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디아서 3장 6-14절 주해
I. 서론
역사적으로 갈라디아서는 바울의 이신칭의 복음에 대한 오해와 1세기 유대 기독교 상황에 대한 상대적 간과로 인해 상당 기간 동안 정당한 해석이 유보되어 왔다. 갈라디아서는 줄곧 "우리가 어떻게 하면 구원을 얻는가?"하는 추상적이고 일반적인 물음 속에서 연구되었으며, 그 답변 또한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전통적인 의미의 이신칭의(以信稱義)로 귀착되었다. 즉 '믿음' -'행위'라는 이원론적 대립 구조의 틀 속에서 이해되어 왔던 것이다. 그러나 최근 들어서면서 이러한 견해에 대한 일련의 비판이 가해졌다. 유대교의 구원론과 관련하여 큰 논쟁이 제기되었던 것이다.
부세트, 빌러백, 불트만을 비롯한 대부분의 대륙의 학자들은 유대교를 행위(行爲)로써 구원얻으려고 노력한 공적주의적인 종교로 간주하고, 바울이 유대교를 비평한 것은 유대교가 이렇게 율법의 선행으로 스스로 구원을 얻어보려고 노력한 행위 구원의 종교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래서 불트만은 유대인들이 '죄'에 빠진 것은 자신의 율법의 의(義)를 내세워 스스로 구원을 획득해 보려는 노력에 있다고 보고, 죄의 본질을 '자기 주장'(seif-assertion)으로 정의하였다. 이러한 유대교 해석은 영미 계통의 해석에도 크게 영향을 미쳐 거의 표준화되다시피 했다.
그러나 최근에 와서 이러한 유대교 이해는 여러 학자들에 의해 도전을 받고 있다(E.Sanders, J.D.G.Dunn, J.Barclay). 이들이 모두 동일한 주장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들의 공통분모는 유대교가 행위 구원의 종교가 아니라 분명한 은총의 개념을 가지고 있다고 본다는 것이다. 바울이 유대종교를 비판한 것은 그것이 행위 구원의 종교이기 때문이 아니라, 오직 언약의 축복이 유대인에게만 있기 때문에 이방인이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려면 할례를 받음으로 유대교의 개종자가 되어(갈2:14) 유대인의 신분 표지의 행위를 하면서 유대인처럼 살라는 유대인들의 선민족 배타주의(排他主義)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점은 논의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보다 자세히 언급될 것이지만, 미리 밝혀두는 것은 본 소논문이 후자의 주장 위에 기초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의 관심사는 갈라디아서 3장 6-14절의 주해이다. 그러나 주해에 들어가기 전에 본 서신과 관련하여 몇 가지 밝혀 두어야 할 것이 있다.
첫째로는 본 서신이 쓰여진 목적인데, 갈라디아서는 갈라디아 교회에 거짓 교사들이 침투해서 갈라디아 그리스도인들을 그들의 거짓 복음으로 설득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바울이 쓴 서신이다.
둘째로는 거짓 교사들의 정체인데, 이들은 갈라디아인들을 "요란케 하고"(1:7), "요동케 하고"(5:10), "어지럽게 한"(5:12) 장본인들로서, 하나님의 백성 곧 언약의 백성이 되기 위해서는 할례(언약의 표징)를 받아야 하며 유대적 생활 양식인 율법을 준수해야 한다고 가르친 유대주의자들(J udaizers)이다.
셋째로는 본 서신의 문맥인데, 갈라디아서는 편지 서문(1:1-5), 머리말(1:6-11), 진술부(1:12-2:14), 주장(2:15-21), 증명(3:1-4:31), 권고(5:1-6:10), 후기:결론(6:11-18)으로 구성되어 있다. 진술부에는 바울의 사도직 변호가 나오며, 이어 바울의 이신칭의 복음에 대한 주장(2:15-21)이 나온다. 그리고 이신칭의 복음에 대한 증명(3-4장)이 이어진다. 우리가 다루고자 하는 본문은 이신칭의 복음을 증명하는 부분 중 두 번째이다.
넷째로는 본 서신의 쟁점 사항인데, 본 서신은 이신칭의를 다루고 있지만 다른 각도에서 보면 그리스도의 사건이 새 언약의 제사로서 모든 인류를 위한 구원의 사건이냐(바울의 복음), 아니면 옛 언약의 성취로만 의미가 있느냐(거짓 교사들의 복음)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 사건에 대한 기독론적, 구원론적 논쟁이다.
II. 문제 제기
이제 우리의 관심사인 갈라디아서 3장 6-14절을 살펴보도록 하자.
먼저 바울은 3장 전체에서 자신의 이신칭의 복음을 논증하는데, 그 흐름을 살펴보면 대체로 다음과 같다.
2:15-21 주장: 이신칭의
3:1-4:31 논증 : 이신칭의를 논증함
1-5 첫번째 주장 : 갈라디아인들의 성령 경험
6-14 두번째 주장 : 아브라함에게 한 하나님의 약속
15-18 세번째 주장 : 율법의 일반적 관행
19-25 율법에 관한 여담
26-4:11 네번째 주장 : 그리스도교 전승
4:12-20 다섯째 주장 : 우정
4:26-31 여섯번째 주장 : 사라와 하갈의 비유
바울은 갈라디아서 3:1-5에서 같은 서신 2:15-21에 제시된 이신칭의 복음을 갈라디아인들의 성령 경험에 호소하면서 책망조로 논증한다.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3:2). "너희 가운데서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듣고 믿음에서냐"(3:5). 바울은 여기서 갈라디아인들의 성령 경험이 율법의 행위로 (ՅՎ ՅՑՃՙՍ ՍՏՌՏՕ) 말미암은 것이 아님을 강조한다. 성령 경험은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바울은 이어 갈라디아서 3:6 이하에서 이신칭의 복음을 성경에 호소하면서 논증을 시작한다. 그는 분명 갈라디아인들을 잘못 인도한 거짓 교사들의 그릇된 가르침을 구약을 인용하면서 바로잡고 있다. 그렇다면 거짓 교사들의 가르침은 무엇인가? 사도 바울이 '다른 복음'이라 부른 이 복음의 내용은 무엇인가?
