 만찬식과 성례로서의 그 이해를 렐레니즘계의 그리스도교에서 받아들였다. 그가 주의 만찬식에 의한 그리스도 죽음의 현재화를 "복음선포"라고 부르는 바 주의 만찬의 성례도 말 선포에 예속되어 있다는 것을 드러낸다. 그러므로 성례의 役事는 선포하다는 행위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 여기서 바로 세워지고 승인되는 것은 "주"의 지배권이다.
3. 신앙
35) 신앙의 구조
신앙은 인간이 신의 의를 선물로 받고 신의 구원의 행위를 자신에게 신현시키는 인간의 태도이다. 그러므로 신앙은 의를 받는데 필요한 조건이며 그리스도교 소식을 받아들이는 것이라는 의미이다.
1. 순종으로서의 신앙
바울은 무엇보다도 우선 순종으로서의 신앙행위를 말한다. 그러므로 신앙의 행위는 자랑함의 태도에 극단으로 대립되며 옛 나 대신 새로운 나가 형성도는 순종의 자연스러운 행위이다. 그러한 결단으로서 신앙은 본래의 의미의 행위이다.
2. 고백으로서의 신앙
신앙은 ....에 대한 신앙을 말한다. 즉 언제나 그 대상, 그리스도 안에서의 신의 구원행위와 관련되어 있다. 그러므로 고백하는 일과 믿는 일은 서로 교차된다. 순종에서 발생한 믿음에는 반드시 앎이 포함된다. 그리고 이는 새로운 자기 자신의 이해라는 점에서 동일하다. 케리그마를 받아들이는 것 귿 신앙은 순종이고 승인이고 고백이다. 신앙은 그 자체의 행위 또는 태도의 됨됨이에 근거를 두지 않고 선행된 그것에 추가된 신의 은혜의 행위에 의거한다.
3. 희망으로서의 신앙
믿는자가 자기 자신에게서 시선을 돌린다는 것은 바로 믿음이 곧 희망이라는 것을 표현한다. 믿음은 인간의 독립된 정신 상태가 아니라 그것은 오히려 미래를 향해 있다. 믿음의 목표는 의로 그것은 신에 대한 그이 관계이다. 그것은 현재성은 항상 종말론적이며 미래적이다. 희망은 믿는자가 자기 자신과 동시에 자신의 미래를 위한 근심을 신에게 맡겼기 때문에 미래를 향한 자유함과 열림이다. 그리고 자기 자신을 위해 염려하는 인간은 실제로는 불안에서,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 미래에 대해 폐쇄적으로 산다. 이 불안은 믿는 자에게서 탈취되었다. 그는 신앙에서 자기 자신을 위한 염려를 버렸다.
4. 두려움으로서의 신앙
이 희망은 두령움이 교류된다. 이것은 신의 은혜를 향한 믿는 자의 시선의 방향을 확고하게 한다는 점에서 믿음에 불가결한 구성적 요소이다. 신의 은혜에 눈을 돌리 때 불안에서 해방시키는 은혜가 심판자의 그것임을 잊어서는 안된다. 자기 자신을 보면 그는 언제나 자신의 허무함과 신의 은혜에 의존되어 있음에 관한 지식으로서 두려움을 가질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이 두려움은 소극적인 의미뿐 아니라 인간에게 그의 책임을 의식케 하는 적극적인 의미도 가지고 있다. 전적으로 신에게 자신을 맡기고 자신의 모든 근심과 힘, 이용할 수 있는 모든 안전성을 포기하는 순종으로서의 그것의 성격이 이에 의해 분명하게 된다. 그러므로 신앙적 존재는 '이미'와 '아직'사이의 음직임이다.
5. 신뢰로서의 신앙
신앙이 은혜에 근거를 둔 한 그것은 신뢰이기도 하다. 철저한 의미에서의 신에 대한 신뢰는 사실 자신의 근심과 힘을 신에게 완전히 맡기는 것 즉 신앙의 순종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36) 신앙에서의 삶
1. 신앙의 개인주의화
인간의 신에 대한 관계로서 믿음은 인간의 자기 자신에 대한 관계를 규정한다. 믿음은 삶을 그의 역사적 움직임에서 규정한다. 즉 믿는 자의 개인적인 행동들에서 구체적인 생활로 실현된다. 그리스도인은 계속 믿는 자로서만 자신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믿음의 개인주의화는 신이 각자에게 나누어준 믿음의 정도에 따라 일어난다.
2. 믿음의 전개
아주 출중한 은사는 인식, 즉 영지이다. 공동체의 모임에서는 지혜의 말과 영지의 말이 큰 역할을 담당한다. 그리고 바울은 공동체가 말과 지식으로 부해짐을 자랑할 수 있음을 기뻐했다. 영지와 지혜는 믿음에 포함되어 있는 지식을 점점 더 분명하고 더 포괄적인 것으로 발전시킨다. 이 인식은 특별한 영의 은사이다. 신의 선물로 지식을 이해한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선사한다는 것을 인식한다는 것이며 그러므로 분명한 자기 이해이다. 이것은 완전해 질때까지 부분적인 지식으로 남는다는 것은 타당하다.
