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현경(이대 교수·여성신학)
월간「기독교사상」94.9,11월호
대한기독교서회 제공
Ⅰ
여러분이 앞으로 들으실 이야기는 문자 그대로 한국의 한 여성신학자가 본(보거나, 듣거나, 경험한) 오늘 우리 사회의 가정, 성, 사랑에 대한 이야기이다. 한 글자도 더하지도 덜지도 않은 '진짜'이야기이다. 왜 내가 이 시간, 이 땅에서 이 말을 해야 하는지 잘 모르겠지만, 내 앞에 말할 기회가 주어졌고 그 기회가 "내게 기회를 달라."고 자꾸 소리치며 나를 귀찮게 하기 때문에 그 시달림에서 벗어나려 이 글을 쓴다. 하나님의 뜻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Ⅱ
"아가씨는 정말 공부만 했나봐. 미국에서 8년 살았다는 사람이 가져온 건 책밖에 없쟎아?" 영동 세관에서 소개해 준 트럭 아저씨는 50대 후반의 인자한 얼굴을 가지신 분이었다. 우선 아저씨가 나를 아줌마로 부르지 않은 것이 그런대로 기분이 괜찮았고, 이것저것 친절히 통관절차를 도와주신 것이 고마와 아저씨가 묻는 말들에 가능한 한 진지하게 대답해 드렸다.
아저씨는 이화여대까지 오는 길에, 내게 한국사회에서 어떻게 살아남아야 하는가에 대한 열띤 강의를 하셨다. 아저씨는 내가 공부만 열심히 한 쑥맥이라고 스스로 상정하시고, 역시 여자는 남편 잘 만나 사는 것이 최고의 행복이니 곧 좋은 남자 만나 혼인하라고 신신당부를 하셨다. 나는 처음 만난 트럭 운전사 아저씨께 내 사랑의 이야기들이나 나의 개인적인 삶에 대해 말할 필요가 없다고 느껴 그냥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아저씨는 내 침묵이 이상하다고 느꼈는지 갑자기 정색을 하고 내게 질문을 던지셨다.
"아가씨, 연애해 본 적 있어?"
"아저씨, 제가 30을 훨씬 넘었는데 연애 한번 해 본 적이 없겠어요?"
"그렇겠지. 하지만 아가씨가 앞으로 결혼하게 되면 결혼할 남자에게 한번도 연예한 적 없다고 내숭을 떨어야 해. 그게 한국이거든."
"·······."
"나도 연애 많이 했지만 우리 마누라는 하나도 몰라."
그러면서 아저씨는 10년 간 몰래 사귀던 어떤 여자와 얼마 전에 헤어졌다는 것, 몰래 연애하는 데에는 스스로 조심하는 가정 주부들이 최고라는 것(안전제일을 강조하시면서), 서울 근처에는 러브 호텔들이 많은데 항상 갈 때마다(물론 대낮이지만) 아저씨들 같은 사람들로 초만원이라는 것, 아저씨 친구들 중에 연애 안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는 것, 한국 중년 남자들의 풍속도에 대해 긴 오리엔테이션을 해 주셨다. 그러시다 나의 긴 침묵이 어색하셨던지 이렇게 말을 맺으셨다.
"그러니 아가씨도 혹시 남편이 바람피게 되면 눈감아 주라고·····. 남자는 다 그런 거야."
"아저씨, 아저씨가 사귀셨다는 분들이 다 가정 주부시라는데 혹시 아저씨 몰래 아저씨 부인이 연애하신다면 아저씨도 눈 감아 주실 거에요?"
"그건 절대로 안 되지."
"아저씨는 하시며서요?"
"아, 나는 남자쟎아!"
"아, 나는 남자쟎아!"라는 말과 이 말을 할 때의 아저씨의 확신에 찬 태도가 내 가슴에 박혀 그 후론 택시를 탈 때마다 택시 운전사 아저씨들이 보시는 한국의 정치, 경제, 문화에 대한 강의를 열심히 들은 후 사족처럼 슬쩍 질문을 던진다. "아저씨, 저는 한국의 가족에 대해서 연구하는 학자인데요. 절대로 비밀을 보장할테니 한 가지 질문에만 정직히 대답해 주세요. 제가 들은 바에 의하면 한국 남자들은 부인 몰래 연애들을 많이 한다는데 아저씨도 그러세요?"
