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기대하는 여성: "돕는 반대자"

창 2:18

최 창 모 (건국대학교 교수/히브리학)

최근 우리 나라에서 잘 나가는 작가 이문열씨의 소설 {선택}이 화제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작가는 조선 시대의 정부인 장씨의 이야기를 통해 오늘날 여성들의 가치관에 일침(一針)을 가하고자 하는 의도를 가지고 썼다. 그는 "이혼은 '절반의 성공' 쯤으로 정의되고, 간음은 '황홀한 반란'으로 미화되는" 오늘날의 페미니즘을 천박한 쾌락주의로 규정하고 있다.

그런데 여성들의 반발이 만만치 않다. 현모양처(賢母良妻) 형의 지순지고(至純至高)한 조선 시대의 한 여성이 마치 현대 여성들을 일갈(一喝)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여성에 대한 모독이며 남성들의 오랜 악덕을 미화하려는 편견의 산물이라는 비판이다. 이런 비판이 빗발치는 마당에서도 작가는 "한쪽으로 기우는 배를 바로 잡는다고 짐을 모두 반대편으로 옮기지 말라"는 말로써 페미니즘의 균형을 강조하고 있다.

페미니즘과 反페미니즘의 대결

페미니즘과 反페미니즘의 대결은 언제쯤 결말을 얻을 수 있을까? 온 세상이 모두 남성 아니면 여성뿐인데, 이 대결을 종결지을 수 있는 어떤 '신학적' 논거(論據)는 없는 것인가? 성서학을 전공하는 한 남성으로서 이에 관한 성서적 대답에 귀를 기울여 보고자 한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아담이 홀로 있는 것이 좋지 않으니, 내가 그에게 반대할 수 있는 돕는 배필을 만들 것이다"(창2:18)

인류학자들은 인류 사회에 있어서 가정의 다양한 유형들을 구분하면서, 대체로 부권 중심의 사회와 모권 중심의 사회로 나눈다. 몇몇 학자들의 견해에 의하면, 모계 사회는 경제력이 빈약한 농경 문화와 결부된 것이며, 그 반면에 가축을 기르는 유목 문화는 부권(patriarchate) 제도의 구조를 나타낸다고 하였다. 그들은 일반적으로 원시 사회의 가정 형태가 모계 중심 사회로 시작되어 부계 중심 사회로 진화되어 왔다고 주장한다.

母權이냐 父權이냐

그러나 모권 중심의 제도란 어머니의 권위가 가정의 핵심을 이루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라기 보다는(이런 경우의 고대 사회는 지극히 희귀하다), 친척 관계가 母系를 통하여 결정된다는 사실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 실상 고대 사회의 자녀는 자기 어머니의 사회 집단에 속하는 것이지, 자기 아버지의 그것에 속하지 않았다. 또 모계 혈통에 상속권을 부여하기도 하였다.

구약 성경에 나타난 이스라엘의 가족 제도에 관하여는, 그 가정의 형태가 父權 중심이냐? 아니면 母權 중심이냐? 를 가름하기가 매우 까다롭다. 물론 지파 중심의 공동체였던 이스라엘 사회에 있어서 족장의 부권은 기본적으로 존중되었다. 고대 이스라엘 사회의 족보는 "아버지의 가문"(ࠁࠀ ࠛࠉࠁ)을 중심으로 하여 작성되었으며, 이 경우 여자들은 예외적인 경우에만 언급되고 있다. 또 남편을 "주인"(ࠌࠒࠁ)이라 불러 자기 아내의 "소유권자"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러나 고대 이스라엘 사회에서 모권이 전혀 무시된 것은 아니다. 비록 남편이 아내의 "주인"(ࠌࠒࠁ 혹은 ࠐࠅࠃࠀ)이었으나, 여자의 위치가 노예의 그것과 마찬가지의 것은 결코 아니었다. 남편은 자기의 남종(노예)이나 자기의 딸까지 팔 수 있었지만(출21:7) 자기의 정식 부인을 팔 수는 없었으며, 또 여인은 자기의 남편에게 쫓겨나 일방적으로 이혼을 당할 수는 있었으나 다시 사들여 올 수는 없도록 되어 있다(신21:14).

