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경 : 요한복음 전체

믿음의 본질

사람이 원래부터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어떤 신뢰를 통해서 믿음이 창조되는 것이다. '나는 도저히 아무것도 믿을수 없다'는 사람이 있다. 세상의 어떤 것도 믿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이 사람도 왼전한 신뢰를 만나면 믿음이 생기는 것이다. 믿음이 창조된다.

이것을 보면 믿음은 피처럼 원래 몸속에 있는 것이 아니고 어떤 것이 옴으로 인해 그것에 대한 반응으로 믿음이 생겨나는 것이다. 이렇게 새롭게 창조되는 것을 우리는 '인격'이라고 한다. 피가 창조된 것은 자연에 속한 창조이지만 인격이 창조된 것은 자연의 창조에 속한 것이 아니고 새 생명의 창조이다. 이것이 거듭나는 것이다. 우리가 예수를 만나지 않으면, 하나님 마음을 만나지 않으면 영원한 생명을 가지기는 불가능 하다. 그리스도의 인격을 나타내는 것이 불가능 하다. 대체로 사람들은 하려고 하면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예수도 했기 때문에 자신들도 노력하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오해이다.

사랑을 불러 일으키는 요소가 없이 노력만 가지고 사랑이 나오지 않는다. 어린애는 공연히 울지 않는다. 울수 밖에 없는 자극을 받았기 때문에 우는 것이다. 우리 몸에서 열이 난다는 것도 어떤 원인에 대한 반응일 뿐이다. 사랑은 공연히 생기는 것이 아니다. 어떤 것이 와서 자극을 하기 때문에 사랑이라는 반응이 생기는 것이다. 이것이 창조이다.

얼마전 어느 분과 이야기를 하게 되었는데 그분의 말씀이 자기는 누가 자기에게 다가오면 그에게 최선을 다하노라고 말하였다. 이분의 말씀을 다른 면으로 생각하면 자기를 떠나는 사람은 붙잡지 않는다는 말이기도 하다. 이 분의 말씀을 듣고 나는 창세기의 "빛이 있으라 하니 빛이 있었다" 는 말씀이 생각났다. 이 말씀은 창조를 말하고 있었다. 빛이 없었기 때문에 빛이 있도록 한 것이다.

나는 그 분에게 창세기 1:3 을 이야기 하게 되었다. 그 분은 곧 내 말을 알아듣고 자기는 그 동안 창조된 사랑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 외에 덧 붙인 사랑만 했노라고 고백하게 되었다.

그리스도의 인격은 창조이다. 어린 아이가 태어난 후 어떻게 그의 인격이 창조되는가? 육체는 젖을 먹고 밥을 먹고 자라지만 그 인격은 우리의 마음을 만남으로 창조 되게 된다. 사람은 원래 긍정적인 것도 아니고 부정적인 것도 아니다. 그리고 선한 것도 아니고 악한 것도 아니다. 그 사람 속에 어떤 것이 들어가느냐에 따라 선하게 되기도 하고 악하게 되기도 할 뿐이다. 어떤 마음과 부딛쳤느냐에 따라 사랑하는 사람이 되기도 하고 미워하는 사람이 되기도 한다. 선한 사람이나 악한 사람이나, 사랑하는 사람이나 미워하는 사람이나 피가 다른 것이 아니다. 간혹 개를 대단히 싫어 하는 사람을 보게 되는데 그는 과거에 개에게 물린 적이 있다고 말한다. 원래 그런 성질을 타고 난 것이 아니고 크게 혼이 난 경험때문에 개를 싫어 하는 성격이 생긴 것이다. 사람은 원래 무엇을 가지고 태어나는 것이 아니다. 아무 것도 없는데 누군가가 와서 사람속에 반응을 일으켜서 무엇이 있게 한것이다. 없던 것이 생겨난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부르시는 분이시다.

없던 사랑을 있게 하고 없던 믿음을 있게 하신다.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를 바라보자" 는 말씀도 예수 자신이 믿음의 창조자라는 말이다. 사람들은 많은 기사와 이적을 잘 믿는다. 그러나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만은 믿을 수가 없다. 다른 믿음은 다 가졌지만 이 믿음은 가질 수가 없다. 바로 이 사실을 믿게 해 준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도저히 믿을 수 없었는데 그로 인하여 믿음이 생겼다.

