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레몬서연구
빌레몬서는 우리가 단숨에 읽을수 있는 뱰은 말씀입니다.
전체가 25절로된 그리고 1장밖에 안되는 짤막한 편지입니다.
비록 이서신은 짧지만 매우 귀한 하나님의 말씀이 담겨있는 책입니다.
이 빌레몬서는
어떤 의미에서는 지극히 사적이고 개인적인 서신인 것 처럼 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빌레몬서가 성경의 66권중 당당히 한권의 자리를 찾이 하고있는 것을 볼 때
이 빌레몬서가 얼마나 귀하고 중요한 책으로 자리메김을 하고 있는지 잘알수 있읍니다.
루터는 빌레몬서를 가르쳐"기독교의 사랑의 진수가 담긴 책이다"했습니다.
칼빈선생님은"그리스도의 용서가 꽃처럼 피어있는 책이다"하셨습니다.
오늘 이 시대의 사회와 교회와 우리성도들은 빌레몬서를 통해 깨닫아야하는 중요한 영적교훈이 있읍니다.
이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자신이 유익한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무익한 삶을 살기를 원하는 사람은 단 한사람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앞에 그리고 이사회와 국가에 유익한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유익한 사람이 되기를 원한다고 해서 다 유익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무익하고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끼치는 사람들이 더욱 많읍니다.
21세기 민족의 숙원인 통일을 바라보는 이시점에 살아가고 있는 우리모든 충현의 성도들은 유익한 자들이 다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유익한 사람이 될수 있읍니까?
첫째:예수안에서 거듭 태어나야만이 유익한 사람이 될수가 있읍니다.
오늘 본문에 오네시모라는 사람의 이름이 등장합니다.
그를 가리켜 사도바울은 전에는 무익한 사람이 였다고 말합니다.
그의 과거는 빌레몬집의 노예였습니다.
그는 주인의 사랑을 져버리고 주인의 재물을 훔쳐 달아난 도망자 였습니다.
이로 볼때 그는 무익한 자일뿐만 아니라 주인에게 해를 끼치는 자였읍니다.
이 노예는 자유인으로 마음껏 살고싶어서 주인의 재산을 훔쳐 달아났습니다.
그는 주인에게 불만이 있어서라기 보다는 자유인으로 마음껏 살고싶어서 주인의 재산을 훔쳐서 달아났습니다.
그는 당시 세계적인 수도였던 로마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그는 곧 로마의 화려한 상점들과 주점들에 현혹되었을 것입니다.난생처음으로 돈을 마음껏 썼읍니다.그는 밤마다 마시고 취하고 즐기면서 로마의 밤거리를 누비며 다녔습니다.
그러나 흥겹고,만족하리라고 상상했던 환락과 자유의 생활대신에 그에게 찾아온 것은 설명할수 없는 고독과 불안과 허무함뿐 이였읍니다.
어느날 삶의 무의미와 절망의 늪에서 몸부림치던 이 오네시모에게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그는 방탕과 쾌락을 통해서 얻지못했던 참된자유를 얻게 되었습니다.
뿐만아니라 술과 여인과 도박과 유흥이 가져다 주지 못한 기쁨과 평안을 얻었습니다.
오네시모의 이변화는 한 사람을 만남으로부터 비롯되었습니다.
오네시모가 만난 사람은 바울이 였습니다.
바울을 통해 그리스도 예수를 만난것입니다.
오네시모가 어떻게 옥중에 갇힌 바울을 만났는지는 알수는 없지만 바울은 오네시모를"갇힌중에 낳은 아들"이라고 했습니다.
오네시모는 바울을 통해 그리스도 예수안에 거듭태어나게 된것입니다.
인생의 참된변화는 예수안에 거듭날때만이 가능합니다.
무익한 사람이 유익한자가 되는것은 예수님을 만나 거듭날 때만이 가능합니다.
교육으로 안됩니다,법으로도 되어지지 않읍니다.교양으로나 상식으로 되어지는 일이 아닙니다.
영혼의 근본적인 변화가 이루워져야 하는 것입니다.
1.오네시모"그의 신분은 노예였읍니다.
그 이름의 뜻은 "유익한자""도움이 되는"라는 의미입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이름 값을 못하는 사람이 였읍니다.
