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 역사에 있어서 왕조

형성에 대한 사회학적 연구

* 역사적 고찰

* 사회사적 해석

I. 서론

이스라엘은 이집트에서 왕조로부터 겪은 고난과 고통에 대해 잘 알고 있었으며,

그들에게 왕조의 형성은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할 것이란 것을 숙지하고 있었을 것

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에집트에서 지내왔던 생활 자체가 왕조 하에서의 생활이

었고, 그들은 그곳에서 뼈아픈 종살이를 해야만 했었던 것이다. 그들이 처음에 왕

조를 거부한 것도 이러한 점에서 그 이유를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왕조하에서

그들은 처절하게 느꼈을 것이다. 그들에게 왕조는 있어서는 안될 것이란 것을.

하지만 그들에게는 이러한 민족적 정체성을 포기해야만 하는 위기에 놓이게 되었

다. 그것은 외부적인 요인들과 내적 요인들을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본 논문에

서는 먼저 그 내부적인 요인들을 이해하고 그에 따른 문제점을 짚어 보고자 한자

그리고 내부적인 요인들을 사회학적으로 바라보고 이스라엘에게 왕조형성은 과연

불가피한 것이었는지 그리고 왜 왕조는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는지 등에 관해 이해

하고자 한다.

먼저 그들에게 있어서의 왕권의 의의는 무엇인가? 과연 왕권이 이스라엘 역사에

즉 그 민족들에게 미친 의의는 무엇인가 부터 간략히 짚고 넘어가자. 그리고 사사

시대에서 왕조시대로의 전환은 어떤 의미를 갖는지에 대해서도 잠시 언급하고자

한다. 이스라엘에게 있어서의 왕조의 형성은 그들에게 많은 변화를 가져오게 된

다. 그들은 결국 절대적인 왕권하에서 지배를 받는 처지에 놓이게 되고 그들은

그러한 변화들에 익숙해져 가게 된다. 외부적 요인들로 부터 비롯된 왕조제도는

결국 내적인 요인들로 인해 자리를 굳혀가게 된다. 사사 시대에서 왕조로의 전환

은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엄청난 변화이며, 그들의 왕조로의 변화 시도는 결국 엄

청난 모험일 수 밖에 없었다. 그것은 결국 되어진 변화들을 보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차차 살펴보기로 하겠다. 이러한 이스라엘에게 나타난 여

러가지 변화들을 대하기 전에 먼저 존 브라이트의 입장에서 왕조 형성의 배경을

살펴 보고자 한다. 이를 통해 사회학적 문제 제기와 함께 사회학적 사료들의 분

석으로 당시의 왕조 형성에 형향을 미친 내적 요인들을 면밀히 살펴보고자 한다.

1. 전통적 입장에 대한 해석

- 알트의 입장을 중심으로

1) 왕조 형성전의 주변적 배경 - 블레셋인들로 인한 위기와 지파 동맹 체제의

파탄

전통적 지파동맹을 마감시켰던 위기는 주전 11세기 후반에 왔다. 이 시기에 일

련의 사건들이 방생하여 한 세기가 못되어서 이스라엘을 완전히 바꿔 놓음으로써

이스라엘을 당시의 세계에서 강대국의 하나로 만들어 놓았다. 이 시기와 기간은

짧지만 상당히 자세하게 살펴보고 주목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이 시기는 이스

라엘의 역사 전체를 통해 가장 의미심장한 시대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이다.

약 200여 년간 존속해 왔던 이스라엘의 지파동맹은 블레셋인들의 침략으로 붕괴

되고 말았다. 블레셋인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팔레스타인에 들어온 그 시기에 이

땅에 발을 들여놓았고, 사사시대의 대부분의 기간을 이스라엘과 단속적이면서도

점차 가열되는 알력 속에서 나란히 공존해 왔다. 그들은 이스라엘을 그들의 안보

또는 해안으로부터 내륙으로 통하는 교역로의 안전을 위협하는 존재로 보았기 때

문에 서부 팔레스타인 전지역을 장악하려고 했다. 블레셋인들은 인접한 몇몇 지

파들에게만 관련되는 제한된 위협이나 각 지파들이 집결하여 일거에 물리칠 수 있

는 위협을 가해 온 것이 아니었다. 정복을 목적으로 한 그들은 잘 훈련된 병사와

무기로, 더욱이 단일한 중앙 정부는 없었지만 불레셋인들의 도시 전제군주들은 단

합된 행동을 취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그들의 침략 시기는 분명치 않

으며, 그들은 일찍부터 해안 평야와 에스드렐론 평야에 잔존해 있던 가나안 족의

도시 국가들과 그곳에 정착해 있던 다른 해양 민족들을 지배해 오기 시작했을 것

이다. 삼손 이야기에 잘 나타나 있는 것같이 국경 분쟁이 끊임없이 계속되었음이

확실하며, 이러한 분쟁은 블레셋인들을 자극하여 더욱 호전적인 행동을 취하게 하

였을 것이다.

주전 1050년 직후에 결정적인 전투는 아벡 부근에서 벌어졌다(삼상 4장). 이스라

엘은 초전에 패했고, 그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과는 참패였다. 이스라엘 군대

는 뿔뿔이 흩어졌다. 하지만 그들은 이스라엘의 살던 땅을 완전히 점령하지는 못

했다. 그들은 네게브 지방, 중부 산악지대의 상당부분 그리고 물론 에스드렐론 평

야를 장악하였지만, 그들의 지배권이 갈릴리 전 지역에 미치지는 못했던 것 같다.

이러한 Alt의 견해는 주변적인 요인으로부터의 왕조 형성에 대한 원인 규명에 그

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하지만 이러한 왕조의 형성은 그들에게 지극히 이질적

인 제도였고, 그들의 역사를 되짚어 볼 때 그들은 왕조가 도래함으로 인해서 닥쳐

올 상황을 짐작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그에 순응했었고 왕조의 제

도에 묻혀 갔다. 그리고 그들은 그러한 전통속에서 다시금 살아가게 된다. 왕조

제도를 거부하던 그들이 왕조제도 속에 매몰된 이러한 변화를 단지 외부의 침략적

인 요인에서만 찾는다는것은 문제가 있다. 당시에 왕조가 형성 됨으로 인해서 발

생한 변화들에 대해 우리는 좀더 자세히 살펴보아야 할 것이며, 그를 토대로 다

시금 이스라엘의 왕조 형성에 대한 사회학적 입장을 밝혀야 할 필요성을 느낀다.