3. 그리스도 안에 있음
그리스도 안에 라는 말투는 신의 구원행위에 의해 살고 있는 맏는 자의 개인적 역사적 삶의 명확성을 위한 표식의 의미를 얻게 된다. 그러므로 이말은 신앙인 안의 그리스도의 존재라고 말해도 차이는 없다.
37) 종말론적 사건으로서의 신앙
믿음은 선포된 말의 대답으로서 믿음의 순종으로서 종말론적 사건에 속한다. 이것은 가능성으로 새로이 열린 구원의 길이다. 믿는자는 결단의 가능성을 은혜로 경험하기 때문에 오로지 은혜 자체의 선물로서만 자신의 결단을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인간에게 책임이 주어졌음을 스스로 알게 한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이 선사된다고 말할 수 있었다. 아니 그는 정말 예정론적으로 말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예정론적인 표현들은 신앙의 작용이 케리그마에 해후할 때 모든 동기적 힘을 상실한다는 사실, 그리고 동시에 신앙은 자기 자신 위에 근거를 둘 수 없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바울은 믿음이 작용하는 사랑을 영의 열매라고 불렀다. 이에 비추어 본다면 사랑 안에서 작용하는 신앙에서의 그리스도교적 존재가 종말론적 사건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4. 자유
38) 죄에서의 자유와 영에서의 생활
1. 서술과 명령
신의 은혜에 대한 신앙의 순종적 복종은 스스로 살고 스스로의 힘으로 생명을 얻으려는 인간의 옛 자기 이해를 포기하는 것이다. 믿음과 함께 선사되는 새로운 자기 이해는 믿는 자가 생명과 동시에 자기 자신을 얻는 자유의 새로운 이해이다. 자유는 그래서 자신을 철두철미하게 은혜에 맡기고 자신을 신 내지 추의 소유로 알면서 그를 위해 산다는 사실에서 자란다.(고전 3: 21 - 23)
죽음에서 해방된 자의 삶은 누구을 위해 살 것인가의 기본 가능성 앞에 직면하여 사는 삶이다. 이 양자택일은 믿은 자 앞에 다가서 있다. 그리고 그가 해방되어 가지는 자유는 새로운 종됨, 그리스도에게 즉 의에 종됨을 내포하고 있으며 이것은 다분히 역설적이다. 죄에서의 자유는 계명의 의도를 생명을 위한 계명의 의도로서 실현하는 가능성 중에 존속한다. 그 까닭에 죽음서의 자유는 진정한 미래를 가지는 것이다. 죄의 세력에서의 자유는 신의 의에서 이미 실현되었다. 그의 피안성은 신의 심판의 피안성이고 그에 대한 관계는 믿음의 순종의 관계이다.
2. 미래적인 것의 능력으로서의 영
믿는 자가 영의 선물을 받았다는 것은 그에게 자유가 죄와 죽음의 세력에서의 자유가 선사되었다는 것을 말한다. 육의 세력이 사람을 무상한 것에 결박한다면 영의 능력은 믿는 자에게 자유를 준다. 자유란 사실 참 미래를 향해 솔직히 서는 것, 미래에 의해 자기가 규정되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영은 미래성의 능력으로 표시될 수 있다. 이 미래는 그에게 있어서 규범같은 근원이고 힘이다. 이것은 영광이 결국 계시된 미래에서 흘러나오는, 현재를 규정하는 힘인 것과 같다. 그래서 바울은 신의 구원행위를 근거로 영에 의해 미래가 열려진 것은 희망의 확실성이 신의 사랑이 우리에게 주어진 거룩한 영에 의해 우리에게 부어진다는 표현으로 드러난다고 말한다.
3. 힘과 규범으로서의 영
영의 개념에는 특유한 이중성이 결부되어 있다. 우선 영은 행동의 자유를 제공하는 사는 일의 규범으로 작용한다. 이 가능성은 옛 자기 이해를 버리고 자시늘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부활하는 일에 내어주려는 자에게 나타난다. 분명한 것은 영에 의해 인도되는 것은 육이냐 영이냐의 결단이 전제되어 있다는 것이다. 영을 놀라운 힘으로 보는 견해에서의 통속적 표상들을 바울은 반성없이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 현상들의 유일성을 부인했으며 공동체 내부의 사랑의 역사들을 영의 역사로 여겼다는 점에서 통속적 이해와 차이가 있다. 영의 열매가 德目이라는 범은 영의 개념이 자유로운 윤리적 순종이 단지 이적에 그 근원을 둘 수 있었다는 것을 말한다.
4. 기쁨
기쁨은 영에 의해 세워진 종말론적 실존의 지표들 중에 속한다. 믿는 자의 존재는 종말론적 존재로서 기쁨 중의 존재이다. 어떤 내세계적 대상도 가지지 않는 이 기쁨은 그 스스로 주관적 의식에서 실현되는 것인 한 미래에 관련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그렇게 실현되어야 할 것이다. 또 이 종말론적 기쁨은 그것으로 결합된 자들의 상호관계와 서로 위하는 관계로도 실현된다.
