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의 정절
"또 일었으되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거든 이혼 증서를 줄 것이라 하였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 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는 저로 간음하게 함이요 또 누구든지 버린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마5:31∼32)."
이 두 구절이 이혼에 관한 많은 우리 주님의 교훈의 총계를 나타내는 것으로 생각될 수 없다. 이러한 구절은 마태복음 19장에 보다 완전하게 기록되어 있는 가르침의 간략한 요약인 듯하다. 우리는 두 구절을 함께 생각하며 긴 구절에 비추어 짧은 구절을 해석하는 것이 현명할 것이다. 다음은 예수님께서 나중에 바리새인들과 논쟁하셨던 말씀이다.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나아와 그를 시험하여 가로되 사람이 아무 연고를 물론하고 그 아내를 내어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사람을 지으신 이가 본래 저희를 남자와 여자로 만드시고 말씀하시기를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하신 것을 읽지 못하였느냐?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니 여짜오되 그러하면 어찌하여 모세는 이혼 증서를 주어서 내어버리라 명하였나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모세가 너희 마음의 완악함을 인하여 아내 내어버림을 허락하였거니와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 외에 아내를 내어버리고 다른 데 장가드는 자는 간음함이니라(마19 : 3∼9)."
우리는 이혼에 관한 지금의 논쟁이 힐렐(Hillel)과 샤마이(Shammai)라는 두 경쟁 랍비 학파 사이에서 벌어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랍비 샤마이는 매우 엄격한 태도를 취했으며 신명기 24 : 1로부터 이혼의 유일한 이유는 중대한 결혼상의 범죄 즉 명백하게 드러난 수치라고 가르쳤다. 한편 랍비 힐렐은 매우 방종한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만약 우리가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를 믿을 수 있다면 이것이 일반적인 태도였다. 왜냐하면 그는 모세의 규정을 어떻게 해서든지 아내와 이혼하기를 바라는 사람에게 적용시켰기 때문이다.1 힐렐은 유사하게 이혼의 이유는 수치가 되는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이 말을 아내의 매우 사소한 허물을 포함하는 가장 넓은 의미로 해석했다. 만약 아내가 음식을 잘하지 못한다거나 음식을 태운다면, 혹은 만약 아내가 예쁘지 않거나 그가 더 아름다운 다른 여자에게 반해 있기 때문에 그가 그녀에 대한 흥미를 랽었다면, 이러한 것들은 수치가 되는 것이었으며 그가 그녀와 이혼하는 것을 정당화하였다. 바리새인들은 랍비 힐렐의 방종에 관심을 갖고 있었던 것 같다. 이것이 그들의 질문이 취했던 형식을 설명해 줄 것이다. "사람이 아무 연고를 물론하고 그 아내를 내어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마19 : 3). 다시 말해서 그들은 예수님께서 그 당시의 논쟁에서 누구의 편에 서시는지 그리고 그가 엄격한 학파에 속하시는지 혹은 방종한 학파에 속하시는지를 알기 원했다.
그들의 질문에 대한 우리 주님의 대답은 세 부분으로 되어 있었다. 이러한 것들을 하나씩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던 순서대로 고려하는 것이 밝혀내는 것이다. 각 부분에서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과 의견을 달리 하셨다.
a. 바리새인들은 이혼의 이유에 몰두했었으나 예수님께서는 결혼 제도에 몰두하셨다.
그들의 질문은, 예수님께서 이혼을 위한 합당한 이유를 말씀하시도록 짜여 있었다. 어떤 이유 때문에 남자는 그의 아내와 이혼할 수 있는가? 한가지 이유 혹은 여러 가지 이유 혹은 어떤 이유 때문에?
예수님의 대답은 그들의 질문에 대한 대답이 아니었다. 그는 그들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으셨다. 대신 그는 그들의 성경 해석에 관하여 반대 질문을 하셨다. 그는 창세기를 언급하시며 인간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신 것과(1장)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되는 결혼 제도를(2장) 말씀하셨다. 이와 같은 성경의 정의는 결혼이 독점적이며(사람이⋯⋯그의 아내와) 영속한다는(그의 아내와 합하여) 것을 뜻한다. 이어지는 그의 말씀에서(19 : 6) 강조하시기 위해 선택하시는 것이 바로 다음과 같은 결혼에 관한 두 가지 면이다. 첫째로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둘째로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이와 같이 결혼의 기원에 관한 우리 주님의 설명에 의하면 결혼은 신적인 제도이며 하나님께서는 이것으로 사회의 새로운 구성 단위를 형성하기 위하여 단호하게 그리고 공개적으로 그들의 부모를 떠난 두 사람을 영속적으로 하나로 만드시며 한몸이 되게 하신다.
b. 바리새인들은 이혼에 대한 모세의 규정을 명령이라고 생각했으나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인간의 마음의 완악함으로 인한 양보라고 생각하셨다.