2) 왕조의 형성 - 왕의 추대

왕정은 이스라엘의 전통과는 전적으로 이질적인 제도였다. 하지만 당시의 어려

운 상황에 비추어 보면 그러한 조치는 거의 잠정적인 것이었고 또 일부에서는 마

지못해서 이에 따랐다는 것도 마찬가지로 놀랄 일이 아니다. 이 시기 기브아라는

성읍의 베냐민 지파 사람 사울을 왕으로 옹립하였다. 사울의 추대에 관한 기사는

서로 병렬적인 세 가지 설화의 형태로 전해졌는데, 하나는 왕정에 대하여 암암리

에 호의적이고, 다른 하나는 몹시 적대적이었다. 첫번째 설화(삼상 8, 11)는 왕조에

대한 찬,반의 양쪽으로 나뉘어진다. 하지만 여기서는 반왕권적 성향이 강하게 나타

나며, 왕권으로서의 강제 부역과 강제 노동의 모습들이 나타난다. 두번째 설화(삼

상 9, 1-10, 16)는 어떻게 사울이 라마에서 사무엘에 의해 사사롭게 기름부음을 받

았는가에 관하여 말해주고 있다. 이 이야기는 사무엘상 13, 3b; 4b-15 에서 다시

이어진다. 사울이 암몬과 싸워 이기고 이어 갈갈에서 대중들에 의해 환호를 받았

다는 원래 따로 있었던 이야기(11장)가 이 설화와 섞여 있다. 여기서는 왕조에 대

한 찬성에서 반대로 수정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여기서는 누가 왕이 될 수있느

냐에 대한 질문이 대두되며, 여기에 대한 대답은 작은 자가 왕이 될 수 있다는 것

이다. 곧 하나님의 선택으로 왕이 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세번째 설화(10,

17-26장)는 왕조주의자들의 논리를 담고 있으나 이 설화가 비교적 역사적 서술에

가깝다고 볼 수 있으며, 이 설화에서는 추천을 통해 왕을 뽑을 수 있다고 하며, 세

습은 이루어질 수 없으며, 민주적인 원리를 강조하고 있다. 결국 여기서는 전쟁에

나가서 승리하는 자가 뽑기에서 당첨 될 수 있다는 논리이다.

한 사료(삼상 8, 5; 20)에 의하면 왕정을 이교 국가들을 모방한 제도라고 비난한

다. 왕정이 이스라엘에게 이질적인 제도였다는 의미에서는 그러했다. 왕정은 다

른 곳에서는 보편적인 제도였고, 따라서 이스라엘은 주변의 다른 민족들로부터 이

제도를 생각해 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의 왕정은 독특했다. 이스라엘

의 왕정은 확실히 가나안이나 블레셋의 봉건적인 도시 국가 체제를 모방한 것은

아니었다. 에돔, 모압, 암몬과 같은 민족으로 이루어진 왕국들로부터 여러 가지

특징을 빌려 왔을 지는 모르지만

{{ 그러나 우리는 이 나라들에 관해 거의 모르고 있으므로 확실히 말할 수는 없다. 하지

만 적어도 에돔은 여러 세대에 걸쳐 왕위 계승 원칙에 저항했던 것으로 보인다.

Cf. Alt, op. cit, pp. 199-202 ; Noth, HI, p.171. }}

, 이스라엘의 왕정은 여전히 특색 있는 이스라엘적인 현상이었고, 처음에는 가능한 한

옛 질서 그대로 유지했다. 그러나 그의 기름부음에 관해 말하고 있는

사료(삼상 9, 1-10, 16; 13, 4b-15)에서 사울이 왕이 아니라 "지도자" 또는 "사령관"으로

지칭되고 있는 것은 흥미롭다.

이것은 사무엘과각 지파의 장로들이 사울을 관습적인 왕으로 추대할 의향은 전혀 없었

고 단지 영속적인 기반을 갖는 지파들의 선택된 군사 지도자로서 일해 주기를 바랐다는

것을 의미할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들의 의향이 무엇이었던 간에, 처음부터 백성들은

사울을 왕으로 생각했고 또 곧 그를 왕이라 부르기 시작했을 것이다.

어쨌든 사울의 권위는 영속적인 것으로, 또는 적어도 "전쟁 기간 중에는" 영속적

인 것으로 인정되었다. 그리고 그렇게 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의 혁

신(innovation)임이 확실했지만 옛 전통과 칼로 베듯이 단절한 것은 아니었다. 여

기서 주목해야 할것은 사울의 통치시기에 이스라엘은 큰 내적 변화를 가져오지 않

았었다. 지파 조직은 과거와 다름없이 남아 있었고, 행정 기구나 관료제도는 발달

하지 않았다

{{ Aharoni, LOB, pp. 255-257은 사무엘하 2, 8f. 에 언급된 지역들을 사울이 설정한 5개

행정구역으로보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별로 확실치 않은 듯하다. }}

. 물론 우리는 젊은 군인들을 모아 자기 직속으로 장기 복무를 시킨

듯한 사울의 관행(삼상 14, 52)에세 상비군 제도와 군사적 귀족정치의 시초를 엿볼

수 있다. 그러나 사울의 경우 이러한 조치는 단지 군사적 필요성에서 취해진 것

일 뿐이었다. 그는 각 지파에서 모은 군대에만 의존해서는 살아 남을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다윗의 시대에 가서는 옛질서의 흔적을 찾아 볼 수 없을 정도로

크게 달라졌다.

우리는 여기서 한가지 문제를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이스라엘은 스스로가 왕

정 체제를 거부했으며, 또한 그 속에서 수없이 많은 고난을 겪은 민족이다. 그럼

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자연스럽게 왕정이 들어서게 된 것은 어떤 이유에서일까?

