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법과 복음

율법과 복음의 관계에 대한 논쟁은 종교개혁 자들의 중요한 논쟁 거리였을 뿐만 아니라 최근의 신학계 내에서조차 여전히 논쟁의 핵심을 차지하고 있다. 주지하다시피 율법과 복음에 대한 가장 전통적인 해석들 중의 하나는 루터의 견해이다. 루터 신학을 따르는 최근의 신약 학자들은1)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마침(ՔՅՋՏՒ)이 되셨기 때문에(롬 10:4) 율법이 그리스도 안에서 폐지되었다고 단정한다. 그리스도께서 율법에 종지부를 찍었기 때문에 사람이 하나님께 접근하는데 있어서 율법이 차지하는 자리는 이제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성령과 자유의 시대는 율법의 시대를 대체시켰기 때문에(롬6:14, 고후 3:6, 갈 5:1) 그리스도인은 삶의 법칙으로서 율법 아래 있지 않다. 이에 반해서 개혁파적 전통에 서 있는 신약 학자들은 이러한 루터 신학적 입장이 자유방임주의에 위험하게 접근하는 것으로 생각하기도 한다. 이들은 모세 율법이 하나님의 법으로서 선하고 거룩하고 신령하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롬 10:4을 율법의 목표를 완성(ՔՅՋՏՒ)이라는 뜻으로 해석한다. 그리스도 자신이 법을 성취하셨으며 성령을 주신 것은 율법을 굳게 세우기 위한 것이다.(롬 3:31, 8:2,4) 율법을 굳게 세운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거룩한 뜻을 율법 속에서 은혜스럽게 계시하여 주셨다는 것을 뜻하며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그것을 기쁘게 받아들여 자신의 삶의 지침서를 삼아야 한다. 성경의 말씀은 본질적으로 하나이기 때문에 복음과 율법은 하나이며 결과적으로 율법은 그리스도 안에서 폐지되지 않았다.

율법과 복음에 대한 루터파와 개혁파간의 이러한 논쟁은 여기서 다 다룰수는 없다. 그러나 갈라디아서에서 노출된 바울의 부정적인 율법관이 로마서에서 수정되거나 적어도 로마서에 나타난 바울의 율법관과 모순되는지를 강력하게 살피고 이것이 복음과 어떠한 관계를 이루며 조화되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그리고 루터파에서는 이신득의를 바울 이해의 열쇠로 보고, 또 개혁 교회도 루터처럼 칭의를 강조하나, 이에 더 나아가 성화를 강조하므로 칭의에만 과도히 집착하지는 않았지만 이신득의가 그 출발점이요 기초가 되었다. 이러한 종교개혁의 가르침 때문에 개신교회가 바울의 중심과제의 하나인 복음과 율법과의 관계는 하나의 구원서정(ordo salutis)의 도식에 넣어서 이해를 하였다. 그러나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서 개진한 바울의 가르침은 구원 서정이 아니라 구원사(historia salutis)이다.

왜냐하면 바울의 모든 관심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이루어지기까지 어떻게 하나님의 구원의 섭리를 이루어 오셨는가의 관점에서 복음과 율법의 관계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바울의 이신득의의 진리는 종교개혁자들이 주장한 것과 동일하지만, 바울은 이 칭의의 교리를 구원사적인 관점에서 개진하였고 반면에 개혁자들은 이 점을 착안하지 못하고, 칭의의 교리를 바울 이해의 유일한 통로로 접근하였기 때문에 구원사를 보지 못하고 복음과 율법과의 관계를 구원서정으로 이해하였다.

특별히 율법과 복음의 관계에 대한 바른 입장을 정리하는 것은 우리의 신앙 생활과 목회에 큰 힘이 될 뿐 아니라 신학적 논쟁의 불씨를 잠재울 수 있는 중요성을 가지며, 올바른 바울 신학의 이해로 말미암아 칭의로부터 시작된 성화의 삶을 바로 살아갈 수 있는 의미를 지닌다고 본다.