바리새인들은 결혼 제도와 그것의 영속성에 관한 예수님의 설명에 다음과 같은 반응을 보였다. "그러하면 어찌하여 모세는 이혼 증서를 주어서 내어버리라 명하였나이까?"(19 :7). 산상 설교에 있는 율법 학자의 가르침에 관한 예수님의 인용도 유사하다. "또 일렀으되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거든 이혼 증서를 줄 것이라"(5 : 31).
이러한 두 가지 반응은 모두 모세의 규정을 멋대로 뜯어고친 것이며 성경이 의미하는 것을 바리새인들이 무시한다는 것을 잘 나타내는 것이다. 그들은 마치 이혼 증서를 주는 것이 모세의 규정의 가장 중요한 부분인 것처럼 그것을 강조했으며, 또한 이혼 증서와 이혼을 모세의 명령으로 언급했다.
신명기 24 : 1∼4을주의 깊게 읽어보면 매우 다른 것이 드러난다. 무엇보다도 먼저 전체 단락은 길게 이어지는 조건절에 걸려 있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의역으로 의미를 분명히 드러낼 수 있다. "사람이 아내를 취하여 데려온 후에 만약 그가 그녀에게서 어떤 수치가 되는 것을 발견했다면 그리하여 그가 그녀에게 이혼 증서를 주고 그녀와 이혼하고 그녀가 떠난다면, 그리고 만약 그녀가 다시 결혼한다면, 그런데 그녀의 두 번째 남편이 혹은 죽는다면, 그녀와 이혼했던 첫 번째 남편은 그녀와 다시 결혼하지 못한다⋯⋯" 이 말씀이 주장하는 것은 이혼했던 사람과 다시 결혼하는 것을 금하는 것이다. 이 규정의 이유는 분명하지 않다. 만약 그녀의 수치가 되는 것이 이혼을 위한 충분한 이유가 될 정도로 그녀를 더럽혔다면 그것은 또한 그녀를 다시 데려오지 못할 충분한 이유가 된다는 것인 듯하다. 그것은 또한 일단 결정을 내리면 철회될 수 없기 때문에 성급한 결정을 내리지 말라고 남편에게 경고하려고 했거나 또는 이용당하는 것으로부터 아내를 보호하려 했던 것일 수 있다. 이곳에 우리의 목적을 위해 이러한 금지 명령이 전체 구절에서 유일한 명령이라는 것을 주목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남편에게 그의 아내와 이혼하라고 명령하는 것이나 그렇게 하라고 권하는 것이 전혀 없다. 대신 그 곳에 있는 모든 것은 만약 이혼을 한다면 필요한 어떤 절차에 대한 언급이다. 그러므로 마지못해 허락하는 뜻이 내포되어 있으며 현재의 관행이 묵인된다.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모세의 규정에 관한 바리새인들의 질문에 응답하셨는가? 그는 그것을 사람의 마음의 완악함 탓으로 돌리셨다. 그렇게 하심으로써 그는 그 규정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으셨다. 그렇지만 그는 그것이 신적인 교훈이 아니라 인간의 완악함에 대한 신적인 양보일 뿐이라는 것을 넌지시 말씀하셨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모세가⋯⋯아내 내어버림을 허락하였거니와"(19 : 8)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곧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고 말씀하시면서 하나님의 원래의 목적을 다시 언급 하셨다. 그러나 곧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고 말씀하시면서 하나님의 원래의 목적을 다시 언급 하셨다. 이와 같이 신적인 양보까지도 원칙적으로 신적인 제도와 모순이 되었다.
c. 바리새인들은 이혼을 가볍게 생각했으나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매우 중대하게 생각하셨기 때문에 단 한 가지 경우를 제외한 모든 재혼을 간음이라고 생각하셨다.
이것이 바리새인들과의 그의 논쟁의 결론이었다. 그리고 이것이 산상 설교에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그의 두 말씀을 나란히 살펴보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5 : 32 -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 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는 저로 간음하게 함이요, 또 누구든지 버린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
19 : 9 -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 외에 아내를 내어버리고 다른 데 장가 드는 자는 간음함이니라.
이혼이 이혼한 자들의 재혼을 낳는다는 것을 가정하는 듯하다. 오직 이러한 가정만이 이유 없이 아내와 이혼하는 사람이 그녀를 간음하게 만든다는 말씀을 설명할 수 있다. 만약 그녀가 다시 결혼한다면 그의 행동은 그러한 결과를 낳을 수 있다. 그 외에 이혼하지 않은 별거는 고대 세계에 알려지지 않은 현대의 제도이다.