먼저 과연 그들에게 왕정이 불가피했던 이유는 외부적 요인밖에는 없었는지, 그리

고 이후 그들의 체제가 정립되고 어느 정도의 안정을 찾았을 때 왜 다시 옛질서

로 돌아갈 수 없었는지, 물론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이 또한 그 당시의 사회적

모습을 반영해 주고 있다.우리는 이에 대해 좀더 자세히 살펴봐야 할 것이다. Alt

의 견해에 있어서 나타나고 있는 블레셋인들로 인한 위기와 지파 동맹체의 파탄은

좀 문제가 있다. 왕조형성의 원인을 블레셋이나 외부의 침입에만 둔다는 것이 먼

저 문제가 된다. 이스라엘 내부에서 일어난 변화들에 대해서는 전혀 무관심한 체

외적요인들만을 찾는 다면 오히려 많은 오류를 가져 올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

고 지파 동맹체의 파괴란 말에서 Alt가 주장한 지파동맹체에 대한 맹점도 지적하

지 않을 수 없다. 먼저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중앙 성소는 사사시대에 존재하지도

않았으므로, 중앙 성소를 중심으로한 이스라엘 지파 동맹체는 그 근거를 제기하기

에 어려움이 따른다. 또한 그들에게 나타나고 있다는 계약사상 또한 B.C 7세기

이후 부터 등장한 후기 사상이다. 이러한 점을 비추어 볼때 Alt의 사상에 대한 문

제를 제기하며, 이에 새로운 연구가 필요하다고 느낀다. 즉 사사 시대에서 왕조시

대로의 변화 과정들을 통한 사회학적 연구들을 필요로 하게 되는 것이다. 다음에

서는 이러한 사회학적 변화들을 중심으로 왕조형성의 원인들과 그대로 이스라엘에

게 남아 있을 수 밖에 없었던 요인들을 살펴보기로 한다.

II. 본론

2. 전통적 입장에 대한 비평과 사회사적 접근과 보충

@ 사사시대 사회 질서와 왕조 시대 사회 질서의 비교

- 태동 원인의 연구

a. 군사적 체계의 변화

먼저 사사시대에는 군사적 체계가 불확실했던 것으로 보인다. 유목민의 경우에

는 군대와 백성이 서로 구별되지 않았다. 약탈자들과 싸울 때에는 싸울 힘이 있

는 자마다 모두 전투에 가담해야 되었고, 자기 종족의 재산이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하여서는 추장이나 용맹스러운 영도자의 지휘를 따라 항상 대적과 싸울 각오가

되어 있어야 했다. 그들은 어떠한 사건을 계기로 인해 모집되는 인원으로 군사를

대신한다. 즉 다시 말해 이들은 자기의 생업을 하다가 전쟁이 일어나면 전쟁터로

나가야 했다. 그들은 결국 다른 나라들처럼 제대로 된 군사훈련을 받지 못한 체

전장에 나가야 하는 어려움을 겪어야만 했다. 이런 이스라엘과는 달리 블레셋은

상비군제도로 이미 정예부대가 존재하였다. 이런 군대를 맞아 싸워야 했던 이스

라엘은 매번 전투에서 질 수밖에 없었다. 이들은 결국 왕조 체제를 원하게 되었

고 결국은 왕조의 형성과 이들에게도 상비군 제도가 도입되어 사울은 용병을 모집

하기에 이른다. 이들 용병 중에는 외국인까지 존재하고 있었던 것 또한 알 수 있

다(삼상 21, 8; 22, 18). 우리는 여기서 이스라엘 사사시대와 왕조시대의 군대나

무기의 실태 등을 살펴보고자 한다. 어느 민족의 군사 체제는 여타의 사회체제들

보다 더 빨리 변화한다. 그것은 정부의 형태와 정치적인 필요성과 적진의 상태와

무기의 발전 여하에 따라서 신속하게 변하기 마련이다. 우리는 이스라엘의 군사

조직도 역사적으로 발전해 가는 과정에 따라서 관찰해야 옳을 것이다. 이와 동시

에 우리는 성서의 일반적인 성격도 고려해야 한다.

이스라엘이 반(반)유목민적인 생활을 할 때에 그와 똑같은 처지에 있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출애굽기와 민수기가 보고하는 자료 속에 숨겨진 실제 상황은 거의 알

아 볼 수가 없다. 이집트에서 탈출하는 이스라엘 백성이 무장을 하였다는 기록(출

12, 37; 13, 18; 14, 19f. )과 광야에서 군대식으로 조직하고 행군하거나 진지를 구

축하였다는 기사(민1, 3,20,22; 2,1-31; 10, 11-28)는 후기 이스라엘 백성이 민족 통

일을 완수하고 국가적인 위기에 처하여 모든 장정을 징집하던 시대의 이상화된 과

거 묘사다

{{ R. 드보 저 , 이양구 역, 구약시대의 사회 풍속 , 1992 서울 }}

. 이스라엘의 군대의 종류는 먼저 국민 개병(국민 개병), 그리고 직업

군인들로만 구성된 군대에는 용병대와 전자 부대가 있다. 마지막으로 징병 부대

(징병 부대)가 있다. 사울은 암몬 족속과 싸울 때(삼상 11, 1-11), 그리고 아말렉

족속과 대결 할 때에도 온 이스라엘을 집합시켰다(삼상 17, 2, 11). 온 백성을 전

쟁에 불러모으기 위해서는 영도자나 사사나 왕이 나팔을 불어 알리게 하거나, 각

지파로 전령들을 보내어 알리었다. 이 때에 전령이 전달한 사신은 자주 상징적인

행동을 동반하였다. 사울은 한 겨리의 황소를 조각조각 잘라서 이스라엘 온 지역

으로 나누어 보내며 이렇게 위협하였다. : 누구든지 사울을 따라 출전하지 않는 사

람은 이 황소의 신세가 되고 말 것이다(삼상 11, 7). 용병들은 사울에 의해서 선

발되었으며, 지파와 국적에 관계없이 힘세고 용감한 사람이라면 모두 다 끌어들였

다. 그래서 유다 지파의 다윗도 기용되었고 에돔 사람 도엑과 같은 외국인도 기

용되었다. 다윗은 이스라엘과 유대의 통일 왕국을 이룩한 다음에도 여전히 자기

의 용병 부대를 거느렸으며, 그들의 숫자도 더 많아졌다. 다윗은 이제 사방으로

외적들을 쳐서 굴복시켰기 때문에 더 넓은 지역에서 용병을 규합할 수 있었고, 자

기의 사병 부대를 유지할 경제력도 강화되었다. 그리고 전차부대는 주전 1500년

경부터 근동 전쟁의 본질적인 요소였다. 군마를 키우는 지식과 두 바퀴 전차를

만드는 기술은 북쪽에서 인도-유럽 사람들을 통하여 근동으로 도입되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경제적인 어려움 때문에 상당히 늦게 서야 그러한 전투 방법을 개발