바울은 로마서 1: - 2:16 까지에서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정하신 구원이 필수적임은 그들이 범죄하였고 또 죄아래 있어서 하나님의 정하신 사형에 이르게 되었으므로 하나님의 구원의 길이 없이는 멸망에 이를 뿐이다. 그리고 로마서 2:17 - 3:18 까지에서 유대인들도 율법을 받았으나 지키지 못하였으므로 이방인들과 동일한 형편이라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바울은 율법이 구원의 길이 아니라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의의 길을 믿음으로 받는 것 뿐이라고 가르친다. 이렇듯 로마서에서는 하나님이 정하신 의의 길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구원이라는 진리를 전개한다.

1. 율법과 의의 길

바울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모세를 통하여 율법을 주신 것은 백성들이 지킬 수 있고, 또 의롭다는 선언을 받을 수 있어서가 아니라 율법을 더하시므로 범죄가 더하게 하여 '온전한 구속주 곧 율법을 온전히 지켜 주실 율법의 완성자이신 메시야 즉 예수 그리스도'를 고대하게 한 것 외에는 다른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구원은 믿음의 길이고, 율법의 길이 아니라 "구원의 길로써 율법은 그리스도가 오시기까지 뿐이요 그 이후 율법은 전적으로 무력해졌다는 것"이 바울의 주장이며 구원의 길은 율법이 아니고 하나님이 내신 의의 길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뿐이라는 것이 바울의 중심 교리이다. 율법은 죄만 깨닫게 한다(롬 3:20). 율법은 세상으로 심판 아래 있게 한다(롬 3:19). 모든 족속은 죄의 권세 곧 율법의 정죄 아래 있게 하셨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고(롬 3:23) 또 이 범죄로 율법을 지킬 수 없기 때문이다(롬 3:20).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한 의의 길을 내셨는데 그냥 예고 없이 내신 것이 아니라 율법과 선지자들에 의해 증거 받아 예비되었다(롬 3:21). 그 길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오는 하나님이 값없이 주는 의의 길이다(롬 3:22-24).

2. 아브라함과의 언약과 믿음의 길

아브라함은 할례를 받아 율법을 지킬 의무를 지닌 유대인의 조상일 뿐 아니라 율법과 할례와 상관이 없는 이방인의 조상도 되었다(롬 4:9-12;갈 3:6-10). 왜냐하면 그가 하나님이 내실 의의 길을 믿었기 때문이다. 즉 율법이 있기 전이요 지키기 전에 믿음으로 시작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이삭을 주시기로 약속하였을 때, 세상의 구원의 섭리를 보았고 이삭의 출생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즐거워 하며 믿고 기뻐하였다(요 8:56). 세상의 구원자를 아브라함의 씨로 주시겠다고 하는 하나님의 약속을 그가 믿었는데 그가 약속을 믿음은 바로 구원자를 믿은 것이었다. 바로 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하나님이 의로 여기셨고, 그 의를 인치시기 위해 할례를 받게 하셨다. 인간적인 조건이 아니라 말씀하신 이를 믿는 믿음을 하나님은 의로 여기셨을 뿐 아니라 그 모본을 따라 하나님이 내신 구원의 길을 믿는 모든 믿는 자들로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 다는 것을 미리 보이셨다(롬 4:16-24).

3. 시내산 언약과 그리스도의 십자가

시내산에서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과 언약을 믿음으로 그들에게 율법을 허락하였다. 이 율법의 수여 목적은 그들을 자기 백성으로 삼아 그들을 언약 백성으로 살도록 하는 삶의 길로 주셨다. 그들이 하나님의 법을 지키면 하나님의 백성으로 남을 수 있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길은 율법을 지킴으로써 가능하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율법을 지켜 하나님의 백성으로 존속하는 길은 불가능하였다. 율법을 받았으나 지킬 능력이 없는 백성이 율법의 요구에 매이므로 율법의 종이 되는 길 외에는 다른 길이 없었다. 율법의 종이 되므로 율법으로 인해 죄가 더욱 증가되고 죄의 증가로 멸망만이 그 귀결이었다.