한국에 돌아온 후 5년 간 고장난 레코드처럼 이 질문을 계속했는데 대답에는 단 한번도 예외가 없었다. 모두 "그렇다"였다. 그 후 나는 여러 이야기를 들었다. 모 교수의 애인은 누구라는 둥, 모 목사의 애인이 하는 술집이 어떤 동네에 있다는 둥, 모 신학자와 그 애인의 관계는 세상이 다 아는 사이라는 둥, 그러면서 한국은 "간통죄"라는 것이 있는, 세계에서 보기 드문 나라이다. 나는 한국사회의 드러나지 않는 너그러움과 드러나는 처벌 사이의 간격이 너무 커서 현기증을 느낀다.
Ⅲ
십년 만에 만난 대학 때 친구는 두 아이의 엄마가 되어 있었다. 지나간 10년 동안의 많은 이야기를 하다가 문득 열렬히 연애하던 그 친구와 그의 남편의 젊은 날을 기억하면서 이런 질문을 했다.
"너 남편 사랑하니?" 친구는 어이없다는 듯 날들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아직도 너는 그런 질문을 하니? 한국에서는 그런 질문 같은 건 사치야. 그냥 사는 거다. 너도 곧 알게 될 껄."
친구는 지난 10년 동안 자기들이 어떻게 살았나 이야기했다. 남편은 대기업의 모범 사원이었고, 어찌나 회사가 바빴던지 새벽 6시에 나가 밤 12시에 들어오는 날이 허다했고, 어떤 때는 너무 일들이 밀려 합숙하여 처리하느라고 집에 못 오는 날도 많았다고. 그리고 자기 집을 10번 이상 이사하며 아파트 장만하랴, 애들 키우랴 어떻게 시간이 갔는지 그렇게 세월이 흘러가 버리더라고. 남편은 이제 겨우 사십대 초반인데 벌써 건강이 안 좋고, 항상 피곤해 해서 부부생활을 안한 지도 오래된다고 했다.
친구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왜 한국이 세상이 놀라는, 소위 말하는 '기적적인 경제성장'을 했는지, 왜 한국이 어느 나라보다도 앞서가는 사십대 남자 사망률을 보이는지 이해가 되었다. 또 왜 한국 남자들은 다른 나라 남자들이 안 먹는 뱀도 먹고, 사슴 피도 먹고, 개도 먹고, 뭣도 먹는지, 왜 '정력제'라는 것들을 닥치는 대로 먹어대는지 알 수 있었다.
그러면서 의문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렇게 피곤들 하다면서, 왜 가는 곳마다, 수많은 룸싸롱, 퇴폐 이발소, 성인 디스코장이 줄을 서 있고 그 안에는 한국 남자들이 아글아글 매일 몰려 드는지, 그리고 앞 이야기에 나오는 연애하는 아저씨 아줌마들은 무슨 정력이 남아 돌아서 그렇게 열심히 연애들을 하시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수수께끼의 조각들이 잘 맞아들어가는 것 같지가 않다. '전국토의 사창가화'가 일어나고, 남자들은 온갖 '정력제'를 먹어대며, 빨리 사십대에 요절하면서, 연애하느라고, 연애하고 싶어 발광을 한다? 그리고 부인들은 남편 사랑하냐, 안하냐의 질문하기를 포기하고, 남자에게 온갖 '정력제'를 구해다 먹이고, 항상 피곤해 하는 남편을 불쌍히 여기며 요절할까 적정한다? 또 한편 그 많은 아저씨의 애인들은 많은 경우, 가정 주부이고, 그 많은 룸싸롱에는 젊고 이쁜 아가씨들로 가득 차 있고, 유흥 산업은 날로 날로 발전하는 것을 보면 무언가 '보이지 않는 손'이, 물귀신이 머리채를 잡고 사람들을 물 속으로 끌어들이는 것처럼 우리들은 어디론가 끌고가는 것 같다. 이 '보이지 않는 손'은 누구의 손일까?