일차적인 자료가 없는 관계로 갈라디아서에 나타난 이들에 대한 바울의 대응을 기초로 재구성해 볼 수 밖에 없는 형편이지만, 이들 거짓 교사들의 그릇된 가르침에 대한 명확한 분석은 갈라디아서 3:6-14에 나오는 바울의 이신칭의 복음을 위한 성경적 논증을 분명하게 이해하도록 도와 줌은 물론 그 주석에도 큰 도움을 줄 것이다. 따라서 갈라디아서 3:6-14 주해는 이 구절 배후에 깔려 있는 거짓 교사들의 그릇된 가르침을 늘 염두에 두면서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이제 그 서막을 열어 보자.
III. 본론
1. 본문 분해
3:6-14 성경으로부터의 논증
6 1. 성경으로부터 권위 있는 구절 인용 (창 15:6)
7 2. 주석적 명제
8-13 3. 명제의 증명
8-9 1) 첫번째 증명 : "아브라함의 축복" 해석
10 2) 두번째 증명 : 첫번째 증명의 부정적인 면 (신 27:26 인용)
11 3) 세번째 증명 : 율법은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함으로 이끌어 주지 않음(합 2:4 인용)
12 4) 네번째 증명 : 율법은 믿음에 기초해 있지 않음(레 18:5 인용)
13 5) 다섯번째 증명 :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 해석(신 21:23 인용)
14 3:1-13까지의 논증의 결론
3장 6-14절에는 아브라함의 모범을 사용하는 성경으로부터의 논증이 들어 있다. 이 단락의 바울의 논거는 대단히 이해하기 어려운데, 이 점은 주석가들도 동의하는 바다. 특히 역사비평적 성경 해석 방법들로 훈련받은 사람들에게는 바울의 논증 방식이 매우 임의적인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로이즈(A. Loisy)와 같은 비판적인 사람이 그것을 "창의적인 환상"이라고 부르기까지 했다.
어쨌든 바울은 3장 1-6절의 논증 전체에 대한 증빙 본문이 된다고 보는 성서 구절을 인용함으로써 시작한다(3:6). 이것은 주석상의 논제 제시에 의해서 계속된다(3:7). 주요 단락(3:8-13)에는 3장 7절에서의 논제에 대한 증거로서 준비된 다섯 개의 성서 증빙 구절이 들어 있다. 그 구절들을 통해 3장 7절이 3장 6절에서 인용된 성서 구절에 대한 바른 해석이라는 것이 입증된다. 그리고 이 단락에 대한 두 개의 결론이 나온다. 첫번째(3:14上)는 3장 6-14절의 토론 결과를 진술하고, 두번째(3:14下)는 이 결과를 첫번째 논증에 관련시키며 또한 다음 단락에서 다룰 중요한 단어 "약속"을 소개한다.
2. 본문 주해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 (6)
바울은 3:1-5에서 갈라디아인들의 성령 경험을 이야기하다가 갑자기 6절에 와서 창세기 15:6을 인용하여 아브라함이라는 인물을 그의 논의에 도입한다. 왜 갑자기 아브라함이 논의에 도입되는 것인가?
아브라함과 아브라함의 '자녀들' 또는 '씨'의 확인에 의한 논의는 갈 3:6-18의 논의를 주도하고 3장 마지막에 다시 나타난다(3:29,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해 있으면 너희는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아브라함의 이야기는 4:21-31의 확장된 알레고리에서 다시 나타난다. 우리의 표준들을 여기에 적용해 보면, 아브라함을 지칭하는 구절들의 어조(tone), 그 빈도성, 그 구절들의 분명성 그리고 비친숙성 모두는 분명 갈라디아의 거짓 교사들이 갈라디아인들을 설득시키기 위해서 아브라함에게 호소했음을 시사해 준다. 그들은 창세기 17장을 사용하여 할례받지 않는 자는 누구나 그의 백성에게서 끊어지고, 그는 하나님의 언약을 파기한 것이라(창 17:10-14)고 경고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갈라디아인들이 아브라함의 언약과 아브라함의 축복에 동참하기 위해서 할례를 받아야 하고 그것이 하나님의 명령이라고 논증했을 것이다.
아브라함은 특히 유대교의 시작과 기초이며 첫번째 개종자이다(창 17:4-5, 너는 열방의 아비가 되리라). 따라서 할례를 받아야만 그의 참 자손이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어떻게 성경이 유대교에 동정적인 이방인들을 할례를 받도록 설득하는 데 사용될 수 있는지 분명히 밝혀준다.
이처럼 바울은 거짓 교사들의 그릇된 가르침에 직면하여 이에 대응하기 위해 그들에 의해 사용된 아브라함 전승을 다시 활용한다. 그는 아브라함의 주제를 그리스도의 빛 아래서 재해석하여 창세기 15:6 인용과 연결시킨다. 분명히 그는 아브라함의 믿음과 관련된 의(ՄՉՊՁՉՏՓՕՍՇ)에 대한 강조 때문에 이 본문을 선택한다(참조. 2:15-17). 하나님께 대한 아브라함의 반응의 유일한 본질적ԉ특징은 여러 유대교 해석들(아브라함의 공적, 율법 준수, 순종)과는 달리 그의 믿음(ՐՉՓՔՉՒ)이었다. 이를 통해 바울은 아브라함의 자손은 할례가 아니라(ՏՉ ՅՊ ՐՅՑՉՔՏՌՇՒ) 믿음에 의해(ՏՉ ՅՊ ՐՉՓՔՅՙՒ) 특징지워진다는 것을 논증할 수 있었다.
