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락 박사
- 한신대학교 -
1. 문제점
유대인들은 선민의식(選民意識)이 투철하였다. 그들을 하나의 민족 공동체로 결속하고 지탱해 준 근본적인 힘은 지기들은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은 특별한 민족이라는 정체의식(正體意識)이었다(신 26:5-9 참조). 유대인들은 인류를 양분(兩分)할 때에 유대민족과 이방민족들로 가르는 이분법을 사용하였다. 오늘날 기독자들은 어떠한가? 기독자들이 그들의 신앙을 기준으로하여 인류를 양분한다면 기독자들과 비기독자들로 나눌 것이다. 기독자란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다. 기독자들의 정체의식에는 '믿다'라는 개념이 절대적인 자리를 차지한다. 신약성서에서는 '믿다'와 '믿음'이라는 용어가 기독자의 정체를 기술하는 핵심적 개념으로 사용되었다. 신약성서에서 'ՐՉՓՔՅՕՙ'(믿다)와 'ՐՉՓՔՉՒ'(믿음)이 사용된 회수는 각각 248번, 244번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구약성서[한글개역판]에서는 '믿음'이라는 명사는 단 한 번(합 2:4) 사용되었을 뿐이며 '믿다'라는 동사는 61번이지만 '믿다'의 대상을 여호와 하나님으로 한 것은 9번(창 15:6; 민 14:11; 20:12; 신 1:32; 9:23; 왕하 17:14; 시 78:22; 사 43:10; 욘 3:5. 절대적 용법으로 사용된 곳은 시 116:10; 사 7:8. 그밖에 시 27:13; 78:32; 106:12; 119:66에는 각각 '여호와의 은혜 볼 것', '그의 기사', '그 말씀', '주의 계명'이 목적어로 되어 있음) 정도이다. 신구약성서 사이에 왜 이러한 차이가 생겼으며 그 결과로 기독교에 어떠한 변화가 일어나게 되었는가?
2. 하나님과 유대민족의 관계
하나님과 유대민족 사이에 이미 성립된 관계는 구약성서의 기본 전제이다. 이 관계를 언약(言約)이라 한다. 이 언약은 요약하면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에게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된다"는 선언으로 성립되었다. 구약성서의 모든 이야기와 진술은 이 언약을 바탕으로 하여 전개된다. 구약성서는 이 언약이 어떻게, 어떠한 근거로 성립되는가를 다루지 아니한다. 구약성서는 이미 성립된 이 언약이 어떻게 유지될 수 있으며 역사적으로 이스라엘 민족이 이 언약을 어떻게 배반했는지를 기술한다.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에 대하여 취하는 태도는 이 언약에 충실한가 불충실한가 하는 사실로써 표출된다. 따라서 구약성서에서는 '순종하다'와 '거역하다'(또는: '배신하다')라는 용어가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태도를 나타내는 주요한 개념으로 사용된다. 이스라엘 민족에게 있어서 하나님이 그들을 자기 백성으로 선택하시고 구원해 주셨다는 것은 과거의 경험에 속한다. 히브리어에서 '알다'라는 동사는 단순히 지적인 인식을 뜻하지 않고 경험적, 총체적 인식을 뜻한다. 이스라엘이 그들의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취해야 할 첫 번 째 태도는 하나님이 그들의 조상에게 베푸신 구원 사건과 여호와가 그들의 하나님이심을 아는 것이다(대략 150번 이상 사용됨). 이와 관련하여 과거의 구원을 환기시키기 위해서 '기억하다'라는 동사도 자주 사용하였다(약 30번 사용됨). 구약성서는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요구하시는 뜻은 그의 율법과 계명에 구체적으로 표시되었다고 보므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율법과 계명을 지키느냐가 이스라엘의 하나님에 대한 태도를 판가름하는 주요한 기준으로 제시하였다.