Ⅳ
'여성의 전화'의 조사 연구에 의하면 한국 여성의 40퍼센트 정도가 남편에게 구타당하고 살고 있다고 한다(이현숙, "기독교와 성폭력", 「한국여성신학」12호, 1992). "여자와 북어는 사흘에 한번씩 두들겨야 맛이 난다."고 가르치는 문화이니 40퍼센트나 되는 여자들이 맞고 산다는 것이 하나도 놀랄 것이 못된다. 아내 구타에 대해 연구하는 사람들의 글을 보면 아내 구타는 그 부부가 속해 있는 사회계층, 직업, 교육정도와 관계없이 어떤 집단에서나 다 골고루(?) 일어나고 있는 현상이다. 신경 정신과 의사인 김광일 교수가 한 구타자 남편에 대한 연구에 의하면, 구타자 남편 중 가장 많은 수가 기독교인이었으며, 목사라는 직업이 때리는 남편의 직업 중에서 가장 높은 빈도 중의 한 직업으로 밝혀졌다.(김광일, 「가정폭력: 그 실상과 대책」, 서울, 탐구당, 1988, 146-148). 또한 요사이는 목회자에 의한 여신도 폭력 사건의 예도 공개적으로 보고되고 있는데, 최근 들은 이야기 중 가장 충격적이었던 것은 어떤 장로교 목사의 이야기였다. 이 목사는 자기 마음에 드는 여자 신도들에게 그들이 영적, 육적으로 아내의 사명이 있다고 안수 기도까지 해 가며 성추행을 일삼았다고 한다. 그는 성경 귀절(창세기)을 자기가 하는 성추행의 근거로 사용하면서 여신도들에게 이렇게 가르쳤다: "야곱에게는 레아와 라헬이라는 두 아내가 있었다. 너는 라헬처럼 일생 동안 결혼하지 말고 나를 남편으로 맞으라. 너에게 특별한 사명이 있다. 지금은 네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있겠지만, 믿어라. ·· 네 몸이 누구 것이냐? 너는 하나님께서 나에게 붙인 것이다."(이문자, "기독교 현장의 성폭력 사례", 「한국여성신학」12호, 1992) 그래서 이 목사는 자기의 아내인 '레아', 많은 여신도 '라헬'을 거느리고 살면서, 혹시라도 누가 자신을 비판하게 되면, 하나님이 세우신 주의 종을 비판하면 하나님께서 화를 내리실 테니 조용히 하라고 오히려 큰소리를 친다고 한다.
이러한 폭력의 사례들은 성인들 사이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어린이들에게도 가해져, 많은 어린이가 소위 '안전한' 가정과 교회라는 허구속에서 학대당하고 있다. 폭력 사회가 폭력 남편과 폭력 부모를 만든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폭력 기독교가 폭력 목사를 만들어 내는 것일까?
Ⅴ
나는 한국에 살고 있는 여성신학자이다. 나는 예수가 보여 주신 하나님 나라의 비전과, 여성운동에서 나온 여성주의 자와 철학, 그리고 한국전통 문화와 종교속에서 스며나오는 한국인의 영성을 내 삶의 소중한 축들로 여기며 하루 하루를 살아간다.