이 믿음은 의로운 자의 믿음이 아니라(롬 4:2), 불의한 자를 의롭게 하시는(롬 4:5), 죽은 자를 살리시는, 그리고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불러 내시는(롬 4:17) 하나님을 믿는 자의 믿음이다. 그것은 "소망에서 소망으로" 우리를 나아가게 하는 믿음이며, 눈으로 볼 수 있는 증거에 맞서서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는 믿음이다(롬 4:18-20). 이 믿음은 그래서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인정하시는"(롬 4:4) 믿음인 바, 공로(ՊՁՔՁ ՏՖՅՉՋՇՌՁ)로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인정된다.
한편 바울은 아브라함과 성령을 연결시키는 본문을 찾지는 못했을지라도 아브라함의 믿음과 성령 경험을 특징적으로 연결시킨다. 3:5에서 3:6에로의 전이(轉移)는 '믿음'이라는 공통된 모티프를 통해 이루어짐으로써 갈라디아인들의 성령 경험이 아브라함이 의롭다 함을 받은 것과 일치하는 것으로 파악한다.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아들인줄 알지어다 (7)
바울은 창세기 15:6의 인용을 이어 주석적 논제를 제시한다. "알지어다"(ՃՉՍՙՓՊՅՔՅ)는 직설법("여러분은 안다")으로도 또는 명령법("알지어다")으로도 해석될 수 있다. 여기서는 후자가 바람직한데, 그 이유는 그것이 교훈 문학에 있는 병행구를 따르기 때문이다.
한편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ՏՉ ՅՊ ՐՉՓՔՅՙՒ)은 하나님 앞에서의 그들의 존재가 믿음에(ՅՊ) 기초를 두고 있는 자들이다. 이 어구는 바울 서신 중에서 여기서만 나오며 아마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ՏՉ ՅՊ ՅՑՃՙՍ ՍՏՌՏՕ, 갈 3:10)과 "할례자들"(ՏՉ ՅՊ ՐՅՑՉՔՏՌՇՒ, 갈 2:12)에 대조해서 바울이 만들어낸 것 같다. 이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아들"과 동일시된다. 왜냐하면 그들은 아브라함이 믿었던 것과 똑같은 것을 믿기 때문이다. 확실히 이러한 동일시는 반유대적인 입장을 의도한 것이다.
이처럼 바울은 7절에서 6절의 논의에 입각하여 하나의 논제를 제시한다. 아브라함을 규정하는 본질적 특징은 그의 할례(창 17장)가 아니라 그의 믿음(창 15:6)이다. 따라서 아브라함의 아들은 아브라함의 자연적, 육적 게승자인 "할례자들"(갈 2:12)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초자연적, 영적 계승자인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갈 3:7)이다. 갈라디아의 거짓 교사들이 전자를 가르친 반면, 바울은 이에 대응하여 후자를 가르쳤다.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이 너를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 하였으니 (8)
바울은 자신의 논제를 입증하기 위해 3장 8-13절에서 성경으로부터 다섯 가지를 논증한다. 첫번째 논증은 유명한 "아브라함의 축복"에 대한 해석이다. 문장은 아브라함의 축복 부분에서 발견되는 칠십인역의 어느 구절과도 정확하게 동일시될 수는 없지만, 인용문의 특징을 분명히 취하고 있다. "모든 이방이 너를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ՅՍՅՕՋՏՃՇՈՇՓՏՍՔՁՉ ՅՍ ՓՏՉ ՐՁՍՔՁ ՔՁ ՅՈՍՇ). 유대교 신학에서 ՅՍ ՓՏՉ는 많은 주의를 끌며 "율법에 따라 행함으로"를 뜻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그러나 바울은 주로 어구 ՐՁՍՔՁ ՔՁ ՅՈՍՇ에 관심이 있다. 그가 볼 때 그것은 모든 이방을 뜻한다. 확실히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은 '많은 후손'과 '그 후손들이 살 수 있는 땅'을 갖게 될 것을 아브라함에게 약속했다(창 12:1-2; 7:13,14-18; 15:5-16:18; 17:4-8,16-21; 18:18; 22:17).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과 맺은 언약은 이것에 기초되었다. 그렇지만 바울의 질문은 구약을 넘어선다.
바울은 아브라함의 축복을 오직 하나님의 은혜 그리고 하나님의 믿음에 의한 의와 동일시하면서, 이 약속을 받았던 아브라함도 그 약속을 역시 같은 의미로 이해했다고 결론짓는다. 그리하여 사도는 아브라함에게 독특한 역할을 돌린다 : 그는 그리스도 이전에 복음을 알았던 그리고 그것을 믿었던 유일한 사람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바울은 자신이 알고 있는 성서 개념을 언급함으로써 그것을 설명한다 : "...[그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ՐՏՑՉՄՏՕՓՁ ՄՅ Շ ՃՐՁՖՇ) 그리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ՐՑՏՅՕՇՃՃՅՋՉՓՁՔՏ Քՙ ԂԡՂՑՁՁՌ).