우리는 자신을 생각해볼 때 사람이 하나님일 수 있다는 개념이 없다. 사람속에서 하나님님의 성분을 찾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어떤 교회에 가 보면 가난했다가 부자가 되는 믿음도 있고 병자를 고치는 믿음도 있고 죽은 자를 살리는 믿음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이 사람되는 믿음은 볼 수가 없다. 예수는 특별한 사람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람이 될 수있지만 다른 사람은 절대로 그럴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것이 사탄의 계략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 사람되신 분인 것을 믿는다면 우리 자신도 하나님이 사람된 존재인 것을 믿어야 한다. 이 사실을 믿게 하기 위해서 예수 자신이 하나님이 사람되신 것을 보여 주신 것이다. 이것이 십자가의 죽으심이다. 만일 이것을 보여 주시기 위함이 아니라면 그는 십자가에 죽으실 필요가 없으시다. 예수님의 죄명이 참람함이었다는 것은 그가 사람이면서 하나님과 하나라고 말했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하나님을 비하시킨 것이고 멸시한 것이기 때문에 그를 죽일 수 밖에 없었다.

우리가 예수 죽은 것을 헛되지 않게 하려면 우리는 이 사실을 확실히 믿지 않으면 안된다. 예수님이 병자를 고쳤다는 것만 믿어서도 않되고 오병이어(五餠二魚)의 기적만 믿어서도 않된다. 그가 하나님에게서 나온 사람으로만 믿어서도 안된다. 예수께서 죽으신 것은 그가 부활하심으로 온 인류가 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믿게 하려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이 땅위에 어떻게 하나님 나라가 임하겠는가?하나님아들이 예수님 혼자 뿐이라면 2000년 후인 지금, 어디에서 예수의 나라를 찾을 수 있겠는가? 우리자신이 예수이지 않으면 그의 나라가 될 수 없다.

개의 왕국은 개들이 사는 나라이다. 하나님왕국은 하나님이 사는 나라이다. 예수의 왕국국이란 예수로 가득찬 나라를 말한다. 이것이 비밀이다.

적그리스도의 영이란 하나님이 사람된 사실을 믿지 않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께서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지 않는 것, 예수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부인하는 것이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요1:1-3)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그로 지어진 나도 하나님 없이 지어진 것이 하나도 없다는 말이다. 알콜이 없이는 술을 만들 수 없는 것처럼 하나님 없이 된 사람은 없다. 창세기 2:7에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모든 사람은 숨이 불어 넣어진 존재이다. 즉 하나님이 불어넣어져서 만들어진 존재라는 말이다. 이렇게 창세기에서는 하나님을 숨으로 표현하고 있지만 이 책의 저자인 요한은 '그가 없이 된 것이 없다'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산 혼이 되는 것일까?

이 말의 뜻을 사람이 어떤 물건을 만들듯이 생각해서는 안된다. 예를들면 시계가 사람에 의해 만들어졌지만 그것은 사람의 인격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고 그의 기술로 만드어진 것이다. 생기란 하나님자신의 생명이기 때문에 우리가 산혼이 되었다는 것은 우리속에 하나님의 생명이 들어온 것이지 하나님의 기술이 좋아서 우리를 만들었다는 말이 아니다. 우리는 그의 아들이지 그의 작품이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창조의 개념을 기술적 개념으로 오해하고 있다. 하나님이 기술이 좋아서 우주만물을 지었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개념은 표면적일 뿐이다. 모든 만물은 하나님자신으로 말미암아서 지어졌다. 하나님자신이 없이 지어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므로 지어진 모든 것속에는 하나님자신이 포함되어있는 것이다. 풀 한포기에도 나무 한그루에도 다 하나님의 성분이 들어있다. 그러나 이 말을 하는 것은 풀이나 나무를 말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요한 자신을 말하고저 함이다. 요한자신이 하나님의 기술적 작품이 아니고 그의 자신을 물려 받은 아들이라는 사실을 선포하고 있다.

하나님은 생명을 주시는 분이다. 씨가 죽어서 나무가 되듯이 자기가 죽어서 생명이 되셨다. 씨는 기술이 좋아서 나무를 만든 것이 아니다. 씨자신이 죽었는데 나무가 된 것이다. 그러므로 나무속에는 씨없이 된 것이 하나도 없다. 물론 나무를 아무리 뒤져보아도 씨의 모양은 없지만 씨없이 된 것은 아무 것도 없는 것이다.