이 하나님의 섭리는 율법 준수로 백성들이 구원에 이르게 됨이 가능하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율법을 주심으로 백성들을 죄 아래 가두어 그리스도를 믿음에서 오는 의의 길을 제시하기 위함이었다.

이 율법 준수의 길에는 자기의 무능과 무력 그리고 율법의 준엄한 선언 때문에 절망감 밖에 아무것도 없다. 이러한 좌절과 낭패의 상황에서 언약 백성들이 바랄 수 있는 것은 자기들의 괴로운 짐을 담당하여 율법을 대신 지켜 주어 율법의 준수 요구를 다 이루어 줄 율법의 완성자를 고대하는 다른 길 밖에 없다.

바로 이 귀결에 이르게 함으로써 율법은 그 기능과 사명을 다한 것이다. 그러므로 시내산 언약은 행위언약 복귀를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니고 의의 길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인도하기 위한 목적이다. 바울은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로마 세계의 사회제도인 몽학선생의 사례를 들어 설명한다. 바울은 이 노예 가정교사(몽학선생)와 주인 아들과의 관계를 율법과 믿음의 관계에 비교하였다. 율법 역시 그리스도가 오시기까지만 백성들을 가르치고 지도하고 통제하였지만, 그리스도가 오셔서 구속을 이루신 후에는 믿음으로 살게 되어 율법은 그 임무와 기능을 끝마친다. 즉, 하나님의 아들의 구속으로 하나님의 자녀의 지위에 올라 완전히 자유함에 이르렀고 상속자가 되었으므로 더 이상 율법은 자유나 상속권을 간섭하고 지배할 임무와 사명이 없어진 것이다.

따라서 율법의 요구를 백성들이 준수할 수 없으므로 하나님의 내신 의의 길은, 육신이 연약하여 지킬 수 없는 율법을 아들로 다 지키게 하심으로 이루어졌다(롬 8:1-3, 갈 4:4,5).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모든 율법의 요구를 다 이루신 것이다(요 19:30). 그러므로 자기를 믿는 자에게 의를 주시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셨다(롬 10:4).

4. 아론의 제사와 그리스도의 제사

구약의 레위 제사직에 의해 드린 피제사는 죄를 제거하고 양심을 깨끗이 해서 완전한 구속을 이룬 것이 아니라(히 9:9,10 : 10:1-4,11) 그것들을 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상의 완전한 희생을 지시하는 예표요 그림자요 복사다(히 8:5, 9:24).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완전한 제사장 그리스도를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라 세우시고(히 7:11-28) 완전한 희생 곧 성령으로 성화된 그리스도의 피를 제물로 삼아 온전한 제사를 드리게 하시며(히 9:14,15) 그 제사를 받으사 세상 구원을 완성하시므로 구약 제사는 완결하시고 폐하였다(히 7:12, 8:13, 9:10, 10:9).

옛 언약 아래서 주어진 율법과 제사는 완전한 율법 준수와 완전한 제사로 구약의 율법과 제사를 성취하고 대치하였을 뿐 아니라 폐지되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십자가 후에도 십자가를 위한 구원 섭리를 계속하시므로 옛 언약의 제사 질서를 막으셨다.

5. 율법의 생활 규범성

통상 율법을 의식법 (儀式法),윤리법(倫理法), 시민법(市民法)으로 나눈다. 이 법은 그리스도의 속죄로 성취되었다. 그러나 윤리법의 기능과 정신이 그리스도의 속죄 이후에도 하나님의 뜻으로 표현되고 있어 그리스도인들의 생활에서 그대로 실현되기를 요구한다. 의식법도 그리스도 안에서 폐지되었으나 그 본질과 정신은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실현되어야 할 요구로 나타난다.

