ㅑ 약어표기 \

ㅑ 책머리 \

서론 ㅱ. 목적과 방법 \

제1부 ㅱ. 민중신학의 형성 \

제1장. 전사 \

1. 수난과 저항의 한국 민중사 \

1.1. 1945년 해방과 반공-냉전 이데올로기 시대의 개막 \

1.2. 1960년대, 군사파시즘과 반민중적 경제개발정책 \

1.3. 전태일 사건과 역사 주체로서의 민중의 등장 \

2. 한국 그리스도교사 \

2.1. 민족 수난기의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민족의식 \

2.2. 함석헌 사상의 영향 \

2.3. 토착화신학, 세속화신학, '하느님의 선교'신학 \

2.4. 한국 그리스도교의 사회선교 \

제2장. 1970연대, 민중신학의 성립

1. 인권과 민주주의를 위한 1970년대: 민중신학 성립기

1.1. 민중사건의 화산맥.―.하느님의 선교(1)

1.2. 신학자들의 증언.―.하느님의 선교(2)

2. 민중신학의 성립

제3장. 신학자들

1. 서남동

2. 안병무

3. 신학자들과 민중신학

제4장. 민중

1. 역사에 있어서의 민중

1.1. 1919년 3.1운동 이전까지의 민중ㅗ민중의식의 형성

1.2. 1945년 해방까지의 민중ㅗ민중의식의 형성

2. 현실에 있어서의 민중.―.민중 생활의 현주소

2.1. 장영근(농민)

2.2. 조만영(노동자)

2.3. 이옥순(도시빈민)

2.4. 전태일 사후 12년, 평화시장 여성노동자들의 상황

2.5. 분단 시대 민중의 비극적 삶

3. 주제로서의 민중.―.민중신학의 민중 이해

3.1. 민중신학의 주제 민중

3.2. 민중신학의 민중관

3.3. 민중의 '한'

3.4. 민중의 '메시아성'

제2부 ㅱ. 민중신학의 전개

제5장. '사건'과 '합류'의 해석학

1. 사건

2. 합류

2.1. 합류와 증언

2.2. 합류의 범례 : 김지하의 장일담 이야기

2.3. 민중신학의 한 패러다임으로서의 합류의 의미

2.4. 성령론적 공시성의 원리

3. 전거

4. 민중의 언어, 민중신학의 언어

4.1. 민중의 언어

4.2. 유언비어

4.3. 기적 이야기

4.4. 민중의 사회전기

4.5. 민중신학의 언어 : 민담의 신학.―.반신학

4.6. 탈신학적 민중신학의 언어 이해

5. 계시의 하부구조 : 민중신학에 있어서 '한국적'의 의미

제6장. 성서와 민중

1. '민중의 눈으로'

2. 성서의 재발견

3. 성서의 해방

4. 예수사건과 그 전승주체

4.1. 문제제기

4.2. 케리그마의 성격

4.3. 예수사건 전승의 성격

4.4. 그 민중신학적 의미

5. 예수사건의 전승주체 분석의 민중신학적 의미

제7장. 1980연대 이후의 민중신학의 전개

1. 상황의 변화

2. 운동의 신학으로서의 민중신학

3. 민중교회 운동

4. 민중신학의 자기성찰과 전망

4.1. 1980년대에서 바라본 1970년대 민중신학

4.2. 비평의 올바른 관점

4.3. 민중교회의 선교 경험으로부터 본 민중신학

결론 ㅱ. 본질과 구조, 그리고 전망

ㅑ 참고문헌 \

서 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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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적과 방법

1. 목적

1970년대에 출현한 민중신학은 한국 그리스도교 1백여 년의 역사에 있어서 가장 빛나는 신학적 성과로 꼽힌다. 민중신학이라는 자기 자신의 신학을 가지게 됨으로써 한국 그리스도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역사적 현실과 문화적 전통에 튼튼히 발딛고 선 신앙의 정체성(identity)을 확립하게 되었다. 민중신학은 성서 및 그리스도교의 민중전통과 한국사의 민중전통이라는 두 갈래 전통의 흐름이 1970년대 한국 민중의 민주주의와 인권을 위한 투쟁 현장에서 하나로 합류(合流)하였음을 증언한다. 한국의 일부 그리스도인들은 민중신학의 이러한 증언을 그리스도 교회의 신앙고백으로 받아들임으로써, '그리스도인'이면서 동시에 '한국인'일 수 있는 새로운 길이 활짝 열리게 되었다.

과거에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과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은, 문화적인 면에서는 물론이고 사회정치적 면에 있어서도 하나로 일치되지 못하고 서로 갈등하는 관계에 있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먼저, 한국인으로서의 문화전통으로부터 단절 또는 분리됨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리스도교 문화에 몸담고 사는 것 자체가, 자신이 의식하든 않든 간에, 한국인으로서의 문화적 정체성을 상실 내지 손상 당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민중신학자 안병무의 극적 표현을 빌린다면,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한국인으로부터 그리스도인으로의 '전향'(轉向)이었다.

비단 문화적인 삶에 있어서만이 아니었다. 사회정치적 관계에 있어서도,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사회의 기층을 이루고 있는 민중의 편에 서기보다는 그 반대쪽, 즉 민중을 억압하고 수탈하는 편의 이해 관계와 사회정치적 견해를, 적극적이거나 소극적이거나 간에, 지지하고 따르는 것을 의미했다. 그렇게 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바른 신앙 자세요 본분이라고 교회로부터 주입당해 왔던 것이다.

그런데, 민중신학은 이러한 신앙 이해를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1970년대 한국 민중의 현장에서 '민중의 눈으로' 성서를 새롭게 읽음으로써, 민중신학은 그리스도교의 기나긴 역사에서 망각되고 은폐되어 온 민중의 복음이라는 성서의 진면목을 밝혀 드러내 놓게 되었다. 성서 속의 민중과 오늘의 민중이 '하느님의 선교'의 장에서 서로 어우러져, 사회정치적 차원에서만이 아니라 사상 문화적 차원에서도, 하나의 민중전통으로 합류하여 오늘 여기에 현존하는 것을 증언하게 된 것이다. 민중신학은 또한 그리스도교 교회사의 전통 안에서도 민중의 해방과 구원을 이룩해 가시는 하느님의 영의 활동이 일관되게 이루어져 왔음을 확인하고, 이 교회사의 민중전통의 흐름이 한국 민중사의 민중해방 전통과 합류하고 있음을 증언하고 있다.

민중신학은 바로 그러한 증언을 자신의 임무와 과제로 삼는 신학이다. 본 연구는, 서구의 주류신학으로부터의 탈출을 주제와 방법 양면에서 성취하여 탈서구-아시아 신학으로서의 위치를 정립해 가고 있는 한국 민중신학의 '주제들'과 '방법론적 특질', 그리고 '내적 구조'를 해명해 보려는 시도다. 본 연구는 또한, 민중신학을 1990년대의 변화된 상황에서 반성적으로 성찰하고자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민중신학의 본질적 가치와 보편적인 생명력을 새롭게 조명하여 더욱 선명하게 드러내 줌으로써 이 신학이 1970년대와 1980년대의 신학에 머무르지 않고 1990년대 이후의 신학으로서도 의연히 그 유효성을 견지하고 있음을 밝히는 한편, 민중신학에 주어지고 있는 비판의 소리에도 귀를 기울이면서 수정 보완해야 할 점들을 찾아내고 그 해결 방도를 진지하게 궁리해 보아야 할 것이다. 이것은 민중신학이 금후 '아시아의 신학'으로, 나아가서는 '21세기의 지구촌 신학'으로 전개될 수 있는 가능성을 모색하는 일이 되기도 할 것이다.

2. 방법

민중신학이라는 매우 독창적인 그리스도교적 사상은 '1970년대'의 한국 현대사를 무대로 하는 창조적 사고의 소산이다. 민중신학에 대하여 말하려고 하면 응당 인권과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의 1970년대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1970년대와 민중신학은 마치 심장과 혈액의 관계처럼 서로 떼어놓을 수 없이 밀착되어 있다. 이 점에서 민중신학은 1970년대 한국사회를 장(場)으로 한 현장의 신학이라고 말할 수 있다. 누구든지, 언제 어디서든지, 민중신학을 옳게 이해하고자 한다면, 반드시 한국 현대사의 인권과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의 1970년대로 돌아가 보아야 한다.

1970년대에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수많은 역사적 사건들이 하루가 멀다하고 끊임없이 터져 나왔다. 하나하나의 사건이 그 규모나 질에 있어서 거대한 산봉우리에 비유될 만한 것이었고, 따라서 1970년대는 그러한 사건들의 험산준령으로 이루어진 웅대한 산맥이었다. 전태일 분신 사건(1971년), 경기도 광주 대단지 주민 폭동사건(1971년), 7.4남북 남북공동성명(1972년), 박정희 정권의 10월유신 선포(1972년), 남산 부활절 연합예배 사건(1973년), 대통령 긴급조치 1ㅗ2호 발동(1974년), 민청학련 사건(1974년), 인혁당 사건(1975년), 김상진 자살 사건(1975년), 긴급조치 9호 발동(1975년), 3.1 민주 구국선언 사건(1976년), 크리스챤 아카데미 사건(1979년), 여성근로자 결사항쟁 사건(YH 사건; 1979년), 박정희 피격 암살 사건(1979년) 등등, 1970년대 한국 민중사의 사건들의 현장에 돌아가, 거기에 두 발을 튼튼히 딛고 서서 '민중신학이란 무엇인가'를 숙고해 보아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1970년대 한국 민중사의 심장부에 뿌리내린 그리스도교 신학의 한 그루 푸른나무인 민중신학의 생명성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 그런 뜻에서, 나는 1970년대는 민중신학을 해명하는 해석학적 열쇠라는 것을 강조하고자 한다.

그 시대는 박정희 유신 군부독재의 불의와 폭압에 신음하는 민중이, 문자 그대로 "의에 주리고 목말라하면서", 한 시대의 종말과 새 역사의 개벽을 일일천추(一日千秋) 갈구해 마지 않았던 묵시적 정황이었다. 따라서 민중신학에서 이 1970년대라는 역사적 콘텍스트를 사상(捨象)하거나 1970년대가 지니는 해석학적 의미를 약화시킨 채, 단지 신학의 내재적 논리에 치중하여 접근하는 방식은 하나같이 이 새로운 신학의 뿌리에 해당하는 요소를 놓치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민중신학의 '본질'과 '내적구조'를 파악해 보려는 본 연구는, 무엇보다도 먼저 1970년대 한국 민중사의 심장부로 되돌아가려는 '귀향'과 '회상'의 작업으로부터 출발하지 않으면 안된다. 따라서 필자는 이 책의 전반부에서 한국사회의 민주화와 인권을 위한 투쟁의 1970년대가 살아 숨쉬는 현장으로, 최선을 다한 복귀를 시도할 것이다. 그렇게 하는 것은 민중신학의 본질을 밝히려는 이 책의 목적에 부합하는 방법론의 일부이기도 하다.

그런데, 필자에게 있어서 1970년대로의 귀향은, 1970년대의 전 기간을 감옥 안에서 보낼 수밖에 없었던 필자 자신의 특이한 개인사와 불가분 얽혀 있는 1970년대 한국 민중사로의 회상의 여정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 연유로, 나는 이 책에서 불가피하게 자신의 감옥살이 경험을 언급하게 될 것인데, 이것은 '민중의 자술적 이야기'와 '두 이야기의 합류'라고 하는 민중신학 방법론을 적용해 보려는 시도이기도 하지만, 이 책에서 전개하고자 하는 신학적 주장이 필자 자신의 개인사적 특성과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다음으로, 이 연구서의 방법론상으로 또 하나의 구상은 '신학자 탐구'라는 것이다. 진정한 의미에서 신학의 영위(doing theology)는 신학자의 삶과 일체를 이루고 있는 것이어서 양자를 분리해 버리면 어느 쪽도 그 실체가 진실하게 규명되지 않는다고 나는 믿고 있다. 신학과 개인사의 이러한 밀접한 연관성은, 이 책에서 집중적으로 분석 검토할 한국 민중신학의 대표적 두 신학자, 서남동과 안병무의 신학에 있어서도 그대로 타당하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이 책에서는 이 두 신학자의 개인사와 특이한 인격과 개성, 그리고 그것과 무관하지 않은 그들의 신학적 편력을 자료가 허락하는 한 추적할 것이며, 이러한 탐구가 그들의 신학의 주제 및 방법에 관한 고찰과 서로 분리되지 않고 유기적으로 결합되도록 노력할 것이다.

'1970년대'와 '한국 민중의 수난'이 없었더라면 민중신학은 형성되지 않았을 것이다. 실로, 1970년대라는 역사적 시대는 민중신학이라는 생명이 잉태된 '태'였다. 그런데, 여기서 간과되어서는 안될 것은, 1970년대 역사가 있고 민중의 수난이 있었어도 만일에 그 시대에 서남동, 안병무와 같은 신학자가 없었더라면 민중신학은 태어나지 못했을 것이라는 또 하나의 진실이다. 신학자 탐구는 그래서 중요하다. 그 두 신학자를 탐구함에 있어서도 그들의 독특한 개성과 실존적 삶의 자세, 그들의 인생 체험이 모두 다 중요하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그들이 쌓아 온 신학적 훈련(theological disciplinary)이다. 1970년대 한국 그리스도교는 서남동과 안병무라는 두 사람의 잘 준비된 창조적 신학자를 가지고 있었다. '잘 준비된 창조성'이라는 말의 뜻은, 그들이 현대 서구신학의 진보적 정수(精髓)를 사상과 방법의 양면에서 두루 체득하고 있었으며 그것을 가지고 자기 자신의 새로운 신학을 창출해 낼 수 있을 만큼의 역량을 갖추고 있었다는 것이다. 탈서구신학, 반신학이라는 민중신학의 슬로건에도 불구하고, 1970년대의 민중사건을 그리스도 사건으로 읽을 수 있었던 그들의 신학적 통찰력은, 그리고 '성서 및 교회사의 민중전통과 한국사의 민중전통이 1970년대 신의 선교(Missio Dei)에서 합류했다'는 식의 발상법은 기본적으로 그들이 갈고 닦은 서구 신학의 훈련에 힘입은 것이었다. 그렇게 준비된 그들의 신학적 상상력이 1970년대와 만났을 때, 거기에서 새로운 신학의 창조적 불꽃이 일어났던 것이다. 신학자는, 1970년대가 그러하듯이, 민중신학 연구에서 또 하나의 '방법론적 열쇠'인 것이다.

세번째로, 그러나 민중신학을 이야기할 때 가장 으뜸자리에 놓아야 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민중 그 자체다. 민중의 수난과 절규, 그리고 민중 자신의 해방의 몸부림이 그리스도인들과 신학자들의 양심을 깨어나게 했고, 그들로 하여금 '민중의 눈으로' 성서를 다시 읽고 세상을 다시 보게 하였던 것이다. 드디어, 신학자들은, 오늘의 신, 오늘의 예수 그리스도는 민중 안에, 민중과 더불어, '예수민중'으로 현존하며, 이 사실을 증언하고 해석하는 것이 신학의 사명이라는 새로운 인식에 도달하게 되었던 것이다. 여기서, 민중은 이제야 그리스도교 신학의 주제가 된 것이다. 이 책은 민중신학의 주제인 민중을 한국 기층 민중의 자술적 이야기들을 통해서 밝히려고 할 것이다. 민중이 어떻게 신학의 주제가 될 수 있었으며, 그 신학적 함의가 무엇인가를 '민중의 한(恨)', '한의 속량적 성격', '민중의 메시아성' 등을 통해 밝힐 것이다.

다음으로는, 성서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민중과 성서의 관계다. 결론을 앞당겨 말하면, 성서는 민중의 책이고, 민중은 성서의 주제이며, 성서의 민중은 오늘의 민중을, 오늘의 민중은 성서의 민중을 비춰 주며, 그 둘은 오늘의 신의 선교 곧 예수민중운동에서 합류하고 있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사건, 합류, 전거, 성서의 맥, 성령론적 공시성, 민중언어(이야기), '한국적' 등의 해석학적 패러다임을 해명하는 가운데 민중신학의 내적 구조를 드러내도록 노력할 것이다.

나는 이 저술 전체를 수미일관하는 신학적 주조(主調)로서는 '성령론'을, 방법론적 주조로서는 '합류'를 설정하려고 하였다. 비유적으로 말하면, 책을 구성하고 있는 각각의 부분, 곧 장ㅗ절과 소주제들이 구슬에 해당한다면, 성령론적 공시성이라는 원리는 그 구슬들을 꿰는 실에, 합류는 구슬을 실로 꿰어 엮는 일 또는 구슬 목걸이 그 자체라고 할 수 있겠다. 따라서 독자는 이 책 도처에서 성령론적 합류의 사고와 만나게 될 것이다.

끝으로, 이 책의 문체에 관해서 한마디 부언하면, 나는 이 글이 민중신학 저술임을 감안하여, 되도록 누구든지 읽고 이해할 수 있는 평이한 문장으로 쓰려고 노력하였다.

이 책의 구성은 이러하다. 서론에 이은 제1장에서, 1970년대 민주화 운동에 선행하여 민중신학을 배태하고 길러낸 한국 그리스도교사와 한국 민중사에 있어서의 민중신학의 전사(前史, 내지 토양)를, 제2장에서는 1970년대 한국의 사회정치적 상황과 민중신학의 탄생을, 제3장에서는 신학자 서남동, 안병무를 다룰 것이다. 제4장에서는 민중을 본격적으로 다루게 될 것이다. 한국사의 문맥에서 민중의 위치, 농민ㅗ노동자ㅗ도시빈민 등 한국의 기층민중과 감옥 속의 분단시대 민중의 사회전기를 제시하며, 민중신학의 주요 모티프인 '한'의 본질을 신학적으로 해명할 것이다. 제5장에서는 민중신학의 해석학을, 제6장에서는 성서를, 제7장에서는 1980년대 이후 민중신학의 전개와 자기성찰 및 전망을 다룰 것이다. 마지막으로, 결론에서 본 저서의 내용과 성과를 정리하고, 민중신학이 아시아 신학으로, 나아가서는 21세기 지구촌 신학으로 전개될 수 있는 '보편적 생명력'을 확인할 것이다.

제1부

민중신학의 형성

제 1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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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사(前史)

1. 수난과 저항의 한국 민중사

1.1. 1945년 해방과 반공-냉전 이데올로기 시대 개막

우리 민족ㅗ민중에게 1945년 8월 15일 해방은 문제의 종결이 아니라 새로운 과제의 시작이었다. 해방은 우리에게 세 가지 과제를 부여했다. 그것은 첫째, 일제 식민지 시대의 잔재를 청산하고, 한반도에 개입하여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미국과 소련 등 외세에 대하여 자주의 입장을 견지함으로써 명실상부 자주독립을 성취하는 일이었다. 둘째, 식민지 경제의 유제인 반(半)봉건적 지주-소작제를 철폐하고, 식민지 지배에 동조한 반민족 세력으로부터 매판자본을 환수하여 민족자본에 의한 자립경제를 수립하는 일이었다. 셋째, 위 두 과제의 실현을 토대로 민족해방운동의 주도세력이었던 '민중'을 주체로 하는 새로운 근대적 민족국가를 수립하는 일이었다. 이러한 과제를 달성함으로써만 8.15는 진정한 의미의 해방일 수 있었다.

그러나, 미ㅗ소의 냉전정책와 민족 내부 역량의 부족으로 인하여, 우리는 이러한 과제를 해결하는 데 실패하고 말았다.

일본이 항복한 후 38도선을 경계로 미소의 분할점령이 기정사실이 됨에 따라, 오끼나와의 미 제24군단이 남한의 점령군으로 투입되었는데, 하지 중장이 지휘하는 미점령군은 남한에 군정을 실시하는 데 필요한 사전 지식이나 준비가 전혀 없었다. 미국의 남한 지배는 과거 일본의 식민지였던 이 지역을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새로이 등장한 신식민지 지배질서로 급속히 재편하는 데 일차적 목표를 두고 오직 미국의 국익을 관철시켜야 한다는 것이 최우선의 관심사였다. 이미 미군의 투입에 앞서 1945년 8월 28일 연합군 최고사령관 맥아더는 조선총독 아베에게 전문을 보내어, 미군이 진주하기까지 38도선 이남에서 모든 치안질서를 유지해 줄 것과 일본이 정식으로 항복할 때는 통치기구를 그대로 미군에게 인계하라고 지시했다. 미국의 통보를 받은 조선총독부는 군대와 경찰을 그대로 유지하고 내렸던 일장기를 다시 게양하고 조선인에게 인계했던 신문사와 학교도 도로 접수했다.

9월 7일, 맥아더 사령부는 38선 이남에 대한 점령정책을 명시한 포고문을 비행기로 뿌렸는데, 그 내용에는 조선의 해방을 축하하는 말은 단 한 마디도 찾아볼 수 없었고 오직 복종의 강요와 저항에 대한 경고만이 번뜩이고 있었다. 예를 들면, 포고문 제3조는 "모든 주민은 본관의 권한 아래서 발포한 일체의 명령에 즉각 복종하여야 한다. 점령군에 대한 반항행위 또는 공공의 안녕을 교란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가차없이 엄벌에 처한다"라고 되어 있었다. 9월 8일 남한에 진주한 미군의 태도는 정복자의 태도였지 해방자의 태도는 아니었다.

9월 9일, 수도 서울에 진주한 미 제24군단 하지 중장은 아베 총독과 조선총독부에서 항복조인식을 가졌는데, 이 때 총독부 건물에서 일장기는 내려지고 대신 성조기가 게양되었다. 미군정은 과거 일본 총독부의 지위와 체계를 고스란히 인수하였고, 총독부의 일본인 관리들도 상당기간 그대로 유임시켰다가 후에는 자문역으로 미군정을 보좌하게 하였다. 항복조인식은 일본 식민지 통치질서의 근본적 해체가 아니라, 식민지 통치권을 일본의 손에서 미국의 손으로 이양하기 위한 절차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미군정은 친일 경력이 뚜렷한 인사들을 선별하여 고문이나 군정청 관리에 채용하였고 일제의 경찰기구를 그대로 인수, 경찰간부의 8할은 과거 일제 경찰의 주구 노릇을 하던 자들로 채웠다. 11월 2일에 발표된 미군정 법령 제21호는, "과거 총독부가 공표한 법규, 명령, 지시 및 각종문서들 중에서 미군 진주일인 1945년 8월 9일까지 유효했던 것은 합법적 당국(미군정)에 의해 폐기될 때까지 계속 발효한다"고 함으로써, 일제가 제정했던 온갖 파쇼 법령들이 재등장하고 일제경찰의 앞잡이 노릇을 하던 자들이 민중과 애국인사들 위에 난폭하게 군림하게 되었다.

그때 이후로 오늘까지, 대한민국의 국가권력과 검ㅗ경찰, 안기부 등 수사정보기관은 기본적으로 일제경찰의 성격을 온존, 승계해 왔다고 해도 크게 무리는 아니다. 그들이 일제의 주구 노릇을 하면서 조선 민중에 대하여 저질렀던 그 가공할 죄악은 반공이라는 한 마디로 깨끗이 면죄부가 주어졌다. 이승만 정권 이래 친일파와 친미파는 반공이라는 명분 아래 서로 융화하고 야합하여 한국 사회의 지배층을 형성, 무소불위의 권력과 특권을 누려왔다.

이상과 같은 역사적 고찰은 이승만 정권으로부터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를 거쳐 오늘의 정권에 이르는 권력의 성격의 일면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요소다. 동시에 이것은 8.15 해방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민중들에게 가해져 온 잔혹한 압제와 파렴치한 폭력의 정체를 이해하는 데도 필수적인 요소다.

1948년 2월 미국의 의도대로 남한만의 총선거 실시안이 유엔에서 통과 되자, 5월 선거를 거쳐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고, 북측에서도 9월 9일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정부가 수립되었다. 이로써 해방후 통일된 자주독립국가를 건설하려던 민족의 염원은 좌절되고 민족분단으로 귀결되고 말았다. 이 분단이라는 비운의 역사는 미구에 찾아올 6.25 전쟁(한국전쟁)이라는 동족 상잔의 비극의 씨앗이었고, 남한에서는 이후 40여년에 걸친 반공-냉전 이데올로기를 내세운 역대 친미정권들에 의한 독재의 서막이기도 했다.

아무튼, 해방된 지 반세기가 지난 오늘에도 우리 민족에게 주어진 그 세 가지 과제는 미해결로 남아 있고 한국 민중은 1970년대 1980년대를 거쳐 21세기를 눈앞에 둔 오늘에까지 자주, 민주, 통일이라는 3중의 목표를 향해 줄기찬 싸움을 계속하고 있다.

1.2. 1960년대, 군사파시즘과 반민중적 경제개발정책

1960년 4.19혁명은 냉전 이데올로기 체제에 의하여 빈사상태에 빠져있던 민족ㅗ민중의식에 생기를 불어넣었다. 민족통일 문제에 대한 관심이 되살아나 1960년 11월 서울대 학생들의 '민족통일연맹' 결성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움직임은 양심적 지식인과 혁신적 정치인들에게 자극을 주어 한국전쟁 이후 처음으로 통일논의가 일어나는 계기가 되었다. 1961년에 혁신계 정치인들은 '민족자주통일 중앙협의회'를 조직하고 남북교류와 미군철수를 주장하였고 학생들은 한미경제 및 기술협정에 반대하는 운동을 추진하였다. 이승만 일인독재 정권에 의해서 침묵을 강요당해온 노동자들도 쟁의를 벌였고 교직원들은 학원의 자유, 교육행정의 부패제거 등을 요구하며 운동을 벌인 결과 전국적 규모의 교원노조 결성이라는 성과를 가져와 큰 사회적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그러나 4.19혁명 이후 한국사회 전반에서 되살아난 민족ㅗ민중의식과 사회변화의 요구는 체계도 조직도 없이 산발적으로 이루어졌다. 1961년 4.19 일주년 기념대회를 기해 운동의 방향을 '민족통일운동'으로 정리하게 된 학생운동 주도세력은 5월 8일 '민족통일 전국학생연맹'의 이름으로 북한측에 남북학생회담을 제의하게 되었다. 학생들의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라는 구호는 반공체제 하에서 기득권을 누려온 보수세력에게 심각한 위기감을 불러 일으켰다. 보수세력의 이러한 위기감에 편승하여 동년 5월 16일 박정희를 위시한 일단의 장교들은 반공과 경제발전을 기치로 내세우며 군사 쿠테타를 일으켰다. 이로써 민주화와 민족통일을 향한 민족ㅗ민중의 열망은 또 한번 좌절을 맞보게 되었다.

쿠테타에 성공한 박정희 일파는 반공 친미 빈곤퇴치 경제발전 근대화 등의 구호를 내걸고 권력의 정당성을 선전하는 한편, 포고령을 발표, 4.19혁명 이후 등장하였던 혁신세력과 학생들을 검거 투옥함과 동시에 '국가재건 비상조치법', '노동자의 단체활동에 관한 임시조치법' 등 반민주 악법을 새로 만들어 민중운동을 탄압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또한 중앙정보부(CIA)를 만들고, 기존의 국가보안법에 더하여 반공법을 제정하여 반군부, 반체제세력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였다. 대미종속을 내용으로 하는 각종 법령과 협정들을 존속시키고 미국의 주선 하에 한일협정 체결을 서둘렀다.

이미 쿠테타 직후인 1961년 10월 중앙정보부장 김종필이 방일하여 이께다 수상과 회담을 가진 바 있었고, 1962년에는 한일국교정상화의 쟁점이 되는 재산청구권과 보상청구권 문제를 해결짓는 '김종필-오오히라 메모'가 작성되었다. 제3공화국 출범 이후 수차의 회담을 거친 끝에 1965년 6월 한일 기본조약 및 제협정이 조인되기에 이르렀다.

이 과정에서 학생들을 위시한 일반국민들과 야당, 재야지식인들의 격렬한 반대투쟁에 부딪치자, 1965년 2월 위수령이 선포되고 서울지역 대학에 휴교조치가 취해지는 등 정권유지를 위해 강압적 수단에 호소하지 않을 수 없는 취약성을 스스로 드러냈다.

1965년 한일회담반대 및 한일협정비준반대 투쟁은 군사정권이 내걸었던 '민족적 민주주의'의 허구성과 군사정권의 반민족성을 폭로하여 정권의 비정통성을 극명하게 드러냄으로써 반군사독재 투쟁의 대중적 기초를 확대했고, 5.16 이후 위축되어 있던 사회운동 분위기를 활성화시키는 계기가 되었으며, 1960년대 후반의 혁신적인 청년 학생 지식인 세력의 기반이 형성되었다.

한편, 한일간의 관계개선은 국내적으로 경제개발계획 추진과 한국 자본주의의 물질적 기초를 제공함으로써 친미 반공분단종속체제의 경제적 안정화에 기여한다는 측면과, 국제적으로는 한미일간의 경제적 정치적 불록(bloc)화를 실현함으로써 박정희 군사 파쇼체제를 정치 군사적으로 안정화시킨다는 측면을 가지고 있었다. 박정희 정권은 근대화와 경제성장 이데올로기를 동원하여 국민들을 무마하는 한편, 한국군의 월남파병 정책에 의한 냉전적 반공의식의 강화, 일본과의 경제유착, 한미행정협정 체결(1966)과 이를 통한 미국의 군사기지화의 법적보장 등에 의해 불안한 정권의 기반을 다지려 했다. 언론의 자유와 대학의 자율을 제약하기 위한 시도인 학원안정법 제정과 향토예비군 창설(1968년), 국민교육헌장 제정 선포 및 반공교육의 강화(1968년) 등 파쇼통치 체제의 공고화를 통해 대중의 정치진출과 학생운동, 사회운동의 활성화를 억제하는 제반 정책을 펴나갔다.

또한 군사파시즘을 이데올로기적으로 정당화하기 위하여 1967년의 동베를린 사건과 '민족주의 비교연구회 사건', 1968년의 통일혁명당 사건 등 여러 좌익 사건들을 연이어 조작 발표하여 반공 이데올로기를 강화하고 반정부운동의 열기를 냉각시키는 데 이를 이용하였다. 같은 시기에 북조선의 대남공작정책의 강경노선화도 군사파시즘의 공세를 강화하는 데 구실을 제공했다. 즉, 1968년초 김신조 무장게릴라 청와대 습격 기도, 동년 11월 울진 삼척 무장게릴라 침투 사건을 계기로 군사정권은 안보위기를 내세워 사회운동을 더욱 철저히 단속했고, 반파쇼 민주세력은 극도로 위축되었다.

1967년 대통령선거에서 가까스로 당선된 박정희가 삼선개헌을 감행(1969년)하여 장기집권의 의도를 노골화하자 이에 대한 반대투쟁이 광범하게 전개되었다. 삼선개헌 반대투쟁을 시발점으로 해서, 1971년 선거에서 야당후보에 근소한 표차로 이긴 박정희에 대한 부정선거 규탄투쟁, 학원 자유수호 운동과 교련반대 투쟁 등이 잇달아 일어나 박정권의 권위는 땅에 떨어지게 된다. 삼선개헌과 부정선거를 통한 군사정권의 장기집권 음모는 그 동안 냉전 이데올로기에 의해 은페되어 온 군사정권의 반민주성을 일반국민에게 명백히 인식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그 결과, 1960년대 내내 대학생에 국한되었던 반정부운동이 일반국민과 사회 각계층으로 확산되기 시작했다.

이로부터 사회 각 영역에서의 권리보장과 생존권 확보를 위한 새로운 양태의 대중 투쟁들이 차츰 고개를 들기 시작하였다. 1970년대에 들어와 한국 자본주의의 급속한 공업화와 경제성장 정책에 따른 제반 모순들이 격화하는 가운데 모든 부담은 노동자, 농민, 도시빈민 등 민중계층에게 전가되어 왔었는데, 이제 이들의 불만과 저항이 구체적인 형태로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1.3. 전태일 사건과 역사 주체로서의 민중의 등장

1960년대 박정희 군사정권은 한일회담 타결과 경제 개방화 조치를 통해 일본 자본을 비롯한 외국 자본을 대대적으로 도입, 1962년부터 1971년에 이르는 제1ㅗ2차 경제개발계획을 시행하여 외형적으로는 연평균 9%에 달하는 급격한 성장과 공업화를 달성하여 1960년대 후반에는 한강의 기적이라는 찬사를 들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러한 급격한 고도성장 정책 이면에 숨겨진 성장의 모순이 1970년대에 이르러 노출되기 시작한다. 엄청난 외채의 누적과 경제의 대외의존 심화, 무역수지의 만성적 적자, 저곡가 정책에 따른 농민의 희생과 농촌의 피폐, 이농인구의 증대와 도시빈민층의 확대, 빈익빈 부익부 현상의 심화, 선성장 후분배 정책에 따른 소득분배의 불평등, 저임금 정책과 노동조건의 열악성 등등 사회ㅗ경제 문제들이 서서히 노정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런 가운데서도 농촌에서 뿌리뽑혀 대도시로 이주해와 변두리 무허가 판자촌에 살면서 영세기업의 열악한 노동환경 속에서 저임금에 혹사당해 병들어 죽어가고 있는 밑바닥 민중의 실상은 세상에 노출되지 않은 채 숨겨져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서울 중구 청계천 6가 평화시장에서 재단사로 일하던 한 노동자가 제 몸에 석유를 붓고 성냥을 그어 불을 붙였다. 전태일이라고 하는 이 노동자는 화염에 휩싸인 채 평화시장 앞 길을 달리면서 외쳤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일요일은 쉬게 하라!", "노동자들을 혹사하지 말라!" 그는 쓰러졌고 그의 품 속에서 {근로기준법}이라는 책 한 권이 불이 붙은 채 땅에 떨어졌다.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 이것이 그의 마지막 말이었다.

그는 그렇게 죽어갔다. 그날 일어난 사건은 단지 한 노동자가 죽었다는 것뿐이었다. 당시 한국에서 한 노동자의 죽음은 전혀 중요한 사건이 되지 않았다. 먼 나라의 어느 유명한 여배우가 손가락을 다치는 것은 하나의 사건이 될 수 있어도 노동자가 죽어간 사연은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다.

매일 수많은 노동자들이 죽어갔다. 직업병이 숱한 노동자들의 목숨을 갉아먹고, 때로는 인간 이하의 가혹한 노동환경이 어린 노동자들을 비명에 죽게 하고 해마다 수백 수천 명의 광부들이 무너진 갱도 속에 생매장되어도 세상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아니 했다. 가난에 못이겨 스스로 목숨을 끊는 수많은 밑바닥 인간들의 사연은 세상의 관심밖의 일이었다. 가난한 민중의 죽음은 이름이 없다.

그러나 전태일의 경우는 달랐다. 그는 초등학교도 제대로 마치지 못했고 평생 밥 한끼 포식해 보지도 못했으며 무허가 판자촌에서 살아온 '하바리' 인생이었지만,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고 외치고 죽어간 그의 죽음만은 세상에 알려져, 마침내 얼음처럼 굳고 차디찬 현실을 뚫는 불꽃이 되어 역사적인 사건으로 기록되었다. 그의 죽음이 사람들의 양심에 던진 충격의 파문, 그의 죽음이 우리 민중의 역사에 끼친 영향은 오늘 이 시점에서까지도 충분히 측량할 수가 없다.

노동운동을 하던 한 젊은이가 근로기준법 책과 함께 제 육신을 불살라 죽었다는 이 보기드문 사건이 세상에 알려지자, 한국 사회에 예상치도 못했던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다. 그의 죽음과 함께 평화시장의 비좁고 침침한 작업장 속의 참혹한 노동자들에 관한 소식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고, 그것이 발단이 되어 한국의 전체 노동자들이 겪고 있는 인간 이하의 처우에 대한 관심이 환기되었다. 학생들과 지식인들의 대화 속에서 이제껏 아무도 발음하려고 하지 않던 금기의 말 노동자니 노동운동이니 하는 어휘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노동문제가 신문과 잡지에 오르게 되었다. 이러한 사태의 변화와 발전은 물론 당대의 역사적, 정치사회적 조건과 상황의 성숙을 반영한 것임에는 틀림없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전태일이라는 한 인간의 처절한 외침이, 그의 사랑과 분노으로 불타는 육탄이 우리 사회에 던진 충격의 결과였다.

전태일이 자신의 한 몸을 불사르면서까지 고발하려고 했던 당시 평화시장 노동자들의 참상은 과연 어떤 것이었는가?

그가 재단사로 일하고 있던 평화 시장은 주로 17세 이하의 여성노동자들을 고용하여 피복을 생산하는 소규모 봉제업체들이 대략 8백여 개 모여 있는 곳이었다. 약 2만여 명의 노동자 가운데 80-90%가 여성이었고 그 대부분이 17세 이하의 소녀들이었다. 작업장 하나의 넓이는 약 8평, 거기에 보통 10대의 고속재봉틀과 재단대와 일감들이 꽉 들어차 있고, 10명의 미싱사, 10명의 시다, 1명의 재단사, 1명의 재단보조가 일한다. 천정의 높이가 약 1.5미터, 걸을 때는 허리를 구부려야 한다. 채광이 없는 밀폐된 공간, 먼지로 범벅된 낡고 소음이 심한 환풍기, 재봉틀의 기계소음 속에 아침 8시부터 밤 11시까지 하루 평균 15시간 이상 일을 한다. 주문이 밀리면 이틀이나 사흘 밤을 주인이 나눠주는 '타이밍'(잠 안오는 약)을 먹고 철야작업을 해야 한다. 휴일은 월 1회뿐이다. 여러 개의 작업장 당 한 개씩밖에 없는 변소에 가려면 주인의 눈치를 봐야하고, 변소 앞에서는 차례를 기다려야 한다. 노동자들은 대개 위장병 신경통 결핵 폐기종 등의 만성질환에 시달려야 했다. 임금은 최저생계비의 '5분의 1'에도 못 미친다.

그가 죽은 지 사흘째 되던 날, 서울대 학생들이 전태일의 시체를 인수하여 장례식을 거행하겠다고 병원측에 요구하고 나선 것을 시발점으로 한국사회는 격동하기 시작했다. 서울 시내의 거의 모든 대학에서 추도식, 항의단식 집회, 거리시위가 연일 계속되었다. 11월 20일에는 여러 대학 학생들이 합동으로 추도식을 갖고 전태일을 죽인 기업주, 어용 노총, 지식인, 모든 사회인들을 고발하며 시위에 나서 기동경찰과 충돌하였다. 휴교령이 내려진 서울대학교에서는 학생들이 철야 농성에 들어갔다.

11월 22일 새문안교회 대학생부의 '전태일 추도 금식기도회'에 이어 25일에는 그리스도교인들이 신구교 합동으로 '전태일 추모예배'를 가졌는데, 추도사에서 김재준 목사는, "ㅗㅗㅗ 우리 그리스도교도들은 여기에 전태일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서 모인 것이 아니라, 한국 그리스도교의 나태와 안일과 위선을 애도하기 위해서 모였다"고 말했다. 이러한 움직임은 전국의 대학과 종교단체들로 확산되어, 대체로 학생들이 겨울방학에 들어갈 때까지 계속되었다.

전태일의 의로운 죽음은 현실의 질곡 아래 짓눌려 인간다운 삶을 빼앗기고 있었던 민중들, 특히 젊은 노동자들에게 비상한 충격을 주어 빈사상태에 있던 한국 노동운동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다. 곳곳에서 노동자들의 항의가 전에 없이 격렬하게 빈번히 일어났고 한국노총 산하의 어용노조에 대한 비판도 활발히 일어났다. 예를 들면, 11월 20일, 청주의 여공 50명이 상경, 체불노임을 요구하며 노동청 앞에서 농성을 벌였는데 이런 투쟁양상은 전에 없던 것이었다.

학생들, 종교인들, 노동자들의 궐기는 노동문제를 사회여론의 제1차적 관심사로 바꾸어 놓았다. 종전에는 노동문제라면 사실보도조차 기피하던 신문 잡지 방송 등이 연일 노동문제에 관한 보도 특집기사 논설을 실었다. 동아일보 1971년 신년호는, 6.25가 1950년대를 상징하고 4.19가 1960년대를 상징하듯이 전태일의 죽음은 1970년대의 한국사회를 상징하는 가장 뜻깊은 사건이라고 평가했다. 사건 직후에는 한동안 애매한 태도를 취했던 언론기관들의 논설은 학생 종교인 노동자의 움직임이 격화되면서부터 점차 태도를 바꾸어 노동자들의 참상을 보도하고 노동행정의 실태에 비판을 가하며 노동정책의 일대 전환을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변화는 정계에도 파급되었다. 11월 21일 야당인 신민당은, "현정권의 반 근로자적 노동정책에 대하여 항의 한다"고 했고, 1971년 1월 당시 공화당의 박정희 후보는 대통령 연두기자회견에서 1970년도에는 언급조차 없었던 노사문제를 일곱번째 문항으로 하여, "첫째는 근로자의 노동환경과 복지향상 문제이고, 둘째는 근로자의 복지를 기업의 생산과 함께 점진적으로 향상시켜 나갈 작정 ㅗㅗㅗ"이라고 했다.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전태일 사건이 던진 충격이 얼마나 한국사회를 총체적으로 흔들어 놓았는가를 말해 주는 것이리라.

전태일 사건은 한국 민중운동에 새로운 전기가 되었고 '위대한 1970년대' 반독재 민주화와 인권운동에 불을 지펴 놓았다.

이렇게 하여, 전태일이라는 이름 석자는 1970년대 이후의 한국 역사와 사회에, 지식인과 종교인들의 양심과 기도 속에, 그리고 노동자들과 학생들의 머리와 가슴 속에, 쉴 새 없이 떠올랐다가 가라앉으며 이상한 소리를 발신하는 발사체가 되었다. 그 소리는 '민중의 시대가 왔다!'는 것이었다.

2. 한국 그리스도교사

민중신학이 한국 민중사의 1970년대적 소산임은 분명하지만, 이 신학의 상상력, 파토스, 사상적 신학적 지향 등이 불과 10년이라는 짧은 세월 동안 형성된 것이라고 단언내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민중신학의 뿌리를 더듬어 본다면, 그것이 한국의 1970년대의 심장부에 튼튼히 자리잡고 있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더 더듬어 내려가면 멀리는 5천년 민족문화 유산의 토양에 그 뿌리가 닿아 있으며, 가까이는 100여 년 한국 그리스도교의 민족ㅗ민중적 전통의 혈맥 속에 착실히 뿌리내려져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민중신학의 전사를 말할 때 언급하고 넘어가지 않으면 안되는 요소들은 허다하다. 민족수난기에 있어서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민족의식, 함석헌 사상, 토착화신학, 세속화신학 등의 영향, 한국 그리스도교의 사회선교, 즉 도시빈민선교, 그리스도교 학생들의 사회참여 운동을 우선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전태일의 삶과 사상, 김지하 문학에 나타난 신학적 상상력, 그밖에 민중사학, 민중문학, 민중문화, 민중사회학의 영향 등도 빼어銝을 수 없는 요소들이다. 본서에서는 민족수난기의 초기 한국 그리스도인들의 민족의식과 함석헌 사상, 그리고 1960년대말-1970년대초의 한국 그리스도교의 사회선교를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2.1. 민족 수난기의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민족의식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은 복음을 받아들이고 전도를 막 시작했을 무렵이던 19세기말, 20세기초에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과 식민 지배를 체험했다. 즉, 한국 그리스도교의 초기 역사는 (개신교에 한정해서 보면) 일제의 침략사와 중첩되어 있다. 이러한 역사적 현실은 한국 그리스도교가 처음부터 민족적 성격을 띨 수밖에 없었던 사정을 말해 준다.

1876년은 한국인으로서 최초의 세례교인이 생긴 해인데, 바로 이 해가 한국이 일본의 강압에 못이겨 병자수호조약을 맺음으로써 쇄국의 빗장을 풀고 문호를 개방한 해다. 이로부터 20년간은, 1882년 임오군란, 1884년 갑신정변, 1894년 갑오농민전쟁(동학운동), 청일전쟁, 갑오개혁, 1895년 을미사변(민비 시해와 친일내각 구성), 의병전쟁이 일어나는 등 한국 근대사 최대의 격동기였다.

이 기간에 일어난 교회사적인 큰 일들을 열거한다면, 한국어 성서가 출간된 것(신약성서의 완역출간은 1887년), 1884년 황해도 솔내(松川)에 한국인 교회가 생긴 일, 최초의 선교사인 알렌(H.N. Allen; 1984년), 언더우드(H.G. Underwood)와 아펜셀러(H.G. Appenzeller; 1985년)가 내한한 것, 1893년 이른바 네비우스 선교정책이 결정된 것, 1896년 서재필 윤치호 등의 그리스도교인들과 나중에 그리스도교인이 된 이상재 등이 중심이 되어 독립신문을 발간하고 독립협회를 창설한 일 등이 있었다.

한자를 쓰지 않고 한글로만 발행됐던 독립신문은 우리 역사상 최초의 대중적 언론매체였다. 한글을 읽을 수 있는 일반 대중과 한글 성서를 통해 글을 익혔던 민중 그리스도인들에게 독립신문은 주권재민 사상과 자주독립 정신을 고취했다. 또한 독립협회는 만민공동회라는 일종의 민중대회를 종로 네거리에서 열어 부녀자, 청년, 천민 등 누구라도 참가해서 자기의견을 주장할 수 있게 했는데, 봉건사회의 신분관념이 아직도 지배적이었던 당시에 천민 중에서도 가장 비천하게 취급받던 백정 출신의 박성춘이라는 사람도 등단하여 나라의 독립과 민권을 부르짖었다고 전해진다. 그런데 1898년 10월 29일 열렸던 만민공동회에서 궁민(官民)이 함께 채택한 결의안 내용(외국에 양여한 모든 이권에 대한 규탄, 나라의 주권 수호 결의, 정부의 무능 부패 비판 등)이 문제가 되어 주동 인물들(서재필, 윤치호, 이상재, 남궁억, 이승만 등)이 투옥되고 독립협회는 해산당하게 된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교는 한국에서 민족문제를 외면할 수 없는 역사적 상황에서 수용되었다. 이 시기에 그리스도교는 대체로 우리 민족과 민중의 지지를 받는 종교로 정착하였고 민족자주 운동에 적극 참여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선교사들로서도 그들의 신앙노선과 교리에 관계 없이 선교의 장인 한국과 선교의 대상인 한국인이 처한 민족적 비극의 상황을 외면한 채 선교를 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을 것이다. 특히 1900년을 전후한 청일, 노일 양대 전란기에는 사람들이 교회로 몰려와 교인수가 급증하였다. "한국 교회는 초만원을 이루었고 교세확장의 기회는 무제한이다"라는 선교사들이 탄성이 일어났던 것이 바로 이 시기였다. 국토는 유린당하고 백성은 생명과 재산을 잃는 극한상황에서 민중은 교회를 신뢰하였고 교회는 민중의 생명과 재산을 지켜주는 피난처가 되어 주었던 것이다.

청일ㅗ러일 두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영일동맹과 카츠라-태프트 밀약(1905년)을 통해 영ㅗ미를 비롯한 서구 열강들로부터 조선 지배권을 보장받고, 1905년 을사보호조약, 1907년 정미 7조약에 이어 1910년 마침내 합방 조약을 체결하여 조선을 병탄(倂呑)하였다. 이렇게 일제의 침략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민족자주 의식을 가진 다수의 유식(有識) 계층이 민족독립운동의 목표를 가지고 그리스도교로 들어오게 되었고, 초창기의 한국 교회는 민족운동의 산실이 되었다.

이처럼 민중 계층이 주류를 이루었던 교회에 양반, 유식계층이 들어옴으로써 두 계층간에 갈등이 노출되기도 했으나 그리스도교의 민족의식이 강화되는 효과를 가져왔고, 그리스도교가 민족 전체의 종교로 성장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1902-1905년 사이에 옥중에서 개종한 지식인들은 개화주의적인 민족의식이 강한 인물들이었다. 이들은 교육과 신앙의 힘으로 민족의 자존과 독립을 실현하려는 뜻을 품고 있었다. 이러한 지식인들의 의지는 교육과 계몽운동을 통해 민중에게 확산되었고, 이렇게 의식화된 민중의 힘을 바탕으로 그리스도교 민족운동이 가능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1905년 을사조약 체결을 전후한 시기부터 상황은 크게 달라졌다. 교회의 민중들이 민족자주의식으로 각성되어 가는 것에 대하여 이를 우려하고 그들의 신앙을 비정치화하려는 선교사들의 의도와 선교정책이 노골화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선교사들은 조선 그리스도교인들의 신앙의 열정이 일본 제국주의에 항거하는 민족적 에네르기로 전화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들이 표면에 내세운 명분은 아직 연약한 상태에 있는 조선 교회와 교인의 보호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진실은 달랐다. 친일적 입장에 확고히 서 있었던 선교본부로부터의 훈령, 1906년 통감부 설치 후 통감 이또 히로부미(伊藤博文)의 고도의 선교사 회유책, 그리고 선교사 자신들의 보수 신학적 입장이 복음의 정치적 이해와 정치적 저항의 행동을 극도로 혐오했다는 것과 그들의 선교정책이 민족의 비운에 떨고 있는 조선인의 불안 심리를 그리스도교를 전파하는 절호의 기회로 이용한 것 등이 사실상의 이유였던 것이다.

선교사들은 교회의 비정치화를 선언하고 조선 그리스도인들의 일본에 대한 비분을 성령운동으로 전환시켰다. 1907년의 대부흥운동은 2년전에 약 4만 명이었던 교인수를 약 3배로 증가시켜 약 12만 명으로 만드는 경이적인 성과를 거두었다는 점을 일단 제쳐 놓는다면, 부정적 평가를 면할 수 없다. 왜냐하면, 한국 교회의 비정치화 내지 몰역사화가 여기서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1907년의 대부흥운동은 1905년을 을사보호조약 체결 직후 민족의 아픔과 분노를 성령운동이라는 종교적 카타르시스에 의해 희석시킨 몰역사성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

1909-1910년 선교사들에 의해 추진된 백만명 구령(求靈) 운동은 "백만 심령을 그리스도에게"라는 표어 아래 시도된 대규모 신자화 운동이었다. 당시 선교사들의 추산으로도 교인수는 20만 정도에 불과했다. 운동의 목표는 1년내로 신자를 5배로 늘린다는 것이었는데, 이것은 실현 가능성이 없는 무모한 목표였다. 선교사들이 이렇게 비현실적인 대전도 운동을 계획한 것은 당시의 역사적 정황에 대한 그들의 판단과 밀접한 상관관계가 있었다. 당시 선교사 게일(J.S. Gale)의 다음과 같은 말에서 그들의 의도를 읽을 수 있다.

백만명의 구령이라는 소리는 민족의 실망이 절정에 다다른 이 때에 널리 울려 퍼지고 있다. 자기 자신의 잘못으로 파멸과 굴욕의 구덩이에 빠져 자기방위와 자주정치의 능력을 상실한 이 나라 사람들은 ㅗㅗㅗ 한 구세주를 찾고 있다. 오늘은 절정의 날이다. 우리는 내일을 기다릴 수 없고 예언할 수도 없다. 오늘이 전도하는 그 날이요, 이 곳이 전도할 그 곳이다. 활짝 열린 전도의 문 앞에 겸손하게 서 있는 수많은 백성들과 초라한 심정으로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다. 우리 선교사들은 이 때가 한국의 중대한 고비라고 확신하고 있다.

선교사들은 국운이 기울어가는 당시 한국의 정치 사회 상황을 대대적인 전도사업을 펼치기 위한 절호의 기회로 포착했던 것이다. 그들이 파멸과 굴욕의 멍에를 쓴 사람들과 함께 분노하거나 슬퍼하기보다는 이러한 조건이 전도하기에 두 번 다시 없는 절정의 날을 가져다 주었다고 흥분하던 모습을 역력히 읽을 수 있다. 그들의 전도 내용에서는 "영혼구제와 천당지옥의 화복만이 강조되었을 뿐 국가 민족의 존망은 전혀 고려되지 않았다"고, 당시 대한매일신보의 논설은 비판했다고 한다.

어쨌든, 선교사들의 시도는 큰 성공을 거두었고, 한국 교회에 정치적 무관심, 개인영혼구원 중심주의, 타계주의 등의 신앙양태를 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합방을 전후하여 추진된 백만인 구령운동을 일제는 단순한 종교적 운동으로만 보지 않았다. 이 운동을 백만인 반일 십자군 양성을 위한 반일적인 구국운동으로 판단한 일제는, 합방이 공포된 직후의 표면적인 평온함 뒤에 앞으로 일어날 대규모 항일운동의 위험이 숨어 있다고 예견하고, 105인 사건을 조작하여 민족의식이 있는 그리스도교인을 대대적으로 검거, 그리스도교 자체를 위축시키고, 그리스도교 내의 민족주의 세력을 거세하며, 민족운동과 그리스도교를 분리시키려고 획책하였다.

일제측은 사건의 공식 이름을 '데라우찌 총독 모살미수 사건'이라고 하였다. 일제측의 기소장에 따르면 이 사건은 윤치호 양기탁 안태국 이승훈 옥관빈 임치정 등이 데라우찌 총독의 서북지방 시찰 풍문을 듣고 총독 암살을 모의했다는 것이다. 일제는 사건에 연루된 사람들의 심문과정에서, 그들이 항시 주시해 왔으나 그 실체를 밝힐 수 없었던 비밀결사 신민회를 포착해내게 되자, 그들이 조작한 사건을 신민회와 연결시켜 수사를 전국적으로 확대했다. 그리고 민족적 성향이 있다고 의심해 온 그리스도교계 인사 수천 명을 검거했다. 이 사건으로 구속된 사람만도 700여 명에 달했고, 당시 기소된 자가 123명에 달해 이들을 동시에 수용할 만한 재판정이 없어 건물을 신축할 정도였다. 제1심에서 유죄판결을 받은 사람이 105인이었다고 해서 '105인 사건'으로 불리게 된 이 사건은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킨 개항 이후 최대의 사건이었다. 기소된 자의 종교별 구분을 일제측의 공판기록에서 보면, 123명중 82명이 그리스도인으로 전체의 67%에 달하며, 그 가운데는 목사 장로 집사 등 교회의 지도급 인사도 적지 않았던 것을 알 수 있다.

과연, 한국 교회의 민중들은, 일제가 불안해하며 의심했던 대로, 1919년 3.1운동 때 분연히 떨쳐 일어남으로써 일제 당국은 물론이고 선교사들마저도 놀라게 했다. 한국 교회의 신앙을 비정치화하려는 선교정책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민중은 그들이 한글로 읽고 있는 성서로부터 직접 영향을 받고 있었던 것이다. 세계 그리스도교사에서 그 시대 한국 교회의 그리스도인들 만큼 성서를 사랑하고 열심히 반복해 읽어 줄줄 외우기까지 하는 사람들의 예를 찾기는 어려울 것이다. 한국 교회의 민중들, 역대 지배층으로부터 억압과 수탈을 당해온 위에 설상가상으로 나라를 빼앗기고 이민족의 압제 아래 신음하는 그 민중들에게는 성서의 이야기가 문자 그대로 오늘 우리들의 이야기로 너무나도 생생하게 실감되는 것이었다. 모세의 출애굽 이야기, 예언자들의 이스라엘 민족을 향한 애타는 예언의 외침, 십자가 상의 예수의 고통에 찬 절규는 바로 우리의 이야기였고, 그런 이야기를 담고 있는 성서는 민족적인 각성을 일깨우기에 부족함이 없는 '정치 교과서'였던 것이다. 성서의 이야기와 한국 민중의 이야기는 서로 연결되어 있는 '하나의 큰 이야기'였고, 한국의 교회민중은 '오늘의 성서 시대'를 살고 있었으며, 하느님의 구원 경륜을 지금 체험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바로 이와 흡사한 경험을 1970년대 박정희 유신 군사독재 정권 아래서 새롭게 체험하게 되었던 것이다. 일제시대 한국 그리스도인들에게 민중신학은 없었지만, 그들이 살았던 역사적 현실과 신앙의 경험은 본질에 있어서 민중신학적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1970년대의 민중신학은 그 전통의 재생, 부활이며, 계승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2.2. 함석헌 사상의 영향

민중신학의 사상사적 배경을 말하려고 하면 함석헌의 '씨량 사상'에 대해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서남동과 안병무 두 사람 다 함석헌을 존경해 스승으로 모셨고 그의 사상으로부터 음으로 양으로 영향을 받아왔다.

함석헌의 사상적 특징을 든다면, 그의 자유로운 비판 정신과 예언자적 역사의식, 고난받는 민족의 메시아성(性), 씨량(민중) 사상, 기성종교 비판과 인류구원의 새 종교 대망을 말할 수 있겠는데, 이러한 사상은 서남동과 안병무의 민중신학 사상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함석헌의 '고난받는 민족의 메시아성'은 서남동의 '민중의 메시아성'으로 연결되며, 그의 '씨량'은 안병무의 '민중'의 선구였다고 할 수 있다.

함석헌은 민중신학의 '민중'이란 말 보다 먼저 '씨량'이라는 말을 썼다. 씨량이란 '씨'라는 말과 '량'이란 말을 한데 붙인 것인데, 한자로 쓰면 '종자'고 순전한 우리말 하면 '씨앗'이라고 한다. 그는 1970년 4월에 4.19혁명 10주년을 기념하여 월간지 {씨량의 소리}를 창간하고 매호마다 표지 안쪽 면에 씨량의 해설을 실었다. "씨량이란 말은 민(民), 피플(people)의 뜻인데, 우리 자신을 모든 역사적 죄악에서 해방시키고 새로운 창조를 위한 자격을 스스로 닦아내기 위해 일부러 새로 만든 말입니다"라고 하고, 씨량의 '량'자를 풀이하기를, "'둁'은 초월적인 하늘을 표시하고, '蟁'은 내재적인 하늘, 곧 자아를 나타내며, '鱁'은 활동하는 생명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했다.

민(民)이란 말 대신에 굳이 씨량을 쓰는 이유를 그는 다음과 같이 들고 있다. 첫째, 우리의 주체성을 세우기 위해서라고 한다. 중국의 한자 문화에 눌려 잃어버린 주체성을 찾기 위해 순수한 우리말인 씨량을 쓰자는 것이다. 둘째, 민이란 말 속에는 봉건시대의 지배-피지배 관계가 배어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민은 봉건시대를 표시하지만 씨량은 민주주의 시대를 표시합니다"). 셋째, 앞에서 풀이한 씨량의 상징적 의미를 살리기 위해서라고 한다. 그에게 있어서 씨량은 모든 삶의 밑뿌리이면서 무시당해 거의 잊혀졌던 민의 본래적 모습을 찾기 위한 하나의 상징인 것이다.

함석헌에 따르면, 씨량은 '맨 사람'이다. 맨 사람이란 역사와 사회의 맨 밑바닥에 살고 있되 제도와 신분과 계급에 의해 규정될 수 없는 존재다. '나(我)대로 있는' 사람이며 '난(生)대로 있는' 사람이다. 또한 씨량은 제도나 신분에 물들지 않은 본질적인 존재, '량 사람'이다. '량 사람'은 인간 생명의 본성(자발성, 스스로 함)을 충실히 간직한 존재다.

평생을 야인으로 살아왔던 함석헌은 지배층에 대해서는 강한 불신을 품고 있었던 반면에 역사와 사회의 밑바닥에 있는 씨량(민중)에 대해서는 확고한 신뢰를 가지고 있었다. 오천 년 역사 속에서 짓눌리고 빼앗기면서도 인간생명의 본성을 간직해온 씨량은 지극히 어리석은 것 같으나 지혜롭고, 못난 것 같으나 위대한 존재다. 씨량은 모든 지혜와 문화의 원천이다. 따라서 씨량을 가르치기 전에 먼저 씨량에게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함석헌은 씨량을 역사적 사회적 의미로만 보지 않고, 거기에 신학적, 존재론적 의미를 부여했다. "하나님과 씨량은 하나다. 하나님이 머리라면 그의 발은 씨량에 와 있다. 거룩한 하나님의 발이 땅을 디디고 흙이 묻은 것, 그것이 곧 씨량이다." 그에게서 하느님과 씨량을 일치시키는 표현은 무수히 발견된다. "하늘에 계시는 하나님이 이 땅에 오시면 씨량"이라든지, "하나님이 현상계에 내려온 자리가 씨량"이라든지, "하늘의 뜻은 언제나 씨량의 가슴에 내려와 있다"든지 하는 표현들이 그것이다.

함석헌은 또한 씨량의 저항적 성격을 강조한다. 씨량의 본성은 '스스로 함'인데, 스스로 함은 자유 자존 주체성을 실현함이다. 뿐만 아니라 스스로 함은 자유 자존 주체성을 침해하는 외부로부터의 부당한 간섭과 조작에 대하여 맞서서 대드는 것, 즉 저항성을 의미한다.

그는, 역사의 뜻이 엘리트나 집권자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어디까지나 씨량에 의해서 구현된다고 믿었으며, 그래서 씨량은 역사의 중추 세력임을 강조했다. 이것을 뒤집어 말하면 민중의 해방이 역사의 뜻이라는 것이다. 함석헌은 그 자신 한 씨량로서, 씨량 편에 굳게 서서 그들의 입이 되고 그들의 설움과 한을 대변하는 생애로 일관했다.

위에서 간단히 살펴본 것으로도, 함석헌의 씨량은 민중신학의 민중과 깊이 연결되어 있는 사상인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씨량은 민중보다 더 포괄적이고 근원적인 개념이라는 차이가 있다. 씨량과 민중의 차이에 대해서 안병무는, 민중을 존재론적 우주론적 차원에서 보면 씨량이고,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차원에서 보면 민중이라고 설명했고, 서남동도 이런 설명에 동의한다고 했다.

민중신학에 끼친 함석헌의 영향은, 씨량 사상 이외에도 서구신학의 영향에서 자유로운 그의 동양적 사유방식을 들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의 열정적이고 예언자적인 비판정신과 불의한 권력에 저항하는 용기 있는 행동을 빼어놓아서는 안 될 것이다. 그는 [5.16을 어떻게 볼 것인가](1962년)라는 글에서 박정희 군사 쿠테타의 부당성을 정면으로 비판하고 나섰는가 하면, [군인정치를 말한다](1972년)에서 서슬푸른 군사독재 권력에 목숨을 내걸고 맞섰다. 이러한 함석헌의 저항적 삶은 민중신학이 정치적 저항의 신학으로 체질을 형성하는데 깊은 영향을 끼쳤고, 서남동과 안병무로 하여금 '3.1 구국선언'에 그와 함께 참여하게 함으로써 군사정권에 의해 투옥되는 길로 이끌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2.3. 토착화신학, 세속화신학, '하느님의 선교'신학

한국 그리스도교 신학계에는 1960년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신학의 이름에 값하는 새로운 신학 조류가 등장하였다. 토착화신학과 세속화신학이 그것이었다. 이 두 흐름은, 성서에 대한 역사적, 비평적 연구를 이단시하고 에큐메니칼 운동을 배격하는 이른바 보수 정통주의 신학이 줄곧 지배해온 한국의 신학 풍토에 숨구멍을 트고 청신(淸新)한 바람을 불어넣기 시작했다.

1963년 한국사회가 박정희 군사정권 연장 반대투쟁이라는 정치적 시련을 겪고 있을 때, 그리스도교 신학계가 몰두하고 있었던 신학적 논의는 바로 토착화신학이었다. 당시의 한국 교회는 '정통'의 이름 아래 학문적 성서 연구의 길을 막고, 전통종교와 문화를 우상숭배시하는 근본주의 신학이 지배하고 있었다. 그러한 풍토 속에 한국의 문화전통과 타종교에 대한 개방적 자세를 가르쳐 준 점에서 토착화신학의 의미는 적지 않은 것이었다. 토착화신학을 소개하고 전개한 일군의 신학자들은 한국인의 마음 바탕인 문화전통, 특히 종교적 정신문화를 탐구하면서 한국적 신학 형성의 가능성을 모색하고자 했다.

비록 실천적 과제에까지 이르지 못하고 방법론적 논의에 머무르기는 하였지만, 한국의 그리스도교는 한국의 문화와 종교 심성에 뿌리내려야 하며 복음은 한국 문화전통과 역사이해의 틀 안에서 해석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처음으로 일깨워 준 것은 토착화신학의 공로였다. 당시의 긴박한 정치-사회적 문제를 외면한 추상적 논의라는 한계는 명백했지만, 그러나 이 토착화신학 논쟁은 우리의 전통문화에 대한 주체적 이해의 길을 터놓았고, 남의 문화 남의 사상만이 아닌 우리의 삶과 우리의 전통문화를 신학의 소재로 삼기 시작하였다는 점에서 획기적인 발상의 전환이었다고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이 토착화 논의는 다가오는 1970년대에 민족사관을 신학 속에 도입하는 계기로 작용하였고, 1970년대에 가서 신학이 민중문화에 대하여 개방적인 자세를 취하고 이를 신학 안에 적극적으로 수용할 수 있는 사고의 기틀을 마련해 주었다.

다른 한편으로, 한국 신학계에는 1965년부터 세속화신학의 흐름이 대두하게 된다. 주로 그리스도교 학생운동을 지도하고 있었던 일군의 신학자들.―.그 중심인물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후에 민중신학자가 된 서남동 바로 그 사람이었다.―.은 급변하는 세계와 과학기술 문명의 문제, 그리고 한국의 근대화, 도시화 문제와 사회적 현실에 눈을 돌리고, 우리 사회의 현실 속에서 오늘의 그리스도를 만나고 증언하려 하였다.

로빈슨(J.A.T. Robinson), 하비 콕스, 판넨베르그, 본회퍼가 이들 사이에서 논의 되었고, {신에게 솔직이(Honest to God)}, {세속도시(The Secular City)} 등이 번역되어 큰 호응을 불러일으켰다. 때를 같이하여 본회퍼의 {옥중서신}, {신도의 공동생활} 등이 소개되었다.

세속화신학은 당시의 근대화와 경제발전의 긍정적 의미를 강조하는 방향으로 일부 굴절하기도 했으나, 크게 보면 한국 그리스도교로 하여금 세속사회의 정치-사회 문제에 적극적인 관심을 갖게 하였으며, 그 중에서도 특히 본회퍼의 영향은 불의한 권력에 대한 저항적 실천이 그리스도교적 신앙과 합치한다는 것을 일깨워 주었다.

토착화신학과 세속화신학이 닦아놓은 이러한 신학적 사고의 토대 위에서, 한국 교회로 하여금 1970년대의 현실참여의 길로 나아갈 수 있도록 밀어준 결정적인 신학적 지원은 1960년대 세계교회에서 일반화되고 있던 '하느님의 선교'(Missio Dei) 신학이었다. 하느님 선교의 신학이 한국 교회에서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한 것은 1969년 1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가 주최한 '오늘의 한국에 있어서의 하느님의 선교'를 주제로 한 협의회에서였다. 이 협의회를 계기로, 한국 교회는 선교에 대한 새로운 개념과 이해를 갖게 되었다.

종래의 선교를 '교회의 선교'라고 한다면, 이제부터의 선교는 '선교의 주체가 하느님 자신'이라는 것이 인식되었다. 그리고, 종래의 교회의 선교가 개인영혼구원을 중심으로 하는 것이었다면, 하느님의 선교는 하느님의 피조세계 전체, 즉 정치 경제 사회 문화를 포함한 모든 영역에서의 총체적 구원을 목표로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느님의 선교는, 교회가 세상을 선교의 대상이나 방편으로 삼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느님이 교회를 세상을 위한 선교의 도구로 사용하여 이 세상에 하느님의 나라를 실현하려는 것임을 깨닫게 된 것이다.

이 때부터 하느님의 선교는 한국 에큐메니칼 선교 신학의 확고한 기치가 되었다. 선교 개념의 변화에 따라 선교의 대상이 바뀌었고, 그에 따라 교회 구조의 변화와 교회의 신학에 대한 개방이 요청되었다. 그리고 이제까지 진행되어온 토착화신학이나 세속화신학의 논의도 이를 학문적 영역에만 가두어두지 말고 선교라는 실천의 장으로 나와 구체적인 현실 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데로 관심이 이동하게 되었다.

하느님 선교의 신학은 격동하는 한국 사회의 제반문제를 신학과 신앙의 영역으로 끌고들어올 수 있는 신학적 사고의 틀이 마련된 것을 의미했다. 그리고 그것은 이미 1970년대의 현장신학을 예비한 것이었다. 실제로 하느님의 선교신학이라는 새로운 신학의 틀이 적용될 수 있는 새로운 역사적 경험도 1960년대 말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2.4. 한국 그리스도의 사회선교

⑴ '수도권 도시선교 위원회'와 도시빈민선교

1960년대에 박정희 군사정권에 의해 적극적으로 추진된 공업화정책은 농촌의 피폐화와 이농(離農), 도시의 인구집중을 가져왔고, 대도시 주변에 이농민을 기반으로 한 대규모 무허가 판자촌을 형성하게 되었다. 이들 판자촌 빈민들에 대한 정부당국의 대응은 정책부재를 넘어서 아무 대책도 없는 무조건의 철거와 폭력적인 추방이었다.

이에 한국 교회는 급증하는 도시빈민 문제에 대하여 선교적 과제를 자각하게 되었는데, 그 첫 결실이 1968년 연세대학교 도시문제연구소 내에 도시선교위원회를 창설하게 된 것이었다. 미국 연합장로교의 지원으로 이루어진 이 위원회의 활동은 연구활동보다는 구체적인 선교활동을 위한 실무자 훈련에 역점을 두었다. 1969년 1월부터 6개월간 일정한 지역을 선정하여 실시된 제1차 훈련 프로그램에서부터 실무자의 신분이 노출되어 경찰에 연행되고 그 지역 판자촌이 일시에 강제철거되는 등 어려움이 닥쳐 왔으나, 선정지역을 이동해 가면서 공중변소 설치, 하수도 개수, 전기 가설 등을 주민 스스로의 힘으로 해결하도록 유도하는 한편, 당국과 교섭하여 철거시기 연기, 세입자들도 철거 후 그 지역에 건설되는 서민 아파트의 입주권을 받을 수 있게 하는 등의 성과를 거두어 나갔다.

1970년 4월 8일 와우 아파트 붕괴사건으로 도시빈민 문제가 전사회적인 관심을 끌게 되자, 훈련 단계에 머물러 있던 도시빈민선교 활동을 강화할 필요를 느끼고, 1971년 9월 초교파적 선교기구인 '수도권 도시선교 위원회'를 조직하기에 이르렀다. 이로부터 빈민선교는 청계천 지역을 중심으로 한 강제철거 반대투쟁과 주민자활 운동으로 심화되어 갔다. 실제로 한국의 진보적 그리스도인들이 민중의 생활 현장에 들어 가서 민중을 피부로 접촉하는 경험을 하게 된 것은 이 도시빈민선교를 통해서였다. 그런 만큼 이 선교활동이 민중신학 형성에 끼친 영향은 깊은 것이었다. 이 위원회에는 초창기부터 민중신학 개척자의 한분인 현영학을 비롯, 1970, 80년대 민주화 운동의 주역들인 박형규 조승혁 오재식 권호경 이해학 등이 참여하고 있었다.

도시선교위원회는 1973년 7월 이른바 '남산 부활절 연합예배사건'으로 박형규 권호경이 구속되는 등 이런저런 시련 가운데서 동년 12월 '수도권 특수지역 선교회'로 개칭하고 신조와 선교전략을 재정비하였다. 신조는 하느님의 선교 신학에 입각하여, 하느님은 가난하고 억눌리고 버림받은 사람들 가운데서 해방사업을 벌이신다는 것, 선교자는 민중을 섬기는 자로 부름받아 하느님의 해방사업에 동참한다는 것, 선교자는 잘못된 자선행위나 간섭적인 지도를 삼가고 민중의 자율적 운동을 도우며 민중문화운동을 촉진하고 모든 선한 세력들과 연대한다는 것을 밝혀 놓았다. 선교전략에는 다음과 같이 한국 고유의 전통과 민중문화에 대한 강조.―.이것은 아마도 이 문제에 가장 깊이 천착하였던 민중문화신학자 현영학의 입김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가 뚜렷이 확인된다.

우리는 이 땅에서 ㅗㅗㅗ 하나님의 말씀을 성육신하여 밑바닥 깊숙이 내려가 민중과 동일화를 모색한다. 주민의 현실에서 출발하여 그들의 욕구에 따라 주민을 조직하되 그 욕구 충족을 위한 모든 과정을 통해서 주민을 의식화시킨다. ㅗㅗㅗ 그들의 조직된 힘과 의식화된 힘을 통해서 사회의 제도와 구조, 그리고 교회의 위선을 회개시키는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려는 것이다. 우리는 특히 한국의 전통문화를 바탕으로 한국의 문제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이룩하려는 것이다. ㅗㅗㅗ 주민교회, 민중의 교회에 초점을 두고 수입신학, 수입예배의식, 수입교회 형태를 지양하며 ㅗㅗㅗ 한국의 문제 속에 오시는 그리스도를 예배할 수 있는 한국적인 예배의 틀을 추구한다.

⑵ 그리스도교 학생운동의 사회참여 운동

한국 현대사에 있어서 청년 학생들은 언제나 당대의 역사적 사회적 현실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는 존재였다. 그리스도교 청년 학생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지만, 다만 그들은 현실참여의 행동을 신앙적으로 설명해 줄 수 있는 신학적 뒷받침을 필요로 했다. 따라서 그들은 1960년대 후반의 진보적 신학의 흐름을 재빨리 흡수 소화하면서 현실참여의 신앙적 근거를 마련했다.

