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신학 제 2강

책 소개 하겠습니다.

먼저 독일어로 되어 있는데 영어로 번역된 고펠트의 신약신학 두권으로 되어 있다. 보수주의 입장에서 독일 사람의 책으로는 상당히 온건하고 밸런스를 잘 이룬 책인데 비판적인 학설을 충분히 토론하고 그러기 때문에 교과서로는 아주 좋은 책이다.

그 다음에 확실히 보수주의 입장에서 쓰여진 책으로써 교과서로는 많이 쓰이는 책이 G.E.Ladd의 시약신학 책이 있는데 이미 번역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예수의 가르침에 있어서 아주 좋은 책이 J. Jermias의 신약신학이 있는데 이책도 원래 독일어로 쓰여졌다가 번역이 된 책인데 이 사람이 두권을 쓰려고 했는데 두번째 책을 못쓰고 세사을 떠났다. 그래서 제 1권 예수의 선포만 있는데 아주 좋은 책이다. 우리가 늘 참조해야할 아주 많은 자료들을 요약해서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응데 아주 온건한 책이고 이 사람이 신약의 유대교적 배경에 있어서 금세기 최고의 학자이었다. 그래서 그런 지식을 충분히 복음서연구에 활용을 해서 저술하였다.

신약신학 교과서로서는 대개 이러한 책들이 좋고 우리가 참고해야할 책으로는 불트만의 걁니약신학(1,2)인데 이것은 예수의 가르침에 대해서는 볼 것이 하나도 없다. 그리고 여기에 대해서는 30 page 정도로 떼어버리니까...그리고 그는 예수는 신약신학에 속하지 않는다고 그런다. 이 사람의 신약신학이란 책을 열면 무슨 말이 나오느냐하면 예수의 생애와 가르침은 신약신학의 전제이지 신약신학의 내용에 속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 역사적인 예수를 경시하고 무시해버렸기 때문에 그의 신학 체계가 그렇기 때문에 그런 체계 밑에서 시작하고 예수에 대한 가르침이 약 30page정도밖에 없다.

그러나 바울신학에 대해 상당히 집중되어 있는데 바울과 요한신학에 집중되어 있는데 물론 우리가 그 사람의 신학적인 결론을 대부분 받아들일 수 없다. 특히 역사적인 평가를 못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래도 바울신학이나 요한신학의 주제들을 해석하는 것에 있어서는 우리가 볼 것이 참 많다. 특히 이 사람의 바울신학에 있어서 인간론이나 구원론의 부분에 있어서 아까처럼 없는 것도 많지만 배울 것도 많다. 좋은 insite가 많고 또 묵상하는 방법을 많이 배울 수가 있다. 그래서 보수주의 학교에서 보통 공부를 하면 불트만 하면 무조건 안읽는 버릇이 있는데 그것은 옳지 않은 태도이다.

우리가 신학적으로 도저히 동의할 수 없는 책에서도 우리는 많이 배울 수가 있다. 긍정적으로도 배울 수가 있고 부정적으로도 우리 말에 '반대거울'이란 말이 있듯이... 이사람들에 대해 내가 왜 동의하지 않나? 이 사람말이 왜 틀렸나? 를 추적하다가 우리가 많은 진리를 발견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사람 책도 무조건 안읽는 것이 아니고 읽어서 긍정적으로도 부정적으로도 배울 것을 많이 배우는 것이 좋다.

그 여태 신약신학에 대한 교과서류가 더러 있는데 H. Conzelmann 이러한 책들은 아까 소개한 책보다는 조금 떨어지는 책인데 W.G. Kummel(웑멜)의 신약신학 같은 책이 있는데 이러한 책은 조금 부족한 책들이다. 각각 특징이 조금 있다. 웑멜은 짧게 요약되어있는 장점이 있다. 예수와 바울과 요한의 세개의 부분에만 요약되어 있는 장점이 있다.

콘젤만은 강의실에서 사용하기 좋게 배열해 놓은 점과 불트만의 약점을 조금 보완했다는 것이 특징이 있지만 불트만의 선에서 그렇게 많이 발전된 것도 아니고 별로 일류책이록 볼 수 없다.

D. Guthrie의 책은 내가 읽어보지 못해서 뭐라고 말할 수는 없으나 그는 좋은 학자이다. 그래서 volumn이 방대한데 주제별로 잘 다루었을 것이다. 이러한 것들이 교과서이고 앞으로 신약적인 주제를 다룰 때마다 그때 그때 주제에 대해 쓰여진 단행본들을 소개할 것이고 많이 읽어야 한다. 우리 한국말로 되어져 있는 서적들도 더러 있겠지만 이러한 것은 내용이 빈약하고 영어나 독일어로 된 서적들을 많이 있을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언어를 위의 둘중에 잘 해두는 것이 신약신학을 하는데 필수적이다.

자 지난 시간에 어디까지 하였는가?

지난 시간에 우리가 간접 기독론이란 방법을 쓸 수밖에 없다고 하였고 쓸 수 밖에 없는데 그 방법론이 비유사성의 원칙이라고 하였다.

그러면 우리가 그 방법을 사용하여 가지고 어제 예수의 자기 이해를 살펴보도록 하겠다. 그러면 첫째로 예수의 독특한 말버릇이 우리에게 눈에 띈다.

1)말버릇

여기서 두 가지가 있는데 a)ՁՌՇՍ(ࠐࠍࠀ)이란 말들을 어떻게 사용하여쓴가 하는 것이 아주 독특하다.