하나님께서는 결혼을 그가 만드시며 사람이 깨뜨려서는 안 되는 독점적이고 영속하는 결합으로 제정하셨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이혼하고 다른 사람과 결혼하거나 혹은 이혼한 사람과 결혼하는 것이 금지된 불순한 관계에 들어가는 것이라는 필연적인 추론을 끌어내신다. 왜냐하면 인간의 법률이 보는 바로는 이혼을 확보할 수 있었던 사람이 하나님께서 보실 때에는 그의 혹은 그녀의 첫 번째 배우자와 결혼한 상태에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원칙에 단 한 가지 예외가 주어졌다. "음행한 연고 없이"(5 : 32) 혹은 "음행한 연고 외에"(19 : 9). 이른바 예외 조항이라는 것이 잘 알려진 어려운 문제이다. 주석가들은 그것의 확실성과 그것의 의미에 관하여 의견이 일치되지 않는다.
첫째로 그것의 확실성이다. 나는 사실상 보수적인 모든 주석가들이 주장하는 바와 같이 우리가 이 조항을 마태복음의 진정한 부분으로서 뿐만이 아니라 (왜냐하면 그것을 생략하는 사본이 없기 때문에) 예수님의 진정한 말씀으로 받아들여야만 한다는 것을 주장하고 싶다.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마태에 의한 삽입 문구로 생각하며 그것을 거부하는 이유는 그것이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의 병행 구절에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플러머(Plummer)가 이와 같이 예외 조항을 편집상의 해설이라고 쉽게 해치워버리는 것을 "극단적인 가정"이라고 불렀던 것은 적절했다. 마가복음이나 누가복음에 그것이 없는 것은 그들이 그것을 무시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라는 것이 훨씬 더 그럴 듯하다.
결국 모세의 율법 아래서 간음은 사형에 처해야 마땅한 죄였다(비록 이러한 범죄에 대한 사형이 예수님 당시에 폐기되었던 것 같지만).2 그러므로 아무도 결혼상의 부정이 이혼의 정당한 이유라는 것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것이다. 적대 관계의 랍비 샤마이와 힐렐까지도 이것에 관하여 의견을 같이 했었다. 그들의 논쟁은 신명기 24 : 1의 "수치되는 일"이라는 표현이 이것보다 얼마나 더 넓게 해석될 수 있느냐 였다.
예외 조항에 관한 두 번째 의문은 음행이 무엇을 뜻하느냐와 관계가 있다. 헬라어는 포르네이아(porneia)이다. 이것은 보통 결혼하지 않은 자들의 부도덕한 행위를 의미하는 음행으로 번역이 되며 흔히 결혼한 자들의 부도덕한 행위인 모이케이아(moicgeia, 간음)와 구별이 된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만약 어떤 결혼 전의 성적 범죄가 나중에 발견된다면 예외 조항이 이혼을 허용한다고 주장했다. 어떤 사람들은 신명기 24 : 1의 "수치되는 일"이 똑같은 의미를 가졌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헬라어는 이렇게 제한될 만큼 정확하지 못하다. 포르네이아는 창녀라는 포르네(porne)에서 파생되었으며 그녀가 결혼했는지 혹은 결혼하지 않았는지를 구체적으로 나타내지 않는다. 더 나아가서 그것은 70인 역에서 호세아의 아내 고멜로 예증되는 바와 같이 여호와의 신부 이스라엘의 부정을 나타내는데 사용된다(호 1 : 2,3 ; 2 :2,4). 그러므로 우리는 포르네이아는 결혼한 사람의 간음이나 결혼하지 않은 사람의 간음이나 남색을 포함하는 포괄적인 말이라는 타스커의 결론에 동의해야만 할 것 같다. 동시에 우리는 정반대의 극단으로 흐르며 포르네이아가 어떤 막연한 의미에서 성적인 근거를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는 모든 범죄를 포함한다고 주장할 권리도 없다. 이것은 사실상 포르네이아를 불일치와 동일시하는 것이 될 것이며 이것에 대한 어원적인 근거는 전혀 없다. 그렇다면 포르네이아는 성적으로 부도덕한 행위인 음행을 뜻한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무엇을 가르치셨는가? 스톤하우스( N. B. Stonegouse)는 산상 설교의 대구의 처음 부분에 대한 훌륭한 의역을 다음과 같이 제공한다. "너희는 남편들이 그들의 뜻대로 자유롭게 아내와 이혼하도록 허락하는 정책을 구체화하기 위하여 유대의 선생들이 신명기 24 : 1에 호소하는 것을 들었다-단순히 적당하게 입증된 사건 서류를 아내에게 제공함으로써."