즉 구약의 법에 매여 강제적으로 지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랑의 강권함 때문에 더욱 강하게 실현되어져야 한다.

따라서 구원의 길로서 율법의 지배 아래 있지는 않지만 율법의 언약의 백성들의 생활 규범으로 역사 한다. 율법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과 맺은 언약의 거룩을 지키기 위한 울타리였다. 바로 하나님과 맺은 언약의 거룩을 지키기 위하여 그 울타리로 율법이 주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새 언약 백성에게도 율법은 하나님께서 주신 생활의 법칙이요 규범이다. 새 언약 백성들이 율법을 규범으로 하여 살 때만이 그리스도의 피로 세워진 언약의 거룩이 유지되고 보존될 수 있기 때문이다.

야고보는 이 율법이 무용지물이라고 결론 내리지 않고 언약 백성들의 생활 법칙이기 때문에 죄를 피하게 가르쳐 주고 거룩한 생활을 위해 필요한 생활 규칙이라고 정의하였다(행 15:20).

바울 역시 율법이 구원의 길이 아니라 언약 백성들의 생활 법칙과 규범임을 밝히고 있다. 로마서 6장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은혜 아래 있고 율법 아래 있지 않으므로 죄를 지을 수 있느냐 ? 바울은 아니라고 한다. 다시 죄를 지으면 그 결국은 사망이다. 그러므로 구속을 받아 다시 사망에로 되돌아갈 범죄를 계속할 수 없다는 것이 로마서 6:14-23의 내용이다. 구속을 받아 새 생명으로 살고 있는 자가 죄를 지을 수 없고 더구나 그리스도와 연합 때문에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었으니 죄가 이전처럼 증가하지 않는다(롬 7:14). 바로 이 법이 생명의 성령의 법이다(롬 8:2).

따라서 율법이 언약 백성들의 생활 법칙이고 규범이라고 할 때 단지 윤리법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일면 의식법과 시민법에도 미친다. 먼저 의식법의 본질과 정신은 예배와 경건 생활의 규범성에서만 볼 수 있다. 외양과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신령하게 자발적으로 지켜야 할 규범이다. 또한 선교적인 사명과 활용을 통하여 국가 조직을 하나님 섬기는 일에 유익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그리고 윤리법은 앞서 논한 바 있듯이 그리스도인의 생활 법칙으로서 성령을 따라 준수해 가야 할 규범이다.

그러므로 율법과 복음을 정리하면

첫째로, 구원사 속에서 인류 구원을 위해 시종일관하게 적용되어 온 가운데서 처음에 예시되었고 이제는 그리스도의 복음 속에서 성취된 것이다. 그러므로 구원사는 율법을 통한 구원의 원리가 적용되어 오다가 이제 믿음을 통한 구원의 원리로 대체된 것이 아니라 율법은 본래 생명과 의를 제공하는 구원사로서의 원리로 의도된 적이 없고 하나님을 아브라함의 약속이 내포하고 있는 믿음만이 의와 생명을 제공하는 구원사의 유일한 원리를 계획하셨다. 약속은 그것이 수립되었을 때부터 효력을 발휘하기 시작하였으며, 율법은 기껏해야 수립된지 430년이 지난 뒤에야 '천사들로 말미암아 중보의 손을 빌어서' 주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직접적인 간섭을 통해 주어진 약속은 천사들을 통해 간접적으로 주어진 율법보다 우선하며 우월하다.