유대교에서는 ՁՌՇՍ을 우리와 같이 사용하였다. 우리가 아멘을 어떻게 씁니까? 하나님의 말의 선포 끝에나 끝에 그것이 진리이다. 그것이 학실하다는 우리 수용의 표시로 아멘 그렇게 한다. 그리고 기독의 譻에 우리가 하나님게 드리는 기도와 청원,찬양의 끝에, 지금 우리가 드리는 것이 진정으로 확실히 우리가 드리는 것을 확인하는 의미로 ՁՌՇՍ그렇게 한다. 유대인들도 아멘을 꼭 이렇게 사용하였다.

그런데 예수는 아멘을 뒤집어서 사용하였다. '아멘 아멘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리고 중요한 하나님의 말슴의 선포의 순우로 이야기가 이어졌다. 우리 말에 '진실로'라고 번역된 것이 그렇다.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우리 말에 그렇게 번역되어 있지요?

우리, 유대인: 내용 ՁՌՇՍ

예수님: ՁՌՇՍ,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내용

사실 진실로 라는 말이 번역되어서는 안되는 말이다 그냥 놔두어야 한다.

왜그러냐하면 헬라어로 쓰여진 우리 신약성경에 셈족어 ՁՌՇՍ이 그냥 그대로 나온다. 왜냐하면 ՁՌՇՍ이 아주 중요한 예수의 독특한 말이었기 대문에 일부러 번역하지 않고 일부러 그 말이 무슨 말인가를 가르친다.

신약에 그런 아주 중요한 말들이 꽤있다. 일마누엘,아멘,아바,마라나타,이런 말들이 다 그렇다. 요새 많이 쓰는 할렐루야도 그렇다. 히브리어 몰라도 할렐루야가 무슨 소리인지 알듯이 물론고린도 교인이나 갈라디아 교인 로마교인도 히브리어는 몰라도 그런 말들은 알았다. 왜? 그것이 아주 중요한 신앙고백을 담고 있는 기독교적인 특수용어이었기 때문이다. 그러기 때문에 성경에도 번역이 안되고 그냥 남아있는 것이다.

그러니가 그런 정신을 살려서 우리 한글 번역에도 그냥 놔두었어야 한다. 그런데 잘 났다고 그런 것을 다 번역해 놓은 것이다. '진실로' 그렇게 번역해 놓았다. 물론 뜻이야 그렇다. 그런데 뜻만 가지고 되냐? 이게 벌서 ՁՌՇՍ을 이렇게 썼다는 것이 중요하다.

ՁՌՇՍ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렇게 아멘 하면 내가(강조) 너희에게 말한다가 강조되어 있다. 이미 헬라어 배워서 알겠지만 동사가 인칭변화가 하기 때문에 인칭대명사 주어는 생략된다. 그런데 어느때만 나오느낙? 강조할 때 이다. ՁՌՇՍ ՅՃՙ ՋՅՃՙ ՕՌՉՍ 이때는 항상 나온다. 아멘, 내가 너희들에게 말한다. 이렇게 '내가'가 항상 강조되어 나타난다. 벌서 이 문장 형식에만 해도 내가 말한다는 강조가 되어 있다. 즉 자기의 권위주장이 이 문장의 형식에만 해도 들어 있다.

그런데 이것의 진정한 의미를 우리가 하려면 성경에 이와 비슷한 말 버릇을 살펴보아야 한다. 그것은 한 두가지가 있다. ①그중에 한 가지가 랍비드의 자기딜의 가르침을 자기 제자에게 전수할 때 어떻게 하였냐 이다. 항상 어떻게 하였는가? 자기 선생의 이름으로 말하였다. 그래서 랍비 Meir가 랍비 R.J.B.Z.의 이름으로 힐렐의 말을 하기를 R. Meir R.J.B.Z. R.H

하고 자기들의 가르침을 전하였다. 그러니까 랍비 Meir가 자기의 직접 선생이다. 그 선생이 하나 가르침을 전할 때 자기의 직접 선생이 랍비 요한 흠 벤자카이의 내용을 전하는데 요한 흠 벤자카이는 랍비 헬렐에게서 배웠다. 이렇게 바통 3,4대를 거슬러 올라가는 일을 하였다. 랍비 Meir가 랍비 요한흠벤자카이의 이름을 랍비 힐렐의 말을 또 하시기를 '네가 안식일에 소를 끌어서는 안된다'고 이렇게 가르쳤다. 이렇게 해서 어디까지 올라간다고 보았는가 하면 모세까지 올라간다고 보았다. 그래서 모세에게 최고의 권위를 호소한 것이다.

그러니까 이때의 이러한 말버릇은 무엇을 한 것인가? 이것이 내 말이 아니라 나의 위대한 선생의 말라고 그 선생의 더 위대한 선생의 말이고 그 사람말도 아니고 결국은 우리에게 하나님이 법을 계시한 모세의 말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자기가 지금 전수하는 가르침의 권위를 성립시키려고 했던 것이다. 자 이것이 랍비들이 하던 말버릇이었다면 ②선지자들은 어떻게 자기의 말을 시작하였는가? '주의 말씀(영)이 나에게 임했다''여호와의 말씀이 나에게 임했다고 했다' 또는 '여호와의 영이 나에게 임했다'고 한다. 그래서 자기에게 임한 말씀을 선포한다.