39) 율법에서의 자유와 인간들에 대한 노력
1. 율법에서의 자유
구원사건을 통해 죄는 육과 더불어 심판을 받았다. 율법이 구원의 길이기를 요구하는 한 그리스도가 율법의 마지막이라는 것이다. 바울이 율법의 성취라고 부른 곳에서도 같은 사상을 드러낸다.
2. 그리스도교의 권위
율법에서의 자유는 변증법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 즉 요구에서 자유하지만 그것에 구속되어 있다. 순수한 의미의 니세계적 요구들이 그의 기동력을 상실하고 모든 내세계적 사물들과 상황들이 차별없이 되는 자유를 전제로서 가진다. 그리고 이 자유는 주와 그에 구속되는데서 생긴다. 모든 세상적인 것들의 차별은 책임이라는 구체적인 상황에서 사라져 버린다. 그러나 이 상황은 정결의 요구와 같이 인간의 상호관게로부터 자라는 의무들에 의해 그 성격을 얻게 된다. 여기서 비롯된 자유는 형제들을 위한 고려가 요구되고 사적인 권리로서의 귄리의 포기가 요구될 때 분명해진다. 오로지 형제를 위한 자유의 활동으로서만 그 포기는 타당성을 갖며 그러한 것으로서만 포기는 요구된다. 그리스도교의 자유는 모든 인간의 고나습들과 가치 척도들에서의 자유이다.
3. 사랑
믿는 자들이 소유하고 있는 자유는 주의 노예로서 가지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율법은 사랑의 요구이다. 사랑은 공동체를 세우고 권위의 포기를 요구한다. 사랑은 율법의 실천이다. 그러나 이 실천은 공적이라는 의미에서 일이 아니라 자유의 행위이다. 종말론적 실존에 옮겨진 신앙은 사랑에서 작용한다. 그러나 이것은 영의 은사로서 다른 것들과 동렬에 속할 수 없다(고전 13장). 사랑의 특수한 顯現 양식은 겸손이다.
40) 죽음에서의 자유
1. 미래의 생명
율법과 죄에서의 자유는 죄의 삯과 열매인 죽음에서의 자유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믿는 자는 그의 부할에도 참여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은 이것을 밀의종교와 영지주의에서 생긴 언어로 표현했다. 그러나 그리스도에 의해 중개된 생명을 인간에게 주입된 자연의 힘, 영혼이 소유하는 불사성의 힘으로 이해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들과 구별된다. 그는 죽은 자들의 부활에 대한 전통적 유대교및 초대 그리스도교적 가르침과 동시에 마지막 심판 및 옛 세계에 종막을 내리고 구원의 새 세계, 온전한 것을 이루어 놓는 다는 우주적인 대사건에 관한 묵시문학의 사상을 고수했다. 그는 주의 날을 기다렸다. 이 날은 곧 부활 이후 존속하는 그의 지배의 종막이고 신이 만유중의 만유가 되는 구원시대의 시작이다. 사는 것과 육에서의 삶의 현재는 영광의 현재가 아니라 환란과 범속들의 현재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에는 모든 믿는 자들의 부활이 근원적으로 들어 있다. 바울은 "사는 것은 이미 내가 아니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산다"(갈 2:20)는 말로 이 사상을 표현했다.
2. 현재의 생명
생명과 영광은 소망을 가진 자에게는 현재이다. 여기서 영은 삶의 원천이고 힘이다. 그러므로 믿는 자의 생명은 속사람이 날마다 새롭게 됨으로 뿐만 아니라 영광에서 영광으로 변화한다고 묘사할 수 있다. 이 이해는 그의 새로운 자기이해에서 나오는 것으로 고난의 의미를 그에게 향한 문제와 그의 생의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하는데 두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자신의 약함과 허무함을 의식케 하는 고난은 신앙의 순종에서 자신의 힘을 근본적으로 단념한 믿는 자에게 강압, 아니 도움을 주어, 이 포기와 은혜에 대한 철저한 신뢰를 구체적인 생활에서 실현시킨다. 그래서 믿는 자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고 그의 죽음을 함께 경험한다. 고난의 동참은 고난들을 극복하고 자랑의 대상으로 만든 이해에서 일어난다.
3. 세계에서의 자유
세계와 그 세력들에서의 자유는 죽음에서의 자유와 함께 주어졌다. 믿는 자는 자기 자신을 신뢰하고 세계를 이용하며 세계에 빠진 인간의 불안에서 해방된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와 그를 통해 신의 것이 된 자는 모든 것의 주인이 된다. 자유와 의와 생명은 그 근거를 신 안에 두고 있다. 그리고 신의 영광은 마지막 의미와 마지막 목표로서 그것들 중에서 타당성을 얻는다.
그리스도는 신의 영광을 위해 그의 일을 완성했다. 그리고 그는 그의 영광을 신에게 돌려주어 신이 만유중에 만유이게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