둘째로, 만일 율법이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구원사의 원리가 아니었다면, 율법은 과연 무엇인가 ? 율법은 약속에 덧붙여진 것이거나 그것을 보충하는 어떤 것이 아니라 더욱이 율법은 말씨온주의자들이 주장하듯이 약속과 모순된 것도 아니다. 그것은 비록 천사들을 통해 모세의 중보를 빌어 간접적인 계시일지라도 하나님의 거룩한 계시로서 죄를 깨닫고 체험하게 하며 죄를 더하게 하고 죄를 정죄하는 역할을 담당한다. 율법은 모든 사람들을 율법의 저주 아래, 즉 죄 아래 가두어 둠으로써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 주어지는 자유를 갈망하게 하고 믿음으로 의롭다 하시는 구속의 은총의 필요성을 부각시키는 역할을 담당한다. 그러나 율법과 약속은 상호 모순된 구원사의 두 경쟁적인 원리가 아니다. 그것들은 통일된 하나님의 구원 의지 속에서 서로 다른 차원 또는 영역에서 작용할 뿐이다.

세째로, 죄를 깨닫도록 체험하게 만들며 죄를 정죄 하는 율법의 기능은 그리스도 안에서 폐지되었다. 믿음의 시기를 살아가는 그리스도 인들에게 율법은 더 이상 타당성을 상실하고 말았다.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은 율법을 '헐었다(ՊՁՔՅՋՕՓՁ)'는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율법의 요구가 무효화되었음을 직접적으로 진술한다(갈 2:18). 그러나 로마서에서 바울은 이신칭의의 원리를 좇다가 율법을 폐지하였다는 비난에 대해서 자신을 변호한다.(롬 3:31) 이 구절에서 바울은 율법을 '폐한다(ՊՁՔՁՑՃՅՙ)'는 말보다는 '굳게 세운다(ՉՓՔՁՍՙ)'는 말로 자신의 입장을 정죄한다. 겉보기에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취한 부정적인 율법관을 유대주의자들의 비난에 직면하여 로마서에서 수정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이 율법에 대해 사용한 '헐었다'는 말은(갈 2:18) 다음절인 19절과 관련하여 해석되어야 한다. 갈라디아 2:19절의 '율법에 대해 죽었다'는 표현은 다시 20절에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말로 부연 설명되어진다. 따라서 율법은 하나님의 거룩한 신의 의지로서 죄를 깨닫고 체험하게 만들며 죄를 정죄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는데,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율법의 이러한 정죄 기능을 '헐어 버린' 것이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들의 '율법 아래' 있지 않다는 말은 그들이 이제 율법의 이러한 정죄의 기능 아래 더 이상 있지 않고 은총의 통치 아래 있다는 것을 뜻한다(갈 5:18).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취한 부정적인 율법관이 로마서에서 긍정적인 율법관으로 수정되거나 진화한 것이 아니고(contra H.Hubner) 성령의 인도와 능력 속에서 '이루어지는'사랑은 사실 율법의 본질을 적극적으로 성취하는 것이기 때문에 거룩하고 선하고 의로운 신의지의 계시로서의 율법은 새로운 메시야 시대에서 '믿음과 성령을 좇아' 행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여전히 타당성을 지니고 있다(갈 5:14;롬8:4). 바울이 롬 3:31에서 사용할 '율법을 굳게 세운다(ՉՓՔՁՍՏՌՅՍ)'는 표현은 바로 이런 의미에서 사용한 것이 분명하다.