예수의 이 말버릇은 물론 랍이의 말과는 정대조적인 방법이다. 랍비들은 자기들의 선생에게 거슬러서 올라가서 자기가 한 말의 권위를 부쳤는데 예수님은 누구? '자기에게'' 내가 한다는 것이다. '

그런데 그것의 진리됨을 누가 보장한다는 것인가? 내가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선지자의 말도 '주의 말씀이 나에게' 또는 '주의 영이 나에게 임했다'할 때에 왜 이렇게 했는가? 결국은 자기 청중들의 관심을 자기에게서 누구에게로? 주께로 돌려서 지금 자기가 선포하고 있는 말이 주께서 하시는 권위있는 말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보기에는 형식적으로는 이렇게 小文이 있다는 것이 선지자들이 말과 랍비들의 말투와 비슷하지만 그러나 예수님의 경우는 정반대이다. 즉 랍비들이 자기들의 선생들에게 호소를 했다. 그래서 구윽적으로 모세에게 호소해서 그 권위를 의지하였다면 또 선지자가 주의 영이나 주의 말씀에 호소했다면 예수는 그 권위를 누구에게 호소하였는가? 자기가 한 말의 권위를 누구에게 호소하였는가? 자기 자신이다. 내가.

내가 그 말의 진리됨을 선언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의 이 독특한 ՁՌՇՍ이라는 말을 쓰는 용법을 보면 이 속에 얼마나 예수의 큰 권위 주장이 들어 있느냐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예수가 자기 권위로 하나님의 진리를 선포한다는 것을 주장하고 있다 그래서 그것이 하나님의 진리됨을 자기의 권위로 보장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몇가지 생각해 볼 수 있다. 그것은

첫째로 물론 그 내용이 중요하다. 예수가 이렇게 ՁՌՇՍ을 사용하는 이렇게 귀중한 자기 주장이 들어 있다는 것처럼 그런데 이것이 소위 우리가 지난 시간에 이야기한 것처럼 비유사성의 원칙을 써서 이렇게 확연히 나타난 것이다. 이렇게 유대인들이 어떻게 말을 했나? 또 선지자가 어떻게 아멘을 사용하였는가? 것 등과 비교해 볼 때에 비유사성 원칙을 사용하셨을 때에 예수의 독특성이 확연히 드러나게 된다. 즉 검은 배경에 하얀 글씨로 써 놓은 것처럼 확연히 드러난다.

이렇게 지난 시간에도 이야기하였지만 비유사성 원칙을 문자 그대로 적용이 되면 아주 파괴적이고 상식을 벗어나는 비역사성을 띠는 그런 방법이 되지만 바르게 사용하면 아주 이렇게 유용할 때가 있다.

예수의 독특한 가르침을 확연히 드러나게 하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래서 예수가 이렇게 ՁՌՇՍ을 사용하였다는 것을 심지어 Bultmann도 비판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비유사성 원칙이란 방법이 유용할 때가 있는 것이다. 그러한 방법을 사용하여서 보니까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는 것은 얼핏 보게에는 기독론적인 자료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 같다. 왜냐하면 기독론적인 칭호가 있는 것도 아니고 무슨 유대교적인 메시야 사상이 반영된 것도 아닌 아무런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 그러나 그런 자료를 분석해보니까 이렇게 엄청난 예수의 자기이해가 들어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추출하여 예수의 자기 이해를 도출하여 내는 것을 간접 기독론이라고 한다. 이렇게 이 방법이 유용할 때가 있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이러한 짐작도 하였다. 예수가 항상 하나님과 긴밀한 교통을 하고 계셨으므로 하나님이 예수에게 어떤 말씀을 계시하면 거기에 아멘 이라고 응답을 하고 이제 내가 그것을 받아서 너희에게 말한다. 하나님이 예수에게 무슨 말씀을 계시하면 그 하나님의 말씀에 '아멘'하고 응답을 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고 한 그 말을 예수가 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우리에게 한 말은 아멘 이후의 말이 아니겠는가? 하고 해보았는데 그럴지도 모른다.

그래도 우리에게 그렇든 안 그렇든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무엇이냐 하면 이렇게 독특한 예수의 말 버릇에서 우리는 무엇을 아느냐면 자기가 선지자보다 더 직접적인 그리고 완벽한 하나님의 뜻의 계시자라는 주장이 주는 것이다. 그러한 자기 이해가 이 말속에 들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 ՁՌՇՍ이 어떻게 쓰였는지에 대해서 자세히 보려면 Kittel의 신약사건의 '아멘'이란 부분을 찾아 보라. 그 areicle을 H. Schleir라는 사람이 썼는이 이 사람은 뭐라고 결론을 맺느냐 하면 이 '아멘'이라는 조그마한 한 마디에 신약 기독론이 전부 다 들어 있다고 한다. 마치 방송이에 알맹이가 그냥 꽉차 있듯이 이 '아멘'이란 조그만 한 마디에 신약 기독론이 꽉차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전혀 과장이 아니다. 여러분들 이것에 대해서 좀더 추구할려면 J. Jeremias의 신약신약 책에도 나온다. 그보다 더 자세하게 나온 것이 Kittel의 신약사전에 H.Schler가 쓴 '아멘'이라는 부분을 읽어보시기 바란다.

b)abba ՁՂՂՁ(ࠀࠁࠀ)이다.

이빠라는 말은 어린아이가 (압바가 아니라 아빠임) 자기 아버지에게 사용하는 아람어 애칭이었다. 우리말의 아빠와 똑같은 말이었다. 가정에서 아이들이 아버지를 아빠라고 부르죠?

서양언어에 papa 아니면 영어의 dad와 꼭같은 말이었다. 단 한가지 우리나라의 아빠와 틀렸다면 우리는 꼭 자기의 육친의 아버지에게만 사용하는데 셈족에서는 이 말의 사용이 좀 확대되어서 장성한 아이가 아버지에게 부를 수 있었고 요새 시집간 부인들도 친정의 어머니에게 엄마라고 부르죠? 옛날에는 그럴 수가 없었는데 지금을 그러잖아요? 그리고 아버지와 좀더 가까와지면 아빠라고 할 때 시집가고 장가간 뒤에도...