1968년 KSCM과 YMCA 연맹 학생들은 마침내 '학생사회개발단 운동'을 구상하기에 이르렀다. 그들은 종래의 자선적 봉사활동의 한계를 뼈저리게 느끼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고심한 끝에 사회의 구조적 질병을 치유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새로운 현실참여의 방안을 '학사단'(학생사회개발단의 약칭)운동이라는 형태로 구체화하게 된 것이다.

그들은 1969년 1월 학사단 요원 훈련을 위한 동계대학을 개최하고 155명의 학생이 참가한 가운데, 성서연구, 한국사회 구조분석, 농촌문제와 농협운동, 도시사회선교, 학사단 운동의 조직과 비전 수립 등의 뚺겼을 행하였다. 학사단은 운동의 기본전략을, ㉠ 농촌문제에서 도시문제로; ㉡ 자선사업에서 사회개혁으로; ㉢ 개인적 실천에서 사회운동으로 정하고, 이를 5단계(제1단계: 단원모집과 훈련 단계 / 제2단계: 대상지역의 실태 파악과 문제발굴 단계 / 제3단계: 지역조직(Community Organization) 단계 / 제4단계: 전략행동단계 / 제5단계: 확대운동의 단계)의 전략으로 구체화했다.

운동의 제1기를 3개 년(1969-71년)으로 하고 제1차 년도(1969년)를 '문제 발굴의 해', 제2차 년도(1970년)를 '문제 고발의 해', 제3차 년도(1971년)를 '문제 해결의 해'로 설정하였다. 1969년 7-8월 여름방학 기간에 행한 현장 활동에는 전국적으로 29개단 517명의 학생들이 참가하는 성황을 보였다. 다음과 같은 입단시의 선서문에는 사회문제와 사회개혁 의지에 눈떠가는 1960년대 말 한국 교회 청년 학생들의 소박한 신앙의 자세가 잘 드러나 있다.

1. 우리는 기독 대학생으로서 그리스도의 사랑과 사회정의 구현에 몸과 마음을 바칠 것을 선서한다; 2. 우리는 가난과 무지에서 허덕이는 나의 이웃과 동포의 친구가 되어 사회개발에 헌신할 것을 선서한다; 3. 우리는 불의와 사회악에 대항하여 끝까지 싸워 이길 것을 선서한다; 4. 우리는 기독 대학생으로서 학생사회개발단원이 됨을 명예롭게 생각하며 민주사회 건설에 이바지 할 것을 선서한다.

그리스도교 학생들의 이러한 현실참여 움직임은 1970년 11월 13일 전태일 사건의 충격에 의해 일약 1970년대 민중운동으로 질적 비약을 이루게 된다. 그리스도교 학생들은 금식기도회를 열고 기도하며 부르짖었다.

전태일의 분신자살은 그가 스스로 죽은 것이 아니다. 불의한 사회가 그를 죽인 것이다. 우리 기독교인들도 이 불의한 사회와 공모한 자이기에 우리의 죄를 참회하자. 이 현실을 외면하는 교회여, 하나님보다 세상 물질을 더 중요시하는 배금주의 교회여, 회개하라. 언론인이여 회개하라. 지식인이여 회개하라. 종교인이여 회개하라. 정치인이여 회개하라. 저 평화시장에 가서 바로 나 자신이 살인자임을 자수하자!

이제 학생들은 그리스도교 학생운동이 지향해야 할 목표가 이 땅의 버림받은 '민중'이라는 것을 불을 보듯 확연하게 깨닫게 되었다.

제2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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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민중신학의 성립

1. 인권과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의 1970년대

전태일 사건은 1945년 해방 이후 한국 민중운동사에 큰 분수령이 되었다. 민중은 전태일 사건을 계기로 해서 깨어 일어나 오랜 체념과 좌절의 세월을 딛고 1970년대 민중의 새 역사를 살기 시작했고, 청년 학생들과 지식인들과 종교인들은 전태일의 죽음이 그들의 양심에 쏜 충격의 화살을 맞고 1970년대 인권과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의 대열로 들어서기 시작했다.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은 전태일의 삶과 죽음에서 예수의 삶과 죽음을 보았고, 1970년대 한국 민중의 일어섬, 곧 전태일의 부활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보았으며, 1970년대 민중운동에서 오순절 성령사건을 체험했다.

한국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한국 현대사의 인권과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의 1970년대는 성서의 민중전통과 한국사의 민중전통이 하나의 흐름으로 합류한 사건이었다. 그것은 성서의 재발견이었고 예수 그리스도와의 새로운 만남이었으며, 회심을 통한 신앙의 새 출발이었다.

1970년대 한국 민중의 새 역사는 전태일 사건이라는 큰 산에서부터 뻗어내린 하나의 거대한 산맥이었다. 전태일을 기폭제로 하여 1970년대 반독재 민주화 운동의 수레바퀴는 지축을 울리며 굴러가기 시작하였다.

신학자들은 전태일 사건에서 역사의 주체로서의 민중의 시대가 도래했음을 알리는 '때의 징조'를 읽었다. 그들은 이 새로운 역사의 흐름에 합류하였고 거기에서 민중의 수난과 한, 민중의 기쁨과 희망을 함께 나누면서,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손으로 만진 일들"(요일 1,1)을 신학의 언어로 증언하였으니, 이름하여 민중신학이라는 새로운 신학이 형성되어 간 것이다.

1.1. 민중사건의 화산맥.―.하느님의 선교(1)

⑴ 전태일 사건 직후의 작렬한 학생들의 궐기의 불꽃은 겨울방학 동안 잠시 진정 기미를 보였으나, 이듬해 봄 개학과 더불어 학생들의 교련반대 투쟁으로 다시 점화되기 시작했다.

1971년 4월, 연세대 1천여 학생이 교련반대 성토대회를 열고, "학원사찰을 중지하고 언론의 자유를 보장하며 대학을 정치권력에 예속시키지 말고 학생 군사훈련을 위한 현역교관을 즉각 학원에서 철수시키라"고 요구, 전국대학생 및 언론인에게 보내는 호소문을 채택하고, 가두로 진출하면서 경찰과 충돌, 대학가에 교련반대 투쟁의 선풍을 일으켰다. 이에 대해 정부는 무장군인들을 학원에 난입시켜 학생들을 닥치는 대로 구타 연행하고, 그 중에서 교련거부 학생 전원에게 징집영장을 발부했다.

이렇게 되자 이제까지 권력의 횡포에 대해 침묵해오던 다양한 사회계층이 정부의 권력남용을 비판하고 나섰다. 1971년 4월 8일, 학계 언론계 법조계 종교계 문학예술계를 총망라한 사회 저명인사들이 모임을 갖고 다가오는 4.27 대통령선거에 대비, '민주수호 선언'을 채택하고, '민주수호 국민회의'를 결성하였다. 이 민주수호 국민회의는 1970년대 반유신 투쟁의 구심점이 되었고, 이에 보조를 맞추어 창립된 '민주수호 전국학생총연맹', '민주수호 기독청년협의회'와 함께 유신시대 공개적 조직운동의 원류가 되었다.

4월 27일 대통령선거가 희대의 부정선거로 끝나자 민심은 완전히 이반하고, 민주세력의 공세가 날로 가열됨에 따라, 이에 대한 권력의 남은 수단은 보다 더 강력한 폭력으로 대처하는 것뿐이었다.

⑵ 1970년대 초, 한국의 신문 잡지들은 이런저런 필화 사건을 겪어야 했다. 필화 사건이 잦았다는 것은 그 사회에 감추어지기를 바라는 일이 많았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1970년대 초의 언론과 문필가들의 수난은 그나마 즐거운 추억이라 할 수 있었다. 1970년대 중반 이후의 강요된 침묵, 나아가서는 자포자기적인 협력은 그야말로 언론의 지옥이었기 때문이다.

1970년대 초의 대표적인 필화 사건은 김지하의 담시(譚詩) [오적(五賊)] 사건이었다. 당국은 김지하 시인을 징역 1년 자격정지 1년에 집행유예를 선고하고, 이 시를 게재한 잡지 {사상계}를 폐간조처하였다. 1971년 2월호 {다리} 필화 사건, 그 후 줄을 이어서 조선일보, 동아일보, 서울신문 등 일간지 기사가 문제시된 경우가 잇따랐다.

그러나 언론은 차츰 가중되는 탄압에 굴하여 침묵하고 말았다. 전국의 대학생들이 총력을 경주해서 싸우고 있는 교련반대 투쟁 등 사회적 문제성이 큰 사건들을 언론이 침묵으로 일관하는 것에 대한 대학생들의 누적된 불만이, 1971년 3월 '언론인에게 보내는 경고장', '언론 화형 선언문' 발표, 언론화형식 거행 등 언론을 규탄하는 시위로 폭발하였다.

대학생들은, "정치문제는 폭력이 무서워서 못쓰고, 사회문제는 돈을 먹었으니 눈감아 주고, 판매부수를 올리기 위해 저질로 치닫는다면 그 이상 무엇을 하겠다는 것인가. ㅗㅗㅗ 도둑을 지키라는 파수꾼이 망보기꾼으로 둔갑한 꼴이 아니고 무엇인가"라고 규탄하고, "언론의 횡포가 얼마나 민중의 가슴을 멍들게 했는가. 붓을 휘두르는 깡패들이여! 민중의 소리를 외면하고 권력과 금력에 아부하면 역사의 단두대가 그대들을 기다릴 것이다. 언론인들이여, 궐기하라!"고 언론인들의 각성을 촉구하였다.

대학생들의 이러한 촉구에 호응한 일부 언론인들의 반응이 1971년 4월 동아일보 기자 30여 명의 언론자유 수호선언으로 나타났다. "자유언론의 일선담당자인 우리는 오늘의 언론 위기가 한계상황에 이르렀음을 통감하고 민주주의의 기준인 언론의 자유가 어떤 압력이나 사슬로서도 훼손되어서는 안된다고 엄숙히 선언한다."

동아일보 기자들의 이 선언은 전 언론계에 차츰 파급되어 전국 14개의 신문사와 방송사, 통신사 기자들이 언론 자유수호를 선언, 드디어 5월 15일 한국기자협회가 '언론자유수호 행동강령'을 발표하게 된다. 4개항의 강령은, ㉠ 책임성 있는 취재보도; ㉡ 관계기관의 불법부당한 연행의 일체 거부; ㉢ 기사 삭제에 대한 타당성 확인; ㉣ 정보기관원의 언론사 상주 출입 배제 등이었다.

이러한 양상은 권력의 시녀 노릇을 해왔던 사법부에서도 나타났다. 법원은 1971년 6월 신민당사 농성사건으로 구속된 학생 10명을 무죄판결 내린 데 이어, 7월에는 월간지 {다리} 필화 사건 관련자 3명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박정권이 이에 대한 보복으로 판사 2명을 파면조처하자, 정치권력에 의해 사법권이 침해당해 온 데 대한 누적된 불만이 마침내 폭발, 7월말 서울 형사ㅗ민사 지방법원 판사 전원이 사표를 제출하고 사법권 침해사례 7건을 공개했다. 예를 들면, 반공법 국가보안법 위반 사건의 경우 영장발부에서부터 선고에 이르는 전 과정에서 검찰로부터 공공연한 압력을 받아온 사실을 열거했다. 이 사법권수호운동은 곧 전국으로 확산, 전국 415명의 판사 중 153명이 사표를 제출, 사법부의 독립을 결의했다.

그 여파는 이어서 대학교수 사회로 전해져 대학자주화선언 운동이 먼저 서울대에서 시작되고 곧 전국대학으로 파급되었다.

⑶ 1971년 8월 경기도 광주군에 서울시가 마련한 새 정착지 주민 5만여 명이 생존의 벼랑끝에서 관을 상대로 목숨을 건 극한 투쟁을 벌여, 온 사회를 충격으로 몰아넣은 이른바 광주 대단지 폭동 사건이 일어났다. 광주 대주택단지는 원래 서울시가 경기도 광주군에 새 위성도시를 만들어 서울시 내의 무허가 판자촌 주민 약 30만 명을 이주시킨다는 계획 아래 추진한 것이었다. 그러나 밀려든 불경기로 인해 이주민들은 생계의 길이 막힌 채 황무지에 버려진 상태가 되었다. 주민 5만여 명은 몇번이나 서울시에 진정도 해보고 산발적 시위도 해봤으나, 아무런 반응이 없자 대책위원회를 투쟁위원회로 바꾸고 8월 10일을 최후결전의 날로 정해 서울시 당국 뿐만 아니라 부조리한 사회 전체를 향한 결사항쟁을 감행, 요구를 관철시키고 기층 민중의 무서운 힘을 보여 주었다.

⑷ 1971년 10월 8일, 서울대 총학생회가 중앙정보부 폐지, 군의 정치적 중립을 요구하는 성명을 발표하자, 박정권은 10월 15일 서울 전역에 위수령을 발동하고 학원질서 확립을 위한 특별명령을 발표, 서울시 소재 8개 대학에 위수군을 진주시키고, 대학생 1천 8백여 명을 연행, 이중 119명을 구속하였다. 문교부는 시위주동 학생의 제적을 학교측에 강요, 23개 대학에서 117명을 제적조처하고, 이들을 즉각 강제입영시켰다. 각 대학 동아리 74개를 해체하고, 서울대의 {자유의 종} 등 14종의 학내 간행물을 폐간 조처했다.

1971년 12월 6일, 국가비상사태를 선포, 전국을 공포상태로 몰아 넣고, 12월 27일 '국가보위에 관한 특별조치법'을 전격 통과시켰다. 이 법은 대통령에게 ㉠ 경제 규제 명령권; ㉡ 국가 동원령 선포권; ㉢ 언론과 출판에 대한 특별조치권; ㉣ 노동자 단체행동권의 규제권; ㉤ 군사상의 목적을 위한 세출액 조정권 등 엄청난 비상대권을 부여했다.

⑸ 그런 중 뜻밖에도, 1972년 7월 4일 7.4 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되었다. 성명은 "서울의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1972년 5월 2일부터 평양을 방문하여 평양의 김영주 조직부장과 회담을 진행하였으며, 김영주 부장을 대신한 박성철 제2 부수상이 1972년 5월 29일부터 6월 1일까지 서울을 방문하여 이후락 부장과 회담을 진행하였다"고 하고, 쌍방은 통일의 3대 원칙으로 "첫째, 통일은 외세에 의존하거나 외세의 간섭을 받음이 없이 자주적으로 해결한다. 둘째, 통일은 상대방에 반대하는 무력행사에 의거하지 않고 평화적 방법으로 실현해야 한다. 셋째, 사상과 이념, 제도의 차이를 초월하여 우선 하나의 민족으로서 민족적 대단결을 도모한다"고 합의했으며, "쌍방은 이 합의사항이 조국통일을 일일천추(一日千秋)로 갈망하여온 겨레의 한결같은 염원에 부합한다고 확신하면서 이 합의사항을 성실히 이행할 것을 온 민족 앞에 엄숙히 약속한다"고 합의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박정희 정권은 공동성명의 잉크가 채 마르기도 전인 그 해 10월 17일, 전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 국회를 해산시키고 정당 및 정치활동을 중지시키며 현행헌법의 일부기능을 정지시켰다. 7.4 남북공동성명에 천명된 민족적 사명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한 불가피한 조처라는 구실로. 비상계엄이 내려진 상태에서 다음과 같은 포고령 제1호를 공포됐다.

1972년 10월 17일 19시를 기하여 하기(下記) 사항을 포고함. ① 모든 정치활동을 목적으로 하는 실내외 집회 및 시위를 일체 금지한다; ② 언론 출판 보도 및 방송은 사전검열을 받아야 한다; ③ 각 대학은 당분간 휴교조처한다; ④ 정당한 사유 없는 직장이탈이나 태업행위를 금한다; ⑤ 유언비어의 날조 유포를 금한다; ⑥ 야간통행금지는 종전대로 시행한다. 이 포고를 위반한 자는 영장 없이 체포 구속한다.

이러한 상황은 11년전 5.16 쿠테타의 상황을 답습한 것이었다. 이런 비상계엄 하에서 박정희는 헌법을 제멋대로 뜯어고쳐 이른바 유신헌법을 급조해 통과시켰다. 이 신헌법에 의하면, 통일주체국민회의가 대통령을 선출하고, 국회의원의 1/3은 대통령이 임명하며, 법관 임명권을 대통령이 장악, 사법부를 권력의 시녀로 만들고, 대통령의 임기를 6년으로 연장, 대통령에게 긴급조치권과 국회해산권을 부여했다. 긴급조치권은 헌법의 기능을 사실상 정지시킨 것이나 다름 없었으니, 유신헌법은 헌법이기를 스스로 포기한 셈이었다. 이 때부터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가 암살되기에 이르기까지 이른바 유신시대가 계속된다.

⑹ 폭력과 강권에 의해서나마 일시적으로 공고화되어 가는 것같았던 유신체제에 대한 최초의 집단적인 저항은 1973년 10월 2일 서울대학교 학생들의 시위였다. 이 시위를 주도한 학생들 가운데는 1971년 교련반대 투쟁 과정에서 강제징집 당했다가 군복무를 마치고 복학한 이들이 들어 있었다. 서울대 학생들의 이 시위는 1971년 12월 국가비상사태 선포 이후 공포 분위기 속에서 숨을 죽이고 있던 민주화 운동에 물꼬를 트는 계기가 되었다. 이로부터 반유신 운동은 급속히 확산되어가기 시작했는데, 그 일차적인 구호는 '유신헌법 철폐 및 개헌'이었다.

1973년 12월부터 '개헌청원 100만인 서명운동'이 시작되어 1974년 1월에는 서명자가 30만 명을 돌파하게 된다. 이 개헌서명운동은 {사상계} 사장 장준하의 주도로 전개되었는데, 발기인 30명 가운데는 함석헌 안병무 김정준 김관석 문동환 김찬국 등 민중신학 관계인사들과 김수환 지학순 김지하 등 가톨릭계 인사들이 망라되어 있었다. 이 개헌청원에 대해 정부는 대통령 담화를 발표, "일부 몰지각한 인사들의 사회혼란을 조성하려는 불순한 움직임"으로 규정했으나, 대통령의 이 담화에 응답하듯 1974년 1월 문인들의 개헌서명 지지성명이 나왔다. "1, 고난에 찬 민족현실을 직시하고; 2, 인간다운 삶의 실현을 위해 양심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를 포함한 기본적 인권보장을 요구하며; 3, 민주적 질서회복을 위한 헌법 개정요구는 국민의 권리임을 천명하며; 4, 국민의 편에서 민주주의와 사회정의를 위해 싸우는 모든 양심세력과 더불어 어떠한 가시밭길도 헤쳐나가겠다"고. 과연, 유신정권은 1월 8일 개헌청원 저지를 겨냥한 대통령 긴급조치 1ㅗ2호 선포했다. "헌법을 부정 반대 왜곡 비방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법관의 영장 없이 체포 구속 압수 수색하며 15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 이 조치를 위반하거나 비방한 자는 비상군법회의에서 심판 처단한다." 이렇게 해서 대한민국 헌법은 국민도 손댈 수 없는 신성불가침이 되었다. 장준하에게는 징역 15년 자격정지 15년이 선고되었다. 민주주의를 위한 도정은 갈수록 험난한 가시밭길이 되어 갔다.

⑺ 학생들의 '반독재 민주구국선언' 등 대규모의 시위가 예상되던 1974년 2월경부터 박정권은 갖가지 반공극(反共劇)을 연출하게 되는데, 그 하나가 1974년 4월 3일 긴급조치 4호를 발동한 후 동월 25일 발표한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약칭: 민청학련) 및 '인민혁명당 재건위원회'(약칭: 인혁당) 사건이었다.

박정권이 발동한 긴급조치 4호는 민청학련이나 그와 유사한 단체의 관련자를 사형까지 시킬 수 있는 유례없이 위압적인 조치였다. 이 조치에 따라 민청학련 관련 혐의로 1,024명이 수사를 당했고 그 중 253명이 군법회의에 송치되었으며, 이 사건은 종교인 문인 언론인, 그리고 2명의 일본인까지 포함된 초대형 사건으로 확대되었다. 5월 27일 비상군법회의가 1차 기소자 54명의 공소사실을 발표한 내용을 보면, 전국의 학생운동을 민청학련에 묶고, 이를 전(前) 인민혁명당 관련자들과 연루시켜 민청학련을 북괴 또는 공산주의와 연결지은 다음, 2인의 일본인을 통해 조총련으로부터 구체적인 지원을 받은 것으로 하여, 학생운동과 그리스도교계와 지식인들의 반정부 운동이 폭력혁명을 통한 공산정권 수립에 목적이 있다고 몰아세움으로써 반정부세력을 일거에 제거하려는 계획임이 명백했다.

그러나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이라는 단체는 현실로 존재하지 않는 단체였다. 그리고 군ㅗ검찰이 "북괴의 선전구호를 그대로 인용했다"고 주장했던 민청학련의 유인물 '민중ㅗ민족ㅗ민주선언'의 내용은 유신 독재정권의 폭압체제에 대해 민족과 민중의 입장에서 반대투쟁을 선언한 것이었다.

인혁당 사건은 '인민혁명당 재건위원회'라는 명칭이 보여주듯이 원래 그로부터 10년 전인 1964년 8월, 한일회담 반대와 대일 굴욕외교 반대의 움직임이 범국민적으로 확산되고 있었던 시기에 그런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기 위해 당시의 중앙정보부에 의해 조작된 사건이었다. 6월 3일 비상계엄령이 선포된 상황에서 8월 14일 당시 중앙정보부는 혁신계 인사, 언론인, 교수, 학생 등으로 조직된 인민혁명당이 국가전복을 꾀한 사건이 발생하였다고 발표하고, 한일회담 반대운동의 절정인 6.3사태가 공산주의자들의 배후조종에 의한 것인 듯하게 이 사건을 부각시켰다. 당시 이 사건의 기소여부를 둘러싸고 검찰내부에 심각한 의견대립을 빚어 수사를 맡았던 3명의 검사가 사표를 제출했을 만큼 원천적으로 조작적인 성격을 띤 사건이었다. 이것을 10년이 지난 1974년 4월에 다시 꺼내 그 관련자들을 희생제물로 삼으면서, 민청학련 배후에 공산주의 세력인 인혁당이 있음을 발견했다는 식으로 두 사건을 결부시켜 동시에 발표했던 것이다.

인혁당 사건 관련자들은 이처럼 민청학련 사건 관련자들과 같이 검거되었음에도 인혁당이라는 별도 명칭으로 불리면서 사람들의 관심에서 제외되고 있었다.

전격적으로 사형이 집행된 인혁당 사건 관련자들의 몹시도 비극적인 이야기를 어느 외국인 관찰자는 다음과 같이 본국에 보고했다고 한다.

1975년 4월 8일, 대법원의 판결후 24시간도 채 안되어 인혁당 관련자 8명이 처형되었다. 그 다음날 아침 사형이 집행되었다는 소식이 라디오 방송을 통해 전해졌다. 한 희생자의 어머니는 아들이 죽은 줄도 모르고 교도소에 가서 아들이 쓸 용돈을 차입하고는 그 길로 변호사 사무실로 갔다. 거기서 아들의 사형집행 소식을 들었다. 라디오 방송을 듣지 못한 다른 가족들은 그 날 오후 교도소 당국이 보낸 전보를 받고서야 처형 사실을 알았다. 가족들이 시체를 인수하러 갔을 때 두 부인이 쇼크를 받아 병원으로 옮겨졌다. 다른 한 부인은 길 가운데 드러누워 자살을 기도하였다. 그날은 단지 세 구의 시체만 가족에게 인도되고, 다른 세 구는 후에 인도되었으나, 두 구는 가족들의 동의 없이 화장된 후에야 인도되었다. 극심한 고문으로 그 두 사람의 시신이 만신창이였기 때문에 당국은 시신이 공개되는 것을 꺼렸던 것이다. 처형된 사람 중 한 사람은 장례를 치르기 위해 성당으로 가는 도중, 기동경찰들이 달려와 영구차를 세웠다. 시신을 화장하라는 상부의 지시를 받았다는 것이다. 절대로 그럴 수 없다고 완강히 버티는 가족들을 기동경찰대는 강제로 영구차에서 끌어내렸다. 그리고는 견인(牽引)을 이용하여 영구차를 화장터로 끌고가버렸다. 결국 장례식은 화장터에서 거행되었다. 전격적인 사형집행, 불법적인 시체처리로 마무리지어버린 인혁당 사건, 가족들까지도 극심한 고통과 죽음으로 몰아 넣은 이 사건에서 당국은 무엇을 두려워 하고 있었던 것일까.

⑻ 1974년 4월의 긴급조치 4호 발동과 동시에 민청학련 사건으로 수많은 학생 종교인 지식인들이 투옥되자, 한국 사회는 일순에 칠흑의 밤으로 변한 듯 했다. 수많은 정치범들에게 무더기로 사형 무기징역 5년 이상의 장기형이 군사법정에서 선고되었다. 그들의 가족, 친지들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신음하며 통곡하고 있을 때, 언론은 침묵하고 있었다. 언론에 대한 통제는 과거 어느 때보다 강화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철벽같은 통제를 뚫고 젊은 일선 기자들의 '자유언론실천선언'의 한줄기 빛이 어둠 속을 비치기 시작했다.

우리는 오늘날 우리사회가 처한 미증유의 난국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이 언론의 자유로운 활동에 있음을 선언한다. 민주사회를 유지하고 자유국가를 발전시키기 위한 기본적인 사회 기능인 자유언론은 어떠한 구실로도 억압될 수 없으며 어느 누구도 간섭할 수 없는 것임을 선언한다. 우리는 교회와 대학 등 언론계 밖에서 언론의 자유회복이 주장되고 언론의 각성이 촉구되고 있는 것에 부끄러움을 느낀다. 본질적으로 자유언론은 바로 우리 언론 종사자들 자신의 실천과제일 뿐 당국에서 허용하거나 대중이 찾아다 쥐어주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우리는 자유언론에 역행하는 어떠한 압력에도 굴하지 않고 자유언론 실천에 모든 노력을 다할 것을 선언하며, 우리의 뜨거운 심장을 모아 다음과 같이 결의한다.

㉮ 신문 방송 잡지에 대한 어떠한 외부 간섭도 우리의 일치된 단결로 강력히 배제한다; ㉯ 기관원의 출입을 엄격히 거부한다; ㉰ 언론인의 불법연행을 일체 거부한다. 만약 어떠한 명목으로라도 불법연행이 자행되는 경우 그가 귀사할 때까지 전원 퇴근하지 않기로 한다.

10월 24일 동아일보 편집국과 방송국 소속 기자 180여 명은 이러한 내용의 선언문과 결의사항을 채택하고 이것을 신문과 방송을 통해 보도할 것과 보도가 될 때까지 제작을 중지할 것도 결의했다.

경영진과의 팽팽한 힘겨루기 끝에, 1974년 10월 24일 동아일보가 25일 오전 10시에 제작되어 나왔다. 자유언론실천선언 기사가 1면 3단으로 실린 신문을 기자들은 떨리는 손으로 받아들었다.

동아일보 기자들의 이 '선언'은 곧 전국의 신문 방송 통신 기자들의 자유언론선언 운동으로 번졌다. 조선일보와 한국일보가 뒤따랐고 전국의 31개 신문 방송 통신사 기자들이 일제히 자유언론의 기치를 들고 일어섰다.

처음에는 기자들의 기세에 밀려 물러섰던 경영진측과 권력기관은 집요한 제동과 방해공작을 시작했다. 드디어 당국의 동아일보 광고탄압이 시작되었다. 광고주들이 동아일보에 광고를 싣지 않게 된 것이다.

이로부터 세계 언론사에 길이 빛날 한국 국민의 '동아일보 돕기 격려광고내기 범국민운동'이 전개된다. 신구교 그리스도교인, 불교도, 은행원, 대학생, 중고등학생, 책장사, 예비군, 버스 안내원, 간호사, 음악인, 시인, 배우, 노동자 ㅗㅗㅗ, 그리고 익명의 많은 시민들이 참가했다. 결국 기자들이 동아일보에서 강제 해직당할 때까지 3개월여 동안 동아일보 광고란을 메웠던 국민들의 격려문안들은 그 자체만으로 어떤 예술작품보다 감동적이고 아름다웠다.

⑼ 1975년 4월 29일 박정희는 40분간의 라디오 방송에서 "북괴가 남침하느니 안하느니 이러쿵저러쿵할 때가 아니다. 올해 안에 반드시 남침이 있을 것이다"라고 단정하면서, "모든 국민은 군인입니다. 본인도 650만 서울 시민과 함께 죽음을 무릅쓰고 서울을 사수하기 위해 싸울 결의가 되어 있습니다"라고 발표했다. 5월 10일 140만의 서울시민을 반공대회에 동원, 이런 분위기를 이용, 박정권은 5월 13일 정치적 반대자들에게 사형까지 부과할 수 있게 하는 사상 최악의 긴급조치 9호를 발표한다. 유신 군부세력은 1974년 8월 15일 육영수 저격사건과 1975년 봄 월남 패망을 국민들의 반공 위기의식 고양의 주요한 계기로 삼아 체제를 더욱 공고화하려고 하였다. 그 집약적 표현이 긴급조치 9호 발동이었다. 유신세력은 이 '법 아닌 법'으로 정부에 비판적인 일체의 움직임에 대해 체포 고문 투옥 등 가혹한 탄압을 일상화하였고, 노동현장에서 일어나는 낮은 수준의 노동쟁의에 대해서도 즉각적 공권력 투입에 의한 무차별 진압과 연행, 구속을 일삼았던 것이다. 이 긴급조치 9호를 경계선으로 해서 유신체제의 전반기가 끝나고 '민주주의의 암흑기'라고 할 수 있는 유신 말기로 들어가게 된다.

그러나, 유신 말기의 민주 암흑기는, 한편으로 노동자들의 생존권 투쟁이 강화되고 민주노조를 중심으로 하는 조직적 노동운동이 확대됨으로써, 반파시즘 민주화 투쟁의 새로운 지평이 열리는 시기이기도 하다. 1970년대 전반에는 노동운동이 주로 자연발생적이었고 일회적인 투쟁에 그쳤으나, 1970년대 후반에 들어와서는 학생운동 및 사회운동세력들과의 연대가 부분적으로나마 이루어져 노동자들의 생존권 투쟁은 반파시즘 운동의 주요한 구성부분이 되었고, 이는 민주화 운동의 민중적 성격을 좀더 강화하는 계기로 작용하였다. 당시 한국 노동운동의 요구와 투쟁 수준은 크게 보아 경제투쟁의 성격을 벗어나는 것은 아니었으나 1970년대 후반의 유신체제 하에서는 그러한 낮은 수준의 경제투쟁마저도 불법화되어 있었기 때문에 공권력의 무자비한 탄압을 받았다.

바로 이처럼 노동자들의 투쟁에 탄압이 가해졌을 때, 그리스도교 단체나 지식인들이 공개기구를 통해 정부에 항의를 제기하고 학생운동세력과 연대하여 투쟁하는 것이 1970년대 후반의 일반적인 추세였다. 이처럼 유신체제는 기층민중의 생존권 투쟁이 곧바로 정치투쟁으로 전화되는 비탄력적인 강권억압 체제였다. 바로 이런 체제의 성격 때문에, 노동현장의 분규가 정치권의 문제로 전화함으로써 유신체제 붕괴의 한 요인을 이루었던 것이 다름 아닌 'YH 사건'이었다.

한편, 문인 언론인 법조인 해직교수 재야정치인들의 저항도 1976년의 민주구국선언, 1978년의 '3.1 민주선언', 1979년의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위한 국민연합' 결성 등으로 줄기차게 전개되었다. 이는 중간층의 도덕적 각성과 비판의식을 고양시켜 이 계층을 유신체제로부터 이반시키는 데 기여했다. 특히 1979년 9월 이후에는 이러한 학생과 지식인들의 투쟁이 폭발적으로 일어나 신민당과 집권당(공화당) 간의 갈등, 하부권력 단위 내부의 갈등을 야기시켰고, YH사건, 부산ㅗ마산 지역 시민항쟁을 거쳐 유신체제를 내부로부터 붕괴시키는 힘이 되었다.

1.2. 신학자들의 증언.―.하느님의 선교(2)

한국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앞 절(1.1) [민중사건의 화산맥]에서 기술한 수다(數多)한 사건들 한 가운데서 그 사건들과 뒤엉켜 숨쉬고 싸우고 기도하고 수난을 당하면서 1970년대를 살아왔다. 따라서 본절에서 언급하는 사건들도 민중사건의 화산맥의 일부임에는 다름이 없다. 다만 이 사건들을 '신학자들의 증언'이라는 제목으로 따로 취급하는 의미는, 민중사건의 화산맥의 활동 그 자체가 1970년대 한국에서 일하시는 '하느님 자신의 선교'라는 것을 신앙고백적 행동이나 신학적 언어로 증언한 것이었고, 바로 그것이 민중신학이었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다. 이처럼, 1970년대의 민중신학은 그 본질에 있어서 신학 '이론'이 아니라 증언의 '행동'이었던 것이다.

⑴ [어떤 예수의 죽음.―.고 전태일의 영전에]

한국 그리스도교의 대표적인 잡지 월간 {기독교사상} 1970년 12월호에는 한 편의 이색적인 글이 실렸다. 그것은 [어떤 예수의 죽음.―.고 전태일의 영전에]라는 제목의 글로, 이 글의 필자는 당시 한국기독학생총연맹(KSCF) 총무였던 오재식이었다. 이 글은 한국 그리스도교 보수교단으로부터 격한 반박을 받았는데, 이유인즉 전태일의 죽음은 자살이므로 교리에 위배된다는 것이었다.

전태일의 의로운 죽음을 '어떤 예수의 죽음'으로 해석한 그 글은, 오늘의 시점에서 볼 때, 민중신학의 단초로서 매우 소중한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 평가된다. 조금만 인용해 본다.

예수, 너는 친구들을 모아놓고 말했다. "이것은 내 살이니 받아먹고 나를 기념하라." "이것은 내가 쏟은 피니 마시고 나를 잊지 말라."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 너는 네 죽음이 끝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새로운 시작을 본 것이다. 너는 벽 뒤의 세계를 보았기 때문에, 그 세계가 오리라는 것을 믿었기 때문에 벽을 뚫을 수가 있었다. 이 시작을 죽음이 막지 못한 것이다. 죽음은 생명의 탈바꿈이 아닌가.

네가 죽은 후, 예수여! ㅗㅗㅗ 죽음의 벽이 당분간은 누리를 덮었지만, 그 밑으로 고동소리, 희망이 흐르고 있었다. ㅗㅗㅗ 죽은 너는 다시 무리 속에 살아서 흐르지 않는가. 새 역사의 여명이, 부활의 아침이 급박하게 다가오는 것이 아닌가.

예수, 너는 죽어서 많은 예수를 낳고 그 예수들이 다 같이 예루살렘 거리에 서는 날, 너는 우리에게 부활의 의미를 가르칠 것이다. 할렐루야!

⑵ 4.19 혁명 기념행사 '부활과 4월혁명'

1971년도 4.19 혁명 기념행사는 '부활과 4월혁명'이라는 주제로 4월 10일 종로5가 기독교회관에서 열렸다. 안병무 등의 강연이 있은 후, 참석자들은 그 다음날 새벽에 부활절 기념 연합예배가 열릴 남산까지 십자가행진을 해서 남산에서 철야기도회를 가지기로 결의하고, 대형십자가를 앞세우고 남산으로 행진하던 중, 무술경찰관의 저지를 받아 거리에 연좌하였으나 무차별 폭행을 당하고 십자가마저 파괴당하고 말았다. 이 사건을 계기로 전국적인 그리스도교 학생들의 금식기도회와 항의 집회가 한동안 계속되었다.

⑶ 가톨릭 원주교구의 부정부패추방운동

1971년 10월 가톨릭 원주교구의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 1천 5백여 명이 부정부패 일소를 위한 특별미사를 마친 후 "부정부패를 뿌리 뽑고 사회정의를 이룩하자"라는 구호를 외치며 시위와 철야 농성을 한 사건이다. 이제까지 사회문제에 대하여 보수적, 소극적 자세로 일관해온 가톨릭 교회가 유례없는 집단행동으로 대(對) 사회 발언에 나섰다는 점에서 한국 교회와 사회에 신선한 자극을 주었다. 그 영향으로 신ㅗ구교 연합의 '사회정의 실현 촉진대회'가 열리게 되었고, 위수령 발동을 부른 전국적 학생시위의 선언문에 "특권층의 부정부패 척결 요구"가 등장하게 되었다.

당사자인 지학순 주교의 다음과 같은 말에서 우리는 이 시기에 가톨릭 교회에도 이미 사회선교의 신학적 준비가 익어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우리 가톨릭교회는 근년에 와서 사회정의, 인간의 기본권과 생존권, 인류공동의 유대관계 등 사회문제를 직접 다루고 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현대세계의 사목헌장'이나 교황들의 교서들은 모두 그런 내용들이다.

지금 한국 사회에는 부정부패가 만연하여 사회정의는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없고 인간의 기본권과 생존권이 말살당하고 있는데 방에 들어 앉아 기도나 드리고 있으면 무슨 큰 기적이 일어나 오늘 교회가 부르짖는 정의가 가득찬 세상이 될까. 나는 마음 속에 언제나 이런 충격을 느끼며 언젠가는 힘차게 일어서서 동포들을 규합해서 이 나라 이 백성을 위해서 교회가 명하는 지상과제를 수행해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도시주변의 하수구와 같이 권력층에 썩은 물이 범람하는 꼴을 보고도 말못하는 교회는 죽은 교회라고 생각한다.

⑷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오늘의 구원' 협의회

1973년 4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는 '오늘의 구원'을 주제로 협의회를 열었다. 그것은 1972년 12월 세계교회협의회(WCC) 주최로 태국 방콕에서 개최됐던 '오늘의 구원'(Salvation Today) 국제협의회의 내용을 보고하고 토론하는 자리였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김관석 총무는 보고를 통해, "오늘의 구원 방콕 대회는 오늘날 정치적 사회적 인종적으로 온갖 압제와 불의에서 '구원'을 얻고자 하는 모든 사람들의 열망을 다루었다. 이런 열망을 달성시키는 데 있어서 그리스도교의 구원의 복음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라는 문제였다"고 하고, 전통적으로는 구원은 "하나님을 믿음으로써 죽은 후에 영혼의 구원을 받는다"는 소박한 개념으로 해석되었으나, 구원의 의미가 이런 차원에 머물러서는 안된다는 것이 전세계 그리스도교계의 움직임이라고 하면서, 오늘의 구원은 추상적이고 개인적인 면을 떠나 현실사회에 맞부딛쳐 구원의 뜻을 실현해야 한다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이어서 방콕대회에서 논의된 결론을 오늘 한국의 상황에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관해서 말했다.

여러분도 같은 느낌이 들리라 생각합니다만, 한국 교회의 대표가 이런 모임에 나가면 우리가 처해 있는 상황에서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하는 고민과 분열에 빠지는 것은 흔히 있는 현상입니다. ㅗㅗㅗ 그 이유는 아프리카 남미, 유럽의 교회가 당면한 문제는 한국 교회와는 별로 상관이 없기 때문입니다. 가령 인종문제, 종교적 편견 같은 문제는 우리에게 별로 심각하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빈곤에서의 해방이란 문제도 사실상 우리가 인도나 다른 제3세계 후진국들처럼 처참한 빈곤에 처해 있지는 않기 때문에 관심 있는 주제가 되지 못합니다. 우리의 머리를 떠나지 않는 하나의 문제는 과연 무엇이 우리에게 가장 절실한 주제일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 문제의 소재(所在)와 성격을 규명하기 전에는 우리에게 구원의 메시지가 선명하게 드러나기 어렵겠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결국, 한국 교회의 입장에서 볼 때, 흔히 교회는 정치에 관여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합니다만, 한국이 안고 있는 문제의 성격은 '정치적'이라는 결론에 도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ㅗㅗㅗ 저 개인의 최근의 견해입니다만, 우리나라에 있어서 구원의 메시지는 어디까지나 '정치신학적인' 것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느낍니다.

⑸ 1973년 '한국 그리스도인 신앙선언'

1972년 10월 박정희 군사정권이 포고령을 발동하고 이른바 '10월 유신'을 단행한 지 얼마 안되는 살벌한 시기에, 수난을 각오하고 군사정권에 맞서 일어선 일군의 그리스도인들이 있었다. 그들은 1973년 5월 20일 한국 그리스도인들의 현실인식과 신앙고백을 담은 지하문서 '한국 그리스도인 신앙선언'을 발표했다. 이 문서에서 그들은 민주화 투쟁의 신앙적 기반을 명백히 하고 한국 민주화 운동의 진로를 제시하면서, 세계 교회들에게 연대를 호소했다.

이 문서가 극비리에 해외로 반출되었을 때, 세계교회는 한국 그리스도인들의 성숙한 신앙과 대담한 자세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면서, 이 문서를 '제2 바르멘 선언'라고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이 문서는 한국 그리스도인들의 민주화 투쟁을 널리 세계에 소개하고 세계교회들의 연대적 지원을 불러 일으키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우리는 '신앙선언' 속에 이미 민중신학의 씨앗들이 영글어가고 있음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이것은 신학이 관념의 산물이 아니고 삶과 투쟁의 산물이라는 것을 보여 주는 증거가 된다.

다음은 '한국 그리스도인의 신앙선언' 전문이다.

우리는 한국 기독교인 공동의 이름으로 이 선언을 발표한다. 그러나 일인(一人)이 정부의 삼권을 장악하고 군사무기와 정보망을 국민의 탄압에 사용하고 있는 현 상황하에서는 이 문서에 서명한 사람들의 이름을 밝히기를 주저한다. 우리들의 승리를 쟁취할 때까지 지하에서 투쟁하지 않으면 안된다.

지난 10월 이래 한국민은 비통한 역사적 상황에 놓여 있다. 박대통령이 권력을 강화함으로써 한국민과 국가는 악마의 저주를 받은 것처럼 되었다. 기독교계는 한국민의 일부로서 메시아 왕국의 성스러운 부르심을 받아 현재의 상황을 고발하고 궐기한다.

제2차 대전 이래 우리 국민은 사회적 혼란과 경제적 착취, 특히 비극적인 한국전쟁과 그 결과로 나타난 독재정치의 시련과 고통을 겪어 왔다. 그러므로 우리 국민의 간절한 소망은 우리 생활이 새롭고 인간적인 사회로 회복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국민의 희망은 박대통령의 절대적인 독재정치와 무자비한 정치적 탄압에 의하여 무참히도 부서졌다. 이것은 이른바 '10월 유신'의 이름으로 행하여졌다. '10월 유신'이란 몇 사람의 악인의 간악한 계획으로서 거짓 약속에 불과하다.

우리들 한국 기독교인은 다음과 같은 근거로 고발하는 동시에 행동을 취하지 않을 수 없다.

⑴ 우리들은 주님의 명에 의하여 구체적, 역사적 상황에서 그의 말씀을 충분히 따르지 않을 수 없다. 오늘날 우리가 움직이고 있는 것은 승리에의 도취감이 아니라 오히려 주님 앞에서 우리의 죄를 고백하는 느낌이 든다. 그리하여 우리는 주님의 부르심에 따라 한국의 상황에 대하여 진리를 말하고 행동한다.

⑵ 한국민은 음울한 상황에서 기독교인에게 행동을 취할 것을 기대하며, 촉구하고 있다. 그 이유는 우리가 그들을 대변하기에 족하기 때문은 아니다. 우리는 흔히 그들의 간절한 소망을 채워주지 못했다. 그러나 이러한 일련의 행동을 촉구하고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우리가 우리 국민들의 대표라고 자부해서가 아니라 그들의 고통으로 인하여 우리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그들을 악의 세계로부터 구해내도록 움직이게 되었기 때문이다.

⑶ 우리는 일본의 식민지 통치에 저항해서 독립운동을 한 역사적 전통을 간직하고 있다. 우리는 우리 기독교계가 궐기할 용기를 간혹 갖지 못했던 것을 알고 있다. 기독교계를 대표하는 공식기구는 신학적인 견해로 인하여 혁명적인 행동을 취하기에는 너무 경건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일부 형제 자매들의 연약함에 실망하기보다는 우리 교회의 역사적 전통으로부터 신학적 신념을 추구하기로 결심하였다.

우리의 말과 행동의 확고한 기초는 역사의 주이신 하나님, 메시아 왕국의 포고자이신 예수, 민중 속에서 활발히 살아 움직이고 있는 성령에 있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눌린 자와 약한 자와 가난한 자의 최후의 옹호자임을 믿는다. 또한 하나님은 역사에서 악한 세력을 심판하셨음을 믿는다. 우리는 주 예수가 메시아 왕국의 도래를 선포하신 것을 믿는다. 메시아 왕국은 악한 세력을 꺾고 재산 없는 자와 거부당한 자와 짓밟힌 자의 안식처가 될 것임을 믿는다. 우리는 성령이 새로운 역사와 우주를 창조하며 또한 각 개인을 부활하고 성화할 것을 믿는다.

이 어두운 역사적 상황에서 우리 기독교인들은 다음 사항을 믿는다.

㈎ 우리는 역사의 심판자이며 주이신 하나님의 이름으로 고통받고 억압받는 인민이 해방되도록 기도하라는 하나님의 소명을 받았다.

㈏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가 유대에서 한 것처럼 눌린 자와 가난한 자와 버림받은 자의 가운데 살도록 주 예수의 소명을 받았으며, 주 예수가 로마제국의 관헌 앞에서 한 것처럼 권력자에 저항하여 진실을 말하라는 주 예수의 부르심을 받았다.

㈐ 우리는 새로운 사회와 역사를 창조하기 위한 성력의 개조력과 운동에 참여하고 우리의 성품을 개선하도록 하라는 성령의 계시를 받았다. 이 성령은 메시아 왕국의 성령이며, 이 세상을 사회 정치적으로 변혁시키는 투쟁을 전개하라고 지시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우리의 신앙을 표명한다.

㈀ 현재 한국의 독재정치는 법과 설득에 의한 통치를 파괴하고 있으며, 현재는 폭력과 위협만으로 통치하고 있다. 사회는 장글세계로 돌아가고 있다. 실로 하나님 이외에는 (누구도) 법을 초월할 수 없다. 이 세상의 권력이란 하나님이 정의와 질서를 인간 사회에 유지하려고 권력자에게 위탁한 것이다. 누구든지 법을 초월하고 신이 위탁한 정의를 배반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반역이다. 동양의 전통에서 봐도 좋은 정치란 통치자의 덕망과 도덕적인 설득으로 이루어진다. 민중은 칼로 정복할 수 있으나 칼로 다스릴 수는 없다.

㈁ 한국의 정권은 양심의 자유와 신앙의 자유를 파괴하고 있다. 한국에는 표현의 자유도 침묵의 자유도 없다. 기독교회의 예배, 기도, 집회, 설교의 내용, 그리고 성서의 가르침까지도 정권에 의해 간섭받고 있다. 기독교회와 다른 종교단체는 국민을 위하여 양심의 옹호자가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양심의 파괴야말로 저주받을 행위이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정권의 간섭에 저항하여 종교적 자유를 지키려면 기독교회는 한국민을 위하여 양심의 자유를 지켜야 한다.

㈂ 한국의 독재정권은 국민을 통제하기 위하여 기만과 조작과 세뇌를 조직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언론기관은 정권의 선전기관이 되어 국민에게 철저한 거짓이거나 진실을 반쯤만 알린다. 우리는 기독교인이 진리의 증인으로서 언제나 기만과 조작의 통제를 파괴하는 투쟁을 한다고 믿는다. 진리를 알리는 것이야말로 민중을 하나님의 메시아 왕국으로 이끌어가는 최후의 힘이다.

㈃ 한국의 독재정권은 음흉하고 비인간적이며 동시에 무자비한 방법으로 정적들과 비판적 지식인과 죄없는 국민을 탄압한다. 이러한 목적 수행에 쓰이는 정보는 나치의 게슈타포나 스탈린 시대의 KGB의 악랄한 방법과 유사하다. 사람들이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고문당하고 공갈과 협박을 받으며 어떤 경우에는 완전히 실종된다. 이러한 조치는 전혀 인간성을 거역한 악마의 행위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인간의 육신을 창조했다고 믿는다. 육체와 영혼은 다같이 메시아 왕국의 심판의 날에 부활될 것이다. 우리는 특히 인체(人體)의 성스러움을 믿는다. 그러므로 그에 대한 폭행은 살인과 같다.

㈄ 현재의 독재정치는 한국에서 강한 자가 가난한 자를 지배하는 경제체제를 낳았다. 가난한 도시 노동자들과 농민들은 심한 착취와 사회적 경제적 부정의 희생물이다. 이른바 '경제적 발전'이란 가난한 국민에 대한 몇 사람의 지배자의 음모임이 드러났다. 그것은 또한 우리에게도 저주받을 환경이다. 우리 기독교인은 이러한 극단적인 비인간화와 불의의 체제를 파괴하기 위하여 투쟁하지 않으면 안된다. 왜냐하면 우리는 역사에 실현되는 메시아 왕국의 증인이기 때문이다. 거기에서도 가난한 자가 부자가 되고 압박받는 자가 옹호될 것이며, 인민은 평화를 향유할 것이다.

㈅ 현재의 남북한의 정권은 통일의 논의를 정권유지에 이용할 따름이다. 그들은 통일을 갈망하는 민중을 배반하고 있다. 우리는 기독교인으로서 민중이 진정한 화해를 바탕으로 한 올바른 사회를 열망하고 있다고 믿는다. 지난날의 쓰라린 전쟁의 경험과 이념적이고 정치 경제적인 체제의 차이를 초월하지 않고는, 그리고 압박받는 우리의 역사적 상황을 극복하지 않고는 진정한 통일이 실현될 수 없다.

【 행동과 지지를 호소함 】

⑴ 한국민에게 1972년 10월 17일 이후에 이루어진 독재정치의 모든 정치 과정과 법률, 명령, 정책 등을 어떤 형식으로든 인정하지 말 것. 남한에서 민주정치를 회복시키기 위한 투쟁에 국민들을 어떤 형태로든지 뭉치게 할 것.

⑵ 한국의 기독교인에게: 위에 말한 투쟁의 준비로서 우리 기독교인은 교리를 깊이 생각하고 눌린 자와 가난한 자와 유대를 굳히고 보조를 같이 함으로써, 또한 메시아 왕국의 복음을 전하고 우리 나라를 위해 기도함으로써 우리의 교회를 개혁해야 하며, 우리는 필요하다면 우리의 조상들이 그랬던 것처럼 순교자가 될 준비를 해야 한다.

⑶ 세계의 기독교인에게: 무엇보다도 우리는 당신들의 기도와 연대성을 필요로 한다. 또한 우리의 용기를 북돋아 주고 지원해 줌으로써 다같이 공동의 유대를 지니고 있음을 표명해 주기 바란다.

【 맺음말 】

우리 주 구세주 예수는 유대에서 눌린 자, 가난한 자 그리고 병든 자들 가운데서 사셨다. 예수는 로마제국의 관리에게 과감히 저항하여 진리의 증언을 하다가 십자가에 못박히셨다. 그는 죽음으로부터 다시 살아나 인민을 해방할 화신의 힘을 보이셨다. 우리는 주님의 발자취를 따라 압박받고 가난한 인민들 가운데서 살고 정치적 탄압에 저항하여 역사의 변혁에 참여할 것을 결의한다.

이것이야말로 메시아 왕국에 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⑹ 남산 부활절 연합예배 사건

1973년 4월 22일 부활주일 새벽 5시 서울의 남산에서는 6만여 명의 신도가 모여 부활절 연합예배를 드렸다. 이는 한국 그리스도교 진보세력을 대표하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와 보수 그리스도교의 연합체인 대한기독교연합회(DCC)가 자리를 같이한 최초의 부활절 연합예배로, 두 단체가 따로따로 부활절 예배를 드려온 지 17년만의 일이었다. 이 날 예배를 마치고 돌아가는 신도들에게 청년 몇 명이 무슨 구호가 적힌 전단을 나누어 준 일이 있었다. 그로부터 70여 일이 지난 7월 7일 일간 신문들에는 다음과 같은 놀라운 기사가 실렸다.

[내란음모 기도 15명 검거.―.목사 넷 구속, 11명 즉심에]

서울지검 공안부는 6일 현정부 전복을 기도한 서울 제일교회 목사 박형규(50세)씨와 동교회 전도사 권호경(32세)씨 등 15명을 검거했다. 이들은 지난 4월 22일 부활절 연합예배일을 거사일로 정하고, 남산 부활절예배 장소에 모인 10만여 군중 속에, "민주주의의 부활은 민중의 해방이다" "주여, 어리석은 왕을 불쌍히 여기소서!" 등의 내용이 적힌 전단을 뿌렸으며 플랑카드를 들고 행동대원이 군중들을 유도, 중앙방송국과 중앙청을 비롯한 관서들을 점령할 계획 등 내란음모를 기도했다는 것이다. 경찰은 음모에 가담한 15명 중 김동완 나상기 황인성 등 한국기독학생총연맹의 간부 11명은 즉심에 돌리고, 음모책임자 박형규씨 등 4명은 내란예비음모죄를 적용, 구속했다고 밝혔다.

수사기관의 이러한 사건 취급은 부활절에 있었던 해프닝 정도로 그쳐버릴 수도 있었던 한 작은 사건을 세인들의 관심거리로 부각시켰을 뿐 아니라 이 사건으로 하여금 한국 그리스도교 운동사의 새로운 한 페이지를 여는 뜻깊은 사건이 되게 했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의 '박형규목사 사건 진상조사위원회', 한국기독교장로회의 '대책위원회'가 구성되고 한국교회여성연합회 등의 단체가 나섰으며, 미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USA), 일본기독교교회협의회(NCCJ), 세계교회협의회(WCC), 동아시아교회협의회(EACC; 아시아교회협의회의 전신) 등 해외교회들의 조사위원단이 한국에 파견되었다.

이 사건은 한국 그리스도교회로 하여금 이후 유신 독재체제의 교회 탄압에 대처할 수 있는 태세를 정비하게 해주었으며, 이 사건에 대한 해외 교회들과 그리스도인 자매 형제들의 즉각적이고도 뜨거운 관심과 지원은 반군부독재 투쟁에 대한 한국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적 확신과 불굴의 투지를 한층 북돋아 주었다.

⑺ [민중 속에 성육신해야]

[민중 속에 성육신해야]는 1973년 6월 {한국신학보}에 실린 현영학의 글이다. 이 글은 서남동의 최초의 민중신학 작품으로 알려진 [예수ㅗ교회사ㅗ한국 교회](1975년 2월 발표)와 안병무의 [민족ㅗ민중ㅗ교회](1975년 4월 발표)보다 2년 앞선 것으로, 민중신학 형성사에 있어서 비중 있게 다루어져야 할 글이다.

우선 [민중 속에 성육신해야]라는 제목부터 매우 인상적인 민중신학적 발상이 아닐 수 없다. 이 글에서 현영학은 먼저 "민중이라는 말은 소위 엘리트, 특권층, 또는 지도층과 대비되는 말이다. 권력층이나 경제적 부나 사회적 지위나 고등교육이 없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ㅗㅗㅗ 민중은 이름없는 사람들이다"라고 민중에 관한 정의를 내린 다음, 오늘의 그리스도교가 민중의 것이 되어야 하는데 그러자면 먼저 민중의 친구가 되어 민중과 함께 살고 함께 생각하고 함께 보고 함께 느낄 수 있어야 한다고 한다. 이미 엘리트가 된 그리스도인은 그 지위와 엘리트 의식을 버리고 민중 속으로 성육신해야 한다고 한다. 여기서 민중신학(자)의 존재방식이 분명해졌다고 생각된다.

다음으로 그는, 그리스도교는 "민중 속에 담겨져 있는 지혜와 진실을 배워야 할 것"이라고 강조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민중문화, 특히 민화 민속 탈춤 그리고 민중종교 등에 주목해야 할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스도교의 하느님이 역사적인 하느님이고, 역사를 통해서 활동하고 역사를 통해서 그 뜻을 나타내는 분이라면, 우리는 우리의 역사 안에서도 하느님의 경륜을 찾아보아야 하고, 불교적인 것과 유교적인 것만이 아니라 무속적인 것까지를 포함한 우리의 문화적 전통에서 하느님나라의 표징을 찾아보아야 하지 않겠느냐고 제안한다. 여기서 그는 민중신학의 소재와 연구의 방향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⑻ 1974년 '한국 그리스도인의 신학적 선언'

1974년 11월 18일, 한국 개신교의 대표적인 신학자들과 교회지도자 66인은 이제까지의 한국 그리스도인들의 인권과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을 돌아보면서 오늘의 현실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신학적 입장을 다시 한번 정리해서 발표하기로 결의 했다. 1973년의 '신앙선언'이 지하문서의 성격을 띤 것이어서 서명자의 이름을 밝히지 못했던 것과 달리 이번의 '신학적 선언'은 66명의 참가자가 전원 서명을 했다. 이 문서는 국가와 종교, 인권, 교회의 선교 등 이제까지 종종 권력측으로부터나 보수교단으로부터 비난과 공격을 받아온 주제들에 대해 신학적 정리를 했다.

"정치와 종교 또는 국가와 교회의 분리는 본래 정치적 권력과 종교적 권위의 야합에서 오는 권력의 절대화와 그에 따른 횡포와 부패를 막기 위한 것이지 종교와 정치의 영역을 분리하기 위한 것은 아니다. 구약의 예언자들은 예외 없이 경제와 정치적 횡포와 부패에 맞서 싸웠다. 예수는 바로 이 계열에 서신 분이다." "제도나 법은 인권에 봉사하는 한에서 인정된다. 제도나 법이 사람을 위해서 있지 사람이 제도나 법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다. 이런 뜻에서 예수는 '사람은 안식일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다. 사람은 안식일의 주인이다'(마르 27, 28)라고 했다. 이것은 억압하는 제도나 법에 대한 첫 인권선언이다." "교회의 선교는 현대사회에서 정치적 사회적 활동으로 추진될 수밖에 없다. 인간이란 영혼만이 아니라 육체이며, 개인적 실존만이 아니라 사회적 관계이며, 또한 전체 환경 안에 있는 존재이다. 인간의 구원은 ㅗㅗㅗ 전체적이며 구조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의 선교는 인간의 자유화, 인류의 사회화, 제도의 인간화, 사회정의, 세계평화, 인간과 자연의 화해에 종사하게 된다."

이렇게 정리한 위에 이를 기초로, '한국 교회의 시국선언에 대하여'라는 장을 따로 설정하여 이제까지 발표되어온 그리스도교 선언문들의 신학적 위치와 정당성을 해명하고 재확인하였다.

⑼ 해직당한 그리스도인 교수들과 갈릴리교회

1975년 2.12 국민투표 실시후, 2월 15일 구속자 일부 석방과 석방된 학생들의 복학 문제를 둘러싸고 문교당국과 대학측이 팽팽하게 대결하고 있었다. 문교부의 경고에도 불구 그리스도교계 대학인 연세대가 먼저 석방학생 8명이 제출한 복학원서를 무조건 받아들였고, 한신대는 "대학의 권한과 대학이 소속한 교단으로부터 위임받은 의무의 범위 안에서 석방된 학생들을 즉시 복학시키겠다"는 공한을 문교부에 발송함으로써, 학교 및 학교를 지지하는 학생들의 문교부를 상대로 한 대접전이 벌어졌다. 이 싸움은 전국 대학생들의 반정부 시위로 번져, 연세대 한신대에 대한 휴교령에 이어 긴급조치 7호에 의한 고려대 휴교령으로 이어졌고, 급기야는 서울대 학생 김상진의 양심선언 발표 후의 할복자살이라는 비극을 불렀다. 그리고 드디어 5월 13일 긴급조치 9호가 발동되었다. 문교부는 이어서 5월 14일 대학 내 동아리들의 해산을 명했고, 5월에서 6월에 걸쳐 한신대의 안병무 문동환, 연세대의 서남동 이계준, 고려대의 이문영 김용준, 서울대의 한완상 등 그리스도인 교수들과 그밖에 4, 5명의 대학교수들을 해직했다.

1974년 4월의 긴급조치 4호 발동과 민청학련 사건, 인혁당 사건으로 수많은 학생 종교인 지식인들이 투옥되고, 수많은 정치범들에게 무더기로 사형 무기징역 5년 이상의 장기형이 군사법정에서 선고되었으며, 그들의 가족 친지들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신음하며 통곡하고 있었다. 1975년에는 수많은 언론인들이 일터에서 붸겨났고 종교인들 가운데서도 구속자들이 속출하더니 드디어 긴급조치 9호 이후에는 그리스도인 교수들 마저 수난을 당하게 된 것이다. 여기서 그리스도인 해직교수들은 고난당하는 사람들 사이에 상호격려와 연대를 위한 공동체를 구상한 끝에 갈릴리교회를 세우기로 의견을 모았다.

1975년 8월 17일 오후 2시, 대성 빌딩에서 갈릴리교회 설립예배가 열렸다. 이 자리에는 안병무 문동환 서남동 이문영 등 그리스도인 해직 교수들과 아직 해직되지 않았던 이우정 교수, 정치적 이유로 수감된 사람들의 아내들과 어머니들, 자유언론수호 투쟁으로 해직된 기자 등 33명과 사복형사 및 기관원 9명까지 모두 42명이 참석했다. 갈릴리교회는 8월 24일 두번째 예배 때부터 벌써 시련에 부딪쳤다. 1개월 동안 사용계약을 했던 대성 빌딩의 문은 굳게 잠겨 있어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건물 주인은 사정이 생겼다며 계약을 취소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그 후로 갈릴리교회는 갈릴래아 예수민중이 그러했듯이 집요하게 따라붙는 감시와 방해공작 때문에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이곳저곳으로 전전하며 예배를 드려야만 했다.

갈릴리교회의 예배 방식은 좀 특이했다. 참석자들은 둥그렇게 원을 그리고 앉았다. 위 아래의 위계 질서를 갖지 않기 위해서였다. 예배는 경건하고 진지했으나 사회와 설교는 교인들이 돌아가면서 맡았다. 설교에 앞서 고난 현장에 대한 보고가 먼저 있었고 이를 위한 기도는 예배 분위기를 한층 더 간절하고 생생하게 만들었다. 예배 후 친교 시간에는 수감자들의 근황, 건강 상태, 가족들의 형편, 새로 수감된 사람들과 출옥한 사람들에 관한 소식을 나누었다. 이 친교 시간은 직장에서 해고된 사람들에게 일거리를 소개하는 기회로도 활용되었다.

일본의 신학자 관전관웅(關田寬雄)은, 갈릴리교회를 방문했던 일본인 H.S. 씨의 말을 인용하면서 갈릴리교회의 특질을 다음과 같이 뜻깊게 밝혀 주었다.

H.S. 씨는 일본인으로서 갈릴리교회를 방문하여 한국의 상황에 처음 접하는 외국인으로서의 한계를 느끼면서도, "보는 눈을 가진 자에게는, 죽음의 그늘에 앉은 백성에 속하는 이 예배 참가자들 사이에, 희망이라는 작은 빛이 빛나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다"고 말한다. 즉 갈릴리교회는 정치권력의 무자비한 탄압이라는 '죽음의 그늘'에 놓여 있으면서도 '희망의 빛'에 살고 있으며, "희망을 품고 있는 사람들의 사귐이 살아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 고난 속을 걷는 희망의 공동체로서의 갈릴리교회의 특질이 잘 드러나고 있다. 여기서는 민중의 고난과 설교와 예배가 하나로 결합되어 있으며, 고난당하는 민중과의 연대가 교회의 본질적 요소로 되어 있다.

안병무는 갈릴리교회 설교집 {주예수여, 오시옵소서}의 서문에서 "갈릴리교회라고 이름을 붙였을 때, 우리들은 갈릴리의 민중과 함께 울고 웃었던 예수의 선교 현장과 그 정신을 우리들의 행동으로 고백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했다"고 썼다. 1970년대 한국의 갈릴리교회의 신앙은 '행동으로 고백하는 신앙'이었던 것이다. 안병무 문익환 문동환 서남동 등이 갈릴리교회에서 한 설교는 민중신학적 성서읽기의 한 표본이 되었고, 민중신학은 갈릴리교회라는 수난의 민중공동체로 육화하는 과정에서 스스로도 무르익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⑽ 목요기도회

1970년대 한국 그리스도교에서 일어난 특기할만한 일로는 목요기도회를 빼어놓을 수 없다. 1973년 남산부활절 사건을 계기로 그리스도교 신앙의 아주 새롭고 건강한 흐름이 기도회라는 모습으로 나타나 하나의 전통을 형성하게 되었다. 그것은 과거의 개인주의적, 탈역사적, 기복적 신앙 양태를 탈피한, 오늘의 정치적 상황 속에서 행동으로 고백되는 신앙의 새 전통이었다. 이러한 기도회에서 그리스도인들은 동료 그리스도인에 대한 사랑을 표현할 뿐만 아니라 회심을 통해 자신의 가치관을 전도시켰으며, 나아가 무고한 자를 박해하는 악의 세력을 하느님 앞에 고발하고 그 악의 세력의 회개를 촉구하며, 그것과의 선한 싸움을 결단하는 기도를 올렸던 것이다. 이것은 성서적 신앙의 회복이었으며, 초기 그리스도교 신앙 전통으로의 복귀였다.

이 기도회의 전통은, 1974년 긴급조치 4호의 위압 아래 잠시 숨을 죽이고 기다리는 듯 했으나, 6월 중순부터 긴급조치 위반으로 무수한 사람들이 구속되고 그 가족들이 억울함을 가눌 수 없어 슬퍼하며 방황하게 되었을 때, 다시 활발하게 되살아 났다. 7월 18일 문동환 이해동 김상근 허병섭 등은 구속자 가족 20여 명과 함께 기독교회관 소회의실을 빌려 긴급조치로 수감된 자들과 그 가족들을 위한 기도회를 열었다. 당시에는 이런 성격의 기도회 조차도 긴급조치에 위배되는 사항이었으므로 모두들 가슴을 졸이며 기도회에 참석하였다.

이 기도회는, 기관원들의 갖은 방해공작에도 불구하고, 구속자 가족들을 중심으로 매주 목요일로 정례화되어 갔다. 1975년 2월 긴급조치 위반 구속자들이 풀려나오자, 목요기도회는 이들이 체험담을 공개하고 정권의 부도덕성과 폭압성을 폭로하는 장소가 되었다. 이에 당국의 탄압은 가중되어 목요기도회는 장소를 얻기 어렵게 되었고 참석자가 연행되거나 설교자가 구속되기까지 했다. 긴급조치 9호와 함께 목요기도회는 한동안 중단될 수밖에 없었으나, 1975년 9월 소위 '수도권 선교자금 사건'으로 두 성직자가 구속된 것을 계기로 다시 재개되었고, 1970년대 후반기의 험난한 역사를 넘어 1980년대 초까지 계속되었다. 목요기도회에서 설교를 맡았던 신학자, 목회자, 그리스도인 교수들의 수는 사오십 명에 달했는데 우리는 설교자의 명단에서 서남동 안병무의 이름을 가장 빈번히 만날 수 있다. 민중신학은 갈릴리교회와 함께 목요기도회를 현장으로 하여 그 체험의 깊이를 더해가며 성숙해 갔던 것이다.

(11) '3.1 민주구국 선언'

1976년 3월 1일 오후 6시 서울 명동성당에서 3.1절 미사를 드린 후 신구교합동 기도회를 가졌다. 이 기도회에서 김지하 시인의 처우개선과 석방을 호소하는 시인 모친의 편지를 한 신부가 낭독한 다음 사회자는 개신교 측의 기도 순서가 있을 것이라고 알렸다. 이때, 해직교수 이우정이 한 선언문을 낭독했다. '3.1 민주구국 선언'으로 알려진 이 선언은 서명자 11명 중에 포함된 서남동 안병무 문익환 문동환 이우정 등에게 투옥이라는 새로운 민중경험을 갖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선언의 내용은 차치하고라도, 1심 1차 공판(1976년 5월 4일)에서 1심 선고공판(8월 28일)에 이르는 15차에 걸친 4개월 동안의 긴 재판에서, 검사의 심문에 대답하는 가운데, 한국의 유수한 그리스도교 신학자들인 이들의 역사관, 사회관, 성서 이해, 신앙고백, 그리고 유신 독재체제에 저항하는 민주주의자로서의 확고한 신념 등이 당당하게 피력되었다. 그것은 그대로 민중신학의 내용과 일치하는 것이었다. 실제로, 안병무의 '사건', 서남동의 '합류'와 같은 해석학적 범주가 명료한 형태를 갖추게 된 것은 이 감옥 안에서였다. 감옥은 사건과 합류를 지금 일으키고 계시는 '성령의 장(場)'이요, '하느님의 선교의 자리'였던 것이다.

2. 민중신학의 성립

민중신학의 성립 경위에 관하여 서남동 자신은 어떻게 보고 있는가를 그의 글 [민중신학의 성서적 전거](1982년 발표)에서 살펴보겠다.

"민중신학, 이는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은 단어다. 민중신학은 1970년부터 대두되었다.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 교회내에는 사회선교, 보다 구체적으로는 도시산업선교와 농민선교가 활발히 전개되었다." 이러한 교회의 새로운 선교활동에 대하여 "한국 신학이 그것을 어떻게 정리할 것이냐"라고 하여 표제를 내건 것이 민중신학이었다고 한다. 물론 신학자들이 나서서 이같은 선교활동을 주도한 것은 아니고 일반 평신도와 소수의 성직자들이 선교활동을 하니까 뒤늦게 신학자들 중 몇 사람이 이러한 선교활동의 신학적 정리를 시작하게 되었고, 이러한 신학적 작업을 하면서 민중신학이라는 단어가 대두하게 되었던 것이라고 한다.

그는 또 민중신학 발생의 배경으로 신학의 본고장인 구미에서 발전시켜온 신학, 20세기의 제3세계 신학들, 그 중에서도 남미해방신학과 흑인신학으로부터 얻은 깨우침을 든다. 그리고 최근에 활발히 전개되고 있는 여성신학으로부터는 "해방신학보다 훨씬 더 근본적인 문제를 우리에게 제기하고 있다"고 한다. 이렇게 20세기 후반기에 등장한 신학의 문제들이 있는데, 특히 제3세계 신학은 "2천년 역사를 가진 그리스도교 신학에 하나의 갱신운동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아시아의 일각인 한국에서도 일련의 사태 및 급변하는 정세 때문에 일부 개신교 신학자들과 몇몇 가톨릭 신학자들이 민중신학이라는 표제를 내걸고 같이 연구하고 활동하고 발표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시작된 민중신학은 즉시 인도 필리핀 인도네시아 스리랑카 등 아시아 전역의 호응을 받아, 아시아의 신학으로 부각되었고 지금은 세계교회와 신학계에서 상당한 주목과 기대를 모으고 있다고 한다. 신학에 '정치'라는 수식어를 붙이기 시작한 것은 가톨릭 신학자 메츠(J. Metz)였는데, 해방신학 흑인신학 여성신학 그리고 민중신학은 크게 요약해서 말한다면 정치신학이라 할 수 있다고 한다.

"한국에서의 민중신학은 구ㅗ신약성서의 민중전통과 한국 역사의 민중전통이 합류되면서 그 모습을 드러냈다. ㅗㅗㅗ 1970년대에 들어와 성서적인 전통, 즉 민중해방 전통과 한국의 민중전통 즉 역사적으로 계승된 정치ㅗ경제ㅗ문화ㅗ예술, 그것도 지배자의 전통이 아닌 민중의 전통이 합류하였다. ㅗㅗㅗ 이같은 합류가 구체적으로 나타난 것은 평화시장 노동자 전태일에게서였다"고 하고 또 1970년대 후반에는 시인 김지하에게서도 이같은 합류가 이루어졌다고 한다. 이렇게 구체적인 두 인물의 생활에서 두 전통이 실제로 합류된 것을 신학적으로 정리하는 데서 민중신학이 나온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 민중신학은 1970년대 중반부터 그 모습과 활동을 구체적으로 드러내게 되었다는 것이다.

서남동이 여기서 말하고 있는 것은 민중신학의 신학적 '계기'에 관한 설명으로서는 적절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합류가 구체적으로 나타난 것은 비단 전태일과 김지하에 있어서만은 아니었다. 앞에서 대강 살펴본 바 있는 민중사건의 거대한 화산맥이 통채로 합류인 것이다. 환언하면, 1970년대 그 자체가 거대한 예수사건이었고 합류의 사건이었다. 1970년대를 온 몸으로 살았던 무수한 이름 없는 민중들, 그들이 다 합류의 주인공들이다. 그리고 민중신학은 그 1970년대의 신학적 증언이(어야 한)다.

제3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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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자들: 서남동 안병무

'신학자 탐구'는 민중신학의 본질 구명(究明)에 있어서 어떠한 함의를 갖는 것인가?

나는 제1장 서론에서, 민중신학이 1970년대 한국사회의 인권과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 현장에서 창출된 신학이라는 것을 민중신학의 기본성격으로 정식화하였다. 즉, 민중신학은 한국 현대사에서 '인권과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의 1970년대'의 역사적-창조적 소산이며, 1970년대 한국사회를 장으로 한 '현장신학'이다. 따라서 '1970년대는 민중신학을 해명하는 열쇠'라고 주장했다. 다른 한편, 나는 참된 의미에서 신학의 영위는, 신학자의 삶(生涯)과 일체를 이루고 있는 것이어서 신학으로부터 신학자의 삶을 분리해버리면 그 신학의 실체가 잡히지 않는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따라서 한국 민중신학 창출에 주역을 담당한 두 사람의 신학자 서남동과 안병무의 '인간과 삶'의 탐구는 민중신학의 본질과 구조를 해명하려는 본 논문에 있어서 또 하나의 관건이 된다는 점을 강조하고자 한다.

