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1,2,3,서 와 유다서' 의 신학적 내용들
요한 1서
신관념 과 관련된 요한1서의 구조
많은 학자들은 요한 1서가 작품으로서의 줄거리가 없다고 느낀다. 저자가 자신의 주제들을 하나씩 제시하여 메시지를 전개한 다음 결론을 이끌어 내는 방식을 취하지 않기 때문에 서신의 개요를 설명하는 것은 거으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아마도 이는 저자의 마음속에서 사고가 체계화되는 것을 알려주는 가장 좋은 내부적 증거는 저자가 제시한 신관념과 관련하여 찾을수 있다.
즉 하나님은 빛이시다(1:5) 하나님은 생명이시다.(2:25) 하나님은 사랑이시다.(4:8) 라는 정의가 그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각각의 신관념과 관련해서 논의 되는 주제는 교훈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즉 첫째 하나님은 빛이시다라는 명제는 빛 가운데 살아라.(1:5~2:6), 세부적으로 형제를 사랑하고 세상을 사랑하라.(2:7~17) 마지막으로 하나님이 빛이시니 빛처럼 사신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이심을 믿으라(2:18~24)로 귀결된다..
둘째 하나님은 생명이시다.라는 명제는 생명의 하나님이 원하시는 옳하른 자녀의 삶이 무었인가.?(2:25 ~3螡10) 형제를 사랑하되 말로만 하지 말고 행함으로 하라.(3:11~18) 그러므로 육체로 오셔서 이렇게 삶을 사신 성육신 예수님을 고백하라.(3:19~4:6) 로 이어진다.
세째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라는 명제는 그렇다면 우리는 사랑안에 거하고 있는가? 그의 계명을 지키자. (4:7~5:12) 그리고 그 귀결은 이를 위하여 물과 피를 쏟으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라는 것이다.
결국 요한 1서의 저자는 신관념을 정의 하고 그것을 실천적으로 제신한후 그 귀결로써 예수를 그리스도로 정의하고 또한 예수의 그리스도의 성격의 정의하는 것으로 연결 시킨다. 즉 하나님의 정의를 통하여 예수님의 증명하는 구조를 갖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신증명 구조를 지닌 요한 1서는 나선형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즉 한번 소개되었던 관념들이 다시 돌아와 추가로 취급되고 적용된다. 예컨대 빛과 어두음은 한번 소개되고 나서 재차 도입되고 적용된다 죄의 용서 역시 동일한 방식으로 취급되어 몇번이나 논의에 재 등장하낟. 거짓을 말하는 자는 반복해서 나오는 주제이며 계명 도한 그러하다. 즉 여러 가지 여러가지 개념을 반복하여 이러한 신관념을 증명하는데 있어서 용어와 개념의 연속성을 유지하는 것 같다.
요한복음과의 관계
제4복음서와 요한 서신이 공통의 저자를 가진다는 것은 여러 세기를 통하여 학자들의 일치된 견해였다.전승은 세배대의 아들 요한과 이 모든 문서를 결부시켜 왔다. 이러한 동일 저자설에 대한 인정은 관용어와 어구가 분명히 유사하며 주제들이 공통되고 신약성서의 독특한 신학적 관점이 양쪽에 다 나타난다는 것이다. 20세기에 와서 이 통속적 견해에 의문을 제기하여 도전한학자는 H.J. 홀츠만과 C.H.다드였다. 다드는 분명한 신학적 차이가 이선신의 저자로써 요한의 제자쪽을 시사하여 준다교 결론을 내렸다. 그는 ①종말론은 복음서 쪽이 더욱 원시적이며, ②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한 해석 역시 복음서 편이 더 원시적이고, ③성령론은 복음서에서 더욱 고조되어 있다고 지적하였다.