사람속을 아무리 튛어보아도 하나님을 볼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없이 된 것은 하나도 없다. 우리속에 하나님의 씨가 들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어느날 하나님의 마음과 우리의 마음이 부딪치면 거기에서 하나님의 마음이 생겨난다. 이것이 두번째 창조이다.

내재해 있던 하나님의 마음이 원래의 아버지를 만나면 숨어있던 하나님의 마음이 솟아나게 된다. 지금 우리는 이 창조안으로 부름 받고 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라는 말씀 안으로 부름 받고 있다.

우리는 감나무에서 감을 볼 수있다. 해마다 열리기 때문에 그 나무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매년 감을 볼 것이라는 믿음을 갖게 된다. 혹시 배가 열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감나무에서는 감이 열린다. 이것이 생명이다. 모든 생명체는 그것마다 생명의 특성을 가지고 있다. 개는 사람이 쓰다듬어 주면 꼬리를 흔들고 소는 쓰다듬어 주면 '음매'하고 운다. 이렇게 모든 생물에게 사람의 마음을 주어보면 각각 그에 따른 반응이 다르게 일어난게 된다. 사람의 마음도 마찬가지로 어떤 마음이 전달됐을 때 그 사람에 따라서 그에 대한 반응이 감사이기도 하고 혹은 분노이기도 한 것을 보게 된다. 이것 역시 생명이 다르기 때문이다. 물질의 세계에서도 같은 시약이지만 반응하는 물질에 따라 전혀 다른 색깔과 반응이 나오듯이 사람도 같은 마음으로 다가가지만 어떤 사람이냐에 따라 반응이 다르게 나타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우리는 그리스도의 향기라고 말한다. 사방에 풍기는 향기인데 어떤 사람에게는 생명을 좇아 생명을 풍기는 냄새이고 어떤 사람에게는 사망을 좇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가 되더라는 것이다. 마음은 하나였는데 한쪽은 생명으로 한쪽은 사망으로 반응하더라는 것이다. 내가 어떠한 생명을 가졌느냐에 따라 나타나는 반응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있다. 개는 개이상의 반응을 할수없고 소는 소이상의 반응을 할 수 없다.

사람은 원래 타고난 생명을 가지고 있다. 그 생명을 다른 생명으로 바꾸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바뀌어져야 한다. 아담의 생명이 아닌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바꾸어질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타고난 우리의 생명은 돌감나무라 할 수있다. 돌감나무에 거름을 주고 비료를 주고 가지를 쳐서 정성을 들인다면 그것은 헛수고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우리자신이 돌감나무인 줄 알았으면 그것을 잘라내고 단감나무의 가지로 접을 붙여야 한다. 원래 우리가 가지고 있던 생명은 하나님을 반응할 수 없는 것들로 가득 차있었다. 이 생명은 잘리고 하나님을 반응하는 생명으로 접부쳐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타고난 생명을 부인해야 한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는 말처럼 나를 부인하고 그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의 생명이 그의 생명으로 바뀌는 것이 필요하다.

"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먼저는 생명이고 다음은 마음이고 그 다음은 말씀이 있는데 그 말씀이 다른 사람의 마음에 부딪쳐서 그 마음속에서 빛이 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이 재 창조이다. 지금 우리는 재 창조안에 있다. 이 새 창조안에서 예수의 말을 들을 때 그 말씀이 하나님의 마음으로, 하나님의 생명으로 우리안에 들어 오게 된다. 이것이 곧 우리의 양식이다.

나는 여러분에게 참으로 많은 말을 하고 있다. 물론 여러분의 귀를 즐겁게 하기위함이 아니고 내 마음을 여러분에게 알리기 위함이다. 여러분이 내 마음을 알아서 먹기를 원한다. 예수님도 '내 살을 먹지 아니하면' 이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그 의미가 그의 말을 먹고 그의 마음을 알아서 그의 생명을 먹어야 된다는 말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먹는 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먹는 것이고 하나님의 말씀을 먹는 것은 하나님의 생명을 먹는 것이다.그러므로 우리는 말씀을 먹는 동안 우리안에 생명이 생기고 그 생명이 자란다는 것을 알게 된다.