아마 오네시모의 부모들은 그 이름을 지으면서 놀라운 기대를 가지고 지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 이름의 기대를 져버리고 말았읍니다.
우리 인생이 예수님을 참으로 만나지 못하면 아무리 이름을 잘지어도
그럴듯한 기대를 가지고 자녀들의 이름을 지어도 무익한 자가 될 뿐입니다..
예수님을 만난 오네시모는 어떻게 변하였읍니까?
"저가 전에는 네게 무익하였으나 이제는 나와 네게 유익하므로"라고 바울이 증거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예수그리스도를 진정으로 만나고 그분안에서 변화될 때만이 비로소 유익한 존재가 될수 있읍니다.
우리는 예수님 만나기 전에는 무익한 자 였읍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남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유익한 존재 주님이 쓰시기에 합당한 "오네시모"가 된것입니다.그러므로 이것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입니다.
만약 우리가 현재 타인에게나 교회에 그리고 사회적으로 조그마한 유익이라도 끼치는 존재가 되었다면 그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되어진 것입니다.그모든 영광을 나를 거듭나게해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우리는 다 주님의 오네시모(유익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어떻읍니까?정말 주님 보시기에 유익한 존재입니까?하나님의 나라에 필요한 존재입니까?
오네시모는 참으로 유익한 사람이 되었읍니다.
그는 바울을 만나 복음을 듣고 예수를 믿어 변화되어 이름값을 하는 사람이 되었읍니다.
우리는 오네시모의 모습에서 나자신의 모습을 발견할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를 받은 오네시모!
전에는 주인의 돈을 훔쳐달아나며 주인의 마음에 아픔만 주는 자였으며,하나님의 일에는 상관도없는 삶을 살았던 자 였읍니다.
그러나 이젠 바울의 충성스런 동역자가 되었읍니다.
그는 무엇보다도 하나님께 쓰임받는 자가 되었읍니다.
우리는 오네시모에게서 회개한 사람의 참 모습을 발견할수 있읍니다.
주님을 향한 그의 삶은 방향을 온전히 돌이킨 사람이였읍니다.
그래서 바울도"저가 이제는 유익한 존재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나의 아들입니다.복음의 사역을 위해 함께 일하는 나의 심복이 되었읍니다."고 했읍니다.
오네시모는 바울의 사랑받는 사람이 되었읍니다.
그리고 이젠 없어서는 안될 귀한 존재가 되었읍니다.
둘째로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용서할줄 아는 사람이 유익한 사람입니다.
바울이 오네시모를 옥중에서 전도하여 믿음의 아들로 삼았읍니다.
오네시모는 믿음의 사람이 되었고 바울에게 특별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직도 처리해야할 일이 남아 있습니다.
그것은 과거의 주인 빌레몬과의 문제입니다.
과거의 주인 빌레몬의 용서를 받는 것입니다.
이문제는 결코 쉬운일이 아닙니다.
그당시의 노예제도를 기억해야 합니다.
당시는 노예는 사람이 아니라 살아있는 도구에 지나지 않습니다.
주인은 노예를 살리고 죽일 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당시 역사가들의 기록을 살펴보면,
베디우스 폴리오라는 사람이 노예를 어떻게 다루었는가를 기록하고 있는데...
"한 노예가 수정으로된 술잔쟁반을 안뜰로 나르다가 그중 하나를 떨어뜨려서 깨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그 주인 폴리오는 즉시 그를 뜰 중앙에 있는 연못으로 집어던져 버리라고 명령을 했읍니다.그 연못에 사나운 악어들이 그를 갈기갈기 찢고말았습니다".
유베날은"노예들이 잔인한 채찍으로 괴로워 울부짖는 소리는 어떤 노래잘하는 가수의 노래소리 보다 듣기 좋은 것"이라고 했읍니다.
이처럼 로마제국이 노예억압 정책을 쓸수 밖에 없었던 것은 로마내에 6천만명의 노예가 있었는데 이들이 끊임없는 위협이 되었읍니다.만약 폭동이 일어난다면 큰 문제가 아닐수 없었읍니다.그래서 반앙적인 노예는 즉시 제거되었읍니다.그리고 노예가 도망을하다 잡히면 도망자를 뜻하는 첫글자 F자를 빨간인두로 이마에 낙인을 찍고 주인의 용서가 있어야 죽음을 면했읍니다.