A. 유사점
학자들의 일치된 견해는 요한1서와 요한복음이 신학적으로 동일한 접근방법을 공유하며 일반적으로 말해서 똑같은 주제들을 취급하고 있다는 것이다. 비록 서신에는 이야기(설화)가 나오지 않지만 복음서에 크게 부각되어 있는 영생 하나님의자녀된 신자들 하나님의 사랑과 형제사랑 하나님이 인간 안애 내주하심 등의 소재들을 포함하고 있다. 게다가 그 두 문서를 괄련지어주는 공통된 관심이 있다. '증거'는 양자의 공통적 강조점이다.('증거'라는 말은 서신에서 9번 사용되고 있다.) 성육신의 중요성은 두 문서에서 다른 모든 고려의대상을 압도하고 있다. 구조적으로 서신의 머리말과 복음서의 머리말간에는 표현방식이 유사한 관계가 존재하였음이 분멍한것 같다.
히브리적인 대립적 병행구절(antithetical parallelisms)과 '범죄하였다.' 진리를 행한다.' '거한다.' 세상을 이기다.' 진리의 영' 관은 특색있는 문구들이다.
이원적 접근 주재도 그러한다. '빛과 어둠' '질리와 오류' '하나님과 세상' '사랑과 미움' '하나님의 자녀와 마귀의 자녀'와 같은 대조적 문구들은 매우 친숙하다.
이러한 성구 비교를 통해 한 저자가 두책을 다 저숙하였거나, 아니면 한쪽의 저자가 다른쪽의 책을 매우 익숙히 알고 있어서 그 말투를 자신의 책속에서 흉내내었음이 충분히 드러난다. 분명한것은 양자 모두 동일한 사상적 배경에 속해 있다는 것이다. 즉 거듭남을 그리스도의 사역의 영적 유익해 참여하는 방법으로 강조한점 그리고 이 세상 질서에 강대한 영향력을 행사한는것으로 생삭되는 사단을 정복할 것을 강조한 점 등은 위의 사항을 드러내는 단적인 예라 할 것이다.
< 평행구절 대조표 >
요한 1서 요한복음 요한 1서 요한복음
1.2,3 3.11 3.16 10.15
1.4 16.24 3.22 8.29
2.11 12.35 3.23 13.34
2.14 5.38 4.6 8.47
3.5 8.46 4.16 6.69
3.8 8.14 5.9 5.32
3.13 15.18 5.20 17.3
3.14 5.24
B. 차이점
요한 1서와 제4 복음서 사이의 현저한 유사점들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몇가지 차이점이 명백히 나타나고 있다. 처째로 종말론의 경우 복음서 보다 소박한 단계에 머물고 있다. 즉 실현된 종말론으로 알려지게 된 재 해석이 더 결여 되어 있고 둘째로 그리스도의 죽음에관한 해석이 더 미 발달되어 있다고 주장되는 바 이는 저가'속죄'(expiation)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점에서 특별히 드러난다.(2:2,4:10) 그리고 세째로는 성령론이 통속적인 신앙의 수준에 국한되고 있으며 북음서의 경우에서와 같이 고양되어 있지 않다.(따라서 요 3:5~8의 경우처럼 그 과정 가운데 역사하는 성령의 사역을 언급함이 없이도 중생을 논할수 있었던 것이다.) 이같 중요한 기독교 신락상의 주제에 있어서 서로 다르다는 것은 다드의 견해에 의하면 서신서 저자의 입장이 제 4복음서의 기자의 관점과 는 현저하게 다름을 시사하는 것이라고 주장되어지고 잇다.
이러한 주장에 대하여 수용 하는 것과 반론하는 것으로 반대주장을 나누어 이해할수 있다.
수용하는 입장에서는 이러한 주장들이 결국 그시대의 베드로, 마가복음으로 대변되는 주류 신학과의 접근으로 이해 되어질수 있다는 것이다.
반대 입장으로는 요한서신의 표현의 상의 점은 결국 동일한 배경하의 서로 다른 표현일 뿐이라는 것이다.