이처럼 갈라디아서 3:8은 창세기 12:3과 18:18을 결합하여 인용하여, 아브라함을 통하여 '모든 열방'에게 약속된 축복이 예언(ՐՏՑՉՄՏՕՓՁ)과 복음의 예표(ՐՑՏՅՕՇՃՃՅՋՉՓՁՔՏ) 즉 이방인을 위한 복음(1:16; 2:8,9)의 예표로 간주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이 본문은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방인들이 ՅՈՍՇ로 남아 있으면서도 즉 할례받지 않으면서도 그들을 믿음으로 말미암아(ՅՊ ՐՉՓՔՅՙՒ) 의롭다 하시는지 보여준다. 이 점에서 아브라함의 축복들은 이미 바울의 율법과 관계 없는 이방 선교를 합법화시켰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 (9)
이 말은 첫번째 증명을 종결짓는다(3:8-9). 8절에서 제시된 해석이 성취된다면, 그 결과는 9절과 같다. 8절의 문구 "모든 이방"(ՐՁՍՔՁ ՔՁ ՅՈՍՇ)은 이방인들 중에서 아브라함처럼 믿는 사람들을 뜻하는 것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그들을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ՏՉ ՅՊ ՐՉՓՔՅՙՒ)이다. 이제 아브라함의 본질적인 속성인 Տ ՐՉՓՔՏՒ는 그리스도인들처럼 "믿는 자 됨"의 의미에서 이해될 수 있다. 유대교에서 "율법에 복종함으로써 얻은 의"의 원조인 아브라함은 지금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의 원조"가 되었다. 그들은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는다". 그것은 그들이 믿음을 공유하기 때문이다.
바울이 "복을 받는다"(ՅՕՋՏՃՏՕՍՔՁՉ)를 "의롭게 되다"((ՄՉՊՁՉՏՕՍՔՁՉ)와 대치시키지 않은 것은 주목할 만하다. 왜냐하면 그는 그 다음 성경 증명을 위해 여전히 그 말이 필요하기 때문이다(3:10). 그러나 9절의 결론은 7절의 논제가 주석상으로 옳다는 것을 일찍 보여 준다. 아직 남아 있는 일은 구원의 기초를 "율법의 헹위"에 두고 있는 자들을 배제시키는 것이다. 더욱이, 3장 10-13절에서 나올 "믿음으로"라는 개념에 대한 그리스도론적이고 구원론적인 해석이 여전히 나오고 있지 않다.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10)
바울은 성경으로부터 두번째 논증을 소개한다. 다시 그는 결론을 먼저 언급한다. :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ՏՓՏՉ ՃՁՑ ՅՎ ՅՑՃՙՍ ՍՏՌՏՕ ՅՉՓՉՍ ՕՐՏ ՊՁՔՁՑՁՍ ՅՉՓՉՍ). 바울은 부정적인 추론에 의하여 결론에 도달한다. 만일 (9절에서 언급된 것처럼)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이 아브라함과 함께 축복 받는다면,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이 아닌 자들은 "율법에 속한 자들"(ՏՉ ՅՊ ՍՏՌՏՕ)임이 분명하며, 그들은 "저주 아래" 있어야 한다. 축복받지 못하는 것은 저주받는 것과 같다.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에 속하지 않는 것은 "율법에 속한 자들"이나 다름없다. 더욱이 "율법에 속한 자들"은 율법의 행위(ՏՉ ՅՊ ՅՑՃՙՍ ՍՏՌՏՕ)로써 구원 얻고자 하는 자들이다. 결국 이 형태에 속하는 자들은 모두 "저주 아래" 있다. 이 저주는 갈라디아서 1장 8-9절에서의 바울 자신의 저주와 연관된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고려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갈라디아서 2:16에 세 번, 3:1-14에 세 번 나오는 "율법의 행위"(ՅՑՃՁ ՍՏՌՏՕ)가 과연 무엇을 말하느냐는 것이다. 많은 학자들이 율법의 요구에 순응하는 행위들을 가리킨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미 서론 부분에서 밝힌 바 있듯이 "율법의 행위"란 유대인의 생활 양식 즉 유대인의 신분 표지의 구실을 하는 할례, 음식법, 특별한 축제일 같은 율법에 대한 특별한 준수를 말한다. 따라서 10절 상반절은 선민적 배타주의에 물들어 이방인에게 (유대인들에게 속한) 할례와 율법 준수를 요구한 유대주의자들은 저주 아래 있음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이에 대한 해답은 10절 하반절에 인용된 신명기 27장 26절에서 나타나 있다. ՃՅՃՑՁՐՔՁՉԎՏՔՉ("기록된 바")라는 법식이 그 인용문을 특징지우며, 그 인용문은 다음과 같다. ՅՐՉՊՁՔՁՑՁՔՏՒ ՐՁՒ ՏՒ ՏՕՊ ՅՌՌՅՍՅՉ ՐՁՓՉՍ ՔՏՉՒ ՃՅՃՑՁՌՌՅՍՏՉՒ ՅՍ Քՙ ՂՉՂՋՉՙ ՔՏՕ ՍՏՌՏՕ ՔՏՕ ՐՏՉՇՓՁՉ ՁՕՔՁ("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그러나 이 본문은 칠십인역 또는 마소라 본문과 완전히 일치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바울은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은 칠십인역 이본으로부터 또는 기억으로부터 인용했을까? 아니면 의도적으로 본문을 바꾸었을까? 이 점에 대해서는 아직 분명치 않다.
