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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아들보다 귀한 자부의 인애
김 지 찬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교수/구약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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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은 해방 이후 서양의 개인주의의 강한 영향으로 개인주의적 색채를 띄고 있다. 따라서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만 잘 이루어지면 된다고 생각하고, 내가 하나님께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신경을 쓰고 이를 잘 수행하려는 데 반해, 내가 식구와 이웃에 대해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그리 많은 신경을 쓰지 않고 있다. 내 식구와 내 이웃을 대할 때에 그저 상식 선에서, 예의를 벗어나지 않는 정도로 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 아니 어쩌면 이 정도만 되어도 상당히 수준이 높은 것인지 모른다. 우리는 그 동안 너무나 상식이 안 통하는 사회와 교회의 경직된 풍토에서 자라왔다. 따라서 상식만 통하는 사회도 우리에게는 대단하다. 그래서 우리는 상식이 통할 수 있는 공동체를 만들고는 쉽게 자족한다. 그러나 문제는 그렇게 해서는 거룩한 공동체를 형성할 수 없다는데 있다. 거룩한 공동체는 상식을 초월한 이웃에 대한 충성 위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2. 충성의 상실
그러나 더욱 심각한 것은 최근에 심지어 기독교인 가정에서조차 서로에게 충성하는 모습을 보기가 쉽지 않다는 점이다. 기독교인들이 이혼하는 빈도수가 늘고 있는 것이 이를 잘 대변하고 있다. 물론 어떤 경우에라도 이혼은 절대 안된다는 것을 필자가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상대방이 음행을 했다든지, 도저히 함께 살 수없는 정신병자라든지 할 때는 이혼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최근에는 성격이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서로 기대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순전히 개인적인 이유를 들어 이혼을 하는 경우를 보게 된다. 때로는 집안에 어려운 일이 생기면 아이를 내팽개치고 가출하는 경우도 있다.
우리는 이런 작금의 사실을 돌아보면서 여성의 목소리가 급증함을 보게 된다. "여자들도 그전처럼 남자들에게 억눌려 살 수 없다. 우리 목소리를 높여야 한다." 이런 저런 이유로 여성 해방을 부르짖는다. 물론 우리는 이 목소리에 신중히 귀를 기울여야 한다. 한국 교회에서조차 유교 문화가 아직도 강한 위세를 떨치고 있기 때문에, 기독교인 가정에서조차 남자들이 여자들에게 지나친 복종과 인고를 강요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런 사회의 경향에 편승하여 성경에서 말하는 충성의 개념이 잊혀지고 있는 것이 문제이다. 서로 자신의 이익에 맞지 않으면, 이혼을 서슴지 않고, 자식을 버리고, 자식이 부모를 살해하고, 고부간의 갈등으로 가정이 깨어지는 모습 속에서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성경적인 충성의 개념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러나 심지어는 한 가정 안에서도 가족 구성원들이 서로 충성하는 모습을 보기가 어려워지고 있다. 아니 충성이라는 단어 자체가 매우 어색하게 들릴는지 모른다. 식구에 대한 "충성"이라니, 지금은 봉건주의 시대가 아닌데 내가 누구에게 충성하란 말인가 라고 반문할 분이 많이 있을 것이다. 전에는 국가에 대한 충성, 부모에 대한 충성, 식구에 대한 충성을 강조하였으나, 현대의 젊은이들에게는 이런 전통적인 개념은 피부에 와 닿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런 전통적인 충성은 하위자의 상위자에 대한 절대적인 복종을 의미한 때문이다. 이런 전통적인 의미를 충성이란 단어가 가지고 있기에 우리는 충성이란 단어를 들으면 왠지 닭살이 돋고 소름이 끼친다.
3. 역설적인 성경의 충성 개념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충성은 하위자가 상위자에 대해 보이는 무조건적 복종과 순종이 아니다. 오히려 이와는 정반대이다. 상위자가 하위자에 보이는 자발적인 사랑과 헌신,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충성의 개념이다. 구약에서는 이런 개념을 헤세드(ࠃ॑࣌)란 용어로 표현한다. 한글 개역판에서는 "인애, 인자, 선함" 등으로 번역하고 있고, 영어에서는 "loving kindness"로 가장 많이 번역하고 있다. 성경은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은 인애의 삶이라고 말한다. 즉 약한 자(하위자)가 곤궁에 처해 있을 때 강한 자(상위자)가 그럴 의무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자발적으로 보이는 사랑과 충성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믿음의 공동체 안의 다른 이가 피폐한 삶을 당하고 있을 때, 강한 자가, 유리한 위치에 있는 자가 그렇지 못한 자에게 자발적으로 보이는 충성과 사랑, 이것이 바로 "인애의 삶"이다.
이렇게 이론적으로 설명하면 인애의 삶의 실체를 잘 파악하기 힘들 것이다. 따라서 실제로 인애의 삶을 멋지게 산 구약의 한 인물을 살펴보면서, 오늘날 한국 그리스도인 가정의 잃어버린 영적 자산이 인애의 삶임을 되새겨보도록 하자.