이러한 눈으로 지금 우리 사회의 가정, 성, 사랑을 보면 가슴속에서 큰 슬픔이 일어난다. 우리들은 어디로 미친듯이 가고 있는 것일까? 우리가 여기까지 오기까지도 많은 '보이지 않는 손'이 우리들을 믿고, 끌고, 유혹해 온 역사가 있다. 우리들은 이 '보이지 않는 손'의 음모에 놀아난 것이다. 가끔은 강압적인 힘에 못 이겨, 가끔은 그 꼬임이 달콤해서 자발적으로, 그러나 대부분의 시간은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어느덧 여기까지 흘러온 것이다. 그렇다면 그 '보이지 않는 손'들의 주인은 누구일까? 그리고 그들의 이름은 무엇일까? 그들은 여러 이름을 가지고 있다. 가부장적 종교문화, 제국주의, 군사주의, 자본주의, 식민주의, 새도·매조키즘······. 이 귀신들은 우리의 영혼 깊은 곳에 들어와 우리들을 뒤흔들어 댔다. 군대 귀신이 집단으로 우리 안에 들어와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 와중에서, 우리의 건강하고 아름다와야 할 가정과 성 그리고 사랑을 다 잃어버리는 걸까? 우리가 원하는, 생명이 넘치는 가정, 성, 사랑을 키워나가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이 물음에 대해 나는 여러분과 같이 씨름하여 우리들의 가정, 성, 사랑을 건강하고 아름답게 꽃피우기 위한 해답들을 찾아가고 싶다. 앞으로 나가게 될 글들은 위의 물음들에 대한 한국의 한 여성신학자의 잠정적인 답변이다. 감히 이런 문제를 열어 보려는 것이 마치 판도라의 상자를 여는 것 같아 두렵고 떨리지만, 누군가는 말을 시작해야 하고, 이 문제들에 대해 억압적인 침묵과 금기는 깨어져야만 치유의 장이 열릴 것같아 씨름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여러분의 괌심과 참여를, 그리고 같이 씨름하고자 기도 드린다.
Ⅵ
위에서 나는 우리 사회의 '고장난' 가정, 성, 사랑의 단편들을 보며 질문했다. "우리의 가정, 성, 사랑은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우리를 지배하는 귀신의 정체, '보이지 않는 손'의 정체는 무엇일까?" 이제는 그 '고장'의 뿌리를 보아야 할 시간이다. 고장난 사랑 이야기부터 시작하자.
우리는 수많은 문학 작품, 영화, 노래 등을 통해 "사랑이 무엇이냐?"고 물어왔다. 사랑에 관한 질문은 하나님에 관한 질문만큼이나 영원한 질문이다. 요한의 공동체는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고 고백했다. 물론 우리는 이 고백을, "그러므로 사랑이 곧 하나님이다."라고 뒤집을 수는 없지만, 이 고백을 통해 하나님과 사랑과의 뗄 수 없는 관계를 감지할 수는 있다. 하나님과 사랑은 우리 삶의 핵심에 위치하면서 우리가 누구인가, 왜 우리가 이 세상에 왔는가, 무엇하러 왔는가 하는 중요한 질문들을 우리 존재를 향해 던지고 있다. 그러므로 긴 역사를 통해 우리는 우리 자신의 존재 의미를 묻기 위해 끊없이 하나님에 대해, 사랑에 대해 질문해 온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이, 사랑이 우리의 제한적인 언어에 의해 규정되는 순간 금방 그 생명력을 잃고 우상으로 전락하는 것 또한 보아왔다. 그래서 예로부터 하나님에 관해 말할 때 신학자들은 부정의 방법(via negativa)을 써 온 것이다. "하나님은 ······ 은 아니다(적어도)." 나도 역시 부정의 방법을 좋아한다. 왜냐하면 긍정의 방법(via positiva)으로 하나님에 대해 표현하려면 말을 끊고, 그냥 춤춰야 할 것 같기 때문이다. 그냥 웃고, 그냥 춤추고, 그냥 살고 ·······. 설명이 끊어지고 존재만이 그득하다. 그 때 나는 '신학자'라는 직업도 버릴 것이다. 하지만, 아직은 나는 하나님에 관해 말하고 쓰고 가르치며 돈을 버는, 내 생계를 유지하는 신학자이기 때문에 부정의 방법에 의해 하나님에 대해, 또 사랑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Ⅶ
그렇다면 도대체 사랑이란 적어도 무엇은 아닌가? 첫째로, 아주 분명하게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말할 수 있는 것은, 사랑은 적어도 '지배와 종속'은 아니라는 것이다. 나는 우리 시대의 사랑 안함, 사랑 못함, 사랑 안 됨, 사랑 못 됨의 가장 큰 이유가 지배와 종속에 근거한 삶의 관계에 있다고 본다. 나는 이 지배와 종속의 관계가 우리 시대의 만악의 근본이라고 보고, 그것을 타파하려는 여성주의(feminism), 여성해방 운동, 여성신학에 내 몸과 마음과 영혼을, 그리고 내 삶을 던지기로 결심했다.