그러나 한 가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신명기 27장 26절이 바울의 반대자들이 자신들의 요구들을 지지하기 위해 사용된 구절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갈라디아의 이방인들에게 언약 백성 즉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 위해서는 할례(유대인의 신분)와 율법의 준수(유대인의 신분 표지 즉 생활 양식을 의미함)을 요구하면서, 이러한 요구를 지지하기 위해 '율법에 기록된 모든 것을 항상 지키지 않는 자들에게 저주를 선언하는' 신명기 27장 26절을 사용했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그의 반대자들이 사용한 신명기 27:26을 그리스도의 빛 아래서 재해석하여 재인용하면서 신명기의 저주를 율법의 행위를 하는 자들에게로 향하게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신명기 27:26은 바울 자신의 결론을 입증해 주는가? 바울에게 있어서 그리스도 안에서의 구원과 율법의 성취는 의심할 바 없이 병행한다(참조. 5:14,19-23; 6:2). 문제는 "율법의 행위"라는 유대교의 개념이 율법의 성취까지 가능하게 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바울은 이것을 부인한다. 시내산에서 주어진 유대교 율법은 영원한 생명을 주려고 의도된 것이 아니라(3:21) "범법함을 인하여" 주어진 열등한 실체였다. 그가 갈라디아서 3:19-22에서 설명하듯이 율법을 세우는 것은 범법한 자로 만드는 것이다(참조. 2:18). 범법의 축적은 죄를 가중시켜서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다"(3:22).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행하지 아니하는 것"은 그것을 "위반하는 것"을 뜻하고, 이로 인해 "죄 아래" 있는 자들은 "저주 아래" 있다.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나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이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라 (11)
성경으로부터의 세번쩨 증명은 10절의 행에서 계속된다. 11절 상반절의 결론은 그 자체의 논증에서 나온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ՏՔՉ ՄՅ ՅՍ ՍՏՌՙ ՏՕՄՅՉՒ ՄՉՊՁՉՏՕՔՁՉ ՐՁՑՁ Քՙ ՈՅՙ ՄՇՋՏՍ). ՄՅ는 앞의 문제에 덧붙여서 하나의 문제를 소개한다. 그래서 11절은 10절의 병행구 이상이다. 11절은 하박국 2장 4절에서 결론을 끌어내지만, 동시에 11절은 10절의 주장을 계속한다. 만일 "율법에 속한 자들"이 저주 아래 있다면, 그 율법으로는 누구도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될 수 없음이 명백하다.
바울의 취지를 입증하기 위해 인용하는 성경 구절은 이번에는 통상적인 인용 법식 없이 하박국 2장 4절로부터 채용된다 : Տ ՄՉՊՁՉՏՒ ՅՊ ՐՉՓՔՅՙՒ ՆՇՓՅՔՁՉ("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바울은 로마서 1장 17절에서와 같은 형태로 그 구절을 인용한다. 그는 그 문장을 자신의 신학에 맞게, 즉 칠십인역은 물론 마소라 본문과 다르게 해석한다. 그는 ՌՏՕ("나의")를 생략하고 문구 ՅՊ ՐՉՓՔՅՙՒ("믿음으로")를 신학적 법식-"그리스도 예수를 믿음으로"-으로서 이해한다(참조. 2:16). 따라서 "의롭다"고 불리게 될 사람은 믿음 때문에 그렇게 불리며, 이 사람은 "믿음으로" 여기서 그리고 내세에서 영생에 접근한다고 성경은 말한다. 거꾸러, "율법으로" 의로워지기를 구하는 자는 썩어진 것을 거두고(6:8, "파멸을 의미함") 그리고 영원한 구원으로부터 제외됨으로써 끝나는 "저주 아래"(10上) 있는 것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라 이를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 하였느니라 (12)
바울은 또 하나의 주석적 결론을 진술한다.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라"(Տ ՄՅ ՍՏՌՏՒ ՏՕՊ ՅՊ ՐՉՓՔՅՙՒ). 이전 결론(11上)은Ԉ"율법으로"는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함을 얻을 사람이 하나도 없음을 말했다. 왜냐하면 성경(하 2:4)은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고 선언하기 때문이다. 이제 바울은 "믿음으로"라는 말은 유대교에서처럼 율법을 포함시킬 수 없다는 것을 레위기 18장 5절로부터 추론한다.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율법을 행함으로써, 아브라함에게 한 약속의 참여자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 바울은 유대교에 반대할 뿐만 아니라 바울의 반대자들 때문에 갖게 된 갈라디아인들의 기대- 율법의 행위가 그리스도를 통해 가지게 될 구원의 참여자가 되기 위한 전제라는 것 -에 반대한다.
바울이 인용하는 구절은 다시 인용 법식 없이 레위기 18장 5절에서 발췌된다 : "이를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Տ ՐՏՉՇՓՁՒ ՁՕՔՁ ՆՇՓՅՔՁՉ ՅՍ ՁՕՔՏՉՒ). 여기 인용된 레위기 18:5은 분명 거짓 교사들이 자신들의 주장을 지지하기 위해 사용한 것으로 바울에 의해 재인용되고 있다. 이 말의 의미는 명확하다 : "그리고 너희는 나의 모든 계명과 나의 모든 칙령들을 준수하고 그것들을 행하라. 그것들을 행하는 자는 그것들에 의해 살리라. 나는 주 너의 하나님이다". "율법으로"(ՅՍ ՍՏՌՙ)는 실제로 율법을 행하는, 즉 "율법의 행위"를 하는 사람들이다. 이 사람들의 삶의 방식은 "율법을 행함"에 의해서 구성되지, "믿음"에 의해서(ՅՊ ՐՉՓՔՅՙՒ) 구성되는 것이 아니다. "믿음은 율법의 시발점이 아니고 율법은 믿음을 그 기본적 원리로 간주하지 않는다". 양자는 타협될 수 없는 별개의 원리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13)
연달아 바울은 이제 다섯번재 성경 논증에 이른다. 그리스도의 이름이 초두에 나타나고 또 돌연히 나타나 인상적이다.
3장 10절에서 바울은 구원을 "율법의 행위"에 둔 자들이 "저주 아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율법을 준수하는 것이 곧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3:11)에 이르지 않는다. 율법과 믿음은 근본적으로 구분되어야 한다(3:12). 그렇다면 어떻게 바울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가 아브라함의 축복을 나누어 가진다고 말할 수 있을까?(참조 3:9, 14) 누가 우리인가? 그 문맥에 의하면 바울이 "우리"라고 말할 때 염두에 둔 자들은, 그리스도를 통해 "율법의 저주"로부터 구원된 사람들, 즉 3장 10절에서 묘사된 "저주 아래" 있던 유대 그리스도인들이다. 이방 그리스도인들은 이 저주 아래 있지 않았다. 그들은 율법이 아닌 세상의 초등 학문 아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울은 율법 아래 있는 것도 "세상의 초등 학문" 아래 있는 또 다른 방식일 뿐이라고 가정한다. 따라서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모두 "세상의 초등 학문" 아래 있다.