사람은 태어나면서 부터 무슨 말이든지 듣고 살아 왔다. 말을 먹고 살아 온 것이다. 이것이 현재의 나를 조성하고 있다. 말을 듣는 것은 참으로 중요하다. 우리가 어떤 말을 들었느냐에 따라 하나님 말씀을 알아 듣기도 하고 알아 듣지 못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세상의 말을 잔뜩 듣고 하나님 말씀을 듣으면 이상하게 짜증도 나고 분이 나기도 한다. 좋은 예로 유대인들은 아주 오랫동안 조상들로 부터 많은 말을 들어 왔는데 그로인해 어떤 마음이 생기게 되었다. 그래서 예수가 그들을 살리고자 왔을 때 그들은 오히려 네가 우리를 죽이려 하는구나 라고 분을 내었던 것이다. 오랫동안 들어왔던 말이 그던 말이 예수를 받아들일 수 없는 마음이 되었고 마침내 자기들이 살기위해 예수를 죽이고 말았다. 이렇게 '말씀'은 중요한 것이다.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한다는 것이다.

말은 그냥 듣기만 해서는 안된다. 말하는 사람의 마음을 알아듣는 것이 그 말을 먹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성경대로 살아야 한다.'는 말은 말은 맞지만 마음이 없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생명이 되지 못한다. 어떤 형제가 내게 문제를 가지고 왔으때 만일 내가 " 형제여 성경에 ....게 기록되어 있으니" 라고 대답했다면 그 형제의 마음은 어떠하겠는가? 성경지식은 많아지겠지만 내 마음은 전달되지 않게 된다. 우리의 문제는 성경을 모르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마음이 없은 것이다. 혹시 성경에 없는 말이라도 그리스도의 마음이 담긴 말이라면 그 말은 하나님의 말씀이 되어 그 형제를 시원하게 할 것이다. 그의 생명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 형제안에서 새 창조가 시작될 것이다.

하나님의 마음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하게 된다. 그리고 그 말씀을 들으면 내 속에 하나님의 생명이 심겨지는 것을 알 수있다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온 것은 영원한 생명이다. 그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어진 마음은 우리에게 말씀이 되었고 그 말씀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표현하고 있다.

( 생명 강물 보좌에서 )