여성주의자들은 이 지배와 종속의 뿌리를 '가부장제'(patriarchy)라는 이름으로 규정하고 있다. 가부장제란 남성이 중심인 피라미드형의 권력구조인데, 이 구조속에서 여성들은 그들이 속해 있는 남성들의 계급, 인종, 국가, 혹은 종교 등의 서열에 따라 자신들의 종속도와 착취당하는 정도가 정해지고 있다.(Elisabeth Schussler Fiorenza, Bread not stone, Boston, Beacon Press, 1984, p. xvi) 그러므로 '가부장제'는 다만 남성에 의한 여성의 지배를 평면적으로 표현하는 개념 구조가 아니라 모든 계급, 인종, 국가, 종교, 성적인 오리엔테이션, 나이, 소위 맑하는 몸의 정상 정도(장애인인가 아닌가) 등에 따라 인간과 자연을 종속시키고 지배하는 입체적인 권력 구조를 의미한다. 이 구조하에서 남성과 여성은 남성적으로 여성적으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다.
많은 여성학자는 남성과 여성의 관계가 지배와 종속의 관계를 바뀌는 과정을 관찰·분석하여 남성의 여성 지배에 대한 이론들을 만들어대고 있는데, 그 중 낸시 차도로우(Nancy Chodorow)의 입장이 괄목할 만하다. 낸시 차도로우는 그의 책, 「어머니 노릇의 재생산: 심리 분석과 성의 사회학」(The Reprodution of Mothering: Psychoanalysis and sociology of Gender)에서 남성적 자아와 여성적 자아를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남성적 자아(masculine self)는 에고(ego) 중심적이며 분명한 목표, 과제, 그리고 규법이나 법칙 등을 지향하며 만들어지는데, 특히 서구 산업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그 특징들이 더욱 두드러진다. 남성의 정체성(maleidentity)은 주로 자신을 남들과 분리해서 생각하는 과정에서 생겨나는데, 그들은 그 과정에서 일반화되고 추상화된 남성성을 받아들이고, 여성성을 거부하며, 영향을 깊이 주고받는 감정적인 관계를 부정적으로 생각한다.
이렇게 형성되는 남성의 첫째, 관계들로부터 끊임없이 독립하려는 필요를 느끼는 존재이며, 둘째, 경쟁적인 상황에서 성공함으로써 자신의 존재 가치를 증명하며, 셋째, 공적인 영역에서 자신의 자존성(autonomy)을 획득함으로써만 성숙한 남자가 된다는 것이다.(Joanne Carlson Brown and Carole R. Bohn eds, Christianty, Patriarchy, and Abuse: A Feminist Critigue, New York, The Pilgrim Press 1990. p.44) 그러므로 이 과정에서 나타나는 남성 자아의 원형은 '무사'(warrior)나 '보호자'(protector)의 모습이다.
이에 반해서 여성적 자아(feminist self)는 주로 영향을 깊이 주고받는 감정적인 관계에 의해 형성되는데, 이러한 특징은 가정에서 생명을 양육하는 데 중요한 요소로 여겨진다. 여성들은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맺음으로써 그리고 더욱 상황과 자신들이 처한 특수성에 충실함으로써 자신의 정체성을 발전시켜 나간다. 여성들은 대부분 다양한 관계들 없이는 자신들의 삶이 완성되었다고 느끼지 않는다. 그들은 또한 가능한 한 공개적인 갈등과 경쟁을 피하려고 하며, 남을 양육하고 돌보는 일을 통해 자신들의 가치를 확인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과정을 통해 나타나는 자아의 원형은 무사에 의해 보도되는 자, 섬기는 자(serve), 간호하는 자(nurse), 혹은 종족 생산자(breeder)이다.(ibid).
이러한 성역할 분담을 강조하는 가부장제 문화권에서 어린 남자 아이, 여자 아이들이 이 문화의 메시지를 따르는 엄한 부모밑에서 자라게 되면 신경질적인 남성 정체성과 여성 정체성을 형성하게 된다. 신경질적인 남성 정체성(neurotic masculine identity)은 관계성을 두려워하고, 혼자 있기를 좋아하며, 거칠고, 친밀함을 폭력과 연결시키는 경우가 많다. 이 정체성은 반항적인 성향을 나타나는데, 특히 여성적인 것들에 대해 반발을 일으킨다.