4. 룻은 구속사적 연결 고리
우리는 다윗의 증조모인 모압 여인 룻의 삶을 통해 무엇이 인애의 삶인지 분명하게 알 수가 있다. 룻은 한 평범한 이방 여인이었다. 성경에는 그가 뛰어난 미모의 소유자라는 언급이 없다. 룻은 한 남자와 결혼하였다가 먼저간 남편의 시신을 가슴속에 장사지낸 한 평범한 젊은 과부였다. 그러나 룻은 시모에게 충성하는 삶을 통해 다윗의 증조모가 되는 특권을 누리게 되었다. 필자는 여기서 단지 한 여인이 이스라엘의 국부요 영웅인 다윗의 외조모가 된 개인적 영광을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사사 시대에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진 이스라엘의 국가적 삶이 다윗에 의해 풍요로운 삶으로 바뀌는 과정 가운데 가장 중요한 사건으로 성경 기자는 룻의 삶을 이야기하고 있다. 우리는 이같은 성경 기자의 관점을 룻기가 사사기와 사무엘 상하 사이에 놓인 사실에서도 분명히 살펴볼 수 있다. 우리의 관심은 도대체 룻의 삶이 얼마나 대단하기에 사사 시대의 이스라엘의 피폐해진 삶이 다윗 시대에 풍요롭게 되는 과정에 가장 결정적인 요인으로 언급되고 있느냐는 것이다.
5. 상식을 초월한 시모에 대한 충성
룻의 충성과 인애에 대해서는 나오미와 보아스가 모두 칭찬하고 있다. 나오미는 "너희가 죽은 자와 나를 선대한 것같이 여호와께서 너희를 선대하기를 원하노라(1:8)"고 기원하였다. 여기서 "선대하였다"고 한글 개역에서 번역한 단어는 히브리어로 헤세드로서 인애란 의미이다. 보아스도 3:10에서 "내 딸아 여호와께서 네게 복주시기를 원하노라 네가 빈부를 물론하고 연소한 자를 좇지 아니하였으니 너의 베푼 인애가 처음보다 나중이 더하도다"고 했다.
그렇다면 도대체 룻의 인애가 어떤 것이기에 하나님께서 이방여인을 통해 그의 구원 역사를 이루시는지 살펴보도록 하자. 나오미는 남편과 두 아들을 십년 사이에 모두 잃고 빈털터리가 된 후에 자기 고향 베들레헴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하였다. 이에 나오미는 같은 과부 신세가 된 며느리 오르바와 룻에게 어미 집으로 돌아가라고 권고하였다. 그러나 룻은 시모를 떠나지 않았다. 룻은 얼마든지 나오미가 가라고 했을 때 떠났다 하더라도 비난을 받지 않았을 것이다. 어떤 이는 나오미의 또 다른 자부인 오르바가 떠난 것을 들어 비난하고 있지만 본문에는 이렇게 볼 근거가 전혀 없다. 나오미는 룻과 오르바가 자신과 자신의 아들들에게 인애를 베풀었다고 분명히 언급하고 있다. 더욱이 오르바는 먼저 나오미에게 그의 곁을 떠나겠다고 요청하지도 않았다. 처음에 나오미가 그들에게 각기 어미 집으로 떠나라고 했을 때, 그들은 소리 높여 울며 "아니니이다. 우리는 어머니와 함께 어머니의 백성에게로 돌아가겠나이다"라고 했다. 더욱이 나오미는 자기 고향으로 돌아가는 도중이었다. 나오미를 따라간다는 것은 이방 땅에서 과부로서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오르바는 나오미와 마찬가지의 행동을 하고 있는 것이다. 즉 자기 고향으로 돌아가는 일을 한 것이다. 나오미는 자기 고향으로, 오르바도 자기 고향으로! 이런 상황에서 그들이 나오미를 떠난다고 해서 비난할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오르바의 결정은 결코 불충성이 아니다. 오히려 상식인으로서 적절한 행동이었다고 볼 수 있다. 충성이 무슨 희생을 치르면서라도 모든 관계를 지속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오르바의 상식적이고 합리적인 결정은 룻의 충성이 상식을 초월한 시모에 대한 충성이었다는 점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6. 죽음에 이르는 충성
룻은 꼭 그렇게 해야 하는 상황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룻은 얼마든지 오르바처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곤궁에 빠진 나오미를 그냥 놔두고 떠날 수 없었다. 룻은 그래도 자신은 나오미보다는 나았으며, 나오미를 위해 무엇인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었다. 이에 룻은 자발적으로, 그 어떤 강압이나 체면 유지의 차원이 아니라, 순수히 인애의 마음에서, 곤궁한 처지에 빠진 나오미에게 끝까지 충성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인애이다.