바울의 가르침과의 관계
이 문제는 오늘날 보다는 예전 시대에 더 큰 비중을 차지 하였는데 왜냐하면 바울과 원사도들 사이의 대립은 대다수 학자들에 의해 더이상 타당한 것으로 간주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비록 많은 강조점 사이의 차이가 있지만 바울과 요한의 교설 사이엔 근본적인 대립이 존재하지 않음이 충분히 입증되었고 현대 에서는 양자의 연속성이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요한일서의 적그리스도에 대하여
요한은 무엇보다도 그리스도교 신앙의 기본적인것을 강조함으로써 그 믿음위에 독자들을 견고히 세우기 위해 이서신을 기록했다. 그러나 그에게는 또 다른 목적이 있었던 것 같다. 즉 이서신이 그리스도에 대한 깊은 이해를 위하여 쓰여 졌다면 또다른 하나는 공격하는것. 즉 '미옥의 영'(4:6)과 신실한 자들을 '미혹케 하는'(2:26) 포교자들을 공격하는 것이다. 이 미혹은 가현론자들이나 특히 케린토스(Cerinthus)라는 인물에 집중되 이해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신약성서의 배경에 나타난 가장 진보된 단계의 영지주의 가 요한 1서이 저작에 반영되었던 것 같다. 영지주의 는 희랍 사상의 우주론이 동양종교 큭히 유대교와 철학적으로 혼합되어 나타난 결과이다. 요한 1서는 기독교에대해 심각한 의미를 지녔던 영지주의의 세가지 특징 즉 '이원론' '빛의 비췸' 그리고 '성육신의 부정'을 다소 예리하게 나타내었다. 즉 이러한 세가지 의미의 잘못된 해석에 대하여 실현되었지만 조금은 미래적인 종말론은 통한 균형잡힌 이원론, 그리고 빛이 비췸의 근원적인 의미에서 하나님의 정의, 그리고 성육신의 인정등이 여기에 대한 요한 서신의 답이었다.
특히 가현론자 가운데 1세기 말엽 에베소와 그 주위에서 맴돌던 케린토스라는 사람에 대한 전승은 이러한 요한서신의 실질적인 표적이었다는 주장의 상당히 뒷받침에주고 있다. 그에 따르면 예수와 그리스도는 별개의 두 존재리나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는 세례 받을 대 인간 예수에게 내려온 하늘의 응력인데 십자가에 못박히기전에 그를 떠났다는 것이다. 요한이 요한일서 5장 6절에서 공격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 케린토스적 이단이다. ' 이느 물과 피로 임하신 자는 곧 예수르리스도시라 물로만 아니라 물과 피로 임하셨느니라' ---여기에서 물은 세례를 피는 십자가를 상징한다. 그르므로 교회로 부터 이탈한(2:19,4:1) 케린토스의 추종자들은 사실상 이렇게 말하면서 둘아다녔던 것 같다. '성육신은 사실이 아니다 우리의 탁월한 지식으로 우리는 죄를 초월했기 때문에 도덕은아무래도 좋다.'
요한 일서를 주의 讻게 읽어보면'케린토스주의자들'과 요한이 논쟁한 흔적을 볼수 있을것이다. 문장이 시작될 때 마다 " 만일 우리가 죄없다 하면"(1:8) "저를 아노라 하면서....."(2:4) 등의 말을 하며 또한 하나님을 사랑한다 하면서 형제를 미워하는자(2:11)를 힐책하고 있다. 그리고 예수께서 육신으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임을 역설한다.(4:2) 이런 것 들로 미루어 보아 저자가 이단자들을 염두에 두고 있엇음을 확신할수 있다.