이에 반해 신경질적인 여성 정체성은 분리된 자아 개념을 상실한다. 이것은 항상 남의 요구에 의해 형성되는 자아이기 때문에 자기 스스로 이룩하는 정체성과는 거리가 있다. 이러한 정체성을 가질 때 여성들은 자신을 피해자(victim)로 인식하게 된다. 그들은 항상 자기 밖의 관계들에 대해 의존적이며 자신의 약한 자아의 요구들을 채우기 위해 알게 모르게 남을 이용하게 된다. 특히 이 때 이용되는 자는 많은 경우 어린아이들이다.(ibid)
이러한 문화적 사회적 시스템 안에서 만들어내는 '이상적인' 남성상은 경쟁적이고, 잘 싸우고, 남을 통제 · 지배하면서 자신의 힘을 확인해 가는 남자이다. 앞으로만 나아가야 하는 이러한 남자는 관계를 맺을 시간, 감정을 나눌 시간, 특히 여자 때문에, 사랑 때문에 울고 짜고 할 시간이 없다. 그런 것은 '못난 자식'들이나 하는 일이다. 남에게 자기 존재를 열고, 가슴을 나눌 수 없는 사람은 자연히 권위적, 지배적, 통제적인 인간으로 굳어진다. 이러한 남자들의 힘은 그들의 전쟁 노획물의 질과 양, 얼마나 많은 다른 자들을 거느리고 있나 등에 의해 규정되기 때문에, 소위 말하는 '부드러운' 남자들은 이러한 남성 사회의 실패작들이고 '사나이답지 않다'고 주변부로 쫓겨나게 된다. 그래서 여기선 성공한 '딱딱한' 남자가 나오게 되고, 그 남자들은 자연히 자신들의 치우친 인간성을 '부드러운' 여자를 찾음으로써 균형잡아 보려는 무의식적인 요구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가부장제 속의 '이상적인' 남성상은 '이상적인' 여성상을 불러낼 수밖에 없는데, 이곳의 이상적인 여성은 끊임없이 남을 위해(특히 남자와 어린이들) 자기를 희생하고, 자기를 내어 주는 여성, 관용적이고, 남을 잘 이해하며, 양보 잘하고, 자신을 낮추는 부드럽고 복종 잘하는 여성이다. 이러한 여성은 남에게 끊임없이 주는 행위속에서 자신의 힘을 느끼게 되는데, 이 '청순 가련형' 혹은 '영원 희생형'의 여성은 자기 안에 있는, 치우친 의존적인 인간성을 균형 잡아보려는 무의식적인 노력으로 자연히 '강한- 딱딱한(?)' 남자를 찾게 되는 것이다.
이리하여 가부장제하의 이상적인 남자와 이상적인 여자는 천생연분, 찰떡궁합을 이루게 된다. 그들은 서로가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서로를 이용하는, 잠재적으로 '병적'인 관계를 형성해 간다. 이렇게 양분화되고 한쪽으로만 강화된 인간성은 자신 안에 참된 균형과 평화가 없기 때문에 결국은 불행하고, 초조하며, 끊임없이 자신의 행복을 위해 남을 이용하고, 통제하며 결국은 착취하는 관계를 만들어낸다. 이 과정에서 "너무 많이 사랑하는 여자"(Women who love too much)와 "너무 적게 사랑하는 남자"(Men who love too little)가 나오게 되는데 이들은 결국 남성 지배- 여성 종속이라는 가부장제의 드라마의 주인공들이 되어 이 체제를 유지하고, 재생산하고 강화해 나간다. (Robin Norwood, Women who Love Too much, New York, Pocket Books, 1986).
그러므로 이 가부장제 속에서 새디스트적(sadistic) 남자와 매조키스트적(masochistic) 여자가 많이 산출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논리적 귀결이다. 새디스트란 자신의 외로움, 자신의 갇혀 있는 느낌을, 남을 자신의 일부로 만듦으로써 극복하려는 자이다. 그는 특히 자신을 경배(worship)하는 자에 의해 자신의 힘을 확인해 나간다. 매조키스트란 자신의 소외감과 분리된 느낌을, 자기를 보호하고 지배하고 통제하는 자의 일부분이 됨으로 극복하려는 자이다. 그는 자신을 통제하고 보호하는 자 없이는,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나다. 그는 어려운 일을 결정할 필요도 없고, 모험할 필요도 없으며 책임질 필요도 없다.