여기 다시 "율법의 저주"가 등장하는데, "율법의 저주" 개념은 생소하며 바울 서신에서도 여기서만 나온다. 그가 율법의 저주라고 할 때 뜻하는 바는 무엇인가? 서신의 문맥에서 보면, 그는 하나님 앞에서 "율법의 행위"로서 의롭게 되기를 구하는 자들에게 율법은 저주가 된다는 것을 분명히 전제한다. 왜냐하면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에게 주어진 아브라함의 축복을 스스로 박탈하는 격이 되기 때문이다(3:9).
그러나 자세한 의미를 고찰하기 위해서는 바울이 "율법의 저주"를 입증하기 위해 인용한(갈 3:10下) 신명기 27장 26절을 연구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 인용 구절은 그 문맥을 볼 때, 시내산 언약을 갱신하는 의식을 거행할 때 이미 하나님의 백성이 된 이스라엘 공동체에 선포된 12저주 중의 하나로서, 그 이전의 11개 저주들을 일반화한 요약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바울은 이 율법을 갈라디아서에서 "율법책"으로 대치함으로써 신명기 27:26을 구약 성경 전체의 율법으로 확대 적용한다. 여기서 우리는 언약과 율법이 밀접한 관계에 있음을 알게 된다. 사실 율법은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맺은 언약 관계의 결과이다. 언약과 율법은 일종의 직설법-명령법 관계다. 따라서 율법에 대한 순종은 이스라엘의 계약 의무로서 이스라엘이 계약 관계를 계속 유지하고 하나님의 모든 복을 누릴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그러나 율법 위반은 율법의 저주를 초래한다. 왜냐하면 이는 그들이 하나님께 충성하지 않는다는 것과 그 분과 관계를 맺는 자로서 합당치 않다는 것을 실증하기 때문이다. 그 저주는 또한 하나님의 저주인데, 이는 율법이 그의 율법이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의 빛 속에서 신명기 27:26이 인용되어 있는 갈라디아서 3장 10절을 조명해 보면 다음과 같을 것이다. 언약 백성으로서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율법에 순종(물론 바울은 유대인의 신분 표지를 고려하면서 말한다) 하는 모든 유대인은 율법의 저주 아래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언약의 율법의 모든 명령을 지키는 데 실패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율법에 대한 전반적인 불성취의 개념이 전제되어 있다.
그렇다면 13절로 돌아오자. 이러한 "율법의 저주"로부터의 해방(3:13下)은 십자가 위에서 죽으신 그리스도의 은혜이다. 바울은 기독론적-구원론적 교리에 관한 언급으로써 이것을 확인한다 : "그리스도께서...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ՑՉՓՔՏՒ ՇՌՁՒ ՅՎՇՃՏՑՁՓՅՍ ՅՊ ՔՇՒ ՊՁՔՁՑՁՒ ՔՏՕ ՍՏՌՏՕ). 이 교리는 "속량"이 뜻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정의하기 위해 함께 끌어내 온 몇 개의 개념들을 사용함으로써 간결하게 법식화되었다. 속량되기 이전의 인간성의 상황이 전제되어 있다 : 구속받지 못한 인간성은, 특별히 유대인에 대해서 "율법의 저주 아래 있음"을 뜻하는 "세상의 초등 학문"(ՓՔՏՉՅՉՁ ՔՏՕ ՊՏՓՌՏՕ)에 사로잡혀 있다. 무서운 운명으로부터 그 인간성을 구속하기 위해, 하나님은 자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셨다. 한 인간("여자에게서 난")이 됨으로써 그리고 "율법 아래 있음"으로써(갈 4:4) 그리스도는 "율법 아래"(4:5上) 있는 자들의 자유를 사시고 세상의 초등 학문 아래" 있는 자들에게(4:9下) "하나님의 아들"로서 양자삼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이 속량이란 개념은 노예를 사서 해방할 때에 사용된 말이며, 그 절차는 이교도들이 그들의 신전에서 노예를 매매하는 형식을 취해 신이 노예를 사서 세상에서 완전한 자유자를 만든다는 것이다(Deissman).
그렇다면 다음 구성 요소로 넘어가자.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음"(ՃՅՍՏՌՅՍՏՒ ՕՐՅՑ ՇՍՙՍ ՊՁՔՁՑՁ)으로써 그 구속을 이루셨다. 이 진술은 희생에 관한 사상들을 전제한다. 바울은 그리스도가 우리를 대신하여 저주의 대상이 되었음을 암시한다.그리스도의 성육신에 의하여(갈 4:4-5) 그는 한 인간으로서 죽임을 당했다. 그는 죄가 없었기 때문에 그의 죽음은 유대교의 용어로 표현해서 특별하게 공적 있는 죽음이었다. 그 결과로 "우리"는 "율법의 저주"로부터 그리고 실로 율법 자체로부터 자유롭다. 그래서 바울은 그리스도가 "율법의 끝"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갈 2:19-20; 3:25; 5:6; 6:15).