생명강물 보좌에서 흘러내리네

강좌우에 생명나무 열매가득해

다시밤이 없고해와 등이없어도

주는곧 빛되시네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길

곧오라 듣는자 오라하시네

목마른 자와또 원하는자는

값없이 생수마 셔

그침없이 솟아나는 그리스도는

우리의강 우리의물 우리의나무

낮과빛과 새벽별이 되신그리스도

우리의모 든것돼

생명안에 거하므로 주를누리네

달콤하고 놀라우신 주를맛보네

그의피를 믿음으로 두루마길빨아

생명의나 무얻어

해보다도 더빛나는 우리집에서

형제자매 연합하여 하나되었네

주는우릴 한데묶어 우리주나타내

풍성한 교제로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편히 쉬게 하리라."는 말씀이 들려 올 때 그 말을 하는 사람이 어떤 사람이냐에 따라 우리에게 아멘이 되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다. 예를 들어 도둑질 하러 온 사람이 주인에게 이 말을 했다고 생각해 보자. 분명히 성경에 있는 말이지만 주인이 쉴 수있는가. 이와같이 말을 듣는 것은 말의 내용이 아니고 말하는 사람의 마음이다. 어떤 형제가 목사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이 진실하게 느껴졌다고 하자. 그것은 목사님의 말씀이 옳기 때문이 아니고 그 분의 마음이 믿어졌기 때문이다. 그 분이 정말자기를 쉬게 하고 싶은 마음이라고 알아졌다는 것이다. 이렇게 우리는 사람의 마음을 통하여 하나님의 마음을 받아들인다. 하나님만이 우리를 무거운 짐에서 쉴수 있게 할수 있다. 왜 사람은 사람을 쉬게 할수 없을까? 사람은 태어날 때 부터 율법아래 있다. 그래서 우리자신 속에 율법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율법을 가지고 있는한 나는 다른 사람을 쉬게 할수 없다. 말로는 편하게 해 주마 라고 말할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를 편하게 할수 없다. 내속에는 온통 율법으로 짜여져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쉬게 할수 없다. 그래서 모세는 짐진자들을 쉬게 해준다는 말을 할수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온통 그의 속이 평안으로 채워져 있다. 은혜와 생명으로 채워져 있다. 이런 사람이기 때문에 짐진자들을 쉬게 할수 있었다. 이 말을 받아들인 사람은 복된 사람이다. 그런데 우리가 세상에 나가 그들의 짐을 벗게 하고 싶은 마음으로 이야기를 하는데 그들은 그 짐을 벗고 싶어 하지 않는다. 짐을 너무 오래 지고 있었기 때문에 오히려 그 짐을 벗게 되면 죽을 것 같은 생각을 하는 것이다. 거지들이 누더기를 오래 입다 보면 오히려 그들에게 그 누더기가 더 편리해 지고 누가 와서 그 누더기를 벗고 새 옷을 입으라 하면 불안해 하는 것과 같다. 사람은 어떤 관념이나 습관에 오래 젖어 있으면 그것이 변할 수없는 진리로 여겨지게 된다. 그래서 참 진리가 와도 그것에서 벗어나려고 하지 않는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벗게 하려고 해도 벗으려 하지 않는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은 다 내게로 오라" 하시는 주님의 말씀이 들리지 않는다. 인생을 쉬게 하시려는 주님의 마음을 받을 수없다.하나님은 진심으로 우리를 평안케 하고자 하신다. 공중에서 바라보면서 말씀만 하고 계시는 것이 아니고 친히 사람으로 다가 오시는 것이다.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는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다.' 라는 말씀처럼 평안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오는 것이다. 하나님안에 평안이 있지만 그것이 나와 하나님사이에 중보된 사람이 없이는 올 수없다는말이다.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평안이 사람을 통하지 않고 우리에게 올 수없다.하나님은 은혜와 실제를 통해서 나에게 다가왔다. 그 다가온 사람이 없이 우리는 평안을 경험할 수 없다. 하나님은 우리가 쉬기를 원하지만 실제로 그런 사람이 우리앞에 있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쉴 수없다. 죄문제도 마찬가지다. 어떤 형제가 내게 죄를 지었을 때 그가 하나님께 기도하고 나서죄를 용서 받았다고 믿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내가 용서해야 용서가 되는 것이지 하나님께 기도했기 때문에 용서되는 것은 아니다. 물론 하나님은 항상 용서하고 계시다. 그러나 나를 통하지 않고 그 효력이 발생하지 않는다.

마치 법은 항상 있는 데 그것이 집행될 때는 반드시 경찰관을 통해서 실행되는 원리와 같다.

법의 옳고 그름이 법관과 경찰관을 통하지 않고 효력을 발생시킬 수 없다는 것이다. 사람이 없이 하나님의 어떤 것도 집행되지 않는다. 하나님은 사람을 통하여 자기자신을 집행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사람 속에 자기자신을 주어서 그 사람으로 집행하게 하신다.

하나님의 마음을 만난 사람이 그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집행하게 된다.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을 통해서 표현된다.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을 통해서 인격을 창조하신다. 그 창조된 인격은 곧 하나님의 마음이다. 우리들은 이 마음안에서 하나님을 구체적으로 만지게 된다.

하나님이 자비로운 분인 것은 누구이든지 알고 있다. 하나님이 사랑이 많는 분이라는 것은 누구든지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사실을 안다해도 만일 그 마음을 전달해 줄 사람이 없다면우리 하나님의 마음을 깨달을 수 없다. 형제들의 사랑과 자비가 없이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깨달을 수 없다. 그러므로 형제를 받아들이지 않고서는 하나님을 알 수없다. 하나님의 마음을 모른다는 것이다. 이것은 고아로 사는 길이다. "내가 너희를 고아처럼 버려두지 아니하고 나 있는 곳에 너를 영접하겠다" 고 예수님은 말씀하고 있다. 예수 자신이 하나님 마음을 가졌기 때문에 우리를 고아와 같이 버려 두지 않는 다는 말씀이다. 우리에게 마음이 없다면 우리는 아버지 마음을 가질 수 없다. 그리고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고아가 될 것이다.

우리에게 하나님 마음이 왔다는 것은 모든 사람들을 친 아들로 만들 수 있음을 말한다.부모에게 태어날때는 육신으로 태어났지만 거듭날 때는 하나님의 마음으로 된다. 하나님의 마음이우리속에와서 생명이 되고 그생명은 우리안에 와서 변화를 일으키게 되다. 종의 생명에세 아들의 생명으로 바꾸어 지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종의 생명으로 하나님 마음을 반응하는 것과 아들의 생명으로 하나님의 생명을 반응하는 것은 너무 다르다. 아버지의 마음이 아들에게 전달될 때는 아들로 나타나지만 종에게 전달될 때는 종으로 나타난다. 종은 아무리해도 아버지 마음을 받을 수 없다. 마무리 자비롭고 사랑둁을 베풀어도 종에게는 그것들이 모두 일잘하라는 말로 들리는 것이다. 주인이 '나와 같이 밥을 먹자' 고말한다 해도 종의 귀에는 일을 잘해야 한다는 말로 들리고 ' 옷을 잘 입어야 한다'는 말도 일을 말도 일을 잘해야 한다 는 말로 들리게 된다. 그러나 아들은 아버지가 욕을 한다해도 너는 내 아들이다는 말로 들린다. 이 얼마나 큰 차이인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전환될 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달콤하게 들린다. 아버지의 다정한 말로 들리게 된다. 이것이 인생의 가장 큰 축복이다. 할렐루야!! 떠오르는 태양을 바라보면서 종의 마음과 아들의 마음은 얼마나 다르겠는가?