룻의 시모에 대한 충성은 그저 겉치레의 수사에 지나는 것이 아니었다.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장사될 것이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와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룻 1:17). 심지어는 죽어서까지 나오미를 떠나지 않겠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 룻의 말을 그의 결심이 얼마나 대단한가를 과장법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해서는 아니된다. 실제로 고고학적인 발굴 결과에 의하면 고대 근동 아시아에서는 사람들이 실제로는 죽음에 의해서도 서로 헤어지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는 실제적인 근거가 있다. 보통 식구들의 무덤이 있으며, 살이 썩고 나면 뼈를 모아 무덤 안의 공동 뼈 보관소에 거두어 보관한다(삼하 21:12-14). 룻은 여기서 단지 죽은 후에 다시 하늘에서 만나는 재회를 언급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장례 풍습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룻은 죽음과 무덤에까지 이르는 충성을 맹세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룻은 가정에 충성을 다하려다가 죽음까지도 불사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룻은 나오미가 "목욕을 하고 기름을 바르고 의복을 입고" 마치 신랑을 위해 단장한 신부처럼 단장하고 타작 마당에 나아가 보아스가 누운 발치에 들어가라고 지시하였을 때도 즉시 순종하였다. 룻이 밤중에 남자들만의 세계인 타작 마당에 들어가 보아스의 발치 아래 들어간 것은, 목숨까지도 위태로울 수 있는 위험한 행동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나오미와 죽은 남편에게 충성하기 위해 이런 위험을 감수한 것이다. 이에 베들레헴 장로들은 4:12에서 보아스에게 "여호와께서 이 소년 여자로 네게 후사를 주사 네 집으로 다말이 유다에게 낳아준 베레스의 집과 같게 하시기를 원하노라"고 축복한 것이다. 다말이 자신의 남편의 씨를 잇기 위해 창기로 가장하고 유다와 관계를 맺기에 이르고 이로 인해 임신한 것이 드러나자 화형을 당할 위험에 처한 사실을 우리는 잘 기억하고 있다(창 38:24). 이같은 점은 룻이 죽은 남편과 시모에 대해 충성하기 위해 어떤 위험을 겪었는지를 간접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보아스가 룻을 극구 칭찬한 것도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내 딸아 여호와께서 네게 복주시기를 원하노라 네가 빈부를 물론하고 연소한 자(=젊은 청년)를 좇지 아니하였으니, 너의 베푼 인애가 처음보다 나중이 더하도다(3:10)." 룻이 나오미의 곁을 떠나지 않고 이삭을 주어 공양한 인애 보다, 보아스와 결혼하여 죽은 남편의 씨와 기업을 영원히 이어지게 하려고 위험을 무릅쓴 나중 인애가 더욱 크다는 사실을 칭찬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룻의 충성과 인애로 말미암아 나오미의 삶은 텅비었다가 풍성하게 채워지게 된다. 이에 베들레헴 여인들은 "일곱 아들보다 귀한 자부(4:15)"라고 룻을 칭찬하고 있다. 아들을 선호하는 사회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엄청난 칭찬이다.
7. 평범한 행위가 갖는 구속사적 의미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믿음의 공동체가 서로 서로에게 충성하는 태도 가운데 임재하시고 활동하신다. 각자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동하던 사사 시대에 하나님의 뜻을 따라 충성의 삶을 살던 룻을 통해 우리는 한 여인인 나오미의 삶이 풍성해질 뿐 아니라 사사 시대에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진 이스라엘이 다윗 왕조에 이르러 풍성함을 누리게 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여기서 우리는 룻기가 왜 사사기와 사무엘 상하의 사이에 끼여 있는지를 알 수 있다. 한 평범한 여인의 평범하기 그지없는 충성의 삶을 통해 한 민족이 복을 받는 모습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뜻에 합치하는 우리의 평범한 행위 하나가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는지를 알 수 있다.
우리가 교회의 모순과 믿음의 공동체의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위대한 개혁자가 될 필요는 없다. 위대한 구원자, 뛰어난 개혁자가 되지 않고도, "각자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한" 혼란의 와중에서도 공동체 삶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길이 있다. 그것은 주어진 작은 공동체인 가정에서부터 식구들에게 충성하는 길이다. 특별히 고부간의 갈등을 너무나 당연시하는 한국 사회의 풍토에서는 기독교인 고부가 서로 충성하는 모습은 거룩한 공동체를 만들 수 있는지를 시험하는 시금석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만일 이 시험에 통과한다면 불신자들의 전도도 그만큼 쉬워지지 않을까? 내가 속한 가정이 작은 공동체이기에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같이 보이고, 실제로 매일 같은 일들만 반복되다보면, 매너리즘에 빠지게 될 뿐 아니라 자기가 하는 일이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생각되기 쉽다. 그러나 그것이 아무리 사소한 것처럼 보이더라도 우리가 그 작은 공동체인 가정 안에서 서로 인애의 삶의 모습을 보일 때 그것은 구속사적인 의미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이같이 말씀하신다. "인자(인애)와 진리로 네게서 떠나지 않게 하고 그것을 네 목에 매며 네 마음 판에 새기라 그리하면 네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은총과 귀중히 여김을 받으리라"(잠 3: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