보유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전차부대는 다윗의 때에 만들어 진 듯하나 다윗의

출전한 이야기 중에 전차부대에 관한 언급은 하나도 없다. 이후 유대왕 웃시야

때에는 용병 부대와 전차 부대로 인한 경제적 부담을 줄이고자 징병 부대를 모집

하는 것을 볼 수가 있다. 즉 국민병의 징집연령은 20세부터 해당되었으며, 대하

25:5 ; 민1:3에서는 20세 이상에서도 '싸움에 나갈 만한 모든 자'라는 세부 규정을

두고 있다. 군대의 편성은 족속단위로 구성하였고, 각 지역 별 군대 편성이 되었

다.

b. 행정체계의 변화

사사시대와 왕조 시대의 질서들 행정 경제 등 사회 전반에 걸친 변화들을 살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것은 지파동맹체제에서 왕정시대로의 전환점에서 나타

난 변화들을 알 수 있으며, 또한 당시의 왕조형성에 대한 중요한 사회학적 근거를

제시해 줄 수 있을 것이다.

왕정시대에는 사사시대와는 달리 새로운 행정체계가 형성되었다. 특히 다윗의

내각 관료들에 관한 두 가지 명단(삼하 8, 15-18; 20, 23-26)외에는 우리는 다윗의

행정 기구에 관해 거의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명단에는 재상의 직책이 없는 것으

로 보아 우리는 다윗의 수반으로서 자신의 정부를 적극적으로 이끌어갔을 것이라

고 추측하지 않을 수 없다. 명단에 의한 관료들은 각지파에서 소집한 지휘관과

외인 용병부대(그렛인들과 블레셋인들)의 지휘관, 왕실 홍보관, 왕실 비서실장 또

는 국무장관. 두 명의 대제사장 등이며, 한가지 주목할 것은 약간의 후대의 것인

두번째 명단에서는 '강제노역'(corvee)을 감독하는 관료를 추가하고 있다. 반면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들은 연합체제를 형성하고 있다. 그와 같이 연합체제를 체

결하는 종족들은 세력이 미약한 작은 집단들에 불과할 수 있다. 학자들 중에는

이스라엘 열두지파의 체제를 고대 헬라인들의 종족동맹들과 비교한 사람이 있다.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들은 어느 일정한 조직에 의하여 지휘된 것이 아니며, 이스

라엘의 체제는 헬라의 것과 똑같이 정치적인 영향력을 지닌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

다.

그들의 12종족의 체제는 다른 곳에서도 유사하게 많이 나타난다. 그것은 바로

동일한 사회 발전의 과정을 통과하였던 근친종족에게서 나타난다. 이스라엘의 열

두 종족들은 세겜에서 한 가지 협정을 체결하였다. 이것은 그들의 종교적인 통일

성을 확인하고 그들 차제를 이미 일정한 민족적인 단일체로 연합시켜 주었다. 폰

라트는 이러한 종족들의 연합 조직을 고대 헬라의 "부족 동맹"과 비교하였다. 그

들은 야훼의 축제들을 법궤가 있는 성소에서 거행하고, 법궤는 그들의 한 가운데

에 임제한 야훼의 현존을 상징하였다. 그들은 공동의 율례와 법도를 지니고 있으

며, 이러한 관습법이나 기록된 법률의 위반사항을 판결하기 위하여 다같이 집합하

였다. 지파 체제가 아무리 온전한 단일체라 할 지라도 역시 혈연관계에 근거를

둔 내부적인 서열이 있다. 가정을 의미하는 표현은 "베트 아브"이며, 이것은 아버

지와, 아버지의 아내와 아내들과, 미혼 자녀들만을 포괄하는 것이 아니라, 결혼한

아들들과, 그들의 아내들과 자녀들도 포함하는 개념이다. 종들도 가족에 포함된

다. 여러 가족들이 모여서 형성하는 것은 씨족인 것이다. 씨족의 구성원들은 보통

동일한 장소에 살며, 어떤 경우에서든지 이들은 공동의 종교적인 축제 때와, 희생

제물로써 식사를 할 때에 함께 모여서 만난다(삼상 20, 6, 29).

c. 가족과 씨족

가족은 혈연 공동체와 동시에 거주(주택공용)공동체를 통하여 결속된 모든 자들

로 구성된다. 가정이란 한 집을 가리키며, 한 가정을 건설한다는 것은 한집을 새운

다는 표현을 통하여 표시된다. "집"이라는 개념도 매우 확대성을 지닌 것이어서,

이것은 민족 전체를 표시할 수도 있다. 이와 같이 넓은 의미에서는 가족이라는

개념이 씨족(미쉬파하)개념으로 넘어가 있다. 씨족은 공동의 동일한 거처를 지니

며, 각각 그 씨족의 세력 여하에 따라서 한 마을이나 여러 마을들을 지니고 있다.