특히, 성경에서 남녀의 지위에 관한 근거로 제시되는 것 가운데 하나가 성경 안에 나와 있는 여러 남자들의 一夫多妻(polygamies) 현상이다. 아브라함을 비롯하여 야곱, 에서, 기드온, 솔로몬 등이 그들이다. 엄밀한 의미에서 구약 성경은 一夫一妻(monogamies)를 절대적인 제도로 지켜 나가려는 흔적은 없다. 그렇다고 해서 일부다처제를 인정하거나 장려하고 있지 않음 또한 분명하다. 물론 본처에게서 자식이 없는 경우에 첩(妾)을 둘 수 있는 규정은 있으나, 그것이 곧 다처를 법적으로 인정하는 것은 아니었다. 첩들은 본처와 법적인 동등한 권리를 결코 가지지 못한 것에서도 그 근거를 찾을 수 있다. 탈무드에 의하면 일반적으로 개인에게는 4명의 아내를, 왕에게는 18명의 아내를 지정할 수 있도록 하고 있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탈무드 시대의 순전히 이론적인 사고들을 근거로 하고 있을 뿐이다.

우리는 성경의 가정 제도를 말할 때 반드시 고려해야 할 것은, 이스라엘의 가정 제도는 고대 인류 사회가 경험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각 시대의 사회적 특성의 한 부분임을 주의하지 않을 수 없다는 점이다. 다시 말하면 성경의 어떤 인물 가운데 다처(多妻)가 보도된다 하여, 다처 제도(制度)가 곧 하나님의 질서로 인정될 수는 없다는 말이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가장 이상적인 가정의 모형(模型)을 역사의 흐름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되어 온 이스라엘의 사회 구조 속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근본적인 하나님의 창조의 원리에서 찾는 것이 보다 바람직하다는 결론을 얻을 수 있다.

더불어 창조된 남·녀

창세기에서 하나님께서 아담(인간)을 창조하실 때에 남성과 여성(ࠄ࡚ࠗࠏࢮ ࠘ःࢷ, 1:27)을 창조하셨다. 이러한 인간의 性(gender)의 구별은 다른 동물의 창조 이야기에서는 나타나지 않는다. 인간의 성은 그런 의미에서 전적으로 동물의 그것과 다르다. 바로 다음 절(v.28)에서 하나님은 인간(들)에게 복을 주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 하라. 땅을 정복하여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 위에서 살아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려라"고 하셨다(22절과 비교해서 읽을 것).

여기서 남녀는 한 인간의 種으로서 각기 다른 생리와 특성과 습관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동일한 가치를 부여받은 존재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인간은 한 개체가 파괴되는 것이 곧 전체 세계의 파괴와 맞먹는다는 사상을 되풀이하여 깨우치도록 하기 위하여 한 단위(a single unit)로 창조되었다(M. San. 4:5). 동시에 한 인간을 살리는 것은 모든 인간을 살리는 일과 맞먹는 행위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창세기 2장 18절은 하나님께서 직접 "돕는 반대자"를 창조하셨다. 히브리어의 'ࠅࠃࠂࠏࠊ ࠘ࠆࠒ'는 우리말 성경에서 '돕는 배필'(개역 성경), '거들 짝'(공동 번역), '돕는 사람, 곧 그에게 알맞은 짝'(표준 새번역)으로 번역하였으며, 주요 영어 성경에서도 이와 비슷한 뜻의 'a helper fit'(RSV), 'a fitting helper'(JPS)로 각각 번역하였다. 그러나 히브리어의 문자적인 의미는 '돕는 반대자'('help-opposite')라는 뜻이다. 즉 '그(남편)에 반대할 수 있는 돕는 자'를 의미한다.