하였든 처음에 어린아이가 아버지에게 사용하는 호칭이었는데 이것이 확대되어서 장성한 사람에게도 자기 아버지에게 섰으며 또 자기 아버지 뿐만 아니고 자기 스스이나 자기 아들의 친구 중데도 쓰는 말이었다.

그러나 항상 원래는 아주 가까운 관계, 아주 가까운 사람의 관계를 나타내는 말이다. 바로 이렇게 시작이 어린아이가 자기 아버지에 대해서 아주 가까운 관계를 나타내는 것이고 그런 그 말이었기 대문에 유대인들은 이 말을 하나님에게 대해서 절대로 사용하지 않았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못불렀다. 너무 거룩하다 해서 이름을 불렀는가? 못 불렀는가? 그래서 하나님의 이름이 나오면 우리 주, 나의 주, 아도나이 이렇게 대칭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에 상응하는 많은 이름들을 지어내었다. 그래서 가령 '하늘과 땅을 지은이''막강한 힘을 가진 이' '전능한 이' 또는 '태초부터 계신 이' 이렇게 하나님의 이름을 무한히 많이 지어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말을 하나님에게 적용한 예는 없다. 이것에 대해서 착안하고 많이 연구한 사람이 T.W. Manson이었는데 이 사람의 'Teaching of Jesus'라는 책이 있는데 거기에 보면 이것이 나와 있는데 이것을 진짜로 더 많이 연구한 사람은 J.Jeremias가 아까 이야기한대로 금세기 셈족과 유대교적인 배경에 대해서는 둘째 가라고 하면 너무너 섭섭해 할 사람인데 이 사람이 유대문서를 다 찾아보아도 AD 7 세기의 무슨 문서에 이와 비슷한게 뭐 하나 나온 것 외에는 도대체 유대문서에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른 예가 없다.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이기 때문에 자기들이 하나님의 자녀들이다라는 사상이 구약부터 쭉 있다. 가령 출 4:22부터 쭉 나온다. '이스라엘은 나의 첫 아들이라' 거기에서부터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아들이고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아버니라는 사상이 얼마든지 있다. 그러나 그런 이해를 하나님에 대해서 아빠라고 부른 것으로 절대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제 소위 비유사성 원칙에 의해서 예수의 진짜 말로 확인되는 것이다. 예수님은 항상 그의 기도에서 하나님을 부를 때에 '아빠'라고 불렀다. 기도에서 하나님을 蚁를 때 아빠라고...

①예수가 항상 그의 기도에서 하나님을 부를 때 아빠라고 불렀다.

②자기만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른 것이 아니라 자기 제자들도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르도록 가르쳤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가 가르쳐준 아주 독특한 기도에의 부름이기 때문에 헬라말을 쓰는 바울의 교회들에서도 하나님에 대해서 아빠라고 부르는 이 기도가 계속 남은 것이다. 그러한 구절이 그 흔적이 우리에게 두 곳이 있다. 하나는 갈4:7 하나는 롬8:17 거기에 보면 바울이 뭐라고 하는가? '그 아들의 영이 우리 안에서 뭐라고 울부짖는다고요?' 아빠 아버지!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었다. 우리가 아들들이 되었다는 것이 무었어냐? 아들이 영을 우리가 양자의 영을 받았다는 것이다. 양자의 영을 받았다는 것이 뭐냐? 하나님의 아들의 영이 우리 속에서 원래 독특한 하나님이 아들 예수의 기도, 예수가 하나님을 부르는 기도, 아빠를 부른다. 예수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과 같이 우리도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자기의 제자들에게 자기의 추종자들에게 아빠로, 하나님을 아빠로 부르라 하셨다. 그런데 또 재미있는 것은 이렇게 그리스도 자신이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르고 자기의 제자들에게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르라고 가르치면서도 자기와 자기 제자들을 동급으로 놓지 않는다. ③자기와 동급으로 놓지 않고 항상 구분한다. 그래서 예수가 자기와 제자들을 싸잡아서 하나님을 '우리 아빠'라고 한 예가 없다.

하나님은 또 너희들의 아빠, 또 나의 아빠, 이렇게 구분한다. 우리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는다. 자기와 제자들을 포함해서 사용하지 않는다. 자신을 제자들과 구분한다.이러한 세가지 현상을 우리는 발견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그러면 어떠한 예수의 자기 이해가 담겨 있느냐?

첫째로는 예수가 하나님의 독특한 아들이라는 것이다. ①과③이 그것을 말한다. 예수가 하난미의 독특한 아들이라는 것을 나타내 준다 ①과③이 그리스도 자신이 하나님의 독특한 아들이라는 자기 이해를 나타낸다. 자기의 추종자들에게 하나님의 독특한 아들됨을 중계하는 자기의 주종자들에게 하나님의 아들됨을 중개하는 독특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예수의 자기 이해가 있는 것이다.

Jeremias는 이 관계를 아주 잘 요약하고 있다.

예수님의 하나님께 대한 아빠라는 그 기도 속에는 예수님이 하나님을 얼마나 가까이 느꼈고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얼마나 확실한 이해가 나타나느냐? 이말이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의존은 어린아이가 아빠에게 전적으로 의존하고 하듯이 의존하고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 어린아이가 아빠를 경외하듯이 그 하나님에 대한 순종심, 그 하나님에 대해서 포근함을 느끼는 것, 이러한 모든 것이 그 한마디에 들어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하나님과의 관계가 그렇다는 것이다.