예를 들면, 단 지파의 씨족은 소라와 에스다올에 살고 있다. 또는 유다 지파의 베

냐민 지파의 집단들이 예루살렘에 살고 있는 바와 같이한 도성에 여러 씨족(미쉬

파호트)이 거주하기도 한다. 씨족은 공동의 관심사들과 의무들을 지니고 있으며,

씨족의 구성원들은 자기들을 서로 결속시키는 혈연관계를 잘 이해하고 있다. 그

들은 서로 "형제"하고 부른다(삼상 20, 29). 결국 사사 시대에서 왕조시대로의 변

화가 가져온 큰 변화는 무엇보다 가장의 권한 축소이다. 여기서 가장이 해야 할

일들을 다 왕권이 대행하게 된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씨족 사회

에서의 권위적 인물이었던 가장은 그 권한이 거의 없어지고 결국 소규모화된 가정

의 경제적 책임자 외의 어떤 기능도 주어지지 않는 것 같다.

d. 종교적인 영역속에서의 가족-사회, 경제적 변화를 중심으로

당시에 가족이 형성하는 사회적 단위는 종교적인 영역에서도 표현된다. 그 예는

유월절 축제는 각 가정에서 거행되는 가정 축제이며, 사무엘의 아버지는 매년 자

기의 가족 전체를 데리고 실로로 순례하였다(삼상1, 3). 이들 가족들은 서로 보호

하며, 심지어 부채까지도 대신 갚아 주었다. 즉 그들은 상호 보호할 책임이 있었

다. 가족, 씨족 단위의 지파 동맹에서 그들은 상호 보호할 책임은 그들의 외부로부

터 오는 침입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며, 이러한 모습들은 확고한 가족제도

의 종족 조직의 유산이었다. 하지만 이 조직적 유산도 농경지의 정착생활로 넘어

간 과정과 왕정 도래와 도시 생활의 개발은 온갖 사회 변혁을 초래하였고, 그 결

과는 가정 생활의 관습들에게도 영향을 끼치었다. 가정은 이제 더이상 자급자족

할 수가 없다 이제 물질적인 요구들이 더 확대되었고, 사업의 발전은 노동력의 전

문화를 초래하였다. 그런데도 혈연관계는 여전히 권리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직

업적인 면에서는 예외를 가져 왔는데, 기타의 마을들은 언제나 목공인들의 마을이

나 철공인들의 마을로 특수화되어 있었다. 이제 어느 조상 밑에 여러 세대들이

단합하여 살던 족장시대의 대가족 제도들은 이제 정착민의 도시생활에서 더 이상

지속되지 않거나, 희귀한 경우에만 찾아 볼 수 있다. 이는 고고학적 발굴작업들을

통하여 출토되는 가옥들은 소형주택의 흔적들임을 통해 엿볼 수 있다. 노예들은

여전히 가족에 속한다고는 하여도, 그들의 숫자가 줄어들었으며, 과거 반유목시대

의 노예들은 이제 농경사회에서 새로운 사회계층을 형성하고 있다. 이제 하인과

주인이 함께 살던 가족의 사회적 집단들이 사라진 것만이 아니라, 국가와 도시의

새로운 체제가 형성되어, 왕과 신하들, 고용주들과 노동자들, 부자와 빈민들이 나

타난다. 이렇게 시작된 사회변혁은 주전 8세기 동안에 이스라엘과 유다에서 완결

된다. 씨족 사회를 바탕으로 형성된 사회 질서는 어느 정도까지는 왕조시대 하에

서도 존속되었고, 포로생활에서 귀환한 후에도 여전히 남아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느 4, 7; 슥 12, 12 이하). 그런데도 왕조시대에 들어와서는 중앙집권화의 새로운

체제와 함께 여러가지의 중요한 변화들이 나타났다. 군부의 장교들과, 군인이나

민간인으로 동시에 구성된 왕의 관리들은 남부 왕조의 두 수도에 거주하거나 지방

에서 왕의 권위를 대리하며 살았는데, 이들은 일종의 특수층을 형성하면서, 지역의

이익은 마음에 두지 않고 자기들의 치부와 안락에만 대부분 마음을 쏟다가, 이로

써 때때로 민심과 충돌을 하였다. 여기서도 특별히 경제생활의 불안한 변화들과,

상업과 토지의 투기업들 때문에 가정들의 평등한 위치는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한 쪽에서는 별안간에 새로운 부자들이 속출하는 반면에, 다른 한 쪽에서는 무수

한 빈민들이 발생하였다. 그런데도 다른 사회질서들에게 알려져 있었거나 알려져

있는 "자본주의자들"과 "무산계급들"의 차이나, "귀족"과 "평민" 사이의 구별과

같은 것을 고대 이스라엘의 사회 속에서 재발견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이미 빗나

간 길로 들어서는 행위가 될 것이다. 현대적인 의미의 순수한 사회계급들은 고대

이스라엘에서 나타난 적이 없었다. 곧 자기 계급의 특수한 관심들을 의식하고, 상

하의 계층들이 서로 계급투쟁을 하는 집단들은 이스라엘에 전혀 없었다. 이것을

혼동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는 여기서 차라리 "주민들의 요소들" 사이에서

순전히 권력과 경제를 바탕으로 형성된 부자들과 그 반대의 집단들이 있었다고 말

할 수 있다. 그러한 "주민의 요소들"을 정확하게 규정하고, 서로의 경계선을 명백

하게 긋는다는 것은 물론 언어 사용의 이질성과 모호성 때문에도 더욱 어렵게 된

다

{{ R. 드보 저, 이양구 역, 구약시대의 생활풍속, 1988 서울 }}

. 하지만 여기서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계급에 대한 자각 부족과 현실을 직

시하지 못하게 한 여러가지 이유들, 또는 그러한 계급적 상황을 인식하면서도 그

에 대항할 수 없었던 심리적, 주변적 요인이 반드시 있었던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에 있었던 민심과의 충돌 또한 이러한 부분의 표출 일 것이다. 즉 옛질서 속에서

의 평등함에서, 씨족공동체에서 벗어난 그들은 돌이킬 수 없는 옛질서를 그리워했

을 것

{{ R. 도보 저, 이 양구 역 , 구약시대의 생활 풍속 , 1988, 서울 p.40

구약성서의 "유목민적 이상"이라고 칭하는 관점이 있다. 예언자들은 과거를 되돌아보

며, 이스라엘의 광야에서 야훼와 사랑의 계약을 맺던 그 청춘시대를 회상하고 있다.