ࠃࠂࠏࠊ는 성경에서는 유일하게 창세기에서만 두 번 나오며(2:18, 20), 성경 밖의 자료에서는 미쉬나(Mishinah)의 '첨가' 부분인 토세프타(Tosefta)에 다시 나온다. 토세프타에서는 랍비 이스마엘(R. Ishmael)과 엘리자르 벤 아자리야(R. Eleazar b. Azariah)의 이야기 가운데서 이 단어가 나오는데, "ࠎࠉࠛࠉࠇࠚࠍࠄ ࠃࠂࠏࠊ"이라는 표현으로 나온다. 여기서는 "(지저분하게 자란) 수염을 자르려는 자 같은(like those who destroy the beard)"이라는 말로 이해된다. 미드라쉬(Midrash)에서는 이 단어를 명사로 읽어 "적(敵)" 또는 "상대"(adversary)로 해석하고 있으며, 탈굼(Targum)에서는 오히려 특별한 전치사적 의미로 "닮음"(resemblance) 혹은 "비슷함"(similarity)을 일컫는 말로 받아들이고 있다[Shlomo Nach, "ࠅࠃࠂࠏࠊ ࠘ࠆࠒ ,ࠎࠉࠛࠉࠇࠚࠍࠄ ࠃࠂࠏࠊ: Forgotten Meanings and a Lost Proverb," Lesonenu 59(1996), Pp.99-117. (in Hebrew)].

이 말의 뜻을 라시(Rashi)는 설명하기를 "만일 남자가 존경받을 만하면 그의 아내는 '돕는 자'(࠘ࠆࠒ)가 될 것이요, 만일 그렇지 않다면 그녀는 '반대자'(ࠅࠃࠂࠏࠊ)가 될 것이다."라 하였다. 만일 하나님께서 '아담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으시다(ࠅࠃࠁࠌ ࠎࠃࠀࠄ ࠛࠅࠉࠄ ࠁࠅࠈ ࠀࠌ)' 말씀하셨다면 왜 하나님은 단순히 여자를 단순히 '돕는 배필' 혹은 '반대자'를 만들지 않으시고, '돕는-반대자'를 만드신 것일까?

生의 同伴者인 배필(配匹)은 반드시 '예'와 더불어 '아니오'를 할 수 있는 자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help-opposite'의 생각이 NO인데 남편에게 YES만 하도록 만들어 졌다면 그의 생각과 말이 이중적이 되기 때문에 결국은 둘은 하나가 아니라 '또 다른' 하나가 되는 셈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그 아내와 연합하여 (ࠅࠛࠚࠀࠁ ࠗࠁࡼ) 한 몸(ࠃࣈࡒ ࠘৊࡚ࠌ ࢮࠉࢍ)을 이룬다"(창2:24)고 하였다. 한 몸을 이룬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물론 육체적 결합을 전제로 하는 말이지만, 그 이상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부부의 관계는 하나이기 때문에 한 개체의 파괴는 곧 전체의 파괴와 같은 것임과 동시에, 아내는 남편에 대하여 '돕는 반대자'이기 때문에 결국 '예'와 '아니오'를 말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이다.

따라서 모든 부부는 함께 생의 잔을 마시며 살아야 하지만 항상 같은 잔으로 마실 필요는 없는 것이다. 부부는 서로의 잘못을 바로 잡아 가며, 보충하여 완전하게 하며, 서로를 격려하고, 위로할 뿐만 아니라, 서로 돕고 도움을 받으며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홀로'(alone)가 아닌 '하나'(one)가 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여자가 남자로부터"(ࠄ৊ࠀࠌ ࠎࠃࠀࠄ ࠐࠍ, 2:22) 창조되었기 때문에 여자는 남자보다 열등하다거나 남자에게 종속되어 있다는 주장은 그 논리적 근거를 상실하게 된다. 남자와 여자는 하나의 '관계 지워진 존재'로 창조되었으며, 상호 '예'(돕는 자)와 '아니오'(반대자)가 가능한 상대임을 알 수 있다. 한마디로 性이 다르기 때문에 차별 대우를 받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의 원리가 아니다.

건강한 가정의 기초

최근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는 일련의 충격적인 사건, 사고들을 보면서 많은 전문가들은 한결같이 문제의 원인을 가정에서부터 찾으려는 경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사회의 기초가 가정이라는 점에서 그렇게 보는 것 같다. 이러한 주장에는 건강한 가정이 건강한 사회를 낳는다는 전제가 밑바탕에 깔려 있다. 사실 폭력을 휘두르는 가정에서 폭력을 사용하는 각종 범죄자들이 만들어져 가는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다.