그래서 Schlier는 '아멘'이라는 말에 신약기독론이 밤송이가 알맹이로 그 속에 꽉찼듯이 말했다면 마찬가지로 이 ՁՂՂՁ라는 말에 신약의 기독론이 꽉차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예수의 독특한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자기 이해가 이렇게 확연히 된다.

또 이말도 얼핏 보기에는 기독론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말이다. 그러나 이런 자료가 우리에게 더 예수가 자기 스스로를 어떻게 보았는가를 더 정확히 보여준다. 더 의미심장하게 더 깊이 예수가 자기에게 메시야라는 칭호를,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를, 주라는 칭호를 사용했느냐 안했느냐는 것이 별로 중요한게 아니다. 예수가 자기에게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르 사용했냐 안했냐 그것가지고 대가기 터질 필요가 없다.

그냥 '아빠'라는 말속에 그냥 다 들어 있다.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자기 이해가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이다 하는 것보다 더 훌륭하게 들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안했느냐 하는 그 이유가 우리에게 더 중요하다. 그래서 공관복음에서는 예수가 내 놓고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안하는데 요한복음에서는 자꾸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데 그러면 요한복음이 다 틀렸느냐 하면 안틀렸다.

이런 예수의 독특한 말들,

두번째 모세의 율법과의 관계에 있어서 예수가 율법관이라든지 이것을 하기 전에 앞으로 무엇을 하겠는가를 조금 이야기 하겠다.

지금 하는 간접 기독론이 제 1부라면 제 2부에서는 예수의 독특한 가르침인 하나님의 나라의 선포를 살펴볼려고 한다. 제 3부에 가서는 예수의 자기 칭호 그 사람의 아들, 인자를 집중적으로 토론할려고 한다. 그 다음 4부에 가서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 이런 식으로 이번 학기의 강의를 이어갈려고 한다.

이제 간접기독론을 해나가는데

2)예수의 모세 율법에 대한 태도

이것을 우리는 산상수훈의 예를 잘 들수가 있다.

마5:21-22을 읽어보라. 거기에 보면 거기의 문장 형식 '옛 사람에 대하여 말하기를 살인하지 말라'했다.

옛사람,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기를

여기서 '내가'는 강조이다. 새로운 것의 선포이다. 산상수훈에 보면 새로운 것이 무엇이 되어 있는가? 5:27-28/31-32/33-34/38-39/43-44 절에 보면 '반대문형'이 나온다.

'너희가 옛사람에게 이러이러했다고 들었다. 그러나 이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가끔 '아멘'이라는 말이 동반된다. 이 옛사람에게 말한 것이 무엇인가? '살인하지 말라'이다. 이것이 무엇인가? 모세 율법의 요약인 십계명에서 왔다. 모세의 법이 무슨 법인가? 옛사람에게 말한 옛법이다. 이제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는데 형제에게 화제를 무시하는 자는 벌써 살인행위를 범한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심판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27-28절에 보면 옛사람에게 말하기를 '간음하지 말라'고 하였다고 하였다. 그리고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으면 그 사람은 벌써 간음을 한 자이다. 여기에 보면 우선 형식으로 여기에 '반대형식'으로 되어 있다. 그래서 나중은 예수가 이제 선포하는 새로운 것, 이렇게 반대형식으로 되어 있다.

내용적으로는 십계명을 인용하고 있다. '살인하지 말라' 모세 율법의 핵심인 십게명을 인용하고 있다. 그런데 모세 율법은 무엇을 요구한 법인가? 행위의 최소한을 요구하는 법이다. 진짜 누구의 목을 치지 않으면 살인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예수가 선언하는 복음은 무엇인가? 이 행위 이전에 동기의 최대한을 요구하는 법이다. 형제를 미워하는 형제를 무시하는 여기에서부터 살인하는 행위가 나온다. 형제의 목을 치는 살인행위가 나온다. 동기의 최대한, 우리 심장의 상태를 추궁하는 법이다. 그러니까 그 내용에 있어서 행위의 최소한을 요구하는 옛법에 비해서 동기의 최대화를 요구하는 과격히 내면화도니 절대화된 법을 예수가 선포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모세의 법보다 훨씬 더 완벽화된 법을 선포한다. 그렇게 볼 수 있다. 그런데 그것을 누가 하는가? 내가 한다는 것이다. 내가....

자 이러한 말 버릇에 숨어 있는 예수의 자기 이해는 무엇인가?

이러한 말버릇으로 간접적으로 우리에게 나타내는 예수의 자기 이해는 무엇인가?

그것은 한마디로 자기가 모세보다 더 직접적으로 하나님의 법을 계시하는 자라는 자기 이해가 이속에 나타난다. 모세보다 더 직접적이로 완벽하고 더 권위있는 하나님의 법을 계시한다는 것이다. 모세의 법을 능가하는 옛법에 대해서 새로운 능가하는 하나님의 법을 선포한다는 말이다.

그러니 무슨 소리인가? 이 이야기가.... 그것은 모세보다 더 위대한 더 권위있는 직접적인 하나님의 계시자라는 말이다.

그런데 유대교의 틀 안에서 모세보다 더 위대한 사람이 있는가 없는가? 없다. 심지어 유대교의 메시야 사상에 의하면 메시야도 모세 밑에 있다. 신18:15에 의하면 하나님이 어떤 선지자를 약속하는가? 여기가 유대교에 있어서 메시야 사상의 중요한 뿌리 중의 하나인데 어떤 메시야인가?