이제 민중신학을 대표하는 두 신학자 서남동과 안병무의 인생과 신학적 편력에 관하여 기억과 자료가 허락하는 한에서 서술해 보겠다.

1. 서남동

1.1. 1994년 6월 한국민중신학회 운영위원회에서 '고 서남동 선생 10주기 추모제' 행사로 묘소를 참배하기로 의견을 모았을 때, 나는 사전답사를 자청했다. 서남동 선생의 묘소가 있는 경기도 파주군 탄현면은 내가 근년에 이사와서 살고 있었던 일산 신도시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인데 한 번 찾아 가지도 못한 것이 내심 부끄럽기도 해서였다.

선생의 묘소는 한강과 임진강이 만나 서해로 빠지는 오두산 통일전망대 근처의 군사분계선 옆에 자리잡은 '탄현 기독교 묘원' 안에 있었다. 서해쪽에서 불어 오는 해풍에 실려 분계선 저쪽의 대남 선전방송의 확성기 소리가 이따금 우렁우렁 들려오는 그런 곳이었다.

1999번이라고 적힌 팻말이 그의 무덤 한 구퉁이에 꽂혀 있다. 그의 서대문 형무소 시절 수번을 닮은 유택(幽宅)의 지번(地番)이다. 비명(碑銘)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죽재(竹齋) 서남동 "주께서 나를 보내심은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심이라." ― 루가복음 4장 18절

서남동 선생은 겸허한 분이다. 그는 언제나 낮은 곳에서 들려오는 미세한 소리를 들으려고 스스로 자세를 낮추는 분이다. 그에게는 어릴적 사고로 실명한 아들이 하나 있다. 아마 이로 인해 약하고 가련한 사람들에 대한 배려의 자세가 몸에 밴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어린 여성 노동자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그의 모습은 예수의 말씀을 듣고 있는 어린 아이와 같았다고 사람들은 회상하곤 한다. 그럴 땐, 여성 노동자가 선생이 되고 그는 학생이 된다. 1970년대의 민중신학자들이 대개 그러했지만 서남동은 특히 민중 현장을 가까이하려고 성실하게 노력했다.

그는 1984년 강연차 미주에 갔다가 발병하여 김포공항에서 곧장 연세대 부속병원으로 옮겨져, 암 선고를 받고 이렇다 할 투병도 못한 채 그 해 7월 19일 타계했다. 묘비 뒷면에는 그의 약력이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1918년 2월 5일 전라남도 무안에서 출생, 전주 시흥고, 일본 同志社 대학 신학부, 카나다 임마누엘 신학교에서 수학했다. 경상북도에서 목회를 했고, 한신대학과 연세대 신과대학에서 후학들에게 현대신학의 새로운 흐름을 가르쳤다. 연세대 신과대학 학장, 연합신학대학원장을 역임. 1976년 '3.1 민주구국선언 사건'으로 투옥되었고 1980년 5월 재차 옥고를 치렀다. 민중의 고난을 몸으로 겪으며 민중신학을 연구하고, 민중의 현장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증거하여, 한국 그리스도계는 물론 세계 신학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1978년 이후 선교교육원 원장 역임하였으며, 1984년 모교인 카나다 임마뉴엘 신학교에서 명예 신학박사 학위를 수여받다. 민중해방의 사제 고 죽재 서남동 박사는 1984년 7월 19일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이 곳에 안장되다.

'죽재'(竹齋)라는 아호는 '장공'(長空) 김재준 선생이 지은 것인데, 서남동 목사의 아호를 왜 죽재라고 했는지를 장공은 그의 일기에 다음과 같이 밝혀 놓았다 한다.

그의 용모와 뜻은 맑고 깨끗하며

그의 지조와 마음은 곧고 비어있도다.

그의 학문은 넓고, 그의 사귀임은 공경할만 하도다.

고난을 당하되 태연하고 안정하여 학문에 힘쓰니

널리 그의 풍문이 들리도다.

이에 그의 덕을 기리어 84세 장공이 그의 아호를 竹齋라 하노라.

1.2. 서남동은 1976년에 그가 세상에 남긴 두 권의 매우 중요한 저서 중 첫번째 책인 {전환시대의 신학}(이하 {전환}으로 표기)을 펴냈다. 1976년이라면 그가 민중신학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신학적 입장을 새로이 정립하고, [예수ㅗ교회사ㅗ한국교회], ['민중의 신학'에 대하여](1975년 4월) 등 후에 그가 {민중신학의 탐구}에 수록한 글들을 이미 발표한 이후에 해당한다. 그런데도, 그는 {전환}에는 그 두 편의 글은 포함시키지 않았다. 그것은 그가 자신의 신학을 민중신학 '이전'과 '이후'로 확실하게 구분하고 {전환}에는 자신이 '민중신학'으로 개안하기까지의 신학적 편력과 암중모색의 발자취를 총정리하여, 거기에 일획을 긋고 새 출발하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나타낸 것이다.

이 책 {전환}의 머리말에서 서남동은 자신의 생애에 걸친 신학수업 과정을 돌이켜보면서 자신이 매양 새로운 신학적 충격을 받아 그것을 극단으로(radically) 표현해 왔음을 스스로 발견한다. 그 자신의 말에 따르면, 서남동의 생애에는 크게 보아 7번의 큰 충격(즉 깨달음)이 있었다.

최초의 충격은 중학교 2학년 무렵이었다. 그는 목포 앞바다의 무안이라는 한 작은 섬에 태어나 교회도 모르고 자라다가 소학교 5학년 때 목포의 한 교회학교에 진학했다. 거기서 처음으로 성서를 배우기 시작했다. 성서시간에 선생님은 칠판에 성지를 그려놓고 가르쳤는데 지도 위에는 갈릴래아 호수, 요르단 강, 사해를 그려놓고, 거기다 예루살렘과 베들레헴에 점을 찍어 표시한 것이었다. 그런데 중학교 2학년쯤에 그 지도가 지구 위에 있는 땅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받은 충격은 상당히 크고 영속적인 무엇이었다고 한다.

두번째 충격은 일본 도오시사(同志社) 대학 예과를 마치고 신학과 1학년에 들어갔을 때의 일이었다. 일본인 도미노모리(富野森) 교수는 신약문학개론을, 미국인 선교사 캅 교수는 구약문학개론을 가르쳤는데, 그 때 그분들이 가르친 문헌비판에서 그는 처음으로 학문의 엄격성을 배움과 함께 신학적 충격을 받았다. 1941년 대학을 졸업하고 평양에서 성서학교 교사를, 그 다음 해부터 10년간 경상북도 대구에서 목회를 하는 동안에, 그는 일본의 야나이하라(矢內原)의 잡지 {가신(嘉信)}, 칼 바르트, 에밀 부룬너(E. Brunner) 등의 위기신학, 그리고 라인홀드 니이버(Reinhold Niebuhr)의 정치적 실재주의(political realism) 등의 신학으로부터 많은 감화를 받았다. 특히 니이버의 저술 {비극을 넘어서}는 그에게 충격적인 감명을 주었고 {인간의 본성과 운명}도 반복해서 정독했다고 한다. 그것이 세 번째 충격이었다.

그런데 뭐니뭐니해도 그가 받은 신학적 충격 중에서 그의 신학 형성에 가장 크고 영속적인 영향력을 가진 것은 폴 틸리히(P. Tillich)의 신학이었다고 한다. 그는 아마도 1951년에 비로소 틸리히의 {프로테스탄트 시대(Perspective on 19th and 20th Century Protestant Theology)}를 읽었던 것 같은데, 그 논문들을 읽는 동안 여러 가지 충격적인 경험을 하는 가운데 가장 탈자적인 감명은 그의 '싸크라멘트적인 자연관'이었다고 한다(네번째 충격). 산도 하늘도 구름도 물도 숲도 풀도 돌도 바람도 다 신비한 내면을 그에게 열어 보여주고 속삭였다. 이러한 황홀경은 오랫동안 지속되어, 그는 한신대학과 연세대에서 1960년대 중반까지 틸리히의 철학적 신학을 강의했다. 틸리히를 통해서 칼 융(K. Jung)의 심리학을 알게 되어 한때는 그의 저작들을 다 읽었다. {전환}의 '성령'과 '인간'의 항목에 실린 글들의 대부분은 그러한 사상적 분위기에서 쓰여진 것들이라 한다. 또 틸리히에게서는 역사신학을 배우고 특히 그를 통해서 12세기의 요아킴 플로리스(1131-1202)의 '성령의 제3시대'를 알게 되었는데, {전환}에 시종 가장 자주 얼굴을 내미는 신학자는 요아킴임을 발견하고 그 자신도 놀랐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그는 틸리히에 의해 자신 안에 생래적으로 깃들어 있었던 '물활론'과 '범신론'을 촉발시켰던 것 같다고 술회한다.

1955년 서남동은 캐나다 임마뉴엘 신학교로 두번째 유학을 간다. 그 곳에서는 다드(C.H. Dodd)와 불트만의 신약신학, 베르쟈에프(N. Berdyaev)의 종교철학과, 엘리아데(M. Eliade)의 종교사에서 적지 않은 영향을 받은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충격다운 신학적 충격은 1964년에야 그에게 밀어닥쳤다. 그것은 본훼퍼(D. Bonhoeffer)의 {옥중서간}이었다(다섯번째 충격). 그 해에 '세계교회협의회 교회와 사회 협의회'가 있었고, 또 그 후 10년간 계속 구독한 마티 편집의 잡지 {신신학(新神學)}도 그 해부터 읽기 시작했다. 그는 이렇게 고백한다. "현대 그리스도교 신학의 소용돌이는 이 무렵에 일기 시작해서 10년간이라고 하겠다. 그 소용돌이 속에 휘말려든 나는, 세속화론(1965년), 신의 죽음의 신학(1966년), 그리고 다시 희망의 신학(1968년) 등 거듭거듭 밀려오는 신학의 파도를 타고 넘으려고 안간힘을 다했다."

1969년부터 서남동은 "비교적 침착한 마음으로 한국의 신학계를 등지고" 서재에 틀어박혀 현대 과학기술 문명과의 신학적 싸움에 들어갔다. 떼이야르 드 샤르댕(Teilhard de Chardin)의 진화론, 과정신학, 생태학, 반(反)문화, 생명과학 등에서 그는 충격을 받고 전율하면서 거기에 몰두했다(여섯번째 충격). 그 싸움은 1974년 여름까지 계속되었다. 과학과 종교의 종합에 의해 나타날지도 모르는 새로운 우주관과 새로운 신의 출현! 곧 '과학종교'에 대한 그의 집념은 "잠재워버릴 수 없는 미련"이라고 그는 고백한다.

드디어 1975년, 서남동은 그것으로 인해 자신의 삶의 지향이 바뀌고 신학의 주제와 패러다임이 근본적으로(radically) 뒤바뀌며, 그가 감옥으로 가게 되는, 생애 최후의 신학적 충격을 경험하게 된다. 그것은 그 이전의 다른 충격들과는 달리, 외부(구미 신학)로부터 온 것이 아니고 내부로부터, 즉 그 자신의 '삶의 자리'인 1970년대 한국사회의 민중으로부터 온 충격이었다. 그는 {전환}의 서문 말미에 이 새로운 신학적 충격에 대하여 이렇게 써 놓았다.

작년과 금년 내가 받은 새로운 신학적 충격은 본 논문집에는 반영되어 있지 않지만 또한 큰 것이다. 그 충격의 계기들을 밝히는 것은 보류하기로 하되, 나는 그 충격을 '민중의 신학'으로 극단화(radicalize)하고 있다. 나는 이 신학의 미래를 남미 해방신학이나 흑인신학에 못지 않은 또 하나의 '현장의 신학'이 될 것이라고 내다본다. 그리고 내가 지금까지 추구해왔던 어떤 신학보다도 한국교회의 삶에 그 호홉과 음정이 맞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1.3. 서남동이 여기서 암시하고 있는 그 충격의 계기들이 무엇이었을까? 그것이 정리된 형태로 밝혀진 바는 없지만, {전환}을 펴낸 이후 8년만에 묶어낸 {민중신학의 탐구}에 실린 이런저런 글에는 '그 계기들'이 충분히는 아니지만 상당히 많이 밝혀져 있다.

우선 그가 누누히 말하고 있는 김지하와의 만남, 곧 김지하의 담시와 민담에 나타난 신학적 상상력과 그의 정치적 행동을 들 수 있겠다.

다음으로, 1970년대에 한국 역사학계에 대두한 '민중사관'의 영향과 문학 계간지 {창작과 비평}이 주도한 민족-민중 문학, 민중문화 운동의 영향이다. 서남동은 [민담에 관한 탈신학적 고찰]에서 민중사관으로 씌어진 이기백의 {한국사 신론}을 적극 평가하면서, "1960년까지만 해도 국사학의 제1의 과제는 식민사관의 극복이었다. 1970년대에 와서는 지금까지의 지배사관이 아닌 민중사관의 정립이 주요 과제인 것 같다. 이기백의 {한국사 신론}은 민중사관으로 씌어진 대표적인 통사다. 5백면이 넘는 그 책의 맨 끝에 다음과 같은 맺음말이 있다. [지배세력과 민중]이라는 소절이다"라고 말하고, "한국사의 기층세력이면서도 주인 구실을 못하고 지내온 민중이 이제 한 발작씩 지배세력으로 등장하는 길을 닦아가고 있다"는 그 맺음말의 내용을 그대로 인용하고 있다. 또, {창작과 비평}에서 영향받은 것에 대해서도 직접 언급한다. "1975년 쯤에 {창작과 비평}에 지식인들이 민중의 문화활동을 취급하고 민중을 주제로 경제평론이나 정치평론을 한 것을 읽게 되었지요. 신학자들이 민중이라는 주제를 내걸고 신학을 하기 시작한 것이 그 무렵이었습니다."

그러나 사회사적으로 볼 때 날카로운 계기는 1970년 11월 청년노동자 전태일의 분신사건과 그 충격에 의한 지식인과 종교인의 일대 각성, 그리고 민중운동의 폭발적 확산을 들어야 할 것이다.

다음으로 신학적 계기를 살펴 보면, 남미해방신학의 영향이 컸던 것 같다. 그 증거는 첫째로, 송기득과의 대담 [민중신학을 말한다]에서 "우리의 현실문제에 눈을 뜨게 되면서 해방신학에 종사하게 되었고, 그 과제를 한국적 상황에서 문제시하여 이번에는 민중신학에 관여하게 되었습니다"라고 한 데서 확인된다. 둘째로는 그의 신학 메모다. 이 메모는 서남동 신학 형성의 배경과 주요 모티프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점한다고 생각되므로 여기서 좀 자세히 언급하겠다.

1982년, 내가 13여년만에 감옥에서 세상으로 나왔을 때, 서남동 선생은 당시 선생이 원장으로 있던 한국기독교장로회 선교교육원이 있는 서대문 근처의 어느 으슥한 골목의 단골 술집으로 나를 초대해 주었다. 선생은 내게 소주잔을 권하며, 해방신학, 흑인신학, 여성신학 등 현대신학과 제3세계 신학에 관한 정보들을 자상하게 일러주고 나의 신학공부를 격려해 주었다. 그 무렵 나는 가끔 선교교육원으로 선생을 찾아가서 신학 이야기를 나누곤했는데, 어느날 선생은 갓월드(N.K. Gottwald)의 {야훼의 지파들}(The tribes of Yahweh)의 두툼한 복사본을 내게 선물로 주며, "박선생, 이거 읽어보시오. 굉장한 책이오"라고 했다. 책갈피에는 한 장의 신학 메모가 들어 있었다. 그것은 선생이 조금 전에 일러 주었던 내용을 조목조목 적은 것이었다.

[제3세계 신학과 구미 전통신학의 대결]이라는 제목이 붙은 그 육필 메모를 나는 지금도 소중히 보관하고 있다. 이 메모는 서남동 신학 연구를 위한 귀중한 1차 자료가 된다고 생각되므로, 여기 그 내용을 옮긴다.

<제3세계신학과 구미전통신학의 대결>

― 제3세계 신학의 점검과 통전의 모색 ―

1. 제3세계신학자협의회(EATWOT, 1983) 성명윤곽.

2. 송천성(宋泉盛) 신학(문화신학): 창조와 속량의 일치.

3. 남미 해방신학: praxis, 맑시스트 분석방법, 제자직의 그리스도론, 해방의 제3 층위의 일치, 하나의 역사(이원론 극복), 신앙과 이데올로기(eschatological reservation), 라틴아메리카의 종교와 집권세력의 유착

4. 사회사적 방법: 벨로(Fernando Belo); 까잘리스(Georges Casalis); 슈테게만(Wolfgang Stegemann); 노먼 갓월드(Norman K. Gottwald).

5. 피어리스(Aloysius Pieris)의 신학(문화신학): Liberation(가난)+ Incultration (제종교).

6. 흑인신학(문화신학): 해방, 구원, 내세, 흑인문화.

7. 아프리카 신학.

8. 여성신학.

9. 민중신학: 민중현장(연대), 민중사-민중전통-민중문화-민중의 사회전기, 성서적 전거, 사회정치적 현실분석, 한, 민중 그리스도론, 천년왕국, 민중의 교회, 탈신학화, 해방신학과 문화신학의 통전.

이 <메모>를 보면, 그가 해방신학에서 사회정치적 해방의 모티프와 사회분석 방법을 배우고 그것으로부터 자극을 받았으면서도 그의 신학적 관심의 다른 한 극은 언제나 문화신학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두 개의 모티프는 저울대의 양끝처럼 늘 긴장관계에 놓여 있었다. 그는 자신의 민중신학에서 그 두 모티프의 행복한 일치를 추구했다. 그의 민중신학이 이러한 일치에 도달했는지 어떤지를 밝히는 일은 이제부터의 과제다. '메모'의 마지막 항 '해방신학과 문화신학의 통전'은 두 모티프의 일치에 대한 서남동의 희망을 요약한 말이다.

1.4. 장공 김재준이 서남동의 아호를 죽재라고 지은 까닭을 설명한 시구에도 있듯이, 서남동의 독서와 학문은 폭이 넓었다. 그는 구미의 난삽한 신학서적들을 남보다 많이, 먼저 읽고 그것을 정확히 소화하여 한국 신학계에 소개했다. 1960년대 내내 세계신학계에서 논의되는 현대신학의 최첨단 조류를 제때에 전달하여 새 바람을 일으키곤 했는데, 그래서 그는 '신학의 안테나'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한쪽에서는 서남동의 신학하는 태도가 지니치게 유행적이어서 한 신학에서 다른 신학으로 너무 쉽게 넘어가 버리지 않느냐, 도대체 서남동 신학의 정체가 무엇이냐는 평도 있었다.

이에 대한 그의 대답은 동료 신학자 송기득과의 대담 [민중신학을 말한다]에서 직접 들어보기로 하자.

대국적으로 보아 내 신학의 변화는 서구신학의 흐름을 따른 것입니다. 대체로 서구신학은 변증법 신학에서 실존론적 신학으로, 그리고 세속화신학, 신의 죽음의 신학, 혁명의 신학 등으로 흘렀고, 특히 미국에서는 종교와 과학의 관계가 중시되어 테크놀로지, 생명과학 등의 문제가 신학의 중요한 과제로 등장했는데 내 신학의 변화도 대체로 그 길을 따른 셈입니다. 그러다가 우리 현실에 눈뜨게 되어 민중신학을 하게 되었지요. ㅗㅗㅗ 여기서 지적하고 싶은 것은 오늘의 신학은 혼자서 하는 신학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세계신학의 논단에 한 회원으로 참여해야 합니다. 그러다보면 그 흐름에 따른 변화가 자기의 변화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신학의 공동대화의 광장의 변화에 따른 셈입니다. 신학의 흐름이란 그때그때의 시대가 안고 있는 과제에 대한 진실한 접근이지 단순한 유행이 아닌 것입니다. 제멋대로의 자의적인 변화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과연, 그의 저서 {전환}에는 그가 시대의 과제를 안고 노심초사했던 신학적 구도의 자취가 선명하게 각인된 글들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런 글들 가운데 하나가 1967년에 11월 {연세논총}에 발표한 논문 [현재적 그리스도]다. 이 글에서 우리는 서남동의 민중신학 단계를 예비하는 개념들과 발상들을 적지 않게 만나게 된다.

전승이라는 것은 다름 아닌 역사적 지식(Historical Knoledge)이다. 나사렛 예수에 관한 역사적 지식은 후대의 우리들에게 그가 현재하는 유일하고 참된 방식이라고 말할 수 있다. 참된 의미에 있어서 역사적 지식 이외에 우리가 그와 함께 있고 그가 우리와 함께 있는 다른 길은 없다. 이것이 또한 오늘날 해석학이 운위되는 까닭이기도 하다. 해석학은 역사적 지식을 얻는 방법이다.

하나님의 말씀의 사건적 성격이라고 할지라도, 그 사건적 성격은 하나님의 말씀이나 성서적 케리그마의 독점적 성격이 아니라, '역사적 지식' 자체의 본질상 사건적 성격을 띤 것이다. 그리스도의 '말 사건'이 가졌다는 초월적 신적 원인 내지 근거는 해석의 행위에서 유래하는 것이 아니라, 그 역사적 근거 곧 성서가 증거하는 역사적 예수에서 유래한다.

여기에서 이미, 성서 그 자체가 계시인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해방사건이라는 역사적 핵이 계시이고, 성서는 그 민중해방 사건의 역사적 핵(계시)을 담고 있기 때문에 성서가 되는 것이라고 하는 그의 민중신학적 성서관의 단초가 나타나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는 역사적 지식을 강조하는 이유를, "해석학이 일으키는 오해는 교회 선교(케리그마)의 배후에 정체불명의 예수를 상정할 수도 있다"는 염려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또한, [금일적 그리스도]에는, 그가 유고로 남긴 글 [현장의 소리]에서 전개한 '민중 그리스도론' 즉, 루가복음의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그리스도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은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 아니라 '강도 만난 사람'이라고 하는 놀랄 만큼 참신한 발상도 이미 거의 완성된 꼴을 갖추고 있음을 본다. 다만, 당시는 아직 '민중 그리스도'가 아닌 '세속적 그리스도'의 단계였지만 말이다. 인용해 보겠다.

그럼 종교의 시대가 지난 이 세속시대에 그리스도는 어떻게 우리를 찾오시는가, '세속적 그리스도'의 이미지는 어떠한 것인가, 이러한 물음에 대해서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루가 10장)와 양과 염소의 이야기(마태 25장)는 우리에게 세속적 그리스도의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ㅗㅗㅗ 먼저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생각해보기로 하자. ㅗㅗㅗ 누가 그리스도의 이미지를 취하고 등장하는가. 이 물음에 대해서 관례적으로는 사마리아 사람이 그리스도 역을 취했다고 대답한다. ㅗㅗㅗ 단적으로 말해서 여기서 그리스도의 역을 취한 배역은 강도 만난 사람이다. 이것이 세속적 그리스도의 이미지다. 그 강도를 만난 사람, 사경에 처해 도움을 부르짖는 그 사람이, 그 사람의 신음 소리가,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부름을 대신한다. 그 사람에게 대한 태도가 곧 그리스도에게 대한 태도이기 때문이다. 그 사람에게서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하면 아무데서도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한다. 거기에서 그들의 구원과 멸망이 결정된다. 그는 나에게 인간이 되라고 호소한다. ㅗㅗㅗ 나의 사람됨의 실현을 촉구하는 그 이웃의 신음소리는 전통적인 용어로 표현되어온 내 구주의 음성이다.

다음으로 서남동은 이 논문에서 '탈그리스도교'라는 주제도 언급한다. 그는 약속된 그리스도의 내림은 우리의 인간성을 실현하도록 촉구하는 '고난받는 이웃'으로 구현된다고 말하고(여기에서 말하는 이웃은 개체적이면서 단체적이고 개인적이면서 사회적인 이웃이라고 부언한다), 오늘의 교회가 고난받는 형제의 얼굴에서 내림하는 그리스도의 얼굴을 인지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히브리 민족의 종교의 실패를 반복하는 것이 될 것이며, 그리스도교(Christian Religion)는 그 전통적 그리스도론 때문에 이같은 비극을 반복하는 것이 될 것이라고 우려한다. 이것이 그리스도교 교회사가 지금 겪고 있는 위기인데, 이 위기는 갱신이냐 탈출이냐의 기로에 우리를 세운다. 유대교에서 그리스도교가 탈출해 나왔듯이 성서적 신앙(Biblical faith) 내지 그리스도교 신앙(Christian faith)도 역사적 그리스도교에서 탈출해 나와야 한다고 제안한다.

여기서 그는 요아킴 플로리스의 '성령의 제3시대'의 예언을 떠올린다. 그리고 묻는다. "제3시대의 내용은 무엇일까?"라고. 그는 이어서 "가톨리시즘과 프로테스탄티즘에 다음가는 에큐메니즘, 종교개혁 시대 소종파 신앙의 후예인 급진적 그리스도교(radical Christianity), 혹은 세속화와 희망의 신학의 어느 것일까, 아니면 유대교, 그리스도교에 다음가는 휴머니즘일까, 아니면 종교와 형이상학에 다음가는 과학일까, 그도 아니면 위에 열거한 세 가지 것들의 제3시대적인 삼중적 합류일까?"라고 자문한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의 이런 물음과 탐색은 1970년대에 민중신학으로 수렴되었다고 하겠는데, 그의 물음 꼬리에 붙어 있는 '삼중적 합류'라는 말은 질기고 긴 여운을 남긴다. 그의 민중신학은 때로는 분광기를 통과하지 않은 빛, 또는 여러가지 광물성분이 뒤엉킨 거대한 원광석 덩어리처럼 느껴지기도 하는데, 그 비밀은 바로 이 삼중적 합류에 있었던 것이 아닐런지?

[금일적 그리스도]라는 이 글이 그의 민중신학 첫 논문이 발표된 1975년 보다 8년이나 앞선 1967년에 발표된 것임을 감안하면, 그의 신학에서 중단 없는 연속적 진화의 궤적을 읽을 수 있다. 우리는 여기서 서남동의 민중신학은 그의 1960년대 '전환시대의 신학'의 연장이자 '세속화론'의 비판적 계승이라는 것, 그의 '탈신학'조차도 신학과의, 말하자면 '연속적 불연속' 관계에 있다는 것을 무리없이 말할 수 있다. 그 불연속성 내지는 비약의 계기는 '전태일의 죽음'으로 상징되는 '1970대 민중'에 의해 주어졌던 것이다.

1.5. 서남동은 신학교를 졸업하는 제자들에게 한의 사제가 되라고 권했다. 한국사회의 모순, 비리와 제도적 구조적 악을 외면하고 권력과 지배계층을 축복하며 가난한 자, 눌린 자들의 울분과 저항정신을 마취시키는 관념적 지배신학을 벗어던지고, 민중의 상처를 싸매주고 민중의 갈망에 호응하고 민중의 가슴 속에 응어리진 한을 풀어주는 한의 사제가 되라는 것이었다.

애굽에서 학대받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신음소리, 최저생계비도 받지 못하는 근로자들의 신음소리, 무직에서 범죄로 다시 죄수로 떨어져 국민이라는 울타리 밖으로 추방당한 소외계층의 신음소리, 여리고로 가는 길에서 백주에 강도를 만나 사경에 이른 사람들의 신음소리, "고문, 조롱, 결박, 투옥, 불 속에 던져지고 돌로 맞아 죽고 ㅗㅗㅗ 양과 염소의 가죽을 몸에 두르고 질질 끌리며 학대받으면서 토해내는 울부짖음"(히브 11,34-38), 광야 산중 암혈 토굴에 버려진 한의 곡성, 곡식을 거둔 농민에게 지불되지 아니한 품삯의 소리 ㅗㅗㅗ 이 소리가 지금 땅에 가득 찼다.

땅에서부터 하늘에 호소하는 아벨의 피소리(창세 4,10)를 대변하고, 여리고 길에서 강도 만나 뺏기고 얻어맞는 이웃의 신음 소리를 듣고 그 아픈 상처를 싸매주고, 일꾼들에게 지불되지 아니한 품삯이 하늘에 들리도록 외치는 소리(야고 5,4) ㅗㅗㅗ 이 '소리의 내력'을 밝히는 한의 사제가 되어야 할 것이다.

죽재 서남동, 그 자신이 한의 사제가 되어, 그의 생애의 종장을 1970, 80년대 한국민중의 '한풀이'에 쏟아바쳤다. 그러다가 미국으로 카나다로 일본으로 소리의 내력을 전하느라 종종걸음치고 돌아온 날, 그만 김포 공항에서 쓰러졌다.

2. 안병무

2.1. 안병무는 서남동과 함께 1970년대 초부터 민중신학의 묘목을 심고 가꾸어 왔다. 1922년 6월 23일 평안남도 안주에서 태어난 그는 한 살 때 어머니 등에 업혀 북간도로 갔다. 일제 식민지 시대의 조선 민중은 혹은 일제의 탄압을 피해서, 혹은 독립운동에 뜻을 두고, 혹은 입에 풀칠할 길을 찾아서 북간도로, 중국으로, 러시아, 미주로 떠나갔던 것이다. 그는 간도 명동에서 소학교 4학년 때 어느 마을에서 교회 십자가를 보았는데, 그것이 "누군가가 우리 대신 죽었다"는 뜻이라는 설명에 이상한 감동을 받아 교회에 다니기 시작한 것이 그리스도인이 된 계기였다고 한다.

1950년 서울대학교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1956년 독일 하이델베르크 신학부에 유학했다. 1965년에 귀국, 그가 1950년대에 창설했던 중앙신학교 교장에 취임, 학교를 재건했다. 1969년에 월간지 {현존}을 창간, 1980년 군사정권에 의해 폐간될 때까지 그의 절제된 실존적 언어, 서구신학의 교양과 개성 있는 성서해석으로 한국 그리스도교계에 '안병무 독자권'을 형성할 정도로 깊은 영향을 미쳤다. 1973년 독일 동아시아 선교회의 후원으로 한국신학연구소를 설립하고 한국 최초의 본격적인 신학전문 계간지 {신학사상}을 창간, 현대 서구신학의 본격적인 소개와 한국신학의 형성이라는 과제에 기여했다. 1975년, 당시 대학에서 제적된 젊은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일종의 '지하신학교'를 선교교육원에 개설, 그 졸업생의 상당수가 오늘날 민중교회 목회자가 되었다. 1970년 이래 한국신학대학에서 신약성서학을 가르쳐 왔는데, "역사의 예수는 알 수 없다는 결론밖에는 가져온 것이 없다"는 귀국 소감과는 달리, 그는 불트만 학파의 신학을 위시한 서구신학의 정수를 가져와 한국신학계에 신선한 자극을 주었고 수많은 제자를 길러냈다.

1975년과 1980년, 두 번 교수직에서 강제해직 당했다. 1977년에는, 그 전해 3.1절 예배에서 발표된 '민주구국선언' 건으로 함석헌, 문익환, 김대중, 서남동, 이우정 등과 함께 투옥되어 1년간 옥고를 치렀다. 이 때 일생의 지병이 된 심장경색증이라는 질환을 얻었다. 병이 악화해 두 번이나 목숨을 담보한 대수술을 받았고, 이따금 병원에 입원한다. 또 이런 건강상태로 인해 외출과 활동에 제약을 받는다. 그런 까닭으로, 민중신학자이면서도 민중의 삶 한 가운데 뛰어 들지 못하는 것을 늘 아쉬워 하며 그것을 자신의 한계로 자각한다. 대신에 다락방 서재에 칩거, 깊은 사색과 독서로 그의 성서해석과 민중신학에 깊이를 더했다. 그는 항상 죽음을 가까이하고 살면서, 자신의 죽음을 화제로 사람들을 웃겨 배꼽을 잡게 하는 뛰어난 유머감각을 가졌다. 그의 말이나 글은 위트와 기지가 풍부하고 매끄러운 단문이어서 쉽고 재미있게 읽힌다. 비유법에 탁월하고, 촌철살인(寸鐵殺人)의 비판정신은 그의 말과 글의 생명이다.

스스로 교회를 몇 개나 세웠고 일생을 설교자로 살아왔지만, 목사 안수는 끝내 받지 않았고, 한국의 기성교회에는 희망이 없다고 잘라 말한다. 따라서 그와 그의 신학에 대한 교회쪽의 시선은 곱지 않다. 일생 동안 단 한 번을 제외하고는(고은 시인의 결혼주례) 누구의 결혼 주례를 선 적이 없다. 임종이 가까우신 어머니의 마지막 소원을 거역할 수 없어 마흔 여섯에야 결혼은 했다지만 아직도 이념적으로는 독신주의자이기 때문이다. "그 분 아직도 살아계신가?"라는 인사를 받으면서, 1987년에 대학에서 정년퇴직했고, 3년전(1992년)에 고희 기념논문집을 증정받았고, 최근 자신의 전집 20권을 손수 정리해 출판하고자 했을 정도로(이 중 한길사에서 6권 출간) 수복(壽福)을 타고났다고나 할까(고 서남동 선생에 비하면!). 1992년에 창립된 한국민중신학회의 초대 회장을 지냈다.

2.2. 그와 필자의 관계는 자못 각별한 데가 있다. 서남동, 안병무의 민중신학의 비판적 계승자로서의 자의식을 가지고 있는 필자인 만큼, 그와의 개인적 관계를 좀 언급할 필요를 느낀다.

나는 감옥에 있는 동안 아내를 통해 그의 서재로부터 신학서적을 빌려다 읽곤 했다. 선생은 감옥에서 갓 나온 내게 한신대 교역과에서 신학과정을 마칠 수 있도록 주선해 주었고, 과정을 마치자마자 당시 선생이 소장으로 봉직하던 한국신학연구소의 학술부장이라는 중책을 맡겨 주었다. 또 서남동 안병무 현영학 서광선 김용복 등이 함께 하는 '월례 민중신학 연구모임'에 참석할 수 있는 기회도 베풀어 주었다.

나는 한국신학연구소에서 격동의 1980년대를 그와 함께 지내면서 선생의 신학적 발상법과 탁월한 상상력으로부터 깊은 자극과 많은 배움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을 큰 행운으로 여긴다. 한국 민주화 투쟁과 민중운동이 1987년 6월 대투쟁의 절정을 향해 고조되고 있었던 1986년 무렵, 당시 한국신학연구소에서 일하고 있던 젊은 민중신학연구자 그룹 멤버들(이정희, 강원돈, 박재순, 최형묵, 그리고 필자 등)은 시위현장의 열기와 체루 가스 냄새를 몸에 뭍힌 채로 그의 서재에 밀고 들어가 이른바 '짜내기 작전'을 전개한 결과, {민중신학 이야기}(이하에서는 {이야기}로 약칭)라는 민중신학의 한 '작품'을 산출할 수 있었다. 제자들의 질문에 답하는 형식으로 엮어진 이 책은, 안병무의 탁월한 신학적 상상력과 깊은 연구와 사색, 개성 있는 화법이 종횡무진 펼쳐지는 가운데 '민중신학의 본질'을 관통한 새 스타일의 신학서로 평가되고 있다.

그 무렵 나는 그를 두 번 인터뷰했다. 그 중 하나는 [민중을 발견하기까지]라는 제목으로 {이야기}에 수록된 것이고, 다른 하나는 가톨릭 잡지 {생활성서}에 게재된 것이다. 나는 잡지사 편집실의 두 수녀와 함께였는데, 그분들이 자아내는 묘한 내성적 분위기에 편승, 평소 궁금해 하던 것을 좀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문: 선생님은 한국사회에서 가장 대우받는 학자, 박사, 대학교수에, 그리스도교계 지도자이시고 사회적 명사이시죠. 선생님의 사회적 지위는 민중과의 거리를 불가피하게 가질 수밖에 없는 그런 위치에 있다고 할 수 있겠는데요, 그리고 선생님은 저택이라고까지는 할 수 없어도 이런 좋은 집에 사시면서 이런 조용하고 멋진 서재에서 사색을 하시고, 게다가 늘 건강이 안 좋으셔서 조심해야 하고, 그러니 저 밑바닥 인생들과 섞이기가 어렵단 말이죠. 그러면서도 선생님으로 하여금 민중신학의 최전선을 지켜나가게 하는 추동력은 과연 무엇일까? 이것이 늘 궁금하단 말입니다.

답: 글쎄, 그것이 제일 어려운 질문이예요. ㅗㅗㅗ 민중을 생각하면 돌아가신 나의 어머니를 생각하게 되고, 북간도에서 만났던 찢어지게 가난했던 동포들을 생각하게 되고, 또 '영포'란 아이를 생각하게 돼요. 그들에 대한 나의 감정이 예수에 대한 감정과 한치의 오차도 없이 꼭 포개어지는 걸 느껴요.

그는 이어서 말했다. 요즘에 와서 그 북간도 민중의 기억이 어머니의 얼굴과 함께 무서우리 만큼 생생하게 되살아 난다고. 해방후 한국전쟁을 거쳐 이제까지 살아오면서 무수하게 만났던 억울하고 비참한 사람들, ㅗㅗㅗ 목포 디아코니아에서 만났던 폐결핵환자들, 그들이야말로 어처구니 없이 짓밟히고 가장 무시당하고 가난에 찌들어 살아온 민중이라는것, "그들의 모습이 오늘의 민중의 현실과 겹쳐 나를 떠나지 않지요 ㅗㅗㅗ"라고.

그 날 인터뷰를 마치기 직전에 한숨 돌리는 기분으로 나는 가볍게 물었다. "선생님은 혼자 골방에서 지내실 적이 많으시죠. 또 오래 지병하시며 누워계실 때가 많은데, 그런 시간에 보고싶은 사람, 그리운 얼굴은 없으신지요?"(혹시나 기나긴 총각시절, 하이델베르크에서 사귀던 어느 여인에 관한 회상이라도 듣게 되지 않으려나 하는 기대감을 암시하면서ㅗㅗㅗ.)

그런데, 그의 대답은 너무나도 뜻밖이었다. 서재로 쓰고 있는 다락방의 지붕을 가리키며, "이게 가건물이거든, 비가 오면 비 떨어지는 소리가 굉장하지, 그 요란한 빗소리를 듣다가 나는 갑자기 폭동을 그리워해요. '민중봉기를!' 이 그리움, 오래됐어요. 내가 거리로 달려나가지 못하지만 뭔가 일어나기를 기다리고 있단 말야. 내가 잡혀갈 사람이지. 가장 그리운 것이 4.19 혁명 같은 거. 모두가 일시에 왁 일어나 항복시키고 마는 그런 사건이 그리워요. 내게는 제일 보고싶고 그리운 게 그거예요. 종말론적인 환상이라 할 수 있겠지만, 세상이 완전히 한 번 바뀌는 그런 개벽이 그립지, 개인의 얼굴 따위 뭐 그리 그립겠소."

언제 멎어버릴지도 모르는 낡은 시계 같은 그렇게도 형편 없는 심장을 가진 그가, 그 심장으로 폭동을 그리워하다니! 그에게 그리운 얼굴은 '개인'이 아니라 '사건'이었던 것이다. '민중사건' '예수사건' '하나님사건' 등, 민중의 '집단적 영혼'이 그려진 '예수민중의 얼굴'이었다. 그는 "예수도 하나님도 '사건'이다"라고 주장한다. 개인(individium), 또는 인격(persona)으로 이해하는 것보다는 사건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정확하고 이해하기도 쉽다는 것이다.

'현장의 신학' '사건의 신학'을 하는 그가, 격동의 1980년대를 그 흔한 시위현장 한 번 나가볼 수 없으면서도, 생동하는 문체의 다이나믹한 현장신학을 산출할 수 있었던 것은 실로 경이로움 그 자체이지만, 그의 사무친 그리움이 '화산맥' '예수사건의 분출' 따위의 신학적 메타포로 결실했으리라.

나는 민중의 사건을 거대한 하나의 화산맥에 비유하지요. 하나의 화산맥이 여러 시대를 두고 흘러오면서 각각의 역사적 상황에서 분출하는 것으로 보고 있어요. 그 화산맥이 예수시대에 거대한 활화산으로 터진 사건이 바로 예수사건이다, 이렇게 보고 있고 그 화산맥이 지금 이 시대에도 면면히 역사의 지각 밑을 흘러가고 있다고 봐요. 그래서 오늘 한국에서 일어나는 민중사건들도 단절된 독립적 사건들이 아니라, 2천년전의 예수사건과 맥을 같이 하는 사건들이라고 보고 있어요. 이것이 중요한 건데, 내가 추구하는 건 현존(現存)의 그리스도, 즉 '내가 오늘 이 시대에 어떻게 나타나는가' 하는 데 있어요. 그가 오늘 여기에 민중의 사건을 통해서 나타나고 있다, 그러니까 2천년전의 예수를 추구하는 것이나 교리상의 그리스도를 추구하는 것은 넌센스다, 중요한 것은 오늘의 그리스도가.―.나의 언어로는 오늘의 예수사건이.―.어디서 어떻게 일어나느냐 하는 것이다, 그것은 기존체제 안에서 일어나는 것도 아니고 기존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거기로부터 소외당하고 버림받고 쫓겨난 '성문 밖'.―.예수는 예루살렘의 성문 밖에서 처형당해 죽었지요.―.에서 일어난다, 이렇게 보는 겁니다.

신학함에 있어서 그의 현장감각은 언제나 젊은 제자들을 능가한다. 그는 반드시 삶의 현장, 역사의 현장, 사건의 현장으로부터 질문을 얻어 그 질문을 성서에 던진다. 성서로부터 답이 되돌아 올 때에도 언제나 현장에 의해 성서가 재조명되어, 성서의 진리가 새롭게 밝혀짐으로써 괄목상대하게 되는 그런 방식으로 답이 이끌어내진다. 그의 설교를 듣거나 글을 읽어보면 그가 얼마나 이런 해석학에 충실한지 알게 된다.

2.3. [민중을 발견하기까지]와 {갈릴래아의 예수}(이하 {예수}로 약칭)에서, 안병무는 그가 서구의 학문적 신학으로부터 탈(脫)하여 드디어 텍스트 배후의 '예수민중'을 찾아내기까지의 긴 도정을 말하고 있다. 다음은 {이야기}의 [머리말]을 필자의 언어를 가미하여 발췌 요약한 것이다.

일생을 통한 나의 관심은 '신학'이 아니라 '역사의 예수'였다. 이 말은, 예수에게 집착한 것은 아카데믹한 관심에서가 아니라 예수의 삶을 찾아 거기에 참여하고 싶은 목적에서였다는 뜻이다. 불트만의 공관복음에 관한 전승사적 연구는 텍스트의 객관화를 시도한 진지한 노력의 산물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 작업의 결과는 '케리그마화한 그리스도상'으로 예수상을 산산조각 낸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의 책을 정독한 후의 나의 생각은, "그리스도 케리그마의 핵은 역시 역사의 예수가 아니겠는가? 역사의 예수 없이 그리스도 케리그마가 있을 수 있겠는가? 역사적 실체를 뺀 신앙은 결국 도케티즘(docetism)과 무엇이 다르겠는가?"라는 것이었다.

그것은 내가 독일로 가기 2년전(1954년)에 이미 에른스트 케제만(Ernst Käsemann), 귄터 보른캄(Günter Bornkamm) 등 불트만의 제자들이 제기한 문제와 같은 것이었다. 그들에 의해 소위 역사의 예수 운동이 다시 신약학계에 대두하였으나, 모두 양식사의 테두리와 케리그마의 그리스도를 전제로 했기 때문에 근본적으로는 불트만을 넘어설 수 없었다.

양식사에 의해서 복음서 전체가 와해되는 것을 방지하려는 노력은 편집사적 연구방법으로 구체화되었다. 그것은 복음서 기자들을 각기 신학적 틀을 가진 편집자들로 보고 그 틀에서 예수를 보려고 한 것이다. 그 결과 복음서들이 전체로서 재조명되게 되었다. 그러나 편집사적 연구에서 치명적인 것은 '복음서 편자들의 신학'을 발견했으나 '역사의 예수'에 대해서는 오히려 더 멀어지는 결과에 떨어졌다는 사실이다. 아무튼, 서구신학의 영역에서 예수를 추구하던 나의 노력의 결과는 역사의 예수에 대한 불가지론에 이른 것뿐이었다.

우리는 오랜 세월 저 서구신학자들의 물음과 대답을 소화하고 전달하는 것이 신학자들의 과제인 줄로 알아왔다. 그러던 중, 1960년대 말에 이르러 어떤 역사적 계기에 우리는 큰 충격과 함께 서구신학의 깊은 잠에서 깨어났다.

박정희 군사독재정권 아래서 많은 비극적 사건이 일어났다. 고난에 찬 민중의 절규는 교회와 신학의 게토 안에 안주하고 있던 목회자들과 신학자들의 귀에 까지 들려왔다. 달리 말하면, 민중의 신음 소리가 사회와 그리스도교 사이를 갈라놓았던 담을 헐어버린 것이다. 우리는 민중의 고난에 대해 신학적으로 대답할 필요를 느꼈으나 전통적인 케리그마 신학은 전혀 대답이 될 수 없었다. 우리는 아무런 신학적 정리를 못한 채로 민중의 현장에 끌려들어 갔다.

민중과의 제휴는 자동적으로 고난을 수반했다. 고난의 현장에서 우리의 '물음'이 달라졌고, 그 자리에서 뜻밖에도 복음서에 그려진 '수난의 예수'를 만나게 되었다. 예수가 갈릴래아로 간 까닭, 거기서 민중과 더불어 산 하나하나의 '이야기'가 단순히 신앙이나 학문의 대상이 아니라, 바로 지금 여기서 우리가 당하고 있는 현장과 현실의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동시에 갈릴래아의 예수와 민중은 서로 구별되지 않는 예수민중으로 하나였고, 예수민중과 한국민중이 서로 피가 통하는 관계가 되는 체험을 했다. 우리는 드디어 역사의 예수를 '우리의 현장'에서 만난 것이다!

2.4. 전통적인 신학에서는 삶과 실천은 신학과 별개의 영역이다. 신학은 오로지 이론적 영위이며 실천의 매개 없이 그 자체로서 완결적이다. 실천을 말하는 경우에도 기껏해야 신학이론의 적용이라는 부차적 필요에서일 뿐이다. 전통적인 신학에서 말하는 '신학화하다'(to theologize, theologisieren)는 순전히 개념적인 이론화 작업을 말한다.

이에 반해서, 민중신학에서는 먼저 지금 여기의 민중의 고난에 참여함으로써 신학의 물음이 바뀐다. 이것은 민중의 눈으로 본다는 말과 같은 말이다. 즉 시좌(視座)가 바뀌는 것이다. 그 물음이 성서 안에서 해답을 찾다가 성서의 '민중'(오클로스)을 발견하게 되었고 그 오클로스의 현실과 오늘의 민중의 현실이 공명을 일으켜 전통적인 대답과는 전혀 다른 '대답'을 얻게 되었다. 이 경우, 물음은 민중의 물음이고 대답도 민중의 대답이다. 민중의 삶의 자리에서 나온 민중의 물음이 아니면 성서는 침묵하고 만다. 민중예수의 이야기 책인 성서는 민중의 물음이 아니면 그 물음에 돌려줄 대답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 안병무가 얻은 대답은 무엇이었나? 그것은 첫째로, '예수사건'과 '민중'(오클로스)의 관계에 관한 것이다. 지금까지는 예수를 '개인'(individium)으로 보고 '나사렛 예수(개인)=그리스도'라는 신학적 도식에 귀착, 거기에 안주했다. 그러나 민중사건을 경험함으로써 그 충격에 의해 열린 눈은 예수 개인으로부터 예수를 둘러싼 이름 없는 민중, 오클로스에게로 초점을 이동하게 되었다. 그들은 전에는 예수를 드러내는 배경에 불과했었다. 서양의 성서학자들은 생동하는 민중 오클로스가 예수사건을 일으키는 또 하나의 주체로서 텍스트 안에서 살아 움직이고 있는 것을 보지 못했다. 이름 없는 민중 오클로스가 예수의 공생애 첫 출발점에서부터 예수를 에워싸고 있었는데도, 그들의 눈은 거기에 미치지 못했다. 그들은 오로지 예수에게만 시선을 빼앗겨("주 예수 만을 바라보라!") 예수만을 연구했고 예수 혼자서 모든 것을 다 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안병무는 아주 놀라운 것을 보고 말았다. 그것은 '예수와 민중은 예수사건 속에서 둘이 아니고 하나!'라는 사실이었다. 안병무는 그들을 '예수민중'이라 부른다.

실제로 텍스트에서는 민중들이 예수로 하여금 예수되게 하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예를 들어 예수가 병을 고친다 할 때, 이름 없는 민중들이 예수에게 몰려와 병을 고쳐줄 것을 그에게 강청(强請)하고 예수로 하여금 병을 고치지 않을 수 없도록 강제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예수는 그들에게 "네 믿음이 너를 고쳤다"고 했다. 복음서 안에서 예수는 고립된 개인이 아니라 민중사건 한복판에 민중과 혼융일체가 되어 있는 존재였다. 예수와 민중이 분리되어 있으면 그것은 이미 예수가 아니다. 복음서 안에서 예수는 오직 예수민중으로만 존재한다. 그러므로 예수민중은 예수의 다른 이름이다. 여기에서 서구신학의 '예수'와 '민중'이라는 주객도식은 설 자리를 잃는다.

안병무가 얻은 두번째 대답은 "우리 안에 예수가 있다"는 것이었다. 예수는 갈릴래아의 민중과 하나인 것만이 아니라 오늘의 한국 민중과도 하나라는 것이다. 예수민중은 2천년 전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오늘 여기'에 한국의 민중으로 실재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지금 일어나고 있는 한국의 민중해방 사건은 예수민중이 일으키는 사건, 곧 '오늘의 예수사건'이 되는 것이다.

이상과 같은 것을 보는 데는 상상력에 의한 발상의 비약이 필요했다. 서구신학에 길들여진 눈에는 신학이라는 '비늘'이 끼어있어서, 상상력을 방해하고 있었다. 그런데, 비늘이 떨어지는 충격은 한국의 1970년대 민중사건들로부터 왔던 것이다.

3. 신학자들과 민중신학

신학자들! 그들의 존재가 있었기에 민중신학의 탄생은 가능했다. 이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서남동의 안테나는 1970년대의 온 하늘 땅에 편만했던 민중의 소리를 감지하여 그 '소리의 내력'을 신학적으로 대변하는 예리한 촉수였고, 안병무의 역사의 예수에 대한 간단없는 추구는 민중신학이라는 단비를 부르는 기나긴 목마름이었다. 1970년대 한국사회와 민중운동사의 현장이 민중신학이라는 새 생명이 자라는 태였다면, 신학자는 산파, 아니 더 적극적으로 산모였다고 할 수 있으리라.

다시 강조하거니와, 신학적 훈련을 충분히 쌓은 탁월한 신학자의 매개역할이 없다면 창조적인 신학의 산출은 불가능하다. 단 그들의 신학적 훈련이 책과 강의실과 연구실에서의 논리와 학(Wissenschaft)에 그치지 않고, 민중의 생활과 문화라는 넓은 바다로 합류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전태일의 죽음, 김지하의 문학과 저항적 행동만이 아니라, 신학자들의 언어와 삶에서도 '두 이야기'(성서 및 교회사의 민중전통과 한국역사의 민중전통)는 합류되었다. 민중신학자들, 특히 서남동과 안병무의 신앙과 인격 속에서 격렬하고 극적인 합류가 일어났던 것이다.

다른 신학자들이 로마-그리스도교적 전통만이 그리스도교라는 좁은 생각에 안주하여 정체된 말놀이에 빠져있을 때, 그들은 서구신학의 허구성을 꿰뚫어보고 그 신학이라는 게토를 탈출, 1970년대 군부독재정치 상황과의 대결을 통해 한 새로운 신학적 창조를 이룩한 것이다. 이것은 한편으로는 서구 신학에 대한 반대요 저항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서구신학의 비판적 계승이었다. 그들이 정열을 불태워 연구, 흡수했던 서구신학의 적극적(positive)인 요소들이 한국의 민중경험과 그들(신학자) 안에서 합류한 것이다. 이것은, 서구의 진보신학에는 한국의 민중신학과 '접점'이 될 수 있는 요소가 무르익어 있었다는 것을 말해 준다. 우리는 여기에서, '상황'에 대한 신학자의 대결이 진실하고 치열하면 그 접점에서 창조적 신학의 섬광(spark)이 일어날 수 있다는 하나의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엄혹한 1970년대의 상황에서 시대의 가장 어둡고 불의한 세력에 정면으로 도전장을 던졌던 그들의 용기 있는 신학적 발언은 그 자체로서 그 시대 사람들의 잠든 의식을 꿰뚫는 예언의 화살촉이었다. 돌이켜 보면, 적어도 1970년대의 민중신학자들은 그 시대의 민중과 더불어 순결했다. 그들의 치열한 신학언어는 말이면서 행동이자, 순교자적 헌신 그것이었다.

신학자들은 자신의 삶 속에서 두 전통의 합류가 일어났다는 것을 확고히 의식하고 있었다. 그러한 자의식을 가지고 그들은 1970년대 한국 민중현장에서 일어나고 있는 합류의 사건들을 증언했다. 그리고, 그 '증언'을 신학적으로 정리해내는 과정에서 민중신학이라는 한 새로운 신학이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된 것이다.

제4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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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

1. 역사에 있어서의 민중

(한국사의 맥락에서 본 민중ㅗ민중의식의 형성)

1.1. 3.1 운동 이전까지의 민중ㅗ민중의식의 형성

한국역사에서 민중과 민중의식의 형성과정을 연구하여 민중을 해명하는 데 크게 기여한 사람은 사학자 정창열이다. 그는 민중을 "정치, 경제, 사회적인 모순에 의한 억압과 수탈을 받으면서 그러한 억압과 수탈을 해체시키기 위하여 싸우는 주체로서의 인간집단"으로 이해한다. 이러한 동태적인 성격의 민중 개념이 1970년대 이후 한국사회에서 널리 쓰이고 있으나, 민중에 대한 과학적인 개념은 아직 애매하다고 하면서, 민중을 피지배계층 일반으로 보거나 또는 지배계층에 의해 왜곡되고 억눌리고 소외되는 인간 집단 일반으로 광범하게 규정하면 민중이 초역사적인 존재로 되어버려 그 실체가 모호하게 될 우려가 있다고 지적한다.

그는 [백성의식, 평민의식, 민중의식]에서, 지배계층의 권위에 복속되어 순종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획득하기 위해 싸우는 인민이라는 동태적인 민중 개념을 제시하고, 이러한 민중과 민중의식이 역사적으로 어느 시기에 어떻게 형성 발전되어 왔는가, 특히 지배계층의 강제에 의해 규범화된 지배 이데올로기를 인민이 어떻게 내재적으로 극복하면서 스스로를 민중으로 정립하였는가에 초점을 두고 탐색한다. 그는 민중의식은 '백성의식→평민의식→민중의식'의 순으로 역사적으로 형성되어 왔다고 보고, 한국사의 14세기 말에서 18세기 중엽까지를 백성, 백성의식의 시기로, 18세기 중엽에서 1876년 개항까지의 시기를 민중은 형성되었으나 의식에 있어서는 민중의식에 이르지 못한 평민, 평민의식의 시기로, 1876년 개항 이후에서 오늘까지의 시기를 민중, 민중의식의 시기로 구분한다.

아래에서는, 정창렬의 논문 [백성의식, 평민의식, 민중의식]에 크게 의존하면서 한국사의 문맥에서 민중과 민중의식의 형성을 살펴볼 것이다. 필자는 정창렬의 이 논문이 '한국 민중'의 한 역사적 패러다임을 제시한 글이라고 평가하고 있으며, 한국 민중신학의 민중 이해는 정창렬이 제시한 민중 패러다임과의 창조적 대화를 통해 전개됨이 바람직하다고 확신하고 있다.

⑴ 백성ㅗ백성의식

15, 16세기에 확립된 조선왕조의 사회경제 체제는 지주-전호제(地主-佃戶制)를 기둥으로 한 것이었다. 대다수의 백성, 즉 농민은 농노적인 전호로 존재하고 지주인 양반이 정치적 지배, 문화의 창조 및 문화의 향수(享受)를 독점하였다. 따라서 백성은 양반계층과 국왕에게 절대 복종해야 하는 인간 유형으로 정립되었다. 그러한 관계를 위한 지배 이데올로기는 '민본'(애민, 愛民) 이데올로기였다. 그 내용은, 군주는 국가에 의존하고 국가는 민에 의존한다. 그러므로, 민은 국가의 근본인 동시에 군주의 하늘이다. 따라서 부모가 자식을 애지중지하여 젖먹여 기르듯 통치자는 민을 아끼고 길러야 하고, 민은 통치자를 친부모처럼 존경하고 따라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와 같이 민본 이데올로기는 통치자의 인정(仁政)을 기본으로 한 것이며 정치사회의 안정과 질서는 '인정'에 대한 백성의 귀복(歸復) 여부에 달린 것이다. 백성은 주체적인 존재로서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통치행위의 객체일 뿐이었고, 기본적으로는 이러한 민본 이데올로기에 몰주체적으로 매몰되어 있었다. 따라서 이들 백성에게는 인간사회의 모순은 뚜렷하게 의식될 수 없었다. 그 결과, 백성은 양반의식에 대립하는 백성의식을 가질 수 없었고, 인종(忍從)과 공순(恭順)의 윤리를 바탕으로 인정을 기대하며 임금님을 받드는 정치객체로서의 분(分)에 안존(安存)하는 백성의식을 갖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백성은 양반문화와는 다른 그들 자신의 '백성문화'를 가지고 있었다. 민요 민담 전설 민속놀이 부락굿 등 백성문화는 양반문화의 용인 아래 존속했으나 어느 정도는 인간사회의 모순을 반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예를 들면, 부락굿을 통하여 백성들은 그들의 공동체적인 결속을 다지면서 일년 내내 양반에게 억눌려 지내온 불평불만을 털어놓을 수 있었다. 부락굿을 통한 농민의 공동체적 결속이 양반의 지배질서를 위협하지 않는 한에서 부락굿은 조선왕조의 양반질서의 영속화에 기여하는 것이기도 하였기 때문이다.

백성문화는 양반문화에 예속된 채, 봉건사회의 질서유지에 기여하면서 주체적인 독립성을 결여하고 있었지만, 다음과 같은 점에서 미래의 민중의식ㅗ민중문화 형성에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다.

① 조선왕조의 백성은 그 뒤의 민중의 역사적 전신이었다. 따라서 백성의식, 백성문화는 오늘날의 민중의식, 민중문화의 역사적 모체였다. ② 백성은 생산노동의 담당계층이었기 때문에 백성의식, 백성문화는 체념적 비관적이지 않고 건강성을 간직하고 있었다. 예를 들면, 우리의 민요에는 한이 그 자체로서 노출되거나 직접적인 복수심으로 표출되는 예는 거의 없고 많은 경우 한이나 원(怨)을 해학에 의해 극복하는 건강성을 간직하고 있었다. ③ 백성은 언어, 문화, 전통적 심리와 정서 등의 공통성을 강화하면서 전근대적 민족구성체가 되어 갔다. 이런 점에서 백성집단은 한국 근대 민족형성의 역사적 모체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⑵ 평민ㅗ평민의식

조선왕조의 봉건사회는 17, 18세기에 이르러 커다란 변화를 나타낸다. 신분적 특권에 의해서가 아니라 부를 바탕으로 하여 토지를 집적하여 지주로 성장한 서민지주가 대두하고, 시장의 확대와 농업생산 기술의 향상에 따른 '경영형 부농'(經營型富農) 또는 광작농민(廣作農民)이 대두했다. 상공업에서는 부상대고(富商大賈)가 등장하여 상인자본을 축적하는 한편, 독립수공업자에 의해 상인을 물주(物主)로 하는 '선대제(先貸制) 매뉴팩처'가 성립했다. 그 결과 농민의 계층분화가 격렬하게 전개되어 수많은 농민이 토지 긴박(緊縛)에서 해방되었다. 그 파문은 봉건적 신분제의 동요를 초래, 경제적 부를 바탕으로 한 신분 이동이 일상적으로 일어나게 되었다.

이러한 조선왕조 봉건질서의 동요에 대응하여 한편으로는 동아시아의 주자학적 보편주의를 비판하고 양반문화를 대폭 수정하려는 실학의 의식형태가 일어났고, 다른 한편에서는 봉건질서와 민본 이데올로기의 허구성을 비판하는 백성의 의식과 문화가 일어났다. 실학은 생산력의 제고, 지주-전호제의 개혁, 전국적인 단일 시장권의 형성 등을 지향하였고, 신분제의 근본적 개혁에 의한 주민의 등질화를 전망하고 주권재민의 원칙을 주장하였다. 이는 한국에 있어서 근대적인 민족의식과 민족주의의 싹을 보인 것으로, 양반층이 창조한 문화의 최고봉이었다.

한편, 백성층의 의식은 거납(拒納; 국가에 바치는 납세의 거부), 항조(抗租; 국가, 왕실, 지주에 바치는 지대와 소작료의 거부)와 화적, 민란 등으로 표현되었다. 이러한 행동의 주체는 이미 봉건제의 예속농민에 머무르지 않고 자신의 존재에 봉건질서를 부정하고 저항하는 새로운 내용을 담으려 하는 민중으로 변모하고 있었다. 이들 민중은 양인(良人) 농민과 노비 농민을 주축으로 하고 거기에 몰락양반, 상인, 수공업자가 합세한 광범한 연합체였다. 이는 자기의 고유한 계급적 이해관계를 가진 사회경제적 계급이 아니었기 때문에 조직의 구심점이 없었고, 자신의 세계상도 갖지 못하였으며, 그 저항 역시 지속성이 없었고 일시적 봉기에서 끝났다. 이들의 의식형태와 문화가 평민의식, 평민문화였다.

민란으로 표출된 백성의 의식 가운데는 지주-전호 제도와 봉건적 수취제도, 즉 사회체제에 대한 강한 회의와 비판이 있었는데 이것은 종전의 '백성 단계'에서는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정치의식이었다. 특히 1860년 최제우에 의해 창교(創敎)된 동학에서는 농민층의 희원(希願)이 적극적으로 반영되어 "인심은 곧 천심"(人心卽天心)의 원리가 제시되었다. 이로써 인간해방에의 지향이 평민의식의 한 내용으로서 자리잡았다고 할 수 있다. 동학에는 인간해방의 지향 외에도 민족으로서의 자각과 사회적 해방의 지향도 어느 정도 포함되어 있었다. 또한 봉건제 사회의 불평등과 양반윤리의 허구성을 비판하는 평민의식은 가면극, 판소리와 평민소설 등에서 첨예하게 드러났다.

그러나, 크게 보아 평민의식, 평민문화는 양반사회, 양반문화에 대한 회의와 비판에서 그치고 있을 뿐, 자기 자신을 새로운 사회, 새로운 문화의 담당주체로 자각하는 수준에까지는 이르지 못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이상에서 살펴보듯, 18세기 후반에서 1876년 개항까지 시기의 평민의식, 평민문화에서는 인간해방의 지향이 지배적이었고, 사회적 해방의 지향은 부차적인 것이었으며, 민족으로서의 인식은 매우 낮은 수준에 있었다고 볼 수 있다.

⑶ 민중ㅗ민중의식

평민의식, 평민문화가 개화하여 근대적인 민족의식과 시민문화가 성립되기 이전에 한국은 1876년 개항이라는 새로운 역사적 국면을 맞게 되었다. 개항은 우선 일본에 대한 개항이었지만 일본 자본주의에의 편입을 통한 세계 자본주의 시장체제에의 타율적 편입, 종속이었다. 그리고 세계 자본주의 시장체제는 한국 국내의 사회적 제모순에 매개되면서 한국사에 내재화하게 되었다.

이러한 새로운 국면에 대응하여 한국에서는 대체로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의식형태가 성립되었다. 개화사상, 척사위정 사상, 보국안민 사상이 그것이었다.

개화사상은 약육강식의 세계질서 속에서 국권을 지키고 강자가 되려면 문명 개화하는 것이 유일하고 불가피한 방법이라고 파악하였다. 따라서 목적은 '문명개화', '부국강병'으로 압축되었다. 개화사상, 개화운동에 의해 민족적 위기의식이 크게 각성되었고 나라의 근대화가 절실하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그러나 개화세력은 구미와 일본의 근대문명에 절대적인 가치를 부여하는 근대주의에 매몰된 결과, 민중의 역량을 알지 못하고 한국 민중에 대한 우민관(愚民觀), 민중멸시 의식을 초래하였다. 따라서 민중에 의한 가장 믿음직한 민족운동인 농민전쟁, 의병 투쟁도 근대주의에 의해 그 가치를 판단하여 야만적인 행동이라고 단죄하고, 외국군의 힘을 빌려서라도 그것을 철저히 진압하는 것이 옳다고 인식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부르조아적 민족형성의 코스'를 지향했던 개화사상은 한국근대 민족문화의 형성에 일정한 기여를 했으면서도, 역사의 주체로서 민족과 민중을 전적으로 배제해 버렸기 때문에 한국 근대 민족문화의 중심 주체로는 될 수 없었다.

척사위정 사상은 종래의 북벌론(北伐論), 화이론(華夷論), 존주론(尊周論) 등의 양반문화가 새로운 국가적 위기의식에 의해 재편성된 것이었다. 이 사상의 긍정성은 개항이 선진국의 경제침략을 초래한다는 현실인식이 한국 주민의 근대민족으로서의 결집에 일정하게 기여한 점이었다. 즉, 한국 주민의 근대민족으로서의 결집에 있어서 이정표의 지위에 놓이는 1896년의 의병투쟁과 1905- 1910년의 의병전쟁에서 척사위정 사상은 그 표면적인 이념의 구실을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척사위정 사상의 목표는 봉건적 신분제의 고수, 지주-전호제의 유지, 봉건적인 민본 이데올로기에 의한 지배체제의 재확립이었다. 이것은 말하자면, '양반적 민족형성의 코스'였다고 할 수 있다.

보국안민 사상은 조선 후기에 형성된 평민의식, 평민문화의 흐름이 개항 후의 새로운 역사적 조건에 조응하여 새 단계로 비약하면서 동학의 세계관에서 긍정적인 측면을 적극 섭취하여 새로운 의식, 새로운 문화로 형성된 것이었다. 이 보국안민 사상은 1894년의 농민전쟁, 1898-1899년의 영학당(英學黨) 운동, 1898-1904년의 할빈당(活貧黨) 운동 등의 사상적 기반으로 되었다.

개항 이후의 한국 농민층은 1862년의 37개 지역의 민란이 모두 좌절로 끝난 역사적 체험을 갖고 있었고, 그후 1893년 말까지 45건의 민란이 모두 실패로 끝난 체험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한 좌절 과정에서 농민층은 당연하게 스스로의 독자적인 세계관을 요구하게 되었다고 생각된다. 이러한 요구에 의해서 동학의 다음과 같은 세 측면이 농민층에 의해 수용되었다. ① 인간해방의 지향이었다. ② 기존의 사회질서와 서양의 침략을 총체적으로 부정하고 있는 측면이었다. 즉, 동학의 역사관에 의하면, 개벽에 의해서 선천(先天)의 세계가 끝나고 후천(後天)의 세계가 열리는 데, 기존의 사회질서와 서양의 침략질서는 선천의 세계에 속하는 것이었다. ③ 동학이 인간의 존엄성과 도덕적 각성을 촉구하는 내적 윤리를 확보하고 있는 측면이었다.

보국안민 사상, 곧 농민층의 사회의식은 두 차례의 동학농민전쟁(제1차: 1894년 3-4월 ; 제2차; 1894년 10-11월)을 거치면서 차츰 성장하여, 일체의 타협 없이 농민층 자신의 주체적 역량과 실천에 의해서 봉건체제를 타도하여 인간해방과 사회해방을 이룩하고 일본 침략세력을 이 땅에서 몰아냄으로써 민족의 결집을 이루어내려는 의식체계였다. 여기에서 한국사에 있어서 '민중적 민족형성의 코스'와 상호 부합하는 민중의식, 민중문화가 일단 성립되었다고 보여지며, 이것이 오늘날의 한국 민중의식의 원형이라고 생각된다.

1910년의 한일합방에 의해 이러한 민중의식, 민중문화는 일단 좌절되었다. 그 기본적 원인은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에 있었고, 일본 침략세력과 야합한 국내의 김홍집 개화당 정권, 그리고 그것과 합세한 봉건지주층에게도 있었지만, 민중의식 그 자체에도 커다란 취약성이 있었다. 그것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천부적 인권이라는 의식의 결여와 그 인권을 합리적으로 실현해 가는 능력으로서의 이성에 대한 자각의 결여. 둘째, 사회적 해방을 지향하는 의식에 있어서도 봉건사회의 해체와 세계 자본주의 시장체제에의 편입에 따른 농민층의 분해와 무산자 계급화에 대한 계급적 자각의 결여. 따라서 민중적 민족의 주체를 형성할 광범한 대중적 기반의 결여. 그리고 그 필연적 귀결이지만, 지속적 조직적 투쟁이 아니라 일시적 봉기로서 시종한 것. 셋째, 민중 자신이 정치권력의 담당 주체라는 민주주의적 정치의식의 결여(예컨대, 1894년의 농민전쟁에서도 왕정의 절대성은 끝까지 의심되지 않았다). 넷째, 민족으로서의 결집을 지향한 의식에 있어서도, 외세의 침략에 민족으로서 저항한 것이지 침략세력의 제국주의적 성격을 과학적으로 인식하지는 못하였고, 따라서 반제국주의 민족해방의 방법론을 결여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취약성은 물론 당대의 농민운동의 역사적 한계이었지만, 어쨌든 이상과 같은 이유에서 1876년에서 1910년까지의 민중의식, 민중문화는 그 이후의 것과 질적으로 구분되지 않을 수 없다.

1.2. 1945년 해방까지의 민중ㅗ민중의식의 형성ㅪ

1910년 한일합병까지는 상호배제적으로 또는 비협력, 방관의 자세로 진행되었던 민중운동과 개화운동이 일정한 변용을 거쳐 상호협력하여 전개한 민족독립 운동이 3.1 운동이었다. 그러나 이 협력관계는 다음 몇 가지 요인에 의해서 와해되고 한국의 민족운동은 재편성되었다. 즉, 그 몇 가지 요인이란, 일본 제국주의의 민족분열 정책인 문화정치, 일본 독점자본의 한반도 진출과 이로 인한 한국경제의 일본 자본주의에의 수직적 편입, 일본 제국주의의 한국에서의 예속자본의 육성, 그리고 사회주의 사상의 도입 등이었다.

민족운동의 변모와 재편성 가운데서도 가장 두드러진 것은 3.1 운동 이후로 광범하게 이루어진 노동자단체의 결성과 노동운동, 그리고 농민단체의 결성과 농민운동의 앙양이었다.자산가 지식인 청년 학생 소시민 등에 의한 민족운동은, ㉮ 대자본가층을 바탕으로 한 타협적 민족주의 세력; ㉯ 중소자본가층을 기반으로 한 비타협적 민족주의 세력; ㉰ 민족적 사회주의 세력; ㉱ 계급주의, 세계주의적 사회주의 세력 등으로 분류될 수 있을 것이다. 이 중에서 비타협적 민족주의 세력과 민족적 사회주의 세력이 노동자 농민 운동과 동맹관계에 있었는데, 이 동맹세력이 일제하에 있어서 한국 민족운동의 중심되는 주체였다. 이 세력, 즉 노동자 농민을 근간으로 하고 민족자본가 지식인 청년 학생 소시민 등을 그 동맹자로 한 민족세력이 바로 '민중'이었다.

이 새로운 단계에서의 민중의 특징은, 그 각 구성 부분이 사회계급 계층으로서의 독자성을 가지면서도 당시의 민족적 현실이 요구하는 역사적 과업에 응답하여 하나의 광범한 연합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이 민중은 앞에서 고찰한 바 있는 1910년까지의 민중의식이 결여하고 있었던 요소들, 즉 천부적 자연권으로서의 인권의식, 인간의 이성에 대한 자각, 노동자 농민계급으로서의 사회적 해방의식, 민중의 정치적 주권자 의식, 제국주의의 침략과 지배구조에 대한 인식에 기초한 반제 민족해방 의식 등을, 개인적 수준에서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집단적 수준에서는 확립하기에 이르렀다. 환언하면, 인간해방 의식, 계급해방 의식, 민족해방 의식이 유기적인 체계로 통일을 이룬 것이 민중의식이었다고 생각된다.

고전적 시민혁명을 완수하였던 유럽 선진자본주의 사회의 경우에는 대체로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에서 시작된 인간해방의 과제가 시민혁명에서 완수되면서 민족국가가 형성되고, 이어서 계급해방의 과제가 시작되었다. 이처럼 시간적으로 선후관계에 있었던 인간해방 민족형성 계급해방 등의 과제들이,―.봉건제도를 스스로의 힘으로 청산하지 못한 채 식민지로 전락하였던 한국의 경우에는,―.중첩된 형태로 한꺼번에 부과되었고, 그 과제들을 해결할 주체와 의식체계가 1920년대 후반기에 민중 민중의식 민중문화의 확립으로 나타나게 되었다고 생각된다.

이렇게 확립된 민중의식 민중문화도 1930년대 이후 일제의 단말마적 탄압에 의하여 좌절되거나 지하로 잠복해 버리게 되었다. 1945년의 해방으로 민중의식 민중문화가 개화될 수 있는 계기가 주어졌으나 미소 양극 냉전질서에 편입됨으로써 다시 좌절 국면을 맞게 되었다. 미군정기와 이승만 독재정권 아래서 한국사회는 모든 분야에서 친미 반공세력과 극우 민족주의 세력이 득세하게 되었고, 일제하에서 한국 민족운동의 중심 주체로서의 역할을 감당해 왔던 민중세력은 혹심한 테러와 탄압에 의해 분쇄되고 사회와 정치 무대의 전면에서 모습을 감추게 되었다.