바울은 이모든 사실을 잘알고 있었고 빌레몬이 비록 크리스찬이지만 오네시모를 돌려 보넨다는 것은 무시못할 모험이라는 것을 잘알고 있었읍니다.그래서 바울은 오네시모를 용서해주길 간절하고 눈물겨운 호소를 담은 서신을 빌레몬에게 보냅니다.
빌레몬서의 기록목적은 빌레몬에게 도주한 노예 오네시모를 관대하게 용서하라는 바울의 요청입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사람이 다른 사람을 용서한다는 것은 쉽지만은 않은것 같읍니다.
한사람이 다른 사람을 용서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문제인것 같읍니다.
또한 세상사람들이 성도들을 조롱할때 "우리는 막걸리 한잔을 마시면서 다 털어버리는데...예수믿는 사람들은 그렇게도 못하고 두고보자 한다고"고 조롱합니다.
오늘날 수 많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 용서해 주지 못함으로 인한 마음의 괴로움을 상담해 옵니다.용서하지 못해 미움이 되고,증오가 되고 한이 ꂙ혀있읍니다.
사단과 귀신의 세력에 눌린 사람들을 보면 두가지 이유가 있읍니다.
첫째;도덕적 육체적 잘못된 삶으로 말미암아 자기 양심이 죄책에 시달릴때 사단의 세력이 틈탑니다.
둘째:다른 사람이 자신에게 준 큰 고통으로 아음에 상처를 입었을 때,그것이 쓴 뿌리가 되고,그것을 용서해 주지 못함으로 미워하고 증오하며,그것이 한이되어 사단의 세력에 눌리는 것을 봅니다.
오늘날 이시대의 사회와 교회는 그 어느 때 보다도 용서와 사랑이 필요한 시대입니다.
미움과 증오의 악한 영이 역사하는 이 사회속에 빌레몬서는 너무도 분명한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를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편지를 받는 사람은 빌레몬입니다.빌레몬이란 이름의 뜻은 "사랑을 간직한자"라는 뜻입니다.
빌레몬은 바울에게 있어서 두가지를 감사하게 하는 자였읍니다.
5절에"주예수와 및 모든 성도에 대한 네 사랑과 믿음이 있음을 들음이라"
바울은 말합니다.
"빌레몬이여! 네게 사랑이 있고 믿음이 있다는 사실 때문에 나는 하나님께 감사한다"
빌레몬은 목회자로 감사의 기도가 나아오게 하는 자였읍니다.
6절에"이로써 네 믿음의 교제가 우리가운데 있는 선을 알게 하고 그리스도께 미치도록 역사하느니라"
바울은 빌레몬의 믿음과 사랑을 칭찬하면서 네가 가지고 있는 믿음의 교제를 통해 구체적으로 그리스도의 사랑을 입증하도록 격녀합니다.
여기 "믿음의 교제"라는 말이 나아옴니다.이교제는 헬라어로 우리가 잘아는 코이노니아라는 단어가 쓰였읍니다.이 코이노니아라는 뜻은 3가지의 의미를 가지고 사용됩니다.
첫째:함께한다.공동으로 무엇인가를 한다는 것입니다.이를 태면 사업을 공동으로 한다 그래서 이것은 그리스챤이 신앙을 함께한다는 뜻으로 쓰입니다.
둘째는:친교를 나타냅니다.초대교회 성도들이 떡을 서로 때면서 교제했다는 친교의 의미입니다.
세째는 나눈다는 의미가 있읍니다.나누워 주는 행동을 의미합니다.
우리 크리스찬의 자기희생 즉 나눔과 베푸는 삶을 의미합니다.
본문의 믿음의 교제란 나눈다는 성도의 자기희생적인 나눔의 삶 세번째 의미를 뜻합니다.
즉 빌레몬의 믿음은 자기희생적인 나눔을 통해 용서로 나타나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사실을 통해 바울은 용서란 그냥 댓가없이 이루워 지는 것이 아니라
용서란 자신의 아픔을 감당하는 희생을 통해 이루워지는 값비싼 댓가를 지불 할 때만이 가능한 것이라는 사실을 말씀해 줍니다.
하나님께서도 저와 여러분을 용서하실 때 무조건적인 사랑으로 용서하셨지만 값비싼 희생과 댓가를 치루셨읍니다.