요한2서
요한 2서의 거짓교사
요한 2서는 분량도 작을뿐 아니라 그 내용도 개인적이다. 그러나 이렇게 작은 분량과 개인적인 내용임에도 불구 하고 요한은 7절에서 거짓교사에 대한 언급을 다시 그리고 강력하게 재기 하고 있다. 이 거짓 교사는 요한 일서에서 언급한 자들과 동일 인물임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것은 그들이 그 교리로 교회를 크게 위협하던 가현설주의자 였음을 의미한다. 거짓 교사들은 개교회들을 순회하였으며 기독교인들의 환대에 편승하여 이사람들에게 자기들의 주장을 가르쳤던 같다. 따라서 요한 이드에 대하여 가혹하고 불친절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단호하게 그들과의 관계하지 말것을 강조하였던 것이다. 역사적으로 그리스도교의 믿음을 떠난 '고등교리'는 어느 것이든 거짓이며 이러한교리는아들로서의 예수에 대한 참된 교리를 놓치고 있고 동시에 아버지도 잃어버리고 만다고선언한다. 그리고 독자들에게 이러한 이단자들을 물리치라고 권고한다.'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말라'는 것이 그 요지인 것이다. 이것은 기독교의 사랑의 법과는 맞지 않아 보이는 정말 가혹한 충고이다. 이에 대항서 장로는 위급 한 상황에 처해서는 관용이란 있을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이것은 바로 사랑의 사도인 저자가 사랑과 충성가운데 가지고 있었던 긴장의 모습이라 할것이다.
요한 3서
지역교회 지도자와의 갈등
저자는 몇몇 대리 순회자들을 파견하였고 그들은 교회를 순회하였던것 같다. 그중 한교회의 디오드레베는 이들을 받아 들이지 않았고 또한 이를 받아 들이는 교회의 신도들을 출교 시키기 까지 아였던 이에 덧붙여 이오드레베는 사도 자신에 관해서도 그다지 말고써 경의를 표하지 둽았다. " 악한 말로 나를 평론하고(10절)" 디오드레베가 권위를 행사한 방식을 볼때 그가 이 교회의 지도적 위치에 있었다고 추정하는 것이 합당하다. 적어도 그는 요한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앗으면(9절) 그들 사이에 무언가 개랦거 불화가 있었던 것 같다. 만일 저작 동기에 관한 이러한 해석이 정확하다고 가정한다면 저자는 가이오에게 디오드레베에 반대하도록 권하고 자신이 보낸 순회자(데메드리오)가 교회를 방문할때 즉시 맞아 줄것을 원하는 즉 데메드리오를 위한 추천시의 성격을 겸하고 있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케제만은 다소 혁신적인 해석을 내어 놓기도 한다. 그는 디오드레베를 독재적 감독정치(MONARCHICAL EPISCOPACY)의 초기적 전형으로 본다.---10절을 파문권을 지니고 있었던 것으로 해석한다.---도한 더 나아가 그 장로가 독재적인 디오드레베에 항거 했다고 주장한다.(장로 라는 직을 2세기 공식적인 공직개념으로 이해하여) 즉 규율을 어기고 디오드레베의 권위에 반해 그자신의 전도단을 조직한 사람이 곧 그 장로였는데 그는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하고 자신이 파문되었던 그 교회에 대해 자기 지위를 복구하고자 편지를 냵다고 주장한다.
어찌 되었건 간에 디오드레베의 성격은 지역교회 의 지도자로 영적인 지도자인 장로와 마찰이 있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인것 같다.