광야 시절은 그들에게 황금시대에해당되었다(호 2, 16f; 12, 10). 예언자들의 이러한

태도에서는 가나안 원주민의 정착문화에 대한 거부가

반영되어 있다. 가나안에 이주한 이스라엘 백성들과 이제는 자기들의 고유한 예절과 종

교 행위를 버리고, 정착민의 풍속에 빠져들 위험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의 이상은 유목생활자체가 아니라,

종교생활의 순순한 실현과 계약에 대한 성실성이다. 또한 레갑족속들은 도시의 문명과

거리를 두고 있었으며, 이는 오직 사치와 타락의 도시 생활에 대한 반발 현상이다. }}

이나, 그들은 주변 국가적 상황과 이스라엘의 처한 위기 또한 무시할 수 없

는 요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다윗의 중앙집권적인 정책도 큰 영향을 주었을 것

으로 본다.

e. 영토적인 변화

여기서 영토적인 문제를 잠시 거론한다면, 사사시대에는 모든 지파는 주어진 영

토를 소유하고 있었다. 어느 지파의 영토 안에서 경작된 토지는 일반적으로 개인

의 사유지이고, 가축을 기르는 초원은 공동의 소유지이다. 그러나 지파들의 경계

선을 대부분 선명한 것이 아니었으며, 서로 좋은 관계를 맺고 있을 경우에는 종족

이 다른 집단들이 그 비옥한 목초지나 농경지를 적절하게 나누어 사용하였다. 물

론 그런 지역을 차지하고 있는 지파가 여러가지의 조건들을 내세울 수가 있고, 그

런 목초지에 대한 자기의 권리를 행사할 수 있다

{{ 사울은 자신이 만든 상비군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서 많은 재정적 부담을 가져야 했을

것이다. 그는용감하고 힘센 사람이면 다 자기의 용병으로 끌어 드렸다(삼상14, 52).

그는 베냐민 출신의 사람은 물론 이스라엘의 다른 지파 사람들도 기용하였다.

그래서 다윗도 기용되었다. 하지만 그는 한번도 충분한 용벙을 거느리지 못하였다.

아무튼 그는 용병의 품삯에 관한 문제를 잘 해결해 나간것 같다. 여기

서 사울은 그가 가진 땅에 대한 권리를 이용함으로 그 경제적인 부담을 해결할 수 있었

다는 추측도 가능한 것으로 본다. 이는 용병들을 지휘하는 장교단들에게 토지를 녹봉으로

부여해 준 경우를 통해 사울의 토지 이용은 더욱 확실시되는 것 같다. (삼상 22, 7) }}

. 이러한 자유를 바탕으로 해서

온갖 분쟁이 쉽게 일어날 수 있는데, 그것은 특별히 샘물이나 연못의 이용을 둘러

싸고 일어난다. 창13, 7; 창 21, 25; 창 26, 19-22 등은 우물이나, 목초지대나 유랑

의 도로들에 대한 충돌들이 선의적으로 해결되지 않을 때에는, 그것이 결국 전쟁

의 원인이 된다. 종족들의 이러한 영토적인 윤곽은 왕국시대의 행정 조직을 통

하여 변화된다. 어느 특정한 종족에 소속되었다는 회상은 아직도 확실히 생생하

게 남아 있지만, 여전히 자체를 존속시키고, 또 고대의 풍속과 관습들을 어느 정도

보존시킨 단위로서는 종족이 아니라 씨족이다. 정착생활의 범위 안에서는 마을이

씨족의 위치를 대리한다. 역대기의 아주 많은 족보들 중에서는 지명들이 조상의

이름들을 대신하여 등장한다.

<참고 도표> 이스라엘의 사사시대에서 왕조시대로 변화에 따른 사회학적인변화들.

{{ 사 사 시 대 }}

{{ 왕 조 시 대 }}

{{ 가 족 씨 족 }}

{{ 가장의 권한이 강함 }}

{{ 가장의 기능 위축 (왕이 이를 대신함) }}

{{ 지 파 }}

{{ 성 밖에서의 생활을 하였음 }}

{{ 성안에서의 생활 즉 도시 중심의 생활(시장이 형성되었고 이는 잉여농산물이 있

었음을 나타 낸다. 그리고 노예의 출현 등의 변화 등) }}

{{ 민 족 체 제 }}

{{ 큰 변화는 없었으나 다 민족 체제로 변화 하게 됨 }}


이상에서 우리는 여러 가지 사회적 변화들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이러한 변화들

은 빈자를 속출하게 했고(삼상 1, 2장 22, 계약법전 등), 즉 부의 불균형을 만들어

갔다. 이러한 모순된 모습 속에서 이스라엘 민족들은 이에 대항할 수 없었던 주

변 국가의 통치 형태와 또한 그로 인한 그들의 심리적 요인들까지도 우리는 추론

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주변국가들 즉 고대 근동의 국가 개념과 통치 방식들

을 살펴보자.

f. 고대근동의 국가 개념

팔레스틴의 여러 나라들이 그와 같은 정치 형태를 취한 것은 힉소스 족속의 통치

시대에 시작된 일이다. 그러나 이러한 정치 형태 자체의 출현은 훨씬 더 고대로

소급된다. 주전 2000년대의 초엽에서 그러한 정치 형태를 증언하고 있다. 이와

같이 작은 국가들은 단지 요새 화된 도성 하나와 그 사면의 좁은 영토로써 구성되

어 있었다. 그 도시국가들은 한 사람의 왕에 의하여 통치되었는데, 그 왕이 힉소

스 시대와 아마르나 시대에는 자주 외국 출신의 인물들이었다. 왕은 자기 세력의

뒷받침으로써 군대를 거느리고 있었으며, 그 군대는 자기의 백성들로써 조직되고,

용병들을 통하여 보강되었다. 왕위 계승은 대체로 왕조의 세습제였다. 이와 똑 같

은 국가 조직이 해변에 있는 블레셋 족속의 제후 국가들에서 다시 나타난다. 이

들은 물론 연방제를 이루고 있었으나(수 13, 3; 삿 3, 3; 삼상 5, 8). 기브온 족속

의 네 도성들이 연합국가를 형성하였다는 데에서도 그와 똑 같은 경향이 나타난

다. 그러나 후자는 아마 가나안 원주민의 왕들 사이에서 전시에 잠정적으로 체결

된 계약이었던 것 같다(수 10, 3; 11 장 이하).