요3:16"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는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하심이니라"
롬8:32"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시지 아니하겠느뇨"
요일3:16절"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용서하실 때 값비싼 댓가를 치루시며 희생을 감수 하셨읍니다.
빌레몬은 자기 희생을 통해 그리스도의 사랑과 믿음의 삶을 드러내는 자였읍니다.
자신에게 큰 손해를 끼친 오네시모를 용서할 뿐만 아니라,이제는 종이아닌 사랑안에서 형제로 용납하는 관용을 보였읍니다.
원래 죄인이였으나 그리스도의 은혜로 하나님의 자녀가된 성도는 이같이 그리스도께서 자신에게보여준 용서와 사랑을 실천할때 유익한자가 됩니다.
세째:중보자의 사명을 감당하는 자가 유익한 자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빌레몬과 오네시모의 중간에 서서 화해를 중재하는 바울의 모습을 볼수 있읍니다.
이는 다름아닌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서 화목제물이 되신 십가가의 우리 예수그리스도의 모습을 연상케 합니다.바울의 이 모습은 바울안에 살아 있는 예수님의 모습이요,바로 이 모습이 우리안에 있어야할 살아계신 작은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성도는 이 시대의 가정과 사회와 국가에 있어서 사랑의 중재자입니다.
신앙인의 참된의미는 중보자의 사명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이사회에서 성도의 역활은 화평케 하는 자입니다.
"화평케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아들이라 이컫음을 받을 것이요"(마5:9)
어떤 사람은 그사람이 들어가는 곳마다 말이 생기고 마음들이 나뉘어지고 분열이 생기는 사람들이 있읍니다.똑똑하기는 한데....일은 열심히 하는데....분쟁과 다툼이 일어난다면...
그같은 사람은 아직 성숙하지 못한 그리스도인이요,예수그리스도의 모습과는 거리가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어떤 사람은 그 한사람으로 인해 나뉘어 졌던 생각들이 하나로 묶어집니다.
분쟁과 다툼이 있던 곳이 그 사람이 들어오고 부터 화목해지고 하나되어집니다.
이사람은 유익케하는 사람이요,성숙한 사람이요 중보의 역활을 잘 감당하는 사람입니다.
이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성도들의 삶은 중재자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오늘은 국가적으로나 민족적으로 매우 중요한 시기라고들 입을 모아 이야기들 합니다.
민족의 숙원사업인 통일이,
그어느 때보다도 통일의 길이 가시적으로 보여지는 시기 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통일을 준비해야 한다고들 합니다.
북한 체제에 대해 매우 조심스럽게 이야기하는 미국의 CIA국장이 북한의 김정일 정권이 무너질수도 있다고 이야기 합니다.
기독교 어떤 단체에서는 통일에 대비해 북한 주민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통일적금"들기 운동을 펼치고 있읍니다.
통일을 위한 우리 성도들의 구체적인 준비가 필요한 시점인것 같읍니다.
그러나 외형적이고 가시적인,그리고 물질적인 준비에 앞서서 절대필요한 준비는 바로 영적인 준비입니다.
어째던 두체제는 과거에 총뿌리를 서로겨누며 피를 흘렸던 원한이 있읍니다.
우리 성도들의 사랑과 용서의 영적인 준비가 먼저 일어나야 합니다.
이 화해와 용서의 준비가 다될때 하나님은 통일의 복된날을 이 민족에게 허락하실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이 남과 북의형제를 끌어안는 중보의 기도가 충만할 때 두동강난 한반도는 하나가 되는 역사가 일어날줄로 믿읍니다.
우리는 바로 나자신이 예수안에 거듭난 자입니다. 예수님의 보혈로 용서받은 오네시모인것을 깨닫아야 합니다.
저와 여러분은 다 예수안에 무익하던 삶이 유익한 삶으로 변화받은 자들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혹은 역사의 현장에서,
빌레몬처럼 어떤 희생을 지불하고서라도 이 피의 역사를 용서하고 하나되겠다는 각오가 있어야 합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
바울의 중보의 모습가운데 우리를 향하신 예수님의 중보자의 모습을 깨닫고
죄악된 세상에서 죄를 먹고 마시며 살고있는 이웃형제 자매들을 위해 중보의 눈물을 흘리는저와여러분의 삶이 될때 우리의 무익한 삶이 유익한 자로써 놀라운 변화가 이루워 진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