새디스트와 매조키스트는 서로에게 의존하지 않고는 하루도 살아갈 수 없다. 서로에 대한 병적인 의존성이란 면에서 그들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그들의 차이점이 있다면, 새디스트는 명령하고, 착취하고, 상처 입히고, 모멸감을 줌으로써 자시 자신의 힘과 존재 여부를 확인하는데 비해, 매조키스트는 명령에 복종하고, 착취당하고, 상처를 입고, 모멸감을 감수하면서 자신의 존재를 확인한다. 그들은 열쇠와 자물쇠처럼 서로를 필요로 한다. 표면상 그들은 매우 다른 사람들처럼 보이지만 조금만 더 깊이 들여다보면 그들은 그렇게 다르지 않다. "통전성 없는 융합"(fusion without intergrity)의 구조속에서만 살아남을 수 있다는 면에서 그들은 깊은 공통점을 나누고 있는 것이다.(Erich Fromm the Art of Loving, New York, Harper & Brothers Publishers, 1956. pp.19-20)
가부장제 안에서 모든 남자가 새디스트이고 모든 여자가 매조키스트인 것은 아니지만, 성적 역할 분담에 의해 화석화된 남성성과 여성성은 새디스트 경향이 다분한 남자와 매조키스트적인 경향이 다분한 여자를 만들어낼 수 밖에 없다.
에릭 프롬이라는 사회심리학자는 그의 책 {사랑이라는 예술} 에서 "사랑은 자유의 아이이다."라고 천명한 적이 있다.(ibid. p.28) 나는 여기서 "사랑의 예술"에 자유만큼 중요한 또 다른 요소를 첨가하고 싶다. 그것은 "사랑은 평등의 아이이다."라는 것이다. 근본적으로 우리를 지배와 종속에서 벗어나게 하는 관건은 - 힘의 균형, 나눔, 정의 - 이다. 그러므로 세계의 많은 여성주의자는 근원적인 평등주의(radical egalitarianism)을, 가부장제를 극복한 사회의 중요 이념으로 보고 있다. 어떻게 평등 없이 정의로운 관계가 이루어질 수 있겠는가? 어떻게 정의 없이 평화로운 관계가 이루어질 수 있겠는가? 어떻게 평화없이 우리의 가슴 겹겹히 닫힌 감옥 문을 열 수 있겠는가? 어떻게 가슴의 문을 열지 않고서 사랑이 가능할 수 있겠는가?
가부장제는 이 평등의 싹을 그 떡잎부터 잘라버리는 병적인, 악마적인 구조이다. 가부장제는 힘있는 남자가 자기보다 힘없는 다른 남자나 여자나 어린이나 자연을 계급· 인종· 성· 종교 ·몸의 상태 등의 차이에 따라 차별을 만들어내고 그들을 지배 이용하는 권력 구조이다. 이 권력의 사다리인 피라미드 구조 속에서 진정한 평등이란 결코 나올 수 없다. 그래서 여성주의 문명 비판, 사회 비판은 지금까지 나온 어떤 비판 이념보다도 더 래디칼한 입장을 취한다. 그들은 주장하기를, 해방은 우리 삶의 모든 부분에서 필요하다고 하며, 다중적· 중층적 인간 해방에 대한 분석을 여성의 경험에서 출발하여 전개해 나간다. 그들이 여성의 경험에서 그들의 분석을 전개해 나가는 것은 여성이 남성보다 '존재론적'으로 우월하거나 더욱 도덕적이어서 그런 것이 아니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역사적'인, 인식론적인 특권 때문에 그러한 것이다. 여성들은 역사적으로 가부장제의 주변부에서 생활하면서 남성 권력의 횡포, 남용, 통제가 인간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가 하는 것을 직접적인 피해자로서 뼛속 깊이 경험해 왔다. 그래서 여성들은 '당한 자'가 볼 수 있는 특수한 능력-부정의에 대한 투시력-을 개발시켜 온 것이다. 이것이 바로 여성들이 가지고 있는 가부장제에 대한 인식론적 특권이다. 이 인식론적 특권에 의해서 여성주의자들은 가부장제의 귀신들, 악마들의 이름을 불러냄으로써 그들의 정체를 밝히고 그 악령들을 축출하고, 모두가 지배와 종속에서 벗어나 관계성, 상호성에 근거한 올바른 관계를 이루어 내려고 하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올바른 관계가 여성주의자들이 말하는 '정의'(jusitice)이다.(이 '올바른 관계'와 '정의'에 대한 신학적 분석은 Carter Heyward의 책에 잘 나타나 있다. Carter Heyward, Our Passion for Justice: Images of Power, Sexuality, and Liveration, New York, The Pilgrim Press 1984.)