성서 전승에 의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왕을 요구할 때, "다른 민족들과 같이"

되기 위해서라고 설명하였다(삼상 8, 5). 다시 말해서 그들은 가나안 땅을 정복할

때, 제거하였던 가나안 원주민들의 제후적인 통치구조를 모방하지 않았다. 그러한

국가 형태는 이스라엘에서 어느 시대에도 통용되지 않았다. 비록 그와 비슷한 시

도들이 여러번 추진되었으나, 그것들은 언제나 다시 좌절되었다. 이스라엘 사람들

은 자기들의 국가 이해를 최소한 본래에는 강대국들의 형태를 따라서 결정하지 않

았다. 그러한 방향으로 특별히 가깝게 간 일이 있다고 한다면, 여러가지로 많은

접촉을 하게 되었던 이집트의 형태를 따라서 국가 이해를 결정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다윗 통치 시대의 말기와 솔로몬의 통치시대에 들어와서야 비로소 이스라

엘에서도 강대국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시도하였다. 그것은 짧은 기간 동안에만

성공한 것이었다. 거기서 남은 것이라고는 이집트의 행정 조직에서 몇 가지를 모

방한 것들에 불과하다. 이스라엘에게서 결국 왕조의 발전은 외부로 부터 오는 전

쟁의 위협을 통해 가속화되었지만, 왕조의 건립은 종족 동맹의 결말이었다. 이러

한 왕조의 제도가 사울에게서 시작되었으나, 그것은 그 첫 출발에 불과하였다. 사

울의 권위는 군사적인 명령의 폭력 이외에 별로 다른 것이 아니었다. 사울에게서

는 군대의 통수권자인 아브넬 이외에 다른 장관들은 한 사람도 찾아 볼 수가 없

다. 그 당시에는 전혀 중앙정부가 없었다. 종족들이나 그보다는 더욱 더 씨족들

이 독립적으로 여전히 자치적인 운영을 하였다. 다윗의 통치를 통하여 비로소 결

정적인 새로운 전환기가 시작된다. 이렇게 변화되어져간 사사시대에서 이스라엘

왕조로의 행로, 과연 이 역사적 진행은 그들에게 어떤 의미를 주며, 또한 그들의

사상에 어떤 변화를 가져 왔는지 알아보자. 결론 부분에서는 왕조 형성으로 인한

경제적 변화에 따른 빈자 속출과 그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그들의

정신적 구조의 변화를 중심으로 살펴보며 이를 토대로 그들에게 왕조라고 하는 것

이 과연 어떤 의미로 그들에게 존재하는지 살펴보도록 하자.

III. 결론

3. 정신사적 신학적 변화로써의 결론 도출

이스라엘은 왕조의 형성으로 인해 여러가지 많은 변화를 겪게 됨을 본론의 내용

을 토대로 알 수 있을 것이다. 그 중에서 그들에게 극심한 변화를 가져 온 것 중

의 하나는 씨족 공동체에서 도시 생활로의 변화에서 나타난 소가족의 형성과 그에

따른 씨족 공동체의 흐트러짐일 것이다. 그들은 도시 생활과 잣은 전쟁으로 인해

고통은 날로 더해 갔으며, 대부분의 남자들은 전쟁에 나가야만 했다. 그들 중에

대부분은 다시 돌아올 수 없었을 것이며, 여자와 아이들만 남은 집에서는 지극히

어려운 환경에 놓이게 될 것이란 건 자명한 사실이다. 과연 이들은 그들에게 닥

친 어려움과 고통을 어떻게 이해했을까? 반면 부자도 등장하게 된다. 앞서 언급

한 바와 같이 군부의 장교들과, 군인이나 민간인으로 동시에 구성된 왕의 관리들

은 남부 왕조의 두 수도에 거주하거나 지방에서 왕의 권위를 대리하며 살았는데,

이들은 일종의 특수층을 형성하면서, 지역의 이익은 마음에 두지 않고 자기들의

치부와 안락에만 대부분 마음을 쏟다가, 이로써 때때로 민심과 충돌을 하였다. 여

기서도 특별히 경제생활의 불안한 변화들과, 상업과 토지의 투기업들 때문에 가정

들의 평등한 위치는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한 쪽에서는 별안간에 새로운 부자

들이 속출하는 반면에, 다른 한 쪽에서는 무수한 빈민들이 발생하였다. 그런데도

다른 사회질서들에게 알려져 있었거나 알려져 있는 "자본주의자들"과 "무산계급

들"의 차이나, "귀족"과 "평민" 사이의 구별과 같은 것을 고대 이스라엘의 사회

속에서 재발견보다 주변 국가들의 형태가 이들에게 그다지 큰 자극을 받는데 영향

을 주지 못했을 것이다. 타 지역에서 또한 계급 사회가 이루어져 있었고, 귀족 정

치 사회가 이미 존재해 왔었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자신들의 그러한 삶이 당연시되

었을 수도 있다. 여기서 이에 대해 좀 더 보충하자면 이스라엘민족들의 국가 개

념이나 국가 이념으로 보충한다면 좋을 것 같다. 한가지는 좋든 나쁘든 이스라엘

은 왕정에 내맡겨져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옛 체제를 이상으로 생각하면서 새로

운 체제를 하나님에 대한 반역으로 배격하기도 했지만(삼상 8, ; 12) 현실적으로

왕정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은 있을 수 없었고 또 이스라엘 안에서 이러한 일

을 진지하게 숙고한 사람은 아마 거의 없었을 것이다. 왕정은 이스라엘이 서로

엇갈린 평결을 내렸던 문제 많은 제도로 남아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아무런 의

심없이 다윗의 나라를 신이 정한 제도로 받아들였고 왕권을 진적으로 이교적인 관

점에서 볼 준비까지 되어 있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다윗 가문에 대해서 충성스

러웠지만 그 가문이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은 하나님의 용인을 통해 통치하는 것이

며 따라서 엣 전통에 입각한 비판에 복종해야 한다는 것을 결코 잊지 않았다. 또

어떤 사람들, 특히 북부에 있는 사람들은 옛 체제로 돌아가야 한다는 일관된 생각

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왕위 세습의 원칙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였고 또