2. 현실에 있어서의 민중

(민중 생활의 현주소)

현실 가운데 있는 그대로의 민중을 파악하는 데는 무엇보다도 민중 자신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보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은 달리 없을 것이다. 사회과학적인 분석방법 등은 그 나름의 기능이 있겠지만 민중 자신의 이야기를 직접듣는 이점을 대신할 수는 없다. 민중신학은 '민중의 자술적 이야기'를 신학의 한 주요한 방법으로 삼고 있다. 이 논문에서도 그와 같은 방법으로 현실의 민중을 제시하고자 한다.

먼저 노동자 시인 박노해의 시 한 편을 소개한 후에, 1970년대를 살아온 노동자 농민 도시빈민 등 기층민중들의 살아온 이야기를 되도록 그대로 옮겨 볼까 한다. 또한, 전태일의 죽음 이후 10여 년이 지난 1980년대 초의 청계천 평화시장 노동자들의 삶이 얼마나 어떻게 달라졌는지도 살펴보려고 한다. 그리고 필자 자신의 옥중 경험도 분단시대를 살아가는 한(조선)반도 민중의 '특수성'을 이해하는 데 보탬이 되리라 생각하여 첨부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지식인(신학자를 포함한 학자들 등)의 머리를 통과한 '추상화한 민중'이 아니라 피가 흐르고 숨을 쉬고 있는 '민중의 실체'에 접근해 보려는 것이다. 민중 개념이 무엇이냐라든가, 민중이 어디 있느냐라는 등의 논의는,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민중 자신의 이런 이야기들을 통해 어느 정도 그 해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우리 세식구의 밥줄을 쥐고 있는 사장님은

나의 하늘이다

프레스에 찍힌 손을 부여안고

병원으로 갔을 때

손을 붙일 수도 병신을 만들 수도 있는 의사 선생님은

나의 하늘이다

두달째 임금이 막히고

노조를 결성하다 경찰서에 끌려가

세상에 죄 한 번 짓지 않은 우리를

감옥소에 집어넌다는 경찰관님은

항시 두려운 하늘이다

죄인을 만들 수도 살릴 수도 있는 판검사님은

무서운 하늘이다

관청에 앉아서 흥하게도 망하게도 할 수 있는

관리들은

겁나는 하늘이다

높은 사람, 힘있는 사람, 돈많은 사람은

모두 하늘처럼 뵌다

아니, 우리의 생을 관장하는

겁나는 하늘이시다

나는 어디에서

누구에게 하늘이 되나

대대로 바닥으로만 살아온 힘없는 내가

그 사람에게만은

이제 막 아장걸음마 시작하는

미치게 예쁜 우리 아가에게만은

흔들리는 작은 하늘이겠지

아 우리도 하늘이 되고 싶다

짓누르는 먹구름 하늘이 아닌

서로를 받쳐 주는

우리 모두 서로가 서로에게 푸른 하늘이 되는

그런 세상이고 싶다.

― [하늘](박노해)

1.1. 장영근씨(농민)

1.2. 이옥순씨(도시빈민)

돌이켜 보면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서울 부근의 성남시에까지 어떻게 흘러들어 오게 되었는지 참으로 아득하기만 합니다. 우리 집은 동해안 삼척에서 장사를 하며 별 어려움 없이 살았고, 그래서 나는 어릴 적에는 고생이란 잘 모르고 자랐습니다. 스무살에 지금의 남편과 결혼해서 강원도 사북 탄광으로 왔습니다. 남편은 내색 않고 묵묵히 일을 했지만 일이 무척 힘든 것 같았습니다. 밤이면 숯검뎅이가 되어 기진맥진해서 돌아오곤 했습니다. 그런 남편이 전혀 낯선 사람처럼 보여 비명을 질렀던 적도 있었습니다.

광부의 아내들에게 언제나 따라 다니는 걱정은 툭하면 일어나는 사고 걱정이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남편도 1977년 6월 사고로 다리를 다쳐 한달 동안 일을 나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 정도는 다른 사람들에 비하면 가벼운 상처였습니다. 사고로 죽는 것도 무서운 일이지만 평생을 불구자로 지내야 하는 경우도 몸서리쳐지는 일이었습니다. 어서 빨리 탄광촌을 벗어 났으면 하는 생각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당장의 생계 때문에 탄광촌을 벗어나기란 쉽지 않았습니다. 남편은 가끔 친구들과 술을 마시고 들어오면, "우리 여기서 한 3년만 더 벌어서 시골에 가서 땅 사가지고 농사짓고 살자"고 입버릇처럼 말하곤 하였습니다(사실 광부들은 술을 많이 마십니다. 작업은 힘들고 끊임 없는 사고의 불안 때문에 늘 술에 젖어 있기 마련입니다).

그러던 어느날(1978년 12일), 퇴근 시간이 지났는데도 남편이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사고가 나서 구조작업에 들어갔다는 연락을 받고 정신없이 광업소로 달려가보니 남편은 살았으나 같이 일하던 남편의 친구가 죽었습니다. 그 부인과 아이들을 볼 때 가슴이 무너지듯 하였습니다. 그 뒤로도 이런 일이 자주 있었고 그 때마다 얼마나 놀라고 슬퍼서 많이 울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다른 시련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1982년 2월무렵 남편은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습니다. 약 한달간 50여만 원을 들여 이런저런 치료를 받았지만 차도가 없었습니다. 큰 병원에서 X-레이 검진결과 진폐결핵 중증이란 판정이 나왔습니다. 진폐증은 광부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병인데 그 중에서도 중증 환자는 치료가 거의 불가능 하다고 했습니다. 회사측에서는 퇴직을 종용했습니다. 4월 10일자로 퇴직을 하고 여기저기 빚진 것을 갚고나니 수중에는 동전 한닢 남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어쨌든 강원도를 뜨기로 하였습니다. 우리 아이들만은 광부로 만들어서는 않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입니다. 우리 가족은 서울로 가자니 방 얻을 돈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방세가 가장 싸다는 성남시로 이사하기로 결정하고 친구에게 사정해서 100만 원을 빌렸습니다. 남편은 동해시에 있는 산재병원에 입원하게 되어 이때부터 나는 남편과 떨어져 가정을 책임지게 되었습니다.

빌린 돈 100만 원 중에서 이사비용 30만 원과 월세 보증금 60만 원을 제하고 나니 수중에는 다시 무일푼이 되었습니다. 이사한 집은 산꼭대기에 있었는데 나는 도시에서 사람들이 이렇게 산꼭대기에 집을 짓고 살거라고는 상상도 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장마철에는 비가 새서 부엌의 그릇이란 그릇은 다 갖다가 물을 받아야 했습니다. 수입이라곤 남편이 불치의 병에 걸린 대가로 받는 월 20만 원 남짓한 돈이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 중에서 월세로 매달 6만 원을 내고 나면 두 아이의 학비와 생활비는 어림도 없었습니다.

성남에 정착한 지 두 달쯤 지나서 이웃 아주머니 소개로 장갑 공장에 나가게 되었습니다. 아침 8시부터 밤 8시까지 점심 먹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단 5분도 쉬지 않는 고된 일이었습니다. 종업원은 장갑짜는 기술자들, 세탁하는 아줌마들, 실밥뜯는 아줌마들, 그리고 장갑을 비닐에 넣는 아줌마들이 있었는데, 나는 장갑을 비닐봉지에 넣는 일을 하였습니다. 장갑은 고급품으로 백화점에 납품한다고 했고, 사장의 남편은 따로 봉제공장을 하나 더 경영하고 있다고 하는 걸 보면 꽤 많이 수입을 올리고 있는 듯 했습니다. 그런데 월급이 너무나 적었습니다. 특히 내가 하던 일이 제일 박해서 하루 12시간씩 한달 꼬박 일을 한 대가가 6만 5천 원이었습니다.

이렇게 5개월을 나가다가 그 돈가지고는 도저히 살 수가 없어서, 가방공장에서 일거리를 가져다 실밥뜯는 일을 시작했습니다. 가방 한 개의 실밥을 뜯는 데 10원씩이었는데, 그나마 일이 얼마든지 있는 것이 아니어서 한달 내내 일에 매달려 3만 원을 벌었습니다. 결국 이것도 집어치우고, 이번에는 쉐터 공장에 들어갔습니다. 일당 2천 5백원에 시간 외로 일한 것까지 해서 8만 원 정도를 받으니 장갑공장에 다닐 때보다 낳았으나 일은 더 고됐고 일요일도 일을 시키기 때문에 교회에 나갈 수가 없어 그것이 제일 괴로웠습니다.

결국 다른 공장으로 옮기게 되었는데, 이 공장은 종업원이 1,500명이나 되는 큰 봉제공장이었습니다. 월급이 10만원 정도로 먼저 공장보다 약간 더 많아 좋았지만 그 만큼 어려운 일도 많았습니다. 처음엔 누구나 시다 일을 하는데 미싱사 1명에 시다가 2명씩 딸렸습니다. 미싱사는 대개가 젊은 아가씨들인데 시다는 태반이 사오십대 아주머니들인 것이 문제였습니다. 어떤 미싱사 아가씨는 엄마뻘 되는 시다 아줌마들을 함부로 부리고 욕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도 아줌마들은 미싱사에 딸린 시다라서 꾹 참기 일쑤였습니다. 더 어려웠던 것은 여반장 때문이었습니다. 공장 안에는 각 작업반 별로 길게 늘어앉아 일을 하게 되어 있는데, 맨 앞 높은 자리에 여반장이 앉아 빈틈 없이 감시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다가 누군가가 마주 앉은 사람과 눈짓이라도 주고 받을라 치면 당장에 마이크로 "제××번 한눈팔지 말아요" 하는 앙칼진 소리를 듣기 마련이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힘든 것은 야간 작업이었습니다. 아침 8시부터 밤 8시까지가 기본 근무시간이었고, 수출품 공장이기 때문에 일이 밀릴 때는 보통 밤 10시, 때로는 새벽 2-3시까지 일을 시킬 때가 많았습니다. 그러니 집안 일을 도저히 할 수가 없어서 이 공장에도 오래 다닐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런 일 저런 일로 옮겨 다니다가, 성남시의 부자들이 모여 산다는 우성 아파트의 계단 청소부로 일하게 되었읍니다. 매일같이 계단을 청소하고 광택내는 약으로 계단의 쇠를 닦는 일이었습니다. 그밖에도 잔디밭의 풀뽑기, 지하실 청소 등 일은 많았습니다. 아파트 주민에게 섭섭한 마음을 품을 때가 간혹 있었습니다. 가만히 있어도 줄줄 땀이 흐르는 찌는 여름날, 계단청소를 다 하고 돌아서 나오는데 자기네 집 현관 청소한 먼지를 계단에 쓸어내리는 것이었습니다. 다 같은 사람인데 저럴 수가 있을까 하고 분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금은 그 일을 그만두고 파출부 일을 하고 있습니다. 여러 집을 다니며 파출부 일을 하는 동안 저는 참 많은 것을 느꼈습니다. 처음에 간 집은 세무서 직원이었고, 그 다음은 보험회사 사원, 그 다음은 어느 관서의 공무원이었습니다. 나는 그런 사람들이 사는 모습을 보고 내가 사는 세상과는 천양지간으로 다른 세상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엄청난 부자가 아니라 중류정도라고 하는 데도, 우리 이웃들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방마다 값비싼 가구와 전자제품들, 부엌에는 온갖 주방기구들이 다 갖춰져 있는데 거의 외제였습니다. 아이들 간식도 고급 케랺 우유 딸기 토마토 수박 사과 바나나 등 계절마다 고루 먹이는데, 우리집 아이들과 이웃집 아이들을 생각하면 서글픈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가 사는 산동네 아이들을 보면, 몇십 원짜리 과자도 못사 먹고, 어린 것들이 사달라고 조르면 매로 다스리는 것이 고작입니다. 양쪽 아이들을 비교하면 가슴이 미어지듯 아팠습니다.

주거환경도 그랬습니다. 우리들은 20평 남짓한 게딱지 만한 건물에 네 가구가 오글오글 살고 있는데, 저들은 30-40평이나 되는 아파트에 4-5명이 편안히 살고 있으니 얼마나 큰 차이입니까? 지금 다니는 집은 이제까지 다녀본 중에서 제일 부자집입니다. 아침 9시부터 저녁 5시까지 청소, 빨래, 밥짓는 일을 하고 월 10만 원을 받고 있습니다. 40세 남짓한 부부와 아이 둘, 모두 네 식구라서 일도 그리 많지 않고 해서 꽤 만족하고 있지만 이 집 씀씀이에 비하면 참 초라한 액수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런 집 아이들은 수영 강습 받는 데도 1인당 10만 원씩은 쓰고 있으니까요.

물론 공부도 많이 하고 능력도 있어서 그렇겠지만 마흔 살 갓넘은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돈이 많을까 하는 것도 참 궁금한 일입니다. 얼핏 들으니 이 아파트 말고도 아파트가 두 채쯤 더 있다고 합니다. 그렇다고 이들을 시기하거나 미워해 본 적은 없습니다. 다만 내 생활, 아니 그보다는 내 이웃의 생활을 생각해보면 그저 가슴이 답답해질 뿐입니다.

1.3. 조만영(노동자)

1.4. 전태일 사후 12년, 평화시장 여성노동자의 삶

최진숙 : 나는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에 진학하고 싶어 사흘간 밥도 안 먹고 울기도 했지만 집안 형편 때문에 공부를 계속하기는 어려웠어요. 이듬해, 서울에서 공장에 다니는 이모가 구정을 쇠고 올라갈 때 나도 따라 나서게 되었어요. 고향을 떠나오면서 엄마 아빠한테 "나 서울에 올라가서 돈 많이 벌어서 다달이 부쳐 드릴테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하고 인사했더니 아빠는 나를 객지에 혼자 보내는 것이 속상하셔서 아무 말씀도 못하셨어요.

서울에 올라온 그 아튿날 이모가 일하는, 서울운동장 뒤에 있는 쟘바 만드는 공장에 취직을 했어요. 그런데 공장에 들어서자 마자 나는 너무 실망하고 말았어요. 서울의 공장 하면, 텔레비젼에서 보았듯이 여공들이 예쁜 까운을 입고 스카프 쓰고 깨끗한 공장에서 몇백 명이 일하는 것인 줄 알았는데, 이 공장은 너무나 적은 데다 들어서자마자 숨이 콱 막힐 지경이었어요. 비좁은 공장에다 다락까지 있고, 어둡고 먼지 투성이인 공장 속에 사람들이 옴지락옴지락 모여서 짐승처럼 일하고 있지 않겠어요. 이모가 구석의 미싱자리룰 가리키면서 저기가 네가 일해야 할 자리라고 가르쳐 주더군요. 나는 어떻게 저 속에서 일하나 싶었어요.

나는 취직한 지 3일 째 되는 날부터 야단을 맞기 시작했어요. 그 날 점심시간에 점심 먹고난 후 학교에서처럼 점심시간이 끝날 때까지 노는 것인 줄 알고 밖에 나가 놀다가 점심시간이 끝나자 들어 갔더니 공장장 아저씨가 막 화룰 내면서 야단을 치는 거예요. "시다 주제에 건방지게 점심시간에 논다"고요. 또 미싱이 하도 신기해서 나도 미싱을 밟아보고 싶어서, 대뜸 올라가서 밟았더니 미싱이 갑자기 '드르륵' 소리를 내면서 빠른 속도로 천을 박는 통에 나는 깜짝 놀랐어요. 재단사 아저씨는 막 나룰 야단치면서 내가 건방지대요. 공장에 들어온 지 며칠도 안된 것이 미싱에 올라갔다고 말입니다.

일하는 시간은 아침 8시나 8시 30분에 시작하여 오후 1시부터 2시까지 1시간 동안 점심을 먹지만, 바쁠 때는 점심시간이 없지요. 일을 끝내는 시간은 저녁 10시인데, 10시까지 할 때는 8시쯤에 100원짜리 빵 하나 하고 요구르트 1개를 간식으로 주지요. 그런데 10시에 다른 사람들이 일을 끝내고 가더라도 우리 시다들은 계속 남아서 11시 30분까지 밀린 시다 일을 다 하고 또 그날 끝낸 옷의 실밥을 다 따고나야 집에 갈 수 있어요. 나는 집이 금호동인데 퇴근해서 집에 가면 12시가 넘고, 씻고 저녁밥을 먹고 잠자리에 들면 새벽 1시가 됩니다. 다음날 아침에 또 6시 30분에 일어나야 합니다. 그래도 나는 다른 사람에 비해 편한 것 같아요. 이모가 나보다 일찍 일어나 해 주는 밥 먹고 다니니까요. 다른 애들은 자기가 밥을 해먹고 다니니까 여간 힘든 게 아니예요.

지금 이 공장생활이 비록 고생은 되지만 열심히 일해서 빨리 오야(미싱사)가 되어 돈 많이 벌어서 엄마 아빠 팔도강산 구경시켜 드리고 싶고 엄마 아빠 편히 모시고도 싶어요.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내 꿈이 어려워질 것만 같은 느낌이 드네요.

문혜영 : 저는 어렸을 때는 집에서 별로 고생하며 자라지는 않았는데, 공장에 취직해 시다 생활을 시작하면서 너무 어마어마한 고생을 한 것 같아요. 1976년도에 처음 아동복 만드는 공장에 취직했는데 평화시장이 아닌 창신동 가정집 공장이었어요. 그때는 통행금지가 있었을 때였지요. 미싱사 언니들은 버스 막차가 떨어지는 시간에 맞추어 밤 10시 반에서 11시에 퇴근했어요. 출근시간은 물론 아침 8시 30분이었고, 바쁘면 출근시간도 30분, 더 심하면 1시간까지 앞당기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시다도 마찬가지였는데 저와 또 한 아이는 집이 바로 공장 근처에 있었기 때문에 11시 40분이 우리들의 퇴근시간이었어요. 시다들의 아침 출근은 8시였는데 저는 늘 7시면 출근해서 미싱 연습을 해야했지요. 그 시간이 아니면 배울 시간이 없었으니까요. 점심시간엔 기계가 고장이 난다고 재단사가 못하게 하거든요.

김명선 : 저는 공장에서 침식을 했어요. 우리 공장은 츄리닝 만드는 곳이었는데 중부시장에 있었지요. 이곳도 조금 전에 나온 이야기와 같이, 미싱사나 출퇴근하는 시다들이 11시에 퇴근하면 나처럼 공장에서 침식하는 시다들은 남아서 새벽 2시까지 일하다가 깜빡 잠이들죠. 그러면 통행금지가 풀리는 새벽 4시 싸이렌이 울리고, 우리는 다시 일어나 물건을 가게에 배달해 주어야 했어요.

사장은 돈을 아끼느라고 완성된 옷을 지겟군을 불러서 가게에 실어내지 않고, 그 많은 물건을 수십 개의 보따리로 만들어 우리 시다들이 머리에 이고 한 줄로 서서 중부시장에서 평화시장의 가게까지 운반하게 했지요. 그런 진풍경을 새벽마다 연출해야 했어요. 그때가 1979년도였는데 무척 고생이 되었으나 힘들다고 생각지는 않았어요. 조금이라도 돈을 벌어 시골에서 고생하시는 부모님께 보내드려야 겠다는 생각뿐이었으니까요.

서럽고 괴로왔던 것은 ㅗㅗㅗ 철야작업을 할 때 동생이 졸다가 오야한테 야단 맞는 것을 볼 때 였습니다. 어린 동생이 살기 위해 남한테 야단 맞는다 싶어 속상해서, 내가 더 큰 소리로 동생을 야단을 치고나서는 또 그것이 서러워 서로 부둥켜 안고 울어버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어요.

시다할 때 오야의 심부름거리는 정말 가지가지였어요. 약 사다 주고, 라면 끓여 주고, 먹을 것 사다 주고, 하다 못해 생리대까지 심부름 해 주었어요. 그런데도 미싱사 언니들은 "너희들, 그래도 요즘은 얼마나 좋아진 건지 아니? 이 만큼 좋아진 것도 전태일이라는 남자가 죽었기 때문이야"라는 말을 하곤 했죠. 그래서 호기심이 많던 저는 자세히 알고 싶었으나 언니들도 자세히 모르고 해서 공장장님한테 물어봤더니, 그 공장장은 단지 질이 안 좋은 재단사인데 누가 써주지도 않고 해서 성질나서 자살했다고 하더군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지만 달리 알아볼 도리가 없었지요.

최진숙 : 저는 지금의 공장에서 1년 4개월간 일을 해왔어요. 현재 봉급은 13만 원입니다. 매일 밤 11시까지 일했음에도 불구하고 월급 명세서에는 시간외 근무 수당 내역은 적혀 있지 않고, 다만 본봉과 가불 액수만 적혀 있을 뿐이에요. 그러니까 지금까지 시간외 수당이나 생리수당이라는 것을 받아본 적이 없어요.

처음 취직했던 공장이 대인복 만드는 공장인데 보통 밤 11시에 퇴근했기 때문에 무척이나 피곤했어요. 그러다가 미싱사 언니를 따라 옮긴 곳이 중앙시장에 있는 공장이었는데, 이 공장은 퇴근이 저녁 8시로 정해진 공장이었지만 바쁠 때면 철야작업을 했어요. 그 공장에서 저녁 8시 이후의 작업에 대해서는 시간외 근무 수당을 지급해 달라고 사장한테 요구하여 그것이 합의가 되었었지요. 그런데 그 합의는 결국 한번도 실행되지 않았어요. 사장은 계속 미루다가 나중에는 흐지부지 안 주고 말더군요. 초과근무의 수당을 달라는 것도 아니고, 하루 10시간 30분을 일해 주고 그 이후에 일한 시간에 대한 수당을 달라는 것인 데도 이렇게 주지 않는 거예요.

그 공장에서 월 12만 원까지 받다가 지금의 공장으로 옮겨온 후 월 13만 원씩 받게 되었어요. 그 중 4만 원을 계돈으로 넣고, 4만 5천 원을 보험료로, 2만 원을 밥값으로, 그리고 나머지 1만 5천 원을 교통비와 잡비로 써요. 그런데 그 공장이 그만 문을 닫게 되어 한 달 남짓 일한 것도 떼이고 지금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어요. 사장이 얻어준 방 한칸에 다른 시다애 하나와 함께 남아 있는데 쌀도 반찬도 다 떨어지고, 일주일째 굶주리고 있어요. 다행히 나는 미싱사 언니네 집에 가서 하루 한 끼씩 얻어먹어 그런대로 견딜 수 있지만, 친구는 안집 주인이 가끔씩 갖다 주는 식은 밥으로 겨우 연명하고 있어요. 이제는 그 방에서 마저 쫓겨나야 할 형편이에요. 주인은 방세를 못받게 생겼으니 빨리 내 보내려 하고 그 친구는 오갈 데도 없고 돈은 한푼도 없으니, 정말 어떻게 했으면 좋을지 모르겠어요. 물론, 노동부에 진정을 냈으나 노동부에서도 대책이 없다고 해요.

김명선 : 저는 츄리닝 만드는 집에서 5년간 일했는데 그만 둘 때쯤엔 A급 미싱사로 19만 원을 받았어요. 하지만 츄리닝이 아닌 다른 직종의 경우 A급 미싱사들이 24만 원을 받는다기에, 돈도 돈이지만 기술 배울 욕심으로 아동복 만드는 공장으로 일자리를 옮기게 되었어요. 그래서 다른 오야들이 25만 원 받을 때 22만 원을 받으면서도 열심히 일했지요. 그 결과 공장에서 나올 때쯤엔 24만 원을 받게 되었어요. 그 후 줄곧 그 액수를 받고 있지요. 퇴근은 저녁 9시, 바쁘면 10시까지 연장 작업을 하지요. 그렇다고 따로 시간외 수당이 나오는 것도 아니지요. 요새는 객공(客工)으로 일을 하는데, '비철'이어서 한 달에 10만 원 정도밖에 못벌어요.

동생과 같이 객지 생활하며 돈을 모으겠다고 허리를 졸라 매고 있지만, 조금 모아졌다 싶으면 몸이 아프든지, 집에서 사고가 난다든지 해요. 그리고 집에서 부모님이 영농자금 빚진 것 이자 갚고 원금 조금 갚고, 그러고 나면 아무 것도 안 남아요. 동생과 둘이서 만 8년간 일했는데 손에 쥔 것이라곤 지금 살고 있는 월셋방 보증금밖에 없어요. 객지생활이란 정말 암담해요.

이성숙 : 저는 원래 몸이 건강한 편이어서 직장에 다니면서 처음 1, 2년간은 전혀 아픈 곳이 없었어요. 감기 한 번 안 걸리고 일을 했었는데, 시다일이 밀릴 때 화장실에 가고 싶어도 참으면서 억지로 일하는 것이 버릇이 되다보니 이것이 나중에 신장염이 되어버렸어요. 처음엔 변비인줄 알았는데 나중에 병원에 가서 진찰한 결과 신장염인 것을 알게 되었어요. 이것이 지금도 완전히 낫지 않은 상태라 조금만 무리해도 몸에 힘이 쭉빠지는 등, 매우 안 좋아요.

문혜영 : 저도 특별히 병을 앓는다든가 하는 일은 거의 없었어요. 그런데 제품공장에 나온 지 3년쯤 되었을 때 위벽이 헐었다는 진단을 받았는데, 2년여 동안 고생을 했어요. 일할 때 아침밥은 새벽 5, 6시에 먹고, 점심밥은 급히 먹은 다음 먹자마자 일하고, 저녁 7-8시경이 되면 속이 쓰리고 배가 고프지만 억지로 이 시간을 참았다가 11시에 퇴근해서 그제서야 저녁밥을 먹고자 해도 식욕이 당기지 않아서 제대로 못먹게 되고, 이런 것이 1년 2년 지나 습관이 되고 쌓이다 보니까 위를 버리고 만 거예요. 그러니 무엇을 먹어도 쉽게 체해서 고생을 하곤 하죠. 그것 때문에 괭장히 노력을 해서 지금은 대충 고쳤어요.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온 몸이 나른하면서 등과 이마에 식은 땀이 맺히고 손가락을 들었다 내렸다 하는 것조차 힘들어지는 증세가 생기게 되었어요. 영양제 빈혈치료제 등 끊임없이 약을 복용하는데 계속 안 좋은 상태고, 거기에다가 장염까지 겹쳐서 몸을 주체하기도 힘들어요. 이것이 직업병인 것만은 확실해요. 시다 때 너무 고생을 했고 또 미싱사가 된 다음부터는 일이 너무 많아서 생긴 병이거든요. 나 정도의 경력을 가진 친구들이면 거의 열에 아홉은 이렇게 아파요. 남들이 나한테 일류 미싱사라고 하지만, 일류 환자이기도 하죠. 그래서 "청계천 여자는 시집가서 3년 써먹으면 고물된다"는 말이 있나 봐요.

이성숙 : 그런 소리 무척 많이 들어요. 생리통 방광염 위장병 안질 동상 변비 관절염 중 한둘은 누구나 다 가지고 있는 병인 것 같아요. 나는 미싱사 4년여의 경력이 있는데 이만한 경력에는 적어도 세 가지 이상의 병이 따라붙는 것 같아요. 특히 생리통이 너무 심해서 저는 아예 아무 것도 못하는 때가 많아요.

김명선 : 겨울이면 참 일하기 힘든 게 한두 가지가 아니예요. 그 추운 공장에 난로 하나 없이 발은 동상에 걸리고, 손은 시리고, 온몸이 얼어 붙는 것 같아요. 원래 건강한 체질이었는데, 요새는 숨쉬기도 힘이 들어요. 폐가 나빠진 것인지 어디가 나빠진 것인지 걱정 돼 죽겠어요. 사진을 한 번 찍어봐야 겠어요.

배인숙 : 모두 그래요. 먼지를 많이 먹기 때문에 기관지가 약해지고 잔기침이 많이 나고 눈이 매워서 안질에 걸려요. 주위에 폐결핵 앓은 친구가 여러 명 있기도 해요. 저는 요새 다리가 아파서 일도 못할 지경이예요. 처음엔 관절염 초기인 줄 알았는데 그것은 아닌가 봐요. 진찰을 받아 보아야 하겠는데 여태 병원엘 가 보지 못했어요. 돈이 없으니 계속 미뤄지는 거죠. 심하게 아플 땐 다리가 붓고 온 몸이 붓는 때도 있어요. 걸음도 걸을 수 없어요. 주위의 친구가, "햇빛을 못 보아서 그런가 보다. 너는 '태일'이 오빠 수기도 못봤니?" 그러면서 웃은 적도 있어요. 아무튼 다리가 너무 아파서 한 달 이상 미싱을 못밟고 있어요. 대부분의 미싱사들이 겪는 경험이지요.

문혜영 : 그래요. 누구든 아프고 사고가 나면 몇 년 허리띠를 졸라매고 모은 돈을 일시에 날려버리고 빚더미에 올라앉게 되죠. 의료보험 혜택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근로기준법이 있다지만, 최소한의 법마저 지켜지지 않고 있잖아요. 그 중에서도 특히 작업시간이 긴 것이 가장 큰 문제예요. 잠시도 쉴 여유 없이 사니까 산다는 것이 하나도 즐겁지 않은 것이 우리들의 삶이 아닌가 해요. 아침 8시에서 밤 10-12시까지 이렇게 짐승처럼 일을 시키는 공장이 너무 많아요. 심지어는 매일 밤 철야하는 공장도 많지요. 제발 우리들도 하루 8시간만 일하고 자기생활을 가질 수 있는 사회가 되었으면 정말 좋겠어요. 이런 것을 포함해서 노동자가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는 두말 할 나위 없이 노동조합을 인정받아 조합을 통해서 여러 가지가 개선돼야 하겠지요. 정부당국은 노동운동을 탄압하지 말고, 노동운동의 자유를 보장해 주었으면 좋겠어요. 현재로서는 전태일 오빠가 죽은 후에 만들어진 '청계피복노동조합'을 하루 빨리 합법적으로 인정받는 것이 가장 급선무겠지요.

최진숙 : 저도 언니의 말에 전적으로 동감이예요. 무엇보다도 여유 있게 살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주위에 특권 있는 사람들도 우리를 인간으로 대해 주었으면 좋겠어요. 인격을 무시당하고 너무나 억울한 일 서러운 일을 겪을 때가 많아요. 그리고 좀 더 좋은 환경에서 일하고 싶어요. 일하는 작업장이 돼지우리 같아요. 지하실은 통풍시설이 전혀 안돼 있고, 계단은 가파라서 엉금엉금 기어야만 되고, 숨막히는 다락방 작업장의 먼지는 너무 많이 쌓여 점심 먹을 때는 먼지와 밥을 비벼 먹는다는 웃지 못할 소리가 있어요. 이런 것들이 다 개선되었으면 좋겠어요.

이성숙 : 나는 얼마전까지만 해도 사회의 통념대로 대학을 졸업해야만 인간이 된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노동조합의 교육을 통해서 적어도, "집안이 어려워 배우지 못했지만 기쁜 마음을 가지고 노동자로서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나의 희망은, 한 사람의 노동자라도 노동조합을 알게 되어 조합을 통해 노동자로서 자부심과 긍지를 가지고 기쁜 마음으로 살았으면 좋겠어요.

김명선 : 남녀가 혼숙하는 공장이 없어졌으면 좋겠어요. 한창 자랄 나이에 작업장에서 그대로 먹고 자니 제대로 성장할 수도 없고, 또한 남녀 혼숙으로 말미암아 성도덕이 문란해지는 것은 전적으로 사업주들 책임이 아니겠어요? 제발 작업장에서 자는 짐승 같은 생활이 아닌, 기숙사다운 기숙사가 있었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한창 자랄 나이의 청소년 근로자들이 밥이라도 푸짐하게 먹을 수 있는 제도가 마련되었으면 좋겠어요. 물론, 이런 것들이 단순한 바람만 가지고는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요. 우리들이 굳게 단결하여 그 단결된 힘으로 개선해야겠지요.

1.5. 분단시대 한(조선)반도 민중의 비극적 삶

3. 주제로서의 민중

(민중신학의 민중 이해)

3.1 민중신학의 주제 민중

서남동은 민중신학의 주제가 '예수가 아니라 민중'이라고 선언했다. 서남동 자신의 말에 따르면 이것을 깨닫게 된 것은 일본의 성서학자 다가와(田川建三)의 마르코복음서에 대한 편집사적 연구인 {원시그리스도교 연구}를 참조한 결과라고 한다.

다가와는 마가복음서를 분석한 결과 '민중'이 주제라고 판단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적어도 마가의 신학에 서면 '오클로스'를 '군중'이라고 번역하는 것보다, 정치신학적인 용어인 '민중'으로 번역하는 것이 훨씬 타당하다고 봅니다. 그리고 마가의 신학에서 보면 '예수'는 민중을 대표하는 '상징'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인데, 나는 신학적으로 이런 사고가 옳다고 봅니다. 하나님이 인간으로 오신 것은 순전히 인간을 섬기려 한 것이지, 인간에게 예배받자는 것이 아니거든요. 민중이라는 것이 하나의 인격적 존재로 기술될 필요가 있을 때 거기에 예수가 나타난다고 다가와는 말했는데, 결국 마가복음서가 그리려 한 것은 예수가 아니고 '민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민중이 한 사람의 인물로 나타난 것이 예수이니까요.

'마르코복음서가 그리려고 했던 것은 예수가 아니고 민중'이라는 말은 환언하면 '마르코복음서의 주제는 예수가 아니고 민중'이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한다면 '민중'이 신학의 주제가 아닐 수 있겠는가.

이 문제에 관한 안병무의 생각은 그가 예수와 민중의 일체성을 깨닫고 '예수민중'에 도달함으로써 '예수 대 민중'이라는 주객도식을 허물어버렸다는 데서 자명해진다고 말할 수 있다. 그도 '예수민중'이라는 해답을 얻을 때까지는, 예수를 '개인'(individium)으로 보고 '나사렛 예수(개인)가 그리스도다'라는 신학적 도식에 안주했었다. 그러나 1970년대 민중사건들을 경험함으로써 그 충격에 의해 열린 그의 눈은 예수 개인으로부터 예수를 둘러싼 이름 없는 민중 오클로스에게로 초점을 이동하게 되었다. 안병무에게서 그들은 전에는 예수를 드러내는 배경에 불과한 존재로 인식되었으나 이제는 예수사건을 일으키는 하나의 주체로서 텍스트 안에서 생동하고 있는 존재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복음서 안에서 예수는 고립된 개인이 아니라 민중사건 한복판에 민중과 혼융일체가 되어 있는 존재였다. 예수와 민중이 분리되어 있으면 그것은 이미 예수가 아니다. 복음서 안에서 예수는 오직 '예수민중'으로만 존재한다. 그러므로 '예수민중'은 예수의 다른 이름이다. 여기에서 안병무의 신학은 민중신학이 된 것이다. 그런데, '예수민중'은 2천년 전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오늘 여기에 한국의 민중으로 실재한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한국 민중의 해방사건은 다름아닌 '예수민중'이 일으키는 사건, 곧 오늘의 '예수사건'이다. 따라서 안병무의 신학은 '사건의 신학'이 된다. 사건의 신학의 주제는 '예수민중'이다.

3.2. 민중신학의 민중이해

⑴ 서남동의 민중 이해: 구원사의 주체로서의 민중

⒜ 서남동은 자신의 민중관이 가장 집중적으로 전개된 글 [민중신학의 성서적 전거](1982)에서 한 절을 '민중의 개념'이라는 제목에 할애하고 있다. 이 글에서 그는, "일부 민중신학자들 가운데는 '민중을 정의내리면 안 된다. 정의를 내리는 것은 객관화시키는 것이고 객관화시키면 살아 있는 민중을 대상화하고 박제화하는 것이다. 민중 스스로 자기를 나타내도록 해야지 의식적으로 정의하면 굴레를 씌우는 것이 되므로 안 된다'라고 해서 민중의 개념 정의를 거부하고 있는데, 이것은 대단히 의미있는 말이고 또 사실이다"라고 전제한 다음, 그러나 위험한 일인 줄 알면서도 일단 학문의 영역에서는 정의를 내려보지 않을 수 없다고 한다.

그는 민중을 정의하는 한 가지 방법으로 '민중 아닌 것과 민중을 대비'한다. 즉 '민중은 OOO이 아니다'라고 함으로써 민중을 드러내려는 것이다. 첫째로, 민중과 백성을 대비한다. 백성이라는 말은 오직 한 사람의 지배자 왕을 제외한 모든 사람이 신민(臣民)이 되는 봉건제 사회의 용어다. 이에 비해 민중은 왕을 우리의 지배자로 인정하지 않는다. 민중이라는 말 속에는 우리가 주인이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민중이 역사의 주체며 자기운명의 주인이고 사회의 주권자라는 주장이 들어 있다는 것이다. 둘째로, 민중과 시민을 대비한다. 시민은 서구 시민사회, 곧 부르조아 사회의 역사와 문화의 주체였다. 그런데 역사 발전은 시민으로 끝나지 않고 민중으로 이어진다. 동트기 시작하는 새로운 사회에서의 주체는 시민이 아니고 민중이다. 민중은 시민보다 사회의 밑바닥과 변두리까지 내려간 더 넓은 폭을 가지고 있다. 민중은 역사 발전에 있어서 시민 다음으로 새 역사의 담당자가 될 주체세력이다.

다음으로 그는, 민중과 프롤레타리아를 대비시킨다. 프롤레타리아는 유물사관에서 말하는 새로운 사회를 도래하게 할 정치적 사회적 혁명의 주체세력이라는 것인데, 고정적인 의미에서는 노동자이고 유동적인 상황에서는 중농 이하의 농민까지 포함된다. 그런데 아시아, 특히 한국에서 민중이라고 하는 것은 프롤레타리아와는 아주 다르다고 한다. 아시아에서의 민중의 잠정적인 의미는 경제적으로 가난하고, 정치적으로 억압받고, 사회-문화적으로 소외당한 사람들이다. 이처럼, 아시아에서 민중이라고 할 때에는 경제적 빈곤만이 아니라, 정치적 억압, 사회적 문화적 소외가 있는 것이다.

여기서 서남동은 민중신학과 해방신학의 차이에 언급한다. "라틴아메리카의 해방신학과 우리가 발전시키려고 하는 민중신학과는 현저한 차이가 나타난다. 라틴아메리카의 경우는 전세계의 절반 가까운 부를 차지한 미국이 그들을 준식민지화하고 있는 현상이 큰 문제가 된다. 미국의 경제적인 준식민지화의 질곡에서 벗어나는 것이 제일 큰 과제이기 때문에 그들의 주안점은 경제 문제에 있다. 우리의 경우, 경제문제가 배제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보다 더 큰 문제가 있다. 아시아에는 상당히 긴 문화전통이 있다. ㅗㅗㅗ 이렇게 거대한 전통은 경우에 따라서는 힘이 되기도 하지만 때로는 우리를 얽어매는 속박도 된다. 아시아인이 갖고 있는 이와 같은 과제를 라틴아메리카나 아프리카의 사람들은 갖고 있지 않은 것 같다." 한국의 민중신학은 해방신학보다는 오히려 북미주에서 발생한 흑인신학과 훨씬 가까운 편이라고 하면서, 흑인신학의 '흑인영가'와 민중신학의 '민담'의 유사성에 대해 언급한다. 결론적으로, "민중이라는 개념은 경제적인 문제만을 대상으로 삼고 있지는 않다. 민중은 그보다는 더 넓은 개념을 갖고 있는 사회적 문화적 실재인 것이다"라고 했다.

넷째로, 민중과 대중을 대비시킨다. 대중은 영어로 매스(mass)다. 대중은 무시당하거나 억압당하는 인간 집단이 아니라 단순히 많은 사람들의 집단, 사람들의 덩어리를 뜻한다. 대중 속에는 가난한 자와 소외된 자도 들어 있으나 부자나 지식인도 들어 있다. 이와 같이 대중은 한갖 사회학적 개념으로서 정치적인 주체성을 가질 수 없다. 이에 비해, 민중은 처음부터 정치신학적인 개념이라고 한다.

끝으로 민중과 지식인을 비교한다. 지식인도 민중의 범주에 들 수 있는가? "그것은 어렵다"고 서남동은 대답한다. 실제로 지식인은 항상 지배집단의 이데올로기를 대변하기 때문이다. 지배집단, 지배세력의 지배이념을 항상 대변해 주고 선전해 주고 옳다고 정당화해 주며 편들고 학교에서 가르치는 역할을 맡아 하는 것이 지식인이라는 것이다. 서남동의 지식인에 대한 이해는 기계적이 아닌 탄력적 이해를 보인다. 지식인이 민중의 범주에 들어가기는 '어렵다'는 것이지 '불가능하다'는 아닌 것이다. 그는 새로운 시대의 참된 지식인상에 대해 언급한다. "참 지식인은 민중의 형편을 알고 체험하고 동참하여 민중의 고난과 기쁨을 다 알아야 한다. 그리고 민중이 말 못할 때 그들을 대변하고 그들의 입이 되어 주어야 한다." 실제로 이러한 지식인상을 1970년대 한국에서는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다. 서남동 자신이 그러한 참 지식인의 한 사람이었다.

⒝ 서남동은 앞에서 본 바와 같이 민중 아닌 것과의 대비를 통해서 민중을 드러내는 방법을 시도 했지만, 거기에 머무르지 않고 이번에는 적극적으로 민중신학의 민중 개념을 찾는다. 그는 루가복음 14장 16-24절(=마태 22,1-10)에 주목하고 여기에서 민중신학의 민중 개념은 밝혀진다고 본다.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준비하고 많은 사람들을 초대하였다. 잔치시간이 되자 초대받은 사람들에게 자기의 종을 보내어 준비가 다 되었으니 어서 오라고 전하였다. 그러나 초대받은 사람들은 한결같이 못 간다는 핑계를 대었다. 첫째 사람은 "내가 밭을 샀으니 거기 가 봐야 하겠소. 미안하오" 하였고, 둘째 사람은 "나는 겨릿소를 다섯 쌍을 샀는데 그것들을 부려 보려 가는 길이오. 미안하오" 하였으며, 또 한 사람은 "내가 지금 막 장가들었는데 어떻게 갈 수가 있겠소?" 하고 말하였다. 심부름갔던 종이 돌아와서 주인에게 그대로 전하였다. 집 주인은 대단히 노하여 그 종더러 "어서 동네로 가서 한길과 골목을 다니며 가난한 사람 불구자 소경 절름발이들을 이리로 데려 오너라" 하고 명령하였다. 얼마 뒤에 종이 돌아 와서 "주인님, 분부하신 대로 다 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자리가 남았습니다" 하고 말하니, 주인은 다시 종에게 이렇게 일렀다. "그러면 어서 나가서 길거리나 울타리 곁에 서 있는 사람들을 억지로라도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도록 하라. 잘 들어라. 처음에 초대받았던 사람들 중에는 내 잔치애 참여할 사람이 하나도 없을 것이다."

서남동은 이 비유에서 예수의 민중관이 기본적, 전체적, 개괄적으로 드러났다고 보고 있다. 그는 이 비유를 이렇게 해석한다. 즉, 잔칫상을 크게 차리고 손님을 많이 청했다는 것은 약속된 새 시대의 하느님나라에 초청받은 것을 의미 한다. 이렇게 초청받았는데도 기득권자들은 가진 것 때문에 즉 지식이나 재물이나 명예나 지위를 스스로 포기하지 못하기 때문에 자유와 기쁨과 평화가 약속된 새 시대의 주인공이 되지 못한다. 반면에 새 시대, 즉 하느님나라에 초청되지 않았다고 일반적으로 생각되는 사람들, 신체불구자 과부 빈자 고아 노예살이하던 사람들 등이 오히려 초청에 응하고 약속된 새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다. 바로 이들이 민중이다. 이렇게 복음서는 그리스도교 신앙이 약속한 대로의 하느님니라 즉 새 시대 새 역사의 주빈이며 주인공인 민중을 묘사하고 있다는 것이다. 서남동은 다름 아닌 성서에서 민중의 개념은 훨씬 더 구체적이고 분명해 진다고 한다.

서남동은 루가복음서에서 밝혀진 이 민중의 정의는 루가복음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신구약성서 전반에 걸쳐 전개되는 '핵심사상'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러한 성서의 민중전통이 한국사의 민중전통과 합류한다. 여기서 민중을 이해하는 또 하나의 길, 곧 한국의 민중전통에서 민중을 찾는 길이 열리게 된 것이다.

한국의 민중전통에서 민중을 찾아낸 한 모범을 서남동은 시인 김지하의 문학에서 발견한다. 담시 [장일담(張日譚)]에 관한 김지하 자신의 다음과 같은 메모에서는 민중의 실체와 그 역사적인 운명, 그리고 그 구원의 길이 아주 잘 설파되었다고 본다.

창세기에 하느님이 인간에게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그리고 그 땅을 정복하라는 말이 있다. 이와 같이 땅을 정복하고 그 속에서 충만해져 세계를 변혁시키며 사회를 이루어서 역사를 추진해온 보편적인 인간의 육체적인 주체, 곧 정신에 대응하는 인간의 실질적인 내용을 이루는 것이 민중이다. 즉 자기 스스로 노동에 의해서 밥을 먹고 노동에 의해서 집을 짓고 땅을 가꾸고 그래서 생산을 하고 또 자기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 말로써가 아니라 자기 몸으로, 나가서 자기 육신을 죽이면서까지 자기 조국이라는 가치를 지키는 그런 구체적인 주체가 민중이다. 이것은 대체로 권력과 반대되는 개념이며, 또한 인텔리 등 중간 입장과 대응되는 개념으로 쓰인다. 권력이라는 것은 결국 민중으로부터 나온 것이지만 이것이 나온 지가 오래 되어서 그 자체가 제도화되면 그것이 오히려 자신의 고향인 민중을 억압하는 질곡으로 변하게 된다. 그러면 역사의 과정은 다시금 민중이 자기의 외화물(外化物)인 권력을 원자리로 되돌려서 공의(公義)를 회복하도록 하는 파탄을 일으키게 되는 것이다. 권력이 정의를 반역하고 반민중적이 될 때 민중의 편에 서는 것이 정의이고 권력의 편에 서는 것은 불의라고 나는 생각한다.

역사의 발달로 보아 세계는 점점 이 권력에 의해 지배의 역사로부터 점차 민중이 주체가 되는 역사로 바뀌어지고 있고 독재와 압제로부터 점점 민주주의적인 해방의 역사로 바뀌고 있다고 나는 본다

지배자가 아니라 민중이 태초부터 하느님과의 계약의 상대자(partner)였다. 실제로 민중은 땅을 활용하고 생활가치를 생산하고 세계를 변혁시키며 역사를 추진해온 실질적 주체다. 그러면서도, 지배권력으로부터 억압 소외되어 천민 죄인으로 전락했다. 이제야 민중은 역사의 발전에 따라서 자기의 외화물인 권력을 원자리로 되돌리고 하느님의 공의의 회복을 주체적으로 이끌어서 구원을 성취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기독교의 복음이(예수가) 죄인, 곧 믿바닥 천민을 일차적으로 구원하러 왔다 했으면 오늘날에도 역시 교회가 종을 울리고 있는 한, 천민들 가운데서 복음의 폭발적인 생활력을 획득해야 된다. 그렇다면 그 구원의 대상이 되는 가장 비참한 천민 자신이 그 구원사업의 주체가 되어야 하고 선봉이 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천민들을 작품의 주인공으로 등장시켜 저항하고 승리하게 함으로써 구원의 가능성을 제시하려는 것이다. 극단적인 비참을 선택적으로 구원함으로써 하느님의 영광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어떤 신비를 제시하자는 것이다 우리가 기독교인으로서 그렇게 갈구하고 매일 기도에서 부르짖고 있는 메시아는 우리들과 같은 때 묻은 자들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사실 우리한테 학대받고 굶주린 그들(흉악한 죄수들)로부터 온다는 이상한 확신을 나는 나의 경험에서 갖게 되었다. 그래서 그러한 밑바닥으로부터 오는 메시아에 대한 확신을 작품으로 형상화하려고 한 것이다.

김지하가 왜 거의 모든 작품에서 천민들을 주인공으로 등장시키고 있는가를 설명한 위의 메모에서 서남동은 앞에서 루가복음에 밝혀진 성서의 민중 이해와 혹사(酷似)한 민중관을 발견하고 크게 공명한다. 즉 김지하의 민중관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다. 하나는, 민중은 창조와 생산에 있어서 하느님과의 계약의 상대자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창조와 역사에 있어서 '하느님의 공의(公義)'의 회복의 담지자(bearer) 내지 작인(agent)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하느님의 공의'의 회복의 작인역은 바로 하나님의 공의를 침해하는 권력에 짓밟힌 희생자, 소위 죄인 천민 가난한 자 고아 과부 떠돌이 신체불구자 도둑 등 밑바닥 인생이라고 김지하는 파악하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서남동은 민중이 담당하는 생산만이 아니라, 민중이 겪고 있는 고난(suffering)을 민중의 표지로서 중요시하고 민중의 이 고난이야말로 하느님의 역사 경영을 알아보는 색인(index)이라고 한다. 민중의 고난을 중시하고 그 의미를 신학적으로 이해한다는 이 점에서 민중신학의 민중 개념은 사회과학적 또는 계급적 민중 개념과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

⒞ 다음으로, 서남동은 1970년대 이래의 한국의 역사 현실에서 사회세력으로서의 민중의 실체가 드러났다고 본다. "그러면 우리 역사에서 민중이 뭐냐? 단적으로 말해서 지난 10년 동안 새 역사를 형성할 민중이 형성됐다고 봅니다. ㅗㅗㅗ 유신체제의 모순 속에서, 이 산고의 진통을 겪으면서 민중이라고 하는 사회세력이 형성됐습니다. 개신교의 목사와 천주교의 신부가 합작을 했고, 크리스챤과 논크리스챤이 합작을 했고 지식인과 노동자가 합작을 해 가지고 불의의 세계에 저항하는 1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새 역사를 담당할 민중의 주체세력입니다. 우리 민족사의 새 장을 연 주체세력입니다."

⒟ 서남동이 서거하기 1년전인 1983년에 발표한 두 편의 논문 [세계의 생명 그리스도]와 [빈곤의 사회학과 빈민의 신학]을 대하면 그가 한국 사회의 민중의 현주소를 있는 그대로 적나라하게, 구체적으로 드러내기 위해 얼마나 필사적이었나 하고 숙연해 지지 않을 수 없다. 이 두 논문은 그의 신학적 역량과 방법론적 가능성을 한계에까지 총동원한 느낌을 주는데, 연역적 방법과 논리적 서술로 일관하는 전통적인 신학 논문의 관례와 스타일을 완전히 일탈하고 있다. 특히 그의 최후의 논문이 된 [빈곤의 사회학과 빈민의 신학]에서는 제목이 암시해 주고 있듯이 사회학과 신학을 접맥시키는 방법을 시도한다. 이 논문은 제1부와 제2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제1부에서는 1980년대 초의 한국 민중의 실상을 밝히기 위해, 사회학이나 경제학 논문을 방불케 할 정도로 통계수치와 도표를 잔뜩 동원하면서, '빈곤의 사회학'을 전개한다. 목적은 한국사회의 가난의 실태를 드러내 보이고 한국 민중의 현주소를 구체적 물질적 귀납적으로 밝히는 데 있다. 제2부 '빈민의 신학'에서는 신구약성서에 나타난 빈곤의 신학을 면밀히 탐색한다.

결국 서남동의 민중 이해의 '완결편'이라 할 수 있는 이 두 글은 그의 '민중관' 뿐만 아니라 '사회학과 신학의 통전'이라고 하는, 그가 만년에 도달한 민중신학의 새 구상마저 우리에게 선보여 주고 있다. 앞에서 이미 서술한 서남동의 민중 이해에 이것만은 반드시 추가되어야 하겠다고 생각되는 부분만을 아래에 보완하겠다.

신약성서에서 복음의 담지자요 전승자, 예수운동의 담지자들은 '가난한 사람들'이었다. 이들의 내용은,

첫째, '병든 사람들'이다. 누가복음 14장 13ㅗ21절; 4장 18절; 7장 22절; 마태복음 11장 5ㅗ25과 11장 35절 이하; 갈라디아서 4장 9절; 그리고 누가복음 16장 20절의 거지 라자로의 경우도, 마가복음 10장 46절 이하의 여리고의 맹인 거지 바르티매오의 경우도 병자 혹은 신체장애자들이다. 둘째, 가난한 사람들은 헐벗은 사람들이다. 묵시록 3장 17절; 야고보서 2장 16절; 마태복음 25장 36절 등. 셋째, 가난한 사람들은 '굶주린 사람'이었다. 누가복음 3장 11절; 6장 20-21절; 마태복음 25장 35-36절; 6장 25절; 야고보서 2장 15-16절 등. 넷째로, 가난한 사람들은 '극빈자'들이었다. 라자로, 바르티매오의 경우, 사도행전 3장 1절 이하의 성전 문 앞의 걸인, 그리고 마가복음 14장 7절; 마태복음 25장 35-36절; 누가복음 16장 20절; 묵시록 3장 1절 등이다.

이로 보건대, '예수운동'(맨 처음 교회를 가리킴)은 그 처음에 가난한 사람들의 종교운동으로서 팔레스타인의 유대교의 역사 무대에 등장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가난한 사람들'의 희망은 어떤 것이 었을까?

마가복음 10장 46절(마태 20,29 이하; 누가 18,35 이하)에 예리고의 맹인 바르티매오가 예수를 만난 다음, '자기 믿음으로' 눈이 밝아졌다. 이 이야기는 한 맹인의 생의 전환만을 보도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예수운동에 가담했던 '가난한 사람들'의 희망을 담고 있는 이야기인 것이다. 그들의 희망은 메시아 정치의 실현이었다. 예수는 단순히 그들에게 희망의 상징인 것만이 아니라, 이 사람 예수로 인해서 그들의 희망이 실현될 예언자적 메시아였다. 가난한 사람들의 비참한 삶이 곧 끝나고 현재의 사회적 운명이 전환되었다는 사회적인 희망이었던 것이다. 이것이 이러한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이적 이야기, '마리아의 찬가', 라자로의 이야기 등에 담겨진 것이다.

이 예수운동의 담지자들인 '가난한 사람들'의 자의식은 어떤 것이 었을까? 서남동은 가난한 사람들(ptochoi)의 자의식이 두드러지게 나타난 다음의 성서 구절들을 제시한다.

여러분은 선택된 민족이고 왕의 사제들이며 거룩한 겨레이고 하느님의 소유가 된 백성입니다(베전 2,9).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의 가난한 사람을 택하셔서 믿음을 부요하게 하시고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약속해 주신 그 나라를 차지하게 하지 않으셨습니까?(야고 2,5)

이 성서 구절들에 나타난 바로 이들이 하느님의 구원사의 주체로 "선택된 민족이고, 왕적인 사제들이며, 거룩한 겨레이고, 하나님의 소유가 된 백성이다"(베전 2,9).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의 가난한 자들을 택하셔서 믿음에 부요한 자가 되게 하시고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약속하신 그 나라를 차지하게 하시지 않으셨습니까"(야고 2,5). 이 말은 복음의 역사적 담지자인 가난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구원사의 주체'라는 자의식을 명명백백하게 나타내는 것이라고 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민중신학이 민중사학으로부터 수용한 명제, '민중은 역사의 주체'를 한층 더 신학적으로 심화시킨 '민중은 하느님의 구원사의 주체'라는 명제를 얻게 된다. "민중신학의 주제는 예수가 아니고 민중이다"라는 혹은 생경하게, 혹은 부당하다고까지 여겨졌던 서남동의 주장도 이쯤에서는 오래 입은 옷처럼 자연스럽게 느껴지게 된다. '민중'이 그리스도교 신학의 주제가 될 수 있다는 이해를 넘어, '민중'이야말로 무릇 모든 신학의 주제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이제 수긍하게 된다.

⒠ 그런데, 서남동의 민중 이해는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내딛는다. 문제는 복음과 가난한 사람들의 관계가 무엇이냐 하는 것이다. "복음은 가난한 자들에게 주어지는 기쁜 소식"이라는 것이 전통적인 이해다. 그러나 서남동의 생각은 엉뚱하다. 결론부터 말하면, "가난한 사람들은 복음을 구성하는 '구성적 요인'"이라는 것이다. 서남동 자신의 설명을 좀 쉽게 풀어 보자.

성서 메시지의 역사적 전승자는 가난한 사람들이었다. 복음의 담지자도 가난한 사람들이었다. 복음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어졌을 뿐만 아니라, 애당초 가난한 사람들의 복음으로 성육신(구체화)되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어진 복음', '가난한 사람들의 복음'(루가 4,18; 7,22; 마태 11,5)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빼버리면, ㅗㅗㅗ 복음은 추상적인 이념이 되고 만다. '복음'과 '가난한 사람들'은 한 쌍을 이루는 실체다. 전항은 상부구조(마음)이고 후항은 하부구조(몸)다. 복음은 가난한 사람들 사이에서, 또 가난한 사람들과의 사이에서 이루어진 연대(하부구조=몸)의 조직 속성 곧 이데올로기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것이, 그를 믿고 따랐던 사람들(프토코이)을 제외하고서 믿을 수 있다거나, 선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여기에 선택받은 가난한 사람들은 하느님의 말씀(복음)의 우연한 조역이 아니라, 그 구조적 요소다. '복음'이라는 내용 혹은 이념이 우연한 역사적 자료(가난한 사람들)에 담겨졌다가, 다음 세대의 교회와 신학에서 그 본질적 내용과 우연한 자료로 따로 분해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역사적 교회, 전통적인 신학에 있어서는 이 구조적인 실체가 분해ㅗ해체되어서, 원래 '가난한 자들의 복음'이었던 것이 '부자들의 복음'으로 변해버렸다. 부자의 복음이라는 것은 "가난한 사람도 부자도 하느님 앞에서는 같은 죄인이며 복음은 이 양자에게 똑같이 유효하다는 '보편적 복음'인 것이다. 부자와 가난한 사람, 주인과 종은 같은 죄인이라고 균등화하는 것은 하느님 앞에서 죄를 범하는 것이고, 현실의 잔혹한 불의와 불평등과 비참한 가난에 대한 외면과 무관심을 낳고 부자들의 자기 의인(義認)을 다져주게 된다. 부를 같이 나누려 하지 않고 죄만을 나누는 것이다.

그러면 이렇게 계시(복음)의 하부구조를 해명하고, 복음과 가난한 사람들의 관계를 밝히는 것은 실제로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것은 이러하다. 예수를 믿고 따랐던 사람들, 복음의 전승자들, 하느님의 구속사의 주체들(가난한 사람들)을 제외하고서 예수를 믿을 수 있는 길은 없다. 또 그리스도교의 선교를 할 수 있는 길도 없다. 오늘날 우리가 예수의 복음을 수락하려면, 그래서 구원을 받으려면, 우리 시대의 가난한 사람들과의 연대를 수락하지 않으면 안 된다. 가난한 사람들, 속죄양들과의 연대에서만 우리는 복음과 계시를 이어받아, 복음의 상속자, 믿음의 증인들의 반열에 오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가난한 사람들과의 연대 없이 복음을 우리의 것으로 수락하는 길은 없다. 여기서 말하는 가난한 사람들은 어디까지나 우리 시대의 가난한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처럼, 서남동은 [빈곤의 사회학과 빈민의 신학]에서 성서의 가난한 사람들(성서의 민중)과 오늘의 가난한 사람들(한국 민중)을 하나로 연결시키고, 그 양자의 '합류'에서만, 즉 오늘 우리 시대의 민중과의 연대에서만 성서의 민중과 만나는 것이라는 것을 역설한다. 그럼, 연대의 실천은 어떻게 하는가? 서남동은, 연대의 전략을 수립하는 것은 신학적인 '해석'으로 다 되는 것은 아니고 '사회적 정치적 실천'으로 전개되는 것이라고 한다.

⑵ 안병무의 민중 이해

⒜ "누가 민중인가?"

안병무는 민중을 정의하는 일은 하지 않기로 했다고 못 박는다. 정의하는 데 급급하다 보면 정의하는 일 자체가 유일한 테마가 되어버려 민중을 잊어버리는 일이 왕왕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또 "민중은 누구인가?"라고 묻는 자는 이미 그것을 알고 있으면서, 무언가 피할 구멍을 찾기 위해 묻는 자이거나 아무리 일러 줘도 모르는 자일 거라고 한다.

그는 민중을 정의하는 일 따위에는 손댈 생각은 없지만, 민중을 이해하는 길은 있다고 하면서 두 가지 생각을 제시한다. 하나는, "진정한 민중 현장에는 '식민지의 경험'이 있다"는 것이다. 제국주의의 식민지, 제3세계 뿐만이 아니라 정치적 억압이 있고 경제적 착취가 있는 곳, 지식층에 의한 문화의 독점이 있는 곳, 또는 사회적 차별과 소외가 있는 곳, 이른바 '최후의 식민지'라는 여성.―.이런 것들이 예외 없이 '식민지의 경험'을 가지고 있고 여기에 민중 현장이 있는 것이 아니냐라고 그는 이해한다. 다른 한 생각은, 그가 1980년대 중엽 독일교회의 초청을 받아 독일에서 강연을 했을 때, 어떤 사람이 "독일에서 민중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했는데, 그때 그의 머리에 떠오른 것이 외국인 노동자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외국인 노동자라고 하면 어떨까요?"라고 대답했더니 그 사람의 얼굴이 빨개졌다. 그것은 그도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안병무의 이 설명에서, "민중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과 "누가 민중인가?"라는 물음의 차이를 느낄 수 있다. 전자가 민중의 개념이나 정의를 요구하는 사변적이고 학문적인 물음이라면, 후자는 민중의 개념화 따위를 넘어서 현실의 민중에 대한 구체적인 경험을 묻는 것으로 이해된다. 예수의 "누가 네 이웃이냐?"라는 물음처럼 말이다. 안병무의 위의 진술은 이 후자의 질문에 대한 훌륭한 대답이 되지 않았나 생각된다. 성서에 무수히 등장하는 '가난한 사람들'은 서남동이 이해했듯이 성서의 핵심 사상인 민중관을 뚜렷이 드러내 주고 있으며, 안병무도 이러한 성서의 민중 이해의 노선을 따라서 "누가 민중인가?"에 충분히 답하고 있다.

안병무는 그의 민중이해를 우선 철저하게 성서로부터 취한다고 할 수 있다. 그는 {갈릴래아의 예수} 제6장 [예수와 민중]에서 그가 이해하고 있는 성서의 민중 이해를 다음과 같이 정리해 준다. 먼저 유대사회의 민중은 암하아레츠(땅의 사람들)이었다. 암하아레츠는 농투성이, 무식꾼, 율법을 모르고 지키지 않는 자, 따라서 그들은 일반 유대인의 식탁에 함께 할 수 없었고 이방인 취급을 당했다. 그들은 안식일법을 지킬 수 없어 죄인으로 낙인찍혀 체제 밖으로 밀려난 소외자들이었다.

다음, 마르코복음에 나타난 '예수민중'이다. 제일 뚜렷이 부각된 것은 '병자들'이다. 세례자 요한의 질문에 대한 예수의 답변에서 그들의 중요성을 알 수 있다. "가서 너희가 듣고 본 것을 요한에게 알리라. 맹인이 보고 절뚝발이가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해지고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사람이 살아나고 가난한 사람들이 복음을 듣는다"(마태 11,4-5). 예수운동의 핵심으로 어부들이 등장하고, 다음으로 여인들이 많았다('예수와 여인들'에 관한 안병무의 해석은 후술한다). 예수의 제자 가운데는 세리도 있었다. 세리와 원수관계의 젤롯당 출신도 있었다. 마르코복음서는 예수 주변의 사람들을 오클로스라는 말로 부른다. 오클로스는 어떤 집단에 권리와 의무 관계로 소속되지 않은 자들이다. 라오스는 그 민족사회에 소속되므로 권리와 의무가 있고 보호를 받는다. 그러나 오클로스에게는 그런 것이 없다.

안병무는 오클로스를 한국어 민중과 등치시키고, 오클로스의 특징을 이렇게 파악한다. 첫째, 예수가 가는 곳에는 어디나 민중(오클로스)이 있다. 둘째, 예수는 민중과 식탁을 같이 했다. 셋째, 예수와 오클로스는 예루살렘과 대립관계에 있다. 넷째, 예수는 오클로스를 '목자 없는 양'(마르 6,34)처럼 보았다. 다섯째, 예수는 오클로스를 "내 어머니와 내 형제"라고 선언한다. 여섯째, 이것은 무엇보다도 중요한 점인데, 예수는 오클로스에 대해서 여하한 도덕적 종교적 평가도 내리지 않았다. 즉 예수는 바리사이파를 위시한 소위 지도층에게는 맹렬한 비판을 퍼붓지만, 오클로스에 대해서는 그들을 '무조건' 받아들일 뿐, 그들의 죄를 운운하는 법도 없고 그들에게 어떤 도덕적 요구를 일체 하지 않는다.

이상이 마르코복음서를 중심으로 살펴본 예수와 민중의 특징이다. 예수가 민중과 함께 하는 모습은 그 원인이 어디 있든지 간에 지금 고난당하는 무리, 지금 배고프고 지금 울고 지금 목마르고 지금 억눌리고 지금 소외된 자들에게 자신의 모두를 기울여 무조건 편드는 자세다. 그런데, 마르코복음서는 임박한 하느님나라의 도래라고 하는 대전제 아래서 이러한 예수민중(오클로스)의 행태를 이해하고 있다. 마르코는 예수의 설교를, "하느님나라가 가까이 왔다!"(1,15)로 요약했다. "하느님나라가 곧 온다, 지금 오고 있다!" 이 종말론적 선언은 낡은 지배질서의 종말과 새 세상의 개벽을 고지함으로써 오클로스에게 희망을 안겨 준 것이다.

⒝ 안병무의 민중 이해에 있어서의 페미니스트적 시각

① 일반적으로 민중신학이 여성신학으로부터 도전과 자극을 받고, 어느 정도 페미니스트적(성해방주의적) 시각으로 경도한 것은 사실이다. 그것은 시대정신에 따른 것으로, 하등 새롭다거나 특기할 일이 아니다. 그러나 안병무의 경우는 다르다. 안병무의 민중 이해를 다룰 때에는 그의 페미니스트적 예수민중 이해를 빠트릴 수는 없다. 그것이 그의 예수민중의 성격과 예수운동 이해의 필수적인 부분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안병무는 1990년 5월에 출간한 {갈릴래아의 예수}의 열두 개 장 가운데 [예수와 여인]이라는 제목의 한 장(제8장)을 할애했다. 그는, "여성의 입장에서 성서를 보려는 노력은 남성 중심의 시각을 당연시해 온 전통적인 해석에 제동을 걸었으며, 특히 예수운동을 이해하는 데 크게 기여하고 있다"고 선언한다. 그는 그 장에서 이러한 여성의 시각을 최대한 수용하면서, 구약의 전통에서의 여성관과 예수시대의 상황인 유대교의 맥락 속에서 '예수와 여인의 관계'를 다각도로 살피고 있다. 이 책에서는 그의 논문 중에서 '예수와 여인의 관계'에 집중해서 검토하겠다.

② 여인에 대한 예수의 관심

복음서에는 예수와 여인의 관계가 복음서 전체의 분량에 비해 상대적으로 많이 보도되고 있다. 예수시대의 사회관습으로 보아 예수와 여인의 관계는 명예로운 일로 인정될 수 없었을 것이므로, 그러한 전승들은 오히려 전수 과정에서 많이 축소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대표적인 예를 들면, 그리스도교 초기 서간에는 예수를 따르던 단 한 사람의 여인의 이름도 거명되지 않았다. 심지어 십자가 사건과 부활의 목격자인 막달라 마리아를 위시한 여인들이 전혀 언급되고 있지 않으며, "복음이 전해지는 곳마다 이 여인이 행한 일을 전하라"(마르 14,19)고 한 그 여인의 이야기도 전해지지 않고 있다. 그런데 복음서에는 십여 차례에 걸쳐 예수가 여인들과 접촉한 경우가 전승되고 있는데, 그 중 일부는 예수의 남자들과의 관계에서는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특수성을 보이고 있다. 예수가 여인을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삼은 경우도 많다. 그런데 그 경우들은 예외 없이 적극적이고 중요한 문제와의 관련에서 언급되고 있다. 예수가 여인을 소재로 말하는 경우 언제나 적극적인 의미를 부여하고 있으며, 부정적으로 취급하는 경우는 하나도 없다. 유대교의 정통적 시각에서 볼 때 이 사실은 결코 가볍게 보아 넘길 일이 아니다. 예를 들면, 비정한 재판관과 한 과부(루가 18,2-5), 부자 남자의 헌금과 가난한 과부의 헌금(마르 12,41 이하), 병든 딸을 구해달라고 간청하는 이방 여인(마르 7,24-30), 혈루증 앓는 여인(마르 5,34) 등. 예수가 남자 제자들의 무지와 잘못을 책망하는 것은 여러 군데서 볼 수 있지만, 여인들을 책망하는 경우는 단 한 군데도 없다. 이것은 예수가 일반 민중을 대하는 태도와 똑 같다.

예수의 언어가 농경사회의 언어임은 모두 인정하고 있는 바와 같다. 그런데 주목되는 것은 예수가 '여성적 언어' 또는 여성과 관련된 언어를 많이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이다(떡, 식탁, 소금, 맷돌, 누룩, 옷깁기, 물동이, 신랑을 기다리는 처녀, 잔치, 유방, 젖, 태, 품 등). 특히 언어들이 쓰인 맥락을 보면, 하늘나라, 공동체 생활, 심판 경고 등 모두 중요한 주제에서 사용하고 있다. 수난의 도상에 있는 예수가 여인들을 위해 한 말,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해 울지 말고 너희 자녀들을 위해 울라"(루가 23,28)가 특히 그러하다. 예수가 예루살렘을 보면서, "암탉이 병아리를 모아 날개 아래 품듯이 내가 몇번이나 자녀를 모으려고 했던가"(루가 13,24)라고 한 것은 자신의 진실한 사랑을 여성의 품으로 상징한 것이다.

이상의 관찰이 모두 여성에게만 해당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주제와 관련해서 사용된 남성적 언어가 얼마든지 있다. 단지 예수의 세계가 남자들의 독무대가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

③ 여인과 제자직

예수는 여인들을 제자로 삼았는가? 복음서에는 예수가 열두 제자를 선택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들은 모두 남성이다. 그렇다면, 예수는 제자의 반열에서 여자를 배제했던 것일까? 여기서 먼저 물어야 할 것은 이른바 열두 제자 제도가 역사적 사실인가 하는 것이다. 결론을 말하면 복음서에는 제자들의 이름도 일치하지 않으며, 베드로와 요한, 야고보 등 세 사람 이외에는 사실상 제자의 역할이라 할만한 것이 뚜렷하지 않다. 따라서 여인들이 열두 사도라는 범주에 들지 않았다는 것만 가지고 예수와의 관계에서 여인들의 역할이 이른바 제자들보다 중요하지 않았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먼저 주목할 것은 여러 여인들이 예수와 동행했다는 사실이다. 루가복음 8장 1-3절에서 예수가 하느님나라를 선포하고 복음을 전하는 데 열두 제자들이 동행했다고 하고, 그 일행 중에는 여러 여인들이 함께 했는데 그들은 자신들이 가진 것으로 예수 일행을 '섬겼다'고 한다. '섬겼다'(diekonoun)은 예수 자신이 세상에 온 목적은 섬기기 위함이라고 했을 때의 어휘 '디아코네오'(diakoneo)와 똑같다(마르 10,45). 예수는 제자들에게 바로 그 '섬기는 일'을 요구하고 있다. 그 만큼 여인들은 중요한 일(섬기는 일)을 행한 것이다.

실제로 여인들은 사도들과 똑같이 복음선교의 전선에 나섰다. 마르코는 십자가 처형장에 있었던 여인들은 예수가 갈릴래아에 있을 때부터 따르며 동역하던 여인들이라고 한다(마르 15,41).

④ 예수를 움직인 여인들

마르코는 예수가 십자가에 달렸을 때 그의 운명을 지켜본 여인들에 관한 이야기를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또 여인들도 멀리서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 중에는 막달라 마리아와 젊은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와 살로메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께서 갈릴래아에 계실 때 따르며 시중들던 여인들이었습니다. 그 밖에도 예수와 함께 예루살렘에 올라온 많은 여인이 있었습니다"(마르 15,40-41).

이 보도에서 주목할 것은 첫째, 그 여인들이 갈릴래아에서부터 예수를 따르며 시중들었다는 것; 둘째, 갈릴래아에서 예루살렘까지 예수와 동행했다는 것; 셋째, 그 수가 많았다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그들이 죽임당할 위험을 무릅썼다는 사실이다(티베리우스 황제 시대에는 십자가에 처형된 사람을 애도하기만 해도 공범자로 취급당해 처벌당했다). 마지막까지 예수를 따른 이는 여인들 뿐이었다는 마르코의 서술은 믿을 만한 전승이다.