이러한 정의는 정부에서, 법정에서, 산업 전선에서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연인과 남편과 벌거벗고 뒹구는 이불 속에서, 우리의 부엌에서, 우리의 가장 감상적인 사랑 노래나 사랑 소설, 영화속에서도 필요한 것이다. 바로 이 점에서 여성주의자들이 그렇게도 강조하는 "개인적인 것이 곧 정치적이다."(personal is political ! ! )라는 모토가 나오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껏 정의, 평화, 창조세계의 보전 문제를 다루면서 소위 말하는 '공정영역' , '큰 이념의 담론'들을 가지고 우리 삶의 문제를 규정하고 비판하고 개혁하려고 노력해 왔다. 그러나 이제는 그러한 공적인 영역, 큰 이념의 담론들이, 우리가 소위 '사적영역'이라고 비하시키고 소홀히 여겨 왔던 곳에서 일어나는 일들과 지혜에 의해서, 또 우리 일상생활에서 일어나는 작은 생활과, 삶의 담론들에 의해 수정되고 변혁될 때가 도달한 것 같다.
우리가 만약 술취해 들어온 남편이 부인을 강간하는 것과, 우리나라 정부와 군인들이 탱크를 가지고 광주에서 시민들을 대량 학살하는 사건사이에 아무런 연결도 지을수 없다면, 우리의 새 사회에 대한 꿈, 힘을 주고 치유하는 관계에 대한 모든 꿈들은 물거품처럼 사라지고 말 것이다. 술취한 남편에 의한 부인 강간과 광주의 대학살은 가부장제의 폭력과 억압이라는 동전의 양면일 뿐이다.
우리가 개인적인 사건과 정치적인 사건에 의한 억압을 동일전상에서 보며, 우리의 "가부장제-지배-종속"이라는 악령을 축출할 때, 비로소 우리의 온전성을 다시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때야말로 '사랑이 무엇냐고 물으신다면 눈물의 씨앗이라고 말하겠어요'라는 나훈아의 노래가 애국가보다 더 친근하게 우리의 가슴을 울리며 애창되는, 사랑의 귀신들림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제 당신이 내게 '사랑이 무엇냐고 물으신다면' 나는 사랑은 '평등의 아이'라고 말하려 한다. 이것이 바로 나의 사랑이야기 1편이다. 나는 다음 호에 나올 '사랑이야기 2편'에서 우리 사회에서 만연하고 있는 '고장난 성'의 뿌리에 대해 여러분과 함께 고민해 보고 싶다. 성처럼 신나고 아름다운 하나님의 선물이 있을까? '전국토의 사창가화'가 일어나고 있는 '동방예의지국'인 한국의 성, 그대들과 나의 성, 어디쯤 가고 있는 것인가? 독자 여러분 중 누군가가 이 문제에 대한 지혜를 나누고 싶거나 비밀 제보를 하고 싶다면 {기독교사상} 편집실로 연락 주시기 바란다. '절대 비밀 보장'할 테니······. 이 과정을 통해 "절대 비밀 보장"이 필요 없는 우리의 사랑 이야기, 성 이야기의 장이 이루어지기를 꿈꿔 본다. 다음 호에서 다시 건강하게 여러분과 만나길 기대하며 당신의 사랑과 성에 하나님의 임재가 그득하기를 기도 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