3. 구약성서에 사용된 '신뢰하다', '의뢰하다', '의지하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인격적 관계를 묘사함에 있어서 인간 쪽의 태도를 표시하는 낱말로 구약성서는 '신뢰하다', '의뢰하다' 또는 '의지하다'를 사용한다. 개역성경에 의거하면 구약성서에서 '신뢰하다'는 동사는 4번(대하 20:20; 시 32:10; 사 30:15; 렘 39:18), '의뢰하다'는 약 33번(삼하 22:30; 왕하 18:22,30; 19:10; 대상 5:20; 시 4:5 등등), '의지하다'는 약 60번(삼상 23:16; 왕상 18:22; 왕하 18:5; 대하 13:18 등등) 사용되었다. 이 세 동사는 거의 다 히브리어 '바타'를 번역한 것이고 역대기하 20장 20절은 히브리어 '해애민'의 번역이다. 신뢰, 의뢰, 의지는 관계적 개념이다. 신뢰, 의뢰, 의지의 관계는 한 쪽에서 다른 쪽에 대하여 신뢰, 의뢰, 의지의 태도를 정함으로써 성립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신뢰, 의뢰, 의지를 받을 만한 자격을 다른 쪽에서 구비되어 있음이 전제되어야 한다. "사람은 하나님을 신뢰해야 한다"는 표현 속에는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태도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신실하심, 즉 하나님은 신뢰받으실 분이시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4. 구약성서에 사용된 '믿다', '믿음'
구약성서에서 '믿다'가 하나님을 목적 어로하여 사용된 경우에는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인격적 신뢰 관계를 나타내므로 '믿다'는 '신뢰하다', '의뢰하다', '의지하다'와 동의어이다. 그러나 창세기 45장 26절, 출애굽기 4장 1, 5, 8, 9, 31절, 14장 31절, 19장 9절에 사용된 '믿다'는 아무개의 말이나 어떤 일을 '사실로 인정하다'(für wahr halten)를 뜻한다. 신약성서의 '믿다'와 관련해서 특히 중요한 것은 창세기 15장 6절이다.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었다"는 말은 아브람이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주신 약속이 이루어진다는 것 또는 하나님은 그러한 약속을 이루실 분이시라는 것을 믿었다는 뜻이다. 세속 헬라어에서 '신들을(3격) 믿다'는 표현은 신들의 존재를 믿는 것을 뜻한다. LXX에서 이 구절이 3격으로 표현되었지만 세속 헬라어의 뜻을 뛰어넘고 있다(약 2:19 비교).
개역성경으로 구약성서 가운데 유일하게 하박국 2장 4절에 '믿음'이라는 명사가 사용된 것은 신약성서 가운데서 로마서 1장 17절, 갈라디아 3장 11절, 히브리 10장 38절에 인용된 구절의 번역문이 구약번역에 투사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하박국 2장 4절의 '믿음'은 히브리어로는 '애무나'이다. '매무나'는 무슨 뜻인가? '애무나'는 관계 개념이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나타내는 경우에 '애무나'는 인간 쪽의 태도를 표시하는 말로 사용되기도 하며 또 하나님 쪽의 처신을 표시하는 말로 사용되기도 한다. 전자의 경우에는 '신뢰'를 뜻하며 후자의 경우에는 '신실성'을 뜻한다. 어느 쪽이든 간에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견고한 관계가 성립되어 있음을 표시하는 데는 아무 차이가 없다. 다만 전자는 인간 쪽의 측면을, 후자는 하나님 쪽의 측면을 드러낸다. 하박국 2장 4절의 '애무나'는 누구의 '애무나'인가? 이것은 결정하기가 매우 어렵다. 히브리어 성경에는 '그의 애무나'라고 표현되었으며 LXX에는 '나의 애무나'로, 신약성서의 인용문에서는 소유격을 제거하고 그냥 '피스티스'[믿음]이라 하였기 때문이다. 바울은 이 구절을 그의 의인론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인용했다. 바울은 구약성서를 인용할 때에 LXX 본문을 사용했다. 그러나 바울은 여기서 LXX 본문을 따르지 아니했다. 이 이유는 아마 그것이 그의 의인론 이론에 잘 부합되지 아니하기 때문일 것이다. 히브리어 본문을 인용하지 아니한 이유는 아마 다른 곳에서 LXX 본문을 일관되게 인용했디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복합적인 사정을 고려하여 그는 소유격을 제거하고 인용했을 것이다.
예언자 하박국이 활동한 시기를 약 BC 600년경으로 잡는다면 그 때는 이스라엘 백성은 아시리아 제국으로부터 위협과 압제를 받으면서 절망에 빠져 있던 시기이다. 이 절박한 상황 가운데서 하박국은 다음과 같이 하나님께 안타깝게 항변한다.
"어느 때까지리이까? 내가 강포를 인하여 외쳐도 주께서 구원치 아니하시나이다.
....
어찌하여 궤휼한 자들을 방관하시며 악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사람을 삼키되 잠잠하시나이까?
....
그가 그물을 떨고는 연하여 늘 열국을 살육함이 옳으니이까?"
(합1:2,13,17)
그러면서 하박국은 성루에 올라가서 하나님의 대답을 애타게 기다린다. 이 때에 하나님께서 하박국에게 다음과 같이 대답하셨다.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 고 정녕 응하리라.
....
그러나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합 2:3,4).