바울은 자신의 기독론을 뒷받침하기 위해서 다시 성경으로부터 한 구절을 인용한다. 인용문은 칠십인역과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지만, 신명기 21장 23절로부터 발췌한 것이다 :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ՅՐՉՊՁՔՁՑՁՔՏՒ ՐՁՒ Տ ՊՑՅՌՁՌՅՍՏՒ ՅՐՉ ՎՕՋՏՕ). 신명기 21장 23절은 범죄자들을 목매다는 것에 대한 법적 규정을 담고 있다 : "사람이 만일 죽을 죄를 범하므로 네가 그를 죽여 나무 위에 달거든 그 시체를 나무 위에 밤새도록 두지 말고 당일에 장사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 이 구절은 십자가 위에서의 그리스도의 죽음이 성경의 말씀을 성취했다는 것을 입증한다. 그것은 범죄자였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 위에 매달리는 행위를 통해 저주가 효력을 발생했다는 것을 뜻한다. "그리스도는 나무에 달려 죄수의 죽음에 복종하심으로 율법의 요구를 만족시키고 율법의 시대에 종지부를 찍으셨다"(Vincent).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 (14)
ՉՍՁ로 시작하는 두 절은 3장 6-14절을 끝맺으며 그 결과를 진술한다. 첫번째 절은 일반적인 은혜를 말한다 :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ՉՍՁ ՅՉՒ ՔՁ ՅՈՍՇ Շ ՅՕՋՏՃՉՁ ՔՏՕ ԂԡՂՑՁՁՌ ՃՅՍՇՔՁՉ ՅՍ ԂԩՇՓՏՕ ԷՐՉՓՔՙ). 만일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이 저주 아래 있다면(3:10), 만일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율법으로 의롭다함을 얻을 수 없다면(3:11), 만일 그들이 "믿음에서 난"(3:12) 자들"이 아니라면, 그러나 한편으로 만일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죽음에 의해 구원된다면(3:13),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아브라함의 축복의 상속자들이 될 수 없다. 만일 그들이 상속자들이 아니라면, 상속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또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들의 구원을 받았던 저 이방인들(ՔՁ ՅՈՍՇ)일 수밖에 없다. 이들은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이다. 증명 본문들이 보여주듯이, 결국 성경은 이방인들이라고 할지라도 믿음을 가지게 되면 아브라함과 함께 축복받는 자들이라는 것을 실제로 미리 내대보았고 미리 말했다(참조. 3:8-9).
두번째 결론은 첫번째 결론을 전제하고 있는 것으로 단순히 병행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ՉՍՁ ՔՇՍ ՅՐՁՃՃՅՋՉՁՍ ՔՏՕ ՐՍՅՕՌՁՔՏՒ ՋՁՂՙՌՅՍ ՄՉՁ ՔՇՒ ՐՉՓՔՅՙՒ). 14절 상반절에서 결론지은 교리상의 논의로부터 바울은 이제 경험으로부터의 논증(참조.갈 3:2,5)에로 되돌아 갈 수 있다. 그는 일인칭 복수로 바꾼다. 14절 하반절에서 새로운 요소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한 약속이 이제는 "성령의 약속"으로 불리는 것이다. 그는 다음 이유들로 해서 이 결론에 도달한다 : 이방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을 받았으며(3:2.5), 그들은 "믿음을 말미암아"(ՄՉՁ ՔՇՒ ՐՉՓՔՅՙՒ) 그렇게 하였다. 만일 이것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한 약속의 성취라면, 약속의 내용인 축복은 성령의 은사여야 한다. 갈라디아 사람들이 성령을 받았을 때, 이것은 비합법적인, 미숙한 또는 불완전한 사건일 수 없었다. 그들은 분명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했던 엄숙한 약속의 성취를 경험했던 것이다.
결국 바울은 갈라디아서 3:13-14에서 그리스도를 등장시켜, 그의 저주받은 죽음이 아브라함의 썂복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이방인들에게 미치도록 한다. 그리고 또한 아브라함의 복, 믿음, 성령 경험이 특징적으로 연결됨을 보여 준다.
IV. 결론
갈라디아서는 소위 '믿음'과 '행위 일반' 사이의 반정립이 아닌,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과 유대인으로서의 삶의 반정립이라는 시각에서 고찰되어야 한다.
갈라디아서 3:6-14은 갈라디아서 2:14-21에서 제시된 이신칭의 복음을 성경으로부터 논증하는 부분(그 이전 갈라디아서 3:1-5에서는 '갈라디아인들의 성령 경험'으로부터의 논증이 제시된다)이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3:6-14에서 자신의 반대자들이 그들의 주장을 지지하기 위해 사용한 아브라함 전승을 다시 활용하여 그리스도의 빛 아래서 재해석한다.
바울의 반대자들은 갈라디아인들을 설득시키기 위해 아브라함에게 호소했다. 그들은 창세기 17장을 사용하여 할례받지 않는 자는 누구나 하나님의 백성에게서 끊어지고, 하나님의 언약을 파기한 것이라(창 17:10-14)고 경고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갈라디아인들이 아브라함의 언약과 아브라함의 축복에 동참하기 위해서 할례를 받아야 하고 그것이 하나님의 명령이라고 논증했을 것이다. 아브라함은 특히 유대교의 시작과 기초이며 첫번째 개종자이다(창 17:4-5, 너는 열방의 아비가 되리라). 따라서 할례를 받아야만 그의 참 자손이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자신의 반대자들의 주장에 대응하여, 바울은 권위 있는 성경 구절인 창세기 15장 6절을 인용, 아브라함의 본질적 특징은 바로 그의 믿음(ՐՉՓՔՉՒ,Ԍ그의 반대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율법 준수나 공적이 아닌)이라고 주장한며(갈 3:6), 이를 통해 바울은 아브라함의 자손은 할례가 아니라(ՏՉ ՅՊ ՐՅՑՉՔՏՌՇՒ, 갈 2:12) 믿음에 의해(ՏՉ ՅՊ ՐՉՓՔՅՙՒ) 특징지워진다는 것을 논증한다(갈 3:7). 따라서 바울은 진정한 "아브라함의 아들"은 "할례자들"(갈 2:12) 또는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갈 3:10)이 아니라 바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이라고 규정하면서(갈 3:7) 자신의 반대자들의 논의에 쐐기를 박는다.