그런데, 여기서 관심을 끄는 문제는 예수와 여인들의 관계는 과연 어떤 성질의 것이었는가 하는 것이다. 복음서는 예수와 여인들 사이에 오갔을 대화를 일체 보도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그 여인들이 예수에게 어떤 영향력을 행사하는 존재였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복음서에는 예수에 대한 여인들의 행동이 보도되고 있고 그 행동에 대한 예수의 반응이 보도되고 있다. 우선, 네 복음서에 모두 매우 값진 순 나르드 향유를 담은 옥합을 깨뜨려 그것을 예수의 머리에 부은 한 이름 없는 여인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마르 14,3). 예수는 이 여인의 행동에 대해서 "이 여인이 내게 한 일은 아름답다. ㅗㅗㅗ 이 여인은 자기 힘껏 했다. 곧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사를 미리 준비한 것이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온 세계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여인이 한 일도 전해져서 이 여인을 기억하게 될 것이다"(마르 14,6-9)라고 말한다. 즉 예수는 이 여인의 행위를 옹호하고 여인의 행동의 의미를 자신의 죽음과 결부시킨다. 여기서 안병무는 이 이야기의 이름 없는 여인을 예수를 둘러싼 수많은 여인들의 대명사로 보고 예수와 여인들의 관계의 성격을 다음과 같이 유추한다.

수난사의 서장을 장식하는 이야기의 주인공은 여인이다. 그 자리에 합석한 남자들은 그 여인의 행위의 의미를 알지 못하고 그 낭비성을 비판한다. 확실히 그 여인의 행위는 비정상적이었다. 그것은 그 여인만이 '비상한 때'를 알고 비상한 행동을 감행했다는 뜻이 된다. 이것을, 수난예고를 들은 남성 제자들의 경우와 비교해 보면 놀라운 대조를 이룬다. 남성 제자들의 경우에는 베드로가 그랬던 것처럼 예수가 수난당할 것이라는 말에 반대의사를 나타냈다. 그래서 예수로부터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한다"(마르 8,33)는 저주에 가까운 책망을 듣는다. 이에 비해서 이 여인의 행동은 예수가 가야할 길을 정확히 인식한 것이다. "이 여인이 내 장례를 준비했다"는 예수의 반응은, 이 여인의 행동의 의미가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당신은 십자가를 지셔야 합니다. 당신이 각오하고 있는 그 길을 걸어가십시요"라고, 예수를 죽음의 길로 내모는 행동이었다고 이해한 것이 아니었을까? 예수는 그 여인의 행동에서 '민중의 염원'을, 곧 민중 가운데서도 민중인 여인들의 '구원과 해방의 갈망'을 읽었던 것이 아닐까? 이렇게 볼 때, 비로소 예수의 말,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온 세계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이 여인이 한 일도 전해져서 이 여인을 기억하게 될 것이다"가 제 자리를 찾게 된다.

이러한 관점으로 안병무는, 갈릴래아에서부터 예수를 따르고 섬기던 여인들, 예수의 수난의 자리에까지 동행하여 십자가 처형을 지켜보고 있었던 여인들, 홀로 무덤에 가서 부활한 예수를 처음 만났던 여인의 예수와의 관계의 성격을 이해하려고 한다. 그리하여 안병무의 예수민중 및 예수운동 이해는 페미니즘의 기(氣)를 받아 '남성 중심주의'의 고질을 치유받기 시작했다.

3.3. 민중의 한

⑴ 서양선교사들에 의해 한국에 전래된 그리스도교는 오랜 세월 동안 한국의 전통종교와 민속문화, 민중의 토속적 생활정서를 비그리스도교적인 것이라 하여 천시해 왔다. 그러다가 1970년대 초에 이르러서야 일부 신학자들이 민중에 눈뜨면서 민중 자신의 문화와 종교, 민중의 생활 정서를 보는 눈이 열리게 되었다. 그 선구자는 현영학 서남동 그리고 서광선이었다. 현영학은 그의 글 [민중신학과 한의 종교]에서 그 경위를 이렇게 술회한다.

이 신학자들은, 민중 자신들은 과거와 현재에 걸쳐서 자기들이 겪은 고통과 억울함을 어떻게 느끼고 소화하고 극복해 왔는지, 미래에 대한 포부는 어떻게 가져왔는지, 그리고 그런 것들을 어떻게 표현해 왔는지를 알아보려고 했다. 민중의 탈놀이와 판소리에서, 민요와 민담에서, 소외당한 사람들의 수기와 증언에서, 그들의 고통과 눈물의 삶(제사장직), 그들의 분노와 투쟁(예언자직), 그들의 해학과 웃음(제왕직)을 배웠다. 그리고 이러한 문화 밑바닥 깊이에 깔려 있는 그들의 종교(무교)에서도, 가진 사람들의 머리에서 짜낸 종교가 아니라 몸으로 살아야 하는 사람들의 오장육부에서 빚어져 나온 종교에서 원초적인 종교의 모습과 새로운 민중종교의 가능성을 엿보게 되었다. 이와 같은 배움의 과정에서 도움을 제공한 사람들은 문인 민속학자 종교학자 그리고 인류학자들이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민중신학자들의 의식에 또렷하게 떠오른 것은 '한'이라는 낱말이었다. 한이란 말은 40ㅗ50대 이상의 한국인이라면 일상 듣고 살아온 서민의 언어다. 필자 자신은 굶주렸던 소년 시절에, "밥 한 번 실컷 먹어 봤으면 한이 없겠다"는 식으로, 이 한이란 낱말을 자연스럽게 생활화하고 있었다. "못배운 게 한이지"라거나, "한 많은 한평생"이라거나, "한을 못 풀고 죽었다"거나 하는 말은 사회적으로 신분이 낮고 가난하고 못배운 사람들, 민중 여성들, 요컨대 한국사회 저변으로 내려가면 갈수록 더 자연스럽고 친숙한 언어가 된다.

한은 춥고 배고픈 사람들, 사는 것이 도무지 외롭고 답답하고 힘겨워 견딜 수 없는 사람들의 감정이다. 똑 같은 사람인데도 사람 대접을 받지 못하는 데 대한 슬픔과 억울함이 담긴 말이다. 사회의 부조리와 모순과 불의를 늘상 경험하고 그것에 대해 울분을 느끼면서도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어 당하기만 하고 사는 서민계층의 절망감이다. 한은 '며느리의 한'처럼 봉건제와 가부장제 아래서 기구한 삶을 이어온 한국 여인들의 정조(情操)다. 한은 '백제 유민의 한', '전라도 사람들의 한', '5.18 광주의 한', '조선 민족의 한'처럼 집단적 정조로 되기도 한다. 한은 식민지 시대를 경험했고 6.25 전쟁을 裣었고 분단의 역사를 살아온 우리 민족 민중의 보편적 정서다. 그런데, 한은 언젠가는 한을 한번 풀 날이 있으리라는 강렬한 희망의 정조이기도 하다. 그래서 한맺힌 사람은 소극적이거나 체념적이지 않고 오히려 낙천적이고 억척스러울 경우가 많다. 한맺힌 사람들은, 전태일에게서 보듯이, "무릎 꿇고 사느니 서서 죽겠다"는 저항적 자세를 보이기도 한다. 한은 머리가 아닌 가슴, 아니 배속과 창자속에 또아리틀듯 맺힌다. 맺힌 한은 어떻게든 풀어야 한다. 풀지 않으면 병이 된다. 우리 민족과 민중은 한풀이의 지혜를 오랜 역사를 통해 익혀 왔다. 노래(민요)로 풀어내고, 이야기(신세타령, 민담)로 풀어내고, 춤(탈놀이)과 굿으로 풀었다. 한은 "너죽고 나죽자"는 불같은 복수와 저주의 감정으로 치닫는 경우도 있으나, 눈물과 한숨 섞인 익살(해학)로 풀어내어 삭히는 경우가 더 많다. 노래로 타령으로 춤으로 굿으로 푼다. 한을 모르고서는 한국 사람과의 감정소통이 되지 않는다. 한은 복합ㅗ중층적인 한국(조선)인의 집단적 무의식, 한국(조선) 민중의 집단적 영혼이라고나 할지.

한 만큼 한국적인 것이 있을까? 한국 민중의 영혼과 내면세계와 집단적 무의식을 한이라는 이 한마디 말처럼 빼어나게 잘 나타내는 말이 또 있을까? 아마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 말을 한국 그리스도교는 천대 무시 망각해 왔다. 그런데 1970년대에 이르러 몇몇 신학자들이 이 한을 신학의 한 주요한 모티프로 삼게 된 것이다. 그렇게 해서 현영학의 [한국 탈춤의 신학적 이해]와 [민중신학과 한의 종교], 서남동의 [한의 형상화와 그 신학적 성찰], 서광선의 [해방의 탈춤] 등의 신학 작품들이 나오게 된 것이다.

⑵ 현영학은, 그리스도교가 우상숭배라거나 황당무계한 미신이라고 해서 업신여겨 왔던 민중의 신앙인 무교를 이제 새롭게 보아야 한다고 제창했다. 그리스도교는 말할 것도 없고 불교와 유교가 들어오기 오래전부터 한국민중의 신앙으로서 그들의 삶을 지탱해준 무교, 한국(조선)인의 심성 밑바닥에 깔려 있어서 어떠한 억압과 박해에도 끈질기게 견디고 살아남은 무교, 국가가 유교 불교 등 소위 고등종교를 국교화하여 강요할 때는 겉으로는 받아들이는 척하면서 안으로는 그것을 오히려 무속화시켜버린 무교를 이제 그리스도교 신학자가 '신학'이라는 이름으로 말하게 된 것이다. 현영학은 그의 글 [한국민중과 한의 종교]에서, 미국 하와이 대학에서 인류학을 가르치다가 요절한 김영숙이 강신 무당 여섯 명의 생애를 연구한 책 {한국 여성 여섯 사람}에서 인용하면서, '무당의 신병' 내력을 통해 한국 민중의 한의 본질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강신무당 여섯 사람은 ㉠ 같은 계층의 다른 여성들에 비해서 지능이 훨씬 높았고; ㉡ 찢어지게 가난한 생활 때문이건 시어머니의 구박과 남편의 학대 때문이건 간에 지독하게 고생을 했고; ㉢ 이런 고통을 자기에게 뒤집어씌운 사회문화적 인습과 전통 제도에 대해서 극도로(미칠 정도로) 민감했고; ㉣ 바로 그렇기 때문에 신병에 걸렸다; ㉤ 또 이 신병에서 회복되는 과정에서 무당이 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정도로 정신적 영적 압력을 (신령으로부터) 받았고; ㉥ 그래서 결국 무당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 결론이 시사하는 바에 의하면, 무당의 신병이라는 것은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어떤 계시 때문도 아니고, 귀신들의 장난 때문도 아니며, 일상생활에서의 너무나도 지독한 고통과 고생, 거기서 맺히고 쌓인 한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루 세끼 식생활이 해결된 사람들이 느끼는 죄책감이나 죽음의 공포, 삶의 무의미성이나 불안 등과 같은 것 때문이 아니라는 것이다. 또는 삶과 유리된 어떤 철학적 직관이나 협의의 '종교적 경험' 때문에 무병이 생긴 것은 더욱 아니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저쪽 명부(冥府)의 세계로부터의 영신적 작용이거나 '머리'에서 나온 고등종교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 것이 아니고, 한맺힌 오장육부에서 빚어진 '몸'의 경험이라는 것이다.

"무당의 종교행위의 극치는 시퍼런 작두날 위에서 사뿐사뿐 추는 춤이다. 이 행위는 단순한 기능의 습득이나 훈련에서 온 것이 아니라, 무당들의 지독히도 쓰라리고 고된 인생경험에서 온 것이다. 그것은 이 풍진 세상을 등진 중상류층의 풍류나 멋과는 달리, 작두날 같이 험하고 무서운 이 세상과의 싸움에서 살아남은 힘을 과시하는 행위라고 보여진다. 그것도 해학과 춤과 노래를 곁들일 정도로 여유있게 말이다." 바로 이런 이유로 해서 무당은 한국 민중의 이른바 '한의 사제'(서남동)로서 수천 년 동안 한국인의 원초적인 종교 심성을 사로잡고 한맺힌 이 땅의 민중의 넋에 생기를 불어넣고 그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며 고난에 찬 삶을 지탱하는 힘이 되어 주었던 것이다.

⑶ 현영학은 '한'에는 세 얼굴이 있는 것 같다고 한다. 하나는 정한(情恨)인데 탄식-체념-적응-연민과 사랑 등으로 연결되는 제사장직의 한이고, 다른 하나는 원한(怨恨)인데 원망-복수-변혁-정의의 실현 등으로 전개되는 예언자직의 한이다. 한의 이 두 얼굴은 서로 엇바뀌며 교대로 나타날 때도 있고 앰비벌런스 하게 동시에 나타날 때도 있다. 문학평론가 임헌영은 이 두 얼굴이 언제나 함께 있음을 강조한다. 그러나 현영학은 이 두 얼굴이 있는 곳에는 언제 어디에나 따라다니는 또 하나의 얼굴이 있다고 한다. 해학과 풍자와 웃음의 얼굴이다. 이 웃음은 점쟎고 얌전한 미소가 아니라, 봉산 탈춤에서 보듯이 창자에서 터져나오는 웃음, 허리를 잡고 몸을 비틀며 웃어젖히는 파안대소다. "이 웃음은 단테가 본 것처럼 천당에서 모든 만물이 하나님과 더불어 웃는 웃음, 궁극적 승리자 '제왕'의 웃음이다. 이 세 가지 얼굴은 민중의 한의 예술인 탈놀이나 판소리, 한의 종교인 무교에서는 언제나 볼 수 있다." 이렇게 말하면서 현영학은 그리스도교의 자화상을 떠올리며 묻는다. "우리의 신앙이나 교회가 이 세 얼굴을 다 가지고 있는지? 예언자의 얼굴을 내밀어야 할 때 제사장의 얼굴을 내보이고(부자들에게), 제사장의 얼굴로 임해야 할 때 예언자의 얼굴을 내밀지는 않는지(가난한 사람들에게)?"

1970년대 대학 캠퍼스에서 자주 벌어졌던 탈놀이판의 무르익은 분위기를 서광선은 소위 '신학논문' 위에다 그대로 옮겨 놓는다.

흐느끼고 눈물을 흘리면서 표현되는 한도 있지만, 탈춤 속의 말뚝이는 소리지르고 웃고 조롱하고 거짓말하고 저항하면서 그의 깊은 한을 터뜨린다. 속 깊이 간직했던 한을 노출시키는 것이다. 탈판의 민중들은 말뚝이와 함께 불의와 억압에 항거하는 함성을 지른다. 탈춤 속에서 말뚝이는 더 이상 비굴한 종놈일 수 없다. 그는 억압의 악순환에 저항하고 그 악순환의 사슬을 끊어버릴 태세를 갖춘 투사로 변신한다. 탈판을 에워싼 민중의 웃음과 갈채 속에서 우리는 해방을 향해 나아가는 민중의 소리를 듣게 된다. 우리는 다가오는 폭풍을 직감한다.

현영학 서광선에서 보듯이, 민중신학이 민중의 한을 신학에 도입하자마자, 그리스도교의 신학은 들의 꽃(마태 6,28) 같이 생기를 얻게 되었고 갈릴래아 민중의 땀냄새와 건강한 웃음소리와 항거의 몸짓을 회복하게 되었다.

⑷ 한의 속량적 성격

⒜ 서남동의 '한 이해'는 또 다른 뉘앙스를 갖고 있다. 그는 먼저 민중과 한의 관계를 특이한 방식으로 설명한다. "사람을 밖에서 보면 육체이고 안에서 보면 혼이듯이, 민중도 밖에서 보면 민중이고 안에서 보면 한이다." 즉 민중의 혼에 해당하는 것이 한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혼이 빠진 사람이 사람이 아니듯이, 한이 없는 민중은 민중이 아니다'라는 결론이 나온다. '민중인가 민중이 아닌가'라는 분별은 '한을 지니고 있는가 없는가'에 달려있다. 가난한 자들, 포로된 자들, 눈먼 자들, 눌린 자들(루가 4,18), 목마른 자들, 배고픈 자들, 병든 자들, 헐벗은 자들, 감옥에 갇힌 자들(마태 25장), 천대 멸시 차별받는 자들, 결박당하고, 매맞고, 고문당하고, 죽임당하는 자들(히브 11장), 그래서 한을 지닌 자들, 이 한이 민중을 나타내는 지표(indicator)다. 민중의 고난이 우리 곁에는 없는가? 이런 한맺힌 사람들이 오늘 이 세계에 없는가? 한의 문제, 민중의 문제는 지구 밖으로 사라져 버렸는가? 만일 그렇다면, 십자가도 그리스도도 없다. 그리스도교도 존립의 근거를 잃는다. 구원도 부활도 없다. 수난이 없으면 그리스도가 아니며, 십자가가 없으면 부활도 없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우리가 다루어 온 그리스도교 신학의 문제는 죄의 문제였다. 그러나 앞으로의 신학, 즉 한국에서 전개되는 민중신학의 핵심되는 문제는 한의 문제일 것이다." 민중신학의 과제는 민중의 한을 신학의 주제로 할 뿐만 아니라 민중의 한을 풀자는 것이다. 교회의 역할도 어떻게 하면 민중의 한을 푸는가에 있다. 그리스도교에 있어서 이것은 죄를 용서받는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역사적으로 볼 때, 그리고 우리의 일상적인 경험에서 보더라도, 죄라고 하는 것은 강자가 약자에게 뒤집어 씌우는 누명이나 딱지인 수가 많다. 예수 시대도 그랬다. 그 시대에 종교적 지배집단이 민중에게 붙인 딱지가 '죄인'이었다. "예수가 죄인을 위해서 왔다"는 것은, 그래서 더 깊은 의미가 있는 것이다. 죄는 지배자의 눈으로 보면 죄이고 민중의 눈으로 보면 한이다. 죄는 지배자의 언어이고 한은 민중의 언어다.

물론 서남동은 인간이 하느님 앞에 지은 죄가 없다든지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한다. 또 인간 실존의 영역에서 문제되는 죄를 과소평가하자는 것도 아니라고 한다. 그것은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절대적 관계의 문제로서, 지배자가 민중에게 죄를 씌우는 문제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차원이다. "너무도 많은 경우, 죄라고 하는 것은 지배자편에서 피지배자에게 붙인 딱지였다. ㅗㅗㅗ 죄라고 하는 것은 무엇이었나? 힘 있는 자들이 힘 없는 자들에게 붙이는 렛델인 경우가 많지 않은가?" 이 문제에 대한 사회학적 분석없이 종교적으로 죄를 말하는 것은 위험하며, 지금 우리가 당면한 문제는 죄의 문제가 아니라 한의 문제라는 것이다.

이 점에 관한 안병무의 설명은 이해하기 쉬워서 설득력이 더 있다. "예수의 죽음을 대속이라는 개념으로만 해석해 버리는 것은 너무 단순한 도그마입니다. 적어도 예수 자신은 죄라는 문제에 관심을 두지 않았어요. 예수의 안중에는 소위 죄인이라는 것이 없었어요. 도대체 누가 죄를 규정합니까? 기존실서가? 엄밀히 말하면 지배층이 설정한 그물에 걸린 사람들이 죄인이지요. 그러나 예수는 그들을 죄인으로 보지 않고 오히려 그런 올가미에서 해방시켜야 할 대상으로 보았습니다. 예수의 비판 대상은 오히려 그들을 죄인으로 규정하는 지배층이었습니다. 언제나 강자가 약자에게 죄를 씌우는 것이기 때문에 죄를 강조하다 보면 결국 약자만 당하게 돼요. 법적 제의적 체제를 장악한 지배층에 깔려 신음하는 민중들이 예수 주변에 몰려들었어요. 이들에게 예수는 '너희 가난한 사람들은 복이 있다. 하느님나라가 너희의 것이다', '너희는 하느님의 아들 딸이다'라고 했습니다." "서남동 교수가 '죄란 지배자의 언어이고 그것은 민중에 있어서는 한이다'라고 했는데 이것은 참 예리한 인식이라고 생각합니다."

⒝ 서남동은 다음으로, 우리 모두를 해방시킬 메시아는 고난받는 민중의 신음소리, 곧 '한의 소리'를 타고 오실 것이라고 한다. 우리 시대의 수난당하는 이웃, 특히 우리가 '구조적인 악'이라고 부르는 것 때문에 고통받고 있는 이웃의 절규에서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한다면, 우리는 다른 아무데서도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한다고, 서남동은 단언한다. 그는 이것을 가리켜 고난받는 민중의 메시아성 또는 한의 속량적 성격이라고 말한다.

서남동은 민중이 당하고 있는 고난이 하느님의 역사 경영을 알아보는 색인(index)이라고 했는데, 이 말은 '민중을 보고 하느님을 안다'는 말과 같다. 민중은 하느님을 지시하는 나침반 같은 것이다. 민중의 현실이 하느님을 이해하게 해 주는 안내자다. 민중을 보고 하나님을 안다. 이 경우 민중이 '계시'다.

서남동은, 게르트 타이쎈이 {예수운동의 사회학}에서 '속죄양'에 관한 깊은 성찰을 보여준 것을 소개한다. 타이쎈에 의하면, 예수운동은 당시의 사회적 모순과 위기의 산물이지만 그 사회적 모순과 위기를 타개하려는 시도(문제에 대한 대답)이기도 했다고 한다. 예수는 당시의 사회적 모순에 의해서 살해되었으나 거기서 끝나버리지 않았다. 살해된 예수는 자기 자신 속에 모든 모순을 흡수해버리는 속죄양이라는 그리스도론적 상징으로 승화했다. 예수운동은 속죄양에게 모든 죄악을 짊어지워 망각의 광야로 추방해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를 '속죄의 메시아'로 내세우며 자기 자신들(예수운동 집단 곧 초기 그리스도교회)을 그 속죄양과 동일시(identify)하면서 세상의 모순과 죄악을 흡수해버리는 메시아 운동을 줄기차게 전개해 나갔던 것이다. 그래서 결국, 희생의 제물이 된 자가 도리어 사제의 자리에 서게 되고, 피고가 판사가 되고, 무력한 자가 세계의 주권자가 되고, 추방당한 자가 공동체의 중심이 되었던 것이다. 이리하여 예수의 삶은, 죽임을 그 안에 흡수해 버리는 삶, 곧 부활의 삶이 되었다. 죽임의 흡수는 스스로 속죄양이 됨으로써만 가능하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의 참 생명인 것이다. 참 생명은 세상의 죽임(불의와 죄악)을 흡수해 버리는 생명이다. 그러한 속죄양과의 지속적인 자기 동일화는 실로 놀라운 것이고 그 유례가 없는 것이라고 타이쎈은 말했다. 서남동은 그러한 대속적인 삶 하나를 전태일의 삶에서 인지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대속적인 죽음일 뿐 아니라 이 세상에서 계속되고 있는 대속적인 죽음들을 발견하게 하는 빛이다."

⒞ 다음으로 서남동은 '속량'과 '해방'의 재일치(reunion)를 말한다. 전통적 그리스도교 신학에서는 속량과 해방이 분리되어 버린 결과, 한편으로는 해방이라는 사회적 차원의 실천이 탈락되고 속량은 종교적 차원에 국한되어 버렸고, 다른 한편으로는 해방은 종교적 차원을 상실해 버리고 사회적 해방에만 국한되어버렸다. 그러나, 양자는 본래 분리되면 안 되고, 분리되면 양자가 다 변질 왜곡되는 것이었다. 성서의 구원은 그 양면을 다 포괄하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출애굽의 구원은 해방과 같은 말이고, 신약성서의 구원(lutro)는 속량으로도(루가 24,21; 히브 9,12) 해방으로도(루가 1,16; 베전 1,18) 번역되었다. 인간의 구원이 사회적 해방의 차원에까지 이르지 않으면 신체를 떠난 혼 같이 유령이 될 뿐만 아니라 그 유령은 다시 신체를 마취, 마비시키는 보복을 한다. 그래서 사회적 차원을 떠난 종교는 '아편'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창조와 속량은 실제에 있어서 동전의 양면이다. 창조가 있는 곳에 속량(redemption)이 있다. 전통적인 서양 신학은 창조의 영역과 속량의 영역을 분리시켰으나, 창조와 속량은 실은 하느님의 행위의 양면이다. 송천성(宋泉盛)이 옳게 지적하고 있듯이, 아시아의 문화와 역사에서도 하느님의 창조의 역사와 함께 하느님의 속량의 역사도 같이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교와 직접적인 접촉이 없었던 민족들과 인민들의 제 역사는 하느님의 속량적인 사랑과 능력으로부터 분리된 채 진행된 단순한 자연사들인 것은 아니다. 어느 민족이나 나라의 역사적 흥망성쇠는 자연적 요소와 정치적 요소만으로는 설명될 수 없다. 거기에는 인간의 불의와 부패를 심판하고, 숭고한 것, 거룩한 것을 고무 격려하는 속량적인 요소가 있다. 한국 민중사와 문화전통 속에도 하느님의 창조와 속량의 역사가 있어 온 것이며, 지금도 있고 앞으로도 있게 될 것이다.

과연, 우리는 속량과 해방이 분리되지 않고 일치된 경우를 전태일의 삶과 죽음에서 만나게 된다. 전태일의 속량은 자기의 몸을 불살라 바쳐 다른 노동자들을 속량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을 각성시켜 해방의 도정에 나서게 하였다. 그의 죽음은 속량과 해방, 종교적 차원과 사회적 차원을 포괄한 것이었다. 민중신학에서 구원론을 말한다고 할 것 같으면, 바로 속량과 해방의 절묘한 일치를 구현하고 있는 전태일의 예를 이야기하면 될 것이다.

⒟ 한풀이의 길

서남동은, "민중신학의 과제는 민중의 한을 푸는 것이다"라고 했다. 그러면 민중의 한풀이는 어떻게 하는 것인가? 그는 대담 [민중신학을 말한다]에서, "한풀이에는 부당한 억눌림, 말 못할 억울한 사정을 풀어야 한다고 해서 오히려 그것을 무마하고 망각하게 하고 해소하고, 그래서 마음이 후련해지게 하는 역할을 강구하는 수가 있습니다. 이것은 종교의 중요한 기능 중의 하나죠. 그러나 단슨히 여기에 그치면 한풀이는 아편의 역할 이상이 아닐 것입니다. 자칫 그것은 불의한 권력을 연장시키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합니다. ㅗㅗㅗ 종교가 민중의 한풀이에 그친다면 생명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부당한 체제는 영속할 것이기 때문입니다"라고 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이 참된 의미의 한풀이일까? 그의 답은 이렇다. 한풀이는 하나의 저항으로 펼쳐져야 하는데, 현대 사회에 있어서의 저항은 사회적 부조리를 사회과학적으로 정확히 분석하여 밝혀내고 고발하는 데로 나서야 한다. "사악한 법령(국가보안법, 유신헌법, 긴급조치 등)에 눌려 있는 정의의 소리, 악한 제도에 억압되고 있는 참된 민주주의, 이러한 사회적 원인에 기인한 한을 푸는 데는 인격적 차원에서의 회개와 자선 사업만으로 되는 것은 아니고 법률적 정치적 경제적 차원에서의 구조적 변혁으로 되는 것이다. 아니 사회의 구조적 차원에서 모순과 부조리가 제거되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가 서는 것이요, 예수의 십자가의 속량이 발효하는 것이다. 이것이 성숙하고 참된 의미에서 도덕과 종교의 차원이다."

이 문제와 관련해서 서남동은 한국의 대표적 평론가 백낙청의 견해에 주목한다. 백낙청은 민중을 이해하는 데는 반드시 한을 이해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오랜 세월을 가난하고 억울하게 살아온 민중의 아픔과 설움을 우리는 곧잘 한이라는 말로 표현해 왔다. 한이란 원한과 달라서 내 불행이 어디서 왔으며 누구에게 앙갚음을 해야 좋을지도 모르는 막연한 설움이요 이름 없는 아픔이다. ㅗㅗㅗ 우리 민족의 노래와 이야기, 춤과 그림은 어느 것도 이 한과 따로 떼어서는 존립하기가 힘들다"고 하고, 민중의 한은 이제 "계속 쌓이기만 할 것이 아니라 풀어져야 할 시대가 온 것이다"라고 주장한다. 민중의 한풀이 욕구는 이제 거역할 수 없는 힘으로 역사의 마당에 뛰어들고 있으며, 이러한 민중의 욕구를 떠나서 민심을 찾고 천심을 따로 찾아보았자 헛수고가 될 것이라고 한다. 그는 민중의 한풀이는 민중이 좀 더 자기 운명의 주인이 되는 과정이어야 하며, 그것은 구체적으로 물질적인 생산력의 증대, 보다 더 슬기로운 사회 제도의 창안, 새로운 사상의 탄생과 참신한 감정의 표현과 같은 진보를 이루는 과정일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러한 진보는 누가 옆에서 진보의 조건을 명시하거나 일러주고 시켜서가 아니라 민중이 스스로 알고 느끼고 깨달은 만큼의 힘을 다해서 자신의 욕구를 실현하는 가운데서 이루어질 것임에 틀림 없다고 말한다.

3.4. 민중의 메시아성

앞에서 필자는, 민중신학에서 구원론을 말한다고 할 것 같으면, 바로 속량과 해방의 절묘한 일치를 구현하고 있는 전태일의 예를 이야기하면 될 것이라고 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대속적인 죽음일 뿐 아니라 이 세상에서 계속되고 있는 대속적인 죽음들을 발견하게 하는 빛이다"라고 한 서남동은 바로 전태일의 죽음에서 그러한 대속적인 죽음 하나를 인지한다. 당연하게도, 서남동은 한의 속량적 성격으로부터 민중의 메시아성이라는 그의 신학의 또 하나의 주요한 모티프로 나아간다.

⑴ 어느 노동자의 시에 계시된 민중의 메시아성

올 어린이날만은

안사람과 아들놈 손목 잡고

어린이 대공원에라도 가야겠다며

은하수를 빨며 웃던 정형의

손목이 날아갔다

작업복을 입었다고

사장님 그라나다 승용차도

공장장님 로얄살롱도 태워 주지 않아

한참 피를 흘린 후에

타이탄 짐칸에 앉아 병원엘 갔다

기계 사이에 끼어 아직 팔딱거리는 손을

기름먹은 장갑 속에서 꺼내어

36년 한많은 노동자의 손을 보며 말을 잊는다

비닐봉지에 싼 손을 품에 넣고

봉천동 산동네 정형 집을 찾아

서글한 눈매의 그의 아내와 초롱한 아들놈을 보며

차마 손만은 꺼내 주질 못하였다

훤한 대낮에 산동네 구멍가게에 주저앉아 쇠주병을 비우고

정형이 부탁한 산재관계 책을 찾아

종로의 크다는 책방을 둘러봐도

엠병할, 산데미 같은 책들 중에

노동자가 읽을 책은 두 눈 까뒤집어도 없고

화창한 봄날 오후의 종로거리엔

세련된 남녀들이 화사한 봄빛으로 흘러가고

영화에서 본 미국상가처럼

외국상표 찍힌 왼갖 좋은 것들이 휘황하여

작업화를 신은 내가

마치 탈출한 죄수처럼 쫄드만

고층 사우나빌딩 앞엔 자가용이 즐비하고

고급요정 살롱 앞에도 승용차가 가득하고

거대한 백화점이 넘쳐흐르고

프로 야구장엔 함성이 일고

노동자들이 칼처럼 곤두세워 좆빠져라 일할 시간에

느긋하게 즐기는 년놈들이 왜 이리 많은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얻을 수 있고

바라는 것은 무엇이든 이를 수 있는'

선진조국의 종로거리를

나는 ET가 되어

얼마간 미친 놈처럼 헤매이다

일당 4,800원짜리 노동자로 돌아와

연장노동 도장을 찍는다

내 품 속의 정형 손은

싸늘히 식어 푸르뎅뎅하고

우리는 손을 소주에 씻어 들고

양지바른 공장 담벼락 밑에 묻는다

노동자의 피땀 위에서

번영의 조국을 향락하는 누런 착취의 손들을

묻는다

프레스로 싹둑싹둑 짓짤라

원한의 눈물로 묻는다

일하는 손들이

기쁨의 손짓으로 살아날 때까지

묻고 또 묻는다

― 박노해의 [손 무덤]

[제1연] 열악한 노동조건, 손목이 잘리는 산업재해 사건, 절망적인 노동자의 현실(절망, 슬픔) / [제2연] 사용자측의 부당한 처리 장면(원한, 분노) / [제3연] 동료의 잘린 손목을 가족에게 전해 주러 갔으나 차마 그러지 못하고 되돌아 나오는 장면(서글픔, 절망감) / [제4연] 번화가 대형서점의 산더미처럼 쌓인 책 중에 산업재해 관계서적 등 노동자용 서적이 없는 비민중적 현실(분노) / [제5연] 외국상가 같은 거리와 화사하고 세련된 남녀들과 탈출한 죄수 같은 차림의 노동자의 대비, 현실의 모순구조(억울함, 슬픔, 분노) / [제6연] 5연보다 더욱 적나라한 대비(억울함, 슬픔, 분노, 절망) / [제7연] 잘린 손목을 공장 담벼락 밑에 묻는 행위(또는 의식)를 누런 착취의 손, 일 안하고 놀고 먹는 하얀 손들을 묻는 행위(또는 의식)로 극적으로 일치ㅗ전환시킴으로써 노동현실과 사회의 변혁을 주체적, 실천적으로 실현하겠다는 의지를 표현(슬픔, 절망, 분노, 원한의 한풀이와 민중해방의 실현 의지).

제1연에서 제6연까지는 민중의 일방적인 패배로 인한 슬픔과 절망, 분노와 원한의 누적 과정이다. 한은 쌓이고 그 원인인 사회적 모순구조에 대한 인식과 함께 주체적 실천으로 일어서는 질적 전환(한풀이)을 보여 주고, 드디어 제7연에 이르러 일하는 손들의 부활과 민중의 구원ㅗ해방을 상징하는 행위(의식)의 반복(강조)으로 끝맺고 있다. 이는 이 시가 어떤 이념이나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한국 민중예술의 기본구조, 즉 대립 갈등의 상황이 언제나 민중의 일방적인 희생과 패배로 끝나지만, 한이 쌓이고 깊어지면서 민중이 현실의 본질을 꿰뚫어보게 되고 드디어 상황 자체의 변혁을 행동으로 요구하게 된다고 하는, 민중 해방의 전체 구도를 보여 주는 것이다.

이 시는 서남동의 '한풀이 신학'의 시적 구현처럼 느껴진다. 서남동의 말투를 잠시 흉내낸다면, "노동자의 시 [손무덤]은 민중의 대속적인 수난을 비춰주며, '한의 속량적 성격'과 '민중의 메시아성'을 계시(reveal)해 준다"라고 말해도 무방하지 않을까.

⑵ 강도 만난 사람의 사크라멘트

전통적 신학에서 그리스도의 현존을 보여주는 가장 뚜렷한 방식은 성찬식의 떡과 포도즙을 통한 성례전적 현존이다. 서남동은 그의 글 [소리의 내력]에서, "오늘날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현존을 매개하는 것은 자연적인 요소인 떡과 포도즙이 아니라 사회적인 요소인 이웃과의 형제 관계"라고 하는 스위스의 가톨릭 신학자 발타자르(1950∼)의 말을 소개한다. 마지막 날 저녁 식탁에서 떡을 떼시며, "이것은 너희를 위한 내 몸이라"고 하신 주는 그의 마지막 설교에서, "내가 주렸을 때 네가 내게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말랐을 때 마실 것을 주었다"고 하신 그 주님이시다. 떡과 포도즙으로 화체(化體)하신 그리스도는 또한 아픔을 당하는 이웃으로 화신(化身)하신다. 이것을 발타자르는 '형제의 사크라멘트'라 하였다는 것이다. 성찬식에서 떡을 함께 떼어먹고 포도즙을 나누어 마심으로써 주의 속죄의 은총을 입듯이, 우리의 현실에서 이웃이 당하는 고난, 옥중에서 신음하는 이들의 아픔에 동참하고 그 한을 함께 나눌 때 우리는 고난의 십자가의 공동체로 결속되어 새 계약의 백성으로 출애굽의 행진을 하게 되는 것이라고 한다. 여기서 그는 고난받는 민중이 메시아의 성격을 지니며, 우리에게 메시아의 역할을 한다는 그의 생각을 발타자르의 말을 빌려 설명한 것이다.

이러한 생각을 보다 적극적으로 전개한 글이 그의 유고 [현장의 소리]다. 이 글에서 그는 루가복음 10장 25-37절의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그의 '민중 그리스도론'에 입각하여 다음과 같이 재해석한다.

즉, 이 이야기에서 '그리스도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은 누구인가? 이 물음에 대한 전통적이고 관습적인 대답은 선한 사마리아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서남동 자신은 '강도에게 습격당해 반죽음이된 그 사람'이 그리스도 역을 하고 있다고 한다. 그 사람의 신음 소리가 거기를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인간이 되라고 호소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강도 만나 빼앗기고 상처 입어 죽어가는 사람을 통해서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접근해 오신다는 것이다. 그 사람이야 말로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매개하는 사크라멘트라는 것이다.

다음으로, 이 이야기에 대하여 전통적, 인습적으로 붙여온 제목은 '선한 사마리아인'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의 화자인 예수의 시좌에서 본다면 이 이야기의 진정한 제목은 '강도 만난 사람'이 될 것이라고 한다. 전자는 부르조아 그리스도 교회, 백인 그리스도인의 시좌에서 붙인 제목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교회를 선한 사마리아인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그들로부터 착취당하고 소외된 제3세계 민중의 눈으로 보면 강도 만난 사람이야말로 이 이야기의 진실한 제목이 될 것이다. 화자인 예수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시좌에서가 아니라 강도 만난 사람의 입장과 시좌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셋째로, 그는 강도들의 문제를 제기한다. "인습적으로 이 본문을 읽거나 설교하는 경우, 강도에 주목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실은 강도야말로 모든 불행과 모순의 원인이었는데도 말이다. 사마리아인과 강도 만난 사람에는 언급하지만 강도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잊어버린다. 마치 강도는 등장하지 않았던 것처럼 말이다. 강도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 것이 부르조아 그리스도교 설교의 에티켓이다. 설교는 언제나 사마리아인의 선행을 선전하거나, 강도 만난 사람의 참상을 듣는 이들의 감정에 호소한다. 이렇게 하는 것이 부르조아 그리스도교의 관념적 성서해석 방법이다. 구제금과 복지사업과 원조ㅗ차관의 그리스도교다. ㅗㅗㅗ 역사적으로 교회는 강도에게 빼앗기고 반죽음을 당한 민중의 한과 한을 발생시킨 강도들이 범한 악에 대해서는 침묵해 왔다. ㅗㅗㅗ 그것은 죄의 신학이었지 한의 신학은 아니었다. ㅗㅗㅗ 제1세계 교회의 역할은 선한 사마리아인이 되는 것으로 정해져 있다. 그러나 제3세계의 교회는 그 강도들을 보았으며, 또한 강도에게 당한 쪽에 있기 때문에 강도들을 고발하지 않으면 안된다. ㅗㅗㅗ 제3세계의 교회는 빼앗는 자와 빼앗기는 자의 실상을 구조적으로 보고 구조적인 변화를 촉구하는 입장이다. 우리는 고전적 그리스도론의 제3세계적 이해, 즉 실천적 예언자로서의 그리스도, 상처를 싸매주는 제사장으로서의 그리스도, 구조악을 쳐부수는 승리와 부활의 제왕직으로서의 그리스도, 이 3중 직능의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것이다."

제2부

민중신학의 전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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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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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과 합류의 해석학

이 장에서는 민중신학의 해석학적 패러다임에 두 개의 기조를 이루고 있는 안병무의 '사건'과 서남동의 '합류'를 중심으로 하면서, 이들과의 관련 속에서 여타의 해석학적 개념들을 밝혀 보려고 한다. 여기에는 '전거', '성서의 맥', '탈신학=민담(또는 이야기)', '계시의 하부구조', 그리고 민중신학에서 '한국적'의 해석학적 의미 등이 포함된다.

1. 사건

1.1. 안병무에게 있어서 민중신학은 '사건의 신학'이다. 그에게 있어서 '신학'이란 하느님(예수, 성령)과 인간이 함께 일으키는 역사적이고 사회적이고 집단적(또는 공동체적)인 일, 곧 사건을 증언하는 것이다. 사건의 신학은 역사적인 사건들 속에서 활동하는 하느님(예수, 성령)을 발견하고 그것을 해석하고 증언하는 신학이다. 하느님은 사건을 일으키는 신이고, 사건 안에 현존하며, 사건을 통해 인식되는 신이다. '하느님(예수, 성령) 사건'은 각 시대의 사회구조와 제도와 문화 속에서, 역사적, 사회-정치적, 문화적 사건들 속에서 일어난다. 신학은 바로 이 사건을 증언한다. 여기서 사건의 신학은 '증언의 신학'이 된다. 증언의 신학은 오늘의 민중현장에서 일어나는 사건들 속에서 하느님(예수, 성령)의 사건을 보고 그것을 증언하는 신학이다. 오늘의 사건들에서 출애굽 사건과 십자가 사건과 부활 사건이 재현하는 것을 보고 그것을 증언하는 신학이다. 안병무는 그리스도교의 출발이 '십자가 사건'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본다.

그전에는 역사적 예수를 추구하면서도 그의 인격에 매료되어 개인으로서의 예수를 추구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건으로서의 예수, 즉 '예수 사건'으로 그를 새롭게 이해하게 되니까 역사적 예수에로의 큰 신작로가 열린 느낌이 들었습니다. 서구 신학자들은 이른바 말씀의 신학이라고 해서 예수를 '말'의 사건으로 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는 예수의 말씀에서보다 '십자가'라는 사건에서 성립한 것입니다.

그는 예수와 민중이 일체가 되어 공동주체로 판을 벌이는 사건 속에서 예수는 한 개인(individium)이 아니라 '민중예수'(집단적 예수)로 확인되며, 이 민중예수는 오늘의 '예수민중'으로 현존한다. 안병무는 여기서 그가 한평생 찾아 헤매던 '역사의 예수'를 만났다고 고백한다.

1.2. 민중신학에서 말하는 사건이란 하느님과 인간이 함께 일으키는 역사적이고 사회적이고 집단적(또는 공동체적)인 일(日語: 出來事)을 말한다. 성서 안에서 대표적인 예를 찾는다면 출애굽 사건, 예수 사건, 오순절 성령사건 등을 들 수 있다. 사건은 과거, 현재, 미래에 걸쳐 통시적(diachronological)으로도 일어나며, 오늘 여기에 현존하는 예수(오늘의 예수)가 일으키는 사건(예수사건)이라는 방식으로 공시적(synchronical)으로도 일어난다. 출애굽 사건도, 예수 사건도, 성령사건도 단순히 역사적 유일회적 사건이 아니다. 하느님(예수, 성령)이 민중과 일체가 되어(공동주체로; intersubjectively) 역사를 만들어가는 것이라면, 민중이 노동과 고난과 죽음 가운데서 자신의 역사를 만들어 나가는 그 속에 하느님(예수, 성령)의 고난과 죽으심이 내포되어 있다. 과거라는 시간성이 지양되고, 예수의 삶과 죽음이 지금 여기에서 다시 일어난다. 서남동은 이것을 '성령론적 공시성'이라고 불렀다.

성서는 역사적 사건의 전승들을 담고 있는 문서다. 성서의 어느 한 전승을 놓고 보더라도 그 전승의 경로를 역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반드시 거기에는 그 전승의 역사적 핵에 해당하는 사건이 있다.

1.3. 사건은 안병무 신학의 주요 패러다임이다. 이 패러다임을 하나의 명제로 바꾸면, "최초에 사건이 있었다."가 된다. 안병무의 '사건'이라는 패러다임은 '역사의 예수'의 실체를 규명하는 길을 열었다. 즉 성서 속에서 케리그마에 가려져 있던 예수 사건 전승을 찾아내는 열쇠가 주어진 것이다.

그런데 사건이라는 열쇠는 과거의 예수 사건을 규명하는 데 있어서 만이 아니라 현재의 예수 사건을 규명하는 데 있어서도 효험을 발휘한다. 안병무는 오늘 한국에서 일어나는 민중사건을 오늘의 예수 사건으로 보고, '예수사건'이라는 해석학적 열쇠로 오늘의 그리스도 사건을 추적한다. "오늘의 그리스도가 ― 나의 언어로는 오늘의 예수사건이 ― 오늘 여기에 민중의 사건을 통해서 나타나고 있다. 이천년전의 예수를 추구하는 것이나 교리상의 그리스도를 추구하는 것은 넌센스다. 중요한 것은 오늘의 예수 사건이 어디서 어떻게 일어나느냐 하는 것이다."

안병무는 십자가와 부활 사건은 2천년 전에 단 한 번 일어나고 그것으로 끝나버린 사건이 아니라, 오늘 우리의 현장에서 민중의 수난과 부활(민중운동) 속에서 거듭 재현된다고 한다.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그 십자가에서 그리스도를 만났다. 그러면 그 사건에서 이천년의 시간적 거리를 가진 오늘의 우리는 어디서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나? 우리가 오늘의 그리스도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은 바로 이천년 전의 그리스도의 절규를 오늘에 들을 수 있을 때다. ㅗㅗㅗ 그것은 수난당하는 이웃의 비명소리를 타고 우리의 현장에까지 진동한다. ㅗㅗㅗ 바로 이 절규에 호응해서 그 고난에 참여하는 자는 오히려 정말 현장에 엄존하는 그리스도를 만나고 있는 것이다.

1.4. 수난당하는 이웃의 비명소리에 호응해서 그 고난에 참여하는 일이 실제로 그(안병무)에게 일어났었다. 1975년 6월 대학 교수직에서 첫번째로 강제해직당했고, 1977년 2월에는 그 전 해에 있었던 '3.1 민주구국선언 사건' 관련으로 투옥되었던 것이 그것이다. 그는 자신의 옥중 경험을 바울로가 필립비 감옥에 갇혔던 사건에 비추어, 복음전파의 전진이요, 하느님의 선교(Missio Dei)의 한 사건으로 이해했다.

바울로의 생애 전체는 사건으로 점철되어 있다. ㅗㅗㅗ 이러한 바울로가 드디어 필립비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필립비서를 읽어보면 그가 이미 죽음을 각오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죽음에 직면한 그는 한 가지 진실을 깨닫는다. "형제들이여, 내가 당하고 있는 일이 도리어 복음 전파에 진전을 가져왔다는 사실을 여러분이 알기 바랍니다. 내가 감옥에 갇힌 것이 그리스도를 위함이라는 사실을 ㅗㅗㅗ 모든 사람이 알게 되었습니다. 거의 모든 형제가 내가 구금된 일 때문에 주 안에서 확신을 얻어 두려움 없이 더욱 담대하게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게 되었습니다"(필립 1,12-13). 바울은 그가 감옥에 갇히게 된 사건 자체가 하느님의 복음 전파에 전진을 가져왔다고 인식한다. 즉 하느님은 바울이 감옥에 갇힌 일 마저도 하느님 자신의 선교(Missio Dei)에 사용하신다는 확신이다. 승리하는 때, 영광의 때, 행복이나 성공의 때 만이 아니라, 쓰러지는 때, 매맞아 피를 흘리는 때, 감옥에 던져지는 때, 패배나 불행에 직면한 때에도, 바로 그 사건을 통해서, 자신도 모르는 중에, 하느님은 당신 자신의 일을 행하신다고 하는 사실을 그는 깨달았던 것이다.

그렇다. 사건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도 사건이고 부활도 사건이고 오순절 성령강림도 사건이었다. 사건으로 점철되어 온 그리스도교의 역사는, 이제부터도 사건을 통하여 계승되어 갈 것이며, 우리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하느님은 이들 사건들을 통해서 당신 자신의 사업을 성취해가실 것이다. 그 사건이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가 교회 밖에서인가, 성서 안에서인가 성서 밖에서인가라는 구별은 중요하지 않다. 하느님은 실로 이 역사적 사건들을 통하여 당신의 사업을 이루어 가실 것이다. 우리들은 그의 증인에 지나지 않는다.

안병무는 민중이 승리하는 때만이 아니고 실패하고 좌절하는 때에도, 민중이 고난당하고 죽임을 당하는 때에도, 그 실패와 좌절, 고난과 죽임당함에서 그리스도 사건을 확인한다. 그는 '증인'으로서의 확신에 넘쳐서 말한다. "오늘의 부활 현장은 어디인가? 그것은 바로 물리적 힘을 최상으로 알고 죽임으로 위협하면서 부당하게 억누르는 현장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ㅗㅗㅗ 우리는 죽은듯 했다가도 다시 살아나서 불의에 항거하는 저 민중의 소리를 듣는다. 여기서 우리는 부활한 그리스도가 저들 속에 현존한다는 것을 안다."

2. 합류

2.1. 합류란 무엇인가?

합류는 두 줄기의 강물이 만나서 하나로 되어 흘러가듯이 서로 다른 전통들이 합하여 하나되는 일 그 자체, 그리고 그 방법이다. 신과 인간이 '공동주체'가 되어, 정치적 해방과 문화적 해방(문화적 정체성확보)을 이루어 나간다. 이것이 합류의 내용이다. 서남동은 합류의 내용을 보다 구체적으로, "1970년대 한국의 민주화운동과 인권운동에서 민족-민중전통과 성서적 민중전통이 합류되어 삼중의 질곡, 즉 봉건주의, 식민주의, 신식민주의를 벗기고 약속의 새 나라에 가는 원동력이 되고 있다"고 했다.

합류는 <하느님의 선교>(Missio Dei)다. 하느님의 선교인 이 합류를 증언하려면, 이것이 바로 하느님의 일이라고 하는 것을 (특히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이) 분별하고 승인할 수 있게 해주는 어떤 지표가 필요한데, 이 지표 역할을 해주는 것을 서남동은 '전거'라고 부른다.

민중신학은 성서와 교회사의 흐름에서 민중적 전거들을 찾아낼 뿐만 아니라, 한국 민중운동사의 계보를 더듬어서 '전거들'을 찾아낸다. '동학농민혁명'은 한국 민중운동사에 있어서 전거의 최고봉이며 '패러다임적인 전거'가 된다. 3.1 운동과 4.19 혁명은 오늘의 한국 인권투쟁에 대한 역사적 전거가 된다.

2.2. '합류'와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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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합류의 범례 ― 김지하의 '장일담'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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⑴ 한국에서 두 이야기가 합류한 한 모범적인 사례로 김지하의 장일담 이야기를 꼽고 있는 서남동은, 그 신학적 의미를 이렇게 말한다. "장일담의 해방의 복음은 신학의 토착화를 결정적인 중요과제로 삼는다. 김지하는 예수의 이야기인 복음서와 민중의 한의 이야기인 판소리를 결합하려는 것이다. 그리하여 한국적, 민중적 신학을 형성해 보려고 한다. 판소리의 사설인 장일담 이야기는 예수 이야기 엮음인 요한복음서의 진행과 흡사하다."

장일담 이야기에 나타난 김지하의 이러한 합류의 발상을 서남동은 어떻게 발전시켰는가? 이것은 민중신학의 해명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질문이다.

2.4. 민중신학의 한 패러다임으로서 합류의 의미

⑴ '합류'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의 발견은 민중의식의 각성과 무관하지 않다. 민중의식의 각성이 있을 때에야, 비로소 그 시대 사람들의 눈에 자기 자신의 것, 민중의 문화전통이 보이게 되는 것이다. 1970년대 한국 민중의 각성이 그리스도교 교회와 신학으로 하여금 한국 민중의 문화전통에 눈뜨게 하였고, 그리스도교의 전통과 한국 민중의 정치적 및 문화적 전통이 만나고 결합하는 방식에 대해 고민하게 하였으며, 드디어 '합류'라는 새로운 신학적 패러다임에 도달하게 한 것이다.

⑵ 합류는 두 차원, 곧 정치, 경제, 사회적 해방의 차원과 문화ㅗ종교적 주체성의 차원을 가지는 바, 이 두 차원에서 진행되는 민중의 해방과 주체성 확보를 위한 실천(또는 운동)을 합류라고 말할 수 있다. 신학은 이 합류를 증언하고 해석하는 것이다. 사회 정치적 차원에서 일어나는 합류를 증언하고 해석하는 것이 '정치신학'이라면, 문화 종교적 차원에서 일어나는 합류를 증언하고 해석하는 것이 '문화신학'이다. 민중신학은 이 양자를 포괄하고 통전하려고 한다. 민중신학은 사회 정치적 차원에서 일어나는 합류와 문화 종교적 차원에서 일어나는 합류를 통전적으로 증언하고 해석하는 신학이다.

⑶ 서남동은 '두 이야기'의 합류를 말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다. "어째서 '두' 이야기인가?"라고. 우리에게는 두 이야기(즉 두 전통)밖에 없단 말인가? 세 이야기, 네 이야기, 아니 여러 이야기들이 있는 것이 오늘의 아시아, 나아가서 지구촌의 정치적, 문화적 정황이 아닌가. 서남동의 유연한 문화신학적 감수성이 이러한 상황을 외면했을 리는 없다. 실제로, 그가 말하는 두 이야기는 '여러' 이야기들의 존재를 전제한 '두' 이야기였다. 그의 신학의 최우선적인 과제는 '1970년대 한국에서의 하느님의 선교'를 한국 그리스도인들에게 증언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우선 두 이야기의 합류를 말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민중신학이 아시아의 신학, 세계의 신학으로서 갖는 '보편성'을 염두에 둘 때에는, '여러' 이야기들의 합류를 말하지 않으면 안된다. 합류란 다원문화, 다원종교, 다양한 이데올로기 및 정치 사회제도의 장에서 이루어지는 하느님 자신의 선교(Missio Dei)이고, 신학은 그것의 해석이기 때문이다.

⑷ '합류' 신학에 있어서 또 하나의 중요한 포인트는 합류의 '원심력과 구심력의 문제'이다. 합류의 원심력에 해당하는 것이 문화의 관점이라면, 구심력에 해당하는 것은 '민중의 관점'이다. 원심력은 문화의 다양성, 다원성을 추구하는 방향이고, 구심력은 민중성을 추구하는 방향이다. 이 문제를 숙고함에 있어서 우리는 宋泉盛의 신학에서 유익한 암시를 발견한다.

일찍이 서남동은, 宋泉盛의 문화신학 혹은 그리스도교의 아시아적 전위(transposition)는 단순히 그리스도교와 동양 종교들과의 교섭의 문제에 머물지 않고 현지, 현장의 정치 사회적 실재(reality)에 그리스도교가 어떻게 전위하느냐는 문제까지를 포함한다는 점을 높이 평가하면서, 그것이 그의 뛰어난 신학적 공헌이라고 말한 바 있다. 宋泉盛의 신학은 그 신학의 구심력(민중성)이 차츰 강화되면서 원심력(문화성)과 균형을 취하는 쪽으로 이동해오고 있는 듯한데, 이것은 한국 민중신학으로부터의 자극 때문이 아니었을까.

宋泉盛 신학의 구심력(민중성)은 그의 민담의 신학에서도 힘 있게 드러난다. 그는 폴리네시아 민담의 해석에서, 지금까지 선교사들이 전해준 아시아의 그리스도교는 한갖 얼굴 치장의 그리스도교(decoration christianity)였는데 진정한 아시아인의 그리스도교는 살과 뼈를 깎고 거기에 문신된 그리스도교(tattooed christianity)라야 한다고 갈파했다. 아시아의 그리스도인은 아시아의 현실에서 살과 뼈가 깎이고 다듬어진 체험의 신학, 머리만의 신학이 아니라 몸에 '태투된(tattooed)'신학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宋泉盛은 또한 민요를 좋아하는 소녀가 민요를 불러서 황금열쇠를 얻어내었고 드디어 산중에 숨겨진 호숫물을 마을의 전답으로 끌어들이는 데 성공했다는 중국 민담을 해석하면서, 황금 열쇠를 얻은 비결은 민요를 많이 부르는 것이었다고 했다. 즉, 해방의 열쇠를 얻는 비결은 민요, 민담, 민중의 이야기를 많이 듣고 민중의 한, 민중의 꿈을 아는 것이라는 것이다. 이 말은 무척이나 상징적이다. 신학 이론으로 포화상태가 된 머리와 가슴을 열어야 한다. 열쇠는 민요를 부르는 것이다. 민요를 많이 부르는 것은 신학으로 세뇌된 머리를 '세척'하는 작업이다. 청소를 한 다음에는 민중의 이야기로 머리를 채워야 한다. 그래야 "더 악한 다른 귀신들이 들어와 사는"(마태 12,43-45)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민담의 신학'은 '합류의 신학'이다. '민담(이야기)'에 합류의 원리가 엿보인다. 이야기, 민담은 한 곳에 고여 있지 않다. 광활한 대지를 적시며 구비쳐 흐르는 대하처럼, 민담은 지역, 민족, 문화권의 경계를 넘어 그 전승권을 넓혀가는 강물이다. 흘러가며 다른 강들과 만나 합류한다. 이 합류의 도도한 흐름은 주객도식의 둑을 무너뜨리는 운동이다. 민담의 강물은 인간(민중)만이 아니라 유역(流域)의 모든 자연과 생명의 젖줄이다. 그래서, 합류의 신학은 '탈'신학이다. 아시아의 그리스도교가 서구 부르조아 인간 중심주의 신학 속에 갇힌 바벨론 포로상태에서 '탈'출해 아시아 민중전통의 바다에 합류하는 신학운동(theological movement)이다. 이 합류신학의 원리는 서남동의 '성령론적 공시성'에 암시되어 있다.

2.5. 성령론적 공시성의 원리

성령론적 공시적 원리(또는 방법)는 둘 이상의 서로 다른 전통들이 합류하는 원리 내지 방법이라고 생각된다. 즉 합류는 성령론적 공시성의 원리에 따라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따라서, 합류를 해석하려면 성령론적 공시적 해석방법을 가지고 해야 한다. 즉, '성령론적 공시성'은 합류의 원리이자 합류를 해석하는 '해석학적 원리'이기도 하다. 나는 성령론적 공시성의 원리를 다음과 같이 설명해 본다.

첫째로, 성령론적 공시성의 원리는 '현재'와 '현장'을 중시하고 그 의미를 강화시키는 성령의 활동 원리다. 성령은 하느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현재화, 현장화시키는 '오늘의 하느님'이다.

둘째로, 성령론적 공시성의 원리는 성서 및 교회사의 민중전통과 오늘의 민중전통을 합류시키는 '하느님 선교'의 방법이다. 합류는 두 차원, 곧 정치(사회, 경제)적 해방의 차원과 문화(종교)적 정체성 확보의 차원을 가진다. 성령론적 공시성의 원리는 합류의 이 두 차원에서 진행되는 해방의 영의 활동을 증언하고 해석하는 방법이다.

셋째로, 성령론적 공시성의 원리는 오늘의 세계에 있어서 문화의 다양성을 적극적으로 긍정하고, 세계와 인간생활의 다원성과 다원종교, 다원문화, 다민족(Ethnics), 제 인종, 남녀 양성 및 하느님의 창조계(creation)를 관류하는 성령의 활동을 해석하는 원리다.

넷째로, 성령론적 공시성의 원리는 성서의 빛 아래서 과거 및 현재의 민중전승들과 민중문화, 민중종교의 의미를 조명해내는 한편, 여러 민족의 다양한 민중문화 전승들의 빛 아래서 그리스도교적 전승들의 의미를 재조명하여 양자를 합류시키는 성령의 활동원리다.

다섯째로, 성령론적 공시성의 원리에 따르면, 합류는 우선적으로 낮은 곳, 어두운 곳, 구석진 곳, 변두리, 밑바닥에 사는 작은 사람들을 지향하는 '하방합류'이며, 따라서 우리는 성령이 지금 어디에서 어떠한 합류의 사건을 일으키고 있는지를 분별하고 나의 삶을 성령의 지향에 합류시켜야 한다.

3. 전거

서남동은 그의 이른 바 '두 이야기의 합류'신학을 구상함에 있어서 먼저 두 이야기(전통)를 확정해야만 했다. 두 이야기란 하나는 성서의 민중전통과 그리스도교 교회사의 민중전통이고 다른 하나는 한국사의 민중전통인데, 이 두 개의 전통을 형성하고 있는 방대한 내용으로부터 핵심요소들을 뽑아내어 거기에 '전거'라는 이름을 붙였다.

서남동이 제시하고 있는 민중신학의 전거는 크게 나누어 두 가지다. 즉, 그리스도교의 민중전통과 한국사의 민중전통이다. 그리스도교의 민중전통에는 성서의 민중전통과 교회사의 민중전통이 있다. 민중신학의 성서적 전거로서, 구약성서에서는 ㈀ 히브리들의 출애굽; ㈁ 가나안 정착과정과 왕조형성 이전의 원이스라엘 평등공동체 형성; ㈂ 예언자의 아나빔(가난한 사람들); ㈃ 야훼의 고난받는 종 등을 들고 있으며, 신약성서에서는 ㈎ 예수의 갈릴래아 활동; ㈏ 십자가 처형 사건; ㈐ 초대 교회의 방랑하는 설교자들을 들고 있다. 다음으로, 교회사적 전거로서는 ⒜ 요아킴의 '성령의 제3시대'; ⒝ 토마스 뮌쩌의 사회혁명적 신앙; ⒞ 탈그리스도교 시대인 현대의 정치신학, 해방신학, 여성신학, 흑인신학, 민중신학 등을 든다. 그리고 한국 민중사의 전통으로는 동학농민 전쟁, 의병운동, 활빈당 투쟁,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 3.1 운동, 4.19 혁명 등 한국 역사의 흐름 속에서 일어난 민중해방의 몸부림과 투쟁, 그리고 민중의 내면성과 혼을 표현한 민중문화의 유산들, 즉 민담, 민요, 가면극, 판소리, 시조, 가사, 노래, 시, 소설 등과 그밖에 미륵 신앙 등 민중종교의 전통을 들고 있다.

일부의 신학자들이 민중신학은 성서의 전거를 마음대로 취사선택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민중신학의 성서적 전거는 편협하고,성서 전반을 무시하면서 어떤 부분만 강조하고 인용하는 것은 아닌가라고 비판하는 데 대해서, 그는 이렇게 대답한다. "내가 제시하는 민중신학의 성서적 전거는 성서의 한 부분이 아니라 바로 '성서의 핵심'입니다. ㅗㅗㅗ 이스라엘의 출애굽과 원이스라엘의 형성, 예수의 갈릴래아 선교활동과 십자가와 부활은 신구약성서의 한 부분 이상으로 성서의 역사적 기원이며 핵심입니다. 민중신학은 성서의 기원적, 핵심적 텍스트들에 의거하고 있습니다. 그 텍스트들에 분명하게 나타난 하느님의 구원사에서 주체 선택의 상대는 바로 민중입니다." 또 다른 곳에서는 이렇게 대답한다. "성서의 내용이 비록 방대하다고 해도 그 안에는 생명의 핵 같은 성서의 핵심이 들어 있으며, 이 핵심은 관념이나 추상적인 교훈 같은 것이 아니라 역사적 사실인데, 민중신학은 바로 이 역사적 사실을 근거로 삼고 있다"

그리고 그는 민중신학은 성서적 근거를 관념이 아닌 역사적 사실(또는 사건)에 두고 있는 만큼, 근거라는 말 대신에 전거라는 말을 써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 이유는 전자는 관념적인 혹은 철학적인 내용을 담기에 적합한 말인데 대해 후자는 역사적인 사고가 담긴 말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민중신학이 역사적인 사고를 해야 하는 것은 신구약 성서의 사고방식이 '역사적'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철학적으로 따지는 것이 아니고 역사적 실증을 대는 것이 성서의 논리이고 성서의 언어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서남동은 전거라는 말을 전통적인 신학의 규범인 계시와 대립하는 말로 사용한다. 즉, 그에 의하면, 계시는 종교적 사고의 범주인데 대하여, 전거는 역사적 범주라는 것이다. 그는 종교적 범주에 속하는 것을 해석하는 방법과 역사적인 범주에 속하는 것을 해석하는 방법을 구분하여, 전자를 전통적인 '기독론적-통시적 해석'(christological-diachronic interpretation)이라고 하고, 후자를 '성령론적-공시적 해석'(pneumatical-synchronic interpretation)이라고 해서 양자를 대조시킨다. 그는 나자렛 예수라고 하는 성서적 전거를 예로 들어, 그리스도론적 해석과 성령론적 해석이 얼마나 서로 다른 해석을 내리고 있는가를 보여 준다. 즉, 그리스도론 해석에서는 이미 주어진 종교적 범주에 맞기 때문에 적합성이 인정되는데 대하여, 성령론적 해석에서는 지금 여기의 현실적 경험 및 상황과 맞기 때문에 적합성이 주어지게 된다. 그리스도론적 해석에서는 예수가 '나를 위하여' '나 대신에' 속죄한 것이 된다. 이에 비해, 성령론적 해석에서는 '내가 예수를 재연'하는 것이고 지금 '여기에 예수사건이 재현'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는 이 두 가지 입장을 양자택일적으로 생각하기보다는 상호보완적으로 생각해야 한다고 하면서도, 민중신학의 입장에서는 "성령의 역사가 문제의 핵심이고 물려받은 전통은 해석의 전거로서의 구실을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하고 있다.

서남동은 [민담에 관한 탈신학적 고찰]에서, "성서의 역사적 발생학적 핵, 곧 계시는 역사적 사건이다. 그러므로 '태초에 말씀(다바르, 로고스, 도)이 있었다'가 아니라, '태초에 사건이 있었다'라고 해야 할 것이다" 모든 역사적 사건이 계시인 것은 아니고 "어떤 역사적 사건이 계시다. 말씀이 계시의 그릇이라고 하기보다는 사건이 계시의 그릇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라고 했다.

구약성서의 핵인 출애굽과 이스라엘 공동체 건설은 '역사적 사실'이다. 성서의 역사적 출발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주전 1250년경 가나안 땅에 새 국가를 건설한 때부터이다. 이 구체적, 역사적 사실 또는 사건을 출발로 해서 역사적 신앙이 형성되었고, 이 역사적 신앙에 의해 아담의 이야기, 아브라함의 이야기, 노아의 이야기 등, 천지창조나 그밖에 세계역사의 시원과 종말이 신학적으로 진술되었다. 신약성서에 있어서는 마르코복음이 역사적인 기원이며 출발이다. 마르코복음에 기술된 예수의 갈릴래아 선교활동이 그리스도교의 출발이다. 그 선교활동의 결과인 예수의 '십자가 처형과 부활'사건이 신약의 출발이라는 것이다.

신구약 성서에서의 '역사적 사실'들이 성서의 핵심인 것이다. 이제까지는 성서의 문서적 기록이나 종교적 신비체험, 철학적 교리 등을 중요시해 왔다. 그러나 그런 것들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느님이 인간 역사에 개입해서 일으키신 사건들인 것이다. 즉, 모세의 출애굽과 이스라엘 형성, 그리고 예수의 갈릴래아 선교활동이라는 역사적 사건이다. 이것이 인간을 구원하시는 하느님의 계시인 것이다.

여기서 서남동은, 하느님이 일으킨 인간구원의 역사적 사실(사건), 곧 '계시'와 '성서'를 구별한다.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성서 그 자체를 하느님의 계시라고 믿고 성서의 자의(字意)를 따지려드는데, 이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한다. 성서는 하느님의 인간구원의 사건인 계시를 기록한 책일 뿐, 문자로 기록된 성서 자체는 계시가 아니라고 한다. "하느님이 실제로 행하신 이같은 인간구원, 인간해방, 그리고 역사적 사건들을 통하여 새 역사를 이끄신 '사건'이 하느님의 인간구원의 계시인 것이다."

그런데, 서남동은 '출애굽 사건'과 '십자가 사건' 같은 성서의 핵심에 해당하는 사건은 '정치적 사건'이었다는 것을 특별히 강조한다. 예를 들어, 십자가 사건은 십자가(cross)가 아니라 십자가형(crucifiction)이었다. 나자렛 예수는 제롯당과 같은 정치활동을 하는 사람으로 판정되어 정치범으로서 십자가형에 처해졌다. 따라서 예수의 십자가는 정치적 사건이다. 이것이 기본적인 역사적 사건이었다. 그런데 교회는 예수의 십자가형에서 '형'을 탈락시키고 십자가를 종교의 영역으로만 승화시켰다. 인간의 죄를 구속하신 하느님의 위대한 사랑을 나타내는 영원한 종교적 상징으로만 만들어버리고 말았다. 출애굽 사건도 정치적 사건이었다. 당시 대제국인 애굽의 학정에 시달리던 최하층민 히브리들이 반란을 일으켜 탈출한 역사적 사건이었다. 그런데 교회는 실제적 역사에 뿌리박고 있는 정치적 사건이라는 '물질적' 차원은 배제하고 정신적-종교적인 하느님의 구원사건이라는 종교적 영역만으로 이 십자가 사건을 승화시켜 버렸다.

출애굽 해방사건과 예수의 십자가 처형사건은 구체적인 역사와 정치에 뿌리박은 정치적 사건인 동시에 종교적으로도 영원한 의미를 갖는 사건이었다. 그러므로 이제는 정치적 사건이라는 이제까지 망각되어온 차원을 복원시켜야 한다는 것이 민중신학의 주장이다. 민중신학이 이것을 강조하는 이유는, 민중신학이 성서적 전거로 삼고 있는 것은 실제적이며 역사적 핵, 곧 '하느님의 민중 구원(해방) 사건'이라는 점을 분명히 하려는 데 있다.

성서가 '하느님의 계시의 책'이라고 하는 까닭은, 그 영감적 성격 때문이 아니고 성서가 그 계시적인 역사를 보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경우에 '계시적인 역사'라고 말하는 것은 바로 그 때 거기에서 전개되었던 그 '역사 과정'을 말하는 것이다. 민중신학은 성서가 민중구원의 사건을 핵심으로 하는 민중의 책이기 때문에 성서이고 계시라고 받아들인다. 성서에 기록되어 있다고 해서 이스라엘 민족사가 다 계시인 것은 아니고, 그 안에서도 '민중해방의 사건'만이 계시다.

이와 똑 같은 의미의 맥락에서, 민중신학은 '한국 민중사' 안에서도 계시를 읽을 수 있다. 서남동은 성서 밖에서도 교회사에서 전거를 찾아 내었듯이, 한국 민중사에서도 전거들을 찾아내고 그것들을 그리스도교 신학인 민중신학의 전거로서 망설임없이 받아들인다. 이 경우에 성서적 전거와 한국 민중사적 전거 사이에 하등 우열을 두지 않는다. 서남동에 있어서 더 중요한 것은 한국 민중사의 전거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우열의 문제가 아니라 하느님 자신의 선교에 있어서 중요성의 문제일 뿐이다.

서남동은, "한국의 민중신학의 한 패러다임적인 전거는 한국사의 전개과정에서 펼쳐지는 민중의 전통이다"라고 하고, 이 민중의 전통을 역사학자 강만길, 이기백 등의 사관에 따라 '민중이 역사의 객체의 자리에서 점차 그 주체로 해방되어 나가는 인간화의 과정', 즉 '민중이 자기운명의 주체로 성장해 가면서 자기 존재를 쟁취해 나가는 민중운동사의 계보'로 이해한다. 그리고 이 민중전통에 있어서 동학혁명은 그 최고봉이며 민중신학의 패러다임적 전거가 된다고 한다.

이러한 한국 민중사의 전거들이 성서 및 교회사의 전거들과 지금 한국 그리스도인들의 사회선교 현장에서, 또는 표현을 달리하면 오늘의 '신의 선교'에서 합류하고 있는 바, 이 합류를 어떻게 이해하고 실현해 나갈 것인가 하는 것이 한국 민중신학의 역사적 소명이라고 한다.

4. 민중의 언어와 민중신학의 언어

서남동은 성서의 역사적 발생학적 핵, 곧 계시는 역사적 사건이기 때문에 이 태초의 사건은 신학적인 논술로 전달되는 것이 아니고 이야기에 담겨져 전해지는 것이라고 했다. 즉, '역사적 사건'이 성서의 핵인 계시이고, 사건은 계시를 담는 그릇(매체)이며, 민중의 이야기는 사건을 담아 전한다고 하는 것을 강조하면서, 민중신학에 있어서의 언어의 문제를 제기했다. 서남동이 제기한 이 문제를 '민중의 언어'와 '민중신학의 언어'로 일단 나누어 살펴보겠다. 특히 후자에 있어서는 김용복의 '민중의 사회전기', 안병무의 '유언비어', 서남동의 '탈신학=이야기'를 차례로 검토할 것이다.

4.1. 민중의 언어

'언어'의 문제와 관련하여 한국의 민중신학자들은 자신들 내부에 갈등과 모순을 지니고 있었다. 그들은 민중의 삶의 현장을 가까이하려 했고 민중의 눈으로 보고 민중의 처지에서 생각하려 노력했지만,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 몸에 밴 사유 형식은 그들이 오랫동안 젖어뙖던 서구신학의 개념적 언어와 논리체계였다. 그것이 민중과 민중신학자 사이에 거리를 조성하고 장벽을 만들었다. 그들은 스스로의 한계를 느끼고 고민하면서 민중의 언어를 익히려 애를 썼다.

안병무는 1년 동안 감옥생활을 하게 된 기회에 한국사회의 맨 밑바닥 민중에 접하는 경험을 하였다. 그는 '수인'(囚人)들이 일상적으로 내뱉는 욕설에서 민중의 체취와 민중언어의 어떤 요소를 배웠다고 술회하곤 한다. 그는 기회 있을 때마다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 걸쭉한 '민중언어(욕설)'로 자신의 입을 더럽히면서 좌중을 웃기기도 하고 곤혹스럽게 하기도 한다. 우리는, 대학교수요 서구적 교양을 지닌 지식인이요 한국의 저명인사인 그가 민중을 배우기 위해 노심초사하는 이러한 모습에서 감명을 받는다.