결과적으로 루터주의와 개혁주의는 바울의 율법관의 전체적 측면을 밝혀내지 못하고 특정한 한 측면을 부각시킨 것으로 보인다. 바울에 있어서 기독교의 복음 속에서 성취된 '약속'은 구원사의 시종일관한 원리로 적용되어 왔고, 모세의 율법은 하나님이 주신 신의지이기는 하지만 천사들을 통해 모세의 중보를 빌어주신 간접적인 계시이기 때문에 여러 면에서 약속 또는 복음보다 열등한 것이 사실이다. 바울에 있어서 율법의 본질은 복음의 정신과 모순된 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점에서 바울은 개혁신학적 입장에 접근한다고 본다. 바울이 이렇게 한편에서는 그리스도인이 율법에 대해서 죽었다고 말하고 다른 편에서는 율법이 여전히 그의 삶에 타당성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그가 모순된 율법관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런 현상은 두 가지 모순된 율법관의 충돌에서 빚어진 것이 아니고 하나의 율법이 지니는 '이중적인'(twofold) 기능에 기인한 것이다. 율법은 하나님의 거룩하고 선하고 의로운 의지의 계시를 담고 있다.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은 그들에게 요구되어지는 그의 거룩한 뜻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하나님의 거룩하고 의로운 뜻이 계시됨으로 인간들의 모든 죄와 악들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폭로되기도 한다. 결과적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율법의 이러한 정죄 기능을 그리스도 안에서 무효화시키고 폐지시켰지만, 그렇다고 율법 자체가 지니는 거룩하고 의로운 신의지의 계시로서의 본질적 내용이 무효화되거나 폐지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의로운 요구가 성령을 좇아 행하는 신자들에 의해 성취되는 종말론적인 '성취'의 시대가 도래하였기 때문에(갈4:4)율법의 참된 본질은 신자들의 삶 속에서 승화되어 계승되고 점진적으로 성취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율법의 성취는 사랑의 실천으로 이루어 질 수 있다(요 13:34). 그리스도 자신이 율법을 사랑으로 요약하셨고 하나님과 이웃 사랑을 모든 율법과 선지자의 대강령으로 규정하셨기 때문이다. 그 사랑은 그리스도 자신의 피에 기초한 사랑이기 때문에, 사랑의 게명은 율법과 선지자의 대강령이고 새 게명이다(요 13:35). 바울도 이 사랑이 그리스도인의 행동 원리임을 밝히고 있다(롬 13:8). 따라서 사랑의 빚을 갚는 자가 율법을 이루는 자이고 이 사랑의 실천이 율법의 성취임을 알 수 있다(롬 13:8-10, 갈 5:14, 약 2:8).

그러므로 율법과 복음과의 관계는 바울이 전개한 구원사역 관점에서 잘 이해될 수 있다. 율법이 선포되고 정죄에 이르게 함으로 구원에 이르게 한다. 율법은 구원의 길로서 더 이상 자리를 차지하지 못하게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가 율법의 마침이시다. 이 율법은 이제 예수 믿는 백성들이 의거하여 살 언약 백성의 생활 규범이다. 이런 의미에서 율법의 참된 본질은 오직 복음 안에서만 계승되고 성취되며 완성되는 것이라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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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루터파 전통에 서 있는 학자로는 F.F. Bruce, "Paul and the Law of Moses". BJRL 57(1975), 259-279 ; R. Bultmann, Theology of the New Testament I, 340-345; H.Hubner, Law in Paul's Thought (1984) ; D.J.Moo, "The Law of Christ As the Ful-fillment of Moses; A Modified Lutheran View" The Law, the Gospel and the Modern Christian(1993), 319-371등 루터파의 사상에 관한 서론으로서는 G. Ebeling, Luther (London:Collins,1970)을 참조.

2) 개혁파 전통을 따르는 학자들로는 K.Barth, Gospel and Law, "God Grace and the Gospel" (Edinburgh ; Olaer & Boyd,1959), "Die Stellung des Paulus zu Gesetz und Ordnung", Evangelische Theologie 33 (1973) 496-526 ; C.E.B. Cranfield, "St Paul and the Law", SJT 17 (1964),43-68; International Critical Commentary on the Epistle to the Romans,ICC,(Edinburgh:T&T Clark 1979), volⅡ ; D.P.Fuller,Gospel and Law : Contrast or Continuum ? (Grand Rapids:Erdmans,1980):R,Bring,Christus und das Gestz (Leiden : Brill, 1969)를 참조

3) C.E.B Cranfield, "St Paul and the Law" reprint, 167,169, "Essay Ⅱ. Concluding Remarks on Some Aspects of the Theology of Romans Ⅱ의 논문. Ԓ