한편 갈라디아서 3:8-13에서 바울은 왜 "믿음으로 말미암는 자들은 아브라함의 아들"(갈 3:7)인지를 자신의 반대자들이 사용한 성경 구절을 재인용하면서 논증한다. 바울의 논증은 크게 세 가지 요소(factor)로 구성되는데, 그것은 아브라함의 축복(갈 3:8), 율법의 저주(갈 3:10-13),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갈 3:13-14)이다.
첫째 요소는 아브라함의 축복이다. 바울은 창세기 12장 3절과 18장 18절을 결합하여 인용한 갈라디아서 3:8에서, 아브라함을 통하여 '모든 열방'(ՐՁՍՔՁ ՔՁ ՅՈՍՇ)에게 약속된 축복이 복음의 예표(ՐՑՏՅՕՇՃՃՅՋՉՓՁՔՏ) 즉 이방인을 위한 복음(1:16; 2:8,9)의 예표로 간주되고 있음을 보여 준다. 또한 아브라함의 축복은 오직 하나님의 "믿음에 의한 의"와 동일시된다(갈 3:8上). 따라서 아브라함의 축복은 "율법 행위에 속한(ՅՎ ՅՑՃՙՍ ՍՏՌՏՕ) 자들"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바울 반대자들의 주장처럼] "믿음으로 말미암은(ՅՊ ՐՉՓՔՅՙՒ) 자들"에게 속한 것이다[바울의 주장처럼](갈 3:9).
그러므로 갈라디아서 3:8절은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방인들이 ՅՈՍՇ로 남아 있으면서도 즉 할례받지 않으면서도, 그들을 믿음으로 말미암아(ՅՊ ՐՉՓՔՅՙՒ) 의롭다 하시는지를 보여준다. 이 점에서 아브라함의 축복들은 이미 바울의 '율법과 관계 없는 이방 선교'를 합법화시킨다.
둘째 요소는 율법의 저주이다. 둘째 요소는 어떤 면에서 첫째 요소의 부정적인 측면이다. 만일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이 아브라함과 함께 축복 받는다면,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이 아닌 자들은 "율법에 속한 자들"(ՏՉ ՅՊ ՍՏՌՏՕ)임이 분명하며, 그들은 "저주 아래"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함을 얻을 육체가 하나도 없다"(갈 2:16下)고 했고, 또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갈 3:10, 신 27:26 인용 구절)라 하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언약 백성으로서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율법에 순종( 유대인의 신분 표지들에 대한 준수)하는 모든 유대인은 율법의 저주 아래 있다. 뿐만 아니라 율법 준수를 구원으로 간주하는 바울의 반대자들(유대 그리스도인들)과 율법 아래로 들어간 갈라디아인들도 마찬가지 신세이다.
이처럼 구원을 "율법의 행위"에 둔 자들이 "저주 아래" 있고, 율법 준수로는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갈 3:11)에 이르지 못하고, 율법과 믿음은 근본적으로 구분된다(갈 3:12)면,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갈 3:13)는 곧 유대 그리스도인들은 아브라함의 축복을 나누어 가진다고 말할 수 있을까?(참조 3:9, 14) 바로 그 해답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에 있다.
셋째 요소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이다.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음"(ՃՅՍՏՌՅՍՏՒ ՕՐՅՑ ՇՍՙՍ ՊՁՔՁՑՁ)으로써 그 구속을 이루셨다. 성육신에 의하여(갈 4:4-5) 그는 한 인간으로서 죽임을 당했다. 그는 죄가 없었기 때문에 그의 죽음은 유대교의 용어로 표현해서 특별하게 공적 있는 죽음이었다. 그 결과로 "우리"는 "율법의 저주"로부터 그리고 실로 율법 자체로부터 자유롭다. 그래서 바울은 그리스도가 "율법의 끝"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갈 2:19-20; 3:25; 5:6; 6:15).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ՅՐՉՊՁՔՁՑՁՔՏՒ ՐՁՒ Տ ՊՑՅՌՁՌՅՍՏՒ ՅՐՉ ՎՕՋՏՕ)라는 신명기 21장 23절은 이를 잘 설명해 준다. 이 구절은 십자가 위에서의 그리스도의 죽음이 성경의 말씀을 성취했다는 것을 입증한다. 그것은 범죄자였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 위에 매달리는 행위를 통해 저주가 효력을 발생했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율법을 어긴 것 때문에 율법의 저주 아래 놓인 유대인들을 구속하는 종말론적인 사건이다.
이제 정리해 보자.
첫째, 아브라함의 축복은 "율법 행위에 속한(ՅՎ ՅՑՃՙՍ ՍՏՌՏՕ) 자들"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말미암은(ՅՊ ՐՉՓՔՅՙՒ) 자들"에게 속한 것이다.
둘째,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율법의 저주 아래 있다(3:10).
셋째,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율법의 저주 아래 있는 자들을 위하여 대신 저주를 받으심으로 율법의 저주에서 그들을 속량하셨다. 율법의 저주 아래 있던 이 유대 그리스도인들의 구속은 동시에 그리고 동등한 조건으로 이방인들의 구속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율법 아래"(4:5上) 있는 자들(유대인들)의 자유를 사시고 "세상의 초등 학문 아래" 있는 자들(이방인들)에게(4:9下) "하나님의 아들"로서 양자삼는 것을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브라함의 축복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또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이방인에게 미친다. 성경은 이방인들이라고 할지라도 믿음을 가지게 되면 아브라함과 함께 축복받는 자들이라는 것을 실제로 미리 내대보았고 미리 말했던 것이다(참조. 3: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