다윗 가문이 영속적으로 통치해야 한다는 주장을 배격하였다. 그들 가우넨 많은

사람들은 솔로몬의 전제 정치에 격노했고, 솔로몬을 왕으로서 해서는 안되는 모든

것의 화신으로 보았으며(신 17, 14-20),

{{ 이 구절은 솔로몬의 대한 반감을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 cf. G. E. Wright,

IB, II(1953), p.441. }}

국가를 신적 제도로 보기는커녕 도저히

참을 수 없는 것으로 여겼다. 그러므로 왕정은 결코 긴장을 피 할 수 없었으며,

왕정의 근본적인 문제인 지파들의 독립성과 중앙정부의 요구와의 간격, 옛 전통과

새로운 체제의 요구 사이의 간격을 메우는 문제 등을 메우는데 성공하지 못했고,

솔로몬시대에는 치유할 수 없을 정도로 넓혀 놓았다. 이러한 왕조와의 긴장 문제

는 이스라엘의 왕조에 대한 개념들의 하나이며, 과히 좋지 못한 방향으로 흘러 갈

것이 분명하였다. 여기서 다른 하나의 이스라엘 국가 이념을 보면

이는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통일된 국가 이념이나 개념이 있었다고 할 수 없다고

본다. 종족동맹이나 포로후기의 공동체는 실제적인 국가 체제를 형성하지 않았다.

최초의 종족 동맹에서 최후의 민족 공동체에 이르는 이 양극의 중간에서 나타났던

이스라엘의 왕조는 계속 다양한 형태로 존속하였다. 그 왕조의 제도가 어느 정도

나 그 백성의 사상 체계에 영향을 주고 변화를 끼쳐주었는지는 말하기 힘들다. 오

히려 주목할 만한 사실은 포로 후기의 공동체가 얼마나 힘들이지 않고서도 왕조

이전의 생활 형태로 되돌아 갈 수 있었는가이다. 이 때에 나타난 공동체는 씨족

사회의 차원과 시골과 도시 공동체의 수준에서 고대의 제도들을 그대로 계승한다

는 추측을 허락하고 있다. 이러한 공동체의 생활은 율법의 본문들이 고려에 넣고

있는 공적인 생활의 유일한 면이기도 하다. 성서에는 왕조에 대한 부정적인면들

즉 왕을 세우면 그로 말미암아 파생될 수 있는 온갖 악행들을 미리 경고하고 있다

(삼상 8:11-18 ; 신 17:16 이하). 이와는 대조적으로 왕조에 대하여 호의적인 부분

은 왕국의 설립에 대하여 다르게 보고하는 전승에서 나타난다(삼상 9, 1-10, 16;

11, 1-15). 그리고 사무엘하에서 시편 등에서 왕에 대한 시들에서 미래의 구속자

를 다윗의 후손이라고 선포하며, 그를 이스라엘의 위대한 왕이라는 이상화된 모습

에 따라서 나타나는 왕으로 선포하는 곳들, 곧 왕의 사고에 의하여 형성된 모든

메시야적 본문들에서 왕에 대한 호의적인 이해가 나타난다. 이러한 두가지는 동

일한 권세개념, 제정일치의 동일한 사고에 의하여 형성되었다. 이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종교적인 공동체로 존속한다. 가나안 땅에 정착한 지파들을 한 공동체로

결합시킨 것도 종교요, 맨 나중에 이르러 유랑지로부터 고향에 돌아온 자들을 하

나로 결합시킨 것도 종교다. 왕 또한 하나님께서 선택하며, 왕은 하나님과의 변함

없는 계약을 얼마나 성실하게 준수하며 통치하는가의 척도에 의해 평가된다. 결

국 그들에게 있어서 왕조는 부수적인 것이며, 그들은 곧 실제적으로 종교 그 자체

에 의해 왕조를 평가하고 있다. 이러한 이스라엘 민족에게 다윗은 자신의 대에서

구속자가 나옴을 천명하게 할 수밖에 없었단 결론을 도출할 수도 있으며, 이는 메

시야 사상으로 이어졌을 수 있다. 이스라엘 민족들은 자신들의 야훼와의 계약 속

에서 왕조를 살아갔으며, 그들은 포로기 이후에도 자연스럽게 이에 순응하며 살아

갔다. 과연 이들의 야훼와의 계약을 올바로 잊지 않고 살아갔다면 그들은 자신들

의 권리와 평등 공동체를 지켜나갈수 있었을런지도 모른다. 왕조가 아닌 다른 체

제를 만들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들은 타민족을 모방하지 않으려 노력

했지만 그들은 결국 그들과 다를 바 없는 지배 체제 속에 머물게 되었고, 계급 사

회의 일원으로 소속되어져갔다. 이들은 이러한 과정 속에서도 자신들의 민족성을

잃지 않았을 것이나 일부에서는 눈에 보이는 안위와 쾌락 속에서 자신들의 민족

정신과 얼을 깡그리 상실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들에게 다가온 경제적 불균형과

계급사회의 모순은 자연스럽게 이루어졌을 것이며, 그들 또한 자연스럽게 받아들

였을 것으로 본다. 하지만 그렇게 않은 사람들이 더 많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

의 이야기는 성경속에서 드물게 존재하고 있으며, 빈자들의 울부짖음 또한 그렇게

많지 않은 듯하다. 하지만 다윗을 노래하고 왕조를 칭송하는 노래들은 그들의 계

약 공동체를 무색하게 할 정도로 성경을 구석구석에서 울려 나고 있다.

| | | | 참고 도서 | | | | |

존 브라이트, 이스라엘 역사, 크리스챤 다이제스트, 1994 서울

R. 도보 저, 이 양구 역 , 구약시대의 생활 풍속 , 대한 기독교 출판사 1988 서울

R. 드보 저, 이양구 역, 구약시대의 생활풍속, 1988 서울

J. 알베르토 소긴 저, 한국신학연구소 학술부 역, 국제성서주석(판관기), 한국신학

연구회 1992 서울

프리쯔 스톨쯔 저, 박영옥 옮김, 국제성서주석(사무엘상하), 한국신학연구회 1991

서울

A. Alt, "The Formation of the Israelite State in Palestine" (1930; Essays on

Old Testament History and Religon [Eng. tr., Oxford: Blackwell, 1966],

pp.171-237)