요한 서신들에 관하여 결론
세개의 편지는 각각 아시아 교회 안에 있었던 기자으 교훈이나 권위에 대한 도전을 다루기 위하여 쓰여진 것이다. 이것들을 논쟁적 성격의 저작이라고 보기 보다는 목회적 성격의 서신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을것 같다. 요한 2,3서의 저자는자신을 사도로 보다는 장로로서 기술하고 있다. 요한 1서는 복음서의 선행성을 지지하는 많은 증거들에 반하여 미래적 종말론(2;18,28,3:2) 과 예수의 피에 의한 대속이라는 분명히 원시적인교리(1:7,2:2)가 다루어져야 한다. 이것 중 어느 것도 북음서에서 강조되고 있지 않다 .비록 두가지 가르침이 모두 서신들의 초기 연대의 표징으로 간주될 수도 있으나 그것들은 또한 오한1서가 복음서 보다 더 발전하는 전통적인 교회의 교리에 의존하고 있다는 견해와도 잘 조화된다. 요한 서신들은 아무래도 요한의 목회서신이라고 정학하게 규정될 것 같다.
(요한서신에 반영된 정통과 교회 질서의 문제들) 요한 3서는 요한1서,2서와 같은 종류의 문제를 다루는것이 아니라 오히려 교회 행정조직이나 치리에 대한 문제를 다루고 있다. 갈등은 디오드레베를 중심으로 일어나고 있다. 그는 일반적으로 자기의 교회에서 군주적 교권제도의 권력을 요구하는 사람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많은 교회에 대한 장로 자신의 관습적인 감독의 역할이 위협을 받았기에 장로가 그에 반대를 하였던 것으로 이해 될수 있다.
유다서
본서신은 신학적 가르침은 바울서신들 및 베드로 서신들의 교훈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衁덧처럼 조인다 악한 자들의 운명이 요한계시록에서 만큼이나 생생하게 모셔되고 있으며 그런 의미엑서 본서가 신약의 이 두부분 사이에 있는 것으로 이해할수 있다. 본서는 당시의 희랍인들과 로마인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던 희랍사상의 형상-질료 개념들과 충돌하게 되었을때 통합주의의 위험이 생겨났으며 신약후기의 서신들이 복음 메세지의 순수성과 교회의 확장 두가지를 다 위헙하는이 새로운 문제를 취급함과 같이 유다서 또한 그러한 거짓 교사들과의 문제를 취급하고 있다.
외경과 위경의 사용
모세의 시체를 놓고 미가엘과 마귀가 논쟁을 벌이는 이야기(9절)와 에녹의 에언(14절)을 포함하고 있다. 6절에는 타락한 천사들의 심판에 대한 전설에 관한 언급이 나온다. 9절의 사건은 심히 손상된 한 희랍어 역본에만 유일하게 남아 있는 외경 모세 승천기로 부터 유래된 것이다. 이 본문에는 그 논쟁의 내용을 포함하고 있는구절이 없다. 그 이야기으 궁극적인 출처는 오늘날 분실된 지 오래된 아람어 창세기 주석이었음이 틀림 없다. 이 주석의 일부에 대한 슬라브어 번역본 및 몇몇 의랍어 단편들에 그 구적이 부존되어 있다. 그 구절에서 애급사람을 살해하였던 모세에 마귀는 고소를 제기하나 대천사 미가엘은 같은 종류의 반응을 보이지는 않는다. 6,14,15,절의 암시적 언급들은 히브리 원어로 쓰여저 있는 그 단편들이 쿰란에서 발견되 위경 에녹1서로 부터 취해진 것이다. 그 인용둁들은 거짓교사들에 대한 저자의 논박에 필수 불가결한 것으로서 이해되어져야 한다. 그 분파적인 둁챁대교적 본문들이 이아스포라들 사이에서 널리 유포되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잇다. 저자는 이들 본문들 조차 이단들에 의해 악용되었다고 아는 것을 논증하며 전설들도 옳게 해석될때는 구약의 정통적인 견해를 뒤받침한다고 하는 점을 논증하려한다. 결국 유다서 저자는 그시대에 유포되었던 외경을 인용하는 거짓 가르침을 가르치는 자들에 대하여 외경에도 거짓 교사들에 대한 강력한 심판이 있음을 증거하고 있노라고 반박하였던 것같다.