하나님이 나타날 때마다 종의 자리에 있는 사람과 아들의 자리에 있는 사람의 마음이 하늘과 땅 처럼 다를 것이다. 우리들은 하나님이 나타날 때마다 얼마나 행복한가! 그를 피해 갈데가 없는 사람이기 때문에 우리들은 하나님이 나타날 때 행복히지 않을 수 없다. 땅에 속한 일 같으변 한국에서 미국으로 이민을 갈 수 있지만 인생의 운명은 다른 것으로 바꿀 수 없다. 하는 일이나 외형은 바꿀 수 있지만 인생이라는 틀은 바꿀 수 없다는 것이다.

다윗은 이것을 이렇게 고백하고 있다. " 내가 주의 낯을 피하여 어디로 갈 수있읍니까? 내가 새벽 날개를 펴고 바닷가에 갈지라도 여호와께서 거기 계실 것이며 내가 땅속 음부에 들어갈지라도 여호와께서는 거기 계실 것 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좋아지는 수 밖에 없다. 우리가 하나님을 물리친다고 해서 물러나는 분도 아니고 부인한다고 해서 없어지는 분도 아니다. 온 인류가 다 밀어내도 밀려나가지 않는 분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좋아져야만 행복하다. 하나님마음이 말씀으로 닥아올때 그 말씀이 달콤하게 여겨져야 한다. 이것이 가장 큰 축복이다.

다윗은 '주의 말씀은 꿀송이 보다 더 달고 정금보다 더 달다.' 고 노래할 만큼 하나님의말씀을 달콤하게 여겼다. '여호와의 법은 내 영혼을 소성케 한다.' '여호와의 법은 건축자의 버린 돌로 집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게 하였다.' 등의 말씀은 우리의 영혼을 소생 시킨다.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불러 내신다. 이것이 축복이다.

하나님은 우리 안에 무엇인가를 불어넣어서 우리속에서 복이 솟아나기를 隥하신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부르셨을 때 '내가 너로 복의 근원이 되게 할 것이다'라는 약속을 하셨다. 우리를 부르신 것도 마찬가지다. 말씀으로 인하여 마음이 생기고 마음으로 인하여 생겨난 생명은 우리의 영원한 복의 근원이 되는 것이다.

나는 내 자신이 선하고 옳다고 생각할 때는 고통뿐이었다. 그런데 어느날부터 나는 모든 일이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그다음부터 나는 내가 똑똑한 사람이 아니고 아무데도 쓸모가 없는 사람인 것을 알았다. 실제로 여기 저기 굴러다니는 인생이 되고 보니 나는 성경에서 말하는 ' 건축자의 버린 돌' 이 바로 나 자신인 것을 깨닫게 되었다. 만일 내가 버려진 적이 없다면 이 말씀이 무슨 뜻인 줄 알았겠는가? 도저히 알 수 없는 일이다. 그 말이 나 자신인 사실을 깨달을 수 없다. 이후로 나는 내가 성경속에 있다는 것을 알았고 점점 성경속에서 나를 발견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나를 너무 즐겁게 하였고 재수가 좋은 사람으로 만들었다.

아브라함속에서 내가 박견되고 이삭안에서 내가 발견되는 것은 너무 행복하였다. 성경속에 있는 모든 사건들과 사실들이 모두 우리 자신들이라는 사실은 너무 수지 맞는 일이다.

예수님이 성전에 올라가서 성경을 읽을 때 그 내용이 예수님 자신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같이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같아서 별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시지 아니하였도다.(이사야 53:2,3)우리도 성경이 우리들의 이야기로 보여질 때 그맛이 꿀과 꿀송이 같아 진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