모세와 같은 선지자 모세와 같지만 모세를 능가하지 않는다. 모세가 기준이다. 거기에 나오는 유대교의 메시야 사상에 보면 이런 거이 있다. 메시야가 오면 어떻게 해요? 모세의 율법을 잘 가르치는 사람이다. 메시야가 뭐해요? 모세 율법을 잘 가르치는 사람이다. 그러니까 모세가 메시야보다 더 우선한다. 유대교의 틀안에서는 모세가 더 위대하다.

그런데 예수가 여기에서의 말버릇은 무엇을 주장하는가? 내가 모세보다 더 위대하다고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는다. 다만 간접적으로 그러나 더 효과있게 우리에게 나타내는 주장이 무엇인가? 하여간 모세를 능가하는 모세보다 더 위대한 더 완전한 하나님의 계시자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예수의 말 버릇은 이미 유대교의 틀을 부순 것이다. 유대교의 틀을 벗어난 것이다. 유대교의 틀 안에서는 이런 말을 할 수가 없다.

아까 랍비들의 가르침을 아무리 위대한 '힐렐'이고 '자카이'고 누구고 할 것없이 그들의 모든 권위를 모세에게 호소하였는데 모세의 권위를 능가하는 것을 가졌다고 주장하는 자는 이미 유대교를 떠난 것이다.

그래서 예수가 스스로를 메시야라고 보지 않았다고 하는 라구크 스트라우스나 Wrede 등의 과격파 신학자들, 특히 Bultmann 학파의 과격한 신학자들 F. Kasemann까지도 이 현상을 보고 말하기를 이러한 주장을 하는사람에게는 이미 유대교의 틀을 벗어난 사람이다. 그런데 이 사람에게 적용될 수 있는 카테고리는 미흡하지만 메시시야적인 카테고리밖에 더 있느냐 하는 것이다. 이런 주장을 했다면 에수가 자기 자신이 (스스로를) 메시야라고 아니 메시야를 능가하는 자라고 주장하는 것이 틀림이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Kasemann은 말하고 있다. 이것이 Kasemann의 유명한 1956년인가 출간한 유명한 paper가 있는데 '역사적인 예수에 대한 제고'라는 아주 긴 논문인데 그 논문에 의해서 Kasemann이 Bultmann에게 정면으로 도전해서 '역사적인 예수'에 대한 연구를 우리가 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주장을 해서 그 일로 역사적인 예수에 대한 연구가 다시 시작된 것이다.

그논문에서 위의 점을 들고 있다. 우리가 아무리 예수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고 양식사 비판으로 그리고 지난 시간에 이야기한 비유사성 원칙을 중심으로 한 전승사 비판으로 공관복음에 기록된 역사성은 다 부인된다 해도 이것은 부인할 수가 없는 것이다. 예수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부인할 수가 없다. 비유사성 원칙으로 해봐도 부인할 수가 없다. 그런데 이것을 음미해 볼 때 예수가 이미 모세 율법의 테두리를 벗어난 그러니까 유대교의 테두리를 벗어난 자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에게 메시야적인 카테고리 밖에 더 적용할 게 없지 않느냐 하는 것이다. 이런 주장을 Kasemann은 했다. 역사적인 예수에 대해서 연구가 가능하고 또 신학적으로 해야만 되는 그렇지 않으면 우리 신학이 전부가 신화가 되어 버리고 만다. 역사적인 에수의 우리 신앙이 근거하지 않으면 신화가 된다. 역사적인 근거가 없는 그냥 주장밖에 되지 않는다. 문선명이가 신아다라고 하는 것과 비슷해져 버린다. 아루런 근거없는 주장이 된다.

그러기 때문에 역사적인 예수에 대한 재론이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Kasemann이 이런 주장을 하는데 거기서 Kasemann이 이런 관찰을 하고 있다. Kasemann도 예수가 자기를 메시야로 보지 않았다는 과격한 자유주의자들이 대 전제 때문에 그 논문에서 스스로 모순을 범한다. 그러나 예수가 자기를 메시야로 보지 않았다蝥 이 다위 소리를 한다. 하였든 Kasemann은 위의 내용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이것을 볼때 예수가 스스로를 하나님의 아들로, 유대교가 그 당시 기대하였던 메시야 이상의 권위를 가진 , 유대교의 메시야 사상으로서는 도저히 부적한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권위를 주장하는 것을 볼 수가 있다.

유대교의 메시야는 어떤 자이었다고? 모세의 율법을 잘 가르치는 자이었다고. 그런데 예수는 그 보다 더 한 권위주장을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3)죄 용서

또 한가지 예수의 특징이 무엇이냐 하면 죄용서이다.

예수님은 죄용서해주는 권위를 주장하였다. 막2:5,10 눅 7:48 인자가 그러니까 ' 그 사람의 아들'이 땅 위에서 뭐할 권리가 있는가?죄를 용서해 주는 권리가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자기자 죄를 용서해줄 권리가 있고 죄를 용서해 주는 종말론적인 구원행위를 한다는 것을 극으로 표시하였다. 그것이 무엇인가? 세리와 죄인들과 더불어 먹고 마시는 것이다. 불의한 죄인들로 더불어 잔치를 베푸는 것이다. 즉 회개한 죄인들과 그 집에 들어가서 잔치를 베풀므로 그들의 죄를 자기가 지금 용서해 주었다는 것을 드라마로 표시하는 것이다.

구약성경과 유대교의 틀안에서는 누구만 죄용서해 줄 수 있었는가? 하나님만. 왜? 하나님만 죄용서하실 수 있었는가? 하나님이 창조주이기 때문에 그가 지은 모든 피조물들에게 뜻을 두었다. 자기의 뜻을 모든 피조물에게... 그래서 하나님 만이 자기가 지은 피조물들이 합당하게 살았는지 않했는지를 판결할 수가 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만이 심판자가 되시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만이 죄를 용서해 줄 수 있다. 자기의 뜻에 어긋나게 산 피조물을 용서해 줄 수가 있다.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창조주이기 때문에 그렇다.