비성서 쿰란 두루마리들의 대다수는본질적으로 물시적이거나 혹은 묵시적 특징들을 태호하고 있다. 그러한 문맥에서는악한 인물과 최후 심판의 사건들이큰역할을 한다. 유다서에서는 바로 그런 특징들이 지배적이다. (천사,모세,에녹,마귀...등)이러한 표현들은 결국 유다서가 이들과 어느정도 근접하여 있었던 위치나 혹은 그당시에는 이러한 표현이 상당히 유포되어 통용되었음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볼수 있겠다.
유다서의 이단
이유다서에서 암시된 이단이 정확히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를 규명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왜냐하면 유다서 자체가 그 이단에 대해서 매우 애매하게 표현했기 대문이다. 저자는 이단에 대하여 묘사한다는것이나. 이단들과 논쟁한다는 것에 관심이 있언던 것 아닌것 같다. 저자으 의도는 비록 분명히 표현되지 않았지만 이단자들을 악한자로 성격지우며 고발하는 것이엇다.
이단과 교회에 대한 관계는 불분명하다. 저자는 이 이단에 대하서 4절 외부에서 교회로 가만히 들어온 사람들이라고 묘사하지만 12절에서는 그들은 교회에 속한 자들로서 기독교인의 애찬의 암초라고 표현했다. 또 자기 몸만 기르는 목자 라고 건급한 점은( 12절) 그 이단자들은 사도적 권위에 복종하지 않은 분리주의자들이라는점을 암시해주고 있다. 모호한 구절인 23절은 교회가 그들을 추방하려고 햇음을 암시한다. 그들의 불법적인 입교(4절)에도 불구하고 자기들의 영지주의적 가르침을 말할수 있는 기회가 꽤 있던것으로 볼수 있다. 이들은 그들이 영적인 영역으로 글어 올려진 신령한 자들이라고 자신들을 생각했던것 같다. 그래서 도덕 규범과 이 셋상의 권위로 부터 떠나 마음대로 행동하었다.(8절12절16) 그래서 그들은 특별한 환상을 보았다고 주장하며(8절) 자신들을 신자들의 단체들과는 분리 되어 있다고 이해했다.(19절) 그들이 이렇게 이해 하였던 것은 피조세계를 통치하는 천사의 세력에 대해 자신들이 승리했다는주장에 근거한 것이다. 8절은 천사들을 악한세력으로 특정짓는 어떤 우주론을 암시하는 것처럼 조인다. 유다서에서 심판과 재림이 강조되것은(21,22절) 그당시에 영적 부활에 대한 가르침이 있어서 그리스도의 심판과 재림을 부정하는 자들이 있었다는 것을지적하는것 같다.(21절23절) 결과적으로 우리는 이러한 적들을 종합해 볼때 영지주의적 분리주의적인 생각을 지닌자들이 아닌가 추즉할수 있다.
베드로 후서와의 관계
양자의 관계가 매우 밀접함은 양서신을 극히 무심코 비교해 보아도 명백하다. 베드로 후서 2장의 내용 대부분은 유다서에 그 병행구절이 나타난다. 다른 두 장의 병행구절들 역시 발견되고 있다. 공통되는 자료는 거짓 교사들을다루고 있으며 단지 우발적으로만 다른 주제를 건드리고 있다. 베드로 후서가 좀더 적극적인 기독교 교리를 담고 있는데 비해 유다서는 고발에 집중한다. 양쪽의 거짓교사들이 동일 집단인지 아닌지는 확일할수 없으나 아닌것으로 주장되어지고 있다. 그리므로 어떻게 양 서신이 이들에 관해 그같이 비슷한 서술을 하게 되었는지에 관한 의문이 제기된다.보통 의존설로서 유다서가 베드로 후서의 기초가 되었다는 것이 그 역보다 지배적이다. 그러나 제3의 가능성으로 동일한 자료를 이용하였을 가능성에 대하여서도 관심을 가져볼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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