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시야의 죽음부터 1차 유배까지의 상황(B.C 609-597)

멸망한 앗수르를 차지하기 위한 열강들의 쟁탈전은 유다로 하여금 파국

적인 재난을 가져오게 하였다. 특히 당시 두 강대국인 바벧론과 이집트는

앗수르의 멸망한 영토를 차지하기 위해 B.C 609 년 갈그미스 전투를 벌였는

데요시야왕은 이 싸움을 위해 진군하던 바로느고의 군대를 막기 위해 출정

했다가 므깃도에서 전사하였다. (왕하 23: 28-30).

결국 바로느고의 갈그미스패전은 메소포타미아를 바벧론의 확고한 수중

에들어가게 했으며 느고는 팔레스틴 지역에서 만이 영향력을 행사할 수 밖

에없었다. 그래서 그는중앙 아시아의 리블라(Riblah 립나)에 자리잡은 자기

의사령부로 여호아하사를 소환하여 (혹은 찾아온) 왕위를 박탈하고 그 형

제엘리아김(Eliakim) 으로 왕을 삼고 막중한 공물을 바치게 하였다.

그러나 이집트의 유다 지배도 잠시 뿐이었다. B.C 605 년 바벧론의 느브

갓네살의 군대가 갈그미스의 이집트 군대를 완파하고 (렘46:2) 하맛까지 이

르러 큰 타격을 준 후 결정적인 진출을 위해 진격을 멈추고 귀국하여 실권

을장악하였다. 그리고 다음해인 B.C 604년에 재차 진출하여 블레셋 평원과

아스글론 (Ashkelon)을 파괴하고 (렘47:5-7 참조) 그곳의 지도급 인사들을

바벧론으로 사로잡아 갔다. 이때에 유다를 침공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늦어

도그 다음해에 여호야김은 태도를 바꾸어 느브갓네살에게 충성할 것을 다짐

하고 그의 봉신이 되었다. (왕하 24:1)

그러다가 B.C 601년 느부갓네살이 이집트 국경부근에서 느고 군대와의 싸

움에서 쌍방의 큰 손실을 입고 약 1년동안 본국에서 군대를 재조직하는 기

회를 틈타 여호야김은 3년만에 바벧론에게 반기를 들었다. (왕하 24:1) 그

러나 그것은 착각이었다. 바벧론은 자기 수하에 있는 아람족과 모압족과 암

몬족으로 하여금 유다를 교란케 했으며 (왕하 24:2-4 렘 35:11) B.C 598년

12월에는 바벧론의 본 부대가 진격하였다. 아마 이때 여호야김은 그를 죽임

으로 바벧론에 환심을 살것이라는 백성들에 의해 죽었을 것이다.(렘

22:18-19)

그후 유다는 여호야김에 이어 그 아들 여호야긴이 18세 왕위에 올랐으나

3개월도 안되어 예루살렘은 포위되어 함락되었고 느부갓네살은 성전과 왕궁

의 보물과 백성과 방백과 용사, 대장장이 그리고 여호야긴과 그의 모친과

처, 내시등 18,000명 이상을 사로잡아 간 후 여호야긴의 아자비(삼촌) 맛다

니야(Mattaniah)를 시드기야(Zedekiah) 로 개명하여 왕으로 세웠다(왕하

24:8-19) 이때는 B.C 597 년으로 바벧론으로의 제1차 유배이다.

바벧론의 유다 공략과 남유다의 멸망

느부갓네살에 의해 21세에 봉신국의 왕이 된 시드기야는 무모한 애국심

의망동에 부딛쳐 예레미야 선지와 여러차례 의논하며 형세를 판단해 보았으

나바벧론에 대해 반란을 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확신을 갖지 못했다.

(렘21:1-7,38:14:23)

그러나 그의 측근들은 시드기야로 하여금 반란을 경정짓도록 하였고 마

침내 그의 즉근들은 시드기야로 하여금 반란을 결정짓도록 하였고 마침내

그의 즉위 9년 10월 10일에 느부갓네살의 군대는 예루살렘을 포위하여 봉쇄

했으며 (렘 21:3-7 참조) 이틈을 타 에돔은 유다를 침입하여 (옵1:10-14,

애4:21-22) 유다의 성읍들을 하나씩 짓 밟아 벧술,벧세메스, 드빌,아랏,엔

게디 등을 철저히 파괴시켰고 최후까지 버티던 라기스와 아세가(렘34:7)까

지파괴되어 예루살렘만이 남았다.

이제 유다백성들의 사기는 땅에 떨어졌고유다는 풍전등화의 위기 속에

처하였다. 그러나 이때 아마 시드기야의 호소로 올라온 듯한 이집트의 진격

소식에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있던 느브갓네살의 군대는 철수되었고 사람들

은 이제 살았다고 아우성 쳤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계속해서 멸망을 예고하

엿다.(렘37:5-10,34:21 f)결국 예레미야의 예언대로 이집트 군대는 곧 격퇴

되고 예루살렘은 다시포함되어 그 다음해 (B.C 587) 까지 버틴 후 시드기

야는 항복을 원했다(렘38:14-23).

그러나 항복할 형세가 되지 못함을 알고 B.C 587년 7월에 (왕하25:2-3)

도성에 비축했던 식량이 바닥이 나자 군졸 몇명과 함께 아라바길로도망하였

으나 여리고 근방에서 붙잡혀 립나(Riblah)에 있는 바벧론왕에게끌려가

그의 아들은 목전에서 죽었고 자신은 두 눈이 빼어 사슬에 묶여 바벧론으

로 끌려가 그곳에서 죽었다(왕하 25:1-7,렘52:9-11).

그후 한달 뒤 느부갓네살 제19년 5월 7일에 왕의 신하 시위대장관 느부사

라단(Nebuzaradan)에 의해 예루살렘은 불탔고 성벽은 헐렸으며 성직자와 군

대및 주요인물들고 지도급 시민들은 립나에 있는 느부갓네살에게 끌려가 처

형되었고 (왕하 25:18-21,렘52:24-27) 상당수의 주민은 바벧론으로 유배되

었다.

이리하여 유다의 역사는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B.C 587년)

멸망 후 유다의 여음

유다가 시드기야왕을 마지막으로 종말을 과한 후 바벧론의 느부갓네살

은귀족출신의 그달리야(Gedaliah)로 유다의 총독을 삼아 다스리게 하였다.

(그달리야의 아버지 아히감은 예레미야 선지를 구해준 사람 렘 26:24) 그러

나그의 총독직은 완강한 저항자들로부터 한갓 별볼일 없는 직책이었고 그

의재직기간도 상당히 짧았다.

그리고 그는 왕족 중 한사람으로 전에 암몬땅으로 피신해 있던 이스마

엘(Ishmael)에 의해 살해되었다. 이로인해 예레미야는 느부갓네살의 복수

를두려워하는 그달리야의 친구들에 의해 억지로 이집트에 피신하게 되었

다(왕하 25:22-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