그런데 예수가 자기가 죄를 사해주는 권리를 선언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가령 마가 2장을 보면 거기에 둘어 앉았던 서기간들, 요즈음 말로 하면 신학자들이 화가 났겠는가? 아니 나겠는가? 화가 났죠.

그래서 예수님을 요새말로 뭐라고 욕하였나요? 참람하다고 하였다. 그말이 무슨 말인가? 하나님을 모독했다는 말이다. 하나님의 권리를 침해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특권을 침해했다는 것이다. 즉 예수 스스로 자기를 하나님으로 만든 자라는 것이다. 스스로 신격화한 자라는 것이다.

그런데 기에 대해서 예수가 뭐라고 하는가? 그 사람의 아들(인자)이 땅 위에서 죄사하는 권세가 있는 것을 너희드로 하여금 알게 하기 위함이라고 하였다. 내가 demonstration하겠다고 그래서 중풍병자에게 네 자리를 들고 일어나 가라고 하였다.

이제 예수가 중풍병자에게 일어나 가라는 것이 이 땅에서 예수가 죄사하는 권리가 있음을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었다고 하였다.

아렇게 죄 용서해주는 권리를 선언하고 죄를 용서해주고 죄를 용서해 주는 표시로 무엇을 하였는가? 죄인들을 모아서 먹고 마셨다. 이렇게 먹고 마시니 예수님에게 무슨 별명이 있었는가? 술주정뱅이라고 하였다. 또 탐식하는 자라고 하였다. 먹기 좋아하고 술주정뱅이요 탐식하는 자라고 하였다. 이렇게 욕을 얻어 먹었다.

경건하려면 세례요한의 제자같이 금식하며 얼굴에 머 시커멓게 바르고 다니고 해야 하는데 예수는 이 형편없는 것들-세리들,창기들-과 먹고 마시고 심지어 세리집에서 잔치 베풀고 하니 탐식하는 자요, 술주정뱅이라고 욕하였다.

그러므로 예수가 뭐라고 답하였는가? 요한은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고 하니까 너희들이 귀신들렸다고 하더니 그 사람의 아들(인자)은 와서 먹고 마시니 술주정뱅이요 탐식하는 자라고 욕하느냐? 그리고 이 세대가 분간할 줄 모른다고 하였다. 여기가 아주 중요한 대목이다.

그래서 이렇게 죄를 용서해 주는 권위를 선언하고 또 demonstration하는데 그게 무슨 의미를 갖고 있는가? 여기서 도출할 수 밖에 없는 예수의 자기 이해는 무엇인가? 자기가 하늘의 대권을 행사하는 자라. 자기가 하나님의 대권을 행사하는 자다. 하나님의 대권자이다. '하나님을 대신하는 자'라는 것이다.

하나님 대신 권리를 행사하는 자, 하나님의 대권을 행사하는 하나님의 대신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자기이해가 있어따 그렇죠?

또 예수의 특징 하나가 예수의 중심 메시지가 무엇이었나? 하나님 나라이다. 그것은 이 다음 시간에 자세히 보게 될 것이다. 하나님 나라가 무엇인가?

그런데 여기서 잠간 보려고 하는 것은 예수가 하나님 나라가 어떠하다고 선포한 것이 아니다. 예수가 무엇도 했냐면 어떤 사람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있고 어떤 사람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는가? 라는 것도 가르쳤다. 그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조건을 내세웠다. 그리고 들어갈 수 없는 조건도 내세웠다. 그것만 해도 상당히 큰 권위주장이 그 속에 있는 것이다. 마치 하나님의 나라의 대문의 열쇠를 가진 것같이.. 그런한 권위주장이 그 속에 들어 있다.

그런데 한발 더 나아가서 어떤 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가? 궁극적으로 말하면 죄를 회개하고 옛의 하나님 나라 선포를 믿고 예수를 추종하는 제자들, 곧 누가? 자기를 버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자기(예수)를 따르는 자들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있는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조건을 제시하는 것만 해도 상당히 큰 권위주장이 내포되어 있는데 한발 더 나아가서 그 조건이 무엇이냐 하면 자기에(예수) 대한 제자도가 그 조건이라는 것이다.

이런 주장을 하는 예수는 어떤 주장을 하였다고 보아야 하는가? 자기가 인간의 생사를 경정하는 arbiter. 자기가 하나님의 나라의 주인으로서 인간의 생사를 결정하는 arbiter라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이 어디에 쓰여져 있는가? 예수의 제자돌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의 구원을 얻을 수도 있고 그것을 부인하므로 멸망에 이를 수도 있고 .. 최후 심판자와 구원자로서 자기 이해가 여기에 나타나는 것이다. 막10:15.마7:21.눅12:32.22:29.23:42 등을 한번 살펴보기 바란다.

4)마지막으로 예수의 또 하나의 특징은 무엇이냐 하면 당시의 선지자들이나 랍비들과는 달리 예수는 후계자를 생각하지 않았다. 흔히 예수의 12제자를 예수의 후계자라고들 하는데 그것은 아주 옳지 않은 신학이다. 예수는 도대체 자기 후계자를 생각하지 않았다.