그 자신 오랜 설교자였기에 교회의 언어에 대한 고민과 문제제기는 누구보다 깊고 심각했다. 그는 [그리스도교와 민중언어]라는 제목으로 쓴 글에서, 한국 민중의 언어습관을 자신의 인생 체험담과 함께 회상의 형식으로 추적하면서 마르코복음서의 민중언어나 한국 민중의 언어가 다 같이 구전의 '이야기'이고 '민담'적이라고 결론짓는다. 반면에 한국의 신학작업은 민중과 유리된 서구의 사고와 논리여서 그리스도인의 삶의 발전에 별로 기여하지 못했다고 반성한다. 즉, 교회는 한국 민중이 알아듣기 쉬운 대중적 언어를 사용하여 그들을 교회로 끌어들이는 데는 성공했지만, 교회 안의 민중 그리스도인들을 교회의 특수언어에 길들여 교회 밖의 민중과는 다른 언어를 쓰는 '게토화된 민중'으로 만들어 버렸다고 한다. 그 결과 교회의 언어는 민족공동체의 언어와 맥이 끊어진 언어, 비역사적인 언어가 되어 버렸다고 한다. 한국 교회의 언어는 '민중의 언어'를 되찾아야 한다. 새 시대를 열어가야 할 교회는 게토화된 교회의 특수 언어권에서 탈출해야 한다. 민중의 언어를 배워야 한다고 그는 역설한다. 그러면서, "민중의 언어를 어떻게 배울 것인가?"라고 마치 자문하듯이 묻는다. 민중의 언어는 삶에서 우러난 언어이고 이야기체라는 것, "그것을 배우는 길은 그들과 살아보는 수밖에 없으리라. 나는 그 이상의 방법을 모른다"라고 했다.

민중 언어를 열정적으로 추구한 또 한 사람의 신학자는 서남동이다. 그는 민중이 사용하는 언어라고 해서 모두 다 민중의 언어는 아니라고 한다. 민중이 사용하는 언어 가운데는 지배자의 언어를 내면화한 언어가 섞여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지배자의 언어를 내면화한 체념적이고 굴종적인 언어를 '백성의 언어'라고 하고 이것을 민중의 언어와 구별하면서, 민중의 언어를 찾는 작업에는 지배자의 언어를 배제하는 작업에 못지 않게 백성의 언어를 벗겨내는 작업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한국 교회 대중의 언어에는 이런 백성의 언어가 만연하고 있는데, 예를 들면, 한국 교회의 부흥사들은 흔히 백성의 언어는 사용하지만 민중의 언어는 모른다고 갈파한다. 또 그리스도교 신학의 경우에, 교리의 정통성, 교회의 구속사 관점, 오직 일회적인 절대계시, 자연대 초자연의 이분법 등의 교리적 개념들이 다 지배자의 지배언어를 내면화한 것에 다름아니며, 우리의 삶에 이런 지배자의 언어, 식민주의자의 언어가 속속들이 스며 있는 것을 제거하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어떻게 해서든지 교회와 신학의 언어에서 지배자의 언어를 벗겨내고 민중의 언어를 뿌리내리게 해야 한다. 민중의 언어 없이는 민중의 시대는 오지 아니 한다고 역설한다.

4.2. 민중언어의 한 형태로서의 '유언비어'

안병무는 [예수사건의 전승 모체]에서, 민중언어의 가장 특징적인 성격은 이야기체라는 것이고, '예수의 수난사건'은 그 사건이 일어난 후의 정치적 상황 때문에 민중의 언어인 이야기 중에서도 특히 '유언비어'의 형태로 구전되었을 것이라는 가설을 제시한다. 예수사건이 정치적 폭력에 의해 지도자 예수의 처형으로 귀결되었기 때문에 이 사건의 전승은 비공개적으로 동지들 사이에서 저항적인 성격을 띤 일종의 유언비어로 구전되었을 것이며, 그것은 민중편에서 보면 그 사건의 진실성을 정확하게 인지함으로써 자기네들이 서 있는 자리를 확인하려는 노력이었다는 것이다. 그는 먼저 민중의 유언비어의 성격을 대체로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 유언비어는 주로 정치적, 사회적 탄압 아래서 이루어진다. 어떤 집단이 벌이는 운동이 지배층의 권력에 의해서 금지되었을 때, 또는 권력에 의해 그 집단이나 그 성원이 억울한 누명을 썼을 때, 그로 인해 박해를 받았고 현재도 받고 있는 상황에 있을 때, 더욱이 그 집단이 소수이거나 그 힘이 미약하여 어떠한 저항력도 못 가지는 경우에, 유언비어는 박해받는 집단이 자기 정체성을 규명 보존하는 형태로서, 또는 사건의 진상규명과 증언의 형태로서 자연발생적으로 일어난다. ⒝ 어떤 사건으로 인해 피해를 당한 집단의 지도층이 어떤 사정 때문에 그 사건의 진상을 발설하지 못하거나 안 하는 경우에, 그 집단내의 민중에 의해 유언비어의 형태로 그 사건의 진실이 전해질 수 있다. 어떤 집단의 지도층이 사건의 진상을 발설할 수 없는 것은, 권력의 박해가 주된 원인인데, 그 집단의 지도층이 이 박해 앞에서 수동적으로 침묵하거나, 사건 자체를 고차원적으로(예컨대 종교적으로) 해석하여 추상화함으로써 가해자의 불의를 은폐하는 결과를 가져오거나, 가해자와의 충돌을 피하기 위해 가해자의 동기를 미화하거나 사건의 책임을 다른 데로 전가시키는 경우 등이 있다. 이러한 경우들은 집단의 지도층이 자신을 포함한 집단의 존속을 위해 불가피하게 취하는 타협행위다. ⑶ 유언비어는 어떤 집단이 겪은 과거의 사건이 그 집단의 현재의 실존적 상황에 부합할 때, 활성화한다. 민중은 과거의 사건을 유언비어적인 이야기로 퍼뜨리면서 기뻐하기도 하고 슬퍼하기도 하는 것이다. 따라서 민중의 유언비어는 과거사를 이야기하면서도 남의 이야기가 아닌 자신들의 오늘의 실존적 상황 표출이다.

안병무는 민중의 유언비어의 성격에 관한 이러한 관점으로부터 복음서가 전하는 예수사건 이야기의 성격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 예수가 로마 정부와 유다 지도층의 야합에 의해 반로마 정치범으로 처형된 이상, 그의 추종자들은 정치적 박해를 각오하지 않고는 예수사건을 진상대로 전승할 수가 없었다. 예수의 민중들이 예수사건의 이야기를 전승했음이 틀림 없는데도, 그들 전체에 대한 직접적인 박해의 이야기는 없다. 이것은 그들이 예수사건의 이야기를 유언비어의 형태로 전했으리라는 것을 말해 준다. 예수사건의 구전전승이 오랜 세월에 걸친 것일 거라는 것을 말하는 사람은 많으나, 그 구전이 어떠한 정치적 조건 아래서 이루어졌는가 하는 것은 언급되고 있지 않다. 복음서 전승의 원형이 유언비어적 성격을 가졌을 것이라고 전제하는 경우에, 유언비어를 토대로 문서화된 복음서의 이야기들에서 문서의 양식(Form)만을 추구함으로써 결론을 내리는 연구들에 대해서는 근본적인 이의제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박해 아래서 형성된 유언비어는 그 서술에서 어떤 사상이나 관념의 전달보다는 사건 자체의 직접적 서술에 집중하게 된다. 그러므로 마르코복음의 예수 이야기는 마태오나 루가와 비교할 때, 사건 형태의 이야기가 대부분이며, 예수의 말씀은 이차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데 이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 예수사건은 그 실상이 묵살 되거나 왜곡되었다. 마르코복음서에는, 예수를 미친 사람(3,21ㅗ30), 탐식가이며 술꾼(2,16), 예루살렘 성전을 파괴하려는 자(14,58), 왕이 되려는 야심가(15,2ㅗ12) 등으로 말하는가 하면 죽은 예수의 시체를 그의 제자들이 훔쳐갔다는 등의 왜곡된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것은 예수의 적대자들이 날조하여 유포시킨 유언비어를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상황에서 예수가 왜, 그리고 어떻게 처참하게 처형되었는지에 대해 통일된 정보와 신념을 갖지 못한 예수의 민중들을 위해서, 예수의 행태와 수난과 빈 무덤의 목격자들을 중심으로 한 일군의 목격자들이 예수사건의 진실성을 밝히려는 노력을 일찍부터 시작했을 것이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그러한 노력은 유언비어의 형태를 띨 수밖에 없었을 것인데, 그들의 예수 수난사 전승 속에는 전승자들 자신의 실존적 상황이 반영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른바 평화로운 갈릴래아 시대에도 예수는 출발부터 적대자들에 의해 죽임의 위협을 받고 있는 것으로 서술된 것(마르 3,6)은 전승자의 실존적 상황을 노출한 것이며, 바로 그 상황의 유사성이 저들에게 공감과 위로가 되었기 때문에 예수의 수난 이야기는 민중언어의 한 형태인 유언비어로 구전되었으리라는 것이다.

우리는 안병무의 예수 수난사 전승의 매체에 대한 이러한 가설에서, '민중의 사회전기' 중 하나의 특수한 형태에 관한 구체화와 함께 그 사회-정치 심리적 심층을 들여다 볼 수 있는 방법을 얻게 되었다.

4.3. 기적 이야기

예수의 민중운동 이야기에서 가장 많이, 그리고 가장 구체적으로 생생하게 전해진 것은 '기적 이야기'다. 복음서에는 예수가 일으킨 기적 이야기가 무려 29회나 전해지고 있다. 요한 기자는 복음서 끝말에, "이 책에 기록되지 않은 다른 많은 표징들도 제자들 앞에서 행하셨습니다"(20,30)라고 했는데 그렇다면 복음서에 전승된 이야기 외에도 많은 기적 이야기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특히 맨 처음 씌어진 마르코복음에는 예수의 가르침(말씀)보다 그의 기적(행위)가 양적으로나 비중에 있어서 가히 압도적이다.

안병무는 기적 이야기에서 민중언어의 한 전형을 발견한다. 그는 기적 이야기의 고찰로부터 민중언어의 특질을 밝혀내고자 한다. 일반적으로 '언어는 곧 세계관이라'고 하지만, 민중언어는 '관'(觀)이 아니고 민중 자신의 구체적 삶의 파악이며 그것의 표현이다. 민중언어의 한 전형인 기적 이야기에는 그들이 현실에서 당하는 애환이 적나라하게 노출되어 있다. 억눌림, 가난, 패배 속에서 그것과 결코 무관하지 않은 생리적인 병으로 몸부림치는 민중의 현장이 모습을 드러낸다. 기적 이야기에는 질병에서 해방되고자 하는 의지, 고통에서 풀려나고자 하는 원망(願望), 체념 속에 그대로 매몰되지 않고 운명을 거부하면서 일어나겠다는 투지가 그려져 있다. 앉은뱅이가 걸을 수 있다는 희망, 소경이 볼 수 있다는 희망, 아니 죽음마저도 극복할 수 있다는 투혼이 표출된다. 이것은 민중의 저력이다. 밑바닥 민중이나 절망 가운데 빠진 사람이 아니고서는 가져볼 수도 없는 한과 희망의 파토스다.

한 나병환자가 무릎을 꿇고 간청한다(마르 1,40: "예수를 보자 엎드려 구했다"//루가 5,12). 그 모습이 예수에게 그를 측은히 여기는 마음을 일으켰다. 앓는 딸을 가진 회당장이 예수의 "발 아래 엎드려 그 딸을 살려달라고 애원"했다(마르 5,23-24). 한 이방 여인이 "예수의 발 앞에 엎드려 자기 딸에게서 귀신을 쫓아내 주시기를 간청"했다(마르 7,25-26; 루가에는, "큰 소리를 질러 가로되"). 이에 대해 예수는 자녀가 먹는 떡을 개에게 줄 수 없다는 모멸스러운 말로 거부했는데, 이 여인은 "그러나 상 아래 있는 강아지들도 자녀들이 흘린 떡부스러기는 주워먹습니다"(28절)라고 말하여 스스로 개의 위치에 있어도 좋다고 애걸함으로써 마침내 예수의 마음을 움직여 놓고 만다. 바르티매오라는 맹인 거지는 예수가 지나간다는 말을 듣고 "다윗의 자손 예수여, 저를 불쌍히 여겨주십시오."라고 소리질렀다. 여러 사람이 그를 만류하자 그는 더욱 소리높여 같은 절규를 반복함으로써 마침내 예수가 응할 수 밖에 없도록 하는 데 성공한다(마르 10,46-52). 대체로 이상과 같은 것이 기적 이야기에 묘사된 민중과 예수의 대조적인 모습이다.

기적이야기에서 대부분의 경우 예수는 수동적이고, 주도권을 잡고 있는 쪽은 민중이다. 즉, 예수는 병에서 해방시켜 달라는 민중의 열망 앞에서 '마지 못해' 응하는 수동적 대응을 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이러한 이야기를 전승한 자들이 바로 민중 자신이 아니라면 그 누구일까?み또한 민중 자신이 이야기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기적 이야기는 민중언어의 특질과 함께 민중 자신의 특질도 전형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4.4. 민중의 사회전기

김용복은 '민중의 자술적인 사회전기'(social biography)를 민중신학에 한 패러다임으로 도입했다. 그에 의하면, '민중의 사회전기'란 민중의 역사적 경험을 민중 자신이 스스로 이야기하거나 기록한 것을 말한다. 그것은 개인의 전기나 영웅전과 구별된다. 민중의 사회전기는 역사의 밑바닥에서 역사를 체험한 민중 자신의 이야기다. 이 이야기에서 민중은 주인공이고 일인칭으로 서술된다. 실제로 민중의 사회전기는 '수난의 이야기'이며, 불의한 세력에 대한 한 맺힌 이야기다. 그 고난을 극복하기 위한 투쟁의 이야기이고, 새 날을 위한 꿈의 이야기다. 김용복은 주장하기를, 민중의 수난이나 갈망 등을 역사철학적인 인식론이나 사회과학적인 방법론으로 파악하는 데는 명백한 한계가 있다고 한다. 그러한 방법은 민중을 대상화 객체화하기 때문에 추상적이고 사변적인 민중 이해에 머무른다. 이에 대해서, '민중의 사회전기'는 민중이 몸으로 경험한 것을 표현한 '통전적' 서술이기 때문에, 민중의 실체는 자신들의 이야기인 '민중의 사회전기'를 통해서만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민중이 무엇인가, 민중이 누구인가에 대한 결정적 서술은 '민중 고난의 체험 이야기'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김용복은 민중 사회전기의 특성을 대략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첫째로, '이야기'는 인류역사상 한 세대의 경험을 다음 세대로 전하는 가장 보편적이고 포괄적인 언어 형태이다. 이야기라는 언어는 이야기하는 사람의 자유로운 주체를 전제한다. 민중의 주체란 원칙적으로 절대정신이나 계급의식과 같은 역사철학적 범주나 개념에 종속될 수 없다. 둘째로, 민중의 이야기는 사변적 언어가 아니라 인격의 총체인 몸(soma)의 언어이다. 여기서 서구의 사변적, 합리적 인식에서의 주관과 객관의 분리를 극복할 수 있는 가능성이 생긴다. 몸의 이야기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이야기가 서로 나누어지고 엮어져서 '공동의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셋째로, 민중의 이야기는 역사를 드라마와 같이 표현하는데, 이 역사적 드라마에서 주역은 민중이며, 민중은 하느님과의 계약에 주체적인 파트너가 된다. 지배층은 민중의 상대역으로서 이 역사적 드라마 안에 항상적으로 존재한다. 그러므로, 이 억압자, 지배층의 권력의 실재를 이해하고 왕들과 제국들의 정치사회학을 이해하는 것은 하느님의 계시의 본질을 이해하는 데 필수적이다. 넷째로, 민중의 이야기는 하느님의 정의를 갈망하는 백성들(people)의 이야기다. 민중은 한편으로는 억압적인 세력의 희생자이면서 다른 한편 하느님의 정의를 경험하고 인식할 수 있는 '인식론적 특권'과 미래의 이상향을 그리며 내일의 희망을 이야기하는 '종말론적 특권'을 지닌 '메시아적 민중'이다.

김용복은, 한국민중의 사회전기를 통해서 한국사회와 한국 민족 민중사의 심층에 접하고, 그 빛에 조명되어 그리스도교의 진리가 밝히 드러나도록 성서를 해석하려 한다. 그 목적은 민족-민중의 과제에 임하는 그리스도인의 자세를 가다듬는 데 있다는 것이다. 그러한 시도를 그는 [한국인 원폭피해자의 민중사회전기]와 [한국의 가난한 여성들에 관한 연구] 등에서 구체화하고 있다.

4.5. 민중신학의 언어 : 민담의 신학 ― 반신학

서남동은 김지하의 민담형식의 문학과 만나게 됨으로써 일종의 '신학적 회심'을 하게 된다. 여기에서, '민담'(=민중의 이야기)이 그의 신학의 한 방법이 된다. 그는 '민담'을 민중신학의 논문에 대담하게 도입하게 되고, '민담의 신학이라는 신학의 새로운 방법을 제창하기에 이른다.

서남동은 민담이라는 것이 민중의 집단적인 영혼의 공간을 갖고 있는 민중의 '자술적인 사회전기'라고 말하고, 같은 맥락에서 김용복의 '민중의 사회전기'라는 발상은 민중과 민담의 이해에 큰 공헌을 한 것이라고 높이 평가한다. 그는 논문 [민담에 관한 탈신학적 고찰]에서 '쇠똥에 미끄러진 범', '은진미륵과 쥐', '에밀레종' 등의 한국 민담을 직접 도입해서 민담에 대한 신학적 고찰을 본궤도에 올려 놓았다. 이 논문은 민중의 사회전기라는 방법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한 범례를 제시한 기념비적 논문이 되었다.

서남동의 [민담의 신학 ― 반신학]은 세 편의 한국 전래 민담('안동 신랑 이야기', '지성 스님 이야기', '장님 눈뜬 이야기')으로 엮어진 글이다. 이 글은 전통 서구신학적 의미의 신학논문은 아니다. 민담 세 편을 통째로 옮겨다 놓고 거기에 매편마다 약간의 신학적 코멘트를 곁들인 아주 새로운 스타일의 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글은 신학적 통찰의 깊이에 있어서 그 어떤 신학논문에못지 않은 무게를 지니고 있다. 그는 신학의 '언어'와 '방법'의 양면에서 이처럼 극적인 전환을 의도한 이 글을 선언적으로 '민담의 신학'이라고 명명했다. 민담의 신학은 서구신학처럼 논리와 개념으로 하는 신학이 아니라 '이야기로 하는 신학'이라는 것이며, 따라서 '반신학'이라는 것이다. 이로써 그는 전통적인 서구신학에 대해 반기를 들고, 그 자신의 이야기신학, 반신학(Gegen Theologie, countertheology)의 새 기치를 내건다.

그 글의 첫머리는 한국의 전래 민담 '안동 신랑'으로 시작된다. 어떤 재상 댁의 장남 안국은 글 읽기를 싫어하여 성년이 되도록 글(漢文)을 깨우치지 못했는데 요행히 지혜로운 처녀에게 장가들어 신부가 들려주는 예날 이야기를 듣고 글을 깨우치고 책을 읽기 시작하여 장원급제했다는 이야기다. 서남동은 이 민중의 이야기 속에서 민중 언어의 본질과 민중신학의 인식론과 방법론을 탐색해내는 신학적 상상력을 보여 준다.

그는 안동신랑이 "민담설화를 들으면 정신이 맑아져서 죄다 또록또록 기억이 되지만 문자에 대해서는 어찌된 영문인지 도무지 터득이 안될 뿐만 아니라 글공부라는 말만 들어도 벌써 두통이 일어난다"는 대목을 놓고 신학적 해석을 가하면서, 민담(이야기)의 '민중적 성격'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문자는 인쇄된 것을 사람이 읽어서 이해하는 '간접적 매체'이고, 이야기는 한 사람의 입에서 다른 사람의 귀로 들려져서 알게 되는 '직접적 매체'다. 문자로 써놓은 것은 대개 그 내용이 관념적이고 추상적(일반적)인데 대해서 이야기는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것이다. 문자(책)는 학문의 연구발표의 방식으로서 '머리의 언어'이고, 이야기는 일상생활의 표현전달 방식으로서 '몸의 언어'라고 할 수 있다. 머리의 언어는 분해적(analytical)인데 몸의 언어는 통전적(holistic)이다. 문자를 통한 통신은 밖으로부터 무엇을 부과하는 방식이어서 결국 사람을 자기로부터 소외시키는 결과를 가져오는 데 대해서, 이야기를 통한 통신은 사람이 재미가 나서 자발적인 수락으로 그 내용을 직관적, 통전적으로 자기화한다. 따라서 전자는 억압적인데, 후자는 해방적이다. 문자가 두통을 일으키는데 이야기는 정신이 또록또록 맑아진다는 소년 김안국의 반응은 가히 알만하다.

다음으로, 서남동은, "하느님의 자기 계시의 매체는 무엇일까?"라는 질문을 던진다. 여기에서 그는 하느님의 자기 계시의 매체는 제1차적으로는 '역사적 구속사건'이지만, 그 사건의 본래적인(authentic) 전달매체는 이야기라는 결론을 내린다. "성서의 전통에 따르면 하느님의 자기계시의 주된, 제1차적인 매체는 하느님의 구속행위, 곧 역사적 사건이다.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살아계신 하느님의 자기 계시는 그가 일으키시는 사건이다." 여기서 그가 '역사적 사건'이라고 말하는 것은, 신구약성서에 기록된 과거의 역사적 사건에 국한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시간에도 하느님의 구속사건은 계속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전제하고 하는 말이다. 교리나 신학, 또는 특정한 시대의 특정한 신학의 입장에서 편집된 성서도 하느님의 계시의 제1차적인 매체는 아니라고 그는 주장한다. 제1차적인 매체는 역사적 구속사건이고, 사건의 전달매체는 이야기라는 것이다. 첫째로는 '구전의 이야기'이고 다음으로는 '이야기 문학'이라는 것이다. 신구약성서가 거의 이야기문학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은 그 때문이라고 한다. "하나님의 언어는 이야기이고, 예수님의 화법도 이야기였고, 성령의 통신매체도 '머리의 언어'가 아니고 '몸의 언어'다. 하나님의 계시의 매체는 사변, 개념, 문자라기보다는 행함, 사건, 삶, 이야기이다."

여기서 그는 전통적 서구신학을 자신의 이야기 신학의 입장에서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전통적인 신학의 매체는 논리적 사변, 추상적 관념이며 그 방법은 연역적이고 그 담고 있는 내용은 초월하신 신의 존재다. 전통적인 신학은 초월적인 신의 존재, 혹은 기록된 성서나 주어진 교리에서 출발하여 이어받은 '전통'을 굳혀간다. 자유주의 신학이라 해도 '머리의 언어'의 강화요, 현대신학이라 해도 '교리의 재해석'에서 끝난다. 전통적인 신학이 그런 것인 데 대해서 하느님의 계시의 참다운(authentic) 매체는 실제적, 구체적 경험과 사례에서 귀납적(inductive) 방법으로 얻어낸 이야기다. 추상적인 초월을 찾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성육신을 찾는다. 전통적인 신학이 초월적 연역적이라면 이야기 신학은 귀납적 신학, 아니 '반신학'이다.

전통적 신학에 대한 그의 비판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그는 문자와 서적과 체계적인 신학은 지배(통치) 이데올로기에 편입, 흡수되어 지배질서를 정당화해 주고 그것을 축복하는 기능을 수행하는 '지배의 신학'(Herrschende Theologie)이라고 한다. 하느님의 초월성, 전지전능, 무소부재, 그리스도의 왕권과 주권을 강조하는 내용이 다 정치적 지배구조 안에서 얻어진 '이미지'(지배자의 언어)이며 그 고정화, 항구화에 기여한다는 것이다.

대체로 신학이라는 것 그 자체가 성서적인 계시 이후에 생겨난 사상 체계인데, 그리스도교의 신학체계가 발생한 사회학적인 삶의 자리는 고대 노예제 사회인 그리스와 로마였다. 따라서 자유민과 노예, 성과 속, 물질과 정신의 형이상학적 이원론과 사회의 계급구조가 그 신학이 발생한 모태였다. 그렇게 생겨난 것이 신학이기에 그 태생적 성격으로 인하여 신학은 지배의 신학이라는 것이다. 이에 반해서, 성서적 계시에 나타나는 본래적 삶의 자리는 노예제 사회에서 탈출한 히브리, 가나안과 갈릴래아 민중들이었고, 그들의 삶의 이야기가 계시의 매체였다. 그것은 신학과는 유전적,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고 그런 의미에서 반신학이라 한다. 민중신학은 지배체제의 통치 이데올로기와 그 문화를 비판하고 시정하는 민중의 언어(이야기)로 하는 신학이(어야 하)고, 그렇기 때문에 사변과 연역법적 논리로 하는 신학에 대한 안티테제 '반신학'이라는 것이다.

서남동은 또 '지성 스님 이야기'에 붙인 코멘트에서 이렇게 말한다. "책을 보고 깨우치면 지식의 길이 트이고, 사건을 보고 깨우치면 실천의 길로 인도된다. 하나는 '머리'의 길이고 다른 하나는 '몸'의 길이다. 전자는 '신학'의 길이고 후자는 '예수'(반신학)의 길이다."

그러나, 반신학이 '예수의 길'이라면 반신학이야말로 본래적인 의미에서 신학이 아니겠는가. 따라서 "민담의 신학은 반신학"이라는 명제는 민담의 신학이야말로 '신학'이며, 도리어 서구신학이 반신학이라는 역설의 선언인 것이다.

서구신학에 대한 '파산선고'에 가까운 서남동의 이러한 표현은 좀 과장된 것이 아닐까. 실제로, 서남동의 민중신학의 방법은, 크게 말해서, '사회경제사적 방법'을 한 날개로 하고 '성령론적 방법'을 다른 한 날개로 하는 양날개의 방법론이라 할 수 있다. 양 날개를 펼쳐서 균형을 취하는 것이 그의 신학방법의 요체다. '민중의 자술적 이야기'(민담)라는 방법은 어느 쪽인가 하면 후자, 곧 성령론적 방법에 속하는 것일 것이다.

민중신학이 추구하는 민중의 '실체'는 사회과학적 분석만으로는 충분히 드러나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민중이 처해 있은 경제적 조건, 사회적 정치적 조건은 사회과학적 분석의 도움을 받을 때보다 효과적으로 밝혀질 수 있다. 민중신학은 사회과학적으로 파악된 민중 이해를 딛고 그 성과 위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신학적'인 작업을 진척시킬 수 있다. 민중의 자술적인 이야기(사회전기)를 통해서 더욱 구체적, 통전적으로 드러나는 민중의 생동하는 실체와 만나서 민중에 대한 이해를 풍부하게 하고, 심화시켜야 할 것이다. 어느 일방만을 강조하면 균형은 상실되고, 민중의 실체를 붙잡는 데 실패할 것이다. 민중신학에 있어서, 민중의 현실을 파악하는 데 '사회분석적 매개'가 필수적이라는 것은 이미 상식에 속한다.

그러면, 그의 '반신학 선언'의 진정한 의미와 강조점은 어디에 있는가? 민중신학이 '방법'에 있어서 획기적인 새로움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민중신학이 서구신학에서 전환한 것은 단지 방법론에 있어서의 전환일 뿐만 아니라(방법론은 상대적인 것이다. 앞으로 더 적절한 방법이 발견될 수도 있다는 뜻에서 그렇다) '민중의 편에 선다'는 점에서 더 결정적인 전환이다. 말하자면 '편바꾸기'다. 지배층을 편드는 지배의 신학이라는 자리로부터 피지배층인 민중의 편으로 신학하는 자리를 옮기는 것이다. 이것이 더 본질적인 전환이다.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는 표현을 쓸 수 있다면 바로 이 대목에서일 것이다. 물론, 민중신학은 내용과 방법, 양면에서 '새로운 신학'이다. 그러나 민중신학은 기존의 모든 신학적 방법들을 폐기하고 유아독존하는 신학이 아니다. 창고에서 새 것과 헌 것을 꺼내는 하늘나라 훈련을 받은 학자(마태 13,51-52)처럼 물려받은 신학의 전통과 유산들을 주체적으로 활용할 줄 아는 창조적이고 개방적인 신학이다. 서남동 자신이 현대신학으로부터 여러 가지 방법론을 배워서 적절히 구사하고 있는 데서 그것을 알 수 있다. 인간은 인간과 인간, 인간과 사회, 역사, 자연과의 관계에서 학문을 영위하는 것이 불가피하다. 그리스도교 신학에 있어서도 학문적, 이론적 활동이 있을 수밖에 없고, 개념과 논리를 구사하는 이론 작업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서남동 자신이 방법으로 채택하고 있는 사회경제사적 방법이나 문학사회학적 방법이 다 학문적이고 이론적인 작업의 소산이며, 그 방법들의 응용 자체가 만만치 않은 논리적 작업임에 틀림없다. 그의 [민담의 신학 ― 반신학]을 읽어보아도 알 수 있듯이 거기에는 그 자신이 '신학'이라는 학문영역에서 오랫동안 연마한 역량이 유감없이 발휘되고 있다는 것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민담의 신학'이라는 한 새로운 방법을 모처럼 얻었을 때, 그것과 전통적인 신학의 여러 방법들과의 상관성을 고려한다든지 민담의 신학 그 자체를 객관적으로 상대화시켜 바라본다든지 하는 일이 서남동의 몫은 아니었던 것이다. 새로운 신학적 상상력에 감전되어 1970, 80년대 한국 민중운동의 절정기를 정열적으로 살다 간 그에게 그러한 주문을 하는 것은 무리다. 오로지 지배적 신학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하는 일, 민중과 무연(無緣)한 '학문'으로서의 신학을 영위하는 것과 단호히 결별을 선언하는 일, 신학의 언어와 방법에서 일대 쇄신을 단행하는 일이 그에게는 우선 초미의 관심사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반신학이라는 역설은 전통적인 서구신학에 대하여 분명한 선을 긋고 민중신학의 독자성을 선언하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서남동은 [민담의 신학 ― 반신학](1983년) 보다 1년 먼저 발표한 [민담에 관한 탈신학적 고찰]에서는, 성서의 역사적 발생학적 핵인 계시는 역사적 사건인데, 이 역사적 사건은 신학적 논술이 아니라 이야기에 담겨 전해졌다고 하면서, 계시(복음)가 담긴 '이야기'를 되찾으려면 적어도 방법적으로는 신학(그리스도론, 구원론 등)이 유보(moratorium)되어야 할 것이라고 말한다. 이 신학의 '유보'가 말하자면 그가 말하는 '탈'(신학)인 것이다.

원계시는 원래 이야기(민담)로 표현되었다. 그런데 구약성서에 있어서는 율법이 생기면서 이야기는 끝났고, 신약성서에 있어서는 신학이 생기면서 이야기는 가려져 버렸고, 종국에는 이야기가 말씀으로, 교리로, 신학으로 바뀌어졌다. 마찬가지로, 예수의 이야기는 교회의 신학에서 하느님의 말씀으로 바뀌어졌고, 예수의 죽임(살해, murder)은 역사적 교회에서 예수의 죽음(death)으로 대치되었고, 예수의 십자가형(정치적, 형법상의 형집행)은 예수의 십자가(종교적 상징)로 바뀌어졌다. 그러므로 예수 이야기(복음)를 되찾으려면 적어도 방법론적으로는 신학(그리스도론, 구원론 등)이 유보(moratorium)되어야 할 것이다.

예수의 이야기를 되살리려면, 신학적인 하느님의 말씀이 예수의 삶(생애)으로 바뀌어져야 하겠고, 예수의 대속적인 죽음이 죽임으로 바뀌어져야 하겠고, 예수의 십자가가 십자가형으로 바뀌어져야 하겠고, 예수의 부활은 사체의 소생이 아니라 죽임당한 자들의 부활로 바뀌어져야 하겠다. 이렇게 탈신학화해야 할 것이다.

4.6. 탈신학적 민중신학의 언어 이해

이제 서남동의 반신학, 탈신학의 도전적 의미를 감안하면서, 민중의 언어, 민중신학의 언어라는 문제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보완이 필요하리라고 생각된다.

첫째로, 민중신학자의 '자리'는 어디인가? 민중의 삶의 현장인가? 따라서 함께 수난당하고 함께 투쟁하는 현장인가? 만일 그렇다고 한다면 해방의 기쁜 소식을 전달하는 민중신학자의 전달매체(언어)는 민중의 생생한 생활 언어여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 경우 민중신학의 일차적인 청중 또는 대화의 파트너는 민중 자신일 것이다. 다음으로, 만일 민중신학자가 민중의 현실과 비민중(또는 반민중)의 현실 사이에 서 있다면, 즉 민중의 삶의 실상과 민중의 갈망, 민중사건과 민중운동의 '비전'을 비민중(시민이나 지식인)에게 증언하는 위치에 서 있을 경우에는, 그 전달매체는 반드시 민중의 생활언어가 아니어도 될 것이다. 대상과 사안에 따라서 거기에 맞는 언어와 형식이 바람직할 것이다.

둘째로, 민중신학의 언어(매체와 방법)는 예컨대 논문, 이야기 등으로 고정되어야 하는가? 무언가 민중에게 신명을 자아낼 수 있는 다른 매체나 방법은 없는 것일까? 재미있고 신나면서도 민중의 생활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새로운 방법, 복음의 내용인 '해방의 기쁜 소식'을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다른 매체는 없는가? 그것은 반드시 문자 또는 언어이어야만 하는가? 기존의 신학은 너무도 오래 문자에만 매달려 온 것은 아닐까? 무엇보다도 신학이 주로 논문이라는 형식에 의존해 온 것에 대해서는 근본적으로 반성을 해야 하지 않을까? 신학자들은 스스로 학문이라는 게토에 갇혀서 개념과 논리의 포로가 되어 있는 상태로부터 탈출을 시도할 때가 되지 않았을까?

민중신학의 언어와 방법은 주체와 대상, 현장과 상황에 따라 창조적으로 적용되고 개발되어야 한다. 신학은 오늘의 민중(또는 대중)의 정서가 살아 숨쉬는 현장언어, 그리고 민중 자신의 생활과 문화로부터 신학의 매체와 방법을 발굴해 내고 이를 신학 안에 수용해야 할 것이다. 서남동의 반신학은 이러한 반성과 모색의 한 계기이자 범례가 될 수 있다.

5. 계시의 하부구조

(민중신학에 있어서 '한국적'의 의미)

필자는 서남동의 해석학적 주요개념의 하나인 '계시의 하부구조'를 '민중신학에서 한국적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과 연관지어 고찰하고자 한다. '한국적'을 규정하는 규준(規準)은 한국인으로서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 현실의 삶이다. 이 명제 가운데는, 오늘이라는 역사적 시간과 한국이라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 공간과 우리라는 민족ㅗ민중적 집단 내지 공동체에 대한 일정한 이해가 전제되어 있고, 현실의 삶이라는 인간의 개인적 및 사회적인 생활에 대한 이해가 주어져 있다. 또한 오늘 우리 현실의 삶은 우리 민족의 과거의 역사적 문화적 전통에 혈맥이 이어져 있기도 하다. 즉 '한국적'을 생각할 때는 오늘의 삶을 중심에 놓되 그 오늘의 삶은 전통과의 유기적 관계 속에 있는 '총체적인 삶'이라는 것을 전제하는 것이다.

오늘 우리의 현실적 삶이라는 객관적이고 인식 가능한 실체를 제쳐놓고 한국사상 문화사의 저 먼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어떤 사상적 지표, 문화적 특질, 전통종교의 원리를 찾아내어 그것을 '한국문화의 고유성' 또는 '우리 민족의 내재적 원리'라고 하면서 '한국적'의 규준으로 제시하는 것은 본말이 전도된 방법이다. 우리는 우리의 현실의 삶과 그 속에 교직된 전통문화의 맥과 무늬와 결까지를 포함한 총체적 삶으로부터 '한국적'의 내용과 형식을 귀납해 내지 않으면 안된다. 나는 이것이 '한국적'이라는 문제와 관련하여 민중신학이 일관되게 견지해야 할 원칙이라고 생각한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대만신학자 宋泉盛의 신학에 대한 서남동의 논평은 대단히 유익한 관점을 제공한다.

서남동은 宋泉盛의 신학을 소개하고 논평한 글 [문화신학 정치신학 민중신학]에서 그리스도교 신학을 서양문화-백인문화의 지배로부터 벗겨내어 아시아 문화에 전위(transposition)시키려고 노력한 宋泉盛 신학의 동기와 성취에 대해 선망과 찬사를 아끼지 않는다고 했다. 서양 그리스도교 선교사의 선교 입장으로부터 아시아인을 향해 말하는 하느님보다는 아시아인의 문화-종교 심성으로부터 말하는 하느님의 말씀을 찾으려고 집요한 열정을 불태운 宋泉盛의 신학적 업적이야말로 오늘날 아시아의 신학자들이 토착화신학, 문화신학, 정치신학 혹은 민중신학을 시도함에 있어서 통과하지 않을 수 없는 매우 의미 있는 작업이라는 점을 지적했다. 필자는 서남동의 이 지적이 그가 활동했던 1970년대와 1980년대의 민중신학에만 타당한 것이 아니라, 바로 오늘 1990년대와 앞으로 다가올 서기 2천년대의 민중신학에도 변함 없이 유효한 민중신학의 '지침'으로서 깊이 음미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서남동은 다음으로 宋泉盛 신학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대목에 이르러, 宋泉盛이 성서적 계시의 신학(상부구조-이념)만을 주목하지 성서적 계시의 역사(하부구조-물질-사회사)는 간과하고 있다고 날카롭게 비판한다. '사회사적 인식의 결핍'이라는 소제목이 붙어 있는 그 부분에서 조금 길게 인용해 보기로 하자.

크로놀로지칼한 의미에서 계시의 역사적 원점 혹은 원계시는, 구약성서에서는 출애굽에서 시작되는 원이스라엘의 200여 년간의 신앙과 사회사이며, 신약성서에서는 예수의 3년간의 갈릴리 선교활동이다. 구약성서의 경우 그 원계시의 구성 요소는 유일신 야훼신앙과 원이스라엘의 사회사이다. 신약성서의 경우 그 원계시는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선교활동의 장인 갈릴리의 민중들이다. 원이스라엘의 사회사, 그 때의 갈릴리 민중의 사회사 및 그들의 자의식이 계시를 구성하는 구성적 요소이다. 그러므로 계시의 일면은 분명히 사회과학적 연구의 대상이 되고 또 되어야만 한다. 이런 의미에서 계시는 '역사적 계시'이고 그것은 '물질적 계시'다. 다시 말해서 계시의 '하부구조'가 있다. 그것은 원이스라엘의 사회구조, 갈릴리 민중의 사회경제사다. 원계시의 매체인 택함을 받은 히브리이들의 새 공동체와 갈릴리의 가난한 민중은 단순히 계시의 매체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그 계시의 구성적인 요소다. 그렇기에 우리가 역사적 계시라고 말할 수 있다. 복음(계시)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어졌을 뿐만 아니라 가난한 사람의 복음이다. '가난한 사람'은 복음(계시)의 구성적 요인이다. 그러므로 교회(우리)가 복음(계시)를 갖게 되는 방식은 가난한 사람들과의 연대(solidarity)에서만 허락된다. 예수 그리스도가 갈릴리의 가난한 민중을 불러 일으켜 세웠고 그 가난한 민중들은 일어서서 자기네가 하느님의 구원역사의 주체라는 자의식을 갖게 된 일련의 사건들이 복음이요 계시다.

이제 宋박사의 성서 인용을 비판하자. 그와 함께 전통적 신학의 성서 인용의 기반을 비판한다. 宋박사는 성서적 계시의 신학(상부구조-이념)만 인용하지 성서적 계시의 역사(하부구조-물질- 사회사)는 완전히 간과한다. 宋박사는 그의 전 저서를 통해서 십자가와 부활을 아주 많이, 그리고 자세하고 길게 풀이한다. 그러나 그 풀이는 전적으로 십자가와 부활의 신학(상부구조)이지, 그 역사(사회사)는 아니다. 다시 말하자면 십자가에 부과된 종교적 희생 속죄만을 풀이하지, 불의한 정치에 의한 의인의 처형이라는 역사(사회사)는 전적으로 간과한다. 부활에 관해서도 그 종교적인 의미만 말하지 사회사적(물질적)인 역사는 말하지 아니 한다. 내가 부활의 사회사적인 하부구조라 함은 '죽임을 당한 자의 부활' '갈릴리에서의 만남' '메시아 재림 때의 부활'이라는 사회사적인 측면인데 宋박사는 여기에 대해 전혀 언급이 없다는 말이다

우리가 '역사적' 계시라고 말하면서 그 하부구조(몸)에서 유리된 상부구조(이념)만을 말하는 전통신학은, 그렇기에 나는 유령이요 나아가서는 아편이라고 말한다. 역사적 계시의 하부구조가 복원되어야 할 것이다.

이 대목에서 서남동 목사가 언급하고 있는 바는, 민중신학을 포함하여 무릇 모든 신학은 단지 성서적 계시의 상부구조(머리=신학=이념)만을 말해서는 안되고 반드시 하부구조(몸=물질=사회사)를 아울러 말해야 한다는, 신학의 방법, 성서 해석학의 통찰임은 말할 것도 없다. 하지만 결코 거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그는 '역사적 계시'라고 입버릇 처럼 말하면서 바로 그 계시의 '몸'에 해당하는 갈릴래아 민중의 사회사를 빠뜨린 신학은 '복음'의 이해에도 도달하지 못한 전통신학의 아류일 뿐이고 '아시아 민중의 신학'으로서는 낙제점을 면치 못한다는 것이며, 한 걸음 더 나가서 '아편'이라는 것이다. 그 글의 말미를 채우고 있는 다음의 말은 더 신랄하고 자극적이며 퉁명스럽기까지 하다: "문화의 물질구조만의 연구는 신학이 될 수 없다. 그러나, 역사적 계시의 물질구조에서 유리된 그 상부구조의 연구에만 머무는 신학은 허구이고 유령이다. 그것은 지배 이데올로기에 흡수되어서, 약속된 구원에 대한 증언이 아니라, 마취시키는 아편으로 작용할 위험이 크다."

서남동의 이 비판은 그의 겸손하고 어눌한 평소의 성품과 어울리지 않게도 칼날같이 매섭다. 왜 그렇게 과격한 발언을 했을까? 나의 판단으로는, 바로 이 대목이 민중신학을 포함해서 모든 신학이 걸려 넘어지기 쉬운 '문턱'이고, 신학의 '아킬레스건'이며, 민중신학으로 자처하는 어떤 신학이 과연 '민중'신학인지 아닌지를 판별하는 시금석이기 때문이다.

宋泉盛 신학에 대한 서남동의 논평 속에 1990년대와 그 이후를 살아갈 한국 민중신학 세대가 신학의 '지침'으로 삼아야 할 두 가지 원리가 들어있다고 나는 확신한다. 그 두 가지 원리를 다시 정리하면, 서양-백인문화 신학으로부터 아시아 문화 신학으로의 전위가 그 하나이고, 신학은 계시의 하부구조(몸-물질-사회사)를 지녀야한다는 것이 다른 하나이다.

그러면, 서남동이 말하는 상부구조와 하부구조의 상호관계는 무엇인가? 상부구조니 하부구조니 하는 것이 마르크스의 역사적 유물론의 용어인 것을 우리는 알고 있는데, 그것을 지칭함인가? 서남동 목사가 만년에 사회경제사의 방법을 배워 신학의 방법으로 삼았던 것은 사실이나, 그의 신학 작업의 구체적인 사례들을 검토해 보면 그가 사용하는 상-하부구조의 상호관계는 마르크스의 역사적 유물론의 정식과는 아주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가 '통전'이나 '합류'라는 일종의 패러다임을 즐겨 사용했다는 사실이 그것을 암시한다. 통전이든 합류든 역사적 유물론의 방법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은 그의 신학작업들 ― 예를 들면, [한의 형상화와 그 신학적 성찰], [민담에 관한 탈신학적 고찰], [두 이야기의 합류] 등 ― 을 분석해 보면 분명해진다. 그러나 어떻게 하는 것이 통전이고 합류인지 그 패러다임의 논리적 구조를 정리된 형태로 제시한 바가 없기 때문에, 우리로서도 '이것이 서남동 신학의 방법'이라고 딱 부러지게 말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그의 신학적 개성이 두드러지게 드러난 글 [두 이야기의 합류]에서 그의 방법론의 골격이 대략 제시된 것을 볼 수 있다. 다음의 글이 그렇다.

나는 이러한 전거들을 해석하는 데 있어서 지금은 우선 사회경제사적 내지 문학사회학적 방법을 적용하자고 제안한다. ㅗㅗㅗ 사회경제사적 방법을 적용함으로써 비로소 지배세력에 대한 민중의 제약조건들이 분명해지는데, 여기에서 민중의 역사가 밝혀진다면 문학사회학적 방법을 적용함으로써는 민중의 사회전기, 민중의 집단적 영혼, 민중의 의식과 그들의 갈망들을 들여다 볼 수 있다. 나는 이러한 사회적 해석학의 새로운 틀들은 일찍이 본회퍼가 '성서의 세상적인 해석'을 제안하고 시도한 것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ててて 신학의 또 하나의 방법, 곧 해석학의 틀이라는 것은 신학자의 지평 내지 시각을 의미한다. 어거스틴의 신학이 플라톤의 이데아 철학을,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이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을, 최근의 실존주의 신학이 실존주의 철학을 그 틀로 삼고 있듯이, 오늘의 새로운 지배적 상황은 사회경제사, 문학사회학등이 제시하는 시각과 지평이라고 생각된다. ㅗㅗㅗ 교의학적 신학과 실존론적 신학이 간과한 사회적 조건들을 정치신학은 그 신학의 틀 내지 지평으로 삼는 것이다. 기초가 상부구조를 조건짓느냐 그 역이냐, 존재가 의식을 조건짓느냐 그 역이냐, 환경적인 조건이냐 그 역(유전적 소질)이냐 하는 문제에 대해서 인습적인 편견일수록 후항들을 대답으로 택하는 관념론에 빠진 것이 상례이다. 사회과학적인 발견들은 전항들에 편든다고 보겠다. 실제로는 전항과 후항의 교호작용이겠지만, 인습적 편견을 타파하려면 사회적 조건이 인간성을 조건짓는다고 하여 변증법적인 역점을 두는 것이 정치신학의 자세라고 하겠다(강조는 필자).

또 [대담: 민중신학을 말한다]에서는, 민중신학은 신학과 민중사학을 묶는다는 데 중요한 의의가 있다고 하면서, 그러나 민중신학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민중의 메시아적 성격까지 논하니까 단순히 민중사론에 그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그것을 신학에까지 연결시키는 것이라고 했다. 이렇게 볼 때 그의 방법은 사회경제사적 방법과 문학사회학적 방법을 아우른 위에 '신학적 해석학'을 더 보탠 것으로, 역사적 유물론의 2층 건물 구조(토대와 상부구조)에 비해 훨씬 복잡한 다층복합 건물 구조를 가진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신학에는 사회사에는 없는 '플러스 알파'가 반드시 존재하는 법이고, 사회과학자나 역사학자가 아니라 신학자였던 서남동이 그 '알파'를 해명하기 위한 방법을 찾는 신학의 순례길에서 무척이나 고심하고 애쓴 흔적을 우리는 그의 복잡한 방정식에서 느낄 수 있다.

그러면, 민중신학에서 '한국적'을 밝히는 일은 위에서 길게 논한 서남동의 신학하는 방법, 그리고 그가 지적한 민중신학의 지침이 될 두가지 원리, 곧 '아시아 문화 신학으로의 전위' 및 '계시의 하부구조(사회사)'의 강조와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인가?

민중신학에서 '한국적'의 정체는 넓게는 신학 그 자체로부터, 좁게는 민중 그 자체로부터 나온다. 나는 "신학은 '하느님의 선교'를 해석하는 작업"이라는 서남동의 정의에 기본적으로 동의하는데, 우리의 신학이 일차적으로 해석해야 할 하느님의 선교는 하느님의 '한국 사회, 정치, 문화 현장'에서의 일이다. 하느님의 '한국사회 정치 문화 현장'에서의 일을 해석하는 것이 신학이라면, 그 신학은 '한국적'일 수밖에 없다.

다음으로, 민중은 어떠한가? 한국 민중신학이 말하는 '민중'은 일차적으로는 한국민중(더 정확하게는 한/조선반도의 민중)이다. 민중신학자들은 민중을 영어나 독일어로 표기할 때 피플(people)이나 폴크(Volk)라고 하지 않고 '민중'(minjung)이라고 표기할 것을 요구한다. 이것은 무슨 국수주의적인 아집의 발로가 아니다. 민중을 minjung으로 표기함으로써 민중신학의 민중이 '한국민중'에 의해 계시된 민중임을 나타내려는 것이다. 민중은 미국에도 있고(아메리칸 인디언, 흑인 등), 일본에도 있고(아이누, 부라꾸민), 독일에도 있고(동독 출신, 외국인 노동자들), 라틴 아메리카에도 있다(프에블라). 또 여성신학은 세계의 민중은 '여성'이라고 한다. 이들이 모두 민중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민중들은 한국 민중신학이 말하는 '민중'은 아니다. minjung은 세계 어느 나라에나 있고 역사의 어느 시기에나 있는 보편적 존재로서의 민중이 아니다. minjung은 한(조선)반도의 기나긴 수난의 역사를 통하여 봉건제, 반(半)봉건제, 식민지, 신식민지, 매판-예속 자본주의, 가부장제적 성차별주의, 이승만 친미-반공 독재 정권, 일제식민지 잔재, 박정희 군사 쿠테타와 군부독재와 유신체제, 대미종속문화, 분단체제, 분단문화, 5.18. 광주 대학살, 광주 민중항쟁, 한국사회의 계급-계층문화, 민중문화, 이러한 한국적 고난의 역사를 온몸으로 안고 살아온 사람들, 즉 '한국민중'이다. minjung은 사회경제사적, 정치경제학적, 문화사회학적, 종교-예술-신학적 존재이며, 그 모든 '한국적'요인들을 통전적으로 육화한 존재다. 그러므로 피플이 아닌 민중(minjung)이다. 민중은 이처럼 '한국적'이다. '민중'의 역사적 사회적 전기, '민중의 이야기'를 풀다 보면 '한국적'이란 것이 저절로 풀린다. 그러므로, '한국적 민중'은 동어반복이고 '한국 민중신학'은 형용모순이다. '한국적'은 '민중'의 내포(connotation)일 뿐이다.

민중신학의 민중은 일차적으로 '한국적'이다. 첫째, 문화적으로 한국적이고 둘째, 사회사적으로 한국적이다. 전자에 대한 신학적 성찰을 위해 서남동은 宋泉盛의 '아시아 문화신학의 전위'의 방법을 배우자고 했던 것이고, 후자에 대한 성찰을 위해 '계시의 하부구조'를 강조했던 것이다. 양자의 '통전'에 의해서만 민중신학에서의 '한국적'은 올바르게 해명될 수 있다.

그런데, '몸'이 없는 신학, '사회사'(계시의 하부구조)가 빠져 달아나 버린 이념만의 신학들이 우리 주위에 편만해 있다. 몸뚱어리(하부구조)를 서양에다 두고 있는 머리만의 신학, '외제 수입품' 신학, 복제신학이 그것들이다. 그 신학들은 아시아의 일부인 대만의 신학자 宋泉誠으로부터 열심히 전위의 방법을 배워 자신의 불구성을 치유해야할 것이다. 더러는 '한국 신학'의 문패를 내건 신학들도 있다. 그들의 진지함과 순수한 동기는 의심할 수 없겠지만, 신학의 명의 서남동의 처방에 따를 것 같으면 그런 신학도 몸뚱아리 없는 '유령'이 되지 않도록 자계해야 할 것이다.

윤성범의 '성'(誠), 유동식의 '풍류'(風流)는 한국적인가? 한 문화비평가는 "지배문화는 지배계급에게는 문화적 의미를 지녀도, 피지배계급이나 민중에게는 이데올로기적 의미를 지닌다"고 말한다. 동일한 현상이 한 계급 계층의 관점에서는 문화적인 가치로 기능하고, 다른 계급 계층의 관점에서는 지배 이데올로기로 기능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시각에서 볼 때, '성'과 '풍류'는 그것을 문화로 수용ㅗ향유하는 계층에게는 김치나 쌀밥처럼 너무나도 '한국적'인 것으로 느껴질지 모르나, 민중에게는 그렇지 않을 것이다. 어떤 문화적 가치가 마치 사회적 입장과는 분리된 절대적인 것, 또는 가치중립적인 것인양 현학적으로 명명되는 것은 옳지 않다. 이것은 토착화신학이나 문화신학에만 적용되는 말이 아니다. 민중신학, 여성신학도 예외일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성(誠)의 신학', '풍류신학'은 아무래도 한국 신학으로서는 함량 미달이라 할 수밖에 없겠다.

그것들과 극명하게 대조되는 것이 '한의 신학'이다. 한의 신학은 건장한 민중의 몸뚱어리를 지녔다. '한'은 그 민중의 몸뚱어리오장육부와 가슴 한복판에 서리서리 응어리져 맺혀 있는 한국민중의 파토스다. 한은 서남동의 표현에 따르면, "약소민족으로서, 백성으로서, 여자로서, 천민노비로서 갖게 되는 한국 사람의 지배적인 저변감정"이다. 또는 민중의 집단적 얼(영혼)이다. 민중의 집단적 영혼은 집(=공간)을 갖고 있는데 그것이 민중의 삶(사회사, 사회전기)이다. '한'이야말로 '한국적'인 것의 한 전형이라고 하는데 반대하는 이는 없을 것이다.

여기서 자명해지는 바이지만, 민중신학에 뜻을 두는 사람은 宋泉盛에게까지 갈 것 없이 서남동의 '한의 신학'으로부터 배운다면 신학의 '방법'(머리, 논리) 뿐만 아니라 신학의 파토스(가슴, 혼)까지를 배우는 일석이조의 이(利)를 얻을 수 있다. 신학에는, 특히 민중신학에는 파토스가 필수적이다. 신학(=하느님의 선교/일을 해석하는 작업)에는 머리 뿐만 아니라 가슴으로부터 분출하는 파토스적인 열량(energy)이 소요되기 때문이다.

민중신학의 세번째 지침은 '저항성'이다. 신학은 신학함(doing theology)이고 민중신학은 민중의 '한풀이'(구원과 해방)이기에 저항을 내포한다. 민중신학의 신학함은 '한국적'이 아닌 것, '한국적'이 되는 것을 방해하는 것, 몸(사회사)이 없는 머리(이데올로기/신학)만의 신학(즉 아편), 외제 수입품 신학과 복제신학, 스스로 '한국적'이 아닌 것으로 변질 내지 변절해 가는 것에 대한 자기비판과 저항을 내포할 수밖에 없다. 저항에는 '향내적'인 것과 '향외적'인 것이 있다. 저항은 살아 있음의 발현 형태로서 창조의 한 측면을 지닌다. 저항은 당대의 역사적, 사회적, 정치적, 문화적 상황에 제약받으면서 그 상황을 뛰어넘으려는 창조적 비판능력이다.

민중신학의 제3의 성격(지침)은 바로 이 저항(resistance; protest)에 있다. 민중신학은 저항적 신학이다. 민중신학에서 '한국적' 이라는 의미 속에는 이 '저항성'도 포함된다. 우리는 자주 자신의 신학의 '체온'(저항성)이 식지 않았나 살펴야 한다.

끝으로 민중신학에서의 '한국적'을 묻는 우리들의 신학 작업에서는 '문화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의 변증법적 관계를 항상 깊이 고려해야 한다는 것을 부언하고 싶다. 민중신학의 문화신학적 측면(또는 민중문화신학)과 정치신학적 측면(또는 정치신학으로서의 민중신학)은 공히 민중신학의 '구성적 요소'로서, 결코 양자택일적일 수 없으며, 항상 상호비판적 창조적 긴장관계에 있어야 한다. 문화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 사이의 이러한 변증법은 전자가 형이상학적 이념이나 지배 이데올로기로 변질하지 않고, 후자가 삶의 문화적 차원에 대한 성찰을 결여한 빈곤한 정치 이데올로기로 전락하지 않기 위한 기본 요건으로 생각된다. 이 변증법적 관계를 담보할 때, 민중신학은 민중의 내포로서 '한국적'이 함축하는 '오늘 우리의 삶의 총체성'을 신학화해 낼 수 있을 것이다.

제6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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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와 민중

1. 민중의 눈르로

민중신학은 민중의 눈으로 성서를 읽으려 한다. '민중의 눈으로'는 민중신학에서 성서 읽기의 기본 발상이다. 서구의 성서학은 자칭 성서를 객관적, 이성적으로 해석한다고 한다. 역사비판적 방법을 예로 들면, 역사니 비판이니 하는 말 속에 이미 일정한 입장과 시점이 들어있는 데도, 그것을 말하지 않고 객관성을 위장한다. 일종의 허위의식이다. 그와는 달리, 민중신학은 처음부터 민중의 눈으로, 라고 자신의 시좌와 입장을 분명하게 드러내 놓고 있다.

서구신학의 성서 주석은 저자가 누구냐, 저자의 관심과 의도는 무엇이냐, 본문이 전달하고 있는 메시지가 무엇이냐 등을 묻고, 그 해답을 얻으려 한다. 그러나 아무리 주석을 해도 거기서 나오는 답은 텍스트의 한계를 넘지 못한다. 이를테면, 구조주의 방법에서는 텍스트의 내면구조가 말하는 다양한 의미를 추적한다고 하지만 그 결과가 갖는 한계는 마찬가지다. 민중은 성서에서 '해방의 길'을 묻는데, 텍스트의 내면구조만을 묻는 주석으로는 텍스트 배후에 있는 '하느님의 해방사건'(민중예수 사건)이 포착되지 않는다.

성서 텍스트의 진정한 의미는 문자 배후에 있는 하느님의 계시(민중사건)에 있다. 그것을 붙잡으려면 문자를 뛰어넘어가는 방법이 필요하다. 그런데 문자를 뛰어넘어가는 방식은 전통적인 성서 해석의 영역을 넘어선다. 즉, 전통적인 학문적 성서 해석은 텍스트 없이는 단 한발짝도 나갈 수 없기 때문에 텍스트를 뛰어넘어 그 배후의 어떤 현실(reality), 그 원사건에 도달한다는 것은 학문(Wissenschaft)의 작업 범위를 넘어서는 일이다.

그런데, 1970년대 한국 그리스도교에서 그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 그것은 방법적으로 어떻게 가능했는가? 이 물음에 대해 정연한 답변이 가능하다면, 그것이 바로 '민중신학의 성서 해석방법'이 될 것이다. 학문은 텍스트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텍스트를 뛰어넘을 수 없다. 그것은 맞는 말이다. 그러나 만일 목적이 '학문'에 있지 않고 '민중구원'(해방)에 있다고 한다면, 텍스트의 의미는 상대화된다. 민중구원이 목적이라면 텍스트를 우상화할 필요가 없다. 그리스도교적 사유에 있어서 성서 텍스트는 중요하다. 그러나 텍스트가 중요한 것은 텍스트(문자) 자체가 중요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찾고 있는 '그 무엇'이 텍스트에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그 무엇'을 전통신학에서는 그리스도, 구원 등으로 말하는데, 그들이 말하는 구원은 역사적 차원, 사회적-정치적 차원, 해방의 차원이 탈락하여 관념화, 추상화한 구원이 되어 버렸다. 전통신학에서 탈락된 이 차원을 되찾으려면 어떻게 해야 좋은가? 무엇보다도 텍스트의 우상화를 타파해야 한다. 텍스트를 한치도 벗어날 수 없는 '학문적' 신학을 '탈'해야 한다는 것이다.

2. 성서의 재발견

민중신학이 성서를 해석하는 패러다임은 '민중의 눈으로'라는 것이다. '민중의 눈과 머리와 가슴으로' 성서를 다시 읽는다는 것이다. 이 새로운 성서 읽기 결과, 성서를 새롭게 만나게 되었다. 성서의 재발견, 성서와의 새로운 만남은, 성서 자체가, 민중이 ― 곧 가난한 사람들, 사회와 역사의 가장 밑바닥에서 억눌려 지내온 사람들, 역사와 사회의 변두리로 밀려나 차별과 천대를 받고 살아온 사람들이 ― 하느님의 구원과 해방의 역사 경륜에 있어서 중심 역할을 담당하는 주체(주인공)라는 사실을 이야기하고 있으며, '성서는 바로 그들의 이야기'라는 새로운 발견인 것이다. 그 새로움은 실로 '창조'의 이름에 값하는 것이다.

성서의 이러한 재발견은 성서학자의 서재나 대학 연구실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1970년대 한국 민중의 수난 현장에서, 그 현장에 몸을 던졌던(혹은 그들 자신의 표현으로는 '던져졌던') 몇몇 신학자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 중 한 사람인 안병무는 그 경험을, "민중을 접촉점 삼아 성서와 오늘의 한국사회를 연결해 본 것이지요. 그렇게 하자마자 성서의 새 세계가 눈앞에 활짝 전개되었습니다. 성서의 내용과 해석 방법에 질적인 변화가 일어난 것입니다"라고 했다. 또 한 사람 서남동은, 이 성서의 재발견 작업을 신학의 '정의'에까지 연결시킨다. "신학이란 그 시대의 언어와 사상의 틀로써 성서를 재해석하는 작업이다."

그러면 그들은 실제로 성서에서 무엇을 발견한 것인가? 먼저 그들은 성서에서 민중의 위치를 발견했다. '성서가 민중을 주제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성서의 중심 테마를 발견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민중은 그리스도교 신학의 중심 테마가 되지 않을 수 없다. 즉 민중은 하느님, 예수, 성령, 구원 등 신학의 여러 주제들 중의 하나가 아니라는 것이다. 민중이라는 신학의 대상 또는 주제를 하나 더 추가한 것이 아니라 "신학의 진정한 주제를 비로소 찾아내고야 말았다!"고 해야 할 정도의 의미라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민중은 신학의 주제일 뿐만 아니라 방법(패러다임)이기도 하다. 안병무는, "성서 해석에 있어서 관건은 성서 각 책 자체의 성격이 '방법'을 규정하고 있다는 사실에 있다"고 한다. 성서라는 책 자체가 자기 안에 질문을 가지고 있고 그 질문이 고유성을 지녔기 때문에 그 질문에 답하는(해석하는) 데 있어서도 그 나름의 고유한 방법이 있다는 것이다. 성서의 고유한 물음은 민중이다. 성서는 민중을 묻는다. 민중의 현실, 민중의 고난, 민중의 '한', 민중의 구원, 민중의 해방, 민중의 희망, 민중의 나라(하느님나라)를 묻는다. 따라서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성서 안에서 찾는 것이 성서 해석의 목적이 되고 방법이 되어야 한다. 성서 해석의 목적이 어떤 교리나 신학(이데올로기)을 정당화하는 것이어서는 안된다. 또 그러한 목적에 효과적으로 봉사하는 수단을 성서 해석의 방법으로 삼아서도 안된다. 어떤 신학을 이미 정답으로 설정해 놓고 그것을 정당화하는 논리 '놀음'이 성서 해석학이어서는 안된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성서 해석의 방법도 '민중'이어야 한다. 이처럼 민중신학에서 주제와 방법은 통일되어 있다. 실제로, 흑인신학이나 여성신학에서 '흑인'이나 '여성'은 그 신학의 주제일 뿐만 아니라 그 자체가 패러다임을 지시하는 말인 것과 같은 이치다.

3. '성서'의 해방

서남동은 [민담에 관한 탈신학적 고찰]에서, 그리고 안병무는 [예수와 민중]에서 각각 김지하의 희곡 <금관의 예수>의 풍자와 은유를 빌려, 민중이 예수를 신학으로부터 해방시킨다는 것, 나아가서 이것은 성서 자체의 해방이라는 것을 말한다.

이 희곡의 줄거리를 발췌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1971년 한국의 소도시, 몹시 추운 겨울날 새벽, 어느 성당 앞. 예수상이 서 있다. 그 앞에 문둥이와 거지가 추위를 견디려고 등을 서로 붙이고 앉아 있다. 그 앞을 수녀가 지나가고 신부가 지나간다. 거지들은, 저 사람들이 예수 팔아서 먹고 사는 예수쟁이들이라고 쑤근거린다. 거지 하나가 말 못하는 예수상을 손가락질하며 비웃기도 하고 제 신세타령을 했다가 자신에 대한 저주를 퍼붓기도 하다가 예수상 앞에 나동그라진다. 이 때 그의 이마에 물방울 하나가 떨어진다. 올려다 보니, 예수상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는 것이 아닌가. 그는 의아해 하며 예수상을 살핀다. 예수상의 머리에 씌어진 금관을 발견하고 그것을 벗긴다. 그러자 예수가 입을 열어 말하기 시작한다. "그 금관을 가져가라." 거지가 두려워하며 그 앞에 무릎을 꿇으니 예수가 계속해서 말한다. "나는 너무나 오랜 세월을 이 시멘트 속에 갇혀 있었다. 답답하고 적막한 이 시멘트 감옥 속에. 나는 너처럼 가난한 사람들과 이야기하고 싶었고 괴로움을 함께 나누고 싶었다.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른다. 이 감옥에서, 이 신전의 감옥에서 해방되는 날을. 해방되어 너희들 속에, 너희들의 불행 속에 내가 다시 불꽃으로 살아 타오를 날을. 그런데 네가 왔다. 네가 가까이 와 내 입을 열어 주었다. 내가 너에게 구원을 받았느니라."

거지가 놀라며 묻는다. "누가 예수님을 감옥에 가두었습니까? 그들이 누구입니까?" 예수상의 예수는 대답한다. "가난한 사람들의 굶주림을 외면하고, 박해받는 사람들의 고통스런 외침에 귀를 막고, 세속의 안락과 부귀와 권세에 너무나 가까이 있는, 스스로 예수의 제자라고 자칭하는 바리새인들이 나를 가난한 사람들에게 가지도 못하도록 이 시멘트 감옥에 가두었느니라."

거지는 다시 묻는다. "예수님, 어떻게 하면 해방될 수 있습니까? 다시 살아날 수 있습니까? 다시 살아나 저희들에게 올 수 있습니까?"

"내 힘만으로는 안된다. 너희들이 나를 해방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너희같이 가난하고 불쌍하고 천대받으면서도 어진 사람들이 아니면 안 된다. 네가 내 입을 열어 주었다. 네가 내 머리에서 금관을 벗겨내는 순간 내 입이 열렸다. 네가 나를 해방시켰다. 자, 가까이 오너라. 네가 내 입을 열게 했듯이 이제는 내 몸을 자유롭게 해다오. 내 몸에서 이 시멘트를 벗겨다오. 답답하고 갑갑해서 못살겠구나. 어서 빨리 이 감옥에서 벗어나 가난한 민중 속으로 가고 싶다. 내 머리에는 가시관으로 족하니라. 어서 이 시멘트를 벗겨다오. 어서!"

이 때, 신부와 사장과 순경이 나타나 거지가 금관을 훔쳤다고 해서 금관을 도로 빼앗아 신부에게 준다. 신부는 그 금관을 다시 시멘트 예수상에 씌워놓으니 예수상은 다시 입을 열지 못하는 벙어리로 돌아가 버리는 것이었다.

김지하가 '금관'으로 은유하고 있는 것은 교회이고 교회조직이다. 그리고 교리요 신학이다.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생각해 보면, 예수는 성서 속에 감금된 것은 아닐까? 어떤 사람들은 중세기 교회로부터 성서는 해방되었다고 말한다. 그것이 종교개혁이었다고. 그러나 예수는 정통교리와 신학에 의해 해석된 성서 속에 감금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예수의 머리에 씌어진 금관, 예수를 가둔 시멘트, 그것은 교회가 만들어낸 '그리스도론'이다. 그것은 바로 예수로 하여금 제도교회를 옹호하도록 만들어진 이데올로기다.

서남동은, 예수의 머리에서 금관을 벗기고, 몸에서 시멘트를 헐어내는 것은 신학이 아니라고 한다. 해방신학도 민중신학도 아니라고 한다. 그는 묻는다. "예수를 신학으로부터, 나아가 성서로부터 해방시킬 자는 누구일까?" 안병무는 지난 1970년대에 군부독재 치하에서 신음하는 민중의 절규가 예수의 금관을 벗겼다고 한다.

한국교회는 가톨릭 200주년, 개신교 100주년의 전통을 자랑스럽게 내세운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서구에서 형성된 신학의 도그마에 의해 화석화된 예수만을 제시했으며, 이로써 이 땅의 민중과 더불어 고난당하는 예수는 외면했던 것이다. 그러나 지난 1970년대에 신음하는 민중의 소리가 예수의 금관과 시멘트를 벗겨냄으로써 우리는 비로소 예수의 눈물을 보고, 말을 들을 수 있게 되었다. 교회에 의해 감금되었던 예수와 성서가 민중에 의해 해방될 수 있다는 '놀라운 사실'을 경험하게 된 것이다. 그것 자체로서 하나의 사건이었다. 그런데 제도교회는 예수의 금관을 되찾아 도로 씌우기 위해 안간힘 쓰고 있다.

예수의 해방은 예수만의 해방이 아니다. 민중신학에서는, 예수는 곧 '예수민중'이라고 했다. 따라서, 예수의 해방은 성서 속에 있는 민중의 해방이기도 하다. 그리스도교 역사의 긴 세월 동안, 복음서 속의 민중은 보이지 않는 존재였다. 1970년대 한국 민중의 상황이, 그들의 고난과 절규와 몸부림이 신학자들로 하여금 성서 속의 민중의 존재에 눈을 크게 뜨게 한 것이다. 그들은 민중이 있는 곳에 예수가 늘 함께 있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예수와 민중은 예수민중으로서 '하나'인 것을 알 수 있었다.

4. 예수사건과 그 전승 주체

4.1. 문제제기

1984년 10월, 안병무는 '한국 기독교 100주년 기념 신학자 대회'에서 민중신학사에 남을 한 편의 기념비적 논문을 발표했다. [예수사건의 전승 母體]라는 제목의 이 논문은, 성서신학자 안병무의 진면목이 드러난, 그의 대표작으로 평가될 수 있다. 또한 이 논문은 민중신학의 관점과 입장을 관철시키면서도, 서구 신약성서학의 학문적 성과를 십분 활용하면서 서구신학과의 단절이 아닌 학문적 대화의 길을 열어 놓은 글이라는 점에서도 주목된다. 사건의 신학, 예수사건이라는 그의 패러다임을 이해하는 데 길잡이가 되는 글이기도 하다.

이 논문에서 안병무는 다음과 같은 문제들을 제기한다.

㉠ 양식사학에서는 공관서 전승의 모체가 '그리스도교 공동체'였다는 결론에 도달하였으면서도, 그 공동체를 사회학적으로 분석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다. 따라서 공동체의 정치-사회적 위치와 기능, 공동체가 존속하기 위한 대처 방법, 공동체 성원의 성격과 구성 및 그들과 공동체와의 관계를 밝히지 않았다.

㉡ 공관서 전승 가운데는 케리그마 전승(예수어록 전승을 포함한) 외에도 '예수사건 전승'이 병행한다. 교회 안에는 예수사건보다는 제도화된 교회의 보존과 안정에 우선적 관심을 두는 층과 예수사건의 목격자로서 그 사건의 충격을 기억하고 그 사건의 전승에 우선적 관심을 갖는 층이 있었을 수 있다.

㉢ 양식사학파에서는 신약성서에 있어서 이른바 케리그마를 발견했다. 신약성서의 골격이 케리그마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신약 전체를 케리그마로 보는 것은 옳지 않다. 특히 공관서가 전하는 예수사건을 케리그마의 시각에서 처리해 버리는 것은 공관서의 역사성을 경시하고, 따라서 역사의 예수의 물음을 봉쇄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 예수사건 전승은 케리그마의 형태를 띨 수도 있으나 그 사건 목격자의 역사서술 형태로서 전승될 수도 있다. 두 전승은 구별되어야 하고 각각의 내용적 특성이 밝혀져야 하며, 전승을 담당한 주체의 사회적 성격이 밝혀져야 한다.

㉤ 그러기 위해서는 비교적 초기의 것으로 인정된 대표적 케리그마의 내용과 이야기체로 전승된 복음서의 예수사건의 내용을 비교해 보아야 한다.

이상과 같은 문제제기와 관련하여 안병무는, '사건 자체의 진술자'와 '사건 의미의 전달자'를 다음과 같이 구별한다. 일반적으로 어떤 사건을 경험했을 때, 그 사건의 충격을 목격자로서 그대로 진술, 전달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그 사건의 사실성보다는 의미를 전달하는 경우가 있다. 의미의 증언은 공동체의 지도층이 담당하는데 그 증언은 다분히 주관적 변증적 성격을 지닌다. 이에 반해, 사건 자체의 진술자는 목격자로서의 충격을 그대로 전하는 것이기 때문에 역사적 객관성을 지닌다. 케리그마는 교회에서 형성된 것으로 공동체의 내적 지도이념이며, 공동체 밖을 향한 교리적이고 변증적인 성격을 갖는다. 케리그마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의 의미에 초점을 두고 있는데, 실은 케리그마가 형성되기 이전에 예수의 수난 사실과 부활 사건 자체가 있었다. 그러므로 예수사건에서 케리그마로 이행하는 것이 순서이지 그 역은 불가능하다. 태초에 케리그마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태초에 예수사건이 있었다.