이것은 절망적인 상황 가운데서도 절망하지 않고 끝까지 하나님의 구원을 참고 기다리는 사람 은 살 것이라고 하는 구원의 소식이다. 히브리어 성경에 이 '믿음'에 해당하는 '애무나'라는 낱말은 다른 곳에서는 '성실', '신실', '진실', '진리', '미쁘심'(공동, 표준)이라는 개념으로 번역되었다(신 32:4; 시 33:4; 37:3; 96:13; 98:3; 100:5; 119:30; 잠 12:17; 사 59:4; 렘 5:1; 7:28; 삼상 26:23; 시 40:10; 88:11 등등).
"의인은 나의 믿음으로 살 것이다." <히브리어 성서>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살 것이다." <LXX>
히브리어 성경에 나타나 있는 '나의 믿음'이라는 표현은 '하나님의 신실성'을 뜻한다고 할 것이다. 즉 의인은 하나님이 그의 계약 백성에게 약속을 지키시는 신실성에 근거하여 살 것이고 하는 말이다. 헬라어 성경에 나타나 있는 '그의 믿음'이라는 표현은 '의인의 성실성' 즉 의인이 하나님의 약속에 매달리는 신실성을 뜻합니다. '하나님의 신실성'과 '의인의 신실성'은 별개가 아니고 같은 일의 양면을 각각 나타낸다고 할 것이다. 즉 의인의 신실성은 인간학적인 어떤 독립된 덕목이 아니고 하나님의 신실성에 대하여 응답하는 태도를 가리킨다. 바울은 이 말씀을 인용할 때에 히브리어 본문과 70인역 본문 사이에 양자책일(兩者擇一)을 하지 않고 그 대신에 소유격 대명사를 생략하고서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라고 인용했다. 이 말씀을 윤리적 가르침으로 해석하는 것은 잘못이다. 즉 죄인이나 악인이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인으로 인정을 받고 그리하여서 참된 삶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가르치는 말씀이 아니다. 신약성서에서 '믿는 사람들' 또는 '성도들'이라고 지칭되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구원 사건의 수혜자들을 가리키듯이 구약성서에서는 '가난한 사람들' 또는 '의인'은 하나님의 구원 행위의 대상자들을 가리킨다. 하박국서에서 '의인'이라고 지칭된 이 사람은 사회적 무관계 속에 서 있는 단독자(單獨者)가 아니고 대립과 갈등 관계의 회오리 속에 휘말려 있는 역사적て사회적 존재이다. 이 사실은 하박국서에서 이 의인과 대립관계에 서 있는 자들을 다음과 같이 여러 가지 명칭으로 지칭하는 데서 잘 드러난다.
'악인','사납고 성급한 백성', '땅의 넓은 곳으로 다니며 자기의 소유 아닌 거할 곳들을 점령하는 갈대아 사람들', '그 힘으로 자기 신(神)을 삼는 자', '사람을 바다의 어족과 주권자 없는 곤충 같게 하는 자', '낚시와 그물과 초망으로 사람들을 잡는 자', '기뻐하며 그 그물에 제사하며 초망 앞에 분향하는 자', '그 그물을 떨고는 연하여 늘 열국을 살육하는 자', '궤휼하며 교만하여 가만히 있지 아니하고 그 욕심을 음부처럼 넓히는 자', '사망 같아서 족한 줄을 모르고 자기에게 만국을 모으며 만민을 모으는 자', '자기 소유 아닌 것을 모으는 자', '볼모잡은 것으로 무겁게 짐진 자', '여러 나라를 약탈한 자', '사람의 피를 흘린 자', '모든 거민에게 강포를 행한 자', '재앙을 피하기 위하여 높은 데 깃들이려 하며 자기 집을 위하여 불의의 이를 취하는 자', '여러 민족을 멸한 자', '피로 읍을 건설하며 불의로 성을 건축하는 자', '짐승을 두렵게 하여 잔해한 것 곧 사람의 피를 흘리며 땅과 성읍과 그 모든 거민에게 강포를 행한 자' 등등으로 지칭되었다. '의인'은 위에 서술한 것과 같은 그러한 악인에게 마구 짓밟히면서도 절망하지 않고 하나님의 구원을 믿고 기다리는 사람을 가리킨다. 이러한 사람은 현재의 극악한 상황 속에서도 절망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이 펼치실 미래를 성실하게 바라본다. 이러한 믿음을 가진 사람만이 살아남을 수 있다.
5. 신약성서에 사용된 '믿다'와 '믿음'
신약성서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관심의 핵심으로 되어 있다. 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인격과 그의 구원 사역에 대하여 인간이 취할 근본적 태도를 표현하는 데 '믿다'라는 동사가 압도적으로 사용되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