그것은 무슨 소리인가 하면 예수가 자기의 사역을 종말론적인, 하나님의 구원사 가운데 종말론적인 의미를 갖는 단회적인 사건으로 단 한번 일어나는 사건으로 보았다. 단회성이다. 되풀이 되고 또 되풀이 되는 것이 아니다. 단 한번 일어나는 이것을 이어받은 신약의 신앙고백이 무엇인가 하면 예수가 우리를 위하여 단 한번 ones for all, 하나님의 인류를 위한 한번 일어나는 한번에 완성하는 일인 것이다.

예수가 자기 사역을 이렇게 종말론적인 독특한 구원사역의 중심사건으로서 단 한번 일어나는 사건으로 이해하였다. 그러기 때문에 자기 일을 계승하고 하는 것이 없다. 제자들이 예수의 일을 계속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에게서 일어난 단 한번에 완성될 구원을 가지고 선전하는 것 밖에 없는 것이다. 그들은 그 구원에 덧붙인 것이 하나도 없다.

이러한 것들이 지난 시간에 이야기한 비유사성 원칙을 적용해서 도출해낸 예수의 독특성이고 그 독특성 그래서 누구도 부인할 숭벗는 아무리 과격한 신학자들도 부인할 수 없는 그 점을 살펴보니까 그게 전부 얼핏 보기에는 기독론적인 자료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 같으나 그 속에는 예수의 엄청난 권위주장이 혹은 자기 이해가 들어 있는 것이다.

그것을 신학 전문용어로 vollmachsansprud(권위주장)이라고 하고 영어로는 claim to authority라고 한다. 예수의 아주 독특하고 강력한 절대적인 권위주장인 것이다.

그것을 조금 더 정확히 정의하면 무엇인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종말에 완벽한 하나님의 계시자로서 하나님의 대권을 행사하는 하나님의 백성을 모으며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며 누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올 수 있는가?

자기 자제들, 자기를 추종하는 자들을 , 백성을 모으며 그들을 하나님의 자녀들로 만든다는 그리고 자기를 믿고 자기에게 모여 있는 자들에게 하나님을 뭐라고 부르라고 하였는가? 하나님의 자녀들을 회개케 하는 자라는 자기 이해가 그 속에 있는 것이다.

이렇게 기독론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 같은 자료들이 이렇게 엄청난 예수의 권위주장, 또는 자기 이해를 갖고 있는 것이다. 어때요? 이러한 것들이 얼마나 값진 것인가? 간접기독론을 하여 보니.....

만일 이러한 것을 하지 않으면 여러번 읽어도 그냥 지나치고 넘어가는 것이다.

이렇게 간접 기독론을 해보니 분명히 예수의 이와같은 자기 이해가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면 이 간접 기독론적인 자료에 의해서 이와같은 예수의 자기 이해를 도출하고 보니 예수가 그 제자들에 의해서 메시야로 하나님의 아들고 신앙고백 받고 하나님에 의해서 또는 악령들이 또는 하나님의 막강한 힘을 체험한 소경이나 병든 자들이나 귀신 쫓겨난 자들이 예수의 진정한 정체를 알고 예수를 메시야로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는 것을 예수가 받아들이는 이유가 나타났다. 그럴 수 있는 것이다. 예수가 그 고백을 박아들이겠다는 것이다. 왜 간접기독론에서 직접적인 자료들을 일단 체쳐놨었다. 왜? 그러한 자료들이 예수의 메시야 사상을 직접적으로 나타내는 것이니까 혹 나중에 교회가 예수를 메시야라고 신앙고백한 후 교회가 다 그러한 것을 지어냈을 가능성이 있으므로 그러한 자료는 앞에서 일단 제쳐 놓는다고 하였다. 왜? 그러한 것은 직접 기독론의 자료이니까 제쳐놓는 것이다.

이제는 그러한 것이 아닌 자료만 우리가 본다고 하였다. 그렇게 하고 보니 여기에서 최소한도의 예수의 메시야적 자기 이해가 나타난 것이다. 그렇게 보았을 때 그러면 지금까지 이야기한 예수의 직접적인 기독론적인 자료도 예수의 삶과 가르침 중에 가끔씩 튀어나왔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즉 남들이 그렇게 신앙고백을하였을 때에 그렇게 받아들였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개연성을 간접기독론이 충분히 지적해 준다는 것이다. 간접적인 기독론의 결론이 직접적인 기독론의 개연성을 지적해준다.

Ⅱ.하나님 나라 선포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에 대해서는 책이 참으로 많다. 나이를 많이 먹은 H. 리더보스 책도 있고 그 책이 나이를 많이 먹었다. 그 책이 나왔을 때 그렇게 original한 책은 아니었다. 미국의 reformed한 사람들이 많이 사용해서 우리 한국에도 많이 읽히었는데 좌우간 좋은 책이지만 나이가 많이 먹은 책이다.

좀더 새로운 책들을 볼려면 가장 최근의 책이 G.Beasley Murray 영국 침례교 신학자인데 참 좋은 신학자이다. 좋은 책을 많이 썼다. 특히 이 사람이 전공한 것이 종말론이 전공이어서 마가복음 13장에 대한 책도 썼고 요한계시록의 주석책도 하나 좋은 것을 섰고 그런 사람인데 1985년에 출판한 책이 'Jesus and the kingdom of God'인데 한번 구해서 읽도록 하고 1960,1970년대에 나온 책은 래드의 책이 있다. 래드의 책도 좋고 또 예레미야스의 신약신학에 있어서 하나님 나라 그것도 좋고 고펠트에 나오는 하나님 나라도 좋고 물론 래드의 신약신학에도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충분히 토의가 되어 있다. 래드에 대해서는 래드가 원래 '하나님 나라에 대한 종말론'을 전공한 사람이다. 그래서 그의 신약신학 책에 충분히 언급되어 있으니까 그런 것들을 죽 읽어보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