4.2. 케리그마의 성격

다음으로, 케리그마의 성격을 밝히기 위하여 안병무는 교회에서 공식화한 가장 오래된 케리그마인 ⓐ 고린도전서 15장 3-8절, ⓑ 필립비서 2장 6-11절, ⓒ 사도행전에 나타난 케리그마를 차례로 분석한다.

ⓐ 고린도전서 15장 3-8절은 바울로 이전에 교회공동체에 의해 형성된, 예수의 죽음과 그리스도의 부활에 관한 케리그마인데, 그 성격은 첫째, 예수의 죽음과 부활 사건의 비역사화다. 예수가 죽임을 당한 것은 역사적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이 문서에서는 '언제, 어디서, 누구에게, 왜'라는 관심을 봉쇄한다. "성서에 기록된 대로"나 "우리 죄를 위하여" 등의 표현(고전 15,3 등)은 결과적으로 사건의 역사적 진술을 회피하는 것이다. 둘째, 사건의 진상보다 교권 확립의 노력이 두드러지게 드러난다. 부활 현현의 첫 목격자를 게파, 곧 베드로로 한 것이라든지, 주의 형제 야고보를 부활의 증인으로 열거한 것이라든지, 열두 사도라는 추상적인 집단 개념을 사용한 것 등이 이 사실을 반영한다. 복음서에는 게파에게 나타났다는 기록이 없으며, 야고보는 예루살렘 교회에서 지배권을 행사한 것으로 나타나 있으나, 그가 언제 그리스도인이 되었는지에 대한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 오히려 복음서에는 예수의 형제들의 불신앙적 모습만이 전승되었을 뿐이다. 열두 사도가 아니라 차라리 열한 사도라야 할 것이다. 부활의 목격자 명단과 그 배열 순서도 역사적이 아니다. 셋째, 이 문서는 공적 성격이 뚜렷하다. 공적인 문서화에 있어서는 외부의 권력 관계를 우선적으로 고려하게 된다. 부활이 십자가의 수난 사건과 유리될 수 없다면, 십자가 사건의 역사적 현실성을 규명해야만 그 사건이 갖는 의미로서 부활의 성격도 분명해질 것이다. 당시에는 그리스도인의 입장에서 볼 때, 예수의 십자가 처형에 대한 원망과 한이 풀리지 않고 생생히 남아 있었음에 틀림없다. 그런 마당에 이런 추상화된 표현이 어떻게 용납될 수 있었을까. 그러나 이 문서가 공표될 때 예수를 처형한 로마 제국은 물론이고 그것과 야합한 유다인 세력도 엄존했다. 교회의 지도층은 강력한 로마 제국과 유다교를 의식하고 제도화된 교회의 존립을 우선했기 때문에 그것이 가능했을 것이다.

ⓑ 필립비서 2장 6-11절은 '그리스도 찬가'라 일컬어지는 것으로, 상당히 일찍 형성된 케리그마라는 것은 일반적으로 공인되는 바다. 이 찬가가 운율적인 시 형식으로 되어 있는 것은 벌써 역사적 충격에서 벗어나 객관적으로 관조할 수 있는 여유를 나타낸다. 내용상으로도 '선재자'(첫째 구)와 '들어올리운(곧 부활한) 자'(셋째 구) 사이에 '수육자'(둘째 구)가 놓여 있기 때문에 그 수육한 삶의 모습이 어떠했는지 수난의 현장이 어떠했는지는 큰 비중을 가질 수 없게 되어 있어 수난사건의 역사성을 희석시키고 있다.

ⓒ 사도행전에 나타난 케리그마는 2장 22절 이하, 3장 13절 이하, 10장 37절 이하, 13장 23절 이하 등이다. 이 케리그마의 성격은 '예수의 죽으심과 하느님이 그를 다시 살리심'에 초점을 둔 점이다. 바울로가 전승한 케리그마와 대조되는 점은, 예수의 생애의 일부를 언급하고 있다는 것, 예수의 십자가 사건을 언급함에 있어서 빌라도의 책임을 묻지 않고 유다 지도자들에게 그 책임을 돌리고 있기는 하지만, 예수 처형의 책임자에 대해 언급하고는 있다는 점, 하느님의 아들 칭호대신 다윗의 자손이라는 칭호가 사용되고 있다는 점 등이다. 사도행전에 산재해 있는 케리그마가 역사적 예수의 편모들을 비록 포괄적으로나마 언급한 것은 마르코복음 또는 다른 전승에 의해서 예수의 행적과 수난사건을 알고 있던 루가가 첨가한 것이다.

위의 세 가지 외에도 바울로 문서에서 전승된 케리그마의 단편들이 산견(散見)되나 그 어느 것도 위에서 열거한 케리그마의 내용과 다를 바 없다. 이것은 바울로가 역사적 예수의 전기적 내용이나 말씀에 관해서 침묵하고 있다는 사실과 상통한다. 바울로는 단 한 번(갈라 4,4: "그의 아들을 보내셔서 여자에게 나게 하시고 ㅗㅗㅗ") 외에는 역사적 예수에 관해 언급하지 않았고, 개념화된 예수의 십자가 또는 죽음을 자주 언급했다. 이것은 그의 모호한 발언, "이제부터 육으로 그리스도를 알려고 하지 않는다"(고후 5,6)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대로 예수의 사건을 서술하는 대신 그 의미만을 전달하는 케리그마로 재빨리 이행함으로써 예수사건은 추상화되었다. 이러한 케리그마의 성격에 근거하여 안병무는 다음의 물음으로 옮아간다.

케리그마로의 그토록 빠른 이행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그 대답을 그는 다음과 같이 유추한다.

정치적 사회적 조건들이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이다. 로마제국에 대한 반란자로 십자가형에 처해진 예수를 주로 섬기는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이끌어 나가려고 하던 교회의 지도층은 예수의 죽음을 추상화해 버림으로써 권력과의 충돌을 피하려고 했다. 젤롯당과 동일시되는 것도 원치 않았다. 이런 노력이 케리그마 형성에 영향을 미쳤다. 교회의 지도층은 또한 예수사건을 유다교의 틀 안에서 해석함으로써 유다교로부터 인정을 받으려 했고, 동시에 유다교를 공인하고 있던 로마 제국으로부터 유다교의 일파로 간주되기를 원했다. 결국,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보존을 위한 이런 변증적 노력이 역사적 예수사건을 재빨리 케리그마의 형태로 옮기게 한 것이다. 그 결과, 역사적 사건에 대해 침묵한 데 그치지 않고 그것을 왜곡하였으며, 더욱이 공동체의 성원 다수의 의사를 수렴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그것에 반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4.3. 예수사건 전승의 성격

㉮ 예수사건은 민중언어의 형식인 '이야기체'로 전승되었다. 마르코 편자가 전승한 수난사를 비롯해 마태오나 루가가 전하는 특수자료들과 어록 자료의 일부도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이야기라는 민중언어는 지도이념이나 교리의 선포, 또는 변증적 논증을 위한 언어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예수를 따르던 무리들에게 예수사건의 진상을 알리려는 일군의 목격자들이 있었을 것이다. 사건 직후의 정치-사회 상황 때문에 그들은 예수사건을 저항적인 불온성을 띈 유언비어 형태의 이야기로 전승했을 것이다. 유언비어는 어떤 집단이 겪은 과거의 사건이 그 집단의 실존적 상황에 부합할 때 활성화된다. 민중은 과거의 사건에 대한 이야기에 자신들의 실존적 희망을 담아 전하면서 그 이야기가 자기네 이야기인 것처럼 기뻐도 하고 슬퍼도 한다.

㉯ 예수사건 전승의 이야기 형태는 케리그마 형태와 그 전달하는 내용이 근본적으로 다르다. 케리그마 형태에서는 감격과 좌절, 환희와 분노, 희망과 절망, 승리와 패배 등과 같은 충격적인 역사적 사건의 진실에 대한 민중의 적나라한 반응이 표출되지 않는다. 특히 케리그마에는 예수의 처참하고 한스러운 수난 사실이 전혀 표출되어 있지 않고, 누가 왜 어떻게 처형됐는지가 불투명해진다. 이에 비해 공관서의 예수사건 전승은 지도층에 의해 은폐된 이 사실들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

㉰ 공관서의 수난 이야기는 첫째, 예수가 로마총독 빌라도의 법정에서 사형선고를 받아 처형된 것으로 되어 있다. 이것은 "성서에 기록된 대로"라는 추상적이고 애매한 말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둘째, 수난이야기에는 사흘만에 부활할 것이라는 전제가 어디에도 반영되어 있지 않다. 그 전제가 있다면 제자들의 배신이나 게쎄마네에서의 기도(苦鬪), 십자가 상에서의 최후의 절규 같은 것이 설명될 수 없다. 예수의 고통의 핵심은 하느님에게 버림받는다는 데 집중되어 있다. 셋째, 케리그마에서는 전승의 주체가 사도들로 되어 있으나 공관서에서는 그들이 예수의 수난에 대해 전혀 무지했고 수난의 목격자도 아닌 것으로 되어 있다. 수난과 빈 무덤, 그리고 부활 현현의 첫 목격자는 사도들 중의 그 누구도 아니고 오직 여인들뿐인 것으로 나타나 있다. 넷째, 수난이야기는 수난이 과도기적 현상이 아니고 그 자체가 독립적인 사건으로서, 철저한 절망의 현장을 노출시키고 있다. 신의 출현은 물론, 초자연적인 어떤 가능성도 없는 문자 그대로 '신 부재의 암흑의 현실'임을 드러내고 있다. 이것은 부활(즉 승리)에 초점을 두고 그것에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서 하나의 과도기적 사건으로 예수의 죽음을 언급한 케리그마 전승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으로, 이것을 전승하는 민중의 절망적인 삶의 정황과 부합한다. 십자가 위에서 예수의 절규는 억울함을 당하는 민중의 절규와 일치한다.

5. 예수사건의 전승 주체 분석의 민중신학적 의미

㈎ 이상과 같은 검토를 통하여 안병무는, 예수사건의 전승주체는 마르코복음에서 보는 바 대로 '여인들을 위시한 민중'이라는 사실을 논증하려 했다. 마르코는 민중이 전한 이 전승을 수렴하여 그것을 중심으로 해서 복음서로 문서화한 첫 사람인데, 이것은 당시 원시 그리스도 교회가 처한 정치-사회적 정황으로 볼 때 가히 혁명적인 결단이었다. 마르코 덕분에 우리는 추상적인 문서로 된 케리그마의 배후에 감춰졌던 예수사건의 진실과 그 전승 주체인 예수민중의 실체를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오늘의 정황에서도 이러한 확인은 오늘의 예수사건인 한국 민중운동에 연대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신앙적 정체성을 부여하는 기반이 된다.

㈏ 그런데, 마르코는 민중에 의한 예수사건 전승을 그대로 복음서에 문서화한 것은 아니다. 마르코는 이미 '그리스도 케리그마'를 잘 알고 있었으며, 예수사건 전승이 케리그마화해 가는 과정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그 과정에서 예수사건의 진상이 퇴색하고 사라져 가는 것과 교회가 교리와 제도만으로 경직화해 가는 것에 대해 저항하고자 하였다. 그가 예수사건의 민중전승을 교회공동체로 끌어들임으로써 그것이 새로운 활력소로 작용할 수 있도록 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는 오늘의 교회를 갱신하고 재활성화하는 데 있어서 무엇에 저항해야 하며 그 무기로서 어떤 신학을 강화해야 하는지를 일러 준다.

㈐ 안병무의 이 논문에 의해 예수사건 전승과 케리그마 전승 각각의 성격과 그 삶의 자리들에 대한 사회학적 분석이 시도된 것은 획기적이다. 또한 복음서 안에서 예수사건의 이야기 전승이 케리그마 전승에 도전하고 있음이 확인되었다. 민중에 의한 예수이야기의 전승이 밝혀짐으로써, 케리그마의 예수상에 의해 관념화하고 탈역사화, 탈정치화한 예수가 그 역사성을 되찾을 수 있는 통로가 열리게 되었다. 그래서 오늘의 민중은, 그리스도가 되기 이전의 '인간 예수', 민중과 더불어 먹고 마시고 민중의 언어를 사용하고 동고동락하던 예수, 민중을 억압하고 수탈하고 소외시키던 지배층에 저항하여 민중을 옹호하고, 민중이야말로 하느님의 자녀임을 선포하다가 마침내 권력자의 손에 비참하게 죽임당한 '예수사건의 예수상'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제7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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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이후의 민중신학의 전개

1. 상황의 변화

1.1. 광주 민중항쟁과 민주화 운동의 질적 고양

19년간 계속된 박정희 유신독재 체제가 1979년 10.26 박정희의 피살로 막을 내린 후, 일부 군부세력은 유신잔존 세력과 결탁, 12.12 군사반란으로 권력을 장악하고, 민중과 학생, 재야 등 민주화 세력의 폭발적 진출을 일거에 압살할 음모를 진행하고 있었다. 1979년 10월부터 1980년 5월에 이르는 기간에, 군부 퇴진과 민주화 요구가, 부마 민주항쟁의 격랑을 거쳐, 5월13일 서울 도심 광화문 일대에서의 6개 대학 이천 오백여 학생들의 격렬한 민주화 요구 시위에 이은 전국 37개 대학 학생들의 일제 시위와, 15일의 서울 시가지를 완전히 뒤덮은 학생들과 일부 시민들이 합세한 대규모 시위로 확산 고조되자, 15일 밤 전국에 비상계엄령이 선포되었다. 그 후 전국적으로 시위는 일시 소강상태에 들어갔으나, 광주에서는 15일에 이어 16일에도 3만여 학생과 시민이 도청 앞 광장에 집결하여 대규모 횃불시위를 계속하였다. 17일 밤, 전두환 군사쿠테타 세력은 광주지역 주둔 공수부대 1천여 명에게 작전개시 명령을 하달하고, 18일에는 포고령 제10호를 발동, 김대중 등 재야 정치인과 민주인사 26명을 체포 구금하고, 광주 전남대와 조선대에 공수특전단을 진주시키고, 재야 민주인사와 학생들을 대량 검거하여, 광주시민을 극도로 자극함으로써 시민 학생의 시위는 급속히 확산되었다.

같은 날, 오후 3시, 군사쿠데타 세력은 육군 특수부대인 제7 공수특전단을 광주시에 투입, 학생 시민에 대한 체포 구타 살상을 무차별 자행하였다. 이에 20일에는, 20여 만에 이르는 시민이 항쟁에 나서자, 광주 시내에 진주한 계엄군이 무력 진압에 착수, 연일 시민에 대한 잔혹무비한 살상행위가 계속되었다. 기층민중과 학생, 시민들이 기어이 손에 무기를 들고 시민군을 결성, 결사항전에 들어갔다. 그러나 27일 장갑차와 헬기까지 동원된 계엄군에 의한 무차별 살륙에 의해 시민군의 저항은 무참히 진압된다. 이로 인해 사상자가 수천에 이르고, 수백 명의 민주시민과 학생, 기층민중이 체포 투옥된다.

광주 시민에 대한 군의 대량 살륙은 한국 현대사에 있어서 동족상잔의 한국전쟁 이후 최대의 비극적 참사였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1980년 5월의 광주'는 이 땅의 민족ㅗ민중 의식의 일대 고양과 민주화 운동의 질적 비약을 가져오는 역사적 계기가 되었다. 여기에서 특기할 것은, 한국군 작전권을 쥐고 있는 미국이 군부대의 이동과 작전을 허용함으로써 대학살극을 배후에서 묵인한 사실은, 한국 국민에게 "우리에게 미국의 존재는 무엇인가?"라는 각성된 물음과 군부세력의 배후에는 언제나 미국이 있다는 새로운 인식을 심어 주어, 한국인의 의식을 지배해 온 전통적인 '친미적 세계관'이 비로소 깨어지게 되었다.

이로써, 1980년대의 운동은 1970년대 운동과 질적으로 구별되는 새로운 특징을 갖게 된다. 1970년대 운동이 '인권과 민주화를 위한 체제내적 운동'이었던 것에 비해, 1980년대 운동은 '민족ㅗ민주 변혁운동'으로 불리운다. 이때 '민족운동'이란 미국의 예속으로부터의 해방을 뜻한다. 또 '변혁'이란, 국내의 군부 파시즘으로부터의 '민주화'와 외세로부터의 '자주화'라는 민족적 과제를 불가분 연관된 두 측면으로 보고 이의 동시적 해결을 한국사회의 모순(외세에의 예속과 국내 군사파시즘)의 근본적 치유(변혁)에 의해 실현하겠다는 새로운 한국 역사-사회 인식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러한 1980년대 운동의 변별적 특징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5월 광주'는 한국사회의 지배권력의 폭력성과 부도덕성을 극명하게 드러냄으로써, 대다수 국민에게 민주화를 통한 한국사회의 변화가 얼마나 절실한 과제인가를 깨닫게 하였다.

둘째, 광주항쟁에서의 기층민중의 잠재적 변혁역량이 확인되었고, 민중 자신의 각성이 고양되었다. 1970년대 민주화 운동의 중심이었던 종교인과 학생, 지식인 이외에 노동자, 농민, 도시빈민 등 기층민중이 점차 운동의 주체로 등장하게 되었다. 특히 1980년대 중엽부터 노동운동이 크게 성장하여 노동자계급의 전체운동에서의 위상이 급상승했다.

셋째, 학생운동권을 비롯, 기층민중과 연대하는 운동권 지식인 사이에 사회과학적 운동이론(특히 맑스주의적 변혁이론)이 도입되어 이른바 '변혁적 지식인층'이 형성되고, 그들을 중심으로 한국사회의 성격, 변혁운동의 전략 전술 등을 둘러싼 치열한 토론이 전개되었다. 이 과정에서 한국사회에 대한 사회과학적 인식과 변혁운동 이론이 형성되었다.

넷째, 그러한 사회과학 이론의 영향은 운동에 참여하는 기층민중에게도 파급되었고, 1985년경부터는 그리스도교 운동권 청년 학생과 소수의 진보적 목회자들, 민중신학 연구자들 사이에서도 사회과학 연구가 일반화되었다.

이상과 같이 광주 민중항쟁 이후의 상황 및 그에 대한 상황 인식의 변화를 민중신학의 1980년대적 전개라는 문제와 관련지어 살펴보면, ① 민중의 변혁 주체로의 진출과 사회과학적 현실인식 및 변혁이론의 대두로 인하여, 전체 운동에서 그리스도교 세력이 점했던 지위가 상대적으로 저하되었고, 또한 그리스도교 운동에서의 민중신학의 사상적 지도력의 약화를 가져왔다는 것, ② '운동의 신학'으로서의 민중신학적 전개가 이루어졌다는 것, 그리고 ③ 민중교회라는 새로운 형태의 교회운동이 시작되었다는 것 등으로 요약할 수 있다.

2.2. 운동의 신학으로서의 민중신학

1980년대에는 어떤 부문의 운동이든지, 그것이 민족ㅗ민중의 해방이라는 진보적 지향을 갖는 경우에는, 사회과학적 현실분석과 운동이론을 배우지 않으면 안되는 그런 시대 분위기가 팽배했다. 대학생들은 금지된 서적을 복사해서 비밀리에 돌려 읽었고, 사회과학 서적에서 배운 생경한 번역투의 언어로 목소리를 죽여 수근거리는 그들의 대화는 '불온한 열정'으로 가득찼다. 그리스도교 학생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들은 1970년대식의 민중신학으로는 1980년대 민족ㅗ민주 변혁운동의 성격에 부응하는 그리스됴교 운동의 새로운 신학적 요구를 충족시킬 수 없다고 단정했다. 그래서 일부 그리스도교 학생들은 스스로 신학연구 팀을 만들어 사회과학과 신학을 절충시키는 방법으로 동아리 학습용의 신학교재를 제작했다. 그런 책자 중의 하나가 1985년에 만들어진 {신학과 실천 1}이었다. 이 시기에 그리스도교 진보진영의 운동적 중심은 기독교사회운동연합(이하 '기사련')이었는데 그 이론적 지도역할은 당시 한국신학연구소 학술부장이었던 박성준(필자)과 동 연구소 번역실장이던 강원돈이었다. 1986년, 박성준은 기사련이 주최한 '청년기독자를 위한 강연회'에서 [한국기독교의 변혁과 기독교운동의 과제]라는 제목으로 강연을 하고 그 내용을 곧 글로 발표하였다. 그것은 곧 운동의 신학이라는 명칭으로 당시 그리스도교 청년학생 운동과 진보적 그리스도교 활동가들에게 널리 받아들여져 1980년대 그리스도교 운동의 이론적 지침으로 간주될 정도로 영향력이 있었다는 것이 일반적 평가였다.

그 글은 1980년대 중반 운동권의 사상-이론적 지형 속에서 '그리스도교 운동의 사상적 독자성 확보'라는 운동의 절실한 요구에 부응한 것으로 그 요지는 다음과 같다:

㉮ 현실 속에는 두 개의 그리스도교가 존재하며, 거기에 상응하는 '두 개의 신학'이 존재한다. 하나는 지배자들의 그리스도교와 그 신학이고, 다른 하나는 피지배자들, 곧 민중의 그리스도교와 그 신학이다. 같은 성서를 사용하고 같은 하느님을 부른다 해도 그 두 개의 그리스도교(두 신학)는 단순히 한 덩어리(一枚岩)가 아니라는 것은 너무나 명백하다. 현실은 그리스도교라는 하나의 이름 아래 두 하느님, 두 그리스도, 두 가지 성서해석, 두 가지 신학, 한마디로 두 개의 그리스도교가 엄존한다. 이렇게 분열된 그리스도교의 치유와 진정한 일치를 위해서는 먼저 교회가 분열되어 있다는 현실 인식이 필요하다.

㉯ 교회는 한국사회의 물질적 토대를 자신의 존립기반으로 하고 있으며, 한국사회의 성격과 구조를 이데올로기적으로 체현하고 있다. 그러므로 교회를 쇄신하려면 한국사회를 변혁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 역도 성립한다. 한국사회를 변혁하려면 그리스도교를 변혁해야 한다. 그것은 한국 그리스도교가 그 자체의 제도와 구조, 이데올로기(신학, 성서해석)를 가지고 자신의 존립기반인 한국사회의 성격과 구조를 유지 온존 강화시키는데 기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국 그리스도교의 변혁은 한국사회 변혁의 유기적 일부분이다.

㉰ 한국 그리스도교 변혁 방향은 민족적 그리스도교로의 변혁과 민중적 그리스도교로의 변혁이다. 이 둘은 서로 중첩되어 있는 한 과제의 이중적 측면이다. 여기서 '민족적'이라는 말은 배외적(排外的)이거나 서구 자본주의 열강의 제국주의적 민족주의가 아니라, 제3세계 (반)식민지 민중의 반외세ㅗ민족해방의 민족주의다. 이러한 '민족적'의 성격은 인류적 보편성과 모순되지 않으며 성서의 해방 사상과도 일치한다.

㉱ 우리는 현단계 그리스도교 운동을 '한국 그리스도교 민족민주운동'이라 부르고, 그것을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이 주체가 되어 행하는 자주화 민주화 민족통일을 위한 운동'으로 정의한다. 이 운동에 참여하는 한국 그리스도인들은 한국 민중의 일부며, 한국 그리스도인들이 주체가 되어 행하는 그리스도교 운동은 한국민중이 주체가 되어 행하는 민족민주 운동의 부분운동이다.

㉲ 한국 그리스도교 운동은 일반 임무와 특수 임무를 지닌다. 전자는 민족민주 운동의 '일반성'에 기초한 임무(정치적 임무)이고 후자는 그리스도교 운동의 특수성에 기초한 임무(신학적 임무)다. 부분운동으로서의 그리스도교 운동은 전체운동으로서의 민족민주 운동과 정치적 임무를 공유한다. 그러나 특수 임무인 신학적 임무는 그리스도교 운동의 고유하고 독자적인 영역이다. 한국 그리스도교의 민주적 발전과 변혁이라는 고유한 임무수행이 그것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는 '민족적 그리스도교로의 변혁'과 '민중적 그리스도교로의 변혁'이다. 한국 그리스도교 민족민주 운동의 일반 임무와 특수 임무는 변증법적으로 통일되어야 한다. 민족ㅗ민주 운동의 일반적 요구는 전체를 구성하는 각 부분의 개별성을 통해서만 실현될 수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 운동의 특수적 임무는 그 중요성이 간과되어서는 안 된다. 일반적(정치적) 임무만을 중시하고 신학적 임무를 경시하는 오류(소위 '조건활용론'이나 '외피론' 따위의 편향)나, 신학적 임무만이 그리스도교 운동이라고 생각하는 오류('종교운동론'이나 '세력화론' 따위)를 범해서는 안된다.

㉳ 한국 그리스도교 운동의 특수 임무 가운데 가장 시급한 과제는 첫째, 그리스도교 운동론의 정립; 둘째, 변혁의 논리로 무장된 그리스도교 운동 조직의 건설; 그리고 변혁적 그리스도교 운동의 신학 정립, 이 세 가지다.

여기서, 박성준은 '운동의 신학'의 정립은, 무로부터의 창조일 수 없다고 하면서 기존의 신학적 유산의 정수를, 오늘 우리의 운동의 상황적 요구에 비추어 창조적으로 재해석함으로써 이루어야한다고 본다. 즉 한국의 민중신학,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의 민중해방신학들, 서구신학의 진보적 유산들이 검토되어야 하고, 특히 한국의 민중신학을 비판적으로 발전시켜 이 신학으로 하여금 민중적 세계관과 이념과 역사인식에 기초한 한 1980년대 운동의 신학으로서의 지위에 오를 수 있도록 이를 견인해야 한다고 한다. 이 새로운 신학의 한 가지 사명은 이제까지 한국 그리스도교가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온 전통 서구신학의 본질과 그 지배 이데올로기적 성격을 폭로하여 한국 그리스도인들의 아이덴티티를 서구 그리스도교와 서구신학의 전제들로부터 해방시키는 일이라고 하면서, 1980년대의 새로운 운동의 신학의 기본 요건을 다음 일곱 가지 명제로 제시한다.

① 새로운 운동의 신학은 맑스주의 종교비판 '이후'의 신학이어야 한다. ② 새로운 운동의 신학은 민중적 세계관에 기초한 민중적 그리스도교 아이덴티티를 가져야 한다. ③ 새로운 운동의 신학은 성서의 민중전통, 교회사의 민중전통, 한국사의 민중전통, 이 세 가지 민중전통을 풍부하게 합류시킨 신학이어야 한다. ④ 한국 그리스도교 운동의 새로운 신학은 민족문제에 대한 심화된 인식을 가져야 한다. ⑤ 새로운 운동의 신학은 사회과학적 분석방법을 신학의 방법론 안에 수용하고 이를 신학적 해석학에 유기적으로 통합시킨 신학이어야 한다. ⑥ 새로운 운동의 신학은 한국교회 대중의 계급계층 분석을 다루는 이론 모델을 창안해야 한다. ⑦ 새로운 운동의 신학은 신학하는 주체와 방법의 전환을 시도하여 이를 점진적으로 실현해야 한다.

박성준은 위의 일곱 가지 명제를 차례차례 해설했는데, 민중신학의 전개와 관련하여 특별히 의미 있다고 생각되는 논의만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 한국사의 민중전통 가운데는 문화적으로는 샤머니즘, 불교, 유교 등의 적극적 요소들이 녹아들어 있고, 정치사상적으로는 진보적 휴머니즘 전통이 합류되고 있다. 동양과 서양의 온갖 이념과 문화가 만나고 세계의 고등종교인 불교, 유교, 그리스도교가 공존하며, 민족분단의 비극 속에서 세계사의 온갖 모순을 육화한 민족의 사상과 정서가 난만하게 꽃피어난 이 한반도는 새로운 그리스도교 신학이 잉태될 수 있는 창조의 태 또는 용광로 같은 곳이다. 한국 민중사의 풍부하고 기름진 사상 종교 문화적 유산을 밑거름으로 하여 새로운 민중적 그리스도교의 신학을 꽃피우자. ⓑ 그리스도교 운동의 신학은, 민족모순과 계급모순이 중첩되어 있는 우리 사회에서 그 두 모순의 동시적 해결이라는 정치적 과제를 짊어지고 있다. 민족문제와 민중문제는 운동의 신학의 핵심 테마다. 민중신학자 안병무는 한국 민중을 '민족적 민중'으로, 한국 민족을 '민중적 민족'으로 파악하는 특이한 민족 민중 이해를 보인다. 우리의 경우, 민족과 민중은 불가분리, 혼연일체인 그런 민족 민중이다. 민족이자 민중, 민중이자 민족인 그런 민족, 오천 년 민족사가 외세의 침략과 지배에 시달려온 민중의 한과 한숨과 눈물로 점철된 그런 민족, 민족 전체가.―.소수의 비민중 반민족 세력을 제외 하면.―.민중이고, 민중이 계급적이지만 않고 동시에 민족적이라는, '민족적 민중'이라는 바로 이 점에 한반도 민중의 특수성이 있다. 우리는 이 민족의 문제를 신학화해야 한다. ⓒ 우리는 민중을, 역사 발전의 일정한 단계에, 그 시대 그 사회의 중첩된 모순(민족모순과 계급모순)을 자기 존재의 객관적 조건(토대)으로 하여 등장하는 사회적 정치적 문화적 실체이며, 이 민중은 영원히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모순의 극복과 더불어 스스로를 지양하는 집단적 실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민중을 사회-정치적으로 뿐만 아니라, 문화적 실체로 파악하고 있음에 주목해야 한다. 민중을 객관적으로 성찰하는 데는 문화적 접근이 반드시 필요하며, 동시에 문화적 접근은 정치 사회 경제적 분석과 어울어질 때 비로소 민중의 객관적 실체에 접근할 수 있다. 민중신학에서 자주 말하는 한국 민중의 한도, 민족모순과 계급모순이 오랜 역사를 통하여 복잡하게 얽히고 곪히는 과정에서 민중의 가슴과 오장육부에 응어리진 우리 민족 민중의 집단적 정조에 다름 아니다. 따라서 민중의 '한풀이'는 한의 뿌리인 민족모순과 계급모순이 풀리게 되는 때에만 역사적 사회적으로, 곧 현실적으로 가능해 진다. 그렇게 되는 날, 이 땅의 민중은 더 이상 민중일 필요가 없게 될 것이다. 이러한 점에 착안하여 민족문제에 대한 깊은 연구와 민중 개념에 대한 심화된 인식에 노력함으로써 민중신학은 민족문제가 민주화 운동의 핵심 과제로 되고 있는 1980년대의 운동의 신학으로 발돋움하게 될 것이다.

한편 "전통적 그리스도교의 세계관인 관념론 및 형이상학의 극복과 민중적 그리스도교의 새로운 아이덴티티를 뒷받침해 줄 '민중적 세계관'의 정립"이라는 1980년대 그리스도교 운동의 새 문제의식을 안고 가장 열정적으로 가장 진지하게 가장 멀리까지 비관념론적 물질론적 세계관 탐색에 몰두했던 사람은 필자보다 젊은 세대에 속하는 강원돈이다. 평소 타고난 집중력과 왕성한 글쓰기로 1980년대 후반기 3-4년간에 무려 30여 편의 무게 있는 논문을 발표했는데, 그 논문들의 일부가 자신의 신학적 화두인 {물(物)의 신학}이라는 매우 이색적인 이름으로 출판됐다.

그는 이 책의 머릿말에서 자신의 물의 신학을, "1980년대 민중 주체 변혁운동에 동참한 한국 기독교인들의 경험을 신학적으로 성찰하고, 한국 기독교 운동의 신학사상적 요구에 부응하고자 한 작은 시도"라고 했다. 그는 또한 자신의 '물의 신학'이 "유물론의 합리적 핵심을 비판적으로 재구성하여 그것을 기독교 신앙전통의 합리적 핵심과 통일시키는 새로운 신앙의 언어"를 개발하는 데 목적이 있다고 밝히고, "이 신앙의 언어는 역사의 진보적 이익을 실현하고자 하는 기독교인들의 실천에 의해서 검증받아야 한다"고 하면서, "우리 시대 최고 최대의 과제인 민족통일을 성취하고 진보적인 새 공동체를 형성하는 데 필요한 신학적 언어를 개발하고 구체적 대안을 마련하는 데까지 나가야 한다"고 강한 실천적 의지를 토로한다.

강원돈의 물의 신학은, 한편으로는 그의 난삽한 문체 때문에, 다른 편에서는 그가 받고 있었던 '유물론적 혐의' 때문에 정확하게 이해되지도 온당하게 평가되지도 못했다. 그러나 강원돈의 논문들을 선입견 없이 성실하게 읽는 독자라면, 그의 글들이 '신학과 정치경제학의 결합'이라든지 '물질적 세계관과 신앙의 한 종합' 등, 실험의 냄새가 짙은 언어들의 과용에도 불구하고, '사회과학의 시대'였던 1980년대의 문제의식과 신학적 과제에 가장 치열하게 대결했던 드물게 역량 있는 신학연구자의 가열찬 작업의 성과였음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1980년대 한국 민중신학계가 그의 '물의 신학' 정도의 연구 성과물 조차 산출하지 못했더라면, '유물론'과 '맑스주의적 사회과학'이 사회운동이론으로서 거의 지배적이었던 한 시대에 대한 신학의 대응으로서는 얼마나 가난하고 부끄러웠을 것인가.

3. 민중교회운동

3.1. 민중교회운동은 1980년대 한국 그리스도교 운동사에서 가장 주목되는 하나의 흐름이었다. 민중교회는 민중들이 다니는 교회이고, 가난한 밑바닥 사람들이 다닐 수 있는 교회다. 그러나 지나치게 상식적인 이 말풀이는 한국 그리스도교회의 한 단면을 날카롭게 드러낸다. 즉, 한국사회에는 교회는 엄청나게 많고 흔해서 이미 '포화상태'를 넘어섰지만, 가난한 밑바닥 사람들이 다닐 수 있는 교회는 턱없이 부족한 것이 현실이라는 것이다. 한국 교회의 일반적 추세인 양적 성장주의 목회는 가난한 밑바닥 사람들보다는 헌금과 여가시간을 교회에 바칠 수 있고 교회의 성장에 기여할 수 있는 중간층 이상의 사람들을 위주로 하는 목회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예 '민중교회'라고 밝힘으로써 부자들은 저절로 발길을 돌리게 되는 반면, 가난한 사람들은 편안한 마음으로 다닐 수 있는 교회를 만들자는 생각이었다고 소박하게 말할 수 있다.

한국에서 민중교회의 효시가 된 것은, 1970년 전태일 분신 사건에서 받은 충격으로 시작된 '수도권 특수선교 위원회' 활동의 일환으로, 판자촌 빈민가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목회자들에 의해 자연스럽게 생기게 된 몇몇 교회들이었다. 성남주민교회, 동월교회, 청계천 뚝방교회, 사랑방교회 등(모두 한국기독교장로회 소속)이었는데 이 교회들은 주로 도시빈민 선교를 목표로 했다. 노동자계층을 선교대상으로 설정한 최초의 교회는 1977년에 시작된 신명교회였다. 그러나 당시에는 아직 민중교회라는 개념은 없었다.

민중이라는 말을 명확히 의식하면서 몇몇 목회자들이 민중교회를 시작한 것은 1980년대에 들어와서였는데, 이것은 1980년 광주의 충격이 가져온 이른바 '1980년대적 현상'의 하나였다. 민중교회를 시작한 목회자들은 1980년대초 이런 저런 사건에 연루되어 대학을 제적당했거나 감옥 경험을 했던 사람들로, 이들은 한국기독교장로회 선교교육원 비정규 신학과정에서 당시 해직교수였던 서남동, 안병무로부터 민중신학 교육을 받고 목회자가 된 사람들이었다. 목회자로서의 이들의 특징은, 1980년대 대학생운동권 출신이라는 것, 따라서 사회과학적 인식을 가지고 선교에 임했다는 점, 주로 노동자계급을 선교대상으로 하는 교회라는 개념으로 민중교회를 이해하고 있었다는 것, 민중교회를 단지 그리스도교 선교라는 차원에서만 이해하지 않고 전체 '민족민주변혁운동'에 복무하는 '교회운동'으로 이해하고 있었다는 것 등을 들 수 있다.

3.2. 민중교회들은 1985년 1월부터 민중교회 운동 조직화 작업에 착수하여 4월에 '한국 민중교회 선교협의회'(약칭, 민교협)을 결성하고, 기본이념으로 ㉠ 민중선교 운동은 노동자, 빈민, 농민 선교운동이다; ㉡ 민중선교 운동은 민중신학에 기초한 실천운동이다; ㉢ 민중선교 운동은 사회운동에 있어서 대중노선에 합류한다 등, 3개항을 정하고, 그 실천과제를 ① 노동교회를 많이 개척한다; ② 간부양성에 힘쓴다; ③ 재원을 축적한다; ④ 그리스도교 운동 내의 다른 세력과 연대한다; ⑤ 사회운동 내의 다른 세력과 연대한다, 라고 규정했다. 1986년에 조직의 명칭을 '한국기독교장로회 민중교회운동협의회'로 바꾸었다. 즉 '한국'을 '한국기독교장로회'로 축소했고 '선교'를 '교회운동'으로 바꾼 것인데, 이것은 그리스도교 운동이 교회대중과 연결되지 못하고 교회 밖에서 이루어져온 것에 대한 반성과 함께 이제부터는 교회 평신도 대중을 중심한 교회운동을 그리스도교 운동의 본령으로 삼겠다는 뜻을 분명히 한 것이다.

한국 민중교회의 역사의 산 증인이자 민중교회 목회자로서 민중교회운동에 대한 원숙한 이해를 보여주는 노창식(신명교회 목사)은 민중교회의 역사를 다음과 같이 세 시기로 나누어 설명한다.

제1기는 초창기에서 1987년까지다. 1987년이라면 6월 민주화 대투쟁과 7, 8월 노동자 대투쟁이 있었던 해다. 이 투쟁의 성과로 노동자들은 제한적이나마 합법적 운동공간을 획득하게 된다. 따라서 그 이전까지 그리스도교가 갖는 합법적 성격 때문에 지역 노동자들에게 소중한 활동공간이 되어 주었던 민중교회는 이제 그 효용성이 상대적으로 줄어들게 된다. 제2기는 1988년부터 1990년까지인데, 이 시기는 민중교회가 교회로서의 자기 정체성을 정비해 나가면서 '운동'이라는 말에 눌리고 가려져 제 자리를 찾지 못했던 '신앙'이라는 말에 제자리를 찾아주고 이른바 '운동성과 교회성의 균형'을 취하게 되는 시기였다. 제3기는 1991년부터 현재까지다. 제2기와 제3기를 이렇게 시기구분하는 것은 어떤 객관적 기준에 근거한 것이라기보다는 다시 한 번 새로운 각오로 출발을 다짐했다는 주관성에 근거한 것이라 한다.

제1기에 있어서 민중교회 할동의 특징은 '지역 노동운동의 외곽으로서의 역할'이었다고 할 수 있다. 앞에서 잠시 언급했지만 교회라는 합법적 공간이 갖는 장점 때문에 수많은 노동운동 활동가들이 민중교회로 몰려들었다. 이 시기 민중교회는 교회의 주된 역할을 지역 노동운동 지원으로 규정해 놓고 있었기 때문에 노동 상담, 노동자 교육, 노동자를 위한 문화 교양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했고, 노동자들은 이런 프로그램을 매개로 교회에 나와 함께 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주일 예배에는 참석자가 적어도, 주중에는 늘 노동자들로 북적거렸던 것이 이 시기 대부분의 민중교회의 모습이었다."

이 무렵에는 교회 안에서 신앙이라는 말을 거의 입에 담지 않았다. 그렇게 된 원인은 대략 두 가지를 들 수 있다. 하나는, 민중교회에 출석하던 운동권의 이른바 의식분자들 사이에 종교적 현상의 부정적 측면에 대한 혐오감이 팽배해 있었음에 비해 종교의 긍정성에 대한 이해는 거의 없었기 때문이었다. 다른 하나는, 교회 성장에 대해 민중교회가 가지고 있었던 막연한 생각, 즉 운동의 일반적 임무를 다하면 교회는 저절로 성장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노동운동의 합법적 공간을 구해 교회를 찾았던 많은 사람들은 상황과 필요에 따라서는 교회를 빠져나갔기 때문에, 교회에 남는 사람은 언제나 소위 '신앙 있는' 소수의 사람들 뿐이었다. 결과적으로는 교회의 정체를 가져 왔다. 하느님 선교 신학의 잘못된 영향도 이런 현상에 어느 정도의 책임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민중교회 목회자들의 신앙과 목회 훈련 부족과 안이한 목회 태도, 그리스도교 전통과 문화에 대한 경직된 이해, 그리스도교 운동에 대한 비주체적 자세 등이 주된 원인이었다. 다만, 민중교회가 지역운동의 센터 역할을 했던 것은 이 시기 민중교회 활동의 소중한 성과였다.

제2기는, 제1기의 경험에서 서서히 떠오르기 시작한 '교회의 아이덴티티'와 '신앙'의 문제가 본격적으로 대두된 시기였다. 앞서 언급한대로, 1987년 6월 대투쟁과 7, 8월 노동자 대투쟁의 성과로 기층민중의 자주적 대중조직이 생겨나면서 운동 질서의 대대적인 개편이 일어났다. 즉 각 운동부문, 각 운동단체마다 자기의 고유한 대중이 누구인가를 확인하고 그 대중을 확보하여 그 기반 위에 자신의 조직을 꾸려나가게 된 것이다. 이런 경우에 한국사회의 모든 부문, 모든 영역에서 민중을 지원해 왔던 그리스도교 운동, 특히 기층민중 운동을 지원하던 민중교회의 경우 문제는 심각하였다. 노동자들은 자기네 노동운동조직으로 돌아가고 나면, 자신의 고유한 대중이란 교회에 남은 몇몇 '신앙 있는' 교인에 불과했던 것이다.

여기에서 생겨난 것이 '교회성'과 '운동성'이라는 문제제기였다. 이 문제를 둘러싼 치열한 논쟁은 민중교회를 한때 대혼란으로 몰아넣기까지 했다. 이 논쟁의 귀결은, "선교가 별 것인가, 기층민중 특히 노동자들이 교회를 합법공간으로 활용하는 것 자체가 교회의 선교가 아니겠는가"라고 하는 이른바 '조건할용론'적 사고를 가진 활동가들이 결국 교회를 떠나는 것으로, 그리고 민중교회는 '교회성과 운동성의 균형과 조화'라는 선교원리를 결론으로 가지게 되는 것으로 결착되었다. 한 민중교회 목회자의 경험담을 직접 들어보자.

그러나 문제는 여전히 남았다. 이 개념(교회성과 운동성의 조화)은 양자의 통일을 말하고는 있었지만 교회성과 운동성이라는 이분법적 도식을 씀으로써 실제로는 대립개념화하는 오류를 범했다. 과도기적 현상이라 할 수 있었다. 이러한 개념은 후에 '신앙과 실천'이라는 언어로 재정리되었다. '신앙과 실천'이라는 개념은 '운동'이라는 개념보다 훨씬 포괄적인 의미를 내포하면서도 운동이 신앙과 결코 분리될 수 없는 내적 관계에 있음을 나타내 준다. 이 개념은 교회성과 운동성이라는 편협하고 대립적인 갈등을 지양하고 통일적이면서도 보다 풍부한 해석을 가능하게 하는 개념으로 생각되었다. 그러나 한편 '교회성'의 내용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제시되지 못했기 때문에, 그저 예배에 전보다 열심히 참여하는 것 외에 별다른 변화를 가져오지 못했다. 다른 한편, '운동성'이라고 할 수 있는 영역에서도 여러 가지 문제가 나타났다. 운동성을 노동현장의 권리투쟁 활동이나 시위 참석으로만 이해할 뿐 그밖의 가치들에 대해서는 평가절하하는 경향이 일반적으로 나타났다. 그래서 머리만 큰 노동자가 되어 불성실한 생활, 경직된 사고, 편협하고 교만한 사고에 빠지는 경우를 흔히 볼 수 있게 되었다.

1991년부터 현재에 이르는 제3기는, 제2기에서 제기된 교회성과 신앙이라는 문제에 대한 성찰이 보다 깊어지면서 어느 정도 정착되는 시기다. 교회성이란 '하느님과의 내면적 관계로서의 신앙'이라는 인식에 도달하였고, 이러한 신앙의 형성을 위하여 성경공부와 기도생활 등에 이전과는 다른 역점이 주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인적 물적 기반은 여전히 취약할 뿐 개선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 이유를 고민하는 과정에서 또 하나 떠오른 문제는 '개교회의 성장'이라는 문제였다. 초창기의 민중교회는 민중교회들간의 연대사업에만 주력했을 뿐 개체 교회의 성장의 중요성에는 관심이 미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그런 관심 자체를 옳지 않은 것으로 여기는 분위기 마저 있었다. 그 배경에는 한국 그리스도교의 고질적 병폐인 개교회 성장 제일주의와 물량주의에 대한 강한 거부감과 비판의식, 그리고 민중교회는 '작은교회'여야 한다는 사고가 깔려 있었다. 그것은 한국의 기성교회들이 그 엄청난 교인수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기는 커녕 오히려 사회적 역기능을 해온 데 대한 정당한 비판의식이었다. 그러나 민중교회의 경우, 교인의 수가 늘어난다는 것은 하느님의 해방사업의 일꾼이 늘어난다는 것을 뜻하며 지역운동의 센터로서의 민중교회의 인적 물적 역량이 개선됨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한 예를 들어본다면, 민중교회의 목회자는 지역운동의 요구는 계속 늘어나서 시간에 쪼들리면서도 교회 건물 임대료와 가족생활비 마련을 위해 일용공으로 취직하거나 새벽에 신문을 돌리거나 세차를 하는 등 문자 그대로 악전고투하고 있었다. 만일 민중교회의 교인수가 매교회당 최소한 100명 정도로 안정적으로 확보된다면 교회의 재정문제가 해결될 뿐만 아니라, 그들이 훈련을 받아 지역운동의 일꾼이 될 때 교회는 운동의 진지(陣地) 내지 교두보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편 교인수의 증가를 추구하는 데는 언제나 따라 다니는 위험과 유혹이 있으므로, 이 문제를 고려함에 있어서는 민중교회에 있어서 민주적이고 민중적인 교회 구조가 담보되어야 하며, 신앙고백과 신학에 있어서의 '민중적 순결성'이 요구되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바로 이런 점에서 민중교회 목회자들과 민중신학자들의 튼튼한 연대와 공동작업이 요청된다.

4. 민중신학의 자기성찰과 전망

4.1. 1980년대에서 바라본 1970년대 민중신학

필자는 위에서 1980년대에 이루어진 이른바 '제2세대 민중신학'의 문제제기들과 논의들, 그리고 다소의 성과를 새삼 돌이켜 점검해 보면서, 스스로 자괴감을 갖는다. 1980년대 제2세대 민중신학의 '가난함과 남루'를 확인했기 때문이다. 서남동, 안병무가 이루어 놓은 1970년대 민중신학의 화려하고 눈부신 보고 속을 한바퀴 순례하고 나온 참이어서 이 자괴감은 더 하다. 그러나 한편, 이 확인은 실로 가슴뿌듯한 감격이다. 우리는 1970년대에 민중신학이라고 하는 위대한 사상-문화적 창조물을 산출하였다. 민중신학은 단지 한국 그리스도교의 신학적 자산일 뿐만 아니라 우리 민족 문화사의 한 빛나는 창조물로서 기록될 것이다.

이번에 필자는 이 책을 쓰느라고 1970년대 민중신학 속을 깊은 곳까지 탐사해 보았다. 그 결과, 과연 "민중신학은 1995년 지금에도 너무나 푸르고 싱싱하구나!"라는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민중신학의 이 '푸르름'의 원천은 두 가지라고 생각된다. 하나는 성서 자체의 창조적 생산력이다. 다른 하나는 한국 민중이 이룩한 1970년대의 위대함이라 생각한다. 최근 한국신학계 일각이 민중신학의 치명적 약점 내지 고질로 낙인찍은 '민중의 메시아성'이야말로 바로 성서의 창조적 생산력의 발로이고 '1970년대'의 민중적 통찰로서 우리 모두가 기쁜 마음으로 확인해야 할 민중신학의 핵심 포인트라고 나는 확신한다. 메시아의 광맥은 구ㅗ신약성서, 곧 고대 이스라엘의 역사만이 아니고 한국 민중의 유구한 역사에도 풍부하게 매장되어 있었던 것이며, 그 광맥은 성서와 한국 민중사를 관통하여 우리의 삶 한 가운데로 흐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오늘 이 땅에서 민중사건의 모습으로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을 증언한 언어가 서남동의 합류고, 안병무의 사건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또한 이 두 신학자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들의 신학적 상상력도 뛰어났지만, 그들이 1970년대의 현장에 대하여 순결하다 할 정도의 감수성을 가지고 현장과의 팽팽하게 긴장된 교감을 가졌던 것, 그래서 얻은 정보를 신학화하는 일에 혼신의 힘을 쏟아부은 결과가 민중신학이라는 탐스러운 열매로 결실한 것이다. 이 사실이 1970년대 민중신학으로부터 우리가 확인하고 배워야 할 가장 중요한 점이다.

4.2. 비평의 올바른 관점

특이한 현상은, 최근 민중신학에 던져지는 한국 신학계의 비판은 과거 1970년대나 1980년대처럼 안기부 측이나 그리스도교의 민중신학 반대진영 또는 보수 기성교단으로부터가 아니라 민중신학회 회원으로 있는 신학자나 연구자들로부터 발해진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민중신학의 발전과 쇄신을 위한 이른바 '겸허한' 자기비판인가? 하지만 그렇게 생각되지 않는다. 필자의 판단으로는, 진정한 의도야 어디있든지 간에 그들의 비판은 민중신학의 우경화 또는 '교회신학'화의 요구로 귀결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시류를 타고 민중신학의 이런저런 허점이나 모순을 지적하는 것이나, 교권 또는 교회의 이해 관계에 경도된 눈으로 민중신학을 바라보며 훈계하는 것은 '민중신학하기'(doing minjung theology)와는 너무나도 동떨어진 태도다. 1990년대에 들어와 소련과 동구 사회주의권의 몰락에 따른 한국사회와 교회의 보수화 기류에 편승한 '민중신학 약점 들추기'는 차라리 부끄러운 치부여서 덮어두고 싶다.

1992년 '한국 민중신학회' 창립선언문의 다음 구절은 오늘의 시점에서 읽을 때, 그런 비판들에 대한 대응으로는 오히려 너무 온건하고 소극적이 아니었던가 반성된다.

1990년대 들어와 소련과 동구 사회주의권의 몰락에 따른 세계사의 일대 지각변동은 민중신학의 터전인 한반도에 크게 영향을 미치고 있음이 사실이다. 입장과 관점에 따라서는 민중신학이 이미 시효가 지난 신학이며 1990년대의 변화된 상황이 제기하는 신학적 과제들을 감당하기에는 걸맞지 않은 낡은 신학이라고 치부해 버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평가와 판단은 지나치게 안이하고 무책임한 속단이다.

우리가 이 시점에서 새삼 확인하는 바는, 우리 사회가 변함없이 외세의 정치 경제 군사적 지배 아래 놓여 있어 민족과 민중의 자주적 발전이 침해당하고 있고, 외세에 영합하는 반민주적 정치권력의 영속적 지배가 사회 제분야의 참된 민주화를 지연시키고 있으며,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통한 민족 역량의 증진과 평화구조의 정착이 내외의 반민족 반평화 세력에 의해 저지되고 있는 엄중한 현실이다. 일제 36년의 종살이에서 놓여났던 반세기 전의 그때에 우리 민족 민중의 어깨에 짊어지워졌던 자주 민주 민족통일의 과제가 1990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어깨를 더 한층 무겁게 누르고 있는 것이다. 민족 민중적 현실의 어느 문제치고 민중신학의 과제가 아닌 것이 없으며, 1990년대의 변화된 상황과 조건들은 민중신학의 페기가 아니라 보다 심화된 전개를 요구할 따름이다.

그 뿐만 아니라, 민중신학은 교회의 쇄신이라는 지난한 숙제를 안고 있다. 한국의 대다수 교회는 오랜 선교 역사를 통하여 주로 미국 선교사들이 심어준 '근본주의' 교리에 무비판적으로 경도됨으로써 비성서적인 교조와 이데올로기로 교회 대중을 마비시켜 현실 사회문제에 대해 무기력하게 만드는 부정적 기능을 수행해 왔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민중신학은 그 태동기부터 이러한 경향에 대하여 비판적 입장을 명백히 하였는 바, 이는 저 유신시대의 군부독재에 대한 반대와 더불어 민중신학자들이 일관되게 취해온 기본 입장이라 할 것이다.

우리는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간직한 진실한 신앙인으로 바로 설수 있고자 하며, 교회 안팎에서 눈떠 일어나는 민중의 의식과 행동을 억압하고 대중을 세뇌하고 잠재워 탈역사화하고 비주체화하는 유형무형의 온갖 폭력에 맞서고자 한다.

어떤 신학을 그 신학이 산출된 시대의 역사적 사회적 조건들에서 분리시켜 평가하는 것은 상식에도 어긋나는 일이다. 특히 민중신학처럼, 단지 신학자 누구누구의 지적인 작업 성과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모태가 되었던 한 위대한 역사적 시대를 토양으로 하여, 그 시대에 수난당하고 싸우고 죽어갔던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을 밑거름으로 자라난 신학의 경우에는 더욱 그러하다. 민중신학을 말하려거든 먼저 신학을 말하기 전에 역사를 말해야 한다. 나는 근자에, 이제는 민중신학을 비판하기로 작정했노라고, 성역은 없노라고 공언하고 나선 몇몇 사람들에게 충언하고 싶다. 1970년대를 다시 한 번 공부해 보라고. 그 시대가 어떠한 시대였기에 그런 성서 이해가 가능했고 그런 신학적 상상력과 창조성의 분출이 가능했는지 알아보라고. "그 쯤은 나도 이미 알고 있다." 이것이 만약에 그네들의 답변이라면, 나는 다시 고언(苦言)하지 않을 수 없다. 당신의 역사적 사고는 너무나도 비신학적이라고. 그런 빈약한 신학적 상상력으로는 '1970년대의 민중신학'을 이해하기는 아마 어려울 것이라고.

최근에 접한 김명수의 서평 [민중 메시아론 비판]은 필자의 논지와 일치하며 필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매우 설득력 있는 논리로 제시해 주고 있으므로 여기에 그 일부를 인용한다.

어떤 신학을 막론하고 그 시대의 한계성을 벗어날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모든 신학은 상대성을 지니고 있다. ㅗㅗㅗ 신학은 시공을 초월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시대와 접함으로써, 그리고 자기 목소리로 자기 시대를 진솔하게 증언함으로써, 진정한 의미의 보편성을 획득할 수 있을 것이다. 서구 정통주의 신학 뿐만 아니라, 민중신학을 포함하여 제3세계 그리스도교 영역에서 전개되고 있는 신학적 흐름도 여기에서 예외일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어떤 신학을 비판할 때, 이러한 점들이 고려되지 않으면 안된다. 한 신학자가 서 있는 삶의 정황, 그리고 그 신학이 생산된 역사적 조건(Kontext)과 유리시켜 그의 신학을 비판하는 일은 바람직스럽지 못하다.

한 신학을 적어도 학문적 영역에서 비판의 대상으로 삼을 때에는 몇 가지 유의해야 할 점들이 있다.

첫째로, 주관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지만, 비평에는 객관성을 유지해야 한다. 객관성은 학문이 지녀야 할 최소한의 요건이다. 이를 위해서 특히 신약성서학 분야에서는 역사비평학적 고찰이 필수적으로 수반되어야 한다.

둘째로, 도그마에서 해방되어야 한다. 신학이 특정한 도그마에 사로잡혀 시와 비를 가리려 한다면, 그것은 더 이상 학문이기를 포기하는 행위다. 비평자를 결코 심판자로 세워서는 안된다.

셋째로, 신학적 비평은 해석학적 차원에서 진행되어야 한다. 신학의 과제는 텍스트의 진정성과 허위성을 가려내는 작업이 아니다(만일 역사비평학의 본질을 이런 식으로 이해한다면 그것은 무지의 소치다). 그것은 각 텍스트(전승과 편집)가 그 시대에서 어떠한 신학적 의미(메시지)를 가지느냐를 탐구하고 해석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 신학이 생산된 공동체의 역사적 콘텍스트를 비평에서 고려하지 않으면 안된다.

넷째로, 모든 신학은 신앙고백을 전제하고 있다. 민중신학도 예외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민중신학에 신앙고백적 차원이 있는가 없는가를 흑백 이원론으로 묻기 보다는, 어떤 신앙고백이냐를 역사적 콘텍스트에서 물어야 한다.

다섯째로, 신학은 실용주의적 관점에서 평가되어서는 안된다. 신학은 교회(민중) 현장(프락시스)과 긴밀한 관계를 가져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현장에 매이거나 종속되어서는 안된다. 신학은 현장로부터 상대적 자율성을 지닐 수 있어야 한다.

여섯째로, 신학은 오늘의 지평에서가 아니라 그 신학을 생산한 시대의 지평에서 평가되어야 한다. ㅗㅗㅗ 1970년대 민중신학은 그 시대적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였다. 오늘의 상황에 비추어 단선적으로 비판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여기서 제시된 '비평의 원칙들'에 비추어 볼 때, '1970년대 민중신학'이 당대의 한 민중사상으로서 뿐만이 아니라 그리스도교신학으로서도 '진정한 의미의 보편성'을 획득하고 있다는 것은 명백해졌으리라. '민중의 메시아성'이라는 언어로 표현된 1970년대 민중신학의 그리스도론이 전통적인 속죄론적 그리스도론과 맞아떨어지지 않는다고 해서 문제 삼는 입장은 이제 더 이상 신학적으로는 설 자리를 잃게 되었다. 교리재판이 아니고 신학적 비평이라면, "민중신학에 신앙고백적 차원이 있는가 없는가를 흑백이원론으로 묻기보다는, 어떤 신앙고백이냐를 역사적 콘텍스트에서 물어야 하기" 때문이다.

필자의 판단으로는, '어떤 신앙고백이냐'보다는 '어떤 그리스도론이냐'가 신학적 질문으로서는 더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이 점과 관련해서는 1980년대 민중신학자에 속하는 김창락의 논문 [이야기 신학으로서의 민중신학]이 적절한 해명을 제공한다. 그는, 마르코복음서 저자는 왜 복음서를 저술했으며, '그의 독자들을 어떤 그리스도론으로 인도하려 했는가?'라는 질문에서 논의를 시작한다. 먼저 그의 결론부터 앞당기면, "마르코복음서 저자가 예수에 관한 수많은 이야기들을 편집하여 하나의 이야기 책을 저술했던 중요한 동기는 그 당시에 팽배했던 관념적인 그리스도론 또는 구속론을 극복하기 위해서였다"라는 것이다. 그 근거를 마르코복음 1장 24절의 예수의 침묵명령을 예로 들어 설명한다. "더러운 귀신이 예수를 향해서 '하느님의 거룩한 분'이라고 불렀을 때, 예수는 침묵명령을 내렸다. 이것을 전통적인 서구신학은 '메시아의 비밀'이라는 신학적 동기로 해석해왔다. 세례자 요한이 예수에 대해서 이미 증언했고, 예수가 세례를 받을 때에 하늘로부터 하느님의 아들임을 선언하는 소리가 이미 있었는데 침묵명령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ㅗㅗㅗ 예수가 침묵 명령을 내린 것은 이 칭호를 거부하거나 숨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적대자의 입에 담긴 그리스도론적 칭호가 무의미한 혀놀림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지적하기 위해서였다고 할 수 있다." 그는 또한, 예수가 8장 27절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제자들에게 자기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고 물은 것은, 지금까지의 모든 경험들을 근거로 해서 판단해 보라는 촉구의 뜻이었다고 해석한다. 베드로의 메시아 고백은 옳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실제의 경험에서 귀납적으로 끌어낸 결론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음 순간, 예수의 수난이 그의 메시아됨과 부합할 수 없다고 베드로가 생각했을 때, 그의 메시아 고백은 무의한 말로 변하고만 것이라고 김창락은 해석한다.

김창락은, 마르코복음서의 어떤 메시지는, 그것이 그리스도론에 관한 것이든 속죄론에 관한 것이든 또는 부활에 관한 것이든, 마르코복음서의 예수 이야기 전체가 의도하는 바에 비추어 그 의미가 밝혀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우리가 그리스도론, 구속론, 종말론 같은 신학적 명제들을 이해할 때는 반드시 그러한 명제들이 기반하고 있는 역사적인 사정들과 관련해서 보아야만 그 의미가 올바르게 드러난다"는 것을 해석학적 명제로서 제시한다.

마르코복음 16장 1-8절에서 저자는 왜, 세 여인들이 흰 옷입은 청년으로부터 예수가 부활했다는 그토록 중요하고 기쁜 소식을 듣고서도 기뻐하기는커녕 오히려 두려워했고, 그 메시지를 아무에게도 전달하지 않았다고 말하는가? 김창락은 이에 대한 답을 위의 해석학적 명제에 따라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이 물음은 여인들의 인간성 속에서 어떤 심리적인 이유를 찾아 답변해서는 안된다, 오히려 마르코복음서의 예수 이야기 전체가 의도하는 바에 비추어 그 이유가 밝혀져야 한다. 예수의 부활에 관한 메시지는 그것이 아무리 교의학적으로 옳고 중요하다 하더라도 그것 자체로서는 무의미하다는 것을 마르코복음서는 말하려 한다. 예수의 부활에 관한 메시지가 참으로 의미 있는 것이 되기 이해서는 갈릴래아로 가서 부활한 예수를 직접 만나야 한다. 갈릴래아로 가야 한다는 것은 예수가 지금까지 갈릴래아에서 벌여온 하느님나라 운동을 계승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부활한 예수를 만나는 사건은 예수의 하느님나라 운동을 실천하는 현장에서, 이것은 오직 그 자리에서만 일어난다. 예수에 대한 그리스도론적 신앙고백이 내용적으로 옳다 하더라도 그것 자체로서는 무의미하며 그것이 참으로 의미 있는 고백이 되는 것은 십자가를 지고 그의 뒤를 따르는 제자직의 수행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사실과도 상통한다.

민중의 해방투쟁의 현장에서 마주치는 그 분이 부활한 예수라는 사실은 무엇으로 확인할 수 있는가? 도마가 손바닥에 박혀 있는 못자국을 보고 예수임을 확인했다는 보도는 매우 상징적이다. 현재적 예수의 정체는 마르코복음서의 이야기가 증언하는 대로 민중해방자와 수난의 종으로서의 예수상을 떠나서는 확인되지 않는다. 그리고 현재 벌어지고 있는 민중해방투쟁의 현장에서 부활한 예수를 만나지 않고서는 그리스도인이 알고 있는 예수는 과거의 인물에 불과하다.

김명수는 민중신학연구소의 {민중은 메시아인가?}에 실린, 제2세대 민중신학자들의 민중메시아론에 대한 비판은 주로 서구 전통주의 신학의 그리스도론에 의존하고 있다고 하면서, "새 술은 새 부대를 필요로 하듯이, 새로운 시대에 요구되는 그리스도론의 정립이 요구된다"는 함축적인 말로 결론을 맺는다.

4.3. 민중교회의 선교경험으로부터 본 민중신학

다음으로, 필자는 민중교회의 선교경험에서 나온 민중신학 비판을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검토하고자 한다. 앞서 말한 {민중은 메시아인가}라는 책 제2부에는 [민중교회 현황 및 의식]이라는 제목 아래 동연구소가 실시한 민중교회에 관한 설문조사 결과가 수록되어 있다. 또한 그 조사결과에 관한 좌담회의 내용도 게재되어 있다. 이 좌담회에서는 설문조사 결과에 나타난 민중교회 목회자들과 신도들의 '민중신학'에 대한 반응을 분석하고 있다.

필자는 좌담에 참석한 박재순의 발언에 특히 유의하였다. 필자는 평소에 그와는 민중신학에 관한 견해를 상당히 달리하면서도 그의 문제제기로부터 시대의 변화와 민중신학에 대한 민중신학자들의 입장과 사고의 변화를 읽을 수 있어 배우는 바가 크기 때문이다. 우선 그의 발언 중에서 필자의 문제의식과 관련된 부분만을 간추려 제시한다. 그런 다음 '민중교회와 민중신학'이라는 쟁점에 대한 필자 자신의 견해를 제시하겠다. 이를 통해, 이 문제를 둘러싼 민중신학 진영 내부의 현격한 견해 차이를 들춰낼 수 있고, 민중신학의 자기 성찰과 금후의 과제와 관련한 전망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박재순의 견해】

* 민중신학은 1990년대 들어와 분위기가 달라졌는데, 특히 중요한 차이는 대안으로 제시되었던 사회주의 체제가 무너져버렸다는 것이다. 지난 20년 동안에 한국 자본주의 사회가 나름대로 괄목할 발전을 이룩한 결과 자본주의 문화가 민중을 장악하고 있다.

* 사회의 뒤안길에 있는 민중의 삶은 외면되고 있다.

* 하느님나라 선교 입장에서 볼 때,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는 민중문제를 다 해결할 수 없다는 깨달음이 필요하다.

* 1970년대의 전태일이 1990년대 민중의 전형은 아니다. 1990년대 민중은 유린당하기만 하는 민중이 아니라 저항할만한 역량이 충분히 성장한 민중이다. 경제성장의 성과물이 민중에게 어느 정도 보편화되었고, 노동자로 생활하면서도 상당히 많은 민중이 생활을 꾸려나갈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 오늘의 민중들은 반체제적인 성격과 체제에 적응하려는 시민적인 성격을 공유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시민은 체제내에서 자기 삶을 실현하려고 하는, 즉 체제의 주인이 되려 하는 주체적 존재를 뜻한다. 이제 시민의 개념도 새롭게 규정되어야 한다.

* 반체제적인 접근만 가지고는 민중신학, 민중교회를 바로 세울 수 없다. 이 체제가 가지고 있는 가능성을 충분히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 물론 체제를 넘어서는 측면이 있어야 하지만.

* 법 테두리 안에서 체제 안에서 가능성이 있다면, 그것을 적극 활용하자는 말이다. 그런 경향들이 주로 시민에게 있다는 말이다. 그런 점에서 민중 개념을 확대할 수 있지 않을까.

* 민중교회는 신앙적인 운동을 지향해야 한다. 영성과 공동체성을 회복하는 신앙적 운동이 필요하다.

* 민중목회자들이 민중신학에 요구하는 것, 아쉽다고 생각하는 것은 개인영혼에 대한 관심, 기성교회와의 관계 정립, 목회를 도와주는 실천신학적인 지원 등이다.

* 전통적인 교리를 민중신학적으로 재해석해야 한다. 예수를 신으로 볼 것이냐, 인간으로 볼 것이냐는 교리와 신앙고백에 있어서 핵심적인 문제다.

* 설문조사 결과를 보면, 민중교회 교인들은 민중의 죄성, 개인영혼, 하느님에 의한 구원 등에 관심이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민중과 예수를 똑같이 메시아로 보는 관점은 일반적으로 민중교회에서 받아들여지고 있지 않다고 볼 수 있다.

* 설문에서 '민중신학에 바라는 목회자의 의견'이라는 문항을보면, 첫째는 민중교회 목회를 하는 데에 필요한 실천적인 신학이 민중신학으로부터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 목회자들의 첫번째 불만인 것 같다. 민중신학이 예배와 교회운영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민중신학자들이 민중교회의 요구와는 맞지 않는 딴소리를 하는 것 같다는 것이다. 이것은 민중신학자들의 삶이 현장과 유리되어 있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이다. 민중교회의 요구는, 민중신학이 현장이 요구하는 신학적인 자료들을 제공하라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민중신학자들은 현장 경험을 위해 주일날 민중교회에 출석해야 한다고 많은 민중교회 목회자들은 요구하고 있는 것 같다. 나는 기본적으로 여기에 동의한다. 민중신학자들은 가능한 한 민중교회 교인이 되어 민중교회를 체험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 설문에서 보면, 민중교회 목회자들 자신들이 개인영혼 강조, 예배에서의 하느님 체험 강조, 전통신학 보완, 목회 전문성 등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나와 있다. 이로 미루어 보면, 민중교회의 목표 중 하나가 올바른 교회상의 정립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제 이에 대한 필자 자신의 견해를, 마치 그 좌담회에 참석해서 발언 한 것과 같은 분위기로(brain storming 방식으로) 아래에 제시해 본다.

【박성준의 견해】

* 민중교회의 경험은 그 자체로서 소중한 것이지만, 민중교회의 경험에서 나온 판단이라고 해서 다 옳은 것은 아니다. 설사 민중교회의 경험에서 도출된 어떤 견해가 옳은 것일 경우에도, 민중신학의 견해는 그것과 다를 수 있다. 민중교회의 경험에 비추어 보아 맞지 않으니까 오류다, 고쳐라, 라고 하는 것은 옳지 않다. 민중교회의 경험이라 하더라도 금과옥조(金科玉條)일 수 없으며, 그것이 민중신학의 법정일 수 없다. 민중신학도 민중교회도 다 형성 과정에 있는 것이므로 심판자의 위치에 있지 않고 서로 협력하고 배우는 관계일 뿐이다.

* 민중신학은 교회에 관해 나름대로의 견해를 가지고 있다. 무릇 모든 신학의 임무가 그러해야 하지만, 민중신학은 어느 편인가 하면 현실 교회를 비판하는 쪽이다. 따라서 교회적 실천경험과 민중신학의 교회 이해가 서로 맞지 않는 경우가 있는 것은 당연하다. 민중신학은 크게 보아 '하느님 선교'신학에 입각하고 있다. 서남동은 '합류'를 하느님의 선교로 보았고 신학의 임무는 하느님 자신이 전개하는 선교 활동(일, 사건)을 해석하고 증언하는 일이라고 했다. 민중신학을 판단할 때는 민중교회의 선교만을 기준으로 해서 판단해서는 안된다. 1990년대 한국 민중교회의 선교는 1990년대 하느님의 선교의 한 부분, 그것도 교회를 통한 하느님 선교의 일부일 뿐이다. 더구나 민중교회 선교는 하느님의 교회적 선교의 전부가 아니라, 그 일부일 뿐이다.

* 1990년대 민중신학의 현장은 어디인가? 민중신학은 1970, 80년대에 민주화 투쟁의 장이라는 현장이 있었다. 1970년대에는 한국사회 그 자체가 통째로 '교회'였다. 하느님의 영은 교회 위에 머물고 은혜와 영을 쏟아부워 주고 있었다. 한국사회 자체가 거대한 '민중교회'였다. 당시 '하느님 선교' 신학은 책 속의 선교이론이 아니었다. 산 현실이었고 생활이었다.

1990년대 민중신학은 민중을 놓쳐버렸고 민중을 따라가신 하느님도 놓쳐버린 것이 아닌가? 현장을 갖지 못한 신학자들의 콤플렉스! 오죽하면 민중교회 목회자들의 입에서 "민중신학자들 뭣해? 주일날 민중교회라도 나오지. 민중신학자 행세는 하면서ㅗㅗㅗ." 이런 비꼬임 섞인 불평이 나오는 것일까.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1990년대 민중신학의 현장이 민중교회라는 생각은 옳지 않다. 1970년대의 역사적, 사회적 과제는 근본적으로는 변함 없이 1995년 오늘에도 민중신학의 과제다. 따라서 민중신학의 현장은 민중교회에만 한정될 수는 없다.

서남동, 안병무 신학의 장점은 민중의 역사적, 시대적 과제를 그리스도교 신학 속으로 대담하게 접수했다는 점에 있다. 민주화, 인권, 한국교회의 개혁, 반파시즘, 군축, 평화통일 등은 1995년 오늘에도 민중신학의 과제임에는 변함이 없다. 안병무의 '민족적 민중, 민중적 민족'이라는 한국 민족ㅗ민중 이해는 한맺힌 민족ㅗ민중의 고난에 찬 역사에 대한 이해가 그 바탕에 깔려 있다. 다른 나라 사람들, 특히 제1세계 사람들은 이 점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다(단, 흑인신학은 민중신학을 쉽게 이해한다고 한다). 민중신학은 민족적 과제와 민중적 과제가 중첩된 한국 민중의 역사를 끌어 안고 신학을 하는 것이다.

* 민중신학은 1970에 비롯되어, 1980년대에 계승된 과제에 더하여 1990년대 한국사회의 변화에 따른 새로운 1990년대적 문제들, 예를 들어 외국인 노동자 문제, 시민운동과의 관계 문제, 환경ㅗ교육, 여성ㅗ장애인ㅗ노인 문제 등에도 섬세한 시선을 돌리지 않으면 안된다. 한국에 노동자를 보내는 아시아 사회와의 연관 속에서 '아시아 민중'이라는 민중 개념의 확대가 요구된다.

* 민중의 신학이 있듯이 '시민의 신학'이란 것이 있다면, 그것은 어떤 신학일까? 비민중 계층에게 그리스도교의 복음은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일까? '선한 사마리아인의 신학'은 성립할 수 없는 것인가? '민중의 신학'과 '강도의 신학' 간의 양극 대치상태는 계속되어야 하는가? 시민운동과의 연대가 가능하려면 민중신학에 있어서 해방과 구원의 변증법이 요청되는 것은 아닐까? 한국 자본주의의 가능성에 대한 이해가 1970년대 민중신학에는 명함을 내밀 수도 없었다. 그 때는 흑백논리 밖에 없었다. 시민의 가능성을 적극적으로 평가하고, 시민의 개념 정의도 새롭게 해야 한다는 박재순의 발언은 새겨 볼 필요가 있다.