그렇다면 좀더 폭을 좁혀 보면 사회의 문제는 부부 관계로부터 시작한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부부는 가정의 가장 기초적인 단위이기 때문이다. 건전한 부부 질서는 건강한 가정을 낳고, 건강한 가정은 곧 건전한 사회를 만든다는 점에서 정상적인 부부의 관계는 그 만큼 중요하다 하겠다. 부부간의 건전한 질서는 곧 건전한 사회의 질서를 회복시켜 줄 수 있는 유일한 길로 통하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한 대로 가장 바람직한 성서의 제안은 부부의 일체감(一體感)이다. 일체감은 각기 다른 성(性)의 차별성(差別性)을 인정하면서도 서로의 동등성(同等性)을 추구하는 것이며, 서로에게 강요 없이 순종(順從)을 명령할 수 있으면서도 구속 없이 거역(拒逆)할 수도 있으며, 나아가 적극적인 찬성과 더불어 건설적인 비판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관계를 의미한다. 이러한 부부 관계는 모든 가정과 사회의 기초 질서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러한 일체감의 질서는 '自由로운 共存'을 기초로 할 때에 가능하다. 자유로운 공존이란 상대방을 위협하거나 방해하지 않으며, 자기와 같이 자유로운 존재로 인정하고, 자유로운 존재로서의 자기 의사(意思)를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여기에는 강자의 위협이나 강제로 종속시키거나 합병하려는 의도(意圖)가 배제되어야 한다.

이러한 질서의 원리는 모든 관계와 사회의 원리로 적용시켜 나갈 수 있는데, 이러한 원리가 적용되는 곳에서는 성차별은 물론 그 어떠한 폭력도 발붙일 수 없는 곳이 된다. 이러한 공존에는 우선 진정한 만남과 대화가 전제되어 있는데, 남녀가 만나고, 부자와 가난한 자가 만나고, 남북이 만나고, 이데올로기가 만나고, 노소가 만나고, 사자와 송아지가 함께 만나는 장소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동등한 인격적 만남 없이는 건전한 사회의 질서란 처음부터 기대할 수 없는 것이다.

또 이 질서 속에서는 '正義로운 協同'이 성립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정의란 곧 평등이다"라고 말하였듯이 평등이란 상대방을 소외시키지 않는 태도를 의미한다. 부부간에 서로 소외됨 없이 협동할 수 있다는 것은 가족 구성원간의 관계 속에서도 같은 원칙으로 존중되어야 하며, 이는 곧 사회 전체의 질서 속에서도 실천되어야 할 원리이다. 공평 자체가 곧 정의에 속하는 내용이 되기 때문에 '자유로운 공존'은 사회 정의의 기본 조건이며, 이는 동시에 협동을 위한 조건이 된다.

마지막으로 이 질서는 '共同的 參與'를 가능케 한다. 여기서 말하는 공동적 참여란 반드시 '자유로운 공존'과 '정의로운 협동'에 관해 깨우친 결과이다. 이는 강요와 체면에 의해 생산된 외형적 힘의 집합만으로는 창출할 수 없는 질적으로 다른 차원의 힘을 창조하는 힘이다. 이 '공동적 참여'는 오만과 이기심을 견제하고 극복하는 가장 현실적인 표현으로써 평화의 한 존재양식(存在樣式)이다.

근본적으로 우리가 이 사회에서 실천해야 할 평화의 모습은 상대방을 위협하지 않는 자유로운 공존, 상대방을 소외시키지 않는 평등한 협동, 그리고 상호간의 오만과 이기심을 극복한 공동적 참여 바로 그 모습이다. 성서는 이스라엘 사회를 지탱해 주고 있는 사회 구조의 핵심으로써 건강한 가정이 예시하고 있다. 가정의 질서는 '배필'의 부부 질서를 중심으로 한 자녀와의 상호 관계를 통하여 유지되었다. 즉 건강한 부권과 모권이 유지되는 사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