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남편의 그와 같은 무책임한 행동은 그와 그의 아내와 그들의 두 번째 배우자를 결혼이 아니라 간음이 되는 결합으로 이끌 것이니라"고 계속해서 말씀하셨다. 이러한 일반 원칙에 한 가지 예외가 있다. 일곱 번째 계명을 범하지 않고 이혼과 재혼이 가능할 수 있는 유일한 상황은 어떤 중대한 성적 범죄에 의해 그것이 이미 깨어져 버렸을 때이다. 이러한 경우에만 이혼은 허용될 수 있다. 즉 적어도 죄가 없는 상대방이 더 이상 간음의 오명을 쓰지 않고 그것을 얻게 될 수 있다고 예수님께서 가르치셨던 것 같다. 결혼상의 범죄보다는 회복할 수 없는 붕괴 즉 결혼의 파멸에 근거하여 이혼에 대한 법률을 만드는 서구 나라의 현대적인 경향이 보다 훌륭하고 보다 공정한 법을 만드는데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이 예수님의 가르침과 모순되지 않는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제는 거기에서 끝날 수 없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왜 이와 같이 원하시지 않는 허락을 하시는지를 깨달아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밖에 또 그러한 허락은 언제나 그것의 가까운 상황(하나님의 뜻 안에서 결혼의 영속성에 대한 그리스도의 강조적인 지지)과 화목의 복음을 선포하는 산상 설교와 성경 전체의 보다 넓은 상황으로 이해되어야만 한다. 하나님께서 기꺼이 그의 부정한 아내 이스라엘을 다시 돌이키려고 하셨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지 않은가?(참조. 렘 2 : 1, 3 : 1, 4 : 1 ; 호 2 : 1∼23). 따라서 누구나 이혼의 합법성에 관하여 물으며 이러한 주제에 관한 논의를 시작해서는 안 된다. 이혼의 근거에 몰두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정죄하셨던 바로 그 바리새주의의 죄를 범하는 것이다. 랍비들과의 논쟁에서 강조하신 모든 것 즉 하나님께서 제정한 결혼 제도의 독점적이며 영속적인 관계와 하나님께서 두 사람을 사람이 깨뜨려서는 안되는 결합으로 멍에를 메게하신 것 그리고 서로 사랑하고 용서하며 싸움과 불화의 모든 상황에서 화평케 화는 자가 되라고 하신 그의 강조는 명확했다. 크리소스톰은 적절하게 이 구절을 팔복과 연결시키며 그의 설교에서 그것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온유하고, 화평케 하며, 심령이 가난하며, 긍휼히 여기는 자가 어떻게 그의 아내를 내어쫓을 수 있는가? 늘 다른 사람들을 화목케 하는 자가 어떻게 그의 아내와 불화할 수 있는가?" 이러한 신적인 이상과 목적과 요구에 의하면 이혼은 다만 비극적인 타락으로 간주될 수 있을 뿐이다.
따라서 그리스도교의 목사로서 개인적으로 말하자면 누군가가 나와 이혼에 관하여 이야기하기를 청할 때마다 나는 그렇게 하는 것을 여러 해 동안 단호히 거부해 오고 있다. 나는 누구와든지 먼저 다른 두 가지 주제 즉 결혼과 화목에 관하여 이야기하기 전에는 그와 (혹은 그녀와) 이혼에 관하여 결코 이야기하지 않기로 하였다. 때때로 이러한 주제에 관한 논의가 다른 불필요한 논의를 일으킨다. 적어도 사람이 결혼에 관한 하나님의 견해와 화목하라는 하나님의 요구를 이해하고 받아들일 때에만 누구나 슬퍼하며 이혼에 관하여 계속해서 이야기할 수 있는 가능한 상황이 일어나게 되었다. 나는 이러한 목사의 우선권적인 원칙이 예수님의 가르침과 일치한다고 믿는다.3
각주 : 1. Antiquities, Ⅳ. ⅷ. 23.
2. 신 22 : 22, 요 8 : 1∼11. 라드(G. E. Ladd)는, "구약은 간음을 사형으로 정되했 다. 신약은 간음자가 죽은 자로간주되어야 하며 죄가 없는 상대방은 마치 그의 배우자가 죽은 것처럼 그의 결혼 서약에서 벗어나게 된다고 말한다"라고 말했다.
3. 성경 자료에 더 충실한 연구에 관해서는 저자의 저술인 "이혼에 대한 성경적인 가르침"(Divorce: the biblical teacging- Falcon, 1972)을 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