* 이 점과 함께 민중신학은 이제부터 시민운동의 시대, 소위 시민사회에서의 민중의 자리매김을 옳게 해내지 않으면 안된다. 그에 따라 구체적 삶의 현실에서 일어나는 문제들을 소재로 한 민중신학의 각론을 전개하는 것도 이제부터의 과제다. 그런데 그것을 부르주아적 관점이 아닌 민중적 관점에서 할 수 있어야 한다. 시민사회에서 민중문제가 시민문제와 연결되고 얽혀 있는 것은 당연하다. 따라서 민중문제를 풀려면 시민운동과 연결을 가지고 연대해야 하는 것도 당연하다(환경문제, 교육문제, 교통문제, 핵발전소 문제 등은 그 예다.). 그러나 시민운동과의 연대는 어디까지나 민중적 관점에서 해야 한다.

* 오직 민중, 민중교회라는 경험의 잣대로만 세계를 판단할 때의 위험은 없는 것일까. 민중신학이 불과 1970, 80년대라는 상대적으로 짧은 기간의 경험이라는 점, 실험적인 성격, 형성 과정 중에 있고 현재진행형의 신학이라는 것을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민중교회도 민중신학도 자신의 경험을 소중히 여기면서도 세계 이해의 지평을 넓혀야 한다. 양자가 경계해야 할 것은, 스스로 좁은 경험의 울타리에 안주하여 우물안 개구리가 되는 것, '바리사이적 위선'과 매사에 민중을 내세우는 독선이다.

* 젊은 독일인 신학자 리히터의 말은 섬뜩하게 매섭다. "최근 안병무가 케리그마에 가한 비판은 맑스의 종교비판이 갖는 것과 똑같은 결함을 안고 있다. ㅗㅗㅗ 그는 자기비판을 배제하고 있다. 좋은 것은 '우리' 의식으로 돌리고 나쁜 것은 '적'의 탓으로 돌리는 한국에서는 만장일치를 요구하는 정부의 선전에 맞서기 위해서라도 자기비판의 필요성이 강조되어야 하지 않을까."

* 민중교회라는 범주 자체도 더 확대해야 한다. 소위 민중교회는 아니지만 필자가 목회해온 한백교회나 김경호 목사의 강남향린교회는 넓은 범주의 '민중교회'로 볼 수 있다고 생각된다.

* 신학이란 무엇인가? 합류를 증언하고 해석하면 그것으로 되는 것인가? 더 고려할 사항은 없는가? 신앙이란 무엇이며 신학과 신앙의 바른 관계는 무엇인가? 서남동은, 신학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체계화 작업이라고 한 적이 있는데 이 경우 그가 생각하는 신앙이란 그리스도의 사랑 구원 해방이라고 했다. 가령 안병무는 "신학은 민중의 삶과 고난을 기술하는 데 그쳐서는 안되고 거기에 그리스도가 현존한다고 증언하는 데 신학의 역할이 있다"고 했다. 예수의 빛에 비추어 전태일을 이해하고, 전태일의 빛에 비추어 예수를 이해한다, 이것이 가능한가? 전가가 말하자면 임태수의 신학이 아닐까? 과연 후자는 가능한가? 그것을 가능하다고 보는 것이 서남동이요 안병무다("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느님의 어린 양", "강도 만나 상처입고 쓰러져 신음하는 사람의 사크라멘트"). 후자가 빠져버리면, 그 신학은 민중신학이 아니다. 전통신학의 그리스도론으로 후퇴 변질 전향하는 것이 되고 만다. 전자와 후자를 통합시키는 패러다임이 '합류', '화산맥'이다. 합류, 화산맥의 활동은 '성령론적 공시성'의 원리로 볼 때, 문제가 쉽게 풀린다. 안병무 신학에 의하면 후자가 있음으로 해서 비로소 예수와 민중의 일치(통합)가 이루어져 주객도식이 깨어지고 '예수민중'이 된다. "민중이 예수다"라는 식의 메마른, 불모의 상상력으로 하는 3류 신학이 아니다. 서남동, 안병무의 '민중의 메시아성'은 탁월하게 신학적인 진술이다. 전통적 그리스도론이 '금관'으로 화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안병무의 예수민중은 예수의 머리에서 금관을 벗겨 그리스도론에 감금된 예수를 해방한다. 어느 쪽이 더 그리스도교적이고 신학적인가? 곰곰히 생각해 볼 문제다. 안병무는 자기다운 신앙적 경험에서 그런 신학적 상징을 절실하게 제 것으로 삼고 있는 것이다. 안병무는 전통교리의 그리스도론 가지고는 한국 민중에 대한 절실한 문제의식을 나타낼 수 없었다. 그것이 임태수와 안병무의 차이다. 여기에 신앙고백의 차이가 있다는 것을 서로 겸허하게 인정해야 한다. 교리적 성서 읽기와는 달리 성서의 문학과 그 배후에 있는 종교를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 뿐만 아니라 한국 민중사의 흐름 속에서, 그 흐름과 함께 합류해 들어오시는 하느님의 백성, 예수민중의 살아온 발걸음과 함께 읽어 내려가는 것이 안병무, 서남동의 신학이다. 이를테면, 구약성서가 고대 이스라엘이 낳은 신앙의 기록이라면, 민중신학은 1970년대 한국 민중이 낳은 신앙의 기록이다.

* 민중신학의 '패러다임들'(사건, 합류, 성령론적 공시성 등)과 심오한 인간 이해(한의 속량적 성격, 민중의 메시아성), 성서해석 방법('민중의 눈으로', 예수민중, 예수사건), 실천론(합류와 증언) 등은 신학하는 방법으로서 매우 탁월하고, 참신하다. 서남동, 안병무 신학은 시대를 뛰어넘는 보편성을 지녔다. 필자는 이 저술 작업을 계기로 이제 민중신학을 얼마 만큼은 알게 됐다고 자부하면서, 이 신학의 수명이 꽤 길 것이라고 단언하는 바이다.

* 민중신학은 신학의 본래적 의미에 있어서의 신학이고, 그렇기 때문에 민중신학은 교회의 신학이 아니다. 기성교회와는 너무나 다른 민중교회 조차도 교회임에 틀림없다. 민중교회 설문조사와 민중교회 목회자들의 대화에서 벌써 그것이 드러나 있다. 그것이 옳지 않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교회는 조직이고 제도다. 제도와 조직의 현상을 보수 유지해야 하는 것을 속성으로 한다. 그러나 신학은 다르다. 신학은 새로움이고 변혁이며, 방향전환이고, 혁신이고 근원으로 돌아감이다. 민중교회는 민중신학의 한 부분을 교회적으로 육화할 수 있을 뿐이지 민중신학을 통째로 민중교회의 신학으로 발전시킬 생각은 말아야 한다. 그것은 교회신학의 발전일 수는 있어도(또 다시 교회중심주의적인!) 민중신학의 발전은 아니다. 민중교회의 검정(檢定)에 불합격이라고 해서 민중신학이 완전히 불합격 판정을 받는 것은 아니다. 민중교회는 민중신학의 옳고 그름을 판정하는 유일한 시금석이 아니다. 민중신학은 '새 시대의 새 술'이 되어야 한다. 민중교회가 민중신학의 새 술을 담을 수 있는 새 가죽부대인가는 미지수다. 민중신학이 너무 새 술이라 틀렸다고 할 것이 아니라, 민중교회가 끊임 없는 자기 쇄신을 통해 새 가죽부대가 되어야 할 것이다.

* 물론, 민중신학적 교회신학, 실천신학, 예배의 신학, 찬송가의 신학, 민중교회적 영성훈련의 신학 등등, 그런 것을 반드시 발전시켜야 한다. 그리고 그 작업에는 민중신학의 신학적 역량이 필요하고 민중신학자들의 더욱 각별한 노력이 있어야 한다. 유의할 것은 '민중교회신학'이라는 '금관'을 만들어 예수에게 씌우지 않도록 해야 한다.

민중교회가 제시하는 신학적 과제를 포함하여 북한 선교, 중국대륙 선교, 아시아 신학의 발전을 위한 연대, 지구촌시대의 인간ㅗ자연ㅗ생명의 공생관계 등 21세기를 향한 허다한 문제들이 민중신학 패러다임의 활용을 기다리고 있다. 민중신학의 지평은 광활하다.

결 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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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질과 구조, 그리고 전망

1. 본 논문은 1970년대 한국의 민중신학의 형성을 중심으로 민중신학의 본질과 구조를 밝히려는 연구다. 필자는 서론에서 민중신학이 1970년대 한국 민중운동의 현장에서 창출된 신학이라는 것을 민중신학의 기본성격으로 정식화하였다. 즉, 민중신학은 한국 현대사의 인권과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의 1970년대의 역사적ㅗ창조적 소산이며 1970년대 한국사회를 장으로 한 '현장신학'이다. 따라서 '1970년대'는 민중신학을 해명하는 방법론적 열쇠라고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민중신학은 실제로 1970년대말까지에는 내용과 방법의 기본 골격이 이미 다 완성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민중신학의 본질과 구조를 밝히려는 본 논문은 1970년대에 집중함으로써 연구의 실효를 거둘 수 있다.

서남동은 민중신학을 정의하여, "한국사의 민중전통과 성서 및 교회사의 민중전통이 1970년대 한국의 인권과 민주화를 위한 하느님의 선교에서 합류하고 있음을 증언하는 신학이다"라고 했다. 서남동의 이 정의 속에 민중신학의 본질이 잘 드러나 있다. '증언'은 행동과 실천, 더 정확하게는 프락시스(praxis)를 뜻한다. 서남동은 [한의 사제]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1970년대에 들어와서 인권과 민중을 위한 투쟁으로 전개되는 한국교회의 하느님의 선교 활동에서 이 두 전통은 극적으로 합류하였다. 오늘 하느님의 선교에 초청받고 있는 우리들은 이 두 전통을 계승해야 한다. 그것은 이 땅에 태어나서 오늘을 사는 한국 그리스도인들의 역사적 운명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우리들이 아니고서는" 이 증인의 전통이 완결되지 않는다고까지 말하고 있다(11,40). 증인의 전통을 이어받는다는 것은 역사적 지식의 문제, 즉 이론의 문제가 아니고 실천의 문제, 곧 프락시스(praxis)의 문제다.

민중신학이 개념화되고 조직화되어 세련된 신학으로 되는 것은 십중팔구 민중신학의 본질에 해당하는 '증언'으로부터 멀어짐을 뜻하는 것일 수 있다. 증언의 행동과 신학의 언어가 미분화 상태였던, 안병무식으로 말하면, 케리그마화 이전의 '사건으로서의 민중신학'이 민중신학의 본질이라고 믿고 있는 필자는, 이 본질에 충실하고자 하는 자세로 본 연구에 임하였다.

2. 본 논문은 제1부에서, 먼저 민중신학의 형성의 배경을 이루고 있는 한국 민중사와 한국 그리스도교사를 [전사](제1장)로 다룬 후, 1970년대 민중신학의 성립의 3대 요소인 '1970년대'(제2장)와 '신학자들'(제3장)과 '민중'(제4장)을 고찰하였다. 이 세 요소 상호간의 유기적 관계의 규명이야말로, 제2부에서 고찰한 [사건과 합류의 해석학](제5장)과 함께, '1970년대 한국 민중신학의 본질과 내적 구조'의 해명에 관건이 된다.

2.1. 민중신학이 한국 민중사의 '1970년대'의 소산임은 분명하지만, 이 신학의 상상력, 파토스, 신학적 지향은 불과 10년이라는 짧은 세월에 형성된 것은 아니며 그 뿌리는 수난과 저항으로 점철된 근현대 한국 민중사와 100여 년의 한국 그리스도교사의 민족ㅗ민중적 전통 속에 착근해 있다. 따라서, [전사]에서는 1945년 해방에서 1970년 전태일 사건에 이르는 한국 민중사와 한국 그리스도교사의 민중전통을 다루었다. 그리스도교사의 민중전통에서는, 민족 수난기에 있어서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민족의식, 함석헌 사상, 토착화 신학, 세속화 신학 등의 영향, 한국 그리스도교의 사회선교 등을 중심으로 고찰하면서 '민중신학적' 발상의 맹아가 이 시기에 이미 배태되었음을 밝혔다. 특히, 1945년 해방 이후 한국 민중운동사에 큰 분수령이 된 전태일 사건을 계기로, 역사와 사회에 대한 긴 무관심의 잠에서 깨어 일어난 그리스도인들이 1970년대 인권과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의 대열에 참여하여 증언자의 삶을 산 모습을 추적하였다. 이 증언자들의 삶이야말로 민중신학의 '본질'의 드러남이고, 신학이란 그러한 증언의 행동에 대한 해석이기도 하였다.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은 전태일의 삶과 죽음에서 예수의 삶과 죽음을 보았고, 1970년대 한국 민중의 일어섬(곧 전태일의 부활)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보았으며, 1970년대 민주화운동에서 오순절 성령사건을 체험했다. 한국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한국 현대사의 인권과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의 '1970년대'는 성서의 민중전통과 한국사의 민중전통이 하나의 흐름으로 합류한 사건이었다. 그것은 또한 성서의 재발견이었고 예수 그리스도와의 새로운 만남이었으며, 회심을 통한 신앙의 새 출발이었다.

1970년대 한국 민중의 새 역사는 전태일 사건이라는 한 준봉으로부터 뻗어내린 거대한 산맥이었다. 신학자들은 전태일 사건에서 역사의 주체로서의 민중의 시대의 도래를 알리는 '때의 징조'를 읽었다. 그들은 이 새로운 역사의 흐름에 합류하여 민중의 고통과 한과 희망을 함께 나누면서,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손으로 만진 일들(요일 1,1)을 신학의 언어로 증언하였고, 거기에서 '민중신학'이라는 한 새로운 신학이 형성된 것이라는 것을 밝혀보려 하였다.

2.2. 다음으로, [신학자들](제2장)을 다루었다. '신학자 탐구'는 민중신학의 본질과 방법론적 특질을 구명하려는 본 연구에 있어서 '1970년대'와 함께 또 하나의 관건이 된다. 따라서, 필자는 한국 민중신학의 묘목을 심고 길러낸, 민중신학의 대표격인 두 신학자 서남동, 안병무의 인생과 신학적 편력을 자료가 허락하는 한에서 충실하게 기술하려고 노력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신학자'는 민중신학 형성의 필연적인 구성적 요인임을 대략 다음과 같이 밝혀보았다.

이 두 사람의 신학자가 있었기에 한국의 민중신학이 탄생할 수 있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서남동의 신학적 '안테나'는 1970년대 한국 민중의 한맺힌 소리를 감지하여 그 '소리의 내력'을 신학적으로 증언하는 예리한 촉수였고, 안병무의 '역사의 예수'에의 간단(間斷)없는 추구는 민중신학이라는 단비를 부르는 긴 목마름이었다. '1970년대'가 민중신학이라는 새 생명의 태였다면, '두 신학자'는 그 산모였다고 할 수 있다. 신학적 훈련을 쌓은 탁월한 신학자의 매개역 없이는 창조적인 신학의 산출은 불가능하다. 다만 강조해야 할 것은, 그들의 신학적 훈련이 책과 강의실과 연구실에서의 논리와 학(Wissenschaft)에 그치지 않고, 민중의 생활과 문화라는 대해에 합류했기에 가능했다는 점이다. 그들은 서구신학의 게토를 '탈'(脫)했지만, 그 '탈'은 전면 부정이 아니라, 서구신학에 대한 치열한 저항이며, 또한 서구신학의 비판적 계승이기도 했다. 그들이 정열을 불태워 연구, 흡수했던 서구신학의 적극적인 요소들이 한국의 민중경험과 그들의 신학 안에서 극적으로 합류한 것이다. 이것은, 서구의 진보신학에는 1970년대 한국 민중현장과의 '접점'이 무르익어 있었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상황'에 대한 신학자의 대결이 진지하고 치열하면 그 접점에서 창조적 신학의 불꽃이 일어날 수 있다는 교훈을 얻는다.

2.3. 그 다음으로, [민중](제3장)을 ⑴ '역사에 있어서의 민중', ⑵ '현실에 있어서의 민중', ⑶ '(신학의) 주제로서의 민중'으로 나누어 고찰하였다.

⑴ 먼저 '역사에 있어서의 민중'에서는, 민중사학자 정창열의 연구에 힘입어, 한국 근현대사에 있어서 '민중과 민중의식의 형성' 과정을 제시하였다. 정창렬은 그의 논문 [백성의식, 평민의식, 민중의식]에서, 지배계층의 권위에 복속되어 순종만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획득하기 위해 싸우는 인민이 바로 '민중'이라는 동태적인 개념화를 시도하고, 이러한 민중과 민중의식이 역사적으로 어느 시기에 어떻게 형성 발전되어 왔는가, 특히 지배계층의 강제에 의해 규범화된 지배 이데올로기를 인민이 어떻게 내재적으로 극복하면서 스스로를 민중으로 정립하였는가에 초점을 두고 탐색한다. 그는 민중의식이 역사적으로 '백성의식→평민의식→민중의식'의 순으로 형성 전개되어 왔다고 하고, 한국사에 있어서의 '민중ㅗ민중의식'이 1876년 개항 이후에서 1970년대까지의 시기에 형성된 것으로 본다. 필자는, 이처럼 한국사에 있어서 민중ㅗ민중의식의 형성 시기가 그리스도교의 전래 시기와 정확히 일치한다는 점에서 민중신학의 민중 이해(이를테면 '합류')에 빛을 던져 준다고 생각하며, 또한 한국 민중신학의 민중 이해는 정창렬이 제시한 민중ㅗ민중의식 패러다임과의 창조적 대화를 통해 전개됨이 바람직하다고 확신한다.

⑵ '현실에 있어서의 민중'에서는 현실의 민중을 있는 그대로 생생하게 파악하기 위해 민중신학이 한 방법인 '민중의 자술적 전기'(이야기)라는 방법을 도입, 1970년대를 살아온 노동자, 농민, 도시빈민 등 기층민중들의 살아온 이야기를, 신학적 해석을 가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옮겨 놓았다. 또한, 전태일의 죽음 이후 10여 년이 경과한 1980년대초의 청계천 평화시장 노동자들의 실태를 그곳 여성노동자들의 좌담에서 발췌해 실었다. 그리고 분단시대를 살아가는 한(조선)반도 민중의 '특수성'을 민중신학의 민중 이해에 보태기 위해 필자 자신의 옥중경험을 실었다. 그것이 반공법, 국가보안법 등 분단을 관리하는 악법들의 존재로 인해 고통당해 온 한국 민중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불가결한 요소라는 점 외에도, 서론에서 언급한 대로, 본 논문의 논지가 필자 자신의 개인사의 어떤 특징과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다.

⑶ 다음에, '(신학의) 주제로서의 민중'에서는, 민중신학이 어떻게 '예수'보다는 오히려 '민중'을 신학의 주제로 삼을 수가 있는가 하는 문제로부터 논의를 시작하여, 서남동과 안병무의 민중 이해를 고찰하였다. 특히 민중을 '하느님의 구원사의 주체'로, '복음(계시)의 구성적 요인'으로 보는 서남동의 민중관을 자세히 논구하면서 '한의 속량적 성격'과 '민중의 메시아성'을 해명하였다.

① 서남동은 민중신학의 주제가 '예수'가 아니고 '민중'이라고 선언했다. 이 점에 관한 안병무의 생각은, 그가 예수와 민중의 일체성을 깨닫고 '예수민중'에 도달함으로써 '예수 대 민중'이라는 주객도식을 허물어 버렸다는 데서 분명해진다. 예수민중은 2천 년 전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오늘 여기에 한국의 민중으로 실재한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한국 민중의 해방사건은 다름 아닌 예수민중이 일으키는 사건, 곧 '오늘의 예수사건'이다. 따라서 안병무의 신학은 '사건의 신학'이고 그 주제는 '(예수)민중'이 된다.

서남동의 민중 이해를 요약하면, '하느님의 구원사의 주체로서의 민중'이 될 것이다. 그는 민중의 고난(suffering)이야말로 하느님의 역사 경영을 알아보는 색인(index)이라고 한다. 민중의 고난을 중시하고 그 의미를 신학적으로 이해한다는 점에서 민중신학의 민중 개념은 사회과학적 민중 개념과 다른 신학적 개념이다. 서남동에 따르면, 예수운동의 담지자들인 '가난한 사람들'(ptochoi)의 자의식은 '하느님의 구원사의 주체'라는 것이었다. 여기에서 민중신학이 민중사학으로부터 수용한 명제, "민중은 역사의 주체다"를 한층 더 신학적으로 심화시킨 "민중은 하느님의 구원사의 주체다"라는 명제를 얻게 되며, 민중이 그리스도교 신학의 주제가 될 수 있다는 이해를 넘어, 민중이야말로 무릇 모든 신학의 주제일 수밖에 없다는 결론이 도출된다.

② 서남동의 민중 이해는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성서의 메시지의 역사적 전승자인 '가난한 사람들'은 복음의 '구성적 요인'이다"라는 데까지 이른다. 복음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어졌을 뿐만 아니라, 애당초 '가난한 사람들의 복음'으로 육화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가난한 사람들'을 빼버리면, 복음은 추상적 이념이 되고 만다. 복음은 상부구조(마음)고 가난한 사람들은 하부구조(몸)다. 양자가 모두 역사적 계시(복음)의 필수적 구성 요인이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를 믿고 따랐던 사람들, 복음의 전승자들, 하느님의 구속사의 주체들(가난한 사람들)을 제외하고서 예수를 믿을 수 있는 길도, 그리스도교의 선교를 할 수 있는 길도 없다. 오늘날 우리가 예수의 복음을 수락하려면, 그래서 구원을 받으려면, 우리 시대의 가난한 사람들과의 연대를 수락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③ 안병무는 자신의 민중 이해를 철저하게 '성서로부터' 취하고 있다. 그는 마르코복음서의 오클로스를 민중과 등치시킨다. 예수가 있는 곳에는 어디나 민중(오클로스)이 함께 있고, 예수와 민중은 식탁을 같이 하며, 예수와 오클로스는 예루살렘과 대립관계에 있고, 예수는 오클로스를 "내 어머니와 내 형제"라고 선언했다. 특히 예수는 오클로스에 대해서 여하한 도덕적, 종교적 평가도 내리지 않았다. 즉 예수는 바리사이를 위시한 소위 지도층에게는 맹렬한 비판을 퍼붓지만, 오클로스에 대해서는 그들을 '무조건' 받아들일 뿐, 그들의 죄를 운운하는 법도 없고 그들에게 어떤 도덕적 요구를 일체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안병무는 이것을 예수민중의 주요 특징으로 본다. 예수는 그 원인이 어디 있든지 간에 지금 고난당하는 무리, 지금 배고프고 지금 울고 지금 목마르고 지금 억눌리고 소외된 자들을 무조건 편들었다. 안병무는, 때로 민중을 낭만화(또는 미화)한다는 비판에 접할 때마다, 예수와 민중의 그와 같은 관계를 제시하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안병무의 민중 이해에 있어 무엇보다도 '페미니스트적' 예수민중 이해를 빼놓을 수 없다. 그것이 그의 예수민중과 예수운동의 성격을 이해하는 필수적인 부분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는, "여성의 입장에서 성서를 보려는 노력은 남성 중심의 시각을 당연시해 온 전통적인 해석에 제동을 걸었으며, 특히 예수운동을 이해하는 데 크게 기여하고 있다"고 선언하고, 갈릴래아에서부터 예수를 섬겼고 수난의 현장까지 예수를 동행했던 여인들이 남성 제자들보다 예수운동의 본질을 더 깊이 이해했고, 그들이 예수로 하여금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도록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던 것이라고 추론한다.

⑷ 한국의 일부 그리스도교 신학자들은 1970년대에 한국 민중의 토속종교인 무교(샤머니즘)와 민중문화예술, 그리고 그것들 속에 내재한, 한국(조선) 민중의 집단적 혼인 '한'을 신학의 한 주요한 모티프로 도입했다.

한은 춥고 배고픈 사람들, 사람 대접을 받지 못하고 사는 사람들, 사회의 부조리와 모순과 불의를 일상 경험하고 그것에 대해 울분을 느끼면서도 어찌 해볼 도리가 없이 늘 당하기만 하고 사는 서민계층의 절망감이다. 한은 봉건제와 가부장제 아래서 기구한 삶을 이어 온 한국 여인들의 정조(情操)다. 한은, 언젠가는 한번 한풀이할 수 있는 날이 있으리라는 강렬한 희망의 정조를 밑바닥에 깔고 있다. 그래서 한맺힌 사람은 소극적이거나 체념적이지 않고 오히려 낙천적이고 억척스러울 경우가 많다. 한맺힌 사람들은 전태일에게서 보듯이 "무릎 꿇고 사느니 서서 죽겠다"는 저항적 자세를 보이기도 한다. 머리가 아닌 가슴과 창자 속에 또아리 틀듯 맺힌 한은 풀지 않으면 병이 된다. 우리 민족과 민중은 한풀이의 지혜를 오랜 역사를 통해 익혀 왔다. 노래(민요)로 풀어 내고, 이야기(신세타령, 민담)로 풀어 내고, 춤(탈놀이)과 굿으로 풀었다. 한은 "너죽고 나죽자"는 불같은 복수와 저주의 감정으로 치닫는 경우도 있으나, 눈물과 한숨 섞인 익살(해학)로 풀어 내어 삭히는 경우가 더 많다. 한은 식민지시대와 한국전쟁과 분단의 시대를 살아온 한(조선) 민족ㅗ민중의 보편적 정조다. 한은 복합적이고 중층적인 한국(조선)인의 집단적 무의식, 한국(조선) 민중의 집단적 영혼이라고 말할 수 있다.

현영학은 한에는 세 얼굴이 있는 것 같다고 한다. 하나는 정한(情恨)인데 '탄식-체념-적응-연민과 사랑' 등 으로 연결되는 '제사장직의 한'이고, 다른 하나는 원한(怨恨)인데 '원망-복수-변혁-정의의 실현' 등으로 전개되는 '예언자직의 한'이다. 한의 이 두 얼굴은 서로 엇바뀌며 교대로 나타날 때도 있고 동시에 나타날 때도 있다. 현영학은 이 두 얼굴이 있는 곳에는 언제나 따라다니는 또 하나의 얼굴이 있다고 한다. 해학과 풍자와 웃음의 얼굴이다. 이 웃음은 점잖고 얌전한 미소가 아니라, 봉산탈춤에서 보듯이 창자에서 터져 나오는 웃음, 허리를 잡고 몸을 비틀며 웃어젖히는 파안대소다. 이 웃음은 단테가 본 것처럼 천당에서 모든 만물이 하느님과 더불어 웃는 웃음, 궁극적 승리자 제왕의 웃음이다. 이 세 가지 얼굴은 민중의 한의 예술인 탈놀이나 판소리, 한의 종교인 무교에서는 언제나 볼 수 있다. 민중의 한을 신학에 도입하자마자, 그리스도교의 신학은 들의 꽃(마태 6,28) 같이 생기를 얻게 되었고 갈릴래아 민중의 땀냄새와 건강한 웃음소리와 항거의 몸짓을 회복하게 되었다.

⑸ 서남동의 '한 이해'는 또 다른 뉘앙스를 갖고 있다. 그는 먼저 민중과 한의 관계를 특이한 방식으로 설명한다. "사람을 밖에서 보면 육체이고 안에서 보면 혼이듯이, 민중도 밖에서 보면 '민중'이고 안에서 보면 '한'이다." 즉 민중의 혼에 해당하는 것이 한이라는 것이다. 그는, 이제까지 그리스도교 신학의 문제는 '죄'였는데, 민중신학의 핵심 문제는 '한'이라고 한다. 죄라는 것은 강자가 약자에게 뒤집어씌우는 누명이나 '렛델'인 경우가 많다. 예수시대에도 종교적 지배집단이 민중에게 붙인 딱지가 '죄인'이었다. "예수가 죄인을 위해서 왔다"는 것은 그래서 더 깊은 의미가 있다. 죄는 지배자의 눈으로 보면 죄이고 민중의 눈으로 보면 한이다. 죄는 지배자의 언어고 한은 민중의 언어다.

서남동은, 다음으로, 우리 모두를 해방시킬 메시아는 고난받는 민중의 신음소리, 곧 한의 소리를 타고 오실 것이라고 한다. 우리 시대의 수난당하는 이웃, 특히 우리가 '구조적인 악'이라고 부르는 것 때문에 고통받고 있는 이웃의 절규에서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한다면, 우리는 다른 아무 데서도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할 것이라고 서남동은 단언한다. 그는 이것을 가리켜 '고난받는 민중의 메시아성' 또는 '한의 속양적 성격'이라고 한다.

한편 서남동은 '속량'과 '해방'의 재일치(reunion)를 말한다. 전통적 그리스도교 신학에서는 속량과 해방이 분리되어 버린 결과, 한편으로는, 속량은 해방이라는 사회적 차원의 실천이 탈락되어 종교적 차원에 국한되어 버렸고, 다른 한편, 해방은 종교적 차원을 상실해 버리고 사회적 해방에만 국한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그러나, 양자는 본래 분리되면 안되고, 분리되면 양자가 다 변질 왜곡되는 것이다. 성서의 구원은 그 양면을 다 포괄하는 것이다. 창조가 있는 곳에 속량(redemption)이 있다. 창조와 속량은 실은 하느님 행위의 양면이다.

필자는, 한국 민중사와 문화전통 속에도 하느님의 창조와 속량의 역사가 있어 왔고 지금도 있고 앞으로도 있게 될 것이라고 본다. 이 속량과 해방이 분리되지 않고 일치된 경우를 전태일의 삶과 죽음에서 만난다. 전태일의 속량은 자기의 몸을 불살라 바쳐 다른 노동자들을 속량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을 일으켜 세워 '해방'의 도정에 나서게 하였다. 실로, 전태일의 죽음은 속량과 해방, 종교적 차원과 사회적 차원을 포괄한 것이었다. 민중신학에서 구원론을 말한다고 할 것 같으면, 바로 속량과 해방의 절묘한 일치를 구현하고 있는 전태일의 예를 이야기하면 될 것이다.

3. 본 논문의 제2부에서는, [사건과 합류의 해석학](제5장)과 [성서와 민중](제6장), 그리고 '운동의 신학'과 민중교회운동을 다루는 [1980년대 이후의 민중신학의 전개](제7장)를 고찰했다.

[사건과 합류의 해석학]에서는 민중신학의 해석학적 패러다임의 두 기조인 안병무의 '사건'과 서남동의 '합류'를 중심으로 민중신학의 방법론적 구조를 해명하고자 하였다. 특히 이것들과 관련되는 여타의 해석학적 개념들, 곧 전거, 탈신학=민담(또는 이야기), 계시의 하부구조 등을 해명하였으며, 그러는 과정에서 민중신학의 해석학적 뼈대가 드러나게 하였다. 제6장에서는 민중신학의 성서 읽기 패러다임이라고 할 수 있는 '민중의 눈으로', 성서의 재발견, 민중에 의한 성서의 해방, 예수사건의 전승 주체 등을 다루었다. 마지막 제7장에서는 1980년 5월 광주민중항쟁이라는 또 하나의 분수령으로부터 발원한 '1980년대 민중운동'의 흐름 속에서의 민중신학의 전개를 살펴보았다. 필자는 이 시기에 전개된 민중신학의 특징을 나타내는 3개의 지표로 ⒜ 제2세대 민중신학 그룹에 의한 '운동의 신학' 형성, ⒝ 민중교회운동의 전개, ⒞ 서남동 서거 이후의 제1세대 민중신학 진영 내부의 변화와 안병무의 신학작업의 성과 등이라고 보고, 이를 고찰함과 아울러 민중신학의 '자기성찰'과 금후의 전망을 시도하였다.

3.1. 안병무의 신학은 '사건의 신학'이다. 그에게 있어서 신학이란 하느님(예수, 성령)과 인간이 함께 일으키는 역사적이고 사회적이며 집단적(또는 공동체적)인 일, 곧 사건을 증언하는 일이다. 하느님은 사건을 일으키는 신이고, 사건 안에 현존하며, 사건을 통해 인식되는 신이다. 하느님사건, 예수사건, 성령사건은 각 시대의 사회구조와 제도와 문화 속에서, 역사적, 사회-정치적, 문화적 사건들 속에서 일어난다. 신학은 바로 이 사건을 증언한다. 여기서 사건의 신학은 '증언의 신학'이 된다. 증언의 신학은 오늘의 민중현장에서 일어나는 사건들 속에서 하느님(예수, 성령)의 사건을 보고 그것을 증언하는 신학이다. 즉 오늘의 사건들에서 출애굽사건과 십자가사건과 부활사건이 재현하는 것을 보고 그것을 증언하는 것이다.

안병무는 예수와 민중이 일체가 되어 벌이는 '사건' 속에서 예수는 한 개인(individium)이 아니라 민중예수(집단적 예수)로 확인되며, 이 민중예수는 오늘의 '예수민중'으로 현존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는 여기에서 그가 한평생 찾아 헤맸던 역사의 예수를 드디어 만났다고 고백한다.

'사건'은 안병무 신학의 주요 패러다임이다. 이 패러다임을 하나의 명제로 바꾸면, "최초에 사건이 있었다"로 된다. 안병무의 사건이라는 패러다임은 역사의 예수의 실체를 규명하는 길을 열었다. 즉 성서 속에서 케리그마에 가려져 있던 예수사건 전승을 찾아 내는 열쇠가 주어진 것이다. 그런데 사건이라는 열쇠는 과거의 예수사건을 규명하는 데 있어서만이 아니라 현재의 예수사건을 규명하는 데 있어서도 효험을 발휘한다. 안병무는 '오늘 한국'에서 일어나는 민중사건을 '오늘의 예수사건'으로 보고, 예수사건이라는 해석학적 열쇠로 오늘의 그리스도 사건을 추적한다. "오늘의 그리스도가(나의 언어로는 오늘의 예수사건이) 오늘 여기의 민중사건을 통해서 나타나고 있다. 2천년전의 예수를 추구하는 것이나 교리상의 그리스도를 추구하는 것은 넌센스다. 중요한 것은 오늘의 예수사건이 어디서 어떻게 일어나느냐 하는 것이다."

안병무는 십자가와 부활사건은 2천년 전에 단 한 번 일어나고 그것으로 끝나버린 사건이 아니라, 오늘 우리의 현장에서 민중의 수난과 부활(민중운동) 속에서 거듭 재현된다고 한다.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그 십자가에서 그리스도를 만났다. 그러면 그 사건에서 2천년의 시간적 거리를 가진 오늘의 우리는 어디서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나? 우리가 오늘의 그리스도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은 바로 2천년 전의 그리스도의 절규를 오늘에 들을 수 있을 때다(그것은 수난당하는 이웃의 비명소리를 타고 우리의 현장에까지 진동한다). 바로 이 절규에 호응해서 그 고난에 참여하는 자는 현존하는 그리스도를 만나고 있는 것이다."

3.2. '합류'란 무엇인가? 서남동은 김지하의 '옥중 메모'에서 합류의 착상을 얻었다고 하는데, 정작 '서남동 신학'의 대명사처럼 된 이 합류에 대해서 그 개념이나 정의를 스스로 제시한 바가 없다. 그의 글 [두 이야기의 합류]에는, "기독교의 민중사와 한국의 민중사가 한국 기독교인에게서 지금 합류되고 있다. 이러한 합류과정을 민중신학은 어떻게 이해하고 실현해야 할 것인가"라고 문제제기하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필자는 본 연구에서 합류의 해석학적 성격과 의미를 해명하기 위해 노력했다. 합류에 관한 필자 자신의 정의 또는 이해를 아래와 같이 제시한다.

⑴ 합류는 서로 다른 전통들이 합하여 하나되는 일 그 자체, 그리고 그 방법이다. 합류는 그리스도교의 민중전통과 한국 민중의 정치적 및 문화적 전통이 만나고 결합하는 방식에 대한 신학적 패러다임이다. 신과 인간이 '공동주체'가 되어, 정치적 해방과 문화적 해방(문화적 정체성의 확보)을 이루어 나간다. 합류는 두 차원, 곧 정치, 경제, 사회적 해방의 차원과 문화ㅗ종교적 주체성의 차원을 가지는 바, 이 두 차원에서 진행되는 민중의 해방과 주체성 확보를 위한 하느님의 선교(Missio Dei)가 바로 합류다. 이 합류를 증언하고 해석하는 일이 곧 신학인데, 사회ㅗ정치적 차원에서 일어나는 합류를 증언하고 해석하는 것이 정치신학이라면, 문화ㅗ종교적 차원에서 일어나는 합류를 증언하고 해석하는 것이 문화신학이다. 민중신학은 이 두 차원에서 일어나는 합류를 통전적으로 증언하고 해석하는 신학이다.

⑵ 합류의 신학에 있어서 한 중요한 포인트는 합류의 '원심력과 구심력의 문제'다. 합류의 원심력에 해당하는 것이 문화의 관점이라면, 구심력에 해당하는 것은 민중의 관점이다. 원심력은 문화의 다양성, 다원성을 추구하는 방향이고, 구심력은 민중성을 추구하는 방향이다. '민담의 신학'은 원심력과 구심력이 균형을 이룰 때 '민중적 합류의 신학'으로 될 수 있다. 필자는 이러한 합류를 '하방(下方) 합류'라 부른다. 낮은 곳을 향해 흐르고 자기를 비워 종의 모습이 되는 민중적 성격의 합류를 다른 것들과 구별하기 위함이다.

⑶ 이야기/민담은 한 곳에 고여 있지 않다. 광활한 대지를 적시며 구비쳐 흐르는 대하처럼, 민담은 지역, 민족, 문화권의 경계를 넘어 그 전승권을 넓혀 가는 강물이다. 흘러가며 다른 강들과 만나 합류한다. 이 합류의 도도한 흐름은 '주객도식의 둑'을 무너뜨리는 운동이다. 이야기라는 강물은 인간(민중)만이 아니라 유역의 모든 자연과 생명에게도 젖줄이 된다. 그래서, 합류의 신학은 '탈'신학이다. 아시아의 그리스도교가 서구 부르주아 인간 중심주의 신학의 바벨론 포로 상태를 '탈'출해서 '아시아 민중전통의 바다'에 합류하는 신학운동(theological movement)이다. 이 합류신학의 원리는 서남동의 '성령론적 공시성'에 암시되어 있다.

⑷ '성령론적 공시성의 원리'는 둘 이상의 서로 다른 전통들이 합류하는 원리 내지 방법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즉 합류는 성령론적 공시성의 원리에 따라 이루어진다. 따라서, 합류를 해석하려면 성령론적 공시적 해석방법을 가지고 해야 한다. 환언하면, 성령론적 공시성은 합류의 원리이자 합류를 해석하는 해석학적 원리이기도 하다. 성령론적 공시성의 원리는 다음과 같이 이해될 수 있다.

첫째로, 성령론적 공시성의 원리는 '현재'와 '현장'을 중시하고 그 의미를 강화시키는 성령의 활동원리이다. 성령은 하느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현재화, 현장화시키는 '오늘의 하느님'이다.

둘째로, 성령론적 공시성의 원리는 성서 및 교회사의 민중전통과 오늘의 민중전통을 합류시키는 하느님의 선교의 방법이다. 합류는 두 차원, 곧 정치(사회, 경제)적 해방의 차원과 문화(종교)적 정체성 확보의 차원을 가진다. 성령론적 공시성의 원리는 합류의 이 두 차원에서 진행되는 '해방의 영'의 활동을 증언하고 해석하는 방법이다.

셋째로, 성령론적 공시성의 원리는 오늘의 세계에 있어서 문화의 다양성을 적극적으로 긍정하고, 세계와 인간생활의 다원성과 다원종교, 다원문화, '다'민족(ethnics), '다'인종, 남녀 '양성' 및 하느님의 창조계(creation)를 관류하는 성령의 활동을 해석하는 원리다.

넷째로, 성령론적 공시성의 원리는 성서의 빛 아래서 과거 및 현재의 민중전승들과 민중문화 민중종교의 의미를 조명해 내는 한편, 여러 민족의 다양한 민중문화 전승들의 빛 아래서 그리스도교적 전승들의 의미를 재조명하여 양자를 합류시키는 성령의 활동원리다.

다섯째로, 성령론적 공시성의 원리에 따르면, 합류는 우선적으로 낮은 곳, 어두운 곳, 구석진 곳, 변두리, 밑바닥에 사는 작은 사람들을 지향하는 '하방합류'이며, 따라서 우리는 성령이 지금 어디에서 어떠한 합류의 사건을 일으키고 있는지를 분별하고 나의 삶을 성령의 지향에 합류시켜야 한다.

3.3. 서남동은 그의 이른바 '두 이야기의 합류' 신학을 구상함에 있어서 먼저 두 이야기(전통)를 확정해야만 했다. 두 이야기란, 하나는 성서의 민중전통과 그리스도교 교회사의 민중전통이고, 다른 하나는 한국사의 민중전통인데, 이 두 개의 전통을 형성하고 있는 방대한 내용으로부터 핵심요소들을 뽑아 내어 거기에 '전거'라는 이름을 붙였다.

서남동의 민중신학의 전거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즉, '그리스도교의 민중전통'과 '한국사의 민중전통'이다. 그리스도교의 민중전통에는 성서의 민중전통과 교회사의 민중전통이 있다. 민중신학의 성서적 전거로서, 구약성서에서는 ① 히브리들의 출애굽, ② 가나안 정착과정과 왕조형성 이전의 원이스라엘 평등공동체 형성, ③ 예언자의 아나빔(가난한 사람들), ④ 야훼의 고난받는 종 등을 들고 있으며, 신약성서에서는 ⓐ 예수의 갈릴래아 활동, ⓑ 십자가 처형 사건, ⓒ 초대교회의 방랑하는 설교자들을 들고 있다. 다음으로, 교회사적 전거로서는 ㉠ 요아킴의 '성령의 제3시대', ㉡ 토마스 뮌쩌의 사회혁명적 신앙, ㉢ 탈그리스도교 시대인 현대의 정치신학, 해방신학, 여성신학, 흑인신학, 민중신학 등을 든다. 그리고 한국 민중사의 전통으로는 동학농민전쟁, 의병운동, 활빈당 투쟁,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 3.1운동, 4.19혁명 등 한국역사의 흐름 속에서 일어난 민중해방의 몸부림과 투쟁, 그리고 민중의 내면성과 혼을 표현한 민중문화의 유산들, 즉 민담, 민요, 가면극, 판소리, 시조, 가사, 노래, 시, 소설 등과 그밖에 미륵신앙 등 민중종교의 전통을 들고 있다.

서남동은 '전거'라는 말을 전통적인 신학의 규범인 '계시'와 대립하는 말로 사용한다. 즉, 그에 의하면, 계시는 종교적 사고의 범주인 데 대하여, 전거는 역사적 범주라는 것이다. 그는 종교적 범주에 속하는 것을 해석하는 방법과 역사적인 범주에 속하는 것을 해석하는 방법을 구분하여, 전자를 전통적인 '그리스도론적-통시적 해석'(christological-diachronic interpretation)이라고 하고, 후자를 '성령론적-공시적 해석'(pneumatical-synchronic interpretation)이라고 해서 양자를 대조시킨다. 그는 나자렛 예수라고 하는 성서적 전거를 예로 들어, 그리스도론적 해석과 성령론적 해석이 얼마나 서로 다른 해석을 내리고 있는가를 보여 준다. 즉, 그리스도론적 해석에서는 이미 주어진 종교적 범주에 맞기 때문에 적합성이 인정되는 데 대하여, 성령론적 해석에서는 지금 여기의 현실적 경험 및 상황과 맞기 때문에 적합성이 주어지게 된다. 그리스도론적 해석에서는 예수가 '나를 위하여' '내 대신에' 속죄한 것으로 되는데 대하여, 성령론적 해석에서는 '내가 예수를 재연(再演)'하는 것이고 지금 '여기에 예수사건이 재현(再現)'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는 이 두 가지 입장을 양자택일적으로 생각하기보다는 상호보완적으로 생각해야 한다고 하면서도, 민중신학의 입장에서는 "성령의 역사가 문제의 핵심이고 물려받은 전통은 해석의 전거로서의 구실을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하고 있다.

3.4. 서남동은 김지하의 민담형식의 문학과 만나게 됨으로써 일종의 '신학적 회심'을 하게 된다. 여기에서, 민담(민중의 이야기)이 그의 신학의 한 방법이 된다. 그는 민담을 민중신학의 논문에 대담하게 도입하여 '민담의 신학'이라는 신학의 새로운 방법을 제창하기에 이른다.

서남동은 "성서의 역사적ㅗ발생학적 '핵' 곧 계시는 역사적 사건이기 때문에 이 태초의 사건은 신학적인 논술로 전달되는 것이 아니고 이야기에 담겨져 전해지는 것"이라고 한다. 즉, 역사적 사건이 성서의 핵인 '계시'이고, '사건'은 계시를 담는 그릇(매체)이며, 민담은 사건을 담아 전한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민담이라는 것이 민중의 집단적인 영혼의 공간을 갖고 있는 민중의 '자술적인 사회전기'라고 한다.

서남동의 [민담에 관한 탈신학적 고찰]과 [민담의 신학.―.반신학]은 한국 전래 민담들을 통째로 옮겨다 놓고 거기에 매편마다 약간의 신학적 코멘트를 곁들인 아주 새로운 스타일의 글이다. 그는 신학의 '언어'와 '방법'의 극적인 전환을 의도한 이 글을 선언적으로 '민담의 신학'이라고 명명하고, 신학에 있어서의 언어의 문제를 제기한다. 그는 민담의 신학은 서구신학처럼 논리와 개념으로 하는 신학이 아니라 '이야기'로 하는 신학이라는 것이며, 따라서 '반신학'(Gegen Theologie, countertheology)이라는 것이다. 이로써 그는 전통적인 서구신학에 대해 반기를 들고, 그 자신의 이야기 신학, 곧 반신학의 새 기치를 내걸었다.

그는 이러한 입장에서 전통적 신학의 매체가 논리적 사변, 추상적 관념이며 그 방법은 연역적이고 그 담고 있는 내용은 초월적인 신의 존재라고 비판한다. 이에 대해서 하느님의 계시의 참다운(authentic) 매체는 실제적, 구체적 경험과 사례에서 귀납적 방법으로 얻어낸 이야기다. 이야기는 추상적인 초월을 추구하지 않고 구체적인 '성육신'을 찾는다. 전통적인 신학이 초월적 연역적이라면 이야기신학은 귀납적 신학, 아니 반신학이라는 것이다.

전통적 신학에 대한 서남동의 비판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그는 문자와 서적과 체계적인 신학은 지배의 이데올로기에 편입, 흡수되어 지배질서를 정당화해 주고 그것을 축복하는 기능을 수행하는 '지배의 신학'(Herrschende Theologie)이라고 한다. 하느님의 초월성, 전지전능, 무소부재, 그리스도의 왕권과 주권을 강조하는 내용이 다 정치적 지배구조 안에서 얻어진 이미지(지배자의 언어)며 그 고정화, 항구화에 기여한다는 것이다. 대체로 신학이라는 것 그 자체가 성서적인 계시 이후에 생겨난 사상체계인데, 그리스도교의 신학체계가 발생한 사회학적인 '삶의 자리'는 고대 노예제 사회인 그리스와 로마였다. 따라서 자유민과 노예, 성과 속, 물질과 정신의 형이상학적 이원론과 사회의 계급구조가 그 신학이 발생한 모태였다. 그렇게 생겨난 것이 신학이기에 그 태생적 성격으로 인하여 신학은 '지배의 신학'이라는 것이다. 이에 반해서, 성서적 계시의 본래적 삶의 자리는 노예제 사회에서 탈출한 히브리, 가나안과 갈릴래아 민중들이었고, 그들의 삶의 이야기가 계시의 매체였다. 그것은 신학과는 유전적,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다. 민중신학은 지배체제의 통치 이데올로기와 그 문화를 비판하고 시정하는 민중의 언어(이야기)로 하는 신학이(어야 하)고, 그렇기 때문에 사변과 연역법적 논리로 하는 신학에 대한 안티테제 '반신학'이라는 것이다.

3.5. 서남동의 '민담의 신학'이라는 방법에 관한 필자 자신의 비판적 소감을 간단히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서남동의 민중신학의 방법은, 크게 말해서, '사회경제사적 방법'과 '문학사회학적 방법'을 한 날개로 하고 '성령론적 공시적 방법'을 다른 한 날개로 하는 '양날개의 방법론'이라 할 수 있다. 양 날개를 펴서 균형을 취하는 것이 그의 신학방법의 요체라 할 수 있는데, 때로는 그의 글이 이 균형을 잃어버리는 경우를 보게 된다. 가령 [민담의 신학.―.반신학] 같은 경우가 그렇다. 민담(민중의 이야기)이라는 방법은 신학의 한 가지 방법일 수는 있어도 그것만으로 다른 모든 방법들을 대신할 수는 없는데, 서남동은 문자로 기록되는 모든 신학을 '말(이야기)의 신학'과 극단적으로 대립시키고, 문자의 신학을 '이야기'로 대체해야 한다는 듯이 말한다. 그런가 하면 비슷한 시기(1983년)에 쓴 [빈곤의 사회학과 빈민의 신학]에서는 마치 [민담의 신학]에서 한 말을 잊어버리기라도 한 듯이 경제학이나 사회학 논문을 방불케 할 정도로 사회과학적 분석을 도입하고 있다.

민중신학이 추구하는 민중의 '실체'(reality)가 사회과학적 분석만으로는 충분히 드러나지 않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민중이 처해 있은 경제적 조건, 사회ㅗ정치적 조건은 사회과학적 분석의 도움을 받을 때 보다 효과적으로 밝혀질 수 있다. 민중신학은 사회과학적으로 파악된 민중 이해를 딛고 그 성과 위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신학적'인 작업을 진척시킬 수 있다. 그렇게 될 때, 민중의 자술적인 이야기(사회전기)를 통해서 보다 구체적, 통전적으로 드러나는 민중의 생동하는 실체는 민중신학의 민중 이해를 보다 풍부하게 심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 어느 일방만을 강조하면 균형은 상실되고, 민중의 실체로부터 멀어지게 될 것이다.

민중신학이 돋보이는 것은, 그 발상법에 있어서의 획기적인 새로움을 보여 준다는 점이다. 그러나 민중신학의 서구신학으로부터의 전환은 단지 '방법'이나 '해석학적 발상'에 있어서의 전환일 뿐만 아니라 '민중의 편에 선다'는 점에서 '더 결정적인 전환'이다. 말하자면 '편바꾸기'다. 지배층에 편드는 '지배의 신학'의 자리로부터 피지배층인 '민중의 신학'으로의 신학하는 자리 옮김이다. 이것이 더 본질적인 전환이다. 만일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는 표현을 쓸 수 있다면 바로 이 점에서 일 것이다.

민중신학은 기존의 모든 신학 방법들의 폐기 위에 유아독존하는 신학이 아니라, '창고에서 새 것과 헌 것을 꺼내는 하늘나라 훈련을 받은 학자'(마태 13,51ㅗ52)처럼 물려받은 신학의 전통과 유산들을 주체적 활용할 줄 아는 창조적이고 개방적인 신학이(어야 한)다. 서남동 자신이 현대 구미신학으로부터 여러 가지 방법론을 배워서 적절히 구사하고 있는 데서 그것을 알 수 있다. 인간에게 있어서 인간과 인간, 인간과 사회, 역사, 자연과의 관계에서 학문의 영위가 불가피하다. 그리도교의 신학에 있어서도 학문적, 이론적 활동이 있을 수밖에 없고, 개념과 논리를 구사하는 이론 작업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서남동 자신이 방법으로 채택하고 있는 사회경제사적 방법이나 문학사회학적 방법이 다 학문적이고 이론적인 작업의 소산이며, 그 방법들의 응용 자체가 만만치 않은 논리적(머리의) 작업임에 틀림없다. 그의 [민담의 신학.―.반신학]을 읽어 보아도 알 수 있듯이 거기에는 그 자신이 신학이라는 학문영역에서 오랫동안 각고연마한 이론적 역량이 유감없이 발휘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다만, 그를 위한 변명을 한마디 덧붙인다면, 그가 '민담의 신학'이라는 새로운 아이디어를 모처럼 얻었을 때, 그것과 전통적인 신학의 여러 방법들과의 상관성을 고려하고, '민담의 신학'의 방법론적 한계를 냉정히 객관화해 보아서 균형을 취하는 일은 서남동의 몫은 아니었다. 새로운 신학적 상상력에 감전되어 1970, 80년대 한국 민중운동의 절정기를 열정적으로 살다간 그에게 그러한 주문은 무리다. 오로지 지배적 신학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하는 일, 민중과 무연한 '학문'으로서의 신학에 대하여 단호히 결별을 선언하는 일, 신학의 언어와 방법에서 일대 쇄신을 단행하는 일이 그에게는 우선 초미의 관심사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반신학은 전통적인 서구신학에 대하여 분명한 선을 긋고 아시아신학으로서의 민중신학의 '자주성'을 선언하는 의지의 표현이었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3.6. 필자는 본 논문에서 서남동의 해석학적 주요개념의 하나인 '계시의 하부구조'의 의미를 "민중신학에서의 '한국적'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과 연관지어 다음과 같이 고찰하였다.

⑴ '한국적'을 규정하는 규준은 '오늘을 살고 있는 한국인으로서의 우리의 현실의 삶'이다. 이 규준은 오늘의 삶을 중심에 놓되 이 오늘의 삶은 우리 민족의 역사적 문화적 전통과 유기적 관계 속에 있는 '총체적인 삶'을 전제하는 것이다. '오늘 우리의 현실적 삶'이라는 객관적이고 인식 가능한 실체를 제쳐 놓고 한국사상ㅗ문화사의 저 먼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어떤 사상적 지표, 문화적 특질, 전통종교의 원리를 찾아 내어 그것을 '한국문화의 고유성' 또는 '우리민족의 내재적 원리'라고 하여 '한국적'의 규준으로 제시하는 것은 본말이 전도된 방법이다.

⑵ 이 문제와 관련하여, 대만신학자 宋泉盛의 신학에 대한 서남동의 논평은 대단히 유익한 관점을 제공한다. 서남동은 宋泉盛의 신학을 소개하고 논평한 글 [문화신학 정치신학 민중신학]에서 그리스도교 신학을 서양문화-백인문화의 지배로부터 벗겨내어 아시아 문화에 전위시키려고 노력한 宋泉盛 신학의 업적은 오늘날 아시아의 신학자들이 토착화신학, 문화신학, 정치신학 혹은 민중신학을 시도함에 있어서 통과하지 않을 수 없는 매우 의미있는 작업이라고 높이 평가했다. 서남동의 이 생각은 현재와 미래의 민중신학에 변함 없이 유효한 '지침'으로서 깊이 음미되어야 할 것이다.

⑶ 그런데, 서남동은 宋泉盛의 신학에서 '사회사적 인식의 결핍'을 발견한다. 즉 宋泉盛이 성서적 계시의 '신학'(상부구조-이념)만을 주목하지 성서적 계시의 '역사'(하부구조-물질-사회사)는 간과하고 있다고 날카롭게 비판한다.

宋박사는 성서적 계시의 신학(상부구조-이념)만 인용하지 성서적 계시의 역사(하부구조-물질-사회사)는 완전히 간과한다. 宋박사는 그의 전 저서를 통해서 십자가와 부활을 아주 많이, 그리고 자세하고 길게 풀이한다. 그러나 그 풀이는 전적으로 십자가와 부활의 신학(상부구조)이지, 그 역사(사회사)는 아니다. 다시 말하자면 십자가에 부과된 종교적 희생(속죄)만을 풀이하지, 불의한 정치에 의한 의인의 처형이라는 역사(사회사)는 전적으로 간과한다. 부활에 관해서도 그 종교적인 의미만 말하지 사회사적인(물질적) 역사는 말하지 아니 한다. 내가 부활의 사회사적인 하부구조라 함은 '죽임을 당한 자의 부활' '갈릴래아에서의 만남' '메시아 재림 때의 부활'이라는 사회사적인 측면인데 宋박사는 여기에 대해 전혀 언급이 없다는 말이다. ㅗㅗㅗ '역사적' 계시라고 말하면서 그 하부구조(몸)에서 유리된 상부구조(이념)만을 말하는 전통신학은, 그렇기에 나는 유령이요 나아가서는 아편이라고 말한다. 역사적 계시의 하부구조가 복원되어야 할 것이다.

서남동은 여기서 민중신학을 포함하여 무릇 모든 신학에게 지침이 되는 하나의 명제를 제시하고 있다. 즉, "신학은 단지 성서적 계시의 상부구조(머리=신학=이념)만을 말해서는 안되고 반드시 하부구조(몸=물질=사회사)를 함께 말해야 한다"는 것이다. 서남동이 지적하는 바로 이 대목이 민중신학을 포함해서 모든 신학이 걸려 넘어지기 쉬운 '문턱'이고, 신학의 아킬레스건이며, 민중신학으로 자처하는 어떤 신학이 과연 '민중'신학인지 아닌지를 판별하는 시금석이 된다. 宋泉盛 신학에 대한 서남동의 논평 속에 1990년대와 그 이후를 살아갈 한국 민중신학 세대가 신학의 지침으로 삼아야 할 두 가지 원리가 들어 있다고 나는 확신한다. 그 두 가지 원리를 다시 정리하면, '서양-백인문화 신학으로부터 아시아 문화 신학으로의 전위'가 그 하나이고, '신학은 계시의 하부구조(몸-물질-사회사)를 지녀야 한다'는 것이 다른 하나이다.

⑷ 그러면, 민중신학에서의 '한국적'을 밝히는 일은 위에서 말한 두 가지 원리와 어떤 관계가 있는가? 한국 민중신학이 말하는 '민중'은 일차적으로는 한국 민중이다. 민중신학자들은 민중을 영어나 독일어로 표기할 때 people이나 Volk라고 하지 않고 minjung이라고 표기할 것을 요구한다. 민중(minjung)은 한(조선)반도의 기나긴 수난의 역사를 통하여 봉건제, 반(半)봉건제, 식민지, 신식민지, 매판ㅗ예속 자본주의, 일제식민지 잔재, 가부장제적 성차별주의, 이승만 친미ㅗ반공 독재 정권, 박정희 군사 쿠테타와 군부독재와 유신체제, 대미종속문화, 분단체제와 분단문화, 5.18 광주대학살, 광주민중항쟁, 한국사회의 계급ㅗ계층문화, 민중문화 등을 온몸으로 살아온 사람들, '민중'이다. 민중은 사회경제사적, 정치경제학적, 문화사회학적, 종교-예술-신학적 존재이며, 그 모든 '한국적' 요인들을 통전적으로 육화한 존재다. 그러므로 people이 아닌 minjung이다. 민중은 이처럼 '한국적'이다. 따라서 민중신학의 민중은 일차적으로 '한국적'이다. 첫째, 문화적으로 한국적이고 둘째, 사회사적으로 한국적이다. 전자에 대한 신학적 성찰을 위해 서남동은 宋泉盛의 아시아 문화신학의 '전위'의 방법을 배우자고 했던 것이고, 후자에 대한 성찰을 위해 계시의 하부구조(사회사)를 강조했던 것이다. 양자의 '통전'에 의해서만 민중신학에서의 '한국적'의 의미는 올바르게 해명될 수 있다.

4. 본 논문의 제6장 [성서와 민중]은 민중신학의 성서 연구의 성과를 집약한 것이다. 그런데, 서남동은 조직신학자이고 안병무는 신약학자이다. 따라서 민중신학의 성서 연구에서의 새로움은 구약성서 쪽보다는 신약성서 쪽에서 이루어졌다. 필자는 민중신학의 성서 해석에서의 기여를 주로 안병무를 중심으로 고찰하였다.

4.1. 민중신학의 성서 해석의 패러다임은 '민중의 눈으로'라는 말로 표상된다. 민중신학은 '민중의 눈과 머리와 가슴으로' 성서를 다시 읽은 결과, 성서를 '재발견'하게 되었다. 이것은, 성서가 민중, 곧 가난한 사람들, 사회와 역사의 가장 밑바닥에서 억눌려 지내 온 사람들, 역사와 사회의 변두리로 밀려나 차별과 천대를 받고 살아온 사람들의 구원과 해방의 이야기이며, 이 이야기에서 주인공은 바로 민중 자신이라는 새로운 발견이다.

이 성서의 재발견은 성서학자의 서재나 대학 연구실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7190년대 한국 민중의 수난 현장에서, 그 현장에 몸을 던졌던(혹은 그들 자신의 표현으로는 "하느님의 발꿈치에 채여 던져졌던") 몇몇 신학자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 중의 한 사람인 안병무는 그 경험을, "민중을 접촉점 삼아 성서와 오늘의 한국사회를 연결해 본 것이지요. 그렇게 하자마자 성서의 새 세계가 눈앞에 활짝 전개되었습니다. 성서의 내용과 해석 방법에 질적인 변화가 일어난 것입니다"라고 했다.

먼저 그들은 성서에서 민중의 위치를 발견했다. "성서가 민중을 주제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성서의 중심 테마의 발견이다. 그렇다면, 이제 민중은 그리스도교 신학의 중심 테마로 되지 않을 수 없다. 즉 민중은 하느님, 예수, 성령, 구원 등 신학의 여러 주제들 중의 하나가 아니다. 민중이라는 신학의 대상 또는 주제를 하나 더 추가한 것이 아니라 "'신학의 진정한 주제'를 비로소 찾아내고야 말았다!"고 말해야 옳다.

4.2. 그런데, 민중은 신학의 주제일 뿐만 아니라 방법(패러다임)이기도 하다. 안병무는, "성서 해석에 있어서 관건은 성서의 각 책 자체의 성격이 '방법'을 규정하고 있다는 사실에 있다"고 한다({갈릴래아의 예수}, 서문). 성서라는 책 자체가 자기 안에 질문을 가지고 있고 그 질문이 고유성을 지녔기 때문에 그 질문을 답하는(해석하는) 데 있어서도 그 나름의 고유한 방법이 있다는 것이다. 성서 해석에서 어떤 교리나 신학(이데올로기)의 정당화를 구해서는 안된다. 성서의 고유한 물음은 '민중'의 문제다. 성서는 민중을 묻는다. 민중의 현실, 민중의 고난, 민중의 '한', 민중의 구원, 민중의 해방, 민중의 희망, 민중의 나라(하느님나라)를 묻는다. 따라서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성서 안에서 찾는 것이 성서 해석의 목적이 되고 방법이 되어야 한다.

4.3. 서남동은 [민담에 관한 탈신학적 고찰]에서, 그리고 안병무는 [예수와 민중]에서 각각 김지하의 희곡 [금관의 예수]의 '풍자'와 '은유법'을 빌려, 민중이 예수를 신학으로부터 해방시킨다는 것, 나아가서 이것은 민중에 의한 '성서의 해방'이라고 한다.

"가난한 사람들의 굶주림을 외면하고, 박해받는 사람들의 고통스런 외침에 귀를 막고, 세속의 안락과 부귀와 권세에 너무나 가까이 있는, 스스로 예수의 제자라고 자칭하는 바리새인들이 나를 가난한 사람들에게 가지도 못하도록 이 시멘트 감옥에 가두었느니라."

거지는 묻는다. "예수님, 어떻게 하면 해방될 수 있습니까? 다시 살아날 수 있습니까? 다시 살아나 저희들에게 올 수 있습니까?"

"내 힘만으로는 안된다. 너희들이 나를 해방시키지 않으면 안된다. 너희 같이 가난하고 불쌍하고 천대받으면서도 어진 사람들이 아니면 안된다.

네가 내 입을 열어 주었다. 네가 내 머리에서 금관을 벗겨내는 순간 내 입이 열렸다. 네가 나를 해방시켰다. 자, 가까이 오너라. 네가 내 입을 열게 했듯이 이제는 내 몸을 자유롭게 해 다오. 내 몸에서 이 시멘트를 벗겨다오. 답답하고 갑갑해서 못살겠구나. 어서 빨리 이 감옥에서 벗어나 가난한 민중들 속으로 가고 싶다. 내 머리에는 가시관으로 족하리라. 어서 이 시멘트를 벗겨다오. 어서!"

김지하가 '금관'으로 은유하고 있는 것은 교회요 교회조직이다. 그리고 교리요 신학이다.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서 생각해 보면, 예수는 '성서' 속에 감금된 것은 아닐까? 예수의 머리에 씌어진 금관, 예수를 가둔 시멘트, 그것은 교회가 만들어 낸 '그리스도론'이다. 그것은 바로 예수로 하여금 제도교회를 옹호하도록 만들어진 이데올로기다.

서남동은, 예수의 머리에서 금관을 벗기고, 몸에서 시멘트를 허는 것은 신학이 아니라고 한다. 해방신학도 민중신학도 아니라고 한다. 그는 묻는다. "예수를 신학으로부터, 나아가서 성서로부터 해방시킬 자는 누구일까?" 대답은 "1970년대에 군부독재하에서 신음하는 민중의 절규가 예수의 금관을 벗겼다"(안병무)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의 해방은 예수만의 해방이 아니다. 민중신학에서는, 예수는 '예수민중'이라고 했다. 따라서, 예수의 해방은 '성서 속에 있는 민중'의 해방이기도 하다. 그리스도교 역사의 긴 세월 동안, 복음서 속의 민중은 보이지 않는 존재였다. 1970년대 한국의 민중의 상황이, 그들의 고난과 절규가 신학자들로 하여금 성서 속의 민중의 존재에 눈을 크게 뜨게 한 것이다. 그들은 민중이 있는 곳에 예수가 늘 함께 있는 것을 보았다. 예수와 민중은 예수민중으로 '하나'인 것을.

4.4. 민중신학의 성서 읽기는 처음부터 '민중의 눈으로'라고 자신의 시좌와 입장을 분명하게 드러내 놓고 있다. 이것은 서구의 성서학(예를 들면, 역사비판적 방법)이 해석의 객관성을 위장하는 것과 대조된다. 민중은 성서에서 '해방의 길'을 묻는데, 서구신학의 주석으로는 텍스트의 배후에 있는 '하느님의 해방사건'이 잡히지 않는다. 텍스트 배후에 있는 '하느님의 계시'(민중사건).―.이것이 성서 텍스트의 진정한 의미다.―.를 붙잡으려면 문자를 뛰어넘는 방법이 필요하다. 그런데 텍스트를 뛰어넘어 그 배후에 있는 어떤 현실(reality), 원사건에 도달한다는 것은 전통적인 성서 해석의 영역을 넘어서는 일이다. 전통적인 학문(Wissenschaft)적 성서 해석은 텍스트 없이는 단 한 걸음도 나갈 수 없기 때문이다.

학문은 텍스트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텍스트를 뛰어넘을 수 없다. 그것은 맞는 말이다. 그러나 만일 목적이 학문에 있지 않고 '민중구원(해방)'에 있다고 한다면, 텍스트의 의미는 상대화된다. '민중의 구원'이 목적이라면 텍스트를 우상화할 필요는 없다. 그리스도교적 사유에 있어서 성서 텍스트는 중요하다. 그러나 텍스트가 중요한 것은 텍스트(문자) 자체가 중요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찾고 있는 '그 무엇'이 텍스트에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그 무엇'을 전통신학에서는 그리스도, 구원 등으로 말하는데, 그들이 말하는 구원은 역사적 차원, 사회적-정치적 차원, 해방의 차원이 탈락하여 관념화, 추상화한 '구원'이 되어 버렸다. 전통신학에서 탈락된 이 차원을 되찾으려면 텍스트의 우상화를 타파해야 한다. 텍스트를 한치도 벗어날 수 없는 이른바 '학문적' 신학을 '탈'해야 한다.

5. 1970년대의 민중신학자들은 민중을 정의하고 개념화해야 할 필요를 거의 느끼지 않았다. 민중은 물과 공기처럼 그저 거기에 있었고 신학자들 자신이 고난당하는 민중과 함께 있었다. 신학은 사건들의 한복판에서 '증언'하는 일 외에 여념이 있을 수 없었다. 증언의 행동(praxis) 그 자체가 신학이었다. 개념화의 요구라는 것은 그 자체가 이미 민중신학의 변증이 요구되는 시대의 도래를 의미하는 것이다. 변증의 필요란 적대자나 비판자의 존재, 또는 객관적 제3자의 시선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어찌보면, 필자에게 이 책을 쓰도록 자극과 동기가 주어졌다는 사실 자체가 민중신학의 유효성이 실천적으로 질문되고 있는 1990년대의 변화된 상황을 말해 주는 것이리라.

필자는 이 사실을 인지하면서, 이러한 상황의 요구에 올바르게 대응할 수 있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민중신학이란 무엇인가?"를 다시 묻고 바른 해답을 얻는 일이 우선되어야 한다고 확신했다. 필자가 보기에는, 최근 한국에서 거론되는 '민중신학 비판'이나 민중신학의 '패러다임 전환'을 제안한 의견들은, 민중신학에 대한 기본적 이해조차 제대로 되어 있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한 비판들에 답하는 것은 또 다른 과제이지만, 이 논문이 그 문제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쓸모 있는 글이기를 기대한다.

이 책을 쓰면서 민중신학을 새삼 정독해 본 결과, 필자는 "민중신학은 1995년 지금에도 아직 너무나 새롭구나!" 하는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어쩌면 그 신선함은 민중신학이 재발견한 성서의 새로움에 그 뿌리가 있는 것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민중신학은 인간이 지상에서 생을 영위하는 한, 그래서 사회를 만들고 역사를 가꾸어 가는 한, 인간이 성서로부터 삶의 지혜를 구하는 한, 늘 푸르름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1970년대 한국 그리스도인들의 인권과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의 현장에서 창출된 민중신학은, '1970년대'와 '한국'이라는 시공(time-space)의 한계를 넘어 그 유효성의 샘이 마르지 않을 보편적 생명력을 지닌 것이 아닐까. 나는 그렇다고 생각한다. 그 근거는 이 책에서 웬만큼 밝혀졌다고 믿는다. 결론에서 다시 한 번 정리하는 뜻으로, 다음 몇 가지 점만 부언하겠다.

첫째, 민중신학의 인간이해(민중론), 역사관(사건, 합류, 성령론적 공시성), 구원론(한의 속량적 성격, 민중의 메시아성), 성서해석 방법(민중의 눈으로, 예수민중, 예수사건), 실천론(합류와 증언) 등은 신학하는 방법으로서 여전히 탁월하고, 참신하고, 유효하다.

둘째, 문화신학과 정치신학의 관계에 있어서의 '원심력과 구심력', '변증법적 긴장', '통전', '계시의 하부구조', '하방합류' 등의 방법론적 착상들은 민중신학이 아시아 신학의 패러다임으로서 전개될 수 있는 잠재적 가능성을 암시해 준다.

셋째, 1970년대 민중신학의 '현장성', 그리고 '민중의 눈으로' 성서를 읽고 세상과 교회를 보았던 그 관점은, 그래서 고난 가운데 신음하며 몸부림치는 사람들과 함께 하며 스스로 민중이 되어 가는 체험을 나누었던 그 증언의 신학은 우리 모두가 소중히 간직해야 할 진실이 아닌가.

넷째, "민중신학은 끝났다. 생각을 바꿔라!"라고 충고하는 일부 시민운동측의 예단에 대하여, 이 책 제1부 제1장 [전사]와 제2장 [1970년대]는 역사적 과거이면서 '과거'가 아니다. 그 시대는 1990년대인 '오늘' 속에 합류해 들어와 있는 오늘 우리들의 일부다. 그 부정적 측면만을 좀 열거하자. 식민지 잔재, 분단체제, 휴전상태, 국가보안법, 남북의 정치ㅗ군사적 긴장과 대치상태, 정치ㅗ군사ㅗ문화의 대미 종속성, 주한미군기지, 최근 안기부의 간첩사건 조작 등등, 이렇게 끝모르게 줄줄이 나온다. 또 이 책 제4장 [민중]에서 제시된 전태일 사후 12년의 평화시장 노동자들의 현실은 그것이 1980년대초의 일이라 해서 결코 '흘러간 옛 이야기'가 아니다. 1995년 오늘의 평화시장 노동자들의 삶의 정황도 그렇게 크게 달라진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십보 양보해서, 적어도 박노해의 시 [손무덤]은 오늘 이 땅에 와서 품을 팔고 있는 외국인 노동자들에게는 생생한 현실이 아닌가. 한국 민중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이 지구촌 사회의 평화로운 공생을 위해서 오늘 우리에게 민중신학의 '상상력'이 절실히 필요하다. 서남동의 유고 [현장의 소리]는 오늘의 세계 어느 곳에서나 인간을 부르는 메시아의 음성으로서 그 메시지의 생명력이 살아 있는 것이 아닌가.

6. 이 책은 1970년대 민중신학의 형성을 중심으로 한 연구일 뿐이며, 그것도 주로 서남동 안병무 두 신학자에 집중했기 때문에 스스로 한계를 지니는 것이다. 1970년대 민중현장에서 증언자의 삶을 살았던 많은 분들이 민중신학 형성에 끼친 자극과 공헌을 충분히 살피지 못한 점, 1980년대의 다른 민중신학자들의 기여와 최근의 젊은 민중신학 연구자 그룹의 집단적 작업 성과를 수렴하지 못한 점, 여성민중신학 쪽으로부터의 비판적 조언에도 귀기울이지 못한 점 등이 이 논문의 한계이자 앞으로의 과제라고 여겨진다.

특히, 이 책을 일본에 와서 썼으면서도 일본신학계의 민중신학 비판이나 연구성과, 또는 민중신학 해방신학 여성신학 등과 유사한 계열의 신학작업을 하고 있는 일본신학자들의 글들을 검토하고 대화할 시간적 여유를 갖지 못하였음을 유감스럽게 생각하며, 금후의 과제로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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